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기는 이스라엘이 포로 된 데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역사이고, 느헤미야기는 예루살렘성의 성벽을 재건하는 역사이다.
예루살렘성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집을 위한 안전장치이자 보호물이었다.
이것은 땅 위의 하나님의 거처와 가정인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져야 함을 상징하는데, 이 왕국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을 수행하시도록, 하나님의 행정을 위하여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권익을 보호하는 영역이다.
하나님의 집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교회를 회복하시는 것의 예표이고, 예루살렘성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왕국을 회복하시는 것의 예표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집을 건축하시는 것과 그분의 왕국을 건축하시는 것은 함께 이루어진다.
느헤미야기의 첫 번째 부분인 1장부터 7장까지는 느헤미야의 인도 아래 예루살렘성의 성벽을 재건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허물어졌고 성문들이 불에 타 버렸다는 보고를 받았다.
느헤미야기 2장 9절부터 16절까지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여정을 떠나 예루살렘 성벽의 상황을 직접 돌아본 것에 대해 말한다.
느헤미야기 2장 17절부터 20절까지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에 관한 말씀이다.
성전은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섬기는, 주님의 임재가 있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 장소는 보호가 필요하다.
성벽은 성전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성벽이 없다면 보호가 없다.
성벽은 보호를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분별을 위한 것이다.
느헤미야기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성벽에서 자신의 부분을 건축해야 함을 말해 준다. 모두가 자신의 부분을 건축해야 한다.
우리는 내재적으로 느헤미야의 본을 따라 ‘성벽을 건축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의 거처인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를 건축해야 한다.
성벽을 건축하는 목적은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 아래 생활하면서 합당한 질서 안에 있도록 우리 모두를 이끄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단체적으로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자 개별적으로 모든 믿는 이들의 머리이시다. 그분은 직접적으로 우리 각 사람의 머리이시다.
교회생활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유일한 머리의 권위 아래 통일되는 생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유일한 머리의 권위를 존중한다면, 이때 주님의 회복 안에서 교회는 집일 뿐 아니라 성일 것이다.
집인 교회는 주로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관계있고, 성인 교회는 주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관계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릴 때 우리는 집인 교회를 갖는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유일한 머리의 권위를 인식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징하는 성으로 확대될 것이다.
성인 교회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건축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로 건축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머리가 되셔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유일한 머리의 권위를 존중한다면, 교회는 왕과 그분의 왕국을 위해 집에서 성으로 확대될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다른 가르침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 성벽을 건축해야 한다.
다른 가르침들이란 하나님의 경륜의 노선에 있지 않은 가르침들을 가리킨다.
디모데전서 1장 3절과 4절, 6절과 7절, 6장 3절부터 5절까지, 20절과 21절에 나오는 다른 가르침들과 4장 1절부터 3절까지에 나오는 이단들은 교회가 타락하고 하락하며 쇠퇴하는 것의 씨 곧 근원이다.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건축물을 허물고 하나님의 경륜을 무효화한다. 심지어 조금만 다르게 가르쳐도 회복을 파괴한다.
한 지방에 있는 교회를 관리하고 목양하기 위해 첫째로 필요한 것은 의견을 달리하는 이들의 다른 가르침들을 끝내는 것이다. 그러한 가르침들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 노선에서 빗나가게 한다.
우리는 다른 가르침들을 피하고,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에 집중해야 한다.
교회 안에 성벽이 건축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건축하는 일을 파괴하도록 원수가 사용하는 이들로부터 보호받을 것이다.
신성한 건축물을 파괴하는 이들은 이단들을 전하고 가르치는 이들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 이단들을 가르치는 이들은 적그리스도들이다. 그들은 주인이신 주님의 인격과 또 믿는 이들을 값 주고 사신 주님의 구속을 모두 부인한다.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심각한 이단이다.
사도는 믿는 이들이 이단의 영향을 받아 진리의 일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그들 자신을 위하여 깨어 있으라고 경고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신 것과 그리스도의 신격의 존재를 부인하는 이들을 반드시 거절해야 하며,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아야 한다.
신성한 건축물을 파괴하는 이들은 당파적이고 종파적인 사람들이다.
당파적인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따라 교회 안에서 무리를 형성하여 분열을 일으키는, 이단적이고 종파적인 사람이다. 교회 안에서 좋은 질서를 유지하려면, 당파적이고 분열적인 사람은 한두 번 권고한 후에 거절하고 멀리해야 한다.
이렇게 분열적인 것은 전염성이 있다. 따라서 이렇게 분열적인 사람들을 거절함으로 분열적인 사람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신성한 건축물을 파괴하는 이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이들이다.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교리나 실행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로마서 16장 17절에서 바울은 굽히지 않고 단호하게 “여러분이 배운 가르침을 거슬러서 분열을 일으키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들을 주의하여 살펴보고 그들에게서 떠나십시오.”라고 말했다.
주님은 ‘형제들 사이에 다툼을 일으키는 사람’을 미워하신다.
신성한 건축물을 파괴하는 이들은 지위를 얻으려는 야심이 있는 이들이다.
우리는 주님을 위한 어떤 일에서도 으뜸이 되기를 결코 꾀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다른 이들과 경쟁하여 으뜸이 되려는 감추어진 야심에 속한 음흉한 일이다.
신성한 건축물을 파괴하는 이들은 양 떼를 아끼지 않는 이리와 같은 이들이고, 믿는 이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이들이다.
성벽이 건축된 후에, 우리는 교회에 대한 죽음의 공격에 저항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사탄의 일의 특징이다. 사탄의 일의 최종 목표는 죽음이 사람 안에 완전히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18절은 교회에 대한 공격이 어떤 근원에서 올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데, 그 근원은 바로 ‘음부의 문들’ 곧 죽음이다.
