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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한 가지를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속부분들과 하나 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한 기쁨을 위하여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어 우리가 뜻을 세우고 행하게 하시도록 허락해 드림으로써, 혼 안에서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누림

엄밀히 말해서,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관한 책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관한 책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은 주로 우리의 영 안에 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은 우리의 혼(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에 있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것에 관한 책이며, 그분을 체험하고 누린 결과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책이다.

빌립보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사역을 통해 복음의 확산을 위하여 교통하였다. 그들이 복음의 확산에 참여한 것은 사도에게 재정적인 공급을 한 것을 포함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누리는 생활은 복음을 확산시키는 생활이고, 복음을 전하는 생활이며, 개인주의적인 생활이 아닌 단체적인 생활이다. 복음이 확산되는 가운데서, 우리가 더 많이 교통할수록 그리스도를 더 많이 체험하고 누리게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릴 때, 우리의 자아와 야심과 선호와 선택은 처리된다.

우리가 말할 때든지 잠잠할 때든지, 우리의 생명과 생활과 존재와 전 인격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어야 한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명령한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복음의 믿음과 더불어 한 혼으로 함께 분투하는 것’이다 ― 빌 1:27.

복음의 일을 위해 한 혼이 되고 같은 혼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한 영 안에 있는 것보다 더 어렵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과 같은 혼이 된 형제였다.

한 혼이 되려면, 우리의 영이 거듭난 후에 더 나아가 우리의 혼이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애정과 생각과 결정에서 하나가 아니라면, 우리는 한 혼을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혼 안에서 하나가 아닌 한, 우리는 복음의 확산을 위한 교통 안에 있지 않은 것이며, 우리의 생활은 복음에 합당한 것이 아니다.

교회 안의 모든 지체들이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질 때, 이러한 하나는 확신을 주고 굴복시키고 매혹적일 것이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릴 것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없을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의 혼, 곧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있다. 음식을 억지로 먹지만 음식을 누리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많은 경우 우리도 그리스도를 체험하지만 그리스도를 누리지 못한다.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누림을 갖고 있지 않을까 봐 다소 염려가 된다.”(그리스도를 체험함, 497쪽)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그들의 혼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많이 누리지 못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혼 안에서 하나가 아니며 혼 안에서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혼 안에서 하나가 되려면 한 가지 것을 생각해야 한다. 빌립보서에서 ‘한 가지 것’은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알고 체험하고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 ‘한 가지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붙잡고 소유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극도로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누려야 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이 굳어진 것(고후 3:14)과 눈먼 것(4:4)과 반역적인 것(10:4-5)과 부패된 것(11:2-3)에서 구출되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과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다른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서로 다르게 생각하게 되어 우리 가운데 불일치가 생기게 된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한 가지 것, 곧 유일한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과 전부로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다.

우리가 주님의 회복 안에서 초점을 맞추고 강조하며 공급해야 할 한 가지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내용은 그리스도이다. 사실상, 세 단계로 된 충만한 사역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 신성한 경륜이시다. 하나님의 갈망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인격만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빌립보 사람들 가운데는 생각이 서로 일치하지 않아 의견 차이가 있었으며, 사도는 이것 때문에 염려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이 같은 것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 가지 것을 생각하여 자신의 기쁨이 넘치게 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한 가지 것 외의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한 가지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 한 가지 것을 생각하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의 생각은 교회생활, 곧 몸의 생활을 위해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으로 가득해야 한다.

빌립보의 믿는 이들의 생각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서로 다른 수준의 사랑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를 지키기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향해 같은 사랑을 가져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성도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조절되고 처리되었다면, 우리는 성도들을 사랑하면서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혼 안에서 하나 되는 것, 곧 혼 안에서 연결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더욱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누리려면 우리는 합당한 혼, 곧 다른 성도들의 혼과 하나인 ‘함께하는 혼’을 가져야 한다.

혼 안에서 하나가 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감정들, 곧 그분의 내면적인 애정과 부드러운 긍휼과 동정을 상징하는 그분의 ‘속부분들’과 하나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서 그분의 속부분들에서 체험하신 것에는 그분의 사랑과 갈망과 즐거움과 느낌이 포함된다.

바울은 자신의 타고난 내적 존재 안에서 살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속부분들 안에서 살았다. 우리가 체험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분의 속부분들, 곧 그분의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 안에 있어야 한다.

빌레몬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속부분들 안에서 사는 몸의 생활에 대한 그림을 본다.

오네시모는 바울과 함께 로마의 감옥에 있었을 때 바울을 통해 구원받았다. 바울은 그를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낳은 아들’이라고 불렀다.

바울이 그의 서신과 함께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냈을 때, “내가 그(오네시모)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는 내 심장과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바울의 내적인 애정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오네시모와 함께 빌레몬에게 갔다. ‘심장’이라는 말은 직역하면 빌립보서 1장 8절에 나오는 ‘속부분들’과 같다. 이 말은 내적인 애정과 부드러운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상징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느낌을 자신의 느낌으로 취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살았다. 그리스도께서 몸에 대해 가지신 느낌이 몸에 대해 바울이 가진 느낌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몸의 생활을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몸과 동일시한다면, 몸으로부터 분리되거나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생활은 완전히 몸의 생활일 것이며, 주님은 오늘날 이 땅에서 그분의 몸의 표현을 얻으실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속부분들 안에서 더 많이 살수록,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더 커지고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우리의 느낌은 더 강해질 것이다.

혼 안에서 하나가 되려면 우리는 우리 속에서 활력을 주시는 하나님과 협력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기쁨을 위하여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어 ‘우리가 뜻을 세우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행하도록 하신다’ ― 빌 2:12-13.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뜻을 세우는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한 기쁨을 이루어 내시기 위해 우리 안으로 ‘뜻을 세움’을 일해 넣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다. 뜻을 세우는 것은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행하는 것은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굴복되고 부활한 우리의 의지로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내주하시는 삼일 하나님과 협력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기를 선택해야 한다. 이렇게 내주하시는 삼일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기쁨을 위해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어 우리가 뜻을 세우도록 하신다.

우리는 아가 4장 4절에 있는 예표를 통해 우리의 변화된 의지를 볼 수 있다. 이 절은 주님을 사랑하여 추구하는 이에 관해서 “그대의 목은 /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 망대, / 천 개의 작은 방패와 / 용사들의 큰 방패가 모두 걸려 있는 망대 같다오.”라고 말한다.

