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제물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이루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이렇게 화평하게 된 결과
우리는
교통과 기쁨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누리게 된다.
화목제물의 실재는 주로
우리가
주님의 상에서
떡을 떼며
그리스도를 기념하고
아버지께
그리스도를 바치고
경배하면서
그리스도를 누릴 때
이루어진다.
화목제물은
주님의 상에 대한
구약의 예표이다.
주님의 상에서
믿는 이들은
하나님과 교통하고
서로서로 교통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그들의 화목제물로 누린다.
그들은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누린다.
주님의 상 집회에서
아버지께 드리는
경배가 없다면,
하나님께
화목제물을 드리는 것이
완전히 성취될 수 없다.
우리는
주님의 상 집회를
두 부분으로
수행해야 한다.
집회의
첫 번째 부분 동안에는
우리의 모든 찬양이
그리스도께 드려져야 하고,
우리는
그분의 인격과 일에 관하여
좋게 말함으로써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집회의
두 번째 부분 동안에
우리는
우리의 찬양을
아버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아버지를 경배하기 위해
주님의 상 집회 시간의
삼분의 일이나 오분의 이 정도를
남겨 두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가
주님의 상에서 누리는
화목제물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또한 아버지께
서원을 하기 위한
분이시다
(is for … a vow to Him;
그분께의 서원을 위해 계신다).
한 면에서 우리는
“주님,
당신을 사랑하므로
제 자신을
당신께 헌신합니다.”
라고 기도함으로써
감사드리며
우리 자신을
주님께
헌신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좋지만
너무 일반적이며
우리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다.
또 다른 면에서 우리는
“주님,
저는
당신께
서원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제 자신을
당신께 드리고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제가 어떻게 느끼든,
언제나
당신 한 분만을 위하기를
원합니다.”
(“Lord,
I come here
to make a vow
to You;
I give myself
to You
and marry myself
to You;
I want to be
solely for You always,
regardless of
what happens
or how I feel”;
“주님,
제가 여기에 와서
당신께
한 서약을 드립니다;
제가 제 자신을
당신께 드리고
또 제 자신을
당신께 결혼시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또는 제가 어떻게 느끼든
저는 항상
오직 당신만을 위하여
존재하기 원합니다”)
라고 기도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서원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회복을 위해
그리스도와
결혼한 이들이
되어야 한다.
서원 제물은
의지의 문제이며
더 강하고
더 깊은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화목제물을 누리는 것은
번제물과 소제물과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네 가지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데,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우리의 동료 믿는 이들과
교통하기 위해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화목제물은
소 떼나 양 떼 중에서
여러 종류의 동물을
바칠 수 있었으며,
또한 수컷이든 암컷이든
다 바칠 수 있었다.
화목제물이
여러 종류인 것은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의 상태가
여러 가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레위기 3장 1절에서
수컷은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좀 더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암컷은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좀 더 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흠이
없으시며
죄들이나 잘못이
없으시다.
화목제물의 피가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서 있는
제단 위와
제단 주위에
뿌려진 것은
그 피가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자신의 죄들이
씻어졌다는
확신을 줌으로
그의 양심에
평안을 가지게 하기 위한 것임을
나타낸다.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섬기는 제사장,
모든 제사장(제사장 체계),
제물을 바치는 사람,
깨끗해진 백성의 회중,
이 다섯 편의
교통과 누림을 위한
분이시다.
화목제물의
기름 덩이와 내장은
하나님의 몫이었다.
기름 덩이는
그리스도의
내적인 풍성을
상징하는데,
이 풍성은
하나님의 영광에 따라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생명의 풍성함이다.
내장은
하나님을 향해
그리스도의 속 존재가
부드럽고 작고 귀하다는 것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이해하시고
감상하실 수 있다.
화목제물의
기름 덩이와 내장을
여호와께
화제로 바쳐
불태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화목제물을
누리시는 분이시며,
그분께서
화목제물의
첫째 부분,
곧 가장 좋은 부분을
누리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제물로 바친
네 종류의 과자와
오른쪽 넓적다리는
섬기는
제사장의 몫이었다.
요제물로 바친
가슴은
모든 제사장을 위한 것이었다.
