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있는
번제물은
하나님을 위한 음식이었는데,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이신 그리스도,
곧 이 땅에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신 분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는 도살장으로 끌려가셨다.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셨다.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는 가죽이 벗겨지셨다.
즉, 그분의 인간 미덕의 외적인 모습이 벗겨지셨다.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는 각이 뜨이셨다.
그리스도께서 지혜이신 면에서 체험하신 것은
번제물의 머리로 상징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즐거움이신 면에서 체험하신 것은
번제물의 기름 덩이로 상징된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존재의 속 부분들 안에서 체험하신 것은
번제물의 내장으로 상징된다.
그리스도께서 행동에 있어서 체험하신 것은
번제물의 다리로 상징된다.
그리스도께서 더러워지시지 않도록
성령에 의해 지켜지신 체험은
번제물의 다리와 내장을 씻는 것으로 상징된다.
우리가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면 누릴수록,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죄악이 가득한지를
더욱더 깨닫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제물로 취할 수 있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번제물로
더욱더 누리게 한다.
우리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께 안수함으로써
그분과 연결되고
그분과 하나가 된다.
이러한 연결 안에서,
곧 이러한 동일시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약함과 결함과 흠을 가져가시고
그분의 모든 미덕은 우리의 것이 된다.
이러한 연결에 의해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 되시고
우리 안에서 사시면서,
그분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삶,
곧 번제물의 삶을
우리 안에서 반복하신다.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로 취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번제물로서 여러 체험을 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
그리스도를 외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살게 된다.
우리는 도살장으로 끌려가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죽임당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가죽이 벗겨지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각이 뜨이신
(in His being cut to pieces;
조각들로 잘라진, 그분의 토막내짐 안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즐거움이 되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존재의
속 부분들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행동하시는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더러워지지 않도록 성령에 의해 지켜지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로 취할수록,
더욱더 그분의 아름다움의 외적인 표현이
우리에게서 나타나
그분을 확대하게 되며,
우리를 감싸시는 능력으로서
우리를 덮고 보호하고 보존해 주시는
그리스도를 더욱더 누린다.
우리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로
아버지께 경배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제물들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로
그분께 경배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배고프시며
음식이 필요하시다.
제물들은 하나님의 음식이다.
제물들의 주된 목적들 중 하나는
그것들이 하나님을 위한 음식이 되는 것이다.
번제물은 하나님의 음식이며,
하나님은 이 번제물을 누리심으로
만족을 얻으신다.
하나님 외의 그 누구도
이것을 먹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번제물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갈망을 이루어 드린다.
번제물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절대적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합당한 경배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문제이다.
‘번제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위로 올라가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올라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땅에서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사신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번제물로서 그리스도는
오로지 하나님을 완전히 만족시켜 드리는
삶을 사시기 위해 존재하셨다.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께
우리의 손을 얹음으로써
우리는 그분께 연결된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사시는 동안,
그분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삶,
곧 번제물의 삶을
우리 안에서 반복하신다.
‘만족시키는 향기’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직역하면
‘안식의 향기’ 혹은 ‘만족의 향기’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향기를 의미한다.
만족시키는 향기는
만족과 평안과 안식을 가져다주는 향기이다.
만족시키는 이러한 향기는
하나님께 누림이 된다.
우리가 번제물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
하나님께 큰 즐거움을 드리는 향기가
그분의 만족을 위해
그분께 올라갈 것이다.
하나님은 만족을 얻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달콤하고 기쁘게 받아들이실 것이다.
이것이 번제물의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표현을 위해
새 예루살렘이 되도록
감소되어 재가 되고 있다.
번제물은
우리가 이 시대에서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재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감소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주님의 갈망은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이들이
감소되어 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감소되시어 재가 되신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 또한 감소되어 재가 된다.
즉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무로
감소된다.
우리가 죽음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더 동일시될수록,
더욱더 우리는
자신이 한 줌의 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재가 될 때
더 이상 타고난 사람들이 아니다.
그 대신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종결되고 불태워진
사람들이다.
재는
하나님께서 번제물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표시이다.