성경은 자기 뜻대로 행하는 이들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목이 곧은 사람들처럼 완고하고 교만하다(사 3:16). 이처럼 목은 사람의 의지를 가리킨다. 주님은 사람의 의지가 복종하는 것을,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신다.

목이 망대와 같다는 것은, 추구하는 이가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사탄에게 어떤 영향도 받지 않게 될 정도로 그 의지가 하나님에 의해 강화된 것을 의미한다. 추구하는 이의 의지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다윗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데로 이끌렸고, 그리스도께 사로잡혔다.

망대 안에 두어진 무기는 원수가 믿는 이의 의지를 강탈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려고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승리를 상징한다. 작은 방패들과 큰 방패들은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용사들은 힘을 의미한다.

요약하면, 아가 4장 4절은 믿는 이가 기꺼이 그리스도의 의지에 복종하고, 믿는 이의 의지가 그리스도의 의지를 수행하기 위해 망대만큼 강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믿는 이는 깨어 경계하고 있으며, 원수가 자신의 복종하는 의지를 강탈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기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의 순종하는 생명으로 체험하는 것이 노아가 건조한 방주의 예표에 나타나 있다. 방주를 건조하는 것은 우리의 체험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되시는 실지적이신 현재의 그리스도를 건축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선한 기쁨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 곧 단체적인 그리스도를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노아는 방주를 공들여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갔는데, 이 방주가 곧 하나님의 구원이었다. 우리에게는 실지적이신 현재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이 되신다.

그리스도의 예표인 방주는 다만 개인적인 그리스도의 예표일 뿐만 아니라 단체적인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의 몸이며 새사람인 교회의 예표이기도 하다.

노아는 방주를 건조하고 방주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하나님께서 홍수로 악한 세대를 심판하실 때에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세대에서 분별되어 새 시대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체험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되시는 실지적이신 현재의 그리스도를 건축하는 것을 통해 교회를 건축하고 또 교회생활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하나님께서 대환난을 통하여 오늘날의 악한 세대를 심판하실 때에 구원받고 그 세대에서 분별되어 새 시대인 천년왕국 시대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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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창 6: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만들어라. …

마 24:37-39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홍수가 나기 전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 안으로 들어가던 날까지 …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을 휩쓸어 갈 때까지 심판이 오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일했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했다. 그가 이루어 내고 그 안으로 들어간 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 곧 방주였다(창 7:7). 많은 그리스도인이 역사 속의, 멀리 떨어진 그리스도밖에 모른다. 그러나 노아에게서 보는 그림에 따르면, 우리는 역사 속의 그리스도나 멀리 떨어진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지적인 그리스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방주이시며,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 우리는 이 방주를 건축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건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아를 보라. 그가 방주를 건조하고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노아들인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건축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할 필요가 있다. 노아 또한 그가 방주를 건조하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구원을 받았다.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그가 방주를 건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더 전진하여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했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렇게 짧거나 간단하거나 단순하지 않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긴 과정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 안에 있다. 우리는 이 통로 안에 들어섰다. 지금 우리는 이 통로를 통과하고 있으며, 이러한 통과함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노아가 방주를 건조하면 할수록 더욱더 하나님의 구원을 통과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이루어 낸 것 안으로 들어갔다(창 7:7). 우리가 건축하고 있는 바로 그 그리스도가 장차 우리의 구원이 되실 것이다. 어느 날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우리는 우리가 건축한 바로 그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가 매일의 체험에서 주님과 함께 동역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리스도께 속한 어떤 것을 건축할 것이고, 결국 우리가 건축한 것 안으로 들어가 우리의 누림이신 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요한복음 15장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에 관해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리스도를 건축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거할 그리스도가 없게 된다. 이것이 교리적으로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체험적으로는 옳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도 그분을 갖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면 어느 정도 건축이 필요하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건축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건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그분을 사랑해야 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분과 대화해야 하며, 그분에 의해 살아야 한다.

우리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교통하며 주님에 의해 살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지낸다면, 주일에 우리는 분명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깊은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과 교통하지 않으며 주님 안에 살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가운데 시간을 보낸다면, 오늘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기를 원한다 해도 그분의 임재가 없음을 느낄 것이다. 우리의 체험에서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다. 교리적으로는 우리가 그분을 갖지만 체험적으로는 갖지 못한다.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기를 갈망할지라도 그분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한 주 동안 그리스도를 건축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방주를 건조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홍수가 났을 때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갈 방주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매시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교통하며 그분에 의해 살고 그분과 동행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체험에서 그분을 건축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에서 그 안으로 들어갈 우리의 구원이신 그리스도를 건축한다.

