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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하나님의 갈망은 그분의 모든 백성이 오늘날의 나실인들이 되는 것임

God’s Desire
for All His People
to Be Today’s Nazarites
그분의 모든 백성이
오늘날의 나실인들이 되는
하나님의 갈망
 

인류 가운데
유일한 나실인은
주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나실인은
인성 안에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 요 5:30, 빌 2:8, 마 11:28-30,
엡 4:20-21, 요 6:57.

주 예수님은
그분의 인간 생활에서
온 일생 동안
버터(가장 풍성한 은혜)와
꿀(가장 달콤한 사랑)을
드셨다.
이러한 아버지의
가장 풍성한 은혜와
가장 달콤한 사랑으로 인하여
그분은
아버지의 뜻에 속한
선한 것들을
선택하시고
악을
거절하실 수 있었다
― 사 7:14-15, 마 11:25-26,
14:22-23, 26:39, 막 1:35, 눅 5:16.

어떤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고
무언가를
포기하며
자신을
부인하거나
어려운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람 배후에
가장 풍성한 은혜이시자
가장 달콤한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누린 것에서 비롯된,
강화하는 큰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 요 1:17, 롬 5:17, 딤후 2:1,
고후 5:14-15, 갈 2:20, 롬 8:37, 12:1-2.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백성이
나실인이 되기를
갈망하신다.
나실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도록
절대적이고도
궁극적으로
거룩하게 되고
분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만족
곧 예수님의 증거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위하지 않는 것이다
― 민 6:1-2, 시 73:25-26,
계 1:2, 9-13, 19:10, 민 2:2.

포도주나
그 근원과 관련된 모든 것을
금지하는 것은
땅에 속한
모든 종류의
누림과 즐거움을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 민 6:3-4, 시 104:15, 전 10:19.

나실인은
땅에 속한
어떤 종류의 즐거움에서도
절대적으로 분별된다
― 눅 2:46-49, 고후 6:14-7:1,
약 4:4, 요일 2:15.

우리는
우리의
새 포도주
(기운을 북돋워 주는
하나님의 생명이자
우리를 즐겁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날마다
누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전제물로
하나님께
부어질 수 있다
― 마 9:17, 아 1:2, 4:10,
삿 9:13, 딤후 4:6, 빌 2:17.

머리를 밀지 않는 것은
주님의 머리의 권위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대표 권위를
거스르지 않고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 민 6:5, 롬 13:1-2상,
엡 5:21, 23, 6:1, 히 13:17, 벧전 5:5.

“만물은
그분 안에 연결되어
존재합니다.
또한 그분은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 이것은
그분 자신께서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골 1:17-18.

“머리를 붙들(고)
… 온몸은
마디와 힘줄을 통하여
머리로부터
풍성하게 공급을 받고
함께 짜여,
하나님께서 자라심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 골 2:19.

그리스도로 충만한 것은
복종으로 충만하여
복종적인
영과 위치와
분위기와 의도를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이라면
우리와 우리의 장래에
큰 축복이 있을 것이다
― 빌 2:8-9, 엡 5:18-21.

주님의
머리의 권위 아래 있는 것은
큰 축복이며,
심지어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이나
어떤 환경 아래
있는 것조차도
큰 축복이다
― 엡 3:1, 4:1, 6:20.

복종에는
능력이 있다
― 삿 16:17.

자신의 혈육의
주검에 의해
더러워지지 않고
하나님께
분별되어
거룩한 상태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은
나실인이
천연적인 애정을
이긴 것을
의미한다
― 민 6:7.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천연적인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사랑이신
그분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 마 12:48-50, 빌 2:21,
고전 13:4-8, 13, 딤후 1:7.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문제는
천연적인 인간관계와 관련된
천연적인 생명으로 인해
일어났다
― 레 2:11, 행 15:35-39, 골 4:10.

우리는
천연적인 열정과
천연적인 애정과
천연적인 힘과
천연적인 능력을 지닌
천연적인 사람에게서 나온
모든 것에서
자신을 분별하여,
그 영에 의해 살고
그 영에 의해 행하고
그 영에 의해 봉사하면서,
우리의 영 안에 계신
그 영에 의해
하나님의 유일한 증거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해야 한다
― 레 10:1-11, 갈 5:25, 빌 3:3,
롬 1:9, 8:4, 슥 4:6.

죽은 사람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나
곁에 있던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의해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것은
나실인이
죽음에서 분별되는 것을
상징한다
― 민 6:6-9.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은
죽음이다
― 계 3:4, 레 11:31.

여러 종류의 영적인 죽음,
곧 거친 죽음(들짐승의 사체),
부드러운 죽음(집짐승의 사체),
간교한 죽음(길짐승의 사체) 등이
교회생활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퍼질 수 있다
― 레 5:2, 비교 요일 5:16상.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고서,
우리의 영에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의 영을
관심하며
우리의 영을
사용해야 한다
― 롬 8:6.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기도함으로써
반드시 ‘항(抗)죽음제’,
곧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어야 한다
― 롬 8:11, 엡 6:18.

우리가
어떤 예기치 않은
죽음에 의해
더러워졌다면,
우리 자신을
주님께
다시 분별해 드림으로써
새롭게 헌신하여
새로운 시작을
가져야 한다
― 민 6:9-14상, 삼상 1:11, 2:11.

성경은
우리에게
두 명의 나실인인
사무엘과 삼손의
대조를 보여준다.

사무엘은
신실한 나실인의
긍정적인 본이다
― 삼상 1:11, 28, 2:28, 35,
3:20, 7:15.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반향하고
말해 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
사람이
신성한 움직임과
협력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생명의 노선에서
그분과 하나였던 사람인
한나에게
동기를 부여하실 수 있었다.
그러한 사람을
얻으실 수 있는 한
하나님은
이 땅에서
길이 있으시다.

