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elopment
of the Kingdom of God
into a Realm
over Which God Rules
in His Divine Life
하나님의 그 왕국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
다스리시는
한 영역 안으로의
그 발달(성장, 발전, 전개, 개발)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 자신이다
― 막 1:15, 마 6:33, 요 3:3.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을
내용으로 가지고 있다.
하나님 자신이
그분의 왕국의 내용으로서
모든 것이시다
― 고전 4:20, 15:28.
하나님은
생명으로서
신성한 생명의
본성과 능력과 형태를
가지고 계시며,
이 생명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을 형성한다
― 엡 4:18, 요 3:15.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왕국이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 기본 원칙을
보아야 한다
― 요 3:3, 5, 15.
사실상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은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성한 생명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의 문제이다
― 롬 8:2.
하나님의 왕국은
신성한 종(種)의 영역이며,
이 영역 안에는
모든 신성한 것들이 있다
― 요 3:3, 5.
하나님은
사람이 되시어
사람의 종 안으로 들어오셨고,
사람은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어
신성한 종 안으로 들어간다
― 롬 8:3, 1:3-4, 요 1:12-14.
신성한 영역,
곧 신성한 종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나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가져야 하며,
이것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 안에 있는
하나님-사람들이 된다
― 요 1:12-13.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종(種)이 되고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갔다
― 요 3:3, 5.
하나님의 왕국은
신성한 생명의 영역으로서,
이 생명이
움직이고
일하고
다스리고
통치함으로써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 마 6:13하, 요 3:3, 5, 15-16.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조성된
한 유기체로서,
그분의 다스림을 위한
생명의 영역이다.
이 영역 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생명에 의해
왕으로서 다스리시며,
신성한 삼일성이신
그분 자신을
신성한 생명 안에서
표현하신다
― 요 3:5, 15:1-8, 16, 26.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생명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자신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곧 거듭남이다
― 요 3:5, 15, 요일 5:11-12.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의 씨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며,
이 씨는
그분의 믿는 이들,
곧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안에 뿌려져서
하나의 영역으로 발전되는데,
하나님은
이 영역을
그분의 왕국으로 삼으시어
신성한 생명 안에서
다스리신다
― 눅 4:43, 8:5, 10, 17:20-21,
막 4:3, 26-29.
하나님의 왕국은
놀라운 한 인격,
곧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 골 2:9.
그분께서 계시는 곳마다
하나님의 왕국이 있다
― 눅 17:20-21.
하나님의 왕국은
그분과 함께 있으며,
그분은
이 왕국을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져오신다
― 눅 4:43, 17:21.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국의 씨로서
하나님의 선민 안으로 뿌려져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으로 발전하신다
― 눅 8:5, 10, 막 4:26-29.
우리는
우리 안으로 뿌려진
신성한 씨 안에 담긴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의
발전을 체험함으로써,
영원한 왕국 안으로
넉넉히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 벧후 1:1, 4-11.
우리는
동일하게 보배로운
놀라운 믿음을 할당받았으며,
이 믿음은
모든 것을 포함한 씨이다
― 벧후 1:1.
모든 신성한 풍성이
이 씨 안에 있지만,
우리는 반드시 부지런히
이 풍성을 발전시켜야 한다.
성숙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이
우리가 이미 얻은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 벧후 1:1-8, 3:18.
이 미덕들을 발전시킴으로써
우리는
생명이 자라며,
결국에는
성숙에 이를 것이고
그리스도로 충만할 것이며
장차 올 왕국 안에서
왕들이 될
자격과 준비를
갖출 것이다
― 엡 4:13-15, 골 2:19, 벧후 1:11.
우리는
영원한 왕국 안으로
넉넉히 들어가기 위해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의
성장과 발전을
부지런히 추구해야 한다
― 벧후 1:10-11.
우리는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이
(벧후 1:3-7)
발전하는 과정 가운데서
누리게 되는
넘치는 공급으로,
우리 주님의
영원한 왕국 안에
들어가는 데
부족함이 없는,
넘치는 공급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넘치는 공급을 받아,
우리의
탁월한 미덕들(에너지)로 말미암아,
곧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의
모든 풍성으로 말미암아,
장차 올 왕국에 들어갈
능력과 자격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빛나는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 벧후 1:3, 벧전 5:10.
생명이 자라고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이 발전함으로써,
우리는
영원한 왕국 안으로
넉넉히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나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간
이들로서,
우리는
우리 영의 직감에 의해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림을
받는 데로
회복되어야 한다
― 마 5:3, 고전 2:11, 막 2:8.
무죄 시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의 원칙을 보며,
양심 시대에서는
자기 지배의 원칙,
그리고 인간 통치 시대에서는
인간 지배의 원칙을 본다.
타락 이전에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림을
받았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살았고,
하나님께 책임을 졌다
― 창 2:16-17.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때부터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때까지,
하나님은
사람 안에 있는 양심을
견고하게 하셔서,
사람을 통치하는 일에서
그분을 대표하게 하셨다
― 행 24:16.
