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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뛰어난 부활에 이름

‘뛰어난 부활’은 탁월한 부활, 특별한 부활을 가리키며, 이것은 이기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상이 될 것이다 ― 빌 3:11, 계 20:4, 6.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믿는 이는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이기는 이들은 그 부활의 특별하고도 탁월한 몫을 누릴 것이다. 이 부활 안에서 그들은 왕국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추구했던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삶은 뛰어난 부활이신 그리스도였다.

바울 안에 사셨던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의 인격이 ‘뛰어난 부활의 실재’인 분이시다.

뛰어난 부활은 사실상 그리스도라는 사랑스럽고 보배롭고 뛰어난 인격이다. 이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심으로 옛 창조물에서 나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셨다.

뛰어난 부활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 안에서 그분을 알고, 그분의 고난의 교통 안에서 그분을 알며,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써 그분을 알아야 한다.

빌립보서 3장 13절과 14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뛰어난 부활을 이미 붙잡았다고 여기지 않았음을 본다. 그는 뛰어난 부활이라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나님은 상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를 위로 부르셨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목표가 있으며, 이 목표는 뛰어난 부활, 특별한 부활이다.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도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기를 열망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는 뛰어난 부활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는 모두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길에 있다. 뛰어난 부활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표와 목적지가 되어야 한다.

뛰어난 부활로 향하는 길은 부활의 과정이다.

이 과정은 우리가 침례 받은 날에 시작되었고, 탁월한 부활에 도달할 때 끝마쳐질 것이다.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동안 우리는 부활하는 과정에 있다. 결국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이 부활할 것이다.

우리는 뛰어난 부활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이 과정에 있을 것이다.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것은 뛰어난 부활에 도달하는 것이다. 뛰어난 부활에 이르려면 상을 얻을 수 있도록 경주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룬 결과는 우리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가 뛰어난 부활에 이르기 위한 조건이다.

뛰어난 부활에 도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룬 결과이자 산물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같은 형태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항상 그분의 죽음 안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 있을 것이고,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체험하며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머물면서 우리 자신을 그분의 죽음의 모양과 같은 형태가 되도록 허락한다면, 그 결과로 우리 존재의 각 부분이 점차로 부활할 것이다.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의 중요한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에 뛰어난 부활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경주만 하면서 오는 시대에 목표에 도달하기를 바랄 수 있을 뿐인가?

우리가 뛰어난 부활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려면 오는 시대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 시대에 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음 시대에도 이 목표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 중에 뛰어난 부활에 도달하기를 힘써야 한다.

로마서 8장 11절은 우리가 이 시대에 뛰어난 부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계시한다.

이 절은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우리 존재에서 죽어 가는 바로 그 부분 곧 우리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로마서 8장 11절에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은 병이 낫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 신성한 생명으로 우리의 온 존재를 적시시도록 허락해 드린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그 영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실질적이고도 실지적인 방식으로 뛰어난 부활을 우리 존재 안으로 일해 넣고 계신다.

뛰어난 부활에 이른다는 것은 우리의 온 존재가 점차적으로, 계속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죽은 영을 부활시키셨다. 그런 다음 그분은 계속하여 우리의 혼과 우리의 죽을 몸을 부활시키시고, 결국 우리의 온 존재―영, 혼, 몸―가 그분의 생명에 의해,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의 옛 존재에서 완전히 부활하도록 하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생명의 과정이며, 상으로서 주어지는 뛰어난 부활에 이를 때까지 해야 할 경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면,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이 점차로 부활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부활의 과정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는 것에 의해서만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그분의 회복 안에서 전진하시는 유일한 길이고 그분의 교회를 건축하시는 유일한 길이며, 신부가 자신을 준비하는 유일한 길이고 주님을 다시 모셔 오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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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살전 5:23 그리고 화평의 하나님께서 직접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하셔서,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나무랄 데 없이 온전하게 보존되기를 바랍니다.

롬 8:6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뛰어난 부활에 이른다는 것은 우리의 온 존재가 점차적으로, 계속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죽은 영을 부활시키셨다(엡 2:5-6). 그런 다음 그분은 계속하여 우리 영에서부터 우리의 혼(롬 8:6)과 우리의 죽을 몸을 부활시키시고(롬 8:11), 결국 우리의 온 존재―영, 혼, 몸―가 그분의 생명에 의해,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의 옛 존재에서 완전히 부활하도록 하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생명의 과정이며, 상으로서 주어지는 뛰어난 부활에 이를 때까지 해야 할 경주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표와 목적지가 되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써, 곧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함으로써만 이 목표에 이를 수 있다.

우리가 부활 안에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꺼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자연스럽게 부활 안으로 이끌린다면,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이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체험이 되신다. 친절함을 예로 들어 보자. 자매들은 대개 매우 친절하다. 그러나 이 친절함은 천연적인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자매들은 더 이상 친절하지 않겠다고 결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죄악된 것이다.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도 길이 아니고 친절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도 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 길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분을 체험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다면, 우리는 부활 안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온 존재가 부활할 때까지 계속해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통과할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1절에서 말하는 뛰어난 부활이 단지 장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과정임을 성경의 다른 절들이 증명해 준다. 로마서 6장 4절과 5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모양 안에서 장사된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 행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부활의 모양 안에서 부활할 것임을 뜻한다. 이 모양은 바로 생명의 새로움이다.