사탄의 특별한 목적은 교회 안에 죽음을 퍼뜨리는 것이며, 교회와 관련하여 그가 가장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가 그의 죽음의 세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 반석’ 위에 건축된 교회는 죽음과 생명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으며, 음부의 문들은 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처음과 마지막이신 분, 곧 항상 존재하시고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죽은 적이 있었지만 다시 사신 분, 곧 부활이신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서만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본성은 부활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된 새 창조물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 안에 있고, 부활의 실재는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이다.
부활의 원칙은 타고난 생명이 죽음당하고 신성한 생명이 일어나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타고난 생명에 의해 살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살 때, 우리는 부활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생활의 결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자라고 건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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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죄와 죽음은 사탄의 ‘동역자들’이다. 죽음을 퍼뜨리는 사람은 사탄과 협력하는 사람이다. 사탄의 목표는 사람이 죄를 짓고 타락하게 하는 것뿐 아니라 또한 사람이 죽음에 묶이게 하는 것이다. 죽음은 사탄의 일의 특징이다. 사탄의 일의 최종 목표는 죽음이 사람 안에 완전히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집회는 인수가 많아야 좋은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집회에서 반드시 죽음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삼키고 생명을 해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이 없음을 보아야 한다. 이와 동시에 생명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죽음이 가장 추악한 것이고, 생명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이다. 생명은 어떤 교리가 아니다. 생명은 흥분하는 것이나 좋은 느낌도 아니다. 생명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하나님의 풍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풍성의 증거이기 때문에, 교회의 특징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특징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특징은 바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라는 말씀으로 압축될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그릇이 된 목적은 바로 이 생명과 부활을 표현하는 것이다. 교회는 생명으로 충만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생명이며, 사탄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바로 죽음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주된 목적은 사람이 생명을 얻게 하는 것, 곧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요 10:10).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고 부활이시며, 교회는 이 생명과 부활의 그릇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그릇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풍성을 분배하신다.
오늘날 하나님의 목표가 교회이기 때문에, 사탄은 명확하게 교회를 겨냥하여 공격한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이나 교회를 유혹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반드시 죄나 세상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너무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여전히 사탄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십 센티미터나 되는 병 입구를 이 센티미터의 병마개로 막을 수 없다. 단지 죄와 세상만 처리하는 것으로는 사탄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 사탄의 궁극적인 무기는 바로 죽음이며, 사탄은 죽음으로 교회를 공격한다. 죽음은 그리 쉽게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은밀히 교회 안에 기어들어 올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탄이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세상이나 죄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더럽고 기만하는 죄들뿐 아니라 도덕적이고 세련된 것들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탄은 죽음에 속한 이러한 일들을 이용하여 손쉽게 교회를 공격한다.
마태복음 16장 18절은 주님의 교회의 기초가 반석이신 그리스도이고 음부의 문들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음부가 곧 죽음이다. 죽음이 교회를 이기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교회가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건축된다면, 죽음과 생명의 차이를 분별할 것이며, 음부의 문들은 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좋은 교리나 좋은 신학이나 훌륭한 성경 해석이 아니다. 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 곧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다. 어떤 교리나 사상이나 신학이나 성경 해석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대치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온 것만이 음부의 문들을 이길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죽음이 변장한 형태에 불과하며, 사탄의 공격을 이겨 낼 수 없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죽음을 만지지 않고 죽음을 교회 안에 가져오지 않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생명으로 채우시고, 사탄이 교회를 공격할 틈을 찾지 못하게 하시기를 바란다.
5일
건축물에 관하여 한 범주로 분류되는 부정적인 사람들, 곧 신성한 건축물을 파괴하는 이들이 있다. 신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일곱 종류의 파괴하는 이들이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중심적인 가르침 이외의 것들을 강조함으로써 분열적인 가르침의 바람을 일으키는 이들이 있다. 둘째로, 이단들을 전하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다. 셋째로, 당파적이고 종파적인 사람들이 있다. 넷째로, 분열을 일으키는 이들이 있다. 다섯째로, 지위를 얻으려는 야심이 있는 이들이 있다. 여섯째로, 양 떼를 아끼지 않는 이리와 같은 이들이 있다. 일곱째로, 믿는 이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이들이 있다.
많은 이들이 원수에게 선동되어 교회의 건축을 파괴하려고 애쓴다.
분열을 일으키는 이들에게서 떠나는 것(비교 롬 16:17)은 파괴적인 혼돈을 정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는 보존될 것이며, 우리는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가 이런 사람들의 분열적인 말을 듣는 데 열려 있다면, 우리 안에 독이 주입될 것이다. 이 독은 우리가 회복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 것이고, 회복에 대한 우리의 사기를 약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교회 집회들에 참석하는 데 냉담해질 것이고, 〈회복역 성경〉과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들을 읽는 데 냉담해질 것이다. 디모데후서의 주제는 교회의 하락에 대한 예방접종이다. 우리가 반역과 분열이라는 사탄적인 혼돈의 세균에 대항하여 보존되려면 그러한 예방접종이 필요하다.
우리는 야심을 경계해야 한다. 야심은 형편없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야심이 있다. 야심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동역자와 장로로 섬기기 위해 나왔다면 결코 자신의 야심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 심지어 우리는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야심을 갖도록 양육한다. 야심이 없다면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것이고 학교를 졸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역자와 장로로서 자신의 책무를 다해야 할 때, 여러분은 야심을 가져오지 말아야 한다. 야심은 동역자와 장로인 여러분의 책무를 무가치하게 만든다. 여러분에게 야심이 있다면 그 즉시 여러분은 끝난 것이다.
순수한 마음은 주님의 회복 안에서 의도나 목적이나 동기나 행동에서 어떤 형태의 간교한 야심도 없는 정결하게 된 마음이다. 여러분이 동역자나 장로로서 책무를 다하려면 이러한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교회 안에서 유용한 몇몇 형제들은 겉으로는 겸손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높아져 있다. 그것이 바로 간교한 야심이며 그들의 진보를 막는 작은 여우이다. 주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더 이상 어떤 것도 주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에게 무언가를 더 주신다면 그가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야심이 없이 겸손한 이들만이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고, 주님께 은사들을 받을 수 있으며, 주님의 사역을 위임받을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종종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책임을 지도록 안배할 필요가 있다. 안배를 받지 못한 이들은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그들의 목소리나 표정에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내적으로 그들은 침체되고 기쁘지 않다. 이것은 다른 이들과 경쟁하여 으뜸이 되려는 감추어진 야심에 속한 음흉한 일이다.
