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회복은 유일하며, 반드시 어떤 혼합도 없이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단일하며 거룩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정화하는 일을 수행하는 에스라들과 느헤미야들이 필요하다. 주님의 회복의 모든 단계에 정화가 필요하다.
에스라는 ‘거룩한 씨’를 이교도적인 모든 것에서 분별되게 함으로써 회복을 정화했다.
에스라가 도착하기 전에,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교도 아내를 두어 이러한 혼합에서부터 자녀들을 낳았기 때문에 혼합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예표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는 ‘거룩한 씨’를 이교도적인 모든 것에서 분별하기 위해 정화가 필요하다.
주님의 회복은 거룩한 씨이다. 우리는 거룩한 씨가 어떤 이교도적인 것과도 결코 섞이지 않도록 매우 순수해야 한다.
회복이 거룩할 때 우리는 주님의 축복을 볼 것이다.
우리는 집을 건축한 후에 (에스라의 인도 직분 아래서 볼 수 있는) 정화가 필요하고, 성을 건축한 후에 (느헤미야의 절대성에서 볼 수 있는) 다시 정화되는 것이 필요하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 우리는 모든 혼합에서 철저히 정화되어야 한다. 속된 것이나 주님의 회복의 하늘에 속한 본성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든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바빌론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과 우상들에 속한 것들이 혼합된 것이며, 바빌론의 원칙은 사람에게 속한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혼합하고 육체에 속한 것들을 그 영께 속한 것들과 혼합하는 것이다.
바빌론의 일부인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며, 바빌론적인 것은 무엇이든 사탄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패배시킬 수 있는 입지를 준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보다 바빌론의 원칙을 더 미워하신다. 우리 안에 있는 바빌론적인 모든 것을 심판할 때에만, 우리는 우리 역시 바빌론의 원칙을 미워한다고 고백할 수 있다.
사도행전 21장과 야고보서에는 혼합이 있다. 야고보는 구약과 신약을, 새 시대와 옛 시대를, 하나님의 새 백성과 옛 백성을, 새사람과 옛사람을 혼합하였다.
사도행전 21장은 예루살렘 교회 안에 있는 끔찍한 혼합을 폭로해 준다. 유대인 믿는 이들은 여전히 모세의 율법을 지켰고, 구약 시대 안에 머물며 유대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하나님의 신약 경륜과 시대에 뒤진 구약 경륜을 혼합하였다.
유대인 믿는 이들은 율법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 은혜 시대를 전적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두 시대의 구별을 무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시대적인 행정을 거스르며 그리스도의 표현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적인 계획에 큰 손상을 입히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율법은 하나님의 존재에 따라 사람에게 요구를 한다. 하지만 은혜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공급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이루게 한다. 은혜는 사람이 누린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큰 문제는 자아와 영의 혼합이다.
이러한 혼합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길 자격을 잃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 안에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많은 혼합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영은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영이 나오면서 혼과 몸을 통과할 때 더러움과 부패에 오염될 수 있다.
영을 처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불순한 동기들과 의도들, 여러 혼합들을 처리하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마음과 양심과 영이 순수해야 한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음이 순수하다는 것은 목적이 단일한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는 단일한 목표를 가지는 것이다.
순수한 마음은 주님을 유일한 목표로 취하는 마음이다.
신약의 의미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을 얻는 것과 동일하고, 하나님을 얻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조성되도록 하나님의 요소와 생명과 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봄으로써 변화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볼 때 그분의 요소를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우리의 옛 요소는 배출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며,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그분을 표현하며 하나님의 권위로 그분을 대표하게 된다.
우리는 마음이 순수해야 하며 주님의 회복을 위해 단일해야 한다. 오직 이럴 때에만 우리는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선한 양심뿐 아니라 순수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거리낌 없는 양심이다.
순수한 양심은 혼합된 것이 전혀 없이 순수하게 된 양심이다. 이러한 양심은 바울처럼 우리가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뜻만을 구한다고 증언한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한 첫째 자격 조건은 영의 순수함이다.
순수한 영을 가진 사람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순수함은 인도 직분의 전제 조건이고, 우리의 봉사의 기본 조건이다. 혼합이라는 문제는 주님의 일꾼들 가운데 있는 가장 큰 문제이다. 불순함은 자주 오해와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모든 혼합을 철저히 처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영이 해방될 때 다른 이들에게 위험하지 않을 것이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용되기 원한다면, 반드시 우리의 영을 해방해야 하고 우리의 영이 순수해야 한다.
새 예루살렘성은 맑은 유리와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투명한 유리와 같은 순금이다.
금은 하나님의 본성을 상징한다. 성이 순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그 성이 신성한 본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과 신성한 본성이 그 성의 요소라는 것을 가리킨다.
길과 성을 구성하는 순금은 맑은 유리와 같은데, 이것은 온 성이 투명하며 불투명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의 유일한 길로 취한다면, 어떠한 혼합도 없이 순수할 것이고 어떠한 불투명함도 없이 투명할 것이다.
우리가 생명 주시는 영을 주입받고 생명 주시는 영으로 적셔진다면, 우리의 내적 존재는 투명하고 수정처럼 맑게 될 것이다.
우리가 참된 교회생활을 하기 원한다면, 교회 자체가 순수한 금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즉 전적으로 신성한 본성에 속해야 한다. 이 때문에 우리를 정화하고 순수하게 하는 십자가의 일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변절한 기독교계와 진정한 교회의 차이는 바로, 전자는 혼합이고 후자는 순수하다는 것이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새 예루살렘처럼 어떤 혼합도 없이 수정처럼 맑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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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포로 되어 있다가 돌아온 이들을 정화하는 것의 내재적인 의미”
6일
그 영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일하시는 것을 체험한 결과, 우리는 의롭게 된다. 자연스럽게 우리 속존재는 투명해지고 수정처럼 맑아지며,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아도 즉각적으로 주님의 생각을 알게 되고 주님의 뜻과 일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생각과 뜻에 따라 행할 것이다.