하나님께서 번제물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은
그분께서 그것을 재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번제물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은
또한 그분께서 번제물을 기름 덩이로,
곧 그분께 달콤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받으시는 것을 의미한다.
재를 제단 동쪽 옆, 해가 뜨는 곳에 둔 것은
부활을 함축한다.
번제물이신 그리스도께는
재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이다.
재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처해지셨음을 의미하나,
동쪽은 부활을 상징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감소되어 재가 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동쪽에 두어질 것이고,
동쪽에서 우리는 해가 떠오르고
우리가 부활의 일출을 체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다.
결국 재는
새 예루살람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종결되게 한다.
즉 우리를 감소시켜
재가 되게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활을 가져오며,
부활 안에서 재는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한
귀한 재료들이 된다.
우리가 감소되어 재가 될 때,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변화시키시는 일 안으로 이끌린다.
새 예루살렘의 건축을 위한 귀한 재료들은
재가 변화된 데서 나온다.
우리는 번제물이 된 결과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는
중요한 존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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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eplies on “하나님의 만족과 표현을 위해 그리스도를 번제물로 취함”
6일
레 6:10-11
제사장은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하며,
맨살에 세마포 속바지를 입어야 한다.
그는 제단 위에서 불로 태운 번제물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옆에 두고서,
그 의복을 벗고
다른 의복을 입은 다음,
그 재를 진영 밖 깨끗한 곳으로
가져가야 한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믿지 않는 이들의 마음과 다르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번제물은 우리가 이 시대에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다른 어떤 것도 위하지 않으며,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
비록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가장 좋은 교육을 받으라고 격려하지만,
교육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은 가장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으나,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이 땅에서
결국 재밖에 되지 않을 것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번제물로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불태워진 결과인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께 매우 유용하다고
느낄지 모르나,
결국 여러분은 재가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무언가가 되기를 원하나,
만일 여러분이
주 예수님을
전시간으로 섬기고자 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기를,
심지어 재가 되기를
준비해야 한다.
재는
그리스도께서 감소되셔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셨음을 의미한다.
재는
하나님께서 번재물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표시이다.
하나님께서 번제물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은
그분께서 그것을
재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에 관하여
시편 20편 3절은
“네 모든 제물을 기억하시며
네 번제물을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말한다.
여기서 ‘받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사실상 ‘재가 되게 하다’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대개 재를
즐거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번제물을 드리는 우리에게 재는
참으로 즐겁고 보배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번제물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확신을 주는 표시가
바로 재이기 때문이다.
‘받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재가 되게 하다’로
번역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름으로 받다’,
‘기름지게 만들다’,
‘기름지게 되다’로도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번제물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재로 만드시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을 기름으로,
즉 그분께 달콤함과 기쁨을 주는 것으로
받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눈에 제물은
재가 되지만,
하나님의 눈에 그것은
기름이다.
즉, 그것은 기름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만족시켜 드린다.
재는 내버려지지 않고
제단 동쪽 옆,
곧 재 버리는 곳에 두어졌다.
동쪽은 해가 뜨는 곳이다.
재를 제단 동쪽 옆에 두는 것은
사실상 부활을 함축한다.
레위기 6장 11절은
번제물의 재(번제물의 결과)를
위엄있게 다루는 것을 묘사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번제물의 결과는
높이 평가된다.
그것은 곱고 정결하며 깨끗하다.
그러므로 진 밖으로 재를 옮길 때
제사장은 위엄 있는 옷을 입고
위엄 있게 재를 운반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번제물의 결과를 높이 평가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번제물이 된 결과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는
중요한 존재가 될 것이다.
우리가 전시간자로서 일하는 것은
단지 복음을 전파하여
죄인들을 구원하고,
각 지방에 교회들을 세우며,
성경을 가르치거나
혹은 사람들을
생명과 진리 안에서 자라도록
돕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반드시
장차 올 새 예루살렘의 축소판인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특출한 것이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재를 높이 평가하신다.
결국 이 재는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재는 우리를 종결시키는,
곧 재가 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활을 가져온다.
부활 안에서 재는
새 예루살렘을 건축하는
귀한 재료들인
금과 진주와 보석이 된다.
이 세 가지 귀한 재료들은
모두 재가 변화된 데서 나온다.