홍수 후에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림과
자기 지배에도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권위를 주어
그분을 대표하여
사람을 다스리게 하셨다
― 창 9:6, 롬 13:1.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인간 지배로 하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실 때 반드시
사람을
인간 지배에서
신성한 다스림으로
회복시키셔야 한다.
이럴 때 다시 한번
사람은 단순하게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위 아래서
하나님 앞에
살 수 있게 된다
― 마 5:3, 8, 6:33.
하나님의 회복의
계획에 따르면,
사람은 반드시
인간 지배부터 시작해서
중간에 자기 지배를 경유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에 이르기까지
되돌아가야 한다.
양심을 처리하는 것의
최종 목표는 단지
우리를
자기 지배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고
하나님 자신께로
우리를 회복하여,
그 결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 마 5:3.
자기 지배와
하나님의 다스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자기 지배는
우리가
우리 양심의
느낌에 의해 살며,
우리 양심에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 행 24:16.
하나님의 다스림은
우리가
우리 영의
직감에 의해 살며,
직감에
책임을 지는 것
곧 하나님께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영 안에는
직접적인 감각을 가지고
무언가를
깨닫고 분별하며 인지하는
기능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영안에 있는
직감이다
― 고전 2:11, 막 2:8.
우리가
우리의 직감에 의해 살고
이 직감에 의해 통제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생활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림을 받는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영의 직감에 의해,
생명의 감각에 따라
산다
― 롬 8:6.
신성한 생명은
가장 풍성하고
가장 강하며
가장 예민한
느낌을 가진
가장 높은 생명이다
(엡 4:18).
이 느낌이
생명의 감각이다.
생명의 감각에 의해
우리는
타고난 생명 안에서 사는지
아니면 신성한 생명 안에서 사는지,
육체 안에서 사는지
아니면 그 영 안에서 사는지를
알게 된다
― 롬 8:6.
생명의 감각은
우리를
안내하고 통제하고
지배하고 지시한다
― 롬 8:4.
하나님의 왕국에는
실재가 있으며,
이 실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림 아래서
신성한 생명을 사는 생활이다
― 마 5:3, 8, 20, 6:33,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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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하나님의 왕국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 다스리시는 영역으로 발전함”
6일
행 24:16
이 때문에
나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하여 항상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간직하려고
훈련하고 있습니다.
롬 8:6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인간 통치 아래에 사는
모든 사람은
사람 앞에서 생활한다.
… 그들은
사람의 판결과 주목 아래
있지 않을 때에는 언제든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러나 자기 지배 아래에
있는 이들은
그렇지 않다.
… 그들은
자기 양심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모든 말과 행동에
제한을 받는데,
이는
사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기 양심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들은
자기 양심이 인정할 때에만
행동하기 때문에
자유롭다.
외적으로는
그들이 여전히
인간 통치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지적으로
이러한 인간 통치는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
충분하기 때문이다.
양심이
철저히 처리될 때에만
타락한 인간 통치의 상태에서 구출되어
양심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럴 때 모든 일에 있어서
양심의 느낌을 따라
살며 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양심을 처리하는 것의
최종 목표는 단지
우리를
자기 지배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다만
양심의 느낌에 머무른다면,
우리는 여전히
절반 정도는
타락한 상태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을 처리하는 것은
단지 사람으로
인간 통치에서
자기 지배로,
사람의 시야에서
양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욱 사람으로
자기 지배를 거쳐
하나님의 다스림에 이르도록,
즉 양심을 거쳐
하나님 앞에
살게 하려는 것이다.
… 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자신께로
회복되는 것이다.
따라서 양심을 처리하는
최종 목표는
우리를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자기 지배와
하나님의 다스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자기 지배는
사람이
자기 양심의
느낌에 의해 살며,
자기 양심에
책임을 지는 것인데 반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은
사람이
영의
직감에 의해 살며,
직감에
책임을 지는 것
곧 하나님께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 안에
살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직감을
하나님의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감에 의해 살고
직감에 의해 통제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생활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양심은
옳고 그름에 대한
느낌만 지니고 있다.
양심은
그릇되고 악한 것은 모두
유죄 판결하며,
옳고 선한 것은 모두
의롭다고 한다.
그러나 직감은
선악과 옳고 그름을
능가한다.
직감은
그릇된 것 이상이고
옳은 것 이상이며,
악한 것 이상이고
또한 선한 것 이상이다.
직감은
그릇되고 악한 것을 모두
유죄 판결하지만,
옳고 선한 것이라고
반드시 다 인정하지는 않는다.
