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One
Ought to Conduct Himself
in the Church
in Order to Bring Forth
the One New Man
디모데전서 3장 15절은
“혹시 내가
늦어지게 되더라도,
그대가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
라고 말한다.
여기서
‘처신하다’라는 말은
행정을 가리킨다.
디모데는
교회들의 관리와 행정에 관련된
문제들을 안배하라는
바울의 위임을
받았다.
“그대가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을 때,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일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안배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바울은
그 자신이
늦어지게 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에게
영적인 통찰력이 있다면
우리는
바울이 사실상
주님께서
늦어지시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주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교회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곧 교회 안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교회가 무엇이고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무엇을 하시기를 갈망하는지를
분명히 알기 원한다면,
우리는
에베소서 2장 13절부터 16절까지,
골로새서 3장 10절과 11절,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 12절과 13절을
이해해야 한다.
에베소서 2장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사람이 된 것에 대해
말한다.
새사람은
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새사람은
단체적인 새사람이다.
따라서 에베소서 2장 15절은
그리스도께서
이 둘(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는
규례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없애 버리심으로써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어뜨리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모든 규례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규례들은
의례적(儀禮的)인 율법과
그 의식(儀式)들을
가리킨다.
이것들은
생활과 경배의
형식 또한 방식이다.
생활과 경배의
이러한 형식이나 방식이
적대감과 분열을
일으킨다.
합당한 교회생활을
실행하려면,
모든 규례를
거절하고 버려야 한다.
“또한 적대감을
십자가로 소멸하셔서,
이 십자가를 통하여
이 둘(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한 몸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엡 2:16.
이 한 몸인
교회는
이전 절인
2장 15절에 언급된
한 새사람이다.
바로 이 한 몸 안에서
이 둘,
곧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were reconciled to God;
하나님께 일치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우리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화목하게 되었다
(were reconciled;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조화롭게 되었습니다, 융화되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큰 계시인가
(what a revelation
is here;
여기에
어떠한[얼마나 대단한]
계시가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구원받았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
아담, 곧 옛사람 안에
있었다.
구원받았을 때
우리는
아담에게서 나와
옛사람을 벗어 버렸고,
새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입었다.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 새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에 따라
온전한 지식에 이르도록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 골 3:10.
그리스도는
새사람의
조성 성분이시기 때문에,
새사람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이것은
골로새서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대한
요점이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입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 할지라도,
새사람은 아직
우리를 통해
나타나지 않았다.
새사람은
옛 창조물에 속한
우리를
그 구성 요소로 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
골로새서 3장 10절에 나오는
‘온전한 지식에 이르도록’이라는 말이
보여 주듯이,
이러한 새로워짐은 주로
우리의 생각 안에서 일어난다.
새사람은
우리의 영 안에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표현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에 따라
온전한 지식에 이르도록
우리의 생각 안에서
새로워지고 있다.
우리가
주님을
더욱더 알아 갈수록
새사람은
더욱더 새로워질 것이고,
한 새사람의 산출을 위해
주님의 형상이
더 많이 나타날 것이다.
골로새서 3장 11절은
헬라인과 유대인,
할례자와 무할례자,
야만인, 스구디아인,
노예, 자유인이
모두
십자가 위에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없습니다
(직역하면, 있을 수 없습니다—역자 주)’
라는 표현은
모든 것이
종결되었고,
새사람 안에는
타고난 사람이
없으며,
새사람 안에는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신’
그리스도 외에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강한 말이다.
우리가 참으로
이 빛을 본다면,
우리의 봉사와 일에
매우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해서
고린도전서 12장 12절과 13절은
“왜냐하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가 한 몸인 것같이,
그리스도도
그와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모두
한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 받았고,
또 모두
한 영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골로새서 3장 11절과
일치한다.
우리는 모두
성령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즉 한 새사람 안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 받았다.
십자가에 의해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에 의해,
그리스도는
그분께서 구속하신
사람들을 화목하게 하셨고,
그들을
그분 자신 안에서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셨다.