한나의 기도는,
그녀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하나님의 움직임이
(삼상 1:10-17)
하나님의 갈망을
이루어 드리는 데 절대적인
한 나실인을
산출하는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헌신된
사람,
하나님을
머리로 취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남편으로 삼는
사람,
세상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에는
관심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다.

사무엘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하나였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곧 하늘에서
이 땅에 있는
그분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자신의 대표자로서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 삼상 7:3.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새로운 제사장과 신언자였다.
그의 말함은
혁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성한 계시를 통해
시대를 전환하여
왕권을 가져왔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을
성취하실 수 있도록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헌신된
나실인으로서,
곧 하나님의
공식적이고 형식적인
모든 봉사자들을 대치할
자원자로서
사역하였다
― 삼상 1:11, 28상.

사무엘은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장으로서
사역하면서,
진부하고 하락한
제사장 직분을
대치하였다
― 삼상 2:30, 35, 삿 9:9, 13, 신 34:7.

사무엘은
신언자로서
사역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들이
흔히 보이지 않던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였다
― 삼상 3:1-10, 19-21.

사무엘은
왕권의 실재 안에서
사사로서
사역하면서,
낡고 진부한
제사장 직분이
백성을 판결하던 일을
대치하였다
― 삼상 7:15-17.

사무엘은
기도의 사람으로
사역하면서,
하나님의 선민이
하나님의 길 안에 지켜지도록
기도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그분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갈망이
성취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 삼상 8:6, 12:20-25, 15:11.

사무엘은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무엘 안에
복사되었고,
따라서 그는
순수하고
단일하였다
― 마 5:8, 6:22-23, 딤후 2:22.

사무엘의
행함이나 생활이나 일만이 아니라
그의 전 존재와 인격이
하나님과 일치하였다.
사무엘의 존재와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였다.
그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대행자였다.

사무엘이 고려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이었다.
그에게는
다른 어떤 생각이나 고려가
없었다.

그는
조금도 이기적이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 마 16:24, 눅 9:23-25.

그는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선민 외의
다른 것들에는
조금도
그의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의
반영이었고
(고후 3:16-18),
그의 생활과 일은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그 모든 것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무엘은
자신의 후손을 위한
왕국을 세우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왕국을 가져오시는 것이
쉬웠다.
따라서 사무엘은
시대를 전환한 사람이었다.

비록 사무엘이
그의 특별한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표하기가
쉽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권익을 관심했고
시대를 전환했다.
구약에 따르면,
사무엘은
하나님과
그분의 권익을
위하는 면에 있어서
모세와
동일한 위치에 놓인다
― 렘 15:1.

삼손은
나실인의
부정적인 예이다
― 삿 13:3-5, 고전 10:6.

그의 기원은
여호와의 천사가 나타남으로
일어난 기적이었다
― 삿 13:3.

삼손은
어머니의 태 속에서
거룩하게 되어
나실인이 되었다
― 삿 13:3, 5.

그는
성장하면서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
순결하고 순수했다
― 삿 13:4-5.

삼손은
거룩하시고 경륜적인 영이신
하나님의 영에 의해
능력을 얻었다
― 삿 13:25, 14:5-6, 19.

삼손은
생명의 영 안에서가 아니라
능력의 영 안에서
움직인 사람의
실례이다.
그는
매우 능력이 많았지만,
우리는
그에게서
생명에 속한 것을
조금도 볼 수 없다.

삼손은
하나님을 접촉하지 않고
육체의 정욕에 빠짐으로써
실패했다
― 삿 14:1.

그는
배우자를 찾는 데
진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여자들을 접촉한 것은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 삿 14:1-3, 10-17, 16:1-20상.

그는 비록
하나님에 의해
능력을 얻었지만,
정욕에 빠지는 바람에
극도로 손상을 입었다.

결국 여호와는
그를 떠나셨고,
그는
자신의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줄 몰랐기 때문에
비참한 종말에
이르게 되었다
― 딤후 2:22.

나실인에게 필요한 것은
급하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삿 14:6, 19).
그보다 나실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그러한 마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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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삼상 13:14
…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렘 15: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사무엘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왕국을 향한
갈망이 있음을
알았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윗을 통해서
왕국을 가져오기를
원하셨다.

만일 여러분이
사무엘이었다면,
여러분과 필적하거나
여러분 위에 있을
누군가를 위해
어떤 입지를
주겠는가?
사무엘은
순수하고
단일했다.
그는
그의 어머니의
서원에 따라
나실인이 되었으며,
전혀 이기심이 없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선민 외의
다른 것들에는
조금도
그의 마음을
두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으며,
그분의 이런 마음이
사무엘 안에
그대로 복사되었다.

하나님의 마음이
사무엘 안에
복사되었기 때문에,
사무엘은
자신의
유익이나 이익을
관심하지 않았다.
… 사무엘은
그 당시의 상황으로 인해
그의 아들들을
사사들로 임명했지만,
사울과는 반대로
그에게는
그의 아들들을 위한
왕국을 세우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의 아들들은
그의 길을
따르지 않았고,
부당한 이익을 얻으려고
뇌물을 취하여
판결을 굽게 했다
(삼상 8:1-3).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왕을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그는
그의 아들들과 연관된
어떤 것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것으로
하나님을
대치하기 원했기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
(4-7절).
… 사무엘의 관심은
그의 자녀들에게
있지 않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왕국을 가져오시기가
쉬웠다.

사무엘이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면,
결코 하나님과
동역하지 못했을 것이다.
… 하나님은
그에게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삼상 9:16)
라고 말씀하셨다.
사울과 그의 사환이
사무엘에게 이르렀을 때,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정확히 행했다.