5일

빌 2:12-13 …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기쁨을 위하여 여러분 안에서 운행하시어, 여러분이 뜻을 세우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행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 4:4 그대의 목은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 망대, 천 개의 작은 방패와 용사들의 큰 방패가 모두 걸려 있는 망대 같다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낼 수 있다. 하나님은 비밀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추상적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는 우리의 매일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놓치지 않도록,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놓친다면, 이 실지적인 구원을 놓치게 된다.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해 보일 수 있다. 만일 빌립보 성도들이 이렇게 말했다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을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운행하고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분께서 여러분 안에서 운행하시어, 여러분이 뜻을 세우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행하도록 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 안에 그런 뜻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뜻을 여러분 안으로 일해 넣고 계십니다. 그분은 또한 그분의 크고 선한 기쁨을 이루어 내시기 위해 여러분 안에서 운행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안에서 운행하시고 여러분은 이루어 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스스로 그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차를 운전하는 것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가 차를 운전할 때, 그 차가 우리를 움직이는가, 아니면 우리가 그 차를 움직이는가? 우리에게는 그 차를 움직일 힘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차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면서 우리가 뜻을 세우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행하도록 하신다. 그분께서 안에서 운행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루어 낼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달리고 있는 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다. 만일 그 차가 달리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운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두려운 어떤 것이 아니라 누림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계신 비밀하고도 놀라우신 하나님을 놓치는 것이다. 우리는 내주하시는 하나님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주의한다면, 그분께서 차를 운전하실 것이다. 즉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셔서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낼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성경은 자기 뜻대로 행하는 이들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목이 곧은 사람들처럼 완고하고 교만하다(사 3:16). 이처럼 목은 사람의 의지를 가리킨다. 주님은 사람의 의지가 복종하는 것을,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신다. 아가 4장 4절에 복종하는 의지의 두 방면이 있다. 첫 번째는 “그대의 목은 / … 망대 같다오.”이다. 먼저 망대는 허리가 꼬부라진 사람의 상태와 정반대되는 상태를 묘사한다. 성경에서 허리가 꼬부라진 사람은 사탄에게 심하게 억눌려 항상 땅만 바라본다(눅 13:11, 16). 목이 망대 같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해방받았고 사탄의 속박에서 벗어났으며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망대는 또한 강함을 의미한다. 그 여인은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사탄에게 어떤 영향도 받지 않게 될 정도로 그 의지가 하나님에 의해 강화되었다. 두 번째는 ‘그대의 목은 다윗 망대 같다.’(아 4:4)이다. 이 망대는 보통 망대가 아닌 다윗의 망대 같다. 그 여인의 강화되고 구출된 의지에 더하여, 우리는 또한 그녀의 의지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다윗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데로 이끌렸음을 본다. 그녀의 견고함은 그녀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데 달려 있고, 그녀가 구출받는 것도 그녀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데 달려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사로잡히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이 망대의 용도는 무엇인가? 이 망대는 ‘무기고로 건축된’ 것이다. 이것은 영적 전쟁을 하는 목적이 의지를 차지하기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망대 안에 두어진 무기는 원수가 믿는 이의 의지를 강탈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려고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승리를 상징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언급된 무기는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방어를 위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오직 작은 방패들과 큰 방패들만이 언급된다. ‘용사들’은 힘을 의미한다. 요약하면, 아가 4장 4절은 믿는 이가 기꺼이 그리스도의 의지에 복종하고, 믿는 이의 의지가 그리스도의 의지를 수행하기 위해 망대만큼 강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믿는 이는 깨어 경계하고 있으며, 원수가 자신의 복종하는 의지를 강탈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4일

빌 1:8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속부분들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에 대해, 하나님께서 나의 증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골 3:12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랑받는 거룩한 사람들이니,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인자와 겸허와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으로 입으십시오.

몬 12 내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는 내 심장과 같은 사람입니다.

성도들을 간절히 그리워할 때에 사도는 심지어 그리스도의 내장, 곧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속부분들에서 그분과 하나였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누렸다는 말은 그가 그리스도의 속부분들과 하나였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므로 몸에 대한 느낌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반드시 머리의 느낌을 우리 자신의 느낌으로 취해야 한다. 빌립보서 1장 8절에 따르면, 교회를 돌볼 때 바울은 그리스도의 속부분들을 자기의 속부분들로 취했다. 이것은 또한 그가 그리스도의 느낌을 자신의 느낌으로 취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돌보았음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바울과 같이 머리의 느낌을 자신의 느낌으로 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몸의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몸과 자신을 동일시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몸으로부터 분리되거나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생활은 완전히 몸의 생활이 될 것이며, 주님은 그분의 몸의 표현을 얻으실 것이다.

주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주님과 연결되었고 그분과 하나이다. 따라서 그분의 속부분들이 바로 우리의 속부분들이다. 구원받은 후에 주 예수님께서 우리 존재 안에 들어오셨고, 우리는 그분의 속부분들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속부분들이 아니라 그분의 속부분들을 따라 행하고 처신한다.

바울은 주님 안에서, 심지어 주 예수님의 속부분들로 성도들을 그리워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 안에서 홀로 그리워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주님 안에서, 주님과의 연결 안에서 그리워했다.

투옥 기간 중에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그 영을 통하여 오네시모를 낳았다. 헬라어로 오네시모라는 이름은 ‘유익한’, ‘쓸모 있는’, ‘도움이 되는’ 등을 의미하며, 노예들에게 흔한 이름이었다. 그는 빌레몬이 사들인 노예였는데, 로마법에 따르면 그에게는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없었다. 그는 주인에게서 도망갔기 때문에,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 그는 사도와 함께 로마에서 갇혀 지내다가 사도를 통하여 구원받았다. 이제 사도는 오네시모가 이 서신을 가지고 주인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빌레몬서 11절에서 ‘무익한’이란 말은 또한 ‘사용할 수 없는’, 즉 ‘쓸모가 없는’을 의미한다. 이것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서 도망간 것을 말한다. 오네시모는 회심했고 기꺼이 빌레몬에게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에 쓸모 있게 되었다.

빌레몬서 12절에서 ‘심장’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문자적으로 ‘내장’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내적인 애정과 부드러운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상징한다. 바울의 내적인 애정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오네시모와 함께 빌레몬에게 갔다.

바울은 이 자녀를 낳은 후에 그를 소홀히 하거나 고아와 같이 다른 이들에게 맡겨 두지 않았다. 심지어 바울은 그를 ‘내 심장’이라고까지 말했다. 어머니들은 자주 자신의 자녀에 대해 이런 식으로 느낀다. 여러분에게 자신이 주님께 인도한 사람에 대하여 이러한 느낌이 있는가?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의 자녀로만이 아니라 또한 그의 심장으로 여겼다. 바울이 그의 자녀를 빌레몬에게 보낸 것은 또한 자신의 심장을 보낸 것을 의미했다.

어떤 부모들은 자신이 직접 낳은 자녀들을 그들의 심장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 속으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이 아이를 나에게 주셨고, 그를 보살피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다른 이들을 주님께 인도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이와 유사한 태도를 갖는다. 바울과 대조적으로 그들에게는 자신을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을 향한 부모와 같은 깊은 관심이 부족하다.

3일

빌 2:2 여러분은 같은 것을 생각하고, 같은 사랑을 가지며, 혼 안에서 연결되고, 한 가지 것을 생각하여, 나의 기쁨이 넘치도록 해 주십시오.

빌 3:8 그럴 뿐만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또한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빌립보 성도들은 한 가지 것을 생각하고 혼 안에서 연결되는 것에 관한 바울의 말에 복종해야 했다(빌 2:12, 2). 그들이 생각해야 할 한 가지는 몸의 생활을 위해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또한 그것이 몸의 생활을 위해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 한 가지 것을 생각하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이 한 가지 것은 빌립보서 3장에서 명백히 드러나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말한다(8절).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의 누림으로 체험하는 것은 탁월한 것이다. 이 한 가지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배설물이자 개의 먹이이며, 우리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개의 먹이를 먹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우리는 상에서 음식을 먹어야 한다.

