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owing Up into Christ
in All Things
and Learning Christ
as the Reality Is in Jesus
for the Corporate Living
of the One New Man
(모든 것들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람과
또 그 한 새사람의 단체적인 생활을 위하여
그 실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과 같이
[as …; 있는 것으로, 있는 그대로, 있는 만큼, 있으므로,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배움)
한 새사람의
단체적인 생활을 위해
우리는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야 한다.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기까지,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증가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모든 일에서,
곧 크든 작든
각각의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야 한다.
우리는 아직
많은 일들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지 않았다.
그러한 일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밖에 있다.
우리 모두가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랄 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일 것이다.
이것이
우주적인 한 새사람이다.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것은
우주적인
한 새사람이
실지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것은
24절에서
새사람을 입는 것과
동일하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 나오는
충분히 성장한 사람은
24절에 나오는
한 새사람을 가리키는데,
이 한 새사람은
충분히 성장하였다.
에베소서 4장은
생명의 성장을 통해
새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한 새사람은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반드시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에베소서 2장 15절에서
우리는
새사람의
유기적인 창조를 보며,
4장 13절부터 16절까지에서는
기능과 관련해서
새사람의
온전하게 됨을 본다.
유기적으로 온전한
한 새사람이
합당하게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성장을 통해
온전하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
한 새사람은 오직
합당한 양육을 받는 것을 통해서만
기능과 관련해서
온전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이
에베소서에 있는
가장 깊은 관념들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보양하고
소중히 보살피는 것을 통해
한 새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한 새사람은
합당한 양육을 받음으로
더 많이 자랄수록,
더욱더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단체적인 새사람의
성장을 위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강림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지셔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도록
해야 한다.
이럴 때
유기적으로
온전한 새사람이
기능적으로
온전하게 될 것이다.
한 새사람의
단체적인 생활을 위해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를 배워야 한다
(we need to learn Christ
as the reality is in Jesus;
우리는
그 실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그대로[것으로]
그리스도를 배울 필요가 있다).
에베소서 4장 2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이실 뿐 아니라
본이시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그분의 생활에서
하나의 본,
곧 하나의 틀을
세우셨다.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지는 것이다.
침례에 의해
하나님은
우리를
본이신
그리스도 안에
넣으셨다.
침례 받는 것은
틀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지는 것이다.
틀 안으로
넣어짐으로써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활의
틀에 따라
그리스도를
배우는데,
그분의 생활의
틀은
바로 실재이다
(We learn Christ
according to the mold
of the life of Jesus,
which is reality;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의[삶의]
주형에[거푸집에] 따라
그리스도를 배우며,
이것이 실재이다).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그] 틀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의
삶 동안에
세우신
본 안으로
넣어져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it is to be molded
into the pattern
set up by Him
during His years
on earth;
그것은
땅 위에서의
그분의 오랜 기간[해들] 동안에
그분에 의해 세워진[설립된]
그 본[원형] 안으로
형성되는[만들어지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
라는 표현은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생활의
실지 상태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생활은
실재의 생활이었다.
에베소서 4장 17절과 21절에서
우리는
헛된 생각과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의
대조를 본다.
실재는
빛의 빛남이다.
빛은
근원이고,
실재는
표현이다.
주 예수님은
빛이신 하나님의
빛남이시다.
이 땅에서의
주님의 삶의
모든 방면에는
빛의 빛남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의 생활은
실재의 생활,
곧 비추시는
하나님 자신의
생활이었다.
그러한 실재의 생활은
하나님의 표현이었다.
한 새사람의 삶은
정확히
예수님의 삶과
같아야 한다.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방식이
오늘날
새사람이
살아야 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생활 표준은 반드시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와 일치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셨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하는
생활을 사셨다.
예수님의 인간 생활은
실재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의와 거룩함으로 충만하신
하나님 자신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실재의 생활을
살기 위해
그리스도를
배워야 하고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단체적인 인격인
한 새사람은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실재의 생활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생활은 바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생활이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의 영에 따라
생활한다면,
우리는
단체적인 새사람의
생활을 가질 것이다.
곧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에 부합하는
생활을 가질 것이다.