로마서 8장 10절과 11절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우리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우리의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그 영은 우리의 몸이 부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이다. 이것은 단지 장래의 일만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통과하고 있는 부활의 과정이다.

고린도후서 1장 8절과 9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힘에 겹도록 극심한 압박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자신이 결국은 죽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하였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부활의 능력으로 그를 붙드셨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을 우리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서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6절에서 그는 “우리의 겉사람은 썩어 가고 있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부활의 과정이다. 우리는 뛰어난 부활이라는 목표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 과정 안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는지 그러지 않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그분의 회복 안에서 전진하시는 유일한 길이고 그분의 교회를 건축하시는 유일한 길이며, 신부가 자신을 준비하는 유일한 길이고 주님을 다시 모셔 오는 유일한 길이다.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것이다.

5일

롬 8:11 또한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갈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

로마서 8장 11절은 우리가 이 시대에 뛰어난 부활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바울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분의 영께서 우리 존재의 죽어 가는 부분, 즉 우리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 영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재, 곧 뛰어난 부활의 실재이심을 보았다. 그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목적은 실질적이고도 실지적인 방식으로 뛰어난 부활을 우리 존재 안으로 일해 넣으시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로마서 8장 11절은 우리가 이 시대에 뛰어난 부활에 이르러야 함을 보여 준다.

우리는 교회생활에서뿐 아니라 가정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하며, 새 창조물을 살 수 있도록 옛 창조물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고 그분의 고난의 교통 안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뛰어난 부활에 이르며, 옛 창조물에서 완전히 나와 새 창조물 안으로 완전히 부활하는 목표에 도달한다.

어떤 형제가 그의 체험에서 뛰어난 부활에 이른다면, 심지어 그의 아내를 향한 사랑도 새 창조물 안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타고난 사랑, 옛 창조물 안에 있는 사랑이 아닐 것이다. 어떤 형제가 아내를 매우 많이 사랑할 수 있지만, 그의 사랑이 뛰어난 부활과 아무 관계도 없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아내가 그녀의 윤리와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 남편에게 복종할 수 있지만, 그녀의 복종 또한 전적으로 새 창조물이 아닌 천연적인 영역, 즉 옛 창조물 안에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뛰어난 부활 안에 있지 않은 사랑과 복종, 즉 타고난 사랑이나 천연적인 복종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 대신에 그분은 우리가 빌립보서 3장에 계시된 생활을 하기 원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며,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뛰어난 부활에 이르러야 한다.

뛰어난 부활 안에는 옛 창조물의 요소가 없다. 그 대신에 모든 것이 신성한 요소로 가득하다. 이러한 이유로 뛰어난 부활 안에 사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의 생활, 곧 그의 행동과 말은 부활 안에 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 있는 뛰어난 부활이다. 이것이 바울이 그의 갈망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알고 어떻게 해서든지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것이라고 선포했을 때, 그의 생각 속에 있던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이미 이르렀다고 여기지 않고 뛰어난 부활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목표가 뛰어난 부활인 것처럼, 상 또한 뛰어난 부활이다. 목표는 우리가 얻기 위한 것이고, 상은 우리가 누리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에 목표에 도달할 수 있지만, 상은 오는 시대에 누리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은 오는 시대에 있을 상, 즉 첫째 부활의 상을 말한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 둘째 죽음은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으로서 다스릴 것입니다.” ‘첫째’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누가복음 15장에서 돌아온 탕자에게 주어진 ‘제일 좋은’ 옷에 사용된 단어와 동일하다. 첫째 부활은 가장 좋은 부활, 뛰어난 부활이다. 만일 우리가 오늘 뛰어난 부활을 얻는다면, 그것은 다음 시대에 우리에게 상이 될 것이다. 그럴 때 지금 우리의 목표인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공동 왕들로서 다스리는 천년왕국 동안 우리의 상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이 상을 위하여 위로부터 우리를 부르셨다. 이 상은 우리가 이 시대에 추구하고 획득하는 목표가 되어야 한다.

4일

요 11:25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고,

빌 1:21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에 뛰어난 부활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경주만 하면서 오는 시대에 목표에 도달하기를 바랄 수 있을 뿐인가? 어떤 이들은 우리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오는 시대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시대에 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다음 시대에도 이 목표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 중에 이 목표에 이르도록 힘써야 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삶(빌 1:21)은 뛰어난 부활이신 그리스도였으며, 그분이 그의 목표였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도 삶은 뛰어난 부활이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야 할 이 그리스도께서 바로 뛰어난 부활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매일 뛰어난 부활을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가 그의 아내를 매우 사랑한다고 하자. 그는 자신에게 이 사랑이 천연적인 것인지 부활 안에 있는 것인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아닌 남편들도 그들의 아내를 천연적인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 만일 어떤 형제가 부활 안에서 그의 아내를 사랑한다면, 그의 사랑은 옛 창조물에서 나와 하나님 안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 뛰어난 부활을 사는 것, 즉 전적으로 옛 창조물에서 나와 하나님 안에 있는 생활을 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젊은 시절에 나는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왜 바울에게 어려워 보였는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그가 겪은 박해가 그러한 어려움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다른 이들에게서 오는 반대가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경주를 하지 못하게 방해했던 것처럼 보였다. 수년 후에 체험을 통하여 나는 타고난 생명을 따르지 않고 뛰어난 부활 안에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박해를 이겨 내는 것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나는 오십 년 이상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 이 모든 시간 동안에 나는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리스도인의 경주에서 나는 많은 방해물들을 만났는데, 가장 큰 방해물은 여러 관념과 습관으로 가득한 타고난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타고난 생명은 목표를 향하여 달리는 경주를 방해한다.

