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끝에서, 주 예수님은 천국 헌법의 지극히 높은 부분(17-48절)을 끝맺으시면서 “그러므로 여러분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온전하게 되십시오.”(48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반포하신 천국 헌법을 듣던 왕국 백성은 마태복음 5장 45절에서 ‘여러분의 아버지의 아들들’이라는 명칭이 보여 주는 것처럼 신약의 거듭난 믿는 이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가진 자녀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늘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온전해질 수 있다.
왕국의 새 율법의 요구는 옛 시대의 율법의 요구보다 훨씬 더 높다(마 5:22과 각주 3). 더 높은 이 요구는 사람의 타고난 생명으로 충족될 수 없고,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으로만 충족될 수 있다.
천국의 요구는 가장 높으며,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은 그 요구를 충족하는 가장 높은 공급이다.
왕국의 새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거듭난 왕국 백성 안에 있는 새 생명, 곧 신성한 생명의 표현이다. 이 요구는 거듭난 사람들의 내적 존재를 열어 줌으로써 그들이 그렇게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고 그러한 높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시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롬 8:16, 요 3:6) 우리의 영을 하나님의 거처가 되게 하신(엡 2:22) 결과이다. 우리가 신성한 영께서 내주하시고 신성한 영과 연합된 우리의 거듭난 사람의 영(고전 6:17)을 따라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 삶으로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롬 8:4).
왕국 백성이 그들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의 본성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인 우리는 그분과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누리는 것이다.
이 신성한 본성의 미덕이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 곧 삼일 하나님의 충만한 표현 안으로 이끈다. 우리는 믿음으로써 신성한 생명을 받아들이고, 신성한 생명의 실질인 신성한 본성을 계속 누린다. 우리가 신성한 본성을 더 많이 누릴수록 하나님의 미덕을 더 많이 갖게 되고, 더 많이 그분의 영광 안으로 이끌린다.
우리가 신성한 본성을 누리는 것은 현재와 영원 모두를 위한 것이다.
온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해지시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17장 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볼 수 있다 ― “나는 ‘모든 것을 충족해 주는 하나님’이다. / 너는 내 앞에서 행하며, 온전하게 되어라.”
신성한 칭호인 ‘모든 것을 충족해 주는 하나님’(히브리어로 ‘엘 샷다이’)은 하나님께서 은혜의 근원이시며, 그분 자신의 신성한 존재의 풍성을 그분께 부름받은 이들에게 공급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계시한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분하다는 것은 주님의 능력이 우리가 약할 때에 온전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은 그분의 임재 안에서 행하는 것이고, 끊임없이 그분을 누리며 또 모든 것을 충족해 주시는 그분의 공급을 누리는 것이다.
온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하는 요소와 요인으로서 우리에게 더해지시는 것이다. 실지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우리가 생활과 일에서 육체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충족해 주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그분 자신을 모세에게 주입하시는 시간을 가지셨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입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하셔서,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들을 이루실 길을 얻으시려는 것이다.
성경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의 요구들은 사람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주어졌고, 신약의 계명들의 요구들은 하나님께서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하나님은 우리 밖에서 많은 계명들을 우리에게 주시지만, 우리 안에서 이 모든 계명들을 우리를 위하여 지키고 계신다.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온전하게 됨으로써 그분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면,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온전하게 된 것입니다.” ― 요일 2:5.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내적인 본질이고, 주님의 말씀은 이 신성한 본질을 우리에게 공급하며, 우리는 이 신성한 본질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신성한 말씀을 지킬 때, 신성한 생명을 통해 신성한 사랑이 온전하게 된다. 신성한 생명은 하나님 그분 자신이며 우리는 이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산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됩니다.” ― 요일 4:12.
여기에서 ‘그분의 사랑’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는데, 이 사랑은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되고, 또 우리는 바로 이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 온전하고 완전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온전하고 완전하게 나타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의 화해 제물과 생명이 되게 하셨을 때, 이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다.
이 사랑은 우리 서로가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되어 나타날 때에 온전하고 완전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본질인 사랑 안에서 나타나시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다.
“이것으로써 사랑이 우리에게서 온전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존재 그대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온전한 사랑은 도리어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형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못한 것입니다.” ― 요일 4:17-18.
여기에서 ‘온전한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된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낸다. 또한 이 사랑 안에는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에 그분께 형벌을 받는다는 두려움이 전혀 없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사랑이신 하나님을 사는 생활을 하셨고, 지금은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동일한 사랑의 생활을 하여 그분의 존재와 똑같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요한일서 4장 12절과 17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18절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와 신성한 사랑이 연합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될 때, 우리가 사랑 안에서 온전하게 된다. 우리는 사랑이 되고, 사랑은 우리가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심을 통하여, 사랑이신 하나님으로 조성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사랑이 된다.
신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온전하게 됨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따른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원하심에 따라 사람이 되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사람들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산출하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인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께서 믿는 이들 곧 하나님-사람들 안으로 분배되신 결과이다.
이 분배는 근원이시자 기원이신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분배는 아들 하나님을 요소로 하여 이루어진다.
이 분배는 교통이신 영 하나님을 통해 이루어진다.
고린도후서 13장은 믿는 이들에게 온전하게 되기를 격려하기 위해 쓰였다. 그들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또한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을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인 그리스도의 은혜와 함께,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믿는 이들 안으로 분배하는 그 영의 교통을 통하여 누림으로써 온전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온전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며, 온전하게 하는 사람들은 사도와 신언자와 복음 전파자와 목자 및 교사와 같은 은사 있는 사람들이다.
