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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희년(2)

The Jubilee(2)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에게
시력의 회복을 선포하고,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희년의
자유와 축복이다
— 눅 4:18-19.

레위기 25장 10절에 나오는
‘희년’이라는 말은
‘외치는 때’
혹은 ‘숫양 뿔 나팔을 부는 때’를
뜻한다.
숫양 뿔 나팔을 부는 것은
죄 아래 팔린
모든 죄인에게
신약의 희년 안에서
자유를 선포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복음 전파를 통해
죄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가족에게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신약의 누림으로 인하여
외치고
기뻐하게 된다
— 눅 4:16-22, 행 26:16-19.

우리의 복음 전파는
우리가
구속의 나팔을 불어,
세상 사람들에게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기쁘게 받아들이시기에
좋은 때이며,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라고 말하며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다
— 고후 6:2, 사 61:1-3.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분의 의도는
사람에게
그분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의 소유, 사람의 유업으로
주시는 것이었다
(창 2:9, 13:12-15, 시 16:5, 90:1).
그러나 사람은
타락하였으며,
그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소유인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창 3:24, 4:16, 엡 2:12)
자신을
죄와 사탄과 세상에게
노예로 팔았다
(요 8:34, 롬 7:14하, 갈 4:8,
딛 3:3, 요일 5:19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된
하나님의 신약의
구원(롬 3:24, 5:1-2, 엡 2:8)은
타락한 사람을
자신의 신성한 소유인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고
(행 26:18, 갈 3:14, 엡 1:14,
골 1:12, 눅 15:12-24),
죄와 사탄과 세상에게
노예 노릇을 하는 데서
해방되게 하여
(요 8:32, 롬 6:6, 14, 8:2,
히 2:14-15, 요 12:31),
자신의 신성한 가족인
하나님의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갈 6:10, 엡 2:19)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교통을 누리게 한다
(고후 13:14).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준다.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고,
하나님을 누리는 데서
자유를 얻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누리지 않으면
참된 자유를
가질 수 없다.
자유는
모든 속박과
모든 무거운 짐,
모든 압박,
우리를 노예로 삼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 요 8:32, 36, 갈 5:1, 고후 3:17.

우리의 생활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될 수 있고,
우리는
어떤 것에도
노예가 될 수 있다
— 요 8:34, 고전 6:12.

먼저 사탄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그러고 나서 사탄은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면서
우리가 죄를 짓도록
부추기고 선동하는 자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사탄은
우리의 불법적인 주인이
되었고,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오직 죄만 지을 수 있는 정도로
사탄의 포로가 되었다
— 롬 7:14, 요일 5:19.

사람에게
하나님이 없으면,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누리려고 하는 모든 것은
개의 먹이와 쓰레기와 배설물이다
— 빌 3:7-9, 비교 벧후 2:22.

사탄은
‘똥 더미의 주’를 의미하는
바알세불이라 불리었고,
바알세불은
‘파리들의 왕’을 의미하는
‘바알세붑’에서 온 단어이다.
사탄이
전문적으로 하는 일은
파리와 같은 죄인들을 이끌어서
똥을 먹고 살게 하는 것이다
— 마 10:25, 12:24, 27, 왕하 1:2.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무도
죄를 짓기를
원하지 않지만,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다.
그 누구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었다
— 롬 7:18-23, 요 8:34.

로마서 7장 24절에 나오는
바울의 필사적인 절규는
생명의 영의 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였다고 말하는
로마서 8장 2절에서
응답된다.
이것이
희년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해방이다.

우리는 오직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때에만
해방될 수 있고
참자유를 가질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을 누리는 이들만이
죄를 짓지 않고
참으로 자유로워져서,
자유롭고
해방되며
속박에서 벗어난
생활을 할 수 있다
— 요 8:36.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한다.
이 법은
죽음과 부활을 거쳐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신
주님 자신이다
— 롬 8:2.

우리가
주님을
충분히 누리지 않는다면
여전히
많은 것에
얽매일 것이다.
결심하는 것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계속적으로
주님께 와서
그분을
먹고 누려야 한다
— 고전 1:9, 계 2:7, 사 55:1-2.

오직 하나님을 누리는 이들만이
죄를 습관적으로 짓지 않고
참으로 자유롭다
— 요 8:11-12, 24, 28, 31-36.

희년이신 그리스도는
빈곤, 포로 됨, 눈멂, 압제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
— 전 1:2, 14, 3:11, 빌 3:8,
벧후 2:22, 눅 12:21, 계 3:17.

바울은
삼일 하나님께서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거치셔서
우리의 영 안에 설치된
생명의 영의 법이
되셨다는
계시를 받음으로써
위대한 발견을 했다
— 롬 8:3, 11, 34, 16.