우리가 재가 될 때,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변화시키시는
일 안으로 이끌린다.
5일
벧전 2:5
그러면 여러분 자신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인 희생 제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 체계가 됩니다.
히 13:15
예수님을 통하여
계속 하나님께 찬양의 희생 제물,
곧 그분의 이름을 시인하는
입술의 열매를 드립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에 따라
그분을 벤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 베드로전서 2장 5절에서 영적인 희생 제물은
구약의 예표인
모든 희생 제물의 실재이신,
다양한 방면의 풍성을 가지신
그리스도이다.
특별히 영적인 희생 제물은
번제물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포함한다.
… 이 두 구절은 모두,
여러 체험을 하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체험한 정도까지만
그분을 우리의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제물들은 하나님의 음식이다.
여러분은 하나님도 배고프시고,
음식이 필요하시며,
음식을 드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배고프시고
음식이 필요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관념,
사람의 관념에 따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희생 제물들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단지
우리가 하나님과 문제를 가지고 있고,
우리 상황에 대해
하나님을 진정시키도록
속죄를 위한 제물들이 필요하다는
생각만 가질 것이다.
우리는 제물들의 주된 목적들 중 하나가
실제로는, 하나님과 그분을 섬기는 이들을 위한
음식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깨달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번제물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갈망을 이루어 드린다.
번제물은 하나님의 음식이며,
하나님 외의 그 누구도
이것을 먹는 것이 하락되지 않는다.
제물 전체가 제단 위에서 태워진다는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진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번제물을 태우는 불을
하나님의 ‘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합당한 경배는
번제물과 소제물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만족을 위하여
번제물을 드리는 것과
우리의 만족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만족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기 위해
소제물을 드리는 이것이
참된 경배이다.
합당한 경배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것이며,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로
우리가 만족되고
이러한 만족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참된 경배 안에서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올라가시며,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오신다.
그러한 경배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며,
우리는 우리가 누린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함께 나눈다.
번제물은 도살당하고 가죽이 벗겨지고
각이 뜨이고 씻어진 다음에
제단에서 태워졌다.
… ‘만족시키는 향기'(레 1:9)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직역하면 ‘안식의 향기’ 혹은 ‘만족의 향기’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향기를 의미한다.
이러한 향기가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향기를
기쁘게 받으신다.
이 표현은 태워지고 있는 희생 제물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향기로운 증기에 대한
전문 용어이다(S. R. Driver).
이 구절에서
‘태워야 한다
(직역하면, 연기로 올라가게 해야 한다.)’라는 말은
번제물이 급히 태워지지 않고
서서히 태워졌음을 가리킨다.
이렇게 서서히 태워진 결과로
만족시키는 향기,
곧 만족과 평안과 안식을 가져다주는
향기가 있었다.
그러한 만족시키는 향기는
하나님께 누림이 되었다.
우리가 연기가 나는 번제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가
하나님의 만족과 안식을 위해
하나님께 올라갈 것이다.
하나님은 만족하시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우리를 달콤하게 받아들이실 것이다.
이것이 번제물의 의미이다.
번제물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하나님께 달콤함과 화평과 안식을 드려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길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로 취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 안수해야 한다.
이것은 곧 우리가
그분과 동일시되고
그분과 하나 되어,
그분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그러한 삶을 살기를
갈망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한 삶은
죽임을 당하고
가죽이 벗겨지고
각이 뜨이고
씻어지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과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번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릴 무언가를 가지게 되는데,
바로 우리가 체험한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4일
고전 4:12-13
또 우리는 직접 우리 손으로 일을 하며 수고합니다.
우리는 욕설을 들어도 축복하고,
박해를 받아도 견뎌 내고,
비방을 받아도 권유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의 쓰레기와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습니다.
빌 2:5
여러분 안에 이 생각을 품으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각입니다.
빌 1:8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심장으로
(in the inward parts, Lit., bowels; 내장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에 대해,
하나님께서 나의 증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가죽이 벗겨지신 그리스도,
곧 사람의 미덕의 외적인 모습이 벗겨지신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다.
제물의 가죽을 벗기는 것은
그 제물을 싸고 있는 것을 없애는 것이다.