베드로후서에서 우리는 신성한 사랑인 ‘아가페’가 신성한 본성의 궁극적인 발전이고, 거룩함이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생활 방식임을 본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신성한 본성을 지닌 신성한 생명을 받았다. 이 신성한 본성은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가 이 신성한 본성을 극도로 누릴 때, 사랑이 그 완결일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사랑의 존재가 된다.
신성한 사랑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즉 우리를 분별하고 적시어 완전히 거룩하고 완전히 금(金)인 한 백성이 되게 한다. 우리는 ‘금’덩이들이 되어 함께 두어짐으로써 금등잔대가 되고, ‘금’이신 예수님의 증거를 나타내며, 순금의 성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어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한다.
우리는 교회생활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새 예루살렘을 이루어 내기 위하여 성도들을 가르치고 목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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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신성한 본성을 누릴 때 우리는 주로 영과 사랑과 빛이신 하나님을 누리게 되는데, 그것은 이 세 가지가 신성한 본성의 주요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영은 하나님의 인격의 본성이고,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의 본성이며, 빛은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이다.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것은 신성한 영과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빛에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영을 만질 때,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을 가져온다. 더 고귀하고 더 높은 최고의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질 때, 그 결과로 우리는 구별되고 다르게 된다. 인간 사회는 죄로 ‘어둡게’ 되었다. 이런 면에서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똑같다. 어떤 사람들이 구원받고, 또한 구원받은 사람들이 주님을 매일 접촉하면서 교통 안에 머물며 내적인 신성한 운행에 협력할 때, 그들은 사랑이신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이러한 내적인 사랑이 그들을 다르게 만든다. 그들은 학교에서, 집에서, 친척들과 동료들과 학교 친구들 가운데서 구별된다.
‘거룩함’이라는 단어의 본래 뜻은 분별과 구별이다. 금은 신성한 본성을 지니신 하나님을 예표한다. 하나님은 구별되신 분이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한’이라는 단어의 반대는 ‘속된’이다. 금은 ‘금이신 하나님’ 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상징하는데, 바로 분별의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은 분별되신 분이시며 분별의 하나님이시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처럼 구분되고 분별되며 구별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신성한 교통 안에 머물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이나 여러분을 위해 하시는 것을 누리며, 더 나아가 본질에 있어서 사랑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표현에 있어서 빛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누린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푹 잠길 것이다. 여러분은 사랑의 사람이 될 뿐 아니라 사랑 자체가 될 것이다. 이 사랑이 여러분을 구별되게 한다. 여러분이 주님과의 교통 안에 상당한 시간 동안 머문다면, 이러한 교통 후에 아내와 아이들 모두가 여러분이 달라진 것을 깨달을 것이다. 교통 안에 머문 결과는 바로 여러분이 속되지 않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여러분이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모든 동료가 깨달을 것이다. 학교에서 여러분이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교사들이 깨달을 것이다. 친척들 중에서도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며, 그들도 이것을 깨달을 것이다. 여러분은 거룩하다. 이것은 여러분이 다른 모든 이들과 다르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달라지고 분별되었으며 속되지 않다. 하나님은 우주 가운데 있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구별되시고 분별되신 분이시며, 새 예루살렘은 금으로 된 산, 곧 우주 전체에서 구별된 한 실체이다. 그뿐 아니라 각 지방에 있는 교회도 하나의 금등잔대로서 모두 구별되고 다르다.
베드로의 두 번째 서신서에서 우리는 또한 거룩함 안에 있는 사랑을 본다. 사랑은 신성한 본성의 궁극적인 발전이다(벧후 1:7). 거룩함은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생활 방식이다(3:11). 사랑은 거룩함을 가져온다. 여러분이 신성한 본성에 온전히 동참할 때, 사랑이신 하나님으로 채워질 것이다. 이것은 어떤 생활 방식을 가져올 것이고, 이 생활 방식은 분별되고 구별된 생활로서 여러분을 더 이상 속되지 않고 거룩하게 할 것이다. 거룩함은 신성한 본성을 최대한으로 누리는 이러한 생활 방식이다.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누릴 때, 우리는 심지어 사랑이 되며 이 사랑은 거룩함을 가져온다. 거룩함은 방식이다. 신성한 사랑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분별하며 다르게 만든다. 우리는 금인 너무나 거룩한 백성이다. 우리는 더 이상 진흙덩이가 아니라 금덩이이며, 우리가 함께 모일 때 모든 조각이 함께 두어짐으로써 금등잔대가 되고 ‘금’이신 예수님의 증거를 나타낸다. 이것이 베드로가 쓴 글의 중심 노선, 중심 사상이다.
5일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계시를 보아야 한다.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인의 참되고 실지적인 온전하게 됨이다.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몸의 최종 완결일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온전하게 됨은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하는 모든 하나님-사람들의 총체이다.
신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온전하게 됨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따른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원하심에 따라 사람이 되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사람들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산출하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인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께서 믿는 이들 곧 하나님-사람들 안으로 분배되신 결과이며, 이 분배는 근원이시자 기원이신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버지의 본성은 새 예루살렘의 근원과 기원인 순금 기반이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온전하게 됨은 또한 아들 하나님을 요소로 하여 이루어진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의 진주 문들로 예표된다.
영 하나님의 교통의 분배는 거듭남, 거룩하게 됨, 새롭게 됨, 변화, 같은 형상을 이룸, 영광스럽게 됨이라는 여섯 단계에 의해 우리 주위에 신성한 생명의 즙을 분비하는 것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째이신 그 영은 이러한 여섯 단계에 의해 변화시키는 일을 완성하심으로써 우리를 완성된 진주로 만드실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은 믿는 이들에게 온전하게 되기를 격려하기 위해 쓰였다. 그들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또한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을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인 그리스도의 은혜와 함께,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믿는 이들 안으로 분배하는 그 영의 교통을 통하여 누림으로써 온전하게 된다. 고린도후서 13장에서 바울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온전하게 되는 것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다.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삼일성의 셋째이신 그 영의 교통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 우리 주위에 삼일 하나님의 생명 요소를 분비하면서 항상 우리와 함께한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온전하게 됨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하게 되어 다른 이들을 온전하게 하는 사람들이 바로 사도와 신언자와 복음 전파자와 목자 및 교사와 같이 은사 있는 사람들이다.
