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ubilee(1)
레위기 25장 8절부터 17절까지에 나오는
희년은
이사야서 61장 1절부터 3절까지에
예언으로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 4장 16절부터 22절까지에서
실지로 성취된다.
희년에는
두 가지 주된 축복이 있었는데,
그것은
각 사람이 모두
자신의 잃어버린 소유지로
돌아가는 것과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 레 25:8-17.
희년에는
자신의 소유지
곧 자신의 몫으로 할당받은
좋은 땅을
판 모든 사람이
그 땅을 되찾기 위해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아도
자기 소유지로
돌아갈 수 있었고
(레 25:10, 13, 28),
자신을
노예로 판
모든 사람이
자유를 되찾아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레 25:39-41).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지로
돌아가는 것과
자유를 되찾아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신약의 희년에
믿는 이들이
자신들이 잃은
신성한 소유지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신들의 신성한 가족인
교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 엡 1:13-14, 요 8:32, 36,
비교 시 68:5-6.
구약의 예표에서
희년은
일 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그 예표의 성취에서
희년은
신약 시대 곧 은혜 시대 전체를
가리킨다.
이 시대는
죄의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때(사 49:8, 눅 15:17-24, 고후 6:2)이며,
죄의 속박 아래 억눌렸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해방을
누리는 때(롬 7:14-8:2)이다.
믿는 이들이
은혜 시대에
희년을 누리는 것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은
천년왕국에서
희년을 충만하게 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에서
희년을
최고도로 충만하게 누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 요 1:16-17, 롬 5:17,
빌 3:14, 계 22:1-2상.
희년은
은혜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의해
우리 안에 분배되시어
우리의 누림이 되시는
시대이다.
신약의 희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황홀경의 시대이다
— 눅 4:22, 시 45:2,
요 1:14-17, 고후 6:2.
신약 시대는
황홀경의 시대이고,
그리스도인은
황홀경 안에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한 번도
황홀경 안에
있어 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누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 고후 5:13, 행 11:5, 22:17,
시 43:4상, 51:12, 벧전 1:8, 사 12:3-6.
‘희년’은
걱정이나 근심,
염려나 고심,
부족함이나 결핍,
병이나 재난 등의
어떤 문제도 없고,
도리어 유익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에
유쾌하고 만족스러우며,
우리는
모든 근심에서 해방되고
편안하며
열광하고 기뻐한다
— 시 103:1-5.
우리는
참희년이신 주 예수님을
우리 안에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에게
주 예수님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소유로
가지는 것이며,
죄와 사탄의 속박에서
구출되어
참된 자유와 안식을
가질 수 있다
— 행 26:18, 엡 1:13-14,
골 1:12, 마 11:28, 요 8:32, 36.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이자 생명으로
받아들일 때
그분은
우리 안으로 오시어
우리의 희년이 되시지만,
우리가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도록
허락해 드리지 않고
그분에 의해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지적으로
희년 안에서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 레 25:11-12.
우리의 마음이
주님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나 일에
고정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이고
그 결과는
비참하다
— 요일 5:21, 겔 14:3, 5, 6:9.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도록
허락해 드리고
그분에 의해 산다면
우리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문제가 되고
희년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누림으로
얻은 후에만
모든 것에
만족할 수 있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나 일들이나 사물들이 아닌,
바로 우리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온갖 종류의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를
차분하게 하시고
걱정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다
— 빌 3:8-9, 4:5-8, 11-13.
누가복음 4장에 있는
희년의 선포는
누가복음 전체의
중심 사상을 지배하고,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는
희년에 대한
탁월한 예시이다
— 눅 15:11-32.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자기의 소유와 자기 자신을
팔았다.
그릇에 담긴 내용물은
그 그릇의 소유이며,
사람은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소유와 누림으로
가지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비어 있고
가난하게 된다
— 롬 9:21-23, 엡 2:12,
시 16:5, 계 3:17-18.
아담은
생명나무를
취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을 누리는
자신의 몫을
잃었다.
세상의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그들의 소유이자 누림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그들의 지체들을
죄에게 팔아
죄의 노예가 되었다
— 엡 2:12, 롬 7:14, 6:19.
인생은 다만
수고와 슬픔뿐이고
신속히 지나간다.
인생의 참된 상태는
헛되고 헛되며
공허하고 공허하여,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 시 90:10, 73:14, 16-17, 25,
전 1:2-11, 14.
타락한 사람들은
참된 거처가 없으므로
집 없이 표류하며
방황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의 참된 거처이시기 때문이다
— 시 90:1, 창 28:17-19,
요 15:4, 마 11:28.
어느 날 탕자는
자신의 소유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희년 곧 해방이었으며,
모든 것이
유쾌하고 만족스럽게 되었다
— 눅 15:20, 24, 비교 레 25:11-12.
구속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누림을 위한
우리의 소유이시다.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유업으로
돌아가는 것,
즉 하나님께
돌이키고 돌아감으로써
그분을
우리의 소유로
새롭게 누리는 것이다
— 엡 1:13-14.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있을 때
모든 것이 있고,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 골 1:12, 영한 동번 찬송가 1080장.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축복된 몫이 되셨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뻐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은
빛을 내지 못하는
전등과 같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의 몫이신
하나님을 취함으로써
‘스위치를 켜지’ 않기 때문이다
— 엡 4:18, 빌 2:12-16.
