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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통을 알기를 열망했다.

그리스도께는 고난과 죽음이 먼저 오고 나서 부활이 뒤따랐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분의 부활 능력이 먼저 오며 그다음에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 뒤따른다.

우리는 먼저 그분의 부활 능력을 받는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 능력으로 그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두 범주가 있다. 한 범주는 구속을 성취하기 위한 고난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께서 이미 완성하셨다. 다른 한 범주는 교회를 산출하고 건축하기 위한 고난이다. 이것은 사도들과 믿는 이들이 채울 필요가 있는 고난이다.

우리는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없지만, 몸을 산출하고 건축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는 구속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고, 밀알이신 그리스도는 재산출과 건축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

주님은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로서, 부활 안에서 그분의 영원한 생명을 많은 밀알 속에 해방하시기 위하여, 죽음을 통해 그분의 혼생명을 잃으셨다.

하나의 밀알은 몸의 건축을 위해 필요한 모든 고난을 완성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므로 많은 밀알들인 우리가 하나의 밀알이 고난받으신 것과 같이 고난받아야 한다.

많은 밀알인 우리 역시 부활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죽음을 통하여 혼생명을 잃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을 섬기기 위하여 그분을 따르는 것이며, 우리의 혼생명을 잃고 그분의 부활 안에서 생활하는 이 길에서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다.

교회가 생겨나고 증가하는 길은 사람의 영광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에 의한 것이다.

우리의 변화를 위한 고난과 몸을 위한 고난에는 차이가 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은 변화를 위한 고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과 골로새서 1장 24절을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이 말한 고난이 몸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임을 보게 될 것이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그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그분의 고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몸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에 대해 말했다. 이러한 표현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생활의 틀로 취하기를 갈망했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김, 그리스도를 얻음, 그분 안에서 발견됨, 그분을 앎,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앎,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앎은 모두 한 가지,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의 틀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빌립보서 3장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문제이다.

우리는 이러한 죽음의 틀 안에 넣어졌고, 이제 우리는 이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의 능력은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를 이끌며, 우리를 짊어지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틀 안에 넣는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기 위해 인간 생명을 계속적으로 죽음에 넣으신 그리스도의 체험을 가리킨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셨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심으로 주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계셨고 하나님을 사셨다.

그분은 항상 자신의 인간 생명을 죽음에 넘기셨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이 흘러나올 수 있었다.

그분은 사시면서 또한 죽고 계셨다. 즉 새 창조물 안에 있는 삶을 사시기 위해 옛 창조물에 대하여 죽고 계셨다. 이것이 빌립보서 3장 10절에 나오는 ‘그분의 죽음’의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생활의 틀로 취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하는 틀이다. 이것은 밀가루 반죽이 빵틀에 넣어져 그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과 흡사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 안에 두셨고, 우리가 이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도록 날마다 우리를 형태 짓고 계신다.

우리의 생활은 이러한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곧 신성한 생명을 살기 위해 우리의 인간 생명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죽음에 넘긴다면, 우리 안에 또 다른 생명 곧 신성한 생명이 있다는 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생명이 해방될 것이고, 그럴 때 우리는 체험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 안에서 타고난 사람은 죽음당하고,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히며, 자아는 무력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환경이 우리를 이 틀 안으로 밀어 넣도록 허락한다면, 우리의 일상생활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습으로 형태 지어질 것이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수록 우리는 아버지를 더욱더 영광스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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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마 16:24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십시오.

