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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하나님의 신언자들의 신성한 격려를 통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일을 회복함

하나님의 집인 회복된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서 (제사장 직분을 대표하는) 여호수아와 (왕의 직분을 대표하는) 스룹바벨은 모두 어느 정도 약해지고 낙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언자 학개와 스가랴가 그분을 위해 말함으로써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강화하고 돕고 격려하게 하셨다.

학개의 신언의 중심 사상은 하나님의 성전인 하나님의 집의 건축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의 복지와 관련되고, 복원의 시대에서 천년왕국이 메시아와 함께 도래하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집 혹은 성전은 먼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집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였고, 그다음 단체적으로 하나님의 집인 몸 된 교회 곧 확대되신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여호와의 집은 교회의 예표이다. 그러므로 학개의 신언은 신약의 믿는 이들인 우리를 두고 말한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이 예표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학개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말한 것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의 재건을 위해 그들과 백성에게 힘을 북돋아 주며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포로 되어 있다가 돌아와서는 자기 잇속이나 차리며 하나님을 소홀히 대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만 돌보았지 여호와의 집은 돌보지 않았다(학 1:4). 학개서 1장 9절에서 ‘달려갔기’라는 말은 백성이 자기 집을 돌보는 데만 바빴음을 가리킨다.

학개서 1장 6절은 우리가 교회를 소홀히 대한다면 결코 참된 누림이나 만족을 얻지 못할 것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일의 회복과 관련해서 우리는 중립적일 수 없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우리 집을 먼저 돌보든지 아니면 주님의 집을 먼저 돌보든지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선민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일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영 안에서 분발되어 여호와의 집에서 일하러 왔다. 주님의 명령에 반응하여 우리 모두는 주 예수님께 사로잡혀, 주님의 집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건축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새로운 믿는 이들을 먹이며 다른 이들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한다.

“내가 모든 민족을 뒤흔들리니, 모든 민족이 갈망하는 이가 올 것이다.” ― 학 2:7상.

이분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이 갈망하는 분이시다. 비록 민족들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있다. 민족들은 빛과 사랑과 기쁨과 의와 같은 것들을 갈망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것들의 실재이시므로, 민족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민족이 갈망하는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 되어 있는 데서 돌아오는 것과 하나님의 집의 건축이 회복되는 것에 달려 있다.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겠다. … 이 집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더 클 것이다.” ― 학 2:7하, 9상.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의 표현은 하나님의 건축물인 여호와의 집 안에 있다.

에스겔은 하나님에 대한 이상 가운데서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집으로 돌아와 그 집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았다(겔 43:1-5). 하나님의 집의 건축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왔다(겔 43:2, 5). 이것은 영광의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가 건축되어 하나님의 거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에스겔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의 집에서 흘러나와서 동쪽, 곧 하나님의 영광의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겔 47:1, 43:2).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있는 흐름은 제한될 것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가 첫째로 고려해야 할 것은 주님의 영광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결정을 내릴 때 최우선적으로 주님의 영광에 부합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우리 봉사의 목적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단체적이고 건축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고, 신성한 영광 안에 있는 하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을 인장 반지로 만드신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를 그분의 대표로 여기신다는 것과 그분께서 그를 사랑하고 믿으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스룹바벨은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믿으시는 분이시다. 그러한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건축하는 일을 돌보실 자격이 있으시다.

스가랴서는 등잔대의 일곱 등잔(4:2, 계 4:5)이 하나님의 일곱 영,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1:4)이시라는 것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여호와의 일곱 눈(슥 4:10)과 구속하시는 어린양의 일곱 눈(계 5:6)과 건축을 위한 돌의 일곱 눈(슥 3:9)으로서, 삼일 하나님의 완전한 표현과 하나님의 집의 재건을 위한 분이시다.

스가랴서 3장 9절에서 여호수아 앞에 놓인 돌은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한 돌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시 118:22, 마 21:42). 여호와께서 돌에 새기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하나님에 의해 새겨지시고 잘리셨음을 가리킨다. 여호와께서 그 땅의 죄악을 하루 만에 없애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공들여 일하신 그 그리스도께서 하루 만에,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날에 이스라엘 땅의 죄악을 없애 버리실 것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셨다.

돌과 여호와와 어린양은 하나이다. 그리스도는 구속하는 어린양이시며, 건축하는 돌이시고, 또한 여호와이시다. 그리스도는 어린양-돌, 곧 구속을 위한 어린양과 건축을 위한 돌이시다.

하나님의 건축물에서 그리스도는 건축물을 떠받치는 기초 돌이시고, 그분의 몸의 이방인 지체들과 유대인 지체들을 함께 연결하는 모퉁이 돌이시며, 하나님의 건축물에서 모든 것을 완결하는 은혜의 꼭대기 돌이시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일곱 눈을 가진 건축하는 돌이시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일곱 눈이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해 있음을 계시한다.

그리스도는 일곱 눈 곧 일곱 영을 가진 건축하는 돌로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옮겨 부으시어, 우리를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한 귀한 재료로 변화시키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동안 그분의 일곱 눈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옮겨 부으신다.

하나님의 건축물을 완성하시기 위해,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은 구속하는 어린양과 건축하는 돌이신 그리스도의 눈들이신데, 이 눈들은 우리를 감찰하고 살피며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해 그리스도의 본질과 풍성과 부담을 우리에게 주입하고 옮겨 붓기 위한 것이다.

어린양의 일곱 눈은 법리적인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입하고, 돌의 일곱 눈은 유기적인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입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법리적인 구속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에 의하여 이 땅에서 경륜적으로 움직이심으로 그분의 건축의 목표를 이루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 안에는 두 개의 등, 곧 우리의 영과 그 안에 계시는 일곱 배로 강화되신 하나님의 영이 있다(잠 20:27, 계 4:5, 고전 6:17). 변화되려면,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을 완전히 주님께 열어 드려서, 일곱 등불이 있는 주님의 등이 우리 혼의 모든 방을 살피고 우리의 속부분들을 비추고 밝혀 주며 그 속부분들에 생명을 공급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변화를 가장 많이 체험하는 사람은 주님께 완전히 열려 있는 사람이다.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께서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믿는 이들 안에서 운행하심으로써, 그 추구하는 믿는 이들은 이기는 이들이 되도록 강화되어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한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고(고전 15:45하, 요 6:63상, 고후 3:6하), 이 생명 주시는 영은 또한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이시며, 이 영은 생명의 영이시다(롬 8:2). 따라서 일곱 영의 기능은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인 새 예루살렘의 건축을 위하여 신성한 생명을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은 일곱 등불로서, 우리를 태우시고 비추시며 폭로하시고 살피시고 심판하시며 순수하게 하시고 정련하심으로 금등잔대들을 산출하시어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성취하신다.

등잔대 양쪽에 있는 두 올리브나무는 그 당시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와 총독인 스룹바벨을 상징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 재건을 위해 여호와의 영으로 채워진 기름의 두 아들이었다.

기름의 두 아들은 또한 현시대의 마지막 삼 년 반 동안 활동할 두 증인인 모세와 엘리야를 예표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들, 곧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을 강하게 하기 위해 대환난 때에 하나님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원칙적으로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이들은 신선한 기름의 아들들, 곧 즐거움의 기름이신 신선하고 현존하고 완결되신 영으로 충만하여, 등잔대의 빛나는 증거 곧 예수님의 증거를 위해 등잔대 안으로 그 영을 흘려 보내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등잔대인 교회는, 신성한 본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기름 곧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이 함께하는 삼일 하나님의 견고한 체현이다.