우리가 악하고 비방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의 말은 천연적일 수 있다. 우리는 많은 긍정적인 것들을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말은 부활 안에서가 아니라 천연적인 방식 안에서 나올 수 있다. 우리의 성격이나 행위나 윤리나 도덕성을 개선하는 것은 쉽지만, 부활 안에서 사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타고난 생명의 한 가지 특징은 염려이다. 최근에 건강에 문제가 있었고, 나는 그 일에 관해 염려했다. 나는 빌립보서 4장 6절과 7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을 취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약속 위에 서서 선포한 후 금세 나는 다시 염려했다. 나는 염려에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했지만, 염려는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염려했던 이유는 내가 완전히 부활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뛰어난 부활 안에는 염려가 없다. 염려는 옛 창조물에 속한 것이며, 부활의 영역 즉 새 창조물의 영역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바울은 체험을 통해 완전히 옛 창조물에서 나와 하나님 안에 있는 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그는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라고 선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빌립보서 1장에는 선포만 있을 뿐 설명이나 정의는 없다. 빌립보서 3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 뛰어난 부활을 사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본다. 우리의 행위와 말은 반드시 부활 안에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행위가 부활 안에 있지 않다면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말이 부활 안에 있지 않다면 말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어떤 것이 옳은지 그른지가 아니라, 그것이 부활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있다. 심지어 우리의 사랑도 부활 안에 있어야 한다.

3일

고전 9:24-26 경기장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붙잡기 위해 달리십시오. 경기에서 이기려고 다투는 사람마다 모든 일에 자제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받으려고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것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와 같이 달리되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것처럼 하지 않고, 이와 같이 권투하되 허공을 치는 것처럼 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장 11절에서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이르고자 합니다.”라고 말한다. 바울은 필사적이었다. 그는 경주에서 첫째가 되려고 필사적으로 경주하는 주자와 같았다. 바울의 관념은 올림픽 경기에서의 경주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뛰어난 부활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를 원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필사적인 느낌이 우리 안에 주입되게 해야 한다. 우리는 뛰어난 부활에 이르기 위해 필사적이 될 필요가 있다.

푯대는 그리스도를 충만히 누리고 얻는 것이다. 상은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를 최고도로 누리는 것이며, 이 상은 신약의 경주에서 승리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상을 위하여 푯대에 도달하도록 바울은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했다.

바울은 성숙한 성도였고 경험이 많은 사도였지만, 이미 획득하였고 이미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완전한 누림을 얻었거나 생명 안에서 온전히 성숙된 이로 여기지 않았다. 물론 그는 동일한 믿음에 의해 함께 누리는 구원을 얻었다(딤전 1:14-16).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여전히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있었다. 더욱이 바울은 부활의 특별한 몫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있었다.

바울과 같이 우리도 거듭났으나 아직 온전하게 되지 않았고 생명 안에서 성숙하지 않았다. 우리가 주님께로 회심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도록 그리스도에 의해 얻어진 바 되었다. 이제 우리는 아직 획득하지 못하고 아직 온전해지지 못한 이들로서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길의 첫 번째 방면은 우리 자신이 얻은 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한 가지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하는 것이다.

우리가 향해 달리고 있는 푯대는 그리스도에 대한 충만한 누림이며, 상은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누림이다.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누림의 몫이 천년왕국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비범한 누림은 빌립보서 3장 11절의 뛰어난 부활과 상응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죽은 모든 믿는 이들이 부활하지만, 일부만이 비범한 부활, 탁월한 부활을 누릴 것이다. 바울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의 뛰어난 부활이 신약의 경주에서 승리한 모든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라고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부활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념은 틀린 것이다. 성경은 믿지 않은 모든 이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계시한다. 요한복음 5장 28절과 29절에 따르면 두 가지 종류의 부활이 있다. 첫 번째는 생명의 부활이며, 두 번째는 심판의 부활이다. 죽은 모든 믿는 이들은 생명에 이르도록, 즉 구원에 이르도록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은 이들은 천년왕국 후에 심판에 이르도록, 즉 불 못에 이르도록 부활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부활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믿는 이들의 부활과 믿지 않은 이들의 부활에 구별이 있을 뿐 아니라, 부활할 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구별이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모두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단지 일반적으로 부활에 참여할 것이고 뛰어난 부활은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의 다른 이들은 부활의 특별한 몫을 누릴 것이다.

