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ing Renewed
in the Spirit of the Mind
for the Practical Existence
of the One New Man
(그 한 새사람의 실지적인 존재를 위하여
그 생각의 영 안에서[그 영의 그 생각 안에서]
새롭게 됨)
이 시대에서
주님께서 하고 계시는
모든 일은
한 새사람의
실지적인 존재를
이끌어 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이 땅에서의
주님의 움직임이다.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체험의 면에서,
십자가에서
종결된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창조된
새사람을 입기 위해
삼일 하나님과
동역해야 한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과 관련하여
우리는 반드시
옛사람을 벗어 버려야 한다.
침례를 받았을 때,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 버렸다.
우리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침례를 받음으로
장사되었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은
헛된 생각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은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
특별히 옛사람의
공동체 생활을
포함한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는 것은
우리의
생활하는 방식을
벗어 버리는 것이다.
옛사람은
‘그 속이는 것의
욕정에 따라
썩어져 가고 있다’.
‘속이는 것’ 앞에 나오는
‘그’는
강조하는 것이고,
‘그 속이는 것’은
인격화되어 있다.
‘그 속이는 것’은
속이는 자,
곧 사탄을 가리키는데,
그 사탄에게서
부패한 옛사람의
욕정이 나온다.
우리는
‘새사람,
곧 하나님을 따라
그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침례 받음으로
우리는
새사람을 입었다.
새사람은
그리스도께 속하였다.
새사람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그분의 몸이다.
새사람을
입는 것은
한 새사람의
공동체 생활을
입는 것이다.
한 새사람인
교회생활을 입는 것은
신성한 영과
거듭난 사람의 영의
연합으로 산출된
단체적인 한 실체를
입는 것이다.
우리는
한 새사람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은
단체적인 하나님-사람인
한 새사람의
생활이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
‘그 실재’라는 말은
인격화되어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
실재는
하나님이다.
한 새사람은 바로
이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되었다.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비결은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이제
우리의 영 안에 계시며,
이 두 영은
함께 연합되어
생각의 영을
이룬다.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
거하시고
이 영과
연합되신
생명 주시는 영께서
우리의 생각 안으로
확산되실 때,
이 연합된 영은
생각의 영이
된다.
바로 이 연합된 영에 의해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진다.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은
내적이며 내재적이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이
우리의
논리, 철학, 사상, 관념, 심리를
변혁시킨다.
우리 모두가 기꺼이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지고자 할 때에만,
이 시대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수 있다.
생각이
새로워지는 것은
한 새사람이
실지로 존재하기 위한 것이다.
한 새사람이
실지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실지로,
날마다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한 새사람을
얻으실 길이 없다.
우리의 생각은 다만
우리의 영적인 행동이나
개인적인 윤리적 행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새사람의 존재를 위해
새로워져야 한다.
우리가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의
초점은
한 새사람이다.
우리의
민족적이고 인종적인
사고방식은
일생 동안
형성된 것이지만,
한 새사람의
존재를 위해서
이 사고방식은
반드시 새로워져야 한다.
우리의
천연적이고 민족적인
사고방식은
교육을 통해
얻은 것이며,
우리의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배경에 따라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한 새사람이
실지적으로 존재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한 새사람이
완전히 출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국적과 문화에 따라 형성된
우리의 생각이
철저히 새로워지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한 새사람의
실지적인 방면 안으로
들어가기를
갈망해야 하며,
따라서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해 주시고
우리의 내적 존재를
변화시켜 주시기를
주님께 구해야 한다.
매일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한 영을
마심으로써,
우리의 일상생활의
모든 방면에서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져야 한다.
우리가
그 영을 마실 때,
그 영은
우리 존재의
각 부분을 적시신다.
우리의 혼의 부분들 중에서
그분께서
첫 번째로 적시시는 부분이
곧 우리의 생각이다.
그 영을 마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질 것이고,
이렇게 새로워질 때
우리는 모두
한 새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지게 될 때
한 새사람이
실지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는 진실로
모든 것이 되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실 것이다.