기름 자체가 금이다(슥 4:12). 이것은 금이 기름처럼 흐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더 많은 기름이 등잔대 안으로 더해진다는 것은 더 많은 금이 더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금을 더 많이 얻기 위하여, 곧 신성한 본성을 지니신 하나님을 더 많이 얻기 위하여 날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금으로 된 새 예루살렘을 건축하기 위해 순수한 금등잔대가 될 수 있다.

이 문제를 오늘날 우리의 체험에 적용해 볼 때, 우리는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그 영께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금이신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 주어 그들에게 기름을 공급해 줄 때, 우리는 사실상 그들에게 하나님을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흘러나오셔서 그들 안으로 들어가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에게서 다른 이들 안으로 하나님을 옮겨 붓는 올리브나무가 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기름은 하나님을 흘려 내보내는 올리브나무가 된 사람들에 의해 궁핍한 사람들에게 공급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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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슥 4:3 그리고 그 등잔대 옆에는 두 올리브나무가 하나는 대접 오른쪽에, 하나는 그 왼쪽에 있습니다.”

슥 4:12 … “두 금대롱 옆에 있는, 금을 흘려 보내는 두 올리브 가지는 무엇입니까?”

슥 4:14 그가 말하였다. “이들은 기름의 두 아들로서, 온 땅의 주님 곁에 서 있는 이들입니다.”

이 두 올리브나무는 그 당시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와 총독인 스룹바벨을 상징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 재건을 위해 여호와의 영으로 채워진 기름의 두 아들이었다(슥 4:3-6, 12-14). 기름의 두 아들은 또한 현시대의 마지막 삼 년 반 동안 활동할 두 증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들, 곧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을 강하게 하기 위해 대환난 때에 하나님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이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이다.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신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모두 하나님을 위해 증언한다. 모세와 엘리야 이 두 사람은 대환난의 기간 동안 박해받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믿는 이들을 부축하고 그들에게 공급할 것이다.

스가랴서 4장 12절은 가지들이 금을 흘려 보낸다고 말한다. 여기서 ‘금’이란 단어는 기름을 가리킨다. 기름과 금이 하나인 것이다. 기름은 그 영을 가리키고, 그 영은 하나님이시다. 더욱이 성경의 예표에서 금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대접을 채우는 금은 그 영이고, 그 영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금으로 예표되신다. 이 문제를 오늘날 우리의 체험에 적용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서 흘러나오시는 그 영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금이심을 본다. 이와 같이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금을 공급함으로써 그리스도를 공급할 때, 사실상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나와 그들 안으로 흐르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이들 안으로 하나님을 흘려 보내는 올리브나무가 되어야 한다.

출애굽기에서 등잔대는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신약의 끝에서 등잔대들은 삼일 하나님의 증가된 체현인 교회들을 상징한다.

등잔대 안에는 단지 두 가지 기본적인 요소가 있다. 금은 단단한 형태이고, 기름은 타는 요소이다. 이 두 요소가 합쳐질 때 빛나는 등잔대가 있게 된다. 아버지의 본성과 본질, 아들의 형상과 모습, 그 영의 표현을 가진 등잔대는 삼일이신 하나님을 표현한다. 스가랴서 4장 12절은 등잔대의 기름이 금으로 된 기름임을 말해 준다. … 등잔대인 교회는 삼일 하나님의 견고한 체현으로서,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을 기름으로 갖는다. 사실상 기름의 본질은 금의 요소이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잘라 내시고 교회에 더 많은 기름을 더하실 때마다, 그분은 사실상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을 더욱더 더하시는데, 이것은 교회생활 안으로 신성한 본성, 곧 금을 더 많이 더하시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떤 지방에 있는 교회에 금이 그렇게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님은 부정적인 것들을 잘라 내시고 기름을 더하신다. 결국 교회는 더 많은 금을 갖게 될 것이고, 신성한 본성이 더욱더 많아질 것이다. 이것은 삼일 하나님의 체현인 교회 안에 인간적이고 타고난 모든 것들은 감소하고, 신성한 본성은 계속해서 증가해야 함을 말해 준다. 우리의 육체와 자아와 타고난 사람, 그리고 옛 창조물과 관련된 우리의 모든 것, 심지어 우리의 선한 자아도 반드시 감소되어야 한다.

본질에 있어서 그 영은 금의 요소이시고,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 영께서 교회 안으로 더해지시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한 요소가 교회 안으로 더해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이런 방식으로 육체와 타고난 생명과 옛 창조물은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 감소되고 있고, 하나님의 신성한 요소는 증가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교회들은 실지로 순수한 금등잔대들이 되며, 이것이 이 땅에 있는 오늘날 이 시대의 예수님의 증거이다.

5일

잠 20:27 사람의 영은 여호와의 등이라 내적 존재의 모든 깊은 곳을 살핀다.

계 4:5 … 보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타고 있었는데, 이 일곱 등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

누가 변화를 가장 많이 체험할 수 있는가? 주님께 절대적으로 열려 있는 사람이다. “주님, 저는 당신께 완전히 열려 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당신께 열려 있기를 원합니다. 저의 전 존재 곧 저의 마음, 저의 생각, 저의 의지, 저의 감정이 열려 있습니다. 계속 빛을 비춰 주십시오. 철저하게 저를 살펴 주십시오. 제게 빛 비추시고 저를 살려 주십시오. 저는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빛은 각 부분을 꿰뚫고 들어갈 것이고, 생명은 자연스럽게 여러분에게 공급될 것이다. 진흙으로 된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금이 여러분 안에서 형태를 이룰 때, 하나님을 비추어 내시고 나타내시는 일곱 영이 우리 안에 계실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분의 빛 비추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생명이 우리에게 공급되도록 그분께 열려 있기를 바란다. 그럴 때 우리는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닐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등에 의해 빛 비춤을 받을 때, 우리는 우리의 지방에서 실지적인 금등잔대가 되어 삼일 하나님을 나타낼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그분의 증거를 얻으실 것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탁월하시고 경이로우시고 비밀스러우시고 놀라우신 분께서 하나님의 행정의 집행자이시다. 그분께서 하실 수 있고 자격이 있으시기 때문에 일곱 봉인은 그분께 건네어졌다. 이분은 일곱 봉인을 여실 수 있고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실 자격이 있으시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시는 방식은 그분의 눈이신 일곱 영에 의해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경륜의 초점으로서 집행자이시지만, 그리스도께는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한 그분의 눈이신 일곱 영이 필요하시다.

