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에서
하나님은
성막, 곧 회막 안에
계셨으며
회막 안에서
말씀하셨다.
레위기 전체는
하나님께서
건축물인 성막 안에서
말씀하신 것의
기록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그분의 성막 안에서
말씀하시며,
이 성막은
바로 교회이다.
여기에 있는
성경의
예표의 원칙에 따라서,
하나님은
그분의 성막인
교회 안에서 말씀하신다.
이 회막은
신탁의 말씀의 장소,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소이다.
성막의 소중함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있었다.
오늘날 교회의 소중함은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제물들과 제사장 직분을 통해
그분께 경배하고 참여하도록
훈련시키셨다.
그리스도는
제물들의 실재이시다.
온전히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제물인
번제물은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이신
그리스도,
곧 이 땅에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신 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소제물은
하나님을 위한 음식이시자
그분과 교통하고
그분을 섬기는 이들을 위한
음식이 되시는,
온전한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화목제물은
화평하게 하시는 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평과 교통이 되시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상호 만족을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을 가질 수 있게
하신다.
속죄제물은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타락한 존재의
죄악된 본성을
처리하신 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속건제물은
우리의 죄악된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심판받으심으로
우리의 죄악된 행실들을 처리하신 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요제물은
부활하신 분으로서
사랑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거제물은
승천하시고 높여지신,
강력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전제물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 앞에
포도주처럼 쏟아부어진 분이시자,
하나님의 누림과 만족을 위해
하늘에 속한 포도주로서
쏟아부어진 그분 자신으로
우리를 적시시는 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우리는
제물들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제물들은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잇는다.
제물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누리고,
하나님과 연합되며,
하나님을
우리의 존재 안에
동화하여
우리의 조성 성분이
되게 하는 데
유익하다.
제물들은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신성하고 인간적인
합병체의 일부가
되게 하는
길이다.
제물들은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희생 제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누림을 위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선물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제사장들을 통해
하나님께 경배하고 참여하도록
훈련받았다.
이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제사장이신
그리스도,
곧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신 분의
예표이다.
거룩한 말씀의 기록에 따르면,
우주의 실재는
성막과 제물들이신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거처인
성막이시고,
사람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제물들이시다.
성막과 제물들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는
우주의 실재와 내용이시다.
제물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다.
이것이
우주의 실재이며
성경의 내용이다.
성막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사람에게 이끌어 오시고,
제물들이신 그리스도는
사람을 하나님께 이끌어 오신다.
그 결과
사람은
하나님과 연결되고 연합되며 합병된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정결하고 기뻐하는
생활을 하도록
그분의 백성을
훈련시키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의 거룩한 본성에 따라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명하셨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에 따라
처신하며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위기는
우리가
거룩한 생활을
(a holy life; 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옛 생활을
(the old life; 그 옛생명을)
벗어 버리고
새 생활을
(the new; 그 새 생명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집트에서의
이전 행실을
벗어 버리고
가나안 사람들의
율례에 따라
행하지 말 것을
명하셨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상호 누림은
그분의 백성을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님 자신께로
분별시켜서,
그들을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한다.
창세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어
거룩하게 하셨다.
‘거룩하게’는
하나님께 속하도록
거룩하게 되고
분별될 뿐만 아니라,
속된 모든 것과
다르게 되고
구분되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하나님만
모든 것과
다르시고
구분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거룩하시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본성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거룩하신 그분 자신을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하시는데,
이것은
우리 온 존재가
그분의 거룩한 본성으로
침투되고
적셔지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고,
우리 온 존재가
하나님 자신으로
적셔지는 것이다.
레위기 12장부터 15장까지에서
하나님은
정결한 생활을 하도록
그분의 백성을
훈련시키셨다.
레위기 12장은
출산으로 말미암은
부정으로부터
사람이 정결하게 되는 것을
보여 주고,
13장과 14장은
나병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것에 대해
말한다.
레위기 15장은
우리가
사람의 존재에서 유출되는
모든 부정한 것들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것이
필요함을
계시한다.
우리의 말을 포함하여
우리의 존재에서 유출되는 것은
무엇이든 부정하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옛 생명을 끝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하고,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가져다주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필요하다.
우리는 또한
생명수,
곧 말씀 안에 체현되어 계신,
씻으시고 정결하게 하시는
생명의 영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기뻐하는 생활,
행복한 생활을 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시키셨다.
