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ayer of the Age
to Fulfill God’s Economy
and the Sacrifice of Praise
to Display Christ’s Victory
시대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한 새사람인
교회의 기도,
곧 승천하신 주님이시자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행사함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기도이다.
이러한 종류의
기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을
훨씬 넘어서는
무언가를 보게 하는
하늘에 속한 이상이 필요하다
— 엡 1:17.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천의 의미를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구속의 일 전체가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가리킨다
— 히 1:3, 10:12.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지배 권위가
세워졌음을
가리킨다
— 행 2:36.
주님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모든 것이 ‘교회에게’ 전달되고 있다
— 엡 1:19-23, 3:20-21.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의해 높여지셨고,
우주의 주님으로 세워지셨으며,
만물 위에 머리가 되시어
교회에게 주어지셨다는
하늘에 속한 사실을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은
그분의 발아래 있고,
그분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모든 것은
그분의 몸인 교회에게
전달되고 있다
— 엡 1:22-23.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위치를 보아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의 위치는
그리스도의 위치와
정확히 똑같다.
몸은
머리와 하나이기 때문에,
몸의 위치는
머리의 위치와
정확히 똑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권위를
보아야 한다.
몸의 권위는
몸이 행사하는
머리의 권위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취해야 한다
— 마 28:18하-19상, 눅 10:19.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기도를
보아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기도는
개인적인 믿는 이들의 기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기도이다.
우리는
육신적으로는
골방에서 혼자 기도할지라도,
영적으로는
몸과 하나이다
— 비교 왕상 8:48.
이러한 종류의 기도 안에서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해 달라고
애걸하지 않는다.
그보다 우리는
주님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요구한다.
그리스도는
주님의 지배 권위와 머리의 권위를
얻으셨다.
그분은
모든 것 위의
주님과 머리로서
교회에게 주어지셨다.
그리스도는
우주에서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들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히셔서,
우주 안의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지배 권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
— 엡 1:20-21.
우리가
주님께서
승천 안에서 얻으신 것에 따라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
우리는
현 상황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으로서
우리는
주님의 승천의 위치를
취하고
현상황을 지배하시는
주님의 지배 권위를
우리의 것으로 요구합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가
주님께서
승천 안에서 도달하신 것에 따라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단순히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몸 안에 있고,
몸은
머리 안에 있으며,
머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신다.
우리가
머리의 몸이고
지금 머리가
모든 것을 초월하신다는
이상을 본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도달하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요구할 위치를
취할 것이고,
부정적인 모든 것들에게
“나를 괴롭히지 마라.
불 못으로 가라!
나는
모든 것을 초월해 있다.
너는
나를 만질 수 없다.
너는
나의 발아래 있다.”
라고 말할 것이다.
몸은
하늘들에 계신 머리와
하나이기 때문에
하늘들에서
이미 묶고 풀린 것을
묶고 풀 권위가 있다
— 마 16:19, 18:18.
교회는
반석 위에 건축되고,
이 반석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이다.
결과적으로
음부의 문들은
교회를 이길 수 없다
— 마 16:18.
이러한 종류의
기도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
머리가
몸에게 주신
권위를 행사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다음의 두 가지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몸의 지체들이고
몸 안에서
살고 행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예를 들면,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혔지만,
그리스도의 몸에서
고립되지 않았고
몸의 공급에서
끊어지지도 않았다
— 빌 1:19.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됨으로써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새사람은
머리와 몸,
곧 그리스도와 교회로
구성된다
— 엡4:22-24, 2:15-16.
“우리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을 보고
권위의 기도를 하기를
배워야 한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이 문제들은
소홀히 여겨져 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이것들을 회복하시리라고
믿는다.
너무도 자주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천의 위치를
취하지 않고,
그분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잃어버린 이 위치를
주님께서
회복하시리라고
믿는다.
이것은
좋은 땅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가장 높은 산이다.
이 마지막 때에
주님은
가장 높은 이 봉우리,
가장 높은 이 산을
회복하실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 사실들을 깨닫고,
그 위치를 취하고,
머리가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이기는 기도이다.
이것이
시대의 기도이다.”
— 위트니스 리 전집, 1963년, 1권, 그리스도의 승천의 기반 위에서 기도함, 236쪽.
찬양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수행하는
가장 높은 일이다.
성도의 영적 생활의
가장 높은 표현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우주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서
보좌에 앉으신다’
— 시 22:3.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자신까지도
찬양을 통해
높여지신다.