“오늘날
온 땅에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추구하며,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그분을
인격으로 취하고
그분으로 인해 삶으로써,
반드시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
한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오늘날
원하시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 전집, 1977년, 3권,
한 몸, 한 영, 한 새사람, 4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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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plies on “한 새사람의 실지적인 존재를 위해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짐”
6일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모두
한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 받았고,
또 모두
한 영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계 22:17
그 영과 신부께서
말씀하십니다.
“오십시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도
‘오십시오!’라고
말하십시오.
목마른 사람은
오십시오.
원하는 사람은 다
생명수를
거저 받아
마시십시오.”
인간적으로 말해서,
민족들 간의
차이점들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민족적인 특성 외에도
우리 각 사람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독특한 성격과 기질을
가지고 있다.
주님의 은혜와
그 영이 없이는
누구도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한 새사람에 대한
교리를 가지고 있고,
한 새사람에 대한
메시지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한 새사람에 대한
이상을 보았고
또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실지적인 일상생활은
어떠한가?
우리는
매일매일
참으로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지고 있는가?
새로워지는 문제는
매우 실지적인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정말 새로워진다면,
이것은
여러분의
실지적인 일상생활에서
나타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한 새사람을
입은 상태에서
합당한 교회생활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시고
내적인 존재를
변화시켜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한 새사람의
실지적인 방면 안으로
들어가기를
갈망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성도들과의
교통과
교회생활을 위해,
일상생활에서
정말로 실지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 달라고
주님께
구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주님께
이런 식으로
우리를 비추어 달라고
구한다면,
나는
주님께서
많은 것들을
지적해 주시리라고
믿는다.
우리가
그 영 안에서
침례를 받고
끊임없이
그 영을 마신다면,
우리는 또한
완전히 새로워질 것이다.
우리가
마시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의
물질적인 몸을
적시고
신선하게 하며
새롭게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영을 마실 때,
그 영은
우리의 내적 존재의
모든 부분들을
흠뻑 적셔 주신다.
단지
그 영 안에서의
침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적으로
흠뻑 적셔지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영을
마셔야 한다.
그 영을 마신다면,
우리는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질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적인 침례만이
아니다.
우리는
내적이고
지속적이며
즉각적으로
그 영을
마심으로,
그 영께서
우리의
내적 존재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한 영을
마실 때,
이 영은
우리의
내적 존재를
흠뻑 적셔 주신다.
우리의
내적 존재인
혼을 주도하는
중심 부분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영을
마심으로
그분을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게 할 때,
그 영은
가장 먼저
우리의 생각을
적시신다.
어떤 성도들은
그 영을 마시는 것에
실패한다.
그들이
그 영을 마시는 것은
늘 일정하지 않다.
때로는
많이 마시지만
때로는
일주일 내내
마시지 않는다.
만약 그 영을
마시는 것이
지속적이지 않고
불규칙하다면,
영적인 상태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없다.
마시지 않는다면
건강할 수 없다.
우리가
마시면 마실수록
한 새사람이
더욱더 실지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요소가
우리의 사고방식 속에
들어올 때,
우리는
그분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생각할 것이고,
그분께서
보시는 방식대로
볼 것이며,
그분께서
고려하시는 것처럼
상황을
고려할 것이다.
바로 그때에
한 새사람이
실지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더 이상
민족적인 차이도,
사회적인 계급의 차이도,
종교적인 차이도
없을 것이다.
진실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실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이 땅 위에서의
주님의 움직임에 대한
최신의 이상이라고
믿는다.
주님은
한 새사람을 얻으시려고
계속 나아가고 계신다.
이 새롭게 됨이
우리 모두를
새사람이
되게 한다.
이 새롭게 됨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옛 사회생활을
벗어 버리고
교회생활을
입는다.
이것이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오늘날 주님은
이 땅에서
이 일을 하고 계시며,
따라서 이것이
오늘날
주님의 회복의
목표이다.
오늘날
온 땅에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추구하며,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그분을
인격으로 취하고
그분으로 인해
삶으로써,
반드시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
한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5일
골 3:10-11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 새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에 따라
온전한 지식에 이르도록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자와 무할례자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어린 믿는 이였을 때,
나는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을
단지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의 생각을
채우시고 소유하시며 점유하시도록
허락해 드림으로써
새로워질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하고,
주님과 교통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의 죄들을
철저히 자백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변화될 것이며,
우리의 행실도
바뀔 것이다.
