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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워진 하나님의 성전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표현, 곧 찬란하게 표현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과 성전을 가득 채웠다.

“구름이 회막을 덮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웠다.” ― 출 40:34.

성막이 세워지고, 구름이 내려와 성막을 덮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 안으로 들어가 성막을 가득 채운 그날은 위대한 날이었다.

회막 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구름을 볼 수 있었지만, 성막 안의 지성소 안에까지 들어간 대제사장은 성막의 내적인 영광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생활을 체험하면서 계속 전진하여 성막, 곧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상에 있는 떡을 누리고 분향단에서 중보기도 함으로써 하나님의 거처 안에 있는 영광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구름이 덮이고 영광으로 가득 채워진 성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큰 축복이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들이 단지 상징으로 가졌던 것의 실재를 가지고 있다.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집을 가득 채웠다.” ― 왕상 8:11.

성전, 곧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과 처소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워졌다.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을 가득 채웠다는 것은 하늘들에 계신 하나님을 땅으로 모셔 오고, 땅이 하늘들과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꿈을 꾸었다. ‘꿈에 보니 땅 위에 사다리가 세워져 있는데,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았다’(12절). 그는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며 하늘의 문이구나.”(17절)라고 말했다.

거기서 사다리에 의해 하늘이 땅에 내려왔고 땅이 하늘에 연결되었다.

이 사다리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인성을 지니신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땅 위에 세워져 하늘에까지 닿는 사다리로서, 하나님의 집인 벧엘을 위해 하늘이 땅에 열려 있게 하시며 땅을 하늘에 연결시키신다.

오늘날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땅으로 내려오시고 땅은 하나님께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을 뿐 아니라, 그분의 셰키나(Shekinah;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성한 임재)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다.

삼일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시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표현되실 때 그것이 영광이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보이시는 하나님은 영광이시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그를 부르시며, 그를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분별하셨다. 아브라함은 그 영광에 매혹되고 사로잡혔다.

에베소서 1장 17절에서 바울은 ‘영광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영광의 아버지는 자신의 많은 아들들을 통하여 표현되신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거듭남을 암시하고, ‘영광’이라는 단어는 표현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영광의 아버지’라는 호칭은 거듭남과 표현을 암시한다.

아들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은 영광 안에서 동일하시다.

아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다.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의 비침, 곧 빛남이시다.

그리스도는 영광의 왕, 만군(곧 군대들)의 여호와, 승리하시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 안에 체현되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는 영광의 주님이시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우리의 생명이시며, 장래에 우리의 영광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영광에 이르게 하시려고 부르셨으며, 또한 우리를 이 영광 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베드로전서 4장 14절은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을 말한다.

영광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영광의 영은 그리스도를 그분의 부활 안에서 영광스럽게 하신 영이시다.

바로 이 영광의 영은 부활하시고 높아지시어 지금은 영광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박해 가운데서 고난당하는 믿는 이들 위에 안식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경륜과 내재적으로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표는 영원한 단체적인 표현, 곧 새 예루살렘을 위하여 그분의 많은 아들들을 영광 안으로 이끄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표현하게 하시려고 그분의 영광을 얻도록 미리 정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목표는 우리가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형상대로, 곧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된 귀하게 쓸 그릇으로 창조하셨다. 우리는 영광 안에 계신 그분의 존재를 표현하는 그분의 귀한 그릇들이 되도록 그분의 주권 안에서 미리 정해졌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의 영광의 요구를 충족해 드렸다.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영광에 의해, 그분의 영원한 영광 안으로 우리를 부르셨다.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영광의 소망으로 계신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할 때,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른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으로 운행하시어, 우리가 그분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신성한 계시의 고봉과 관련이 있다. 신성한 계시의 고봉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사람이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과 기능에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7장 22절에서 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기도하셨다.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하나 되는 단계(요 17:6-13)와, 거룩한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됨으로 하나 되는 단계(14-21절)를 위하여 기도하신 후에, 주님은 믿는 이들의 하나가 삼일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을 위하여 신성한 영광 안에 있는 것에 관련된 셋째 단계를 위하여 기도하셨다(22-24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이 아들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졌으므로, 진정한 하나는 신성한 영광 안에 있다.

영광은 아버지의 충만 안에서 아버지를 표현하도록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아버지의 생명과 신성한 본성이 있는 아들의 자격이다.

영광에는 네 방면, 곧 아들의 자격과 아버지의 생명과 아버지의 신성한 본성과 아버지의 충만 안에 있는 아버지의 표현이 있다. 이 네 가지는 우리가 아들 안에서 가지고 있고 아들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과 동일하다.

하나 되는 것의 셋째 단계에서, 자신의 자아를 온전히 부인한 믿는 이들은 아버지의 영광을 그들이 온전히 하나 되는 요인으로 누려, 단체적이고도 건축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표현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 되는 것의 셋째 단계 안에서만 절대적으로 온전하게 되어 하나 안으로 들어가 주님을 나타내고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타남과 표현이 되는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본성과 심지어 하나님 자신을 가질 것이다.

에베소서 3장 20절과 2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히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이라고 선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도들 안으로 일해 넣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에베소서 3장 20절과 21절에서 “하나님께 … 영광이 … 있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씀은 성도들 안으로 일해 넣어진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것을 암시한다.

이 영광은 하나님과 함께 우리에게 와서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진 후에,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길이다.

이렇게 오고 감으로써 우주 가운데 첫 열매(약 1:18)인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앞장선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 안으로 일해 넣어지고,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표현되신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있게 된다. 즉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교회 시대인 이 시대에서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왕국 시대인 오는 시대와 만대의 때 곧 영원 안에서도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현시대부터 영원에까지 이르는 모든 시대들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새 예루살렘의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의 표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 안에 있는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인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외양을 지니고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그분의 형상을 표현한다.