우리가 생명 주시는 영을 주입받고 생명 주시는 영으로 적셔진다면, 우리의 내적 존재는 투명해질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생각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주님의 뜻 안에 있게 될 것이고 그분의 뜻을 행할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주님께 올바를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다른 이들을 향하여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고, 심지어 우리의 물질적인 소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즉, 큰일뿐 아니라 작은 일에서도 의로운 사람, 하나님과 다른 이들과 자기 자신에게 의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형상 곧 표현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성의 길은 순금이다. 금은 하나님의 본성을 상징한다. 새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간 후에 우리는 우리의 길인 신성한 본성에 따라 행해야 한다.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 유일한 길의 순금이 ‘투명한 유리’와 같다는 것은 조금도 불투명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금으로 된 길은 수정처럼 맑으며 조금도 불투명하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의 유일한 길로 취한다면, 어떠한 혼합도 없이 순수할 것이고 어떠한 불투명함도 없이 투명할 것임을 가리킨다.
성 자체는 어떤 혼합도 없는 순금으로 되어 있다(계 21:18하). 이것은 교회가 반드시 백 퍼센트 하나님께 속해야 함을 가리킨다. 교회는 반드시 절대적으로 신성한 본성에 속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는 교회는 신성한 본성의 어떤 부분과 타락한 인성의 어떤 부분이 혼합된 것이다. 우리가 참된 교회생활을 하기 원한다면, 교회 자체가 순수한 금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즉 전적으로 신성한 본성에 속해야 한다. 이 때문에 우리를 정화하고 순수하게 하는 십자가의 일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약 삼십 년 전에 나는 순수한 것과 깨끗한 것이 서로 다르다는 짤막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매우 놀랐었다. 나는 깨끗한 것만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마치 순금이 어떤 혼합도 없이 맑아지기 위해 정화될 필요가 있는 것처럼 우리도 여전히 정화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때 이후로 주님은 나에게 깨끗한 것과 순수한 것 사이의 차이를 점차적으로 보여 주셨다. 한 사랑스러운 형제가 친절하고 상냥하고 깨끗할 수 있지만, 여전히 그에게 혼합된 것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그는 투명하지 않고 불투명하다. 그는 친절하고 깨끗하지만 우리는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 깨끗한 것과 순수하고 투명한 것은 별개의 것이다. 종종 우리는 주님 안에 있는 어떤 성도를 만날 때, 그가 깨끗할 뿐 아니라 맑은 유리처럼 투명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삼십여 년 동안 니 형제님과 함께 있었다. 그 모든 해 동안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그가 투명한 사람임을 느꼈다. 내가 그 앞에 앉았을 때 나는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단상에 올라설 때마다 청중은 그가 투명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단지 깨끗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의해 정화될 필요가 있다.
5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는 한 가지 문제는 바로 영과 혼의 혼합이다. 언제든지 그의 영이 나올 때 그의 혼도 나온다. 순수한 영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한 첫째 자격 조건은 능력이 많은가 적은가가 아니라 영이 순수한가이다. 큰 능력은 바라면서 영의 순수함은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 면에서 그들은 능력을 사용하여 건축한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그들은 자신이 건축한 것을 자신의 불순함으로 인해 허물어 버린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지만, 동시에 그들의 영에는 혼합된 것이 있다.
혼합이라는 문제는 주님의 일꾼들 가운데 있는 가장 큰 문제이다. 우리가 형제자매들에게서 생명을 만지는 동시에 죽음을 만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형제자매들에게서 하나님을 만지는 동시에 그의 자아를 만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형제자매들에게서 온유한 영을 만지는 동시에 그의 완고한 자아를 만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형제자매들에게서 성령과 그들의 육체를 함께 발견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말씀의 사역 안에서 그분을 섬기게 하시거나 우리가 그분을 위해 말해야 할 때, 우리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하나님, 제 안에서 일하십시오. 저의 겉사람을 파쇄하시고 허물어 주십시오. 저의 겉사람과 속사람을 분리해 주십시오.” 이러한 구원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입을 열 때마다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겉사람을 표현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면 언제나 그런 사람인 것이다. 우리는 가장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용되기 원한다면, 반드시 우리의 영을 해방해야 하고 우리의 영이 순수해야 한다. 우리의 겉사람이 허물어지지 않았다면, 말씀을 공급함으로 섬길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을 함께 전달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이름에 손상을 입힐 것이다. 우리에게 생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혼합된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이름에 손상을 입힐 뿐 아니라 교회에게도 손실을 끼칠 것이다.
교회생활과 주님의 일에서 불순함은 싹까지 모두 죽인다. 우리가 불순하다면, 불순함은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죽인다. 많은 세월을 지내 오면서 어떤 일들을 결정할 때, 나 자신이 불순할까 봐 내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떨었는지 주님만이 아신다.
책임을 지는 것이나 장로 직분이나 인도 직분의 전제 조건은 순수함이다. 조화되기 위해서는 순수함이 필요하다. 교회생활에서는 언제나 일이 발생한다. 우리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면, 이번 어려움에 걸려들든지 아니면 다음 어려움에 걸려들 것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순수하다면 어떤 어려움에도 걸려들지 않을 것이다.
많은 경우, 겉으로 보이는 우리의 인내는 불순함에서 나온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기다리고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무례하고 조심성이 없어도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순수함이 기본적인 요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순수함은 모든 세균을 죽인다.
오해가 어디에서 오는지 아는가? 많은 경우, 그것의 근원은 불순함이다. 불순함이 없이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는 서로 다툴 수 있고 의견이 대립할 수 있어도 오해는 없다. 그러나 일단 어떤 불순함이 들어오면 오해가 계속될 것이다. 그들이 조심하고 인내하고 현명하게 처신할지라도,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가 계속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마음 상하게 만드는 것은 육체에서 비롯된다. 다른 사람들을 마음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역시 육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세상에서, 회사에서,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매우 조심하는 것은 세상이 불순함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도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교회 안에는 모든 곳에 순수함만 있어야 한다.
순수함은 우리의 봉사의 기본 조건이다.
4일
양심은 우리의 영의 주도적인 부분이다. 양심이 잘못되면 결코 올바른 영을 가질 수 없다. 양심이 잘못되면 영은 사실상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으려면 먼저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 다음 또한 우리에게는 ‘순수한’ 양심이 필요하다.