직감은 오직
하나님께 속하고,
그 영께 속하며,
생명에 속한 것만을
받아들인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께 속하고,
그 영께 속하며,
생명에 속한
말만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형제가
말씀을 전할 경우,
그가
진리를 말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양심에 의해
점검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하고,
무슨 주제를 선택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시어
그로 하여금
말하게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들은
선악과 옳고 그름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양심의 느낌으로는
이 방면에서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오직 직감을 통해서만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을
만질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
양심과 직감의
이러한 차이점들은 또한
자기 지배와 하나님의 다스림 사이의
차이점들이기도 하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세 가지 지배 형태가
합쳐진 상태로
살고 있다.
그들의 존재 중
대부분이
인간 통치를 받고 있는데,
그들은 여전히
이 인간 통치를 받아야 한다.
그들의 존재 중
또 한 부분은
자기 지배인
양심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 중
극히 일부분만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으면서
직접 하나님의 통제를 받고 있을 따름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더 철저히
양심을 처리하여
소극적으로는
인간 통치에서 구출되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에
있어야 한다.
5일
고전 2:11
사람의 일을
사람 속에 있는
사람의 영이 아니면
누가 알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막 2:8
예수님께서
그들이 이렇게
속으로 따지고 있는 것을
즉시 영 안에서 다 아시고
“왜 여러분은
마음속으로
이러한 것을 따지십니까?
몇몇 성경학자들은
성경을
일곱 시대,
곧 무죄 시대,
양심 시대,
인간 통치 시대,
약속 시대,
율법 시대,
은혜 시대,
왕국 시대로
나누고 있다.
처음 세 시대는
통치의 원칙에 따라
분류된다.
무죄 시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의 원칙을 보며,
양심 시대에서는
자기 지배의 원칙,
그리고 인간 통치 시대에서는
인간 지배의 원칙을 본다.
…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죄라는 장애물이 없었다.
이것이 소위
무죄 시대였으며,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림을 받았다.
그때 사람은
하나님 앞에 살았고,
하나님께 책임을 졌다.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
안팎으로 죄가 가득하게 되었고,
그래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사람을 떠나셔야 했다.
그 결과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때부터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때까지,
하나님은
사람 안에 있는
양심을 견고하게 하셔서,
사람을 통치하는 일에서
그분을 대표하게 하셨다.
… 이 시대에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게
다스림을 받으며
자신의 양심에 대해
책임을 졌다.
사람은
이러한 자기 지배 아래에서
불행히도 또다시 타락했다.
사람은
양심의 책망과 통제를 무시했고,
그 결과
살인하고 간음에 빠졌으며,
또한 완전히 타락하여
사악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홍수로 말미암아
이러한 세대를 심판하셨다.
홍수 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자기도
‘사람’에게
피 흘림을 당하게 된다.”
(창 9:6)
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림과
자기 지배에도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권위를 주어
그분을 대표하여
사람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러므로 오래 지나지 않아서
국가가 시작되었고,
인류 가운데
정치적 권력의 지배나
사회적 권력,
또는 가족 가운데의 통제가
생기게 되었다.
… 이러한 것들은
사람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이다.
이 때문에
로마서 13장 1절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위자들에게
복종하십시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고,
사람이
사람에게 책임을 지는
인간 통치 시대이다.
통치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의 타락은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자기 지배로의 타락이었고,
또한 자기 지배에서
인간 통치로의 타락이었다.
사람이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으면 받을수록
사람은
더 고상하게 되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으면 받을수록
사람은
더 천하게 된다.
오늘날 사람의 상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완전히 거절한 상태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에 의해
통제를 받음으로
자기 지배 아래 있지만,
그들의 양심의 영향력은
매우 약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간 통치의 다스림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는데,
그들은
어떤 사람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
결코 순응하지 않는다.
그러한데도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인간 통치 시대에서도
여전히 실패했다.
그들은 인간 통치에
불순종할 뿐 아니라
벗어나고자 하며,
심지어 인간 통치를
전복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반역적이고 무질서한 상태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하나님과 자기와 사람의
지배를 받는 데서
완전히 실패했다.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인간 지배로 하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실 때 반드시
사람을
인간 지배에서
신성한 다스림으로
회복시키셔야 한다.
이럴 때 다시 한번
사람은 단순하게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위 아래서
하나님 앞에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은
한순간에 실현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인간 지배로 하락할 때,
그 사이에 있는
자기 지배의 단계를 지나
하락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회복의 계획에 따르면,
사람은 반드시
인간 지배부터 시작해서
중간에 자기 지배를 경유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에 이르기까지
되돌아가야 한다.
자기 지배는
인간 지배와
하나님의 다스림 사이에 있는
중간 단계이므로,
사람은
구원을 얻을 때 먼저
인간 통치에서 벗어나
자기 지배로 되돌아가야 한다.
4일
벧후 1:10-11
그러므로 형제님들,
더욱 부지런하여
여러분이
부름받은 것과
선택받은 것을
견고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이러한 것들을 행한다면,
언제라도 결코
걸려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여러분은
풍성하고 넘치는
공급을 받아,
우리의
주님이시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11절에서
영원한 왕국은
우리의
주님이시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진
하나님의 왕국을
가리키는데
(단 7:13-14),
이 왕국은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눅 19:11-12).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성장하여
성숙에 이르기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본성의 미덕들이
발전하는 것을
추구하는,
신실한 믿는 이들에게
보상이 될 것이다.