다윗은
하루에 일곱 번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찬양을 통해
솟아오른다.
찬양하는 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주님을 접촉하는 것이다
— 시 119:164.
다윗은
레위인들을 세워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하나님을 칭송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하였다
— 대상 16:4-6.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 건축을
완공했을 때,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지성소 안으로
가져갔다.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나왔을 때,
레위인들은
제단 옆에 서서
나팔을 불면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연주하며
노래했다.
그들이 함께
하나님께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으며,
바로 그 순간에
여호와의 영광이
그분의 집을
가득 채웠다
— 대하 5:7, 12-14.
우리는
온 일생 동안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께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
— 시 146:2, 찬송가 521, 109장.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인
우리가
교회로서 모여
아버지를 찬양할 때,
맏아들은
우리의 노래 가운데서
아버지께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신다
— 히 2:12.
“예수님을 통하여
계속
하나님께
찬양의 희생 제물,
곧 그분의 이름을 시인하는
입술의 열매를
드립시다.”
— 히 13:15.
시편은 사실상
구약에 있는
찬양의 책이다.
그러나 시편에는
찬양에 대한 장들뿐 아니라
고난에 대한 장들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찬양하는 사람들이 바로
고통스러운 상황을 통과하도록
인도받으며
또한 상처받은 느낌을
가진 이들이라는 것을
그분의 백성이
알기를 원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러한 이들에게서 나오는
찬양을 온전하게 하셨다
— 시 8:1-2, 84:4-6, 42:7, 11, 45:1-2.
가장 큰 소리의 찬양은 자주,
고통과 역경을 통과하며
짓밟힌 느낌을 가지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이러한 종류의 찬양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에게서 축복을 받는다
— 비교 시 23:4.
찬양의 본성은
제물, 곧 희생 제물이다.
다시 말하면,
찬양은
아픔과 고난과 손실에서부터
나온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모든 것을 통해,
모든 상황 안에서
그분을 찬양하기를
갈망하신다
— 히 13:15.
찬양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내고
영적인 공격을
이기는 길이다.
사탄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찬양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기도는
영적 전쟁을 의미하지만,
찬양은
영적 승리를 의미한다.
우리가
찬양할 때마다
사탄은 도망친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니,
죄수들이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 행16:25.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찬양의 희생 제물을
드렸다.
그들의 몸에 생긴
상처는 아직 낫지 않았고,
통증은 누그러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발은
차꼬에 채워져 있었고,
그들은
로마 제국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거기에 기뻐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거기에 노래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곳에
초월하는 영을 가지고
모든 것을 뛰어넘은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찬양했을 때,
감옥 문이 열렸고,
묶고 있던 사슬이 풀렸으며,
심지어 간수와 그의 온 집이
기쁨으로 구원을 받았다
— 행 16:19-34.
우리는
기도할 힘이
다 빠지고
우리의 영이
무겁게 억눌리거나 손상되거나 가라앉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기도할 수 없다면
찬양하기를 시도해 보라.
우리가
흔치 않은 환경과 문제들을 만나
혼란스럽고 주저앉을 것 같을 때,
다만 “왜 찬양하지 않는가?”라는
이 한마디를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가
그 순간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고,
모든 문을
열어 주시며,
묶고 있는 모든 사슬을
풀어 주실 것이다.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신언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 대하 20:20-22.
‘시작될 때에’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여호와께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에,
여호와께서 일어나시어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산 주민들을
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무엇도
찬양만큼
주님의 손을
신속히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우리는
상황을 조종하려고 하고
책략을 쓰려고 하는 것을
멈추고,
그 대신 찬양하는
공과를 배우도록
주님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는
찬양을 통해
많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
찬양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고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 계 5:8-14, 7:9-12, 14:1-3, 15:2-4, 19:1-8, 비교 21:6, 22:20.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림으로
계속 승리한다.
이것은 원칙이며
또한 사실이다.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서
넘치는 찬양을 얻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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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시대의 기도와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내 보이는 찬양의 희생 제물”
신언노트, 2018 08 05
시대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한 새사람인
교회의 기도,
곧 승천하신 주님이시자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행사함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기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을
훨씬 넘어서는
무언가를 보게 하는
하늘에 속한 이상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천의 의미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구속의 일 전체가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지배 권위가
세워졌음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모든 것이
‘교회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의해 높여지셨고,
우주의 주님으로 세워지셨으며,
만물 위에 머리가 되시어
교회에게 주어지셨다는
하늘에 속한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그분의 발아래 있고,
그분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모든 것은
그분의 몸인 교회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위치를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의 위치는
그리스도의 위치와
정확히 똑같습니다.
