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물을 바치려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쌓았다.” ― 스 3:2하.
하나님의 집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제단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생활을 위해 첫 번째로 회복해야 할 것은 제단이다.
교회생활을 하려면 먼저 모든 것을 반드시 제단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과 우리 전 존재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반드시 제단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생활의 출발이다.
문제는 우리가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익과 만족을 위해 모든 것을 제단에 바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예루살렘에 돌아와서도, 바빌론에서 살았던 것처럼 계속 살아서는 안 된다.
예루살렘에서의 생활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권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번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안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과 십자가라는 한길을 주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운행하심의 중심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모든 것을 처리하신다.
십자가는 모든 영적인 체험의 기반이자 근거이다. 모든 영적인 체험은 십자가에서 시작된다.
영적으로 진보하려면 우리는 매일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합당한 교회생활을 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아무것도 갖지 않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소유한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대치물이 될 것이다.
“그들은 … 여호와께 번제물을 바치기 시작한 것이다.” ― 스 3:6상.
번제물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절대적이신 것을 상징한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던 번제물은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번제물은 하나님을 위해 온전하고 절대적인 생활을 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이러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번제물은 그리스도 자신이며, 우리는 그분과 하나이다. 따라서 번제물은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된 것이다.
번제물은 하나님의 음식을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은 이 음식을 누리심으로 만족하신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그분 자신에게 먹을 무언가를 제공하실 수 없다. 그분의 음식은 반드시 그분의 백성에게서 와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음식이시지만,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음식이 되지 않으신다. 그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하나님의 음식이시다.
‘번제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문자적으로 ‘위로 올라가는 것’을 뜻하며,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올라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땅에서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생활인데, 이것은 그분이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인 삶을 산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시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신다.
주 예수님은 무엇이 되시든, 무엇을 말씀하시든, 무엇을 행하시든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셨다.
우리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께 우리의 손을 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사시면서, 그분이 이 땅에서 사셨던 삶, 곧 번제물의 삶을 우리 안에서 반복하신다.
번제물은 ‘여호와를 만족시키는 향기’이다.
‘만족시키는 향기’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직역하면 ‘안식의 향기’ 혹은 ‘만족의 향기’를 의미한다.
만족시키는 향기는 만족과 평안과 안식을 가져다주는 향기이다. 만족시키는 이러한 향기는 하나님께 누림이 된다.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분의 삶은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향기이자 달콤한 향기로서 하나님께로 올라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을 만족시켜 드렸다.
레위기에서 제일 처음 언급된 제물은 속죄제물이나 속건제물이 아니라 번제물이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첫 번째 상태, 곧 하나님과 관련된 우리의 첫 번째 문제가 범죄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표현과 대표가 되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위해 존재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인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산다.
번제물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표현하고 대표하는 목적으로 창조하신 사람들인 우리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지 않으며, 우리 스스로는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로 취해야 한다.
‘매일의 번제물’을 드리는 생활을 하는 것은 살아 있는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이다 ― 롬 12:1.
번제물은 우리의 헌신, 곧 우리가 자신을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의 예표이다. 헌신의 의미는 우리 자신을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구약에서 매일 번제물을 드리는 것은 신약에서 하나님께 속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매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예표한다.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과 교회생활에서 우리는 매일의 번제물을 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로 아버지 하나님께 경배드림으로 그분의 갈망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제물들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로 그분께 경배하기를 원하신다. 제물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행복하시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합당한 경배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문제이다.
우리가 번제물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가 그분의 만족을 위해 그분께 올라갈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번제물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그분께 드리는 것에 만족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달콤하고 기쁘게 받아들이실 것이다. 이것이 번제물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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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헌신의 의미는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사람들은 수소와 숫양을 희생 제물로 드렸다. 원칙은 다음과 같다. 수소는 원래 우리에 살며 밭을 갈고 수레를 끄는 데 사용되었다. 이제 수소는 우리에서 끌어내어져 제단 옆에 두어졌다. 이것은 수소의 위치가 바뀐 것이다. 그런 다음 수소는 죽음당하고 제단 위에 놓이게 되며 불태워져서 하나님께 달콤한 향기가 된다. 이것은 수소의 용도가 바뀐 것이다. 이처럼 이 수소는 희생 제물이 된다. 제단 위에 드려진 모든 희생 제물은 하나님께 속하며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누리시기 위한 것이다. 간략히 말해서, 희생 제물이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헌신의 예표이다. 헌신의 의미는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의 만족을 위하여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신약에서 하나님께 속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매일 번제물로 드려야 한다. 차이점은 구약의 백성이 죽은 희생 제물을 드렸던 것과는 달리 우리는 살아 있는 희생 제물을 드린다는 것이다.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은 주님의 만족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만족하시게 해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께 자신을 헌신하는 것의 참된 의미이다.
우리가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는 목적은 그분을 향하여 사는 데 있다(고후 5:15). 그분을 향하여 사는 것은 그분을 위하여 사는 것보다 더 높은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살 때 우리와 그분은 여전히 둘일 수 있지만, 그분을 향하여 살 때 우리와 그분은 분명 하나가 된다. 그분을 향하여 살 때,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생명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으로도 취한다. 우리의 모든 생활과 행동에서 우리는 주님께 협력해 드리고 주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를 통해 사시도록 허락해 드린다.