이제 우리는
사무엘이
왜 하나님의 손에서
그렇게 유용했는지를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이기심이나
자기 이득에 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대신에
머리에 삭도를 대거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나실인으로서
그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쁘게 갔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기쁘게 했다.
그는
하나님과
합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을
수행하시기 위해
사용하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품성을 가졌지만,
그들은 단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사업과
그들의 왕국만을
위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위하지 않는다.
사무엘은
품성이 높았을 뿐 아니라
그의 나실인의 서원 또한 높았다.

사무엘과
또 다른 나실인이었던
삼손을 비교해 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삼손 역시
그의 어머니의 서원에 의해
나실인이 되었지만,
사무엘과는
매우 달랐다.
성경은
삼손과 다른 사사들을 말할 때
종종 하나님의 영이
급하게 임하셨다고 말한다
(삿 14:6, 19).
그러나 사무엘에 대해서는
그러한 말씀이
전혀 없다.
나실인에게 필요한 것은
급하게 임하는 능력이 아니다.
그보다 나실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그러한 마음이 필요하다.

비록 사무엘이
그의 특별한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표하기가
쉽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권익을 관심했고
시대를 전환했다.
구약에 따르면,
사무엘은
하나님과
그분의 권익을 위하는 면에 있어서
모세와
동일한 위치에 놓인다
(렘 15:1).

하나님은
먼저 사울에게,
그다음은 다윗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사무엘을 사용하셨다.
… 사울은 단지
한 군주국을
가졌을 뿐이었다.
하나님의 보좌가
예루살렘에 세워졌을 때,
하나님의 왕국이
다윗 아래서
처음으로 임하였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셨다
(삿 13:25, 14:6, 19).
그에게
참된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수많은 사사들은
… 정욕에 빠지는 것에 대해
아무런 절제가 없었다.

 

5일

삼상 1: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삼상 2: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

삼상 3:20
…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신언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삼상 7:15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으며

사람의 측면에서
사무엘의 근본은
하나님께 경배하던
그의 부모,
특히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았던
그의 어머니였다
(삼상 1:5).
타락한 이스라엘의
혼돈된 상황에서도
엘가나와 한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위하여
정하신
생명의 노선 안에
머물렀다
(창 2:9).
생명의 노선은
하나님의 백성의
누림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산출하는
노선이다
(룻 4:18).
이 노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 땅 위에
그분의 왕국,
곧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얻으실 수 있다
(마 16:18-19, 롬 14:17,
엡 1:22하-23).
하나님께서
한나 안에서
움직이고 계셨기 때문에,
한나는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는
평안이 없었다.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반향하고
말해 낸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
사람이
신성한 움직임과
협력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생명의 노선에서
그분과 하나였던 사람인
한나에게
동기를 부여하실 수 있었다.
그러한 사람을
얻으실 수 있는 한
하나님은
이 땅에서
길이 있으시다.

한나의 기도는,
그녀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하나님의 움직임이
(삼상 1:10-17)
하나님의 갈망을
이루어 드리는 데
절대적인
한 나실인을
산출하는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헌신된
사람,
하나님을
머리로 취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남편으로 삼는
사람,
세상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에는
관심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다
(민 6:1-5).
사무엘은 심지어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에 의해
이러한 사람이 되도록
헌신되었다
(삼상 1:11).

사무엘기상 7장
2절부터 6절까지의
그림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백성과,
이 땅 위에서
하나님과 하나였던 사람인
사무엘을
보여 준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곧 하늘에서
이 땅에 있는
그분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자신의 대표자로서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사무엘은
출생에 따르면
레위인이며,
엄청난 반역을 일으킨
고라의 후손 중
한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대상 6:33-38, 민 16:1-33),
그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신분을 가지고
사역을 수행하였다.
(1)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을
성취하시도록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헌신된
나실인,
곧 임명되어
하나님을 섬기거나
규정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대신한
자원자
(삼상 1:11, 28상).
(2) 하나님을 위하여
신실하게 행동하며
심지어
이 땅에 있는
신성한 통치를 위하여
왕들을
임명하고
세우기까지 한
제사장
(2:35).
(3) 제사장인 자신이
임명한 왕들을
돕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 냄으로써
낡은 제사장 직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것을
대치한,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언자
(3:20).
(4) 백성을 판결하는
낡은 제사장 직분을
대치하도록
하나님의 통치적인 행정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
(7:15-17).
(5)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기도한
기도의 사람
(7:3-14, 8:6, 15:11상, 12:23).
사무엘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길 안에
보존되고,
하나님과
하나 되며,
이방 민족의
우상들이라는 올무에
걸리지 않고,
에벤에셀이신(7:12)
하나님을 누리기를
기도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민에 대하여
뜻하신
갈망이 성취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사무엘이
모세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그분 앞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셨다
(렘 15:1).
모세는
제사장이자(출 29장)
신언자이자(신 18:15, 18)
사사였으며(출 18:13, 16),
항상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는데
(출 32:11-13, 31-32),
사무엘도
이러한 방면에서
모세와 같았다.
구약에서
오직 모세와 사무엘에게만
제사장 직분과
신언자 직분과
사사 직분에
온전히 참여할
자격이 있었다.

 

4일

민 6:6-7
자신을
여호와에게로 분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죽은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
형제나 자매가
죽었을 때에도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로
분별된 표시가
그의 머리에
있기 때문이다.

나실인은
더러워지지 않기 위해
어떤 주검도
접촉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가증스러운 것은
죽음이며,
나실인은
이 죽음으로
더러워져서는 안 된다.

나실인은
가장 가까운 혈육…의
주검에 의해
더러워져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
거룩하게 되도록
분별되어야 한다
(민 6:6-8).
심지어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에 의해서도
더러워져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가
천연적인 애정에서 나오는
죽음에 의해
더러워져서는 안 되고,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깨끗이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실인은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님께
완전히 거룩하게 되고
분별되어야 하며,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굳게 붙어 있어야 한다.

