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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하나님께서 영광의 그룹들 사이에서 말씀하심

God’s speaking
from between the Cherubim of Glory
영광의 그 그룹들(그 지품 천사들; 智品天使)
사이에서부터의
하나님의 말씀하심

주님은
사람이
그의 동반자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마주 대하시고
말씀하셨다
― 출 33:11, 민 12:7-8.

하나님과 모세는
위대한 사업에서
동일한 일에 참여하고
공동의 관심사를 가지는
동반자이자
동료이자
동업자였다.

모세는
하나님과 친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가 있었다
― 출 33:14.

출애굽기 24장
15절부터 18절까지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빛나는 영광이 있는
지성소 안에 있었다.

호렙산과 관련해서
적어도 세 부류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거리에 있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자손은
산기슭에 멀리 떨어져 서서
떨고 있었다
― 출 20:18.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칠십 명의 장로들은
산 위에 멀찍이 서서
경배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 출 24:1, 9.

모세는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의 영광 아래서
그분을 주입받으며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인
성막에 대한 이상을
보고 있었다
― 출 24:13, 16상, 25:1, 8-9.

이 세 장소는
성막의 세 부분인
바깥뜰, 성소, 지성소와
일치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정도에
서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모세가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의 영광 아래 있으면서
하나님에게서
계명을 받은 것에 관한
출애굽기 24장에 나타난
원칙은,
모세가
회막에서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는 것에 대해 말하는
민수기 7장 89절에 나타난
원칙과 동일하다.

모세는
여호와와
말씀을 나누려고
회막에 들어갔을 때,
증거궤위의
속죄 덮개 위에서,
곧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 민 7:89, 출 25:17-22.

속죄 덮개는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그분의 구속받은 백성과
만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장소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 출 25:22, 민 7:89.

속죄 덮개 위의 그룹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며
(겔10:18)
‘영광의 그룹들’이라고
불린다
(히 9:5).
따라서 속죄 덮개 위의 그룹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요 1:14).

두 그룹은
속죄 덮개와
한 덩어리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속죄 덮개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비추어 나오고
그리스도 위에 머물러
증거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 출 25:19, 요 1:14, 고후 4:4, 6.

이러한 하나님의 나타나심,
곧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증거이다
― 출 37:7-8.

숫자 2는
증거의 수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증거가 된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인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 위에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
이러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인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증거이다.

그룹들과 속죄 덮개는
순금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그리스도의 빛남이
신성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 출 25:17-18, 히 1:3.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여호와는
그룹들 사이에서
보좌에 앉으셨고,
거기에서부터
빛을 비추어 내셨다
― 시 80:1, 99:1, 삼상 4:4, 삼하 6:2.

속죄 덮개 위에서,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들 사이에서
하나님은
모세와 만나시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 출 25:22.

하나님께서
속죄 덮개 위에서,
그리고 그룹들 사이에서
그분의 백성과 만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화해시키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증거이신
화해시키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표현된
영광 가운데서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 고후 3:8-11, 18.

하나님께서
그룹들 사이에서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 가운데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 민 7:89, 출 25:22, 시 80:1, 3, 99:1.

하나님은
영광 안에서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이 영광은
그리스도의 빛남이다
― 고후 4:4, 6.

그룹들이 있는
속죄 덮개,
곧 화해 장소는
다름 아닌
우리의
사랑스러우신
주 예수님 자신이다
― 롬 3:25.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이 보배로우신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신다.

실지로,
이렇게 빛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 히 1:3.

희생 제물의 피가 뿌려진
속죄 덮개는,
인성 안에서
구속하시는 그리스도
(법리적인 구속을 이루신 그리스도)와
신성 안에서
빛나시는 그리스도
(유기적인 구원을 이루시는 그리스도)가
타락한 죄인들이
의로우시고 거룩하시며 영광스러우신
하나님과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장소이심을
묘사해 준다
― 레 16:14-15, 29-30.

속죄 덮개 위의
그룹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성으로
빛나시는 것을
상징하고,
속죄 덮개 위에 뿌려진
피는
구속을 이루기 위한
그분의 인성을
상징한다.
이제 우리와 하나님은
구속하시고 빛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만나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

속죄 덮개 위에서
또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남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분의 마음의 갈망을
알 수 있으며
그분에게서
이상과 계시와 지시를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지성소 안에서
주님을 만날 때,
주님은
그분의 온 존재를
우리에게
주입해 주신다
― 고후 3:18.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위의
속죄 덮개는
히브리서 4장 16절에 나오는
은혜의 보좌와
동일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 히 10:19.

지성소 안에
들어가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은혜의 보좌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 히 4:16.

우리가
그러한 장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담대함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담대함을 가진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느 때든지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가진다.

오늘날
지성소는
주 예수님께서 계신
하늘에 있지만
(히 9:12, 24),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 있을지라도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다.

그 비결은
우리의 영이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 안에도 계신다
― 딤후 4:22.

하늘에 속한
사다리이신
(창 28:12, 요 1:51)
그분은
우리 영을
하늘과 연결하시고,
하늘을
우리 영 안으로 가져오신다.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돌이킬 때마다,
우리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은혜의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지성소 안에
들어갈 때마다
우리는
휘장 안에 있는
은혜의 보좌 앞에 가서
하늘들에 계신
승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긍휼을 받고
은혜를 입는다
― 히 4:14, 16, 6:19-20.