하나님은 우리가 제물들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로 그분께 경배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절하거나 무릎을 꿇거나 심지어 단지 노래하고 찬양함으로 그분께 경배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으신다. 참된 경배, 즉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는 경배는 하나님께 우리가 체험한 그리스도를 드리고 우리의 체험에 따라 그리스도를 드림으로써,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체험한 것들을 되새기면서 하나님께 경배하러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찾고 계시며 갈망하시는 경배이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유지하고 강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심프슨(A. B. Simpson)은 그가 지은 찬송에서 “주의 부활 알았으니 죽음 두렵지 않네”(찬송가 362장)라고 말한다. 우리 안에는 모든 것을 충족해 주는 공급이 있으며, 이 공급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다. 이것이 바울이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3)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는 결혼 생활에서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고, 교회생활에서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으며, 가정생활의 모든 어려움과 교회생활에서의 모든 문제를 이길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체험들 안에서 그분을 체험할 수 있고 번제물로서 그분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번제물을 태워 바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가 그분의 만족과 안식을 위하여 그분께 올라갈 것이다. 하나님은 만족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달콤하고 기쁘게 받아들이실 것이다. 이것이 번제물의 의미이다.
5일
레위기 1장 4절에 따르면,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제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제물에 손을 얹기도 하였다.
성경에서 손을 얹는 것은 언제나 동일시하는 것, 곧 연결하는 것을 상징한다. 손을 얹는 것은 대치하는 것을 상징하지 않는다. 제물에 손을 얹는 것은 우리가 제물과 하나이고 제물을 우리와 하나인 것으로 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손을 얹는 것은 둘을 하나로 만든다.
우리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께 우리의 손을 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이렇게 연결하고 동일시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약함과 결함과 흠이 그분의 것이 되고, 그분의 모든 미덕은 우리의 것이 됨을 가리킨다. 이것은 교환이 아니라 연결이다.
우리는 자신이 전혀 자격이 없고 소망이 없음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의 실지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께 손을 얹을 때 곧 안수할 때, 우리의 약점은 그분의 약점이 되고 그분의 장점과 미덕은 우리의 장점과 미덕이 된다. 더 나아가 영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연결에 의해 그분은 우리와 하나 되시고 우리 안에서 사신다. 그분은 우리 안에 사시면서, 그분이 이 땅에서 사셨던 삶, 곧 번제물의 삶을 우리 안에서 반복하실 것이다. 우리 자신으로는 이러한 삶을 살 수 없지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이러한 삶을 사실 수 있다. 그분께 안수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우리와 하나 되게 하고 우리 자신을 그분과 하나 되게 한다. 그럴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분의 삶을 반복하실 것이다. 이것이 번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번제물이신 그리스도께 안수하는 것은 동일시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속죄의 문제, 곧 화해의 문제이기도 하다. 화해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갖고 있는 문제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갖고 계신 문제들이 처리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 안수하는 것은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문제들을 처리하여 우리의 상태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한다. … 그러므로 번제물에 손을 얹는 것은 화해를 위한 것이다.
레위기 1장 5절에서, 제물을 잡는 것은 용서받도록 제물의 피를 흘리기 위한 것이다. 그 피를 제단 주위에 뿌리는 것은 제단 위에 태워진 제물이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기 위한 것이다.
레위기 1장 6절은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떴다고 말한다.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이러한 학대를 거치셨다. 그분은 가죽이 벗겨지셨고 각이 떠지셨다.
제물의 가죽을 벗기는 것은 제물의 외적 표현을 벗기는 것이다. 번제물의 가죽이 벗겨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그분의 인간 미덕의 외적 표현이 벗겨지는 것을 허락하셨음을 의미한다.
제물의 각을 뜨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번제물로서 조금도 보류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자신의 온 존재가 부서지도록 허락하신 것을 상징한다.
레위기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제물들로 누릴 수 있다는 사상이 감추어져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리스도를 번제물로 누릴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이지 않지만,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번제물로 취해야 하고 그분을 번제물로 누려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체험과 누림을 가지려면,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 예수님, 당신은 놀라운 분이십니다. 당신은 항상 저와 함께하시는 완결되신 영이십니다. 당신은 저와 함께하시면서 저의 번제물이 되십니다. 주님, 저는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없지만, 당신은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일 수 없지만, 당신은 항상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이셨고 지금도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이십니다. 주 예수님, 이제 저는 당신을 저의 번제물로 취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로 누릴 것이다.
4일
‘번제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문자적으로 ‘위로 올라가는 것’을 뜻하며,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땅에서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생활인데, 이것은 그분이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인 삶을 산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는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인 삶을 살 수 없다. 우리 존재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 더럽고, 우리가 만지는 것은 어떤 것이든 더러워진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의 예표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가장 거룩한 일을 할 때조차도 우리에게 여전히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거룩한 것을 말할 때마다 나에게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주님의 씻기심과 정결하게 하심을 신뢰한다.