우리가 행한 잘못을 처리하고 주님의 피를 적용하여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할 때, 이 양심은 거리낌 없는 양심이 된다. 다시 말하면 유죄판결을 받지 않는 선한 양심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일에서도 우리를 유죄판결 하지 않는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지만, 이 양심이 순수하지 않을 수 있다. 순수한 양심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뜻만 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을 구하지만 동시에 하나님 ‘이외의’ 무언가를 구한다. …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한 분만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순수하지 않다. 우리의 마음이 단일하고 순수하며 하나님만 구한다면, 이때 우리의 마음은 순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이외의 무언가를 구한다면, 이러한 마음은 우리의 양심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선한 양심을 가질지 모르지만, 이 양심은 순수하지 않게 된다.
우리의 양심은 가장 먼저 반드시 선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두 번째로 반드시 순수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선한 형제를 자주 만난다. 그는 하나님을 위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우리는 그가 복음의 일도 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자신 외에 다른 무언가를 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가 주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선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양심은 그를 유죄판결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어려움은 복음을 전하는 그의 일이 그의 삶에서 주님을 대치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주님‘께 속한’ 것이지만 ‘주님’은 아니다. 이 형제는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순수한 양심은 결코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나는 순수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자신 외에는 그 무엇도 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순수한 양심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많은 처리를 통해 얻게 되는 순수하고 단일한 마음만이 우리의 양심에 영향을 주어 우리의 양심을 순수하고 단일하게 만들 수 있다. … 마음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양심을 포함한다. 순수한 마음은 이 마음이 주님을 향해 단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생각이 순수해야 하고, 우리의 감정이 순수해야 하며, 우리의 의지가 순수해야 하고, 우리의 양심이 순수해야 한다. 우리가 순수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이 순수해야 한다.
우리가 순수한 양심을 가지려고 한다면, 가장 먼저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순수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단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생각이 주님 외의 ‘그 무엇도’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감정이 주님 외의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으며, 우리의 의지가 주님 외의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이럴 때에만 우리는 오직 주님만 구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순수한 양심을 가지려면 가장 먼저 순수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자. 우리의 생각이 오직 주님께만 완전하고도 온전히 점유되었는가? 우리의 감정이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을 더욱더 단순하고 전일하고 온전히 사랑하는가? 우리의 의지가 완전히 하나님을 위해 있는가? 우리가 정직하다면, 즉시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순수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방황하고, 우리의 감정은 다른 많은 것들을 사랑하며, 우리의 의지는 쉽게 변한다. 이 부분들이 순수할 때에만 우리는 순수한 마음을 가질 것이고, 우리의 마음이 순수할 때에만 우리의 양심이 순수할 것이다. 영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순수한 마음을 갖는 것이 매우 필수적이다.
우리의 양심이 순수하지 않다면, 우리의 영은 결코 강해질 수 없다. 우리는 주님 이외의 다른 것을 구할 것이다. 그것이 죄악된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 깊은 곳에 매우 섬세하게 유죄판결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매우 강하거나 거칠지는 않지만, 매우 부드럽고 섬세한 유죄판결이 우리가 완전히 주님을 위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항상 말한다. 그러한 유죄판결이 우리의 영을 약화시킨다.
3일
과거 몇십 년 동안 우리 가운데 있었던 문제는 어떤 사람들이 큰 뜻, 곧 야망은 있으나 역량을 소유하지 못한 데 있었다.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야망의 목표에 도달할 역량이 없다면, 그는 명예스럽지 못한 정치가처럼 될 것이다. 교회에 있어서나 일에 있어서나 문제는 이 점에 있다. 역량 외에 합당한 마음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마음이 순수해야 하며 주님의 회복을 위해 단일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세상 정부에서 일하는 것과 같다. 그가 그의 국가와 국민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야망과 역량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의 동기가 순수하다면, 그는 국가의 영웅이 될 수 있고 국민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야망과 역량은 있으나 순수한 동기가 없다면, 그는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같은 원칙을 주님의 회복 안에서도 볼 수 있다.
나는 여러분 젊은이들이 야망을 갖기를 격려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역량뿐 아니라 순수한 동기도 우리에게 주시도록 주님을 앙망해야 한다. 우리가 셋 모두를 가질 때에만 주님의 손에서 유용하게 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조만간 우리는 문제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마음이 순수하다는 것은 목적이 단일한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는 단일한 목표를 갖는 것이다. 우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물론 우리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순수하고 단일한 마음으로 그분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열린 영과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일종의 체험과 누림이다. 우리가 그분을 볼 때, 그분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며 우리 존재 안으로 주입하신다.
욥기 42장은 욥의 이야기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한 신성한 계시가 하나님의 의해 어떻게 최종 완결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제가 주님에 대해 귀로만 들어 왔으나 / 이제는 제 눈으로 주님을 뵈었습니다. / 그러기에 제 자신을 혐오하며 /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욥 42:5-6) 이것은 욥이 그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하나님을 얻었고 자신을 혐오했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을 얻는 것과 동일하다(마 5:8). 하나님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요소와 생명과 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할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를 하나님의 일부가 되게 한다. 나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묘사할 때 ‘-과(와) 하나 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부가 되는 것, 곧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으로 조성되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보다 더 좋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때 하나님으로 조성되지만, 신격에는 조금도 참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구속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변화시키시고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계 22:4). 우리는 하나님을 봄으로써 변화되는데(고후 3:18),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볼 때 그분의 요소를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새로운 요소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고 옛 요소는 배출된다. 이러한 신진대사적인 과정이 변화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그분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권위로 그분을 대표할 수 있도록 우리를 하나님의 일부가 되게 한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을 혐오한다고 말했다. 우리의 체험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우리 자신을 더욱더 혐오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수록 더욱더 자신을 부인하게 된다.