아버지가
아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아들이
자기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들에게
희년 곧 은혜의 해였다
— 눅 15:20.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들의 누림을 위해
살진 송아지가 되셨다
— 눅 15:23.
이것은
백성들이
희년에는
파종하거나 추수할 수 없고
오직 먹고 누리기만 해야 한다고
말하는
레위기 25장 11절과 12절에
부합한다.
일단 우리가
주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을 얻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의 희년의
시작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고용된 종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누리는 아들들이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소유인
하나님을
계속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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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언노트2, 2018 10 07
희년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은
이사야서 61장에
예언으로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 4장에서
실제로 성취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지, 영지, 영토로
되돌아가는 것과
자유롭게 되어
한 사람의 가족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은,
그 신약 희년 안에서
그 믿는 이들이
그들의 잃어버린
신성한 소유지이신
하나님께로
되돌아갔고,
모든 속박에서부터
해방되었으며,
그들의 신성한 가족인
그 교회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구약 예표 안에서
그 희년은
일 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그 예표의 성취에서
그것은
그 전체의 신약 시대 곧 은혜 시대를
가리키며,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되돌아온
죄의 포로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때이며,
죄의 속박 아래
억압되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해방을
누리는(enjoy; 즐기는, 맛보는) 때입니다.
그 믿는 이들이
그 은혜 시대 안에서
그 희년을 누리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은)
그 천년 안에서
그 희년을
완전하게 누림의
(the full enjoyment;
충만하게 누림의, 최대한으로 즐김의),
또 그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있는
그 새 예루살렘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누림의
(the fullest enjoyment;
최고도로 충만하게 누림의)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 희년은
은혜이신
그리스도의 시대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의해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우리 안으로
분배되십니다;
그 신약 희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한 황홀경의 시대입니다.
그 신약 시대는
한 황홀경의
(of ecstasy; 매우 큰 기쁨의)
시대이고,
한 그리스도인은
황홀경 안에 있는
한 사람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황홀경 안에
있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면,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희년’은
걱정이나 불안(anxiety),
염려나 우려(care),
부족함이나 결핍,
질병이나 재난 등의.
어떤 문제들도
가지지 않고,
오히려,
모든 혜택들을(benefits; 이익들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이
즐겁고(pleasant)
또 우리의 마음에
만족감을 주며,
또 우리는
불안에서부터 자유롭고
(are free; 해방되고, ..이 없고),
편안하며,
활기 있고
(excited; 들뜨고, 흥분되고),
또 기뻐합니다.
우리는
그 참된(real; 실재의) 희년이신
주 예수님을
우리 안으로(in; 안에)
반드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소유지인
(possession; 영토인, 소유인, 재산인)
하나님을 가지고 있고
또 죄와 사탄의 속박에서부터
구출되어
참된(real; 실재의)
자유와 안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자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그분께서 우리 안으로 오셔서
우리의 희년이 되시지만,
우리가
그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허락해 드리지 않는다면
또 우리가
그분에 의해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지적으로, 사실상 거의
(practically; 사실상, 실질적으로, 거의,
실제로, 현실적으로, 실용적으로)
그 희년 안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 외의
어떤 사람이나, 일이나, 또는 문제에
고정되어 있다면,
이것이 우상 숭배이고,
또 그 끝은
불쌍함(wretchedness; 가엾음, 비참함)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허락해 드리고
또 우리가
그분에 의해 산다면,
각각의 모든 것들이
우리가 만족하도록
(to our satisfaction; 우리의 만족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각각의 모든 것들이
한 문젯거리이고,
또 어떤 것도
한 희년이 아닙니다
(nothing is a jubilee;
희년은 없습니다).
우리의 누림이신
(enjoyment; 즐김이신, 즐거움이신, 기쁨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얻은 후에서야
(only after; 오직 … 후에만)
각각의 모든 것들이
우리가 만족하도록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종류의
상황들을 직면할 때
우리로 하여금
차분하게 하고
걱정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하시는 분은
오직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이시고,
외적인
사람들이나, 문제들이나, 또는 일들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4장에 있는
희년의 선포는
누가복음 전체의
중심 사상을 지배하고,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는
그 희년의
한 탁월한
그림입니다
(illustration; 보기입니다):
그 탕자는
(The prodigal son;
그 방탕한 아들은, 그 낭비하는 아들은)
그의 아버지의 집을 떠났고,
그의 소유지와(possession)
그 자신을
팔았습니다:
한 그릇의 내용물은
그 그릇의 소유이며(possession),
또 사람은
하나님의 한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그의
소유와(possession)
누림으로
(enjoyment; 즐거움으로)
가지지 못한다면,
그는
비어 있고
(empty; 공허하고)
가난합니다
(poor; 불쌍합니다).
아담이
그 생명나무를
취하지 않았을 때
그는
하나님을 누리는
그의 몫을
(portion; 1인분을, 상속분을, 분여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 세상의
그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소유지와 누림으로서의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또 그들의 지체들을
죄에게 팔았으며
죄의 노예들이 되었다.
