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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첫째 가는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생명나무이신 주님을 누리며, 예수님의 증거인 금등잔대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목표인 새 예루살렘을 건축함

요한계시록 2장 7절에서 생명나무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고(한 토막의 목재인 나무로 암시되어 있음) 부활하신(하나님의 생명으로 암시되어 있음)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교회 안에 계시며, 교회는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이 새 예루살렘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모든 백성의 자양분과 누림을 위한 생명나무가 되실 것이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를 포함하여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은 사도 바울의 약혼시키는 사역을 버리고 떠났다. 그리하여 우리는 약 이십육 년 후에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를 썼을 때, 그들이 그들의 첫째가는 사랑을 버렸고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누림을 잃어버린 것을 본다.

진정한 신약의 사역은 항상 우리를 분발시켜 첫째가는 사랑으로 주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며, 우리를 강화하여 단순하게 주 예수님을 먹고 누림으로써 생명 공급을 얻게 한다.

주님을 첫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모든 일에서 그분께 으뜸의 위치 곧 첫째 위치를 드리며, 그분의 사랑에 강권되어 우리 생활에서 그분을 모든 것으로 여기고 모든 것으로 취하는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의 결론의 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패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함께 하기를 바란다는 축복이었다. 에베소서에서는 풍성한 느낌이 담겨 있는 ‘사랑 안에서’라는 구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에베소서의 목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내적인 실질인 사랑 안으로 이끌려 사랑이신 하나님을 누리고 또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분의 임재를 누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는 주님을 사랑하는 문제에서 실패했다. 그러한 실패는 역대로 교회가 실패한 주된 이유가 되었다.

요한계시록 2장 1절부터 7절까지에 기록된, 주님께서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게 보내신 서신에는 네 가지 주된 중점이 있다. 이 네 가지 주된 중점은 영어 알페벳 ‘엘(l)’로 시작하는 네 단어 곧 사랑(love), 생명(life), 빛(light), 등잔대(lampstand)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께 모든 길과 모든 일에서 으뜸의 위치를 드림으로써 첫째가는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생명나무이신 그분을 누릴 것이고, 이 생명은 생명의 빛이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금등잔대로서 곧 예수님의 증거로서 빛을 비출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등잔대는 우리에게서 옮겨질 것이다.

금등잔대는 삼일 하나님을 상징한다. 실질이신 아버지는 아들 안에 체현되시고, 체현이신 아들은 그 영을 통해 표현되시며, 그 영은 교회들로서 완전히 실재화되시고 표현되시며, 교회들은 예수님의 증거이다.

신성한 사상에서, 금등잔대는 사실상 꽃받침과 아몬드꽃이 있는 살아 있고 자라는 나무이다. 따라서 금등잔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체현되신 삼일 하나님을 살아 있는 부활의 금나무로 묘사한다. 이 나무는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로 말미암아, 우리로부터 자라고, 가지를 내며, 봉우리를 맺고 꽃을 피워 빛의 열매를 맺는다. 이 빛의 열매(그 영의 열매)는 본성에 있어서 선하고, 절차에 있어서 의로우며, 표현에 있어서 참되다. 이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매일의 행함에서 실재로서 표현되실 수 있다.

생명나무를 먹는 것, 곧 우리의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은 교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한다.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는 ‘먹기 좋은'(창 2:9)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그분을 먹을 수 있고, 하나님의 표현을 위하여 그분으로 조성될 수 있다.

교회생활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달려 있다. 우리가 그분을 더 많이 누릴수록 교회생활의 내용은 더욱더 풍성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누리려면, 첫째가는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향한 첫째가는 사랑을 버린다면,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놓칠 것이고, 예수님의 증거를 상실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등잔대가 우리에게서 옮겨질 것이다.

이 세 가지, 즉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님을 누리는 것과 주님의 증거가 되는 것은 함께한다.

주님의 회복은 첫째가는 사랑, 곧 가장 좋은 사랑으로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생명나무이신 주 예수님을 먹는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을 건축하기 위한 것, 즉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목표인 새 예루살렘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려면, 우리는 항상 그분께 “주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씀드려야 한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향해 불타는 사랑을 가지고 모든 일에서 그분께 첫째 위치를 드린다면, 그분의 온 존재를 누릴 것이다.