번제물은 하나님을 위한 절대적인 생활을 가리킨다. 그런 생활은 절대적으로 순수한 근원에서 나오며, 타락의 요소나 흠이나 죄가 전혀 없다. 이런 생활은 순수하고 거룩하다. 우리 자신 안에서는 이런 생활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이 될 정도로 타락했다. 세상은 전적으로 더럽다. 사실상 세상은 우리 자신이며, 우리가 세상이다. 우리의 실질과 본질과 기질과 요소 전부가 더럽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물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로 취해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관련된 우리의 첫 번째 문제가 범죄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범하든 범하지 않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별로 위하지 않는다. 잘못한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다. 내가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에게 잘못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이 있는 것은, 내가 여전히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첫 번째 필요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이다.
우리의 첫 번째 상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전혀 위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위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가? 이것이 우리의 상태의 첫 번째 방면이다. 우리가 선하든 악하든, 우리의 행함이 옳든 그르든,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다. 이것은 가련한 상태이다. 여러분은 선한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위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선한지 악한지를 막론하고 우리는 전혀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은행 강도이고 어떤 사람은 신사일 수 있지만, 둘 다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데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강도이건 대학교수이건 모두 똑같다. 때로는 심지어 그리스도인 교사들과 전도자들과 목사들까지도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다. 잡지를 읽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성경을 읽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여러분은 진정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관심하고 있는가? 여러분이 행하는 모든 것, 여러분이 말하는 모든 것, 여러분의 존재 전부가 백 퍼센트 하나님만을 위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우리 중 누구도 정직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취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번제물이 되시는 그분이 필요하다. 번제물은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분이심을 상징한다. 여러분이 사복음서를 다시 읽어 본다면, 이 땅에서 백 퍼센트 하나님을 위하여 사셨던 한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분은 무엇이 되시든, 무엇을 말씀하시든, 무엇을 행하시든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셨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유익과 선택을 위한다. 그러나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신다.
3일
민수기 28장 2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음식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의 음식을 잊지 말라고 요구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분께 음식을 드리는 것을 기억하기 원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많은 것을 이루었다. 나는 음식과 음료를 마련해 주었다. 이제 나는 너희가 나의 음식을 돌보기를 요구한다. 나의 음식은 너희가 나에게 바치는 제물들이다. 이 제물들은 나를 만족시키는 향기이다.”
민수기 28장의 시작에서, 하나님은 오셔서 마치 그분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너희는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느냐? 너희는 만족하고 행복하느냐? 나와 나의 만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는 나의 음식을 돌보아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너희를 돌보았다. 나는 새롭고 완전한 방식으로 너희를 위해 모든 것을 마련했고, 이제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을 차지할 준비가 되었다. 나는 너희가 나를 잊지 않기를 요구한다.”
하나님은 배고프시며 음식을 드시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그분 자신에게 먹을 무언가를 제공하실 수 없다. 그분의 음식은 반드시 그분의 백성에게서 와야 한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의 제물, 나의 음식 곧 나를 만족시키는 향기인 화제물을 … 내게 삼가 바쳐야 한다.”(민 28:2)
민수기 28장에 언급된 모든 제물은 하나님의 음식이며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음식이실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음식이심을 가리킨다. 하나님과 우리는 동일한 음식 곧 그리스도를 누린다. 그리스도는 이 장의 내재적인 실질이시다.
그리스도는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을 가질 수 있게 하는 화평이시다. 최상의 교통은 먹는 것과 관련된다. 하나님과 최상의 교통을 누리려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분의 음식이신 그리스도를 드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동안 우리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써 함께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음식이시지만,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음식이 되지 않으신다. 그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하나님의 음식이시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음식은 또한 우리의 음식이 된다. 레위기를 주의 깊게 읽어 본다면, 우리는 번제물이 전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불태워져야 함을 볼 것이다. 번제물의 어떤 부분도 그것을 드린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번제물에 소제물이 수반되면, 번제물 중 많은 부분이 드린 사람을 위한 것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즉 하나님께 그분의 음식이신 그리스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너는 나의 음식을 나에게 주었다. 이제 나는 이 음식의 일부를 너와 함께 나누고 싶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누린다. 우리가 잔치하고 있을 때 하나님도 잔치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와 잔치하시며 우리는 하나님과 잔치한다. 우리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로 함께 잔치한다.
모든 제물들이신 그리스도가 있을 때,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으로 누린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체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그분의 음식으로 그리스도를 드린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드린 그리스도의 일부를 우리와 함께 나누신다.
번제물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온전하고 절대적인 생활을 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이러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
2일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안에서 우리에게 한 인격과 한길을 주셨다. 이 한 인격은 으뜸이시며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이고, 한길은 십자가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신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시며 우주 가운데 있는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실재이시다. 하나님은 이 놀라우신 분을 우리의 구원으로 우리에게 주셨다. 한 인격이신 그리스도는 우주의 중심이시고, 한길인 십자가는 하나님의 행정의 중심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모든 것을 처리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초점이신 것과 같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행정의 중심이다.
