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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물질적인 영역과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에 관한 분명한 조망, 곧 이상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땅에 속한 것과 하늘에 속한 것, 법리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비밀한 것이 현저히 대조된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음으로써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을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어떤 영역, 범위, 왕국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영역은 우리가 지금 있는 영역보다 훨씬 더 높다. 훨씬 더 높은 이 영역이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다.

우리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을 봄으로써 이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 영적인 일들에서는 보는 것이 들어가는 것이다.

삼일 하나님 자신이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시다.

삼일 하나님, 곧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며, 동시에 존재하시고, 상호 내재하신다. 이러한 분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바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시며,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서로 안에 거하신다.

요한복음 14장 10절과 11절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신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체현되시고 아들은 아버지의 체현이 되시어,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곧 삼일 하나님이라는 영역을 형성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 안에 살 수 있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은 사실상, 단순히 삼일 하나님이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께서 완결되시고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복합되신 영이 되셨음을 계시한다.

‘완결되신 영’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영께서 과정을 거치시어 완결되신 영이 되셨다는 것을 함축한다 ― 요 7:39.

완결되신 영은 바르는 기름으로 예표된 복합되신 영이시다.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인성,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능,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능력과 연합되셨다.

이러한 연합의 산물이 복합되시고 완결되신 영이다.

완결되신 영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의 과정을 통과하신 삼일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가 되신 것을 계시한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심으로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가 되셨다.

따라서 우리는 완결되신 영과 이러한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체험에서 우리는 실지로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신성한 출생을 통하여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의 일부가 된다. 거듭남을 통해 우리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요 3:15), 본성(엡 1:4, 벧후 1:4), 생각(엡 4:23, 빌 2:5), 존재(고후 3:18하, 엡 3:8), 형상(고후 3:18상, 롬 8:29), 영광(롬 8:30, 히 2:10), 아들의 자격(엡 1:5, 롬 8:23), 나타남(롬 8:19), 모양(요일 3:2)에 참여함으로써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건축됨으로써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의 일부가 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있을수록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더 있게 된다.

믿는 이들은 한 실체로 섞여 그리스도의 비밀한 몸이 된다.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이자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살아야 한다.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 안에 살 수 있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은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영역 안에 살기를 배워야 한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우리는 유일하고도 모든 것을 포함한 복이신 그 영을 받는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우리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전달을 받고 그분의 하늘에서의 사역의 공급을 받는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유기적인 구원을 체험한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우리는 신성한 종(種)의 영역인 하나님의 왕국 안에 산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우리는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 산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우리는 생명의 법의 자동적인 기능에 따라 자연스럽고 애쓰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한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우리는 계시된 신성한 실재의 표현인 진실함의 생활을 한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우리는 하나를 지키기 위해,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과 연합된다.

참된 하나는 삼일 하나님 안에 있다.

진정한 하나는 믿는 이들과 삼일 하나님의 연합이다.

이러한 하나를 갖기 위해 믿는 이들은 반드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신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믿는 이들은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삼일 하나님과 하나이다.

모든 믿는 이들은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살아야 하고, 신성하고 비밀한 사람 곧 인간적이면서도 신성하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신성하면서도 인간적이어야 한다. 즉, 단지 인간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밀하게 인간적이어야 한다.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이 신성하고 비밀해야 한다.

신성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통하여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 예수님처럼 우리는 눈에 보이는 면에서는 물질적이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면에서는 신성하고 비밀해야 하며, 물질적인 영역과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동시에 살아야 한다.

“그때에 두 남자가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 둡니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 둡니다.” ― 마 24:40-41.

두 남자와 두 여자는 주님께서 두 번째 오실 때 살아 있을 믿는 이들을 대표한다.

데려가지는 것은 대환난 전에 휴거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40절과 41절은 비밀한 휴거, 곧 준비된 이들이자 성숙한 이들의 휴거를 가리킨다.

데려가진 사람과 남겨진 사람의 차이는 생명의 성숙에 있다. 한 사람은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살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마태복음 24장 40절부터 42절까지에 있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고 휴거되기를 기대하는 동안 우리의 일상적인 의무들에 신실해야 하고, 합당하게 균형 잡힌 인간 생활을 하는 동시에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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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6일

마 24:40-42 그때에 두 남자가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 둡니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 둡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의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들에 의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장차 올 심판에 대한 이해도 없지만, 깨어 있고 맑은 생각을 가진 일부 믿는 이들은 데려가질 것이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의 징조가 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40절에 있는 두 남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임이 분명하고, 41절에 있는 두 여자도 주님 안에 있는 자매들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42절의 말씀에 의해 암시되어 있는데,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느 날 우리의 주님께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와 ‘여러분의 주님’이라는 말은 40절과 41절에 있는 두 남자와 두 여자가 믿는 이들임을 입증해 준다. 주님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지 않으실 것이며, 더욱이 그분은 구원받지 않은 이들의 주님도 아니시다.

데려가지는 것은 대환난 전에 휴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휴거는 주님의 오심의 징조이다.

두 남자가 밭에서 일하고 있고 두 여자가 맷돌질하고 있는 모습은 매우 흥미롭다. 밭에서 일하는 것과 맷돌질하는 것은 둘 다 먹기 위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공부하고 일하며, 우리도 역시 공부하고 일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마취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그보다 우리는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존을 유지하는 목적은 십자가의 길을 취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관심은 교육이나 고용이나 사업에 있지 않다.