사람의 생명은
(human life; 인생은)
수고와 슬픔 외에
아무것도 아니고
또 빨리 가버릴 것입니다
(will soon be gone; 속히 사라질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의
참된 상태는
헛됨들 중의 헛됨이고
(vanity of vanities;
자만들 중의 자만이고, 허영들 중의 허영이고, 헛되고 헛되며)
비어 있음들 중의 비어 있음
(emptiness of emptinesses; 공허하고 공허하여),
-곧 바람을 뒤쫓음입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참된 거처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의 집(a home; 한 가정) 없이
표류하고 있고
(are drifting; 떠돌고 있고)
또 방황하고 있는데
(… wandering; 헤매고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참된 거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 탕자는
그의 소유지와(possession; 소유와)
또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것은
한 희년 곧 한 해방이었고,
또 각각의 모든 것들이
즐겁고 만족스럽게 되었습니다:
구속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누림을(enjoyment; 즐거움을) 위한
우리의 소유지이십니다;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상속 재산으로
되돌아가는 것,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것,
곧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서
그분을
우리의 소유지로
새롭게
누리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각각의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축복받은
몫이 되셨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즐겁지 않고(unhappy),
또 그들은
빛나지 않는
전등들과(lights; 빛들과) 같은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몫으로
취함으로써
‘스위치를 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가
그 아들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과
또 그 아들이
그의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온 것은
그 아들에게
그 희년
곧 은혜의 해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in;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 회개하고 되돌아온
탕자들의 누림을(enjoyment) 위한
그 살진 송아지가 되셨습니다.
이것은
그 백성이
그 희년에
씨를 뿌리거나 수확하지 말아야 했고
오직 먹고 누리기만 해야 했다고
말하는
레위기 25장과
일치합니다;
한 번 일단 우리가
주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회개하고
또 하나님께 되돌아오기만 하면,
우리는
안에
하나님을 얻고,
또 이것이
우리의 희년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the Father’s)
고용된 종들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누리는 아들들이고,
지금부터 영원에 이르도록
우리의 소유지이신
하나님을
끊임없이
(continually;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릇 안의 내용물이신
하나님을 맛봄으로
아주 크게 기뻐함
하나님 없이는
기쁨이 없고
하나님 없이는
희년이 없음
기쁨이 없이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음
Life-Study of Romans
Joy
Romans 14:17 says, “The kingdom of God is not eating and drinking, but righteousness and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This verse indicates that the Spirit is related to joy. When we are in the Spirit, we are joyful, so joyful that we may shout praises to the Lord. At times we may be beside ourselves with joy, and praises spontaneously flow out from within us.
What the Kingdom Life Is
Furthermore, we need joy. Every day we should be joyful. If we cannot say, “Hallelujah, praise the Lord,” every day, it means that we are defeated and are not in the Holy Spirit. The Holy Spirit is a Spirit of joy. We must constantly be joyful with God, praising Him, and saying, “Hallelujah.” Righteousness, peace, and joy a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kingdom of God today. And the kingdom of God is the exercise of the church life. The church life is for the kingdom life, and the kingdom life is an exercise of the Christian life. We need such exercise.
Service
Romans 7:6 says that “we should serve as slaves in newness of spirit and not in oldness of letter.” This verse points to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pirit and service. If we are not in the Spirit, we cannot serve the Lord. In 1:9 Paul said that it was in his spirit that he served God in the gospel. The more we are in the spirit, the more we serve the Lord as willing bondslaves. We shall say, “Lord Jesus, as Your bondslave, I am willing to serve You.”
신성한 소유지이신
하나님께로 되돌아올 때,
특히
우리 신성한 가족인
그 교회로 되돌아 올 때
희년이신 그리스도를
극도로 누림
다음 시대에
또 영원 안에서
희년이신 하나님을
충만하게
또 가장 완전하게
누릴 것이라는
약속으로
성령을
그 상속 재산의
보증으로 주심
신언노트, 2018 10 07
레위기 25장 8절부터 17절까지에 나오는
희년은
이사야서 61장 1절부터 3절까지에
예언으로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 4장 16절부터 22절까지에서
실지로 성취됩니다.
그 희년 안에는
두 가지 주요한 축복들이 있었습니다:
각각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잃어버린
소유지로
(possession; 소유물로, 재산으로)
되돌아감과
노예 상태에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그 희년에
자신의 소유지
곧 자신의 몫으로 할당받은
좋은 땅을 판
각각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되찾기 위해
(to redeem it; 그 땅을 구속하기 위해)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아도
자기 소유지로
되돌아갈 수 있었고,
자신을
노예 상태 안으로 팔았던
각각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자유를 되찾았고(regained)
또 그의 가족에게로
되돌아갔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지로
되돌아가는 것과
자유롭게 되어
한 사람의 가족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은,
그 신약 희년 안에서
그 믿는 이들이
그들의 잃어버린
신성한 소유지이신
하나님께로
되돌아갔고,
모든 속박에서부터
해방되었으며,
그들의 신성한 가족인
그 교회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구약 예표 안에서
그 희년은
일 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그 예표의 성취에서
그것은
그 전체 신약 시대 곧 은혜 시대를
가리키며
(refers to; 언급하고).
그 시간은
(as the time when …;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되돌아온
죄의 포로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accepts)
때이며,
죄의 속박 아래
억압되었던(oppressed; 억눌렸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해방을
누리는(enjoy; 즐기는) 때입니다.