우리는 밤에 잠자리에 들 때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낮 동안에 무엇을 했든,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든 상관없이 십자가가 모든 것을 처리한다는 의미이다. 오후에 우리가 아내나 남편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불쾌해졌다고 가정해 보자. 잠자리에 들 때 우리의 불쾌해진 느낌에 십자가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한다면 불쾌한 느낌이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길이 금욕주의나 고행이 아니라 십자가임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를 인식하면서 밤에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잠자리에 누우며 십자가를 통해 잠들기를 실행한다면, 다음 날 아침에는 부활 안에서 새사람으로 깨어날 것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에 반대되는 유일한 인격이신 그리스도가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길에 반대되는 유일한 길인 십자가가 있다.
거리에서 차를 운전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상기시켜 줄 수 있다. 우리는 차를 운전하면서 많은 교차로에 이른다. 모든 교차로가 십자로(十字路)임을 알고 있는가? 이 십자로 중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지만 모두 십자로이다. 많은 십자로를 통과해야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영적인 체험에 대해 말할 때, 우리 또한 새 예루살렘에 이를 때까지 많은 십자로를 통과해야 한다. 교차로를 건너가지 않고서는 지리적으로 멀리 이동할 수 없는 것같이,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영적으로 전진할 수 없다. 새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에야 비로소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이 그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모든 부정적인 것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주님과 함께 행하면서 날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유일한 인격이신 그리스도와 유일한 길인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금욕주의가 필요하지 않다. 더욱이 우리는 어떤 것들에 관하여 결심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한 실행은 효과가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밤에는 십자가를 통하여 잠자리에 들고 편안히 잠을 자며, 아침에 부활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주님을 찬양하자! 그리스도의 죽음을 체험하는 것은 금욕주의와 반대된다!
우리가 취해야 할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는 좁은 길이며, 또한 고속 도로이다. 십자가를 기꺼이 취하려고 하지 않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좁은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을 기꺼이 취하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고속 도로가 된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아니고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는 이미 죽었고 장사되었다고 말한 바울의 태도였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의 온 존재와 모든 소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대치물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아질수록 우리의 체험에서 그리스도는 더욱 대치되실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아무것도 갖지 않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소유한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대치물이 될 것이다.
신언노트, 2023 02 05
하나님의 제단인
번제단을 다시 쌓음
하나님의 제단—번제단을 재건함
주님의 회복 안에는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
무언가 회복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에스라기 3장은
첫 번째로 회복된 것이
제단이었음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하나님의 집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제단을 회복해야 한다.
제단은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는 곳이다.
이것은
참된 헌신의 회복이다.
에스라기 3장에 따르면,
그들은
제단 위에
번제물 외에는
어떤 것도 드리지 않았다.
그들은
속죄제물이나 속건제물이나
화목제물이나 다른 어떤 제물도
드리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번제물이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임을
안다.
속죄제물은
죄들에 대한 것이고,
속건제물은
우리의 위반들에 대한 것이며,
화목제물은
우리의 화평을 위한 것이고,
소제물은
우리의 만족을 위한 것이지만,
번제물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집을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집은
우리가
용서받기 위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기 위한 것도 아니며,
우리의
누림을 위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집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번제물만 드려야 한다.
즉,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과
우리 전 존재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반드시
제단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생활의 출발이다.
교회생활을 하려면 먼저
모든 것을 반드시
제단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대학 학위와 학식을
드려야 하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우리의 모든 소유와 전 존재를
제단 위에 드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의 집은
회복될 수 없다.
몇몇 지역에서 나는
어떤 형제들이
교회생활 안에서
책임을 맡고 싶어 하지만
여전히 세상 가운데 있는 것을
목도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소유와 전 존재를
제단 위에 두지 않았다.
각지에서
교회들을 건축하기 위해
우리는
제단 위에
모든 것을 드리는
헌신이 필요하다.
많은 교회들이
추구하는 이들이
교회에 더해지는 것에 대해
참된 부담이 있다.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는
적은 인수의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솔직하게 말하겠다.
만일 여러분이
모든 것,
즉 여러분이
소유한 것과
할 수 있는 것과
여러분의 존재를
제단 위에 드린다면,
주님께서
추구하는 이들을
이끌어 오실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익과 만족을 위해
모든 것을 제단에 바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는
헌신이 필요하다.
에스라기 3장에서
그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번제물을 드렸다.
그들은 끊임없이
번제물을 드렸다.
제단 위에는
불태워지는 것이
항상 있었다.
오직 이런 종류의 헌신만이
교회들의 건축을
이끌어 올 수 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께 진지하다면,
모든 것을
제단 위에 드려야 한다.
우리는
예루살렘에 돌아와서도,
바빌론에서 살았던 것처럼
계속 살아서는 안 된다.
예루살렘에서의 생활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이익을(관심사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주님의 회복 안의 생활은 절대적으로
교회들의 건축의 회복을 위한
생활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몇몇 교회들은
증가가 거의 없었다.
그들이
주님께 진지하다면,
“주님,
우리에게 증가를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라고
필사적으로 기도할 것이다.
우리는
차갑거나 뜨거워야 한다.
만일 우리가 차갑다면,
함께 얼어붙을 정도가 되자.
만일 우리가 뜨겁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미쳤다고 말할 정도로
뜨겁게 되자.