주님을 믿는 것은 생명이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생명이신 그분을 누리는 것, 즉 우리가 받아들인 바로 그 인격을 누리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랑은 이러한 놀라운 믿음에서 비롯되며, 우리가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의 모든 풍성을 살아 낼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을 때 받아들인 바로 그 생명은 한 인격이며, 이 인격을 적용하고 누리는 유일한 길은 첫째가는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신 주 예수님께서 한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이 순간 그리고 날마다 그분을 새롭게 접촉하여 그분의 현재의 임재를 누려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여러분 자신을 드리라. 다른 어떤 길도 그렇게 유력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어떤 방법도 그렇게 안전하고 부요하고 누림이 충만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분을 사랑하라. 그 밖의 어떤 것도 주의하지 말라.” – 아가서에 묘사된 생명과 건축, 41쪽.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때, 그분은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며, 그분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처를 정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저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저를 강권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향하여 살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가 항상 당신을 사랑하도록 지켜 주십시오.”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께 “주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사랑 안에 지켜 주십시오! 당신 자신으로 저를 매혹해 주십시오! 저를 항상 당신의 사랑스러운 현재의 임재 안에 지켜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려야 한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우리는 주님과의 교통 안에서 그분의 임재를 더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내재적인 방식으로 주님의 회복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주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회복에 관해서 끝난 것이다.

이것에 근거하여 우리는 이렇게 노래하고 기도할 수 있다. “내 주를 진정 사랑하지만 / 내 사랑 없으니 / 모든 사랑은 주의 것이라 / 사랑으로 사네 / 아무것 아닌 나를 비워서 / 주님 안에서 삼킨 바 되리”(영한 동번 찬송가 546장 1절). “다른 것을 사랑한 맘 / 결코 안식 못하리 / 주께 내 맘 드리고서 / 주만 사랑하리라”(영한 동번 찬송가 547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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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요 14:21 나의 계명들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고,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 자신을 나타낼 것입니다.”

요 14: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나의 말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서로 거처를 정할 것입니다.

우리는 온종일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교회생활의 축소판에서 가장 중요한 방면은 바로 주님께 기름을 부었던 사랑이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그분의 임재는 항상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수록 더욱더 그분의 임재를 누리게 된다.
그분의 임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 자신을 누리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더 갖게 될 것이다.
주님의 임재 안에 있을수록 우리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온 존재를 더 누릴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직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오십 년 동안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분께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사랑스러우시다고 느낀다.
누구도 그분만큼 사랑스럽지 않다.
아가는 그분 전체가 사랑스럽다고 말한다(5:16, ‘흠정역 성경’ 참조).
주님의 회복은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회복에서 끝난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21절과 23절은 아들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들과 함께 가셔서 그 사람과 함께 거처를 정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에 이어서, 아들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우리 안에 거하러 오신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믿고서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는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일지라도, 우리 가운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몇 명인가?
대상이신 아버지는 체현이신 예수님 안에 계시고, 이 체현은 아들의 실재화이신 그 영 안에 있으며, 이 실재화는 바로 우리 모두 안에 지금 거하고 계시는 그 영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심지어 매시간 주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누리는지의 여부를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아침에 우리는 주님과 시간을 보내면서 주님의 나타나심을 누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는 우리의 배우자에게 불만이 생겨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나타나심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그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잃어버렸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잃어버릴 때 자신들이 구원도 잃어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영은 항상 믿는 이들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은 ‘엘리베이터 구원’이 아니라, 결코 움직일 수 없는 ‘계단’이다.
비록 우리가 이 계단 위에 있지만, 우리는 계단의 최상단의 복을 누리기 원한다.
우리는 ‘최하층’이 아닌 ‘최상층’에 있기를 원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때, 우리는 최상층으로 옮겨진다.
그때 우리는 하늘에 속한 모든 것을 보게 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단의 맨 아랫부분에 있게 되어 매우 조금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구원의 계단 위에 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때, 그분의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뿐 아니라 그분께서 직접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과의 교통 가운데서 우리가 사랑하는 분의 임재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아버지도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다.
아들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거처를 정하고 거하시려고 아들과 함께 오신다.
우리는 더욱더 우리를 향한 아들의 나타나심 안으로 이끌림으로써, 아버지와 아들께서 우리와 함께 거처를 정하시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주님의 구원의 계단을 오를 필요가 있다.
그럴 때 그분은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며, 그분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누림을 위해 우리와 함께 거처를 정하실 것이다.