2일
우리는 영이 깨끗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영 자체는 더럽지 않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은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라고 말하지만, 이 더러움은 영 자체의 더러움이 아니다. 이 더러움은 혼과 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의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영은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영을 에워싸고 있는 혼과 몸이 이미 사탄의 악한 요소와 혼합되어 더러워졌고 부패했다. 그러므로 영이 나오면서 혼과 몸을 통과할 때 더러움과 부패에 오염된다. 이러므로 영이 나타날 때 더러움, 부패함, 불순함, 부적당함 등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를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영을 처리하는 것은 영 자체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통로인 마음의 목적과 동기와 목표와 의도를 처리하는 것이다. 행동하거나 말하려고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선한지 악한지만을 묻지 말고, 우리의 내적 의도가 깨끗한지, 동기가 순수한지, 목표가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도 분별해야 한다. 우리의 행동 이면에 어떤 이기적인 목적이 있지는 않은가? 어떤 자기 지향적인 것이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 마음의 온갖 부정적인 목적, 바람직하지 못한 의도, 불순한 성향, 부당한 뜻, 혼합된 감정을 철저히 처리함으로써, 영이 나오도록 해야 할 뿐 아니라 올바르고 깨끗하고 순수하게 나오도록 해야 한다.
영을 처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불순한 의도들과 동기들, 여러 혼합들을 처리하는 것을 강조하는 데 비해, 양심을 처리하는 것은 여러 혼합들에 대한 양심의 느낌을 처리하는 것을 강조한다.
한 형제가 다른 한 형제에게 큰 불만을 지니고 많은 비평과 불평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이러한 느낌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양심 속에서는 이 일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한다. 이것은 그 형제 자신의 양심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형제는 이 불만스러운 느낌을 버리거나 이러한 혼합을 처리하고자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이 형제를 기억하거나 이 형제를 언급할 때는 언제나 그의 영에 여전히 이러한 혼합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의 영은 불만스럽고 비난으로 가득 차 있다. 그 형제가 다시금 긍휼을 얻어서 자신 속에 깊이 숨겨진 불만을 버리게 되면, 영 안에 더 이상 그러한 혼합을 지니지 않게 되고, 영을 처리하는 공과를 한 번 더 배우게 될 것이다.
속에 있는 본질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영을 처리해야 한다. 본질이 처리될 때에야 문제의 근원이 처리될 것이다.
영을 처리하는 실지적인 방법은 앞에서 언급한 각종 처리의 방법과 유사하다. 첫째로, 혼합들을 유죄판결 해야 한다. 둘째로, 성령의 능력으로 그러한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비뚤어진 영을 지니고 있다면, 먼저 이 비뚤어짐을 죄로 유죄판결 해야 한다. 그다음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부터 이 비뚤어짐을 일소해야 한다. 유죄판결 하고 제거하는 일이 성령의 능력을 통한 것이지만, 시작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기꺼이 그러한 처리를 하려고 해야 하고, 그렇게 처리하기를 갈망해야 한다. 그럴 때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칠 수 있다. 성령은 우리의 의지가 협력할 것을 요구하신다. 성령은 이 일을 하실 때, 우리에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하실 것이다.
신언노트, 2023 02 26
포로 되어 있다가 돌아온 이들을
정화하는 것의
내재적인 의미
되돌아온 그 포로들을 깨끗하게 함의
본질적인 중요성
에스라는
회복을
강하고 부유하게 했을 뿐 아니라
정화했다.
에스라가 도착하기 전에
혼합이 있었다.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교도 아내를 두어
이러한 혼합에서부터
자녀들을 낳았다.
이것은
우리가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예표이다.
회복은
거룩한 씨이다.
우리가
거룩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혼합이다.
회복은
거룩하다.
그러나 받아들인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그다지 거룩하지 않다.
그러므로 혼합이 있고,
정화하는 일을 할
에스라들이 필요하다.
에스라는
회복을 정화한 사람이었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
우리는
지극히 순수하고 단순하며
어떤 혼합도 없어야 한다.
문제는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이
바빌론에서 돌아오면서
그 배경도
함께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는
거룩한 씨를
이교도적인 모든 것에서
분별하기 위해
정화가 필요하다.
교파들에서 실행했던 것들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으로
가져오지 말라.
그것은
‘이교도 아내들’을
데려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배경에 속한 것들이
얼마나 좋은지와 관계없이
그것들을 포기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거룩한 씨가
어떤 이교도적인 것과도
결코 섞이지 않도록
매우 순수해야 한다.
회복이 거룩할 때
우리는
주님의 축복을
볼 것이다.
어떤 곳들에서
축복이 끊어진 이유는 바로
배경에 의하여 야기된
혼합 때문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초청해서
우리의 집회에서
말씀을 전하게 하지 않는 것 때문에
여러 차례 비난을 받았다.
우리는
교만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주의하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초청하여
말씀을 전하게 했을 때
문제만 일어났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공과를 배우게 되었다.
이 말은
우리의 마음이 좁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회복이
지극히 순수하고
지극히 단일하며
지극히 거룩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정화하는 일을 할
에스라들이
참으로 필요하다.
주님은
어떤 종류의 혼합(혼성물)도
좋아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창조하실 때
만물은
‘제 종류대로’였다.
우리는
순수해야 하며,
엄격하고
단순하며
우리의 종류대로여야 한다.
우리가 교파들이라면,
다만 교파들이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자유 단체들이라면
다만 자유 단체들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지방에 있는 그 교회라면,
다만 지방에 있는 그 교회여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제 종류대로
지극히 단순하고 단일하며
순수하고 참되어야 한다.
우리는
절대적이어야만 한다.
주님은
어떤 종류의 혼합도
결코 귀히 여기지 않으신다.
그것은 반드시
제 종류대로
존재해야 한다.
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
두 책 모두에
정화하는 일이 나와 있다.
한 번은
그 성전을 건축한 후였고,
또 한 번은
그 도시를 건축한 후였다.
주님의 회복의
모든 단계들에서
정화함이(깨끗하게 함이) 필요하다.
에스라는
제사장 겸 교사였으며,
백성에게
제사장의 가르침을 주어
그들이 정화되도록
도왔다.
그가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주었을 때
그들은
영감을 받았다.
그들 모두가
이방과의 혼합을(그 이상한 혼성체를)
다 버리겠다는
언약을 맺는 데에
동의했다.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혼합체의 각각의 모든 조각들을
거부해야 한다(내쫓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혼합에서
철저히 정화되어야 한다.