이 새사람,
이 몸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 새사람 안에는
차이점들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 계신다.
그리스도는
모든 지체들이시고
모든 지체들 안에 계신다.
우리가
위에 언급한
모든 요점에 대해
분명해질 때에만,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떻게 행정을 수행하고
봉사하는지
(어떻게 처신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본을 통해
교회의 행정과 관련된
열 가지 중대한 요점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열 가지 요점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이 열 가지 요점을
우리의 마음 판에 새기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첫째로,
갈라디아서 1장 15절과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그분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으로 전파하게 하시려고,
그분의 아들을
그 안에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한다.
바울은
지식이나 교리를
전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계시해 주신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것은
그분께서
몸의 생명,
곧 새사람의 생명이심을
뜻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말이
강하게 보여 주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생명으로 취하고
그분에 의해
살아야 하며,
골로새서에 계시되신
우주적으로 광대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그분의
온 존재와
그분께서
도달하시고 획득하신 모든 것이
객관적인 것으로
남지 않고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이
될 것이다.
셋째로,
바울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바울은
“내가
… 율법에 대하여 죽었는데,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한 것입니다.
… 이제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생명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생명입니다.”
라고 말한다
— 갈 2:19-20.
넷째로,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과
우리가 소유한 것이
십자가에서 종결되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라고 말한다
— 갈 2:20.
다섯째로,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에 따라서나
우리가
자신 안에 갖고 있는 것에 따라서
봉사해서는 안 된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바울은
“세상은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라고 말한다.
여섯째로,
바울의
유일한 목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유일한 목표는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증가하실 수 있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
바울은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나는 다시
여러분을 위하여
해산하는 진통을
겪습니다.”
라고 말한다.
일곱째로,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 대신 우리는
그들이 오직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며,
그리스도께
완전히 얻어지기만을
바라야 한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바울은
“내가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입니다
(For I did not determine
to know
anything among you
except Jesus Christ,
and this One crucified;
왜냐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
또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 한분 외에는
여러분 중의 어떤 것을
알기로
결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여덟째로,
우리는
우리의
교회 봉사와 일과 행정에서
오직 한 가지 결과만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그 결과는 반드시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출되심으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지체들 안에서 증가하시며,
모두가
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분량에
(at the measure of the stature;
키의 수치에, 키의 기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죽음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생명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합니다.”
라고 말한다.
아홉째로,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위해
기도했다.
우리는 반드시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열째로,
우리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사도 바울과 같이,
특별히 위에 나열된
요점들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는
능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더욱 넘치도록
해 주실 수’(엡 3:20)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에베소서 3장 16절부터 21절까지는
새 예루살렘을
이루어 내고
한 새사람을
산출하기 위해,
봉사자가
어떠한
영과 태도와
기도와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계시해 준다.
바울의 영과 태도
—그가 본 것,
그를 채우고 있는 것,
그가 말하는 것,
그의 마음이 관심하는 것—는
하나님께서
육체로 나타나시고
사람과 연합되심으로,
그리스도로
교회를 건축하시어
교회를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이상과
관계가 있었다.
에베소서 3장 16절부터 21절까지에 있는
가장 귀중한 요점은
바울의 기도와 믿음이 아니라,
그의 영과 태도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협력하여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 안으로
일해 넣어 주고,
재료이신 그리스도를
그들 안으로
건축해 넣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그들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표현 곧 충만을 위해
(한) 영적인 성전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영과 태도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부담이 너무나 무거워서,
“나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빕니다.”
(엡 3:14)
라고 말하였다.
바울이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은
속에 있는 무언가가
그로 하여금
아버지께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사로잡혔기 때문에,
에베소서 3장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을 섬기는
모든 장로와 모든 집사와
모든 동역자와 모든 사람은
(Every elder, deacon, co-worker,
and everyone who serves the Lord;
각각의 모든 장로와 집사와 동역자와
또 주님을 섬기는 각각의 모든 사람은)
이 이상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바울과 동일한
영과
태도와
내적인 감정을
(inner mood;
속의 마음가짐을, 내부의 심적 태도를)
가질 정도까지
이 이상, 곧 이 계시를
보아야 한다.