사도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진리를 정의한다. 신언자는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신언한다. 합당한 신언자는 신성한 말씀을 신언하는데, 이것은 주로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말해 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가, 처녀가 아기를 낳을 것이며 그분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라고 말했을 때 한 일이다. 복음 전파자는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게 하려고 복음을 전파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혼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얻기 위해서 복음을 전파한다. 복음 전파자는 죄인들을 얻어서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도록 한다. 이것은 죄인들이 천당에 가도록 그들의 혼을 얻는 것이 아니다. 목자는 어린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자라도록 그들을 먹인다. 교사는 교회들을 세우기 위해 믿는 이들이 온전하게 되도록 그들을 가르친다.
4일
요한일서 2장 5절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아가페(agape)’이다. 이 단어는 ‘필레오(phileo)’보다 더 높고 고귀한 사랑을 가리킨다. 이 서신에서 ‘사랑’이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모두 이 단어와 이 단어의 동사형만이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말씀, 하나님 자신은 모두 서로 관련이 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킨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신성한 생명의 문제인데, 이 신성한 생명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내적인 본질이고, 주님의 말씀은 이 신성한 본질을 우리에게 공급하며, 우리는 이 신성한 본질로 형제들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신성한 말씀을 지킬 때, 우리가 사는 신성한 생명을 통해 신성한 사랑이 온전하게 된다.
요한일서 4장 12절에서 요한은 또한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하나님 자신 안에서 온전하게 되었지만, 지금 이 사랑은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체험이 될 필요가 있다. 이 사랑이 우리의 체험과 누림이 될 때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이미 온전하게 된 사랑은 우리가 이 사랑을 누림으로써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될 필요가 있다.
요한일서 4장 12절에서 ‘온전하게 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텔레이오(teleioo)’이며, 이 헬라어 단어는 ‘완전하게 하다’, ‘성취하다’, ‘끝내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 온전하고 완전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온전하고 완전하게 나타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의 화해 제물과 생명이 되게 하셨을 때, 이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다(요일 4:9-10).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같이 이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하고 완전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서로가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되어 나타날 때에 온전하고 완전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생활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고 완전하게 나타나도록 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본질인 사랑 안에서 나타나시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다.
요한일서 4장 17절에서 요한은 “왜냐하면 그분의 존재 그대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사랑이신 하나님을 사는 생활을 하셨고, 지금은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동일한 사랑의 생활을 하여 그분의 존재와 똑같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서 계속해서 요한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온전한 사랑은 도리어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형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절의 앞부분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두려움은 사랑 안에 없다.”라고 할 수 있다. ‘두려움’은 우리가 ‘앞으로’ 하나님께 범죄할 때에 받게 될 그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벧전 1:17, 히 12:28)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에’ 하나님께 범죄한 것에 대해 그분께 받게 될 심판의 두려움을 가리킨다. ‘사랑’은 17절에 언급된 온전하게 된 사랑, 곧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온전한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된(요일 4:17)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낸다. 또한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에 그분께 형벌을 받는다는 두려움이 전혀 없다(눅 12:46-47).
요한일서 4장 18절에서 요한은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두려워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온전히 나타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먼저 요한은 요한일서 4장 12절과 17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18절에서는 우리가 사랑 안에서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와 신성한 사랑이 연합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될 때, 우리가 사랑 안에서 온전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이 되고, 사랑은 우리가 되기 때문이다.
3일
우리는 창세기 17장에서 언급된 ‘모든 것을 충족해 주는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칭호의 의미를 배울 필요가 있다. 이 칭호는 히브리어로 ‘엘 샷다이’이다. ‘엘’은 ‘강한 분’, ‘능력 있으신 분’이라는 뜻이고, ‘샷다이’는 모든 것을 충족해 준다는 의미를 지닌 ‘가슴’ 혹은 ‘유방’을 의미한다. 유방은 젖을 내며, 젖은 모든 것을 포함한 공급으로서 이 공급에는 물과 무기질과 여러 비타민이 있고, 우리의 일상생활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엘 샷다이’는 ‘모든 것을 충족해 주시며 능력 있으신 분’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타고난 자아에 의해 행했을 때, 그의 공급의 근원을 잊어버렸다. 다시 말해서, 그는 모든 것을 충족해 주시며 공급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이 유방으로 와라. 너의 공급의 근원은 너의 타고난 자아가 아니라 나, 곧 유방을 가진 능력 있는 이이다. 나는 모든 것을 충족해 주는 이로서, 너의 생활을 위해 너에게 필요한 모든 것과, 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할 수 있다. 내가 근원이다. 너는 근원이 아니다. 너는 자신을 의지하여 자신의 힘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너는 너의 공급의 근원인 나에 의해 살아야 한다.”