그들은
천년왕국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왕의 직분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딤후 2:12, 계 20:4, 6).
베드로후서 1장
3절부터 11절까지는
… 우리 속에서
왕국이 발전하는 것이
사실상 우리가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보여 준다.
3절과 4절에서
베드로는
신성한 능력이
생명과 경건에 관련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고 나서
5절부터 11절까지는
우리가
생명이 자라고 발전하여
영원한 왕국에
넉넉히 들어가는 것에 대해
말한다.
베드로후서 1장
5절부터 7절까지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이
많은 단계를 통해
발전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이
(벧후 1:3-7)
발전하는 과정 가운데서
누리게 되는
넘치는 공급으로,
우리 주님의
영원한 왕국 안에
들어가는 데
부족함이 없는,
넘치는 공급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넘치는 공급을 받아,
우리의
탁월한 미덕들(에너지)로 말미암아,
곧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의
모든 풍성으로 말미암아,
장차 올 왕국에 들어갈
능력과 자격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빛나는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다만
구원받는 것만이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
신성한 생명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을
추구함으로써
왕국을
보상으로 얻는 것이다.
생명의 씨는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이 씨는 다만
자라고 발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속생명의 성장에 의해
매일
왕국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 안에서
왕국이 발전하려면
우리는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비우며,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문화나, 종교나,
윤리나, 도덕이나,
철학이나, 성격 개조나,
영적이 되고 성경적이 되고
거룩하게 되고 승리하려는
노력으로 점유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만 관심하고
우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성장만을
관심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입지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자라시도록
내어 드려야 한다.
우리는 또한
오늘
우리의 혼 생명을 잃음으로써
(마 16:25-28)
왕국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혼 생명과 그 누림을
잃어버릴 때
변화된다.
… 우리가
혼의 누림을 잃어버릴수록,
우리는 장차
왕국에
더욱더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이다.
베드로후서 1장
1절부터 4절까지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라게 하는 능력인
믿음의 씨를 주셨고,
우리가
그분과 동역한다면
비와 성장과 수확을 주시겠다는
약속들을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약속들을 취함으로,
곧 그분의 말씀을 받음으로
믿음의 씨를
부지런히 발전시켜야 한다.
베드로후서 1장
5절부터 11절까지에 있는
베드로의 말에 따르면,
성숙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은
이미 우리가 받은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동일하게
보배롭고 놀라운
믿음을 할당받았으며,
이 믿음은
모든 것을 포함한 씨이다.
모든 신성한 풍성이
이 씨 안에 있지만,
우리는 반드시
이 풍성을
미덕으로 발전시키기를
힘써야 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우리의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자제를,
자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사랑을,
형제 사랑에 신성한 사랑을
더함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런 미덕들을 발전시킴으로써
우리는
성장하여
결국에는
성숙에 이르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될 것이고,
바울의 말과 같이
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분량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엡 4:13).
그때 우리는
장차 올 왕국 안에서
왕들이 될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3일
눅 17:20-21
… “하나님의 왕국은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라고도
말하지 못할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이
여러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막 4:26-27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왕국은
이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고서
밤낮 자고 깨고 하는 동안에
그 씨가 싹 트고 자라지만,
어떻게 그리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왕국과 교회의
차이 또는 관계를
보아야 한다.
이것을
분명하게 분별하고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생명이든
생명은
일종의 왕국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왕국은
생명 자체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생명이지만,
교회는
생명이 아니며
생명이
교회도 아니다.
교회는
생명의 산출물이다.
신성한 생명은
왕국이며
이 생명은
교회를 산출한다.
… 생명의 실재인
왕국이 없다면,
교회는 결코
산출되거나
건축될 수 없다.
교회를 산출하고
건축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왕국이 필요하다.
왕국은 사실상
교회의 실재이다.
복음은
생명이신 하나님을 가져오며,
이 생명은 곧
왕국이다.
왕국은
생명의 영역으로서,
이 생명이
움직이고
일하고
다스리고
통치함으로써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이 영역이 곧
왕국이다.
사실상 생명의 영역인
왕국은
생명 자체이다.
… 자신의 영역을 가지는
이 신성한 생명이
교회를 산출한다.
여러분이
얼마나 많이 가르침을 받더라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그 왕국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그 유일한 길은
생명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또 하나님 그분 자신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것은
여러분의 개념 안에서
(in … concepts;
사고방식[생각, 관념] 안에서)
한 변화를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세에 대한 여러분의 개념들,
그 율법에 대한 여러분의 개념들,
또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한
여러분의
세상적인, 타고난 개념들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이 모든 개념들은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반드시
회개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그 왕국은
그분의 믿는 이들,
곧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안으로
뿌려지신,
또 그 위에(over which)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
그분의 왕국으로(as)
다스리실 수 있는
한 영역 안으로
자라는
생명의 그 씨이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의
(Its; 하나님의 그 왕국의)
입장은
거듭남이고
(요 3:5),
또 그것의 발달은
그 믿는 이들의
그 신성한 생명 안에서의
성장입니다
(벧후 1:3-11).