매주 있는 안식일은
매년 있는 모든 명절들의
주된 의미였다.
이 명절들은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서로서로 함께
안식하기 위한
안식일이었다.
매달 있는
초승달 축제는
우리가
어둠 가운데 빛을 주시는,
우리의 기쁨과 누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체험할 수 있음을
상징한다.
유월절은
기쁨의 때인
우리의 초기의 기초적인 구원을 위해
우리의 유월절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무교절은
죄가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과정을
예표한다.
초실절은
우리의 누림을 위해
부활 안에서
잔치가 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오순절은
교회의 형성을 위해
쏟아부어지신
그 영에 대한 누림을
예표한다.
나팔절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흩어진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것을
예표한다.
속죄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온 집을
모으신 후에
그들이 가지게 될
누림을
예표한다.
장막절은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질
복원의 시대의
누림을
예표한다.
안식년은
우리의 완전한 안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오십 년째 되는 해인
희년은
우리가
잃어버린
권리들과
다른 이들에게 팔아 버린
우리 자신을
구속하여
되찾아 주심으로써
우리의 완전한
해방과 안식과 기쁨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레위기는
우리의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할렐루야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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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plies on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그분께 경배하고 참여하며, 거룩하고 정결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도록 훈련시키심”
6일
계 20:6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
둘째 죽음은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으로서
다스릴 것입니다.
빌 4:4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속죄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온 집을
모으신 후에
그들이 가지게 될,
하나님의 속죄에 대한
누림을
예표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곧 하늘로부터
거룩한 땅으로
내려오실 그때에
성취될 것이다.
장막절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가 아니라,
천년왕국의
회복된 땅에서
이루어질
복원의 시대의
누림을
예표한다.
일곱 번째 해인
안식년은
우리의 완전한 안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데,
이 안식년은
땅이 안식하기 위한 것이며,
… 사람들이
수고하지 않고
양식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오십 년째 되는 해인
희년은
기뻐하며 외치는
때였다.
희년은
우리가 잃어버린
권리들과
다른 이들에게 팔아 버린
우리 자신을
구속하여
되찾아 주심으로써
우리의 완전한
해방과 안식과 기쁨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가장 충만한 방식으로
영원토록 누리는 것이다.
레위기는
우리에게
매주의 누림과
매월의 누림과
매년의 일곱 가지 명절들을
보여 준다.
그런 후에
레위기는
안식년과 희년에 관해
말한다.
신약의 믿는 이들인
우리는
거룩하고
(a holy people;
한 거룩한 백성, 국민, 민족)
정결하며
(a clean people;
한 깨끗한 백성)
항상 기뻐하는
행복한
사람들이
(a happy people;
한 행복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역사(歷史)를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께 경배하고
참여하며,
거룩하고 정결하며 기뻐하는
삶을 살도록
그분의 백성을
훈련시키신 것을
알 수 있다
(trained them;
그들을 훈련시키셨다).
매주의 안식일과
매월의 초하룻날과
매년의 일곱 명절들과
안식년,
그리고 가장 충만한 정도로
하나님을
가장 크고 가장 높고 가장 깊이 누리는
오십 년째 되는 해의 안식년인
희년에
하나님을
풍성하게 누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민은
항상 행복하며,
이 땅에서
기뻐하는 백성이 된다.
하나님 외에
누가
이 모든 놀라운 명절들을
만들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민을
훈련시키시는 것에 관한 기록인
레위기는
또한 하나님의 역사(歷史)의 일부로서,
우리에게
우리의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준다.
우리 모두는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할렐루야 백성’이
되어야 한다.
때로 가장 안식을 주는 일은
찬송을 부르는 것이다.
찬송을 부름으로
우리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며
그리스도를
우리의 안식으로
누리게 된다.
찬송가 265장의 후렴은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 온종일 주께 노래하며
맘 다해 구주 찬양하리”
라고 말한다.
기뻐하는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누리는
생활이다.
이러한 누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며
또한 온종일 크게 기뻐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기뻐하는 생활이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생활은
(our life, the Christian life and the church life;
우리의 생활, 그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그 교회 생활은)
하나님의 큰 기쁨에
(God’s good pleasure;
하나님의 충분한 기쁨에)
따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기뻐하는 생활이다.
여러 차례
신약은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권유한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빌 4:4)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고
시를 읊으며,
항상
모든 일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우리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감사하는’
(엡 5:19-20)
백성이다.