나실인은
땅에 속한 즐거움을
멀리해야 하며,
천연적인 애정을 통해 오는
죽음에 의해
더러워져서는 안 되었다.
즐거움은
누림의 문제이고,
천연적인 애정은
사랑의 문제이다.

만일 나실인 곁에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죽어
나실인의 분별된 머리를
더럽히게 된 경우에는,
그는
칠 일째 되는 날
(분별을 위한 마지막 날─행 21:27)에
자신의 머리를 밀어서
정결하게 되어야 했다
(민 6:9-12).
이것은 만일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어떤 죽음 때문에
더러워진 경우에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 다시 분별함으로써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곁에 있던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죽는 것은
나실인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갑작스러운 죽음도
나실인을 더럽힐 수 있으므로,
나실인은
이 더러움에
책임을 져야 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이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영적으로 말해서
언제 어떤 사람이
우리 곁에서 죽을지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인해
더러워졌다면,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
다시 분별해 드림으로써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죽음이
얼마나 더럽고
또 우리를
얼마나 더럽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 교회 생활 안에서
죄가 들어와
교회를 더럽히고
성도들에게
손상을 줄 수 있지만,
더 많은 경우
우리는
죽음으로 인해
더러워진다.
죽음은
감추어진 것이다.
종종 죽음은
바로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그것을 느끼지 못함으로써
그것에 의해 더러워진다.

우리가
죽음으로
더러워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죽음에 대한
감각이나 느낌을 가짐으로써
이것을 안다.
죄는
유죄 판결을 가져와
우리의 양심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죽음은
유죄 판결의 문제가 아니라,
… 우리를 손상하고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방면에서
그 영 안에 살고 있다면,
어떤 집회에 올 때
우리는
그곳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즉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집회가
낮고
활기가 없다는 것을
알 뿐 아니라,
죽음이
표면 아래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죽음의 상황에 맞서기 위해
아주 많은 기도를
해야 한다.
“주님,
죽이는 모든 것,
모든 영적인 죽음에
대항할 수 있도록
당신의 피로
저를 덮어 주소서.”
우리는
죽음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

우리는
‘항(抗)죽음제’인
생명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인 기도가 아니라
대적에게 대항하여
싸우는 기도를 하기 위해
우리의 영을
얼마나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죄는
사탄에게 속하며
(요 8:44),
이 사탄은 또한
죽음의 근원이다
(히 2:14).
선과 악의 지식나무에는
악이 있지만,
이 나무에 참여한 결과는
악이 아니라
죽음이다.
우리가
생명나무를 먹을 때,
그 결과는
생명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항하여
지속적으로 싸워야 한다.
예를 들어,
기도 집회에서
죽음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죽음과 그 영향력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나실인들은
… 죽음에 대항하는
전쟁을 하기 위해
매우 깨어 있어야 하고
느낌이 가득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죽음에 대한
감각,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3일

고전 11:3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이것을 알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각 사람의 머리이시며,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고, …

고전 11:6
… 여자가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이
부끄럽거든
덮개로 가리십시오.

골 2:19
머리를 붙들(고)
… 온몸은
마디와 힘줄을 통하여
머리로부터
풍성하게 공급을 받고
함께 짜여,
하나님께서 자라심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민수기 6장 5절은
“자신을 분별하여
서원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삭도를
머리에 대서는 안 된다.
자신을
여호와에게로
분별하는 날이
다 찰 때까지는
거룩해야 하므로,
머리털이
길게 자라도록
그대로 두어야 한다.”
라고 말한다.
머리를 밀지 않는 것은
주님의 머리의 권위를
거스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고전 11:3, 6).

나실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땅에 속한 즐거움과
조금도 관계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절대적으로
권위 아래,
곧 머리의 권위 아래
머물러야 한다.

사람의 머리를
미는 것은
주님의 머리의 권위를
거스르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머리를 민다는 것은
우리를 다스리는
주님의 권위를
던져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나실인은
머리가
길게 자라도록
두어야 했다.
즉 그는
주님의 머리의 권위에
계속해서 복종해야 했다.
주님의 머리의 권위 안에
능력이 있다
(삿 16:17).

오늘날은
무법천지이다.
만일 경찰을 없애고
법정을 닫는다면,
사회는
도둑들과 살인자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는
살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은
뛰어난 헌법을
가지고 있으며,
이 헌법을 기초로 한
강력한 법률들과
이 법률들을 수행하는
많은 법정들이 있다.
법정에 들어서는
모든 사람은
미국 정부의 법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 전체가
붕괴될 것이다.

타락한 인류는
반역적인 인류이다.
반역하는 본성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그러므로 대표 권위가
없는 상황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 정부를 세우신
이유이다
(창 9:5-6).
모든 정부는
하나님의 권위를 대표하는
대표 권위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위자들에게
복종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은
권위가 없으며,
이미 있는 권위자들은 다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권위를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롬 13:1-2상)
라고 말한다.
교사들과
고용주들과
경찰관들은
대표 권위자들이다.
이 땅의 어느 곳이든
대표 권위가 있다.

이 대표 권위의 문제를
교회에 적용해 보자.
교회 안에
대표 권위가 있는가?
만일 교회 안에
대표 권위가 없다면
왜 장로들이 있겠는가?
최근에 어떤 이들은
신약 안에는
대표 권위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한 주장이
참되다면
왜 신약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
장로들이 있다고
말하는가?
물론 그리스도는
머리이시며
권위는
그 영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여전히
장로들이 필요하다.
장로들이 없다면
교회는
무정부 상태가 될 것이다.