바울은
아버지에 의해
강하게 되어
속사람에 이르러야 하는
우리의 필요에 관한
네 방면을 묘사했다.
믿는 이들이
강하게 되는 것에 관한
첫째 방면은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엡 3:16)이다.
영광은
표현되신 하나님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그 풍성의 표현이며,
표현된 그 영광이
충만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표현되기를 원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 안으로
일해 넣어지며,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표현되신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있게 된다.
표현되신 하나님의 영광은
믿는 이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그들 안에서
강하게 하는
능력이
될 수 있다.
그 결과
믿는 이들은
강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한다.
믿는 이들이
강하게 되는 것에 관한
둘째 방면은
‘그분의 영을 통하여’
(엡3:16)이다.
그 영이 없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표현되실 수 없다.
아버지는
내주하시는 영을 통하여
안에서부터
우리를
강하게 하신다.
이 내주하시는 영은
우리가 거듭난 이후로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셨다.
믿는 이들이
강하게 되는 것에 관한
셋째 방면은
그들이
‘능력으로’
(엡 3:16)
강하게 되는 것이다.
이 능력은
에베소서 1장 19절부터 22절까지에 언급된
능력,
곧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렸고,
그리스도를
하늘들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혔으며,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시켰고,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머리가 되게 하여
교회에게 주신
능력이다.
그러한 능력이
우리 안에서
발휘되고 있으며
(operates; 움직이고),
하나님은
그러한 능력으로
교회를 위해
우리를
강하게 하신다.
믿는 이들이
강하게 되는 것에 관한
넷째 방면은
그들이
강하게 되어
‘속사람에 이르는 것’
(엡 3:16)이다.
속사람은
우리의 거듭난 영이며,
하나님의 생명이 바로
이 거듭난 영의 생명이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강하게 되어
우리의 영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need to be strengthened
into our spirit
through the Holy spirit;
그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영 안으로
강하여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는 것이다
(The issue
is Christ
making His home
in our hearts;
그 유출은[그 성과는, 그 핵심은]
우리의 마음들 안에
그분의 집을 만드시는
그리스도이다).
에베소서 3장 17절에서
‘마음(들)’은
중요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우리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
반응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마음은
느낌과 감정의 기관이며,
바로 이곳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장소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사람 안으로
일해 넣는
그 필요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증가하시는 일에
사로잡혀 있었다.
따라서 이것이
그의 영과 태도가 되었으며,
이러한 그의 영과 태도가
그의 주요 관심사였다
(he was obsessed with
the matter of Christ
increasing in us,
which was
his central concern,
and this became
his spirit and attitude;
그는
우리 안에서 증가하시는
그리스도의 문제로
사로잡혔고,
이것이
그의 중심적인 관심사였으며,
또 이것이
그의 영과 태도가 되었다)..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6절부터 21절까지를
썼을 때,
심지어 우주까지도
초월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느낌 안에
계시고
우리의 마음 안에서
실재가 되실 때
(is real;
실제적이실 때, 실감나실 때, 생생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을 것이다
(will be rooted
and grounded;
뿌리가 내려질 것이고
[깊이 뿌리박힐 것이고, 자리잡힐 것이고, 정착할 것이고]
땅 위에 놓아질 것이다
[기초가 가르쳐질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바울은
우리가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네 단어를
합한 것이 바로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신
그리스도이다
(Christ
in His immeasureableness;
그분의 측량할 수 없음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다).
이 모든 것의 결과로서
우리는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될 것이다.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가져야 하며,
우리의 생각과 기도는
이것을 위해야 한다.
책임 형제들은
무엇을
자신의 목표로
삼을 것인지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책임 형제들의 목표는
인수의 증가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증가인가
(is it an increase in number
or an increase in Christ;
그것이 숫자에 있어서의 한 증가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에 있어서의 한 증가인가)?
