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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하늘에 속한 만나의 실재이신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로 우리의 음식을 바꿈으로 그리스도로 재조성되어 하나님의 거처가 됨

The Change of Our Diet
to the Heavenly Christ
as the Reality of the Heavenly Manna
So That We May Be Reconstituted with Christ
to Become God’s Dwelling Place
하늘에 속한 그 만나의 그 실재이신
하늘에 속하시는 그 그리스도로
우리의 음식을 바꾸어
그 결과 우리가 그리스도로 재구성되어
하나님의 거처가 될 수 있음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늘에 속한 만나의
실재로서,
하나님의 선민의
매일의 생명 공급이 되신다
― 요 6:31-35, 48-51, 57-58, 63.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서
하늘에 속한 떡이시다
― 요 6:31-32, 41-42, 49-50.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속하시고,
하나님의 보냄을 받으셨으며,
하나님과 함께하셨던 분으로서
하나님의 떡이시다
― 요 6:33.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
곧 ‘조에’를 가진 떡으로서
생명의 떡이시다.
생명의 떡은
떡의 본성을 가리키는데,
이 본성은 바로
생명이다.
생명의 떡은
‘먹기 좋은’ 생명 공급이기도 한
생명나무와 같다
― 요 6:35, 48, 창 2:9.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떡이시다.
이 말은
떡의 상태를 가리키는데,
이 떡의 상태는
살아 있다
― 요 6:51.

그리스도는
참떡이시다.
그분은
참양식이시고
다른 모든 음식은
참된 양식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우리가 매일 먹는
양식의 실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 요 6:32.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 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 영이십니다.
육체는 무익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한 말이
영이요 생명입니다.”
― 요 6:57, 63.

먹는다는 것은
음식이
유기적으로
우리 몸 안에 흡수되도록,
그것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거듭난 새사람에 의해
생명의 방식으로 흡수되실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에 ‘의해서(by)’가 아니라,
우리에게 힘을 주는 요소이자
공급의 요인이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because of)’
산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그리스도를 산다
― 갈 2:20, 빌 1:19-21상.

우리는
영과 생명에 속한
주님의 말씀을 먹음으로써,
곧 온갖 기도로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영적인 양식이신
주 예수님을 먹고,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신
그분을 받아들인다
― 렘 15:16, 엡 6:17-18.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생명의 영의 체현이다.
그분은
지금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시며,
이 영은
그분의 말씀안에
체현되신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함으로
그분의 말씀을 받을 때,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을 얻는다
― 찬송가 451장.

하나님은
우리의 음식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민을 위해 보내신
참된 만나이신
그리스도라는 음식으로
바꾸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그분의 선민이
그리스도로 조성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삶으로
하나님의 거처가 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 출 16:1-36.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
분별된 광야로 이끌렸을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세상을 상징하는
이집트의 요소로
조성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의 백성의 음식을
바꾸어 줌으로써
그들의 요소를 바꾸어
그들의 본성을 바꾸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존재,
곧 그들의 조성 자체를 바꾸시어,
그들을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로
조성되고 변화된
하늘에 속한 백성으로 만들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에게
오직 만나만 주어
먹게 하셨다
(출 16:35, 민 11:6).
이것은
믿는 이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자신을
그들 안으로 일해 넣으시고,
그들이
유일한 음식이시자
하늘에 속한 음식이신
그리스도를 먹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조성을 바꾸시어,
하나님의 거처인
교회를 건축할
자격이 있도록 하시려는 것임을
보여 준다.
사실상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로 재조성된 이후에는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
― 고전 3:16-17, 6:19, 고후 6:16,
딤전 3:15, 히 3:6, 계 21:2-3.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육체를
처리하시는 방법은
육체를 제쳐 두고
육체에게
음식을 주시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음식을 바꾸시고,
그들의 육체가 좋아하지 않는
양식을 그들에게 보내신다.
섞여 사는 무리와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하늘에 속한 맛을 지닌
만나에 싫증이 났으며,
세상의 맛을 지닌
이집트의 양식에
탐욕을 부렸다
― 민 11:4-9, 21:5.

이집트 음식은
우리가
만족을 얻기 위해
먹기를 갈망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미국은
이집트 음식,
곧 세상적인 오락에 관한 한
최고의 나라이다.
우리가
갈구하고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존재를 조성한 것과
일치하는 음식이다.

한 면에서
하늘에 속한 만나는
우리에게
자양분을 주고
우리를 치료하며,
다른 면에서는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제거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만나 외에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그리스도 외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욕구와 배고픔을
없애 주시기를
바란다!

만나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
만나가 되었다.
우리의 조성은
그리스도를 먹는 것을 통해
반드시 재조정되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거처인
교회가 건축될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의 음식을 바꾸시어
우리가
그리스도로 재조성되고
하나님의 거처가 되게 하시기를
바란다
― 마 16:18.

음식을 바꾸는 것과 더불어
입맛이 바뀌어야 한다.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없어지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하십시오.”
― 요 6:27.

우리의 만족을 위해
우리가
우리 속에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말하는
양식에 해당한다.
그리스도 자신만이
썩어 없어지지 않는
양식이시다.
이 양식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강화하고
부축해 주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의 양식이다.
우리가
부축과 힘과 만족을
얻기 위해 취하는
유일한 양식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어야 한다.