일곱 영은 오늘날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하시기 위해 이 땅에서 불타고 계신다.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 타오르는 불꽃의 목적은 금등잔대들인 교회들을 산출하는 것이다. 타오르는 것은 심판하는 것, 정결하게 하는 것, 정련하는 것, 산출하는 것을 함축한다. 나는 세상이나 교회들의 실망스러워 보이는 상태를 믿지 않는다. 나는 세계를 통제하시고 지시하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심판하시고 정결하게 하시고 정련하셔서 순수한 금등잔대를 산출하시는, 타오르시는 일곱 영의 불꽃을 믿는다.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고 정결하게 하시고 정련하심으로 순수한 금등잔대를 산출하시도록 여기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주님께 기회와 입구를 제공해 드리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곱 영의 불태우심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신성한 불꽃이시여, 오십시오! 오셔서 심판하십시오! 오셔서 정결하게 하십시오! 오셔서 정련하시어 금등잔대를 산출하십시오.” 우리는 그분의 긍휼로 그분께 열려 있다. 날마다,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오십시오. 우리는 당신께 열려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 우리 존재의 모든 통로를 열어 드립니다.” 내가 간증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거의 날마다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이다. “주님, 저에게 빛 비추어 주십시오. 제 속을 살피시고 저를 폭로해 주십시오. 주님, 저는 당신에 의해 빛 비춤 받기를 원하고, 당신의 빛 가운데서 폭로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주님, 우리는 열려 있습니다. 오셔서 우리 위에 빛을 비추시고, 우리 속에서부터 빛을 비추시며, 우리 존재의 모든 통로에 빛을 비추시고, 우리 존재 구석구석에 빛을 비추어 주십시오. 우리는 폭로되고 깨끗하게 되고 정결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순수한 금등잔대를 산출하실 길을 얻으실 것이다.

영원하신 분에게서 나오시고 구속자에게 속하시는 일곱 영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불타고 있는 일곱 등불로서 우주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집행하시며, 죽음을 당하신 어린양의 일곱 눈으로서 교회들을 살피시고 교회들에게 주입하고 계신다. 일곱 영의 이중 임무는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하는 것과 교회들을 살피고 교회들에게 주입하는 것이다. 일곱 영은 우리의 죄악된 것을 살피시며, 그리스도의 풍성을 우리에게 주입하신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말하는 동안, 그의 두 눈도 여러분에게 그의 부담을 주입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린양의 눈이신 하나님의 일곱 영은 우리에게 놀라우신 이분의 부담과 본질을 주입하신다.

4일

슥 3:9 …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다.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 만에 없애겠다. 만군의 여호와의 선포이다.

슥 4:10 …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추가 있는 것을 보고 이 일곱이 기뻐하리니, 이 일곱은 온 땅을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다.”

계 5:6 또 내가 보니, … 갓 죽음을 당하신 것 같은 한 어린양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 어린양은 … 일곱 눈을 가지셨는데, 이것은 온 땅에 보내어지신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

스가랴서 4장 10절에서 여호와의 눈인 ‘이 일곱’은 스가랴서 3장 9절에 나오는 돌의 일곱 눈이며, 또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일곱 눈이다(계 5:6). 따라서 돌과 여호와와 어린양은 하나이다. 그리스도는 구속하는 어린양이시며, 건축하는 돌이시고, 또한 여호와이시다. 그리스도의 일곱 눈은 하나님의 일곱 영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구별은 되시나 분리되지는 않으심을 보여 준다. 사람의 눈이 본질적으로 그 사람과 하나인 것처럼, 성령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이시다. 그리스도의 일곱 눈의 기능은 하나님의 심판을 온 우주에 집행하고 하나님의 온 존재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 안으로 옮겨 붓고 주입하기 위해 관찰하고 찾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는데, 이 영은 또한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이시다. 이 영은 생명의 영이시다(롬 8:2). 따라서 일곱 영의 기능은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인 새 예루살렘을 건축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신성한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어린양은 구속을 위한 것이고, 돌은 건축을 위한 것이다. 구속과 건축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일곱 눈을 갖고 계신다.

등잔대인 교회에는 일곱 등잔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다. 우리는 잠언 20장 27절이 “사람의 영은 여호와의 등이라”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두 개의 등이 있는데, 곧 하나님의 영(요 4:24)과 사람의 영이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영은 고장 난 등이었다. 우리가 회개한 후 그 등이 수리되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거듭남에 의해 이 등은 그 안에 들어온 또 다른 등도 갖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었다. 이 두 등이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그처럼 많은 비춤이 있다. 그 둘은 하나가 된다. 왜냐하면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 영’(고전 6:17)이기 때문이다.

잠언 20장 27절은 계속해서, 사람의 영이 사람의 내적 존재의 모든 깊은 곳, 혹은 다비의 각주의 표현에 따르면 ‘혼의 모든 방들’을 살핀다고 말한다. 여러분의 혼 안에는 여러 개의 방들이 있다. 영은 여러분의 감정, 생각, 의지의 방들을 살피고 있다.

혼의 속부분들은 열려 있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감정을 열기를 두려워한다. 기도하는 중에 우리는 어떤 부분에 이를 때 자신을 닫아 버리는데, 그것은 우리의 어떤 내실을 주님께 열어 드리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실하게 모든 집회에 참석하고 말씀을 읽으며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안에 닫혀 있는 문이 있다. 우리는 주님께, 그분을 사랑하고 다른 방식으로 대가를 지불하겠지만 그 문은 열어 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린다.

우리의 영이 거듭나는 것은 간단하다. 우리는 자신의 죄들을 자백하고 주님을 받아들인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의 혼의 변화는 쉽지 않다. 주님의 등이 모든 내실들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주님께 자신의 모든 내실을 여는 사람들은 매우 적다.

이 빛이 비치는 곳에 생명 공급이 있다. 한 방 한 방이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된다. 우리 안의 금이 형태를 이룬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다. 우리 모두 안에서 이 비춤과 공급과 변화가 계속 일어나 우리를 금등잔대로 만든다. 그럴 때 우리는 참으로 교회, 하나님의 실지적인 표현, 그분의 증거가 된다.

3일

학 2:7 … 모든 민족이 갈망하는 이가 올 것이다. 그러면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겠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다.

학 2:9 이 집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더 클 것이다. …

엡 3: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히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성전 건축이 완성된 후에 주님의 영광이 돌아왔다. 에스겔은 그의 사역 초기에 주님의 영광이 점차적으로 떠나는 것을 보았다. 주님의 영광은 먼저 성전을 떠나 문지방에 머물렀다(겔 9:3, 10:4). 그 후 주님의 영광은 문지방을 떠나 성 한가운데서 떠올랐고, 또다시 성을 떠나 성의 동쪽에 있는 올리브산에 머물렀으며(11:23), 그곳에서 하늘로 올라갔다.

주님의 영광이 돌아온 것은 성전 건축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겔 43:1-3). 주님은 이 땅에 돌아오기를 얼마나 갈망하시는지! 하지만 그분께서 돌아오시기 위해서는 그분의 발바닥이 쉴 장소, 즉 그분의 두 발을 둘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그분의 거처인 그분의 집이 바로 이 땅에서 그분께서 발을 두실 수 있는 장소이다.

오늘날 주님은 단지 개인의 영성만 관심하지 않으신다. 심지어 다니엘과 같은 영적 거인들이 바빌론에서 많이 일어났더라도,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채우기 위해 그곳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이 돌아온 것이 바로 성전 건축이 완성된 후였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교회 안에 거하며 교회에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려면 반드시 교회가 완성되어야 한다. 즉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거하시려면 반드시 교회가 건축되어 하나님의 거처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거처를 갖기를 갈망하시므로 교회가 이 땅에서 건축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사시는 장소 곧 그분의 거처는 교회이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거하시므로, 하나님을 찾고 접촉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교회에 와야 한다. 우리에게 은혜가 있어 교회 안에서 건축된다면,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사실 것이다.

에스겔서 43장 4절은 “여호와의 영광은 동쪽을 향한 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라고 말한다. 주님은 동쪽 문을 통해 돌아오셨다.