몸은
머리와 하나이기 때문에,
몸의 위치는
머리의 위치와
정확히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권위를
보아야 합니다.
몸의 권위는
몸이 행사하는
머리의 권위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기도를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기도는
개인적인 믿는 이들의 기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는
골방에서 혼자 기도할지라도,
영적으로는
몸과 하나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기도 안에서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해 달라고
애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우리는
주님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요구합니다.
그리스도는
주님의 지배 권위와 머리의 권위를
얻으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 위의
주님과 머리로서
교회에게 주어지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주에서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들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히셔서,
우주 안의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지배 권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승천 안에서 얻으신 것에 따라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
우리는
현 상황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으로서
우리는
주님의 승천의 위치를
취하고
현상황을 지배하시는
주님의 지배 권위를
우리의 것으로 요구합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승천 안에서 도달하신 것에 따라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단순히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몸 안에 있고,
몸은
머리 안에 있으며,
머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십니다.
우리가
머리의 몸이고
지금 머리가
모든 것을 초월하신다는
이상을 본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도달하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요구할 위치를
취할 것이고,
부정적인 모든 것들에게
“나를 괴롭히지 마라.
불 못으로 가라!
나는
모든 것을 초월해 있습니다.
너는
나를 만질 수 없다.
너는
나의 발아래 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몸은
하늘들에 계신 머리와
하나이기 때문에
하늘들에서
이미 묶고 풀린 것을
묶고 풀 권위가 있습니다.
교회는
반석 위에 건축되고,
이 반석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이다.
결과적으로
음부의 문들은
교회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기도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
머리가
몸에게 주신
권위를 행사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다음의 두 가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몸의 지체들이고
몸 안에서
살고 행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혔지만,
그리스도의 몸에서
고립되지 않았고
몸의 공급에서
끊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됨으로써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새사람은
머리와 몸,
곧 그리스도와 교회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을 보고
권위의 기도를 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이 문제들은
소홀히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이것들을 회복하시리라고
믿습니다.
너무도 자주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천의 위치를
취하지 않고,
그분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잃어버린 이 위치를
주님께서
회복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좋은 땅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가장 높은 산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주님은
가장 높은 이 봉우리,
가장 높은 이 산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 사실들을 깨닫고,
그 위치를 취하고,
머리가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이기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시대의 기도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수행하는
가장 높은 일입니다.
성도의 영적 생활의
가장 높은 표현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우주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서
보좌에 앉으십니다’
— 시 22:3.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자신까지도
찬양을 통해
높여지십니다.
다윗은
하루에 일곱 번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찬양을 통해
솟아오릅니다.
찬양하는 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주님을 접촉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레위인들을 세워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하나님을 칭송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 건축을
완공했을 때,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지성소 안으로
가져갔습니다.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나왔을 때,
레위인들은
제단 옆에 서서
나팔을 불면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연주하며
노래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하나님께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으며,
바로 그 순간에
여호와의 영광이
그분의 집을
가득 채웠습니다.
우리는
온 일생 동안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께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인
우리가
교회로서 모여
아버지를 찬양할 때,
맏아들은
우리의 노래 가운데서
아버지께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계속
하나님께
찬양의 희생 제물,
곧 그분의 이름을 시인하는
입술의 열매를
드립시다.”
— 히 13:15.
시편은 사실상
구약에 있는
찬양의 책입니다.
그러나 시편에는
찬양에 대한 장들뿐 아니라
고난에 대한 장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찬양하는 사람들이 바로
고통스러운 상황을 통과하도록
인도받으며
또한 상처받은 느낌을
가진 이들이라는 것을
그분의 백성이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러한 이들에게서 나오는
찬양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가장 큰 소리의 찬양은 자주,
고통과 역경을 통과하며
짓밟힌 느낌을 가지는
사람들에게서 나옵니다.
이러한 종류의 찬양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에게서 축복을 받는다.
찬양의 본성은
제물, 곧 희생 제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찬양은
아픔과 고난과 손실에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모든 것을 통해,
모든 상황 안에서
그분을 찬양하기를
갈망하십니다.