만일 우리가
그렇게 불타오른다면,
교회의 증가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 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주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주님의 회복을 위해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물을 바치려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쌓았다.”
― 스 3:2하.
하나님의 집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제단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생활을 위해
첫 번째로 회복해야 할 것은
제단이다.
교회생활을 하려면 먼저
모든 것을 반드시
제단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과
우리 전 존재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반드시
제단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생활의 출발이다.
문제는
우리가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익과 만족을 위해
모든 것을
제단에 바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예루살렘에 돌아와서도,
바빌론에서 살았던 것처럼
계속 살아서는 안 된다.
예루살렘에서의 생활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권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안에서
우리에게
한 인격과 한길을 주셨다.
이 한 인격은
으뜸이시며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리스도이고,
한길은
십자가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분으로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신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시며
우주 가운데 있는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실재이시다.
하나님은
이 놀라우신 분을
우리의 구원으로
우리에게 주셨다.
한 인격이신 그리스도는
우주의 중심이시고,
한길인 십자가는
하나님의 행정의 중심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모든 것을 처리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초점이신 것과 같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행정의 중심이다.
우리는
밤에 잠자리에 들 때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낮 동안에 무엇을 했든,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든 상관없이
십자가가
모든 것을 처리한다는
의미이다.
오후에
우리가
아내나 남편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불쾌해졌다고
가정해 보자.
잠자리에 들 때
우리의 불쾌해진 느낌에
십자가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한다면
불쾌한 느낌이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길이
금욕주의나 고행이 아니라
십자가임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를 인식하면서
밤에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잠자리에 누우며
십자가를 통해
잠들기를 실행한다면,
다음 날 아침에는
부활 안에서
새사람으로
깨어날 것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에 반대되는
유일한 인격이신
그리스도가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길에 반대되는
유일한 길인
십자가가 있다.
거리에서
차를 운전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상기시켜 줄 수 있다.
우리는
차를 운전하면서
많은 교차로에 이른다.
모든 교차로가
십자로(十字路)임을
알고 있는가?
이 십자로 중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지만
모두 십자로이다.
많은 십자로를 통과해야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영적인 체험에 대해 말할 때,
우리 또한
새 예루살렘에 이를 때까지
많은 십자로를 통과해야 한다.
교차로를 건너가지 않고서는
지리적으로 멀리 이동할 수 없는 것같이,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영적으로 전진할 수 없다.
새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에야 비로소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이
그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모든 부정적인 것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주님과 함께 행하면서
날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유일한 인격이신 그리스도와
유일한 길인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금욕주의가 필요하지 않다.
더욱이 우리는
어떤 것들에 관하여
결심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한 실행은
효과가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밤에는
십자가를 통하여
잠자리에 들고
편안히 잠을 자며,
아침에
부활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주님을 찬양하자!
그리스도의 죽음을
체험하는 것은
금욕주의와 반대된다!
우리가 취해야 할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는
좁은 길이며,
또한 고속 도로이다.
십자가를
기꺼이 취하려고 하지 않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좁은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을
기꺼이 취하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고속 도로가 된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아니고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는 이미
죽었고 장사되었다고 말한
바울의 태도였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의
온 존재와
모든 소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대치물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아질수록
우리의 체험에서
그리스도는 더욱
대치되실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소유한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대치물이
될 것이다.
번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안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과
십자가라는 한길을
주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운행하심의
중심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모든 것을 처리하신다.
십자가는
모든 영적인 체험의
기반이자 근거이다.
모든 영적인 체험은
십자가에서 시작된다.
영적으로 진보하려면
우리는 매일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합당한 교회생활을
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소유한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대치물이
될 것이다.
민수기 28장 2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음식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의 음식을 잊지 말라고
요구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분께 음식을 드리는 것을
기억하기 원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많은 것을 이루었다.
나는
음식과 음료를
마련해 주었다.
이제 나는
너희가
나의 음식을 돌보기를
요구한다.
나의 음식은
너희가
나에게 바치는
제물들이다.
이 제물들은
나를 만족시키는
향기이다.”
민수기 28장의 시작에서,
하나님은 오셔서
마치 그분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너희는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느냐?
너희는
만족하고 행복하느냐?
나와 나의 만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는
나의 음식을 돌보아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너희를 돌보았다.
나는
새롭고 완전한 방식으로
너희를 위해
모든 것을 마련했고,
이제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을 차지할
준비가 되었다.
나는
너희가
나를 잊지 않기를
요구한다.”
하나님은
배고프시며
음식을 드시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그분 자신에게
먹을 무언가를
제공하실 수 없다.
그분의 음식은 반드시
그분의 백성에게서
와야 한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의 제물,
나의 음식
곧 나를 만족시키는 향기인
화제물을
… 내게 삼가 바쳐야 한다.”
(민 28:2)
민수기 28장에 언급된
모든 제물은
하나님의 음식이며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음식이실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음식이심을
가리킨다.
하나님과 우리는
동일한 음식
곧 그리스도를 누린다.
그리스도는
이 장의 내재적인 실질이시다.
그리스도는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을 가질 수 있게 하는
화평이시다.