일 년에 한 번
‘추수 감사절’을 가지는 대신에,
우리는
매일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분께 찬송을 부르며,
심지어 우리의 열광하는 느낌으로
(by our sense of excitement;
우리의 흥분의 감각으로)
다른 이들을
분발시키기까지
해야 한다
(even stirring up others;
자극하기까지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감정이 풍부한
(emtional;
정서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은
우리에게서
활기찬 어떤 것을
느껴야 한다.
로스앤젤레스의 엘든 홀에서
모이던
그 몇 년 동안,
우리의 이웃들은
우리를
‘할렐루야 백성’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심지어
길을 걸을 때에도
주님을 노래하며
찬양할 정도로
열광해야 한다.
5일
고후 5:17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창조물입니다.
옛것들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고전 5:7
여러분은 본래
누룩 없는 사람들이니,
새 반죽이 되도록
묵은 누룩을
깨끗이 없애십시오.
왜냐하면 우리의 유월절,
곧 그리스도도
이미 희생되시어
제물로 드려지셨기 때문입니다.
정결한 것은
더러워지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사람인 우리가
얼마나 부정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레위기는
심지어 우리의 출생까지도
부정하다고 말하며,
우리에게서 나온
모든 적은 유출까지도
부정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정결한 생활,
곧 더러움이 없는 생활을
해야 한다.
구약의 예표에 따르면,
우리는
놋 제단의 제물들과
물두멍을 통해
하나님을
접촉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 안에 있는
씻는 물’로
깨끗이 된다고
말한다(엡 5:26).
여기에 나오는
‘씻는’에 대한
헬라어 단어를
직역하면
‘물두멍’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는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생명수가 있다.
… 물두멍은
우리가
땅에 속한
더러움을 씻어 내고
정결하게 되는
곳이다.
정결한 생활을
유지하려면
우리는
정결한 사람들을
접촉해야 한다.
정결하지 못한
사람들을 접촉할 때
우리는
더러워진다.
… 우리의 출생조차도
정결하지 못하다.
즉 근원이
부정하다.
레위기 13장과 14장은
나병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간음이나 음란이나
우상숭배나 도둑질 등과 같은
죄들은
나병에 걸린 사람의
상태에 포함된다.
나병은
항상 반역에서 나오며,
고의적인 죄와
주제넘은 죄
혹은 작심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죄와 같은,
사람 속에서부터 나오는
심각한 죄를
상징한다.
레위기 15장은
우리가
사람의 존재에서 유출되는
모든 부정한 것들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것이
필요함을
계시한다.
우리의 말을 포함하여
우리의 존재에서 유출되는 것은
무엇이든 부정하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우리의 옛 생명을 끝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하고,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가져다주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필요하다.
우리는 또한
생명수,
곧 말씀 안에 체현되어 계신,
씻으시고 정결하게 하시는
생명의 영이
필요하다.
우리의 영 안에서
말씀 앞에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우리를 씻어 주는
무언가를 만진다.
레위기는 또한
우리가 기뻐하는 생활을
해야 함을
계시한다.
… 매주 있는
안식일은
매년 있는
모든 명절들의
주된 의미였다.
이 명절들은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서로서로 함께
안식하기 위한
안식일이었다.
매달 있는
초승달 축제는
(new moon feast; 새달 잔치, 새달 진수성찬)
우리가
어둠 가운데
빛을 주시는,
우리의 기쁨과 누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체험할 수 있음을
상징한다.
매주와 매월의
명절들만이 아니라
매년의 명절들도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매주, 매월 그리고 매년의
누림이
필요하다.
유월절은
우리의
초기의 기초적인 구원을 위해
우리의 유월절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 명절은
우리의 거듭난 생활의
시작을
상징한다.
우리의 초기의 구원은
기쁨의 때였다.
우리는
죄가 없는
무교절을
지키고 있다.
이 명절은
칠일간 계속되었는데,
죄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과정을
예표한다.
죄가 있을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힘이 되시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누림과 안식을 위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과정에서
죄 없는 생활을
하게 하신다.
초실절은
(the Feast of the Firstfruits;
그 첫열매들의 잔치, 그 맏물의 진수성찬)
우리의 누림을 위해
부활 안에서
잔치가 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적은데,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순절은
교회의 형성을 위해
쏟아부어지신
그 영에 대한
누림을
예표한다.