교회생활은
단체적인 한 새사람의
매일의 행함이다.
다시 말하면,
본성과 방식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행함이다.
한 새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은
새롭다.
한 새사람은
하나님 자신과
일치하고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신성한 생활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생활은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단체적인 생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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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plies on “한 새사람의 단체적인 생활을 위해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며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를 배움”
6일
요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엡 4:22-24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을 따르는
옛사람,
곧 그 속이는 것의
욕정에 따라
썩어져 가는
옛사람을
벗어 버린 것이며,
또한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
새사람,
곧 하나님을 따라
그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사람을
입은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에 대해
말하고,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면’
(21절)이라고 말한다.
…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 곧 진리는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생활의
실지 상태이다.
예수님의 생활은
진리, 곧 실재로 충만한
생활이었다.
… 예수님은
늘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에
부합되는
방식으로 사셨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
바울은
새사람이
하나님을 따라
그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이 실재는
의심할 바 없이
예수님 안에 있는
바로 그 실재이다.
우리의 생활 표준은
율법이나 사회의 표준들을
따른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반드시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에 의해
살아 나타난
실재를 따른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달리 말해서,
새사람의 삶은 정확히
예수님의 삶과
같아야 한다.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방식이
오늘날
새사람이
살아야 하는 방식이다.
만일 우리가
그런 식으로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옳고 그름을 따라
논리적으로 따지지 말아야 한다.
그 대신 우리는
진리가
예수님 안에 있었던 것처럼
그 진리에 따라
일상생활의 여러 방면들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물건을 사러 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주 예수님께
물건을 사러 가실 것인지
여쭈어 보아야 한다.
한 새사람의 생활은 반드시
예수님의 실재의
생활이어야 한다.
만일 우리 모두가
하늘에 속하고, 신성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산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놀라운 공동체의 생활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새사람의
단체적인 생활이다.
교회생활의 열쇠는
생각의 영이다.
만일 우리가
생각의 영을 따라 산다면
교회생활 안에는
신성한 성품의
표현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맛과
하나님의 표현을 지닌
단체적인 한 백성이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단순히
선하고 의롭고 친절하다는
인상만 준다면,
우리의 교회생활은
실패이다.
우리의
선함과 의로움과 친절함 안에는
반드시 삼일 하나님의 표현이
있어야 한다.
교회생활은
그리스도의 향기와 맛과
하나님의 성품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러한 생활은
우리의 인성을 통해 나타난
삼일 하나님의
생활이다.
수 세기 동안
하나님은
그러한 교회생활을
고대해 오셨다.
새사람인
교회 안에서
우리는
헛된 생각을 따라
살지 않고,
생각의 영을 따라
살아야 한다.
이것이
단체적인 한 새사람의
일상생활의 열쇠이다.
이전에
우리의 생각은
헛된 것으로
가득 찼지만,
지금은 반드시
영으로
적셔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 안으로
퍼지고 있고
생각을
채우고 있는
영을 따라 행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식으로 행할 때,
새사람의
매일의 행함은
생각의 영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교회생활의 비결이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
바울은
새사람이
하나님을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새사람이
하나님 자신과
일치하고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가졌다는 것을
뜻한다.
새사람은
하나님을 따른 것이므로
반드시 신성한 생활을
해야 한다.
이러한 생활은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단체적인 생활일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집회에 함께 모여
찬송하고,
기도로 말씀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고,
간증함으로써
교회생활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생활은
단체적인 한 새사람의
매일의 행함이다.
다시 말하면,
본성과 방식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행함이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의 영에 따라
생활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단체적인 생활을 하는
이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새로운
합당한 공동체의 생활을
가질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우리의 하늘이
청명하고,
우리가
완전히 빛 안에 있게 될
날을
주님께서
속히 오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
5일
엡 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님 안에서
증언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인들이
헛된 생각을 따라
행하는 것처럼
행하지 마십시오.
엡 20-21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들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면,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실재)는
(The truth[reality])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생활의
실지 상태이다
(the real situation).
이방인들,
곧 타락한 사람들의
경건하지 않은 행함에는
공허함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건한 생활에는
진리, 곧 실재가 있다.
