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여러분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이러한 일이 결국에는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을 나는 알기 때문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어떤 일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매사에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 빌 1:19-21상.
그리스도를 확대하도록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생명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지 못한 실패와 그리스도를 확대하지 못한 패배에서 구원받는다.
빌립보서 1장 19절에서 구원은 그리스도를 살고 확대하도록 격려받고 강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이 필요하다.
바울은 그의 구원이 ‘여러분의 간구’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공급이다. 바울은 비록 갇혀 지냈지만, 그리스도의 몸에서 고립되지도 않았고, 몸의 공급에서 끊어지지도 않았다.
바울이 구원을 체험한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이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넘치는 공급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누리고 그분으로 충만할 때, 그리스도는 확대되셔서 우리의 표현이 되신다.
우리는 몸의 생활 안에 있어야 하며 몸을 건축하는 제사장 봉사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확대하도록 그리스도를 살기 위해, 그 영의 넘치는 공급 곧 몸의 공급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다.
사도의 몸이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셨다. 즉 그분께서 (무한히) 위대하시다는 것이 드러나고 선포되었으며, 그분께서 높아지시고 또 높이 찬양을 받으셨다.
사도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무한히 위대하시다는 것을 표현할 기회를 사도에게 준 것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은 그분을 최고의 누림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리스도를 확대하여, 자신을 감옥에 가둔 사람들의 눈에 그리스도께서 위대하게 나타나시도록 했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바울은 기쁨이 충만했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였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것에 관한 것이고, 이러한 체험과 누림은 기쁨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이 책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바울이 기뻐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비추어 내고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무한히 위대하신 것에 대한 선포이자 그리스도께서 다함이 없으신 것에 대한 선포였다.
바울의 모든 생활과 일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거나,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이나 다른 공로나 장점을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와 그가 행한 것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살고 그리스도를 살아 냄으로써, 참다운 교회생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단체적인 표현을 위해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다.
제사장 의복으로 상징된 그리스도의 표현을 가질 때, 우리는 제사장들로서 섬길 자격을 얻고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 속하도록 거룩하게 분별된다. ‘우리의 거룩한 의복’이신 그리스도의 표현은 영광과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다.
‘영광’은 신성한 속성들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름다움’은 인간 미덕들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미덕들의 아름다움과 고르게 섞인 신성한 영광을 표현할 때마다, 우리는 제사장 체계로 함께 건축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고전 10:31)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고전 6:20) 수 있다.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요일 4:13)께서 우리의 몸을 점유하시고 적시시며 우리의 몸을 통해 그분 자신을 표현하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삶으로 그분의 표현을 위해 우리의 몸으로 그분을 확대한다면, 우리는 성도들이 생명이 자라고 주님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요인들, 곧 공급의 통로들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쇠사슬에 매인 바울의 몸에서 높아지시고 격찬받으시고 찬양받으시고 귀히 여김을 받으셨는데,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신 것은 그분의 부활의 실재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보이시고, 그분의 영의 실재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공급되시기 위한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서신을 썼을 때, 그는 감옥에서 살면서 외적으로는 일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언급한 ‘나의 일의 열매’는 그의 일이 사실상 그의 생활이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일의 열매는 그가 살아 내고 확대하고 공급하고 다른 이들 안으로 옮겨 부은 그리스도였다.
이 일의 열매는 바울이 감옥에서 생활한 것의 산물이자 결과였다.
바울의 살아 있는 일은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자신이 확대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 안으로 옮겨 붓는 것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확대함으로써 가이사의 집에 속한 몇몇 사람들까지도 구원을 받았다.
우리 모두는 성도들의 ‘진보’(성도들의 생명의 성장)와 ‘믿음의 기쁨’(성도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위해 그들에게 강력한 요인들, 곧 공급의 통로들이 되기를 열망해야 한다. 우리가 성도들이 생명이 자라고 그리스도를 누리도록 하는 그러한 요인들인지의 여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삶으로 그리스도를 확대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극도로 살고 확대했기 때문에, 성도들 안으로 그리스도를 옮겨 붓고 모든 교회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할 수 있었다.
바울이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인지, 육체 안에 남아 있을 것인지를 고려한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주님과 교회로 철저하게 점유되어 있던 사람이다.
우리가 육체에 머무는지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는지는 교회에 중요한 문제가 되어야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를 공급하고, 그리스도를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부터 성도들의 존재의 깊은 곳으로 옮겨 붓는 데 달려 있다.
몸의 생활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공급의 통로로서 기능을 발휘해야 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
믿는 이들이 신성한 영광 안에서의 하나 안으로, 곧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아를 철저히 처리해야 한다.
나병은 몸의 원수인 사람의 자아에서 나온 심각한 죄를 상징한다. 나병은 사람의 거역과 불순종에서 비롯되고, 나병 환자를 정결하게 하는 것은 죄인을 자아로부터 하나님과의 교통과 사람들과의 교통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려면 ‘털을 모두 밀어야 하고, 머리털과 턱수염과 눈썹까지 모든 털을 밀어야 한다’(레 14:9). 여러 종류의 털은 각각 자아의 서로 다른 방면을 상징한다.