찬양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내고
영적인 공격을
이기는 길입니다.
사탄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찬양을
중단시키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적 전쟁을 의미하지만,
찬양은
영적 승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마다
사탄은 도망칩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니,
죄수들이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습니다.”
— 행16:25.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찬양의 희생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들의 몸에 생긴
상처는 아직 낫지 않았고,
통증은 누그러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발은
차꼬에 채워져 있었고,
그들은
로마 제국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거기에 기뻐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노래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곳에
초월하는 영을 가지고
모든 것을 뛰어넘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찬양했을 때,
감옥 문이 열렸고,
묶고 있던 사슬이 풀렸으며,
심지어 간수와 그의 온 집이
기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힘이
다 빠지고
우리의 영이
무겁게 억눌리거나 손상되거나 가라앉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
기도할 수 없다면
찬양하기를 시도해 보십시오.
우리가
흔치 않은 환경과 문제들을 만나
혼란스럽고 주저앉을 것 같을 때,
다만 “왜 찬양하지 않습니까?”라는
이 한마디를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 순간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고,
모든 문을
열어 주시며,
묶고 있는 모든 사슬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신언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 대하 20:20-22.
‘시작될 때에’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여호와께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에,
여호와께서 일어나셔서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산 주민들을
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무엇도
찬양만큼
주님의 손을
신속히 움직이게
할 수 없습니다.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우리는
상황을 조종하려고 하고
책략을 쓰려고 하는 것을
멈추고,
그 대신 찬양하는
공과를 배우도록
주님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해
많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찬양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고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림으로
계속 승리합니다.
이것은 원칙이며
또한 사실입니다.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서
넘치는 찬양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6일
엡 1:22-23
또 하나님은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시키시고,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머리가 되게 하시어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입니다.
행 2:36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강력한 기도는
… 시대의 기도이다.
오늘날
우리는
강력한 기도에 관해
배울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기도에 관해
알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특히 신약에는
인간의 관념을 훨씬 넘어서는
한 가지 기도가 있다.
이런 종류의 기도 안에
들어가려면
하늘에 속한 이상이
필요하다.
하늘에 속한 이 이상의
첫째 중점은
그리스도의 승천이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주님의 구속의 일 전체가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가리킨다.
주님은
하늘들로 승천하신 뒤에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히 1:3, 10:12).
여기서 앉는다는 것은
안식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사람이
앉을 때
그것은
그가 해야 하는
모든 일을
마치고 성취했다는
뜻이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때
사람은 앉아서 쉰다.
주님께서
하늘들에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하셔야 할 모든 일을
완성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지배 권위가
세워졌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지배 권위는
그리스도의 승천에 의해
세워졌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든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있다.
… 오늘날
주 그리스도는
단지 우주를 창조하신
주님만이
아니시다.
오늘날
주 그리스도는
또한 육체가 되시어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오늘날
하늘들 안에는
한 사람이 계신데,
이분은 높여지셨고
우주의 주님으로
세워지셨다.
오순절날에
베드로는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행2:36)라고 선포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시키시고,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머리가 되게 하시어 …”
(엡 1:22)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과
매우 다른 것이다.
더구나 에베소서 1장 22절은
그리스도께서
만물 위에
머리가 되시어
‘교회에게’ 주어지셨다고
말한다.
주님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모든 것은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교회에게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분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모든 것이
교회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뜻한다.
우리는
이러한 하늘에 속한
사실에 대한
하늘에 속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원수 마귀와 그의 악한 영들은
우리보다
이것을
훨씬 더 잘 안다.
악한 세력들은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되셨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진정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의해
높여지셨고,
우주의 주님으로
세워지셨으며,
만물 위에
머리가 되시어
교회에게
주어지셨다는
하늘에 속한
사실을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은
그분의 발아래 있고,
그분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모든 것은
그분의 몸인 교회에게
전달되고 있다.
하늘에 속한 이 이상의
둘째 중점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위치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의 위치는
그리스도의 위치와
정확히 똑같다.
머리가 있는 곳에 틀림없이
몸도 그곳에 있다.
머리가 가진 것은
모두 틀림없이
몸도 갖고 있다.
더구나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고전 12:27, 엡5:30).
몸은
머리와 하나이기 때문에
몸의 위치는
머리의 위치와 정확히 똑같은 것이다.