4일
신약의 계시와 사도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것이다. 디모데전서 1장 3절과 4절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 하나님의 신약 계시를 개괄하는 용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무르라고 권유하였다. 그것은 디모데가 어떤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다른 것들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문맥에 따르면, 다른 가르침들이란 하나님의 경륜의 노선에 있지 않은 가르침들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신약의 계시에 근거해 가르치기는 했지만 족보와 율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의 경륜은 신약의 계시이며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유일하고 완전하고 온전하다. 어떤 것을 그것에 더하거나 그것에서 제할 수 없다. 그것에서 무언가를 뺀 것은 부족한 것이고, 그것에 무언가를 더한 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가르침이다.
바울은 혼란스러운 환경 속에서 그리고 동역자들과 오랫동안 함께 일한 후에 디모데전서를 썼다. 이 서신은 전적으로 예방접종이다. 그렇지만 이 서신의 서두에서 바울은 우리가 매우 엄중하다고 생각할 만한 방식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다른 것들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딤전 1:3)라는 이 말은 매우 단순하게 보인다. 우리는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실상 이것은 심각한 것 이상이다.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사람들을 죽인다.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건축물을 허물고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무효화한다. 우리 모두는 심지어 조금만 다르게 가르쳐도 회복을 파괴한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말 한 마디가 나라를 세우기도 하고 나라 전체를 망하게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한 메시지를 다 전할 필요도 없다. 단지 우리 자신의 관념을 전하는 한 문장만 말해도 모든 것을 허물어뜨릴 수 있다. 우리는 사역이 ‘무시무시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말이 파괴하고 죽이며 무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 교사들이 가르쳐야 하는 유일한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해 볼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장로회, 물에 잠기게 하는 침례, 감리 제도, 성결, 복음 전하는 방법, 성경을 가르치는 방법 등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유대교의 방식을 가르치는 것이 확실히 잘못된 것임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 전하는 것에 대해 가르치는 것까지도 분열을 초래할 수 있음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오직 하나의 사역만이 조금도 파괴하지 않으며, 항상 건축하고 함양하며 온전하게 한다. 신약성경에서 옳다고 입증되고 권장되며 높여지고 심지어 영광을 얻은 유일한 사역이 있다. 계속해서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4절에서 다르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무엇으로 점유되어야 하는지 말해 주었다. 그러한 이들은 바로 하나님의 경륜으로 점유되어야 했다. 오직 하나의 사역만이 항상 건축하고 결코 파괴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성경적으로 가르치기만 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확신하지 말라. 성경적으로 가르친다고 해서 괜찮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가르침도 분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계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단지 올바르기만 한 가르침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가르치는 가르침을 원한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왜 같은 것을 말하라고 간청했는지를(1:10)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을 옳고 그름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분열적인지 분열적이지 않은지로 평가해야 한다. 오직 한 종류의 사역만이 건축하며 결코 분열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 사역은 바로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유일한 사역이다.
3일
성경의 마지막 두 장에는 한 보좌가 있는 한 성이 있다. 보좌에서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고, 강의 이쪽과 저쪽에 생명나무가 자란다. 보좌에서 생명이 흘러나온다.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보좌는 무엇인가? 이것은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와 권세와 왕권과 지배 권위이다. 우리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깨닫기는 쉽지만,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깨닫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조금 알지만,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신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과 머리 둘 다이심을 분명하게 말한다. 요한복음은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고, 서신서들 특별히 골로새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이심을 말한다.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두 가지 주요 항목, 곧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머리이신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깨닫고 누릴 때, 우리에게 집으로서의 교회가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더 나아가 그분의 머리의 권위를 깨닫는다면, 교회는 성으로 확대될 것이다. 그럴 때 교회는 보호받을 것이다. 집에 침입하기는 쉽지만, 성의 성벽을 통과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성은 집의 보호물이다.
우리는 모두 지금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누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있는 지방의 교회에서 밀월을 누리고 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은 매우 행복함을 느낀다. 하지만 조만간에 이 밀월은 끝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어떤 형제들에 대해서 그렇게 기쁜 느낌이 없을 것이고, 교회가 우리에게 그렇게 즐거운 곳이 아닐 것이다. 바로 이때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누림이 필요할 뿐 아니라 머리의 권위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를 깨닫는 바로 그때에 성벽이 건축될 것이다.
성벽은 보호를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분별을 위한 것이다. 성벽은 분별하는 선이다. 창세기 2장에는 성벽이 없는 동산이 있었다. 그래서 기어 다니는 자인 원수가 기어들어 오기가 쉬웠다. 그런데 성경의 끝에는 성벽의 높이가 백사십사 규빗인 성이 있다. 그것은 십이 곱하기 십이, 즉 영원한 완전의 숫자이다. 속된 것에서 거룩한 것을 분별시키는 완전한 성벽이 있다. 속된 것은 어떤 것도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분별하는 성벽은 규정들이 아닌 변화된 보석들로 건축된다. 새 예루살렘은 진흙 덩어리들이 아닌 변화된 돌들로 건축된 성이다. 진흙으로 된 벽돌은 하나도 없다. 분별하는 성벽은 변화된 돌들로 건축된 것이다. 우리가 변화되면 될수록 더 많이 분별되고, 결국 변화는 분별하는 선이 된다. 우리가 신뢰하는 것은 생명 안에서의 성장과 변화이다. 변화는 분별하는 선이다. 우리에게는 규정이 없지만 변화시키는 생명이 있다. 주님을 찬양하자! 이 변화시키는 생명이 많은 분별을 가져올 것이다.