우리의 가정생활에도
대표 권위가 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대표 권위이며
(엡 6:1),
남편은
아내에게
대표 권위이다
(5:23).
바울은 심지어
아내는
남편을 경외해야 한다고
말한다
(33절).
아내가
남편을
경외한다는 것은
아내가
남편을
대표 권위로 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조그마한 가족 안에도
대표 권위가 있는데
교회 안에는
대표 권위가
얼마나 더 있어야 하겠는가?

나실인에게는
두 가지의
특성 혹은 표시가 있다.
첫째는
나실인은
세상적인 즐거움은
그 무엇도
접촉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항상 자신을
어떤 권위 아래
둔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엄중한 문제들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땅에 속한 즐거움을
금지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의 머리털을
밀지 말아야 한다.
즉 우리는
권위를 존중해야 하며,
모든 방면에서
우리 주님의
머리의 권위 아래
머물러야 한다.

 

2일

민 6:3-4
포도주와
독한 술에서
자신을
분별해야 한다.
그는
포도주로 만든 식초나
독한 술로 만든 식초를
마셔서는 안 되고,
어떤 포도즙도
마셔서는 안 되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분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은
씨에서
껍질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백성이
나실인이 되기를
갈망하신다.
나실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도록
절대적이고도 궁극적으로
거룩하게 분별되는 것이다.
이렇게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위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정결하고
의롭고
신실하기를
원하신다.
…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만을
사랑하기를,
곧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과 감정과
육신의 힘으로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막 12:30).
하나님은
다른 누군가나
다른 그 무엇도 아닌
그분 자신만이
우리의
첫째가는 사랑과
우리의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신다.
설령 우리가
이렇게
그분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절대적이고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지 않을 수 있다.

나실인의 문제는
우리의 절대성을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실인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절대적이고
철저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야 한다.

민수기 6장 2절은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여
자신을
여호와께
분별해 드리는 것에 대해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실인이
자신을
하나님께
분별시키는
특별한 서원을 함으로써
거룩하게 된 사람이라는 것을
본다.
많은 때 우리는
주님께
서원을 하지만
그렇게 강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서원을
지키지도 못한다.
여러분은
서원하고
그것을
일생 동안
신실하게
지킬 수 있는가?

분별됨과
거룩하게 됨에는
차이가 있다.
분별됨은
소극적인 측면이고,
거룩하게 됨은
적극적인 측면이다.
우리는
소극적인 측면에서
세상적인 사람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별하며,
적극적인 측면에서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
즉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
먼저 우리는
분별되고,
그런 다음에
거룩하게 된다.

누군가가
출생에 의해
제사장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시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문제이다.
제사장은 분명히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인 사람인
나실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명에 따른 것이다.
한 사람이
제사장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문제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 대해
무엇을 하셨느냐의
문제이다.

누군가가
서원에 의해
나실인이 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분별되는
문제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출생에 의해
나실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서원을 함으로써
나실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제사장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시고
시작하시는 것이지만,
누군가가
나실인이 되는 것은
서원에 의한 것이고
그 사람 자신이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또한 우리가 시작한
주님의 회복 안에 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임명을 보완하는
사람의 동역이
요구된다.
이것은
사무엘의 경우로
예시된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제사장인 엘리의
부족을 보완했던
나실인이었다.
… 사무엘은
자발적으로 나와서
엘리의 부족함으로 생긴
공백을 메움으로써
엘리의 부족함을
보완했다.

민수기 6장
3절과 4절에서
우리는
나실인이
포도주나
그 근원과 관련된 모든 것을
금지했음을
본다.
이것은
땅에 속한
모든 누림과 즐거움을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 104:15, 전 10:19).
모든 종류의 포도주를
금지하는 것은
땅에 속한
모든 누림과 즐거움을
금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즐겁게 하는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을
주의해야 한다.
땅에 속한 즐거움은
욕정이 가득한
행위와 의도를
일으킨다.
땅에 속한
누림과 즐거움은
나실인을 더럽힌다.

나실인은
포도주로 만든 식초와
포도즙과
생포도나
건포도를
금지해야 했다.
… 식초는
포도주로 분류되는데,
이것은
그 근원이
같기 때문이다.
포도주와
식초와
포도즙은
모두
금지된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인 사람은
땅에 속한
즐거움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절대적으로 분별된 것을
본다.
이것은
나실인의 절대성을
보여 준다.

 

신언노트, 2019 02 24

그분의 모든 백성이
 오늘날의
 나실인들이 되는
 (나사렛 사람들이 
 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갈망

 
그 인류 중에,
 그 유일한 나실인은
 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한 나실인은
 그분의 인성 안에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그분의 생활하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한 예표입니다:

그분의 사람의 생활하심 안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의 생활의
 (of … life; 생애의)
 모든 날들 동안
 버터(그 가장 부유한 은혜)와
 또 꿀(그 가장 달콤한 사랑)을
 드셨습니다;
그 아버지의
 이 가장 부유한 은혜와
 또 가장 달콤한 사랑은
그분으로 하여금
 그 아버지의 뜻의
 (of; …인, …에 속한)
 그 좋은 것들을
 (the good things;
 그 선한 일들을)
 선택하실 수 있게 하였고
 또 그 악을
 거절하실 수 있게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그 아버지의 뜻을
 선택할 수 있고
또 어떤 것을
 포기할 수 있거나,
 그 자신을
 부인할 수 있거나,
 또는 그 어려운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그 이유는,
그 사람 뒤에
 그 가장 부유한 은혜이시고
 또 그 가장 달콤한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누림의(of; …인)
크고 또 강화하는
 (reinforcing; 증강하는, 보강하는)
 그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백성이
 나실인들이 되는 것을
 갈망하십니다;
한 나실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
 (to God; 하나님을 향하여)
 절대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ultimately;
 최종적으로, 가장 멀리까지)
 거룩하게 되는 것,
 곧 분별되는 것이고
 (to be … separated;
 분리되는 것이고),
즉,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하여도
 또 그분의 만족
 ―예수님의 그 증거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하여도
 있지 않는 것입니다:

포도주와
 또 그것의 근원에 관련된
 어떤 것도(from; …에서도)
 절제함은
 (Abstaining;
 자제함은, 삼가함은)
 모든 종류들의
 땅에 속한
 누림과
 또 즐거움을
 절제함을
 의미합니다:

한 나실인은
 땅에 속한
 즐거움들의
 어떤 것에서부터도
 완전히(altogether; 전적으로)
 분별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매일
 그리스도를
 우리의
 새 포도주
 (하나님의
 기운 나게 하는
 [invigorating;
 활기 띠게 하는, 고무하는, 격려하는]
 생명과
 또 격려가 되는
 [cheering;
 힘을 북돋우는, 기쁘게 하는,
 환호{갈채, 응원, 위로}하는]
 사랑)으로
 누려야만 하고
그 결과(so that)
 우리가
 그분의 만족을 위한
 한 전제물로
 (奠祭物, as a drink offering;
 한 제주[祭酒]로서)
 하나님께
 부어질 수 있습니다.

그 머리를
 밀지 않음은
 (Not shaving;
 깍지[면도하지] 않음은)
주님의
 그 머리이심에
 (to the headship;
 그 머리의 권위에[그 책임자 자리에])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에 의하여
 임명되는
 (apppointed;
 지명되는, 정해지는)
 모든 대표(deputy; 대리, 대행) 권위[자]들에도
 거부하지 않고
 오직 절대적으로 굴복함을
 의미합니다:

“만물은
 그분 안에 연결되어
 존재합니다.
 (모든 것들이
 그분 안에
 결합합니다
 [cohere;
 서로 밀착합니다, 응집합니다,
 단결합니다, 일치합니다];
또한 그분은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또 그분께서
 그 몸, 곧 그 교회의
 그 머리이십니다)
… 이것은
 그분 자신께서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분 자신께서
 모든 것들 안에서
 그 첫 번째 위치를
 가지실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 골 1:17-18.

“머리를 붙들(고)
 … 온몸은
 마디와 힘줄을 통하여
 머리로부터
 풍성하게 공급을 받고
 함께 짜여,
 하나님께서 자라심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 머리를 붙잡고,
 그분께로부터
 그 몸 전체가,
 그 관절들과
 또 힘줄들의
 [sinews;
 건들의, 근육들의]
 수단에 의하여
 [by means of;
 부에 의하여, …에 의하여]
 부유하게 공급을 받고
 또 함께 짜여서
 (knit together;
 함께 굳게 결합되어),
 하나님의 그 성장과 함께
 자랍니다”
― 골 2:19.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지는 것은
굴복으로
 (with submission;
 항복[복종]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고,
한 굴복적인
 영(spirit),
 지위(standing; 서 있음, 신분),
 분위기(atmosphere; 느낌),
 또 의도를(intention; 목적을)
 가집니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한 사람이라면
 당신과
 또 당신의 장래를 위한
 한 큰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머리이심 아래에
 있는 것
 ―심지어
 어떤 사람,
 어떤 일,
 또는 어떤 환경 아래에
 있는 것은
한 큰 축복입니다.

굴복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의 혈족들의
 (of … blood relatives; 육친들의)
 그 죽음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고,
 오직 그의 분별 안에
 남아 있어
 하나님께
 (to God;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한 것은,
한 나실인이
 천연적인 사랑을(love)
 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천연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직 우리의 사랑이신
 그분으로
 (사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바울과 또 바나바 사이의
 그 문제는
 천연적인 관계들을 가지는(with)
 그 천연적인 생명에 의하여
 야기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의(its)
 천연적인 열정(enthusiasm; 열광),
 천연적인 애정(affection),
 천연적인 힘(strength),
 또 천연적인 능력을(ability) 가지는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의(of; …에게서의)
 각각의 모든 것들에서부터
 우리 자신들을 분별할
 필요가 있고
그 결과(so that)
 우리가
 그 영에 의하여 살고,
 그 영에 의하여 걸으며,
 또 그 영에 의하여 봉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유일한 증거를 위하여
 우리의 영 안에 계시는(in)
 그 영에 의하여
 각각의 모든 것들을
 할 수 있습니다(합니다).

한 죽은 사람 가까이에
 가지 않음이나
 또는 그의 곁의 한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음은
한 나실인이
 죽음에서부터 분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그 눈들 안에
 (in the eyes of God;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죽음입니다.

다른 종류들의 영적인 죽음이
 그 교회 생활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퍼질 수 있습니다
 ―야생의
 [wild;
 자연 그대로의, 사나운, 격렬한, 거친]
 죽음
 (짐승들의 그 사체들),
 순한
 [mild;
 온화한, 가벼운, 부드러운]
 죽음
 (가축의 그 사체들),
 또는 미묘한
 [subtle;
 감지하기 힘든, 음험한, 잠행성의, 간교한]
 죽음
 (기는 것들의 그 사체들)입니다.

죽음에서부터 구원받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생각을
 그 영 위에(on the spirit)
 두어야만 하고,
우리의 영에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의 영을
 돌보며,
 또 우리의 영을
 써야만(using; 사용해야만) 합니다.