2일

빌 3:1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롬 6:4-5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장사된 것은 …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 안에서 그분과 연결되어 자랐다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 안에서도 그분과 연결되어 자랄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 언급된 죽음은 모든 것을 성취한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운 죽음이다. 죽음은 우리가 뛰어난 부활에 이르기 위한 조건이다(빌 3:11). 바울은 뛰어난 부활이라는 특정한 목표에 도달하기를 갈망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믿은 후에 침례 받았다. 침례의 의미는 우리의 타고난 존재를 끝내는 것이고, 신성한 생명으로 발아되는 것이다. 그러나 침례는 다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시작일 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또한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데, 이 목표는 뛰어난 부활이다. ‘뛰어난 부활’이라는 용어는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이 부활할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침례 받을 때, 우리의 옛 생명 곧 우리의 타고난 인간 생명은 끝나고 장사되었으며, 그리스도 자신인 새 생명 곧 신성한 생명이 안에서부터 일어났다. 그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여정을 시작했다.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긴 과정을 포함하고, 우리는 그러한 긴 길 위에 있다. 이 여정의 끝에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있다. 이 목표는 뛰어난 부활, 특별한 부활이다. 이 목표를 향하는 길이 부활의 과정이다.

우리는 우리가 침례 받은 그날에, 우리의 옛 생명과 함께 옛사람 곧 타고난 사람이 장사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 장사됨을 통해서 신성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서 일어났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우리 온 존재를 부활 안으로 이끌려는 목표를 가지고, 새 생명이 우리 안에서 살기 위해 들어왔다. 침례와 이 목표 사이에는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긴 과정이 있다. 비록 우리의 침례가 우리 옛사람이 장사된 것과 또 다른 생명이 우리 안에 살기 위해 일어난 것을 상징하지만, 우리는 침례가 상징하는 바에 따라 살지 않았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의 타고난 생명에 의해 살았다. 우리가 여전히 자주 우리의 타고난 생명에 의해 살기 때문에, 부활의 과정은 반드시 계속되어야 한다

빌립보서 3장 8절부터 11절까지의 절들이 하나의 긴 문장임을 기억하라. 8절에서 바울은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9절에서 그는 율법에서 나온 자기 자신의 의가 아닌, 자신에게서 살아 나타나신 하나님을 그의 의로 갖는 그러한 상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갈망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체험적으로 알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뛰어난 부활에 도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룬 결과이자 산물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같은 형태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항상 그분의 죽음 안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머물면서 우리 자신을 그분의 죽음의 모양과 같은 형태가 되도록 허락한다면, 그 결과로 우리 존재의 각 부분이 점차로 부활할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우리는 먼저 우리의 영 안에서 부활한다. 그 이후로 계속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부활의 과정이다. 하나님은 매일 우리를 타고난 생명에서 부활한 생명에 이르는 과정 가운데 두신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지속적인 과정이지 한 번 만에 완전히 이루어지는 체험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과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아 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과정 아래 있다.

신언노트, 2023 07 30

뛰어난 부활에 이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의
뛰어난 부활은
탁월한 부활,
특별한 부활을 가리키며,
이것은
이기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상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믿는 이는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기는 성도들은
그 부활의 특별하고도 탁월한 몫을
누릴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 35절에서 언급한
‘더 좋은 부활’이다.
더 좋은 부활은
‘첫째 부활’(계 20:4-6),
‘생명의 부활’(요 5:28-29)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부활이며,
주님의 이기는 이들이
왕국의 보상을 받게 될 부활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추구했던 것이다.

뛰어난 부활이라는
푯대를 향해
달리는 것은
옛 창조물에서 나와
완전히 하나님 안에 있는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뛰어난 부활은 사실상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인격이
뛰어난 부활을 묘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 전에는
그러한 묘사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뛰어난 부활과 같은 것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 이전에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물과
연결된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께서
옛 창조물 안으로 오셨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분은
옛 창조물 전체를
십자가로 가져가셔서
못 박으셨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하여
옛 창조물을 끝내셨다.
더욱이 장사되셨을 때
그분은
세마포로 상징된
옛 창조물을
그분과 함께 무덤 안으로
가져가셨다.
그리고 부활하셨을 때
그분은
세마포를
뒤에 남겨 두셨다
(요 20:6-7).
이것은
옛 창조물이
무덤 안에 남겨졌음을
가리킨다.
부활 안에서
무덤 밖으로 나오셨을 때,
그리스도는 완전히
옛 창조물에서 나와
하나님 안에 계신 분이셨다.
이것이
‘뛰어난 부활’이라는
표현의 의미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을 통하여
이 뛰어난 부활에 이르셨다.

신약에 따라 우리는
뛰어난 부활을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분리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께서 사실상
뛰어난 부활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 예수님을 받아들였을 때
뛰어난 부활도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이 일을 생각하는 것’(빌 3:15)은
뛰어난 부활을 추구하는 것과 관련된다.
이 일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되고 구속되고 거듭난 사람들인
우리가 반드시
한 가지 일,
곧 옛 창조물에서 나와
하나님 안에서 생활하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이해와 인식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온 생애가
뛰어난 부활 안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 뛰어난 부활은 사실상
그리스도라는
사랑스럽고 보배롭고 뛰어난
인격이다.
이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심으로
옛 창조물에서 나오셔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셨다.
이 놀라우신 분은
천사들보다
훨씬 더 탁월하시다.
천사들은 여전히
옛 창조물에 속해 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힘이나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되신 후
부활하심으로,
옛 창조물에서 나오셔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리스도 자신께서
뛰어난 부활의
실재이시다!
이제 우리는
어떤 생활을 추구해야 하는데,
이 생활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놀라운 인격이다.
바울과 더불어 우리는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빌 1:21)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또한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사신다고
증언할 수 있었다.
바울 안에 사셨던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이
뛰어난 부활이었다.