새 예루살렘 성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을 통하여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새 예루살렘의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 성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완전히 가득 채워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담고 그분을 표현하는 그릇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영광은 사실상 하나님 그분 자신께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한 성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성안에서 나타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광, 곧 표현되신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밝게 하시며 벽옥 성벽을 통해 빛나신다.

새 예루살렘의 빛은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다.

하나님의 영광은 등이신 어린양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성의 성벽을 통하여 빛난다.

하나님은 새 예루살렘이시며, 따라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그분을 새 예루살렘으로 취하고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새 예루살렘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직 우리가 새 예루살렘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우주 안에서 참되게 영광스럽게 되신다.

새 예루살렘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찬송되도록 할 것이다.

영원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은 하나님으로 온전히 적셔져서 하나님을 표현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스럽게 된 아들들을 통하여 표현되실 것이고, 이렇게 표현되신 하나님이 곧 영광이시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천사들과 긍정적인 것들이 표현되신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스럽게 된 아들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찬송되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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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워진 하나님의 성전”

6일

엡 3:16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분의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여러분을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해 주시고,

엡 3: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히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계 21:11 그 성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성의 빛은 가장 귀한 보석 같았고 … 벽옥 같았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의 영광(계 21:11), 곧 하나님의 표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성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을 통하여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사실, 하나님의 영광은 새 예루살렘의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 성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완전히 가득 채워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담고 그분을 표현하는 그릇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사실 하나님 자신께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성안에서 나타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교회생활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지님으로 이 놀라운 신성한 속성 안에서 그분을 나타내고 표현해야 한다.

바울은 그의 기도에서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성도들을 강하게 해 주시기를 구했다(엡 3:16).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도들 안으로 일해 넣어짐을 암시한다. 찬양하는 말씀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 영광이 … 있으시기를 바랍니다.”(20-21절)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도들 안으로 일해 넣어진 뒤에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것을 암시한다. 예를 들면, 이삭의 부(富)는 먼저 리브가에게 주어져 그녀를 아름답게 했다. 그다음에 리브가가 이삭에게 왔을 때, 그 모든 부는 리브가와 함께 이삭에게 되돌아와서 이삭을 영광스럽게 하였다(창 24:47, 53, 61-67).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따라 성도들을 강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은 그들 안으로 일해 넣어진 후에 강하게 된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길이다.

영광을 따라 강하게 되는 것(비교 엡 3:16)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존재 안으로 일해 넣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강하게 되는 유일한 길이다. 아버지의 영광에 따라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되는 것은 그분의 영광을 우리 존재 안으로 일해 넣는다는 의미이다. 영광이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올 때, 우리는 충만하게 되고 강하게 된다. 영광이 하나님께 되돌아갈 때,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에베소서 3장 20절과 21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교회가 하나님의 충만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 이 시간 전에는 영광이 하나님께 되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교회가 실지적으로 하나님의 충만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영광이 하나님께 되돌아갈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과 함께 우리에게 왔다가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한 교회 안에는 하나님과 우리,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오고 가는 것이 있다. 이렇게 오고 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지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작은 단어인 ‘이제’는 이렇게 오고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3장 21절은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히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 안으로 일해 넣어지고,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표현되신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있게 된다. 즉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믿는 이들의 가정인 교회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존재 안으로 일해 넣어지게 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데 앞장선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지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을 따라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이 영광은 하나님과 함께 우리에게 와서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진 후에,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다. 이렇게 오고 감으로써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앞장선다. 이 우주 안에서 믿는 이들인 우리는 첫 열매이다. 우리가 앞장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하늘과 땅에 있는 다른 모든 족속은 우리를 뒤따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5일

요 17:22-23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온전하게 되어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또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따르면, 하나(oneness)의 첫 번째 근거는 아버지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거듭남이며, 두 번째 근거는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밖에 있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 자신께로 분별되었을 때, 우리는 거룩하게 됨이라는 근거 위에서 모든 세상적인 장소와 모든 세상적인 것에서 한 중심에 속하도록 분별된다. 이 한 중심은 바로 삼일 하나님, 곧 그 영이신 아들 안에 계신 아버지이다. 우리는 바로 이 중심에 속하도록 거룩하게 되었으며, 이 안에 하나가 있다. 이러한 하나의 세 번째 근거는 이것보다 훨씬 더 깊고도 높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성한 영광의 나타남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다. 우리는 거듭난 후에 반드시 세상을 포기함으로써 거룩하게 되어야 하며, 세상에서 분별된 후에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부인함으로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곧 우리 안에 계시는 영광의 소망이신 분(골 1:27)에 의해 살아야 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이 아들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졌으므로, 진정한 하나는 신성한 영광 안에 있다. 영광이란 무엇인가? 영광은 아버지의 충만 안에서 아버지를 표현하도록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아버지의 생명과 신성한 본성이 있는 아들의 자격이다. 영광에는 네 방면, 곧 아들의 자격과 아버지의 생명과 아버지의 신성한 본성과 아버지의 충만 안에 있는 아버지의 표현이 있음을 주목하라. 이 네 가지 모두는 영광과 동일하다. 아버지는 이 영광을 아들에게 주셨고, 아들은 이렇게 아버지를 표현하는 특권을 갖고 계신다. 이것이 아들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로 그 영광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아들 안에 계신 아버지와 아버지의 모든 충만을 표현하도록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지닌 아들의 자격을 갖고 있다. 바로 이 신성한 영광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하나이다.