죽음에서부터 구원받기 위하여,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by exercising;
 행사[발휘, 구사, 운용, 실행]하여,
 작용시켜, 써서, 훈련하여)
 기도함에 의하여
우리는 반드시
 “항사제(抗死劑)”로
 (anti-death; “반[反]-죽음”으로)
 가득 채워져야만,
 곧 생명 주시는 그 영이신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져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예기치 않은
 죽음의 상태에 의하여
 (by … deadness;
 생기 없음으로, 칙칙함으로, 무감각으로)
 더럽혀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주님께
 다시 분별함에 의하여(by; 의한)
 한 새로운 헌신과 함께하는(with; 함께)
 한 새로운 시작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안에
 두 나실인들의
 한 대조가 있습니다
 ― 사무엘과 또 삼손입니다:

사무엘은
 한 신실한 나실인의
 한 긍정적인 본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의
 그 마음의 갈망의
 한 반향
 (an echo;
 한 메아리[공명, 반복, 반응]),
 곧 한 말해 냄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수행함을 위한
사람의
 그 신성한 움직임과의
 한 동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그 노선 위에서
 그분과 하나였던
 한 사람인
 한나에게
 동기를 부여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한 사람을
 얻으실 수 있는 한,
그분께서는
 땅 위에
 한 길을
 가지십니다.

한나의 기도는
 한나의 기도에 대한(to)
 하나님의 응답을 가진
 하나님의 움직이심이
하나님의 갈망을
 성취함을 위하여
 절대적이었던
 한 나실인을
 산출하시는 것이었음을
 가리킵니다;
한 나실인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헌신되는
 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그 머리로 취하는,
 곧 하나님을
 그의 남편으로 여기는
 한 사람이며,
또 세상적인 즐거움들을
 누림 안에
 흥미를 가지지 않는
 한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땅 위에서
 하나님과 하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그 대행자
 (the acting God;
 그 행동하는 하나님),
곧 땅 위에 있는
 그분의 백성 위에
 다스리시는
 하늘 안에 계시는
 바로 그 하나님의
 그 대리자로서
 (as … the representative)
 사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심 안에서
 (In … ordination;
 배치 안에서, 섭리로)
 사무엘은
 한 새로운 제사장과
 또 한 신언자였는데,
그의 말함은
 혁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not through revolution;
 변혁[회전, 순환]을 통하여가 아니라)
 오직 신성한 계시를 통하여,
 그 시대를 바꾸었고
 (changed;
 전환시켰고, 대체하였고),
 그 왕정을
 (the kingship;
 그 왕권을[왕위를], 왕의 그 신분을)
 가져왔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을
 성취하심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헌신되는
 한 나실인,
곧 공식적이고 또 형식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어떤 사람들도 대신하는
 한 자원자로서
 사역하였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 제사장으로서
 사역하였고
신선하지 않고
 (stale;
 싱싱하지 않고, 오래되고, 퀴퀴하고,
 진부하고, 무효가 되고)
 또 하락한
 (degraded;
 타락한, 강등된, 퇴화한)
 그 제사장 체계를
 (the … priesthood;
 그 제사장 직분을[신분을, 집단을])
 대신하였습니다.

사무엘은
 한 신언자로서
 사역하였고
여호와의 그 말씀이
 드물었고
 (rare; 진귀[희귀]하였고)
 또 이상들이
 널리 퍼지지 않았던 때에
하나님의 그 말씀을
 말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왕의 그 신분의
 (the kingship;
 그 왕위의[왕권의, 왕정의])
 그 실재 안에서
 한 사사(士師)로서
 (as a judge;
 한 재판관으로서, 한 심판으로서)
 사역하였고
오래되고(old; 낡고)
 또 신선하지 않은
 그 제사장 체계에 의하여
 그 백성을 재판함을
 (the judging;
 판결함을, 심판함을, 판단함을, 통치함을)
 대신하였습니다.

사무엘은
 기도의 한 사람으로서
 사역하였고,
하나님의 선민이
 하나님의 그 길 안에
 지켜지도록
 기도하였는데
이는(that)
 그들 안에 있는
 그분의 뜻인(of; …의)
 하나님의 갈망이
 성취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마음에 따르는
 (according to; 일치하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의 안에
 복사되었고,
 또 그는
 순수했으며
 또 단일했습니다
 (was … single; 단순했습니다).

사무엘의
 행함, 생활, 또 일뿐 아니라
 그의 전체 존재와 또 인격이,
 하나님께 일치하였습니다;
그의 존재와
 또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였습니다;
그는
 그 땅에 위에 있는
 하나님의 그 대행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사무엘의 고려였습니다
 (consideration;
 고려 사항[이유, 동기, 숙고, 고찰]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생각이나 또는 고려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자기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not self-seeking;
 이기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코
 그 자신을 위하여
 (for himself; 스스로)
 어떤 것을 얻으려고
 추구하지 않았습니다(never sought).

그는
 하나님의 마음과
 또 하나님의 선민 외의
 어떤 것을 위한 마음도
 (heart for anything)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의
 한 반영이었고
 (a reflection;
 한 상[모습]이었고, 그림자였고),
또 그의 생활과 또 일함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에서부터 밖으로
 (out of whatever …)
 수행함을 위하여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그의 자손들을 위한
 한 왕국을 건축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왕국을 가져오시는 것이
 쉬웠습니다;
이와 같이
 (thus; 이렇게 하여, 그러므로),
 사무엘은
 그 시대를 전환하였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그의
 특정한
 (particular;
 독특한, 까다로운)
 환경 안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to stand for;
 의미하는 것이, 지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Although),
그는
 하나님의 이익을 돌보았고
 또 그 시대를 전환했습니다;
구약에 따르면,
 사무엘은
 하나님을 위하여
 또 하나님의 이익을 위하여
 있음 안에서
 (… 이익을 위함 안에서)
 모세와 나란히 세워집니다
 (is ranked with Moses;
 모세와 같은
 순위가 매겨집니다
 [등급으로 분류됩니다]).

삼손은
 한 나실인의
 한 부정적인 예입니다:

그의 기원은(origin; 근원은)
 여호와의 그 천사의
 (the Angel of Jehovah)
 그 나타나심에 의하여
 개시된
 (initiated; 시작된, 착수된)
 한 기적이었습니다.