우리는
뛰어난 부활이라는
푯대를 향해
달려야 한다.
이 뛰어난 부활은
우리의
귀하고 탁월하신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다.
이것을 보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만일 우리가
옛 창조물에서 나와
하나님 안에 있는
생활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가정생활은
얼마나 축복이 되겠는가!

‘뛰어난 부활’은
탁월한 부활,
특별한 부활을 가리키며,
이것은
이기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상이 될 것이다
― 빌 3:11, 계 20:4, 6.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믿는 이는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이기는 이들은
그 부활의
특별하고도 탁월한 몫을
누릴 것이다.
이 부활 안에서 그들은
왕국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추구했던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삶은
뛰어난 부활이신
그리스도였다.

바울 안에 사셨던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의 인격이
‘뛰어난 부활의
실재’인 분이시다.

뛰어난 부활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 안에서
그분을 알고,
그분의 고난의 교통 안에서
그분을 알며,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써
그분을 알아야 한다.

빌립보서 3장
13절과 14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뛰어난 부활을
이미 붙잡았다고
여기지 않았음을 본다.
그는
뛰어난 부활이라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나님은
상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를
위로 부르셨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 언급된
죽음은
모든 것을 성취한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운 죽음이다.
죽음은
우리가
뛰어난 부활에 이르기 위한
조건이다.
바울은
뛰어난 부활이라는
특정한 목표에 도달하기를
갈망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믿은 후에
침례 받았다.
침례의 의미는
우리의 타고난 존재를
끝내는 것이고,
신성한 생명으로
발아되는 것이다.
그러나 침례는 다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시작일 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또한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이 목표는
뛰어난 부활이다.
‘뛰어난 부활’이라는 용어는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이
부활할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침례 받을 때,
우리의 옛 생명
곧 우리의 타고난 인간 생명은
끝나고 장사되었으며,
그리스도 자신인
새 생명
곧 신성한 생명이
안에서부터 일어났다.
그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여정을 시작했다.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긴 과정을 포함하고,
우리는
그러한 긴 길 위에 있다.
이 여정의 끝에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있다.
이 목표는
뛰어난 부활, 특별한 부활이다.
이 목표를 향하는 길이
부활의 과정이다.

우리는
우리가 침례 받은 그날에,
우리의 옛 생명과 함께
옛사람 곧 타고난 사람이
장사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 장사됨을 통해서
신성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서 일어났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우리 온 존재를
부활 안으로 이끌려는
목표를 가지고,
새 생명이
우리 안에서 살기 위해
들어왔다.
침례와 이 목표 사이에는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긴 과정이 있다.
비록 우리의 침례가
우리 옛사람이 장사된 것과
또 다른 생명이
우리 안에 살기 위해
일어난 것을 상징하지만,
우리는
침례가 상징하는 바에 따라
살지 않았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의 타고난 생명에 의해 살았다.
우리가 여전히 자주
우리의 타고난 생명에 의해
살기 때문에,
부활의 과정은 반드시
계속되어야 한다

빌립보서 3장
8절부터 11절까지의 절들이
하나의 긴 문장임을
기억하라.
8절에서 바울은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9절에서 그는
율법에서 나온
자기 자신의 의가 아닌,
자신에게서 살아 나타나신
하나님을
그의 의로 가지는
그러한 상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갈망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체험적으로 알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뛰어난 부활에 도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룬
결과이자 산물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같은 형태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항상
그분의 죽음 안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머물면서
우리 자신을
그분의 죽음의 모양과
같은 형태가 되도록
허락한다면,
그 결과로
우리 존재의 각 부분이
점차로 부활할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우리는 먼저
우리의 영 안에서 부활한다.
그 이후로 계속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부활의 과정이다.
하나님은 매일
우리를
타고난 생명에서
부활한 생명에 이르는
과정 가운데 두신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지속적인 과정이지
한 번 만에 완전히 이루어지는
체험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과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아 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과정 아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목표가 있으며,
이 목표는
뛰어난 부활,
특별한 부활이다.

바울은

  • 어떻게
  •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도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기를
    열망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는
    뛰어난 부활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는 모두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길에 있다.
    뛰어난 부활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표와 목적지가 되어야 한다.

    뛰어난 부활로 향하는 길은
    부활의 과정이다.

    이 과정은
    우리가 침례 받은 날에
    시작되었고,
    탁월한 부활에 도달할 때
    끝마쳐질 것이다.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동안
    우리는
    부활하는 과정에 있다.
    결국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이
    부활할 것이다.

    우리는
    뛰어난 부활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이 과정에
    있을 것이다.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것은
    뛰어난 부활에 도달하는 것이다.
    뛰어난 부활에 이르려면
    상을 얻을 수 있도록
    경주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룬 결과는
    우리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가
    뛰어난 부활에 이르기 위한
    조건이다.

    뛰어난 부활에 도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룬
    결과이자 산물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같은 형태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항상
    그분의 죽음 안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 있을 것이고,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체험하며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머물면서
    우리 자신을
    그분의 죽음의 모양과
    같은 형태가 되도록
    허락한다면,
    그 결과로
    우리 존재의 각 부분이
    점차로 부활할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1절에서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이르고자 합니다.”라고
    말한다.
    바울은 필사적이었다.
    그는
    경주에서 첫째가 되려고
    필사적으로 경주하는
    주자와 같았다.
    바울의 관념은
    올림픽 경기에서의
    경주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뛰어난 부활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를
    원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필사적인 느낌이
    우리 안에
    주입되게 해야 한다.
    우리는
    뛰어난 부활에 이르기 위해
    필사적이 될
    필요가 있다.