생명의 영의 법은
신성한 생명의
자동적인 원리이자
자연스러운 능력이다.
이것은
신성한 생명의
자연스러운 특징과
고유의 자동적인 기능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지의 능력에 의해
살아서는 안 되며,
그의 영 안에 있는
부활 생명의 영의
내적인 법의 능력에 의해
살아야 한다.
이 법은
가장 큰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죽음을 이기고
죽음을 초월하며
죽음에 묶이지 않는다
— 롬 7:19, 마 26:41, 엡 1:19-23,
골 1:28-29, 고후 1:8-9, 요11:25,
히 7:16, 행 2:24, 계 1:18.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서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비참함을 묘사한다.
그는
자비로운 사마리아인 이웃이신
주님이 필요했다.
이러한 주님은
타락하고 율법에 시달리는
죄인인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위해
생명의 영의 법이신
그분 자신을 분배하심으로써
그를 돌보신다
— 롬 7:24-25, 눅 10:25-37.

우리는
죄와 죽음이
우리 속에 있는
일종의 법이며,
우리의 의지력으로는
이 법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반드시 보아야 한다
— 롬 7:15-16, 18-21.

죄가
하나의 법이고
우리의 의지는
결코 이 법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로마서 7장에 갇혀
결코 로마서 8장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모든 생명은
법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법 자체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가장 높은 생명이며,
생명의 영의 법은
가장 높은 법이다
— 잠 30:19상, 신 32:11-12, 사 40:30-31.

신성한 출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영역,
곧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법을 가진
신성한 생명이라는 영역,
죄나 세상이나 육체가
없는 영역 안으로
옮겨졌다.

이 영역 안에서는
우리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생명의 영의 법이
우리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승리가
자연스럽고
자동적이며
무의식적이고
힘이 들지 않는다.

우리의 영 안에는
생명의 영의 법이
내주하는데,
이 법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말씀하심,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의 분배하심이다
— 히 8:10, 롬 3:25, 출 25:22.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이 생명의 영의 법의
‘스위치를 켬’으로써,
우리 속에 설치되었고
우리 속에서 운행하는
이 법과
협력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희년의 자유와
희년의 생활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다
— 빌 2:12-13, 롬 8:2, 4-6, 13-16, 23,
5:10, 17, 딤전 4:7, 딤후 4:22.

우리의 영이라는
‘스위치’를 떠나서는
우리 속에
‘하늘에 속한 전기’로서 계신,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적용할 길이 없지만,
우리에게
스위치가 있고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는 것으로 인해
우리는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 잠 20:27, 슥 12:1, 롬 8:16.

우리의 영 안에 계신
흐르시는 영이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전류’의 스위치를 켜는
최상의 길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 고전 12:3하, 롬 10:12-13.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그 영을 접촉할 때,
그리스도를
희년의
무수히 많고 풍성한
모든 방면들로
누리게 된다
— 롬 8:4.

바울은
주님에 대한
첫째가는 사랑으로
자신의 영 안에서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생명의 영의 법의
스위치를 켠
사람이었다
— 롬 1:9, 5:5, 8:35-39, 계 2:4.

첫째가는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일과 모든 문제에서
그분께
첫째 위치를 드리며,
우리의 생활에서
그분을
모든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 골 1:18하, 10.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고
우리에게서 나가실 때,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이다.
우리는
교회들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며,
그곳에서
우리의 첫째가는 사랑을
그분께 드린다
— 아 7:12, 고후 6:1상,
빌 3:3, 막 12:30.

우리가
첫째가는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첫째가는 일을 한다.
첫째가는 일은
첫째가는 사랑에서
비롯되고
첫째가는 사랑을
표현하는 일이다.
첫째가는 사랑에 의해 유발된
이러한 일만이
금과 은과 보석이다
— 계 2:4-5, 고전 3:12, 15:10, 58.

그리스도의
애정 어린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그분을 향하여 살고
그분을 향하여 죽게 한다
— 고후 5:14-15, 롬 14:7-9.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둠으로써
우리는
희년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게 된다.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 롬 8:6.

로마서 8장에 있는
희년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곧 온전하게 된 하나님-사람들의
단체적인 생활이며,
이것은
로마서 12장부터 16장까지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 실재는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된다.
따라서 로마서 8장은
성경 전체의 초점과
우주의 중심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영의 법이신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심으로써
그분의 경륜을
성취하신다
— 롬 8:2, 6, 10-11, 계 22:1-2상.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를
온갖 기능을 가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
조성한다
— 골 2:19, 엡 4:11, 16, 롬 12:4-8.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의
자연스럽고 자동적인
기능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얻음으로써
하나님을 살 수 있게 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으로 조성됨으로써
하나님의 증가와 확대가 되어
그분의 표현을 위한
그분의 충만이 된다
— 엡 1:22-23, 3:19-21.

희년의 생활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생활,
곧 우리의 유업과 참자유이신
하나님을 누리는
생활이다
— 행 26:18, 요 8:36.

희년 안에 있다는 것은
좋은 땅의 참소출이신
주 예수님을 먹고,
그분을
우리의 안식을 위한
우리의 거처로 취하며,
죄에게 노예 노릇 하고
율법과 종교에 속박된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 요 6:57, 신 8:7-10, 골 1:12,
요 15:5, 시 16:5, 90:1, 롬 6:6-7, 갈 5:1.

인생의
세 종류의 수고,
곧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수고와
염려라는 수고와
고난이라는 수고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누림과 만족과 안식으로
취하는 것이다
— 롬 7:24-8:2, 빌 4:5-7, 고후 12:9.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님에 대한 누림으로
가득한 생활,
기쁨과 찬양이
가득한 생활이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충만히 누릴 때,
주님은
우리의 희년이
되신다.