머리털은 사람의 영광을 과시하는 것을 상징한다. 모든 사람은 특정 분야에서 자랑거리가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혈통을, 어떤 사람은 자신의 교육을, 어떤 사람은 자신의 미덕을, 어떤 사람은 주님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을 자랑한다. 모든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며 과시할 만한 분야를 찾을 수 있다.
턱수염은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나 가문이나 심지어 영성에 관련하여 스스로를 존귀하다고 여긴다. 그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뛰어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눈썹은 사람의 타고난 아름다움, 사람의 탁월함, 공로, 미덕, 강점을 상징한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출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온몸의 털은 사람의 타고난 힘과 역량을 상징한다. 사람인 우리는 타고난 힘, 타고난 방법과 의견으로 가득하여, 자신이 주님을 위해 이런저런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아에 속한 이러한 문제들은 반드시 ‘면도칼’로 밀어야 한다. 이것은 그러한 것들이 반드시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를 처리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를 지는 이들이 되어, 십자가가 우리 위에 계속 운행하도록 허락함으로 우리의 자아를 죽음에 넘겨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머물며 매일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의 종결 아래 두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주관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우리의 영을 사용함으로써 복합되신 영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죽음(흐르는 몰약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죽음을 상징하고, 향기로운 육계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달콤함과 효능을 상징함)을 적용할 수 있다.
찬송가 628장 5절과 6절은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할 때 어떻게 자아에서 해방되는지를 보여 준다.
“영 안에 해방돼 / 자기 의 벗고 / 자기 느낌 책망 / 벗어 버리라”.
“영 안에 해방돼 / 자기 뜻 벗고 / 자기 사랑 교만 / 내려놓으라”.
우리는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 15:31)라고 말한 바울의 본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매일 자신을 향해 죽을 때, 우리는 우리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전파하지 않고 주님의 신성한 영광을 위해 주님을 향해 산다. 더 나아가 참다운 교회생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는 동안 우리는 변화를 받으며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과 봉사의 목적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생활과 봉사는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을 위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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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십자가의 목표는 고난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끝내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끝났다)(갈 2:20, 롬 6:6).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후, 믿는 이들은 십자가 위에 머물면서 옛사람을 계속 십자가로 끝내야 한다. 그리스도는 먼저 십자가를 지셨고, 그다음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은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다음에 그들의 옛사람이 끝난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십자가를 진다. 믿는 이들은 그들의 생명과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이렇게 체험하고 누린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부활하게 되고 해방될 때 그는 구원받는다.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 내야 하고, 안팎의 어려움을 모두 처리해야 한다.
옷은 사람의 몸에 입는 것으로서, 우리의 생활과 행위와 행동을 예표한다. 그러므로 옷을 빠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모든 부적합하고 그릇된 행위를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생명의 체험의 처음 두 단계에 속하는 과거의 일소 그리고 죄와 세상과 양심의 처리를 포함한다.
털은 사람의 몸에서 자라난 것으로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어려움들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털을 미는 것은(레 14:9) 우리 자신의 자아에 속한 어려움을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일은 우리의 존재를 처리하는 십자가의 일이다. 어떤 사람이 십자가의 처리를 받고 나면, 그의 온 존재는 실지적으로 정결하게 된다. 이러한 처리는 한 번 만에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처리는 거듭거듭 반복됨으로써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계속해서 처리하는 것은 철저하고도 세부적이다. 즉, 이러한 처리에는 일반적으로 털을 미는 것이 있을 뿐 아니라 머리털, 턱수염, 눈썹, 온몸의 털을 구분하여 처리한다. 이러한 영역은 하나씩 하나씩 처리되어야 하며, 결국에는 온몸의 털을 완전히 밀어야 한다.
성경에서 여러 종류의 털은 각각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 머리털은 사람의 영광을 상징한다. 턱수염은 사람의 존귀를 상징한다. 눈썹은 사람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온몸의 털은 사람의 타고난 힘을 상징한다. 모든 사람은 특정 분야에서 자랑거리가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혈통을, 어떤 사람은 자신의 교육을, 어떤 사람은 자신의 미덕을, 어떤 사람은 주님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을 자랑한다. 모든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며 과시할 만한 분야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머리털로 예표된다. 이에 더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나 가문이나 심지어 영성에 관련하여 스스로를 존귀하다고 여긴다. 그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뛰어나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이러한 것이 턱수염이다. 또한 사람에게는 어떤 타고난 아름다움, 즉 어떤 타고난 선함과 강점이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출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눈썹이다. 마지막으로 사람인 우리는 타고난 힘, 타고난 방법과 의견으로 가득하여, 자신이 주님을 위해 이런저런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도 온몸에 매우 긴 털을 가지고 있고 털을 밀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이 모든 것은 외적으로 오염된 것이 아니라 타고난 출생의 문제이다. 외적으로 오염된 것은 다만 물로 씻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타고난 문제는 십자가의 처리를 의미하는 면도칼로 밀어야 한다.
5일
나병은 거역과 불순종에서 온다. 미리암은 하나님의 대표 권위에 맞서 거역했기 때문에 나병에 걸렸다(민 12:1-10). 나아만의 나병은 순종함으로 깨끗하게 되었다(왕하 5:1, 9-14). 타락한 모든 사람은 그들의 거역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나병에 걸린 것이다.