예수님의 생활은
항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하는
생활이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생활 안에 계셨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셨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이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로 거듭나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as the reality is in Jesus;
그 실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그대로[것으로])
예수님께 배운다
(learn from Him;
그분께로부터 배운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의
노력으로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to endeavor
to imitate Christ
by the efforts
of our natural life;
우리의
천연의 생명의
노력들로
그리스도를 본받으려
애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is a mistake;
실수이다[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틀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넣으셨다.
… 이 틀은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생활,
곧 절대적으로
진리에 따르는
생활이다.
진리는
빛이 빛나는 것,
곧 빛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진리는
하나님의 표현이다.
복음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생활에 대한
모든 방면이
하나님의 표현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모든 말씀과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표현하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표현은
빛의 빛남이고,
따라서 그것은
진리이다.
진리에 따른
예수님의 생활은
하나의 본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이 본 안에 두셨다
(is the pattern
in which God
has placed us;
그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신
그 본이다[모범이다, 원형이다]).
… 이 생활은
빛의 빛남이다.
빛의 빛남은
진리이고,
진리는
하나님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활에는
진리가 있다.
주 예수님께서
세우신
본의 본질이
진리, 곧 실재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활의 본질이
진리라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를 배웠다.
에베소서 4장 21절에서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 즉 실재는
17절에 있는
헛된 생각과
대조(對照)된다.
이방인들은
그들의
헛된 생각 안에서
행하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산다
(live a life
as the truth is in Jesus;
그 진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그대로[있을 때]
한 생명을 산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사셨을 때
결코
공허함 안에서
행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항상
진리,
즉 신성한 빛의
빛남 안에서
행하셨다.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표현 안에서
살고 행하셨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바로 이 진리에 따라
그리스도를 배웠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삼십삼 년 반을
사시면서
틀, 곧 본을
세우셨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이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to which
… are to be conformed;
이를 향하여
같은 모양이 될 것이다[된다]).
사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주 예수님의 생활은
실재의 생활이었다.
실재는
빛의 빛남이다.
빛은
근원이고,
실재는
근원인 빛의
표현이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다.
이것은
그분께서
빛이신 하나님의
빛남이심을 뜻한다.
이 땅에서의
주님의 생활의
모든 방면에는
빛의 빛남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의 생활은
실재의 생활,
곧 비추시는
하나님 자신의
생활이었다
(a life
of the shining
of God Himself;
곧 하나님 자신의
빛남의
한 생활이었다).
그러한 실재의 생활은
하나님의 표현이었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운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실재이신
예수님의
생활의 틀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배운다
(learn Christ
according to the mold
of the life of Jesus,
which is the reality;
그 실재인
예수님의
생명의 주형에 따라
[생활의 거푸집에 따라]
그리스도를 배운다).
그리스도는
이 틀을 세우신 후에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셨고,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그러한 영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
(As such a Spirit,
He comes into us
to be our life;
그러한 한 영으로서
그분께서
우리 안으로 오시고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침례 받았을 때,
하나님은
밀가루 반죽을
틀 안에 넣듯이
우리를
[그] 틀이신
그리스도 안에
넣으셨다.
우리는
[그] 틀 안에
넣어짐으로써
[그] 틀을
배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짐으로써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면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넣으셨다.
또 다른 면에서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들어오셨고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신
(in which
we have been placed
by God;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그 안에 두어진)
그 틀에 따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by Him;
그분에 의해, 그분으로)
살 수 있다.
우리는
틀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으로서
우리 안에
계신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as the reality is in Jesus;
그 실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그대로[것으로, 있을 때])
그리스도를 배운다.
4일
엡 4:20-21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들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면,
에베소서 4장 17절부터 19절까지는
20절에서
바울이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한 것에
대한 어두운 배경이다.
신약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지적한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바울은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라고 선포한다.
그런데 여기
에베소서 4장 20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웠다고
말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웠다고 말할 때
바울이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또한 다음 구절인
21절에서도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들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면”
이라고 말하면서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이실 뿐 아니라
본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아닌
우리의 생명이신
그분에 의해,
그분의 본을 따라
그분에게서 배웠다.
