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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회복의 책인 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의 중심적이고도 핵심적인 요점 ― 주님의 회복 안에서의 합당하고도 적절한 인도 직분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안에서와 주님의 회복 안에서의 인도 직분은 영적인 역량에 달려 있다. 인도 직분은 공식적이거나, 영구적이거나, 조직적이거나, 계급적이지 않다.

인도 직분에 대한 주님의 관념은 천연적인 관념과는 정반대이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에는 사실상 천연적인 의미에 따른 인도 직분이 없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서 인도 직분은 노예를 의미한다. 인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기꺼이 노예가 되고자 해야 한다.

인도 직분은 생명의 성장에 의해 형성되고, 필요에서 나온 결과이다. 필요가 없다면 인도 직분은 나타날 수 없다.

인도 직분에 대한 사람의 관념을 제쳐 두시려고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가운데의 인도 직분이 항상 영적인 역량에 달려 있도록 정하셨다.

주님의 회복 안에는 조직화된 인도 직분이 없고, 통합하는 조직이 없다. 그 대신 모든 지체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시는 한 머리가 있고, 하나의 유기체인 몸이 있다.

신약에 따르면, 사도들의 권위는 영적인 것이며 그들의 말씀의 사역 안에 있다.

사도들은 교회의 사무에 개입하는 위치상의 권위를 갖지 않는다. 그들이 공급한 말씀만이 권위를 가진다.

교회들이 사도들을 따르는 것은 사도들에게 신약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가 빗나가거나 잘못된 길로 간다면,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 상황을 처리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인도 직분은 사도들의 가르침 안에서 산출되고 강화되며 제한받는다.

신약에는 한 인도 직분이 있는 한 사역이 있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분열된 것은 너무 많은 인도 직분이 있기 때문이다. 사역이 하나이므로 인도 직분도 하나보다 더 많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주님과 그 영께서 모두 하나이시므로 인도 직분도 하나이다. 하나의 인도 직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그 영의 하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신약은 사역에서 인도하는 이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대표 권위, 곧 건축을 위한 권위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나님의 대표 권위는 인도하는 이들의 가르침 안에 있었다.

각처 각 교회에서 같은 것을 가르치는 것은 바울의 대표 권위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신약 사역에서의 인도 직분은 신약 사역의 인도자들 자신 안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신약의 가르침 안에 있다.

신약 사역에서의 인도 직분은 통제하는 한 사람이 가진 인도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라는 통제하는 한 이상이 가진 인도 직분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하늘에 속한 그 이상을 거스르지 않고”라고 선포했다 ― 행 26:19.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사도들을 통해 밝혀졌지만, 믿는 이들이 그것에 대한 합당한 이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것을 회복하실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헬. 오이코노미아)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심으로 그분 자신을 표현하는 집,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얻으시려는 하나님의 가정 행정이다.

‘회복’은 손상이나 손실을 입은 후에 정상적인 상태로 복원되거나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회복’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와 표준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회복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내용들에 대한 주님의 회복의 현재의 전진에 따른 것이다.

주님의 회복은 육체 되심과 포함과 강화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 안에서 우리의 중심과 실재와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회복하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회복하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이상이 우리 안에 날마다 새로워져서 우리의 모든 생활과 일과 활동을 통제하는 이상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회복을 떠나는 것은 그가 주님의 회복이 무엇인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님의 회복의 이상을 본 적이 없다면, 사실상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대한 분명한 이상을 보아야 하며, 그런 다음 이 이상에 의해 통제받고 다스림 받고 지시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의 인도 직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관해 하나님께서 주신 이상이 갖고 있는 인도 직분이다. 이 이상이 우리를 제한하고 지시하고 통제하여 혼돈과 분열을 피하게 해 준다.

회복의 책인 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의 중심적이고도 핵심적인 요점은 합당하고도 적절한 인도 직분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는 하나의 통제하는 이상이 인도 직분을 갖고 있으며, 이 이상은 이상을 가져오는 이들을 통해 수행되는 한 사역 안에 있다.

바울은 그와 그의 동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종들과 하나님의 비밀들을 맡은 청지기들’(고전 4:1)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청지기들로서 하나님의 비밀들에 대한 하늘에 속한 이상을 믿는 이들에게 분배하였다. 이 비밀들은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이다(골 2:2, 엡 3:4, 5:32). 이렇게 분배하는 봉사인 청지기 직분이 사도들의 사역이다(엡 3:2, 8-9).

“청지기들에게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신실한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입니다.”(고전 4:2). 바울처럼 우리도 ‘주님께 긍휼을 받은 신실한 사람’이 됨으로(고전 7:25하, 딤전 1:12) 신실한 노예들이 되어야 한다. 신실한 노예들은 언제나 습관처럼 하나님의 가족에게 영적인 양식을 주며,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생명 공급으로 교회 안의 믿는 이들에게 공급한다(마 24:45-47). 우리는 이 시대에서 주님의 일에 신실한 이들이 되어 다음 시대에 주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이들이 되기를 원하며, 주님의 칭찬과 보상은 우리가 한 일의 크기나 양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은사를 최대한으로 사용한 우리의 신실함과 관계된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

오직 느헤미야와 에스라 같은 이러한 신실한 사람들의 인도 직분 아래서라야 이스라엘이 재조성되어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표현인 하나님의 증거, 곧 이방 나라들과는 완전히 다른 한 백성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예표이다.

느헤미야는 에스라 없이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느헤미야는 나라를 재조성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는 것을 인식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으로 명망 높은 사람이었고, 느헤미야는 기꺼이 에스라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였다.

신성한 원칙에 따르면, 몸을 합당하게 대표하는 일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조화된 이들이 수행한다.

혼자 있는 것은 개인주의적인 것이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보내어지는 것은 몸의 원칙에 따라 보내어지는 것이다.

개인주의적으로 행하는 것은 몸의 원칙을 범하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는 몸을 건축하는 참된 일이 긴급히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건축의 일은 오직 조화된 동역자들만이 수행할 수 있다.

“주님은 나와 함께 노예가 되어 섞이는 방식으로 함께 섬길 많은 형제들을 그분께서 예비하셨음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 나는 이것이 주님의 몸을 위해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예비하신 것이며, 주님의 사역을 수행하는 최신의 길이라고 느낀다.” ─ 1997년 3월 24일, 위트니스 리 ‘감사를 드리는 교통의 편지’

이 시대의 완성된 이상을 긴밀히 따름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의 이상은 창세기에 있는 아담의 첫 번째 이상에서부터 교회의 나타남인 새 예루살렘에 관한 궁극적인 이상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포괄해야 한다. 이것이, 오직 이것만이 완전한 이상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이상이 우리에게 완전히 열렸다.

타이베이시에 있는 고궁 박물관에는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라고 불리는 긴 두루마리 그림 한 점이 있다. 거기에는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중국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과 풍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 긴 두루마리의 처음 몇 부분만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국인들의 생활상의 전체 모습에 관해 분명한 그림, 곧 분명한 ‘이상’을 가지려면 두루마리의 한쪽 끝에서부터 다른 쪽 끝까지 전체를 보아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관한 우리 자신의 그림, 우리의 ‘청명상하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에 대한 아담의 이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생명나무가 있는 새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포괄한다. 새 예루살렘은 이러한 이상의 마지막 광경이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의 것을 볼 수 없다.