어떤 젊은이들은 이 말을 들을 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들으니 얼마나 기쁜가! 더 이상 공부나 일에 주의하지 말자. 우리의 모든 시간을 기도하고 서로 교통하는 데 들이자.” 그러한 태도는 그릇된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40절에서 형제들은 농사짓고 있었고, 41절에서 자매들은 맷돌질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곡물을 맷돌질하는 것은 매우 고된 일이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안이한 직업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 마태복음 24장 38절에 있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세상적이지만, 40절과 41절에 있는 농사짓는 것과 맷돌질하는 것은 거룩한 것이다. 만일 데려가진 이들이 거룩한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들이 휴거되었을 리가 없다. 때로 어떤 자매들이 거룩함에 관해 많이 말할수록, 그들은 덜 거룩해진다. 그런 자매들은 남편과 자녀와 접대해야 하는 손님들에게 훌륭한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요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는 편이 더 낫다. 이렇게 한다면 그 자매들은 더 거룩해질 것이다. 어떤 자매들은 거룩함에 관해 교통하는 법은 알고 있지만, 요리를 잘하는 법은 모른다. 그들은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변명하면서, 항상 가족을 위해 맛없는 음식만 요리해 준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나면 그들의 남편과 자녀들에게 그러한 음식에 대한 불만이 생긴다. 이런 자매들이 거룩해지는 것에 관해 더 말할수록, 그들의 남편과 자녀들은 덜 거룩해진다. 우리에게는 고운 가루를 산출하기 위해 맷돌질하는 더 많은 거룩한 자매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세상적인 것에 마취되어서는 안 되고, 합당하게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주 예수님께는 뚜렷한 목적이 있으셨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휴거되기를 기대하면서 반드시 우리의 일상적인 의무들에 매우 신실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원하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합당하게 균형 잡힌 인간 생활이지, 영적인 것에만 골몰하며 남들이 자기를 돌봐 주기를 바라는 수도승의 생활이 아니다. 휴거될 사람은 바로 밭에서 일하고 있는 형제들과 맷돌질하고 있는 자매들이다.

밭에 있는 두 남자 가운데 한 명은 데려가지고 다른 한 명은 남겨진다. 맷돌질하고 있는 두 여자 가운데 한 명은 데려가지고 다른 한 명은 남겨진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생명의 문제에 있어서 그들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데려가지는 이는 성숙한 사람이고, 남겨지는 이는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생명이 차이를 만든다. 생명이 성숙한 이들인 이기는 이들의 휴거는 남겨진 이들에게 하나의 징조가 될 것이다.

5일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 외에는 하늘에 올라가 본 이가 없습니다.

엡 4:20-21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들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면,

주님은 기도의 사람으로서 사셨다. 그분은 평범한 기도를 드리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살지 않으셨고, 일반적인 기도를 드리는 일반적인 사람으로서 살지 않으셨으며, 하나님께 종교적인 방식으로 기도하는 소위 경건한 사람, 독실한 사람으로서도 살지 않으셨고, 신성한 것들을 달성하고 획득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도 살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분은 육체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은밀하신 하나님께 기도하신 사람이셨다. 사복음서는 그분께서 종종 산에 올라가시거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음을 말해 준다.

예수님은 육체 안에 계신 한 사람이셨지만, 신성하고 비밀한 방식과 영역 안에서 비밀스러우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주님의 모든 기도는 신성한 사실들이다. 우리는 자신의 기도가 신성한 사실들인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어떤 아내는 남편이 직장을 잃어서 주님께 그녀의 가정을 돌봐 주시기를 기도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기도는 신성하지 않다. 그 대신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다. “주님, 저는 한 주부로서 우리가 당신의 손 아래 있는 것으로 인해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이것이 신성한 기도이다.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주님의 기도를 고려해 봄으로써 우리는 신성한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위해 기도할 수 있지만, 신성한 방식으로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적인 기도가 아닌 신성한 기도를 해야 한다. 비록 우리는 사람이지만, 사람들이 느끼기에 우리 안에 비밀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학급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이나 동년배들이 느끼기에 우리 안에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은밀하고 비밀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기도를 하신 분은 육체 안에 계신 한 사람이신 나사렛 사람 예수님이셨지만, 그분의 기도는 비밀했다.

기도의 사람이신 첫 번째 하나님-사람의 본은 우리가 모든 것을 신성한 방식으로 행해야 함을 보여 준다. 심지어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도 신성해야 하며 단지 인간적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신발을 사고 머리를 자르는 방식도 신성해야 한다. 첫 번째 하나님-사람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은 그분의 기도였다. 그분의 모든 기도는 신성했지만, 그 기도들은 인간 생활 안에 있었고 그 인간 생활을 비밀하게 만들었다. 그분은 비밀한 인간 생활을 하셨다. 남편은 단지 영적인 방식이 아니라 신성한 방식으로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다. 육체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신성한 방식과 신성한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할 수 있는가? 이것은 비밀한 것이다. 우리는 신성하고도 비밀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신성하고 인간적이어야 한다. 단지 인간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밀하게 인간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거룩한 말씀 안에 계시된 것이다.

우리에게는 영성에 관한 어떤 관념이 있으며, 이 관념이 우리를 눈멀게 한다. 우리는 자신이 단지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 신성하고 비밀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오늘날 모든 믿는 이들은 신성하지만 또한 매우 비밀한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는 신성하고 매우 비밀스러워야 한다. 심지어 우리와 가까운 사람이 느끼기에 우리 안에 비밀스럽고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 비결은 바로 우리가 사람이지만 신성하게 사는 것이다. 참된 영성은 분명 우리를 신성하게 만들 것이다. 이것은 더 높은 것이다.

우리 생활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신성하고 비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분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놀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러한 지혜와 능력의 일을 얻었습니까? 이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닙니까?”(마 13:54-55) 이것은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것이 신성하고 비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해 사셨다. 그분은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셨다. 이것은 위대한 비밀이다. 디모데전서 3장 16절은 경건의 위대한 비밀은 하나님께서 육체로 나타나신 것이라고 말한다. 신성한 분께서 비밀스럽고도 인간적인 방식으로 나타나셨다.