창세기 17장 1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분 앞에서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 앞에서 행하는 것은 끊임없이 그분을 누리고 그분의 유방의 공급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은 거룩하신 분 앞에서 행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며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충족해 주는 유방을 갖고 계시며 능력이 있으신 분은 우리의 일상적인 모든 필요를 공급하신다. 그분의 공급을 누리고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아브라함에게 온전하게 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이 부족했음을 뜻한다.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 없이 온전하게 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분이 없으면 우리는 항상 무언가가 부족하다. 우리가 자신 안에서 얼마나 온전한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이 부족하며,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으로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가정생활에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의 가정생활은 온전하지 않다. 우리의 결혼 생활에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의 결혼 생활은 온전하지 않다. 하나님이 없으면 온전해질 수 없다. 우리 손에 손가락이 네 개뿐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 손이 좋은 손이라 해도, 엄지손가락이 없기 때문에 그 손은 온전하지 않을 것이다. 온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해지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은 그분을 누리는 것이고, 온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해지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충족해 주시며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온전하게 되지 못할 이유나 변명이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모두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에게 능력이 부족한가? 하나님께서 능력이시다. 우리에게 힘이 필요한가? 하나님께서 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시다. 우리는 가난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은행에 많은 예치금을 가지고 있다.
실지적으로 말해서, 온전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생활과 일에서 육체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충족해 주시며 능력을 가지신 분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타고난 자아를 사용하거나 육체의 힘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모든 일에서 항상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충족해 주심을 신뢰해야 한다. 왜 우리는 어떤 때에 화를 내는가? 왜냐하면 그 순간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것은 우리에게 한 가지 공과를 배우게 한다. 그 공과는 바로 결코 매 순간 하나님에게서 떠나지 말고 그분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순간순간 우리의 성질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의 성질은 극복될 것이다. 온전하게 되지 않은 모든 것은 한 가지에 기인한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충족해 주시며 능력을 가지신 분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있을 때, 마치 전원에서 끊어져 작동하지 않는 전기 기구와 같다.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하나님 안에 자신을 두기를 배워야 한다. 이것이 온전하게 되는 길이다.
2일
우리는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을 통하여 그분과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는 믿음과 침례를 통해 이 유기적인 연결 안으로 들어갔다(요 3:15, 갈 3:27, 마 28:19). 이 신성한 본성의 미덕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 곧 삼일 하나님의 완전한 표현 안으로 이끈다.
우리는 단순히 믿음으로써 신성한 생명을 받아들이며, 신성한 본성은 그 신성한 생명의 실질이다. 우리는 믿을 때 신성한 생명을 받아들였지만 신성한 본성은 우리가 끊임없이 누려야 하는 것이다. 이 누림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신성한 본성을 누리면 누릴수록 더욱더 우리는 그분의 미덕을 갖게 되고, 더욱더 그분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어떠하심을 누리도록, 하나님은 그분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에 따라 우리를 위해 많은 것들을 행하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능히 그분의 본성 즉 그분의 어떠하심을 누릴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분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 중 하나는 그분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분하다는 것이다(고후 12:9). 하나님의 충분한 은혜는 우리가 그분의 본성을 누릴 수 있도록 날마다 우리 안에서 작용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어떠하심은 그분의 본성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성한 본성에 동참할 때 신성한 풍성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거듭날 때 이미 신성한 생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본성의 어떠함을 누려야 한다.
이 누림은 현재와 영원 모두를 위한 것이다. 영원토록 우리는 계속해서 신성한 본성에 동참할 것이다. 이것은 생명나무와 생명수의 강(계 22:1-2)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의 강이 흘러나온다. 이것은 흘러나오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구속받은 사람들의 누림이 되심을 의미한다. 이 흐르는 강은 새 예루살렘성 전체를 흠뻑 적실 것이며, 그 강 안에서 그리고 그 강을 따라 자라는 생명나무는 구속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그들의 생명 공급으로 제공할 것이다.
하나님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신약에 따르면 하나님은 영이시고(요 4:24), 사랑이시고(요일 4:8, 16), 빛이시다(1:5). 이러한 말씀은 하나님의 본성을 가리키고 묘사한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하나님의 인격의 본성인 영과 하나님의 본질의 본성인 사랑과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인 빛이 포함된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과 함께 그분의 본성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분배 아래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그분의 영과 사랑과 빛을 더욱더 갖게 된다.
우리는 결혼 생활에서 하나님의 분배를 체험해야 한다. 결혼한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은 남편이나 아내가 견디기 힘든 시간을 준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여러분이 부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분배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여러분이 그분의 분배 아래 머물며 그 영을 더 많이 여러분 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육체나 감정으로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 영으로 반응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실 뿐 아니라 사랑이시기도 하므로, 우리가 그분의 분배 아래 있으면 있을수록 더 사랑을 갖게 된다. 사실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 안으로 더 분배될수록 우리는 더 사랑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을 가질 뿐 아니라 사랑이라는 뜻이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가지셨을 뿐 아니라 사랑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으로 조성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사랑이 된다. 하나님의 본질의 본성인 사랑이 우리 안으로 분배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사랑으로 반응한다. 오직 한 가지 사랑만이 참된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분배로부터 나오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분배 아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자신인 참사랑으로 반응한다.
신언노트, 2022 12 11
하늘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온전하게 됨으로
그분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우리도 온전하게 됨
하늘의 아버지의 사랑으로
완전하게 됨에 의해
그분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함
마태복음 5장 48절의
주님의 말씀은
헌법의 이 부분,
지극히 높은 이 부분을
끝맺는다.
이 부분의 모든 요구들을
읽고 나면,
우리는 모두
그것들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 후에
우리는
48절에 온다.
이 절은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반드시 우리도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절은
우리가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난
그분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가진
그분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분을
모방하거나
흉내 낼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분의 생명 안에서 자라는 한
우리는
그분과 똑같이 될 것이다.
따라서 천국의 율법의
모든 요구들은
이 신성한 생명과 본성이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를
계시한다.
우리에게는 다만
자신이 폭로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소망을
단념하게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버릴 것이고,
우리 아버지의 생명으로
돌이킬 것이며,
신성한 본성과 함께
머물 것이다.