우리는 이전의 모든 광경들을 내포하는 마지막 광경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최신의 궁극적인 이상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이상을 긴밀히 따라야 한다. 우리는 결코 사람을 따르지 않으며 이상을 따르고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따른다고 말하는 것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현시대에 속한 이상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결된 이상이다.

주님의 회복은 우리의 사랑하는 니 형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때문에 형제님이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1934년에 형제님은 항저우에서 결혼했다. 몇몇 사람이 그 기회를 틈타 소요를 일으켰다. 형제님이 매우 슬퍼했으므로, 나는 어느 날 형제님을 찾아가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니 형제님, 형제님도 아시겠지만 우리 둘 사이에는 천연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제가 형제님이 취하는 길을 취하고 형제님이 전하는 것을 전하는 것은 형제님과의 천연적인 우정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너무나 다릅니다. 저는 북부 지방 사람이고 형제님은 남부 지방 사람입니다. 오늘 제가 형제님이 가고 있는 동일한 길을 가는 이유는 제가 형제님이라는 사람을 따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형제님이 취하고 있는 그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니 형제님, 저는 형제님이 이 점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심지어 어느 날 형제님이 이 길을 떠나신다 해도 저는 여전히 이 길을 갈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몇몇 사람이 소요의 영향을 받아서 더 이상 이 길을 가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따르고 있었다. 그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보이자 그들은 돌아서 버렸다. 그러나 나는 니 형제님께 이렇게 말했다. “심지어 어느 날 형제님이 이 길을 떠나신다 해도 저는 여전히 이 길을 갈 것입니다. 저는 형제님 때문에 이 길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형제님 때문에 이 길을 떠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주님의 길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상을 보았습니다.”

오십이 년이 흘렀다. 오늘날 나는 내가 해 온 모든 일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지난 오십이 년 동안 나는 동일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을 보아 왔다. 어떤 사람들이 왔다가는 떠나갔다. 한 장면이 바뀌고 또 다른 장면이 시작되었다. 대만에서 우리의 일이 시작된 이래로 지난 삼십 년 동안, 우리는 몇 번의 중대한 위기들을 목격했다. 심지어 내가 구원받도록 인도했고 나에게 직접 훈련을 받았던 형제들이 주님의 회복을 떠났다. 이상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참으로 변했고, 이상을 따르는 사람들 또한 변했다. 진심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진지한 한마디의 말을 해 주고 싶다. 주님의 긍휼로 나는 오늘 여기에 서서 여러분에게 이러한 이상을 전해 주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나라는 사람을 따르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분이 주님의 긍휼로, 내가 여러분에게 보여 준 이상을 따르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고 싶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상을 계시해 주신 것은 참으로 그분의 긍휼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나를 따르지 말고 이 이상을 따를 것을 조언한다. 이 이상은 바로 니 형제님과 모든 시대에 걸친 주님의 모든 종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이고,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첫 장면인 아담에서부터 마지막 장면인 새 예루살렘까지를 포괄하는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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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느 8:2-3 …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회중… 앞에 가져왔다. 그는 … 그것을 낭독하였다. …

눅 10:1 이런 일들 후에, 주님께서 다른 칠십 명을 임명하시고, 자신이 가려고 하시던 모든 동네와 모든 장소로 둘씩 둘씩 앞서 보내시며

롬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각 사람이 서로 지체들입니다.

느헤미야는 한 나라의 우두머리이자 통치자였지만 전혀 야심이 없었다. 그가 에스라가 필요함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이것을 보여 준다. 느헤미야는 나라를 재조성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는 것을 인식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으로 명망 높은 에스라가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느헤미야는 기꺼이 에스라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였다. 오늘날 많은 인도자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느헤미야는 에스라 없이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주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셨을 때 증거의 수인 둘의 원칙에 따라 둘씩 둘씩 보내셨다(눅 10:1). 혼자 가는 것은 개인주의적인 것이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보내어지는 것은 몸의 원칙에 따라 보내어지는 것이다.

신성한 원칙에 따라, 주님은 그분의 종이 개인주의적인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모세에게는 아론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아론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모세와 짝을 이루도록 아론을 예비하셨다.

이러한 조화의 원칙은 오늘날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주님께 부름받았다면, 우리는 우리와 조화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둘씩 보내셨음을 지적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섬기려고 나왔을 때 개인주의적으로 처신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항상 그와 조화될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는 절이 이를 입증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과 그리고 형제 소스데네는”. 바울이 이 서신을 썼을 때에는 디모데도 바나바도 그와 함께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소스데네를 짝으로 취했다. 그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형제를 짝으로 취함으로 원칙을 지켰다.

주님을 섬길 때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신성한 원칙에 따른 것이 아니다. 오늘날 신약 경륜 안에서 개인주의적이 되는 것은 몸의 원칙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주의적으로 처신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단체의 원칙을 따라 움직이고 행동함으로써 항상 우리와 조화될 다른 지체를 적어도 한 명은 얻어야 한다. 몸은 개인이 대표할 수 없다. 신성한 원칙에 따르면, 몸을 합당하게 대표하는 일은 언제나, 다른 지체들과 조화된 지체들이 수행한다. 그러나 조화되기는 어렵다. 모세와 아론의 경우에, 동생은 인도자였고 형은 따르는 이였다. 누군가와 조화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육신의 형제와 조화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며, 더 젊은 사람이 인도자인 그러한 상황에서는 조화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원칙적으로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주님은 종종 우리에게 어려운 짝을 안배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짝은 사실상 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짝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제한도 없고 보호도 없고 안전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조화시키시려고 안배하실 때, 종종 이러한 안배를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시간에는 그러한 안배가 유쾌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일부 시간에는 불쾌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쾌함이 우리의 보호이다.

능력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묶이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람은 우리가 고용한 사람과 매우 다르다. 모세는 아론을 고용하지 않았고 바울은 디모데를 고용하지 않았다. 주님의 회복 안에는 몸을 건축하는 참된 일이 긴급히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건축의 일은 오직 조화된 동역자들만이 수행할 수 있다. 하나님의 위임은 이러한 조화에 의해 수행된다.

5일

엡 4:3-4 화평의 매는 띠로 그 영의 하나를 힘써 지키십시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

골 3:10-11 이 새사람…에는 …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엡 4:16 … 온몸은 그 풍성한 공급을 해 주는 각 마디를 통하여, 그리고 각 지체가 분량에 따라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하여 함께 결합되고 함께 짜입니다. 그래서 몸이 자람으로써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회복은 세 가지 주된 항목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항목들은 우리가 교회생활을 실행하는 데 필수적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된다.

먼저, 주님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회복하는 것이다. 지난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거듭 분열되었다. 18세기에 친첸도르프 백작(Count Zinzendorf)은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지키는 것의 필요성을 보았으며, 일 세기 후에 영국의 형제회는 몸의 하나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보고서 어느 정도 몸의 하나를 실행했다. 그런 다음 1920년에 주님은 중국에서 워치만 니 형제님을 일으키셨고 그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보여 주셨다. 니 형제님은 자신이 본 것을 글로 옮겼고, 우리는 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이후부터 중국에서 많은 청년 성도들이 몸의 하나를 증언하는 입장을 취했다. 주님의 회복은 인종이나 문화나 교육 수준이 아무리 다를지라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여야 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나누어질 이유가 없다. 이것은 신약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다.