최상의 교통은
먹는 것과 관련된다.
하나님과
최상의 교통을 누리려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분의 음식이신
그리스도를 드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동안
우리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써
함께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음식이시지만,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음식이 되지 않으신다.
그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하나님의 음식이시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음식은 또한
우리의 음식이 된다.
레위기를
주의 깊게 읽어 본다면,
우리는
번제물이
전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불태워져야 함을
볼 것이다.
번제물의 어떤 부분도
그것을 드린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번제물에
소제물이 수반되면,
번제물 중 많은 부분이
드린 사람을 위한 것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즉 하나님께
그분의 음식이신
그리스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너는
나의 음식을
나에게 주었다.
이제 나는
이 음식의 일부를
너와 함께 나누고 싶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누린다.
우리가
잔치하고 있을 때
하나님도
잔치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와 잔치하시며
우리는
하나님과 잔치한다.
우리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리스도로
함께 잔치한다.
모든 제물들이신
그리스도가 있을 때,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으로
누린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체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그분의 음식으로
그리스도를 드린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드린
그리스도의 일부를
우리와 함께 나누신다.
번제물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온전하고 절대적인 생활을 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이러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들은
… 여호와께
번제물을 바치기
시작한 것이다.”
― 스 3:6상.
번제물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절대적이신 것을
상징한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던
번제물은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번제물은
하나님을 위해
온전하고 절대적인
생활을 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이러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번제물은
그리스도 자신이며,
우리는
그분과 하나이다.
따라서 번제물은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된 것이다.
번제물은
하나님의 음식을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은
이 음식을 누리심으로
만족하신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그분 자신에게
먹을 무언가를
제공하실 수 없다.
그분의 음식은 반드시
그분의 백성에게서
와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음식이시지만,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음식이 되지 않으신다.
그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하나님의 음식이시다.
‘번제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문자적으로
‘위로 올라가는 것’을 뜻하며,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땅에서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생활인데,
이것은
그분이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인 삶을 산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는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인 삶을
살 수 없다.
우리 존재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
더럽고,
우리가 만지는 것은 어떤 것이든
더러워진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의 예표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가장 거룩한 일을
할 때조차도
우리에게 여전히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거룩한 것을 말할 때마다
나에게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주님의
씻기심과 정결하게 하심을
신뢰한다.
번제물은
하나님을 위한
절대적인 생활을 가리킨다.
그런 생활은
절대적으로 순수한 근원에서
나오며,
타락의 요소나 흠이나 죄가
전혀 없다.
이런 생활은
순수하고 거룩하다.
우리 자신 안에서는
이런 생활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이 될 정도로 타락했다.
세상은
전적으로 더럽다.
사실상 세상은
우리 자신이며,
우리가
세상이다.
우리의
실질과 본질과
기질과 요소 전부가
더럽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물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로
취해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관련된
우리의 첫 번째 문제가
범죄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범하든 범하지 않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별로
위하지 않는다.
잘못한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다.
내가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에게
잘못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이 있는 것은,
내가 여전히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첫 번째 필요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이다.
우리의 첫 번째 상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전혀
위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위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가?
이것이
우리의 상태의
첫 번째 방면이다.
우리가
선하든 악하든,
우리의 행함이
옳든 그르든,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다.
이것은
가련한 상태이다.
여러분은
선한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위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선한지 악한지를 막론하고
우리는 전혀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은행 강도이고
어떤 사람은
신사일 수 있지만,
둘 다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데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강도이건 대학교수이건
모두 똑같다.
때로는 심지어
그리스도인 교사들과
전도자들과
목사들까지도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다.
잡지를 읽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성경을 읽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여러분은 진정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관심하고 있는가?
여러분이 행하는 모든 것,
여러분이 말하는 모든 것,
여러분의 존재 전부가 백 퍼센트
하나님만을 위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우리 중 누구도
정직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취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번제물이 되시는
그분이 필요하다.
번제물은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분이심을
상징한다.
여러분이
사복음서를
다시 읽어 본다면,
이 땅에서 백 퍼센트
하나님을 위하여 사셨던
한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분은
무엇이 되시든,
무엇을 말씀하시든,
무엇을 행하시든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셨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유익과 선택을 위한다.
그러나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신다.
‘번제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문자적으로
‘위로 올라가는 것’을 뜻하며,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올라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땅에서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생활인데,
이것은
그분이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인 삶을 산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시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신다.
주 예수님은
무엇이 되시든,
무엇을 말씀하시든,
무엇을 행하시든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셨다.
우리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께
우리의 손을 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사시면서,
그분이
이 땅에서 사셨던 삶,
곧 번제물의 삶을
우리 안에서
반복하신다.
번제물은
‘여호와를 만족시키는
향기’이다.
‘만족시키는 향기’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직역하면
‘안식의 향기’
혹은 ‘만족의 향기’를
의미한다.
만족시키는 향기는
만족과 평안과 안식을
가져다주는 향기이다.
만족시키는 이러한 향기는
하나님께
누림이 된다.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분의 삶은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향기이자
달콤한 향기로서
하나님께로 올라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을 만족시켜 드렸다.