삼손은
 어머니의 자궁(womb) 안에서
 신성하게 되었고
 (was sanctified; 정화되었고, 바쳐졌고)
 한 나실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
 (according to … ordination;
 배치[섭리]에 따라)
 자랐고
 또 깨끗했으며
 (was clean; 순결했으며, 흠 없었으며)
 또 순수했습니다.

삼손은
 그 거룩하신
 곧 경륜적이신
 [그] 영으로서의
 하나님의 [그] 영에 의하여
 능력을 받았습니다.

삼손은
 생명의 그 영 안에서가 아니라
 능력의 그 영 안에서
 움직였던
 한 사람의
 한 실례입니다(an illustration);
그는
 매우 강력했지만
 (was very powerful;
 정말 힘이 있었지만),
그에게서
 우리는
 생명에 속한 어떤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을
 접촉하지 않음 안에서
 또 육체적인 정욕들 안에
 (lusts; 욕정들에)
 탐닉함 안에서
 (in indulging; 빠짐[제멋대로 함] 안에서)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한 배우자를 찾음 안에서
 참되지 않았습니다
 (was not genuine;
 진실하지[진심 어리지,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여자들을 접촉함은
 자신의 정욕들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to indulge;
 충족시키기 위한[기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의하여
 능력을 받았지만,
그는
 그의
 정욕 안에의
 탐닉(indulgence; 빠짐, 방종, 관대) 때문에
 극도로
 (to the uttermost;
 최대한, 가장 멀리까지)
 손상되었습니다
 (was damaged;
 상처를 입었습니다).

결국,
 여호와께서
 그를 떠나셨고,
또 그는
 그의 육체의
 그 정욕을
 억제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한 비참한 최후에
 (to … ending;
 끝에, 결말에, 마지막에,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한 나실인은
 그의 위에
 급히 움직이시는
 (rushing;
 돌진하시는, 갑자기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그 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나실인은
 하나님의 마음의
 한 반영인
 한 마음을
 필요로 합니다.

 

1일

민 6: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여
자신을
여호와에게로
분별하고자 할 때에는

사 7: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까지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성경의 예표에 따르면,
인류 가운데
유일한 나실인은
주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나실인은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나실인은
인성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 사신
주 예수님을
의미한다.

사복음서를 읽어 보면,
밖으로 나타난
주님의 생활이
얼마나 놀랍고 완전한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복음서를 통해서는
주님께서
어떻게
그토록 탁월한 생활을
나타내 보이실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다.
… 이사야서 7장 15절은
주님께서
그러한 생활을
하실 수 있었던
이유를
말해 주고 있다.
주님은
어떤 이유로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하실 수 있었는가?
주님은
어떻게 해서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실 줄
아셨는가?
그분은
어떻게 해서
사람의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원하실 줄
아셨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이사야서 7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14절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말씀이
주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15절을
놓쳐 버린다.
… 14절이
주님을 가리켜
말한 것일 뿐 아니라
15절도
주님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15절은
주님께서
일생 동안
버터와 꿀을
드셨다고
말한다.
주님은
일생 동안
버터와 꿀을
드셨기 때문에
선한 것들을
선택하고
악한 것들을
거절하실 수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그분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실 수 있었다.

버터와 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 버터는
가장 기름진 음식이고,
꿀은
가장 달콤한 음식이다.
주 예수님은
일생 동안
가장 기름지고
가장 달콤한
음식을
드셨기 때문에
능히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하실 수 있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기름진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가장 달콤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항상
그리스도 앞에
풍성한 은혜를
두셨고,
그분으로 하여금
달콤한 사랑을
맛보게 하셨다.
이것으로 인하여
그분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악한 것을 버리고
선한 것을 선택하실 수 있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서
버터와 꿀을
드셨으며,
어떻게 악한 것을 버리고
선한 것을 선택하셨는가를
보기로 하겠다.

주님은
열두 살 때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부모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절기가 끝나자
부모님은 돌아갔으나
그분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머물러 계셨고,
그분의 부모님은
그것을 몰랐다.
나중에 예수님의 부모님은
그분을 찾으러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그들은
사흘이 지나서
그분을
성전에서 만났다.
그분의 어머니가
“얘야,
왜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아버지와 내가
너를
얼마나 애타게 찾았는지
모른다.”
(눅 2:48)
라고 말했다.
주님은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라고 대답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일
(직역하면, 내 아버지의 것들―역자 주)
가운데 있어야 하는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눅 2:49)
주님은
버터와 꿀을
드셨다.
주님은
열두 살 때에도 이미
아버지를 아셨다.
그분께는
하늘에 속한
버터와 꿀이 있었다.
그분은
가장 기름지고
가장 달콤한 것을
얻으셨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생활하셨다.
만일 우리가
주님이었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부모님은
나사렛에 돌아가셔서
목수의 일을 하시고
집안일을 하십시오.
저는
돌아가지 않고
성전에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대답을 하시고
증언하신 후
부모님과 함께
나사렛에 돌아가
부모님께 순종하셨다.
그분께서
어려운 것을
선택하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름지고
가장 달콤한 것을
그분으로 하여금
맛보게 하셨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늘
주님을
괴롭게 한
사람이었다.
남의 집에
포도주가 모자랐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께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습니다.”
(요 2:3)
라고 말했다.
주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마리아는
와서
예수님께
말하려고 하였다
(마 12:46).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내려가셨다.
그리고 나사렛에 돌아오셔서
부모에게 복종하시며 지내셨고”
(눅 2:51)
라고 기록한다.
이것이
주님의 선택이었다.
이것은
다른 이들의 경우에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 그러나 그분은 기꺼이
부모님과 함께 돌아가셔서,
그들과 함께 살기를
선택하셨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실 수 있던 이유는
버터와 꿀을
드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선택하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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