새 예루살렘의 성벽에는 규정에 속한 것이 전혀 없고 오직 변화된 보석들로 이루어진 건축만이 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 있는 모든 절을 기도로 읽는다면, 생명의 흐름, 생명을 먹고 마시는 것, 생명에 의한 변화 등과 같은 생명과 관련된 아주 많은 것들을 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변화로 말미암아 성벽이 건축된 교회이다.
이 때문에 원수는 성벽의 건축을 미워한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 성벽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안전이나 보호 또는 방어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성벽의 건축이 필요하다. 즉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를 깨닫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2일
각 지방에 있는 많은 교회들에는 집 안에서 참으로 생명을 누리는 것이 있지만, 성의 방면에서는 여전히 성벽의 몇 군데에 무너진 곳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에스라 다음에 성벽의 건축을 위하여 느헤미야가 필요하다. 원수는 성전을 건축하는 것보다 성벽을 건축하는 것을 훨씬 더 싫어한다. 원수는 집을 건축하는 것은 망가뜨릴 수 있지만, 일단 성의 건축이 완성되면 집을 보호하는 방어물인 성벽이라는 보호 장치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결국 장기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벽을 건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머리가 되셔야 하며, 우리의 누림이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권위가 되셔야 한다. 오늘날 미국에서 왜 그렇게 이혼이 많은가? 그것은 사람들이 단지 결혼의 누림만을 원할 뿐, 머리의 권위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부는 행복하다고 느낄 때 결혼 생활을 누린다. 하지만 서로에 대해 불편하게 느끼면 이혼한다. 만일 그들이 결혼 생활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머리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들에게 이혼은 없을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머리의 권위 아래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우리는 신성한 권위 아래 있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생명과 머리의 권위를 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집을 가질 뿐 아니라, 튼튼하고 높은 성벽이 있는 성을 가질 것이다.
내가 나의 주님의 머리의 권위를 깨달았다면, 나와 다른 성도들 사이에 기쁨이 있든지 없든지, 나는 단순히 그들과 하나가 된다. 즉 나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나는 그분의 생명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의 머리의 권위 아래 있다. 나는 머리의 권위를 보고, 그 머리의 권위 아래 있다. 성의 실지적인 건축은 모든 형제자매들을 도와서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만 있고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를 전혀 모른다면, 성벽에는 무너진 곳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집인 교회를 건축할 수 있다. 그러나 성인 교회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를 깨달아야 한다. 집일 뿐 아니라 성인 교회를 얻으려면, 반드시 더 전진하여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의지가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 아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훈련하고 새롭게 하며 변화되게 해야 한다. 우리의 의지는 반드시 머리이신 분께 복종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자리를 잡을 것이다. 우리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로 표현되는 몸의 지체들로서 기꺼이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 아래에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성벽에서 우리가 맡은 부분을 건축할 것이며, 그러면 무너진 곳이 없게 될 것이다.
느헤미야기는 각자가 반드시 성벽에서 자신의 부분을 건축해야 함을 말해 준다. 나는 여러분을 대신하여 건축할 수 없고, 여러분도 나를 대신하여 건축할 수 없다. 모두가 자신의 부분을 건축해야 한다. 성벽의 건축에서는 그 일이 주로 더 강한 사람들과 관계되는데, 왜냐하면 그 일이 싸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다. 내가 그것을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여전히 나는 성벽을 건축해야만 한다. 그것이 쉽든지 어렵든지 나는 변함없이 그것을 해야 한다.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나는 성벽이 건축될 수 있도록, 반드시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에 나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
각 지방에 있는 모든 교회들에게는 성벽의 건축이 필요하다. 우리가 각 지방에 있는 교회가 몸의 표현임을 보았다면, 이어서 우리는 몸이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 아래 있음을 보아야 한다. 지체들인 우리는 이 머리의 권위 아래 있다.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우리는 모두 당연히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성벽이 건축될 것이다. 성벽은 성을 구성하고, 성은 예표상으로 왕국 곧 통치를 상징한다. 주님은 집에 계시지만, 왕은 왕국을 위한 성에 계신다.
신언노트, 2023 03 12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건축함
하나님의 집인
그 교회의 보호를 위해
그 도시의 담을 건축함
집과 성의 건축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중심이다.
이 건축은 다만
하나님과 사람의
섞임이다(연합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때,
그것이 곧 섞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다.
이 연합이 확장되고
가장 충만한 정도까지
완결될 때,
그것이 곧 그 도시이다.
그래서 그 도시는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 건축물,
곧 상호 거처가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과의
우주적이고도, 영원한
그 섞임이다.
우리는
그분의 거처이고,
그분은
우리의 거처이시다.
작은 규모로는
이것이 그 집이고,
큰 규모로는
이것이 그 도시이다.
신약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심을 말하지만,
결국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이심을 말한다.
우리가
생명이신 그리스도만을
체험하고
아직 우리의 머리이신 그분을
그다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가
‘그 집인 그 교회’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아직 그 도시는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머리이심을 깨닫는 때,
그때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단계의 확장을
가지실 것이다.
그때 그 교회가
그 집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도시일 것이다.
그 집은 주로
그 생명과 함께 있고,
그 도시는 주로
그 머리와 함께 있다.
그 성전을 건축함을
회복함 후에,
여전히 그 도시를 건축할
필요가 있다.
그 도시 없이는
그 성전을 위한
보호가 없다.
그 성전은 완전하다;
그것은
주님의 임재의 장소이고,
거기에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또 섬긴다;
그러나 그것은
보호를 필요로 한다.
그 도시의 벽은
그 성전에 대한 방어이다.
그 도시의 벽이 없이는,
보호가 없다.
이것은 신약에서
우리가 반드시
적용해야 하는 예표이다.
신약성경에서
교회의 건축은
복음서들에서 처음 언급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선포한 후에,
베드로는
교회가 건축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 다음에
교회가 나온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한 이후에
교회가 존재하게 된다.
동시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왕국의 열쇠들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에 뒤이어서
왕국이 나온다.