화목제물의 살,
곧 고기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몫이었다.
가축의
나머지 살은
깨끗해진 백성의
모든 회중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려면
부정한 모든 것에서
자신을 지켜야 하고,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정결한 사람이
먹어야 한다.
주님의 상에서처럼,
부정한 사람이
하나님의 화평이신
그리스도께 참여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의 교통에서
제쳐진다.
이렇게 죄가 있는
사람은
주님의 상의 교통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또한 죽음의 더러움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누리시는
의미를 훼손한다.
하나님은
죽음을 미워하시며
죽음과 관련된
어떤 것도
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취할 때에
하나님의 만족을 위하여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탁월한 부분(기름 덩이)을
바쳐야 하며,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부분(요제물인 가슴)과
승천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강한 부분(거제물인 오른쪽 넓적다리)은
섬기는 사람의
누림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역량과
강하게 하는 능력을
신약의 제사장들인
우리에게
할당해 주시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누리는
영원한 몫이
되게 하신다.
신약에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는
섬기는 제사장,
제사장 무리,
제물을 바치는 사람,
회중이
되어야 한다.
기름 덩이를
먹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장 좋은 부분이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피를 먹지 않는 것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과 영광의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킨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주 안에서
믿는 이들이
먹을 수 있는
피는
오직 예수님의 피이다.
다른 피를
먹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을
만족시키고,
하나님의 거룩한 위치를
지켜 주며,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의 표현된 위엄을
유지해 준다.
어린양은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온전하시고 아름다우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상징하고,
염소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온전하시고 아름다우신
그리스도를 누리기보다는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신
그분을 누리는 것을
상징한다.
화목제물은
일종의 번제물로서,
하나님의
만족과 누림을 위한
음식이다.
화목제물은
하나님께서
번제물로 말미암아
만족하신 것에
기초를 둔다.
레위기 1장 1절부터 6장 7절까지에 제시된
제물들의 순서에 따르면,
화목제물은 또한
하나님과 사람이
소제물로 말미암아 얻은
누림의 결과이다.
만일 우리가
실지적으로
날마다
화평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고자 한다면,
먼저는 반드시 그분을
우리의 번제물로 삼아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려야 하고,
그런 다음 반드시 그분을
소제물로 먹음으로
그분을 우리의 음식으로
누려야 한다.
레위기 1장 1절부터 6장 7절까지에서
다섯 가지 제물의 순서는
우리의 실지 체험에 따른 것이지만,
6장 8절부터 7장 38절까지의 순서는
하나님의 경륜의
전체적인 그림에 따른 것이다.
레위기 6장 8절부터 7장 38절까지의
제물들의 순서에 따르면,
화목제물은
또한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에
기초를 둔다.
우리의 죄와 허물의 문제가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되고,
하나님과 우리가
번제물이시자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족할 때,
우리는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바쳐
화평 안에서 서로
누림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마음과 갈망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네 가지 제물,
곧 번제물과 소제물과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과 함께
화평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네 가지 제물이신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화평으로
최종 완결되며
이 화평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결국 모든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린 결과는
화목제물을 산출하며
궁극적인 화목제물인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 완결된다
(‘예루살렘’은
‘화평의 기초’를
의미한다.).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영원토록
화평이신 삼일 하나님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제물에 관한
규례들 혹은 법들은
하나님의 경륜 전체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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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plies on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전체적인 그림을 제시하는 주님의 상에서 화목제물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누림”
6일
레 7:37-38
이것이
번제물과
소제물과
속죄제물과
속건제물과
헌신과
화목제의 희생 제물에 관한
법이며,
여호와께서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이다.
그날 여호와는
시나이 광야에서
여호와께 제물을 바치라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셨다.
화목제물은
하나님께서
번제물로 말미암아
만족하신 것에
기초를 둔다.
레위기 1장 1절부터 6장 7절까지에 제시된
제물들의 순서에 따르면,
화목제물은 또한
하나님과 사람이
소제물로 말미암아 얻은
누림의 결과이다.
만일 우리가
실지적으로 날마다
화평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고자 한다면,
먼저는 반드시 그분을
우리의 번제물로 삼아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려야 하고,
그런 다음 반드시 그분을
소제물로 먹음으로
그분을
우리의 음식으로
누려야 한다.