    푯대는
    그리스도를
    충만히 누리고
    얻는 것이다.
    상은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를
    최고도로 누리는 것이며,
    이 상은
    신약의 경주에서
    승리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상을 위하여
    푯대에 도달하도록
    바울은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했다.

    바울은
    성숙한 성도였고
    경험이 많은 사도였지만,
    이미 획득하였고
    이미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완전한 누림을 얻었거나
    생명 안에서 온전히 성숙된 이로
    여기지 않았다.
    물론 그는
    동일한 믿음에 의해
    함께 누리는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여전히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있었다.
    더욱이 바울은
    부활의 특별한 몫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있었다.

    바울과 같이
    우리도
    거듭났으나
    아직 온전하게 되지 않았고
    생명 안에서
    성숙하지 않았다.
    우리가
    주님께로 회심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도록
    그리스도에 의해
    얻어진 바 되었다.
    이제 우리는
    아직 획득하지 못하고
    아직 온전해지지 못한 이들로서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길의
    첫 번째 방면은
    우리 자신이
    얻은 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한 가지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하는 것이다.

    우리가
    향해 달리고 있는
    푯대는
    그리스도에 대한
    충만한 누림이며,
    상은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누림이다.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누림의 몫이
    천년왕국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비범한 누림은
    빌립보서 3장 11절의
    뛰어난 부활과 상응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죽은 모든 믿는 이들이 부활하지만,
    일부만이
    비범한 부활, 탁월한 부활을
    누릴 것이다.
    바울은
    죽은 사람들로부터의
    뛰어난 부활이
    신약의 경주에서 승리한
    모든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라고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부활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념은
    틀린 것이다.
    성경은
    믿지 않은 모든 이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계시한다.
    요한복음 5장
    28절과 29절에 따르면
    두 가지 종류의
    부활이 있다.
    첫 번째는
    생명의 부활이며,
    두 번째는
    심판의 부활이다.
    죽은 모든 믿는 이들은
    생명에 이르도록,
    즉 구원에 이르도록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은 이들은
    천년왕국 후에
    심판에 이르도록,
    즉 불 못에 이르도록
    부활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부활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믿는 이들의 부활과
    믿지 않은 이들의 부활에
    구별이 있을 뿐 아니라,
    부활할 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구별이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모두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단지 일반적으로
    부활에 참여할 것이고
    뛰어난 부활은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의 다른 이들은
    부활의 특별한 몫을
    누릴 것이다.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에
    뛰어난 부활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경주만 하면서
    오는 시대에
    목표에 도달하기를
    바랄 수 있을 뿐인가?
    어떤 이들은
    우리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오는 시대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시대에
    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다음 시대에도
    이 목표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 중에
    이 목표에 이르도록
    힘써야 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삶은
    뛰어난 부활이신
    그리스도였으며,
    그분이
    그의 목표였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도
    삶은
    뛰어난 부활이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야 할
    이 그리스도께서 바로
    뛰어난 부활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매일
    뛰어난 부활을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가
    그의 아내를
    매우 사랑한다고 하자.
    그는
    자신에게
    이 사랑이
    천연적인 것인지
    부활 안에 있는 것인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아닌 남편들도
    그들의 아내를
    천연적인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
    만일 어떤 형제가
    부활 안에서
    그의 아내를 사랑한다면,
    그의 사랑은
    옛 창조물에서 나와
    하나님 안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
    뛰어난 부활을 사는 것,
    즉 전적으로
    옛 창조물에서 나와
    하나님 안에 있는
    생활을 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젊은 시절에 나는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왜 바울에게 어려워 보였는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그가 겪은 박해가
    그러한 어려움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다른 이들에게서 오는 반대가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경주를
    하지 못하게 방해했던 것처럼 보였다.
    수년 후에
    체험을 통하여
    나는
    타고난 생명을 따르지 않고
    뛰어난 부활 안에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박해를 이겨 내는 것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나는
    오십 년 이상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
    이 모든 시간 동안에
    나는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리스도인의 경주에서
    나는
    많은 방해물들을 만났는데,
    가장 큰 방해물은
    여러 관념과 습관으로 가득한
    타고난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타고난 생명은
    목표를 향하여 달리는
    경주를 방해한다.

    우리가
    악하고 비방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의 말은
    천연적일 수 있다.
    우리는
    많은 긍정적인 것들을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말은
    부활 안에서가 아니라
    천연적인 방식 안에서
    나올 수 있다.
    우리의
    성격이나 행위나
    윤리나 도덕성을
    개선하는 것은 쉽지만,
    부활 안에서 사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타고난 생명의
    한 가지 특징은
    염려이다.
    최근에
    건강에 문제가 있었고,
    나는
    그 일에 관해
    염려했다.
    나는
    빌립보서 4장
    6절과 7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을 취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약속 위에 서서
    선포한 후 금세
    나는
    다시 염려했다.
    나는
    염려에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했지만,
    염려는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염려했던 이유는
    내가 완전히
    부활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뛰어난 부활 안에는
    염려가 없다.
    염려는
    옛 창조물에 속한 것이며,
    부활의 영역
    즉 새 창조물의 영역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바울은
    체험을 통해 완전히
    옛 창조물에서 나와
    하나님 안에 있는
    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그는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라고
    선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빌립보서 1장에는
    선포만 있을 뿐
    설명이나 정의는 없다.
    빌립보서 3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
    뛰어난 부활을 사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본다.
    우리의 행위와 말은 반드시
    부활 안에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행위가
    부활 안에 있지 않다면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말이
    부활 안에 있지 않다면
    말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어떤 것이
    옳은지 그른지가 아니라,
    그것이
    부활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있다.
    심지어 우리의 사랑도
    부활 안에 있어야 한다.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의 중요한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에
    뛰어난 부활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경주만 하면서
    오는 시대에
    목표에 도달하기를
    바랄 수 있을 뿐인가?