교회는
유대인 믿는 이들과
이방인 믿는 이들인
두 무리로
형성되는데,
이것은
오순절날에
하나님께 드려진
두 개의 떡에 의해
예표된다.
나팔절은
(the Feast of the Blowing of Trumpets)
하나님께서
그분의 흩어진 백성,
곧 흩어진 이스라엘 자손들을
불러 모으시는 것을
예표한다.
이 예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성취될 것이다.
4일
레 20:7
그러니 너희 자신을
거룩하게 분별하여
거룩하여져라.
왜냐하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엡 1:4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습니다.
레위기에서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거룩하고 정결하고 기뻐하는
생활을 하도록
그분의 백성을
훈련시키셨는지를
본다.
거룩한 생활은
하나님처럼 사는 생활,
곧 경건한 생활이다.
레위기는
우리가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옛 생활을 벗어 버리고
새 생활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집트에서의 이전 행실을
벗어 버리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은 또한
그들에게
가나안 사람들의 풍습에 따라
행하지 말 것과
그분의 거룩한 본성을 따라
거룩한 생활을
할 것을
명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집트에서의 이전 행실을
벗어 버리라고 명하셨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이전의 생활 방식,
곧 옛 생활 방식을
벗어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들이 들어갈 땅의
가나안 사람들의
풍습에 따라
행하지 말 것을
명하셨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구원받은 후에
세상 사람들의
생활과 행동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생활을
해야 했다.
이것은
새사람을 입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따라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은
새사람을 입는 것과
동일하다.
레위기 18장부터 20장까지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요구를
강조한다.
“나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19:2)
“나 여호와가
거룩하니,
너희도
나에게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너희를
여러 백성들 가운데에서
따로 구별하여
내 것이 되게 하였다.”
(20:26)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따라
행하는 것,
곧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상호 누림은
그분의 백성을
하나님 자신께로
분별시킨다.
어떤 것도
이 상호 누림만큼
우리를
하나님께로
분별시키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특별한 보물로
누리시고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모든 것으로
누릴 때,
우리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님 자신께로
완전히 분별된다.
그 결과 우리는
거룩한 민족이 된다.
출애굽기 19장에서
모세와 아론은
천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천둥과 구름과 연기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들의 몫은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하나님에 대한 누림이 있는
하나님의 임재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선택하셨다.
…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을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에 따라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은
거룩함을
죄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념에 따르면,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곧 거룩한 사람이다.
그런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거룩함은
죄 없는 상태나
완전함이 아니다.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속하도록
거룩하게 되고
분별될 뿐 아니라,
속된 모든 것과
다르게 되고
구분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모든 것과 다르시고
구분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거룩하시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본성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길은
거룩한 분이신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넣으셔서,
우리 온 존재가
그분의 거룩한 본성으로
침투되고
적셔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인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은
그분의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여,
우리 전 존재가
하나님 자신으로
적셔지는 것이다.
이것은
죄 없는 완전함이나
깨끗함과는
다른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의 성품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처럼
거룩해지는 것이다.
거룩해지는 것은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분별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구분되고
다르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된 것과는
달라야 한다.
우주 가운데
하나님 한 분만이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그분 외의 모든 것과
다르시고
구분되신다.
그러므로 거룩해지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한다.
죄 없는 것이나
완전한 것은
거룩한 것과는
다르다.
거룩해지려면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3일
요 1:14
말씀께서
육체가 되시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니,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였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에게서 온
독생자의 영광이었다.
요 14: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여러분이 내 안에 있으며,
내가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
우리에게는
그 간격을 이어 주는 것,
곧 우리를
제단에서 성막 안으로 이끄는
어떤 제물들이 필요하다.
물론 주된 제물들은
번제물과 소제물과
화목제물과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이다.
부속된 제물들은
요제물과 거제물과
전제물과 서원 제물과
자원 제물이다.
이 모든 제물들은
우리를 다른 편,
즉 성막 안으로 이끄는
다리이다.
날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뿐만 아니라,
그분의 요소와 본질을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실질로서 누릴 수 있다.
… 그리스도를
먹는 것에 관한
상세한 사항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레위기를 볼
필요가 있다.
레위기에 계시되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먹기에 좋은
분이시다.
레위기는
우리에게
‘식료품’을 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요리’하기 위한
‘조리법’도 준다.