롬 6:3-4 그리스도 예수님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장사된 것은 …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 행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 안에 두셨고, 우리가 이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도록 날마다 우리를 형태 짓고 계신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 생명에 대해 죽고 신성한 생명을 삶으로써, 이러한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 안에서 타고난 생명은 죽음당하고,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히며, 자아는 무력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환경이 우리를 이 틀 안으로 밀어 넣도록 허락한다면, 우리의 일상생활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습으로 형태 지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양에는 타고난 사람이나 옛사람이나 자아에 속한 어떤 표시가 없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할 때, 그분의 죽음이 우리를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습으로 형태 짓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형태 지어지는 것을 통해 우리의 타고난 생명과 옛사람과 자아가 처리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타고난 사람과 함께 타고난 생명과 옛사람과 자아가 계속적으로 죽음에 넘겨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는 타고난 생명이나 옛사람이나 자아에 속한 어떤 활동이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사람이나 옛사람이나 자아 안에서 행동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형상을 지니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이 형상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의 형태이자 틀이며, 우리가 이 틀 안에 넣어진 ‘반죽’이라는 사실에 인상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형태 곧 틀에는 타고난 사람과 옛사람과 자아가 없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에 의해 배제된다. 이와 같이 틀에 넣어져 형태 지어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체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게 되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써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아래 타고난 생명을 부인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가장 먼저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아래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부인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매일의 생활에서 우리는 타고난 생명으로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모든 것에서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부인해야 한다. 이것은 죽음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하나의 틀이 있는데, 이 틀은 죽음 곧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에는 죽음의 요소, 즉 그분 자신의 생명을 부인하는 것이 있다. 이 땅에서 사셨을 때 그분은 매 순간 자신의 생명을 부인하시고 아버지의 생명에 의해 사셨다. 비록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이 땅에서 그분의 여정의 종착역이었지만, 그분은 삼십삼 년 반의 인생 내내 자신을 부인하고 아버지의 생명에 의해 사심으로 십자가의 죽음 아래 사셨다. 이것 또한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 안에 있는 위대한 요소이다.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여쭈어보아야 한다. “주님, 사랑하는 이가 저입니까, 아니면 당신께서 제 안에서 저로부터 저를 통하여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자신에 의해 사랑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에 의한 사랑이며, 죽음과 부활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타고난 생명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에 의해 산다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갈 2:20)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말에 부합하는 이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5일

빌 3:1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갈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

요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라는 표현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생활의 틀로 취하기를 갈망했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할 틀인데, 이것은 반죽이 틀에 넣어져 그것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과 흡사하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 생활을 하실 때 그러셨던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 곧 십자가 아래서의 생활을 계속했다. 우리는 이러한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사시기 위해 인간 생명을 계속적으로 죽음에 넣으신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생활은 인간 생명에 대해 죽고 신성한 생명을 삶으로써 이러한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체험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의 땅에서의 생애 전체에 걸쳐 일어났다. 그분은 사시면서 또한 죽고 계셨다. 즉 새 창조물 안에 있는 삶을 사시기 위해 옛 창조물에 대하여 죽고 계셨다. 이것이 빌립보서 3장 10절에 나오는 ‘그분의 죽음’의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우리 매일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죽음에 넘기고 그것에 따라 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죽음에 넘긴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또 다른 생명인 신성한 생명이 있다는 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의 외적인 타고난 생명이 죽음에 넘겨질 때, 내적인 신성한 생명이 해방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체험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는 네 가지 중요한 항목이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아는 것,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아는 것,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실지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아는 것과 관련된다. ‘같은 형상을 이루어’라는 말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게 되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써 그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고 그분의 고난의 교통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기반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기반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위치로 인도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할 때, 우리는 그분을 알게 된다.

몸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때,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셨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타고난 생명을 끊임없이 죽음에 넘기셨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계셨고 하나님을 사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자 할 때, 우리 또한 오직 그분을 향하여 살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참으로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의 죽음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우리는 그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할 것이다. 이것이 체험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길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즉 그분의 부활 능력 안에서 그분을 체험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얻는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심으로 항상 그분의 인간 생명을 죽음에 넘기시어 그분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이 흘러나올 수 있게 하셨다.

4일

빌 3:1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롬 6:5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 안에서 그분과 연결되어 자랐다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 안에서도 그분과 연결되어 자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겨야 하는데, 그 목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는 것, 즉 율법에서 나온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우리로부터 살아 나타나신 하나님 자신인 의를 갖는 것이다(빌 3:7-9). 이 절들에서 계시된 항목들의 목적은 우리가 그분과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빌 3:10)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김, 그리스도를 얻음, 그분 안에서 발견됨, 그분을 앎,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앎,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앎은 모두 한 가지,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으로 귀결된다.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형이나 틀로 생각했다. 예를 들어, 자매들은 케이크나 쿠키를 만들 때 밀가루 반죽을 틀에 넣는다. 결국 그 밀가루 반죽은 틀 속에 눌려 넣어짐으로 그 틀의 모양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 이것이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뜻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의 틀로, 그리고 우리를 그 틀 속에 넣어져 눌리는 밀가루 반죽으로 간주한다. 그 결과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아담의 죽음은 끔찍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혐오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귀하고 사랑스럽다. 우리 모두는 그 죽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놀라운 죽음은 침례로 상징된다. 복음서들에서 주 예수님은 두 가지 침례를 체험하셨다. 첫 번째는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요단강에서 요한에 의해 받으신 침례이고, 두 번째는 그분의 사역의 말기에 십자가에서 받으신 침례이다. 두 침례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운 죽음을 상징한다.