5일

아 1:2-4 “그이 입의 입맞춤들로 내게 입맞춤해 주었으면! 당신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나은 까닭이랍니다.
당신의 바르는 기름은 향기가 좋고 당신의 이름은 쏟은 관유 같아요.
그러하기에 처녀들이 당신을 사랑한답니다.
나를 이끌어 주세요, 우리가 당신을 좇아 달려가렵니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우리가 단정하는 것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인격이다.
그리고 이 인격을 적용하고 누리는 길은 사랑 외에 없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성도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곤 하였다.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십시오.”
우리도 동일한 기도를 해야 한다.
일단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본다면, 우리는 참으로 강권되고 참으로 사로잡히며 참으로 매혹될 것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을 사랑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을 사랑함으로 그분을 누릴 것이다.
이것이 생명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 인격이기 때문에, 그분을 체험하는 길은 사랑 외에 없다.
오직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우리는 그분을 누릴 수 있다.

만일 이 인격을 대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뜨거운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곧 애정으로 가득하여 항상 그분을 접촉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아가는 주 예수님 전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분이신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은 주 예수님께서 얼마나 매력적이신지, 얼마나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는 천 번이라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주 예수님, 당신은 전체가 사랑스러우십니다!
오, 주 예수님, 당신은 전체가 사랑스러우십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여러분 자신을 드리라.
다른 어떤 길도 그렇게 유력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어떤 방법도 그렇게 안전하고 부요하고 누림이 충만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분을 사랑하라.
그 밖의 어떤 것도 주의하지 말라.
가르침과 교리와 은사와 능력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님, 저를 당신의 사랑 안에 지켜 주십시오!
당신 자신으로 저를 매혹해 주십시오!
저를 항상 당신의 현재의 임재 안에 지켜 주십시오!”
만일 우리가 이런 식으로 기도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어떤 사랑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생명이 어떤 생명인지 알게 될 것이다.
단순히 우리는 주님 자신에 의해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그분을 사랑하는 한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하다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실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그분께서 능력이 되실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합당하고 충분한 지식이 필요하다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심지어 그것이 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시다.
그 밖의 어떤 것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그분의 사랑을 계시하시도록 단지 그분을 주목하라.
아가 1장 4절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이끌어 주세요.
우리가 당신을 좇아 달려가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를 요청해야 하며, 그럴 때 다른 이들도 우리와 함께 그분을 좇아 달려갈 것이다.
그분을 우리의 생명으로 취하기 위해 우리는 그런 식으로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 교회의 타락은 주 예수님을 향한 첫째가는 사랑을 잃어버린 데서 비롯되었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는 좋은 행위들이 많이 있었고 그 교회는 심지어 믿음도 강했지만, 주님은 그 교회를 책망하시며
“그러나 너에게 책망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네가 첫째가는 사랑을 버린 것이다.”(4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신선하고도 제일 좋은 사랑을 잃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들의 타락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뒷걸음치기 시작한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께 나아가야 하고, 그분을 대해야 한다.
“주님, 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저는 사랑스러우신 당신 외에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 자신을 저에게 보여 주십시오!
당신을 따라 달려가도록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오, 주님, 당신의 사랑에 강권되도록 제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십시오!
주님, 당신을 위해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당신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저는 다만 당신을 저의 인격으로 취하기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인격적 특성이 저의 인격적 특성이 되기를 원하고, 당신의 뜻이 저의 뜻이 되기를 원하며, 당신의 갈망이 저의 갈망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모든 것이 저의 모든 것이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것이 단순히 믿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또한 사랑의 문제임을 본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향해 그러한 불타는 사랑을 가진다면, 그분의 온 존재를 누릴 것이다.
주님께 가서, 여러분이 그분을 좇아 달릴 수 있도록 여러분을 이끌어 주시기를 요청하라.
여러분은 ‘조에(zoe) 생명’이 그처럼 사랑스럽고 놀라운 인격이며, 사랑이야말로 그분을 대하는 길임을 인식해야 한다.