이기는 생활의 어조는
끊임없이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 살전 5:16-18, 시 50:14, 23.

이기는 생명은
오직 감사하며 찬양하는 환경에서만
계속 살아 있을 수 있다
— 살전 5:18, 골 3:17,
시 106:12, 대하 20:20-22.

희년의 생활은
우리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 자신
곧 그리스도 자신을
취하는 생활이다.
그럴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주요 요인과 중심이 되시어
우리를 인도하시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스리신다
— 요 6:16-21, 골 1:17하, 18하.

바울은
희년 안에서 사는 비결,
곧 어떤 종류의 환경에서도
그리스도를 얻는 비결을
배웠다
— 빌 4:5-7, 11-13.

모든 것이
그분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저를
채우시고 얻으시고 소유하소서.
저의 바깥 상황이 어떠하든지
저는 다만
주님을 누리기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기 위해
복음을 살고 선포함으로써,
곧 은혜의 희년이신
그리스도를 살고 선포함으로써
오늘날의 사역자와 증인이
되어야 한다
— 행 26: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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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희년(2)”

6일

빌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빌 4:4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희년 안에
있다는 것은
먼저
주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이다.
… 희년을 선포했을지라도
우리가 배고프다면,
우리는
그러한 희년의 선포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희년 안에 있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거하는 곳,
우리의 거처로
삼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집이 되실 때,
우리에게
참안식이 있다.

우리는
희년의 주요한 두 가지 복이
우리의 유업으로
돌아가는 것과
… 죄에게 노예 노릇 하는 것과
율법과 종교의 속박된 것에서
해방되는 것임을
보았다.
희년의 축복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자!

인생에는
세 종류의
수고가 있다.
여기에는
돈을 벌기 위해
직장에서 일하는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
첫째 종류의 수고는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행동을 하며
자신의 성격을
개선하려고 하는 수고이다.
…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동과 성격을 개선하고,
율법을 지키고,
선하고 인내심이 있고
친절하고 정직하려고
노력하는 행위에 의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엡 2:8-9).

둘째 종류의 수고는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이다.
염려하면서 수고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여러분이 매일매일
아무런 염려 없이
일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건강한 사람이 될 것이다.
…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을 누리는 것이다.
주님을 누리고 있지 않을 때마다
나는 염려하고 있다.

셋째 종류의 수고는
고난이다.
고난은
매우 힘든 수고이다.
우리가
희년 안에서
하나님을 누릴 때에는
어떤 고난도 없다.
예를 들면,
바울은
‘육체에 있는 가시’(고후 12:7)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이 가시에 관하여,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서 떠나도록
해 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 간청하였다
(고후 12:8).
그러나
가시를 없애 주시는 대신
주님은
그에게
“나의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
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아니다.
나의 은혜가 충분하므로
나는
그 가시를
없애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누린다면
너는
어떤 고통도
당하지 않을 것이다.”
… 사도행전 16장에서
…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투옥되었지만,
그들에게는
누림과 만족과 안식이 있었다.

주님은
전쟁에서 이기셨고,
우리는
개가(凱歌)를 부르고 있다.
이것이
이기는 생활의
어조이다.
우리 각 사람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승리의 어조를
가져야 한다.
… 넉넉히 이기는 것은
계속 승리하며
항상 승리의 어조를
가지는 것이다.

이기는 생명은
오직 감사하며 찬양하는
환경에서만
계속 살아 있을 수 있다.
근심 가운데 있을 때
이 이기는 생명은
죽을 것이다.
우리가 언제든지
마음에서
찬양과 감사를
잃을 때마다
승리를
잃는다.
빌립보서 4장 4절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한다.
신약에서 말하는 기쁨은
이따금씩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에는 결코
끊김이 없어야 한다.
언제든지 기쁨을 잃으면
승리도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4장 13절은
믿는 이들이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해야 하며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님을
충만하게 누리는
생활이어야 한다.
주님을
충만히 누릴 때,
이 주님께서
우리의 희년이 되신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우리의 유업과 자유가 되신다.
그럴 뿐만 아니라,
주님은
우리의 생활이 되신다.
이런 생활 가운데서
우리는
그분을
극도로 사랑하고,
그분께서
주인이 되시도록
허락해 드린다.
그럴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주요 요인과 중심이 되시어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통치하신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어떤 환경을
통과할 때,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거나
그것의 노예가 되거나
그것에 지배받지 않고
자유로울 것이다.

모든 것은
그분의 주권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비우고
주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님,
저를
채우시고 얻으시고 소유하소서.
저의 바깥 상황이
어떠하든지
저는 다만
주님을 누리기
원합니다.”