빌립보 성도들은 개들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변화되었지만, 어떤 시점에서 그들은 다시 개의 먹이로 돌아섰다. 오늘날 우리도 쉽게 그렇게 될 수 있다. 개의 먹이와 찌꺼기가 버려지는 쓰레기통은 형제들의 경우에는 주로 생각 안에 있고, 자매들의 경우에는 감정 안에 있다. 그러므로 한 가지 것을 생각하고 혼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은 쓰레기통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개 먹이를 제거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 안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 우리가 영 안으로 들어갈 때,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계신 식탁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음식이시고, 식탁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한 가지 것을 생각하고 혼 안에서 하나 될 것을 격려하고 있었다. 그 한 가지는 다만 객관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회생활을 위해 우리의 누림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이 한 가지가 항상 우리의 생각을 점유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우리의 풍성한 누림으로 체험하여 합당한 교회생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몸의 생활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린 결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릴 때, 교회생활은 자연스럽게 산출된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서 나온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 한 가지 것, 곧 교회생활을 위해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만을 생각하도록 돕는다. 우리 모두는 몸의 생활을 위해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한 가지 것 외의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한 가지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형제가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했는가? 여러분은 마음 상하게 한 그 일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경륜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엄중한 문제이다. 불평하는 것 또한 반역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불평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불순종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기질이 있으며, 불평하는 것과 따지는 것과 투덜대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따지는 것과 불평하는 것에 관해 빛 비춤을 받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의 거역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경륜 안에서 반역자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반대로 저는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경륜에 순종하여 한 가지 일만을 생각하기 원합니다. 비록 어떤 이들이 제 마음을 상하게 하였지만, 저는 그 일에 대해 생각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누림에 대해서만 생각하기 원합니다.”

빌립보서 2장 2절에서 같은 사랑을 가지라는 바울의 말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이 말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서로 다른 수준의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보여 준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도 동일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우리의 사랑이 너무 차갑다.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 뜨겁다. 우리의 사랑은 누구를 향해서도 알맞아야 한다.

우리의 사랑이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우리가 다른 이들을 사랑할 때 그리스도를 누리고 있는지 그러지 못하는지에 달려 있다.

2일

빌 1:27 오직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 여러분이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복음의 믿음과 더불어 한 혼으로 함께 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듣도록 해 주십시오.

빌 2:20 나와 같은 혼이 되어 여러분의 사정을 진심으로 돌볼 사람이 디모데 외에는 나에게 아무도 없습니다.

롬 12:2 … 오직 여러분은 생각이 새로워짐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한 영 안에 굳게 서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복음의 믿음과 더불어 한 혼으로 함께 분투해야 한다. 복음의 일을 위해 한 혼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한 영 안에 있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한 혼이 되려면, 우리 영 안에서 거듭난 뒤에 더 전진하여 우리 혼 안에서, 특별히 우리 혼의 주요 부분이며 주도적인 부분인 생각 안에서 변화되어야 한다.

혼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은 우리의 애정과 사랑과 생각과 결정에서 하나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는 매우 실지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자 한다면, 혼 안에서 하나가 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우리의 애정이나 생각이나 결정에서 하나가 아니라면, 혼 안에서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혼 안에서 하나가 아닌 한, 우리는 복음을 위한 교통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빌립보서 1장 27절부터 2장 8절까지에 흐르고 있는 하나의 사상이 있다. 수년 전에 내가 1장 27절을 읽었을 때, 나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앞에서 온전한 품행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 바울이 의미한 바가 아니다. 바울은 여기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나,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나, 혹은 친절하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 그는 우리에게 한 영 안에 굳게 서고 한 혼을 가지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활은 복음에 합당하지 않다. 한 지방이나 한 대학에 우리가 얼마나 오래 있는지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은 우리가 한 영 안에서 한 혼으로 복음을 전할 때 틀림없이 깊은 인상을 받을 것이다. 이것보다 더 확신을 주는 것은 없다. 교회 안의 모든 지체들이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질 때, 이러한 하나는 확신을 주고 굴복시키며 매혹할 것이다. 우리가 굴복시키고 확신시키는 이러한 하나를 가질 때,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릴 것이다. 우리는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우리는 영과 혼 안에서의 우리의 하나를 표현한다.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갖게 된다. 우리가 이와 같이 전하면 전할수록 그리스도를 더 누리게 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혼들이 구원받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는지를 관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림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의 잔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로 잔치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면,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에게 영과 혼 안에서의 하나가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갖는다면, 우리의 복음 전파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의 숫자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 그리스도로 잔치하고 그분을 누릴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단지 체험뿐만 아니라 누림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에 의해 복음을 위한 교통 안에 남아 있고자 한다면, 우리는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져야 한다.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과 관련된 특별한 중점은 한 혼을 갖는 것이다. 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더욱더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은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음식을 먹을지 모르지만, 먹고 있는 음식을 누리지 못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 영 안에만 있다면,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는 있지만 그분을 누리지는 못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기 위해서는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져야 한다.

신언노트, 2023 07 16

한 가지를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속부분들과 하나 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한 기쁨을 위하여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어
우리가
뜻을 세우고
행하게 하시도록
허락해 드림으로써,
혼 안에서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누림

빌립보의 성도들은
복음을 위하여 교통했고,
사도 바울의 사역을 통해
복음의 확산에 참여했다.
빌립보 성도들은
사도에게
재정적인 공급을 함으로써
복음의 일에 참여했고,
그 결과
복음의 확산을 가져왔다.
이러한 교통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품는 것과
개인주의에서
벗어났다.
이것은
그들이
사도 바울과 하나였을 뿐 아니라,
서로 하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중점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생활은
복음을 확산시키는 생활이고,
복음을 전하는 생활이며,
개인주의적인 생활이 아닌
단체적인 생활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복음의 확산을 위한
교통이 있는 것이다.
복음이 확산되는 가운데서,
우리가
더 많이 교통할수록
그리스도를 더 많이
체험하고 누리게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릴 때,
우리의
자아와 야심과
선호와 선택은
처리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은 주로
우리 영 안에서의 문제이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은
우리 혼 안에서의 문제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과
누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때로 우리는
누리는 방식이 아닌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한다.
우리는
“나는
그리스도를
내 생명으로 취해야 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체험해야만 한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아니다.
음식을 억지로 먹지만
음식을 누리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많은 경우 우리도
그리스도를 체험하지만
그리스도를 누리지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리기보다는
고통을 겪는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없이도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가질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의 혼에 있다.