4일

계 2: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회개하여 첫째가는 일을(the first works; 그 첫 번째 일들을) 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갈 것이며, 네가 회개하지 않는 한 너의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옮길 것이다.

계 2:7 … 이기는 이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를 주어서 먹게 할 것이다.’

생명나무를 먹는 것, 곧 우리의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은 교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한다.
교회생활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달려 있다.
우리가 그분을 더 많이 누릴수록 그 내용은 더욱더 풍성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누리려면, 첫째가는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향한 첫째가는 사랑을 버린다면,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놓치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증거를 상실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등잔대가 우리에게서 옮겨질 것이다.
이 세 가지, 즉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님을 누리는 것과 주님의 증거가 되는 것은 함께한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처럼 그렇게 훌륭하고 질서 있고 정연한 교회 안에서, 우리는 먼저 첫째가는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을 이겨야 한다.
두 번째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먹는 것을 지속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께 으뜸의 위치를 드리며 매일 생명나무이신 그분을 누린다면, 우리는 놀라운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때, 하나님의 낙원을 가지게 된다.
오늘날 우리의 낙원은 교회생활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께 으뜸의 위치를 드리지 않거나 주님을 누리지 않는다면, 한 달 동안만 그렇게 해도 교회생활은 우리에게 유쾌하지 않은 장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첫째가는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을 이기고 그리스도를 먹는 것 곧 주님을 누리는 것을 지속할 때, 즉시 교회생활은 우리에게 낙원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우리의 느낌과 태도는 우리의 상태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모든 일에서 주님께 으뜸의 위치를 드리며 온종일 생명나무이신 그분을 누린다면, 교회의 상태와 관계없이 곧바로 교회는 우리에게 낙원이 된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를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첫째가는 사랑을 버리는 것을 이겨야 하고,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먹는 것을 지속해야 하며, 또한 등잔대로서 신성한 빛을 비추어야 한다.
사랑은 생명과 관계있고, 생명은 빛과 관계있다.
사랑과 생명과 빛은 일종의 삼일성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든 일에서 첫째가 되시게 한다면, 우리에게는 사랑이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과 생명이 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누릴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생명이 있다면, 이 생명은 우리에게 빛이 된다.
등잔대인 교회의 빛은 교회 시대의 어두운 밤에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단체적으로 비춘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과 사랑과 빛으로 누리고 있다면, 우리가 있는 지방에서 등잔대의 빛남인 예수님의 증거를 가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과 승천과 강림과 두 번째 나타나심을 증언할 것이다.
빛을 비추어 내는 것은 일종의 증거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를 비추어 내야 한다.

우리는 영어 알파벳 ‘엘(l)’로 시작하는 네 단어 곧 사랑(love), 생명(life), 빛(light), 등잔대(lampstand)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반드시 주 예수님께 모든 길과 모든 일에서 으뜸의 위치를 드림으로써 첫째가는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생명나무이신 그분을 누릴 것이며, 곧바로 이 생명은 생명의 빛이 된다.
그런 다음 우리는 등잔대로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단체적으로 빛을 발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등잔대는 개인적으로는 우리에게서, 단체적으로는 교회에게서 옮겨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든 일에서 첫째로 취한다면, 우리에게는 사랑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분을 생명으로 누리며 그분과 함께 빛을 비추어 낼 것이며, 예수님의 증거로서 빛을 비추는 등잔대가 될 것이다.

3일

계 2:4 그러나 너에게 책망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네가 첫째가는 사랑을 버린 것이다.

