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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한 새사람인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함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높고 가장 풍성한 체험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가지신 의도는 그분 자신을 우리의 생명으로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으로 우리 안에 일해 넣으시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인간 생활에서 아버지를 그분의 인격으로 취하시고 그분의 인격이신 아버지에 의해 사셨다는 것을 계시한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능하셨지만,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선포하셨다. 이것은 그분께서 그분 자신에 의해 살지 않으시고 그분의 인격이신 아버지에 의해 사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아버지를 그분의 인격으로 취함으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우리의 인격으로 취함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

우리의 거듭난 영은 속사람인데, 이 속사람의 인격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거듭난 영이 더 이상 우리가 하나님을 접촉하기 위한 기관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이라는 것을 반드시 보아야 한다.

우리의 속사람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으로도 소유한다.

우리의 속사람은 우리의 새롭게 된 혼을 기관으로 삼고, 인격이신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우리의 거듭난 영을 생명과 인격으로 삼아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함으로써 속사람인 우리의 영 안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전 인격인 우리의 혼을 부인하고, 우리의 영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새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따르면, 거듭난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의 이전 인격인 ‘나’와 우리의 새 인격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모두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이전 인격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새 인격으로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신다. 그 결과로 더 이상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는 것은 억지로 그분께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것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취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취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우리는 자라고 성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기를 갈망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도록 허락해 드림으로써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실 때, 우리는 충분히 그분을 우리의 인격으로 취할 것이다.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 되고, 그분의 감정은 우리의 감정이 되며, 그분의 의지는 우리의 의지가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는 것의 본이다.

우리는 한 새사람인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는 한 새사람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의 강조점은 생명에 있지만, 교회가 한 새사람이라는 것의 강조점은 인격에 있다.

성경은 한 새사람이 단체적이고 우주적인 한 사람이라는 것을 계시한다.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인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새사람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단체적인 한 새사람의 일부이자 구성 요소들이다.

한 새사람은 단체적인 하나님-사람, 곧 모든 하나님-사람들의 집합체이다. 우리가 하나님-사람들을 모두 합할 때, 한 새사람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는 몸의 생명과 새사람의 인격 둘 다이시다.

한 새사람 안에서 타고난 사람은 어떤 입지도 얻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새사람 안에서 어떤 입지도 얻지 못하는데, 이것은 새사람 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 안에 계신다. 따라서 우리 모두에게는 오직 한 인격만 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는지의 여부이다.

새사람을 위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한 새사람 안에는 오직 한 인격, 곧 그리스도만 계신다.

새사람은 지체들에 관한 것(롬 12:4-5)이 아니라 인격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누가 나의 인격인가? 나인가, 주 예수님인가?”

한 새사람이 실지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옛사람의 인격 전체를 제쳐 두고 우리의 새 인격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살아야 한다.

우리의 이전 인격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인격 안에서나 그 인격에 의해서나 그 인격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기준은 옳은가 그른가, 선한가 악한가가 아니라 한 인격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 일을 하느냐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특별히 결정을 내리는 일에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함으로 산다면, 우리의 생활은 새사람의 생활일 것이다.

새사람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함으로, 계획을 세우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정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우리 생활의 어떤 것도 우리 혼자 결정하지 않을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모두 한 새사람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울이 벗겨져 빛 비춤을 받는다면,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가 함께 일어나 한 새사람을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지방에 있는 성도들은 온전하게 되어 한 새사람을 위해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격으로 취하는 상황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자연스럽게 우리 모두가 한 새사람이 될 것이다.

한 새사람이 온전하게 되는 때가 바로 주님께서 오실 때일 것이며, 온전하게 된 새사람은 신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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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엡 4:24 새사람, 곧 하나님을 따라 그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사람을 입은 것입니다.

엡 4: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믿음에서의 하나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온전한 지식에서의 하나에 이르게 하고, 충분히 성장한 사람에 이르게 하며, 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분량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을 표현하고 그분의 통치권을 행사할 한 사람을 얻으시는 것이다. 옛사람은 하나님을 실망시켰지만, 하나님은 옛사람을 대치할 한 새사람을 일으키셨다. 우리의 하나님은 결코 패배당하실 수 없다. 지금이 하나님께서 새사람을 온전하게 하시는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실 수 있는 바로 그때이다. 이 새사람이 땅 위에 완전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표현하고 그분의 통치권을 행사할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이 새사람이 온전하게 되는 때가 바로 주님께서 오실 때일 것이며, 온전하게 된 새사람은 신부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이상이 필요하다.

우리는 한 새사람이다. 우리는 새사람을 입었다. 우리가 새사람을 입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그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우주적인 새사람을 입는다. 우리는 모든 곳의 형제자매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아야 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방에서 교회생활을 하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새사람을 입어서 거룩함과 의를 지니고 있습니까?” 그 의와 거룩함이 바로 새사람의 생활이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우주적인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 모두는 함께 일어나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새사람이 그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이 땅에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교회이고 새사람이다. 우리 가운데 은사가 있는 이들은 사도들이든 신언자들이든 복음 전파자들이든 목자들 및 교사들이든 상관없이, 모두 이것을 목표로 취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모든 지방에 있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격으로 취하는 상황 안으로 들어가게 해야 한다.