이 세 가지가
꼭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그 반석이신 그리스도와
그 교회와
또 그 왕국이다.
그리스도는
체험되셔야 하고,
그 교회는
건축되어야 하며,
그때 그 왕국이
도래할 것이다.
서신서들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두 장에는
한 도시가 있다.
그 도시 안에는
성전이 없는데,
그것은
그 도시가
그 성전의 확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신성하고 또 영원한
그 중심이시다.
그분께서
내 안으로,
여러분 안으로,
다른 많은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실 때,
거기에
그리스도의 증가가 있다.
그리스도의 이 증가가
그 교회이다.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확장이며
그리스도의 증가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부분들이며
또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다.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아주 많은 지체들 안으로
증가되셨고
확장되셨기 때문이다.
그 도시는
더 나아간
그리스도의 확장이다.
그리스도의 확장의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이다.
이 확장의
두 번째 단계도
그 교회인데,
이것은
그 집이 아닌
그 도시인
그 교회이다.
그 집인 교회는 반드시
그 도시인 교회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 도시는
그 집보다
더 크고
더 안전한
어떤 것이다.
결국에는
그 집 전체가
그 도시가 된다.
요한계시록 21장 22절은
그 도시 안에 더 이상
성전이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성전이
그 도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도시는
그 성전의 확장,
즉 그 집의
극도의 발전이다.
에스라기는
이스라엘이
포로 된 데서 돌아와
그 성전을 재건하는 역사이고,
느헤미야기는
예루살렘 시의
성벽을 재건하는 역사이다.
예루살렘 시는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집을 위한
안전장치이자
보호였다.
이것은
땅 위의
하나님의 거처와 가정인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져야 함을
나타내는데,
이 왕국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을 수행하시도록,
하나님의 행정을 위하여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이익을
보호하는 영역이다.
하나님의 집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한(강등된) 교회를
회복하시는 것의
예표이고,
예루살렘성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왕국을 회복하시는 것의
예표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집을 건축하시는 것과
그분의 왕국을 건축하시는 것은
함께 이루어진다.
느헤미야기의 첫 번째 부분인
1장부터 7장까지는
느헤미야의 인도 아래
예루살렘 시의
성벽을 재건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허물어졌고
성문들이 불에 타 버렸다는
보고를 받았다.
느헤미야기 2장
9절부터 16절까지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여정을 떠나
예루살렘 성벽의 상황을
직접 돌아본 것에 대해
말한다.
느헤미야기 2장
17절부터 20절까지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에 관한 말씀이다.
그 성전은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섬기는,
주님의 임재가 있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 장소는
보호가 필요하다.
그 도시의 벽은
그 성전에 대한 방어이다.
그 도시의 벽이 없이는,
보호가 없다.
각 지방에 있는 많은 교회들에는
그 집 안에서
참으로 생명을 누리는 것이 있지만,
그 도시에 관한 한,
그 성벽 안에 여전히
틈들이(구멍들이, 무너진 곳들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에스라 다음에
성벽의 건축을 위하여
느헤미야가 필요하다.
원수는
성전을 건축하는 것보다
성벽을 건축하는 것을
훨씬 더 싫어한다.
원수는
그 집의 건축은
파괴될 수 있지만,
일단 그 도시의 건축이 완성되면
한 방어물인 그 성벽이라는
보호 장치가 있어서
그 집을 보호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결국 장기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벽을 건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 되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머리가 되셔야 하며,
우리의 누림이 되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권위가 되셔야 한다.
오늘날 미국에서
왜 그렇게
이혼이 많은가?
그것은
사람들이 단지
결혼의 누림만을 원할 뿐,
머리의 권위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부는
행복하다고 느낄 때
결혼 생활을 누린다.
하지만 서로에 대해
불편하게 느끼면
이혼한다.
만일 그들이
그 결혼 생활 안에 있을 뿐 아니라
그 머리이심(머리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들에게
이혼은 없을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머리의 권위 아래서는
우리에게
어떤 선택도 없다.
우리는
그 신성한 권위 아래 있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생명과
머리의 권위를
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한 집을 가질 뿐 아니라,
강하고 높은
한 성벽이 있는
한 도시를 가질 것이다.
내가
나의 주님의
머리의 권위를 깨달았다면,
나와 다른 성도들과
행복하든지 또는 그렇지 않든지,
나는 단순히
그들과 하나이다;
즉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는
그분의 생명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의 머리의 권위 아래 있다.
나는
머리의 권위를 보고,
그 머리의 권위 아래 있다.
그 도시의 실지적인 건축은
모든 형제자매들이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를 깨닫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만 있고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를
전혀 모른다면,
그 성벽에는
무너진 곳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그 집인 그 교회를
건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도시인 교회를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를
깨달아야 한다.
한 집일 뿐 아니라
보호를 위한 한 도시인
한 교회를 얻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더 전진하여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를
취해야(붙잡아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의지가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 아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훈련하고
다시 새롭게 하며(일신시키며, 부흥시키며)
변형시켜야 한다.
우리의 의지는 반드시
머리이신 분께
복종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자리를 잡을(정착될, 안정될) 것이다.
우리는
그 지방에 있는
교회들에 의해 표현되는
그 몸의 지체들로서 기꺼이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 아래에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성벽에서
우리의 부분을
건축할 것이며,
그러면
무너진 곳이
없게 될 것이다.
느헤미야기는
각자가 반드시
그 성벽에서
그의 부분을
건축해야 함을
말해 준다.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건축할 수 없고,
여러분도
나를 위하여 건축할 수 없다.
각각의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그 자신의 부분을
건축해야만 한다.
그 성벽의 건축에서,
그 일이 주로
더 강한 사람들과 관계되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싸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의지의 문제이다.
내가
그것을 좋아하든지 또는 아니든지,
나는 여전히
성벽을 건축해야만 한다.
그것이
쉽든지 또는 어렵든지
나는 여전히
그것을 해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는
그 성벽이 건축될 수 있도록,
반드시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에
나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
지방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그 성벽을 건축함을 필요로 한다.