셋째 중점은
몸의 권위에 관한 것이다.
나는
‘능력’이나 ‘권리’라는 단어보다
특별히 ‘권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몸의 권위란
무엇인가?
몸의 권위는
몸이 행사하는
머리의 권위이다.
이같이
몸의 권위는
곧 머리의 권위이다.
…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취해야 한다.
5일
히 13:15
예수님을 통하여
계속
하나님께
찬양의 희생 제물,
곧 그분의 이름을 시인하는
입술의 열매를
드립시다.
행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니,
죄수들이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 찬양의 본성은
제물, 곧 희생 제물이다
(히 13:15).
다시 말하면,
찬양은
아픔과 고난과 손실에서부터
나온다.
… 무엇이
희생 제물인가?
희생 제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다.
… 본래 여러분의 것이었던
소나 양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드린다면,
여러분은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제물을 드리는 것은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누군가가
찬양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그가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을
뜻한다.
곧 희생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무언가를 얻을 때에만
찬양해서는 안 된다.
무언가를 얻을 때
드리는 찬양은
찬양이 될 수 있을지언정
제물은 될 수 없다.
제물의 원칙은
손실에 근거한다.
… 하나님은
우리가
손실을 당하고도
여전히 그분을 찬양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참된 제물이다.
찬양은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는 길이다.
우리는 종종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라는 말을
들어 왔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마다
사탄은
도망친다.
따라서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공격하고 방해한다.
이것은
흔히 있는
사탄의 공격이다.
그러나 나는
또 한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사탄이
가장 많이 공격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찬양이다.
이것은
사탄이
기도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마다
사탄은 그들을 공격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대화하기는 쉬워도
기도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사탄은
여러분에게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끼게 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탄은
기도를 공격할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찬양도 공격한다.
사탄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찬양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기도는
전쟁이지만,
찬양은
승리이다.
기도는
영적 전쟁을 의미하지만,
찬양은
영적 승리를 의미한다.
우리가
찬양할 때마다
사탄은
도망친다.
그러므로 사탄은
우리의 찬양을
가장 싫어한다.
사탄은
있는 힘을 다해
우리가
찬양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의 힘든 환경과
억눌린 느낌 때문에
찬양을 멈춘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더욱더 알아 갈 때,
그들은
빌립보의 감옥도
찬송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행 16:25).
바울과 실라는
지하 감옥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들이 찬양했을 때
감옥 문이 열렸고,
… 묶고 있던
사슬이 풀렸다.
바로 그날에
간수가
주님을 믿었고,
그의 온 집이
구원을 받아
기쁨으로 충만했다
(19-34절).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찬양의 희생 제물을 드렸다.
그들의 몸에 생긴
상처는 아직 낫지 않았고,
통증은 누그러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발은
차꼬에 채워져 있었고,
그들은
로마 제국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거기에
기뻐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거기에
노래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곳에
초월하는 영을 가지고
모든 것을 뛰어넘은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하늘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전혀 변하지 않으셨다.
그들 자신과
그들이 처한 환경과
그들의 느낌이
변하고
그들의 몸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보좌 위에
앉아 계신다.
하나님은 여전히
칭송받기에 합당하시다.
거기에서
우리의 형제들인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고통과 손실 가운데서 드려진
이러한 찬양이
바로 찬양의 희생 제물인 것이다.
이러한 찬양은
또한 승리이기도 하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는
여전히 자신의 상황 안에
머물게 되지만,
여러분이 찬양할 때에는
자신의 상황 위로
솟아오른다.
우리가 아직
기도하며 간구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일에서 나오지 못하고
여전히 그 일에 묶이게 된다.
간구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자신이
더 묶이고 억눌리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 하나님에 의해
바울과 실라는
… 감옥에 갇히고
수치를 당하고
고통을 받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러한 지점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찬양했을 때,
감옥 문이 열렸고,
묶고 있던 사슬이 풀렸으며,
심지어 간수가
기쁨으로 구원을 받았다.
4일
시 22:3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서
보좌에 앉으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시 8: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마 21:16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양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라고 하신 말씀을,
여러분은
읽어 본 적이 없습니까?”
찬양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수행하는
가장 높은 일이다.
성도의 영적 생활의
가장 높은 표현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보좌는
우주에서
하나님께서 계신
가장 높은 지점이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서
보좌에 앉으신다’
(시 22:3).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자신까지도
찬양을 통해
높여지신다.