엄밀히 말해서,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관한 책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관한 책이다.
3장 8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다.
이것은
체험의 문제만이 아니라
누림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3:8) 또한
누림을 가리킨다.
탁월함은 주로
체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림을 위한 것이다.
3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전에
나, 다소의 사울은
나의 신분을 즐겼습니다.
나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8절에 언급된
개의 먹이인 배설물은
누림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도
개의 먹이로부터
누림을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에는
유쾌한 맛이 있다.

빌립보서가 쓰인 이유는,
빌립보 성도들이 비록
주님을 위하고
그분의 종을 돌보며
또 영 안에서 매우 합당했지만,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그들의 혼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생각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혼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조언하고
심지어 간청하기 위해
이 서신을 썼던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누림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봐
다소 염려가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분은
이러한 누림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여러분의 혼 안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자매들은
감정에 너무 빠져 있고,
형제들은
생각에 너무 빠져 있다.
그러나 완고한 의지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에게
문제가 있다.
주님의 회복 안에
오랫동안 있어 온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음식을 누릴 줄 모르면서 먹는
어린아이들과 같다.
젊은이들은
캠퍼스 복음 전파에
매우 활동적일 수 있다.
그들은
기도하고
찬양하며
할렐루야를 외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단지
의무감으로 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많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혼 안에서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다른 이들의 그것과
다르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하나 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혼 안에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서,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관한 책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관한 책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은 주로
우리의 영 안에 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은
우리의 혼(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에 있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것에 관한 책이며,
그분을
체험하고 누린
결과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책이다.

빌립보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사역을 통해
복음의 확산을 위하여
교통하였다.
그들이
복음의 확산에 참여한 것은
사도에게
재정적인 공급을 한 것을
포함했다.

우리가
말할 때든지
잠잠할 때든지,
우리의
생명과 생활과
존재와 전 인격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어야 한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명령한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복음의 믿음과 더불어
한 혼으로
함께 분투하는 것’이다
― 빌 1:27.

복음의 일을 위해
한 혼이 되고
같은 혼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한 영 안에 있는 것보다
더 어렵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과
같은 혼이 된 형제였다.

한 혼이 되려면,
우리의 영이 거듭난 후에
더 나아가 우리의 혼이
변형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애정과 생각과 결정에서
하나가 아니라면,
우리는
한 혼을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혼 안에서
하나가 아닌 한,
우리는
복음의 확산을 위한
교통 안에 있지 않은 것이며,
우리의 생활은
복음에 합당한 것이 아니다.

교회 안의 모든 지체들이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질 때,
이러한 하나는
확신을 주고
굴복시키고
매혹적일 것이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릴 것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없을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의 혼,
곧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있다.
음식을 억지로 먹지만
음식을 누리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많은 경우 우리도
그리스도를 체험하지만
그리스도를 누리지 못한다.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누림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봐
다소 염려가 된다.”
(그리스도를 체험함, 497쪽)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그들의 혼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많이 누리지 못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혼 안에서
하나가 아니며
혼 안에서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한 영 안에
굳게 서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복음의 믿음과 더불어
한 혼으로
함께 분투해야 한다.
복음의 일을 위해
한 혼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한 영 안에 있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한 혼이 되려면,
우리 영 안에서 거듭난 뒤에
더 전진하여
우리 혼 안에서,
특별히 우리 혼의
주요 부분이며
주도적인 부분인
생각 안에서
변화되어야 한다.

혼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은
우리의
애정과 사랑과
생각과 결정에서
하나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는
매우 실지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자 한다면,
혼 안에서 하나가 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우리의
애정이나 생각이나 결정에서
하나가 아니라면,
혼 안에서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혼 안에서
하나가 아닌 한,
우리는
복음을 위한
교통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빌립보서
1장 27절부터
2장 8절까지에
흐르고 있는
하나의 사상이 있다.
수년 전에 내가
1장 27절을 읽었을 때,
나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앞에서
온전한 품행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 바울이 의미한 바가 아니다.
바울은 여기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나,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나,
혹은 친절하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 그는
우리에게
한 영 안에 굳게 서고
한 혼을 가지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활은
복음에 합당하지 않다.
한 지방이나 한 대학에
우리가 얼마나 오래 있는지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은
우리가
한 영 안에서
한 혼으로
복음을 전할 때
틀림없이 깊은 인상을 받을 것이다.
이것보다 더
확신을 주는 것은 없다.
교회 안의 모든 지체들이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질 때,
이러한 하나는
확신을 주고
굴복시키며
매혹할 것이다.
우리가
굴복시키고 확신시키는
이러한 하나를 가질 때,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릴 것이다.
우리는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우리는
영과 혼 안에서의
우리의 하나를 표현한다.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이와 같이 전하면 전할수록
그리스도를 더 누리게 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혼들이 구원받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는지를
관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림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의 잔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로 잔치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면,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에게
영과 혼 안에서의 하나가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진다면,
우리의 복음 전파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의 숫자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
그리스도로 잔치하고
그분을 누릴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단지
체험뿐만 아니라
누림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에 의해
복음을 위한 교통 안에
남아 있고자 한다면,
우리는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져야 한다.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과 관련된
특별한 중점은
한 혼을 가지는 것이다.
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더욱더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은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음식을 먹을지 모르지만,
먹고 있는 음식을
누리지 못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 영 안에만 있다면,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는 있지만
그분을 누리지는 못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기 위해서는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져야 한다.

빌립보 성도들은
한 가지 것을 생각하고
혼 안에서 연결되는 것에 관한
바울의 말에
복종해야 했다.
그들이 생각해야 할
한 가지는
몸의 생활을 위해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또한
그것이
몸의 생활을 위해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 한 가지 것을 생각하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이 한 가지 것은
빌립보서 3장에서
명백히 드러나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말한다.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의 누림으로 체험하는 것은
탁월한 것이다.
이 한 가지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배설물이자
개의 먹이이며,
우리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개의 먹이를 먹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우리는
상에서
음식을 먹어야 한다.