거듭난 모든 사람은
입맛을 바꾸기 위해
음식을 바꾸어야 한다.
하나님의 의도는
세상적인 음식을 끊어 버리고,
하늘에 속한 양식이신
그리스도라는 음식을 먹도록
우리를 제한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은
나를 만족하게 하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나에게
어떤 만족도 없습니다.
나는 매일
그리스도로 인해
강화되고
부축받습니다.
그리스도는
내가 의존하는
유일한 양식이십니다.”

우리가
부축과 힘과 만족을
얻기 위해 취하는
유일한 양식은 반드시
그리스도여야 하며,
신약의 유일한 한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유일한 양식이신
그리스도를 전달해 준다
― 민 11:5-6, 행 1:17, 25,
고후 4:1, 딤전 1:12, 고후 3:6.

우리는
신진대사적으로 변화되기 위해
우리의 유일한 양식,
곧 우리의 매일의 만나이신
그리스도의 특징들을
알고 체험해야 한다.

만나는
비밀이다
― 출 16:15, 골 2:2, 사 9:6, 엡 3:4, 요 3:8.

‘만나’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표현
‘만 후’에서 유래한 것인데,
‘만 후’는
“이것이 무엇이냐?”
라는 뜻이다
― 출 16:15.

우리가
만나를
분석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 예수님을
분석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참된 만나,
참된 “이것이 무엇이냐?”이시다.

만나는
장기간의 기적이다.
만나는
매일 아침 내렸으며
매일 아침 거두어야 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급을
저장해 둘 수 없으며,
날마다 그리고 아침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양식이신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다함이 없으실 것이다
― 출 16:4, 21, 비교 마 6:34.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한 면에서
주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는 떡’이시며,
또 한 면에서는
‘하나님의 떡’,
곧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의 양식이 되신 분이시다
― 출 16:4, 요 6:32-33, 51.

만나는
이슬과 함께 내렸는데,
이슬은
주님의
신선한 긍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우리를
신선하게 하며 적시는
주님의 은혜를
상징한다.
은혜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신선하게 하시고 적시시는
하나님이다
― 출 16:13-14, 민 11:9, 시 133:3,
애 3:22-23, 히 4:16, 시 110:3.

만나는
아침에 내렸는데,
이것은
만나가
우리가
주님과
살아있는 접촉을
가지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가리킨다
― 출 16:21, 아 1:6하, 7:12,
요 5:39-40, 롬 6:4, 7:6.

만나는
작다.
그리스도는
구유에서 나셨고,
작고 멸시받는 마을의
목수의 집안에서
자라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지 않으셨고,
사람들의 눈에
작게 보이기를
더 좋아하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 출 16:14중, 눅 2:12, 요 6:35,
삿 9:9, 11, 13, 마 13:31-32.

만나가
잘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고르시고 균형 잡히셨으며
우리가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지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 출 16:14, 요 6:12.

만나가
둥글다는 것은
우리의 음식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시고
온전하시며
충만하시고
부족이나 결함이 없으시다는 것을
가리킨다
― 출 16:14, 요 8:58.

만나가
희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깨끗하시고
섞인 것이 없이
순수하시다는 것을
보여 준다
― 출 16:31, 시 12:6, 119:140, 고후 11:3하.

만나가
서리와 같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시원하게 하시고
신선하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죽이신다는 것을
상징한다
― 출 16:14, 잠 17:27.

만나가
고수씨와 같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자라며 번성하는
생명으로 충만하시다는 것을
가리킨다
― 민 11:7, 눅 8:11.

(‘백성이
그것을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은 후
솥에 쪄서’
(민 11:8)
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만나가
단단하다는 것은
우리가
만나이신 그리스도를
거두어들인 후에 반드시
우리의 일상 생활의
환경과 상황 가운데에서
그분을
‘갈고, 찧고, 쪄서’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 고후 1:4, 엡 6:18.

만나의 모양이
베델리엄과 같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밝고 투명하시다는 것을
가리킨다
― 민 11:7, 계 4:6, 8, 겔 1:18.

만나의 맛이
기름에 구운
과자와 같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맛볼 때
그 안에
성령의 향기가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 민 11:8, 시 92:10.

만나의 맛이
꿀로 만든
과자 맛과 같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달콤한 맛을 지니신
분이시라는 것을
상징한다
― 출 16:31, 시 119:103.

만나가
과자를 만들기에 좋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양분이 풍부한
부드러운 과자와 같으시다는 것을
가리킨다
― 민 11:8, 딤전 4:6.

공개된 만나는
우리가
먹지 않았던
만나인 반면에,
감추어진 만나는
우리가
먹고 소화시키고 동화시킨
만나를 가리킨다
― 계 2:17.

“여러분은
이기는 이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여러분은
만나이신 그리스도를
누림으로써
이기는 이가 될 수 있다.
공개된 만나를
먹으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감추어진 만나가
되실 것이다.
이 감추어진 만나가
여러분을
이기는 이로
조성할 것이다.”
― 출애굽기 라이프 스타디, 39장, 490쪽.

우리가
먹고 소화하고 동화시킨
그리스도는 전부
영원한 기념이 되실 것이다.
우리가
영원 안에서
그리스도에 관해
회상할 것에는
두 방면이 있을 것인데,
하나는
우리를
재조성하는 요소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의 방면이고,
다른 하나는
이 우주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거처로 만드는
공급이신
그리스도의 방면이다
― 출 16:16, 32.