의심할 것 없이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온 우주에 대해서는
권위의 보좌이지만,
믿는 이들인 우리에게는
은혜의 보좌가 되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진
지성소 안에 있는
증거궤 위의
속죄 덮개로
상징되었다
― 출 25:17, 롬 3:25,
레 16:15, 히 9:3, 5, 12.

언약궤의 덮개,
곧 속죄 덮개는
은혜의 보좌를
상징한다.
속죄 덮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은혜의 보좌이다
― 민 7:89, 출 25:17-22.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과 만나시고
그들과 친밀히 대화하신다
― 출 25:21-22, 민 7:89.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과 친밀히 대화한다
― 히 4:16, 10:19.

하나님은
은혜의 보좌로부터
말씀하시며,
지성소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소인
은혜의 보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표정을 보며,
그분의 임재를 누리고,
그분의 경륜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된다.

은혜의 보좌에서
우리는
보좌에 계신 분을
바라보면서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속죄 덮개의 실재인
은혜의 보좌는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과
일치하게 된다
― 히 4:12, 16, 7:25-26, 8:1, 13:20-21.

우리가
지성소 안에 있는
은혜의 보좌 앞에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때문이다
― 고후 3:18, 4:4, 6.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 성 전체는
등이신 어린양 안에서
비추는 빛인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지성소일 것이며,
우리는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를 누리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보고,
그분의 비춤 아래 살며,
영원무궁히
왕으로서 다스릴 것이다
― 계 21:2-3, 10-11, 16, 22-23,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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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하나님께서 영광의 그룹들 사이에서 말씀하심”

6일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님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계 21:23
그 성에는
그 성을 비춰 줄
해와 달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을 밝게 하며,
그 성의 등이
어린양이기 때문입니다.

성전 안에는
지성소가 있고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있다.
언약궤의 덮개인
속죄 덮개는
은혜의 보좌를
상징한다
(출 25:17, 21).
언약궤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그 언약궤는
지성소 안에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 안에 계시기 때문에
(딤후 4:22),
오늘날 우리의 영은
지성소이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어디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가?
지성소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소인
은혜의 보좌에서이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십자가 주위에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듣기가 어렵다.
그러나 은혜의 보좌
곧 속죄 덮개에
나아올 때마다
우리는
즉시
신성한 음성을
들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소,
곧 은혜의 보좌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표정을 보며,
그분의 임재를 누린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그분의 경륜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우리를
바깥뜰에 있는
제단으로부터
지성소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으로
전환시킨다.

은혜의 보좌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보좌 위에 계신 분께
기도하고 경배하며
그분을 바라본다.
우리는
그분께
찬양과 감사를 드린다.
이 보좌로부터
생명의 강이
흘러나온다.
우리가
이곳에
얼마 동안 머문다면,
은혜의 보좌로부터
무언가가
우리 안으로 흐르고,
우리를 통과하며,
우리에게서
흘러 나간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공급하는 은혜인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긍휼을 받고
은혜를 입어서
때맞추어 도움을 얻는다
(히 4:16).
은혜의 보좌에 나옴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제사장 직분에
반응하게 된다.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중보 기도에
반응하게 된다.
그분의 중보 기도와
우리의 기도는
하늘과 땅 사이의
왕래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하는 것을 통해
점점 변화된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의
‘거울처럼
…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는
헬라어 원문에서
한 단어이다.
거울은
한 면으로
바라보고,
다른 한 면으로
바라본 것을 반사한다.
그것은
거울의
두 가지 기능이다.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주님을 보는 것이고,
반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주님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은
이러한 변화의 목표가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와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임을
말해 준다.
변화하여
그분과 똑같은 형상이 된다는
의미는
우리가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와
점차적으로
같은 형상을 이루어
그분과 같아진다는 것이다
(롬 8:29).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할 때,
주님은
그분의 존재와
그분께서 성취하신 것의
요소들을
우리에게
주입하시고
분배하신다.
결국 우리는
그분의 생명의 능력과
그분의 생명의 본질에 의해
점점
신진대사적으로 변화되어
그분의 생명의 모양을
가지게 된다.
또한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됨으로써
점차적으로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

지성소 안에 있는 빛은
영원한 영광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다.
마찬가지로,
영원 미래에
거룩한 성은
해나 달이
필요하지 않을 것인데,
이는
하나님 자신이
빛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 성 전체가
지성소일 것임을
말해 준다.

빛이신 하나님과
등이신 어린양의
영광은
영원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의
빛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성 안에는
자연의 빛인
해나
사람이 만든
어떤 등의 빛도
필요하지 않은데,
이는
하나님 자신께서
빛이 되시고
그리스도께서
등으로서
하나님을 비추어 내어
성 전체를
밝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안에서
모든 것이심을
의미한다.

 

5일

히 4:14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계시니,
우리가 시인한 것을
굳게 붙잡도록 합시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받고
은혜를 입어서
때맞추어 도움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속죄 덮개 위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남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와 만나실 수 있고
우리와 이야기하실 수 있다.
이곳은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마음의 갈망을
알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이곳에서
바울은
완성하는 사역의 계시를
받았다.
우리는
매일의 체험 가운데서
속죄 덮개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하나님과 만날
필요가 있다.