레위기 6장 8절부터 7장 38절까지의
제물들의 순서에 따르면,
화목제물은 또한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에
기초를 둔다.
우리의 죄와 허물의 문제가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되고,
하나님과 우리가
번제물이시자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족할 때,
우리는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바쳐
화평 안에서
서로 누림을 가질 수 있다.
레위기 7장 37절과 38절은
제사장 직분을 위한
우리의 헌신이
다섯 가지 제물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와 함께해야 하고,
그 제물들의
규례에 따른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어떤 성경 번역본들은
레위기 7장 37절에 나오는
‘헌신’을
‘위임 제물’이라고
(“the consecration offering”;
그 “헌신 제물”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단순히
‘헌신’이어야 한다.
여기에
‘위임 제물’이라고 불리는
여섯 번째 제물은
없다.
오히려 다섯 가지 제물들이
헌신, 곧 위임을 위한 것이다.
제사장들이 헌신할 때,
하나님은
그들이
제물들의
여러 방면을 누리도록
이러한 제물들을
정해 놓으셨다.
레위기 1장부터 5장까지에서
우리는
제물들이
번제물, 소제물,
화목제물, 속죄제물,
속건제물로
이렇게 특별한 순서로
안배된 것을 보았다.
이 기록은
교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지적인 체험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다섯 가지 제물들에 관한
법을 제시할 때는
그 순서가 크게 달라졌다.
번제물에 관한 법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으로 소제물에 관한 법,
속죄제물에 관한 법,
속건제물에 관한 법,
화목제물에 관한 법이
차례로 나온다.
후자의 배열은
하나님의 경륜의
전체적인 그림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갈망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네 가지 제물,
곧 번제물과 소제물과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이
되시는 것이다.
번제물은
속죄제물을 위한 요건이며,
소제물은
속건제물을 위한 요건이다.
이 네 가지 제물들에서,
두 가지 제물은
자격을 위한 것이고,
두 가지 제물은
결과를 위한 것이다.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은
특별한 결과를 위한 것이다.
이 네 가지 제물들이
드려질 때
그 결과는
화목이다.
이 화목이
하나님께서
갈망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그분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그분의 경륜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화목이신 그분을
누릴 수 있도록
번제물과 소제물과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이
되신다.
감사할 때나
서원할 때나
자원 제물을 드릴 때나
우리는
우리의 화목이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함께
누린다.
레위기 1장부터 7장까지에는
두 가지 기록이 있는데,
하나는
체험에 따른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경륜 전체에 따른
기록이다.
네 가지 제물들인
번제물과 소제물과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은 모두
우리가
모든 방면에서
우리의 화목이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함께
누리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네 가지 제물이신 것은
… 화평으로
최종 완결되며
이 화평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결국 모든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린
결과는
화목제물을 산출하며
궁극적인 화목제물인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 완결된다
(‘예루살렘’은
‘화평의 기초’를
의미한다.).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영원토록
화평이신 삼일 하나님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제물에 관한 규례들은
하나님의 경륜 전체와
관련되어 있다.
5일
레 3:17
이것은 너희가
거주하는 모든 곳에서
대대로 지켜야 할
영구한 율례이다.
너희는
어떤 기름 덩이나
어떤 피도
먹어서는 안 된다.
레 7:27
어떤 피든
피를 먹는 사람은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지게 된다.
제사장들은
제물의
기름 덩이와 피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
“이것은
너희가 거주하는
모든 곳에서
대대로 지켜야 할
영구한 율례이다.
너희는
어떤 기름 덩이나
어떤 피도
먹어서는 안 된다.”
(레 3:17)
기름 덩이와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장 좋은 부분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고,
우리의 구속을 위한
그분의 피는
하나님의 요구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주 안에서
믿는 이들이
먹을 수 있는 피는
오직 예수님의 피이다.
“어떤 피든
피를 먹는 사람은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지게 된다.”
(레 7:27)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일반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누리는
교통에서 제쳐질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특별하고
구별되며
귀중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다른 피를
먹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죄이다.
“제사장은
그것들을
제단 위에서
불태워야 한다.
이것은
화제로 바치는
음식이며
여호와를 만족시키는
향기이다.”