그 믿는 이들이
그 은혜 시대 안에서
그 희년을 누림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이신
그리스도를 누림은)
그 천년 안에서
그 희년을
완전하게 누림의
(the full enjoyment;
충만하게 누림의, 최대한으로 즐김의),
또 그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있는
그 새 예루살렘 안에서의
가장 완전하게 누림의
(the fullest enjoyment;
최고도로 충만하게 누림의)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 희년은
그분의 은혜의 말씀으로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우리 안으로 분배되시는
은혜이신
그리스도의 시대입니다
(은혜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의해
우리 안에 분배되시어
우리의 누림이 되시는
시대입니다);
그 신약 희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한 황홀경의 시대입니다.
그 신약 시대는
한 황홀경의
(of ecstasy; 매우 큰 기쁨의)
시대이고,
한 그리스도인은
황홀경 안에 있는
한 사람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황홀경 안에
있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면,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희년’은
걱정이나 불안(anxiety),
염려나 우려(care),
부족함이나 결핍,
질병이나 재난 등의
어떤 문제들도 가지지 않고,
오히려,
모든 혜택들을(benefits; 이익들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이
즐겁고(pleasant; 유쾌하고)
또 우리의 마음에
만족감을 주며,
또 우리는
불안에서부터
자유롭고
(are free; 해방되고, ..이 없고),
편안하며,
활기 있고
(excited; 들뜨고, 흥분되고),
또 기뻐합니다.
우리는
그 참된(real; 실재의) 희년이신
주 예수님을
우리 안에(in; 안으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소유지인
(possession; 소유인, 재산인)
하나님을 가지고 있고
또 죄와 사탄의 속박에서부터
구출되어
참된(real; 실재의)
자유와 안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자와 생명이신(as; ..으로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그분께서 우리 안으로 오셔서
우리의 희년이 되시지만,
우리가
그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허락해 드리지 않는다면
또 우리가
그분에 의해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지적으로
(practically; 사실상, 실질적으로, 거의,
실제로, 현실적으로, 실용적으로)
그 희년 안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 외의
어떤 사람이나, 일이나, 또는 문제에
고정되어 있다면,
이것이 우상 숭배이고,
또 그 끝은
불쌍함(wretchedness; 가엾음, 비참함)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허락해 드리고
또 우리가
그분에 의해 산다면,
각각의 모든 것들이
우리가 만족하도록
(to our satisfaction; 우리의 만족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각각의 모든 것들이
한 문젯거리이고,
또 어떤 것도
한 희년이 아닙니다
(nothing is a jubilee;
희년은 없습니다).
우리의 누림이신
(enjoyment; 즐거움이신, 기쁨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얻은 후에서야
(only after; 오직 … 후에만)
각각의 모든 것들이
우리가 만족하도록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종류의(all kinds of)
상황들을 직면할 때
우리로 하여금
차분하고
걱정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enables us … free of; 해방할 수 있는)
이는
외적인
사람들이나, 문제들이나, 또는 일들이
아니고
오직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가복음 4장에 있는
희년의 선포는
누가복음 전체의
중심 사상을 지배하고,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는
그 희년의
한 탁월한
그림입니다
(illustration; 보기입니다):
그 탕자는
(The prodigal son;
그 방탕한 아들은, 그 낭비하는 아들은)
그의 아버지의 집을 떠났고,
그의 소유지와(possession)
그 자신을
팔았습니다:
한 그릇의 내용물은
그 그릇의 소유이며(possession),
또 사람은
하나님의 한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그의
소유와(possession)
누림으로
(enjoyment; 즐거움으로)
가지지 못한다면,
그는
비어 있고
(empty; 공허하고)
가난합니다
(poor; 불쌍합니다).
아담이
그 생명나무를
취하지 않았을 때
그는
하나님을 누림의
그의 몫을
(portion; 1인분을, 상속분을, 분여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 세상의
그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소유와 누림으로서의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또 그들의 지체들을
죄에게 팔았으며
죄의 노예들이 되었다.
사람의 생명은
(human life; 인생은)
수고와 슬픔 외에
아무것도 아니고
또 빨리 가버릴 것입니다
(will soon be gone; 속히 사라질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의
참된 상태는
헛됨들 중의 헛됨이고
(vanity of vanities;
자만들 중의 자만이고, 허영들 중의 허영이고, 헛되고 헛되며)
비어 있음들 중의 비어 있음
(emptiness of emptinesses; 공허하고 공허하여),
-곧 바람을 뒤쫓음입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참된 거처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의 집(a home; 한 가정) 없이
표류하고 있고
(are drifting; 떠돌고 있고)
또 방황하고 있는데
(… wandering; 헤매고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참된 거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 탕자는
그의 소유지와(possession; 소유와)
또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것은
한 희년 곧 한 해방이었고,
또 각각의 모든 것들이
즐겁고 만족스럽게 되었습니다:
구속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누림을(enjoyment; 즐거움을) 위한
우리의 소유지이십니다;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상속 재산으로
되돌아가는 것,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것,
곧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서
그분을
우리의 소유지로
새롭게 누리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각각의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축복받은 몫이 되셨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즐겁지 않고(unhappy),
또 그들은
빛나지 않는
전등들과(lights; 빛들과) 같은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몫으로
취함으로써
‘스위치를 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가
그 아들을
기꺼이 받아들임과
또 그 아들이
그의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옴은
그 아들에게
그 희년
곧 은혜의 해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in;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 회개하고 되돌아온
탕자들의 누림을(enjoyment) 위한
그 살진 송아지가 되셨습니다.