책임 형제들은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그리스도가 증가하시는 것에
완전히 사로잡힌
바울과 같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 외에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to the extent
that we do not know
what to pray
other than this;
이것 외에 기도할 것을
우리가 모르는 정도까지)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사람의
태도와 영과 기도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이
에베소서 3장 16절부터 19절까지에 있는
기도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바로 뒤에 나오는
20절과 21절에서
그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제
우리 안에서 운행하는
능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더욱 넘치도록
해 주실 수 있으신
하나님께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히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
교회 안에서
…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히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라는 말의
완전한 의미는
새 예루살렘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is seen
in the New Jerusalem;
그 새 예루살렘 안에서 보여진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의
완전한 나타남이며,
오늘날
교회는
새 예루살렘의
축소판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가져야 하는
(with which
we serve the Lord;
그것으로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영과 태도와
기도와 믿음이다.
이럴 때,
우리가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것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울 것이며,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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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ply on “한 새사람을 산출하기 위해 교회 안에서 처신하는 법”
신언 노트, 2018 06 24
디모데전서 3장 15절은
“혹시 내가
늦어지게 되더라도,
그대가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 자신이
늦어지게 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에게
영적인 통찰력이 있다면
우리는
바울이 사실상
주님께서
늦어지시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교회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곧 교회 안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사람이 된 것에 대해
말합니다.
새사람은
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새사람은
단체적인 새사람입니다.
따라서 에베소서 2장 15절은
그리스도께서
이 둘을,
곧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한 몸인
교회는
이전 절인
2장 15절에 언급된
한 새사람입니다.
바로 이 한 몸 안에서
이 둘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were reconciled to God;
하나님께 일치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우리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were reconciled;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조화롭게 되었습니다, 융화되었습니다).
여기에
얼마나 대단한 계시가 있는지요!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
아담, 곧 옛사람 안에
있었습니다.
구원받았을 때
우리는
아담에게서 나와
옛사람을 벗어 버렸고,
새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새사람의
조성 성분이시기 때문에,
그 새사람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입니다.
이것은
골로새서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대한
요점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입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 하더라도,
새사람은 아직
우리를 통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새사람은
옛 창조물에 속한
우리를
그 구성 요소로 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새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에 나오는
‘온전한 지식에 이르도록’이라는 말이
보여 주듯이,
이러한 새로워짐은 주로
우리의 생각 안에서 일어납니다.
새사람은
우리의 영 안에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바로 그 표현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에 따라
온전한 지식에 이르도록
우리의 생각 안에서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욱더 알아 갈수록
새사람은
더욱더 새로워질 것이고,
한 새사람의 산출을 위해
주님의 형상이
더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1절은
헬라인과 유대인,
할례자와 무할례자,
야만인, 스구디아인,
노예, 자유인이
모두
십자가 위에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없습니다
(cannot be;
있을 수 없습니다)’
라는 표현은
각각의 모든 것들이
종결되었고,
그 새사람 안에는
타고난 사람이
없으며,
새사람 안에는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신’
그리스도 외에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강한 말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이 빛을 본다면,
우리의 봉사와 일에
매우 큰 변화가
(such a change)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해서
고린도전서 12장 12절과 13절은
“왜냐하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가 한 몸인 것같이,
그리스도도
그와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모두
한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 받았고,
또 모두
한 영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골로새서 3장 11절과
일치한다.
우리는 모두
성령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즉 한 새사람 안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의해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에 의해,
그리스도는
그분께서 구속하신
사람들을 화목하게 하셨고,
그들을
그분 자신 안에서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새사람,
이 몸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이 새사람 안에는
차이점들이
(differences;
다른 점들이, 의견 차이들이, 불화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지체들이시고
모든 지체들 안에 계십니다.
이 모든 요점들에 대해
분명해질 때에만,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떻게 행정을 수행하고
봉사하는지,
어떻게 처신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본을 통해
교회의 행정과 관련된
열 가지 중대한 요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열 가지 요점들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판들 안에
이 열 가지 요점들을
새기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합니다.