신약에 따르면,
주 예수님은
곧바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지
않았다.
오히려 주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삼십 년을 사신 후,
또 다른 삼 년 반 동안
사역하셨다.
삼십삼 년 반을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그분은
본과 틀과 모형을
세우셨다.
이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다.
사복음서가
쓰인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본,
즉 하나님을
만족시키며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삶의 모형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신약은
네 방면에서 쓰인
유일한 전기(傳記)인
주 예수님의 전기를
보여 준다.
주 예수님은
복음서들에 계시된
그러한 본을
세우신 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주님은
바로 부활 안에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어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
신약에 따르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지는 것이다.
…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넣으실 때,
어떤 틀 안으로
넣으신 것이다.
…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틀에 따른
형태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29절은
우리가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맏아들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이루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틀에 넣어져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맏아들은
본이시고,
맏아들의 많은 형제들은
이 본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본에 따른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
즉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침례에 의해
하나님은
우리를
본이신
그리스도 안에
넣으셨다.
침례 받는 것은
틀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지는 것이다.
로마서 6장 3절과
갈라디아서 3장 27절은
둘 다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 받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 받는 것은
그분 안으로
장사되는 것이다.
이 침례라는
무덤이
본이자 틀이다.
… 틀 안으로
넣어짐으로써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다.
그리스도 안으로
장사됨으로써
우리는
아담과 옛 창조물에서
나오게 되었다.
침례에 의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시며 본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졌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왜 과거 시제를 썼는지를
설명해 준다.
침례에 의해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장사되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웠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이
틀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그분께서
이 땅에서의 삶 동안에
세우신
본 안으로
넣어져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본을 세우신 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 후
부활 안으로
들어가셔서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 영으로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으로
침례 받았을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본이자 틀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넣으셨음을
이미 지적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웠다’고
말할 수 있었다.
신약의 빛과
우리의 체험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넣으셨고,
우리 편에서는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짐으로써
그리스도를 배웠다.
사람이
구원받은 후에는
주 예수님께서
세우신
본에 따라 살기를
…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 갈망을
소홀히 하거나
(ignore; 무시하거나),
자신의 노력으로
그분을
닮는 데
성공할 수 있다고
(they can succeed
in imitating Him;
그분을
흉내냄에 있어[모방하기를, 본받기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잘못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계발한다
(cultivate it;
그것을[갈망을]
기른다, 갈고 닦는다, 함양한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훈련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It is a mistake
to think
that we
can imitate Christ
by the exercise
of our natural life;
우리의 천연의[선천적인] 생명을
행사함으로써[발휘함으로, 연습함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흉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이다[착각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은
그분을
닮아야 하지만
(should imitate;
본받아야 하지만, 보고 배워야 하지만)
자신의 타고난 생명에 따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3일
엡 4:12-13
이것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 사역의 일을
하게 하려는 것,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게 하며, …
엡 3:16-17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분의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여러분을
강하게 하셔서
속사람에 이르게 하시고,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 …
오늘날의 기독교 안에는
몸의 지체들의
합당한 기능 발휘가 없다.
… 믿는 이들이
함께 모일지라도,
그들은
기능을 발휘하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만 있다.
이것은
… 참된 성장을 가져오는
먹임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합당하게 보양을 받은
(properly nourished;
적절하게 영양분을 공급 받은,
제대로 길러진)
이들만이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처음에 있었던 것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처음에,
특히 바울이 있었던 때에
성도들은
풍성하게 먹을 수 있었고
보양을 받았다
(were richly fed
and nourished;
풍부하게 먹여졌고
영양분을 공급 받았다).
만일 우리가
온전하게 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리가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조성될
필요가 있다.
… 우리는
그분으로 적셔질 때까지
그분을
더욱더 우리 안으로 취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기능을 발휘하는
(그) 몸의 지체들,
즉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셨다가 강림하신
(who has ascended and descended;
올라가셨고 또 내려오신)
그리스도에 의해 조성된
(constituted by the Christ;
그 그리스도로 구성된,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은사들이
(gifts; 선물들이)
될 것이다.