둘째로, 주님의 회복은 어떤 교리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시다. 그분은 중심이시며 또한 둘레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지난 육십 년 동안 주님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리스도, 교회, 하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많은 출판물을 내게 하셨다.

셋째로, 주님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다. 주님은 그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이 기능을 발휘하는 지체가 되기를 바라신다. 거의 모든 기독교 단체가 성직자-평신도 제도를 실행하고 있다. 사실상 성직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을 대치한다. 이렇게 대치하면, 자연히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기능과 역량과 유용성을 사라지게 하고 죽인다. 이것은 주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없애고,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의 모든 지체들의 은사와 기능과 역량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귀환한 포로들의 인도자들은 왕족인 스룹바벨과 제사장 가문 출신인 에스라와 평범한 가문 출신인 느헤미야였다.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는 모든 인도자들 가운데서 이 세 사람이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느헤미야는 아무런 지위가 없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다. 성경에는 그의 가족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다는 암시가 없다. 그는 높은 수준의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는 페르시아 왕의 궁전에서 일했지만 왕실의 종이었을 뿐이다.

느헤미야로 끝나는 회복의 책들의 중심적이고도 핵심적인 요점은 합당하고도 적절한 인도 직분의 문제이다. 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에는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라는 세 명의 인도자가 언급된다. 그들은 모두 뛰어난 인도자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인도자는 느헤미야였다. 느헤미야는 인간 역사에서 완벽한 인도자이자 최상의 인도자였다. 오직 스룹바벨과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이러한 사람들의 인도 직분 아래서라야 이스라엘이 재조성되어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표현인 하나님의 증거, 곧 이방 나라들과는 완전히 다른 한 백성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예표이다.

4일

행 26:19 아그립바왕이시여, 그러므로 내가 하늘에 속한 그 이상을 거스르지 않고,

엡 3:3-4 하나님께서 이 비밀을 계시로 나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미 간략하게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읽어 보면,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한 나의 이해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잠 29:18 이상이 없으면 백성이 제한을 벗어던지나 …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의 이상은 창세기에 있는 아담의 첫 번째 이상에서부터 교회의 나타남인 새 예루살렘에 관한 궁극적인 이상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포괄해야 한다.

우리는 이전의 모든 광경들을 내포하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마지막 광경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최신의 궁극적인 이상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이상을 긴밀히 따라야 한다. 우리는 결코 사람을 따르지 않으며 이상을 따르고 있다. 즉, 하나님의 완결된 이상을 따르고 있다.

우리가 전하고 가르치는 것은 인도 직분 아래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이라는 계시에 의해 제한받아야 한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신약 경륜과 다르거나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거나 강조하거나 조장하기 시작한다면, 이것을 제한하기 위해 어느 정도 인도 직분을 행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혼란이 없을 것이다.

우리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이 아닌 것들을 강조하는 가르침들이 들어올 위험성이 있다.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신약 경륜을 가르쳐 알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을 배움으로써, 성도들은 무엇이 필요한 것이고 무엇이 필요하지 않은 것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주님의 새 길로 인해, 모든 사람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늘에 속한 이상, 곧 신약 경륜의 계시에 의해 제한받아야 한다.

신약 사역에서의 인도 직분은 사실상 통제하는 한 사람이 가진 인도 직분이 아니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한 사람이 사람들과 일들을 통제한다는 관념을 거부한다. 우리는 분명 어떤 인도 직분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한 사람이 통제하는 그런 인도 직분이 아니다. 그 대신 하나의 통제하는 계시가 인도 직분을 갖고 있으며, 이 계시는 계시를 가져오는 이들을 통해 수행되는 한 사역 안에 있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계시가 우리를 통제하고 제한한다.

우리 가운데의 사역은 어떤 개인의 사역이 아니라 유일한 신약 사역, 곧 교회 시대에 이 땅에서의 주님의 움직임의 사역이다. 주님은 이 땅에서 그분의 유일한 사역을 통하여 움직이시며, 우리 모두는 이 유일한 사역에 참여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가 사람들의 집 문을 두드리러 나가는 것도 이 유일한 사역의 일부이다. 인도 직분은 주님의 회복 안에서 사람들을 통제하는 어떤 인물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의 인도 직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가 갖고 있는 인도 직분이다. 이 계시가 우리를 제한하고 지시하고 통제하여 혼돈과 분열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회복’은 손상이나 손실을 입은 후에 정상적인 상태로 복원되거나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교회의 회복에 대해 말할 때, 이것은 어떤 것이 원래 있었는데 유실되었거나 손상되었고, 따라서 이제는 그것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수 세기에 걸친 교회 역사를 통해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래 의도대로 복원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에 관한 우리의 이상은 현재의 상태나 전통적인 관습에 지배받아서는 안 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원래 의도와 표준에 지배받아야 한다.

3일

고후 13:10 … 내가 떠나 있는 동안 이런 내용으로 편지를 쓰는 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게 될 때,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권위를 가지고 여러분을 엄하게 대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 권위는 사람들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지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고전 4:17 이 때문에 내가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인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보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나의 생활 방식,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을 여러분에게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신약은 사역에서 인도하는 이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대표 권위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한 가정에 대표 권위가 있을 뿐 아니라 인간 정부에도 대표 권위가 있다. 대표 권위들이 없다면 지구 전체는 무정부 상태로 무질서하게 되어 살기에 부적합한 곳이 될 것이다. 성경은 교회생활과 사역 안에 하나님의 대표 권위가 있음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사역에서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대표 권위는 건축하기 위한 것이지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후 13:10). 하나님의 대표 권위는 인도하는 이들의 가르침에 있었다. 바울은 그의 가르침 안에 있는 그의 권위를 사용했다. 그는 각처 각 교회에서 같은 것을 가르쳤고(고전 4:17하), 교회들은 그가 말한 것을 따랐다. 이것은 바울의 대표 권위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권위는 항상 합당한 가르침을 뒤따른다.

바울과 요한이 행사한 인도 직분은 조직상의 인도 직분이 아니었다. 처음 열두 사도가 주 예수님에 의해 세워졌지만 조직되지 않았다. 주 예수님은 열둘을 동등하게 세우셨다. 신약에서 우리는 조직을 볼 수 없다. 모든 주요 교파에는 위원들과 위원장이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을 그들의 계급 조직의 수장으로 두고 있다. 그러나 신약 사역의 인도 직분은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인도 직분이 아니다. 주님의 회복 안에는 위원들이 없고 위원장이나 최고 지도자도 없다.