지성소 안에서
주님과 시간을 보낼 때,
우리는
그분의 온 존재를
주입받는다.
우리는
한 청년이
저명한 대학교수와
한 시간 동안 대화하는 경우로
이것을
설명할 수 있다.
그 청년은
저명한 대학교수 앞에서
시간을 보낸 후에,
… 무의식중에
그 교수의 말하는 방식을
모방할 수도 있다.
하물며 우리가
한 시간을 들여
주님과 교통한다면
주님은 얼마나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주입하시겠는가!

속죄 덮개인
언약궤의 덮개 위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운 통치에
조금도 위배되지 않고서,
심지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언약궤 덮개 위에 드리워진
그룹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그분의 의로운 율법을
어긴 사람들과
만나실 수 있다.
요구를 하는
율법이 덮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만족되므로
하나님은
죄인들과 말씀하실 수 있고,
이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가지고
그분에게서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속죄 덮개는
은혜의 보좌와
동일하다
(히 4:16).

히브리서 10장 19절은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다고
말한다.
지성소 안에
들어가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은혜의 보좌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러한 장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담대함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담대함을 가진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일 년에 하루만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구약의 대제사장과는 달리
어느 때든지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가진다.

오늘날
지성소는
주 예수님께서 계신
하늘에 있지만
(히 9:12, 24),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 있을지라도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다.
그 비결은
히브리서 4장 12절에
언급되어 있는
우리의 영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지만
또한 우리의 영 안에도
계신다
(딤후 4:22).
하늘에 속한
사다리이신
(창 28:12, 요 1:51)
그분은
우리의 영을
하늘과 연결하시고,
하늘을
우리의 영 안으로
가져오신다.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돌이킬 때마다,
우리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은혜의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을 통해
지성소 안에
들어갈 때마다
우리는
휘장 안에 있는
은혜의 보좌 앞에 가서
하늘들에 계신
승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긍휼을 받고
은혜를 입는다
(히 4:14, 16, 6:19-20).
히브리서 4장 16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받고
은혜를 입어서
때맞추어 도움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라고 말한다.
의심할 것 없이
은혜의 보좌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이다
(계 4:2).
하나님의 보좌는
온 우주에 대해서
권위의 보좌이다
(단 7:9, 계 5:1).
하나님은
이 보좌에 앉으셔서
우주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정의 보좌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에게
그것은
지성소 안의
(히 9:3, 5)
증거궤 위에 있는
(출 25:17, 21, 롬 3:25)
속죄 덮개(시은좌)로 상징된,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진
(레 16:15, 히 9:12)
은혜의 보좌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과 만나시고
그들과 친밀히 대화하신다
(출 25:21-22).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과 친밀히 대화한다.

 

4일

고후 4:6
왜냐하면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라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빛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밝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히 1:3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고,
하나님의 실질의 표현이십니다.
그분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어 주시고
보존해 주시며, …

우리는
출애굽기 25장에서
그룹들의
형태나 치수나 무게에 관한
말을 듣지 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빛나는 영광이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룹들을 설명할 수 없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나는 영광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룹들이
얼굴과 날개를 가졌다는 사실에서
이 영광이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닌
살아 있는 어떤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살아 있다.
우리는
이 영광이
얼굴과 눈과 날개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체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는
영광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고
이 영광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가진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영광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따라서 출애굽기 25장에 있는
속죄 덮개를 통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속죄 덮개가
신성한 영광의 빛남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하나님께서
이 영광 안에서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룹들이 있는
속죄 덮개가
빛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을
필요가 있다.
속죄 덮개는 또한
그리스도의 빛남인
하나님의 영광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얼굴과 눈과 날개들을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다.
이것에 대한
합당한 이해를 가지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에게서 온
빛이 필요하며
어느 정도 분량의
영적인 체험이 필요하다.
주님의 빛 비추심이 없다면,
우리가
이 절들을
반복해서 읽는다 할지라도
그 의미를
조금도 알아낼 수 없다.
그러나 빛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그룹들이 있는
속죄 덮개가 바로
우리의 사랑스러운
주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이 보배로우신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신다.
실지로,
이렇게 빛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당신 자신이 바로
이 속죄 덮개이십니다.
주님,
당신이 없다면
하나님은
저를 만날 장소가 없으시며
제가
그분을 만날 장소도 없습니다.
주님,
속죄 덮개이신 당신이 없다면,
하나님은
저를 만나실 수 없고
영광 안에서
제게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속죄 덮개가
순금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지적했다.
거기에는
주 예수님의 인성을 예표하는
아카시아 나무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확실히
그분의 인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구속을 위한 것이고,
그분의 신성은
빛 비춤을 위한 것이다.
속죄 덮개 위의
그룹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성으로 빛나시는 것을
상징하고,
속죄 덮개 위에
뿌려진 피는
구속을 이루기 위한
그분의 인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단지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사람이시기도 한
그리스도,
심지어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을 본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 안에서
빛을 내시지만,
사람이신 그분은
피로서 상징된
그분의 인성 안에서
구속을 이루셨다.
이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은
구속하시고 빛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만나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이
속죄 덮개이신 그리스도,
즉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만날 수 있는 곳이신
그리스도이다.

〈흠정역〉은
구약에서
속죄 덮개라는 말 대신에
‘시은좌(施恩座)’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좌’라는 말은
궤의 덮개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이야기하실 때
앉기 위한
자리였다는 것을
함축한다.
‘시은’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자비를 보여 주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상 궤의 덮개는
자비의 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의
빛남이 있고
그리스도의 인성의
구속이 있는
화해 덮개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우리의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그분과
이야기할 수 있다.
이곳은 바로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인성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그분의 피를 흘리셨고,
신성 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신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구속하시고 빛나시는 분이 되시어,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께서
타락한 죄인들과
만나실 수 있는
장소가 되신다.