이것은
그 백성이
그 희년에
씨를 뿌리거나 수확하지 말아야 했고
오직 먹고 누리기만 해야 했다고
말하는
레위기 25장 11절과 12절과
일치합니다
(corresponds to; …에 부합합니다);
한 번(일단) 우리가
주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회개하고
또 하나님께 되돌아오기만 하면,
우리는
안에(within; 속에)
하나님을 얻고,
또 이것이
우리의 희년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그 아버지의(the Father’s)
고용된 종들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누리는 아들들이고,
지금부터 영원에 이르도록
우리의 소유지이신
하나님을
끊임없이
(continually;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6일
엡 1:13-14
그분 안에서
여러분도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
그분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도장 찍혔습니다.
이 성령은
우리가 얻은
유업의
보증이 되시어,
하나님께서 사신
소유를
구속에 이르게 하셔서,
그분의 영광이
찬송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에서
주 예수님은
희년이 왔음을
선포하셨다.
누가복음 4장에 있는
희년의 선포는
누가복음 전체의
중심 사상을 지배하고,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는
희년에 대한
탁월한 예시이다.
… 에베소서 1장 13절과 14절에서
바울은
구원받는 것이
우리의 유업으로
돌아가는 것,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하나님께
다시 가서
그분을
우리의 소유로
새롭게 누리는 것임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업이시고,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유업의
보증과 담보와 증거와 보장으로서
우리 안에 계신다.
‘보증’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견본’을
의미하기도 한다.
견본은
일종의 미리 맛봄이며,
장래에
완전한 맛봄이 있을 것임을
보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성령은
우리의 누림이신
하나님에 대한
보증과 견본으로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미리 맛봄을 주시고
장래에
하나님을
충만히 누릴 것임을
보장하신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얻었을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을 얻었다.
하나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다.
하나님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
…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유업이시다.
골로새서 1장 12절은
“여러분이
빛 가운데에서
성도들에게 할당된
몫을 받을
자격이 있도록 하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한다.
오늘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복된 몫이 되셨다.
그리스도를 떠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
… 전구는
건물에 설치되어
전기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스위치를 켜지 않는다면
전구는
빛을 내지 못한다.
… 비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들의 몫이신
하나님을 취함으로써
‘스위치를 켜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빛을 내지 못하는
전구와 같다.
영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 누가복음 15장 11절부터 32절까지에 있는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있는
자신의 소유를
완전히 잃어버린
타락한 사람을
묘사해 준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떠났고
자신을
노예로 팔았다.
… 나중에 이 탕자는
아버지에게 할 말을
준비한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아버지,
내가 하늘을 거슬러
죄를 짓고
아버지 앞에도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들 중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려야겠다.”
(눅 15:18-19)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준비한 대로
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 아버지는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즉시 노예들에게
“어서 그 제일 좋은 겉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또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거워하자.”
(눅 15:22-23)라고 말했다.
그 살진 송아지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들의 누림을 위한
살진 송아지가 되셨다.
우리에게
이것이 바로
희년이다.
따라서 누가복음 15장 11절부터 32절까지는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에서 선포한
희년의 예시이다.
탕자는
자신의 소유지를
팔아 버렸고,
자기 자신도
팔아 버렸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소유지로
돌아왔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바로
희년이며 해방이다.
모든 것이
즐겁고
만족스럽게 되었다.
아버지의 집에는
누림이 있고
먹고 마시는 것만 있을 뿐
수고하는 것이 없다.
이것은
희년에는
씨를 뿌려서는 안 되고
수확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
레위기 25장 11절과
일치한다.
그들은 다만
먹고 누려야 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밭에서
저절로 난 것은
먹을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수고할 필요 없이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것을
먹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희년은
복음의 시대,
바로 지금 이 시대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켜
주 예수님을 영접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을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년의
시작이다.
그날부터 계속해서
우리의 전 생애가
희년이며,
우리는
영원토록
희년을 누린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이신
하나님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다.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자.
우리의 희년은
지금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더욱더 풍성해질 것이다.
이것이
희년의 유업에 대한
의미이다.
5일
롬 9:23
하나님께서
또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들에 대하여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어찌하겠습니까?
시 16:5
여호와는
나의 유업과
나의 잔의 몫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사람의 유업인지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 유업은
소유를 뜻한다.
땅은
우리의 참된 소유가 아니다.
그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유이시다
(시 16:5).
땅은
예표와 상징과 표징일 뿐이다.
… 창세기 1장 26절과
로마서 9장 21절부터 23절까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분의 그릇으로
창조하신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용기인 그릇 자체는
비어 있으며
내용물을
필요로 한다.
그릇에 담긴
내용물은
그 그릇의 소유이다.
빈 그릇은
궁핍한 그릇이다.
… 사람은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하나님이 없다면
사람은
공허하고 궁핍하다.
찬송가 701장 1절 후렴은
“헛되고 헛되네
모든 것 헛되네
바람 그림자 잡는 것 같아”
라고 말한다.
마지막 절 후렴은
“주 없인 공허해
모두 공허해
주님 안에만
공허함 없네”
라고 말한다.
주님이 없으면
사람은 공허하다.
따라서 사람의 참된 소유는
토지나 집이 아니며,
아내나 자식도 아니다.
사람의 소유는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담는
그릇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만약 그릇인 우리가
하나님을
내용으로 담지 않는다면,
우리는
공허하고 궁핍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신 후,
아담에게
다른 것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 주지 않으시고
그를
생명나무 앞에
두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생명나무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셨음을
보여 준다.