나병 환자는 전형적인 죄인을 묘사한다. 나병은 가장 많이 오염시키고 손상을 주는 질병이다. 그러한 환자는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격리되었다.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는 것은 죄인이 회복되어 하나님과 교통하고 또 사람과 교통하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자아에 대한 이상을 보는 것은 몸과 많은 관계가 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 있다. 회복은 결국 이 중요한 문제, 곧 몸의 건축에 이를 것이다. 몸의 원수는 자아이다. 몸에 대한 가장 큰 문제와 가장 큰 좌절과 반대도 자아이다. 우리에게 자아가 있다면 몸은 없다. 자아는 독립적인 ‘내가’이며 독립적인 ‘나를’이다. 독립적일 때 우리는 자아 안에 있고, 몸은 사라지며, 평안은 없어진다.
나병을 정결하게 함에 관한 문제는 우리 바깥에 있는 문제와 우리 자신에게 속한 문제에 관련된 서로 다른 두 가지 처리 방식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주는 예표이다. 성경에서 나병 환자는 항상 타락하고 죄 있는 사람을 상징한다. 나병 환자에게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외적으로 더럽거나 보기 흉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안에 있는 질병의 독성이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죄인들인 우리에게 있는 주된 문제는 사실 외적으로 우리가 죄악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악한 생명에서 비롯된 죄악된 본성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병이라는 예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 있는 상태를 매우 정확하고 철저하게 묘사해 준다. 따라서 레위기에 기록된 대로 나병 환자를 정결하게 하는 방법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되고 처리받는 길이기도 하다.
나병 환자를 정결하게 하기 위한 첫 번째 요구 사항은 그를 제사장에게 데려가는 것이었다. 제사장은 주 예수님을 예표한다. ‘제사장은 진영 밖으로 나가서’(레 14:3) 나병 환자를 살펴본다. 왜냐하면 나병 환자는 진영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진영 밖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를 나타내시는 곳인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로 들어갈 수 없음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우리를 살펴보시려고 밖으로 나오신다. 우리가 진정 마음으로 회개했다면 나병이라는 질병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치료된 것이다. 나병 환자의 더러움은 하나님 앞에서 죄이다. 그러므로 피를 뿌림으로써 정결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죄 있는 본성을 정결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온갖 죄의 기록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피를 뿌리는 절차는 다음과 같다. 새 두 마리를 준비한다. 한 마리는 흐르는 물이 담긴 질그릇 안에서 잡는다. 살아 있는 다른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에 찍어, 그 피를 나병 환자에게 뿌린다. 죽음을 당한 새는 피를 흘리시고 죽음을 당하신 주 예수님을 예표하고, 살아 있는 새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예표하며, 흐르는 물은 우리 주님의 영원한 생명을 예표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고 그분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죽음을 당하셨음을 가리킨다. 이뿐 아니라 주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써 흘리신 피와 그분의 영원한 생명은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와서 우리 안에서 효력이 있게 된다. 피를 일곱 번 뿌리는 것은 주님의 피로 인한 정결하게 함이 완전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주님의 피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갖 죄의 기록을 없애 버릴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받아들이실 수 있게 한다. 살아 있는 새는 피에 찍은 후에 들판에 놓아주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을 대신한 주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인 후에 주님의 피가 그에게 효력을 나타내고 주님의 부활 능력이 그 안에 나타나 그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일
빌립보서 1장 21절의 시작에 있는 작은 단어인 ‘왜냐하면’은 중요하다. 이 단어는 뒤에 오는 내용이 앞 절의 설명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의 몸에서 확대되실 수 있었다. 그리스도를 확대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사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쇠사슬에 매인 바울의 몸에서 높아지시고 격찬받으시고 찬양받으시고 귀히 여김을 받으셨는데,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살았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일만 주의하고 그리스도는 주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일에 열매가 있다(빌 1:22)고 말할 수 있었다. 바울이 ‘열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사실상 그의 생활이 곧 그의 일이었음을 가리킨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서신을 썼을 때, 그는 감옥에 살아서 일하고 있지 않았다. 이 일의 열매는 그가 살아 내고 확대하고 다른 이들에게 공급한 그리스도였다. 바울의 일은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 안으로 옮겨 붓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1장 22절에 언급된 일의 열매는 바울이 감옥에서 생활한 것의 산물이자 결과였다.
바울의 살아 있는 일은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자신이 확대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 안으로 옮겨 붓는 것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죽는 것은 유익한 것이었지만, 사는 것은 살아 있고 열매 맺는 그러한 일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여러분은 물질적인 몸이 죽는 것에서 얻는 유익과 살아 있는 일에서 산출된 열매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나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다른 이들 안으로 그리스도를 옮겨 붓는 살아 있는 일을 계속하도록 육체 안에 사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빌립보서 1장 24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육체에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을 위해서는 더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는’이라는 말은 ‘교회를 위해서는’이라는 의미이다. 사도가 고려한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주님과 교회로 철저하게 점유되어 있던 사람이다. 바울은 교회들에게 그리스도를 더 많이 공급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도록 남아 있으려고 했다.