    우리가
    뛰어난 부활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려면
    오는 시대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 시대에
    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음 시대에도
    이 목표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 중에
    뛰어난 부활에 도달하기를
    힘써야 한다.

    로마서 8장 11절은
    우리가
    이 시대에
    뛰어난 부활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바울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분의 영께서
    우리 존재의 죽어 가는 부분,
    즉 우리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 영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재,
    곧 뛰어난 부활의 실재이심을 보았다.
    그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목적은
    실질적이고도 실지적인 방식으로
    뛰어난 부활을
    우리 존재 안으로
    일해 넣으시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로마서 8장 11절은
    우리가
    이 시대에
    뛰어난 부활에 이르러야 함을
    보여 준다.

    우리는
    교회생활에서뿐 아니라
    가정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하며,
    새 창조물을 살 수 있도록
    옛 창조물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고
    그분의 고난의 교통 안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뛰어난 부활에 이르며,
    옛 창조물에서 완전히 나와
    새 창조물 안으로 완전히 부활하는
    목표에 도달한다.

    어떤 형제가
    그의 체험에서
    뛰어난 부활에 이른다면,
    심지어 그의 아내를 향한 사랑도
    새 창조물 안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타고난 사랑,
    옛 창조물 안에 있는 사랑이
    아닐 것이다.
    어떤 형제가
    아내를 매우 많이 사랑할 수 있지만,
    그의 사랑이
    뛰어난 부활과
    아무 관계도 없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아내가
    그녀의 윤리와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
    남편에게 복종할 수 있지만,
    그녀의 복종 또한 전적으로
    새 창조물이 아닌
    천연적인 영역,
    즉 옛 창조물 안에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뛰어난 부활 안에 있지 않은
    사랑과 복종,
    즉 타고난 사랑이나
    천연적인 복종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 대신에 그분은
    우리가
    빌립보서 3장에 계시된
    생활을 하기 원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며,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뛰어난 부활에
    이르러야 한다.

    뛰어난 부활 안에는
    옛 창조물의 요소가 없다.
    그 대신에 모든 것이
    신성한 요소로 가득하다.
    이러한 이유로
    뛰어난 부활 안에 사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의 생활,
    곧 그의 행동과 말은
    부활 안에 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 있는
    뛰어난 부활이다.
    이것이
    바울이
    그의 갈망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알고
    어떻게 해서든지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것이라고
    선포했을 때,
    그의 생각 속에
    있던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이미 이르렀다고
    여기지 않고
    뛰어난 부활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목표가
    뛰어난 부활인 것처럼,
    상 또한
    뛰어난 부활이다.
    목표는
    우리가 얻기 위한 것이고,
    상은
    우리가 누리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에
    목표에 도달할 수 있지만,
    상은
    오는 시대에
    누리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은
    오는 시대에 있을 상,
    즉 첫째 부활의 상을 말한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
    둘째 죽음은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으로서 다스릴 것입니다.”
    ‘첫째’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누가복음 15장에서
    돌아온 탕자에게 주어진
    ‘제일 좋은’ 옷에 사용된
    단어와 동일하다.
    첫째 부활은
    가장 좋은 부활,
    뛰어난 부활이다.
    만일 우리가 오늘
    뛰어난 부활을 얻는다면,
    그것은
    다음 시대에
    우리에게
    상이 될 것이다.
    그럴 때
    지금 우리의 목표인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공동 왕들로서 다스리는
    천년왕국 동안
    우리의 상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이 상을 위하여
    위로부터
    우리를 부르셨다.
    이 상은
    우리가
    이 시대에
    추구하고 획득하는
    목표가 되어야 한다.

    로마서 8장 11절은
    우리가
    이 시대에
    뛰어난 부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계시한다.

    이 절은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로부터
    살리신 분의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로부터
    살리신 분께서
    우리 존재에서
    죽어 가는 바로 그 부분
    곧 우리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로마서 8장 11절에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은
    병이 낫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
    신성한 생명으로
    우리의 온 존재를 적시시도록
    허락해 드린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그 영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실질적이고도 실지적인 방식으로
    뛰어난 부활을
    우리 존재 안으로
    일해 넣고 계신다.

    뛰어난 부활에 이른다는 것은
    우리의 온 존재가
    점차적으로, 계속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죽은 영을
    부활시키셨다.
    그런 다음 그분은 계속하여
    우리 영에서부터
    우리의 혼과
    우리의 죽을 몸을
    부활시키시고,
    결국 우리의 온 존재
    ―영, 혼, 몸―가
    그분의 생명에 의해,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의 옛 존재에서
    완전히 부활하도록 하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생명의 과정이며,
    상으로서 주어지는
    뛰어난 부활에 이를 때까지
    해야 할 경주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표와 목적지가 되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써,
    곧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함으로써만
    이 목표에 이를 수 있다.