우리에게는 능력이 충만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이신 하나님께서 계신다. 그분은 부활이요 생명이시다(요 11:25). 이분이 우리 안에 계시고, 이분의 생명은 부활 능력이다. 우리가 가난할 때 그분은 우리가 빈곤의 압력을 견딜 수 있게 하신다. 우리가 번창할 때 그분은 우리가 번영이라는 시험을 견딜 수 있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박해할 때, 그분은 내적으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견딜 수 있게 하신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할 때, 그분은 내적으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칭찬에 저항하게 하신다. 우리가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의 좋은 자질과 장점을 잃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내적 공급인 부활 능력이심을 볼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의 틀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이러한 죽음의 틀 속에 넣어진 후에, 부활 능력은 우리를 이러한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한다. 틀 속의 반죽이 구워진 후에 반죽은 틀과 같은 모양이 된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은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를 이끌며, 우리를 짊어지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틀 안에 넣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형상을 지닌다.

우리는 사복음서에 기록된 나사렛 사람 예수님의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죽음의 틀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하나님과 별개인 모든 것은 죽음의 틀에 의해 끝나고 제한되었다. 주 예수님은 삼십삼 년 반 동안 이 땅에서 죽음의 그늘 아래, 즉 죽음의 틀 안에서 사셨다. 이렇게 그분은 하나님을 따르시고, 하나님을 섬기시며, 하나님을 위해 사시고, 하나님을 살아 내셨다. 오늘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를 그분의 죽음의 틀 안으로 넣는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그 영께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은 반드시 죽음에 넘겨져야 한다. 부활 생명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 안에 넣어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도록 한다.

3일

고후 3:18 그러나 우리 모두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 영에게서 비롯됩니다.

빌 4:10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을 우리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서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고난은 완성되었지만, 몸을 산출하시고 건축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한 고난도 ‘그분의 고난’이라 불린다(빌 3:10).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그분의 고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인 우리는 그분의 몸을 위해 그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알고자 한다면, 그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의 변화를 위한 고난과 몸을 위한 고난에는 차이가 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은 변화를 위한 고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과 골로새서 1장 24절을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이 말한 고난이 몸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임을 보게 될 것이다. 몸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부활 능력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 안에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더 참여하여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더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는 모든 고난이 같은 범주에 속한 것은 아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게 되는 고난에는 적어도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 종류의 고난은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고난은 모든 사람에게 온다. 타락으로 인해 창조물은 낡아졌다. 창조물은 타락했고 부패했고 썩어 가고 있다. 옛 창조물과 타락한 사람에게는 너무도 많은 재난과 질병이 있다.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은 모두 사람이며, 사람인 이상 우리는 재난을 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체험하는 두 번째 종류의 고난은 죄들과 실수에서 오는 고난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이 책임진 일들을 이행하는 데 부주의하거나 어리석다면 일종의 손실을 겪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체험하는 세 번째 범주의 고난은 예수님을 죽게 한 고난이다. 바울은 잘못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고난을 체험한 것이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그는 모든 면에서 올바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괴로움을 당하고, 혼란스러운 일을 만나며, 박해를 받고, 맞아 쓰러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수님과 그리스도의 몸과 새 언약의 사역을 위한 것이었다.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은 잘못을 하지 않았고, 이러한 특별한 고난은 그들의 어떤 실수와도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에게는 소멸되어야 할 겉사람이 있었다.

주 예수님께서 땅 위에 계실 때 그분은 어떤 실수도 하지 않으셨으며, 어떤 일에서도 잘못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께도 소멸되어야 할 겉사람이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은 형벌이나 바로잡음이나 징계가 아니다. 우리를 바로잡거나 벌하거나 징계하는 것이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의 목표가 아니다. 이는 또한 자연에서 발생하는 재난의 문제도 아니다. 그보다 그것은 우리의 타고난 사람, 즉 우리의 겉사람과 육체를 소멸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임하는 일종의 박해나 죽음의 활동이나 다루심이며, 이는 우리의 속사람이 발전되고 새로워질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다.