성전에는 세 개의 문이 있다. 남쪽과 북쪽 문은 사람들의 편리를 위한 것이지만, 동쪽 문은 사람들의 편리뿐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교회생활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여러 개의 문이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은 동쪽 문, 곧 주님의 영광을 향해 열린 문이다. 이것은 교회생활 안에 있는 우리에게 주님의 영광을 향해 열린 문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편리만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특별히 주님의 영광을 위해야 한다. 교회생활 안에서 결정을 내릴 때 최우선적으로 주님의 영광에 부합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심지어 집회 날짜와 시간에 관한 결정에서도 사람의 편리만 위하지 말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야 한다. 교회는 반드시 주님의 영광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주님의 영광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강은 성전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른다(겔 47:1하). 동쪽은 주님의 영광의 방향이다. 동쪽으로 흐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강이 항상 하나님의 영광의 방향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

교회생활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한다. 복음 전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생수의 흐름이 흘러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다면, 그 흐름은 제한될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위해야 한다. 그러면 생수가 교회로부터 흘러 나갈 것이다.

2일

학 2:7 내가 모든 민족을 뒤흔들리니, 모든 민족이 갈망하는 이가 올 것이다. …

마 16:18 …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건축할 것이니, 음부의 문들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마 16:27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올 것인데, 그때에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대로 갚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남아 있는 모든 백성은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음성과 신언자 학개의 말을 청종함으로써 여호와께 반응하였고, 여호와 앞에서 두려워하였다(학 1:12). 그때에 여호와의 전달자 학개가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학 1:13)라는 여호와의 선포로 백성을 격려하였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의 영과 여호수아의 영과 모든 백성의 영을 분발시키셨고, 그래서 그들은 와서 만군의 여호와의 집에서 일하였다(학 1:14-15). 얼마나 놀라운 반응인가! 나는 모든 사랑스러운 성도들이 복음을 위해 나가서 사람들을 방문하고, 친척들과 급우들과 동료들을 접촉하는 데 바쁘게 되기를 소망한다. 모든 성도들은 주 예수님께 사로잡혀, 복음을 전하고 새로운 믿는 이들을 먹이며 다른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 나는 이러한 일과 관련하여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분위기와 환경이 혁신되기를 소망한다.

나는 찰스 웨슬리의 찬송에 있는 “오소서, 만국의 갈망하는 이여, 오소서!”라는 가사를 좋아한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온 인류가 갈망하는 분이시다(비교 학 2:7). 모든 사람이 생명과 빛과 평안과 선과 의를 얻기를 갈망하지만, 그들이 사모하는 것이 사실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 미덕의 실재이시다. 따라서 미덕을 갈망하는 것은 사실상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것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안배에 의하면, 사랑과 친절과 인내와 겸손과 같은 그러한 인간 미덕들은 신성한 속성들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 미덕들은 ‘손’인 신성한 속성들을 표현하기 위한 ‘장갑’이다. 손이 없는 장갑은 내용이 없는 것이듯, 신성한 속성들이 없는 인간 미덕들은 실재가 없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6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분 자신의 형상대로 그분의 모양에 따라 만드셨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비어 있었다. 사람에게는 외적인 형태만 있었을 뿐 내적인 내용이 되시는 하나님이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생명나무로 상징되신 하나님을 자신의 내용으로 선택하도록 하실 것을 의도하셨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과 함께 하나님의 속성들을 우리 안에 받아들여 우리의 미덕들로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들 가운데 하나이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생명으로 받아들였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사실 때 사랑이라는 그분의 속성은 사랑이라는 우리의 미덕을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는 사람의 미덕의 실재가 되신다.

오늘날 도처에서 사람들은 생명과 빛과 사랑과 관용과 인내를 갈망하지만, 이러한 미덕들을 갈망하는 것이 사실상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불신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있다.

학개서 2장 20절부터 23절까지에서 우리는 장차 올 왕국에서의 (스룹바벨로 예표된)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본다. 학개는 스룹바벨에게 이와 같이 말하도록 지시받았다. “내가 하늘들과 땅을 뒤흔들겠다. 내가 왕국들의 보좌를 뒤엎고 민족들의 왕국의 권세를 없애 버리겠다. … 나의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의 선포이다. 그날에 내가 너를 받아들이고 너를 인장 반지로 만들리니, 내가 너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의 선포이다.”(21-23절)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을 인장 반지로 만드신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를 그분의 대표로 여기신다는 것과 그분께서 그를 사랑하고 믿으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스룹바벨은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장이 그리스도께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표하시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믿으시는 분이시다. 그러한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건축하는 일을 돌보실 자격이 있으시다.

신언노트, 2023 02 12

하나님의 신언자들의
신성한 격려를 통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일을
회복함
하나님의 신언자들의
신성한 격려를 통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함의 회복

성전 재건은
여호수아의 제사장 직분과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권위를 통해
이루어졌다.
성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건축하면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모두
어느 정도 약해지고 낙심하게 되자,
하나님은
신언자 학개와 스가랴가
그분을 위하여 말함으로써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강화하고
격려하게 하셨다.

학개서의 중심 사상은
여호와의 집의 건축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의
복지와 관련되고,
복원의 시대에서
천년왕국이
메시아와 함께 도래하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집 혹은 성전은
먼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집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였고,
그다음 단체적으로
하나님의 집인
몸 된 교회
곧 확대되신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이처럼 우리가
예표의 실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학개서가
우리를 가리켜 말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귀환한 포로들을 다루시는 것은
회복 안에 있는
우리를 다루시는 것을
상징한다.

학개서 1장
2절부터 6절까지와
9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책망을 본다.

여호와의 집을 재건하기를
지연하는 것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변명은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백성의 변명에 이어
여호와의 질문이 나온다.
“이 집은
황폐해져 있는데,
지금이
너희가
벽널로 장식한 집에
거주할 때냐?”
(학 1:4)
그들은
자신의 집은 돌보았지만
여호와의 집은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오셔서
그분의 집에 관해
그들에게 질문하신 것이다.

학개서 1장
5절과 6절,
9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자기 잇속이나 차리며
하나님을 소홀히 대하던
귀환한 포로들을
여호와께서 다루시는 것을
본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다루실 때
첫 번째로 하신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길들을 생각해 보라고
권하신 것이었다.

여호와는
귀환한 포로들이
씨를 많이 뿌렸는데도
조금밖에 거두지 못하고,
먹고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않고,
사람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은 것같이 되었다고
지적하셨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그분의 집을 돌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아무리 먹고 마시고
잘 입어도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임을
말해 준다.
우리가
교회를 소홀히 대한다면,
우리는 결코
참된 누림이나 만족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학개서 1장 9절에서
여호와는 계속해서
그들이
많은 것을 바랐으나
얻은 것이 조금뿐이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을 때
여호와는
그것을
불어 버리셨는데,
이는
그분의 집이
황폐해져 있는데도
그들이 각자
자기 집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학개서 1장 9절에서
‘달려갔기’라는 말은
백성이
자기 집을 돌보는 데만 바빴음을
가리킨다.
오늘날 몇몇 성도들은
집회에 참석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자기 집을 돌보는 데 바쁘다.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우주 안에
중립이라는 것이
결코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절대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집을 먼저 돌보든지 아니면
주님의 집을 먼저 돌보든지 해야 한다.
여기에서 나의 요점은
우리가
주님의 권익을 위해
시간을 절약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죄인들이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특별히 젊은이들이
우리의 보살핌과 양육을
기다리고 있는가?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와 결산하실 때,
주님은 분명히
우리를 책망하실 것이다.
우리가
증가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우리의 환경 때문이 아니라
주로 우리의 변명 때문이었다.