교회는 다만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아니다. 이 땅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이자 새사람이다. 이 땅에 거대한 옛사람이 있다. 이 옛사람은 아담의 후손들인 아담 족속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에서 하나님은 또 다른 사람, 곧 새사람을 갖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오늘날 그분께서 이 땅에서 한 새사람을 얻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절대로 이 필요를 충족할 수 없다. 기독교는 분열로 가득하고 모두가 독립적이다. 주님의 갈망은 이 땅에서 한 새사람을 얻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일어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단체적인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어떤 종류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새사람 안에서, 그리고 새사람과 함께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이 요구는 크고도 높다. 이렇게 할 때 새사람은 자라고 성숙할 것이며, 우리는 충분히 성장한 사람에 이를 것이다.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있다면, 분명히 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분량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취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는 것은 새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취하는 것은 몸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우리는 자라고 성숙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몸은 자라고 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충분한 분량을 가질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우리가 자라고 성숙되는 한, 그에 수반되는 충만의 신장의 분량도 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해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확실히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생명으로 가질 것이다. 우리의 인격이신 그리스도는 새사람의 성장을 위하시고,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는 몸의 신장의 분량의 증가를 위하신다.

5일

롬 15:32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여러분에게 나아가, 여러분과 함께 쉬고 새 힘을 얻도록 해 주십시오.

몬 14 그러나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것은 그대의 선한 일이 강요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것이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몸은 생명의 문제이고, 새사람은 인격의 문제이다. 몸은 움직임을 위한 것이다. 몸은 행동을 위한 도구이다.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이것은 하나의 행동이며, 이 행동은 몸 안에서 몸에 의해 수행된다.

새사람은 움직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새사람은 결정을 내리고 생활하기 위한 것이다. 몸은 움직임을 위한 것이고, 새사람은 생활을 위한 것이다. 새사람과 관련하여 에베소서 4장 24절은 새사람이 하나님을 따라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의와 거룩함은 우리의 생활의 상태들이다. 따라서 생활은 전적으로 새사람의 문제이다. 새사람은 생활을 위한 것인데, 우리 생활의 팔구십 퍼센트가 결정을 내리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두 가지를 보아야 한다. 몸으로서 교회는 움직임을 위한 것이고, 새사람으로서 교회는 결정하여 생활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하여 행동하고 일하며 책임을 진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새사람이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여 계획을 세우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몸이든 새사람이든, 일하고 움직이는 것이든 생활하고 결정하는 것이든, 모든 것이 단체적이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것이 없다. 여러분은 오늘날 여러분의 생활이 새사람의 생활 곧 단체적인 생활이고, 여러분의 결정이 개인적인 결정이 아닌 단체적인 결정이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여러분은 공장을 세워야 할 것인지, 아니면 교육자가 되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결론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에 일종의 생활이 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이 새사람 안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본다면, 여러분 스스로가 인격이 되어 결정을 내리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새사람 안의 다른 모든 부분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취하고 싶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여러분은 자신의 인생과 관련된 결정을 내리려고 할 때, 여러분 자신을 인격으로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여러분은 새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인격으로 취하여 결정을 내릴 것이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취하는 삶을 살 때, 여러분의 생활은 새사람의 생활일 것이다.

새사람의 생활은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의(義)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함이다. 의는 하나님의 길에 따른 것이고, 거룩함은 하나님의 본성에 따른 것이다. 여러분의 생활 속에 있는 모든 큰일과 작은 일이 그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성과 정확히 일치하고 그 길에 있어서 하나님의 길과 정확히 일치할 때, 거기에 거룩함과 의가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생활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개인적인 성화(聖化)의 생활이 아니다. 그보다 여기서 말하는 생활은 여러분이 새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취하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서 모든 결정을 내리는 분이 되시는 생활이다. 따라서 살아 나타나게 되는 모든 것이 의이고 거룩함이다. 이것은 우리의 움직임이나 역사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이 새사람의 방면이다. 다른 한 방면은 몸이다. 몸으로서 우리는 움직인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움직인다. 따라서 우리가 움직이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이나 우리 자신의 생명에 근거하지 않고, 우리의 생명과 힘이신 그리스도에 근거한다. 더욱이 우리의 움직임은 개인적인 움직임이 아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개인주의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우리가 단체적인 몸이자 단체적인 새사람임을 보아야 한다. 우리의 생활이 단체적이고, 우리의 움직임이 단체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움직임 안에서는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하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는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취한다. 그리스도는 몸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시고, 새사람 안에서 우리의 인격이시다. 우리는 몸 안에서 서로 지체들이고, 새사람 안에서 모두 한입으로 같은 것을 말한다. 이것이 교회이다.

4일

골 3:4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

골 3:10-11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 새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에 따라 온전한 지식에 이르도록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자와 무할례자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려면,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생명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할 필요가 있다. 인격을 이루는 주요 부분들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자아, 곧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부인해야 한다. 자아에 주의를 기울이는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물건을 사려고 할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당신께서 제 인격이십니다. 당신께서 이것을 사길 원하십니까? 사길 원하신다면 제가 이것을 사겠습니다. 사길 원치 않으신다면 저도 사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쇼핑할 때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내가 쇼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쇼핑하신다.”라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실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는 것은 우리가 모든 규례를 거절하고 그분을 모든 것을 포함하신 분, 곧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는 분으로 누리는 가장 좋은 길이다. 우리는 크고 작은 일상의 모든 일을 그리스도와 함께 점검하면서 그분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저는 당신을 제 인격으로 취합니다. 당신께서 이것을 하고자 하신다면 제가 그것을 하겠습니다. 하고자 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그것을 하지 않겠습니다.” … 배우자가 기분을 상하게 할 때 우리는 화를 내지 않게 도와주시기를 그리스도께 구하는 대신에, 자아를 부인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허락해 드림으로 단순히 우리의 인격이신 그분에 의해 살아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할 때,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신다. 우리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거룩하거나 인내하거나 영적이게 되거나 사랑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인격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살 때 그분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거룩함과 인내와 영성과 사랑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우리의 집회는 풍성하고 높이 올려지며 신선하고 만족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우리 각자가 자신이 누린 그리스도의 몫을 가져와서 서로 나눌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자 교회생활이다.