2일

골 1:24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받는 나의 고난을 기뻐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웁니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두 범주가 있다. 한 범주는 구속을 성취하기 위한 고난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께서 이미 완성하셨다. 다른 한 범주는 교회를 산출하고 건축하기 위한 고난이다. 이것은 사도들과 믿는 이들이 채울 필요가 있는 고난이다. 우리는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없지만, 몸을 산출하고 건축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는 구속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고, 밀알이신 그리스도는 재산출과 건축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 주님은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로서, 부활 안에서 그분의 영원한 생명을 많은 밀알 속에 해방하시기 위하여, 죽음을 통해 그분의 혼생명을 잃으셨다. 하나의 밀알은 몸의 건축을 위해 필요한 모든 고난을 완성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므로 많은 밀알들인 우리가 하나의 밀알이 고난받으신 것과 같이 고난받아야 한다. 많은 밀알인 우리 역시 부활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죽음을 통하여 혼생명을 잃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을 섬기기 위하여 그분을 따르는 것이며, 우리의 혼생명을 잃고 그분의 부활 안에서 생활하는 이 길에서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다. 교회가 생겨나고 증가하는 길은 사람의 영광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에 의한 것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제쳐 두고 십자가 아래 계속 머물 때, 부활 능력은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그 즉시 우리를 대적하여 반대가 일어날 것이고, 우리는 고난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고난이 몸의 건축을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통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고난, 즉 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의 실수로 인한 고난의 차이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이 몸의 건축을 위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예를 들어, 우리는 운전할 때 실수함으로 고난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은 실수나 부주의로 인한 결과이다. 그것은 몸을 산출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니다. 그러나 가령 여러분이 직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누리고 있다고 해 보자. 그로 인해 상사들이 여러분을 적대시하여 승진에서 탈락시키거나 해고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고난은 몸의 산출과 건축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범주의 고난은 우리의 실수와 잘못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한 범주의 고난은 우리의 증거로 인한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제쳐 두고 부활의 능력을 누릴 때, 우리의 증거는 매우 강할 것이다. 이것은 원수의 반대를 불러일으킬 것이고, 우리는 고난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고난, 즉 몸의 건축을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통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반대를 당할 때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분을 누린다. 우리가 죽음을 통과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이 더욱더 우리의 누림이 된다. 또한 우리에게 부활 능력에 대한 체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욱더 알게 된다. 바꾸어 말해서, 사복음서에 기록된 삶을 사신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삶을 다시 우리 안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알고,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알며,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안다. 그분께서 자신의 삶을 우리 안에서 반복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된다. 우리는 그분을 누리고 그분과 하나가 됨으로써 그분을 따른다. 이것은 우리가 심지어 그분의 고난받는 삶에서도 그분을 따르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신언노트, 2023 07 30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

빌립보서 3장 10절에
계시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얻는 과정은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앎으로써
그분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하고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아야 한다.
‘그분의 고난의 교통’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써
그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자신께서
탁월하시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의 부활의 생명 능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 체험하기 위하여
추구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께는
고난과 죽음이 먼저 오고 나서
부활이 뒤따랐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분의 부활 능력이 먼저 오며
그다음에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 뒤따른다.
우리는 먼저
그분의 부활 능력을 받는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 능력으로
그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런 고난은 주로
그리스도의 몸을
산출하고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 계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가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체험할 때,
우리는
부활의 모든 요소를
주입받으며,
이러한 주입으로 말미암아
몸을 위한
그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그리스도의 죽음을 체험하려면 반드시
그분의 부활을
분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앎으로써
그분의 죽음을 체험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더 참여하여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더 알게 될 것이다.

모든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교통 안으로
들어가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통을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태생적으로는
참여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많이 얻게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를 체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많이 체험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시며,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준다.