게다가 이 인도 직분은 사역자들의 움직임을 다루는 인도 직분이 아니라, 사역자들의 가르침을 다루는 인도 직분이다. 이처럼 사역자들의 가르침을 다루는 인도 직분은 사역자들이 분열되지 않도록 그들을 제한한다. 신약성경에서 때때로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 중 어떤 이에게 어떤 곳으로 가라고 말하거나(고전 4:17) 어떤 곳에 남아 있으라고 말했다(딛 1:5). 그러나 기본적으로 말해서, 인도 직분은 사역자들의 활동에 행사되지 않는다. 누구도 주님을 위한 일에 어떤 통제도 행사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에게 알래스카로 갈 부담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인지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누구도 그가 가거나 가지 않는 것을 통제하지 않지만, 그는 자신의 결정이 주님과 몸과의 교통을 통해 주님에게서 온 것인지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일꾼들의 움직임에는 어떤 제한도 행사되지 않지만, 만일 누군가가 일어나서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빗나간 것을 가르친다면, 인도 직분에 있는 이들이 일어나서 그 사람에게 다르게 가르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다. 신약에 나타난 인도 직분은 동역자들의 활동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주로 사역자들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주님의 회복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데, 누가 그토록 많은 동역자와 봉사자의 활동을 총괄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동역자들의 활동을 총괄할 위원회나 선교부가 없다. 누구도 사역자들의 활동을 총괄할 위치에 있지 않다. 사역자들은 반드시 기도하면서 주님의 인도를 구하고, 오늘날 이 땅에서의 주님의 움직임에 매우 관심이 많은 사랑스러운 성도들과 교통해야 한다. 성도들과 교통하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 사역자들은 자신이 현재 있는 곳에 머물러야 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할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될 것이다. 홀로 가야 할지 아니면 몇몇 다른 이들과 함께 가야 할지도 분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꾼들이 무엇을 가르칠지, 무엇을 전할지는 제한받아야 한다. 이 방면에서는 인도 직분이 매우 필요하다.

2일

딤전 1:3-4 내가 마케도니아로 갈 때, 그대에게 에베소에 머무르라고 권유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어떤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다른 것들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 그런 것들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의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신약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사도들 스스로는 교회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이 공급한 말씀만이 권위를 가진다. 만일 교회들과 성도들이 말씀에 따라, 곧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에 따라 전진해 나간다면 사도들에게는 교회들을 다룰 권위가 없다. 그러나 어떤 교회가 빗나가거나 잘못된 길로 간다면,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 상황을 처리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무엇을 원합니까? 내가 매를 가지고 여러분에게 가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사랑 안에서 온유한 영으로 가야 하겠습니까?”(고전 4:21) 그는 또한 자신이 영으로 그들과 함께 있어서, 그들 가운데 있는 죄 있는 그 사람을 처리하고 쫓아냈다고 그들에게 말했다(고전 5:3-5). 사도들의 권위는 영적인 것이며 그들의 말씀의 사역 안에 있다. 사도들은 교회의 사무에 개입하는 위치상의 권위를 갖지 않는다.

오늘날 신약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에는 사실상 천연적인 의미에서의 인도 직분이 없다. 사도들 가운데에는 공식적이고 영구적이며 조직적인 인도자가 없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 안의 장로들의 경우도 동일하다. 더욱이 모든 교회들은 동일한 위치에 있고 통합하는 조직이 없다. 마찬가지로 일과 관련해서 모든 권역과 구역과 분야가 동일한 위치에 있다. 조직도 없고, 계급 제도도 없으며, 공식적이고 영구적인 인도자도 없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를 존중하고 높인다.

신약에는 오직 한 사역만 있고, 이 사역에는 오직 한 인도 직분만 있다. 신약 사역의 인도 직분에 관한 진리가 있기는 하지만, 주님은 공식적으로 어떤 사람을 인도자로 세우지 않으셨다. 사도행전 초반부는 우리에게 베드로가 사도들 가운데서 인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베드로를 공식적인 인도자로 세우지 않으셨다. 인도 직분은 생명에 따라, 실지적인 필요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세워지는 것이었다. 인도 직분은 생명의 성장에 의해 형성되고, 필요에서 나온 결과이다. 필요가 없다면 인도 직분은 나타날 수 없다.

사역이 하나이므로(행 1:17, 25) 인도 직분도 하나보다 더 많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주님과 그 영께서 모두 하나이시므로(엡 4:4-6) 인도 직분도 유일하다. 유일한 인도 직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그 영의 하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엡 4:3). 오늘날의 기독교가 분열된 것은 너무 많은 인도 직분이 있기 때문이다. 인도자마다 한 무리를 거느리고 있는데, 그 무리가 곧 그의 인도를 받는 영역이며, 그 영역이 하나의 분파가 된다. 따라서 인도 직분의 문제를 합당하게 적용하지 않거나 인도 직분에 대해 합당한 관점을 갖지 못한다면 분열이 일어날 것이다.

인도 직분은 사도들의 가르침 안에서 산출되고 강화되며 제한받고 통제받는다. 디모데전서 1장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한 가지 일을 하도록 당부했다. 디모데는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과 다른 것들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디모데는 이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사도들의 가르침과 다른 것들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 안으로 분배함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표현하는 몸을 얻으시고 삼일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안에서 완전하고 영원한 표현을 얻으시도록 하는 것이다.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치는 사역자는 누구든지 이러한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경륜과 다르게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었다. 디모데전서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것을 가르치도록 명령하는 어떤 인도 직분이 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신언노트, 2023 03 26

회복의 책인
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의
중심적이고도 핵심적인 요점
― 주님의 회복 안에서의
합당하고도 적절한
인도 직분
그 회복 책들인
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의
그 중심적이고 또 중대한 요점
―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그 적절하고 또 충분한
(그 특유의 또 적절한)
인도 직분

천연적인 관념,
사람의 관념에 따르면
인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다.
그러나 마태복음 20장과 23장에서
주님은
그들 가운데
크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인도 직분에 대한
주님의 관념은
천연적인 관념과는
정반대이다.
물론 오늘날
주님의 자녀들 가운데에는
인도하는 이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서
인도 직분이
노예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인도하는 이가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노예가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참되고 정직하다면,
우리는
인도하는 직분은 좋아하지만
노예가 되는 것은 좋아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의 백성 가운데서
노예라면,
기꺼이 화장실을 깨끗이 하고
마루의 먼지를 청소하며
의자를 정돈하고
안내 봉사를 하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인도 직분에 대한
세상적인 관념과는
얼마나 다른지!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그분의 백성 가운데에
오직 한 분의 인도자만 계시며
(이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서
그분의 자녀들 가운데 있는
인도 직분은
공식적이거나
영구적이거나
또는 조직적이지 않다.
인도 직분은
영적인 역량에 달려 있다.
가장 큰 역량을 지닌 사람이
인도자이다.
오순절 날에는
베드로에게
가장 큰 역량이 있었지만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야고보에게 있었다.

바나바와 바울의 관계가
이 원칙을
더 잘 설명해 준다.
사도행전 13장 2절에서
바나바의 이름이
바울(사울)보다 먼저 나온다.
그러나 그들이
위임을 수행할 때,
바울의 영적인 역량이
더 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바울이 인도했다(행 13:9).
바나바는
바울의 역량이
자신의 역량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인도하는 것에 대해
바울과 다투지 않았다.