4일

요 17:21 그들이 모두 하나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

요 17:23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온전하게 되어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또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이들이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완결되신 영이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있음으로 삼일 하나님과 연합되어야 한다.

모든 믿는 이들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신 것처럼 하나가 되어, 그들 역시 아버지와 아들 안에 거해야 한다. 아들께서 믿는 이들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신 것은 믿는 이들이 온전하게 되어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하나는 반드시 삼일 하나님의 셋 사이의 하나와 같아야 한다. 사실상, 믿는 이들의 하나는 삼일 하나님의 하나이다. 우리가 온전하게 되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삼일 하나님 안에서이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는 삼일 하나님 안에 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아들은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의 메시지에 대한 결론의 기도에서 주님은 우리의 하나가 삼일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하며,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와 완결되신 영과 함께해야 함을 밝히셨다. 이 진정한 하나는 삼일 하나님과 믿는 이들의 연합이다. 이러한 하나를 갖기 위해서 믿는 이들은 반드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신 삼일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아들 안에, 아들은 믿는 이들 안에, 믿는 이들은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신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와 완결되신 영이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삼일 하나님과 하나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은 이 비밀한 영역 안에서 수행되며, 하나님의 유기적인 구원도 이 영역 안에서 실지적으로 성취된다. 만일 우리가 이 영역 안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 안에 참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유기적인 구원을 누리지도 못할 것이다.

믿는 이들은 이 영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여겨야 한다. 또한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지 않으셨다면,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가 되지 않으셨다면, 주 영이 되지 않으셨다면, 육체 안에만 계시고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되지 않으셨다면, 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유기적인 방면에 참여하고 그것을 체험하고 누릴 길이 전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에 관한 고봉의 진리들은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새로운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할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시다. 영원부터 삼일 하나님은 하나의 영역으로서 스스로 존재하시고, 항상 존재하시며, 상호 내재하신다. 첫째 분이 둘째 분 안에 계시고, 둘째 분이 셋째 분 안에 계시며, 셋째 분은 첫째 분과 둘째 분 안에 계신다는 것을 성경이 계시하므로, 우리는 이 셋이 상호 내재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은 하나의 영역이시고, 요한복음은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믿는 이들을 이 영역 안으로 이끌기 원하신다는 것을 계시한다.

요한복음 17장에 따르면, 믿는 이들이 삼일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참된 하나이다(21절). 이러한 하나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의 증가와 확장이다. 수없이 많은 믿는 이들이 삼일 하나님 안에 있지만, 대부분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이러한 사실에 대한 체험과 누림이 없다.

우리는 또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에 관해 연구하고 그 내용을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처음에는 오직 삼일 하나님만이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셨다. 그다음 그분께서 그분의 증가를 시작하시기 위해 육체가 되셨다(요 1:1, 14). 그분은 인성을 취하셨고,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인성을 그분 자신께 더하셨다(롬 1:3-4). 신성하기만 하셨던 하나님께서 신성하고 인간적인 분이 되셨다. 결국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은 그 완결인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이상은 우리에게 성경 전체에 대한 분명한 조망을 준다.

3일

요 14:17-18 그분은 실재의 영이십니다. … 여러분은 그분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여러분과 함께 거하시고, 여러분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돌아옵니다.

요 14: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여러분이 내 안에 있으며, 내가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께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심을 강조했다. 요한복음 14장의 첫 부분에 계시된 것처럼,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신다. 요한복음 14장 16절부터 18절까지에는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말씀뿐 아니라 또한 그 영에 관한 말씀이 있다. 첫 번째 보혜사는 육체를 입으신 그리스도이셨고, 또 다른 보혜사는 실재의 영이시다. 요한복음 14장 17절에서 실재의 영이신 ‘그분’은 18절에서 주님 자신인 ‘나’가 되신다. 이것은 육체를 입으신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여 생명 주시는 영, 즉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지 영적인 일만이 아니라 비밀한 일이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 주 예수님은 ‘그날’을 말씀하셨다. ‘그날’은 그분의 부활의 날이며(요 20:19), 그날 그분은 공기화되신 그리스도, 즉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러므로 ‘그날’은 사실상 ‘부활의 날’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4장 20절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뿐만 아니라 믿는 이들도 포함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을 언급한다.

우리 모두는 단지 삼일 하나님이라는 영역이 아니라,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14장 16절부터 18절까지는 또 다른 보혜사이신 실재의 영에 관하여 말하는데, 실재의 영은 믿는 이들 안에서 아들의 임재로 실재화되신 아들의 실재이시다. 그 영은 아들의 실재이시며, 우리 안에 있는 아들의 임재는 그 영이다.

아들께서 부활하신 날, 곧 아들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신(고전 15:45하) 날 밤에 그분은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요 20:22). 만일 그분께서 그 영이 아니시라면 어떻게 숨을 내쉬시며 제자들에게 그 영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겠는가?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는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신 것과, 믿는 이들이 아들 안에 있는 것과, 아들께서 믿는 이들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 이전에 그분께는 제자들에게 밝히실 많은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제자들은 그 당시에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었는데(요 16:12), 그 이유는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을 받지 않았고,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은 실재의 영께서 오시면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 안에 있게 될 제자들을 인도하시어, 공기 같은 영이시며 완결되신 영이신 이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모든 실재 안으로 그들을 이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실재의 영은 그리스도께 들으신 것을 말씀하시며, 그것을 로마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신약 스물두 권의 서신서들 안에서 제자들에게 선포하셨다.

아버지께서 가지신 모든 것은 아들의 소유이며, 아들 안에 체현된다.