성령을 정의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신학이 아닌
실지적인 체험에 근거할 때,
성령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제쳐 둔 후에
여전히 남아 있는 그것이다.
우리에게
그 영께서 계신다면,
제한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꺼이
자신을 제쳐 두려 하지 않는다면,
그 영께서
제한되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단순히
의지를 사용하여
자신을 제쳐 놓기를
결정하기만 하면 된다.
상황이 힘들 때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죽음 아래 머물라.
여러분은
죽음이 있는 곳에 또한
부활 능력도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부활의 능력이신
그 영께서 즉시
우리 안에서 일어나실 것이고,
우리는
기쁨으로
“죽음 두렵지 않네”라고
찬송하게 될 것이다
(찬송가 362장).
우리는
갈보리에 가는 것을 누리고,
그 결과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이신
거룩한 영을 누린다.
이것이
부활 능력의 실재이다.

부활 능력의 실재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시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갈보리에 이르러야 한다.
갈보리에
놀라운 죽음,
곧 부활을 가져오는
죽음이 있다.
우리가
자아를
십자가에 둔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그것이 성령일 것이다.
이 남아 계신 분으로 인해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이다.
우리는
슬프게 눈물을 흘리면서가 아니라,
심프슨(A. B. Simpson)처럼
기쁨으로 찬송하면서
갈보리까지 갈 것이다.
우리는
부활 능력을 통해
죽음을 누릴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통을
알기를 열망했다.

그리스도께는
고난과 죽음이 먼저 오고 나서
부활이 뒤따랐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분의 부활 능력이 먼저 오며
그다음에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
뒤따른다.

우리는 먼저
그분의 부활 능력을 받는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 능력으로
그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두 범주가 있다.
한 범주는
구속을 성취하기 위한 고난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께서
이미 완성하셨다.
다른 한 범주는
교회를
산출하고 건축하기 위한 고난이다.
이것은
사도들과 믿는 이들이 채울
필요가 있는 고난이다.
우리는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없지만,
몸을
산출하고 건축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고,
밀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재산출과 건축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
주님은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로서,
부활 안에서
그분의 영원한 생명을
많은 밀알 속에
해방하시기 위하여,
죽음을 통해
그분의 혼생명을 잃으셨다.
하나의 밀알은
몸의 건축을 위해 필요한
모든 고난을
완성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므로 많은 밀알들인
우리가
하나의 밀알이
고난받으신 것과 같이
고난받아야 한다.
많은 밀알인
우리 역시
부활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죽음을 통하여
혼생명을 잃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을 섬기기 위하여
그분을 따르는 것이며,
우리의 혼생명을 잃고
그분의 부활 안에서 생활하는
이 길에서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다.
교회가 생겨나고 증가하는 길은
사람의 영광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에 의한 것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제쳐 두고
십자가 아래 계속 머물 때,
부활 능력은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그 즉시
우리를 대적하여
반대가 일어날 것이고,
우리는
고난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고난이
몸의 건축을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통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고난,
즉 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의 실수로 인한 고난의
차이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이
몸의 건축을 위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예를 들어, 우리는
운전할 때 실수함으로
고난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은
실수나 부주의로 인한 결과이다.
그것은
몸을 산출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니다.
그러나 가령 여러분이
직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누리고 있다고 해 보자.
그로 인해 상사들이
여러분을 적대시하여
승진에서 탈락시키거나
해고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고난은
몸의 산출과 건축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범주의 고난은
우리의 실수와 잘못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한 범주의 고난은
우리의 증거로 인한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제쳐 두고
부활의 능력을 누릴 때,
우리의 증거는
매우 강할 것이다.
이것은
원수의 반대를 불러일으킬 것이고,
우리는
고난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고난,
즉 몸의 건축을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통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반대를 당할 때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분을 누린다.
우리가
죽음을 통과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이 더욱더
우리의 누림이 된다.
또한 우리에게
부활 능력에 대한
체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욱더 알게 된다.
바꾸어 말해서,
사복음서에 기록된 삶을 사신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삶을 다시
우리 안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알고,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알며,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안다.
그분께서
자신의 삶을
우리 안에서 반복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된다.
우리는
그분을 누리고
그분과 하나가 됨으로써
그분을 따른다.
이것은
우리가 심지어
그분의 고난받는 삶에서도
그분을 따르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고난은 완성되었지만,
몸을 산출하시고 건축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한 고난도
‘그분의 고난’이라 불린다(빌 3:10).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그분의 고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인
우리는
그분의 몸을 위해
그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알고자 한다면,
그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의 변화를 위한 고난과
몸을 위한 고난에는
차이가 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은
변화를 위한 고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과
골로새서 1장 24절을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이 말한 고난이
몸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임을
보게 될 것이다.
몸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부활 능력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 안에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더 참여하여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더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는
모든 고난이
같은 범주에 속한 것은 아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게 되는 고난에는
적어도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 종류의 고난은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고난은
모든 사람에게 온다.
타락으로 인해
창조물은 낡아졌다.
창조물은
타락했고 부패했으며 썩어 가고 있다.
옛 창조물과 타락한 사람에게는
너무도 많은
재난과 질병이 있다.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은 모두
사람이며,
사람인 이상
우리는
재난을 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체험하는
두 번째 종류의 고난은
죄들과 실수에서 오는 고난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이 책임진 일들을 이행하는 데
부주의하거나 어리석다면
일종의 손실을
겪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체험하는
세 번째 범주의 고난은
예수님을 죽게 한 고난이다.
바울은
잘못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고난을
체험한 것이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그는
모든 면에서
올바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괴로움을 당하고,
혼란스러운 일을 만나며,
박해를 받고,
맞아 쓰러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수님과
그리스도의 몸과
새 언약의 사역을 위한 것이었다.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은
잘못을 하지 않았고,
이러한 특별한 고난은
그들의 어떤 실수와도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에게는
소멸되어야 할
겉사람이 있었다.