만약 우리가
그 몸의 표현인
지방에 있는 그 교회를
보았다면,
그 다음에(그때) 우리는 반드시
그 몸이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 아래 있음을
보아야 한다.
지체들인 우리는
이 머리의 권위 아래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모두 반드시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 아래
있어야만 한다.
그때
그 성벽이 건축될 것이다.
그 성벽은
그 도시를 구성하고,
그 도시는 예표상으로
그 왕국 곧 그 통치를 나타낸다.
주님께서는
그 집 안에 계시지만,
그 왕께서는
그 왕국을 위한
그 도시 안에 계신다.
그 도시의 벽은
보호를 위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분별을 위해 있다.
느헤미야기는
우리가 모두 반드시
그 성벽에서
우리의 부분을
건축해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각각의 모든 사람들이
그 자신의 부분을
건축해야 한다.
우리는
본질적으로(내재적으로)
느헤미야의 본을 따라
‘그 성벽을 건축할’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의 집,
곧 그분의 거처인
그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의 왕국인
그 교회를
건축할 필요가 있다.
성벽을 건축하는 목적은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 아래 생활하면서
합당한 질서 안에 있도록
우리 모두를
이끄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단체적으로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자
개별적으로
모든 믿는 이들의 머리이시다.
그분은 직접적으로
우리 각 사람의 머리이시다.
교회생활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유일한 머리의 권위 아래
통일되는 생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유일한 머리의 권위를 존중한다면,
이때 주님의 회복 안에서
교회는
집일 뿐 아니라
성일 것이다.
집인 교회는 주로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관계있고,
성인 교회는 주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관계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릴 때
우리는
집인 교회를 가진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유일한 머리의 권위를 인식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징하는
성으로 확대될 것이다.
성인 교회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건축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로 건축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머리가 되셔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유일한 머리의 권위를 존중한다면,
교회는
그 왕과 또 그분의 왕국을 위해
그 집에서 그 도시로
확대될 것이다.
신약의 계시와
사도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것이다.
디모데전서 1장
3절과 4절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
하나님의 신약 계시를
개괄하는 용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무르라고
권유하였다.
그것은
디모데가
어떤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다른 것들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문맥에 따르면,
다른 가르침들이란
하나님의 경륜의 노선에 있지 않은
가르침들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신약의 계시에 근거해
가르치기는 했지만
족보와 율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의 경륜은
신약의 계시이며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유일하고 완전하며 온전하다.
어떤 것을
그것에 더하거나
그것에서 제할 수 없다.
그것에서 무언가를 뺀 것은
부족한 것이고,
그것에 무언가를 더한 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가르침이다.
바울은
혼란스러운 환경 속에서
그리고 동역자들과 오랫동안 함께 일한 후에
디모데전서를 썼다.
이 서신은 전적으로
예방접종이다.
그렇지만 이 서신의 서두에서
바울은
우리가
매우 엄중하다고 생각할 만한
방식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다른 것들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딤전 1:3)라는 이 말은
매우 단순하게 보인다.
우리는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실상 이것은
심각한 것 이상이다.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사람들을 죽인다.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건축물을 허물고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무효화한다.
우리 모두는
심지어 조금만 다르게 가르쳐도
회복을 파괴한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말 한 마디가
나라를 세우기도 하고
나라 전체를 망하게도 한다.”
라는 속담이 있다.
한 메시지를 다 전할
필요도 없다.
단지 우리 자신의 관념을 전하는
한 문장만 말해도
모든 것을 허물어뜨릴 수 있다.
우리는
사역이
‘무시무시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말이
파괴하고
죽이며
무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 교사들이 가르쳐야 하는
유일한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해 볼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장로회,
물에 잠기게 하는 침례,
감리 제도,
성결,
복음 전하는 방법,
성경을 가르치는 방법 등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유대교의 방식을 가르치는 것이
확실히 잘못된 것임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 전하는 것에 대해
가르치는 것까지도
분열을 초래할 수 있음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오직 하나의 사역만이
조금도 파괴함 없이,
항상 건축하고
세우며(고양시키며, 계발하며, 함양하며)
온전하게 한다.
신약성경에서
옳다고 입증되고(의롭다 함을 받고)
장려되며(권장되며)
높여지고(고양되며)
심지어 영광스럽게 되는(드높여지는)
오직 하나의 유일한 사역이 있다.
계속해서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4절에서
다르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무엇으로 점유되어야 하는지
말해 주었다.
그러한 이들은 바로
하나님의 경륜으로
점유되어야 했다.
항상 건축하고
또 결코 파괴하지 않는
오직 하나의 사역이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여러분이
성경적으로
어떤 것들을 가르치는 한,
그것이 괜찮을 것이라는
그 평안과 또 확신을
부디 가지지 말라.
그것은 괜찮지 않은데,
왜냐하면 여러분의 가르침이
분열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계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단지
올바르기만 한 가르침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가르치는
가르침을 원한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왜 같은 것을 말하라고
간청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을
옳고 그름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분열적인지 분열적이지 않은지로
평가해야 한다.
오직 한 종류의 사역만이
건축하며
또 결코 분열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의(경륜인, 경륜에 관한)
유일한 사역이다.
우리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다른 가르침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
성벽을 건축해야 한다.
다른 가르침들이란
하나님의 경륜의 노선에 있지 않은
가르침들을 가리킨다.
디모데전서 1장
3절과 4절, 6절과 7절,
6장
3절부터 5절까지, 20절과 21절에 나오는
다른 가르침들과
4장
1절부터 3절까지에 나오는
이단들은(이설들은)
그 교회의
쇠퇴, 하락, 또 퇴보의
씨 곧 근원이다.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건축물을 허물고
하나님의 경륜을 무효화한다.
심지어 조금만 다르게 가르쳐도
회복을 파괴한다.
한 지방에 있는 교회를
관리하고 목양하기 위해
첫째로 필요한 것은
의견을 달리하는 이들의
다른 가르침들을 끝내는 것이다.