첫째로,
갈라디아서 1장 15절과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그분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으로 전파하게 하시려고,
그분의 아들을
그 안에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지식이나 교리를
전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계시해 주신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것은
그분께서
몸의 생명,
곧 새사람의 생명이심을
뜻합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말이
강하게 보여 주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생명으로 취하고
그분에 의해
살아야 하며,
골로새서에 계시되신
우주적으로 광대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그분의
온 존재와
그분께서
도달하시고 획득하신 모든 것이
객관적인 것으로
남지 않고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바울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울은
“내가
… 율법에 대하여 죽었는데,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한 것입니다.
… 이제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생명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생명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 갈 2:19-20.
넷째로,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과
우리가 소유한 것이
십자가에서 종결되었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라고 말합니다
— 갈 2:20.
다섯째로,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에 따라서나
우리가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서
봉사해서는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바울은
“세상은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섯째로,
바울의
유일한 목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유일한 목표는
(Paul’s unique goal, and ours;
바울의 유일한 목표, 또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증가하실 수 있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
바울은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나는 다시
(여러분을 위하여)
해산하는 진통을
(travail again in birth;
출산 안에서 다시 진통을, 해산의 고통을, 산고를)
겪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일곱째로,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그들이 오직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며,
그리스도께
완전히 얻어지기만을
바라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바울은
“내가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입니다
(For I did not determine
to know
anything among you
except Jesus Christ,
and this One crucified;
왜냐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
또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 한분 외에는
여러분 중의 어떤 것을
알기로
결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덟째로,
우리는
우리의
교회 봉사와 일과 행정에서
오직 한 가지 결과만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그 결과는 반드시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출되심으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지체들 안에서 증가하시며,
모두가
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분량에
(at the measure of the stature;
키의 수치에, 키의 기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죽음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생명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아홉째로,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위해
기도했다.
우리는 반드시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열째로,
우리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사도 바울과 같이,
특별히 위에 나열된
요점들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는
능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더욱 넘치도록
해 주실 수’(엡 3:20)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3장 16절부터 21절까지는
새 예루살렘을
이루어 내고
한 새사람을
산출하기 위해,
봉사자가
어떠한
영과 태도와
기도와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계시해 줍니다.
바울의 영과 태도
—그가 본 것,
그를 채우고 있는 것,
그가 말하는 것,
그의 마음이 관심하는 것—는
하나님께서
육체로 나타나시고
사람과 연합되심으로,
그리스도로
교회를 건축하시어
교회를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이상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3장 16절부터 21절까지에 있는
가장 귀중한 요점은
바울의 기도와 믿음이 아니라,
그의 영과 태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협력하여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 안으로
일해 넣어 주고,
재료이신 그리스도를
그들 안으로
건축해 넣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표현 곧 충만을 위해
한 영적인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과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부담이 너무나 무거워서
(was so burdened;
너무 부담 지워져서),
“나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빕니다.”
(엡 3:14)
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이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은
속에 있는 무언가가
그로 하여금
아버지께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사로잡혔기 때문에,
에베소서 3장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모든 장로와 모든 집사와
모든 동역자와 모든 사람은
(Every elder, deacon, co-worker,
and everyone who serves the Lord;
각각의 모든 장로와 집사와 동역자와
또 주님을 섬기는 각각의 모든 사람은)
이 이상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바울과 동일한
영과
태도와
내적인 감정을
(inner mood;
속의 마음가짐을, 내부의 심적 태도를)
가질 정도까지
이 이상, 곧 이 계시를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아버지에 의해
강하게 되어
속사람에 이르러야 하는
우리의 필요에 관한
네 방면을 묘사했습니다.
믿는 이들이
강하게 되는 것에 관한
첫째 방면은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엡 3:16)입니다.
영광은
표현되신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그 풍성의 표현이며,
표현된 그 영광이
충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표현되기를 원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 안으로
일해 넣어지며,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표현되십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있게 됩니다.