비록 이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의
초점은
한 새사람이다.
새사람 안에는
헬라인과 유대인,
야만인과 스구디아인,
노예와 자유인을 위한
여지가 조금도 없다.
새로워지는 것은
단지 우리의 행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새로워지는 것은
… 우리의 민족적인 규례들을
끝내고
타고난 사람도
끝내는 것이다.
… 우리 모두는
한 새사람이
실지로 존재할 수 있도록
새로워져야 한다.
그 영은
우리의 생각 안으로
확산되실 때
우리의 생각의 영이
되신다.
우리가
새롭게 되어
변화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영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영은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하시고,
재건축하시며,
재조정하신다.
사람은
전적으로
자신의 생각의
통제와 지시를
받는다.
자신이 생각한 것을
행하고, 따르며, 실행한다.
우리의 존재를
지시하는 것은
생각이다.
비록 여러분이
거듭난 후
주님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여전히
생각의 지시를 받는다.
그 영께서
우리의 생각을
적시실 수 있도록
우리는
한 영을
마셔야 한다.
생각이
새로워지는 것은
새사람을
참되게 실행하기 위한 것이다.
영국인과 중국인과 미국인은
모두
그들의 문화권에 따라
각기 다른 규례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민족적인 사고방식들이
새로워져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천연적이고 민족적인
사고방식은
교육을 통해
얻은 것이며,
우리의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배경에 따라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새사람이
실지적으로 존재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허드슨 테일러 형제는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부담을 가지고
중국에 갔다.
그는
너무나 큰 부담을
가졌기 때문에
옷까지도
중국인들이 입는
방식으로 입었다.
이것은
매우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우리는
더 전진해서
우리의 사고방식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외적인 방식만
바꾸는 것은
생각이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연기일 수 있다.
우리는
지금이
새사람이
온전하게 되고
완전하게 나타나게 될
시대라고 믿는다.
주님은
새사람이
나타날 수 있도록
외적인 환경과 상황을
안배하셨다.
그러나 외적인 상황은
내적인 실재와
일치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안에
내적인 실재가
필요하다.
이 땅의
과학 발명품들과
정치적인 상황들로 인해서,
많은 나라들과 문화들이
함께 모이게 되었다.
이제는
내적인 실재,
곧 생각이
새로워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애 전체에 걸쳐서
형성된
민족적이고 인종적인
사고방식은
새로워져야 한다.
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주님은
내게
중국인의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나는
오직 주님의 회복만을 관심하고,
중국인의 생활 방식을
주의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기
원했다.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해 주시도록
우리에게는
그분의 긍휼과 은혜가
필요하다.
주님은
이 한 새사람이
완전히 실지로
존재할 수 있도록
무언가를
행하실 것이다.
주님은
모든 다른 문화들과 민족들 가운데서
그러한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 하신다.
이 시대는
한 새사람을
얻으시려는
주님의 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국적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어 온
우리의 생각이
철저하게,
합당하게,
충분히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 영을
마셔야 하는
이유이다.
그럴 때
우리의 전 존재,
특히 우리의 생각이
그 영으로
흠뻑 적셔질 것이다.
4일
엡 4:23-24
또한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
새사람,
곧 하나님을 따라
그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사람을
입은 것입니다.
새사람 안에는
타고난 상태 그대로인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람이
존재할
어떤 가능성이나 여지도
전혀 없다.
새사람 안에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여지만 있다.
그분은
새사람의 모든 지체이시며,
모든 지체 안에 계신다.
그분은
새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이시다.
사실상 그분이
새사람,
곧 그분의 몸이시다.
새사람 안에서
그분은
중심과 전부이시다.
우리 모두가 기꺼이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지고자 할 때에만,
이 시대에서
주님의
영원한 목적이
성취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열고
그 영을 마심으로써,
그 영께서
우리의 존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타고난 사고방식을
흠뻑 적셔
우리의 생활 방식이
신진대사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때
새사람이
완전히 나타날
가능성이 많게 된다.