주 예수님께서
땅 위에 계실 때
그분은
어떤 실수도 하지 않으셨으며,
어떤 일에서도 잘못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께도
소멸되어야 할
겉사람이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은
형벌이나 바로잡음이나 징계가 아니다.
우리를
바로잡거나 벌하거나 징계하는 것이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의
목표가 아니다.
이는 또한
자연에서 발생하는
재난의 문제도 아니다.
그보다 그것은
우리의 타고난 사람,
즉 우리의 겉사람과 육체를
소멸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임하는
일종의 박해나
죽음의 활동이나
다루심이며,
이는
우리의 속사람이
발전되고 새로워질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야 하는데,
그 목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는 것,
즉 율법에서 나온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우리로부터 살아 나타나신
하나님 자신인
의를 가지는 것이다.
이 절들에서 계시된
항목들의 목적은
우리가
그분과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빌 3:10)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여김,
그리스도를 얻음,
그분 안에서 발견됨,
그분을 앎,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앎,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앎은
모두 한 가지,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으로
귀결된다.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형이나 틀로 생각했다.
예를 들어, 자매들은
케이크나 쿠키를 만들 때
밀가루 반죽을
틀에 넣는다.
결국 그 밀가루 반죽은
틀 속에 눌려 넣어짐으로
그 틀의 모양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
이것이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뜻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의 틀로,
그리고 우리를
그 틀 속에 넣어져 눌리는
밀가루 반죽으로 간주한다.
그 결과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아담의 죽음은
끔찍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혐오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귀하고 사랑스럽다.
우리 모두는
그 죽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놀라운 죽음은
침례로 상징된다.
복음서들에서
주 예수님은
두 가지 침례를 체험하셨다.
첫 번째는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요단강에서
요한에 의해 받으신 침례이고,
두 번째는
그분의 사역의 말기에
십자가에서 받으신 침례이다.
두 침례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운 죽음을 상징한다.

우리에게는
능력이 충만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이신 하나님께서 계신다.
그분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시다.
이분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이분의 생명은
부활 능력이다.
우리가 가난할 때
그분께서
우리가
빈곤의 압력을
견딜 수 있게 하신다.
우리가 번창할 때
그분께서
우리가
번영이라는 시험을
견딜 수 있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박해할 때,
그분께서
내적으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견딜 수 있게 하신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할 때,
그분께서
내적으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칭찬에 저항하게 하신다.
우리가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의 좋은 자질과 장점을
잃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내적 공급인
부활 능력이심을
볼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의 틀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이러한 죽음의 틀 속에
넣어진 후에,
부활 능력은
우리를
이러한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한다.
틀 속의 반죽이
구워진 후에
반죽은
틀과 같은 모양이 된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은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를 이끌며,
우리를 짊어지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틀 안에 넣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형상을 지닌다.