표현되신 하나님의 영광은
믿는 이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그들 안에서
강하게 하는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믿는 이들은
강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합니다.
믿는 이들이
강하게 되는 것에 관한
둘째 방면은
‘그분의 영을 통하여’
(엡3:16)입니다.
그 영이 없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표현되실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내주하시는 영을 통하여
안에서부터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이 내주하시는 영은
우리가 거듭난 이후로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셨습니다.
믿는 이들이
강하게 되는 것에 관한
셋째 방면은
그들이
‘능력으로’
(엡 3:16)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에베소서 1장 19절부터 22절까지에 언급된
능력,
곧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렸고,
그리스도를
하늘들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혔으며,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시켰고,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머리가 되게 하여
교회에게 주신
능력입니다.
그러한 능력이
우리 안에서
발휘되고 있으며
(operates; 움직이고),
하나님은
그러한 능력으로
교회를 위해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믿는 이들이
강하게 되는 것에 관한
넷째 방면은
그들이
강하게 되어
‘속사람에 이르는 것’
(엡 3:16)입니다.
속사람은
우리의 거듭난 영이며,
하나님의 생명이 바로
이 거듭난 영의 생명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강하게 되어
우리의 영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need to be strengthened
into our spirit
through the Holy spirit;
그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영 안으로
강하여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는 것입니다
(The issue
is Christ
making His home
in our hearts;
그 성과는[그 유출은, 그 핵심은]
우리의 마음들 안에
그분의 집을 만드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에베소서 3장 17절에서
‘마음(들)’은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
반응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마음은
느낌과 감정의 기관이며,
바로 이곳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장소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사람 안으로
일해 넣는
그 필요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증가하시는 일에
사로잡혀 있었다.
따라서 이것이
그의 영과 태도가 되었으며,
이러한 그의 영과 태도가
그의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he was obsessed with
the matter of Christ
increasing in us,
which was
his central concern,
and this became
his spirit and attitude;
그는
우리 안에서 증가하시는
그리스도의 문제로
사로잡혔고
[그리스도의 문제만
생각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중심적인 관심사였으며,
또 이것이
그의 영과 태도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6절부터 21절까지를
썼을 때,
심지어 우주까지도
초월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느낌 안에
계시고
우리의 마음 안에서
실재가 되실 때
(is real;
실제적이실 때, 실감나실 때, 생생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을 것입니다
(will be rooted
and grounded;
뿌리가 내려질 것이고
[깊이 뿌리박힐 것이고, 자리잡힐 것이고, 정착할 것이고]
땅 위에 놓아질 것입니다
[기초가 가르쳐질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바울은
우리가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네 단어를
합한 것이 바로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신
그리스도입니다
(Christ
in His immeasureableness;
그분의 측량할 수 없음 안에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로서
우리는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가져야 하며,
우리의 생각과 기도는
이것을 위해야 합니다.
책임 형제들은
무엇을
자신의 목표로
삼을 것인지에 대해
분명해야 합니다.
책임 형제들의 목표는
인수의 증가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증가입니까
(is it an increase in number
or an increase in Christ;
그것이 숫자 안에서의 한 증가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증가입니까)?
책임 형제들은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증가하시는 것에
완전히 사로잡힌
바울과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 외에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to the extent
that we do not know
what to pray
other than this;
이것 외에 기도할 것을
우리가 모르는 정도까지)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사람의
태도와 영과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이
에베소서 3장 16절부터 19절까지에 있는
기도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바로 뒤에 나오는
20절과 21절에서
그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서 운행하는
능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더욱 넘치도록
해 주실 수 있으신
하나님께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히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
교회 안에서
…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히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라는 말의
완전한 의미는
새 예루살렘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is seen
in the New Jerusalem;
그 새 예루살렘 안에서 보여집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의
완전한 나타남이며,
오늘날
교회는
새 예루살렘의
한 축소판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가져야 하는
(with which
we serve the Lord;
그것으로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영과 태도와
기도와 믿음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것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울 것이며,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