한 새사람이
실지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교정이나 가르침을
받는 것으로는
한 새사람이
실현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의 사고방식 속에
침투하실 때에만
가능하다.
나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만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도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질 수 있도록,
주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와
우리 위에서
운행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우리 자신을
영 안으로 넣을 때
우리는
새로워진다.
베드로는
비몽사몽 중에
새로워졌지만
실행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우리는
기도할 때
영 안으로 들어가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우리 자신을
항상
영 안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부터
나오지 말아야 한다.
이런 교통을 통해
우리는
일상생활의
모든 문제에서
얼마나
새로워질 필요가 있는지를
볼 수 있다.
남편은
아내와의 관계에서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
과거에
습관적으로 행하던 것처럼
하지 말라.
여러분은
생활에서
실지로
날마다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은
한 몸을 얻으실
길이 없고,
한 새사람을 얻으실
길도 없다.
이것은
우리의 행실을
고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짐으로 변화되어
또 다른 인격이
되는 문제이다.
매일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한 영을
마셔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일상생활의
실지적인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인격이나
윤리적인 행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 새사람을 위해서
생각이
새로워져야 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영께서
그들의 생각 안으로
확산되시도록
허락해 드리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자신의
천연적이고 종교적이며 개인적인
관념을
붙잡고 있다.
…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 열고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 생각을
완전히
당신께
열어 드리기 원합니다.
제 안에
들어오셔서
충만히
채워 주소서.
저의
내적 존재 전체에
침투하시고,
저의
내적 존재 전체를
흠뻑 적셔 주시며
소유하소서.”
만약 우리가
주님께
이런 식으로
기도한다면,
그 영께서
우리의 생각 속에
침투하실 길을
얻으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 영께서
우리의 생각 속에
침투하실 때
규례들은
끝난다.
그 영께서
우리의 생각을
소유하시고
흠뻑 적시셨을 때,
우리는
흑인이나 백인,
중국인, 일본인,
미국인, 영국인,
독일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등을
주의하지 않을 것이다.
집회가
시끄럽든 조용하든
주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한 새사람만을
주의하게 될 것이다.
교회는
새사람이다.
이 현시대에
그렇게 많은 인종들과 민족들이
함께 모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나누어져서
자신들끼리 있기를
좋아한다.
종교적인 규례들 때문에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나누어져 있는 것은
이 시대를
본받는 것인데,
그것은
이 시대가 바로
분열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로마서 12장 2절을,
이 분열의 시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이다.
3일
롬 12:2
여러분은
이 시대를
본받지 마십시오.
오직 여러분은
생각이 새로워짐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선한 뜻,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엡 4:23
또한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
새사람을
실행하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시고
어디에 계신지를
알아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시고,
우리의 영 안에
계신다.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는
지금 우리의 영 안에 계시며,
이 두 영이
함께 연합하여
생각의 영을
이룬다.
에베소서 4장 23절은
우리가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지고 있다고
말한다.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사람의 영과
연합되신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은
새로워지고 있다.
오늘날
연합된 영이나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는 것에 관한
메시지를 듣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다.
연합된 영에 관해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사람들을 얻고,
우리의 선한 행위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베소서 4장 23절은
대단히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구절이다.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비결은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이다.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짐으로써,
새사람의 생활을 위해
실재와 은혜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릴 수 있다.
… 우리가
새로워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영은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과
연합된
믿는 이들의
거듭난 영이다.
이 연합된 영은
우리의 생각 안으로
퍼져서
우리의 생각의 영이 된다.
바로 이 영 안에서
우리는
새로워짐으로써
변화된다.
물론 이것은
신진대사적인
변화의 과정을
함축한다.
이 과정이
진행될 때,
연합된 영은
우리의 생각 안으로
들어오고
우리의 생각을
점유하여
우리의
생각의 영이 된다.
우리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거듭나고
하나님의 영과
연합될 때,
이 영은
연합된 영이 된다.
우리의 거듭난 영이
점차적으로
그 영에 의해
빛 비춤을 받고,
그 영에 의해
움직이고,
그 영에 의해
영감을 얻고,
그 영에게
점유될 때,
이 연합된 영은
우리의 생각 안으로
확산되어
우리의 생각의 영이
된다.