(레 3:16)
이것은
화목제물이
일종의 번제물로서,
하나님의
만족과 누림을 위한
음식임을
의미한다.
제물의
가슴과 오른쪽 넓적다리는
제사장들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제사장들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믿는 이들이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으며,
사랑하는 능력이자
서 있게 하는 힘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슴을 먹을 때,
그분의 사랑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사랑으로
그들을 관심한다.
그리스도의 넓적다리를
먹을 때,
우리는
서 있을 수 있는
힘을 가진다.
화목제물은
하나님께서
번제물로 말미암아
만족하신 것에
기초를 둔다.
하나님과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화목제물은
그리스도께서
번제물이 되신 것에
기초한다.
이것은
레위기 3장 5절과 6장 12절에
나타나 있다.
화목제물에 대해 말하는
레위기 3장 5절은
“아론의 아들들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에 놓은
장작 위의
번제물에 얹어
불태워야 한다.
이것이
화제이며
여호와를 만족시키는
향기이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화목제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기초가
번제물이라는 것을
본다.
번제물을
태우는 것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은
화목제물을 받으신다.
화목제물은
하나님과 사람이
소제물을 누린
결과이다.
한 면으로
화목제물은
번제물에 기초를 두며,
또 한 면으로는
소제물을 누린
결과이다.
이것은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이다.
제물들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했을지라도
우리는
레위기에 있는
그림들을
잘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이 그림들을
제시할 때,
레위기는
많은 전문적인 용어들을
사용한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전문적인 용어들을
알지 못한 채
그리스도를
체험해 왔다.
이 용어들 중의 하나가
번제물이다.
아침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아들을
사랑합니다.
그분을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라고 기도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달콤하게
그리스도를 누리고,
이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드려
그분을 행복하시게
해 드린다.
이것이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드린 후,
우리는
“오, 주님,
당신은
저의 매일의 공급이십니다.
저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소제물,
곧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취하는 것이다.
소제물은
‘생명 공급’에 대한
전문적인 용어이다.
번제물이신 그리스도와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취할 때,
우리는
화평을 가진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가 기뻐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하며
그분께
기쁘게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을 가진다.
이전에 우리는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문제가 없고
우리는 평안하다.
이것이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날마다
이러한 체험과 누림을
가질 수 있다.
4일
레 7:20-21
그러나 부정한 가운데
있는 사람이
여호와에게 속한
화목제의
희생 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지게 된다.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에게서 나온 부정한 것이나
부정한 짐승
또는 부정하고 혐오스러운 것을
만진 사람이
여호와에게 속한
화목제의
희생 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는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지게 된다.
레위기 7장 20절과 21절은
주님의 상에서처럼,
부정한 사람이
하나님의 화평이신
그리스도께 참여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의 교통에서
제쳐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정한 사람은
죄악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상의 교통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너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 덩이는
어떤 것이든
먹어서는 안 된다.”
(레7:23)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이 나타내는
하나님의 음식을
관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름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부드럽고 곱고 탁월한 부분을
상징한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제사장들인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하나님의 음식을
관심해야 하고,
하나님의 몫인
기름을
먹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제사장의 봉사를
행할 때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생각해야 한다.
제물의
최상의 부분인
기름은
제사장들이
먹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죽은 짐승의
기름 덩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짐승의
기름 덩이는
다른 용도로는
사용할 수 있으나,
결코 먹어서는 안 된다.”
(레 7:24)
이것은
죽음의 더러움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누리시는
의미를
훼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죽음을
미워하시며
죽음과 관련된 어떤 것도
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누구든지
여호와에게
화제로 바친
짐승의
기름 덩이를
먹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지게 된다.”
(레 7:25)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때에
그리스도의
인격의
탁월한 부분을
하나님을 위해
남겨 두어야
그리스도를 누리는
교통에서
제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를 누리는
이 교통은
주님의 상을
가리킨다.
주님의 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리는
교통을 가진다.
“너희가
거주하는 곳
어디에서나,
너희는
새의 것이든
짐승의 것이든
어떤 피도
먹어서는 안 된다.”