 

신언노트, 2018 10 14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에게
 시력의 회복을 선포하고,
억압된 이들을
 해방 안에서 보내 버림이
 그 희년의
 자유들과 축복들입니다:

레위기 25장 10절에 나오는
 ‘희년’이라는 그 단어는
 ‘외치는 시간(a time of shouting)’
 혹은 ‘그 숫양 뿔의 나팔을 부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 숫양 뿔의 나팔을 부는 것은
 죄 아래 팔린
 그 모든 죄인들에게
 그 신약 희년 안에서
 자유를 선포함인
 그 복음을 전파함을
 나타내고
 이는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가족,
 곧 하나님의 가정으로
 되돌아오며,
 또 하나님의 구원의
 그 신약 누림 안에서
 외치면서
 크게 기뻐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 복음을 전파함은
 우리가
 구속의 나팔을 불어
 그 세상에,
 “보십시오,
 지금이
 기꺼이 받아들이실 수 있는 시간이며;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고후 6:2)라고
 희년의 해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분의 의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자신을
 사람에게
 사람의 소유지,
 곧 사람의 상속 재산으로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하였으며,
 그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소유인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자신을
 죄와 사탄과 세상에게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된
 하나님의 신약의
 구원은
 타락한 사람을
 자신의 신성한 소유인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고,
 죄와 사탄과 세상에게
 노예 노릇을 하는 데서
 해방되게 하여,
 자신의 신성한 가족인
 하나님의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교통을 누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고,
 하나님을 누리는 데서
 자유를 얻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누리지 않으면
 참된 자유를
 가질 수 없습니다.
자유는
 모든 속박과
 모든 무거운 짐,
 모든 압박,
 우리를 노예로 삼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활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될 수 있고,
 우리는
 어떤 것에도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먼저 사탄이
 우리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탄은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면서
 우리가
 죄를 짓도록
 부추기고 선동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탄은
 우리의
 불법적인 주인이
 되었고,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오직 죄만 지을 수 있는 정도로
 사탄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없으면,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누리려고 하는
 모든 것은
 개의 먹이와 쓰레기와 배설물입니다.

사탄은
 ‘똥 더미의 주’를 의미하는
 바알세불이라 불리었고,
 바알세불은
 ‘파리들의 왕’을 의미하는
 ‘바알세붑’에서 온 단어입니다.
사탄이
 전문적으로 하는 일은
 파리와 같은
 죄인들을 이끌어서
 똥을 먹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무도
 죄를 짓기를
 원하지 않지만,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짓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7장 24절에 나오는
 바울의 필사적인 절규는
 생명의 영의 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였다고
 말하는
 로마서 8장 2절에서
 응답됩니다.
이것이
 희년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해방입니다.

우리는 오직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때에만
 해방될 수 있고
 참자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누리는 이들만이
 죄를 짓지 않고
 참으로 자유로워져서,
 자유롭고
 해방되며
 속박에서 벗어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합니다.
이 법은
 죽음과 부활을 거쳐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신
 주님 자신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충분히 누리지 않는다면
 여전히
 많은 것에
 얽매일 것입니다.
결심하는 것은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계속적으로
 주님께 와서
 그분을
 먹고
 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누리는 이들만이
 죄를
 습관적으로 짓지 않고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희년이신 그리스도는
 빈곤, 포로 됨, 눈멂, 압제에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바울은
 삼일 하나님께서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거치셔서
 우리의 영 안에 설치된
 생명의 영의 법이
 되셨다는
 계시를 받음으로써
 위대한 발견을 했습니다.

생명의 영의 법은
 신성한 생명의
 자동적인 원리이자
 자연스러운 능력입니다.
이것은
 신성한 생명의
 자연스러운 특징과
 고유의(innate; 선천적인), 자동적인
 기능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지의
 능력에 의해
 살아서는 안 되며,
그의 영 안에 있는
 부활 생명의 영의
 내적인 법의
 능력에 의해
 살아야 합니다.
이 법은
 가장 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이기고
 죽음을 초월하며
 죽음에 묶이지 않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서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비참함을 묘사합니다.
그는
 자비로운
 사마리아인 이웃이신
 주님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주님은
 타락하고 율법에 시달리는
 죄인인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위해
 생명의 영의 법이신
 그분 자신을
 분배하심으로써
 그를 돌보십니다.

우리는
 죄와 죽음이
 우리 속에 있는
 일종의 법이며,
 우리의 의지력으로는
 이 법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반드시 보아야 합니다.

죄가
 하나의 법이고
 우리의 의지는
 결코 이 법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로마서 7장에 갇혀
 결코 로마서 8장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법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법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가장 높은 생명이며,
 생명의 영의 법은
 가장 높은 법입니다.

신성한 출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영역,
 곧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법을 가진
 신성한 생명이라는 영역,
 죄나 세상이나 육체가 없는
 영역 안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영역 안에서는
 우리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생명의 영의
 법이
 우리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승리가
 자연스럽고
 자동적이며
 무의식적이고
 힘이 들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 안에는
 생명의 영의 법이
 내주하는데,
 이 법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말씀하심,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의 분배하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이 생명의 영의 법의
 ‘스위치를 켬’으로써,
 우리 속에 설치되었고
 우리 속에서 운행하는
 이 법과
 협력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희년의 자유와
 희년의 생활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라는
 ‘스위치’를 떠나서는
 우리 속에
 ‘하늘에 속한 전기’로서 계신,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적용할 길이 없지만,
 우리에게
 스위치가 있고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는 것으로 인해
 우리는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 안에 계신
 흐르시는 영이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전류’의
 스위치를 켜는
 최상의 길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그 영을 접촉할 때,
 그리스도를
 희년의
 무수히 많고 풍성한
 모든 방면들로
 누리게 됩니다.