바울은 감옥 안에 있든지 감옥 밖에 있든지 성도들의 진보와 기쁨의 강한 요인이었다. 바울 때문에 교회들은 생명이 성장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실재가 되어야 한다. 각지에 있는 교회들에서 장로들은 성도들이 생명 안에서 자라고 그리스도를 누리는 강한 요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장로들이 그러한 진보와 기쁨의 요인이 되는지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삶으로써 그분을 확대하는지에 달려 있다. 장로들이 그리스도를 산다면 그리스도는 분명 장로들 안에서 확대되실 것이다. 그럴 때 장로들은 성도들이 생명 안에서 자라고 주님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빌립보서 1장 25절과 26절에서 우리는 몸의 생활에서 공급의 통로로 기능을 발휘하는 어떤 사람들이 긴급하게 필요하다는 매우 중요한 항목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바울과 같은 지체가 필요하다. 그와 같은 지체가 죽을 때 그리스도의 전달은 매우 실지적인 의미에서 중단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있다면, 전달은 끊임없이 꾸준히 계속될 것이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지 죽는지는 교회에 중요한 문제가 되어야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를 공급하고, 그리스도를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부터 성도들의 존재의 깊은 곳으로 옮겨 붓는 데 달려 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린다면, 우리가 육체에 머무는지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는지는 교회에 영향을 줄 것이다.
3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 받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을지라도(롬 6:3, 갈 3:27), 여전히 그리스도를 입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고(갈 2:20), 그리스도를 살아 내어(빌 1:21)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다(빌 1:20).
주로 영광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제사장의 의복은 그리스도의 신성한 영광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의 표현을 상징한다. 영광은 그리스도의 신성 곧 그분의 신성한 속성들과 관계있고(요 1:14, 히 1:3), 아름다움은 그리스도의 인성 곧 그분의 인간 미덕들과 관계있다. 제사장의 의복에 있는 금으로 예표된 그리스도의 신성은 영광을 위한 것이고,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진홍색 실과 세마포로 예표된 그분의 인성은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다. 신성한 영광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지니신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생활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제사장 체계가 될 자격이 있게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풍성했던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를 그의 표현으로 취했다. 바울의 모든 생활과 일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이나 다른 장점이나 강점을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바울의 존재와 그가 행한 것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해 표현되실 뿐 아니라 심지어 그에게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이었다.
빌립보서 1장 19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을 언급한다. 우리가 그 영의 넘치는 공급이 우리 안에서 운행하도록 허락한다면 우리의 일상생활은 바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매사에 담대하여 그리스도를 확대할 부담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무한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썼을 당시에 노년의 사람이었다. 의심할 바 없이, 경비대원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으로 말미암아 탈진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탈진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님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했다. 나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빛으로 비추어 내고 표현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표현은 그리스도의 무한한 위대하심에 대한 선포이자 그리스도께서 다함이 없으신 것에 대한 선포이다.
우리의 사랑은 결국 고갈되지만, 사랑이신 그리스도는 고갈되지 않으신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타고난 인내는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내이신 그리스도는 무한하시다. 우리 모두에게 인내하는 역량이 있지만, 어느 정도 인내할 수 있을 뿐이다. 얼마 안 가서 우리는 자극을 받아 화를 내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가 아내에게 인내심을 발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이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르고 그 형제는 아내에게 화를 내게 된다. 우리의 타고난 인내는 매우 제한되어 있지만, 인내이신 그리스도는 고갈되지 않으시고 측량할 수 없으시다.
바울은 틀림없이 감옥에서 학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기뻐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의 무한한 위대하심을 경비대원들에게 보여 줄 수 있었다. 특별히 그는 그리스도의 고갈되지 않는 인내를 보여 주었다. 날마다 바울은 주님 안에서 기뻐했다. 시간이 지나도 바울의 기쁨은 줄어들지 않았다. 바울은 기뻐하는 가운데 자신이 체험하고 누린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보여 줄 수 있었다. 이렇게 바울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전시하며 높이고 높이 찬양했다. 나는 바울이 간수 때문에 마음이 상했거나 간수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증인으로서, 그리스도의 힘과 능력과 인내와 사랑과 지혜가 측량할 수 없음을 증언했다. 경비대원들은 바울이 자신들에게는 없는 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면서 이상하거나 특이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경비대원들이 바울에게서 느낀 것은 확대되신 그리스도였다. 바울은 감옥에 있는 동안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확대함으로 바울은 어떤 상황도 이길 수 있었다.
2일
바울의 몸이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셨다. 즉 그분께서 (무한히) 위대하시다는 것이 드러나고 선포되었으며, 그분께서 높아지시고 또 높이 찬양을 받으셨다. 바울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무한히 위대하시다는 것을 표현할 기회를 바울에게 준 것이었다. 바울 안에서 율법이나 할례가 확대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셨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은 그분을 최고의 누림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 20절의 몇몇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서 확대되실 것이라는 바울의 말과 관련된다. 그 표현들은 바로 ‘매사에 담대하여’,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내 몸에서’, ‘살든지 죽든지’이다. 바울은 단지 ‘담대하여’라고만 말하지 않고 ‘매사에 담대하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에서 확대되실 것임을 지적한다.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여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그의 몸에서 확대되셨다. 이뿐 아니라, 그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셨다.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바울이 자신에게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기를 기대했음을 의미한다.