 

3일

고후 3:8-9
그렇다면 그 영의 사역은
더욱 영광 안에 있지 않겠습니까?
유죄 판결을 내리는 사역에
영광이 있다면,
의의 사역에는
영광이 더욱 넘칠 것입니다.

출애굽기 25장 22절 상반절은
“내가
거기에서
너와 만나고”
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화해시키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백성과 만나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22절에서
하나님은 또한
“속죄 덮개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할 모든 것을
너에게 말하겠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증거이신
화해시키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표현된
영광 가운데서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룹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비추어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룹들 사이에서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 가운데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 가운데서가 아닌
그 외의 어떤 장소에서도
그분의 구속받은 백성과
만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다른 장소나
다른 상태에서
우리와 만나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실 때마다,
그 만남은
그분의 영광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체험으로
증언할 수 있다.
하나님과 만날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영광 가운데,
즉 궤의 덮개 위에 있는
그룹들이 상징하는
그러한 영광 가운데
있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가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었던 날,
우리는
영광의 영역 안으로
이끌렸다.
하나님은
우리와
어둠 속에서
결코 만나지 않으신다.
반대로,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영광 안에서 만나시고
영광의 그룹들 사이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집회에서
누군가가 말하는 것에
귀 기울일 때,
그 말이
주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영광 안에 있다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역을 통해
공급될 때마다,
우리는
속에서
영광을 느낀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뛰어난 언변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그들의 말을 들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느낌을 가지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의 언변에 탄복하고
그들의 지식에 감탄하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사역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언변이나 지식에
매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느낌에
매혹된다.
우리가
집에 돌아온 후에도
영광이
우리를 따를 것이다.
수년이 지나도
우리는
그 집회에서 느꼈던
영광을
여전히 회상할 것이다.
체험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 가운데서
우리와 만나시고
그분의 영광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말씀하실 때조차도
그분의 영광 안에서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실 때의 영광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빛남이다.
그룹들은
빛을 내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이렇게 빛나시는 그리스도는
어떤 그리스도이신가?
우리는
궤가
안팎이 금으로 싸인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았다.
아카시아 나무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예표하고,
금은
그분의 신성을 상징한다.
속죄 덮개는
순금으로 만들어졌다.
그것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조금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그리스도의 빛남이
신성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은
이 빛남을 위한
근거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빛남의 근거는
궤를 만들기 위해 사용된
아카시아 나무이다.
그것은
아카시아 나무를 지닌
금이 아니라
금을 지닌
아카시아 나무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성을 근거로 해서
신성을 표현하신다.
오늘날
우리의 체험에서도
그리스도의 신성한 본성을
표현하려면
예수님의 인성이
필요하다.

출애굽기 25장 17절은
우리에게
속죄 덮개의
길이와 너비는 말해 주지만
두께는 말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궤의 덮개의
무게를 알지 못한다.
두께가 나타나 있지 않아
무게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무게를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무게가 얼마인지를
말할 수 없다.
체험적으로 말하면,
그분의 무게는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지니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무게가
얼마나 되느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많이 지니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어떤 성도들이
극히 적은 양의 그리스도만을
지니고 있을까 봐
염려된다.

 

2일

민 7:89
모세는
여호와와
말씀을 나누려고
회막에 들어갔을 때,
속죄 덮개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분께 말씀드렸다.

시 80:1
…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민수기 7장에서
제물을 드리는 것은
모세에게
하나님과 대화할
시간을 주었다.
“모세는
여호와와
말씀을 나누려고
회막에 들어갔을 때,
속죄 덮개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분께 말씀드렸다.”
(민 7:89)
증거궤 위의
속죄 덮개에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대화가 있었다.
이 대화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하나님과 사람이
그러한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속죄 덮개는
로마서 3장 25절과
히브리서 9장 5절에 언급된
화해 장소와 같은 것으로서
궤의 덮개를
지칭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의
덮개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그분의 구속받은 백성과
만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장소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출 25:22).
… 덮개는
순금으로 만들어졌는데,
순금은
그리스도의
순전하게 신성한 본성을
상징한다
(출 25:17).

두 그룹이
속죄 덮개와
한 덩어리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속죄 덮개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비추어 나오고
그리스도 위에
머물러
증거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요 1:14, 고후 4:4, 6).
그룹의 형태, 크기, 무게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비추신 영광은
측량할 수 없으며
비밀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출 25:19).
화해 덮개 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히 9:5)
두 그룹이 있었다
(출 37:7-9).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
바로 영광이다.
우리는
영광을
전기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는
전등의 빛에
비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비춰 내실 때
그분은
영광이 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

두 그룹은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상징한다.
… 출애굽기 37장은
우리에게
단지 한 그룹이 아니라
두 그룹이 있었다고
말한다.
숫자 ‘2’는
증거의 수이다.
… 그리스도 위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인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인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하나님의 증거이다.
이 진리에 담긴
사상과 의미는
매우 풍성하고 깊다.

그룹들의 날개가
속죄 덮개를 덮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표현되어
완전한 증거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히 1:3상, 엡 3:21…).
그룹들의 얼굴은
서로 마주 보며
속죄 덮개 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을
지켜보며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 25:20).