신성한 영광 안에서 하나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포기하고 잊어버려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셔야 한다(갈 2:20).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자아는 반드시 부인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여러 세상적인 장소와 많은 세상적인 것에서 거룩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집에 왔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각 사람에게는 각자의 의견과 사상과 견해가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한때 우리는 다양한 세상적인 장소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지금 우리에게는 여전히 자아라는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의 생명이 아닌 영광의 생명 곧 신성한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거듭난 후에는 반드시 거룩하게 되어야 하고, 거룩하게 된 후에는 반드시 영광스럽게 되어야 한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나서 반드시 세상을 포기해야 하며, 세상을 포기한 후에는 자신을 포기해야 하고 신성한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생명의 영광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의 하나에는 거듭남, 거룩하게 됨, 영광스럽게 됨이라는 세 근거 또는 세 단계가 있다. 거듭남으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갖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고, 거룩한 말씀을 통하여 세상에서 분별됨으로 삼일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 두 번째 단계이며, 우리 자신을 부인함을 통해 신성한 생명의 영광으로 사는 것이 세 번째 단계이다. 바로 이러한 신성한 생명의 영광의 적용과 실재화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될 것이다.

오직 하나의 세 번째 단계에서만 주님의 기도가 이루어질 것이다. 오직 이 단계에서만 하나님의 아들께서 영광스럽게 되심으로써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유일하게 이 단계에서만 우리는 주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며, 하나 안에서 주님을 나타낼 것이다. 이 단계 안에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온전하게 되어 하나 안으로 들어가 주님을 나타내고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온 존재와 하나님의 모든 소유가 우리 안에 체현될 것이므로 우리는 아들의 자격을 실재화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타남과 표현이 되는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본성과 심지어 하나님 자신을 가질 것임을 의미한다.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 주신 충만한 영광을 갖게 될 것이다.

4일

벧전 4:14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비난을 받는다면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여러분 위에 안식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벧전 5:10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을 그분의 영원한 영광 안으로 부르신 분께서 잠시 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직접 온전하게 하시고, 견고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터를 튼튼하게 하실 것입니다.

영광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영광의 영은 그리스도를 그분의 부활 안에서 영광스럽게 하신 영이시다(롬 1:4). 하나님 자신의 영이신 바로 이 영광의 영은, 부활하시고 높아지시어 지금은 영광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박해 가운데서 고난당하는 믿는 이들 위에 안식하고 계신다. 이러한 영은 고난당하는 믿는 이들을 통해 표현되신 하나님의 영이시며, 고난당하는 믿는 이들이 누리고 체험하게 된 하나님의 영이시다. 분명히 영광의 영은 순교당하고 있던 스데반 위에 계셨다(행 6:15, 7:55). 베드로전서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에 계시며(1:11), 영광의 영은 우리 위에 안식하고 계신다(4:14).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온 존재를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영광의 영은 우리 위에 안식하시면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신다. 이 놀라우신 영의 한 방면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그리스도를 계시하신다는 것이고, 이 동일한 영의 또 다른 방면은 영광의 영으로서 우리 위에 안식하시면서 하나님을 표현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더 고난당하고 박해를 받을수록 우리 위에는 더 많은 영광이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축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비난을 받을 때마다 즐거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위에 안식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영광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시자 은혜의 영이신 내주하시는 영이시며, 이분은 박해받는 믿는 이들 위에서 빛나는 영광이 되신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영광에 이르도록 혹은 그분 자신의 영광으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베드로전서 5장 10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영원한 영광 안으로 부르셨다고 말한다. 디모데후서 2장 10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한 영광과 함께 있다. 이것은 영원한 영광이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목표라는 것을 가리킨다(롬 8:21).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의 영광 안으로 들어간다(히 2:10).

하나님이셨던 말씀께서 육체가 되시고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으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 1:1, 14).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을 표현하도록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러나 사람은 죄를 범했다. 이제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대신에 죄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 있는 자아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 3: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미리 정해졌고, 이 영광에 이르도록 부름받았다(고전 2:7, 살전 2:12). 믿는 이들인 우리는 지금 이 영광에 이르도록 변화되는 중이며(고후 3:18), 또한 이 영광 안으로 이끌릴 것이다(히 2:10).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럽게 되어(롬 8:17, 30),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하나님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로마서 9장 23절은 “하나님께서 또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들에 대하여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어찌하겠습니까?”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을 담고 표현하는 그분의 그릇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하신 그분의 그릇들인 우리에 대하여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 우리는 영광 가운데 그분의 존재를 표현하는 그분의 용기(容器), 곧 존귀한 그릇이 되도록 그분의 주권에 의해 미리 정해졌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고 견고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터를 튼튼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그 안으로 부르신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으로서 움직이신다(벧전 5:10). 결국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영원한 영광은 우리에게 우연히 오지 않을 것이다. 장차 올 영광은 오늘날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임으로 인해 건축되고 있다. 하나님은 그러한 영광을 건축하시려고 지금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러한 영광을 건축하시려고 지금 우리를 견고하게 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러한 영광을 건축하시려고 우리를 강하게 하시며 우리의 터를 튼튼하게 하고 계신다. 결국 그러한 영광은 하나의 건축물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일 것이다(계 21:10-11).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신성한 영광이다. 이 신성한 영광은 하나님의 온전하게 하심과 견고하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과 터를 튼튼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지금 건축되고 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모든 움직임이다.

3일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

히 1:3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고, 하나님의 실질의 표현이십니다. …

요 17:5 아버지,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광으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광스럽게 하여 주십시오.