이 모든 사례에서
밝혀 주는 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인도 직분은
공식적이거나
영구적이거나
또는 조직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인도 직분은 언제나
영적인 역량에(수용력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인도 직분에 대한
사람의 관념을
제쳐 두시려고(따로 두시려고)
이렇게 정하셨다.
구약에서 결코
세 명이나 네 명의 왕들이
동시에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약에서
주님은
한 사도가 아닌
열두 사도를 임명하셨다.
후에 주님은
다른 이들,
가령 바울과
바나바와
디모데 같은 사람들을
더하셨다.
나는
많은 사도가 있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고린도후서 11장 13절에서
거짓 사도들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각 지방에 있는 교회 안에는 항상
다수의 장로들이 있다.
장로 직분이
복수(複數)라는 점은
교회 안의 인도 직분이
실제로 고정적인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나를
주님의 회복의 인도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참된 상황에 대해
분명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그 진리의 실행과
반대되는 것이다.
나는
교회들이나 성도들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반대로 많은 때
여러 교회의 장로들이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해 달라고
내게 간청했을 때,
나는 항상 그들에게
주님께 가서
기도하고
인도를 받으라고
말했다.
주님의 회복 안에는
조직화된 인도 직분이 없다.
오래전에 교파를 떠날 때
우리는 주로
계급 제도와 조직을 떠났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제가 한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다.

신약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한 몸임을 계시한다.
지체는 많을지라도
오직 하나의 머리만 계시다.
하위 머리들을
(아래 머리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모든 지체들에게
명령들을 주시는
한 머리께서 계시다.
주님의 회복 안에는
조직이 없다;
단(오직) 하나의 유기체,
곧 그 몸만 있다.
그 몸은
한 유일한 머리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안에서
또 주님의 회복 안에서
인도 직분은
영적인 역량에 달려 있다.
인도 직분은
공식적이거나,
영구적이거나,
조직적이거나,
또는 계급적이지 않다.

인도 직분에 대한
주님의 관념은
천연적인 관념과는
정반대이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에는 사실상
천연적인 의미에 따른
인도 직분이 없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서
인도 직분은
노예를 의미한다.
인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기꺼이 노예가 되고자 해야 한다.

인도 직분은
생명의 성장에 의해 형성되고,
그 필요의 한 결과이다.
필요가 없다면
어떤 인도 직분도
나타내질 수 없다.

인도 직분에 대한
사람의 관념을
제쳐 두시려고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가운데의
인도 직분이 항상
영적인 역량에 달려 있도록
정하셨다.

주님의 회복 안에는
조직화된 인도 직분이 없고,
거기에
통합하는 조직이(조직화가) 없다.
대신에, 직접
그 모든 지체들에게
명령들을 주시는
한 머리께서 계시고,
또 한 유기체,
곧 그 몸이 있다.

신약에 따르면,
그 사도들의 권위는
영적이며
그들의 그 말씀의 사역 안에 있다.

그들은
그 교회 사무들에 간섭하는(개입하는)
위치에서의 권위를
가지지 않는다.
오직 그들에 의해 공급된
그 말씀만이
권위를 가진다.

그 사도들이
그 신약 가르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교회들이
그 사도들을 따른다.

만약 한 교회가
빗나가거나
또는 잘못 인도된다면,
그 사도들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 상황을 처리할
의무와 또 책임을 가진다.

인도 직분은
사도들의 가르침 안에서
산출되고
강화되며
제한받는다.

신약에는
한 인도 직분이 있는
한 사역이 있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분열된 것은
너무 많은 인도 직분이
있기 때문이다.
사역이 하나이므로
인도 직분도
하나보다 더 많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주님과 그 영께서 모두
하나이시므로
인도 직분도 하나이다.
하나의 인도 직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그 영의 하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신약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사도들 스스로는
교회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이 공급한
말씀만이
권위를 가진다.
만일 교회들과 성도들이
말씀에 따라,
곧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에 따라
전진해 나간다면
사도들에게는
교회들을 다룰
권위가 없다.
그러나 어떤 교회가
빗나가거나
잘못된 길로 간다면,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 상황을 처리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무엇을 원합니까?
내가
매를 가지고
여러분에게 가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사랑 안에서
온유한 영으로
가야 하겠습니까?”
(고전 4:21)
그는 또한
자신이
영으로
그들과 함께 있어서,
그들 가운데 있는
죄 있는 그 사람을
처리하고 쫓아냈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사도들의 권위는
영적인 것이며
그들의 말씀의 사역 안에 있다.
사도들은
교회의 사무에 개입하는
위치상의 권위를
가지지 않는다.

오늘날 신약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에는 사실상
천연적인 의미에서의
인도 직분이 없다.
사도들 가운데에는
공식적이고 영구적이며 조직적인
인도자가 없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 안의
장로들의 경우도 동일하다.
더욱이 모든 교회들은
동일한 위치에 있고
통합하는 조직이 없다.
마찬가지로 일과 관련해서
모든 권역과 구역과 분야가
동일한 위치에 있다.
조직도 없고,
계급 제도도 없으며,
공식적이고 영구적인
인도자도 없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를
존중하고 높인다.

신약에는
오직 한 사역만 있고,
이 사역에는
오직 한 인도 직분만 있다.
신약 사역의 인도 직분에 관한
진리가 있기는 하지만,
주님은 공식적으로
어떤 사람을
인도자로 세우지 않으셨다.
사도행전 초반부는
우리에게
베드로가
사도들 가운데서
인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베드로를
공식적인 인도자로
세우지 않으셨다.
인도 직분은
생명에 따라,
실지적인 필요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세워지는 것이었다.
인도 직분은
생명의 성장에 의해 형성되고,
필요에서 나온 결과이다.
필요가 없다면
인도 직분은 나타날 수 없다.

사역이 하나이므로
인도 직분도
하나보다 더 많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주님과 그 영께서 모두
하나이시므로
인도 직분도 유일하다.
유일한 인도 직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그 영의 하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분열된 것은
너무 많은 인도 직분이
있기 때문이다.
인도자마다
한 무리를 거느리고 있는데,
그 무리가 곧
그의 인도를 받는 영역이며,
그 영역이
하나의 분파가 된다.
따라서 인도 직분의 문제를
합당하게 적용하지 않거나
인도 직분에 대해
합당한 관점을 가지지 못한다면
분열이 일어날 것이다.

인도 직분은
사도들의 가르침 안에서
산출되고 강화되며
제한받고 통제받는다.
디모데전서 1장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한 가지 일을 하도록
당부했다.
디모데는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과 다른 것들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디모데는
이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사도들의 가르침과 다른 것들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 안으로 분배함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표현하는
몸을 얻으시고
삼일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안에서
완전하고 영원한
표현을 얻으시도록 하는 것이다.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치는
사역자는 누구든지
이러한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경륜과 다르게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디모데전서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것을 가르치도록
명령하는
어떤 인도 직분이 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신약은
사역에서
인도하는 이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대표 권위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한 가정에
대표 권위가 있을 뿐 아니라
인간 정부에도
대표 권위가 있다.
대표 권위들이 없다면
지구 전체는
무정부 상태로
무질서하게 되어
살기에 부적합한 곳이 될 것이다.
성경은
교회생활과 사역 안에
하나님의 대표 권위가 있음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사역에서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대표 권위는
건축하기 위한 것이지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대표 권위는
인도하는 이들의
가르침에 있었다.
바울은
그의 가르침 안에 있는
그의 권위를 사용했다.
그는
각처 각 교회에서
같은 것을 가르쳤고,
교회들은
그가 말한 것을 따랐다.
이것은
바울의 대표 권위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권위는 항상
합당한 가르침을 뒤따른다.