속된 것이나
하늘에 속한 본성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든 반드시
몰아내야 한다.
주님의 회복은 반드시
순수해야 한다.
그 집을 건축한 후에,
우리는
정화를 필요로 하고,
그 도시를 건축한 후에,
우리는
다시 정화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정화하는 일은
에스라뿐 아니라
느헤미야에 의해서도
실현되고
수행되었다.
에스라 아래서
적어도 두 번의 정화함이 있었고,
또 느헤미야 아래서
한 번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그 성벽의 회복이 필요하고,
또한 그 정화가 필요하다.
이것이
지방에 있는 그 모든 교회들 안에서
오늘날의 필요이다.
우리는
영이 깨끗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영 자체는
더럽지 않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은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라고 말하지만,
이 더러움은
영 자체의 더러움이 아니다.
이 더러움은
혼과 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의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영은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영을 에워싸고 있는
혼과 몸이 이미
사탄의 악한 요소와 혼합되어
더러워졌고 부패했다.
그러므로 영이
나오면서
혼과 몸을 통과할 때
더러움과 부패에
오염된다.
이러므로 영이
나타날 때
더러움, 부패함,
불순함, 부적당함 등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를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영을 처리하는 것은
영 자체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통로인 마음의
목적과 동기와
목표와 의도를
처리하는 것이다.
행동하거나 말하려고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선한지 악한지만을
묻지 말고,
우리의
내적 의도가 깨끗한지,
동기가 순수한지,
목표가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도
분별해야 한다.
우리의 행동 이면에
어떤 이기적인 목적이
있지는 않은가?
어떤 자기 지향적인 것이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
마음의 온갖 부정적인 목적,
바람직하지 못한 의도,
불순한 성향,
부당한 뜻,
혼합된 감정을
철저히 처리함으로써,
영이
나오도록 해야 할 뿐 아니라
올바르고 깨끗하고 순수하게
나오도록 해야 한다.
영을 처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불순한 의도들과 동기들,
여러 혼합들을
처리하는 것을
강조하는 데 비해,
양심을 처리하는 것은
여러 혼합들에 대한
양심의 느낌을
처리하는 것을
강조한다.
한 형제가
다른 한 형제에게
큰 불만을 지니고
많은 비평과 불평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이러한 느낌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양심 속에서는
이 일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한다.
이것은
그 형제 자신의
양심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형제는
이 불만스러운 느낌을
버리거나
이러한 혼합을
처리하고자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이 형제를 기억하거나
이 형제를 언급할 때는 언제나
그의 영에 여전히
이러한 혼합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의 영은
불만스럽고
비난으로 가득 차 있다.
그 형제가 다시금
긍휼을 얻어서
자신 속에 깊이 숨겨진
불만을 버리게 되면,
영 안에 더 이상
그러한 혼합을
지니지 않게 되고,
영을 처리하는
공과를
한 번 더
배우게 될 것이다.
속에 있는 본질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영을 처리해야 한다.
본질이 처리될 때에야
문제의 근원이
처리될 것이다.
영을 처리하는
실지적인 방법은
앞에서 언급한
각종 처리의 방법과
유사하다.
첫째로, 혼합들을
유죄판결 해야 한다.
둘째로, 성령의 능력으로
그러한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비뚤어진 영을 지니고 있다면,
먼저 이 비뚤어짐을
죄로
유죄판결 해야 한다.
그다음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부터
이 비뚤어짐을
일소해야 한다.
유죄판결 하고
제거하는 일이
성령의 능력을 통한 것이지만,
시작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기꺼이
그러한 처리를
하려고 해야 하고,
그렇게 처리하기를
갈망해야 한다.
그럴 때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칠 수 있다.
성령은
우리의 의지가 협력할 것을
요구하신다.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실 때,
우리에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하실 것이다.
사도행전 21장과
야고보서에는
혼합이 있다.
야고보는
구약과 신약을,
새 시대와 옛 시대를,
하나님의 새 백성과 옛 백성을,
새사람과 옛사람을
혼합하였다.
사도행전 21장은
예루살렘 교회 안에 있는
끔찍한 혼합을
폭로해 준다.
유대인 믿는 이들은 여전히
모세의 율법을 지켰고,
구약 시대 안에 머물며
유대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하나님의 신약 경륜과
시대에 뒤진 구약 경륜을
혼합하였다.
유대인 믿는 이들은
율법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
은혜 시대를
전적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두 시대의
구별을 무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시대적인 행정을 거스르며
그리스도의 표현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적인 계획에
큰 손상을 입히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율법은
하나님의 존재에 따라
사람에게
요구를 한다.
하지만 은혜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공급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이루게 한다.
은혜는
사람이 누린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큰 문제는
자아와 영의
혼합이다.
이러한 혼합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길
자격을 잃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 안에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많은 혼합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영은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영이
나오면서
혼과 몸을
통과할 때
더러움과 부패에
오염될 수 있다.
영을 처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불순한 동기들과 의도들,
여러 혼합들을
처리하는 것을
강조한다.
과거 몇십 년 동안
우리 가운데 있었던 문제는
어떤 사람들이
큰 뜻, 곧 야망은 있으나
역량을 소유하지 못한 데 있었다.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야망의
목표에 도달할
역량이 없다면,
그는
명예스럽지 못한
정치가처럼 될 것이다.
교회에 있어서나
일에 있어서나
문제는
이 점에 있다.
역량 외에
합당한 마음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마음이
순수해야 하며
주님의 회복을 위해
단일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세상 정부에서
일하는 것과 같다.
그가
그의 국가와 국민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야망과 역량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의 동기가
순수하다면,
그는
국가의 영웅이 될 수 있고
국민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야망과 역량은 있으나
순수한 동기가 없다면,
그는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같은 원칙을
주님의 회복 안에서도
볼 수 있다.
나는
여러분 젊은이들이
야망을 가지기를
격려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역량뿐 아니라
순수한 동기도
우리에게 주시도록
주님을 앙망해야 한다.
우리가
셋 모두를 가질 때에만
주님의 손에서
유용하게 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조만간 우리는
문제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마음이 순수하다는 것은
목적이 단일한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는
단일한 목표를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물론 우리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순수하고 단일한 마음으로
그분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열린 영과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일종의 체험과 누림이다.