우리는 교회 건축을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의도는 많은 개별적인 믿는 이들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인 교회를 얻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의 능력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산출하신 것을 계시한다. 에베소서 2장은 화평하게 하는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규례들을 자기 육체 안에서 없애 버리심으로써 새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계시한다(14-15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일 뿐 아니라 또한 새사람이다. 몸은 생명의 문제이지만, 사람은 생명만이 아니라 인격과도 관계된다. 나무는 생명이 있고 살아 있지만 인격이 없다. 사람은 생명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격도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은 그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새사람은 생명만이 아니라 인격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교회는 단체적인 사람인 새사람이다. “… 오직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골 3:11) 새사람 안에는 종족이나 종교나 문화에 관계없이 어떤 타고난 사람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새사람 안에는 오직 한 인격, 곧 그리스도만 계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현시대의 끝에 가까이 있다. 이 시점에 주님은 합당한 교회생활을 회복하시고 새사람인 그분의 몸을 건축하심으로 그분의 다시 오심을 앞당기려는 뜻을 갖고 계신다. 우리 모두가 자아에 의해 산다면, 우리가 함께 모일 때 타고난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분열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우리의 인격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산다면, 우리의 종교나 문화나 국적에 상관없이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인격이 되시는, 새사람의 실행 안으로 우리가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새사람의 유일한 인격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성취하기 위해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인 그분의 몸을 건축하실 것이다.

3일

엡 3:17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서

고전 2:16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알아 주님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 2:5 여러분 안에 이 생각이 있도록 하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각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운행하게 하신 능력을 체험해야 하고, 에베소서 3장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는 것은 3장 17절에 계시된다. 이 절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라고 말한다. 사람이 집을 갖고자 갈망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기를 갈망하신다.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고자 하시는 그리스도는 인격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 안에 자리를 잡으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한 형제의 집에 초청을 받지만 그곳에 여러분의 거처를 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곳에 손님으로 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그곳에 완전히 자리를 잡을 자유나 권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의 마음에 주인이 아니라 단지 손님으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실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그분의 거처가 아니라 우리의 거처일 수 있다.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 안에 계신다고 계시한다. 특별히 디모데후서 4장 22절은 “주님께서 그대의 영과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에베소서 3장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기를 갈망하신다고 말한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 영의 주도적인 부분인 양심과 우리 혼의 세 부분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 안에 계시지만, 우리가 그분께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퍼져 나가실 완전한 자유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 마음의 모든 부분에까지는 퍼져 나가지 못하셨을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 안에 가두어 둔다. 우리가 육체의 일들을 생각할 때(롬 8:5)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영으로 다시 돌리고자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영 안에만 머물러 계시고, 우리의 생각으로 오셔서 우리를 괴롭히지 마시라고 말씀드릴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사려고 할 때 그리스도께서 사지 말라고 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영 안에 제한하여 두고 그분께서 우리의 생각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만지시는 것을 허락해 드리지 않는다면, 그분은 비록 우리의 영 안에 계실지라도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지 못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자리를 잡으시게 해 드리려면, 우리는 우리의 속사람 곧 거듭난 우리의 영에 이르도록 강하게 될 필요가 있다. 많은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는 조금밖에 거처를 정하지 못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강하지만 영은 약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믿는 이는 의지가 강철 같아서 한번 어떤 결심을 하면 그리스도라도 그 결정을 바꾸게 하실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사람의 영은 매우 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 사람 안에서 퍼져 나가실 수 없고 그의 영 안에 갇혀 계신다. 우리가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되려면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며, 우리의 실패들을 용서하시고 그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씻겨 주시기를 그분께 구해야 한다. 주님의 이름을 더 부를수록 우리는 그분으로 더 채워지고 우리의 속사람에 이르도록 더 강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될 때, 주님은 우리의 영에서부터 우리 마음의 각 부분으로 퍼져 나가시면서 그분 자신으로 우리의 생각을 적시시고, 우리의 감정을 채우시며, 우리의 의지를 점유하실 것이다. 그 결과 그분은 우리의 내적 존재 전체를 취하시어 우리 안에 완전히 자리 잡으시고 이로써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실 때, 우리는 충분히 그분을 우리의 인격으로 취할 것이다.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 되고, 그분의 감정은 우리의 감정이 되며, 그분의 의지는 우리의 의지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실 것이고, 실지로 우리의 인격이실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일하신 결과일 것이다. 결국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실 것이다.