그룹들과 속죄 덮개가
순금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출 25:17-18)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히 1:3상)
그리스도의 빛남이
신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으로 만들어진
속죄 덮개를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궤 위에
얹은 것은
(출 25:10)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성한 본성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근거가
그리스도의 신성이 아니라
그분의 인성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출 25:21).

하나님께서
속죄 덮개 위에 있는
그룹들 사이에서
그분의 백성과 만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화해시키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증거이신
화해시키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표현된
영광 가운데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후 3:8-11, 18).
그러므로 속죄일에
희생 제물의 피가 뿌려진
속죄 덮개는
(레 16:14-15, 29-30)
타락한 죄인들이
의로우시고
거룩하시며
영광스러우신
하나님과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
은혜이신 하나님을
주입받고
그분에게서
이상과 계시와 지시를
받을 수 있는
장소이신,
인성 안에서 구속하시는
그리스도와
신성 안에서 빛나시는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출 25:22).

 

신언노트, 2019 03 17

영광의 그 그룹들 사이에서부터의
하나님의 말씀하심

주님께서는
 한 사람이
 그의 동반자에게
 (to his companion;
 그의 동지에게[동료에게, 동행에게,
 친구에게, 벗에게, 짝에게, 도우미에게])
 말하는 것과 똑같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또 모세는
 그 같은 경력 안에
 (in the same career;
 그 동일한 직업[직장 생활, 이력, 경과] 안에)
 관련된
 (involved;
 연루된, 포함된, 참여된)
 또 한 큰 기업 안에
 (in a great enterprise;
 한 큰 사업[기획, 계획] 안에)
 공통의 한 관심사를
 (a common interest;
 한 공동의 이익을[공유의 한 이해관계를])
 가지는
 동반자들,
 곧 동료들
 (associates;
 동지들, 친구들, 제휴자들)),
 곧 동업자들이었습니다
 (partners;
 사업 파트너들[공동 경영자들, 동반자들, 동료들,
 협력자들, 애인들, 배우자들, 배필들]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친밀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한 사람이었고,
 그는(who)
 하나님의 마음에 따랐으며
 (was according to …),
 또 그는(who)
 하나님의 마음을
 만질 수 있었습니다
 (could touch …;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thus),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한 최대한의 정도까지
 (to a full extent;
 한 완전한[최고의, 가득 찬]
 크기까지[한도까지, 범위에 이르도록])
 가지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4장
 15절부터 18절까지 안에서
모세는
 그 지성소 안에 있었고,
 거기에는
 여호와의 그 현현(顯現) 영광이
 (the shekinah glory;
 여호화의 그 빛나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호렙산과의 관련 안에서
 (in relation to; …에 관련되어)
 각각 다른 거리들에
 (at different distances)
 적어도 세 부류들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대부분은
 그 산의
 그 기슭에
 (at the bottom;
 맨 아래에)
 있었고
 멀리 떨어져(at a distance)
 서 있었으며
 또 떨고 있었습니다.

아론, 나답, 아비후와
 또 칠십 명의 그 장로들은
 그 산 위에(on)
 있었고
 멀리 떨어져
 경배하였으며
 또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and watching;
 또 주시하고[구경하고, 기다리고, 대기하고,
 망보고, 불침번을 서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 산꼭대기 위에(on)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 아래에서
 그분으로(with)
 주입받고 있었으며
 (being infused;
 불어넣어지고[부어 넣어지고,
 스며들게 되고] 있었으며)
 또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인
 그 성막에 관한
 그 이상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이 세 장소들은
 (locations; 위치들은)
 ―그 성막의
 그 세 부분들
 (그 바깥뜰, 그 성소, 또 그 지성소)과
 일치하고―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그분과의 교통의
 (of; …에 대한, …에 있어서)
 각각 다른 정도들이 있다는
 그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illustrate;
 실례를 통하여[삽화를 이용하여]
 설명합니다).

그 산꼭대기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 아래에
 하나님께로부터
 그 계명들을 받아들이는
 모세와 함께하는(with; …를 가지는)
출애굽기 24장 안에 있는
 그 원칙은
민수기 7장 89절 안에 있는
 그것과(that) 같은데,
이는
 그 회막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모세와 관련됩니다.

모세가
 그 회막 안으로 갔고
 하나님과
 이야기했을 때,
그 증거의 그 궤 위에 있었던
 그 속죄 덮개 위에서부터,
 곧 그 두 그룹들 사이에서부터
 그에게 말씀하시는
 그 목소리를
 (the voice; 그 음성을)
 그가 들었습니다:

그 속죄 덮개는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구속받은 백성과
 만나시고
 또 은혜 안에서
 (in grace; 은혜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그 장소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 속죄 덮개 위에 있는
 그 그룹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또 ‘영광의 그룹들’이라고
 불립니다;
이와 같이,
 그 속죄 덮개 위에 있는
 그 그룹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두 그룹들은
 그 속죄 덮개와
 한 부분이었습니다
 (one piece;
 한 조각이었습니다, 한 개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 속죄 덮개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from)
 또 그리스도 위에(upon)
 밖으로 빛나서
 (shine out to be …;
 확 비추어서)
 한 증거가 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이 나타나심,
 곧 하나님의 이 영광이,
 하나님의 그 증거입니다.

둘은
 증거의 그 숫자입니다;
하나님의 그 영광이
 하나님의 그 증거가 됩니다.

