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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건제물로 취함

속건제물은 
우리의 행위로 지은 
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신성한 빛 안에서 
우리의 죄들을 자백함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건제물로 취하는 것이 
우리가 
새 예루살렘이 되기 위해 
생수이신 그리스도를 
마시는 길이다.

우리의 죄들을 자백함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건제물로 취하는 것이, 
우리가 
생명이 자라서 
생명의 성숙에 이르기 위해 
생명의 교통 안에 
계속 지켜지는 길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건제물로 취함으로 
죄들의 용서를 받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죄를 처리하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성도들에게 공급하는 것은 
세균들을 죽이고, 
문제들을 없애며, 
그 영의 하나를 유지해 준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건제물로 취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해서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지기 위해, 
우리의 모든 결함과 약함과 잘못과 죄악을 
철저히 자백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된 일들의 기록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일은 
하나님께 자백함으로써 
우리에 대한 그 기록을 
지워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철저하고도 세밀하게 
자백한 후에, 
우리는 본질적으로나 경륜적으로 
그 영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 안에서 
활기차고 담대하게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말할 것이다.

속건제물은 
결국 속죄제물이 되는데, 
이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구속이 
두 방면에서의 죄의 문제, 
곧 우리의 내적인 본성에 있는 죄와 
우리의 외적인 행실에 있어서의 죄들을 
해결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속건제물로는 
산비둘기 두 마리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칠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바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한 마리는 
번제물로 바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모든 범죄의 근원이 
우리의 육체 안에 있는 죄이며 
죄를 짓는 원인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레위기 5장은 
속건제물을 필요로 하는 
네 가지 특별한 항목에 대해
말한다. 
이 네 가지 항목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고 정결하며 기뻐하는 생활을 함으로, 
삼일 하나님과 합병되어 
그분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증언하는 일에서 
실패하는 것은 
신실하시고 정직하신 
우리의 하나님과 달리, 
정직하지 않고 신실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거짓말하는 것을 다루는데, 
거짓말은 
거짓의 아버지인 
사탄과 관련된다.

영적인 죽음의 
부정함을 만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심각한 일이다.

우리가 
죽음에서 분별된 
거룩한 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사람들을 접촉하는 것에 관하여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굽이 갈라져 있고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은 
분별력 있게 행동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음미하며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수중 생물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활동하는 동시에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을 상징한다.

날 수 있는 
날개가 있고 
생명의 씨를 
음식으로 먹는 
새들은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세상을 초월한 
생명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생명에 속한 것들을 
그들의 생명 공급으로 삼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날개가 있고 
또 땅에서 뛸 수 있도록 
발 뒤에 다리가 있는 
곤충은 
세상을 초월한 
생명 안에서 
살고 움직일 수 있으며 
세상에서 
그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레위기 5장 2절에 나오는 
동물들의 사체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영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죽음은 
교회생활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도 
퍼질 수 있다. 
들짐승은(beasts; 짐승, 야수, 큰 네발짐승)
거친 죽음을 상징하고, 
집짐승은(cattle; 소, 소떼, 가축)
부드러운 죽음을 상징하며, 
길짐승은(creeping things; 기는 것들, 파충류)
간교한 죽음을 상징한다.

어떤 종류의 죽음이든 
죽음은 다 
부정하고 
불결하며
더럽히는 것이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다.

구약의 예표에 따르면, 
죽음은 
죄보다도 더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서 분별되고
‘항(抗)죽음제’인(“anti-death”; 항사제)
생명으로 충만한 
나실인들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부정한 것은, 
타고난 사람과 
타고난 생명에서 흘러나온 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두 부정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 앞에서 
경솔하게 말하며 
우리의 의견을 
성급하고도 부주의하게 분별없이 
표현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레위기 5장 11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하는 
고운 가루가 
속죄제물을 위해 
사용된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인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죄들을 범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것은 
우리가 
죄들을 범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 안에 
죄가 있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예수님의 인성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인성 안에는 
죄가 없으며, 
그분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시는 분이시다.