2일

갈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

롬 8:4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은 거듭난 후에 속사람이 된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영은 단지 하나의 기관이었지만, 거듭난 후에는 주님께서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신다. 이 거듭난 영은 하나의 기관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속사람으로 변한다. 이 속사람은 주 예수님을 인격으로 갖고 있다. 주님께서 바로 이 속사람의 인격이시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은 이 속사람 안에 사시면서 우리의 속사람이 되신다.

사람은 창조될 때 두 개의 기관을 받았는데, 바로 몸과 영이다. 몸은 우리의 존재나 인격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기관에 불과하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인격은 몸을 떠난다. 사람의 몸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의 인격은 없어진다. 따라서 몸은 기관이지 인격이 아니다. 몸과 마찬가지로 영도 기관이다. 몸은 물질적인 세계를 접촉하는 외적 기관인 반면에, 영은 하나님과 영적인 영역을 접촉하는 내적 기관이다.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를 보면 외적 기관인 몸이 있고, 내적 기관인 영이 있으며, 인격인 혼이 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은 창조된 상태의 사람과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거듭나고 재창조되고 다시 만들어졌다. 우리가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주님께 열고 주님의 이름을 불렀을 때, 주님은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분은 일단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오시면 영원토록 그 사람의 영 안에 거하시며 그의 생명이 되신다. 이제 우리의 영 안에는 우리의 생명이신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영은 더 이상 기관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격, 곧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은 우리의 겉사람과 속사람을 말한다. 겉사람은 혼이고 속사람은 거듭난 영인데, 하나님의 생명이 바로 이 속사람의 생명이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 우리의 영은 단지 기관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남을 통해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셨고, 우리의 영은 우리의 속사람, 우리의 인격이 되었다. 한편으로 우리의 영은 영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을 접촉하는 기관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영은 우리의 속사람이다.

구원받기 전 우리에게는 겉사람만 있었다. 그러나 이제 구원받은 후 우리에게는 속사람, 곧 우리 안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 둘 사이에는 많은 다툼이 있다. 그 이유는 겉사람이 속사람이 반대하는 것들을 하고자 갈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겉사람은 어떤 세상적인 오락을 하고자 하지만 속사람은 그것을 금할지도 모른다. 구원받은 후 우리 안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혼 곧 겉사람에 의해 살아서는 안 되고, 우리의 영 곧 속사람에 의해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전 인격인 우리의 혼을 부인하고, 우리의 영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새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따르면, 거듭난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롬 6:6) 우리의 이전 인격인 ‘나’와 우리의 새 인격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모두 갖고 있다. 우리의 이전 인격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새 인격으로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신다. 우리 안에 더 이상 옛 인격인 ‘나’가 살지 않고 새 인격이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취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우리의 이전 인격인 우리의 자아는 우리의 혼 안에 있지만, 우리의 새 인격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아 곧 옛 인격을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새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는 것은 억지로 그분께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것에 따라 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자매는 어떤 옷을 입고 싶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녀가 다른 옷을 입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그 다른 옷을 입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자매는 자신의 옛 인격을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새 인격으로 취한다. 이 자매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신언노트, 2023 05 21

한 새사람인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함
그 한 새사람인 그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함

요한복음은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인간 생활에서
아버지를
그분의 인격으로 취하셨다는 것을
계시한다.
5장 30절에서
주 예수님께서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하므로 …”
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주님의 인격이셨고,
주님은
그분의 인격이신
아버지에 의해 사셨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능하셨지만,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선포하셨다.
이것은
그분께서
그분 자신에 의해
살지 않으시고
그분의 인격이신
아버지에 의해
사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아버지를
자신의 인격으로 취하심으로써
모든 말씀을 하셨다.
6장 57절에서
주님은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아버지를
자신의 인격으로 취하심으로
아버지 때문에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우리의 인격으로 취함으로
주님 때문에
살아야 한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지만,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분 자신의 인격에 의해
살지 않으셨고
항상 아버지를
자신의 인격으로
취하셨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은
놀라운 인격이셨지만
그분 자신을
인격으로 취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버지를
자신의 인격으로 취하셨다.
주님께서
아버지를
자신의 인격으로 취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주님을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요한복음 14장 10절은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절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절에서
아들은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들께서
땅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동안
아버지는
하늘들에서
아들을 위해
일하고 계셨다는 뜻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아들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동안
일하고 계시던 아버지는
아들 안에 거하시면서
아들과 하나이셨다.
6장 57절에서
아들은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도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후에,
아들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아버지는
하늘 안에 머무셨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시기도 하셨고
아들과 함께 오시기도 하셨다.
이처럼
아들께서 오셨을 때
아버지도
아들과 함께 오셨다.
더욱이 아들께서 말씀하셨을 때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일하셨다.
아들은
말씀하는 분이셨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일하는 분이셨다.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들께서 아버지이셨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아들의 본을 따라서
그분과 하나일
필요가 있다.
그 결과(그럴 때)
우리가 말할 때,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그 일을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6장 57절은
주님께서
그분 자신 때문에
사시지 않고
아버지 때문에
사신 것과 똑같이,
우리 또한
우리 자신들 때문에 살아서는 안 되고
주님 때문에 살아야 함을
보여 준다.
주님은
아버지를
자신의 인격으로 취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을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인내하거나 사랑하거나
겸손하거나 종교적이거나
영적이 되려고 애쓰는 대신,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진짜 영적임은
(진정한 영성은)
살아 계시는 인격이신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아들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말씀하셨을 때
아버지께서 일을 하신 것이었다고
선포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일을 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쇼핑하러 가거나
배우자와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선포한
다음의 말을
우리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적이 되려고 애쓰는 대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영적일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높고
가장 풍성한
체험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가지신 의도는
그분 자신을
우리의 생명으로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으로
우리 안에
일해 넣으시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인간 생활에서
아버지를
그분의 인격으로 취하셨고
그분의 인격이신
아버지에 의해 사셨다는 것을
계시한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능하셨지만,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선포하셨다.
이것은
그분께서
그분 자신에 의해
살지 않으셨고
그분의 인격이신
아버지에 의해
사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아버지를
그분의 인격으로 취함으로
아버지 때문에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우리의 인격으로 취함으로
주님 때문에 살아야 한다.