그리스도 위에
 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그 나타나심이 있고,
이는(which)
 하나님의 그 영광이며,
 또 하나님의 그 영광인
 이 나타나심이
 하나님의 그 증거입니다.

그 그룹들과
 또 그 속죄 덮개는
 순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그 광채이신
 그리스도의
 그 빛남이
 신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그 목자께서는,
 그 그룹들 사이에서
 왕좌에 앉히셨고,
 또 거기에서부터
 그분께서
 밖으로 빛나셨습니다
 (shined forth;
 멀리[앞으로] 비추셨습니다).
 
그 속죄 덮개 위에서부터,
 곧 그 증거의 그 궤 위에 있었던
 그 두 그룹들 사이에서부터,
하나님께서
 모세와 만나셨고
 또 모세와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속죄 덮개 위에서
 또 그 그룹들 사이에서부터
 그분의 백성과 만나셨고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그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화해시키시는
 (propitiating;
 달래시는, 가라앉히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분의 증거이신
 그 화해시키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표현되는
 그 영광 안에서
 우리와 만나시고
 또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그 그룹들 사이에서부터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께서
 그분의 영광의
 그 한가운데 안에서
 (in the midst of;
 그 중앙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안에서(in which)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고
 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영광은
그리스도의 그 빛나심입니다.

우리가
 한 집회 안에서 말하는
 어떤 사람에게 귀 기울일 때,
그 말함이
 주님의 그 말씀인 한
 (as long as …;
 …이기만 하면),
우리는
 우리가
 영광 안에 있다는
 그 느낌을
 가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이
 그 사역 안에서
 말하여질 때마다,
우리는
 우리 안에
 (whithin; 속에)
 영광을 느낍니다
 (sense; 감지합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말을 잘합니다
 (are eloquent;
 연설을 잘합니다, 웅변을 유창하게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아무 느낌도
 (any sense of God’s glory;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어떤 감각도)
 가지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그들의 유창한 말에
 감탄하고(admire)
 또 그들의 지식을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may … appreciate),
하나님의 영광의
 느낌은 가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 말씀의
 그 진짜(genuine; 참된) 사역에
 귀 기울일 때,
여러분은
 유창한 말이나
 또는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의
 한 느낌에 의해서
 매혹됩니다.
여러분이
 집에 되돌아온 뒤에,
 그 영광이
 여러분을 뒤따를 수도 있습니다.
여러 해 뒤에,
 여러분이
 그 집회 안에서 느꼈던
 그 영광을
 여전히 기억해 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체험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의
 그 한가운데 안에서
 우리와 만나시고
 또 그분의 영광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하나님께서
 한 죄인에게 말씀하실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 안에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25장 17절은
 우리에게
 그 속죄 덮개의
 그 길이와 또 너비를
 말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그 덮개의
 그 두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궤의 그 뚜껑의
 (the lid; 그 덮개의)
 그 무게는
 알지 못합니다.
그 두께가
 주어지지 않고
 또 그 무게가
 알려지지 않는다는
 그 사실은
그리스도의 그 무게가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is immeasurable;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무한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무거우신지를
 말할 수 없습니다.
체험적으로 말하자면,
 그분의 무게는
 어느 정도까지
 (to what;
 무엇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지닐 수 있는
 (are able to bear;
 지탱할 수 있는, 떠맡을[감당할] 수 있는,
 견딜 수 있는, 가지고 올[가질] 수 있는)
 그 정도에 따라
 있습니다
 (is according to what;
 그 무엇에[그 얼마 정도에] 따릅니다).
…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무거우신지는
 우리가
 그분께 속한 얼마를
 (how much of Him;
 그분께로부터 얼마나 많이[어느 정도를])
 지닐 수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어떤 성도들이
 오직 극도로 적은 양의
 그리스도만을
 지닐 수 있는 것을
 걱정하게 됩니다.

그 그룹들을 가지는,
 (with; …과 함께하는)
 화해의 그 장소,
 곧 그 속죄 덮개는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사랑스러우신
 주 예수님 그분 자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실 (때는 언제든지)
 또 우리와 이야기하실 때는 언제든지,
이 소중하신(precious)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실제로
 (Actually; 사실은,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고
 또 우리와 이야기하시는 것은
 이 빛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그 위에 뿌려진
 그 희생 제물들의 그 피를 가지는
 그 속죄 덮개는
그분의 인성 안에 계시는
 (그분의 사법적인 구속을 가지시는)
 구속하시는 그 그리스도와
 또 그분의 신성 안에 계시는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을 가지시는)
 빛나시는 그 그리스도를
거기에서
 타락한 죄인들이
 의로우시고, 거룩하시며, 또 영광스러우신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또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 장소로(as)
 묘사합니다:

그 속죄 덮개 위에 있는
 그 그룹들은
 그분의 신성과 함께하는
 (with; …을 가지시는, …으로)
 그리스도의 빛나심을
 나타내고,
그 덮개 위에 뿌려진
 그 피는
 구속함을 위한
 그분의 인성을
 나타냅니다;
이제 우리와 또 하나님은
 구속하시고 또 빛나시는
 그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만나고
 또 함께 대화할 수 있습니다
 (can … talk together).