여호와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길들을 생각해 보고,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건축하라고
명하셨으며,
그 집으로 말미암아
기뻐하시고
영광을 얻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우리의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한
재료들을 모으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인
회복된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서
(제사장 직분을 대표하는) 여호수아와
(왕의 직분을 대표하는) 스룹바벨은 모두
어느 정도 약해지고
낙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언자 학개와 스가랴가
그분을 위해 말함으로써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강화하고 돕고 격려하게 하셨다.

학개의 신언의
중심 사상은
하나님의 성전인
하나님의 집의 건축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의
복지와 관련되고,
복원의 시대에서
천년왕국이
메시아와 함께 도래하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집
혹은 성전은
먼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집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였고,
그다음 단체적으로
하나님의 집인
몸 된 교회
곧 확대되신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여호와의 집은
교회의 예표이다.
그러므로 학개의 신언은
신약의 믿는 이들인
우리를 두고 말한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이 예표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학개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말한 것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의 재건을 위해
그들과 백성에게
힘을 북돋아 주며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포로 되어 있다가
돌아와서는
자기 잇속이나 차리며
하나님을 소홀히 대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만 돌보았지
여호와의 집은 돌보지 않았다.
학개서 1장 9절에서
‘달려갔기’라는 말은
백성이
자기 집을 돌보는 데만 바빴음을
가리킨다.

학개서 1장 6절은
우리가
교회를 소홀히 대한다면
결코 참된 누림이나 만족을
얻지 못할 것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일의
회복과 관련해서
우리는
중립적일 수 없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우리 집을 먼저 돌보든지
아니면 주님의 집을 먼저 돌보든지
할 수밖에 없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남아 있는 모든 백성은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음성과
신언자 학개의 말을
청종함으로써
여호와께 반응하였고,
여호와 앞에서 두려워하였다.
그때에
여호와의 전달자 학개가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학 1:13)라는
여호와의 선포로
백성을 격려하였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의 영과
여호수아의 영과
모든 백성의 영을
분발시키셨고,
그래서 그들은
와서
만군의 여호와의 집에서
일하였다.
얼마나 놀라운 반응인가!
나는
모든 사랑스러운 성도들이
복음을 위해 나가서
사람들을 방문하고,
친척들과 급우들과 동료들을
접촉하는 데
바쁘게 되기를
소망한다.
모든 성도들은
주 예수님께 사로잡혀,
복음을 전하고
새로운 믿는 이들을 먹이며
다른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
나는
이러한 일과 관련하여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분위기와 환경이
혁신되기를
소망한다.

나는
찰스 웨슬리의 찬송에 있는
“오소서,
만국의 갈망하는 이여,
오소서!”
라는
가사를 좋아한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온 인류가 갈망하는 분이시다.
모든 사람이
생명과 빛과
평안과 선과
의를 얻기를
갈망하지만,
그들이
사모하는 것이 사실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 미덕의
실재이시다.
따라서 미덕을 갈망하는 것은 사실상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것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안배에 의하면,
사랑과 친절과
인내와 겸손과 같은
그러한 인간 미덕들은
신성한 속성들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 미덕들은
‘손’인 신성한 속성들을
표현하기 위한
‘장갑’이다.
손이 없는 장갑은
내용이 없는 것이듯,
신성한 속성들이 없는 인간 미덕들은
실재가 없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6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분 자신의 형상대로
그분의 모양에 따라 만드셨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비어 있었다.
사람에게는
외적인 형태만 있었을 뿐
내적인 내용이 되시는
하나님이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생명나무로 상징되신 하나님을
자신의 내용으로 선택하도록 하실 것을
의도하셨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과 함께
하나님의 속성들을
우리 안에 받아들여
우리의 미덕들로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들 가운데 하나이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생명으로 받아들였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사실 때
사랑이라는 그분의 속성은
사랑이라는 우리의 미덕을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는
사람의 미덕의
실재가 되신다.

오늘날 도처에서
사람들은
생명과 빛과
사랑과 관용과
인내를 갈망하지만,
이러한 미덕들을 갈망하는 것이 사실상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불신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있다.

학개서 2장
20절부터 23절까지에서
우리는 장차 올 왕국에서의
(스룹바벨로 예표된)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본다.
학개는
스룹바벨에게
이와 같이 말하도록
지시받았다.
“내가
하늘들과 땅을 뒤흔들겠다.
내가
왕국들의 보좌를 뒤엎고
민족들의 왕국의
권세를 없애 버리겠다.
… 나의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의 선포이다.
그날에
내가
너를 받아들이고
너를 인장 반지로 만들리니,
내가
너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의 선포이다.”
(21-23절)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을
인장 반지로 만드신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를
그분의 대표로 여기신다는 것과
그분께서
그를
사랑하고 믿으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스룹바벨은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장이
그리스도께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표하시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믿으시는 분이시다.
그러한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건축하는 일을
돌보실 자격이 있으시다.

하나님의 선민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일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영 안에서 분발되어
여호와의 집에서 일하러 왔다.
주님의 명령에 반응하여
우리 모두는
주 예수님께 사로잡혀,
주님의 집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건축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새로운 믿는 이들을 먹이며
다른 이들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한다.

“내가
모든 민족을 뒤흔들리니,
모든 민족이 갈망하는 이가
올 것이다.”
― 학 2:7상.

이분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이 갈망하는 분이시다.
비록 민족들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있다.
민족들은
빛과 사랑과
기쁨과 의와 같은 것들을
갈망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것들의
실재이시므로,
민족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민족이 갈망하는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 되어 있는 데서
돌아오는 것과
하나님의 집의 건축이
회복되는 것에
달려 있다.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겠다.
… 이 집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더 클 것이다.”
― 학 2:7하, 9상.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의 표현은
하나님의 건축물인
여호와의 집 안에 있다.

에스겔은
하나님에 대한 이상 가운데서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집으로 돌아와
그 집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집의 건축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영광의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가 건축되어
하나님의 거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에스겔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의 집에서 흘러나와서
동쪽,
곧 하나님의 영광의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있는 흐름은
제한될 것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가
첫째로 고려해야 할 것은
주님의 영광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결정을 내릴 때
최우선적으로
주님의 영광에 부합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우리 봉사의 목적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단체적이고 건축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고,
신성한 영광 안에 있는
하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을
인장 반지로 만드신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를
그분의 대표로 여기신다는 것과
그분께서
그를
사랑하고 믿으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스룹바벨은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믿으시는 분이시다.
그러한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건축하는 일을 돌보실
자격이 있으시다.

성전 건축이 완성된 후에
주님의 영광이 돌아왔다.
에스겔은
그의 사역 초기에
주님의 영광이
점차적으로 떠나는 것을
보았다.
주님의 영광은 먼저
성전을 떠나
문지방에 머물렀다.
그 후 주님의 영광은
문지방을 떠나
성 한가운데서 떠올랐고,
또다시 성을 떠나
성의 동쪽에 있는
올리브산에 머물렀으며,
그곳에서
하늘로 올라갔다.