바울은
 주님에 대한
 첫째가는 사랑으로
 자신의 영 안에서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생명의 영의 법의
 스위치를 켠
 사람이었습니다.

첫째가는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일과 모든 문제에서
 그분께
 첫째 위치를 드리며,
 우리의 생활에서
 그분을
 모든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고
 우리에게서
 나가실 때,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입니다.
우리는
 교회들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며,
 그곳에서
 우리의
 첫째가는 사랑을
 그분께 드립니다.

우리가
 첫째가는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첫째가는 일을 합니다.
첫째가는 일은
 첫째가는 사랑에서
 비롯되고
 첫째가는 사랑을
 표현하는 일입니다.
첫째가는 사랑에 의해
 유발된
 이러한 일만이
 금과 은과 보석입니다.

그리스도의
 애정 어린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그분을 향하여 살고
 그분을 향하여 죽게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둠으로써
 우리는
 희년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게 됩니다.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 롬 8:6.

로마서 8장에 있는
 희년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곧 온전하게 된 하나님-사람들의
 단체적인 생활이며,
 이것은
 로마서 12장부터 16장까지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실재는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됩니다.
따라서 로마서 8장은
 성경 전체의 초점과
 우주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영의 법이신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심으로써
 그분의 경륜을
 성취하십니다.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를
 온갖 기능을 가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
 조성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의
 자연스럽고 자동적인
 기능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얻음으로써
 하나님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으로 조성됨으로써
 하나님의 증가와 확대가 되어
 그분의 표현을 위한
 그분의 충만이 됩니다.

희년의 생활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생활,
 곧 우리의 유업과 참자유이신
 하나님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희년 안에 있다는 것은
 좋은 땅의 참소출이신
 주 예수님을 먹고,
 그분을
 우리의 안식을 위한
 우리의 거처로 취하며,
 죄에게 노예 노릇 하고
 율법과 종교에 속박된 것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세 종류의 수고,
 곧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수고와
 염려라는 수고와
 고난이라는 수고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누림과 만족과 안식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님에 대한 누림으로
 가득한 생활,
 기쁨과 찬양이
 가득한 생활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충만히 누릴 때,
 주님은
 우리의 희년이
 되십니다.

한 이기는 생활의
 경향은
 (tone; 분위기는, 기풍은, 건강한 상태는, 어조는)
 지속적으로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기는 생명은
 오직 감사하며 찬양하는 환경에서만
 계속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희년의 생활은
 우리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 자신
 곧 그리스도 자신을
 취하는 생활입니다.
그럴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주요 요인과 중심이 되시어
 우리를 인도하시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스리십니다.

바울은
 희년 안에서 사는 비결,
 곧 어떤 종류의 환경에서도
 그리스도를 얻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를
 채우시고 얻으시고 소유하소서.
 저의 바깥 상황이 어떠하든지
 저는 다만
 주님을 누리기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기 위해
 복음을 살고 선포함으로써,
 곧 은혜의 희년이신
 그리스도를 살고 선포함으로써
 오늘날의 사역자와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5일

롬 8:4
이것은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롬 8:6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흐름이신
그 영을 떠나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적용되실
방법이 없다.
하나님은
풍성하시며,
그분의 모든 풍성은
우리를 위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풍성이
우리의 체험에
적용되려면
흐름이신 그 영이
필요하다.
그 영의 이 흐름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관유의
기름 바름이며 움직임이다.
… 이제 우리의 영 안에는
신성한 흐름의 움직임,
관유의 움직임이 있다.
우리 안에
계속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다.
이렇게
움직이는 요소에는
신성,
인성,
그리스도의 인간 생활,
그분의 죽음의 효능,
그분의 부활의 능력,
그분의 부활의 향기,
그분의
승천,
보좌에 앉으심,
머리 되심,
주권,
권위,
왕국 등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흐름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우리 영의 중요성을
보아야 한다.
우리의 영은
스위치와 흡사하다.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함으로써
우리 속에 설치된
하늘에 속한 전기의
스위치를 켤 수 있다.
만약 우리에게
스위치가 없거나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면,
전기를 적용할
길이 없을 것이다.
같은 원칙으로,
우리 영의 스위치를 떠나서는
하늘에 속한 전기를
적용할 길이 없다.
주님을 찬양하자!
우리에게는
스위치가
있으며,
또한 우리는
그 스위치가 있는 곳을
안다.
그 스위치는
우리 존재의 내실,
즉 우리의 영 안에
있다.
그 흐름의
스위치를 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로마서 1장 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위하여
나의 영 안에서 섬기는
하나님께서
나의 증인이
되십니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곳은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영이다.
사람들이
‘나의 영’에 대해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
그들의 혼,
그들의 생각,
그들의 감정,
그들의 의지에 대해
말하지만,
그들의 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영 안에서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었다.
우리는
‘나의 영’, 혹은 ‘우리의 영’에 대해
말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로마서 8장 16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 영께서 직접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을
증언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영에 관해
더 말해야 하고,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하며,
모든 일 가운데서
우리의 영을
사용해야 한다.