자연히 이 생명은
우리 안에서 자랄 것이고,
가장 높은 이 율법의 요구를
이룰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필요는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
우리의 영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에 의해
살게 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이루게 된다.
나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생명을
내 안에 가지고 있다!
나는 지금
내 영 안에서
이 생명에 의해 살고 있으며
이 영을 따라
행하고 있다.
내 영 안에 있는
이 생명에 의해 자연스럽게
나는
천국의 율법의
가장 높은 요구들을 이룬다.
이것은
나의 자랑이 아니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나의 겸손한 간증이다.
이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하실 수 있음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그분께서
나의 생명으로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여러분 안에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같은 것을 하실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체험이 되려면,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에
소망이 없다는 것에 대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철저히 파내어지고
드러난 후에,
우리는
타고난 생명에
소망이 없다는 것과,
타고난 생명에
신뢰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반드시 우리 안에 있는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으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쉽게
아버지의 생명으로
돌이킬 수 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순간
아버지의 생명이
우리의 영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분의 영을 따라
행하라.
그러면 율법의 모든 의로운 요구가
여러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들로서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우리는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아버지의 생명을 산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이들이 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의 영 안으로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고
우리의 영을
하나님 그분 자신의
바로 그 거처로
만드심에 의해서이다.
여기, 곧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과 또 본성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아이들이 되었다.
이 거듭난 영을 따라 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 사는
하나님의 아이들이다.
우리가
그 영 안에서
살고 행할 때,
자연스럽게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온전할 것이다.
네 자녀를 둔
어떤 형제를
생각해 보자.
이 자녀들은
사람을 모방하려고 애쓰는
원숭이 네 마리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아이들이고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형상 안으로
자라고 있다.
그들은
자랄수록 더욱더
아버지의 생명을 살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원숭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다소 아기 같거나 유치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자라고 있다.
이 어린 사람들은
장난꾸러기일 수 있지만
그들은
자라고 있다.
몇 해 동안
기다려 보라.
이 모든 장난꾸러기 작은 아이들이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을
여러분이 볼 것이다.
결국 그들은
자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방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
자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우리도
온전하게 되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왕국의 새 율법의 요구는
옛 시대의 율법의 요구보다
훨씬 더 높다.
더 높은 이 요구는
사람의 타고난 생명으로
충족될 수 없고,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으로만
충족될 수 있다.
천국의 요구는
가장 높으며,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은
그 요구를 충족하는
가장 높은 공급이다.
왕국의 새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거듭난 왕국 백성 안에 있는
새 생명,
곧 신성한 생명의
표현이다.
이 요구는
거듭난 사람들의
내적 존재를 열어 줌으로써
그들이
그렇게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고
그러한 높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의 영을
하나님의 거처가
되게 하심에 의해서이다.
우리가
신성한 영께서 내주하시고
신성한 영과 섞인
우리의 거듭난 사람의 영을 따라 걷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 살고 있고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이룬다.
우리는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을 통하여
그분과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는
믿음과 침례를 통해
이 유기적인 연결 안으로
들어갔다.
이 신성한 본성의 미덕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
곧 삼일 하나님의 완전한 표현 안으로
이끈다.
우리는
단순히 믿음으로써
신성한 생명을 받아들이며,
신성한 본성은
그 신성한 생명의 실질이다.
우리가
믿을 때
신성한 생명을 받아들였지만
신성한 본성은
우리가
끊임없이 누려야 하는 것이다.
이 누림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신성한 본성을 누리면 누릴수록
더욱더 우리는
그분의 미덕을 갖게 되고,
더욱더 그분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어떠하심을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그분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에 따라
우리를 위해
많은 것들을 행하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능히
그분의 본성
즉 그분의 어떠하심을
누릴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분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 중 하나는
그분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충분한 은혜는
우리가
그분의 본성을
누릴 수 있도록
날마다 우리 안에서
작용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어떠하심은
그분의 본성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성한 본성에 동참할 때
신성한 풍성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가
거듭날 때
이미 신성한 생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본성의 어떠함을
누려야 한다.
이 누림은
현재와 영원 모두를 위한 것이다.
영원토록 우리는
계속해서
신성한 본성에 동참할 것이다.
이것은
생명나무와
생명수의 강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의 강이 흘러나온다.
이것은
흘러나오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구속받은 사람들의
누림이 되심을
의미한다.
이 흐르는 강은
새 예루살렘성 전체를
흠뻑 적실 것이며,
그 강 안에서
그리고 그 강을 따라 자라는
생명나무는
구속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그들의 생명 공급으로
제공할 것이다.
하나님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신약에 따르면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랑이시고,
빛이시다.
이러한 말씀은
하나님의 본성을
가리키고 묘사한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하나님의 인격의 본성인 영과
하나님의 본질의 본성인 사랑과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인 빛이
포함된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과 함께
그분의 본성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분배 아래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그분의 영과 사랑과 빛을
더욱더 가지게 된다.
우리는
결혼 생활에서
하나님의 분배를
체험해야 한다.
결혼한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은
남편이나 아내가
견디기 힘든 시간을 준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여러분이
부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분배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여러분이
그분의 분배 아래 머물며
그 영을 더 많이
여러분 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육체나 감정으로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 영으로
반응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실 뿐 아니라
사랑이시기도 하므로,
우리가
그분의 분배 아래
있으면 있을수록
더 사랑을 가지게 된다.
사실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 안으로
더 분배될수록
우리는
더 사랑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을 가질 뿐 아니라
사랑이라는 뜻이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가지셨을 뿐 아니라
사랑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심을 통하여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으로
조성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사랑이 된다.