그 영은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을 받으셔서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재 안에 있고,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있는) 제자들에게 선포하신다. 이것은 교회들을 산출하기 위한 것인데, 이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어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표현함으로 영원토록 그분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요 16:14-15). 먼저 만물은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 후에 아버지께서 소유하셨던 모든 것이 아들의 소유가 되었다. 그다음에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을 그 영께서 들으시고 받으셨으며, 그 영께서 이 모든 것을 믿는 이들에게 선포하신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영원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전달이다.

2일

고전 15:45 …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빌 1:19 왜냐하면 여러분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이러한 일이 결국에는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을 나는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께서 완결되신 영이 되셨음을 계시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영원부터 동일하시다. 그분은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체가 되셨음을 계시한다(요 1:14). 이것이 변하신 것이 아니란 말인가? 더욱이 육체를 입으신 마지막 아담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먼저 하나님은 육체 되심을 통해 육체가 되셨다는 점에서 변하셨다. 그런 다음 부활 안에서 그분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는 점에서 한 번 더 변하셨으며, 바로 이 생명 주시는 영은 완결되신 영이시다.

그 영은 완결되셨고,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 곧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가 되셨다. 따라서 우리는 완결되신 영과 이러한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며 상호 내재하시는데, 이러한 분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 되신다. 비밀한 영역이신 삼일 하나님 그분 자신께는 ‘복잡한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는 여러 ‘복잡한 것들’이 존재하며, 그 모든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

나의 영역은 중국이나 미국이 아니다. 나의 영역은 ‘복잡하시고 이해하기 어려우신’ 삼일 하나님이다. 나는 여기에 아버지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아들과, 완결되신 영과 함께 있다. 내가 이러한 삼일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나는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가지고 있다. 내게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필요하다면, 나는 이 영역 안에서 내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발견한다. 내게 부활이 필요하다면, 이 영역 안에서 나는 이미 부활했다. 이러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한다!

이제 요한복음 14장에 계시된,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에 대해 고려해 보자. 1절은 “여러분은 마음에 근심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영역에서 근심하는가? 우리는 세상인 이 땅 위에서(요 16:33), 곧 물질적인 영역 안에서 근심한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주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고’(직역하면, 안으로 믿어 들어오고―각주 참조) 또 나를 믿으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사용된 ‘안으로(into)’라는 전치사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근심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 안에 있기 때문이며, 이 근심을 해소하는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 들어가 그분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영역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세상 곧 물질적인 영역인데, 이 영역 안에 온갖 근심이 있다. 다른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라는 영역 곧 삼일 하나님이라는 비밀한 영역이며, 이 영역 안에는 평안이 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주 예수님은 “내가 여러분에게 이러한 말들을 한 것은 여러분이 내 안에서 평안을 얻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여러분이 환난을 당하나, 용기를 내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물질적인 영역(세상)과 비밀한 영역(나)을 본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 들어가는 것이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들을 없애시고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며 우리의 옛사람을 끝내지 않으셨다면, 또한 그분께서 부활하심으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지 않으셨다면, 그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그분께로 이끄실 어떤 길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그분 안으로 믿어 들어오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던(비교 요 14:1) 그 장소에 있었다면, 우리는 “주님, 저는 당신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당신 안으로 믿어 들어가는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절들이 밝혀 주듯이, 우리가 그분 안으로 들어가려면 그분께서 죽고 부활하셔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셔야만 했다. 그래야만 우리가 그분 안으로 믿어 들어가고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다.

신언노트, 2023 08 13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물질적인 영역과
비밀한 영역에 관한
분명한 조망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인도하는 동역자들과 장로들은
주님의 회복이
그들의 어깨 위에 있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주님의 회복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달려 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무거운 부담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은
이 시대를 알아야 하고
이 시대가
무지한 시대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인 신학에 의해
눈멀어 있고
제한받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현재 있는 영역보다
더 높은 영역, 범위, 왕국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음을
말할 부담이 있다.
이 더 높은 영역이 바로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의
비밀한 영역이다.

삼일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는
스스로 존재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며,
신성한 삼일의 셋은
서로 안에 거하시고
상호 내재하신다.
요한복음 14장
10절과 11절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신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체현되시고
아들은
아버지의 체현이 되셔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곧 삼일 하나님이라는 영역을
형성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 안에 살 수 있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은 사실상,
단순히 삼일 하나님이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다.

완결되신 영은
올리브기름 한 힌에
네 가지 향료와
그 효능을 더해 만들어진
복합물인
바르는 관유로 예표된
복합되신 영이시다
(출 30:23-25).
그 영은
완결되시기 전에
하나님의 영이셨다.
육체 되심을 통해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다.

요한복음 7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사람이신
주 예수님께서
장막절을 지내러
올라가신 장면을
볼 수 있다.
장막절 끝 날,
곧 큰 날에
그분께서 서셔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나에게로 와서
마시십시오.
나를 믿는 사람은
… 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요 7:37-38)라고 외치셨다.
이 책의 저자인
요한은
그다음 절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제시한다.
“…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
(39절)
요한은 어떻게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는가?
물론 창세기에
하나님의 영께서 계셨지만,
복합되고 완결되신 영이신
‘그 영’은
요한복음 7장 39절에서는
‘아직 계시지 않았다’.
사람이신 예수님은
부활 안에서
영광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그 영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까지는
‘아직 계시지 않았다’.
육체를 입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
곧 생명을 공급하시는 영이 되셨다.