내 영이
거듭나게 되었을 때,
그것은
내 속사람이 되었다.
내가
구원받기 전에
내 영은 단지
한 기관이었다.
내가 구원받은 그 날,
주님께서
내 영 안에
거주하기 시작하셨다.
이제 내 거듭난 영은 더 이상
단지 한 기관이 아니다;
그것은
내 속사람이 되었다.
이 속사람은
한 인격
—주 예수님을
가지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의 속사람 안에 계시는
그 인격이시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속사람 안에 사셔서
우리의 속사람이 되신다.

사람이
창조될 때
두 개의 기관을 받았는데,
바로 몸과 영이다.
몸은
우리의 존재나 인격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기관에 불과하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인격은
몸을 떠난다.
사람의 몸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의 인격은
없어진다.
따라서 몸은
기관이지
인격이 아니다.
몸과 마찬가지로
영도 기관이다.
몸은
물질적인 세계를 접촉하는
외적 기관인 반면에,
영은
하나님과
영적인 영역을 접촉하는
내적 기관이다.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를 보면
외적 기관인 몸이 있고,
내적 기관인 영이 있으며,
인격인 혼이 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은
창조된 상태의 사람과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거듭나게 되었고,
재창조되었으며,
또 다시 만들어졌다.
우리가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주님께 열고
주님의 이름을 불렀을 때,
주님께서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분께서 일단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오시면
영원토록
그 사람의 영 안에 거하시며
그의 생명이 되신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
우리의 생명이신
주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은 더 이상
단지 한 기관이 아니라
한 인격, 곧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이유로
성경은
우리의 겉사람과
또 우리의 속사람에 관해
말한다.
겉사람은 혼이고
속사람은 거듭난 영인데,
하나님의 생명이 바로
이 속사람의 생명이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
우리의 영은 단지
기관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남을 통해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셨고,
우리의 영은
우리의 속사람,
곧 우리의 인격이 되었다.
한편으로
우리의 영은
영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을 접촉하는 기관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영은
우리의 속사람이다.

구원받기 전
우리에게는
겉사람만 있었다.
그러나 이제
구원받은 후
우리에게는
속사람,
곧 우리 안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 둘 사이에는
많은 다툼이 있다.
그 이유는
겉사람이
속사람이 반대하는 것들을 하고자
갈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겉사람은
어떤 세상적인 오락을 하고자 하지만
속사람은
그것을 금할지도 모른다.
구원받은 후에,
우리는
우리 안에 살고 있는
두 사람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혼
곧 겉사람에 의해
살아서는 안 되고,
우리의 영
곧 속사람에 의해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전 인격인
우리의 혼을 부인하고,
우리의 영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새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따르면,
거듭난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의 이전 인격인
‘나’와
우리의 새 인격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모두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이전 인격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새 인격으로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신다.
우리 안에 더 이상
옛 인격인
‘나’가 살지 않고
새 인격이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취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우리의 이전 인격인
우리의 자아는
우리의 혼 안에 있지만,
우리의 새 인격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아
곧 옛 인격을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새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는 것은
억지로 그분께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것에 따라
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자매는
어떤 옷을 입고 싶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녀가
다른 옷을 입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그 다른 옷을 입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자매는
자신의 옛 인격을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새 인격으로 취한다.
이 자매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거듭난 영은
속사람인데,
이 속사람의 인격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거듭난 영이 더 이상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접촉하기 위한
한 기관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이라는 것을
반드시 보아야만 한다.

우리의 속사람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으로도 소유한다.

우리의 속사람은
우리의 새롭게 된 혼을
기관으로 삼고,
인격이신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우리의 거듭난 영을
생명과 인격으로 삼아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함으로써
속사람인 우리의 영 안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전 인격인
우리의 혼을 부인하고,
우리의 영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새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따르면,
거듭난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의 이전 인격인
‘나’와
우리의 새 인격이신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모두 소유한다.