히브리서 2장 12절은
맏아들께서
교회 집회에서,
아버지의 많은 아들들 안에서
아버지를 찬양하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인 우리가
교회로 모여
아버지를 찬양할 때에
맏아들은
우리의 찬양 안에서
아버지를 찬양하신다.
그분은 …
우리의 찬양을 통해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찬양하신다.
우리가
노래할 때에
그분도
아버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신다.
그때 우리가
노래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분께서
노래하실 수 있으시겠는가?
우리가
아버지께 노래하면 할수록 더욱더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나타나시고
움직이시는 것과
기름 부으시고
생명 분배하시는 것을
누린다.
다윗은
한 시편에서
하루에 세 번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했지만
(55:17),
또 다른 시편에서는
하루에 ‘일곱 번’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했다
(119:164).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찬양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시인했다.
그는
하루에 세 번 기도했지만
찬양은 일곱 번이나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레위인들을 세워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비파와 수금을 타며
하나님을 칭송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하였다
(대상 16:4-6).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 건축을
완공했을 때,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지성소 안으로 가져갔다.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나왔을 때,
레위인들은
제단 옆에 서서
나팔을 불면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연주하며
노래했다.
그들이 함께
하나님께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으며,
바로 그 순간에
여호와의 영광이
그분의 집을
가득 채웠다
(대하 5:12-14).
다윗과 솔로몬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마음을
만졌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양의 희생 제물을 드렸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서
보좌에 앉으시기 때문에
(시22:3),
우리는 마땅히 평생
여호와를
찬양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찬양을 통해
솟아오른다.
찬양하는 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주님을 접촉하는 것이다.
… 우리는
시련 가운데 있을 때
하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우리는
시련을 초월하여
솟아올라야 한다.
일단 찬양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시련을 초월하게 된다.
성경은
찬양을
매우 중요시한다.
… 시편은
찬양으로 가득하다.
시편은 사실상
구약에 있는
찬양의 책이다.
많은 찬양이
시편에서 인용되었다.
그러나 시편에는
찬양에 대한 장들뿐 아니라
고난에 대한 장들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찬양하는 사람들이
바로 고통스러운 상황을
통과하도록 인도받으며
또한 상처 받은 느낌을 가진
이들이라는 것을
그분의 백성이
알기를 원하신다.
이 시편들은
하나님께 이끌려
어둠의 그림자를
통과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들은
거절과 비방과 박해를
받았다.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시 42:7).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에게서 나오는
찬양을 온전하게 하셨다.
찬양의 말은
순조로운 항해를 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징계와 연단을 받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시편에서 우리는
가장 깊이 상처를 받은
감정을 만질 수 있고,
또한 가장 크고 높은 찬양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많은 고난과 어려움과 비방을 사용하셔서
그분의 백성에게서
찬양을 만들어 내시며,
그런 처지에서
주님 앞에서
찬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배우게 하신다.
그러므로 가장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의
찬양 소리가
가장 큰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소리의 찬양은
많은 경우에
어려움을 통과하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또한 이러한 종류의 찬양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에게서 축복을 받는다.
3일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들을
그대에게 주겠습니다.
그대가
땅에서 묶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 이미 묶인 것이고,
그대가 땅에서 푸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 이미 풀린 것입니다.
마 18:18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땅에서 묶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 이미 묶인 것이며,
여러분이
땅에서 푸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 이미 풀린 것입니다.”
우리가
머리의 몸이고
지금
머리가
하늘들로 승천하셔서
모든 것을 초월하신다는
이상을 본다면,
우리는
그 기반을 취하여
주님께서 도달하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질병에게
요구하고 선포하며 선언할 것이다.
“나를 괴롭히지 마라.
너는 나의 발아래 있다!”
우리는
죄들과 약함과 세상을
이런 식으로 처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거지처럼
구걸하듯이 처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부정적인 이 모든 것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를
귀찮게 하지 마라.
불 못으로 가라!
나는
모든 것을 초월해 있다.
너는
나를 만질 수 없다.
너는
나의 발아래 있다!”
마귀는
이런 기도를 들을 때마다
도망친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단순히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몸 안에 있고,
몸은
머리 안에 있으며,
머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신다.