‘확대하다’라는 단어는 어떤 것이 우리에게 크게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3장에 따르면,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곧 그리스도의 차원은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차원이다. 그리스도는 광대하고 넓고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지만, 황제의 경비대인 치안관이 보기에 그리스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확대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서, 특히 감옥에서 자신을 지키는 이들의 눈앞에서 그리스도를 위대하시게 하였다. 그 결과, 결국 몇 사람이 그리스도께 돌이켰다. 이에 대한 증거는 빌립보서 4장 22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절에서 바울은 ‘가이사의 집안에 속한 성도들’에 대해 말한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확대함으로 말미암아 심지어 가이사의 집안에 속한 사람들도 구원을 받았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로마인들은 정복자들이었고 유대인들은 정복당한 이들이었다. 이렇게 정복당한 이들 가운데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은 위대하고도 대단히 놀라운 분이시지만, 로마인들이 보기에 그분은 아무것도 아니셨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리스도를 확대하여, 자신을 감옥에 가둔 사람들의 눈에 그리스도께서 위대하게 나타나시도록 했다.
우리 또한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를 확대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리스도를 위대하시게 해야 한다. 우리가 일하는 곳과 우리가 다니는 학교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업신여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조롱하고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서 세 번째 계명을 어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작게 보지 않고 확장되고 확대된 방식으로 보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가정에서도 그리스도를 확대해야 한다. 어떤 청년들의 부모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멸시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러한 청년들은 자신의 부모 앞에서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안에 생명이 필요할 뿐 아니라 밖으로 생활이 필요하다. 합당한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다른 이들의 눈에 위대하게 나타나실 것이다. 청년들이여,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에게서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보게 하라.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그에게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확대했다. 이것은 ‘살아도’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다. 바울은 순교당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확대했다. 이것은 ‘죽어도’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살든지 죽든지 쇠사슬에 매인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셨다. 분명히 이것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체험이다.
신언노트, 2023 05 28
참다운 교회생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확대하도록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활로 취하고
신성한 영광 안에서의
우리의 하나를 위해
자아를 처리함
그 진짜 교회생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확대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활로 취함과
또 그 신성한 영광 안에 있는
우리의 하나임을 위하여
그 자아를 처리함
빌립보서 1장 19절에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말하는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살고
확대하기 위해
우리가
격려받고
강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이
필요하다.
이 간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공급이다.
바울은 비록
갇혀 지냈지만,
그리스도의 몸에서
고립되지도 않았고,
몸의 공급에서
끊어지지도 않았다.
원문에 따르면,
빌립보서 1장
18절부터 21절까지는
한 문장이다.
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어떤 방식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시는 것이니,
이것으로
나는 기뻐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19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이것은
19절이
18절의 설명임을
가리킨다.
1장 19절에서
‘이러한 일’이라는 어구는
바울이
앞의 절들에서 언급한,
그리스도를
여러 가지로 전파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도들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바울은
이처럼
여러 가지로 전파하는 것이
그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임을
알았다.
그다음 20절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이라는
어구로 시작한다.
이 어구는
19절의 ‘구원’을
수식한다.
소망으로 가득했던
바울은
구원을 누리기를
기대했다.
20절에서
바울이
누리기를 기대한
구원은
어떤 일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매사에 담대하여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서신을 썼을 때,
그는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외국의 감옥에 있었다.
바울에게는
걱정하고 슬퍼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바울은
매우 힘든 환경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상황에 대해
쉽게 눈물을 흘릴 수도 있었다.
만일 바울이
기뻐하는 대신
눈물을 흘렸다면
그러한 환경에서
구원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러분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유대인이라면
기뻐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눈물을 흘리는 대신
주님 안에서
기뻐했다.
바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그를
구원에 이르게 했다.
이 절들의 문맥에 따르면,
구원은
바울이
어떤 일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 자신이
부끄럽다고 느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떤 일에서도
그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바울의 몸에서
확대되셨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확대는 바로
19절에 언급된
구원이다.
이것은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따른
구원이
그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게 하는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20절에서
우리는
구원의
실지적인 누림에 대한
정의를 본다.
이러한 구원을 누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라고 말한다.
바울이 겪은 고난은
바울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고난은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확대할
기회를 주었다.
우리가
이 절들에 언급된
구원을 체험한다면,
이후에
고난을 겪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확대할 것이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패배하고,
고난 때문에
억눌리며
근심으로 가득하다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그리스도를 확대한다면,
이러한 구원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바울이
구원을 체험한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이었다.
이 넘치는 공급으로,
바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그를
구원에 이르게 했다.
우리의 체험에서
구원과
그리스도와
그 영의 넘치는 공급은 사실상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환경에서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으로 체험하려면,
우리에게는
그 영의 넘치는 공급이
필요하다.
이 영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바울 안에 거하셨고,
오늘날
우리 안에도
거하고 계신다.
그러한 영의 공급으로
바울은
구원을 누렸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이러한 일이 결국에는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을
나는 알기 때문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어떤 일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매사에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 빌 1:19-21상.
그리스도를 확대하도록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생명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지 못한
실패와
그리스도를 확대하지 못한
패배에서
구원받는다.
바울은
그의 구원이
‘여러분의 간구’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공급이다.
바울은 비록
갇혀 지냈지만,
그리스도의 몸에서
고립되지도 않았고,
몸의 공급에서
끊어지지도 않았다.
바울이
구원을 체험한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이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넘치는 공급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누리고
그분으로 충만할 때,
그리스도는
확대되셔서
우리의 표현이 되신다.