레위기에서
제일 처음 언급된 제물은
속죄제물이나 속건제물이 아니라
번제물이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첫 번째 상태,
곧 하나님과 관련된
우리의 첫 번째 문제가
범죄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표현과 대표가 되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위해 존재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인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산다.
번제물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표현하고 대표하는 목적으로
창조하신 사람들인
우리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지 않으며,
우리 스스로는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로
취해야 한다.
레위기 1장 4절에 따르면,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제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제물에 손을 얹기도 하였다.
성경에서
손을 얹는 것은 언제나
동일시하는 것,
곧 연결하는 것을
상징한다.
손을 얹는 것은
대치하는 것을
상징하지 않는다.
제물에 손을 얹는 것은
우리가
제물과 하나이고
제물을
우리와 하나인 것으로
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손을 얹는 것은
둘을
하나로 만든다.
우리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께
우리의 손을 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이렇게 연결하고 동일시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약함과 결함과 흠이
그분의 것이 되고,
그분의 모든 미덕은
우리의 것이 됨을
가리킨다.
이것은
교환이 아니라
연결이다.
우리는
자신이 전혀
자격이 없고
소망이 없음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의 실지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께
손을 얹을 때
곧 안수할 때,
우리의 약점은
그분의 약점이 되고
그분의 장점과 미덕은
우리의 장점과 미덕이 된다.
더 나아가 영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연결에 의해
그분은
우리와 하나 되시고
우리 안에서 사신다.
그분은
우리 안에 사시면서,
그분이
이 땅에서 사셨던 삶,
곧 번제물의 삶을
우리 안에서
반복하실 것이다.
우리 자신으로는
이러한 삶을
살 수 없지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이러한 삶을
사실 수 있다.
그분께 안수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우리와 하나 되게 하고
우리 자신을
그분과 하나 되게 한다.
그럴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분의 삶을
반복하실 것이다.
이것이
번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번제물이신 그리스도께
안수하는 것은
동일시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속죄의 문제,
곧 화해의 문제이기도 하다.
화해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문제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가지고 계신 문제들이
처리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 안수하는 것은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문제들을 처리하여
우리의 상태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번제물에 손을 얹는 것은
화해를 위한 것이다.
레위기 1장 5절에서,
제물을 잡는 것은
용서받도록
제물의 피를 흘리기 위한 것이다.
그 피를
제단 주위에 뿌리는 것은
제단 위에 태워진
제물이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기 위한 것이다.
레위기 1장 6절은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조각들로 잘랐다고
(각을 떴다고)
말한다.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이러한 학대를 거치셨다.
그분은
가죽이 벗겨지셨고
각이 떠지셨다.
제물의 가죽을
벗기는 것은
제물의 외적 표현을
벗기는 것이다.
번제물의 가죽이
벗겨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그분의 인간 미덕의
외적 표현이 벗겨지는 것을
허락하셨음을
의미한다.
제물의 각을 뜨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번제물로서
조금도 보류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자신의 온 존재가 부서지도록
허락하신 것을
상징한다.
레위기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제물들로 누릴 수 있다는
사상이 감추어져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리스도를
번제물로 누릴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이지 않지만,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번제물로 취해야 하고
그분을
번제물로 누려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체험과 누림을 가지려면,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 예수님,
당신은
놀라운 분이십니다.
당신은 항상
저와 함께하시는
완결되신 영이십니다.
당신은
저와 함께하시면서
저의 번제물이 되십니다.
주님,
저는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없지만,
당신은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일 수 없지만,
당신은 항상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이셨고
지금도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이십니다.
주 예수님,
이제 저는
당신을
저의 번제물로 취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로
누릴 것이다.
헌신의 의미는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사람들은
수소와 숫양을
희생 제물로 드렸다.
원칙은
다음과 같다.
수소는 원래
우리에 살며
밭을 갈고
수레를 끄는 데
사용되었다.
이제 수소는
우리에서 끌어내어져
제단 옆에 두어졌다.
이것은
수소의 위치가 바뀐 것이다.
그런 다음 수소는
죽음당하고
제단 위에 놓이게 되며
불태워져서
하나님께 달콤한 향기가 된다.
이것은
수소의 용도가
바뀐 것이다.
이처럼 이 수소는
희생 제물이 된다.
제단 위에 드려진
모든 희생 제물은
하나님께 속하며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누리시기 위한 것이다.
간략히 말해서,
희생 제물이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헌신의
예표이다.
헌신의 의미는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의 만족을 위하여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신약에서
하나님께 속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매일
번제물로 드려야 한다.
차이점은
구약의 백성이
죽은 희생 제물을 드렸던 것과는 달리
우리는
살아 있는 희생 제물을
드린다는 것이다.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은
주님의 만족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만족하시게 해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께
자신을 헌신하는 것의
참된 의미이다.
우리가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는 목적은
그분을 향하여
사는 데 있다.
그분을 향하여 사는 것은
그분을 위하여 사는 것보다
더 높은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살 때
우리와 그분은
여전히 둘일 수 있지만,
그분을 향하여 살 때
우리와 그분은 분명
하나가 된다.
그분을 향하여 살 때,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생명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으로도 취한다.