주님의 영광이
돌아온 것은
성전 건축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 땅에 돌아오기를
얼마나 갈망하시는지!
하지만 그분께서
돌아오시기 위해서는
그분의 발바닥이 쉴 장소,
즉 그분의 두 발을 둘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그분의 거처인
그분의 집이 바로
이 땅에서
그분께서
발을 두실 수 있는 장소이다.

오늘날 주님은 단지
개인의 영성만 관심하지 않으신다.
심지어 다니엘과 같은
영적 거인들이
바빌론에서 많이 일어났더라도,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채우기 위해
그곳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이 돌아온 것이 바로
성전 건축이 완성된 후였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교회 안에 거하며
교회에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려면 반드시
교회가 완성되어야 한다.
즉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거하시려면 반드시
교회가 건축되어
하나님의 거처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거처를 가지기를 갈망하시므로
교회가
이 땅에서 건축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사시는 장소
곧 그분의 거처는
교회이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거하시므로,
하나님을
찾고
접촉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교회에 와야 한다.
우리에게
은혜가 있어
교회 안에서 건축된다면,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사실 것이다.

에스겔서 43장 4절은
“여호와의 영광은
동쪽을 향한 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라고 말한다.
주님은
동쪽 문을 통해
돌아오셨다.

성전에는
세 개의 문이 있다.
남쪽과 북쪽 문은
사람들의 편리를 위한 것이지만,
동쪽 문은
사람들의 편리뿐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교회생활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여러 개의 문이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은
동쪽 문,
곧 주님의 영광을 향해
열린 문이다.
이것은
교회생활 안에 있는 우리에게
주님의 영광을 향해
열린 문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편리만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특별히
주님의 영광을 위해야 한다.
교회생활 안에서
결정을 내릴 때
최우선적으로
주님의 영광에 부합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심지어 집회 날짜와 시간에 관한 결정에서도
사람의 편리만 위하지 말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야 한다.
교회는 반드시
주님의 영광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주님의 영광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강은
성전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른다.
동쪽은
주님의 영광의 방향이다.
동쪽으로 흐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강이 항상
하나님의 영광의 방향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

교회생활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한다.
복음 전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생수의 흐름이
흘러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다면,
그 흐름은
제한될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위해야 한다.
그러면 생수가
교회로부터
흘러 나갈 것이다.

스가랴서 4장 10절에서
여호와의 눈인
‘이 일곱’은
스가랴서 3장 9절에 나오는
돌의 일곱 눈이며,
또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일곱 눈이다(계 5:6).
따라서 돌과 여호와와 어린양은
하나이다.
그리스도는
구속하는 어린양이시며,
건축하는 돌이시고,
또한 여호와이시다.
그리스도의 일곱 눈은
하나님의 일곱 영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구별은 되시나
분리되지는 않으심을
보여 준다.
사람의 눈이
본질적으로
그 사람과 하나인 것처럼,
성령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이시다.
그리스도의 일곱 눈의 기능은
하나님의 심판을
온 우주에 집행하고
하나님의 온 존재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 안으로
옮겨 붓고 주입하기 위해
관찰하고 찾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는데,
이 영은 또한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이시다.
이 영은
생명의 영이시다.
따라서 일곱 영의 기능은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인
새 예루살렘을 건축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신성한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어린양은
구속을 위한 것이고,
돌은
건축을 위한 것이다.
구속과 건축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일곱 눈을
가지고 계신다.

등잔대인 교회에는
일곱 등잔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다.
우리는
잠언 20장 27절이
“사람의 영은
여호와의 등이라”
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두 개의 등이 있는데,
곧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이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영은
고장 난 등이었다.
우리가
회개한 후
그 등이
수리되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거듭남에 의해
이 등은
그 안에 들어온
또 다른 등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었다.
이 두 등이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그처럼 많은 비춤이 있다.
그 둘은
하나가 된다.
왜냐하면
주님께 결합되는 그는
하나의 영이기 때문이다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 영’(고전 6:17)이기 때문이다.)

잠언 20장 27절은 계속해서,
사람의 영이
사람의 내적 존재의
모든 깊은 곳,
혹은 다비의 각주의
표현에 따르면
‘혼의 모든 방들’을
살핀다고 말한다.
여러분의 혼 안에는
여러 개의 방들이 있다.
영은
여러분의
감정, 생각, 의지의 방들을
살피고 있다.

혼의 속부분들은
열려 있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감정을 열기를
두려워한다.
기도하는 중에
우리는
어떤 부분에 이를 때
자신을 닫아 버리는데,
그것은
우리의 어떤 내실을
주님께 열어 드리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실하게
모든 집회에 참석하고
말씀을 읽으며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안에
닫혀 있는 문이 있다.
우리는
주님께,
그분을 사랑하고
다른 방식으로
대가를 지불하겠지만
그 문은
열어 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린다.

우리의 영이
거듭나는 것은
간단하다.
우리는
자신의 죄들을 자백하고
주님을 받아들인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의 혼 안에서
변형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주님의 등이
모든 내실들을 살피는 것을
필요로 한다.
주님께
자신의
모든 내실들을 연 사람들은
매우 적다(거의 없다).

이 빛이 비치는 곳에,
거기에 생명 공급이 간다.
방마다 차례로(한 방 한 방이)
우리는
주님의 형상 안으로
변형된다.
우리 안의 금이
형태를 갖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형성되신다(형상이 이루어지신다).
우리에게 있어서(우리를 위해서)
삶은(사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우리 모두 안에서
이 빛비춤과 공급함과 변형됨이
계속 일어나(계속되어),
우리를
그 금등대로 만든다.
그때 우리는
참으로
그 교회,
하나님의 실지적인 표현,
또 그분의 증거이다.

스가랴서는
등잔대의 일곱 등잔들이
하나님의 일곱 영들,
일곱 배로 강화되신 그 영이시라는 것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일곱 영들은
여호와의 일곱 눈들과
구속하시는 어린양의 일곱 눈들과
건축을 위한 돌의 일곱 눈들로서,
삼일 하나님의 완전한 표현과
하나님의 집의 재건을 위하신다.

스가랴서 3장 9절에서
여호수아 앞에 놓인 돌은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한 돌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여호와께서
돌에 새기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하나님에 의해
새겨지셨다는,
곧 잘리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여호와께서
그 땅의 죄악을
하루 만에 제거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 위에
(공들여) 일하셨던
그 그리스도께서
하루 만에,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날에
이스라엘 땅의 죄악을
제거하실 것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셨다.

그 돌, 여호와, 또 그 어린양은
하나이다.
그리스도는
구속하는 어린양이시며,
건축하는 돌이시고,
또한 여호와이시다.
그리스도는
어린양-돌,
곧 구속을 위한 어린양과
건축을 위한 돌이시다.

하나님의 건축물에서
그리스도는
건축물을 떠받치는
기초 돌이시고,
그분의 몸의
이방인 지체들과
유대인 지체들을
함께 연결하는
모퉁이 돌이시며,
하나님의 건축물에서
모든 것을 완결하는
은혜의
꼭대기 돌이시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일곱 눈들을 가진
건축하는 돌이시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일곱 눈들이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해 있음을
계시한다.

그리스도는
일곱 눈들
곧 일곱 영들을 가진
건축하는 돌로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옮겨 부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한
귀한 재료들 안으로
변형시키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동안
그분의 일곱 눈들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옮겨 부으신다.