속죄제물로 바친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죽이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데에는 
단지 예수님의 인성의 
작은 부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배상을 할 때 
그 값에 오분의 일을 
보태어 배상하는 것은 
속건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신성한 척도, 기준, 측량에 따라 
물질적인 것에서
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 마 1:6.

시편 51편은 
다윗이 
우리야를 살해하고 
그에게서 
그의 아내를 빼앗은 
큰 죄를 범하고 나서 
나단에게 
책망을 받은 후에 
지은 것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시 51:4.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주소서” 
—시 51:9.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 제물은 
상한 영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시 51:18.

다윗의 범죄와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가
‘결혼’한 결과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사람인 
솔로몬‘(평화로운’)이었다.

교회는 언제나 
이러한 솔로몬과 같은 사람, 
곧 사람의 범죄와 회개에 
하나님의 용서가 더해진 
결과로 산출된 
사람에 의해 
건축된다.

우리가 
우리의 범죄와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의 
결혼을 체험할 때, 
우리는 
교회를 건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유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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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plies on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건제물로 취함”

6일

레 5:11 
그러나 만일 그가 
산비둘기 두 마리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칠 형편도 
되지 못하면, 
그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제물로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가져다가 
속죄제물로 
바쳐야 한다.
이것은 
속죄제물이므로, 
그 위에 
기름을 부어서도 안 되고 
유향을 놓아서도 안 된다.

마 1:6 
…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레위기 5장 11절에서 
고운 가루는 
예수님의 인성의 
예표이다. 
이것은 
우리가 
죄들을 범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 안에 
죄가 있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예수님의 인성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인성 안에는 
죄가 없으며, 
그분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시는 분이시다. 
속죄제물로 바친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죽이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데에는 
단지 예수님의 인성의 
작은 부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물건들에 대하여 
죄를 지은 사람은 
배상을 해야 하고, 
그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속여 빼앗은 것으로 인해 
죄를 지은 사람도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것을 완전히 배상하고,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이것은 
속건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신성한 척도, 기준, 측량에 따라 
물질적인 것에서 
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울에게 
누군가로 
그를 대치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찾으셨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온 생애에 걸쳐, 
어떤 사람을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이 한 가지 큰 잘못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 
다윗은 
그 한 가지 큰 잘못으로 
두 가지 큰 죄, 
곧 살인과 간음을 
범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유죄 판결하셨다. 
성경은 
다윗이 
이 한 가지 일을 제외하고는 
평생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게 행했다고 말한다
(왕상 15:5).

다윗은 
살인과 간음을 범한 후, 
신언자 나단에게 
책망을 받았다. 
하나님은 
다윗을
유죄 판결하실 목적으로 
신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다. 
유죄 판결받은 후 
다윗은 
회개했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하는 시이다. 
그는 
회개했고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셨다
(삼하 12:13). 
회개가 있고 
용서가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범죄와 회개와 용서, 
세 항목을 
모두 본다. 
이 세 항목을 
합칠 때 
그 결과는 
솔로몬이다. 
먼저 거기에는 
범죄와 회개가 있었고, 
거기에 용서가 더해졌다. 
그 후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이 있었다. 
…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결혼을 
본다. 
첫번째는 
다윗과 밧세바의 결혼이다. 
두 번째는 
다윗의 범죄와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의 
결혼, 
즉 영적인 결혼이다. 
다윗의 범죄와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이라 불리는 
사람을 낳았다. 
교회는 언제나 
이러한 솔로몬과 같은 사람, 
곧 사람의 범죄와 회개에 
하나님의 용서가 더해진 
결과로 산출된 
사람에 의해 건축된다.

다윗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그의 구원의 기쁨이 
회복된 후에, 
그는 시온을 위하여, 
예루살렘 성벽의 건축을 위하여, 
그의 왕국의 견고하게 됨을 위하여 
기도했다(시 51:18). 
결국 다윗의 죄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결과로, 
하나님은 
그에게 
예루살렘성의 중심인,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아들을 주셨다.