영광의 아버지(엡 1:17)는 자신의 많은 아들들을 통하여 표현되신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거듭남을 암시하고, ‘영광’이라는 단어는 표현을 암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거듭났으며 그분의 표현이다.

많은 아들들의 거듭남과 하나님의 표현이 신성한 경륜의 완결이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 구속을 이루셨다. 그 결과 타락한 피조물들인 우리는 구속받았다. 그런 후에 우리는 거듭나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그분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영광스럽게 되는 그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부터 완전히 표현되실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그분의 충만한 표현이 될 것이다.

히브리서 2장 10절은 하나님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 안으로 이끌고 계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큰 구원의 마지막 단계는 그분의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일이 그분의 미리 아심으로 시작되었고, 그분의 미리 정하심과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을 거친 후에 그분의 영광스럽게 하심으로 끝맺을 것이라고 말하고(29-30절), 모든 창조물이 썩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소망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곧 영광스럽게 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19-21절). 이것은 주님의 다시 오심에 의해 성취될 것인데(빌 3:21), 그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골 3:4).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골 1:27).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렇게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로서 천년왕국 내내 계속될 것이며, 영원토록 새 예루살렘 안에서 충만히 나타날 것이다(계 21:11, 23).

히브리서 1장 3절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는 햇빛이 비치거나 빛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광의 비침, 곧 빛남이시다. 태양의 비침과 광선이 하나이기 때문에, 태양의 비침이 태양 광선과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광채는 영광과 분리될 수 없다.

히브리서 1장 3절은 또한 그분께서 하나님의 실질의 표현이시라고 말한다. 영광은 외적인 표현이고 실질은 내적인 본질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양뿐 아니라 그분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그분의 영광뿐 아니라 그분의 실질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한 그리스도는 이 영광의 광채이시고, 하나님의 실질에 관한 한 그리스도는 이 실질의 표현이시다.

하나님의 실질의 표현은 도장의 표현과 같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신다. 도장에는 형상이 있다. 도장을 종이 위에 찍을 때, 종이는 도장에 있는 것과 같은 표현을 지니게 된다. 도장에 어떤 문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자. 이 도장을 종이 위에 찍을 때, 그 종이는 도장에 새겨진 것과 동일한 문자가 찍혀 동일한 형상을 지닐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실질의 표현이시다. 안의 실질은 표현의 근원이고, 밖의 표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고 하나님의 실질의 표현이시라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태양 광선의 비춤은 태양이 우리에게 도달한 것이다. 우리가 한동안 햇빛 아래 머문다면, 태양의 어떤 요소가 우리 안으로 옮겨 부어질 것이다. 이것은 태양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도달하시고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우리는 우리에게 도달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

2일

왕상 8:11 제사장들은 구름 때문에 서서 섬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집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행 7:2 …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행 7:55 그러나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눈여겨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열왕기상 8장 1절부터 11절까지는 성막이 성전에 하나로 합쳐진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성막은 광야를 옮겨 다니던 이동 가능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건축물의 전신이었다. 성전은 예표에 있어서 하나님의 건축물의 최종 완결로서 모리야산의 최고봉인 시온산에 건축되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다는 것은(출 40:34) 하늘들에 계신 하나님을 땅으로 모셔 오고, 땅이 하늘들과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어야 한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꿈을 꾸었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을 의미하는 벧엘이라고 불렀다. 야곱이 꿈에서 보았던 사다리에 의해 거기서 하늘이 땅에 내려왔고 땅이 하늘에 연결되었다. 이 사다리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이 땅에 열려 있게 하시며 땅을 하늘에 연결시키신다(요 1:51). 오늘날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땅으로 내려오시고 땅은 하나님께 연결된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표현되실 때 그것이 영광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고 감추어지실 때마다 영광은 표현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보이시는 하나님은 영광이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나와 좋은 땅을 향해 여행하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이 보였다(출 13:21).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으로 보이셨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보이셨다. 그것이 영광이었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말씀께서 하나님이셨다는 것과, 그 말씀께서 육체가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과, 또 우리 모두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을 읽었다(1:1, 14). 요한복음 1장 18절은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으나,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는 독생자이신 그분께서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셨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타내 보이심 안에 영광이 있다.

사도행전 7장 2절에서 스데반은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라고 증언하였다. 이 절의 영광은 구름과 불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고(출 16:10, 24:16-17, 레 9:23, 민 14:10, 16:19, 20:6, 신 5:24) 성막과 성전을 가득 채운 것처럼(출 40:35, 왕상 8:11), 눈에 보이는 영광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를 부르신 분은 바로 그러한 영광의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의 영광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하나님의 영광은 아브라함을 세상에서부터 하나님께로 분별시키고 성별시키며(출 29:43), 하나님을 따를 수 있게 하는 큰 격려와 힘이었다(창 12:1, 4).

영광의 하나님에 관한 스데반의 말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과 들어맞는다. 베드로는 그의 두 번째 서신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으로 그리고 그분의 영광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한다(벧후 1:3). 우리는 우리 구주 하나님(1절)의 영광에 의해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분께서 다른 어느 것보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 더 나으시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주 예수님을 받아들였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그 영광에 매혹되고 사로잡혔다. 이 원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영광 가운데서 그분께 사로잡혔다. 어느 날 영광의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을 때, 우리는 매혹되었고 확신을 갖게 되어 그분을 귀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존재에 속한 어떤 요소를 우리 안으로 옮겨 부으셨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을 믿게 되었다. 영광의 하나님께 매혹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그분의 선민 안으로 그들이 그것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옮겨 부으신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최고로 강한 ‘라듐’이시라고 말해도 좋다. 만일 우리가 얼마 동안 그분과 함께 머물고 있으면, 그분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옮겨 부으실 것이다. 이 옮겨 부음으로 인해 주입과 흠뻑 적셔짐과 스며듦이 있게 된다. 일단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분 자신을 옮겨 부으시고 나면 우리는 도망갈 수 없게 된다. 그분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신언노트, 20221002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워진
하나님의 성전