승천하신 때로부터
그리스도는
패배한 원수들을
(the vanquished foes;
완패당한 적들을)
그분의 몸을 위한
은사들로 조성하는
(constitute … into gifts;
선물들 안으로 구성하는)
일을 해 오셨다.
먼저
그분은
패배한 원수들에게 가셔서
그들 안으로
들어가신다.
그런 다음에
그분은
점차 그들을
그분 자신으로
채우시고 적시신다.
마침내
전에
(once; 한때)
그분의 원수들이었던
(His enemies;
그분의 적들이었던)
이들은
(those; 사람들이)
유용한 은사들로
변화되고 조성됨으로써
몸에게
드려질 수 있게 된다
(can be presented to the Body;
그 몸에 주어질 수 있다).
이 은사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그들 안으로
옮겨 붓는다.
이런 식으로
몸의 지체들은
보양을 받고
보살핌을 받는다.
그럴 때
그들은
거룩하게 되고,
순수하게 되며,
변화되어
기능을 발휘하는
지체들이 될 것이다.
그 결과
온몸은
그 풍성한
공급을 해 주는
각 마디를 통하여,
그리고 모든 지체가
분량에 따라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하여
함께 결합되고 짜일 것이다.
이것은
몸이 자람으로써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게 할 것이다
(will cause
the growth of the Body
unto the building up
of itself
in love;
그 몸의 성장을 야기하여
사랑 안에서
그 자체의 건축에
이르게 할 것이다).
나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기능을 발휘하는
지체들이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the day is coming;
그 날이 오고 있다고)
믿는다.
(그) 새사람의
성장을 위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ascended; 올라가셨고)
강림하신
(and descending; 또 내려오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지셔서
(must be wrought
into us;
우리 안으로
세공되셔야만 하고,
우리 안으로
수놓아지셔야만 하고,
우리가 되셔야만 하고)
우리의 모든 것이
되셔야 한다는 것을
(to be our everything;
우리의 각각의 모든 것들이
되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럴 때
유기적으로
(organically;
근본적으로, 기질적으로,
조직적으로, 구조적으로)
온전한
새사람이
기능적으로도
온전하게 될 것이다.
새사람은 주로
가르침에 의해
온전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은
사실상 생명의 성장에
방해가 될 수 있다
(may actually be
a frustration
to our growth in life;
사실상 우리의 생명 안에서의 성장에
하나의 좌절시키는 것이 될 수 있다).
새사람이
창조될 수 있기 전에,
먼저
모든 규례들이
(all the ordinances;
그 모든 규정들이, 명령들이, 포고들이, 법령들이)
폐해져야 했다.
… 규례들은
새사람을 형성하는 일에
장애물이며
(obstacles;
장애물들이고, 방해물들이고),
교리들은
(doctrines;
신조들은, 주의들은, 학설들은, 원칙들은)
새사람이
성장하는 일에
방해물이다.
… 성장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Growth
only comes
through the experience of Christ;
성장은
그리스도를
체험함을 통해서만
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공급할 수 있는
(can minister;
베풀 수 있는, 나누어줄 수 있는,
사역할 수 있는, 봉사할 수 있는,
섬길 수 있는, 모실 수 있는)
정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과
(to our experience of Christ;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함에)
정비례한다.
… 우리가
그리스도를 공급할 때
다른 이들은
보양을 받게 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셋째 하늘로 승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The very Christ
who was crucified
and resurrected
and who has ascended
to the third heaven;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되살려지신
또 그 셋째 하늘로 올라가신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를
기능을 발휘하는
몸의 지체들로
조성하시려고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에
(in our hearts;
우리의 마음들 안에)
거처를 정하심으로써,
또한 우리를
그분 자신으로
적시심으로써
이 일을
수행하고 계신다.
그분께서
우리를
적시실 때
우리는
거룩하게 되고,
순수하게 되며,
보양을 받고,
보살핌을 받으며,
변화된다
(nourished,
cherished,
and transformed;
영양분을 공급 받고,
소중히 여김을 받으며,
또 변형된다, 형질 전환이 된다, 완전히 바뀐다, 탈바꿈된다).
그 결과
우리는
기능적으로
온전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몸은
자라며
스스로 건축된다
(builds itself up;
그 자체를 건축한다).