우리가
그분을 볼 때,
그분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며
우리 존재 안으로
주입하신다.
욥기 42장은
욥의 이야기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한
신성한 계시가
하나님의 의해
어떻게 최종 완결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제가
주님에 대해
귀로만 들어 왔으나
/ 이제는 제 눈으로
주님을 뵈었습니다.
/ 그러기에 제 자신을 혐오하며
/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욥 42:5-6)
이것은
욥이
그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하나님을 얻었고
자신을 혐오했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을 얻는 것과 동일하다.
하나님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요소와 생명과 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할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를
하나님의 일부가 되게 한다.
나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묘사할 때
‘-과(와) 하나 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부가 되는 것,
곧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으로 조성되는 것이(구성되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보다(하나임보다)
더 좋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때
하나님으로 조성되지만,
신격에는
조금도 참여하지 않는다
(그 신격 안에
어떤 몫도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구속하셨고
거듭나게 하셨으며
거룩하게 하셨고
변화시키셨으며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하셨고
영광스럽게 하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봄으로써
변형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볼 때
그분의 요소를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한 새로운 요소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고
그 옛 요소는
배출된다.
이러한 신진대사적인 과정이
변형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형상 안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그분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권위로
그분을 대표할 수 있도록
우리를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 만든다
(하나님의 일부가 되게 한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을 혐오한다고
말했다.
우리의 체험에 따르면,
우리가 더 많이
하나님을 보고
또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더 많이
혐오하게 된다.
우리가 더 많이
하나님을 알수록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더 많이
부인한다.
우리는
마음과 양심과 영이
순수해야 한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음이 순수하다는 것은
목적이 단일한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는
단일한 목표를 가지는 것이다.
순수한 마음은
주님을
유일한 목표로
취하는 마음이다.
신약의 의미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을 얻는 것과 동일하고,
하나님을 얻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조성되도록
하나님의
요소와 생명과 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봄으로써
변형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볼 때
그분의 요소를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우리의 옛 요소는
배출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 안으로
변형되는 것이며,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그분을 표현하며
하나님의 권위로
그분을 대표하게 된다.
우리는
마음 안에서
순수해야 하며
주님의 회복을 위해
단일해야 한다(단순해야 한다).
오직 이럴 때에만
우리가
그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양심은
우리의 영의
주도적인 부분이다.
양심이 잘못되면 결코
올바른 영을 가질 수 없다.
양심이 잘못되면
영은 사실상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으려면 먼저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 다음 또한 우리에게는
‘순수한’ 양심이 필요하다.
우리가 행한
잘못을 처리하고
주님의 피를 적용하여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할 때,
이 양심은
거리낌 없는 양심이 된다.
다시 말하면
유죄판결을 받지 않는
선한 양심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일에서도
우리를 유죄판결 하지 않는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지만,
이 양심이
순수하지 않을 수 있다.
순수한 양심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뜻만 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을 구하지만
동시에
하나님 ‘이외의’ 무언가를 구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한 분만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순수하지 않다.
우리의 마음이
단일하고
순수하며
하나님만 구한다면,
이때 우리의 마음은
순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이외의 무언가를 구한다면,
이러한 마음은
우리의 양심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선한 양심을 가질지 모르지만,
이 양심은
순수하지 않게 된다.
우리의 양심은
가장 먼저 반드시
선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두 번째로 반드시
순수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선한 형제를
자주 만난다.
그는
하나님을 위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우리는
그가
복음의 일도 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자신 외에
다른 무언가를
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가
주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선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양심은
그를
유죄판결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어려움은
복음을 전하는
그의 일이
그의 삶에서
주님을 대치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주님‘께 속한’ 것이지만
‘주님’은 아니다.
이 형제는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순수한 양심은 결코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나는
순수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자신 외에는
그 무엇도
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순수한 양심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많은 처리를 통해 얻게 되는
순수하고 단일한 마음만이
우리의 양심에
영향을 주어
우리의 양심을
순수하고 단일하게
만들 수 있다.
마음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양심을
포함한다.
순수한 마음은
이 마음이
주님을 향해
단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생각이
순수해야 하고,
우리의 감정이
순수해야 하며,
우리의 의지가
순수해야 하고,
우리의 양심이
순수해야 한다.
우리가
순수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이
순수해야 한다.
우리가
순수한 양심을 가지려고 한다면,
가장 먼저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순수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단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생각이
주님 외의 ‘그 무엇도’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감정이
주님 외의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으며,
우리의 의지가
주님 외의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이럴 때에만
우리가
오직 주님만 구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순수한 양심을 가지려면
가장 먼저
순수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자.
우리의 생각이
오직 주님께만
완전하고도 온전히
점유되었는가?
우리의 감정이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을
더욱더
단순하고 전일하고 온전히
사랑하는가?
우리의 의지가
완전히
하나님을 위해 있는가?
우리가 정직하다면, 즉시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순수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방황하고,
우리의 감정은
다른 많은 것들을 사랑하며,
우리의 의지는
쉽게 변한다.
이 부분들이
순수할 때에만
우리가
순수한 마음을
가질 것이고,
우리의 마음이
순수할 때에만
우리의 양심이
순수할 것이다.
영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순수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매우 필수적이다.
우리의 양심이
순수하지 않다면,
우리의 영은 결코
강해질 수 없다.
우리는
주님 이외의 다른 것을
구할 것이다.
그것이
죄악된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 깊은 곳에
매우 섬세하게
유죄판결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매우 강하거나 거칠지는 않지만,
매우 부드럽고 섬세한 유죄판결이
우리가
완전히 주님을 위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항상 말한다.
그러한 유죄판결이
우리의 영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선한 양심뿐 아니라
순수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거리낌 없는 양심이다.
순수한 양심은
혼합된 것이 전혀 없이
순수하게 된 양심이다.
이러한 양심은
바울처럼
우리가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뜻만을
구한다고
증언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는
한 가지 문제는 바로
영과 혼의 혼합이다.
언제든지 그의 영이
나올 때
그의 혼도 나온다.