우리는
 그 그룹들을 가지는
 그 속죄 덮개가
 빛나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는
 그 사실로(with)
 깊은 인상을 받을
 (to be impressed;
 감명을 받을, 새겨질, …을 이해하게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그 빛나심인
 하나님의 그 영광이
 살아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한 얼굴, 눈들, 또 날개들을 가지는
 어떤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적절한 한 이해를 가지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의 빛을
 또한(and also) 어느 정도의
 (a certain amount of;
 약간의, 다소의, 특정한, 일정한)
 영적인 체험을
 필요로 합니다.
주님에 의하여
 빛 비추어짐을 떠나서는
 (Apart from being enlightened;
 깨닫게 됨 없이, 깨우쳐짐[가르쳐짐] 없이는),
우리가
 이 절들을
 그것들의 의미(significance; 중요성) 중의
 아무 것도
 봄 없이
 (without seeing;
 보지 못한 채)
 다시 또 다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빛이
 우리 위에 빛날(shines) 때,
우리는
 그 그룹들을 가지는
 그 화해의(propitiatory) 덮개가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사랑스러우신
 주 예수님 그분 자신이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realize).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실 (때는 언제든지)
 또 우리와 이야기하실 때는 언제든지,
이 소중하신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고
 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 빛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말할 것입니다,
“주님,
 당신 자신께서
 바로 이 화해의 덮개이십니다.
주님,
 당신 없이는(Without You),
 하나님께서
 저와 만나실 수 있는
 또는 제가
 그분과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없습니다.
주님,
 그 화해의 덮개이신
 당신 없이는,
 하나님께서
 저와 만나실 수도 없고
 또는(or) 영광 안에서
 저와 이야기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 속죄 덮개 위에서
 또 그분의 영광의
 그 빛남의 그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분의 마음의 그 갈망을
 배울 수 있으며
 (can … learn;
 알게 될[깨달을] 수 있으며),
 또 그분께로부터
 이상, 계시, 또 교육을
 (instruction;
 가르치심을, 지도를, 설명을, 교훈을, 지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지성소 안에서
 주님과 만날 때,
우리는
 그분에 의하여
 그분께서 무엇이신
 모든 것들로
 (with all that He is;
 그분의 모든 어떠하심으로)
 주입됩니다.

그 지성소 안에 있는
 그 (언약)궤 위의
 그 속죄 덮개는
 히브리서 4장 16절 안에 있는
 은혜의 그 왕좌와
 동일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in; 안에)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그 피 안에서
 그 지성소로 들어감을 위한
 담대함”(히 10:19)을
 가집니다:

그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한 큰 문제인데
 (a great matter;
 하나의 위대한 일[엄청난 사안]인데),
왜냐하면 거기에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은혜의 그 왕좌 위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한 장소(place; 위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담대함을 가져야만 하고,
또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하여
 또 그분의 피에 의하여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피에 의하여
 우리는
 언제라도
 (at any time; 아무때나, 언제든지)
 그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그 담대함을 가집니다.
 
오늘날 그 지성소는
 하늘 안에 있고,
 거기에(where; 그곳에)
 주 예수님께서 계시지만,
우리가 여전히
 땅 위에 있더라도(even though),
 우리는
 그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The secret;
 그 비법은[비밀은])
 우리의 영입니다;
하늘 안에 계신
 그 그리스도께서
 또한 우리의 영 안에
 계십니다.

하늘에 속한
 그 사다리로서,
그분께서
 우리의 영을
 하늘에 연결하시고
 (joins;
 붙이시고, 접합하시고, 이으시고, 합치시고)
 또 하늘을
 우리의 영 안으로
 가져오십니다
 (brings;
 가지고 오십니다, 제공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는(turn; 돌아서는, 돌아가는) 때마다,
우리는
 그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는데,
거기에서
 우리가
 은혜의 그 왕좌 위에 계시는
 하나님과 만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피에 의하여
 그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우리는
 그 휘장 안에 있는
 은혜의 그 왕좌로(to) 와서
그 하늘들 안에 계시는
 승천하신 그 그리스도께로부터
 긍휼을 받아들이고
 또 은혜를 얻습니다
 (find; 찾습니다, 발견합니다,
 알게 됩니다, 체득합니다, …에 이릅니다):

은혜의 그 왕좌는
 의심할 여지없이
 (undoubtedly; 확실히, 분명히)
 그 모든 우주를 향하여
 (to; … 쪽으로, …에, …에 대하여)
 하나님의 그 왕좌,
 곧 권위의 그 왕좌이지만,
우리, 곧 그 믿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은혜의 그 왕좌이고,
그리스도의 그 피로(with; …가) 뿌려진
 그 지성소 안에 있는
 그 증거의 그 궤 위의(over; …를 덮는)
 그 속죄 덮개에 의하여
 나타내집니다.

그 (언약)궤의 그 덮개,
 곧 그 속죄 덮개는,
 은혜의 그 왕좌를
 나타냅니다;
그 속죄 덮개는
 은혜의 그 왕좌이고
거기에서(where)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고
 또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만나시고
 또 그들과 친하게 이야기하십니다
 (communes;
 친하게 사귀십니다, 교감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 피를 통하여
 은혜의 왕좌로 올 때(come to),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고
 또 그분과 친하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그 왕좌에서부터
 말씀하시고,
또 그 지성소 안에 있는
 은혜의 그 왕좌,
 곧 그 말씀하시는 곳에서
 (at … the oracle;
 그 신탁神託[탁선託宣, 신명神命] 장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의 표정을 보며,
 그분의 임재를 누리고,
 또 그분의 경륜 안에서(in …; 경륜으로)
 그분과 하나입니다.