여러분은 
항상 하나님의 눈에 
올발라야 한다. 
그러나 여러분의 올바름은 
교회 건축을 위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 그러나 어느 날 
여러분은
끔찍한 어떤 일을 
행할 것이다. 
… 그럴 때 여러분은 
시편 51편을 
읽어야 하며, 
그것을 
여러분의 시로 삼고 
주님께 나아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주님, 
회개합니다.
제가 
당신께, 
오직 당신께만 
이 악한 일을 
범했습니다. 
저를 용서하소서.” 
이러한 회개 후에 
여러분은 
또 다른 결혼, 
즉 여러분의 범죄와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의 
결혼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평화로운 이이며, 
주님의 사랑을 받는 이인
솔로몬을 
낳아 줄 것이다. 
이 사람은 
교회 
곧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것이다. 
그때에 여러분은 
교회 건축에 
매우 유용하게 될 것이다.

 

5일

레 5:3-4 
그가 
사람의 부정한 것, 
곧 어떤 부정한 것이든지 
만져서 부정하게 되었다면, 
그 일을 
알지 못하였다 해도, 
그것을 알게 되는 대로
그는 
죄가 있게 된다. 
또 누구든지 
악한 일을 하겠다거나 
선한 일을 하겠다고 
자기 입술로 경솔하게 맹세하였다면, 
그 사람이
경솔하게 맹세한 것이 무엇이든 
그 일을 알지 못한다 해도, 
그는 
그것을 알게 되는 대로 
그것들 가운데 한 가지 때문에 
죄가 있게 된다.

레위기 5장 3절에서 
사람의 부정한 것은 
타고난 사람, 타고난 생명을 
상징한다. 
타고난 사람은 
부정하다. 
타고난 사람과 
타고난 생명에서 흘러나온 것은 
모두 부정하다.

우리가 
몸의 지체들로서 
서로 접촉할 때에도, 
영적인 죽음과 
타고난 존재에서 나온 
부정한 것과 같은 
부정한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서로 교통을 나눌 때 
이 두 가지 종류의 
부정한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가 
여러분에게 
다정한 말을 하거나 
혹은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는 
말을 할지 모르나, 
그의 말은 
완전히 천연적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 말을 취한다면 
더러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사람의 부정한 것, 
곧 타고난 존재에서 나온 
부정한 것을 
접촉할 것이기 때문이다.

공손함은
(politeness; 예절 바름, 정중함, 고상함)
일종의 나병이다. 
공손한 것은 
친절한 것과
(being nice; 다정함, 좋음, 유쾌함, 붙임성 있음)
다르다. 
합당한 인간 생활을 위해서는 
다른 이들에게 
항상 친절해야 한다. 
공손한 것은 
사실상 가면을 쓰는 것이다. 
이것은 
공손함이 
가장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한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공손히 대하는 척하면서
(may be polite with;  
예절 바를 수 있지만)
그에 관해 
다른 이들과 한담을 하며 
그를 비판한다 하자
(비난할 수 있다).
이것은 
나병이며 
천연적인 것보다 
더 나쁜 것이다.

성도들은
‘끼리끼리’의 관계를 가질 수 있으며 
영 안에서가 아니라 
천연적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 
이런 사랑은 
천연적이고 
육체에 속하며 
부정하다.

만일 우리가 
이 부분의 말씀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빛 비춤을 받는다면 
우리에게
속건제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고 
그분을 
번제물로 취하면 취할수록, 
우리는 
속건제물이시며 속죄제물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더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근원인 내주하는 죄를 
처리하는 속죄제물과 
이 근원에서 나온 
‘자녀들’인 범죄들을 
처리하기 위한 속건제물이 
필요하다.

주 예수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고 말씀하셨다. 
죽음처럼 
타고난 생명은 
부정함을 가져온다.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생활 안에 
죽음과 타고난 생명이 
널리 퍼져 있을 수 있다.