출애굽기 40장
34절부터 38절까지에는
주님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운
기록이 있다.
34절은
두 방면에 대해 말한다.
이 절은
회막 바깥에서 일어난 일과
성막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한다.
구름이
회막을 덮었고,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웠다.
회막과 성막은
동일한 구조물이었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회막이었으나
하나님께는
성막이었다.
우리는
그것이
외적으로는 회막이었고
내적으로는 성막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다만
회막 주위에
모여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성막 안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출애굽기 40장에서
회막은
구름으로 덮였지만,
성막은
영광으로 가득했다.
회막 주위에 모여 있기만 한
사람들에게는
구름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회막 위에 있는
구름을 누려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성막 안에 있는
영광을 누려야 한다.

우리가
구름과 영광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구름을
하나님의 영광의
바깥 부분,
즉 하나님의 영광의
‘껍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껍질은
외적인 덮개를 의미한다.
사람의 몸에는
껍질인
피부가 있다.
피부는
몸을 덮고 있으며
몸은
우리의 존재를 담고 있다.
우리의 존재는
영이다.
성막의 바깥에 있었던
사람들은
껍질을 볼 수 있었다.
성막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껍질은 볼 수 없었지만
성막의 내적인 영광을
볼 수 있었다.

젊은이들은
교회생활을
누리며
교회생활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간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교회의 껍질만
누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이 누림을 포기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들은 계속해서
성막의 내적인 영광을
누려야 한다.
여전히 내적인 영광을
많이 누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껍질을
던져 버리지 말라.

로스앤젤레스의
엘든 홀에 있었을 때,
우리는
구름을 누리는
교회생활의 지붕 위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오늘 누리고 있는 것이
엘든 홀에서 누렸던 것보다
더 깊고도 내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미 우리는
구름을 누리는
지붕 위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향단에서
중보기도 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분향단에서
중보기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회막을 덮고 있는
구름 안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사람은
교회생활의 내부에 있는
영광으로 둘러싸여 있다.
나는
우리 가운데 더 많은 이들이
이것을
보고 체험하기를
바란다.

나이 든 성도들 중 어떤 이들은
괴로움을 느끼거나
좌절감을 맛볼지도 모른다.
그들은
‘왜 우리는
예전처럼 신선하지 않을까?
왜 교회생활이
이렇게 열광적이지 않을까?’
하고 자문할지도 모른다.
열광하는 것은
좋은 것이며,
다른 이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것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주로 젊은이들이
열광하고
열광시킨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막 바깥에서
구름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막 안에 있는
영광을 체험하고 있는
나이 든 사람들이
열광하기는 어렵다.
나는
나이 든 사람으로서
외적으로는
열광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분향단에서
중보기도 하는
놀라운 일을 발견했음을
간증할 수 있다.
나는
떡 상에서
떡을 누리고
분향단에
오래 머무는 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바깥뜰에 있는
사람들은
번제단 주위에
모여 있거나
회막을 덮고 있는
구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영광을 보기 원한다면,
성막 내부로
들어와야 한다.
영광은
지붕 위에 있지 않고
성막 안에 있다.
우리는
성막 안으로 들어올 때,
그곳에
영광이 있음을
볼 것이다.

열왕기상 8장
1절부터 11절까지는
성막이
성전에 하나로 합쳐진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성막은
광야를 옮겨 다니던
이동 가능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건축물의
전신이었다.
성전은
예표에 있어서
하나님의 건축물의
최종 완결로서
모리야산의 최고봉인
시온산에 건축되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다는 것은
하늘들에 계신
하나님을
땅으로 모셔 오고,
땅이
하늘들과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어야 한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꿈을 꾸었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을 의미하는
벧엘이라고 불렀다.
야곱이 꿈에서 보았던
사다리에 의해
거기서
하늘이 땅에 내려왔고
땅이 하늘에 연결되었다.
이 사다리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이
땅에 열려 있게 하시며
땅을
하늘에 연결시키신다.
오늘날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땅으로 내려오시고
땅은
하나님께 연결된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표현되실 때
그것이 영광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고
감추어지실 때마다
영광은 표현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보이시는 하나님은
영광이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나와
좋은 땅을 향해
여행하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이 보였다.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으로 보이셨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보이셨다.
그것이 영광이었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말씀께서
하나님이셨다는 것과,
그 말씀께서
육체가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과,
또 우리 모두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을
읽었다.
요한복음 1장 18절은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으나,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는
독생자이신 그분께서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셨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타내 보이심 안에
영광이 있다.

사도행전 7장 2절에서
스데반은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라고 증언하였다.
이 절의 영광은
구름과 불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고
성막과 성전을 가득 채운 것처럼,
눈에 보이는
영광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를 부르신 분은 바로
그러한 영광의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의 영광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하나님의 영광은
아브라함을
세상에서부터
하나님께로
분별시키고 성별시키며,
하나님을 따를 수 있게 하는
큰 격려와 힘이었다.