거듭났을 때
이 연합된 영은
단지 우리의
영의 영역 안에만
있었지만,
새로워짐을 통해
이 연합된 영은
점차적으로
우리의
생각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
우리의 생각의 영이
된다.
바로 이 연합된 영이
우리의 생각 안으로
확산됨으로써
우리는
새로워지며,
그 결과
새사람의 생활이
이 땅에 있게 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우리는
우리의 생각 안에
헛된 것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 안에
연합된 영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각은 더 이상
헛된 것들로 가득해서는
안 되며,
연합된 영으로
적셔져야 한다.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은
내적이며 내재적이다.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배운다면,
사람과 사물을 이해하는
더 깊은 인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멀리, 더 깊이
볼 수 있는
더 넓은 조망과 인식이
필요하다.
흔히 우리가
사람들을 아는 것은
매우 피상적이다.
우리는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을
매일 실행하지 않기 때문에,
장벽과 덮개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이 부족하다.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은
우리의
논리, 철학, 사상, 관념, 심리를
변혁시킨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바뀌게 되며,
우리가 만나는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심지어 질문하는 방식을 통해서도
사람들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천연적인 사람은
매우 피상적인 사람이지만,
우리가 영적이라면
깊이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깊이가 있다면,
다른 사람은
우리를 알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일
엡 4:22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을
따르는
옛사람,
곧 그 속이는 것의
욕정에 따라
썩어져 가는
옛사람을
벗어 버린 것이며,
엡 4:24
새사람,
곧 하나님을 따라
그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사람을
입은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교회를
주제로 한 책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교회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책 안에 있는
많은 것을
잘못 적용할 것이다.
우리는
에베소서 4장 17절부터 32절까지를
읽을 때
이 구절들을
개인적으로가 아닌
단체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이 구절들은
개인들의 생활에 관련하여
쓰인 것이 아니라
한 새사람의
단체적인 생활에 관련하여
쓰인 것이다.
새사람은 반드시
우리의 일상생활이
되어야 한다.
4장 24절에서
바울은
새사람을
입는 것에 대해
말한다.
새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 안에서
창조하신
새 인류의 새 생활인
교회생활을 한다는
뜻이다.
교회는
새로운 사람이다.
단체적으로 우리는
또 다른 사람을
입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에베소서 4장의 후반부를
살펴볼 때
이러한 관점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옛사람을
벗어 버린다는 것은
그저 옛 본성을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옛 생활 방식,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을
벗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옛 생활 방식은
전체가
개인주의적인 생활 방식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사회생활, 곧 공동체 생활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완전히 개인주의적이 될 수 없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 존재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회 안에서
살며
어떤 종류의 공동체 생활을
가지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최상의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만일 교회 집회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목적이 없다고
느낄 것이며,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무의미할 것이다.
우리는
집회 안에서
함께 모이는 것을
누린다.
흔히 성도들이
집회가 끝난 뒤에도
떠나기를 주저한다는 사실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참된 공동체 생활을
가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만일 우리가
한 새사람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옛사람의 공동체 생활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의 공동체 생활을
입어야 한다.
믿는 이들은
새사람을
옷 입음으로써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분배를
단체적으로 체험한다.
새사람은
그리스도께 속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안에서
창조된
그분의 몸이다.
새사람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단체적인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5절에 있는
‘그분 자신 안에서’라는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한 새사람인 교회의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한 새사람이
창조되는 영역과
본질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새사람의
바로 그 요소 자체이시다.
우리의 옛사람에게 속한
어떤 것도
새사람을 창조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옛 본질은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놀라운 본질이 있으며,
새사람은
이 본질 안에서
창조되었다.
이 새사람, 곧 교회는
단체적이며 우주적이다.
많은 믿는 이들이 있지만,
우주 안에는
한 새사람만 있다.
모든 믿는 이들은
이러한
하나의
단체적이고 우주적인
새사람의
구성 요소들이다.
새사람과 관련된
외적인 모든 것은
의로우며,
새사람에 관련된
내적인 모든 것은
거룩하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
의는
하나님의 행실을
의미하며,
거룩함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의로우며,
하나님의 존재는
전체가 거룩하다.