우리는
몸의 생활 안에 있어야 하며
몸을 건축하는
제사장 봉사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확대하도록
그리스도를 살기 위해,
그 영의 넘치는 공급
곧 몸의 공급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다.
바울의 몸이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셨다.
즉 그분께서
(무한히) 위대하시다는 것이
드러나고
선포되었으며,
그분께서
높아지시고
또 높이 찬양을 받으셨다.
바울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무한히 위대하시다는 것을
표현할 기회를
바울에게 준 것이었다.
바울 안에서
율법이나 할례가
확대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셨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은
그분을
최고의 누림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 20절의
몇몇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서
확대되실 것이라는
바울의 말과 관련된다.
그 표현들은 바로
‘매사에 담대하여’,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내 몸에서’,
‘살든지 죽든지’이다.
바울은 단지
‘담대하여’라고만 말하지 않고
‘매사에 담대하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에서
확대되실 것임을
지적한다.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여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그의 몸에서
확대되셨다.
이뿐 아니라,
그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셨다.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바울이
자신에게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기를
기대했음을 의미한다.
‘확대하다’라는 단어는
우리의 시야에
어떤 것을
크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3장에 따르면,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곧 그리스도의 차원은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차원이다.
그리스도는
광대하고
넓고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지만,
시저의 황제 경비원(대)인
근위병이(집정관이, 치안관이) 보기에
그리스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확대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서,
특히 감옥에서
자신을 지키는 이들의 눈앞에서
그리스도를
위대하시게 하였다.
그 결과,
결국 몇 사람이
그리스도께 돌이켰다.
이에 대한 증거는
빌립보서 4장 22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절에서 바울은
‘가이사의 집안에 속한
성도들’에 대해 말한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확대함으로 말미암아
심지어 가이사의 집안에 속한 사람들도
구원을 받았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로마인들은
정복자들이었고
유대인들은
정복당한 이들이었다.
이렇게 정복당한 이들 가운데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은
위대하고도
대단히 놀라운 분이시지만,
로마인들이 보기에
그분은
아무것도 아니셨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의 한 감옥에
죄수로 붙잡혀 있었을 때
그리스도를 확대했고,
자신을
감옥에 가둔
사람들의 눈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크게(위대하게) 나타나시게 만들었다.
우리 또한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확대해야만 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리스도를
크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일하는 곳과
우리가 다니는 학교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업신여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조롱하고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서
그 세 번째 계명을
어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작은 방식으로(작게)
보지 않고,
오직 확장의 방식으로,
곧 확대의 방식으로
보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가정에서도
그리스도를 확대해야 한다.
어떤 청년들의 부모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멸시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러한 청년들은
자신의 부모 앞에서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안에
생명이 필요할 뿐 아니라
밖으로
생활이 필요하다.
합당한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다른 이들의 눈에
위대하게
나타나실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의 부모들이
여러분 안에서(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크심을
보게 하라.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생명을 통해서든 또는 죽음을 통해서든)
그의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확대했다.
이것은
‘살아도’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다.
바울은
순교당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확대했다.
이것은
‘죽어도’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살든지 죽든지
쇠사슬에 매인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셨다.
분명히 이것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체험이다.
사도의 몸이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셨다.
즉 그분께서
(무한히) 위대하시다는 것이
드러났고
또 선포되었으며,
그분께서
높아지셨고
또 높이 찬양을 받으셨다.
사도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무한히 위대하시다는 것을
표현할 기회를
사도에게 준 것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은
그분을
최고의 누림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리스도를 확대하여,
자신을
감옥에 가둔 사람들의 눈에
그리스도께서
위대하게 나타나시도록 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 받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입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사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살아 내어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다.
주로 영광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제사장의 의복은
그리스도의 신성한 영광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의 표현을
상징한다.
영광은
그리스도의 신성
곧 그분의 신성한 속성들과 관계있고,
아름다움은
그리스도의 인성
곧 그분의 인간 미덕들과 관계있다.
제사장의 의복에 있는
금으로 예표된
그리스도의 신성은
영광을 위한 것이고,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진홍색 실과 세마포로 예표된
그분의 인성은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다.
신성한 영광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지니신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생활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제사장 체계가 되는
자격이 있게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풍성했던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를
그의 표현으로 취했다.
바울의 모든 생활과 일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이나
다른 장점이나 강점을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바울의 존재와
그가 행한 것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해
표현되실 뿐 아니라
심지어 그의 안에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이었다.
빌립보서 1장 19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을 언급한다.
우리가
그 영의 넘치는 공급이
우리 안에서 운행하도록
허락한다면
우리의 일상생활은
바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매사에 담대하여
그리스도를 확대할
부담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무한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썼을 당시에
노년의 사람이었다.
의심할 바 없이,
경비대원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에 의해
탈진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탈진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님 안에서
기쁨과 크게 기뻐함으로 충만했다.
나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빛으로 비추어 내고
표현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표현은
그리스도의 무한한 위대하심에 대한
한 선포이자
그리스도께서
다함이 없으신 것에 대한
(무궁무진하시다는)
한 선포이다.
우리의 사랑은
결국 고갈되지만,
사랑이신 그리스도는
고갈되지 않으신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타고난 인내는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내이신
그리스도는 무한하시다.