우리의 이전 인격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새 인격으로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신다.
그 결과,
사는 이가 더 이상
우리가 아닐 것이고,
오직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일 것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을
억지로 그분께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 때문에
그분께서 선호하시는 것들에 따라
사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운행하게 하신
능력을 체험해야 하고,
에베소서 3장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는 것은
3장 17절에 계시된다.
이 절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
라고 말한다.
사람이
집을 갖고자 갈망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기를 갈망하신다.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고자 하시는
그리스도는 인격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 안에
자리를 잡으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한 형제의 집에
초청을 받지만
그곳에
여러분의 거처를 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곳에
손님으로 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그곳에
완전히 자리를 잡을
자유나 권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의 마음에
주인이 아니라
단지 손님으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실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그분의 거처가 아니라
우리의 거처일 수 있다.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 안에 계신다고 계시한다.
특별히 디모데후서 4장 22절은
“주님께서
그대의 영과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에베소서 3장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
집을 만드시기를
갈망하신다고 말한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 영의 주도적인 부분인
양심과
우리 혼의 모든 부분들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 안에 계시지만,
우리가
그분께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퍼져 나가실
완전한 자유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 마음의 모든 부분에까지는
퍼져 나가지 못하셨을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 안에
가두어 둔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그 육체의 일들에 둘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들의
방향을 바꾸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영 안에 머무르시고,
또 우리의 생각으로 오셔서
우리를 괴롭히지 마시라고
말씀드릴지도 모른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어떤 품목들을
사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영에 제한하고,
또 그분께서
우리의 생각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허락해 드리지 않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만지시는 것을
만약 우리가
허락해 드리지 않는다면,
그분께서
우리의 영 안에 계실지라도,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
그분의 집을
만들지 못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정착하시도록
허락해 드리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속사람,
곧 거듭난 우리의 영 안으로
강하게 될
(강하게 되어
우리의 속사람,
곧 거듭난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많은 믿는 이들의
마음들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한 작은 크기로
집을 만드셨는데
왜냐하면 그 믿는 이들이
그들의 생각과 감정과 또 의지 안에서 강하지만,
그들의 영 안에서 약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믿는 이는
의지가 너무 강해서
만약 그가
한 결정을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 결정을 바꾸시도록
허락해 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또한
그의 영 안에서
매우 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내부에서
퍼지실 수 없고,
또 그의 영에
국한되신다
(감금되신다).
우리가
강하여져서
우리의 속사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며,
우리의 실패들을 용서하시고
그분의 귀한 피로
우리를 씻겨 주시기를
그분께 요청할
필요가 있다.
더 많이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수록
더 많이
우리는
그분으로 채워질 것이고
또 더 많이
우리가
강하여져서
우리의 속사람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가
강하여져서
우리의 속사람 안으로 들어갈 때,
주님께서
우리의 영에서부터
우리의 마음의
각각의 모든 부분들 안으로
퍼지시면서,
그분 자신으로
우리의 생각을 흠뻑 적시시고,
우리의 감정을 가득 채우시며,
우리의 의지를 점령하실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분께서
우리의 내부 존재 전체를
인수하실 것이고
또 우리 안에
완전히 정착하실 것이며
또 이렇게 하여
우리의 마음 안에
집을 만드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실 때,
우리는 충분히
그분을
우리의 인격으로 취할 것이다.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 되고,
그분의 감정은
우리의 감정이 되며,
그분의 의지는
우리의 의지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실 것이고,
실지로
우리의 인격이실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일하신
결과일 것이다.
결국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취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취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우리는
자라고 성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기를
갈망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도록
허락해 드림으로써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는 것의
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려면,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생명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할
필요가 있다.
인격을 이루는
주요 부분들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자아,
곧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부인해야 한다.
자아에
주의를 기울이는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물건을 사려고 할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당신께서
제 인격이십니다.
당신께서
이것을 사길
원하십니까?
사길 원하신다면
제가
이것을 사겠습니다.
사길 원치 않으신다면
저도
사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쇼핑할 때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내가 쇼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쇼핑하신다.”
라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실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는 것은
우리가
모든 규례를 거절하고
그분을
모든 것을 포함하신 분,
곧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는 분으로 누리는
가장 좋은 길이다.
우리는
크고 작은 일상의 모든 일을
그리스도와 함께 점검하면서
그분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저는
당신을
제 인격으로 취합니다.
당신께서
이것을 하고자 하신다면
제가
그것을 하겠습니다.
하고자 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그것을 하지 않겠습니다.”
배우자가
기분을 상하게 할 때
우리는
화를 내지 않게 도와주시기를
그리스도께 구하는 대신에,
자아를 부인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허락해 드림으로 단순히
우리의 인격이신
그분에 의해
살아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할 때,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신다.
우리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거룩하거나 인내하거나
영적이게 되거나 사랑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인격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살 때
그분께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거룩함과 인내와
영성과 사랑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우리의 집회는
풍성하고 높이 올려지며
신선하고 만족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우리 각자가
자신이 누린
그리스도의 몫을 가져와서
서로 나눌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자
교회생활이다.

우리는
교회 건축을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의도는
많은 개별적인 믿는 이들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인
교회를 얻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의 능력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산출하신 것을
계시한다.
에베소서 2장은
화평하게 하는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규례들을
자기 육체 안에서
없애 버리심으로써
새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계시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일 뿐 아니라
또한 새사람이다.
몸은
생명의 문제이지만,
사람은
생명만이 아니라
인격과도 관계된다.
나무는
생명이 있고
살아 있지만
인격이 없다.
사람은
생명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격도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은
그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새사람은
생명만이 아니라
인격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교회는
단체적인 사람인
새사람이다.
“… 오직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골 3:11)
새사람 안에는
종족이나 종교나 문화에 관계없이
어떤 타고난 사람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새사람 안에는
오직 한 인격,
곧 그리스도만
계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현시대의 끝에
가까이 있다.
이 시점에 주님은
합당한 교회생활을 회복하시고
새사람인 그분의 몸을 건축하심으로
그분의 다시 오심을 앞당기려는
뜻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 모두가
자아에 의해 산다면,
우리가 함께 모일 때
타고난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분열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우리의 인격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산다면,
우리의 종교나 문화나 국적에 상관없이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인격이 되시는,
새사람의 실행 안으로
우리가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새사람의 유일한 인격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성취하기 위해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인
그분의 몸을
건축하실 것이다.