(레 7:26)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속을 위해,
오직 예수님의 피만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호와에게
화목제의
희생 제물을
바치려는 사람은
그 화목제의
희생 제물 가운데서
자기의 제물을
여호와에게
가져와야 한다.
그는
자기 손으로
여호와에게 바칠
화제물을
가져와야 하며,
그 제물의
기름 덩이와 가슴을
가져와야 한다.
그 가슴은
여호와 앞에서
요제물로
흔들어 바쳐야 한다.
제사장은
그 기름 덩이를
제단 위에서
불태워야 한다.
그러나 가슴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것이다.”
(레 7:29-31)
이것은
우리가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취할 때에
하나님의 만족을 위하여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탁월한 부분(기름 덩이)을
바쳐야 하며,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부분(가슴)은
섬기는 사람의
누림을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요제물은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화목제물의
최상의 부분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불태워져
하나님께로 간다.
사랑하는 부분인
가슴은
섬기는 이들인
우리의 몫으로 주어져
우리의 누림이 된다.
“왜냐하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이 바친
화목제의
희생 제물 가운데서
요제물로 바친
가슴과
거제물로 바친
넓적다리를
받아서
그것들을
제사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지켜야 할
영구한 율례이다.”
(레 7:34)
이것은
우리가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역량과
강하게 하는 능력을
신약의 제사장들인
우리에게
할당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누리는
영원한 몫이
되게 하심을
의미한다.
3일
레 3:1-3
만일 그가
바치는 제물이
화목제물이…면,
… 흠 없는 것을
여호와 앞에
바쳐야 한다.
그는
그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회막 입구에서
그것을 잡아야 하며,
제사장들인
아론의 아들들은
제단 위와 제단 주위에
그 피를 뿌려야 한다.
그는
화목제물 가운데 일부를
여호와에게
화제로 바쳐야 하는데,
곧 내장을 덮은
기름 덩이와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덩이와
화목제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죄들과 잘못들이
없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온전하시다.
그분은
흠이 없으시다.
화목제물은
회막 입구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하셨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바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다.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여러분이 있는
바로 오늘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누려라.
멀리 있는 물은
우리의 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없다는
속담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단지
하늘에만 계신다면,
그분은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누리고 있다.
화목제물의 피는
제단 주위에 뿌려졌다.
이것은 피가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양심에
평안을 주기 위한 것임을
가리킨다.
이 피는
하나님을
진정시켜 드리기 위해
지성소 안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이 피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서 있는
제단 주위에
뿌려졌다.
이것은
화목제물의 피가
우리에게
평안과 확신을
준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화목제물의
피를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죄들이
씻어졌다는
확신을 가진다.
제물의 피는
우리를 위해 뿌려졌으며,
이제 그것은
우리의 눈앞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감사합니다.
저의 죄들은
용서받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피를
보았기 때문에
이것을 압니다.
이 피는
하나님께서
저의 죄들을
용서하셨다는
증거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섬기는 제사장,
모든 제사장(제사장 체계),
제물을 바치는 사람,
깨끗해진 백성의 회중,
이 다섯 편의
교통과 누림을
위한 분이시다.
화목제물의
기름 덩이와 내장은
하나님의 몫이었다.
거제물로 바친
네 종류의 과자와
오른쪽 넓적다리는
섬기는
제사장의 몫이었다.
요제물로 바친
가슴은
모든 제사장을
위한 것이었다.
화목제물의
살, 곧 고기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몫이었다.
가축의
나머지 살은
깨끗해진 백성의
모든 회중을 위한 것이었다.
신약에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는
섬기는 제사장,
제사장 무리,
제물을 바치는 사람,
회중이
되어야 한다.
내장은
하나님을 향해
그리스도의 속 존재가
부드럽고 작고 귀하다는 것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이해하시고
감상하실 수 있다.
기름 덩이는
그리스도의
내적인 풍성을
상징하는데,
이 풍성은
하나님의 영광에 따라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생명의 풍성함이다.
화목제물의
기름 덩이와 내장을
여호와께
화제로 바쳐
불태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화목제물을
누리시는 분이시며,
그분께서
화목제물의
첫째 부분,
곧 가장 좋은 부분을
누리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목제물의
고기에 관해서
레위기 7장 19절 상반절은
“부정한 것에
닿은 고기는
먹지 말고
불태워야 한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려면
부정한 모든 것에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지 않은
고기는
누구든지
정결한 사람이
먹을 수 있다.”