타고난 생명은 
천연적인 애정의 문제를 
포함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천연적으로, 
곧 천연적인 애정으로 
서로를 사랑한다. 
어떤 사람이 
과거에는 
여러분에 대해 
애정을 품고 있었으나 
지금은 여러분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자. 
이것은 
다른 이를 
사랑하고 돕고 돌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성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천연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거나, 
혹은 헛된 영광을 구하며 
다른 이들을 시기하고 
질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랑과 시기는 
모두 타고난 생명에 속한 것이다.

레위기 5장 4절에서 
우리는 
경솔하게 말하는 문제, 
곧 하나님 앞에서 
성급하고 부주의하고 분별없이 
말하는 문제를 본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듣고 
그 즉시로 
그것을 좋아한다든지 
혹은 싫어한다든지 
말할 수 있으며, 
그것에 관해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어떤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경솔하게 말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그것을 좋아하실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므로 
성급하게 말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 
우리의 의견을 표현하는 대신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가서, 
우리가 그것에 참여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 문제에서 떠나야 하는지를 
보여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하고 간구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합당한 태도이다.

4일

레 11:3 
짐승 가운데 
굽이 갈라져 있고, 
즉 굽이 두 쪽으로 벌어져 있고
되새김질을 하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어도 된다.

레 5:2 
또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부정한 들짐승의 사체나 
부정한 집짐승의 사체나 
부정한 길짐승의 사체를 만졌다면, 
그 일을 알지 못하였다 해도, 
그는 부정하며 죄가 있게 된다.

레위기 11장부터 27장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의 생활, 
곧 거룩하고 
정결하며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다룬다.

먹는다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접촉하고 
그것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결국 우리의 내적 조성이 된다. 
레위기 11장에서 
모든 동물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상징하며, 
먹는 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접촉하는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종류의 사람을 접촉할지를 
주의해야 한다.

굽이 갈라져 있고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은 
분별력 있게 행동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음미하며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바다는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을 상징한다. 
…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수중 생물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활동하는 동시에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을 상징한다.

날 수 있는 날개가 있고 
생명의 씨를 음식으로 먹는 
새들은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세상을 초월한 
생명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생명에 속한 것들을 
그들의 생명 공급으로 삼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레위기 11장 13절부터 19절까지에서 언급된 
부정한 새들은 
씨를 먹지 않고 
사체를 먹는데, 
이들은 
죽음에 속한 것들을 
먹고 사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날개가 있고 
또 땅에서 뛸 수 있도록 
발 뒤에 다리가 있는 
곤충은 
세상을 초월한 
생명 안에서 
살고 움직일 수 있으며 
세상에서 
그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레위기 5장 2절은 
들짐승과 집짐승과 길짐승의 
사체를 언급한다. 
들짐승은 
야생 동물이며 
집짐승은 
집에서 기르는 동물이다. 
… 어떤 사람들은 
들짐승과 같고, 
어떤 사람들은 
집짐승과 같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길짐승과 같다. 
5장 2절에서 
사체는
죽음을 의미한다. 
이 세 종류의 동물, 
곧 들짐승과 집짐승과 길짐승의 
사체는 
세 종류의 죽음을 
상징한다. 
첫 번째 죽음은 
들짐승같이 거칠고, 
두 번째 죽음은 
온순하고 길들여진 
짐승과 같이 부드럽다. 
세 번째 죽음은 
길짐승처럼 간교하다. 
성경의 예표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세 종류의 죽음, 
즉 거친 죽음과 부드러운 죽음과 간교한 죽음이 
있을 수 있음을 
가리킨다.

그 종류가 어떠하든지 
죽음은 죽음이며, 
그것은 부정하다. 
거친 죽음이든 부드러운 죽음이든 간교한 죽음이든 
모든 죽음은 
불결하고 더럽히는 것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이 세 가지 종류의 죽음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에서 피하는 것은 
쉽지 않다.