우리 모두에게
인내하는 역량이 있지만,
어느 정도
인내할 수 있을 뿐이다.
얼마 안 가서 우리는
자극을 받아
화를 내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가
아내에게
인내심을 발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이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르고
그 형제는
아내에게
화를 내게 된다.
우리의 타고난 인내는
매우 제한되어 있지만,
인내이신 그리스도는
고갈되지 않으시고
측량할 수 없으시다.
바울은 틀림없이
감옥에서
학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기뻐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의 무한한 위대하심을
경비대원들에게
보여 줄 수 있었다.
특별히 그는
그리스도의
고갈되지 않는 인내를
보여 주었다.
날마다 바울은
주님 안에서 기뻐했다.
시간이 지나도
바울의 기쁨은
줄어들지 않았다.
바울은
기뻐하는 가운데
자신이 체험하고 누린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보여 줄 수 있었다.
이렇게 바울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전시하며
높이고 높이 찬양했다.
나는
바울이
간수 때문에
마음이 상했거나
간수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증인으로서,
그리스도의
힘과 능력과
인내와 사랑과 지혜가
측량할 수 없음을
증언했다.
경비대원들은
바울이
자신들에게는 없는 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면서
이상하거나
독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경비대원들이
바울에게서 느낀 것은
확대되신 그리스도였다.
바울은
감옥에 있는 동안
한 확장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표현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확대함으로
바울은
어떤 상황도
이길 수 있었다.
그 상황들에 상관없이
바울은
주님 안에 있는(안에서)
기쁨과 또 크게 기뻐함으로
충만했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것에 관한 것이고,
이러한 체험과 누림은
기쁨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그것은
기쁨과 또 크게 기뻐함으로
가득 채워진 한 책이다.
바울이 기뻐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비추어 내고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무한히 위대하신 것에 대한
선포이자
그리스도께서
다함이 없으신 것에 대한
선포였다.
바울의
모든 생활과 일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거나,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이나
다른 공로나 장점을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와
그가 행한 것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살고
그리스도를 살아 냄으로써,
참다운 교회생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단체적인 표현을 위해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다.
제사장 의복으로 상징된
그리스도의 표현을 가질 때,
우리는
제사장들로서 섬길
자격을 얻고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 속하도록
거룩하게 분별된다.
‘우리의 거룩한 의복’이신
그리스도의 표현은
영광과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다.
‘영광’은
신성한 속성들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름다움’은
인간 미덕들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미덕들의 아름다움과
고르게 섞인 신성한 영광을
표현할 때마다,
우리는
제사장 체계로
함께 건축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고전 10:31).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
(고전 6:20).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점유하시고
적시시며
우리의 몸을 통해
그분 자신을 표현하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 21절의
시작에 있는 작은 단어인
‘왜냐하면’은 중요하다.
이 단어는
뒤에 오는 내용이
앞 절의 설명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의 몸에서
확대되실 수 있었다.
그리스도를 확대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사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이것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다.
그리스도는
쇠사슬에 매인
바울의 몸에서
높아지시고
격찬받으시고
찬양받으시고
귀히 여김을 받으셨는데,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살았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의 일만 주의하고
그리스도를
주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일에
열매가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바울이
‘열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사실상
그의 생활이
곧 그의 일이었음을
가리킨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서신을 썼을 때,
그는
감옥에 살고 있었고
일하고 있지 않았다.
이 일의 열매는
살아 내진,
확대된,
또 다른 이들에게 공급된
그리스도였다.
바울의 일은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 안으로
옮겨 붓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1장 22절에 언급된
일의 열매는
바울이
감옥에서 생활한 것의
산물이자 결과였다.
바울의
살아 있는 일은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자신이 확대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 안으로
옮겨 붓는 것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죽는 것은
얻는 것이었지만
(이익이었지만),
사는 것은
살아 있고
열매 맺는
그러한 일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여러분은
물질적인 몸이
죽는 것에서 얻는
그 이익과
살아 있는 하나의 일에서 산출된
그 열매 중에서
여러분이
선택해야만 한다면
무엇이
여러분의 선택이 되겠는가?
나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다른 이들 안으로
그리스도를 옮겨 붓는
살아 있는 그 일을 계속하도록
그 육체 안에 사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빌립보서 1장 24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육체에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을 위해서는
더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는’이라는 말은
‘교회를 위해서는’이라는 의미이다.
사도가 고려한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주님과 교회로
철저하게 점유되어 있던 사람이다.
바울은
교회들에게
그리스도를
더 많이 공급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도록
남아 있으려고 했다.
바울은
감옥 안에 있든지
감옥 밖에 있든지
성도들의 진보와 기쁨의
강한 요인이었다.
바울 때문에
교회들은
생명이 성장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실재가 되어야 한다.
각지에 있는 교회들에서
장로들은
성도들이
생명 안에서 자라고
그리스도를 누리는
강한 요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장로들이
그러한 진보와 기쁨의
요인이 되는지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삶으로써
그분을 확대하는지에
달려 있다.
장로들이
그리스도를 산다면
그리스도는 분명
장로들 안에서
확대되실 것이다.