금항아리 안에 있는
만나가
하나님의 거처의
초점이었듯이,
우리가 먹은
만나이신 그리스도는 오늘날
하나님의 건축물의
초점이시다
― 히 9:3-4, 엡 4:16, 골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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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출 16:32
… “여호와께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만나를
한 오멜 가득 채워
대대로 보관하여라.
그리하여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게 한
이 양식을
자손들이
볼 수 있게 하여라.’ ”

계 2:17
… 이기는 이에게는
내가
감추어진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것이다. …

감추어진 만나는
이기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공개된 만나는
주님의 백성이
공개적으로
누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감추어진 만나는
세상적인 교회의
타락을 이기는 이들,
곧 그분을
간절히 찾는
이기는 이들을 위하여
남겨진
특별한 몫이다.
교회가
세상의 길을
가는 동안에도
이러한 이기는 이들은
지성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와
거하며,
이 지성소에서
특별한 몫이신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매일의 공급으로
누린다.

여러분은
이기는 이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여러분은
만나이신 그리스도를
누림으로써
이기는 이가
될 수 있다.
공개된 만나를
먹으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감추어진 만나가
되실 것이다.
이 감추어진 만나가
여러분을
이기는 이로
조성할 것이다.
감추어진 만나는 또한
내적인 생명의 법의
요구들을
이룰 것이며,
여러분을
평안 가운데로
이끌어 줄 것이다.
그 결과 여러분은
요한계시록 2장 17절에서 말하는
이기는 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각 사람이
하루에 먹는 양인
만나 한 오멜을
거두어 보관하라고
명령하셨다
(출 16:16, 32).
이것은
우리가
하루에 먹는
그리스도의 양이
우리가
보관할 수 있는
양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분 앞에
어떤 다른 음식을
보관하라고
명령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먹은
그리스도의 양과
동일한 양의
그리스도를 보관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우리가
먹고 체험한 그리스도만이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가 누리는 그리스도는
영원한 기념이
되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체험하고 누리는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조성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사실상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재조성하는 요소,
곧 그들이
재조성되게 하는
요소가 되신다.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념할 가치가 없다.
오직 우리의 조성이 되시는
그리스도만이
영원히 기념할
가치가 있으시다.
우리가
영원히 기념하는 것은
그리스도뿐이다.
대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념이 되실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렇게
만나를 기념하는 것은
참만나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거처를 위한
공급의 근원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를 위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늘에 속한
공급이 되신다.
… 만나의 공급을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은
성막을 건축하게 되었다.
성막은
만나를 공급받고
만나로 재조성됨으로써
하나님의 참된 거처가 된
이스라엘 자손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만나의 공급은 심지어
성막이 되었다.

우리가
영원 안에서
그리스도에 관해
회상할 것에는
두 방면이 있을 것인데,
하나는
우리를 재조성하는
요소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의 방면이고,
다른 하나는
이 우주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거처로 만드는
공급이신 그리스도의 방면이다.
이 두 방면은 분명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취함으로써
우리는
매 집회에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조성 성분으로 누리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거처를
건축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의
이 두 방면은
영원 안에서
기념이 될 것이다.
우리가
영원 안에 있을 때
오늘 우리가 가진 체험을
기억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누렸는지,
하나님의 거처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의 공급으로
어떻게 취했는지를
기억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기념으로 보관된
만나이다.

우리는
그 구약 안에 있는
그 성막과 동일합니다.
깊숙히 안에 있는
우리의 영은
그 지성소입니다.
우리의 영 안에
우리는
하나님의 그 언약궤이신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 의하여
먹히지 않은
그 만나는
그 하늘 아래에,
공개된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그 만나는
우리 안에 감추어진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그 공개된 만나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만나이신
그리스도를
먹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그 감추어진 만나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매일
그 만나에서 먹고 있는
우리 중의 그 사람들에게는,
그 공개된 만나가
그 감추어진 만나가
되고 있습니다.

 

5일

출 16:14
이슬이 스러진 뒤에 보니,
광야 지면에
작고 둥근 것이 있었는데,
마치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잘았다.

요 6: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고, …

시 119:140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사람의 관념과는 반대로
만나는 작았다
(출 16:14중).
사람들은 보통
큰 것을
귀중하게 여긴다.
우리는 자주
주님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작음을
찬양하는 찬송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많은 찬송집을
보아 왔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작음에 대한
찬송은 찾지 못했다.
(당시까지
그리스도의 작음에 대한
찬송이 없었음―역자 주)

건축 재료들은
매우 크지만,
음식은
우리의 입안으로
들어올 정도로
작아야 한다.
우리가 취하는 음식은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아야 한다.
큰 고깃덩어리를 먹으려면,
우리는 먼저
그것을
작은 조각들로
잘라야 한다.

많은 이들이
사복음서를
위대한 사람의
삶의 기록으로 여긴다.
사실상 복음서들은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강조하지 않는다.
물론 주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즉 왕가의 자손이셨다.
그러나 그분은
구유에서 나셨고,
작고 멸시받는 마을의
목수의 집안에서 자라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지 않으셨고,
사람들의 눈에
작게 보이기를
더 좋아하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요한복음 6장에 따르면,
군중은
주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기를
원했지만,
그분은
이렇게
그분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피하셨다.
다음 날 아침에
그분은
돌아오셔서
그분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나타내셨다
(35절).
… 위대한 분이 되는 대신
주님은
우리를 위한
음식이 되기 위해
작은 분이 되기를
원하셨다.

만나는
매우 작고
고르다
(출 16:14).
… 우리의
친절이나 겸손과 같은
미덕조차도
거칠고
균형 잡혀 있지 않을 수 있다.
… 우리는
주 예수님을
우리의 음식으로 취하고
그분의 말씀을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누릴 때
균형 잡힌다.
우리는
작고
고르게 된다.