빌립보 성도들은
개들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변화되었지만,
어떤 시점에서
그들은 다시
개의 먹이로 돌아섰다.
오늘날 우리도
쉽게 그렇게 될 수 있다.
개의 먹이와 찌꺼기가 버려지는
쓰레기통은
형제들의 경우에는
주로 생각 안에 있고,
자매들의 경우에는
감정 안에 있다.
그러므로 한 가지 것을 생각하고
혼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은
쓰레기통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개 먹이를
제거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 안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
우리가
영 안으로 들어갈 때,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계신
식탁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음식이시고,
식탁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한 가지 것을 생각하고
혼 안에서 하나 될 것을
격려하고 있었다.
그 한 가지는 다만
객관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회생활을 위해
우리의 누림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이 한 가지가 항상
우리의 생각을
점유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우리의 풍성한 누림으로 체험하여
합당한 교회생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몸의 생활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린 결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릴 때,
교회생활은
자연스럽게 산출된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서 나온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
한 가지 것,
곧 교회생활을 위해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만을
생각하도록 돕는다.
우리 모두는
몸의 생활을 위해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한 가지 것 외의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한 가지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형제가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했는가?
여러분은
마음 상하게 한
그 일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경륜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엄중한 문제이다.
불평하는 것 또한
반역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불평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불순종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기질이 있으며,
불평하는 것과
따지는 것과
투덜대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따지는 것과 불평하는 것에 관해
빛 비춤을 받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의 거역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경륜 안에서
반역자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반대로 저는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경륜에 순종하여
한 가지 일만을
생각하기 원합니다.
비록 어떤 이들이
제 마음을 상하게 하였지만,
저는
그 일에 대해 생각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누림에 대해서만
생각하기 원합니다.”

빌립보서 2장 2절에서
같은 사랑을 가지라는
바울의 말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이 말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서로 다른 수준의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보여 준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도 동일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우리의 사랑이
너무 차갑다.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 뜨겁다.
우리의 사랑은
누구를 향해서도
알맞아야 한다.

우리의 사랑이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우리가
다른 이들을 사랑할 때
그리스도를 누리고 있는지
그러지 못하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가
혼 안에서
하나가 되려면
한 가지 것을
생각해야 한다.
빌립보서에서 ‘한 가지 것’은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알고 체험하고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 ‘한 가지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붙잡고 소유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극도로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누려야 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이
굳어진 것과 눈먼 것과
반역적인 것과 부패된 것에서
구출되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과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다른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서로 다르게 생각하게 되어
우리 가운데
불일치가 생기게 된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한 가지 것,
곧 유일한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과 전부로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다.

우리가
주님의 회복 안에서
초점을 맞추고
강조하며
공급해야 할
한 가지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내용은 그리스도이다.
사실상,
세 단계로 된
충만한 사역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
신성한 경륜이시다.
하나님의 갈망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인격만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빌립보 사람들 가운데는
생각이 서로 일치하지 않아
의견 차이가 있었으며,
사도는
이것 때문에 염려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이
같은 것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 가지 것을 생각하여
자신의 기쁨이 넘치게 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한 가지 것 외의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한 가지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
한 가지 것을 생각하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의 생각은
교회생활,
곧 몸의 생활을 위해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으로
가득해야 한다.

빌립보의 믿는 이들의 생각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서로 다른 수준의
사랑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를 지키기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향해
같은 사랑을 가져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성도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조절되고 처리되었다면,
우리는
성도들을 사랑하면서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혼 안에서
하나 되는 것,
곧 혼 안에서
연결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더욱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누리려면
우리는
합당한 혼,
곧 다른 성도들의 혼과 하나인
‘함께하는 혼’을
가져야 한다.

성도들을 간절히 그리워할 때에
사도는 심지어
그리스도의 내장,
곧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속부분들에서
그분과 하나였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누렸다는 말은
그가
그리스도의 속부분들과
하나였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므로
몸에 대한 느낌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반드시
머리의 느낌을
우리 자신의 느낌으로
취해야 한다.
빌립보서 1장 8절에 따르면,
교회를 돌볼 때
바울은
그리스도의 속부분들을
자기의 속부분들로 취했다.
이것은 또한
그가
그리스도의 느낌을
자신의 느낌으로 취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돌보았음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바울과 같이
머리의 느낌을
자신의 느낌으로
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몸의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몸과
자신을
동일시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몸으로부터
분리되거나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생활은 완전히
몸의 생활이 될 것이며,
주님은
그분의 몸의
표현을 얻으실 것이다.

주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주님과 연결되었고
그분과 하나이다.
따라서 그분의 속부분들이 바로
우리의 속부분들이다.
구원받은 후에
주 예수님께서
우리 존재 안에 들어오셨고,
우리는
그분의 속부분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속부분들이 아니라
그분의 속부분들을 따라
행하고 처신한다.

바울은
주님 안에서,
심지어 주 예수님의 속부분들로
성도들을 그리워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 안에서
홀로 그리워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주님 안에서,
주님과의 연결 안에서
그리워했다.

투옥 기간 중에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그 영을 통하여
오네시모를 낳았다.
헬라어로
오네시모라는 이름은
‘유익한’,
‘쓸모 있는’,
‘도움이 되는’ 등을 의미하며,
노예들에게
흔한 이름이었다.
그는
빌레몬이 사들인
노예였는데,
로마법에 따르면
그에게는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없었다.
그는
주인에게서 도망갔기 때문에,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
그는
사도와 함께
로마에서 갇혀 지내다가
사도를 통하여
구원받았다.
이제 사도는
오네시모가
이 서신을 가지고
주인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빌레몬서 11절에서
‘무익한’이란 말은 또한
‘사용할 수 없는’,
즉 ‘쓸모가 없는’을 의미한다.
이것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서 도망간 것을 말한다.
오네시모는
회심했고
기꺼이 빌레몬에게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에
쓸모 있게 되었다.

빌레몬서 12절에서
‘심장’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문자적으로
‘내장’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내적인 애정과
부드러운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상징한다.
바울의
내적인 애정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오네시모와 함께
빌레몬에게 갔다.

바울은
이 자녀를 낳은 후에
그를 소홀히 하거나
고아와 같이
다른 이들에게 맡겨 두지 않았다.
심지어 바울은
그를
‘내 심장’이라고까지 말했다.
어머니들은 자주
자신의 자녀에 대해
이런 식으로 느낀다.
여러분에게
자신이 주님께 인도한
사람에 대하여
이러한 느낌이 있는가?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의 자녀로만이 아니라
또한 그의 심장으로 여겼다.
바울이
그의 자녀를
빌레몬에게 보낸 것은 또한
자신의 심장을 보낸 것을
의미했다.