그것은
(It; 하나님의 그 왕국은)
오늘날
그 교회이고,
그 안에(in which)
그 신실한 믿는 이들이
살며
(롬 14:17),
또 그것은
그 천 년 안에서
(계 20:4, 6)
그 이기는 성도들에게
한 상속 재산 보상으로
(as an inheritance reward)
(갈 5:21, 엡 5:5)
그 오고 있는
(coming; 다가오는, 장차 올)
왕국으로
발달할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it; 하나님의 그 왕국은)
하나님의 그 영원한 왕국,
곧 모든 하나님의 구속된 이들이
영원토록
그 새 하늘과 또 새 땅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of; …이라는)
그 영원한 축복의
한 영원한 영역인
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입니다
(계 21:1-4, 22:1-5).
영원 안에서
그 새 예루살렘은
과정을 거치신 그 삼일 하나님을
밖으로 비추는
그 모든 믿는 이들의
그 총계일(totality; 전체일) 것입니다.
그 새 땅은
하나님께서
그 민족들 위에
(over the nations;
그 종족들[나라들, 국가들] 위에)
다스리실
한 영역일 것입니다.
이 다스리시는 영역은
그 새 예루살렘의
그 빛 비춤에 의하여
형성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 새 예루살렘의
그 빛 비춤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한 영역을 산출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그 왕국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라는 누가복음 17장 20절의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왕국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임을
가리킨다.
22절부터 24절까지는
하나님의 왕국이
그리스도 자신임을
증명한다.
그리스도는
바리새인들에게서
왕국에 대하여
질문을 받으셨을 때
바리새인들 가운데 계셨다.
구주가 계시는 곳마다
하나님의 왕국이 있다.
하나님의 왕국은
그분과 함께 있으며,
그분은
이 왕국을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져오신다
(22절).
그분은
하나님의 왕국의 씨로서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뿌려져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으로 발전하신다.
그분은
부활하신 이후로
그분의 믿는 이들 안에 계신다
(요 14:20, 롬 8:10).
이런 이유로,
생명 안에 있는(in; 안에서)
그것의(its; 그 왕국의) 실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with; …를 가지는)
하나님의 그 왕국은
오늘날
그 교회 안에 있습니다
(롬 14:17).
2일
요 3:3
…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습니다.”
요 3: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그대에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물과 그 영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계시는
요한복음 3장의
두 절에 근거한 것이다.
… 3절은
왕국을 보는 것에 대해
말하고,
5절은
왕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말한다.
왕국을 보기 위해서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과 그 영으로
나야 한다.
물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하는데,
우리는 모두
이 죽음 안으로
침례 받았다.
그 영은
부활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3장은
주님을 참으로 추구하는 이였던
니고데모가
밤에
주님을 만나러 온 것에 대해
말한다
(2절).
… 주님은
… 그가
새로 태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에게 밝혀 주셨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었는데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4절)
라고 말함으로
반응하였다.
그때 주님은
그에게
두 번째 출생,
새로운 출생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우리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있는
역량이 없다.
새로 태어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하는
물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그 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 부활되어
또 다른, 곧 새 종種의
(of another, new species),
곧 새 종류의
(new kind)
한 새 사람이
(a new person)
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이 신성한 다스림은
하나의 영역으로서,
신성한 통치의 영역일 뿐 아니라
신성한 종(種)의 영역이며,
이 영역 안에는
모든 신성한 것들이 있다.
식물의 왕국은
식물 종의 영역이고
동물의 왕국은
동물 종의 영역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왕국은
신성한 종의 영역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그 종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하여
육체가 되셨고,
또 사람은
그분의
신성한 신격 안에서가 아니라,
그분의
생명과 또 본성 안에서
하나님이 되어,
그분의 신성한 종 안으로
들어옵니다.
요한복음 3장 안에서
하나님의 그 왕국은
하나님의 그 다스림보다는
하나님의 그 종을 언급합니다.
어떤 것이
동물의 그 종 안에 있기 위하여,
그것은 반드시
한 동물에게서 태어나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Also)
그 신성한 영역,
곧 그 신성한 종의 그 영역 안으로
들어오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서
그 신성한 본성과 또 생명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그 형상 안에서
또 그분의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종류,
곧 하나님의 종(種) 안에서(in; …으로)
창조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창세기 1장은
그 살아 있는 것들의 각각이
그것의 종류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사람의 종류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또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종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믿는 이들이,
거듭남에 의하여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서
그분의 신격 안에서가 아니라
그분의 생명과 또 본성 안에서
그분의 아이들이 되고
(요 1:12-13),
아담이 그러했던 것보다 더 많이
(more[더욱] … than Adam was)
하나님의 종류 안에 있습니다.