막 12:30 그러므로 그대는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그대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간증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육십칠 년 전인 1925년에 주님을 받아들였다.
이 모든 세월이 지난 후에도 나는 주님께서 여전히 나에게 매우 친밀하시다는 것과 내가 그분께 매우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사랑스러운 이분, 곧 살아 계신 이분을 좋아한다.
나는 그분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기쁘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오, 주 예수님! 오, 주 예수님!”이라고 말해야 한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덧붙인다면 더욱 좋다.
우리는 “오, 주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 주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 얼마나 친밀하고 달콤하며, 이 얼마나 다정한 말인가!

자주 나는 어떤 일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옳지 않거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내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주 예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린다.

우리는 첫째가는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을 이겨야 한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는 좋은 교회였다.
그 교회는 질서 있고 정연한 교회였다.
틀림없이 우리는 그러한 교회를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질서 있는 교회가 첫째가는 사랑을 버렸다.
‘첫째가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누가복음 15장 22절에서 ‘제일 좋은’으로 번역된 단어와 같은 단어이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첫째가는 사랑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제일 좋은 사랑임에 틀림없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겉옷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제일 좋은’이라는 말은 첫째가는을 의미한다.

첫째가는 사랑은 하나님 자신인 그 사랑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심을 본다.
온 우주 가운데 하나님만이 사랑이시다.
주님은 남편들에게 자기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나 남편들이 자신 안에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이신 유일한 한 인격이 계시는데,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제일 좋으실 뿐 아니라 첫째가신다.
하나님은 시작이시다.
하나님은 처음이시다.
골로새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으뜸이 되셔야 한다고 말한다.
그분은 반드시 으뜸의 위치에 계셔야 한다.
그리스도는 반드시 첫째이셔야 한다.
첫째가는 사랑을 회복하는 것은 주 예수님을 모든 일에서 으뜸으로 여기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에서 모든 것이 되시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첫째가는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을 이겼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큰일에서만이 아니라 작은 일에서도 첫째이셔야 한다.
우리는 옷을 입는 방식과 머리를 손질하는 방식에서 그리스도께 으뜸의 위치를 드려야 한다.
우리가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께 으뜸의 위치를 드릴 때, 이것이 바로 잃어버린 첫째가는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첫째가는 사랑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주님과 우리의 주인께서 모든 일에서 첫째가는 분이 되시게 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때때로 나는 옷을 입고 있을 때, 주님께 “주님, 당신은 이 셔츠를 좋아하십니까? 당신은 이 신발을 좋아하십니까?”라고 말씀드린다.
그러한 대화는 첫째가는 사랑이신 주님과 매우 친밀하게 대화하는 것이다.
첫째가는 사랑을 회복하는 것은 큰일에서뿐 아니라 작은 일에서도 그분께 으뜸의 위치를 드리는 것이다.
남편들은 아내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에서 그리스도께 으뜸의 위치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으뜸의 위치를 드리지 않은 모든 일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를 구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일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 으뜸의 위치를 드려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달라질 것이고, 우리의 느낌도 달라질 것이다.
온종일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쁠 것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주님과 함께 즐거워할 때, 모든 것이 유쾌할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즐거워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이 불쾌할 것이다.
은혜이신 주님을 누리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첫 번째로 이겨야 하는 것은 첫째가는 사랑을 버리는 것이다.
첫째가는 사랑을 버리는 것이 역대로 교회의 실패의 근원이자 주된 원인이다.

2일

엡 5:25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엡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패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에서는 풍성한 느낌이 담겨 있는 ‘사랑 안에서’라는 구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후에 주님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를 책망하셨는데, 그 이유는 에베소에 있는 교회가 주님을 향한 첫째가는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곧 그리스도의 아내이다.
몸의 방면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하는 것이며, 아내의 방면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 서신의 수신자인 에베소에 있는 교회는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서 실패했다.
바로 이러한 실패가 역대로 교회가 실패했던 근본 원인과 주된 이유이다.

믿는 이들이 생명의 성장을 위해 뿌리를 내리고 건축을 위하여 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사랑의 상태 안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신성한 사랑이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께 우리 안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시고 터를 잡으실 기회를 드리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는 그분의 선한 기쁨에 따라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주님, 제가 저의 선호에 따라서가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마음의 갈망과 당신의 계획에 따라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타고난 인성에는 다른 사람, 특별히 말썽 많은 사람을 짊어질 능력이 없다.
우리가 신성한 사랑 안에서 이러한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비평을 주의하지 않고 빨리 지나가게 할 것이다.