은혜의 그 왕좌에서(At)
 우리는
 그 왕좌 위에 계신
 그 한 분을 향하여 보고
 (look to;
 …을 보고 있으면서[주의하고,
 돌보고, 기다리고, 기대하고]),
 그분께 감사하며
 또 그분을 찬양합니다.

은혜의 그 왕좌,
 곧 그 속죄 덮개의 그 실재는,
 우리의 영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고
 또 은혜의 그 왕좌로
 올 때는 언제든지
 (whenever;
 …때마다[때는 반드시], 오자마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하늘에 속한 사역과(to; …에)
 일치합니다
 (correspond;
 부합합니다, 상응합니다, 조화됩니다
 맞습니다, 서로 어울립니다).

우리가
 그 지성소 안에 있는
 은혜의 그 왕좌에(at; …를 향하여)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그 영광을 바라보고
 또 부활하셨고 또 영광스럽게 되신
 그 그리스도의 그 형상 안으로
 변형되어
 영광에서부터 영광에
 (이르는데;
 transformed into … from glory to glory;
 영광에서부터 영광으로 변형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얼굴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 영광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 새 하늘과 또 새 땅 안에서,
 새 예루살렘의(of; …인[이라는])
 그 전체 도시는
 그 등이신
 그 어린양 안에서 빛나는(shining)
 하나님의 그 영광,
 곧 그 빛으로(with)
 가득 채워진
 그 지성소일 것이고,
또 우리는
 생명의 물의 그 강을 가지는
 (with …; 그 생명수 강과 함께)
 하나님의 또 그 어린양의
 그 왕좌를 누릴 것이고,
 그분을 섬길 것이며,
 그분의 얼굴을 볼 것이고,
 그분의 빛나심 아래에 살 것이며,
 또 영원히 또 항상 다스릴 것입니다.

 

1일

출 33:11
여호와는 마치
사람이
자기 동반자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마주 대하시고
말씀하셨다. …

민 12:7-8
나의 종 모세…는
나의 온 집에서
신실한 사람이다.
그와는
내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말하고,
분명히 말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말하지 않는다.
또 그는
나 여호와의 모습을
보는 사람이다. …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의 동반자였다고
말한다.
… 출애굽기 33장 11절에서
‘동반자’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역대기하 20장 7절과
이사야서 41장 8절에서
아브라함에 관해 사용한
‘친구’라는 단어와는
다르다.
하나님의 친구인
아브라함은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로부터
분별되었고
(수 24:2-3)
롯을 위해
중보 기도했다
(창 18:16-33).
사도 야고보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였다고
말한다
(약 2:23).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사랑을 받는 이,
사랑스러운 이로
여기셨다.
그러나 모세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친구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동반자였다.

‘동반자’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는
친구 관계의 요소를
포함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친밀한 협력의 사상을
담고 있다.
이 히브리어 단어의
한 가지 의미는 바로
‘협력자’이다.
동반자는
협력자이다.
만일 여러분과
어떤 다른 사람이
서로 협력한다면,
여러분은
공동의 관심사,
공동의 사업,
공동의 일을
가지게 된다.
나는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공동의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은
같은 관심사를
소유했다.
그러나 모세와 하나님 사이의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나님과 모세는
위대한 사업에서
완전한 동반자였다.
하나님과 모세는
둘 다
동일한 일에
참여하였다.
주님과 모세는
친밀한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동료와 동업자와 동반자였다.

출애굽기 32장 30절부터
33장 23절까지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필요가 있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배운다.
그럴 때 우리는
모세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가질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히 가졌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매우 한정된 방식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가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과
매우 가까운 사람,
그분의 마음과
일치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하게 가질 수 있었던
이유였다.
우리 모두는
모세와 같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사람만이
하나님과
공동의 관심사를
함께 나눌 수 있고,
그분의 위대한 사업을
이 땅에서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께
사용될 수 있다.

출애굽기 24장에서
백성의 대다수는
시나이산 아래에 있었고,
얼마는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산 위에 있었으며,
모세는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의 영광 아래 있었다.
주님으로부터의 거리가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은
바깥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된
성막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산기슭에 있는 백성은
바깥뜰에서
제단 주변에 있었다.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훌과 함께
칠십 명의 장로들은
산 위에, 즉 성소에 있었다.
산꼭대기에 있는
모세는
여호와의 빛나는 영광이 있는
지성소에 있었다.
나중에
성막이 지어진 후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거기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계시와 이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원칙은
출애굽기 24장의
모세의 경우에서도
동일하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칠 수 있도록,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의 영광 아래 있으면서
하나님에게서
계명을 받았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오늘날
우리는
성직자도 평신도도 아니며
모두가 제사장들이다.
그러나 사실상
주님과 교통하는
체험에 있어서는
우리 가운데
차이가 있다.
많은 성도들이
제단과 뿌려진 피가 있는
바깥뜰에 있다.
또 어떤 성도들은
성소에 들어가
어느 정도
하나님과의 교통을 누린다.
그리고 얼마의 성도들은
지성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 아래 있다.

모세는 사실상
성막에 대한
직접적인 이상을 받은
단 한 명의 사람이었다.
…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의 모형에 관한
이상을
연이어 주셨다.
모세가
하나님의 거처에 대한
상세한 이상을
받는 데에는
사십 일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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