그러한 가르침들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 노선에서
빗나가게 한다.
우리는
다른 가르침들을 피하고,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에 집중해야 한다.
건축물에 관하여
한 범주로 분류되는
부정적인 사람들,
곧 신성한 건축물을
파괴하는 이들이 있다.
신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일곱 종류의
파괴하는 이들이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중심적인 가르침 이외의 것들을
강조함으로써
분열적인 가르침의
바람을 일으키는 이들이 있다.
둘째로,
이단들을
전하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다.
셋째로,
당파적이고 종파적인 사람들이 있다.
넷째로,
분열을 일으키는 이들이 있다.
다섯째로,
지위를 얻으려는
야심이 있는 이들이 있다.
여섯째로,
양 떼를 아끼지 않는
이리와 같은 이들이 있다.
일곱째로,
믿는 이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이들이 있다.
많은 이들이
원수에게 선동되어
교회의 건축을
파괴하려고 애쓴다.
분열을 일으키는 이들에게서
떠나는 것은
파괴적인 혼돈을
정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는
보존될 것이며,
우리는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의
분열적인 말을 듣는 데
열려 있다면,
우리 안에
독이 주입될 것이다.
이 독은
우리가
회복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 것이고,
회복에 대한
우리의 사기를
약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교회 집회들에 참석하는 데
냉담해질 것이고,
〈회복역 성경〉과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들을
읽는 데 냉담해질 것이다.
디모데후서의 주제는
교회의 하락에 대한
예방접종이다.
우리가
반역과 분열이라는
사탄적인 혼돈의 세균에 대항하여
보존되려면
그러한 예방접종이 필요하다.
우리는
야심을 경계해야 한다.
야심은 형편없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야심이 있다.
야심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동역자와 장로로
섬기기 위해 나왔다면
결코 자신의 야심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
심지어 우리는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야심을 가지도록 양육한다.
야심이 없다면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것이고
학교를 졸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역자와 장로로서
자신의 책무를 다해야 할 때,
여러분은
야심을 가져오지 말아야 한다.
야심은
동역자와 장로인 여러분의
책무를 무가치하게 만든다.
여러분에게
야심이 있다면 그 즉시
여러분은 끝난 것이다.
순수한 마음은
주님의 회복 안에서
의도나 목적이나
동기나 행동에서
어떤 형태의 간교한 야심도 없는
정결하게 된 마음이다.
여러분이
동역자나 장로로서
책무를 다하려면
이러한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교회 안에서 유용한
몇몇 형제들은
겉으로는 겸손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높아져 있다.
그것이 바로
간교한 야심이며
그들의 진보를 막는
작은 여우이다.
주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더 이상
어떤 것도 주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에게
무언가를 더 주신다면
그가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야심이 없이 겸손한 이들만이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고,
주님께 은사들을 받을 수 있으며,
주님의 사역을 위임받을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종종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책임을 지도록
안배할 필요가 있다.
안배를 받지 못한 이들은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그들의 목소리나 표정에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내적으로
그들은
침체되고 기쁘지 않다.
이것은
다른 이들과 경쟁하여
으뜸이 되려는
감추어진 야심에 속한
음흉한 일이다.
교회 안에
성벽이 건축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건축하는 일을 파괴하도록
원수가 사용하는 이들로부터
보호받을 것이다.
신성한 건축물을 파괴하는 이들은
이단들을
전하고 가르치는 이들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
이단들을 가르치는 이들은
적그리스도들이다.
그들은
주인이신
주님의 인격과
또 믿는 이들을 값 주고 사신
주님의 구속을
모두 부인한다.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심각한 이단이다.
사도는
믿는 이들이
이단의 영향을 받아
진리의 일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그들 자신을 위하여
깨어 있으라고 경고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신 것과
그리스도의 신격의 존재를
부인하는 이들을 반드시
거절해야 하며,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아야 한다.
신성한 건축물을 파괴하는 이들은
당파적이고 종파적인 사람들이다.
당파적인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따라
교회 안에서 무리를 형성하여
분열을 일으키는,
이단적이고 종파적인 사람이다.
교회 안에서 좋은 질서를 유지하려면,
당파적이고 분열적인 사람은
한두 번 권고한 후에
거절하고 멀리해야 한다.
이렇게 분열적인 것은
전염성이 있다.
따라서 이렇게 분열적인 사람들을 거절함으로
분열적인 사람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신성한 건축물을 파괴하는 이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이들이다.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교리나 실행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로마서 16장 17절에서
바울은 굽히지 않고 단호하게
“여러분이 배운 가르침을 거슬러서
분열을 일으키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들을
주의하여 살펴보고
그들에게서 떠나십시오.”
라고 말했다.
주님은
‘형제들 사이에
다툼을 일으키는 사람’을 미워하신다.
신성한 건축물을 파괴하는 이들은
지위를 얻으려는
야심이 있는 이들이다.
우리는
주님을 위한 어떤 일에서도
으뜸이 되기를
결코 꾀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다른 이들과 경쟁하여
으뜸이 되려는
감추어진 야심에 속한
음흉한 일이다.
신성한 건축물을 파괴하는 이들은
양 떼를 아끼지 않는
이리와 같은 이들이고,
믿는 이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이들이다.
죄와 죽음은
사탄의 ‘동역자들’이다.
죽음을 퍼뜨리는 사람은
사탄과 협력하는 사람이다.
사탄의 목표는
사람이 죄를 짓고
타락하게 하는 것뿐 아니라 또한
사람이 죽음에 묶이게 하는 것이다.
죽음은
사탄의 일의 특징이다.
사탄의 일의 최종 목표는
죽음이
사람 안에
완전히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집회는
인수가 많아야 좋은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집회에서 반드시
죽음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삼키고
생명을 해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이 없음을
보아야 한다.
이와 동시에
생명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죽음이 가장 추악한 것이고,
생명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이다.
생명은 어떤 교리가 아니다.