(레 7:19하)
이것은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려면
부정한 모든 것에서
자신을 지켜야 하며,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정결한 사람이
먹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일
레 3:1
만일 그가
바치는 제물이
화목제물이고,
그 제물을
소 떼에서 골라 바치려면,
수컷이든 암컷이든
흠 없는 것을
여호와 앞에
바쳐야 한다.
레 3:7
만일 그가
어린양을
제물로 바치려 한다면,
그는 그것을
여호와 앞에
바쳐야 한다.
레 3:12
만일 그가
바치는 제물이
염소이면,
그는 그것을
여호와 앞에
바쳐야 한다.
레위기에서
우리는
여러 종류의
화목제물이
있는 것을
본다.
번제물의 크기가
다양한 것처럼
화목제물도
여러 종류가 있다.
화목제물이
여러 종류인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의 상태가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큰 그리스도를
누린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아마도 우리의 가정생활에
어떤 곤란한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누림을
제한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더 작아졌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상태가
협소해지고
작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탄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누림을
제한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상태를
협소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황을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하며,
방해하는 것들을
피하기 위해
우리의 ‘골방’(마 6:6)에서
기도함으로써,
더 큰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는
더 좋고 더 높은
상태에
있어야 한다.
레위기 3장 1절은
“만일 그가
바치는 제물이
화목제물이고,
그 제물을
소 떼에서 골라 바치려면,
수컷이든 암컷이든
흠 없는 것을
여호와 앞에
바쳐야 한다.”
라고 말한다.
수컷의 소를
드리는 것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조금 더 강하여
그리스도를
수컷의 소로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강해지시거나 약해지심으로
차이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강할 때도 있고
약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강하다면
더 강한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고,
우리가 약하다면
더 약한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약하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 때문에
우리의 체험에서
그리스도께서
더 약하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약하거나 낙심할 때,
강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이
조금 더 약해질 것이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체험에서
약하시다.
암컷의 소를
드리는 것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조금 더 약하여
그리스도를
암컷의 소로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모든 소들은
강하다.
그리스도 자신은
강하시다.
우리가
강한 그리스도를 누리는가
아니면 약한 그리스도를 누리는가는
우리의 상태에
달려 있다.
우리의 상태가
강하다면,
우리는
강한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만일 우리의 상태가
약하다면,
우리는
약한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레위기 3장 6절과 7절은
“만일 그가
여호와에게 바치는
화목제물을
양 떼에서 골라 바치려면,
수컷이든 암컷이든
흠 없는 것을
바쳐야 한다.
만일 그가
어린양을
제물로 바치려 한다면,
그는 그것을
여호와 앞에
바쳐야 한다.”
라고 말한다.
어린양은
사람들이
어린양과 같이
완전하시고 아름다우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체험을 했으며
완전하시고 아름다우신
그리스도를 누렸다고
믿는다.
레위기 3장 12절은
“만일 그가
바치는 제물이
염소이면,
그는 그것을
여호와 앞에
바쳐야 한다.”
라고 말한다.
어린양은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완전하시고 아름다우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상징하고,
염소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완전하시고 아름다우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보다는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신
그분을
누리는 것을
상징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따르면,
양은 좋으나
염소는 좋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때때로
양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때때로
염소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가?
만일 우리의 상태가
가련하다면,
우리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곧 완전하고 아름다운 양이신
그리스도를
누리지 못하고,
그분을
완전함과 아름다움이 없는
염소로서
누리게 될 것이다.
어떤 형제가
그의 아내와
다툰 후에
그리스도를 누리려고
애쓴다고
가정해 보자.
그럴 경우에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누림은
가련할 것이며,
그는
양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염소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느낌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상태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그리스도 자신이
달라지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상태에 따라
우리의 느낌에서
우리 자신이
달라지는 것이다.
1일
레 7:16-18
그러나 바치는 화목제의
희생 제물이
서원 제물이거나
자원 제물이면
(a vow
or a freewill offering),
희생 제물을 바친
그날
그것을 먹고,
남은 것은
그다음 날
먹어도 된다.