몸은
머리에 의해서나
(by the Head or …;
그 머리에 의해서나)
에베소서 4장 11절에 언급된
은사들에 의해서
(by the gifts;
그 선물들에 의해서)
직접
(directly;
직접적으로, 곧장, 바로)
건축되지 않는다.
몸은
은사 있는 이들이
온전하게 한
(have been perfected
by the gifted ones;
그 선물로 주어진
사람들에 의해서
온전하게 된, 온전하게 되어 온)
지체들에 의해서
(by those members;
그 지체들로)
직접
건축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적셔질수록
(The more
we are saturated
with Christ;
더 많이
우리가
그리스도로
흠뻑 적셔질수록, 가득 채워질수록, 포화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the more; 더 많이)
실지로
(in reality;
사실, 정말, 실제로, 현실적으로)
특정한 분량의
(a particular measure of;
한 뚜렷한[현저한] 치수의,
하나의 개별적인 크기의)
기능을 가진
몸의 일부분이
(parts of the Body;
그 몸의 부분들이[부위들이])
될 것이다.
그럴 때
어느 곳에 있더라도
우리는
합당하게
(properly; 적절하게, 제대로, 정확하게)
기능을 발휘할 것이며,
(그) 몸은
자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원수인
(the enemy of God;
하나님의 적)
사탄을 떨게 만들 것이고,
또한 주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재촉할 것이다.
2일
엡 4:15-16
오직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고,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야 합니다.
온몸은
그분에게서 나온
그 풍성한 공급을 해 주는
각 마디를 통하여,
그리고 각 지체가
분량에 따라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하여
함께 결합되고
함께 짜입니다.
그래서 몸이 자람으로써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5절에서
바울은
한 새사람의 창조를
말하고 있다.
“규례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 안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이 둘을
그분 자신 안에서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시어
화평을 이루시려는 것이며”.
그런 다음
4장 13절에서는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하고,
24절에서는
새사람을
입는 것에 대해 말한다.
4장 13절에 나오는
충분히 성장한 사람은
24절에 나오는 새사람이다.
에베소서 2장 15절에서
우리는
새사람의 창조를
본다.
우리는
이 창조를
새사람의 출생으로
여길 수도 있다.
마치 어린아이가
성장함으로
온전하게 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사람 역시
성장을 통해
온전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와 같이
4장에서도
새사람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유기적으로
온전하고 완전한 것과
기능의 면에서
온전한 것을
구별할 수 있다.
갓난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유기적으로 온전하다.
즉 갓난아기는
필수적인 모든 기관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나면서부터
기능적으로는
온전하지 못하다.
… 합당하게 발육하고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모든 어린아이는
보양받고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이 원칙은
새사람인
교회에도
적용된다.
에베소서 2장 15절에서
우리는
새사람의
유기적인 창조를 본다.
그러나 4장 13절부터 16절까지에서는
기능과 관련해서
새사람의
온전하게 됨을 본다.
에베소서 4장 16절은
극히 중요한 구절이다.
… 생명의 성장은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것이지만,
몸 안에서의
우리의 기능은
그분에게서 나온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각 지체’라는 말은
몸의 모든 지체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들은
몸의 성장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각자의 분량을
가지고 있다.
몸은
공급하는
마디들과
기능을 발휘하는
지체들을 통하여
스스로 성장한다.
몸의 성장은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서
증가하시는 것이며,
이것은
몸이
스스로 건축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에베소서 2장에서
우리는
새사람의 출생은
보지만
새사람의 기능은
보지 못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새사람은
유기적으로 온전하다.
그러나 아직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마치 어린아이가
보양과 보살핌을 받음으로
온전하게 될 필요가 있듯이,
유기적으로 온전한
한 새사람이
합당하게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성장을 통해
온전하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육신의 생명은
이것을 예시해 준다.
오직 하나님만이
유기적으로 온전한 존재를
창조하실 수 있다.
… 그리고 어린아이가
양육을 받고
성장할수록,
더욱더 이 어린아이는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같은 원칙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된
새사람은
반드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한
성장을 통하여
새사람은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각 지체의 분량에 따른
기능 발휘를 통해
몸은 성장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게 된다.