순수한 영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한
첫째 자격 조건은
능력이 많은가 적은가가 아니라
영이 순수한가이다.
큰 능력은 바라면서
영의 순수함은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 면에서 그들은
능력을 사용하여
건축한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그들은
자신이 건축한 것을
자신의 불순함으로 인해
허물어 버린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지만,
동시에
그들의 영에는
혼합된 것이 있다.
혼합의 문제는
일꾼들 가운데 있는
가장 큰 문제이다.
우리는 종종
그 형제들 안에 있는
생명을 만지지만(접촉하지만),
또한 죽음을 만진다.
우리는
그 형제들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지지만,
또한 그들의 자아를 만진다.
우리가
온유의 영을 만지지만,
또한 완고한 자아를 만진다.
우리는
그들 안에 계시는
성령을 발견하지만,
또한 그들 안에 있는
육체를 발견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의 사역 안에서
그분을 섬기도록 의도하시거나
또 만약 우리가
그분을 위해
말해야만 할 때,
우리는
은혜를 요청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하나님,
제 안에서 일하십시오.
저의 겉사람을
파쇄하시고,
그것을
허물어 주시며,
그것을
그 속사람으로부터
분리해 주십시오.”
만약 우리가
이 구출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우리가
입을 열 때마다
잠재의식적으로
우리의 겉사람을
표현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
그러하다.
우리는
가장할 수 없다
(가식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용되기 원한다면,
반드시 우리의 영이
해방되어야 하고,
또 반드시 이 영이
순수해야 한다.
만약 우리의 겉사람이
파괴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 말씀의 사역자들로서
봉사할 때
우리가
우리와 함께
우리 자신의 짐을
전달할 것이다.
주님의 이름이
손실의 고통을 겪을 것인데,
우리의 생명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혼합 때문이다.
주님의 이름이 고통을 겪을 것이고,
또 그 교회 또한 고통을 겪을 것이다.
교회생활과
주님의 일 안에 있는
불순함은
그 기본적인 죽이는 것이다
(그 근본적인 도살자이다).
그것은
각각의 모든 것들을 죽이는데,
만약 여러분이 불순하다면,
여러분을 포함한다.
어떤 것들에 관한
한 결정을 내릴 때
내가 불순하지 않도록
여러 해 동안
내가 얼마나
두려웠고 또 떨렸는지
오직 주님만 아신다.
책임 안에 있는,
그 장로 직분 안에 있는,
그 인도 직분 안에 있는
전제 조건은
순수함이다.
그 동역은(조화됨은, 조정은)
순수함을 필요로 한다.
그 교회생활 안에서
언제나 일들이 발생한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동기에 있어서
순수하지 않다면,
이번 곤경에 의해서든
아니면 다음 것에 의해서든
여러분이 얽히게 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다.
같은 이유로(마찬가지로),
만약 여러분이 순수하다면,
어떤 곤경도
여러분을
얽히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경우,
겉으로 보이는
우리의 인내는
불순함에서부터 온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리고
또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무례하거나
부주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순수함이
한 기본적인 요인이다.
그것은
모든 세균들을 죽인다.
오해가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아는가?
종종
그것의 근원은
불순함이다.
불순함이 없이
참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한 남편과 아내가
오해함 없이도,
말다툼할 수 있고
또 의견 충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어떤 불순함이 들어오면
오해가 계속된다
(한 오해 뒤에 다른 오해가 있다).
그들이
조심하고,
인내하며,
현명하려
애쓸 수 있지만,
그 불순함 때문에
그 오해들이 지속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마음 상하게 하는 것은
그 육체로부터 온다.
다른 사람들을
마음 상하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역시
그 육체로부터이다.
그 세상에서,
말하자면, 한 회사에서,
사람들은
서로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매우 조심하는데,
이는
그 세상이
불순함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교회에서도 또한
참되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교회가 아니다.
그 교회 안에는
각각의 모든 길들,
각각의 모든 구석들 안에
순수함을 제외한 어떤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오직 순수함만 있어야 한다).
순수함은
우리의 봉사의
한 기본적인
조건이다(상태이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한
(그 일의)
그 첫째 자격은
영의 순수함이다
(순수함의 영이다).
그의 영이 순수한
한 사람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순수함은
그 인도 직분 안에 있는
한 전제 조건이고,
우리의 봉사의
한 기본적인 조건이다.
혼합이라는 문제는
주님의 일꾼들 사이에(중에서)
가장 큰 문제이다.
불순함은 흔히(자주)
오해와 의심의
근원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모든 혼합을
완전히 처리할
필요가 있고
그 결과
우리의 영이
해방될 때,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용되기 원한다면,
우리의 영이
반드시 해방되어야만 하고,
또 우리의 영이
반드시 순수해야만 한다.
그 영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일하시는 것을
체험한 결과,
우리는 의롭게 된다.
자연스럽게 우리 속존재는
투명해지고
수정처럼 맑아지며,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아도 즉각적으로
주님의 생각을 알게 되고
주님의 뜻과 일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생각과 뜻에 따라
행할 것이다.
우리가
생명 주시는 영을 주입받고
생명 주시는 영으로 적셔진다면,
우리의 내적 존재는
투명해질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생각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주님의 뜻 안에 있게 될 것이고
그분의 뜻을 행할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주님께 올바를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다른 이들을 향하여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고,
심지어 우리의 물질적인 소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즉, 큰일뿐 아니라
작은 일에서도
의로운 사람,
하나님과 다른 이들과 자기 자신에게
의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형상
곧 표현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성의 길은
순금이다.
금은
하나님의 본성을 상징한다.
새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간 후에
우리는
우리의 길인
신성한 본성에 따라
행해야 한다.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
유일한 길의 순금이
‘투명한 유리’와 같다는 것은
조금도 불투명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금으로 된 길은
수정처럼 맑으며
조금도 불투명하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의 유일한 길로 취한다면,
어떠한 혼합도 없이
순수할 것이고
어떠한 불투명함도 없이
투명할 것임을
가리킨다.
그 도시 자체가
어떤 혼합도 없는
순금이다.
이것은
교회가 반드시
백 퍼센트
하나님께 속해야 함을
(하나님께로부터 있음을)
가리킨다.