우리는
한 새사람인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는
한 새사람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의 강조점은
생명에 있지만,
교회가
한 새사람이라는 것의 강조점은
인격에 있다.

성경은
한 새사람이
단체적이고 우주적인
한 사람이라는 것을
계시한다.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인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새사람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단체적인 한 새사람의
일부이자
구성 요소들이다.

한 새사람은
단체적인 하나님-사람,
곧 모든 하나님-사람들의
집합체이다.
우리가
하나님-사람들을
모두 합할 때,
한 새사람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는
몸의 생명과
새사람의 인격
둘 다이시다.

한 새사람 안에서
타고난 사람은
어떤 입지도 얻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새사람 안에서
어떤 입지도 얻지 못하는데,
이것은
새사람 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 안에 계신다.
따라서 우리 모두에게는
오직 한 인격만 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는지의 여부이다.

새사람을 위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한 새사람 안에는
오직 한 인격,
곧 그리스도만 계신다.

새사람은
지체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격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누가
나의 인격인가?
나인가,
주 예수님인가?”

몸은 생명의 문제이고,
새사람은 인격의 문제이다.
몸은 움직임을 위한 것이다.
몸은 행동을 위한 도구이다.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이것은
하나의 행동이며,
이 행동은
몸 안에서
몸에 의해 수행된다.

새사람은
움직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새사람은
결정을 내리고
생활하기 위한 것이다.
몸은
움직임을 위한 것이고,
새사람은
생활을 위한 것이다.
새사람과 관련하여
에베소서 4장 24절은
새사람이
하나님을 따라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의와 거룩함은
우리의 생활의 상태들이다.
따라서 생활은 전적으로
새사람의 문제이다.
새사람은
생활을 위한 것인데,
우리 생활의 팔구십 퍼센트가
결정을 내리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두 가지를 보아야 한다.
몸으로서 교회는
움직임을 위한 것이고,
새사람으로서 교회는
결정하여 생활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하여
행동하고
일하며
책임을 진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새사람이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여
계획을 세우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몸이든 새사람이든,
일하고 움직이는 것이든
생활하고 결정하는 것이든,
모든 것이
단체적이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것이 없다.
여러분은 오늘날
여러분의 생활이
새사람의 생활
곧 단체적인 생활이고,
여러분의 결정이
개인적인 결정이 아닌
단체적인 결정이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여러분은
공장을 세워야 할 것인지,
아니면 교육자가 되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결론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에
일종의 생활이 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이 새사람 안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본다면,
여러분 스스로가
인격이 되어
결정을 내리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새사람 안의
다른 모든 부분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취하고 싶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여러분은
자신의 인생과 관련된
결정을 내리려고 할 때,
여러분 자신을
인격으로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여러분은
새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인격으로 취하여
결정을 내릴 것이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취하는
삶을 살 때,
여러분의 생활은
새사람의 생활일 것이다.

새사람의 생활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의(義)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함이다.
의는
하나님의 길에 따른 것이고,
거룩함은
하나님의 본성에 따른 것이다.
여러분의 생활 속에 있는
모든 큰일과 작은 일이
그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성과
정확히 일치하고
그 길에 있어서
하나님의 길과
정확히 일치할 때,
거기에 거룩함과 의가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생활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개인적인 성화(聖化)의 생활이 아니다.
그보다 여기서 말하는 생활은
여러분이
새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취하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서
모든 결정을 내리는 분이
되시는 생활이다.
따라서 살아 나타나게 되는
모든 것이
의이고 거룩함이다.
이것은
우리의 움직임이나 역사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이
새사람의 방면이다.
다른 한 방면은
몸이다.
몸으로서 우리는
움직인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움직인다.
따라서 우리가 움직이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이나
우리 자신의 생명에 근거하지 않고,
우리의 생명과 힘이신
그리스도에 근거한다.
더욱이 우리의 움직임은
개인적인 움직임이 아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개인주의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우리가
단체적인 몸이자
단체적인 새사람임을
보아야 한다.
우리의 생활이
단체적이고,
우리의 움직임이
단체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움직임 안에서는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하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는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취한다.
그리스도는
몸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시고,
새사람 안에서
우리의 인격이시다.
우리는
몸 안에서
서로 지체들이고,
새사람 안에서 모두
한입으로
같은 것을 말한다.
이것이 교회이다.

한 새사람이
실지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옛사람의 인격 전체를 제쳐 두고
우리의 새 인격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살아야 한다.

우리의 이전 인격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인격 안에서,
그 인격에 의해서,
또 그 인격으로
(그 인격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기준은
옳은가 그른가,
선한가 악한가가 아니라
한 인격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고 있는
‘무엇이’ 아니라
그것을 하고 있는 이가
‘누구냐’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특별히 결정을 내리는 일에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함으로 산다면,
우리의 생활은
새사람의 생활일 것이다.