구약의 예표에 따르면, 
죄는 
죽음만큼 더러운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속건제물을 드림으로써 
즉시 용서받고 
정결하게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죽음을 만지면 
며칠을 기다려야 
정결하게 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죽음이 
죄보다 더 더럽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죄는 심각하게 생각하지만 
죽음을 만지는 것은 
평범한 일이며 
심각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죽음을 접촉하는 것은 
가장 심각한 일이다.

죽음의 독은 
성도들을 
손상하고 파멸시킬 수 있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참으로 건축하고 있는지 
아니면 부지중에 
죽음의 독을 
퍼지게 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는 
어떤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냉철하고 공정하며 
조용하고 차분히 
살펴보아야 한다.

 

3일

레 5:1 
누구든지 
어떤 사건을 
보거나 알고 있는 
증인이면서 
증언해 달라고
요청하는 
소리를 듣고도 
증언하지 않는다면 
죄를 짓는 것이고,
그는 
자기의 죄악을 
짊어져야 한다.

요 8:44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버지 
마귀에게서 났으며
… 그는 
… 진리 안에 
서 있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 
그 거짓말은 
자신의 소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쟁이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5장 7절은
“만일 그가 
어린양을 바칠 
형편도 되지 못하면, 
그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속건제물로 
산비둘기 두 마리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여호와에게 가져와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물로 
바쳐야 한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속건제물로는 
산비둘기 두 마리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칠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바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한 마리는 
번제물로 바치기 위한 것이었음을 
본다. 
이것은 
범죄가 
내적인 죄에서 나왔으며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는 데서 나왔음을 
의미한다.
내적인 죄는 
속죄제물을 필요로 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은 
번제물을 필요로 한다. 
이 둘은 
우리의 죄들을 해결하는 
속건제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예표이다.

레위기 5장 7절에서 
우리는 
범죄의 근원을 
볼 수 있으며 
또한 범죄의 원인을 
볼 수 있다. 
범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범죄의 근원은 
무엇인가? 
모든 범죄의 근원은 
우리의 육체 안에 있는 
죄이다. 
범죄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와 관련된 
근원과 원인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마치 내적인 죄가 
남편인 남자와 같으며,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은 
아내인 여자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결혼으로 
한 아이가 태어나는데, 
이 아이의 이름은 
범죄이다.

속죄제물은 
근원을 다루며 
속건제물은 
이 근원에서 나온
‘자녀들’ 혹은‘ 열매들’을 다룬다.

레위기 5장 1절부터 3절까지는 
어떤 특별한 범죄를 
언급한다. 
1절은
“누구든지 
어떤 사건을 
보거나 알고 있는 
증인이면서 
증언해 달라고 요청하는 
소리를 듣고도 
증언하지 않는다면 
죄를 짓는 것이고, 
그는 
자기의 죄악을 
짊어져야 한다.”
라고 말한다. 
‘증언해 달라고 요청하는 소리’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직역하면 ‘맹세의 소리’이다. 
‘자기의 죄악을 짊어져야 한다’라는 말은 
죄나 범죄의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절은 
어떤 사람이 
증언해 달라는 
요청을 듣고도 
자신이 아는 것을 
증언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자기의 죄악을 
짊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며 
오늘날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하지 않게 보이는 
이 문제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드러낸다. 
즉,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면, 
특별히 교회생활 안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신실하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증언할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증언할 것이다. 
이 문제에서 
실패하는 것은 
우리가 
정직하지 않고 
신실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신실하시고 정직하신 
우리의 하나님과 
같지 않은 것이다.

성경의 예표에 따르면, 
레위기 5장의 
모든 방면은 
영적인 의미를 
갖는다. 
1절은 … 사실상 
거짓말하는 것을 
다룬다. 
거짓말은 
사탄과 관련되는데, 
이는 그가 
거짓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레위기 5장 2절은 이어서
“또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부정한 들짐승의 사체나 
부정한 집짐승의 사체나 
부정한 길짐승의 사체를 만졌다면, 
그 일을 
알지 못하였다 해도,
그는 부정하며 
죄가 있게 된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만일 어떤 사람이 
사체를 만지기만 해도 
그가 부정하게 되는 것을 보는데, 
이는 그가 
부정한 것인 
죽음을 만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예표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는 
많은 죽음이 있으며, 
이 죽음은 널리 퍼져 있다. 
더욱이 
부정한 들짐승과 집짐승과 길짐승의 
사체들로 상징되듯이, 
여러 종류의 
죽음이 있다. 
‘그 일을 알지 못하였다 해도’라는 말은 
우리가 
영적인 죽음이라는 
부정한 것을 만졌어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님에 의해 
빛 비춤을 받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많이 
영적인 죽음의 
부정한 것을 만졌으며 
그것에 의해 
더럽혀졌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2일