어떤 부모들은
자신이 직접 낳은 자녀들을
그들의 심장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
속으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이 아이를 나에게 주셨고,
그를 보살피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다른 이들을 주님께 인도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이와 유사한 태도를 가진다.
바울과 대조적으로
그들에게는
자신을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을 향한
부모와 같은
깊은 관심이 부족하다.

혼 안에서
하나가 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감정들,
곧 그분의
내면적인 애정과
부드러운 긍휼과 동정을 상징하는
그분의 ‘속부분들’과
하나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서
그분의 속부분들에서 체험하신 것에는
그분의
사랑과 갈망과
즐거움과 느낌이
포함된다.

바울은
자신의 타고난 내적 존재 안에서
살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속부분들 안에서 살았다.
우리가
체험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분의 속부분들,
곧 그분의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 안에 있어야 한다.

빌레몬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속부분들 안에서 사는
몸의 생활에 대한
그림을 본다.

오네시모는
바울과 함께
로마의 감옥에 있었을 때
바울을 통해 구원받았다.
바울은
그를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낳은
아들’이라고 불렀다.

바울이
그의 서신과 함께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냈을 때,
“내가
그(오네시모)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는
내 심장과 같은 사람입니다.”
라고 말했다.

바울의
내적인 애정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오네시모와 함께
빌레몬에게 갔다.
‘심장’이라는 말은
직역하면
빌립보서 1장 8절에 나오는
‘속부분들’과 같다.
이 말은
내적인 애정과
부드러운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상징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느낌을
자신의 느낌으로 취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살았다.
그리스도께서
몸에 대해 가지신 느낌이
몸에 대해
바울이 가진 느낌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몸의 생활을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몸과 동일시한다면,
몸으로부터
분리되거나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생활은 완전히
몸의 생활일 것이며,
주님은 오늘날 이 땅에서
그분의 몸의
표현을 얻으실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속부분들 안에서
더 많이 살수록,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더 커지고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우리의 느낌은
더 강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낼 수 있다.
하나님은
비밀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추상적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는
우리의 매일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놓치지 않도록,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놓친다면,
이 실지적인 구원을
놓치게 된다.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해 보일 수 있다.
만일 빌립보 성도들이
이렇게 말했다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을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운행하고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분께서
여러분 안에서 운행하시어,
여러분이
뜻을 세우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행하도록 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 안에
그런 뜻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뜻을
여러분 안으로
일해 넣고 계십니다.
그분은 또한
그분의 크고 선한 기쁨을
이루어 내시기 위해
여러분 안에서
운행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안에서 운행하시고
여러분은
이루어 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스스로
그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차를 운전하는 것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가
차를 운전할 때,
그 차가
우리를 움직이는가,
아니면 우리가
그 차를 움직이는가?
우리에게는
그 차를 움직일
힘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차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면서
우리가
뜻을 세우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행하도록 하신다.
그분께서
안에서 운행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루어 낼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달리고 있는 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다.
만일 그 차가
달리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운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두려운 어떤 것이 아니라
누림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계신
비밀하고도 놀라우신
하나님을 놓치는 것이다.
우리는
내주하시는 하나님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주의한다면,
그분께서
차를 운전하실 것이다.
즉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셔서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낼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성경은
자기 뜻대로 행하는 이들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목이 곧은 사람들처럼
완고하고 교만하다.
이처럼 목은
사람의 의지를 가리킨다.
주님은
사람의 의지가 복종하는 것을,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신다.
아가 4장 4절에
복종하는 의지의
두 방면이 있다.
첫 번째는
“그대의 목은
/ … 망대 같다오.”이다.
먼저 망대는
허리가 꼬부라진 사람의 상태와
정반대되는 상태를 묘사한다.
성경에서
허리가 꼬부라진 사람은
사탄에게 심하게 억눌려
항상 땅만 바라본다.
목이 망대 같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해방받았고
사탄의 속박에서 벗어났으며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망대는 또한
강함을 의미한다.
그 여인은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사탄에게
어떤 영향도 받지 않게 될 정도로
그 의지가
하나님에 의해 강화되었다.
두 번째는
‘그대의 목은
다윗 망대 같다.’
(아 4:4)이다.
이 망대는
보통 망대가 아닌
다윗의 망대 같다.
그 여인의
강화되고 구출된 의지에 더하여,
우리는 또한
그녀의 의지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다윗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데로
이끌렸음을 본다.
그녀의 견고함은
그녀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데 달려 있고,
그녀가 구출받는 것도
그녀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데 달려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사로잡히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이 망대의
용도는 무엇인가?
이 망대는
‘무기고로 건축된’ 것이다.
이것은
영적 전쟁을 하는 목적이
의지를 차지하기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망대 안에 두어진 무기는
원수가
믿는 이의 의지를
강탈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려고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승리를 상징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언급된
무기는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방어를 위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오직 작은 방패들과
큰 방패들만이
언급된다.
‘용사들’은
힘을 의미한다.
요약하면,
아가 4장 4절은
믿는 이가 기꺼이
그리스도의 의지에 복종하고,
믿는 이의 의지가
그리스도의 의지를 수행하기 위해
망대만큼 강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믿는 이는
깨어 경계하고 있으며,
원수가
자신의 복종하는 의지를
강탈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혼 안에서
하나가 되려면
우리는
우리 속에서
활력을 주시는
하나님과 협력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기쁨을 위하여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어
‘우리가
뜻을 세우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행하도록 하신다’
― 빌 2:12-13.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뜻을 세우는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한 기쁨을 이루어 내시기 위해
우리 안으로
‘뜻을 세움’을
일해 넣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다.
뜻을 세우는 것은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행하는 것은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굴복되고 부활한
우리의 의지로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내주하시는 삼일 하나님과 협력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기를
선택해야 한다.
이렇게 내주하시는 삼일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기쁨을 위해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어
우리가 뜻을 세우도록 하신다.

우리는
아가 4장 4절에 있는
예표를 통해
우리의 변화된 의지를
볼 수 있다.
이 절은
주님을 사랑하여 추구하는 이에 관해서
“그대의 목은
/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 망대,
/ 천 개의 작은 방패와
/ 용사들의 큰 방패가 모두
걸려 있는
망대 같다오.”
라고 말한다.

목이 망대와 같다는 것은,
추구하는 이가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사탄에게
어떤 영향도 받지 않게 될 정도로
그 의지가
하나님에 의해
강화된 것을 의미한다.
추구하는 이의 의지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다윗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데로
이끌렸고,
그리스도께 사로잡혔다.