바울은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십시오.”
(빌 2:12)라고 말했다.
분명히 이것은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에
완전히 반대된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라고 말한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단지
스위치를 켜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은
스위치를 켜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언가를 설치하셨고
여전히
무언가를 행하고 계시지만,
우리는
스위치를 켤
필요가 있다.
로마서 8장 2절은
“왜냐하면 생명의 영의 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누구인가?
스위치를 켜는
‘나’이다.
이 말씀은
아무런 조건 없이
생명의 영의 법이
모든 믿는 이를
해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최소한 로마서 7장에 있는
한 사람은
해방되지 않았는데,
그는 여전히 거기서
분투하고 있었다.
바울이
8장에 이르기 전에는
그 법이
무언가를 이루어 낼
길이 없었다.
그 법은 이미
설치되었고
지금도
하나님은
그 법을
적용하실 수 있지만,
바울이
스위치를 켜는 것이
필요했다.
오십여 년 전에
나는
생명의 영의 법에 관하여
이 절에서 언급한
메시지를 들었고
그러한 책을
읽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나에게
이 법은
믿는 이들 편에서의
어떤 행동이 없이는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주지 않았다.
사실상 로마서 8장은
생명의 영의 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정의이다.
로마서 8장의 주제는
생명의 영의 법의
해방이다.
그러나 2절만으로는
생명의 영의 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3절 이후부터
로마서 8장 대부분이
생명의 영의 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정의해 준다.
생명의 영의 법은
모든 사람을
해방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해방되지 않았다.
생명의 영의 법은 오직
이 장에 있는
모든 조건을
이행하는 믿는 이들만을
해방한다.

 

4일

롬 7:24
오,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겠습니까?

롬 8:2
왜냐하면 생명의 영의 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은
그 영과 생명에 대해
언급하는데,
오직 생명의 영의 법의
작용과 관련하여
언급한다.
생명은
그 영의 내용과 결과이다.
그 영은
삼일 하나님께서
육체가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심으로
과정을 거쳐
내주하시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신 후
최종적으로 완결되어
나타나신 분이시다.
이 생명 주시는 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에게
생명이 되신다.
우리의 타락한 몸의
지체들 안에 거하는
사탄에게 속한
죄의 법(롬 7:23, 17)에서
우리를 해방한 법은,
바로 이 생명의 영에
속한 것이다.
우리의 육체 안에 있는
죄의 법의 작용에서
우리를 구해 내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얻고
하나님을 살아 낼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것은
하나님이나 그 영이 아니라
바로 이 법이다.
이 생명의 영의 법은
생명의 영의
자연스러운 능력이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법은
그 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상태에서
자동적으로 작용한다.

하나님과 사탄은 모두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와
우리 안에 거하게 된 후에
외적이고 객관적인 활동들로
일하지 않고,
내적이고 주관적인 법으로
우리 안에서
일한다.
생명의 영의 법의
작용은
우리의 영 안에 계신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생명 안에서
일하시는 것이다
(롬 8:2).

로마서 7장 7절부터 25절까지에서
바울은
자신이
주님을 믿기 전에 가졌던
체험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율법 아래서
선을 행하는 것이
비참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 단락에서는
사람의 영이나 하나님의 영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오히려 타고난 생명에서 나오는
선(롬 7:18-19, 21)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사람의 혼의
의지와 생각(롬 7:19, 23)이
언급되고 있다.
비록 이것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상황이지만,
그리스도인들 거의 대부분이
구원받은 후에
이러한 체험을
통과한다
(롬 7:7).

죄의 능력은
강하고
우리의 능력은
약하다.
죄의 능력은
항상 이기고
우리의 능력은
항상 실패한다.
죄가
하나의 법인 것을
깨달았을 때,
바울은
그의 모든 방법이
무익하고
결심도
소용없으며
의지로는 결코
죄의 법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그에게
하나의 위대한
발견이자 계시였다.

바울은
해방을 받는 것이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님을
보았다.
사람이
의지력을 신뢰할 때,
그는
하나님께서
해방하시는 방법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에게
길이 없다는 것을
시인하고
자신의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날이 와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해방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로마서 8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형제자매들이여,
로마서 7장을
가볍게 보지 말라.
우리는
로마서 7장을
인식한 후에야
8장의 체험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여러분이
로마서 8장의 교리를
깨달았느냐에 있지 않고
로마서 7장에서
나왔느냐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로마서 7장에 파묻혀서
의지의 힘으로
죄를 처리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
만일 죄가
하나의 법이라는 것과
의지로는
죄의 법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로마서 7장에
갇힌 사람이며
영영 로마서 8장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
… 여러분의
결심하는 것과
발버둥 치는 것은
헛된 것이다.

성령이
하나의 법이라는 것을
보는 것은
더욱 놀라운 발견이다.
… 참으로 모든 승리는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법이
운행하면서
우리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 오직 내주하시는 영만이
죄를 짓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실 수 있다.
여러분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결심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이기는 생활을 하게 하시는 분은
이 내주하시는 성령이시다.
여러분은
이기는 생활을 하려고
결심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 안에
이 법이
거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생명의 영의 법은
여러분 안에 있다.
그래서 여러분은
자연스럽게 해방된다.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나 노력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성령께서
여러분을
승리로
이끄실 것이다.