출애굽기 16장 31절은
만나가 희다고
말한다.
만나는
깨끗하고
섞인 것이 없이
순수했다.
…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만이
순수하다.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분의 말씀을 먹을수록
우리는
모든 섞인 것으로부터
더욱더 정화되고
구원받는다.

매일
주 예수님께 나아가서
그분을
우리 안으로 취하고
그분의 말씀을 먹는다면,
우리는
더욱더 순수하게 되는
정화의 과정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먹는 사람들은
결국 단순해지고
순수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잡하다.
… 단순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주 예수님을
먹는 것이다.
그분을 먹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수록
우리는
더 단순해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단일해지고
순수해진다.

우리의 만나이신
그리스도께 참여할 때,
우리는
순수해지고
단순해질 뿐 아니라
희어지게 된다.
희어지게 된다는 것은
얼룩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 비록 우리가
어떤 면에서
선하다 할지라도
희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의 사랑과 겸손에도
어떤 타고난 색깔이
있을 수 있다.
사실상 우리의 인간 미덕 중에
흰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취할수록
우리의 타고난 색깔은
더 제거되고
우리는
더 희어진다.

만나는
또 서리와 같다
(출 16:14).
서리는
이슬과 눈
중간 단계의 것이다.
이슬과 서리는 둘 다
우리를
신선하게 해 준다.
이슬도
신선하게 해 주지만
세균을 죽이지는 못한다.
그러나 서리는
세균을 죽인다.
만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신선하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죽이신다.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할 때마다
우리는
촉촉해지고
신선해지며,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
예를 들면
우리의 부정적인 태도와 같은 것이
죽게 된다.
우리는
서리의
신선하게 하는 것과
죽이는 것을 모두
체험한다.

세상적인 사람들은 모두
죄악된 즐거움과
세상 오락을 좇는 일에
너무나 뜨겁다.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너무나 뜨겁고
열이 높다.
그들은
진정될 필요가 있다.
… 우리 모두는
서리를 체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떤 일들에서
너무나 뜨겁기 때문에
진정되고 침착해질
필요가 있다.
…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참여할 때,
우리는
서리에 의해
진정되고
신선해진다.

 

4일

출 16:21 그들은 아침마다 각 사람이 먹을 만큼 거두었다. 해가 뜨겁게 내
리쬐면 그것은 녹아 버렸다.

아 7:12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
랑을 네게 주리라

롬 6:4 …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으로 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6장 21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만나를
“아침마다
각 사람이 먹을 만큼
거두었다.”
라고 말한다.
만나가
아침에 왔다는 사실은
그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준다는 것을
가리킨다.
지구는
지축을 중심으로
매일 자전하기 때문에,
날마다 우리는
새로운 시작,
새로운 전환을 가진다.
우리는 또한
매년 혹은 매달,
새로운 시작을 가진다.
그러나 만나는
매년 혹은 매달의 시작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새로운 시작과
관련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매년 만나를 보내셨다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만나가
매달 보내어졌다면,
우리는
강화되거나
부축받거나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매일 만나를 보내시는
주님께 감사드린다.

우리의 영적 체험에서
우리에게는
이러한 매일의 전환,
즉 매일의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
때때로 나는
하루를 마칠 때
다음 날 아침과
새로운 시작을
간절히 기다린다.
잠자리에 들 때, 우리는
“주님,
오늘 밤 휴식을 가진 뒤,
내일 아침에
당신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가지기 원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매일 새로운 날,
새로운 시작이 있음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하자!
만나는 항상
우리에게
이러한 새로운 출발을
가져온다.

우리는 또한
매일의 새로운 시작이
우리에게
신선한 만나를 가져온다고
말할 수 있다.
주님에게서 온
만나를 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주님,
저는
새로운 전환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전처럼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가지기 원합니다.”
아침에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여러분은
이와 같이 기도하겠는가?
만일 여러분이
주님께
새로운 출발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이슬을 체험할 것이고
이슬과 함께 온
만나를 체험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의 바람이
과거를 반복하며
과거와 똑같은 방식으로
사는 것이라면,
만나는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체험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원할 때마다
만나가 온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아침에
주님께 나아가
이렇게 말하자.
“주님,
저는
새로운 시작을 원합니다.
저는
어제와 똑같기를
원치 않습니다.
당신의
주권과 경륜 안에서,
우리에게
일 년 내내
매일
새로운 시작을 주시는 것에 대해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새로운 시작을 갈망하며
주님께 기도한다면,
아침에
만나가
이슬과 함께
올 것이다.

매일 우리는
주님과 함께 전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인격을
대해야 한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이 살아 있는 인격을
접촉해야 한다.
교리나 방법으로
점유되지 말고
우리는
주님 자신을
필사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주님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매일 아침
주님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침에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시간은
전통이나 습관에 따라
행해져서는 안 된다.
몇몇 가정은
습관적으로
일찍 일어나서
성경을 읽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러나
만나를 거두지 않은 채
매일 아침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과의
살아 있는 접촉을
가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인쇄된
글자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과 40절에서
주 예수님은
종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성경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는데,
이 성경은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나에게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주님께 가야 한다.
생명을 얻으려면
주님을 소유해야 한다.