이제 우리는
그 영께서
완결되신 역사에 관하여
무언가를 볼 수 있다.
비록 이미
하나님의 영과 여호와의 영과 성령께서
계셨지만,
요한복음 7장에서
생명을 주시는 영은 ‘아직’
계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께서 아직
사람의 죄 때문에
죽음을 통과하지 않으셨고,
아직 부활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7장의 때에
그분은 여전히
육체를 입고 계셨으므로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의 생명이 되실 수 없었다.
그러나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고,
이제 그분은
믿는 이들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인성,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능,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능력과
연합되셨다.
이러한 연합의 산물이
복합되시고 완결되신 영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물질적인 영역과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에 관한
분명한 조망, 곧 이상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땅에 속한 것과 하늘에 속한 것,
법리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비밀한 것이
현저히 대조된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음으로써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을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어떤 영역, 범위, 왕국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영역은
우리가 지금 있는 영역보다
훨씬 더 높다.
훨씬 더 높은 이 영역이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다.

우리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을 봄으로써
이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
영적인 일들에서는
보는 것이
들어가는 것이다.

삼일 하나님 자신이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시다.

삼일 하나님,
곧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며,
동시에 존재하시고,
상호 내재하신다.
이러한 분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바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시며,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서로 안에 거하신다.

요한복음 14장
10절과 11절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신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체현되시고
아들은
아버지의 체현이 되시어,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곧 삼일 하나님이라는 영역을
형성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 안에 살 수 있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은 사실상,
단순히 삼일 하나님이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께서
완결되시고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복합되신 영이 되셨음을
계시한다.

‘완결되신 영’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영께서
과정을 거치시어
완결되신 영이 되셨다는 것을
함축한다
― 요 7:39.

완결되신 영은
바르는 기름으로 예표된
복합되신 영이시다.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인성,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능,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능력과
연합되셨다.

이러한 연합의 산물이
복합되시고 완결되신 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께서
완결되신 영이 되셨음을
계시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영원부터 동일하시다.
그분은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체가 되셨음을
계시한다(요 1:14).
이것이
변하신 것이 아니란 말인가?
더욱이 육체를 입으신
마지막 아담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먼저 하나님은
육체 되심을 통해
육체가 되셨다는 점에서
변하셨다.
그런 다음 부활 안에서
그분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는 점에서
한 번 더 변하셨으며,
바로 이 생명 주시는 영이
완결되신 영이시다.

그 영은
완결되셨고,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
곧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가 되셨다.
따라서 우리는
완결되신 영과
이러한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신성한 삼일의 셋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며
상호 내재하시는데,
이러한 분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 되신다.
비밀한 영역이신
삼일 하나님 그분 자신께는
‘복잡한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는
여러 ‘복잡한 것들’이 존재하며,
그 모든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

나의 영역은
중국이나 미국이 아니다.
나의 영역은
‘복잡하시고 이해하기 어려우신’
삼일 하나님이다.
나는 여기에
아버지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아들과,
완결되신 영과
함께 있다.
내가
이러한 삼일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나는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가지고 있다.
내게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필요하다면,
나는
이 영역 안에서
내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발견한다.
내게 부활이 필요하다면,
이 영역 안에서 나는
이미 부활했다.
이러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한다!

이제 요한복음 14장에 계시된,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에 대해
고려해 보자.
1절은
“여러분은
마음에 근심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영역에서 근심하는가?
우리는
세상인 이 땅 위에서,
곧 물질적인 영역 안에서
근심한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주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고’
(직역하면,
안으로 믿어 들어오고)
또 나를 믿으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사용된
‘안으로(into)’라는 전치사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근심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 안에 있기 때문이며,
이 근심을 해소하는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 들어가
그분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영역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세상 곧 물질적인 영역인데,
이 영역 안에
온갖 근심이 있다.
다른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라는 영역
곧 삼일 하나님이라는 비밀한 영역이며,
이 영역 안에는
평안이 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주 예수님은
“내가
여러분에게
이러한 말들을 한 것은
여러분이
내 안에서
평안을 얻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여러분이
환난을 당하나,
용기를 내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물질적인 영역(세상)과
비밀한 영역(나)을 본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 들어가는 것이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들을 없애시고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며
우리의 옛사람을
끝내지 않으셨다면,
또한 그분께서
부활하심으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지 않으셨다면,
그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그분께로 이끄실
어떤 길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그분 안으로
믿어 들어오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던
그 장소에 있었다면,
우리는
“주님,
저는
당신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당신 안으로
믿어 들어가는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절들이
밝혀 주듯이,
우리가
그분 안으로 들어가려면
그분께서
죽고 부활하셔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셔야만 했다.
그래야만 우리가
그분 안으로
믿어 들어가고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다.

완결되신 영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의 과정을 통과하신
삼일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가 되신 것을
계시한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심으로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가 되셨다.

따라서 우리는
완결되신 영과
이러한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께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심을 강조했다. 요한복음 14장의 첫 부분에 계시된 것처럼,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신다. 요한복음 14장 16절부터 18절까지에는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말씀뿐 아니라 또한 그 영에 관한 말씀이 있다. 첫 번째 보혜사는 육체를 입으신 그리스도이셨고, 또 다른 보혜사는 실재의 영이시다. 요한복음 14장 17절에서 실재의 영이신 ‘그분’은 18절에서 주님 자신인 ‘나’가 되신다. 이것은 육체를 입으신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여 생명 주시는 영, 즉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지 영적인 일만이 아니라 비밀한 일이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 주 예수님은 ‘그날’을 말씀하셨다. ‘그날’은 그분의 부활의 날이며(요 20:19), 그날 그분은 공기화되신 그리스도, 즉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러므로 ‘그날’은 사실상 ‘부활의 날’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4장 20절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뿐만 아니라 믿는 이들도 포함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을 언급한다.

우리 모두는 단지 삼일 하나님이라는 영역이 아니라,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14장 16절부터 18절까지는 또 다른 보혜사이신 실재의 영에 관하여 말하는데, 실재의 영은 믿는 이들 안에서 아들의 임재로 실재화되신 아들의 실재이시다. 그 영은 아들의 실재이시며, 우리 안에 있는 아들의 임재는 그 영이다.