새사람의 창조는
주님 혼자의 책임이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할 일이
전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보양하고
소중히 보살피는 것을 통해
한 새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새사람은
이런 식의
온전하게 됨에 의해,
자라고
기능적으로 온전하게 된다.
새사람은 오직
합당한 양육을 받음으로써
기능상 온전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에베소서에서
가장 심오한
관념들 중의
하나이다.
… 몸은
교리의 가르침을 통해
기능적으로
온전하게 되지 않는다.
사실상
생명의 성장을 통해
새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에베소서 4장에서는
교리가 경시된다.
바울은
우리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때,
가르침의 바람에
밀려다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몸의 건축을 위해
필요한 것과
새사람을
기능적으로 온전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생명의 성장이다.
이것은 오로지
먹임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1일
엡 4:13-15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게 하며,
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분량에
(at the measure
of the stature
of the fullness
of Christ;
그리스도의 충만함의
키의 기준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함으로,
온갖 가르침의 바람에
밀려다니거나
파도에
요동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사람들의 속임수이며,
오류의 체계에
빠지게 하는
간교한 술수입니다.
오직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고,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음으로
우리는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란다.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기까지,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증가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15절에 있는
머리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증가에 따른
우리의 생명의 성장이
반드시 머리 아래에 있는
몸 안의 지체들의
성장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머리 안으로
자란다는 것은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와 교회만을
관심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만을
관심함으로써,
즉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음으로써
성장한다.
우리는
윤리적인 품행과 관련된
어떤 종류의
정직이나 성실에 의해서
자라지 않는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성장의 문제는
특별히
모든 일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것과
관련된다.
4장 13절부터 16절까지는 모두
성장의 필요성을
지적한다.
우리가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자라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더 이상
이리저리 밀려다니거나 요동하는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려면
역시 자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 안으로나
그리스도와는 동떨어진
다른 어떤 것 안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성장이
반드시
몸 안에 있어야 함을
가리킨다.
우리가
머리 안으로 자라려면
반드시
몸 안에 있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겉으로 볼 때
영적으로 자라고 있지만,
그들의 그럴듯한 성장은
몸 안에 있지 않다.
나는
이런 종류의 성장을 가짐으로써
사실상
의견을 달리하게 된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랄수록
더 비판적이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이
별로 자라지 않았을 때는
교회생활 안에서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자라게 되면서
그들은
문젯거리가 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성장이
머리 안으로 자란 것이
아니라는 표시이다.
어떤 사람의 성장이
머리 안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몸 안에서의 성장이 아니다.
… 우리가
어떤 종류의 성장을
가질지 모르지만
몸 안에 남아 있지 않다면,
그것은
머리 안으로 자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바울은
반드시
모든 일에서
머리 안으로
자라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측면에서는
머리 안으로 자랐지만,
다른 측면들에서는
아마 머리 안으로
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 만일 우리가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이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간다면,
아직도
머리 안으로 자라지 못한
작은 일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것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성장에 대한
이러한 필요성이
우리의 마음을 만지고,
우리로 하여금
새롭게
주님께 돌이키게 하기를
바란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것은
24절에서
새사람을
입는 것과
동일하다.
새사람을 입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면 자랄수록
더욱더
새사람을
입게 된다.
새사람을 입는 것은
합당한 교회생활 안에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지 않으면
교회생활 안에
있을 수 없다.
예를 들면,
물건을 사는 것과
말하는 것과 같은
일상생활의
모든 세세한 것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야 할
필요가 있다.
종종 우리의 말은
천연적이고
그리스도가 결여되어 있다.
그러한 천연적인 방식의 말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안으로
자람으로써
성장에 의해
그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말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란다면,
우리의 말은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이 특정한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람으로써,
우리는
자연스럽게
새사람을
더 많이
입게 된다.
한 새사람의 표현인
교회생활을 입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성장함으로써
성장에 의해
천연적인 모든 것에서부터
나와야 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에베소서 4장 13절과 1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장에 의해
온전하게 된다면,
확실히 우리는
새사람을
입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