생명나무는
무엇인가?
생명나무는
하나님이다.
주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요 6:35)라고 말씀하셨다.
시편 36편 9절은 또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라고 말한다.
주님은 바로
생명나무이시고
생명의 강이시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그분을 먹고 마시게 되어
만족을 얻는다.
확실히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이시다.
그럴 뿐 아니라,
시편 16편 5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의 유업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잔의 몫이시다.
이 절에서
‘유업’은
일반적인 표현인 반면에,
‘잔’은
좀 더 개인적인 표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업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누림을 위한
우리의 잔의 몫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업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참된 누림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할당된 몫을
지켜 주신다.
하나님은
아담을
생명나무 앞에 두셨지만,
아담은
생명나무를 취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을 누리는
자신의 몫을
잃어버렸다.
아담은
타락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떠났으며,
결과적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에베소서 2장 12절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다고
말한다.
누가복음 15장 11절부터 32절까지에서
탕자는
온 인류를
묘사하고 있다.
왕이든 대통령이든
청소부든 구걸하는 사람이든 간에,
모든 사람이
빈털터리가 되어
‘돼지’와 함께 사는
탕자이다.
사람의 타락은
사람의 소유인
하나님으로부터
타락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소유와 누림이 되시는
하나님을
잃어버렸다.
이것이
사람의 타락의
첫 번째 단계이다.
타락의 두 번째 단계는
사람이
자신을
죄에게 판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 14절에서
“나는
육체적이며,
이미 죄 아래 팔렸습니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타락한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없다.
그럴 뿐 아니라,
우리는
죄에게
우리의 지체들을 팔아
죄의 노예가 되었다
(롬 6:19).
죄가
우리를 지배한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죄의 지배 아래 있다.
어떤 사람은
좀 더 높은 지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의 이성에
지배를 받는다.
사회를 위해,
친척들과 친구들을 위해
그들은 밖의 행위를
제멋대로 하지 않지만,
여전히 속으로는
제멋대로 생각한다.
자신의 마음이
죄에게 팔리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을
죄에게 팔았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소유인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참된 거처도 없다.
타락한 인류는
참된 집이 없이
표류하며
방황하고 있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은
고층 아파트나 큰 저택에
살고 있지만
그들 속에는
안식이 없다.
안식할 거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방황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참된 거처이시고,
사람의 참된 소유이시다.
4일
행 26:18
이것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나를 믿음으로써
죄들이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있는
유업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고후 6:2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을 만한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기쁘게 받아들이시기에
좋은 때이며,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사도행전 26장 18절에서 말한
유업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2절에서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기쁘게 받아들이시기에
좋은 때이며,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라고 말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해,
곧 희년이므로,
바울은
우리에게
속히 하나님을 받아들일 것을
권유한다.
희년은
거룩한 해이며
은혜의 해이다.
우리에게
희년이 있으면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며,
하나님이 계실 때
은혜가 있는 것이다.
‘희(禧)’라는 한자는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때
우리는
희년 안에
있는 것이다.
‘희년’은
걱정이나 근심,
염려나 고심,
부족함이나 결핍,
병이나 재난 등의
어떤 문제도 없고,
도리어 유익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오늘날
어떻게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만족스러울 수 있는가?
매일
모든 일이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고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우리는
만족스럽지 않다.
아마 오늘은
어떤 일들이 만족스럽지만,
내일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만족스러울 수 없고,
우리의 환경은
항상
기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누림으로
얻은 후에야
모든 것에
만족할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모든 것에 만족할 정도로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만족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천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고
풍부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각각의 일과 모든 일에 있어서
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1하-13절)라고 말했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나 일들이나 사물들이 아닌,
바로 우리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온갖 종류의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를
차분하게 하고
걱정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다.
율법 시대인
구약 시대에
… 사람은
노예의 위치에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야
희년이 왔음이
선포되었다
(눅 4:16-21).
우리는
‘희년’이
오십 년째인
한 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오십 년째 되는 해는
한 시대를 예표한다.
시대에 따르면,
희년은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한 시기는
신약 시대,
곧 오늘날 은혜의 시대이고,
또 한 시기는
천년왕국 시대,
곧 희년이 충만한 시대이다.
시대에 따라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고
지금은
희년의 시대이지만,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허락해 드리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는
희년이 없다.
따라서
체험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희년이
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안에
들어오셔야 한다.
그럴 뿐 아니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었고
그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허락해 드렸을지라도,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도록
허락해 드리지 않고
그분에 의해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지적으로
희년 안에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도록
허락해 드린다면,
우리는
그 문제에서
희년을
누리게 된다.
이런 식으로
그 특정한 문제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만족하게 된다.
예를 들면,
결혼 생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도록
허락해 드리고
또한 그리스도에 의해 산다면,
우리의 결혼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만족할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일이
즐거운 일이 되고,
불만족스러운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것이 된다.
…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도록
허락해 드리고
그리스도에 의해 산다면
모든 것에 대해
만족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문제가 되고
희년은 없을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오실 때
희년이
우리 안에 온다.
3일
레 25:12-13
이 해는
희년이며,
너희에게
거룩한 해이다.
… 이 희년에
너희는 각자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야 한다.
시 100:1-2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Make a joyful noise;
기쁨이 넘치는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라,
크게 기뻐하며
외칠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with joyful singing;
큰 기쁨으로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come before His presence;
그분의 임재 앞에
오라)
희년에는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만족하게 하며,
우리는
염려가 없고
편안하며
흥분되고
크게 기뻐한다.