망대 안에 두어진
무기는
원수가
믿는 이의 의지를
강탈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려고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승리를 상징한다.
작은 방패들과 큰 방패들은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용사들은
힘을 의미한다.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일했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했다.
그가 이루어 내고
그 안으로 들어간 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
곧 방주였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역사 속의,
멀리 떨어진 그리스도밖에 모른다.
그러나 노아에게서 보는
그림에 따르면,
우리는
역사 속의 그리스도나
멀리 떨어진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지적인 그리스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방주이시며,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
우리는
이 방주를 건축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건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아를 보라.
그가
방주를 건조하고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노아들인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건축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할 필요가 있다.
노아 또한
그가
방주를 건조하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구원을 받았다.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그가
방주를 건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더 전진하여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했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렇게 짧거나
간단하거나
단순하지 않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긴 과정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 안에 있다.
우리는
이 통로 안에 들어섰다.
지금 우리는
이 통로를 통과하고 있으며,
이러한 통과함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노아가
방주를 건조하면 할수록 더욱더
하나님의 구원을 통과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이루어 낸 것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건축하고 있는
바로 그 그리스도가
장차 우리의 구원이 되실 것이다.
어느 날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우리는
우리가 건축한
바로 그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가
매일의 체험에서
주님과 함께 동역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리스도께 속한 어떤 것을
건축할 것이고,
결국 우리가 건축한 것 안으로 들어가
우리의 누림이신
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요한복음 15장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에 관해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리스도를 건축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거할 그리스도가 없게 된다.
이것이
교리적으로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체험적으로는 옳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도
그분을 가지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면
어느 정도 건축이 필요하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건축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건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그분을 사랑해야 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분과 대화해야 하며,
그분에 의해
살아야 한다.

우리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교통하며
주님에 의해 살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지낸다면,
주일에
우리는 분명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깊은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과 교통하지 않으며
주님 안에 살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가운데
시간을 보낸다면,
오늘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기를 원한다 해도
그분의 임재가 없음을
느낄 것이다.
우리의 체험에서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다.
교리적으로는
우리가
그분을 가지지만
체험적으로는
가지지 못한다.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기를 갈망할지라도
그분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한 주 동안
그리스도를 건축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방주를 건조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홍수가 났을 때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갈
방주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매시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교통하며
그분에 의해 살고
그분과 동행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체험에서
그분을 건축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에서
그 안으로 들어갈
우리의 구원이신
그리스도를 건축한다.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기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의 순종하는 생명으로
체험하는 것이
노아가 건조한
방주의 예표에 나타나 있다.
방주를 건조하는 것은
우리의 체험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되시는
실지적이신 현재의 그리스도를
건축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선한 기쁨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
곧 단체적인 그리스도를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노아는
방주를 공들여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갔는데,
이 방주가 곧
하나님의 구원이었다.
우리에게는
실지적이신 현재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이 되신다.

그리스도의 예표인 방주는 다만
개인적인 그리스도의 예표일 뿐만 아니라
단체적인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의 몸이며
새사람인
교회의 예표이기도 하다.

노아는
방주를 건조하고
방주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하나님께서
홍수로
악한 세대를 심판하실 때에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세대에서 분별되어
새 시대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체험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되시는
실지적이신 현재의 그리스도를
건축하는 것을 통해
교회를 건축하고
또 교회생활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하나님께서
대환난을 통하여
오늘날의 악한 세대를 심판하실 때에
구원받고
그 세대에서 분별되어
새 시대인 천년왕국 시대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1일

빌 1:4-5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간구할 때마다, 나는 항상 기쁨으로 간구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의 확산을 위하여 교통해 왔기 때문입니다.

빌 4:4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빌립보의 성도들은 복음을 위하여 교통했고, 사도 바울의 사역을 통해 복음의 확산에 참여했다. 빌립보 성도들은 사도에게 재정적인 공급을 함으로써 복음의 일에 참여했고, 그 결과 복음의 확산을 가져왔다. 이러한 교통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품는 것과 개인주의에서 벗어났다. 이것은 그들이 사도 바울과 하나였을 뿐 아니라, 서로 하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근거를 갖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중점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생활은 복음을 확산시키는 생활이고, 복음을 전하는 생활이며, 개인주의적인 생활이 아닌 단체적인 생활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복음의 확산을 위한 교통이 있는 것이다. 복음이 확산되는 가운데서, 우리가 더 많이 교통할수록 그리스도를 더 많이 체험하고 누리게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릴 때, 우리의 자아와 야심과 선호와 선택은 처리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은 주로 우리 영 안에서의 문제이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은 우리 혼 안에서의 문제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과 누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때로 우리는 누리는 방식이 아닌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한다. 우리는 “나는 그리스도를 내 생명으로 취해야 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체험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아니다. 음식을 억지로 먹지만 음식을 누리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많은 경우 우리도 그리스도를 체험하지만 그리스도를 누리지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리기보다는 고통을 겪는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없이도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가질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의 혼에 있다.

엄밀히 말해서,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관한 책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관한 책이다. 3장 8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다. 이것은 체험의 문제만이 아니라 누림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3:8) 또한 누림을 가리킨다. 탁월함은 주로 체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림을 위한 것이다. 3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전에 나, 다소의 사울은 나의 신분을 즐겼습니다. 나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8절에 언급된 개의 먹이인 배설물은 누림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도 개의 먹이로부터 누림을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에는 유쾌한 맛이 있다.

빌립보서가 쓰인 이유는, 빌립보 성도들이 비록 주님을 위하고 그분의 종을 돌보며 또 영 안에서 매우 합당했지만,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그들의 혼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생각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혼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조언하고 심지어 간청하기 위해 이 서신을 썼던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누림을 갖고 있지 않을까 봐 다소 염려가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분은 이러한 누림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여러분의 혼 안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자매들은 감정에 너무 빠져 있고, 형제들은 생각에 너무 빠져 있다. 그러나 완고한 의지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에게 문제가 있다. 주님의 회복 안에 오랫동안 있어 온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음식을 누릴 줄 모르면서 먹는 어린아이들과 같다. 젊은이들은 캠퍼스 복음 전파에 매우 활동적일 수 있다. 그들은 기도하고 찬양하며 할렐루야를 외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단지 의무감으로 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많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혼 안에서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다른 이들의 그것과 다르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하나 되지 못한(비교 빌 4:2) 이유는 그들이 혼 안에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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