하나님의 본질의 본성인 사랑이
우리 안으로 분배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사랑으로 반응한다.
오직 한 가지 사랑만이
참된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분배로부터
나오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분배 아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자신인
참사랑으로
반응한다.
왕국 백성이
그들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의 본성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인 우리는
그분과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누리는 것이다.
이 신성한 본성의 미덕이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
곧 삼일 하나님의 충만한 표현 안으로
이끈다.
우리는
믿음으로써
신성한 생명을 받아들이고,
신성한 생명의 실질인
신성한 본성을
계속 누린다.
우리가
신성한 본성을
더 많이 누릴수록
하나님의 미덕을
더 많이
가지게 되고,
더 많이
그분의 영광 안으로 이끌린다.
우리가
신성한 본성을 누리는 것은
현재와 영원 모두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 17장에서 언급된
‘모든 것을 충족해 주는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칭호의
의미를 배울 필요가 있다.
이 칭호는
히브리어로
‘엘 샷다이’이다.
‘엘’은
‘강한 분’,
‘능력 있으신 분’이라는 뜻이고,
‘샷다이’는
모든 것을 충족해 준다는
의미를 지닌
‘가슴’ 혹은 ‘유방’을
의미한다.
유방은
젖을 내며,
젖은
모든 것을 포함한 공급으로서
이 공급에는
물과 무기질과 여러 비타민이 있고,
우리의 일상생활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엘 샷다이’는
‘모든 것을 충족해 주시며
능력 있으신 분’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타고난 자아에 의해
행했을 때,
그의 공급의 근원을
잊어버렸다.
다시 말해서,
그는
모든 것을 충족해 주시며
공급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이 유방으로 와라.
너의 공급의 근원은
너의 타고난 자아가 아니라
나,
곧 유방을 가진
능력 있는 이이다.
나는
모든 것을 충족해 주는 이로서,
너의 생활을 위해
너에게 필요한 모든 것과,
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할 수 있다.
내가 근원이다.
너는 근원이 아니다.
너는
자신을 의지하여
자신의 힘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너는
너의 공급의 근원인
나에 의해 살아야 한다.”
창세기 17장 1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분 앞에서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 앞에서 행하는 것은
끊임없이 그분을 누리고
그분의 유방의 공급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은
거룩하신 분 앞에서 행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며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충족해 주는
유방을 가지고 계시며
능력이 있으신 분은
우리의 일상적인 모든 필요를
공급하신다.
그분의 공급을
누리고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아브라함에게
온전하게 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이 부족했음을
뜻한다.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 없이
온전하게 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분이 없으면
우리는 항상
무언가가 부족하다.
우리가
자신 안에서
얼마나 온전한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이 부족하며,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으로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가정생활에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의 가정생활은
온전하지 않다.
우리의 결혼 생활에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의 결혼 생활은
온전하지 않다.
하나님이 없으면
온전해질 수 없다.
우리 손에
손가락이 네 개뿐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 손이
좋은 손이라 해도,
엄지손가락이 없기 때문에
그 손은 온전하지 않을 것이다.
온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해지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은
그분을 누리는 것이고,
온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해지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충족해 주시며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온전하게 되지 못할
이유나 변명이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모두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에게
능력이 부족한가?
하나님께서 능력이시다.
우리에게
힘이 필요한가?
하나님께서 힘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시다.
우리는
가난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은행에
많은 예치금을
가지고 있다.
실지적으로 말해서,
온전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생활과 일에서
육체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충족해 주시며
능력을 가지신 분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타고난 자아를 사용하거나
육체의 힘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모든 일에서 항상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충족해 주심을
신뢰해야 한다.
왜 우리는
어떤 때에
화를 내는가?
왜냐하면 그 순간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것은
우리에게
한 가지 공과를
배우게 한다.
그 공과는 바로
결코 매 순간
하나님에게서 떠나지 말고
그분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순간순간
우리의 성질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의 성질은
극복될 것이다.
온전하게 되지 않은 모든 것은
한 가지에 기인한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충족해 주시며
능력을 가지신 분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있을 때,
마치 전원에서 끊어져
작동하지 않는
전기 기구와 같다.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하나님 안에
자신을 두기를
배워야 한다.
이것이
온전하게 되는 길이다.
온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하는
요소와 요인으로서
우리에게 더해지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그분 자신을
모세에게 주입하시는
시간을 가지셨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입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하셔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들을 이루실
길을 얻으시려는 것이다.
성경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의 요구들은
사람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주어졌고,
신약의 계명들의 요구들은
하나님께서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많은 계명들을
우리에게 주시지만,
우리 안에서
이 모든 계명들을
우리를 위하여
지키고 계신다.
요한일서 2장 5절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아가페(agape)’이다.
이 단어는
‘필레오(phileo)’보다
더 높고 고귀한
사랑을 가리킨다.
이 서신에서
‘사랑’이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모두
이 단어와 이 단어의 동사형만이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말씀,
하나님 자신은 모두
서로 관련이 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킨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신성한 생명의 문제인데,
이 신성한 생명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내적인 본질이고,
주님의 말씀은
이 신성한 본질을
우리에게 공급하며,
우리는
이 신성한 본질로
형제들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신성한 말씀을 지킬 때,
우리가 사는
신성한 생명을 통해
신성한 사랑이
온전하게 된다.
요한일서 4장 12절에서
요한은 또한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하나님 자신 안에서
온전하게 되었지만,
지금 이 사랑은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체험이 될 필요가 있다.
이 사랑이
우리의 체험과 누림이 될 때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이미
온전하게 된
사랑은
우리가
이 사랑을 누림으로써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될 필요가 있다.