바울과 요한이 행사한
인도 직분은
조직상의 인도 직분이 아니었다.
처음 열두 사도가
주 예수님에 의해 세워졌지만
조직되지 않았다.
주 예수님은
열둘을
동등하게 세우셨다.
신약에서 우리는
조직을 볼 수 없다.
모든 주요 교파에는
위원들과 위원장이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을
그들의 계급 조직의
수장으로 두고 있다.
그러나 신약 사역의 인도 직분은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인도 직분이 아니다.
주님의 회복 안에는
위원들이 없고
위원장이나 최고 지도자도 없다.

게다가 이 인도 직분은
사역자들의 움직임을 다루는
인도 직분이 아니라,
사역자들의 가르침을 다루는
인도 직분이다.
이처럼 사역자들의 가르침을 다루는
인도 직분은
사역자들이 분열되지 않도록
그들을 제한한다.
신약성경에서 때때로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 중 어떤 이에게
어떤 곳으로 가라고 말하거나
어떤 곳에 남아 있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말해서,
인도 직분은
사역자들의 활동에
행사되지 않는다.
누구도
주님을 위한 일에
어떤 통제도
행사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에게
알래스카로 갈 부담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인지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누구도
그가
가거나 가지 않는 것을
통제하지 않지만,
그는
자신의 결정이
주님과 몸과의 교통을 통해
주님에게서 온 것인지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일꾼들의 움직임에는
어떤 제한도 행사되지 않지만,
만일 누군가가 일어나서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빗나간 것을 가르친다면,
인도 직분에 있는 이들이 일어나서
그 사람에게
다르게 가르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다.
신약에 나타난 인도 직분은
동역자들의 활동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주로 사역자들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주님의 회복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데,
누가
그토록 많은 동역자와 봉사자의
활동을 총괄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동역자들의 활동을 총괄할
위원회나 선교부가 없다.
누구도
사역자들의 활동을 총괄할
위치에 있지 않다.
사역자들은 반드시
기도하면서
주님의 인도를 구하고,
오늘날
이 땅에서의 주님의 움직임에
매우 관심이 많은
사랑스러운 성도들과
교통해야 한다.
성도들과 교통하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
사역자들은
자신이
현재 있는 곳에
머물러야 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할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될 것이다.
홀로 가야 할지 아니면
몇몇 다른 이들과 함께 가야 할지도
분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꾼들이
무엇을 가르칠지,
무엇을 전할지는
제한받아야 한다.
이 방면에서는
인도 직분이
매우 필요하다.

신약은
사역에서 인도하는 이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대표 권위,
곧 건축을 위한 권위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나님의 대표 권위는
인도하는 이들의
가르침 안에 있었다.

각처 각 교회에서
같은 것을 가르치는 것은
바울의 대표 권위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신약 사역에서의 인도 직분은
신약 사역의 인도자들 자신 안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신약의 가르침 안에 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의 이상은
창세기에 있는
아담의 첫 번째 이상에서부터
교회의 나타남인
새 예루살렘에 관한
궁극적인 이상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포괄해야 한다.

우리는
이전의 모든 광경들을 내포하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마지막 광경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최신의 궁극적인 이상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이상을
긴밀히 따라야 한다.
우리는 결코
사람을 따르지 않으며
이상을 따르고 있다.
즉, 하나님의 완결된 이상을
따르고 있다.

우리가
전하고 가르치는 것은
인도 직분 아래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이라는
계시에 의해
제한받아야 한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신약 경륜과
다르거나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거나
강조하거나
조장하기 시작한다면,
이것을
제한하기 위해
어느 정도
인도 직분을 행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혼란이 없을 것이다.

우리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이 아닌 것들을 강조하는
가르침들이 들어올
위험성이 있다.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신약 경륜을
가르쳐
알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을 배움으로써,
성도들은
무엇이 필요한 것이고
무엇이 필요하지 않은 것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주님의 새 길로 인해,
모든 사람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늘에 속한 이상,
곧 신약 경륜의 계시에 의해
제한받아야 한다.

신약 사역에서의
인도 직분은 사실상
통제하는 한 사람이 가진
인도 직분이 아니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한 사람이
사람들과 일들을 통제한다는
관념을 거부한다.
우리는 분명
어떤 인도 직분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한 사람이 통제하는
그런 인도 직분이 아니다.
그 대신 하나의 통제하는 계시가
인도 직분을 가지고 있으며,
이 계시는
계시를 가져오는
이들을 통해 수행되는
한 사역 안에 있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계시가
우리를
통제하고 제한한다.

우리 가운데의 사역은
어떤 개인의 사역이 아니라
유일한 신약 사역,
곧 교회 시대에
이 땅에서의
주님의 움직임의 사역이다.
주님은
이 땅에서
그분의 유일한 사역을 통하여
움직이시며,
우리 모두는
이 유일한 사역에
참여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가
사람들의 집 문을 두드리러
나가는 것도
이 유일한 사역의 일부이다.
인도 직분은
주님의 회복 안에서
사람들을 통제하는
어떤 인물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의
인도 직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가 가지고 있는
인도 직분이다.
이 계시가
우리를
제한하고 지시하며 통제하여
혼돈과 분열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회복’은
손상이나 손실을 입은 후에
정상적인 상태로
복원되거나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교회의 회복에 대해
말할 때,
이것은
어떤 것이
원래 있었는데
유실되었거나
손상되었고,
따라서 이제는
그것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수 세기에 걸친
교회 역사를 통해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래 의도대로
복원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에 관한
우리의 이상은
현재의 상태나
전통적인 관습에
지배받아서는 안 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원래 의도와 표준에
지배받아야 한다.

신약 사역에서의
인도 직분은
통제하는 한 사람이 가진
인도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라는
통제하는 한 이상이 가진
인도 직분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하늘에 속한
그 이상을 거스르지 않고”
라고 선포했다
― 행 26:19.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사도들을 통해
밝혀졌지만,
믿는 이들이
그것에 대한
합당한 이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것을 회복하실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헬. 오이코노미아)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심으로
그분 자신을 표현하는 집,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얻으시려는
하나님의 가정 행정이다.

‘회복’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와 표준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회복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내용들에 대한
주님의 회복의
현재의 전진에 따른 것이다.

주님의 회복은
육체 되심과 포함과 강화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 안에서
우리의
중심과 실재와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회복하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회복하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이상이
우리 안에
날마다 새로워져서
우리의 모든 생활과 일과 활동을 통제하는
이상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회복을 떠나는 것은
그가
주님의 회복이 무엇인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님의 회복의 이상을
본 적이 없다면,
사실상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대한
분명한 이상을 보아야 하며,
그런 다음 이 이상에 의해
통제받고
다스림 받으며
지시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의
인도 직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관해
하나님께서 주신
이상이 가지고 있는
인도 직분이다.
이 이상이
우리를
제한하고 지시하며 통제하여
혼돈과 분열을
피하게 해 준다.

회복의 책인
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의
중심적이고도 핵심적인 요점은
합당하고도 적절한
인도 직분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는
하나의 통제하는 이상이
인도 직분을 가지고 있으며,
이 이상은
이상을 가져오는 이들을 통해 수행되는
한 사역 안에 있다.