레 10:17 
너희는 
왜 그 속죄제물을 
성소에서 먹지 않았느냐? 
그것은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서, 
너희가 
회중의 죄악을 짊어지고 
여호와 앞에서 
그들을 위해 속죄하도록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이다.

레 5:6 
… 그는 
자기가 저지른 범죄 때문에 
여호와에게 
속건제물을 가져와야 하는데, 
작은 가축 떼 가운데서 
암컷 
곧 암양이나 암염소를 
속죄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의 죄 때문에 
그를 위하여 
속죄해야 한다.

여인이 
주님께 
생수를 달라고 청했을 때, 
주님은 
죄인인 그녀의 
악함을 비난하거나, 
율법적으로 
그녀에게 
회개하고 
죄들을 자백하는 
실행을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므로 
그녀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다만 그녀의 양심을 만지셨다. 
이러한 식으로 
주님은 
그녀가 
죄들을 자백하고 
회개하도록 
도우셨다.

요한계시록은 
생명수를 마시러 오라는 
부름으로 마친다. 
마시는 것의 결과는 
새 예루살렘이다. 
… 결국 
삼일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와 합병되시어 
새 예루살렘이 되신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이 된다. 
우리가 
새 예루살렘이 되는 것이 
새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주님의 상에 참여하기에 
문제가 없다고 느끼지만, 
죄들을 계속해서 범하고 있는 
다른 이들에 대해 
염려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어떤 성도들이 죄들을 계속해서 범하면서 
여전히 주님의 상에 오는 상황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고린도전서 11장에 있는 
바울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 자신을 
살피라고 말했다. 
즉 우리 자신이 적합한지 
검사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다른 이들을 살피거나 검사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주님께 맡겨야 하며 
그들의 재판관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을 심판하며 
다른 이들은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누군가가 어떤 죄들을 범한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며 
또한 그가 
자신의 죄들을 처리할 수 있도록 
그에게 죄를 처리하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공급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죄를 처리하는 생명이다. 
가장 먼저
여러분 자신이 
죄를 처리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림으로써 
처리를 받아야 한다.
이런 다음 
죄를 처리하는 
생명이신 이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에게 공급해야 한다. 
레위기는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속죄제물을 먹어야 했는데 
이것은
‘회중의 죄악을 짊어지고 
여호와 앞에서 
그들을 위해 속죄하도록 
여호와께서 주신 것’

(10:17)이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죄를 처리하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때에,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의 
죄악을 짊어지는 
역량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죄 가운데 있는 
사랑스러운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기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

우리 모두가 
교회생활 안에서 
하나를 지키며 
사랑하는 생활을 하기를 
힘쓰기를 바란다. 
사랑은 
건축하지만, 
지식은 
죽인다. 
언제나 
사랑하는 생활을 하라. 
어떤 성도를 
도우러 갈 것인지 아닌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도들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모든 성도들을 
동일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교적 강한 성도들은 
사랑하지만 
약한 성도들은 
사랑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반드시 
모든 성도들을 
동일한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 
누군가가 성도라면 
그는 교회 안의 한 지체이며, 
우리는 
다른 성도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동일한 사랑으로 
그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세균들을 죽이고, 
문제들을 없애며, 
그 영의 
영구적이고 지속적인 하나를 
건축할 것이다.