하나님의 건축물을
완성하시기 위해,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은
구속하는 어린양과
건축하는 돌이신
그리스도의 눈들이신데,
이 눈들은
우리를
감찰하고 살피며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해
그리스도의
본질과 풍성과 부담을
우리에게
주입하고
옮겨 붓기 위한 것이다.

어린양의 일곱 눈들은
법리적인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입하고,
돌의 일곱 눈은
유기적인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입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법리적인 구속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에 의하여
이 땅에서 경륜적으로 움직이심으로
그분의 건축의
목표를 이루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 안에는
두 개의 등들,
곧 우리의 영과
그 안에 계시는
일곱 배로 강화되신
하나님의 영이 있다.
변화되려면,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을
완전히 주님께 열어 드려서,
일곱 등불이 있는
주님의 등이
우리 혼의
모든 방을 살피고
우리의 속부분들을
비추고 밝혀 주며
그 속부분들에
생명을 공급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변화를 가장 많이 체험하는 사람은
주님께 완전히 열려 있는 사람이다.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께서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믿는 이들 안에서 운행하심으로써,
그 추구하는 믿는 이들은
이기는 이들이 되도록
강화되어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한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고,
이 생명 주시는 영은 또한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이시며,
이 영은
생명의 영이시다.
따라서 그 일곱 영들의 기능은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인
새 예루살렘의 건축을 위하여
신성한 생명을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일곱 배로 강화되신 그 영은
일곱 등불로서(불의 일곱 등들이고),
우리를
태우시고 비추시며
폭로하시고 살피시며
심판하시고 순수하게 하시며
정련하심으로
금등잔대들을 산출하시어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성취하신다.

누가
변화를
가장 많이 체험할 수 있는가?
주님께
절대적으로 열려 있는 사람이다.
“주님,
저는
당신께
완전히 열려 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당신께 열려 있기를 원합니다.
저의 전 존재
곧 저의 마음, 저의 생각,
저의 의지, 저의 감정이
열려 있습니다.
계속
빛을 비춰 주십시오.
철저하게
저를 살펴 주십시오.
제게 빛 비추시고
저를 살려 주십시오.
저는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방식으로
그 빛이
각각의 모든 영역(부분) 안으로
침투할 것이고,
생명이 자발적으로(자연스럽게)
여러분에게 공급될 것이다.
진흙으로 된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 안으로
변형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 금이
여러분 안에서
형성될(형태를 이룰, 만들어질) 때,
하나님을
비추어 내시고
또 나타내시는
그 일곱 영들께서
거기에 계실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분의 빛 비추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생명이
우리에게 공급되도록
그분께 열려 있기를
바란다.
그럴 때 우리가
변형될 것이고
또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닐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그 등들에 의해
빛 비춤을 받을 때,
우리는
우리의 지방에서
실재 안에 있는(실제로)
그 금등대가 될 것이고,
그 삼일 하나님을
나타낼 것이다.
그때 그분께서
그분의 증거를
가지실 것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탁월하시며
경이로우시고
비밀스러우시며
놀라우신 분께서
하나님의 행정의
집행자이시다.
그분께서
하실 수 있고
자격이 있으시기 때문에
일곱 봉인들이
그분께 건네어졌다.
이분은
일곱 봉인들을
여실 수 있고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실
자격이 있으시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시는 방식은
그분의 눈들이신
그 일곱 영들에 의해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경륜의
초점에 계시는(중심적인)
바로 그 집행자이시지만,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한
그분의 눈들이신
일곱 영들을 필요로 하신다.

그 일곱 영들께서는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하시기 위해
오늘날
이 땅 위에서
불타고 계신다.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
타오르는 불꽃의
목적은
금등잔대들인 교회들을
산출하는 것이다.
타오르는 것은
심판하는 것,
정결하게 하는 것,
정련하는 것,
산출하는 것을
함축한다.
나는
그 세상 안에 있는
또는 그 교회들 안에 있는
실망스러워 보이는 상태를
믿지 않는다.
나는
세계를
통제하시고
지시하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심판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며
정련하셔서
한 순수한 금등잔대를 산출하시는,
타오르시는 그 일곱 영들의
불꽃을 믿는다.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며
정련하심으로
순수한 금등잔대를 산출하시도록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
한 기회와
또 한 입구를
제공해 드리기 위해
애쓰고(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곱 영들의
불태우심을 향해(활활 타오르심을 향하여)
활짝 열려 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신성한 불꽃이시여,
오십시오!
오셔서 심판하십시오!
오셔서 정결하게 하십시오!
당신께서
그 금등잔대를 산출하시도록
오셔서 정련하십시오.”
우리는
그분의 긍휼로
그분께 열려 있다.
날마다,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오십시오.
우리는
당신께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존재의
각각의 모든 길들을
당신께
열어 드립니다.”
내가
간증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거의 날마다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이다.
“주님,
저에게
빛 비추어 주십시오.
제 속을 살피시고
저를 폭로해 주십시오.
주님,
저는
당신에 의해
빛 비춤 받기를 원하고,
당신의 빛 가운데서
폭로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주님,
우리는
열려 있습니다.
오셔서
우리 위에
빛을 비추시고,
우리 속에서부터
빛을 비추시며,
우리 존재의
각각의 모든 길들에
또 각각의 모든 구석들에
빛을 비추어 주십시오.
우리는
폭로되고,
깨끗하게 되며,
또 정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은
한 순수한 금등잔대를 산출하시는
한 길을 가지신다.

영원하신 분에게서 나오시고
구속자에게 속하시는
그 일곱 영들께서는
하나님의 왕좌 앞에서 불타고 있는
일곱 등불로서
우주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집행하시며,
죽음을 당하신 어린양의
일곱 눈들로서
교회들을 살피시고
교회들에게 주입하고 계신다.
그 일곱 영들의
이중 임무는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하는 것과
또 그 교회들을 살피고
그 교회들에게 주입하는 것이다.
그 일곱 영들께서는
우리의 죄 많음을(사악함을)
끝까지 찾아내시며
또 그리스도의 풍성을
우리에게 주입하신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말하는 동안,
그의 두 눈들도
그의 부담을
여러분에게 주입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어린양의 눈들이신
하나님의 일곱 영들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우신 이 한 분의
부담과 본질을
주입하신다.

이 두 올리브나무는
그 당시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와
총독인 스룹바벨을
상징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 재건을 위해
여호와의 영으로 채워진
기름의 두 아들이었다.
기름의 두 아들은 또한
현시대의
마지막 삼 년 반 동안 활동할
두 증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들,
곧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을
강하게 하기 위해
대환난 때에
하나님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이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이다.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신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모두
하나님을 위해 증언한다.
모세와 엘리야 이 두 사람은
대환난의 기간 동안 박해받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믿는 이들을
부축하고
그들에게 공급할 것이다.

스가랴서 4장 12절은
가지들이
금을 흘려 보낸다고
말한다.
여기서 ‘금’이란 단어는
기름을 가리킨다.
기름과 금이
하나인 것이다.
기름은
그 영을 가리키고,
그 영은
하나님이시다.
더욱이 성경의 예표에서
금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대접을 채우는 금은
그 영이고,
그 영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금으로 예표되신다.
이 문제를
오늘날 우리의 체험에
적용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서 흘러나오시는
그 영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금이심을
본다.
이와 같이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금을 공급함으로써
그리스도를 공급할 때,
사실상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나와
그들 안으로
흐르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이들 안으로
하나님을 흘려 보내는
올리브나무가 되어야 한다.