바울은
그와 그의 동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종들과
하나님의 비밀들을 맡은 청지기들’
(고전 4:1)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청지기들로서
하나님의 비밀들에 대한
하늘에 속한 이상을
믿는 이들에게 분배하였다.
이 비밀들은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이다.
이렇게 분배하는 봉사인
청지기 직분이
사도들의 사역이다.

“청지기들에게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신실한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입니다.”
(고전 4:2).
바울처럼
우리도
‘주님께
긍휼을 받은
신실한 사람’이 됨으로
(고전 7:25, 딤전 1:12)
신실한 노예들이
되어야 한다.
신실한 노예들은
언제나 습관처럼
하나님의 가족에게
영적인 양식을 주며,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생명 공급으로
교회 안의 믿는 이들에게
공급한다.
우리는
이 시대에서
주님의 일에
신실한 이들이 되어
다음 시대에
주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이들이
되기를 원하며,
주님의 칭찬과 보상은
우리가 한 일의 크기나 양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은사를
최대한으로 사용한
우리의 신실함과 관계된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

오직 느헤미야와 에스라 같은
이러한 신실한 사람들의
인도 직분 아래서라야
이스라엘이 재조성되어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표현인
하나님의 증거,
곧 이방 나라들과는 완전히 다른
한 백성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예표이다.

주님의 회복은
세 가지 주된 항목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항목들은
우리가
교회생활을 실행하는 데 필수적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된다.

먼저, 주님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회복하는 것이다.
지난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거듭 분열되었다.
18세기에
친첸도르프 백작(Count Zinzendorf)은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지키는 것의
필요성을 보았으며,
일 세기 후에
영국의 형제회는
몸의 하나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보고서
어느 정도 몸의 하나를
실행했다.
그런 다음 1920년에
주님은
중국에서
워치만 니 형제님을 일으키셨고
그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보여 주셨다.
니 형제님은
자신이 본 것을
글로 옮겼고,
우리는
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이후부터
중국에서
많은 청년 성도들이
몸의 하나를 증언하는
입장을 취했다.
주님의 회복은
인종이나 문화나 교육 수준이
아무리 다를지라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여야 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나누어질 이유가 없다.
이것은
신약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다.

둘째로,
주님의 회복은
어떤 교리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다.
그분께서
중심이시며
또한 둘레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지난 육십 년 동안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리스도,
교회,
하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많은 출판물을
내게 하셨다.

셋째로, 주님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다.
주님은
그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이
기능을 발휘하는 지체가 되기를
바라신다.
거의 모든 기독교 단체가
성직자-평신도 제도를
실행하고 있다.
사실상 성직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을
대치한다.
이렇게 대치하면,
자연히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기능과 역량과 유용성을
사라지게 하고
죽인다.
이것은
주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없애고,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의
모든 지체들의
은사와 기능과 역량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귀환한 포로들의 인도자들은
왕족인 스룹바벨과
제사장 가문 출신인 에스라와
평범한 가문 출신인 느헤미야였다.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는
모든 인도자들 가운데서
이 세 사람이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느헤미야는
아무런 지위가 없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다.
성경에는
그의 가족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다는
암시가 없다.
그는
높은 수준의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는
페르시아 왕의
궁전에서 일했지만
왕실의 종이었을 뿐이다.

느헤미야로 끝나는
회복의 책들의
중심적이고도 핵심적인 요점은
합당하고도 적절한
인도 직분의 문제이다.
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에는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라는
세 명의 인도자가 언급된다.
그들은 모두
뛰어난 인도자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인도자는
느헤미야였다.
느헤미야는
인간 역사에서
완벽한 인도자이자
최상의 인도자였다.
오직 스룹바벨과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이러한 사람들의
인도 직분 아래서라야
이스라엘이 재조성되어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표현인
하나님의 증거,
곧 이방 나라들과는 완전히 다른
한 백성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예표이다.

느헤미야는
한 나라의 우두머리이자 통치자였지만
전혀 야심이 없었다.
그가
에스라가 필요함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이것을 보여 준다.
느헤미야는
나라를 재조성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는 것을
인식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으로 명망 높은
에스라가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느헤미야는 기꺼이
에스라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였다.
오늘날 많은 인도자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느헤미야는
에스라 없이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주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셨을 때
증거의 수인
둘의 원칙에 따라
둘씩 둘씩 보내셨다.
혼자 가는 것은
개인주의적인 것이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보내어지는 것은
몸의 원칙에 따라
보내어지는 것이다.

신성한 원칙에 따라,
주님은
그분의 종이
개인주의적인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모세에게는
아론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아론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모세와 짝을 이루도록
아론을 예비하셨다.

이러한 조화의 원칙은
오늘날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주님께 부름받았다면,
우리는
우리와 조화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둘씩 보내셨음을
지적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섬기려고 나왔을 때
개인주의적으로 처신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항상
그와 조화될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는 절이
이를 입증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과
그리고 형제 소스데네는”.
바울이
이 서신을 썼을 때에는
디모데도 바나바도
그와 함께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소스데네를
짝으로 취했다.
그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형제를
짝으로 취함으로
원칙을 지켰다.

주님을 섬길 때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신성한 원칙에 따른 것이 아니다.
오늘날 신약 경륜 안에서
개인주의적이 되는 것은
몸의 원칙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주의적으로 처신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단체의 원칙을 따라
움직이고 행동함으로써 항상
우리와 조화될
다른 지체를
적어도 한 명은
얻어야 한다.
몸은
개인이 대표할 수 없다.
신성한 원칙에 따르면,
몸을 합당하게 대표하는 일은 언제나,
다른 지체들과 조화된 지체들이
수행한다.
그러나 조화되기는 어렵다.
모세와 아론의 경우에,
동생은 인도자였고
형은 따르는 이였다.
누군가와 조화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육신의 형제와 조화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며,
더 젊은 사람이 인도자인
그러한 상황에서는
조화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원칙적으로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주님은 종종
우리에게
어려운 짝을
안배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짝은 사실상
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짝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제한도 없고
보호도 없으며
안전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조화시키시려고
안배하실 때,
종종 이러한 안배를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시간에는
그러한 안배가
유쾌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일부 시간에는
불쾌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쾌함이
우리의 보호이다.

능력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묶이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람은
우리가 고용한 사람과
매우 다르다.
모세는
아론을 고용하지 않았고
바울은
디모데를 고용하지 않았다.
주님의 회복 안에는
몸을 건축하는
참된 일이
긴급히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건축의 일은 오직
조화된 동역자들만이
수행할 수 있다.
하나님의 위임은
이러한 조화에 의해 수행된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으로 명망 높은 사람이었고,
느헤미야는 기꺼이
에스라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였다.

신성한 원칙에 따르면,
몸을 합당하게 대표하는 일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조화된 이들이
수행한다.

개인주의적으로 행하는 것은
몸의 원칙을 범하는 것이다.

“주님은
나와 함께 노예가 되어
섞이는 방식으로 함께 섬길
많은 형제들을
그분께서 예비하셨음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
나는
이것이
주님의 몸을 위해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예비하신 것이며,
주님의 사역을 수행하는
최신의 길이라고 느낀다.”
─ 1997년 3월 24일, 위트니스 리
‘감사를 드리는 교통의 편지’

이 시대의 완성된 이상을
긴밀히 따름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의 이상은
창세기에 있는
아담의 첫 번째 이상에서부터
교회의 나타남인
새 예루살렘에 관한
궁극적인 이상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포괄해야 한다.
이것이,
오직 이것만이
완전한 이상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이상이
우리에게 완전히 열렸다.