아들께서 부활하신 날, 곧 아들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신(고전 15:45하) 날 밤에 그분은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요 20:22). 만일 그분께서 그 영이 아니시라면 어떻게 숨을 내쉬시며 제자들에게 그 영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겠는가?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는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신 것과, 믿는 이들이 아들 안에 있는 것과, 아들께서 믿는 이들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 이전에 그분께는 제자들에게 밝히실 많은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제자들은 그 당시에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었는데(요 16:12), 그 이유는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을 받지 않았고,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은 실재의 영께서 오시면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 안에 있게 될 제자들을 인도하시어, 공기 같은 영이시며 완결되신 영이신 이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모든 실재 안으로 그들을 이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실재의 영은 그리스도께 들으신 것을 말씀하시며, 그것을 로마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신약 스물두 권의 서신서들 안에서 제자들에게 선포하셨다.

아버지께서 가지신 모든 것은 아들의 소유이며, 아들 안에 체현된다.

그 영은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을 받으셔서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재 안에 있고,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있는) 제자들에게 선포하신다. 이것은 교회들을 산출하기 위한 것인데, 이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어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표현함으로 영원토록 그분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요 16:14-15). 먼저 만물은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 후에 아버지께서 소유하셨던 모든 것이 아들의 소유가 되었다. 그다음에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을 그 영께서 들으시고 받으셨으며, 그 영께서 이 모든 것을 믿는 이들에게 선포하신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영원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전달이다.

모든 믿는 이들이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완결되신 영이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있음으로 삼일 하나님과 연합되어야 한다.

모든 믿는 이들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신 것처럼 하나가 되어, 그들 역시 아버지와 아들 안에 거해야 한다. 아들께서 믿는 이들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신 것은 믿는 이들이 온전하게 되어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하나는 반드시 삼일 하나님의 셋 사이의 하나와 같아야 한다. 사실상, 믿는 이들의 하나는 삼일 하나님의 하나이다. 우리가 온전하게 되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삼일 하나님 안에서이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는 삼일 하나님 안에 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아들은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의 메시지에 대한 결론의 기도에서 주님은 우리의 하나가 삼일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하며,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와 완결되신 영과 함께해야 함을 밝히셨다. 이 진정한 하나는 삼일 하나님과 믿는 이들의 연합이다. 이러한 하나를 갖기 위해서 믿는 이들은 반드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신 삼일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아들 안에, 아들은 믿는 이들 안에, 믿는 이들은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신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와 완결되신 영이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삼일 하나님과 하나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은 이 비밀한 영역 안에서 수행되며, 하나님의 유기적인 구원도 이 영역 안에서 실지적으로 성취된다. 만일 우리가 이 영역 안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 안에 참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유기적인 구원을 누리지도 못할 것이다.

믿는 이들은 이 영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여겨야 한다. 또한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지 않으셨다면,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가 되지 않으셨다면, 주 영이 되지 않으셨다면, 육체 안에만 계시고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되지 않으셨다면, 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유기적인 방면에 참여하고 그것을 체험하고 누릴 길이 전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에 관한 고봉의 진리들은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새로운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할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시다. 영원부터 삼일 하나님은 하나의 영역으로서 스스로 존재하시고, 항상 존재하시며, 상호 내재하신다. 첫째 분이 둘째 분 안에 계시고, 둘째 분이 셋째 분 안에 계시며, 셋째 분은 첫째 분과 둘째 분 안에 계신다는 것을 성경이 계시하므로, 우리는 이 셋이 상호 내재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은 하나의 영역이시고, 요한복음은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믿는 이들을 이 영역 안으로 이끌기 원하신다는 것을 계시한다.

요한복음 17장에 따르면, 믿는 이들이 삼일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참된 하나이다(21절). 이러한 하나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의 증가와 확장이다. 수없이 많은 믿는 이들이 삼일 하나님 안에 있지만, 대부분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이러한 사실에 대한 체험과 누림이 없다.

우리는 또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에 관해 연구하고 그 내용을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처음에는 오직 삼일 하나님만이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셨다. 그다음 그분께서 그분의 증가를 시작하시기 위해 육체가 되셨다(요 1:1, 14). 그분은 인성을 취하셨고,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인성을 그분 자신께 더하셨다(롬 1:3-4). 신성하기만 하셨던 하나님께서 신성하고 인간적인 분이 되셨다. 결국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은 그 완결인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이상은 우리에게 성경 전체에 대한 분명한 조망을 준다.

우리의 체험에서 우리는 실지로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신성한 출생을 통하여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의 일부가 된다. 거듭남을 통해 우리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요 3:15), 본성(엡 1:4, 벧후 1:4), 생각(엡 4:23, 빌 2:5), 존재(고후 3:18하, 엡 3:8), 형상(고후 3:18상, 롬 8:29), 영광(롬 8:30, 히 2:10), 아들의 자격(엡 1:5, 롬 8:23), 나타남(롬 8:19), 모양(요일 3:2)에 참여함으로써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건축됨으로써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의 일부가 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있을수록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더 있게 된다.

믿는 이들은 한 실체로 섞여 그리스도의 비밀한 몸이 된다.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이자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살아야 한다.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 안에 살 수 있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은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영역 안에 살기를 배워야 한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우리는 유일하고도 모든 것을 포함한 복이신 그 영을 받는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우리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전달을 받고 그분의 하늘에서의 사역의 공급을 받는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유기적인 구원을 체험한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우리는 신성한 종(種)의 영역인 하나님의 왕국 안에 산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우리는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 산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우리는 생명의 법의 자동적인 기능에 따라 자연스럽고 애쓰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한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우리는 계시된 신성한 실재의 표현인 진실함의 생활을 한다.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우리는 하나를 지키기 위해,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과 연합된다.