아담은
그 내적인 실재,
곧 그 신성한 생명 없이
오직 하나님의
그 외적인 모양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그 신성한 생명의
그 실재를 가지고 있고,
또 우리의 전체의 존재 안에서
변형되고 있으며
또 주님의 형상과
같은 형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 모든 하나님의 아이들이
그 신성한 종의
그 신성한 영역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입니다.
이렇게 하여(Thus; 이와 같이),
거듭남 안에서
하나님께서(God)
하나님들을(gods)
낳으십니다(begets; 얻으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낳습니다.
염소들은
염소들을 낳습니다.
… 만약 하나님의 그 아이들이
하나님의 종류 안에,
곧 하나님의 종 안에
있지 않다면,
그들은
무슨 종류 안에 있습니까?
만약 그들이
하나님들이 아니라면
그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우리 모두는
하나님들입니다.
하지만 말로 표현함을 위하여
(for utterance),
그 신학적인 오해
(misunderstanding;
착오, 의견 차이, 언쟁, 불화)
때문에,
우리가
그 신성한 종 안에 있는
즉, 하나님의 그 왕국 안에 있는
하나님-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 하나님-사람들이,
이들이(who)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아이들이고,
하나님의 그 집을 구성할 뿐 아니라
(딤전 3:15, 벧전 4:17, 요 14:2)
또한 그것으로(with which)
그리스도의 그 몸이 건축되는
그 구성 요소들이며,
또 그리스도의 그 몸이
하나님의 또 그리스도의
그 영원한 왕국인
그 새 예루살렘을
완결할 것입니다
(will consummate;
완성할[완전하게 할] 것입니다)
(고전 6:9, 엡 5:5, 벧후 1:11, 계 11:15).
신언노트, 2019 05 12
하나님의 그 왕국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
다스리시는
한 영역 안으로의
그 발달
하나님의 그 왕국은
하나님 그분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의 그 왕국은
하나님을
그것의 내용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그분 자신께서
그분의 왕국의
그 내용인
각각의 모든 것들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그 신성한 생명의
그 본성, 능력, 또 모양을(shape; 형태를)
가지고 계신데,
이는(which)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그 영역을 형성합니다.
하나님의 그 생명은
하나님의 그 왕국이고
또한 하나님의 그 왕국 안으로의
우리의 입장입니다
(our entrance;
우리의 입구[문, 첫 출발, 들어감,
들어갈 권리, 입장권入場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기본적인 원칙을
(this basic principle;
이 기초적인[근본적인] 법칙을)
보아야만 합니다.
실제로(In actuality),
하나님의 우리 위에 다스리심은
(God’s reigning over us)
한 외적인 문제가 아니고
오직 그 신성한 생명의
그 본질적인
(innate;
고유한, 타고난,
내생內生하는, 안에서 생기는)
능력의
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그 왕국은
그 신성한 종種의
(species; 종류의)
그 영역이고,
그 안에(in which)
그 모든 신성한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사람의 그 종 안으로
들어오셨으며,
또 사람은
신격 안에서가 아니라
생명과 또 본성 안에서
하나님이 되어
그 신성한 종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 신성한 영역,
곧 그 신성한 종의
그 영역 안으로
들어오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서
하나님의
그 생명과 또 본성을
가질 필요가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thereby;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그 왕국 안에 있는
하나님-사람들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나게 되었고
(그 결과; to be)
하나님의 그 종이 되었으며
또 하나님의 그 왕국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그 종이 되고
또 하나님의 그 왕국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나님에게서[of]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왕국은
그 신성한 생명의
그 영역이고
이 생명이(for this life)
움직이고(to move),
일하며,
다스리고,
또 통치하여
그 결과(so that)
생명이
그것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왕국은
그분의 다스리심을 위한
생명의 그 영역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성되는
한 유기체인데,
그 안에서
(in which;
생명의 그 영역 안에서)
그분께서
그분의 생명에 의하여
다스리시고
그 신성한 생명 안에서
그 신성한 삼일이신
그분 자신을
표현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왕국 안으로
들어오는
그 유일한 길은
생명이신 하나님을
(God as life;
하나님을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또 하나님 그분 자신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하나님의 그 왕국은
그분의 믿는 이들,
곧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안으로
뿌려지신
(sown; 뿌려지시는)
생명의 그 씨이신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시고,
또 한 영역 안으로 발달하는데
그 위에(over which)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
그분의 왕국으로(as; …과 같이)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그 왕국은
한 놀라운 인격,
―주 예수 그리스도,
곧 그 삼일 하나님의 그 체현이십니다:
그분께서 계시는 곳은 어디든지,
하나님의 그 왕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왕국은
그분과 함께 있고,
또 그분께서
그것을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져오십니다.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그 왕국의
그 씨이셔서
(그 씨이시고 그 결과[to be])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안으로
뿌려지시며
(그 결과[to develop])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영역 안으로
발달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안으로 뿌려진
(has been sown)
그 신성한 씨 안에 담겨 있는
그 신성한 생명과
또 그 신성한 본성의
그 발달을 체험할
필요가 있고
그 결과(so that)
우리가
그 영원한 왕국 안으로의
한 넉넉한 입장을
(a rich entrance;
한 귀중한[값진, 호화로운, 선명한, 강렬한,
의미심장한, 풍부한] 들어감을[입장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놀라운
동등하게 귀중한
(the wonderful equally precious;
그 동일하게[똑같이] 보배로운 놀라운)
믿음을
(faith; 신앙을, 신조를, 신념을, 확신을)
할당받았고,
또 이 믿음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한 씨입니다:
그 모든 신성한 부가(riches; 풍부가)
이 씨 안에 있지만,
우리는 반드시
그것들을(them)
발달시키는 데
(to develop;
성장시키도록)
부지런해야만 합니다
(must be diligent;
성실해야만[애써야만] 합니다);
성숙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무엇을
발달시키는 것입니다.