타이베이시에 있는
고궁 박물관에는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라고 불리는
긴 두루마리 그림 한 점이 있다.
거기에는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중국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과 풍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 긴 두루마리의
처음 몇 부분만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국인들의 생활상의
전체 모습에 관해
분명한 그림,
곧 분명한 ‘이상’을 가지려면
두루마리의 한쪽 끝에서부터
다른 쪽 끝까지
전체를 보아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관한
우리 자신의 그림,
우리의 ‘청명상하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에 대한
아담의 이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생명나무가 있는
새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포괄한다.
새 예루살렘은
이러한 이상의
마지막 광경이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의 것을
볼 수 없다.

우리는
이전의 모든 광경들을 내포하는
마지막 광경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최신의 궁극적인 이상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이상을
긴밀히 따라야 한다.
우리는 결코
사람을 따르지 않으며
이상을 따르고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따른다고 말하는 것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현시대에 속한
이상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결된 이상이다.

주님의 회복은
우리의 사랑하는 니 형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때문에
형제님이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1934년에 형제님은
항저우에서 결혼했다.
몇몇 사람이
그 기회를 틈타
소요를 일으켰다.
형제님이 매우 슬퍼했으므로,
나는 어느 날
형제님을 찾아가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니 형제님,
형제님도 아시겠지만
우리 둘 사이에는
천연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제가
형제님이 취하는
길을 취하고
형제님이 전하는
것을 전하는 것은
형제님과의
천연적인 우정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너무나 다릅니다.
저는
북부 지방 사람이고
형제님은
남부 지방 사람입니다.
오늘 제가
형제님이 가고 있는
동일한 길을 가는 이유는
제가
형제님이라는
사람을 따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형제님이 취하고 있는
그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니 형제님,
저는
형제님이
이 점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심지어 어느 날
형제님이
이 길을 떠나신다 해도
저는 여전히
이 길을 갈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몇몇 사람이
소요의 영향을 받아서
더 이상 이 길을 가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따르고 있었다.
그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보이자
그들은
돌아서 버렸다.
그러나 나는
니 형제님께
이렇게 말했다.
“심지어 어느 날
형제님이
이 길을 떠나신다 해도
저는 여전히
이 길을 갈 것입니다.
저는
형제님 때문에
이 길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형제님 때문에
이 길을 떠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주님의 길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상을 보았습니다.”

오십이 년이 흘렀다.
오늘날 나는
내가 해 온 모든 일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지난 오십이 년 동안 나는
동일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을
보아 왔다.
어떤 사람들이
왔다가는 떠나갔다.
한 장면이 바뀌고
또 다른 장면이 시작되었다.
대만에서
우리의 일이 시작된 이래로
지난 삼십 년 동안,
우리는
몇 번의 중대한 위기들을 목격했다.
심지어 내가
구원받도록 인도했고
나에게 직접 훈련을 받았던 형제들이
주님의 회복을 떠났다.
이상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참으로 변했고,
이상을 따르는 사람들 또한 변했다.
진심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진지한 한마디의
말을 해 주고 싶다.
주님의 긍휼로 나는
오늘 여기에 서서
여러분에게
이러한 이상을
전해 주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나라는 사람을
따르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분이
주님의 긍휼로,
내가
여러분에게 보여 준
이상을 따르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고 싶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상을 계시해 주신 것은
참으로 그분의 긍휼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나를 따르지 말고
이 이상을 따를 것을
조언한다.
이 이상은 바로
니 형제님과
모든 시대에 걸친
주님의 모든 종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이고,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첫 장면인 아담에서부터
마지막 장면인 새 예루살렘까지를
포괄하는 이상이다.

1일

마 20:25-28 … “이방인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권세를 부리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이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지 크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여러분의 종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여러분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생명을 속전으로 주려고 온 것입니다.”

천연적인 관념, 사람의 관념에 따르면 인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다. 그러나 마태복음 20장과 23장에서 주님은 그들 가운데 크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인도 직분에 대한 주님의 관념은 천연적인 관념과는 정반대이다. 물론 오늘날 주님의 자녀들 가운데에는 인도하는 이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서 인도 직분이 노예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인도하는 이가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노예가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참되고 정직하다면, 우리는 인도하는 직분은 좋아하지만 노예가 되는 것은 좋아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의 백성 가운데서 노예라면, 기꺼이 화장실을 깨끗이 하고 마루의 먼지를 청소하고 의자를 정돈하고 안내 봉사를 하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인도 직분에 대한 세상적인 관념과는 얼마나 다른지!

하나님의 경륜에 따르면, 그분의 백성 가운데에는 오직 한 인도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 있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서 그분의 자녀들 가운데 있는 인도 직분은 공식적이거나 영구적이거나 조직적이지 않다. 인도 직분은 영적인 역량에 달려 있다. 가장 큰 역량을 지닌 사람이 인도자이다. 오순절 날에는 베드로에게 가장 큰 역량이 있었지만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야고보에게 있었다.

바나바와 바울의 관계가 이 원칙을 더 잘 설명해 준다. 사도행전 13장 2절에서 바나바의 이름이 바울(사울)보다 먼저 나온다. 그러나 그들이 위임을 수행할 때, 바울의 영적인 역량이 더 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바울이 인도했다(행 13:9). 바나바는 바울의 역량이 자신의 역량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인도하는 것에 대해 바울과 다투지 않았다.

이 모든 사례에서 밝혀 주는 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인도 직분은 공식적이거나 영구적이거나 조직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인도 직분은 언제나 영적인 역량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인도 직분에 대한 사람의 관념을 제쳐 두시려고 이렇게 정하셨다. 구약에서 결코 세 명이나 네 명의 왕들이 동시에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약에서 주님은 한 사도가 아닌 열두 사도를 임명하셨다. 후에 주님은 다른 이들, 가령 바울과 바나바와 디모데 같은 사람들을 더하셨다. 나는 많은 사도가 있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고린도후서 11장 13절에서 거짓 사도들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각 지방에 있는 교회 안에는 항상 다수의 장로들이 있다. 장로 직분이 복수(複數)라는 점은 교회 안의 인도 직분이 실제로 고정적인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나를 주님의 회복의 인도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된 상황에 대해 분명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진리의 실행과 반대되는 것이다. 나는 교회들이나 성도들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반대로 많은 때 여러 교회의 장로들이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해 달라고 내게 간청했을 때, 나는 항상 그들에게 주님께 가서 기도하고 인도를 받으라고 말했다. 주님의 회복 안에는 조직화된 인도 직분이 없다. 오래전에 교파를 떠날 때 우리는 주로 계급 제도와 조직을 떠났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제가 한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다.

신약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한 몸임을 계시한다. 지체는 많을지라도 머리는 하나뿐이다. 중간 머리들을 통해 명령을 내리시지 않고 모든 지체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시는 한 머리가 있다. 주님의 회복 안에는 조직이 없고 다만 하나의 유기체인 몸이 있을 뿐이다. 몸은 유일한 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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