우리의 모든 생활과 행동에서
우리는
주님께 협력해 드리고
주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를 통해 사시도록
허락해 드린다.
하나님은
우리가
제물들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로
그분께 경배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절하거나
무릎을 꿇거나
심지어 단지
노래하고 찬양함으로
그분께 경배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으신다.
참된 경배,
즉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는 경배는
하나님께
우리가 체험한
그리스도를 드리고
우리의 체험에 따라
그리스도를 드림으로써,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체험한 것들을
되새기면서
하나님께
경배하러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찾고 계시며
갈망하시는 경배이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유지하고 강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심프슨(A. B. Simpson)은
그가 지은 찬송에서
“주의 부활 알았으니
죽음 두렵지 않네”
(찬송가 362장)라고 말한다.
우리 안에는
모든 것을 충족해 주는
공급이 있으며,
이 공급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다.
이것이
바울이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 4:13)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는
결혼 생활에서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고,
교회생활에서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으며,
가정생활의 모든 어려움과
교회생활에서의 모든 문제를
이길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체험들 안에서
그분을 체험할 수 있고
번제물로서
그분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번제물을 태워 바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가
그분의 만족과 안식을 위하여
그분께 올라갈 것이다.
하나님은
만족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달콤하고 기쁘게
받아들이실 것이다.
이것이
번제물의 의미이다.
‘매일의 번제물’을
드리는 생활을 하는 것은
살아 있는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이다.
번제물은
우리의 헌신,
곧 우리가
자신을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의
예표이다.
헌신의 의미는
우리 자신을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구약에서 매일
번제물을 드리는 것은
신약에서
하나님께 속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매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예표한다.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과
교회생활에서
우리는
매일의 번제물을
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로
아버지 하나님께
경배드림으로
그분의 갈망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제물들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로
그분께 경배하기를
원하신다.
제물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행복하시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합당한 경배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문제이다.
우리가
번제물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가
그분의 만족을 위해
그분께 올라갈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번제물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그분께 드리는 것에
만족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달콤하고 기쁘게
받아들이실 것이다.
이것이
번제물의 의미이다.
1일
주님의 회복 안에는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 무언가 회복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에스라기 3장은 첫 번째로 회복된 것이 제단이었음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하나님의 집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제단을 회복해야 한다. 제단은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는 곳이다. 이것은 참된 헌신의 회복이다.
에스라기 3장에 따르면, 그들은 제단 위에 번제물 외에는 어떤 것도 드리지 않았다. 그들은 속죄제물이나 속건제물이나 화목제물이나 다른 어떤 제물도 드리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번제물이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임을 안다. 속죄제물은 죄에 대한 것이고, 속건제물은 우리의 허물에 대한 것이며, 화목제물은 우리의 화평을 위한 것이고, 소제물은 우리의 만족을 위한 것이지만, 번제물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집을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집은 우리가 용서받기 위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기 위한 것도 아니며, 우리의 누림을 위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집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번제물만 드려야 한다. 즉,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과 우리 전 존재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반드시 제단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생활의 출발이다. 교회생활을 하려면 먼저 모든 것을 반드시 제단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대학 학위와 학식을 드려야 하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우리의 모든 소유와 전 존재를 제단 위에 드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의 집은 회복될 수 없다.
몇몇 지역에서 나는 어떤 형제들이 교회생활 안에서 책임을 맡고 싶어 하지만 여전히 세상 가운데 있는 것을 목도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소유와 전 존재를 제단 위에 두지 않았다. 각지에서 교회들을 건축하기 위해 우리는 제단 위에 모든 것을 드리는 헌신이 필요하다.
많은 교회들이 추구하는 이들이 교회에 더해지는 것에 대해 참된 부담이 있다.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는 적은 인수의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솔직하게 말하겠다. 만일 여러분이 모든 것, 즉 여러분이 소유한 것과 할 수 있는 것과 여러분의 존재를 제단 위에 드린다면, 주님께서 추구하는 이들을 이끌어 오실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익과 만족을 위해 모든 것을 제단에 바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는 헌신이 필요하다.
에스라기 3장에서 그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번제물을 드렸다. 그들은 끊임없이 번제물을 드렸다. 제단 위에는 불태워지는 것이 항상 있었다. 오직 이런 종류의 헌신만이 교회들의 건축을 이끌어 올 수 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께 진지하다면, 모든 것을 제단 위에 드려야 한다. 우리는 예루살렘에 돌아와서도, 바빌론에서 살았던 것처럼 계속 살아서는 안 된다. 예루살렘에서의 생활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권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주님의 회복 안의 생활은 절대적으로 교회들의 건축의 회복을 위한 생활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몇몇 교회들은 증가가 거의 없었다. 그들이 주님께 진지하다면, “주님, 우리에게 증가를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라고 필사적으로 기도할 것이다. 우리는 차갑거나 뜨거워야 한다. 만일 우리가 차갑다면, 함께 얼어붙을 정도가 되자. 만일 우리가 뜨겁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미쳤다고 말할 정도로 뜨겁게 되자. 만일 우리가 그렇게 불타오른다면, 교회의 증가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 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주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주님의 회복을 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