우리는
사복음서에 기록된
나사렛 사람 예수님의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죽음의 틀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하나님과 별개인
모든 것은
죽음의 틀에 의해
끝나고 제한되었다.
주 예수님은
삼십삼 년 반 동안
이 땅에서
죽음의 그늘 아래,
즉 죽음의 틀 안에서 사셨다.
이렇게 그분은
하나님을 따르시고,
하나님을 섬기시며,
하나님을 위해 사시고,
하나님을 살아 내셨다.
오늘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를
그분의 죽음의
틀 안으로 넣는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그 영께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은 반드시
죽음에 넘겨져야 한다.
부활 생명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 안에 넣어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도록 한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에 대해
말했다.
이러한 표현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생활의
틀로 취하기를
갈망했음을 가리킨다.

빌립보서 3장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문제이다.

우리는
이러한 죽음의 틀 안에 넣어졌고,
이제 우리는
이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의 능력은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를 이끌며,
우리를 짊어지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틀 안에 넣는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라는 표현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생활의 틀로 취하기를
갈망했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할 틀인데,
이것은
반죽이 틀에 넣어져
그것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과 흡사하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 생활을 하실 때
그러셨던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
곧 십자가 아래서의 생활을
계속했다.
우리는
이러한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사시기 위해
인간 생명을
계속적으로 죽음에 넣으신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생활은
인간 생명에 대해 죽고
신성한 생명을 삶으로써
이러한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체험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의
땅에서의 생애 전체에 걸쳐 일어났다.
그분은
사시면서 또한
죽고 계셨다.
즉 새 창조물 안에 있는
삶을 사시기 위해
옛 창조물에 대하여
죽고 계셨다.
이것이
빌립보서 3장 10절에 나오는
‘그분의 죽음’의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우리 매일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죽음에 넘기고
그것에 따라
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죽음에 넘긴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또 다른 생명인
신성한 생명이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외적인 타고난 생명이
죽음에 넘겨질 때,
내적인 신성한 생명이
해방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체험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는
네 가지 중요한 항목이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아는 것,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아는 것,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실지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아는 것과 관련된다.
‘같은 형상을 이루어’라는 말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게 되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써
그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고
그분의 고난의 교통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기반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기반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위치로 인도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할 때,
우리는
그분을 알게 된다.

몸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때,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셨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타고난 생명을
끊임없이
죽음에 넘기셨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계셨고
하나님을 사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자 할 때,
우리 또한
오직 그분을 향하여 살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참으로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의 죽음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우리는
그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할 것이다.
이것이
체험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길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즉 그분의 부활 능력 안에서
그분을 체험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얻는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심으로
항상 그분의 인간 생명을
죽음에 넘기시어
그분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이
흘러나올 수 있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기 위해
인간 생명을
계속적으로
죽음에 넣으신
그리스도의 체험을 가리킨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셨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심으로
주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계셨고
하나님을 사셨다.

그분은 항상
자신의 인간 생명을
죽음에 넘기셨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이
흘러나올 수 있었다.