제이 차 세계 대전 때
일본군은
1945년 8월 10일에
연합군에게 항복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날 전에는
중국이
일본의 점령 아래에 있었고
많은 중국인들이
매우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한 날,
중국인 어린아이조차도
승리를 요구할
권위를 얻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몇 시간 전에
그들은
매우 겁먹고 있었지만,
일단 항복이 선언되자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쟁취된 것을
권리로 주장할 수 있었다.
승리를 얻게 되자
그들은
그 기반을 취해서
승리를 요구할 수 있었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요구할 수 있다.
몸은
머리의 권위를
함께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땅에서 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들에서도 묶이게 되고
땅에서 푼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들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 16:19, 18:18).
우리가
몸의 권위로 기도한다면,
땅에서 우리가 푸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하늘들에서 풀린 것이고
우리가 땅에서 묶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하늘들에서 묶인 것이다.
몸은
하늘들에 계신
머리와 하나이기 때문에
하늘들에서 이미
묶고 풀린 것을
묶고 풀 권위가 있다.
교회는
반석 위에 건축되고,
이 반석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이다.
결과적으로 음부의 문들은
교회를 이길 수 없다
(마 16:18).
우리가
서 있는 위치는
음부 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머리가
몸에게 주신
권위를 행사하며 기도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기도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
머리가
몸에게 주신
권위를 행사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다음의 두 가지를
깨달아야 한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몸의 지체들이고
몸 안에서
살고 행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둘째로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항상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엡 4:24).
새사람은
머리와 몸, 곧 그리스도와 교회로
구성되어 있다
(2:15-16).
우리는
부정적인 면에서
옛사람을 벗어야 하고,
긍정적인 면에서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몸 안에서 살고
새사람을 입음으로써
우리는
머리가
몸에게 주신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을 보고
권위의 기도를 하기를
배워야 한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이 문제들은
소홀히 여겨져 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이것들을 회복하시리라고
믿는다.
너무도 자주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천의 위치를
취하지 않고,
그분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잃어버린 이 위치를
주님께서 회복하시리라고
믿는다.
이것은
좋은 땅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가장 높은 산이다.
이 마지막 때에
주님은
가장 높은 이 봉우리,
가장 높은 이 산을
회복하실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 사실들을 깨닫고,
그 위치를 취하고,
머리가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이기는 기도이다.
이것이
시대의 기도이다.
2일
엡 1:20-22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셨으므로,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고
하늘들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히셔서,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지배 권위 위에,
그리고 이 시대뿐 아니라
오는 시대에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고,
…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머리가 되게 하셔서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이상의
넷째 중점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기도이다.
이러한 종류의 기도는
개인적인 믿는 이들의 기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기도이다.
이런 기도는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기도는
우리의 천연적인 생각에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에 대해
전혀 모를 수 있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위치와 권위가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기도이다.
이러한 종류의 기도 안에서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해 달라고
애걸하지 않는다.
그보다 우리는
주님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주님의 지배 권위와 머리의 권위를
얻으셨다.
그분은
모든 것 위의
주님과 머리이시다.
주님의 지배 권위와 머리의 권위는
주님께서 얻으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방면들이다.
일단 주님께서
무엇을 얻으셨는지를
깨달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적용해야 한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지배 권위와 머리의 권위를
집행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 우리가
어떤 형제를 만날 때,
우리는
그의 상태와 위치가
주님께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그 결과
우리는
그를 위해
기도할 부담을
가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다.
하나는
… 대부분의 믿는 이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이런 일반적인 방식에 따르면,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린다.
“주님,
이 형제는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주님,
그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에게
무언가를 하시기
원합니다.
그의 영 안에서
일하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또 다른 방식의
기도가 있다.
이러한 방식의 기도는
특별하며,
이것은
우리에게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평범한 기도 방식이 아니라
비범한 기도 방식이다.
이러한 기도 방식에 따르면,
우리는
주님께 담대하다.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서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주님,
여기에 아직도
당신의 머리의 권위 아래 있지 않은
한 형제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상황에
순응하지 않습니다.
주님,
저는
이곳에 서서
당신의 지배 권위를 선포하며
이런 상황에 대해
당신께서
지배 권위를 행사하시기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죄인들을 위해
이와 같은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다.
“주님,
당신의 지배 권위가
이 사람에게
행사되어야만 합니다.
주님,
저는
이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인 기도 방식과
두 번째 기도 방식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두 번째 기도 방식에 의해
그리스도의 권위를
만진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우리 스스로
이러한 방식으로
기도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몇 명의 다른 형제들과
육신적으로 함께 모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는
골방에서 혼자 기도할지라도,
영적으로는
몸과 하나이다.