새로운 시작과
만나의 공급을 위해
주님을 추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영 대신
생각을 사용하기가 쉽다.
이것이
우리의 성향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날의 일로
점유되기 전에
먼저
말씀 안에서
주님을 접촉하는 것은
하나의 좋은 습관이다.
… 매일 아침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말씀 안에서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먹는 것이다.

 

3일

요 6:27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없어지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하십시오.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여러분에게 줄 것입니다. …

고전 3:16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하늘에 속한 음식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한다.
성막을 지은 사람들은
이집트인들이 아니었다.
성막을 지은 사람들은
하늘에 속한
조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집트를 떠난 후,
적어도 넉 달째부터
성막을 짓기 시작했다.
이 넉 달 동안
그들의 음식은 바뀌었고,
그들의 조성은
바뀌는 과정,
곧 만나의 요소로
대치되는 과정에 있었다.
만나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
만나가 되었다.
만나로 조성된 그들은
하나님의 거처인
성막을 건축할 수 있었다.
이 그림은
그리스도로 재조성된 사람들만이
오늘날
하나님의 거처인
교회를 건축할
자격이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분의 백성은
만나로 재조성되어야 했다.
이것은
우리의 조성이
그리스도를 먹는 것을 통해
재조정되어야 함을
계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이집트의 음식을
대치하셔야 한다.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로 재조성될
필요가 있다.
성막을 건축한 사람들은
음식이 바뀌는 것을 체험했고
만나의 요소로 재조성되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오직 이런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거처를
건축할 수 있다.
사실상 재조성된 뒤에라야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거처인 것이다.

우리는
무엇에 배고프고 목마르며,
무엇에 식욕이 있는지를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음식은
이집트의 음식에서
하늘에 속한 음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고기 가마, 생선, 오이, 참외,
양파, 마늘, 부추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하늘에 속한
유일한 음식이신
그리스도께로
돌이켜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음식이시라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심지어
우리의
텔레비전, 오락,
음악, 신문, 스포츠이시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우리의 음식을
여러 가지 것에서
오직 하나,
곧 하늘에 속한 만나로 바꾸셨음을
간증할 수 있어야 한다.
… 주님께서
우리의 음식을 바꾸심으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로 재조성되고
하나님의 거처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주 예수님은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없어지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하십시오.”
(요 6:27상)
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해
일하고 있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에는
텔레비전, 스포츠,
음악, 오락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것들에서 얻는 만족은 모두
썩어 없어질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썩어 없어지지 않는
유일한 양식이시다.
이 양식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없어지지 않는다.

양식은
우리의 만족을 위해
우리 안으로 취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
우리가
이 원칙을 이해한다면,
오늘날의
세상적인 양식이
물질적인 양식뿐 아니라
교육, 돈, 지위, 승진,
스포츠, 오락을 포함한,
사람들이 의지해 사는
모든 것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적인 양식과
심리적인 양식은 먹지만,
영적인 양식은
먹지 않는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없어지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대신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해
수고한다.

주 예수님은
참만나이시다.
요한복음 6장에서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추구하고
그분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셨다.
그러나 음식이 바뀔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다.
… 바로 이러한 이유로
출애굽기 16장은
출애굽기 12장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12장에서 우리는
구속된 사람을 보지만
재조성된 사람은 보지 못한다.
14장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은
이집트에서 나왔지만
이집트가
그들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조성에 따르면,
그들은 여전히
이집트인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의 음식을 바꿈으로써
그들의 조성을 바꾸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성막을 건축했을 그 시점에
그들의 음식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조성도
바뀌기 시작했을 것이다.
성막을 건축하고 있었을 때,
그들은
이집트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의 음식은
만나로 이루어졌다.

 

2일

출 16:35
이스라엘 자손은
정착할 땅에 이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
그들은
가나안 땅 경계에 이를 때까지
만나를 먹은 것이다.

민 11:6
그런데 지금은
입맛도 잃었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구나.”

요 6:51상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누구든지
이 떡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먹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음식이 되셔야 하며
우리는
그분으로 인해
살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다른 양식으로 살기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강화하고
부축해 주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의 양식이다.
우리가
부축과 힘과 만족을
얻기 위해 취하는
유일한 양식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을
만족하게 하고
강화하고
부축해 주는
유일한 근원으로
취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들은
다른 것들로
만족하고 부축받고 강화되려고
노력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부축받고 강화되며 만족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음식을 바꾸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의도는
세상적인 음식을
끊어 버리고,
하늘에 속한 양식이신
그리스도라는 음식을 먹도록
우리를
제한하는 것이다.
‘유혹’이나
‘세상을 사랑함’ 등의
표현들이
기독교에서
가볍게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나는
출애굽기 16장의
신성한 계시를 말할 때
그러한 표현들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여러분의 음식에 관해서
묻고 싶다.
여러분은 날마다
무엇을 먹고
살아가는가?
여러분은
자신을
만족하게 하고
부축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무엇을 취하는가?
우리 모두는
이 질문에
직면해야 하고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은
나를 만족하게 하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나에게
어떤 만족도 없습니다.
나는 매일
그리스도로 인해
강화되고
부축받습니다.
그리스도는
내가 의존하는
유일한 양식이십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교육이나 스포츠나 오락과 같은
매우 많은
여러 종류의 양식으로
산다.
… 물질적인 식료품 가게인
슈퍼마켓이 있는 것처럼,
심리적이고 종교적인 식료품 가게인
슈퍼마켓도 있다.
…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구원받지 않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이집트에서
이집트의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았고
이집트에서 탈출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음식을
바꾸려고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집트의
고기 가마 곁에 앉기를
갈망하고,
오이나 참외나
양파나 부추나 마늘을
먹거나
나일강의 생선을
먹기를
갈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음식으로
한 가지 외에
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문제에 직면한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 외의
다른 많은 것들을 먹음으로써
살아가는 문제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좋은 교육을 받으라고
젊은이들을 격려하지만,
교육을 먹음으로써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깨우쳐 주어야 한다.
교육이
우리의
음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열아홉 살에
구원받았을 때부터,
그리스도는
나를 만족시키는 양식이셨다.
나는
어떤 좋은 것들을
얻었지만,
그것들 중 어느 것도
나에게
한 번이라도
만족을 준 적이 없었다.