영어에서
희년은
‘주빌리(jubilee)’인데,
기뻐하며 즐거이 외치는 것을
뜻한다.
희년에 대한
히브리어는
‘요벨(yobel)’인데,
‘떠들썩한 즐거운 소리’,
‘나팔을 불며 외침’,
‘선포함’ 등의
의미를 가진다.
희년은
슬픔이나 애통함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곧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자손이
가련한 상황에
처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모세를 통해
그들을 구속하고
이집트 땅에서
건져 내시어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실 때
큰 기적을
베푸셔서,
바다를
갈라지게 하여
그들로
건너가게 하셨다.
그들이
홍해를 건너간 후
그들의 원수들이
바다에 빠져
잠기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미칠 듯이 기뻐하며
외치고
춤추었다.
미리암은
홍해 바닷가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크게 환호하며
노래하였다.
전쟁은
남자들의 일이고,
찬송은
여자들이 특별히 잘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여자가 되어야 한다.
기뻐하면 할수록
좋다.
낡은 상태에
머무르지 말고,
경직되게
주일 아침 예배를 하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방식을
받아들이지 말라.
우리는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라고 말한
시편 100편 1절처럼
기뻐 뛰어야 한다.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에 대한
히브리어 원문은
‘함께 떠들썩하게
여호와께 외칠지어다’를
의미한다.
… 에스라기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떠들썩한 기쁨의 소리를
발한 것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된 땅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의 기초를
놓았을 때,
온 백성이
큰 소리로 환호하였다.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으므로,
즐거이 외치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분간할 수 없었다
(스 3:11-13).
… 시편에는
떠들썩한 기쁨의 소리를 내며
기뻐해야 한다고 말하는
여러 절들이 있다.
심지어 단지 기뻐할 뿐 아니라
기뻐 뛰라고 말한다.
희년이 왔을 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떠들썩한 기쁨의 소리를
냈을 것이고,
심지어 동시에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기뻐 외쳤을 것이다.
희년은
황홀경의 시대이다.
신약 시대는
황홀경의 시대이고,
그리스도인은
황홀경 안에 있는
사람이다.
오십 년도 더 이전에
니 형제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이
한 번도 미쳐 본 적이 없다면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니 형제님은
또 계속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미쳐야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정신이 온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 우리는
기쁨으로 외치지만
여전히 정신이 온전하다.
한 면에서 우리는
즐거워하며
떠들썩한 기쁨의 소리를
발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정신이 온전하며
절제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미쳐 본’ 체험에까지
이르지 못했다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황홀경 안에
있어 본 적이 없다면,
우리는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누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누린다면
기뻐 뛸 것이다.
나는
노인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주 미친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이것을
모를 것이다.
내가 매일
정해진 일정에 따라
오고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나의 참된 상태를
아신다.
우리에게는
미쳐야만 하는
참된 이유가 있다.
우리 속에
기쁨이 없다면
우리는
미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누리기 때문에
미칠 수밖에 없는
상태에까지 이른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충족하는
구속의 은혜를
누렸기 때문에,
홍해를 건넌 후
모두가
기뻐 뛰며 외쳤고,
큰 소리로 찬미하며 노래하고
끊임없이 환호하였다.
2일
레 25:11
오십 년째 되는 해는
너희를 위한
희년이다.
너희는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수확한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어들여서도 안 되며,
가꾸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열린
포도를 따서도 안 된다.
사 49:8
…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유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희년이
오십 년째
되는 해였다는 것(레 25:10-11)은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해 드려야 하는
온전한 책임(숫자 50으로 상징됨)이
이미 완수되었으므로
사람은
어떠한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십 년은 또한
타락한 인생의
여정 전체를
상징한다.
따라서 오십 년째 되는 해인
희년은
우리의 타락한 인생의
결말을 상징한다.
희년은
주님께서
사람들을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해로서,
이사야서 61장 1절과 2절에서
예언되었으며,
누가복음 4장 16절부터 22절까지에서
주님께서 오심으로
성취되었다.
구약의 예표에서
희년은
일 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그 예표의 성취에서
희년은
신약 시대 곧 은혜 시대 전체를
가리킨다.
이 시대는
죄의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때(사 49:8, 눅 15:17-24, 고후 6:2)이며,
죄의 속박 아래 억눌렸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해방을
누리는 때(롬 7:14-8:2)이다.
믿는 이들이
은혜 시대에
희년을 누리는 것은
곧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인데,
이 누림은
천년왕국에서
희년을 충만하게 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에서
희년을 최고도로 충만하게 누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레 25:10).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 되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직후에
그분 자신을
사람의 소유로
사람에게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업은
하나님 자신이다.
… 성경에서 말하는
유업은 바로
주님을 믿은
모든 사람이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서
받는 유업이다
(행 26:18).
이 유업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을
유업으로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아담에게
많은 것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원하심이
아담이
그분 자신을
자신의 참된 소유로
받아들이는 것임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하여
하나님을 버렸고
자신의 소유인
하나님을 잃어버렸으며
세상에
빠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소유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팔아 버렸다.
에베소서 2장 12절은
오늘날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귀한 사람이든
천한 사람이든,
야만스러운 사람이든
문명화된 사람이든,
모든 사람이
똑같다.