그렇지만
삼 일째 되는 날에는
남은 희생 제물의 고기를
불태워야 한다.
만일 삼 일째 되는 날에
자기가 바친
화목제의
희생 제물의 고기를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물은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제물을 바친 사람의 것으로
인정되지도 않는다. …
화목제물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이루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이렇게 화평하게 된 결과
우리는
교통과 기쁨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누리게 된다.
화목제물의 실재는 주로
우리가
주님의 상에서
떡을 떼며
그리스도를 기념하고
아버지께 그리스도를 바치고
경배하면서
그리스도를 누릴 때
이루어진다.
화목제물은
삼일 하나님과의 교통을
함축하고
또한 삼일 하나님을 누리는 것을
포함하는데,
이것은
누가복음 15장 23절과 24절에 있는
영접하는 아버지(하나님)와
돌아온 탕자(죄인) 사이의
화평의 누림인
살진 송아지의 비유로
설명된다.
주님의 상에서
믿는 이들은
하나님과 교통하고
서로서로 교통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그들의 화목제물로 누린다.
이렇게 화목제물을 누리는 것은
번제물과 소제물과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을
누린 결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이 네 가지 제물로
누리는 것은
하나의 결과
곧 하나의 귀결을
가져오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화목제물로 누림으로써
하나님과
교통을 가지고
동료 믿는 이들과도
교통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상 집회를
두 부분으로
수행해야 한다.
… 집회의
첫 번째 부분 동안에는
우리의 모든 찬양이
그리스도께
드려져야 한다.
… 집회의
두 번째 부분 동안에
우리는
우리의 찬양을
아버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 주님을 기념하는 동안
아버지께 경배를 드려서는 안 되며,
아버지께 경배하는 동안
주님을 찬양해서도 안 된다.
… 아버지를 경배하기 위해
주님의 상 집회 시간의
삼분의 일이나 오분의 이 정도를
남겨 두는 것이
가장 좋다
(It is best
to leave
one-third or two-fifths
of the time
for the worship of the Father;
그 아버지를 경배함을 위하여
그 시간의
삼분의 일 또는 오분의 이를
남기는 것이
가장 좋다).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그 제물을 드린 사람이
그 제물을 드린
그날에
먹어야 하지만,
서원 제물이나
자원 제물을 위한
화목제물의 고기는
제물을 드린
그다음 날에도
먹을 수 있었다.
이것은
서원을 위한 제물이
감사를 위한 제물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처럼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제물은
단 하루 동안만
먹기에 좋다.
우리는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화목제물과
서원을 위한
화목제물의
차이를
볼 필요가 있다.
… 오늘 우리는
감사함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할지 모른다.
한면에서 우리는
“주님,
당신을 사랑하므로
제 자신을
당신께 헌신합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다.
이것은
감사하기 때문에
드리는 기도이지만
너무나 일반적이다.
또 다른 면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서원하여
드릴 수 있다.
우리는
“주님,
저는
당신께 서원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제 자신을
당신께 드리고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제가 어떻게 느끼든,
언제나
당신 한 분만을 위하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다.
서원은
자발적인 것이다.
수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자신을 헌신할지 모르지만,
오 년 후에
그들은
교회를 떠날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들이
서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원은
결혼에 의해
묶이는 것과 같다.
그러나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제물은
우리의 느낌에
기초한다.
… 서원은
우리의 느낌을
초월한다.
그것은
느낌이나 환경과 관계없이
우리를 묶는
끈이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회복을 위해
그리스도와
결혼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럴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혹은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
관계없이
우리는 항상
주님의 회복을 위해
주님과 함께
머물 것이다.
… 그러한 서원을
하는 것은
민수기 6장에
계시되어 있는 것처럼
참된 나실인이
되는 것이다.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제물은
감정적이며
피상적이지만,
서원을 위한
제물은
굳은 결심에 따른 것이고
보다 깊은 것이다.
… 서원은
(a vow;
맹세, 서약, 다짐, 단언)
의지와 관계가 있다.
…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는
서원할 필요가 있다.
결혼은
어떤 교체나 변동이나 변경도 없는
서원을 포함한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께 서원한 것을
소중히 여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