방에 혼자 있을 때
여러분은
‘나’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여
기도할 수 있다.
“주님,
우리는
현 상황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으로서
우리는
주님의 승천의 위치를
취하고
현 상황을 지배하시는
주님의 지배 권위를
우리의 것으로
요구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기도이다.
이것은
무엇을 해 달라고 애걸하는
기도가 아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얻으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요구하는 기도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께서 얻으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요구하는
기도를 배워야 한다.
또 우리는
주님께서 도달하신 것을
어떻게 집행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가장 많이
얻으셨을 뿐 아니라
가장 높은 곳까지
도달하셨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병에 걸렸다고 하자.
주님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것에 대한
이상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에 처할 때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주님,
당신은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은
하늘 위의 하늘까지
높여지셨습니다.
주님,
우리는
당신의 몸입니다.
우리는
하늘들의 영역에서
당신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발아래 굴복되었으므로
모든 것이
우리의 발아래 있습니다.
이 작은 질병은
‘모든 것’에 포함된 것이므로
이 작은 질병도
역시 저의 발아래 있어야만 합니다.
저는 지금
당신과 함께
초월하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종류의 기도와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기도 사이의
차이점을 보았는가?
1일
엡 1:22-23
또 하나님은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시키시고,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머리가 되게 하시어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입니다.
행 2:36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강력한 기도는
… 시대의 기도이다.
오늘날 우리는
강력한 기도에 관해
배울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기도에 관해
알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특히 신약에는
인간의 관념을
훨씬 넘어서는
한 가지 기도가 있다.
이런 종류의 기도 안에
들어가려면
하늘에 속한 이상이
필요하다.
하늘에 속한
이 이상의
첫째 중점은
그리스도의 승천이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주님의 구속의 일 전체가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가리킨다.
주님은
하늘들로 승천하신 뒤에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히 1:3, 10:12).
여기서 앉는다는 것은
안식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사람이
앉을 때
그것은
그가 해야 하는
모든 일을
마치고 성취했다는
뜻이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때
사람은
앉아서 쉰다.
주님께서
하늘들에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하셔야 할 모든 일을
완성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지배 권위가(lordship; 영주의 신분, 지배권, 통치권, 주권)
세워졌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지배 권위는
그리스도의 승천에 의해
세워졌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든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있다.
… 오늘날 주 그리스도는
단지 우주를 창조하신 주님만이 아니시다.
오늘날 주 그리스도는
또한 육체가 되시어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오늘날 하늘들 안에는
한 사람이 계신데,
이분은
높여지셨고
우주의 주님으로
세워지셨다.
오순절날에
베드로는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행2:36)
라고 선포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시키시고,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머리가 되게 하시어 …”
(엡 1:22)
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과
매우 다른 것이다.
더구나 에베소서 1장 22절은
그리스도께서
만물 위에
머리가 되시어
‘교회에게’ 주어지셨다고
말한다.
주님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모든 것은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교회에게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분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모든 것이
교회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뜻한다.
우리는
이러한 하늘에 속한 사실에 대한
하늘에 속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원수 마귀와 그의 악한 영들은
우리보다
이것을
훨씬 더 잘 안다.
악한 세력들은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되셨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진정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의해
높여지셨고,
우주의 주님으로
세워지셨으며,
만물 위에
머리가 되시어
교회에게 주어지셨다는
하늘에 속한 사실을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은
그분의 발아래 있고,
그분께서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모든 것은
그분의 몸인
교회에게 전달되고 있다
(23절).
하늘에 속한
이 이상의
둘째 중점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위치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의 위치는
그리스도의 위치와
정확히 똑같다.
머리가 있는 곳에
틀림없이 몸도 그곳에 있다.
머리가 가진 것은
모두 틀림없이 몸도 갖고 있다.
더구나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고전 12:27, 엡 5:30).
몸은
머리와 하나이기 때문에
몸의 위치는
머리의 위치와
정확히 똑같은 것이다.
셋째 중점은
몸의 권위에 관한 것이다.
나는
‘능력’이나 ‘권리’라는 단어보다
특별히 ‘권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몸의 권위란
무엇인가?
몸의 권위는
몸이 행사하는
머리의 권위이다.
이같이
몸의 권위는
곧 머리의 권위이다.
…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