그분은
사시면서 또한
죽고 계셨다.
즉 새 창조물 안에 있는
삶을 사시기 위해
옛 창조물에 대하여
죽고 계셨다.
이것이
빌립보서 3장 10절에 나오는
‘그분의 죽음’의 의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 안에 두셨고,
우리가
이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도록
날마다
우리를
형태 짓고 계신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 생명에 대해 죽고
신성한 생명을 삶으로써,
이러한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 안에서
타고난 생명은 죽음당하고,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히며,
자아는 무력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환경이
우리를
이 틀 안으로
밀어 넣도록 허락한다면,
우리의 일상생활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습으로
형태 지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양에는
타고난 사람이나
옛사람이나
자아에 속한
어떤 표시가 없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할 때,
그분의 죽음이
우리를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습으로 형태 짓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형태 지어지는 것을 통해
우리의
타고난 생명과 옛사람과 자아가
처리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타고난 사람과 함께
타고난 생명과
옛사람과
자아가
계속적으로
죽음에 넘겨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는
타고난 생명이나
옛사람이나
자아에 속한
어떤 활동이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사람이나
옛사람이나
자아 안에서 행동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형상을
지니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이 형상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의 형태이자 틀이며,
우리가
이 틀 안에 넣어진
‘반죽’이라는 사실에
인상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형태 곧 틀에는
타고난 사람과
옛사람과
자아가 없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에 의해 배제된다.
이와 같이
틀에 넣어져
형태 지어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체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게 되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써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아래
타고난 생명을 부인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가장 먼저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아래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부인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매일의 생활에서 우리는
타고난 생명으로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모든 것에서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부인해야 한다.
이것은
죽음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하나의 틀이 있는데,
이 틀은
죽음
곧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에는
죽음의 요소,
즉 그분 자신의 생명을
부인하는 것이 있다.
이 땅에서 사셨을 때
그분은
매 순간
자신의 생명을 부인하셨고
아버지의 생명에 의해 사셨다.
비록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이 땅에서
그분의 여정의 종착역이었지만,
그분은
삼십삼 년 반의 인생 내내
자신을 부인하고
아버지의 생명에 의해 사심으로
십자가의 죽음 아래 사셨다.
이것 또한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 안에 있는
위대한 요소이다.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여쭈어보아야 한다.
“주님,
사랑하는 이가
저입니까,
아니면 당신께서
제 안에서
저로부터
저를 통하여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자신에 의해 사랑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에 의한 사랑이며,
죽음과 부활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타고난 생명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에 의해 산다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갈 2:20)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말에
부합하는 이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생활의
틀로 취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하는 틀이다.
이것은
밀가루 반죽이
빵틀에 넣어져
그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과
흡사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 안에 두셨고,
우리가
이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도록
날마다
우리를
형태 짓고 계신다.

우리의 생활은
이러한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곧 신성한 생명을 살기 위해
우리의 인간 생명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죽음에 넘긴다면,
우리 안에
또 다른 생명
곧 신성한 생명이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생명이
해방될 것이고,
그럴 때 우리는
체험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수록
우리는
아버지를
더욱더 영광스럽게 한다.

1일

빌 3:1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딤후 2:11 이 말씀은 믿을 만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빌립보서 3장 10절에 계시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얻는 과정은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앎으로써 그분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하고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아야 한다. ‘그분의 고난의 교통’(빌 3:10)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마 20:22-23, 골 1:24)인데, 이것은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써 그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딤후 2:11). 바울은 그리스도 자신께서 탁월하시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의 부활의 생명 능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 체험하기 위하여 추구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께는 고난과 죽음이 먼저 오고 나서 부활이 뒤따랐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분의 부활 능력이 먼저 오며 그다음에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 뒤따른다. 우리는 먼저 그분의 부활 능력을 받는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 능력으로 그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런 고난은 주로 그리스도의 몸을 산출하고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 계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가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체험할 때, 우리는 부활의 모든 요소를 주입받으며, 이러한 주입으로 말미암아 몸을 위한 그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그리스도의 죽음을 체험하려면 반드시 그분의 부활을 분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앎으로써 그분의 죽음을 체험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더 참여하여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더 알게 될 것이다.

모든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교통 안으로 들어가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통을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태생적으로는 참여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많이 얻게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를 체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많이 체험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시며,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준다.

성령을 정의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신학이 아닌 실지적인 체험에 근거할 때, 성령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제쳐 둔 후에 여전히 남아 있는 그것이다. 우리에게 그 영께서 계신다면, 제한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꺼이 자신을 제쳐 두려 하지 않는다면, 그 영은 제한되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단순히 의지를 사용하여 자신을 제쳐 놓기를 결정하기만 하면 된다. 상황이 힘들 때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죽음 아래 머물라. 여러분은 죽음이 있는 곳에 또한 부활 능력도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부활의 능력이신 그 영은 즉시 우리 안에서 일어나실 것이고, 우리는 기쁨으로 “죽음 두렵지 않네”(찬송가 362장)라고 찬송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갈보리에 가는 것을 누리고, 그 결과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이신 거룩한 영을 누린다. 이것이 부활 능력의 실재이다.

부활 능력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시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갈보리에 이르러야 한다. 갈보리에 놀라운 죽음, 곧 부활을 가져오는 죽음이 있다. 우리가 자아를 십자가에 둔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그것이 성령일 것이다. 이 남아 계신 분으로 인해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이다. 우리는 슬프게 눈물을 흘리면서가 아니라, 심프슨(A. B. Simpson)처럼 기쁨으로 찬송하면서 갈보리까지 갈 것이다. 우리는 부활 능력을 통해 죽음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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