새사람은
이 두 방면에서
하나님을 따라
창조되었다.
새사람의
의와 거룩함은 모두
‘그 실재’에 속한 것이다.
에베소서 4장 24절의
실재 앞에 있는
‘그’는
강조하는 것이다.
옛사람과 관련된
22절에 있는
‘그 속이는 것’이
사탄을
인격화한 것처럼,
새사람과 관련된
24절의
‘그 실재’는
하나님을
인격화한 것이다.
이 실재는
4장 21절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예수님의 생활 가운데서
볼 수 있었다.
실재의 의와 거룩함은
예수님의 생활에서
계속 나타났다.
새사람은
바로 이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되었으며,
그 실재는
실재화되시고 표현되신
하나님이다.
1일
롬 6:6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무력하게 되어
우리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엡 2:15
규례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 안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이 둘을
그분 자신 안에서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시어
화평을
이루시려는 것이며,
주님은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그분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주님께서
예언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틀림없이 성취된다.
새사람이
실지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교회를
건축한다는 것은
공허한 말이
될 수 있다.
교회를 건축하는 것은
새사람이
실지로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새사람이
실지로 존재한다면,
의심할 바 없이
여기에
건축된 교회가
있는 것이다.
현재의
분열된 상황에 관계없이
주님은
한 새사람을
얻으실 것이다.
이 시대에서
주님께서
하고 계시는
모든 일은
한 새사람의
실지적인 존재를
이끌어 오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천연적이고 종교적인
관념들과 생각을
내려놓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이
연합된 영으로
흠뻑 적셔지고,
침투되고,
소유되고,
점유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의 관념은
완전히 근본적으로 바뀌어서
더 이상
어떤 규례들도
가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새사람이
실지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이 땅에서의
주님의 움직임이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목표는
새사람을
얻는 것이다.
옛사람은
하나님을 실망시켰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약 경륜 안에서
새사람을
얻고자 하신다.
이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분의 죽음은 단지
우리의 죄들을 없애시고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며
사탄을 멸망시키시고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규례들
곧 다른 민족들 사이에 있는
다른 생활 방식들을
없애심으로
그분 자신 안에서
새사람을
창조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서로 다른
모든 생활 방식과 경배 방식은
십자가에서 폐해졌다.
에베소서 4장 22절에서
바울은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을 따르는
옛사람,
곧 그 속이는 것의 욕정에 따라
썩어져 가는
옛사람을
벗어 버린 것이며”
라고 말한다.
24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새사람,
곧 하나님을 따라
그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사람을
입은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우리가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에
근거해서
우리는
새사람의 생활을 위해
실재와 은혜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에서
십자가에서 종결된
옛사람을
벗어 버리도록
삼일 하나님과
동역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체험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창조된
새사람을 입도록
삼일 하나님과
동역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22절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렸다고 말한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은
헛된 생각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그러한 생활 방식은
종결되고 벗어졌다.
22절은 또한
“그 속이는 것의
욕정에 따라
썩어져 가는
옛사람”
이라고 말한다.
옛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지만
죄로 인해 타락한
아담에게 속한 사람이다.
‘속이는 것’ 앞에 나오는
‘그’는
강조하는 것이고,
‘그 속이는 것’은
인격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속이는 것’은
속이는 자,
곧 사탄을
가리키는데,
그 사탄에게서
부패한 옛사람의
욕정이 나온다.
옛사람은
그 속이는 것,
곧 속이는 자의
욕정에 따라
썩어져 가고 있다.
외적으로
옛사람의 생활 방식은
헛된 생각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내적으로
옛사람은
그 속이는 것의 욕정,
곧 마귀의 욕정에 따라
썩어져 간다.
이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롬 6:6),
침례 안에서 매장되었다(4절).
우리는
침례 안에서
옛사람을
벗어 버린 것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침례를 받음으로
새사람을 입었다(롬 6:4하).
새사람은
실지적인 교회생활이다.
실지적인 교회생활은 바로
단체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영과 연합되신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한 새사람인
교회생활을 입는 것은
신성한 영과
거듭난 사람의 영의
연합으로 산출된
단체적인 한 실체를
입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