이 미덕들을 발달시킴에 의하여,
우리가
생명 안에서 자라고(grow),
또 우리가
결국 성숙에 이를 것이고(will … reach),
그리스도로 충만할 것이며,
또 그 오고 있는 왕국 안에서
왕들이 되는
자격이 주어질 것이고
또 준비될 것입니다
(will … be … equipped;
장비가 갖추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원한 왕국 안으로의
한 넉넉한 입장을 위하여
그 신성한 생명과
또 그 신성한 본성의
그 성장과 또 발달을
추구하는 데
부지런해야만 합니다:
그 신성한 생명과
또 신성한 본성의
그 발달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그 풍부한(bountiful) 공급이
우리의 주님의
그 영원한 왕국 안으로의
한 넉넉한 입장을
우리에게
풍부하게(bountifully) 공급할 것입니다.
이 공급이
우리가
그 오고 있는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고
또 (우리에게) 자격을 줄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그 웅장한 영광에 이르기까지
(unto …; 이르도록, …을 향하여)
우리의 탁월한 미덕들인
(에너지인
[as … energy; 힘인, 활기인])
그 신성한 생명과
또 신성한 본성의
그 모든 부에 의해서입니다.
그 영원한 왕국 안으로의 그 입장이
우리에게
넉넉하게
(richly;
풍부하게, 부유하게, 귀하게, 진하게, 후하게)
공급되는데
(이는) 생명 안에서의
우리의 성장을 통해서이고
또 우리 안에 있는
그 신성한 생명의
그 발달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고
하나님의 그 왕국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로서,
우리는
우리의 영의 그 직감直感에 의하여
(by the intuition;
그 직관直觀[직각直覺]에 의한)
하나님의 그 직접적인 다스리심에까지
회복될 필요가 있습니다:
무죄의 그 시대 안에서
(In the dispensation of innocence;
순진함의[순결의, 무지의] 그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of God’s rule)
그 원칙을 봅니다;
양심의 그 시대 안에서
자아-다스림의
그 원칙을 (봅니다);
또 사람의 통치의
(of human government)
그 시대 안에서
사람의 다스림의
그 원칙을 (봅니다):
그 타락 전에
사람은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그는(he)
하나님 앞에
살았고
또 하나님께
책임이 있었습니다
(was responsible;
보고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책임이 막중했습니다).
아담의
에덴의 그 동산으로부터의
(from the garden of Eden;
에덴의 그 뜰로부터의[정원에서의])
추방의 그 때부터
노아의
그 방주로부터의
떠남의
(of … departure; 출발의)
그 때까지,
하나님께서
사람 위에 다스림 안에서
그분 자신을 대표하도록
사람 안에 있는
그 양심을
확고하게 하셨습니다
(established;
자리 잡게 하셨습니다,
확립하셨습니다, 안정시키셨습니다).
그 홍수 후에,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에도
또는 자아-다스림에도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 위에 다스림 안에서
그분을 대표하도록
사람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
(authorized;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으로부터
사람의 다스림으로
하락했기 때문에
(Because … has been degraded;
타락했기[강등되었기, 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심 안에서,
그를
사람의 다스림으로부터
신성한 다스리심으로
반드시 회복시키셔야만 하고
그 결과(so taht)
다시 한번
사람이
단순함 안에서
(in simplicity;
단일하게, 간단하게, 평이하게,
소박하게, 성실하게, 꾸밈없이)
또 그분의 직접적인 권위 아래에서
하나님 앞에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의 계획 안에서
사람은 반드시
사람의 다스림으로부터
하나님의 다스리심으로,
중간에 자아-다스림을 거쳐서
(passing through;
통해 지나서)
되돌아가야만 합니다
(must retrace;
오던 길을 되짚어가야만 합니다).