교회는 반드시
절대적으로
그 신성한 본성에 속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
그 교회는
신성한 본성의 어떤 부분과
타락한 인성의 어떤 부분의
한 혼합이다.
우리가
참된 교회생활을 가지기 원한다면,
그 교회 자체가
순수한 금이어야만 한다.
즉 전적으로 신성한 본성에 속해야 한다.
이 때문에
우리를
정화하고 순수하게 하는
십자가의 일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약 삼십 년 전에
나는
순수한 것과 깨끗한 것이
서로 다르다는
짤막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매우 놀랐었다.
나는 깨끗한 것만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마치 순금이
어떤 혼합도 없이
맑아지기 위해
정화될 필요가 있는 것처럼
우리도 여전히
정화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때 이후로 주님께서
나에게
깨끗한 것과 순수한 것 사이의 차이를
점차적으로 보여 주셨다.
한 사랑스러운 형제가
친절하고 상냥하고 깨끗할 수 있지만,
여전히 그가
한 혼합을 가질 수 있다.
그는
투명하지 않고
불투명하다.
그는
친절하고 깨끗하지만
우리는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
깨끗한 것과
순수하고 투명한 것은
별개의 것이다.
종종 우리는
주님 안에 있는
어떤 성도를 만날 때,
그가
깨끗할 뿐 아니라
맑은 유리처럼
투명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삼십여 년 동안
니 형제님과 함께 있었다.
그 모든 해 동안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그가 투명한 사람임을
느꼈다.
내가
그 앞에 앉았을 때
나는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단상에 올라설 때마다
청중은
그가 투명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단지 깨끗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의해
정화될 필요가 있다.
새 예루살렘 도시는
맑은 유리와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투명한 유리와 같은
순금이다.
금은
하나님의 본성을 상징한다.
성이
순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그 성이
신성한 본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과
신성한 본성이
그 성의 요소라는 것을
가리킨다.
길과 성을 구성하는 순금은
맑은 유리와 같은데,
이것은
온 성이 투명하며
불투명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의 유일한 길로 취한다면,
어떠한 혼합도 없이
순수할 것이고
어떠한 불투명함도 없이
투명할 것이다.
우리가
생명 주시는 영을 주입받고
생명 주시는 영으로 적셔진다면,
우리의 내적 존재는
투명하고
수정처럼 맑게 될 것이다.
변절한 기독교계와
진정한 교회의
차이는 바로,
전자는 혼합이고
후자는 순수하다는 것이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새 예루살렘처럼
어떤 혼합도 없이
수정처럼 맑아야 한다.
1일
에스라는 회복을 강하고 부유하게 했을 뿐 아니라 정화했다. 에스라가 도착하기 전에 혼합이 있었다.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교도 아내를 두어 이러한 혼합에서부터 자녀들을 낳았다. 이것은 우리가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예표이다. 회복은 거룩한 씨이다. 우리가 거룩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혼합이다. 회복은 거룩하다. 그러나 받아들인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그다지 거룩하지 않다. 그러므로 혼합이 있고, 정화하는 일을 할 에스라들이 필요하다. 에스라는 회복을 정화한 사람이었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 우리는 지극히 순수하고 단순하며 어떤 혼합도 없어야 한다. 문제는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이 바빌론에서 돌아오면서 그 배경도 함께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는 거룩한 씨를 이교도적인 모든 것에서 분별하기 위해 정화가 필요하다. 교파들에서 실행했던 것들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으로 가져오지 말라. 그것은 ‘이교도 아내들’을 데려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배경에 속한 것들이 얼마나 좋은지와 관계없이 그것들을 포기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거룩한 씨가 어떤 이교도적인 것과도 결코 섞이지 않도록 매우 순수해야 한다.
회복이 거룩할 때 우리는 주님의 축복을 볼 것이다. 어떤 곳들에서 축복이 끊어진 이유는 바로 배경에 의하여 야기된 혼합 때문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초청해서 우리의 집회에서 말씀을 전하게 하지 않는 것 때문에 여러 차례 비난을 받았다. 우리는 교만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주의하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초청하여 말씀을 전하게 했을 때 문제만 일어났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공과를 배우게 되었다. 이 말은 우리의 마음이 좁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회복이 지극히 순수하고 지극히 단일하며 지극히 거룩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정화하는 일을 할 에스라들이 참으로 필요하다. 주님은 어떤 종류의 혼합도 좋아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창조하실 때 만물은 ‘제 종류대로’였다. … 우리는 순수해야 하며, 엄격하고 단순하며 우리의 종류대로여야 한다. 우리가 교파들이라면, 다만 교파들이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자유 단체들이라면 다만 자유 단체들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지방 교회라면, 다만 지방 교회여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제 종류대로 지극히 단순하고 단일하며 순수하고 참되어야 한다. 우리는 절대적이어야만 한다. 주님은 어떤 종류의 혼합도 결코 귀히 여기지 않으신다. 그것은 반드시 제 종류대로 존재해야 한다.
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 두 책 모두에 정화하는 일이 나와 있다. 한 번은 성전을 건축한 후였고, 또 한 번은 성을 건축한 후였다. 주님의 회복의 모든 단계에서 정화하는 일이 필요하다.
에스라는 제사장 겸 교사였으며, 백성에게 제사장의 가르침을 주어 그들이 정화되도록 도왔다. 그가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주었을 때 그들은 영감을 받았다. 그들 모두가 이방과의 혼합을 다 버리겠다는 언약을 맺는 데에 동의했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모든 혼합을 배제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혼합에서 철저히 정화되어야 한다. 속된 것이나 하늘에 속한 본성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든 반드시 몰아내야 한다. 주님의 회복은 반드시 순수해야 한다. 우리는 집을 건축한 후에 정화가 필요하고, 성을 건축한 후에 다시 정화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정화하는 일은 에스라뿐 아니라 느헤미야에 의해서도 실현되고 수행되었다. 에스라의 인도 아래서 적어도 두 번의 정화하는 일이 있었고, 느헤미야의 인도 아래서는 한 번의 정화하는 일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성벽의 회복이 필요하고, 또한 정화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오늘날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