    우리가
    부활 안에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꺼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자연스럽게
    부활 안으로 이끌린다면,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이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체험이 되신다.
    친절함을
    예로 들어 보자.
    자매들은 대개
    매우 친절하다.
    그러나 이 친절함은
    천연적인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자매들은
    더 이상 친절하지 않겠다고
    결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죄악된 것이다.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도
    길이 아니고
    친절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도
    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
    길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분을 체험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다면,
    우리는
    부활 안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온 존재가
    부활할 때까지 계속해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통과할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1절에서 말하는
    뛰어난 부활이 단지
    장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과정임을
    성경의 다른 절들이
    증명해 준다.
    로마서 6장
    4절과 5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모양 안에서
    장사된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
    행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부활의 모양 안에서
    부활할 것임을 뜻한다.
    이 모양은 바로
    생명의 새로움이다.

    로마서 8장
    10절과 11절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우리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우리의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로부터 일으키신
    그 영께서
    우리의 몸이
    부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이다.
    이것은 단지
    장래의 일만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통과하고 있는
    부활의 과정이다.

    고린도후서 1장
    8절과 9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힘에 겹도록
    극심한 압박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자신이 결국은
    죽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하였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부활의 능력으로
    그를 붙드셨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을
    우리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서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6절에서 그는
    “우리의 겉사람은
    썩어 가고 있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부활의 과정이다.
    우리는
    뛰어난 부활이라는
    목표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 과정 안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는지
    그러지 않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그분의 회복 안에서 전진하시는
    유일한 길이고
    그분의 교회를 건축하시는
    유일한 길이며,
    신부가
    자신을 준비하는
    유일한 길이고
    주님을 다시 모셔 오는
    유일한 길이다.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면,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이
    점차로 부활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부활의 과정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는 것에 의해서만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1일

    빌 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이르고자 합니다.

    계 20:6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 둘째 죽음은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으로서 다스릴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의 뛰어난 부활은 탁월한 부활, 특별한 부활을 가리키며, 이것은 이기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상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믿는 이는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기는 성도들은 그 부활의 특별하고도 탁월한 몫을 누릴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 35절에서 언급한 ‘더 좋은 부활’이다. 더 좋은 부활은 ‘첫째 부활’(계 20:4-6), ‘생명의 부활’(요 5:28-29)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부활이며, 주님의 이기는 이들이 왕국의 보상을 받게 될 부활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추구했던 것이다.

    뛰어난 부활이라는 푯대를 향해 달리는 것(빌 3:11)은 옛 창조물에서 나와 완전히 하나님 안에 있는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뛰어난 부활은 사실상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인격이 뛰어난 부활을 묘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 전에는 그러한 묘사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뛰어난 부활과 같은 것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 이전에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물과 연결된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께서 옛 창조물 안으로 오셨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분은 옛 창조물 전체를 십자가로 가져가셔서 못 박으셨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하여 옛 창조물을 끝내셨다. 더욱이 장사되셨을 때 그분은 세마포로 상징된 옛 창조물을 그분과 함께 무덤 안으로 가져가셨다. 그리고 부활하셨을 때 그분은 세마포를 뒤에 남겨 두셨다(요 20:6-7). 이것은 옛 창조물이 무덤 안에 남겨졌음을 가리킨다. 부활 안에서 무덤 밖으로 나오셨을 때, 그리스도는 완전히 옛 창조물에서 나와 하나님 안에 계신 분이셨다. 이것이 ‘뛰어난 부활’이라는 표현의 의미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을 통하여 이 뛰어난 부활에 이르셨다.

    신약에 따라 우리는 뛰어난 부활을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분리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께서 사실상 뛰어난 부활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 예수님을 받아들였을 때 뛰어난 부활도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이 일을 생각하는 것’(빌 3:15)은 뛰어난 부활을 추구하는 것과 관련된다. 이 일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되고 구속되고 거듭난 사람들인 우리가 반드시 한 가지 일, 곧 옛 창조물에서 나와 하나님 안에서 생활하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이해와 인식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온 생애가 뛰어난 부활 안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 뛰어난 부활은 사실상 그리스도라는 사랑스럽고 보배롭고 뛰어난 인격이다. 이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심으로 옛 창조물에서 나오셔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셨다. 이 놀라우신 분은 천사들보다 훨씬 더 탁월하시다. 천사들은 여전히 옛 창조물에 속해 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힘이나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되신 후 부활하심으로, 옛 창조물에서 나오셔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리스도 자신께서 뛰어난 부활의 실재이시다! 이제 우리는 어떤 생활을 추구해야 하는데, 이 생활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놀라운 인격이다. 바울과 더불어 우리는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빌 1:21)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또한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사신다고 증언할 수 있었다. 바울 안에 사셨던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이 뛰어난 부활이었다.

    우리는 뛰어난 부활이라는 푯대를 향해 달려야 한다. 이 뛰어난 부활은 우리의 귀하고 탁월하신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다. 이것을 보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만일 우리가 옛 창조물에서 나와 하나님 안에 있는 생활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가정생활은 얼마나 축복이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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