 

3일

롬 8:2
왜냐하면 생명의 영의 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눅 4:18-19
“주님의 영께서
나에게 임하시니,
이것은
나에게 기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나를 보내시어
포로 된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에게
시력의 회복을 선포하고,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주며,
주님께서
사람들을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희년의 해를
선포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화를 낸 후에
우리는
주님께 돌이키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공과를 잘 배워서
주님께 돌이킬 수 있고
화를 가라앉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도
주님의 임재를 떠나면,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을 볼 때
다시 화가 날 것이다.
… 이 모든 문제는
사람이
속박 아래 있고
자유가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우리 속에 있는
죄는 참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로마서 7장 24절에서
바울은
“오,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그러나 로마서 8장 2절이
있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 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다고
말한다.
주님의 긍휼로 인해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날 때,
신속히
그 화를
이길 수 있고
다시
화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생명의 영의 법이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해방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에서
…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억눌린 이들’은
노예 상태에 있는 이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구원받은 그날에만
희년이 임하여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상 신약 시대 전체가
희년의 시대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일생토록
희년을 지내며,
자유롭게 되고
해방되고
노예 노릇 하는 데서 벗어난
삶을 산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희년의 자유이다.
이것이
희년의 복, 복음의 복이다.
복음의 복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고
하나님을
우리의 유업으로
얻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유업으로
누리기만 하면,
우리는
자유롭게 된다.
오직 하나님을 누리는 이들만이
죄를 짓지 않고
참으로 자유롭다.
요한복음 8장 36절은
“그러므로 아들이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면,
여러분이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우리가
자유롭게 되기를
원한다면,
죄를 짓지 않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을 얻고
그분을 누려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생명 주시는 영이시다.
이 생명 주시는 영은
생명의 영이시고,
생명의 영은
생명의 영의 법으로서
우리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생명의 영의 법은
다만 죽음과 부활을 거쳐
생명 주시는 영,
생명의 영이 되신
주님 자신이다.
모든 생명에게
법이 있듯이,
생명의 영 또한
법을 가지고 있다.
생명의 영의 법은
죄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그 순간만
희년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때부터 시작하여
일생토록
이 자유를
누려야 하고,
영원토록 누려야 한다.
이 자유는 바로
하나님을 누리는 데서
온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우리의 유업이 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누리기만 하면
자유를 얻는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참된 자유를 가지며
더 이상
속박 아래 있지 않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면,
아마도 많은 일에서
여전히
속박 아래 있을 것이다.

희년은
우리가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돌아가고,
죄에게 노예 노릇 하는 데서
해방되는 것이다.
따라서 발버둥 치거나 노력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복음을 믿고
하나님을 누리는 것만이
효과가 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화를 내지 않고
성질도 내지 않을 것이다.”
라고 결심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선을 행하려고 결심하지만,
선을 행할 능력은
그에게 없다.
결심하는 것은
소용이 없고,
반드시 주님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참되고 살아 계신
주님을 접촉하고
그분을 누리기를
배워야 한다.
이럴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해방이 되시고
우리의 자유가 되신다.
그 결과 우리는
유업뿐 아니라
자유를 가진다.

 

2일

요 8:32
그러면 여러분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요 8: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죄의 노예입니다.

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면,
여러분이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희년의 때가 되면,
우리는
우리의 유업이신
하나님 자신께
돌아갈 뿐 아니라,
또한 자유를 얻고
노예의 속박에서 해방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권과 인권을 말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누리지 않는다면
참자유를 가질 수 없다.
…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은 채
자유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그 결과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고
많은 악한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
어느 누가
참자유를 소유했는가?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자유가 있으니
도박장에도
자유롭게 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도박의 노예로 떨어진 것을
모른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더
속박 아래에 있는 것이다.
… 성경의 원칙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돌아가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를 얻기 원한다면,
그 결과는 여전히
우리에게
참자유가 없는 것이다.

사람 안에는
죄를 짓게 하는 요인,
범죄에 대한
탐닉(耽溺)이 있다.
이 요인,
이 탐닉은
사탄 자신이며,
우리는
그의 포로이다.
사탄은
사람을
포로로 사로잡았고,
범죄를 선동하는
죄로서
우리 안에 거한다.
먼저 사탄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그러고 나서 사탄은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면서
우리가
죄를 짓도록
부추기고 선동하는 자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사탄은
우리의
불법적인 주인이 되었고,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오직 죄만 지을 정도로
사탄의 포로가 되었다.
성경에서 사탄은 또한
바알세불이라고 불린다.
성경 원문에 따르면,
바알세불은
‘똥 더미의 주(the lord of the dunghill)’를 의미하며,
‘파리들의 왕’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온 것이다.
똥 더미는
파리들로 뒤덮여 있다.
똥 더미의 주인 사탄이
전문적으로 하는 일은
파리들을 이끌어서
똥을 먹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또한
파리들의 주이다.
사탄은
파리들의 주이기 때문에,
모든 죄인은
파리처럼
사탄을 따라다니며
‘똥을 먹고 산다’.
그들은
악취가 나는 곳에는
어디든지 가서
바알세불을 따라
똥을 먹는다.
심지어 상류층 사람들도
파리와 같다.
바알세불은
상류층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위장할 수 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파리들’도
상류층에 속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멋진 옷을 입으며
매우 세련되었다.
그들이
우아하게 춤을 추기 시작하면
아주 고상해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똥을 먹고 있는 것’이다.