영광의 하나님에 관한
스데반의 말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과
들어맞는다.
베드로는
그의 두 번째 서신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으로
그리고 그분의 영광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영광에 의해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분께서
다른 어느 것보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
더 나으시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주 예수님을
받아들였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그 영광에
매혹되고 사로잡혔다.
이 원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영광 가운데서
그분께 사로잡혔다.
어느 날
영광의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을 때,
우리는
매혹되었고
확신을 가지게 되어
그분을
귀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존재에 속한
어떤 요소를
우리 안으로
옮겨 부으셨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을 믿게 되었다.
영광의 하나님께
매혹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그분의 선민 안으로
그들이
그것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옮겨 부으신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최고로 강한
‘라듐’이시라고
말해도 좋다.
만일 우리가
얼마 동안
그분과 함께
머물고 있으면,
그분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옮겨 부으실 것이다.
이 옮겨 부음으로 인해
주입과
흠뻑 적셔짐과
스며듦이
있게 된다.
일단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분 자신을
옮겨 부으시고 나면
우리는
도망갈 수 없게 된다.
그분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영광의 아버지는
자신의 많은 아들들을 통하여 표현되신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거듭남을 암시하고,
‘영광’이라는 단어는
표현을 암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거듭났으며
그분의 표현이다.

많은 아들들의
거듭남과
하나님의 표현이
신성한 경륜의 완결이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
구속을 이루셨다.
그 결과
타락한 피조물들인
우리가 구속받았다.
그런 후에
우리가
거듭나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그분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영광스럽게 되는
그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부터
완전히 표현되실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그분의 충만한 표현이
될 것이다.

히브리서 2장 10절은
하나님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 안으로 이끌고 계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큰 구원의
마지막 단계는
그분의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일이
그분의 미리 아심으로
시작되었고,
그분의
미리 정하심과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을
거친 후에
그분의 영광스럽게 하심으로
끝맺을 것이라고
말하고,
모든 창조물이
썩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소망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곧 영광스럽게 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주님의 다시 오심에 의해
성취될 것인데,
그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렇게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로서
천년왕국 내내 계속될 것이며,
영원토록 새 예루살렘 안에서
충만히 나타날 것이다.

히브리서 1장 3절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는
햇빛이
비치거나 빛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의 비침,
곧 빛남이시다.
태양의 비침과 광선이
하나이기 때문에,
태양의 비침이
태양 광선과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광채는
영광과 분리될 수 없다.

히브리서 1장 3절은 또한
그분께서
하나님의 실질의 표현이시라고
말한다.
영광은
외적인 표현이고
실질은
내적인 본질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양뿐 아니라
그분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그분의 영광뿐 아니라
그분의 실질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한
그리스도는
이 영광의 광채이시고,
하나님의 실질에 관한 한
그리스도는
이 실질의 표현이시다.

하나님의 실질의 표현은
도장의 표현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신다.
도장에는
형상이 있다.
도장을
종이 위에 찍을 때,
종이는
도장에 있는 것과 같은
표현을 지니게 된다.
도장에
어떤 문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자.
이 도장을
종이 위에 찍을 때,
그 종이는
도장에 새겨진 것과
동일한 문자가 찍혀
동일한 형상을 지닐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실질의 표현이시다.
안의 실질은
표현의 근원이고,
밖의 표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고
하나님의 실질의 표현이시라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태양 광선의 비춤은
태양이
우리에게 도달한 것이다.
우리가 한동안
햇빛 아래 머문다면,
태양의 어떤 요소가
우리 안으로
옮겨 부어질 것이다.
이것은
태양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도달하시고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우리는
우리에게 도달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

영광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영광의 영은
그리스도를
그분의 부활 안에서
영광스럽게 하신
영이시다.
하나님 자신의 영이신
바로 이 영광의 영은,
부활하시고
높아지시어
지금은 영광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박해 가운데서 고난당하는
믿는 이들 위에
안식하고 계신다.
이러한 영은
고난당하는 믿는 이들을 통해
표현되신
하나님의 영이시며,
고난당하는 믿는 이들이
누리고
체험하게 된
하나님의 영이시다.
분명히 영광의 영은
순교당하고 있던
스데반 위에 계셨다.
베드로전서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에 계시며,
영광의 영은
우리 위에
안식하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온 존재를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영광의 영은
우리 위에 안식하시면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신다.
이 놀라우신 영의
한 방면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그리스도를 계시하신다는 것이고,
이 동일한 영의
또 다른 방면은
영광의 영으로서
우리 위에 안식하시면서
하나님을 표현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더 고난당하고
박해를 받을수록
우리 위에는
더 많은 영광이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축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비난을 받을 때마다
즐거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위에
안식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영광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시자
은혜의 영이신
내주하시는 영이시며,
이분은
박해받는 믿는 이들 위에서
빛나는 영광이 되신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영광에 이르도록
혹은 그분 자신의 영광으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베드로전서 5장 10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영원한 영광 안으로 부르셨다고
말한다.
디모데후서 2장 10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한 영광과 함께 있다.
이것은
영원한 영광이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목표라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의 영광 안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이셨던
말씀께서
육체가 되시고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으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을 표현하도록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러나 사람은
죄를 범했다.
이제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대신에
죄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 있는
자아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미리 정해졌고,
이 영광에 이르도록
부름받았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지금
이 영광에 이르도록
변화되는 중이며,
또한 이 영광 안으로
이끌릴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럽게 되어,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하나님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로마서 9장 23절은
“하나님께서 또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들에 대하여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어찌하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을
담고
표현하는
그분의 그릇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하신
그분의 그릇들인
우리에 대하여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
우리는
영광 가운데
그분의 존재를 표현하는
그분의 용기,
곧 존귀한 그릇이 되도록
그분의 주권에 의해
미리 정해졌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고
견고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터를 튼튼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그 안으로 부르신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으로서
움직이신다.
결국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영원한 영광은
우리에게
우연히 오지 않을 것이다.
장차 올 영광은
오늘날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임으로 인해
건축되고 있다.
하나님은
그러한 영광을 건축하시려고
지금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러한 영광을 건축하시려고
우리를
강하게 하시며
우리의 터를
튼튼하게 하고 계신다.
결국 그러한 영광은
하나의 건축물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일 것이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신성한 영광이다.
이 신성한 영광은
하나님의
온전하게 하심과
견고하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과
터를 튼튼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지금
건축되고 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모든 움직임이다.