생명은
흥분하는 것이나
좋은 느낌도 아니다.
생명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하나님의 풍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풍성의
증거이기 때문에,
교회의 특징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특징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특징은 바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 11:25)라는 말씀으로
압축될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그릇이 된
목적은 바로
이 생명과 부활을
표현하는 것이다.
교회는
생명으로 충만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생명이며,
사탄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바로
죽음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주된 목적은
사람이
생명을 얻게 하는 것,
곧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고 부활이시며,
교회는
이 생명과 부활의 그릇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그릇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풍성을
분배하신다.
오늘날 하나님의 목표가
교회이기 때문에,
사탄은 명확하게
교회를 겨냥하여 공격한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이나 교회를
유혹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반드시
죄나 세상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너무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여전히 사탄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십 센티미터나 되는 병 입구를
이 센티미터의 병마개로
막을 수 없다.
단지 죄와 세상만 처리하는 것으로는
사탄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
사탄의 궁극적인 무기는 바로
죽음이며,
사탄은
죽음으로 교회를 공격한다.
죽음은
그리 쉽게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은밀히
교회 안에 기어들어 올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탄이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세상이나 죄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더럽고 기만하는 죄들뿐 아니라
도덕적이고 세련된 것들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탄은
죽음에 속한
이러한 일들을 이용하여
손쉽게 교회를 공격한다.
마태복음 16장 18절은
주님의 교회의 기초가
반석이신 그리스도이고
음부의 문들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음부가 곧 죽음이다.
죽음이 교회를 이기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교회가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건축된다면,
죽음과 생명의
차이를 분별할 것이며,
음부의 문들은
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좋은 교리나
좋은 신학이나
훌륭한 성경 해석이 아니다.
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 곧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다.
어떤 교리나 사상이나
신학이나 성경 해석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대치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온 것만이
음부의 문들을 이길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죽음이 변장한 형태에 불과하며,
사탄의 공격을
이겨 낼 수 없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죽음을 만지지 않고
죽음을 교회 안에 가져오지 않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생명으로 채우시고,
사탄이 교회를 공격할
틈을 찾지 못하게 하시기를 바란다.
성벽이 건축된 후에,
우리는
교회에 대한
죽음의 공격에 저항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사탄의 일의 특징이다.
사탄의 일의 최종 목표는
죽음이
사람 안에
완전히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18절은
교회에 대한 공격이
어떤 근원에서 올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데,
그 근원은 바로
‘음부의 문들’ 곧 죽음이다.
사탄의 특별한 목적은
교회 안에
죽음을 퍼뜨리는 것이며,
교회와 관련하여
그가 가장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가
그의 죽음의 세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 반석’ 위에 건축된 교회는
죽음과 생명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으며,
음부의 문들은
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처음과 마지막이신 분,
곧 항상 존재하시고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죽은 적이 있었지만
다시 사신 분,
곧 부활이신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서만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본성은
부활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된
새 창조물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 안에 있고,
부활의 실재는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이다.
부활의 원칙은
타고난 생명이 죽음당하고
신성한 생명이 일어나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타고난 생명에 의해 살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살 때,
우리는
부활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생활의 결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자라고 건축된다.
1일
집과 성의 건축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중심이다. 이 건축은 다만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때, 그것이 곧 연합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다. 이 연합이 확장되고 최대한으로 이루어질 때, 그것이 곧 성이다. 그래서 성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 건축인 상호 거처가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우주적이고 영원한 연합이다. 우리는 그분의 거처이고, 그분은 우리의 거처이시다. 이 거처가 작은 규모로는 집이고 큰 규모로는 성이다.
신약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심을 말하지만, 결국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이심을 말한다. 우리가 생명이신 그리스도만을 체험하고 아직 우리의 머리이신 그분을 그다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집으로서의 교회’만 있을 뿐이다. 아직 성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머리이심을 깨닫는 바로 그때, 그리스도는 두 번째 단계의 확장을 얻으실 것이다. 그럴 때 교회는 집일 뿐 아니라 성일 것이다. 집은 주로 생명과 관계있고, 성은 주로 머리와 관계있다.
성전의 건축을 회복한 후, 여전히 성을 건축할 필요가 있다. 성이 없으면 성전에 대한 보호가 없는 것이다. 성전은 완전하다. 성전은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섬기는, 주님의 임재가 있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 장소는 보호가 필요하다. 성벽은 성전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성벽이 없다면 보호가 없다.
이것은 신약에서 우리가 반드시 적용해야 하는 예표이다. 신약성경에서 교회의 건축은 복음서들에서 처음 언급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선포한 후에, 베드로는 교회가 건축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 다음에 교회가 나온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한 이후에 교회가 존재하게 된다. 동시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왕국의 열쇠들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에 뒤이어서 왕국이 나온다. 이 세 가지가 꼭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반석이신 그리스도와 교회와 왕국이다. 그리스도는 체험되셔야 하고, 교회는 건축되어야 하며, 그럴 때 왕국이 도래할 것이다.
서신서들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두 장에는 한 성이 있다. 그 성안에는 성전이 없는데(계 21:22), 그것은 성전이 확장되어서 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신성하고 영원한 중심이시다. 그분께서 내 안으로, 여러분 안으로, 다른 많은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실 때, 거기에 그리스도의 증가가 있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증가가 교회이다(요 3:29-30). 교회는 그리스도의 확장이며 그리스도의 증가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일부분이며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아주 많은 지체들 안으로 증가되시고 확장되셨기 때문이다. 성은 한층 더 전진된 그리스도의 확장이다. 그리스도의 확장의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이다. 이 확장의 두 번째 단계도 교회인데, 이것은 집이 아닌 성인 교회이다. 집인 교회는 반드시 성인 교회로 확장되어야 한다. 성은 집보다 더 크고 더 안전하다. 결국에는 집 전체가 성이 된다. 요한계시록 21장 22절은 성안에 더 이상 성전이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전이 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은 성전의 확장, 즉 집이 최대로 발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