그 양심을 처리함의
그 최종적인 목표는
단지 우리를
자아-다스림으로
복귀시키는 것이 아니라
(not … to restore;
복원시키는[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하나님의 다스리심으로
다시
(back; 제자리로)
데려오고
또 우리를
하나님 그분 자신께로
회복시키며,
또, 이렇게 하여
(thus; 이와 같이, 따라서),
하나님의 그 임재 안에서
살게 합니다.
자아-다스림과
또 하나님의 다스리심 사이에
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자아-다스림은
우리가
우리의 양심의
그 느낌들에 의하여 살고,
우리의 양심에
책임을 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우리가
우리의 영의
그 직감에 의하여 살고,
그 직감에
책임을 짐,
곧 하나님께
책임을 짐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영 안에
한 직접적인 감각을 가지고,
일들을
(things;
사물들을, 상황[사정]들을)
깨닫고,
분별하며,
또 인지하는
한 기능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 안에 있는
그 직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직감에 의하여
살고
또 우리의 직감에 의하여
통제될 때
(When … are controlled;
지배[관리, 억제]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그 임재 안에
살고 있고,
또 그분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다스림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에
있을 때,
우리는
생명의 그 감각에 따라
우리의 영의
그 직감에 의하여,
삽니다:
그 신성한 생명은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하며,
또 가장 예민한
(the … keenest;
가장 예리한[날카로운, 열렬한])
그 느낌을 가지는
그 가장 높은 생명입니다;
이 느낌이
생명의 그 감각입니다.
생명의 그 감각은
우리가
그 타고난 생명 안에서
아니면(or; 또는) 그 신성한 생명 안에서
살고 있는지(whether),
우리가
그 육체 안에서
아니면 그 영 안에서 살고 있는지를
우리가 알게 만듭니다
(makes; 합니다).
생명의 그 감각이
우리를
안내하고(guides),
통치하며(governs),
통제하고(controls),
또 지휘합니다
(directs;
지시[감독, 총괄,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그 왕국은
그것의 실재를
가지고 있고,
또 이 실재는
하나님의
그 직접적인 다스리심 아래에 있는
그 신성한 생명의
그 생활함입니다
(the living of the divine life;
그 신성한 생명을 삶입니다).
1일
막 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
요 3: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그대에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습니다.”
침례자 요한은
그의 사역을 시작할 때
“회개하십시오.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
(마 3:2)
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했다.
그가 한 말의 의미는
천국 곧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니
각 사람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왕국’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 만일 하나님께서 떠나신다면,
하나님의 왕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을
내용으로 가지고 있다.
나아가 이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육체 되심을 통해
사람이 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왕국의 실재이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 하나님의 왕국은
신성한 영역이며,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야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요 3:3).
… 생명 자체가
하나의 왕국이고,
세계이며,
규제하는 요소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은
생명으로서
신성한 생명의
본성과 능력과 형태를
가지고 계시며,
이 생명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을 형성한다.
왕국은
중대하고도 어려운
주제이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생명도
일종의 왕국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왕국이다.
여러분이
어떤 왕국 안으로
들어가기 원한다면,
여러분에게는
그 왕국의
특별한 생명이 필요하다.
여러분이
식물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기 원한다면,
여러분에게는
식물의 생명이 필요하다.
여러분이
동물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기 원한다면,
여러분에게는
동물의 생명이 필요하다.
사람인 우리는 모두
사람의 왕국 안에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그 안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은
우리가
사람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같은 원칙으로
요한복음 3장 5절은
우리가
그 영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신성한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이며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 기본 원칙을
보아야 한다.
과거에 우리는
… 하나님의 왕국은 단지
하나님의 다스림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종류의 이해는
하나님의 계시보다는
인간적인 인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만일 하나님의 왕국이 단지
하나님의 다스림이고
하나님의 다스림의 영역이라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
사람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도둑질을 하려고 할 때,
그분은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실 것이다.
여러분이
화를 내려고 할 때,
그분은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여러분이
화가 나서
화내는 말을 하려고 할 때,
그분은
여러분을
중지시키실 것이다.
여러분이
나쁜 짓을 하거나
나쁜 말을 하려고 할 때,
먼저는
여러분에게 경고하시고,
여러분이
듣기를 거부하면
여러분을
징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이러한 이해와 인식은
너무나 좁은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의 다스림은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다.
원숭이가
거듭날 수 있다면,
즉 다시 태어나서
사람이 되어
사람의 생명을
가질 수 있다면,
이 생명이 자동적으로
원숭이 속에서부터
원숭이를 규제하여
사람처럼 살게 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원숭이는
자동적으로,
그리고 자연히
인간의 왕국으로 들어온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원숭이를 다시
원숭이처럼 살고
행동하게 하는 것은
원숭이에게 고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적으로
생명의 고유한 능력의 문제이지
외적인 가르침과 규제의 문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