새사람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함으로,
계획을 세우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정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우리 생활의 어떤 것도
우리 혼자 결정하지 않을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모두
한 새사람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을 표현하고
그분의 통치권을 행사할
한 사람을 얻으시는 것이다.
옛사람은
하나님을 실망시켰지만,
하나님은
옛사람을 대치할
한 새사람을 일으키셨다.
우리의 하나님은 결코
패배당하실 수 없다.
지금이
하나님께서
새사람을 온전하게 하시는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실 수 있는
바로 그때이다.
이 새사람이
땅 위에
완전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표현하고
그분의 통치권을 행사할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이 새사람이
온전하게 되는 때가 바로
주님께서 오실 때일 것이며,
온전하게 된 새사람은
신부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이상이 필요하다.

우리는
한 새사람이다.
우리는
새사람을 입었다.
우리가
새사람을 입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그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우주적인 새사람을 입는다.
우리는
모든 곳의 형제자매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아야 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방에서
교회생활을 하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새사람을 입어서
거룩함과 의를
지니고 있습니까?”
그 의와 거룩함이 바로
새사람의 생활이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우주적인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 모두는
함께 일어나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새사람이
그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이 땅에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교회이고
새사람이다.
우리 가운데
은사가 있는 이들은
사도들이든
신언자들이든
복음 전파자들이든
목자들 및 교사들이든 상관없이,
모두
이것을
목표로 취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모든 지방에 있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격으로 취하는
상황 안으로
들어가게 해야 한다.

교회는 다만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아니다.
이 땅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이자
새사람이다.
이 땅에
거대한 옛사람이 있다.
이 옛사람은
아담의 후손들인 아담 족속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에서
하나님은
또 다른 사람, 곧 새사람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오늘날 그분께서
이 땅에서
한 새사람을 얻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절대로
이 필요를 충족할 수 없다.
기독교는
분열로 가득하고
모두가 독립적이다.
주님의 갈망은
이 땅에서
한 새사람을 얻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일어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단체적인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어떤 종류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새사람 안에서,
그리고 새사람과 함께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이 요구는
크고도 높다.
이렇게 할 때
새사람은
자라고
성숙할 것이며,
우리는
충분히 성장한 사람에
이를 것이다.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있다면,
분명히 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분량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취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하는 것은
새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취하는 것은
몸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우리는
자라고
성숙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몸은
자라고
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충분한 분량을 가질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우리가
자라고 성숙되는 한,
그에 수반되는
충만의 신장의 분량도 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해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확실히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생명으로 가질 것이다.
우리의 인격이신 그리스도는
새사람의 성장을 위하시고,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는
몸의 신장의
분량의 증가를 위하신다.

우리가
너울이 벗겨져
빛 비춤을 받는다면,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가 함께
일어나
한 새사람을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지방에 있는 성도들은
온전하게 되어
한 새사람을 위해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격으로 취하는
상황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자연스럽게
우리 모두가
한 새사람이 될 것이다.

한 새사람이
온전하게 되는 때가 바로
주님께서 오실 때일 것이며,
온전하게 된 새사람은
신부가 될 것이다.

1일

요 5:19 …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무엇을 하시든지 아들도 그와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요 14:10 …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인간 생활에서 아버지를 그분의 인격으로 취하셨다는 것을 계시한다(5:19). 5장 30절에서 주 예수님은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하므로 …”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주님의 인격이셨고, 주님은 그분의 인격이신 아버지에 의해 사셨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능하셨지만,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선포하셨다. 이것은 그분께서 그분 자신에 의해 살지 않으시고 그분의 인격이신 아버지에 의해 사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아버지를 자신의 인격으로 취하심으로써 모든 말씀을 하셨다(14:10). 6장 57절에서 주님은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아버지를 자신의 인격으로 취하심으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우리의 인격으로 취함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지만,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분 자신의 인격에 의해 살지 않으시고 항상 아버지를 자신의 인격으로 취하셨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은 놀라운 인격이셨지만 그분 자신을 인격으로 취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버지를 자신의 인격으로 취하셨다. 주님께서 아버지를 자신의 인격으로 취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주님을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요한복음 14장 10절은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절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절에서 아들은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들께서 땅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동안 아버지는 하늘들에서 아들을 위해 일하고 계셨다는 뜻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아들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동안 일하고 계시던 아버지는 아들 안에 거하시면서 아들과 하나이셨다. 6장 57절에서 아들은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도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후에, 아들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아버지는 하늘에 머무셨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시기도 하셨고 아들과 함께 오시기도 하셨다. 이처럼 아들께서 오셨을 때 아버지도 아들과 함께 오셨다. 더욱이 아들께서 말씀하셨을 때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일하셨다. 아들은 말씀하는 분이셨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일하는 분이셨다.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들께서 아버지이셨다고 말할 수도 있다(사 9:6). 우리는 아들의 본을 따라서 아들과 하나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말하는 것은 아들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그분의 일이 될 것이다.

요한복음 6장 57절은 주님께서 그분 자신으로 말미암아 사시지 않고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신 것과 똑같이, 우리 또한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아 살아서는 안 되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함을 보여 준다. 주님은 아버지를 자신의 인격으로 취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을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인내하거나 사랑하거나 겸손하거나 종교적이거나 영적이 되려고 애쓰는 대신,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진정한 영성은 살아 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영적이 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아들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말씀하셨을 때 아버지께서 일을 하신 것이었다고 선포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일을 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쇼핑하러 가거나 배우자와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선포한 다음의 말을 우리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적이 되려고 애쓰는 대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영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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