우리의 양식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주관적인 분이 되시는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으로
우리의 영 안에 내주하신다.
한 면으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주님으로서
하늘에 계신다.
다른 한 면으로
그분은
모든 것을 포함한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신다.
우리는
… 우리의 영 안에 계신
그 영과 교통한다.
… 그분은
주관적으로
우리 안에 계신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주관적인 분이 되시는
주된 목적은
그분께서
우리의
양식과 생명 공급이
되시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양식이 되고
생명 공급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에게
동화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 존재의
조직과 섬유질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 어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우리는
그 음식과 결합된다.
예를 들어,
저녁 식사로
생선을 먹을 때,
나는
그 생선과 결합된다.
같은 원칙으로,
우리의 참 양식이신
그리스도를 먹을 때,
우리는
그분과 결합되고
그분과 한 영이 된다
(고전 6:17).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관적인 분이 되신
그리스도,
우리와
결합되신 그리스도,
우리와
한 영이 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양식,
즉 하늘에 속한 만나이시다.

그리스도를 먹고
그분에 의해 사는 것은
이따금씩 실행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루 스물네 시간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신언노트, 2019 08 25

하늘에 속하는 그 만나의 그 실재이신
하늘에 속하시는 그 그리스도로
우리의 음식을 바꾸어
그 결과 우리가
그리스도로 재구성되어
하나님의 거처가 될 수 있음

하늘에 속하시는 그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의하여 보내진
 하늘에 속하는 그 만나의
 그 실재이셔서
 (is … to be; 그 실재이시고)
그분의 선택된 백성의
 매일의 그 생명 공급이 되십니다:

그분께서
 하늘에서부터 밖으로 내려온
 그 떡이신
 하늘에 속하는 그 떡이십니다.

그분께서
 하나님께 속하시는(is of …),
 하나님에 의하여 보내지셨던(was sent),
 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was with …)
 그 한 분이신
 하나님의 그 떡이십니다.

그분께서
 영원한 생명과 함께하는
 (with …; …을 가지시는),
 곧 ‘조에’를 가지는
 그 떡이신
 생명의 그 떡이십니다;
생명의 그 떡은
 그 떡의 그 본성을 언급하는데,
이는(which is)
 생명입니다;
그것은
 (it; 생명의 떡은)
 또한 “음식을 위하여 좋은
 (good for food; 음식에 알맞은)”
 그 생명 공급인
 (the life supply; 그 생명 보급물인),
 생명의 그 나무와 같습니다.

그분께서
 살아 있는 그 떡이십니다;
이것은
 그 떡의 그 상태를 언급하는데,
이는(which)
 살아 있습니다.

그분께서
 그 참된 떡이십니다;
그분께서
 그 참된 음식이시고,
 또 다른 모든 음식들은 단지
 그 참된 음식이신
 그분의
 그림자들입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그 음식의 그 실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살아 계시는 그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또 내가
 그 아버지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그렇게 나를 먹는 그가,
 그가 또한 나때문에 살 것입니다
 … 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 영이십니다;
그 육체는
 아무것에도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그 말들이(the words)
 영이고
 또 생명입니다”
 (요 6:57, 63):

먹는 것은
 음식이
 우리의 몸 안으로
 유기적으로 동화될 수 있도록
 (may be assimilated; 소화될 수 있도록)
그것을
 우리 안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주 예수님을 먹는 것은
 그분께서
 생명의 그 방식 안에서
 거듭나게 된 그 새사람에 의하여
 동화되실 수 있도록
우리 안으로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에 의해 살 뿐 아니라
 우리의 힘을 주는 요소이시고
 또 공급하시는 요소이신
 그리스도때문에 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그분을 살고,
또 그분을 먹음에 의해
 그리스도를 삽니다.

우리는
 영과 또 생명인
 (of; …에 속하는)
 주 예수님의 말씀들을 먹음,
 곧 모든 기도의 수단에 의해
 그분의 말씀들을 받아들임에 의하여,
우리의 영적인 양식이신
 그분을 먹고,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신
 그분을 받아들입니다:

그분의 말해진 말씀들은
 생명의 그 영의
 그 체현입니다;
그분께서
 지금
 부활 안에 계시는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시고,
또 그 영께서
 그분의 말씀들 안에
 체현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함에 의하여
 그분의 말씀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을 얻습니다
 (get;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음식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민을 위해 보내신
 참된 만나이신
 그리스도라는 음식으로
 바꾸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그분의 선민이
 그리스도로 조성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삶으로
 하나님의 거처가 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
 분별된 광야로 이끌렸을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세상을 상징하는
 이집트의 요소로
 조성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의 백성의 음식을
 바꾸어 줌으로써
 그들의 요소를 바꾸어
 그들의 본성을 바꾸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존재,
 곧 그들의 조성 자체를 바꾸시어,
그들을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로
 조성되고 변화된
 하늘에 속한 백성으로 만들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에게
 오직 만나만 주어
 먹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이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자신을
 그들 안으로 일해 넣으시고,
그들이
 유일한 음식이시자
 하늘에 속한 음식이신
 그리스도를 먹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조성을 바꾸시어,
하나님의 거처인
 교회를 건축할
 자격이 있도록 하시려는 것임을
 보여 준다.
사실상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로 재조성된 이후에는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육체를
 처리하시는 방법은
육체를 제쳐 두고
 육체에게
 음식을 주시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음식을 바꾸시고,
 그들의 육체가 좋아하지 않는
 양식을 그들에게 보내신다.
섞여 사는 무리와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하늘에 속한 맛을 지닌
 만나에 싫증이 났으며,
세상의 맛을 지닌
 이집트의 양식에
 탐욕을 부렸다.

이집트 음식은
 우리가
 만족을 얻기 위해
 먹기를 갈망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미국은
 이집트 음식,
 곧 세상적인 오락에 관한 한
 최고의 나라이다.
우리가
 갈구하고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존재를 조성한 것과
 일치하는 음식이다.

한 면에서
 하늘에 속한 만나는
 우리에게
 자양분을 주고
 우리를 치료하며,
다른 면에서는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제거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만나 외에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그리스도 외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욕구와 배고픔을
 없애 주시기를
 바란다!

만나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
 만나가 되었다.
우리의 조성은
 그리스도를 먹는 것을 통해
 반드시 재조정되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거처인
 교회가 건축될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의 음식을 바꾸시어
우리가
 그리스도로 재조성되고
 하나님의 거처가 되게 하시기를
 바란다.

음식을 바꾸는 것과 더불어
 입맛이 바뀌어야 한다.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없어지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하십시오.”
― 요 6:27.

우리의 만족을 위해
 우리가
 우리 속에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말하는
 양식에 해당한다.
그리스도 자신만이
 썩어 없어지지 않는
 양식이시다.
이 양식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강화하고
 부축해 주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의 양식이다.
우리가
 부축과 힘과 만족을
 얻기 위해 취하는
 유일한 양식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어야 한다.

거듭난 모든 사람은
 입맛을 바꾸기 위해
 음식을 바꾸어야 한다.
하나님의 의도는
 세상적인 음식을
 끊어 버리고,
하늘에 속한 양식이신
 그리스도라는
 음식을 먹도록
 우리를 제한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은
 나를 만족하게 하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나에게
 어떤 만족도 없습니다.
나는 매일
 그리스도로 인해
 강화되고
 부축받습니다.
그리스도는
 내가 의존하는
 유일한 양식이십니다.”

우리가
 부축과 힘과 만족을
 얻기 위해 취하는
 유일한 양식은 반드시
 그리스도여야 하며,
신약의 유일한 한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유일한 양식이신
 그리스도를
 전달해 준다.

우리는
 신진대사적으로 변화되기 위해
 우리의 유일한 양식,
 곧 우리의 매일의 만나이신
 그리스도의 특징들을
 알고 체험해야 한다.

만나는
 비밀이다.

‘만나’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표현
 ‘만 후’에서 유래한 것인데,
‘만 후’는
 “이것이 무엇이냐?”
 라는 뜻이다
 ― 출 16:15.

우리가
 만나를
 분석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 예수님을
 분석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참된 만나,
 참된 “이것이 무엇이냐?”이시다.

만나는
 장기간의 기적이다.
만나는
 매일 아침 내렸으며
 매일 아침 거두어야 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급을
 저장해 둘 수 없으며,
날마다
 그리고 아침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양식이신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다함이 없으실 것이다.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한 면에서
 주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는 떡’이시며,
또 한 면에서는
 ‘하나님의 떡’,
 곧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의 양식이 되신 분이시다.

만나는
 이슬과 함께 내렸는데,
이슬은
 주님의
 신선한 긍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우리를
 신선하게 하며 적시는
 주님의 은혜를
 상징한다.
은혜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신선하게 하시고 적시시는
 하나님이다.

만나는
 아침에 내렸는데,
이것은
 만나가
 우리가
 주님과
 살아있는 접촉을
 가지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가리킨다.

만나는
 작다.
그리스도는
 구유에서 나셨고,
작고 멸시받는 마을의
 목수의 집안에서
 자라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지 않으셨고,
사람들의 눈에
 작게 보이기를
 더 좋아하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만나가
 잘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고르시고 균형 잡히셨으며
 우리가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지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만나가
 둥글다는 것은
 우리의 음식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시고
 온전하시며
 충만하시고
 부족이나 결함이
 없으시다는 것을
 가리킨다.

만나가
 희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깨끗하시고
 섞인 것이 없이
 순수하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만나가
 서리와 같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시원하게 하시고
 신선하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죽이신다는 것을
 상징한다.

만나가
 고수씨와 같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자라며 번성하는
 생명으로 충만하시다는 것을
 가리킨다.

(‘백성이
 그것을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은 후
 솥에 쪄서’
 (민 11:8)
 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만나가
 단단하다는 것은
 우리가
 만나이신 그리스도를
 거두어들인 후에 반드시
 우리의 일상 생활의
 환경과 상황 가운데에서
그분을
 ‘갈고, 찧고, 쪄서’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만나의 모양이
 베델리엄과 같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밝고 투명하시다는 것을
 가리킨다.