요한일서 4장 12절에서
‘온전하게 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텔레이오(teleioo)’이며,
이 헬라어 단어는
‘완전하게 하다’,
‘성취하다’,
‘끝내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
온전하고 완전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온전하고 완전하게
나타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화해 제물과 생명이
되게 하셨을 때,
이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같이
이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하고 완전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서로가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되어 나타날 때에
온전하고 완전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생활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고 완전하게
나타나도록 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본질인
사랑 안에서
나타나시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다.
요한일서 4장 17절에서
요한은
“왜냐하면 그분의 존재 그대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이신
하나님을 사는
생활을 하셨고,
지금은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동일한 사랑의 생활을 하여
그분의 존재와
똑같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서 계속해서
요한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온전한 사랑은 도리어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형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못한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 절의 앞부분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두려움은
사랑 안에 없다.”
라고 할 수 있다.
‘두려움’은
우리가
‘앞으로’
하나님께 범죄할 때에 받게 될
그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에’
하나님께 범죄한 것에 대해
그분께 받게 될
심판의 두려움을
가리킨다.
‘사랑’은
17절에 언급된
온전하게 된 사랑,
곧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온전한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된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낸다.
또한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에
그분께 형벌을 받는다는
두려움이 전혀 없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서
요한은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두려워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온전히 나타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먼저 요한은
요한일서 4장
12절과 17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18절에서는
우리가
사랑 안에서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와
신성한 사랑이
연합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될 때,
우리가
사랑 안에서
온전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이 되고,
사랑은
우리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온전하게 됨으로써
그분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계시를
보아야 한다.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인의
참되고 실지적인 온전하게 됨이다.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몸의
최종 완결일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온전하게 됨은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하는
모든 하나님-사람들의 총체이다.
신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온전하게 됨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따른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원하심에 따라
사람이 되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사람들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산출하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인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께서
믿는 이들 곧 하나님-사람들 안으로
분배되신 결과이며,
이 분배는
근원이시자 기원이신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버지의 본성은
새 예루살렘의 근원과 기원인
순금 기반이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온전하게 됨은 또한
아들 하나님을 요소로 하여
이루어진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의 진주 문들로
예표된다.
영 하나님의 교통의 분배는
거듭남, 거룩하게 됨,
새롭게 됨, 변화,
같은 형상을 이룸, 영광스럽게 됨이라는
여섯 단계에 의해
우리 주위에
신성한 생명의 즙을
분비하는 것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째이신 그 영께서
이러한 여섯 단계에 의해
변화시키는 일을
완성하심으로써
우리를
완성된 진주로
만드실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은
믿는 이들에게
온전하게 되기를 격려하기 위해
쓰였다.
그들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또한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을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인
그리스도의 은혜와 함께,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믿는 이들 안으로 분배하는
그 영의 교통을 통하여
누림으로써
온전하게 된다.
고린도후서 13장에서
바울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온전하게 되는 것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다.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삼일성의 셋째이신
그 영의 교통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
우리 주위에
삼일 하나님의 생명 요소를
분비하면서
항상 우리와 함께한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온전하게 됨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하게 되어
다른 이들을 온전하게 하는 사람들이 바로
사도와 신언자와
복음 전파자와 목자 및 교사와 같이
은사 있는(선물로 주어진) 사람들이다.
사도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진리를 정의한다.
신언자는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신언한다.
합당한 신언자는
신성한 말씀을 신언하는데,
이것은 주로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말해 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가,
처녀가
아기를 낳을 것이며
그분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라고
말했을 때
한 일이다.
복음 전파자는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게 하려고
복음을 전파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혼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얻기 위해서
복음을 전파한다.
복음 전파자는
죄인들을 얻어서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도록 한다.
이것은
죄인들이
하늘에 가도록
그들의 혼을 얻는 것이 아니다.
목자는
어린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자라도록
그들을 먹인다.
교사는
교회들을 세우기 위해
믿는 이들이
온전하게 되도록
그들을 가르친다.
신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온전하게 됨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따른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원하심에 따라
사람이 되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사람들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산출하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인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께서
믿는 이들
곧 하나님-사람들 안으로
분배되신 결과이다.
신성한 본성을 누릴 때
우리는 주로
영과 사랑과 빛이신
하나님을 누리게 되는데,
그것은 이 세 가지가
신성한 본성의
주요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영은
하나님의 인격의 본성이고,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의 본성이며,
빛은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이다.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것은
신성한 영과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빛에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영을 만질 때,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을 가져온다.
더 고귀하고 더 높은
최고의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질 때,
그 결과로 우리는
구별되고 다르게 된다.
인간 사회는
죄로
‘어둡게’ 되었다.
이런 면에서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똑같다.
어떤 사람들이
구원받고,
또한 구원받은 사람들이
주님을 매일 접촉하면서
교통 안에 머물며
내적인 신성한 운행에
협력할 때,
그들은
사랑이신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이러한 내적인 사랑이
그들을 다르게 만든다.
그들은
학교에서,
집에서,
친척들과
동료들과
학교 친구들 가운데서
구별된다.
‘거룩함’이라는 단어의
본래 뜻은
분별과 구별이다.
금은
신성한 본성을 지니신
하나님을 예표한다.
하나님께서는
구별되신 분이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한’이라는 단어의 반대는
‘속된’이다.
금은
‘금이신 하나님’
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상징하는데,
바로 분별의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은
분별되신 분이시며
분별의 하나님이시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처럼
구분되고 분별되며 구별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신성한 교통 안에 머물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이나
여러분을 위해 하시는 것을
누리며,
더 나아가
본질에 있어서 사랑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표현에 있어서 빛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누린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푹 잠길 것이다.
여러분은
사랑의 사람이 될 뿐 아니라
사랑 자체가 될 것이다.