아담의 자손들은 모두
사탄의 포로들이며,
그에게 사로잡혀 있다.
사탄은
우리를
포로들로 사로잡은 후,
파리들의 왕인
바알세불로서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이리저리로 이끌면서
죄를 짓게 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누구도
죄를 짓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죄에 중독되고
바알세불에 의해 선동되면,
그에게
‘코가 꿰여’
이리저리로
그를 따라다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일이 지나간 후에야
그는 후회하면서
“나는 정말 어리석었어.
내가 지금 무엇을 한 거지?
왜 이런 일을 한 거지?”
라고 말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누구도
죄를 짓기를
원하지 않지만,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다.
그 누구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었다.
이 때문에 주 예수님은
“죄를 짓는 사람마다
죄의 노예입니다.”
(요 8:34)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자유는
해방을 뜻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묶임과 무거운 짐과 눌림과 매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바울은
모든 것이
그에게 허용되지만,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어떤 것에게도
노예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고전 6:12).
우리 인생의
모든 일이
우리에게
속박이 될 수 있으며,
우리는
어떤 일에서
그것의 노예가 될 수 있다.
공부하는 사람이
노예가 되고,
공부하지 않는 사람도
노예가 된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에 지배받고,
돈 있는 사람은 더욱
돈에 지배받는다.
우리가 말하는
수전노는 바로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이다.
희년은
유업의 문제이고
또한 자유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희년은
우리 가난한 이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들을
그들의 유업이신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고,
또한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일

레 25:10
너희는
오십 년째 되는 해를
거룩하게 하고,
그 땅의 모든 주민에게
자유를 선포해야 한다.
그해는
너희를 위한
희년이다.
너희는
각자 자기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자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눅 4:18-19
“주님의 영께서
… 나에게 기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나를 보내시어
포로 된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주며,
주님께서
사람들을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희년의 해를
선포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희년’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는
아마도
‘숫양’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을 것이며,
‘외치는 때’
혹은 ‘숫양 뿔 나팔을 부는 때’를
뜻한다.
숫양 뿔 나팔을 부는 것은
죄 아래 팔린
모든 죄인에게
신약의 희년 안에서
자유를 선포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의미한다
(눅 4:18-19, 행 26:17하-18).
이러한 복음 전파를 통해
죄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가족에게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며
외치고
기뻐하게 된다
(레 25:10).

바울이
에베소서 2장 12절에서
말한 것에 따르면,
전에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세상에서는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그리스도 밖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을 뿐 아니라,
‘스위치를 켜서’
하나님을
우리의 소유로
누릴 수 있다.
따라서 희년은 전적으로
우리의 소유와 관련되며,
우리의 소유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있으면
희년이 있고,
하나님이 있으면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우리의 복음 전파는
우리가
구속의 나팔을 불어,
세상 사람들에게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기쁘게 받아들이시기에
좋은 때이며,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고후 6:2)라고 말하며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다.
비록 사람은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사람을
기다리시며
사람이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희년의 유업으로 누리며
희년의 자유를 얻는다.
… 우리는
희년의 유업을
보았는데
이제
희년의 자유를
볼 것이다.
유업과 자유는 둘 다
긍정적인 것이지만,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유업보다
자유를 얻기 원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런 관념은
틀린 것이다.
우리의 유업은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자유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거절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다면
자유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업은
하나님이며,
우리의 자유는
하나님을
누리는 것에서 온다.
우리가
우리의 유업을 소유하고
그것을 누릴 때
그 결과로
자유를 얻는다.
자유는
억압이나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하는지!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업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누릴 때
자유를 얻는다!

구약은
희년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레위기 25장은
아주 길지만,
거기에는
단 두가지 중점이 있다.
첫 번째 중점은
희년이 오면
유업을 잃었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유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유업이 본래
주인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인이
유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 면으로는
사람이
자신의 유업을
떠나고 잃어버렸지만,
또 다른 면으로는
그 사람의 유업이
그 사람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잃어버리신 것인가?
사실은
둘 다 맞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하나님도
우리를 잃어버리셨다.
우리가 보았듯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희년에 대한 예시이다.
우리는 모두
참으로 탕자들이다.
오늘날
왕들, 대통령들, 수장들, 총리들인 사람들까지도
탕자들이다.
이 비유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잃어버렸는가,
아니면 아버지가
아들을 잃어버렸는가?
이 비유는
아들이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을
주로 말하지 않는다.
누가복음 15장 24절에서
아버지는
“왜냐하면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되찾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절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보다
아버지가
아들을 잃어버린 것을
강조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희년과 관련하여
주로 언급되는 것은
우리의 유업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유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주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희년에
우리가 얻는
가장 큰 복은
우리의 유업이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레위기 25장의
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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