요한복음 17장에 따르면,
하나임(oneness)의 첫 번째 근거는
아버지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거듭남이며,
두 번째 근거는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밖에 있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 자신께로 분별되었을 때,
우리는
거룩하게 됨이라는 근거 위에서
모든 세상적인 장소와
모든 세상적인 것에서
한 중심에 속하도록
분별된다.
이 한 중심은 바로
삼일 하나님,
곧 그 영이신
아들 안에 계시는
아버지이다.
우리는 바로
이 중심에 속하도록
거룩하게 되었으며,
이 안에
하나가 있다.
이러한 하나의
세 번째 근거는
이것보다 훨씬 더
깊고도 높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성한 영광의 나타남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다.
우리는
거듭난 후에 반드시
세상을 포기함으로써
거룩하게 되어야 하며,
세상에서 분별된 후에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부인함으로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곧 우리 안에 계시는
영광의 소망이신 분에 의해
살아야 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이
아들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졌으므로,
진정한 하나는
신성한 영광 안에 있다.
영광이란 무엇인가?
영광은
아버지의 충만 안에서
아버지를 표현하도록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아버지의 생명과
신성한 본성이 있는
아들의 자격이다.
영광에는
네 방면,
곧 아들의 자격과
아버지의 생명과
아버지의 신성한 본성과
아버지의 충만 안에 있는
아버지의 표현이 있음을
주목하라.
이 네 가지 모두는
영광과 동일하다.
아버지는
이 영광을
아들에게 주셨고,
아들은
이렇게 아버지를 표현하는
특권을 가지고 계신다.
이것이
아들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로 그 영광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아들 안에 계시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모든 충만을
표현하도록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지닌
아들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신성한 영광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하나이다.

신성한 영광 안에서
하나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포기하고
잊어버려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셔야 한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자아는 반드시
부인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여러 세상적인 장소와
많은 세상적인 것에서
거룩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집에 왔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각 사람에게는
각자의
의견과 사상과 견해가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한때 우리는
다양한 세상적인 장소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지금
우리에게는 여전히
자아라는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의 생명이 아닌
영광의 생명
곧 신성한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가
거듭난 후에는 반드시
거룩하게 되어야 하고,
거룩하게 된 후에는 반드시
영광스럽게 되어야 한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나서 반드시
세상을 포기해야 하며,
세상을 포기한 후에는
자신을 포기해야 하고
신성한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생명의 영광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의 하나에는
거듭남,
거룩하게 됨,
영광스럽게 됨이라는
세 근거
또는 세 단계가 있다.
거듭남으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가지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고,
거룩한 말씀을 통하여
세상에서 분별됨으로
삼일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
두 번째 단계이며,
우리 자신을 부인함을 통해
신성한 생명의 영광으로 사는 것이
세 번째 단계이다.
바로 이러한 신성한 생명의 영광의
적용과 실재화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될 것이다.

오직 하나의 세 번째 단계에서만
주님의 기도가
이루어질 것이다.
오직 이 단계에서만
하나님의 아들께서
영광스럽게 되심으로써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유일하게 이 단계에서만
우리가
주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며,
하나 안에서
주님을 나타낼 것이다.
이 단계 안에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온전하게 되어
하나 안으로 들어가
주님을
나타내고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온 존재와
하나님의 모든 소유가
우리 안에 체현될 것이므로
우리는
아들의 자격을
실재화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타남과 표현이 되는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본성과
심지어 하나님 자신을
가질 것임을
의미한다.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 주신
충만한 영광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나 되는 것의
셋째 단계에서,
자신의 자아를
온전히 부인한
믿는 이들은
아버지의 영광을
그들이
온전히 하나 되는
요인으로 누려,
단체적이고도
건축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표현한다.

새 예루살렘의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의 표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 도시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도시를 통하여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사실, 하나님의 영광은
새 예루살렘의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 도시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완전히 가득 채워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담고
그분을 표현하는
그릇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사실
하나님 자신께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성안에서
나타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교회생활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지님으로
이 놀라운 신성한 속성 안에서
그분을
나타내고
표현해야 한다.

바울은
그의 기도에서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성도들을 강하게 해 주시기를
구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도들 안으로
일해 넣어짐을
암시한다.
찬양하는 말씀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
영광이 …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도들 안으로
일해 넣어진 뒤에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것을
암시한다.
예를 들면,
이삭의 부(富)는 먼저
리브가에게 주어져
그녀를 아름답게 했다.
그다음에
리브가가
이삭에게 왔을 때,
그 모든 부는
리브가와 함께
이삭에게 되돌아와서
이삭을 영광스럽게 하였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따라
성도들을
강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은
그들 안으로
일해 넣어진 후에
강하게 된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길이다.