모든 제물들은
우리로
하나님을 누리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존재 안으로
하나님이 동화되게 한다.
이 동화는
연합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연합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와 연합되게 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 영이신
주 예수님은
우리의 영 안에 계시며,
날마다
그분 자신을
우리와 연합되게 하신다.
그러나 이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는 것과
소화하는 것과
동화하는 것에
달려 있다.
요한복음 1장 29절은
성막이신 그리스도께서 또한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라고
말한다.
…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제물들의 총체이시다.
성막으로서 주님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이끌어 오셨다.
제물들로서 주님은 이제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오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성막이신 것은
육체 되심의 문제이다.
그리스도께서
제물들이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의 문제이다.
그리스도는
육체 되심 안에서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을 통하여
가셨다.
이것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이끌어 오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하나님과 우리,
우리와 하나님을
하나 되게 하는
양방향의 통행과 같다.
제물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다.
우리는
집회에 갈 때마다,
귀하고 소중한 선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분과 함께 누리기 위해
집회에 간다는
그러한 달콤한 느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희생 제물로서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드릴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누리시고
우리도 그분과 함께 누리기 위한
선물로서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은
제사장들을 통해
하나님께 경배하고 참여하도록
훈련 받았다.
… 이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제사장이신
그리스도,
곧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신 분의
예표이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문제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는 문제이다.
거룩한 말씀의
기록에 따르면,
우주의 실재는 사실상
성막과 제물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이시다.
하나님-사람이신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거처인
성막이시다.
그분은 또한
사람이
하나님 안에 들어가기 위한
제물들이시다.
성막이자 제물들이신
그분께서
우주의 실재와 내용이시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삼일 하나님께서
과정을 통과하셔서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상호 거처인
성막이 되시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제 제물들이신
하나님 자신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다.
이것이
성경의 내용이며
또 우주의 실재이다.
우리의 그리스도는
놀라우신 분이시고
모든 것을 포함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평이한 말로는
그분을
충분히 나타내고 묘사할 수 없다.
이것을 위해서는 사실상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예표가 또한 필요하다.
성막과 제물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성막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사람에게 이끌어 오시고,
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오신다.
2일
히 10:9
그 후에 그리스도는
“보십시오,
내가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처음 것을
폐지하시는 것은
두 번째 것을
세우시기 위한 것입니다.
히 10:12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들에 대한
하나의 희생 제물을
드리심으로써,
영원히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구약에서
모든 제물들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신약은
그리스도의 인격이
이 예표들의 성취임을
계시한다.
온전히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제물인
번제물은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 땅에 계셨을 때
주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만족시키셨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든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원하심대로 행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만족시키셨다.
번제물의 예표의 성취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음식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음식이 되시고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도록
‘불태워’지셨다.
소제물은
하나님을 위한
음식이시자
그분과 교통하고
그분을 섬기는 이들을 위한
음식이 되시는,
온전한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음식이시고
우리의 끊임없는 만족이시다.
소제물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만든 것이다.
고르고 섬세한
고운 가루는
균형 잡히고
고르고 섬세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예표한다.
화목제물은
화평하게 하시는 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고,
다른 이들과도 화목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주에 화평이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에게는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그분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셨다’
(골 1:20).
이제 화목제물의
예표의 성취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님을
화평하게 하시고
서로를
화평하게 하시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해지며
사람과 화목해진다.
속죄제물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타락한 존재의
죄악된 본성을
처리하신 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속에 거하는 죄,
즉 로마서 5장부터 7장까지에서
광범위하게 묘사된
인격화된 죄를
처리하셨다.
그리스도는 또한
속건제물로
예표되신다.
우리는
죄악되고, 많은
죄들과 허물들이 있다.
하나님은
오직 속건제물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실 수 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허물들을
담당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들을
직접 자기의 몸에 짊어지시고
나무에 달리셨다’
(벧전 2:24).
… 속건제물이신 그분은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다.
요제물은
부활하신 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레위기 7장 30절은
화제물의 일부를
“여호와 앞에서
요제물로
흔들어 바쳐야 한다.”
라고 말한다.
… 이것은
부활 안에서 움직이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움직이고’ 계신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살아 계신다.
레위기 7장 32절은
“너희는
… 오른쪽 넓적다리를
거제물로
제사장에게 주어야 한다.”
라고 말한다.
거제물로 드리는 것은
이 제물을
높이 올리는 것이다.