만나의 맛이
 기름에 구운
 과자와 같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맛볼 때
 그 안에
 성령의 향기가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만나의 맛이
 꿀로 만든
 과자 맛과 같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달콤한 맛을 지니신
 분이시라는 것을
 상징한다.

만나가
 과자를 만들기에 좋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양분이 풍부한
 부드러운 과자와 같으시다는 것을
 가리킨다.

공개된 만나는
 우리가
 먹지 않았던
 만나인 반면에,
감추어진 만나는
 우리가
 먹고 소화시키고 동화시킨
 만나를 가리킨다.

“여러분은
 이기는 이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여러분은
 만나이신 그리스도를
 누림으로써
 이기는 이가 될 수 있다.
공개된 만나를
 먹으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감추어진 만나가
 되실 것이다.
이 감추어진 만나가
 여러분을
 이기는 이로
 조성할 것이다.”
― 출애굽기 라이프 스타디, 39장, 490쪽.

우리가
 먹고 소화하고 동화시킨
 그리스도는 전부
 영원한 기념이 되실 것이다.
우리가
 영원 안에서
 그리스도에 관해
 회상할 것에는
 두 방면이 있을 것인데,
하나는
 우리를
 재조성하는 요소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의 방면이고,
다른 하나는
 이 우주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거처로 만드는
 공급이신
 그리스도의 방면이다.

금항아리 안에 있는
 만나가
 하나님의 거처의
 초점이었듯이,
우리가 먹은
 만나이신 그리스도는 오늘날
 하나님의 건축물의
 초점이시다.

 

우리는
그 구약 안에 있는
그 성막과 동일합니다.
깊숙히 안에 있는
우리의 영은
그 지성소입니다.
우리의 영 안에
우리는
하나님의 그 언약궤이신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 의하여
먹히지 않은
그 만나는
그 하늘 아래에,
공개된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그 만나는
우리 안에 감추어진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그 공개된 만나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만나이신
그리스도를
먹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그 감추어진 만나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매일
그 만나에서 먹고 있는
우리 중의 그 사람들에게는,
그 공개된 만나가
그 감추어진 만나가
되고 있습니다.

1일

요 6:32-33
… 하늘에서 오는 참떡을
여러분에게 주시는 분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이입니다.”

요 6:48
나는
생명의 떡입니다.

요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57절에 있는
‘말미암아(because of)’라는 말은
어떤 요인이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흠정역”에서 사용한)
‘의해서(by)’라는 말은
요인이 아닌
수단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기 위한
수단이시라는 것을
함축한다.
이것은
지팡이가
걷는 데 사용되는 것과 같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행함의
요인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수단으로 취하여
그리스도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의 요인으로 취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수단이 아니라
공급하는 요인이다.
우리는
음식에 의해서 살지 않고
음식으로 말미암아 산다.
음식은
우리에게
공급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음식의 공급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다.
걷기 위한 수단으로
지팡이를 사용하는 데는
지팡이를 먹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음식으로 말미암아
살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먹지 않으면
음식은
우리의 삶의
요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살며,
그분을 먹음으로
그리스도를 산다.
먹는 것은
우리의 존재 안으로
어떤 요인을
가져온다.
아침에
좋은 식사를 할 때,
우리가 받아들인 영양분은
우리에게
힘을 준다.
힘을 주는
그리스도의 요소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살게 하는
공급이며 요인이다.

요한복음 6장은
생명의 떡이신
주 예수님에 관한
세부 사항들을 보여 주는
특별한 장이다.
… 생명의 떡(35, 48절)이신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41, 50-51, 58절)이시고,
하나님의 떡(33절)이시며,
살아 있는 떡(51절)이시고,
참떡(32절)이시다.
여기에
우리의 떡이신
주님의
다섯 가지 특성,
곧 하늘에 속한 떡,
하나님의 떡,
생명의 떡,
살아 있는 떡,
참떡이 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서
하늘에 속한 떡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속하시고,
하나님의 보냄을 받으셨으며,
하나님과 함께하셨던 분으로서
하나님의 떡이시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
곧 ‘조에(zoe)’를 가진
떡으로서
생명의 떡이시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분으로서
살아 있는 떡이시다.
‘생명의 떡’은
떡의 본성을 가리키는데,
이 본성은 바로
생명이다.
‘살아 있는 떡’은
떡의 상태를 가리키는데,
이 떡의 상태는
살아 있다.
그리스도는
참떡으로서
진리 또는 실재의 떡이시다.
그리스도는
참되시며 실재이시다.
그분은
참양식이시고
다른 모든 음식은
참된 양식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우리가 매일 먹는
물질적인 양식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우리가 매일 먹는
양식의 실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생명의 떡이시다.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오늘날
이 떡은 단지
육체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신
그리스도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주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 영이십니다.
육체는 무익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한 말이
영이요 생명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 여기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주셔서 먹게 하시는 것이
그분의 물질적인 몸의
살이 아니며,
살인 육체는
무익하다고 설명하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다.

여기에서
‘말’은
그 영 다음에 온다.
그 영은
살아 계시고
참되시지만,
비밀스럽고
손으로 만질 수 없으며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구체적이다.
먼저 주님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 영이 되실 것임을
시사하셨다.
그다음으로 그분은
자신이 하시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분께서 하신 말씀은
생명 주시는 영의
체현임을 가리킨다.
그분은
지금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시며,
이 영은
그분의 말씀 안에
체현되신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함으로
그분의 말씀을 받을 때,
우리는
생명이신
그 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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