이 예표를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가죽이 벗겨지는 것은 모욕당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각이 뜨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4장 13절은
바울이 이것을 체험했음을 계시한다.
… ‘쓰레기’와 ‘찌꺼기’는 동의어이다.
‘쓰레기’는 청소할 때 던져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폐물, 오물을 의미한다.
‘찌꺼기’는 닦어 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더러운 것, 폐물을 의미한다.
세상의 쓰레기와 만물의 찌꺼기가 되는 것은
각이 뜨이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서 나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고 말한다.
레위기 1장에서 그리스도의 지혜는
번제물의 머리로 예표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지혜로 취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롤 살아 내야 한다.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곧 주님 안에 거함으로
그분의 생명을 누리는 생활은
우리 스스로 행하는 생활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행하는 생활이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 즐거움이 되신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다.
주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께 즐거움이 되셨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산다면,
우리도 또한 하나님께 즐거움이 될 것이다.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심장’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직역하면 내장이며,
이것은 내면적인 애정,
곧 부드러운 긍휼과 동정을 상징한다.
성도들을 간절히 그리워할 때,
바울은 심지어 그리스도의 내장,
곧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속 부분들에서
그분과 하나였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속 부분들을 고수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을
자신의 것으로 취했음을 가리킨다.
그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취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내적은 모든 부분을 취했다.
그러므로 바울의 내적인 존재는
변화되고 재조정되며 재형성되고 재조성되었다.
3일
레 1:4
그리고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어야 한다.
그러면 그 제물이
그를 위한 제물로 기쁘게 받아들여져
그를 위하여 속죄를 이룰 것이다.
고후 4:11
이것은 살아 있는 우리가
항상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으로써,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원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절대성이 요구된다.
그렇지만 타락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우리들 중의 몇몇은
상당한 정도로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완전히 철저히 절대적이지는 않다.
우리는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셨을 때만큼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지 않다.
레위기 1장 4절에서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제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제물 위에 안수하였다.
성경에서 안수하는 것은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동일시하는 것,
곧 연결하는 것을 상징한다.
제물 위에 안수하는 것은
우리가 제물과 하나이고,
제물을 우리와 하나 된 것으로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안수하는 것은
둘을 하나로 만든다.
우리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께 안수함으로써
그분과 연결된다.
우리와 그분,
그분과 우리는
하나가 된다.
이러한 연결,
곧 이러한 동일시는
우리의 모든 약함과 결함과 부족함과 흠이
그분의 것이 되고,
그분의 모든 미덕들은
우리의 것이 됨을 가리킨다.
이것은 교환이 아니라 연결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격이 전혀 없고
소망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실지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께 안수할 때,
우리의 약점들은 그분의 것이 되고
그분의 장점과 미덕들은
우리의 것이 된다.
더 나아가
영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연결에 의해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 되시고
우리 안에서 사신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사시면서,
그분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삶,
곧 번제물의 삶을
우리 안에서 반복하실 것이다.
우리 스스로는
이러한 삶을 살 수 없지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이러한 삶을 사실 수 있다.
그분께 안수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우리와 하나 되게 하고
우리 자신을 그분과 하나 되게 한다.
그럴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분의 삶을 반복하실 것이다.
이것이 번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제물과 속건제물로 취하기 위해서
그분께서 체험하신 것을 체험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번제물로서
그리스도를 취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체험하신 것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려진 체험들을 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한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도살장으로 끌려가야 함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결혼 생활의 문제에 적용할 수 있다.
남편과 아내가 다툴 때,
둘 모두 혹은 둘중의 한 사람이라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체험을 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려고 한다면,
다툼은 사라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체험을 하신
그리스도롤 체험한다면,
교회 안의 문제도 사라질 것이다.
다른 이들이 우리를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 것을
저항하지 않고 허락한다면,
우리는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할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라고 말한다.
결국 그리스도는 도살당하셨다.
즉, 죽임을 당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도살당하신 이러한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1절에서
이러한 체험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항상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으로써”
라고 말한다.
죽음에 넘겨지는 것은
도살당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도살당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한다면,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릴 수 있는
그리스도께 속한 무언가를
가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