거제물,
즉 주님 앞에 들어 올린 제물은
승천하시고 높여지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거제물의
예표의 성취이신
그리스도는
승천하시고 높여지시고 초월하신 분,
즉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되신’
분이시다(엡 1:21).
출애굽기 29장 40절은
전제물에 대해 말한다.
전제물로 드려진
포도주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
마시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쏟아부어졌다.
구약에서
전제물은
레위기 1장부터 7장까지에 기술된
기본 제물들 중의
하나 위에
쏟아부어졌다.
기본 제물들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려지신
그리스도의 여러 방면들에 대한
예표이다.
전제물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참포도주로서
하나님께 쏟아부어지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 더 나아가서
전제물은
그리스도 그분 자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누림과 만족을 위해
그분과 우리가
하나가 될 때까지
하늘에 속한 포도주이신
그분 자신으로
우리를 적시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1일
레 1:1
여호와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회막에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레 27:34
이상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민둥산인 시나이산에서
말씀하셨지만,
레위기에서는
건축물인 성막 안에서
말씀하신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필요가 있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하늘에서 말씀하셨다.
때로 그분은
누군가를 방문하시려고
땅에 오셨지만,
곧 하늘로 되돌아가셨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시나이산에 계셨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성막, 곧 회막 안에
계신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하늘들에 계셨다.
출애굽기에서는
이 땅에
그분의 거처를
건축하는 일을 하시려고
시나이산으로 내려와
거기에 머무셨다.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에서
성막은
세워졌고
기구는
성막 안에 정렬되었다.
그다음에 하나님은
성막 안으로
들어오셔서
거기에
거하셨다.
이제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성막인 회막 안에
계시며
회막 안에서
말씀하신다.
레위기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은
이 책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레위기 1장 1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하늘들에서도 아니고
시나이산에서도 아닌
회막 안에서
말씀하신 것이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또한 그분의 성막 안에 있으며,
이 성막은
바로 교회이다.
여기에 있는
성경의
예표의 원칙에 따라서,
하나님은
그분의 성막, 곧 회막인
교회 안에서 말씀하신다.
이 회막은
신탁의 말씀의 장소,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소이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신다.
어떤 믿는 이들의 모임이
실지적으로, 현실적으로
교회의 실재를
어느 정도까지
가지고 있는지는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얼마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만일 어떤 단체에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없다면,
그러한 단체를
교회로 간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성막이 소중한 것은
성막 안에 있는
금 때문이 아니었다.
이집트에는
성막에 있는 금보다
더 많은 금이 있었다.
성막의 소중함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있었다.
오늘날 교회에도
동일한 사실이
적용된다.
교회의 소중함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있다.
…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교회 안에 있는 것에 대해
주님을 찬양하자!
이 말씀하심이
우리에게 보배인 것이다.
하나님께 구속받은 이들은
성막을 통해,
제물들을 가지고,
제사장들에 의해
하나님과 교통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표현하는
거룩한 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다.
하나님과 교통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잔치를 누리는 것,
곧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은
성막을 통해,
제물들을 가지고,
제사장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데,
오늘날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 속한
문제이다.
시나이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율법을 주셨고
또한 성막의 모형을 주셨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율법으로
그들을 규제하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막으로
그들을 격려하셨다.
시나이산에서
율법을 반포하시고
성막을 건축하신 후에,
하나님은
레위기의
모든 장에 있는 내용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참여하며,
거룩하고 정결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도록
그들을 훈련시키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그분께 경배하고
또한 그들의 누림을 위해
그분께 참여하도록
그분의 백성을
훈련시키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께 참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도록
훈련받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제물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경배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는데,
제물들은
그리스도의 모든 방면을
예표한다.
그리스도의
풍성의 모든 방면은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제물들의 실재이시다.
히브리서 10장 7절부터 9절까지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
육체로 오셨는데,
이 하나님의 뜻은
구약의 제물들을
그분 자신으로
대치하는 것이었다.
히브리서 10장 9절 하반절은
“그분께서
처음 것을
폐지하시는 것은
두 번째 것을
세우시기 위한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처음 것’은
구약에 있는
동물의 희생 제물들을 말하며,
‘두 번째 것’은
유일한 희생 제물,
곧 유일한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말한다.
구약에는
많은 제물들이 있었지만
신약에는
오직 한 제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놀라운 인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