참된 하나는 삼일 하나님 안에 있다.

진정한 하나는 믿는 이들과 삼일 하나님의 연합이다.

이러한 하나를 갖기 위해 믿는 이들은 반드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신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믿는 이들은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삼일 하나님과 하나이다.

주님은 기도의 사람으로서 사셨다. 그분은 평범한 기도를 드리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살지 않으셨고, 일반적인 기도를 드리는 일반적인 사람으로서 살지 않으셨으며, 하나님께 종교적인 방식으로 기도하는 소위 경건한 사람, 독실한 사람으로서도 살지 않으셨고, 신성한 것들을 달성하고 획득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도 살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분은 육체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은밀하신 하나님께 기도하신 사람이셨다. 사복음서는 그분께서 종종 산에 올라가시거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음을 말해 준다.

예수님은 육체 안에 계신 한 사람이셨지만, 신성하고 비밀한 방식과 영역 안에서 비밀스러우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주님의 모든 기도는 신성한 사실들이다. 우리는 자신의 기도가 신성한 사실들인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어떤 아내는 남편이 직장을 잃어서 주님께 그녀의 가정을 돌봐 주시기를 기도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기도는 신성하지 않다. 그 대신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다. “주님, 저는 한 주부로서 우리가 당신의 손 아래 있는 것으로 인해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이것이 신성한 기도이다.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주님의 기도를 고려해 봄으로써 우리는 신성한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위해 기도할 수 있지만, 신성한 방식으로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적인 기도가 아닌 신성한 기도를 해야 한다. 비록 우리는 사람이지만, 사람들이 느끼기에 우리 안에 비밀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학급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이나 동년배들이 느끼기에 우리 안에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은밀하고 비밀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기도를 하신 분은 육체 안에 계신 한 사람이신 나사렛 사람 예수님이셨지만, 그분의 기도는 비밀했다.

기도의 사람이신 첫 번째 하나님-사람의 본은 우리가 모든 것을 신성한 방식으로 행해야 함을 보여 준다. 심지어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도 신성해야 하며 단지 인간적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신발을 사고 머리를 자르는 방식도 신성해야 한다. 첫 번째 하나님-사람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은 그분의 기도였다. 그분의 모든 기도는 신성했지만, 그 기도들은 인간 생활 안에 있었고 그 인간 생활을 비밀하게 만들었다. 그분은 비밀한 인간 생활을 하셨다. 남편은 단지 영적인 방식이 아니라 신성한 방식으로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다. 육체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신성한 방식과 신성한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할 수 있는가? 이것은 비밀한 것이다. 우리는 신성하고도 비밀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신성하고 인간적이어야 한다. 단지 인간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밀하게 인간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거룩한 말씀 안에 계시된 것이다.

우리에게는 영성에 관한 어떤 관념이 있으며, 이 관념이 우리를 눈멀게 한다. 우리는 자신이 단지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 신성하고 비밀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오늘날 모든 믿는 이들은 신성하지만 또한 매우 비밀한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는 신성하고 매우 비밀스러워야 한다. 심지어 우리와 가까운 사람이 느끼기에 우리 안에 비밀스럽고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 비결은 바로 우리가 사람이지만 신성하게 사는 것이다. 참된 영성은 분명 우리를 신성하게 만들 것이다. 이것은 더 높은 것이다.

우리 생활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신성하고 비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분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놀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러한 지혜와 능력의 일을 얻었습니까? 이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닙니까?”(마 13:54-55) 이것은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것이 신성하고 비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해 사셨다. 그분은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셨다. 이것은 위대한 비밀이다. 디모데전서 3장 16절은 경건의 위대한 비밀은 하나님께서 육체로 나타나신 것이라고 말한다. 신성한 분께서 비밀스럽고도 인간적인 방식으로 나타나셨다.

모든 믿는 이들은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살아야 하고, 신성하고 비밀한 사람 곧 인간적이면서도 신성하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신성하면서도 인간적이어야 한다. 즉, 단지 인간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밀하게 인간적이어야 한다.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이 신성하고 비밀해야 한다.

신성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통하여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 예수님처럼 우리는 눈에 보이는 면에서는 물질적이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면에서는 신성하고 비밀해야 하며, 물질적인 영역과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동시에 살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들에 의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장차 올 심판에 대한 이해도 없지만, 깨어 있고 맑은 생각을 가진 일부 믿는 이들은 데려가질 것이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의 징조가 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40절에 있는 두 남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임이 분명하고, 41절에 있는 두 여자도 주님 안에 있는 자매들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42절의 말씀에 의해 암시되어 있는데,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느 날 우리의 주님께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와 ‘여러분의 주님’이라는 말은 40절과 41절에 있는 두 남자와 두 여자가 믿는 이들임을 입증해 준다. 주님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지 않으실 것이며, 더욱이 그분은 구원받지 않은 이들의 주님도 아니시다.

데려가지는 것은 대환난 전에 휴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휴거는 주님의 오심의 징조이다.

두 남자가 밭에서 일하고 있고 두 여자가 맷돌질하고 있는 모습은 매우 흥미롭다. 밭에서 일하는 것과 맷돌질하는 것은 둘 다 먹기 위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공부하고 일하며, 우리도 역시 공부하고 일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마취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그보다 우리는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존을 유지하는 목적은 십자가의 길을 취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관심은 교육이나 고용이나 사업에 있지 않다.