영광을 따라
강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존재 안으로
일해 넣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강하게 되는
유일한 길이다.
아버지의 영광에 따라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되는 것은
그분의 영광을
우리 존재 안으로
일해 넣는다는
의미이다.
영광이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올 때,
우리는
충만하게 되고
강하게 된다.
영광이
하나님께 되돌아갈 때,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에베소서 3장
20절과 21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교회가
하나님의 충만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
이 시간 전에는
영광이
하나님께
되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교회가
실지적으로
하나님의 충만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영광이
하나님께
되돌아갈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과 함께
우리에게 왔다가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한 교회 안에는
하나님과 우리,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오고 가는 것이 있다.
이렇게 오고 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지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작은 단어인
‘이제’는
이렇게 오고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3장 21절은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히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 안으로
일해 넣어지고,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표현되신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있게 된다.
즉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믿는 이들의 가정인
교회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존재 안으로
일해 넣어지게 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데
앞장선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지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을 따라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이 영광은
하나님과 함께
우리에게 와서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진 후에,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다.
이렇게 오고 감으로써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앞장선다.
이 우주 안에서
믿는 이들인
우리는
첫 열매이다.
우리가
앞장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하늘과 땅에 있는
다른 모든 종족들이
우리를 뒤따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 안으로
일해 넣어지고,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표현되신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있게 된다.
즉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교회 시대인
이 시대에서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왕국 시대인
오는 시대와
만대의 때
곧 영원 안에서도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현시대부터
영원에까지 이르는
모든 시대들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새 예루살렘의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의 표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 안에 있는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인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외양을 지니고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그분의 형상을 표현한다.

새 예루살렘 도시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을 통하여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새 예루살렘의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 성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완전히 가득 채워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담고
그분을 표현하는
그릇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영광은 사실상
하나님 그분 자신께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한 성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성안에서
나타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광,
곧 표현되신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밝게 하시며
벽옥 성벽을 통해
빛나신다.

새 예루살렘의 빛은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다.

하나님의 영광은
등이신 어린양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성의
성벽을 통하여
빛난다.

하나님은
새 예루살렘이시며,
따라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그분을
새 예루살렘으로 취하고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새 예루살렘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직 우리가
새 예루살렘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주 안에서
참되게 영광스럽게 되신다.

새 예루살렘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찬송되도록 할 것이다.

영원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은
하나님으로 온전히 적셔져서
하나님을 표현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스럽게 된
아들들을 통하여
표현되실 것이고,
이렇게 표현되신 하나님께서
곧 영광이시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천사들과
긍정적인 것들이
표현되신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스럽게 된 아들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찬송되도록 할 것이다.

1일

출 40:34-35 … 구름이 회막을 덮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웠다. 모세는 회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구름이 회막 위에 머물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요 1:14 말씀께서 육체가 되시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니, …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에게서 온 독생자의 영광이었다.

출애굽기 40장 34절부터 38절까지에는 주님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운 기록이 있다. 34절은 두 방면에 대해 말한다. 이 절은 회막 바깥에서 일어난 일과 성막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한다. 구름이 회막을 덮었고,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웠다. 회막과 성막은 동일한 구조물이었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회막이었으나 하나님께는 성막이었다. 우리는 그것이 외적으로는 회막이었고 내적으로는 성막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다만 회막 주위에 모여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성막 안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출애굽기 40장에서 회막은 구름으로 덮였지만, 성막은 영광으로 가득했다. 회막 주위에 모여 있기만 한 사람들에게는 구름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회막 위에 있는 구름을 누려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성막 안에 있는 영광을 누려야 한다.

우리가 구름과 영광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구름을 하나님의 영광의 바깥 부분, 즉 하나님의 영광의 ‘껍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껍질은 외적인 덮개를 의미한다. 사람의 몸에는 껍질인 피부가 있다. 피부는 몸을 덮고 있으며 몸은 우리의 존재를 담고 있다. 우리의 존재는 영이다. 성막의 바깥에 있었던 사람들은 껍질을 볼 수 있었다. 성막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껍질은 볼 수 없었지만 성막의 내적인 영광을 볼 수 있었다.

젊은이들은 교회생활을 누리며 교회생활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간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교회의 껍질만 누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이 누림을 포기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들은 계속해서 성막의 내적인 영광을 누려야 한다. 여전히 내적인 영광을 많이 누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껍질을 던져 버리지 말라.

로스앤젤레스의 엘든 홀에 있었을 때, 우리는 구름을 누리는 교회생활의 지붕 위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오늘 누리고 있는 것이 엘든 홀에서 누렸던 것보다 더 깊고도 내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미 우리는 구름을 누리는 지붕 위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향단에서 중보기도 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분향단에서 중보기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회막을 덮고 있는 구름 안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사람은 교회생활의 내부에 있는 영광으로 둘러싸여 있다. 나는 우리 가운데 더 많은 이들이 이것을 보고 체험하기를 바란다.

나이 든 성도들 중 어떤 이들은 괴로움을 느끼거나 좌절감을 맛볼지도 모른다. 그들은 ‘왜 우리는 예전처럼 신선하지 않을까? 왜 교회생활이 이렇게 열광적이지 않을까?’ 하고 자문할지도 모른다. 열광하는 것은 좋은 것이며, 다른 이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것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주로 젊은이들이 열광하고 열광시킨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막 바깥에서 구름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막 안에 있는 영광을 체험하고 있는 나이 든 사람들이 열광하기는 어렵다. 나는 나이 든 사람으로서 외적으로는 열광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분향단에서 중보기도 하는 놀라운 일을 발견했음을 간증할 수 있다. 나는 떡 상에서 떡을 누리고 분향단에 오래 머무는 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바깥뜰에 있는 사람들은 번제단 주위에 모여 있거나 회막을 덮고 있는 구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영광을 보기 원한다면, 성막 내부로 들어와야 한다. 영광은 지붕 위에 있지 않고 성막 안에 있다. 우리는 성막 안으로 들어올 때, 그곳에 영광이 있음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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