출애굽기에서
등잔대는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신약의 끝에서
등잔대들은
삼일 하나님의 증가된 체현인
교회들을 상징한다.

등잔대 안에는 단지
두 가지 기본적인 요소가 있다.
금은
단단한 형태이고,
기름은
타는 요소이다.
이 두 요소가
합쳐질 때
빛나는 등잔대가
있게 된다.
아버지의 본성과 본질,
아들의 형상과 모습,
그 영의 표현을 가진
등잔대는
삼일이신 하나님을 표현한다.
스가랴서 4장 12절은
등잔대의 기름이
금으로 된 기름임을
말해 준다.
등잔대인 교회는
삼일 하나님의
견고한 체현으로서,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을
기름으로 가진다.
사실상 기름의 본질은
금의 요소이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잘라 내시고
교회에
더 많은 기름을
더하실 때마다,
그분은 사실상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을 더욱더 더하시는데,
이것은
교회생활 안으로
신성한 본성,
곧 금을
더 많이 더하시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떤 지방에 있는 교회에
금이
그렇게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님은
부정적인 것들을 잘라 내시고
기름을 더하신다.
결국 교회는
더 많은 금을
가지게 될 것이고,
신성한 본성이
더욱더 많아질 것이다.
이것은 삼일 하나님의 체현인
교회 안에
인간적이고 타고난 모든 것들은
감소하고,
신성한 본성은
계속해서 증가해야 함을
말해 준다.
우리의
육체와 자아와
타고난 사람,
그리고 옛 창조물과 관련된
우리의 모든 것,
심지어 우리의 선한 자아도 반드시
감소되어야 한다.

본질에 있어서
그 영은
금의 요소이시고,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 영께서
교회 안으로 더해지시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한 요소가
교회 안으로 더해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이런 방식으로
육체와 타고난 생명과 옛 창조물은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
감소되고 있고,
하나님의 신성한 요소는
증가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교회들은 실지로
순수한 금등잔대들이 되며,
이것이
이 땅에 있는
오늘날 이 시대의
예수님의 증거이다.

등잔대 양쪽에 있는
두 올리브나무는
그 당시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와
총독인 스룹바벨을
상징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 재건을 위해
여호와의 영으로 채워진
기름의 두 아들이었다.

기름의 두 아들은 또한
현시대의
마지막 삼 년 반 동안 활동할
두 증인인
모세와 엘리야를 예표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들,
곧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을
강하게 하기 위해
대환난 때에
하나님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원칙적으로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이들은
신선한 기름의 아들들,
곧 즐거움의 기름이신
신선하고 현존하고 완결되신
영으로 충만하여,
등잔대의 빛나는 증거
곧 예수님의 증거를 위해
등잔대 안으로
그 영을 흘려 보내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등잔대인 교회는,
신성한 본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기름
곧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이 함께하는
삼일 하나님의
견고한 체현이다.

기름 자체가
금이다.
이것은 금이
기름처럼 흐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더 많은 기름이
등잔대 안으로 더해진다는 것은
더 많은 금이 더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금을 더 많이 얻기 위하여,
곧 신성한 본성을 지니신
하나님을 더 많이 얻기 위하여
날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금으로 된
새 예루살렘을 건축하기 위해
순수한 금등잔대가
될 수 있다.

이 문제를
오늘날 우리의 체험에
적용해 볼 때,
우리는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그 영께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금이신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 주어
그들에게
기름을 공급해 줄 때,
우리는 사실상
그들에게
하나님을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흘러나오셔서
그들 안으로
들어가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에게서
다른 이들 안으로
하나님을 옮겨 붓는
올리브나무가 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기름은
하나님을 흘려 내보내는
올리브나무가 된 사람들에 의해
궁핍한 사람들에게
공급될 것이다.

1일

학 1:4 “이 집은 황폐해져 있는데, 지금이 너희가 벽널로 장식한 집에 거주할 때냐?

학 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건축하여라. 그러면 내가 그 집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영광을 얻을 것이다. 여호와의 말이다.

성전 재건은 여호수아의 제사장 직분과 유다 총독 스룹바벨(학 1:1)의 권위를 통해 이루어졌다. 성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건축하면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모두 어느 정도 약해지고 낙심하게 되자, 하나님은 신언자 학개와 스가랴가 그분을 위하여 말함으로써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강화하고 격려하게 하셨다.

학개서의 중심 사상은 여호와의 집의 건축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의 복지와 관련되고, 복원의 시대에서 천년왕국이 메시아와 함께 도래하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집 혹은 성전은 먼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집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였고, 그다음 단체적으로 하나님의 집인 몸 된 교회 곧 확대되신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이처럼 우리가 예표의 실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학개서가 우리를 가리켜 말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귀환한 포로들을 다루시는 것은 회복 안에 있는 우리를 다루시는 것을 상징한다.

학개서 1장 2절부터 6절까지와 9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책망을 본다.

여호와의 집을 재건하기를 지연하는 것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변명은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백성의 변명에 이어 여호와의 질문이 나온다. “이 집은 황폐해져 있는데, 지금이 너희가 벽널로 장식한 집에 거주할 때냐?”(학 1:4) 그들은 자신의 집은 돌보았지만 여호와의 집은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오셔서 그분의 집에 관해 그들에게 질문하신 것이다.

학개서 1장 5절과 6절, 9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자기 잇속이나 차리며 하나님을 소홀히 대하던 귀환한 포로들을 여호와께서 다루시는 것을 본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다루실 때 첫 번째로 하신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길들을 생각해 보라고 권하신 것이었다.

여호와는 귀환한 포로들이 씨를 많이 뿌렸는데도 조금밖에 거두지 못하고, 먹고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않고, 사람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은 것같이 되었다고 지적하셨다(학 1:6). 이것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그분의 집을 돌보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면, 아무리 먹고 마시고 잘 입어도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임을 말해 준다. 우리가 교회를 소홀히 대한다면, 우리는 결코 참된 누림이나 만족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학개서 1장 9절에서 여호와는 계속해서 그들이 많은 것을 바랐으나 얻은 것이 조금뿐이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을 때 여호와는 그것을 불어 버리셨는데, 이는 그분의 집이 황폐해져 있는데도 그들이 각자 자기 집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학개서 1장 9절에서 ‘달려갔기’라는 말은 백성이 자기 집을 돌보는 데만 바빴음을 가리킨다. 오늘날 몇몇 성도들은 집회에 참석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자기 집을 돌보는 데 바쁘다.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우주 안에 중립이라는 것이 결코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절대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집을 먼저 돌보든지 아니면 주님의 집을 먼저 돌보든지 해야 한다. 여기에서 나의 요점은 우리가 주님의 권익을 위해 시간을 절약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죄인들이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특별히 젊은이들이 우리의 보살핌과 양육을 기다리고 있는가?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와 결산하실 때(마 25:19), 주님은 분명히 우리를 책망하실 것이다. 우리가 증가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우리의 환경 때문이 아니라 주로 우리의 변명 때문이었다.

여호와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길들을 생각해 보고,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건축하라고 명하셨으며, 그 집으로 말미암아 기뻐하시고 영광을 얻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학 1:7-8). 오늘날 우리의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한 재료들을 모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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