어떤 젊은이들은 이 말을 들을 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들으니 얼마나 기쁜가! 더 이상 공부나 일에 주의하지 말자. 우리의 모든 시간을 기도하고 서로 교통하는 데 들이자.” 그러한 태도는 그릇된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40절에서 형제들은 농사짓고 있었고, 41절에서 자매들은 맷돌질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곡물을 맷돌질하는 것은 매우 고된 일이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안이한 직업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 마태복음 24장 38절에 있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세상적이지만, 40절과 41절에 있는 농사짓는 것과 맷돌질하는 것은 거룩한 것이다. 만일 데려가진 이들이 거룩한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들이 휴거되었을 리가 없다. 때로 어떤 자매들이 거룩함에 관해 많이 말할수록, 그들은 덜 거룩해진다. 그런 자매들은 남편과 자녀와 접대해야 하는 손님들에게 훌륭한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요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는 편이 더 낫다. 이렇게 한다면 그 자매들은 더 거룩해질 것이다. 어떤 자매들은 거룩함에 관해 교통하는 법은 알고 있지만, 요리를 잘하는 법은 모른다. 그들은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변명하면서, 항상 가족을 위해 맛없는 음식만 요리해 준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나면 그들의 남편과 자녀들에게 그러한 음식에 대한 불만이 생긴다. 이런 자매들이 거룩해지는 것에 관해 더 말할수록, 그들의 남편과 자녀들은 덜 거룩해진다. 우리에게는 고운 가루를 산출하기 위해 맷돌질하는 더 많은 거룩한 자매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세상적인 것에 마취되어서는 안 되고, 합당하게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주 예수님께는 뚜렷한 목적이 있으셨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휴거되기를 기대하면서 반드시 우리의 일상적인 의무들에 매우 신실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원하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합당하게 균형 잡힌 인간 생활이지, 영적인 것에만 골몰하며 남들이 자기를 돌봐 주기를 바라는 수도승의 생활이 아니다. 휴거될 사람은 바로 밭에서 일하고 있는 형제들과 맷돌질하고 있는 자매들이다.

밭에 있는 두 남자 가운데 한 명은 데려가지고 다른 한 명은 남겨진다. 맷돌질하고 있는 두 여자 가운데 한 명은 데려가지고 다른 한 명은 남겨진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생명의 문제에 있어서 그들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데려가지는 이는 성숙한 사람이고, 남겨지는 이는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생명이 차이를 만든다. 생명이 성숙한 이들인 이기는 이들의 휴거는 남겨진 이들에게 하나의 징조가 될 것이다.

“그때에 두 남자가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 둡니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 둡니다.” ― 마 24:40-41.

두 남자와 두 여자는 주님께서 두 번째 오실 때 살아 있을 믿는 이들을 대표한다.

데려가지는 것은 대환난 전에 휴거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40절과 41절은 비밀한 휴거, 곧 준비된 이들이자 성숙한 이들의 휴거를 가리킨다.

데려가진 사람과 남겨진 사람의 차이는 생명의 성숙에 있다. 한 사람은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살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마태복음 24장 40절부터 42절까지에 있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고 휴거되기를 기대하는 동안 우리의 일상적인 의무들에 신실해야 하고, 합당하게 균형 잡힌 인간 생활을 하는 동시에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1일

요 14:10-11 …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믿으십시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 …

요 7:39 이것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받을 그 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물질적인 영역과 비밀한 영역에 관한 분명한 조망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인도하는 동역자들과 장로들은 주님의 회복이 그들의 어깨 위에 있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주님의 회복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달려 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무거운 부담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은 이 시대를 알아야 하고 이 시대가 무지한 시대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인 신학에 의해 눈멀어 있고 제한받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현재 있는 영역보다 더 높은 영역, 범위, 왕국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음을 말할 부담이 있다. 이 더 높은 영역이 바로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의 비밀한 영역이다.

삼일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며,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서로 안에 거하시고 상호 내재하신다. 요한복음 14장 10절과 11절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신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체현되시고 아들은 아버지의 체현이 되시어,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곧 삼일 하나님이라는 영역을 형성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 안에 살 수 있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은 사실상, 단순히 삼일 하나님이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다.

완결되신 영은 올리브기름 한 힌에 네 가지 향료와 그 효능을 더해 만들어진 복합물인 바르는 관유로 예표된 복합되신 영이시다(출 30:23-25). 그 영은 완결되시기 전에 하나님의 영이셨다. 육체 되심을 통해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다.

요한복음 7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사람이신 주 예수님께서 장막절을 지내러 올라가신 장면을 볼 수 있다. 장막절 끝 날, 곧 큰 날에 그분은 서시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나에게로 와서 마시십시오. 나를 믿는 사람은 … 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입니다.”(요 7:37-38)라고 외치셨다. 이 책의 저자인 요한은 그다음 절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제시한다. “…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39절) 요한은 어떻게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는가? 물론 창세기에 하나님의 영께서 계셨지만, 복합되고 완결되신 영이신 ‘그 영’은 요한복음 7장 39절에서는 ‘아직 계시지 않았다’. 사람이신 예수님은 부활 안에서 영광을 받으셨다(눅 24:26). 그러므로 그 영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까지는 ‘아직 계시지 않았다’. 육체를 입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 곧 생명을 공급하시는 영이 되셨다.

이제 우리는 그 영께서 완결되신 역사에 관하여 무언가를 볼 수 있다. 비록 이미 하나님의 영과 여호와의 영과 성령께서 계셨지만, 요한복음 7장에서 생명을 주시는 영은 ‘아직’ 계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께서 아직 사람의 죄 때문에 죽음을 통과하지 않으셨고, 아직 부활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7장의 때에 그분은 여전히 육체를 입고 계셨으므로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의 생명이 되실 수 없었다. 그러나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고, 이제 그분은 믿는 이들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인성,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능,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능력과 연합되셨다. 이러한 연합의 산물이 복합되시고 완결되신 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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