참된 것을 붙잡는 것은 무엇이든지 실재인 것, 진리인 것을 붙잡는 것이다.
에베소서에 의하면, 실재이고 진리인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이다.
따라서 참된 것을 붙잡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붙잡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신성한 사랑으로 주님과 그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신성한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한다.
즉, 살고 행동하고 존재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신성한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거친 방식이나 이기적인 갈망이나 타고난 선한 의도 안에서가 아니라,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고,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게 되며, 몸의 하나를 위해 서로를 짊어지고, 참된 것 곧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를 붙잡아, 그리스도의 표현을 위하여 하나의 유기체인 몸 안에서 연결되고 짜이고 함께 건축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신성한 사랑 안에서 행하고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 안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면, 부패함 없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1일

계 2:7 … 이기는 이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를 주어서 먹게 할 것이다.’

고후 11:2-3 내가 하나님의 질투로 여러분에게 질투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러분을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순수한 한 처녀로 드리려고 약혼시켰기 때문입니다. 전에 뱀이 간교하게 하와를 속였던 것처럼, 나는 다만 여러분의 생각이 부패하게 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단순성과 순수성을 잃어버릴까 두렵습니다.

성경에서 생명나무는 항상 하나님의 모든 풍성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이분은 우리의 음식이 되신다.
요한계시록 2장 7절에서 ‘나무’라는 단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교회 안에 계시며, 교회는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이 새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모든 백성을 양육하기 위한 생명나무가 되실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그가 하나님의 질투로 그들에게 질투한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바울은 그들을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순수한 한 처녀로 드리려고 약혼시켰다고 말했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의 바울의 말은 깊은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지며 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분발시킨다.
매우 자주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들은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진다.
메시지를 몇 쪽 읽고 나면 우리 안에서 주 예수님을 향한 부드러운 느낌이 일어나고 우리는 그분께서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고 귀하신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오, 주 예수님, 사랑스러운 신랑이시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사역과 당신의 회복에 감사를 드립니다.”
진정한 사역은 우리의 신랑이신 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분발시킨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사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남편이시며, 저는 그분께 속한 처녀의 일부입니다.
저는 저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사역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분은 기쁘게 하고 사랑스러운 분으로서 제가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회복의 목표는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유일한 남편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그분께만 속해야 한다.
우리가 순수한 한 처녀로 이 남편께 이끌리어 그분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며 그분께 속하는 한, 우리는 보존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지키고 거룩하게 하며 적시고 변화시킬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 매혹되어 그분을 사랑하고 감상하며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교도들의 가르침이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와에게 했던 속이는 말과 비교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창세기 3장을 읽어 보면, 우리는 뱀이 하와가 생명나무를 누리는 것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뱀이 하와가 생명나무를 누리는 것에서 떠나게 한 방법은 그녀가 또 다른 나무, 즉 죽음을 가져오는 선과 악의 지식나무를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목표는 생명이다.
생명나무로 상징된 이 생명은 그 영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다.
뱀, 곧 원수인 사탄인 방법은 사람들이 이 생명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죽음을 가져오는 지식과 선과 악으로 돌아서게 하려고 힘쓴다.
죽음은 하나님을 누리는 것에서 끊어지게 하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이신 하나님을 누리는 것에서 끊어지게 하려고 힘쓴다.
역대로, 간교한 뱀은 사람들이 그들의 생명이신 하나님을 누리지 못하게 하려고 가르침들을 이용했다.
이들 가르침의 대부분은 지식과 선과 악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의 결과는 하나님에게서 끊어지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가르침이든지 여러분이 주님을 누리는 것을 중단시킨다면, 그 가르침이 얼마나 좋아 보이는지와 상관없이 그것은 죽음에 속한 것이다.

어떤 사람의 전파하는 것이나 가르치는 것이 우리에게서 우리의 생명 공급이신 주님을 누리는 것을 빼앗아 간다면, 그 가르침은 뱀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주님의 사역은 항상 우리를 강화하여 우리의 생명 공급이신 그분을 누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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