속건제물은 
결국 속죄제물이 된다. 
이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구속이 
두 방면에서의 죄의 문제, 
곧 우리의 내적인 본성에 있는 죄와 
우리의 외적인 행실에 있어서의 죄들을 
해결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죄의 이 두 방면이 
죄의 총체를 이룬다. 
요한복음 1장 29절은 
이 총체를 말한다.
“보십시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여기서 ‘죄’는 
단수이나 
단지 우리의 본성 안에 있는 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죄와 외적인 죄들 
둘 다로 이루어지는
죄의 총체를 뜻한다.

1일

요일 1:8-9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또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죄와 죄들은 
큰 차이가 있다. 
죄는 
우리 안에 있는 
사탄의 본성인 
내주하는 죄의 문제이며, 
죄들은 
외적인 
죄악된 행위들의 문제이다. 
속죄제물은 
죄를 처리한다. 
그리고 속건제물은 
죄들과 범죄들과 허물들을 처리하는데, 
여기에는 
거짓말과 실수와 온갖 그릇된 행위들이 포함된다.

속죄제물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 있는 
죄를 해결하는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속건제물은 
우리의 행위로 지은 
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한 
느낌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들과 잘못들과 결함들과 실패들을 
철저히 자백할 수 있다. 
이럴 때 
주 예수님의 피가 
즉시 우리를 씻어 줄 것이고, 
우리는 
인정받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특별히 주님의 상 앞에 올 때에 
이것을 실행해야 한다. 
주님의 상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엄중한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오래전에 구원받았고 
이미 모든 죄들을 용서받았다고 
말할지 모른다. 
… 그러나 우리는 
두 주 전에 손을 씻었기 때문에 
더 이상 손을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해서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지기 위해, 
우리의 모든 결함과 약함과 잘못과 죄악을 
철저히 자백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이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아신다. 
마태복음 12장 36절과 37절에 따르면, 
각 사람은 
자기가 한 
모든 무익한 말에 대하여 
심판 날에 
낱낱이 진술해야 할 것이다.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지하다면 
우리는 
회개하고 
철저히 자백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한두 시간을 
개인적으로 
주님과 함께 보내며 
철저한 자백을 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 이렇게 자백하는 것은 
언제나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자백하기 위해 
개인적인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들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들을 알까 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된 일들의 기록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일은 
하나님께 자백함으로써 
우리에 대한 
그 기록을 지워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것이 필요하다. 
… 우리는 
철저한 자백, 
구체적이고 세밀한 자백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소한 모든 것들을
자백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형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면, 
우리는 
그러한 느낌을 
자백해야 한다. 
우리가 
아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면, 
그것 역시 자백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죄들을 
자백해야 한다. 
우리는 
대충 주님께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
… 세밀하게 
죄들의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는 
세밀하게 
자백해야 한다. 
주님께 
세밀한 방식으로 
죄들을 자백해야 한다. 
이렇게 했고 
이렇게 하는 
모든 사람은 
철저한 자백 후에 
내적으로 
그 영으로 충만해지고 
외적으로 
그 영을 입게 된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다. 
그들은 
그 영의 
내적이고 본질적인 충만과 
그 영의 
외적이고 경륜적인 충일을 
얻는다.

우리는 
하나님께 
성령을 달라고 
구걸할 필요가 없다. 
이미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하고 
철저하게 자백하는 것이다. 
그럴 때 
체험적으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결이신 
그 영으로 
안팎이 채워질 것이다. 
그런 후에 우리는 
일어나고 
위로 솟아오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일어남으로, 
또한 완결되신 영으로 
본질적이고 경륜적으로 
채워짐으로 
가야 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순종함으로써 
충만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명확히 정해서 
그 시간에 
철저한 자백을 해야 한다. 
… 그럴 때 
우리 안은 
본질적인 영으로 채워질 것이고 
우리 밖은 
경륜적인 영으로 채워질 것이다.
우리는 
위로 솟아오를 것이다. 
이렇게 자백하고 회개하는 것이 
우리의 실행이 될 때, 
집회에 올 때 
우리는 항상 
위로 솟아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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