이 사랑이
여러분을 구별되게 한다.
여러분이
주님과의 교통 안에
상당한 시간 동안 머문다면,
이러한 교통 후에
아내와 아이들 모두가
여러분이 달라진 것을
깨달을 것이다.
교통 안에 머문
결과는 바로
여러분이
속되지 않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여러분이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모든 동료가
깨달을 것이다.
학교에서 여러분이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교사들이 깨달을 것이다.
친척들 중에서도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며,
그들도
이것을 깨달을 것이다.
여러분은 거룩하다.
이것은 여러분이
다른 모든 이들과
다르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달라지고
분별되었으며
속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가운데 있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구별되시고 분별되신 분이시며,
새 예루살렘은
금으로 된 산,
곧 우주 전체에서 구별된
한 실체이다.
그뿐 아니라
각 지방에 있는 교회도
하나의 금등잔대로서
모두 구별되고 다르다.
베드로의 두 번째 서신서에서
우리는 또한
거룩함 안에 있는
사랑을 본다.
사랑은 신성한 본성의
궁극적인 발전이다.
거룩함은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생활 방식이다.
사랑은
거룩함을 가져온다.
여러분이
신성한 본성에 온전히 동참할 때,
사랑이신 하나님으로
채워질 것이다.
이것은
어떤 생활 방식을
가져올 것이고,
이 생활 방식은
분별되고 구별된 생활로서
여러분을 더 이상
속되지 않고
거룩하게 할 것이다.
거룩함은
신성한 본성을
최대한으로 누리는
이러한 생활 방식이다.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누릴 때,
우리는 심지어
사랑이 되며
이 사랑은
거룩함을 가져온다.
거룩함은 방식이다.
신성한 사랑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분별하며
다르게 만든다.
우리는
금인
너무나 거룩한 백성이다.
우리는 더 이상
진흙덩이가 아니라
금덩이이며,
우리가
함께 모일 때
모든 조각이
함께 두어짐으로써
금등잔대가 되고
‘금’이신 예수님의
증거를 나타낸다.
이것이
베드로가 쓴 글의
중심 노선,
중심 사상이다.
베드로후서에서
우리는
신성한 사랑인 ‘아가페’가
신성한 본성의
궁극적인 발전이고,
거룩함이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생활 방식임을 본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신성한 본성을 지닌
신성한 생명을 받았다.
이 신성한 본성은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가
이 신성한 본성을
극도로 누릴 때,
사랑이
그 완결일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사랑의 존재가 된다.
신성한 사랑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즉 우리를 분별하고 적셔서
완전히 거룩하고
완전히 금(金)인
한 백성이 되게 한다.
우리는
‘금’덩이들이 되어
함께 두어짐으로써
금등잔대가 되고,
‘금’이신 예수님의
증거를 나타내며,
순금의 도시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어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한다.
우리는
교회생활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새 예루살렘을 이루어 내기 위하여
성도들을
가르치고
목양해야 한다.
1일
마태복음 5장 48절의 주님의 말씀은 헌법의 이 부분(17-48절), 지극히 높은 이 부분을 끝맺는다. 이 부분의 모든 요구들을 읽고 나면, 우리는 모두 그것들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 후에 우리는 48절에 온다. 이 절은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반드시 우리도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절은 우리가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난 그분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가진 그분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분을 모방하거나 흉내 낼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분의 생명 안에서 자라는 한 우리는 그분과 똑같이 될 것이다. 따라서 천국의 율법의 모든 요구들은 이 신성한 생명과 본성이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를 계시한다. 우리에게는 다만 자신이 폭로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소망을 단념하게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버릴 것이고, 우리 아버지의 생명으로 돌이킬 것이며, 신성한 본성과 함께 머물 것이다. 자연히 이 생명은 우리 안에서 자랄 것이고, 가장 높은 이 율법의 요구를 이룰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필요는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 우리의 영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에 의해 살게 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이루게 된다.
나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생명을 내 안에 가지고 있다! 나는 지금 내 영 안에서 이 생명에 의해 살고 있으며 이 영을 따라 행하고 있다. 내 영 안에 있는 이 생명에 의해 자연스럽게 나는 천국의 율법의 가장 높은 요구들을 이룬다. 이것은 나의 자랑이 아니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나의 겸손한 간증이다. 이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하실 수 있음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그분께서 나의 생명으로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여러분 안에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같은 것을 하실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체험이 되려면,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에 소망이 없다는 것에 대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철저히 파내어지고 드러난 후에, 우리는 타고난 생명에 소망이 없다는 것과, 타고난 생명에 신뢰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반드시 우리 안에 있는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으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쉽게 아버지의 생명으로 돌이킬 수 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순간 아버지의 생명이 우리의 영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분의 영을 따라 행하라. 그러면 율법의 모든 의로운 요구가 여러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들로서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우리는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아버지의 생명을 산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의 영 안으로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의 영을 하나님께서 직접 거하실 처소로 만드심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바로 이곳,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 거듭난 영을 따라 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가 그 영 안에서 살고 행할 때, 자연히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온전하게 될 것이다.
네 자녀를 둔 어떤 형제를 생각해 보자. 이 자녀들은 사람을 모방하려고 애쓰는 원숭이 네 마리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그들의 아버지의 형상 안으로 자라고 있다. 그들은 자랄수록 더욱더 아버지의 생명을 살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원숭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다소 어리고 유치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자라고 있다. 이렇게 어린 사람들은 말썽꾸러기일지 모르지만 자라는 중이다. 수년만 더 기다려 보라. 이 모든 어린 말썽꾸러기들이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결국 그들은 자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방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 자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우리도 온전하게 되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