모두가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
그럴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죄와 사탄에게
팔아 버린 정도까지
타락했다.
… 기본적인 문제는
사람이
자신을 팔고
하나님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자유와 소유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노예가 되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14절에서
“나는
육체적이며,
이미 죄 아래 팔렸습니다.”
라고 말한다.
불신자들뿐 아니라
심지어 많은 믿는 이들까지도
여전히
파라오, 곧 사탄에게
노예 노릇 하는 데에서
완전히 구출되지 못했다.
희년에는
두 가지 주된 축복이 있었는데,
그것은
각 사람이 모두
자신의 잃어버린 소유지로
돌아가는 것과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얻고
하나님을
우리의 소유지로
누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주 예수님을
참희년으로서
우리 안에
받아들여야 한다.
그분을 얻으면
우리의 소유지가
우리의 것으로
다시 회복되고
우리에게
자유가 돌아온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해방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소유지로
얻으며
죄와 사탄에게
노예 노릇 하는 데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우리 모두는
구원받기 전에
우리에게
자유가 없었고
주인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구원받았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그럴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의 소유지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주 예수님은
“수고하며
짐을 진
사람들이여,
다
나에게로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줄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더 이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자유와 안식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더 이상
빈곤하지 않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유업으로
소유하고 있다
(행 26:18, 엡 1:14, 골 1:12).
이것이 바로
희년의 의미이다.
1일
레 25:10
너희는
오십 년째 되는 해를
거룩하게 하고,
그 땅의 모든 주민에게
자유를
선포해야 한다.
그해는
너희를 위한
희년이다.
너희는 각자
자기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자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사 61:1-2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
선포하여 …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속을 받았고,
하나님의 축복도 받았으며,
최종적으로
가나안이라는
좋은 땅으로 인도되었고,
또한 각 집안이 모두
한 몫의 땅을
얻었다.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축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땅까지도
축복을 받았다.
칠 년째 되는 해마다
가나안 땅은
소출을 낼
필요가 없었다.
그해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 땅이 모두
안식해야 했다.
칠 년째 되는 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안식년이기 때문에
누구도 파종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곱 번의 안식년이
지난 후에는
오십 년째 되는 해가 된다.
오십 년째 해는
단순한 안식년이
아니었다.
오십 년째 되는 해는
사람의 말로
묘사하기가 어렵다.
…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
오십 년째 되는 해는
매번
그들에게 희년이었다.
… 오십 년째 해인 희년은
우리의 타락한 인생의
결말을 상징한다.
희년에는
자신의 소유지
곧 자신의 몫으로 할당받은
좋은 땅을
판 모든 사람이
그 땅을
되찾기 위해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아도
자기 소유지로
돌아갈 수 있었고
(레 25:10, 13, 28),
자신을
노예로 판
모든 사람이
자유를 되찾아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레 25:39-41).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지로
돌아가는 것과
자유를 되찾아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신약의 희년에
믿는 이들이
자신들이 잃은
신성한 소유지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신들의 신성한 가족인
교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가족은
좋은 땅의 일부를
자신들의 몫으로
할당받았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땅의 일부를
자신의 몫으로
할당받은 후에,
어떤 이들은
가난하게 되어
자신의 몫의
땅을 팔았고
(레 25:25상),
그 결과
그들의 소유, 그들의 유업을
잃었다.
또 어떤 이들은
더욱더 가난하게 되어
심지어 자신을 노예로 팔았고
(레 25:39상),
그 결과
자유를 잃고
그들의 가족과
헤어지게 되었다.
가나안 좋은 땅은
성도들에게
할당된 몫이신,
… 그리스도 안에
체현되시고
(골 2:9)
모든 것을 포함하신
생명 주시는 영으로
실재화되신
(고전 15:45, 고후 3:17, 갈 3:14)
삼일 하나님의
예표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분의 의도는
사람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자신을
사람의 소유,
사람의 유업으로
주시는 것이었다
(창 2:9, 13:12-15,
시 16:5, 90:1).
그러나 사람은
타락하였고,
그 타락으로 인해
자신의 소유지인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창 3:24, 4:16, 엡 2:12)
자신을
죄와 사탄과 세상에게
노예로 팔았다
(요 8:34, 요일 5:19하).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된
하나님의 신약의
구원(롬 3:24, 5:1-2, 엡 2:8)은
타락한 사람을
자신의 신성한 소유지인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행 26:18, 갈 3:14,
엡1:14, 골 1:12, 눅 15:12-24),
죄와 사탄과 세상에게
노예 노릇을 하는 데서
해방되게 하여
(요 8:32, 롬 6:6, 14, 8:2,
히 2:14-15, 요 12:31),
자신의 신성한 가족인
하나님의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갈 6:10, 엡 2:19)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교통을 누리게 한다
(고후 13:14).
구약에서
희년은
레위기 25장에
예표로서
기록되어 있고,
이사야서 61장에는
예언으로서
기록되어 있다.
이 예표는
주 예수님께서 오시기
천오백여 년 전에
주어졌고,
이 예언은
주 예수님께서 오시기
칠백여 년 전에
주어졌다.
… 어느 날
주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분은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이사야서 61장을 펴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으로
주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사람들을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희년의 해를
선포하게 하실 것임을
예언하고 있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이 성경 말씀이
오늘
여러분이 듣는 중에
이루어졌습니다.”
(눅 4:21)라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