그럴 때 장로들은
성도들이
생명 안에서 자라고
주님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빌립보서 1장
25절과 26절에서
우리는
몸의 생활에서
공급의 통로들로
기능을 발휘하는
어떤 사람들이
긴급하게 필요하다는
매우 중대한 그 요점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바울과 같은
지체들이 필요하다.
그러한 지체들이
죽을 때
그리스도의 옮겨 부음은
매우 실재적인 의미에서
중단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한,
그 옮겨 부음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되고,
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 안에서
자랑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지 죽는지는
교회에
중요한 문제가 되어야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를 공급하고,
그리스도를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부터
성도들의 존재의 깊은 곳으로
옮겨 붓는 데
달려 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린다면,
우리가
육체에 머무는지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는지는
교회에
영향을 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삶으로
그분의 표현을 위해
우리의 몸으로
그분을 확대한다면,
우리는
성도들이
생명이 자라고
주님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요인들,
곧 공급의 통로들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쇠사슬에 매인
바울의 몸에서
높아지시고
격찬받으시고
찬양받으시고
귀히 여김을 받으셨는데,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신 것은
그분의 부활의 실재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보이시고,
그분의 영의 실재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공급되시기 위한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서신을 썼을 때,
그는
감옥에서 살면서
외적으로는
일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언급한
‘나의 일의 열매’는
그의 일이 사실상
그의 생활이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일의 열매는
그가
살아 내고
확대하고
공급하고
다른 이들 안으로 옮겨 부은
그리스도였다.
이 일의 열매는
바울이
감옥에서 생활한 것의
산물이자 결과였다.
바울의 살아 있는 일은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자신이 확대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 안으로
옮겨 붓는 것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확대함으로써
가이사의 집에 속한
몇몇 사람들까지도
구원을 받았다.
우리 모두는
성도들의 ‘진보’
(성도들의 생명의 성장)와
‘믿음의 기쁨’
(성도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위해
그들에게
강력한 요인들,
곧 공급의 통로들이 되기를
열망해야 한다.
우리가
성도들이
생명이 자라고
그리스도를 누리도록 하는
그러한 요인들인지의 여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삶으로
그리스도를 확대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극도로 살고
확대했기 때문에,
성도들 안으로
그리스도를 옮겨 붓고
모든 교회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할 수 있었다.
바울이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인지,
육체 안에
남아 있을 것인지를
고려한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주님과 교회로
철저하게
점유되어 있던 사람이다.
우리가
육체에 머무는지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는지는
교회에
중요한 문제가 되어야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를 공급하고,
그리스도를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부터
성도들의 존재의 깊은 곳으로
옮겨 붓는 데
달려 있다.
몸의 생활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공급의 통로로서
기능을 발휘해야 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
나병은
거역과 불순종에서 온다.
미리암은
하나님의 대표 권위에 맞서
거역했기 때문에
나병에 걸렸다.
나아만의 나병은
순종함으로
깨끗하게 되었다.
타락한 모든 사람은
그들의 거역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나병에 걸린 것이다.
나병 환자는
전형적인 죄인을 묘사한다.
나병은
가장 많이
오염시키고
손상을 주는
질병이다.
그러한 환자는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격리되었다.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는 것은
죄인이 회복되어
하나님과 교통하고
또 사람과 교통하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자아에 대한
이상을 보는 것은
몸과
많은 관계가 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 있다.
회복은 결국
이 중요한 문제,
곧 몸의 건축에
이를 것이다.
몸의 원수는
자아이다.
몸에 대한
가장 큰 문제와
가장 큰 좌절과 반대도
자아이다.
우리에게
자아가 있다면
몸은 없다.
자아는
독립적인 ‘내가’이며
독립적인 ‘나를’이다.
독립적일 때
우리는
자아 안에 있고,
몸은 사라지며,
평안은 없어진다.
나병을 정결하게 함에 관한 문제는
우리 바깥에 있는 문제와
우리 자신에게 속한 문제에 관련된
서로 다른 두 가지 처리 방식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주는
예표이다.
성경에서
나병 환자는 항상
타락하고
죄 있는 사람을
상징한다.
나병 환자에게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외적으로 더럽거나
보기 흉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안에 있는
질병의 독성이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죄인들인
우리에게 있는
주된 문제는 사실
외적으로
우리가
죄악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악한 생명에서 비롯된
죄악된 본성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병이라는 예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 있는 상태를
매우 정확하고 철저하게
묘사해 준다.
따라서 레위기에 기록된 대로
나병 환자를
정결하게 하는 방법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되고
처리받는 길이기도 하다.
나병 환자를
정결하게 하기 위한
첫 번째 요구 사항은
그를
제사장에게 데려가는 것이었다.
제사장은
주 예수님을 예표한다.
‘제사장은
진영 밖으로 나가서’
(레 14:3)
나병 환자를 살펴본다.
왜냐하면 나병 환자는
진영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진영 밖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를 나타내시는 곳인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로
들어갈 수 없음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우리를 살펴보시려고
밖으로 나오신다.
우리가 진정
마음으로 회개했다면
나병이라는 질병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치료된 것이다.
나병 환자의 더러움은
하나님 앞에서 죄이다.
그러므로 피를 뿌림으로써
정결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죄 있는 본성을
정결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온갖 죄의 기록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피를 뿌리는 절차는
다음과 같다.
새 두 마리를
준비한다.
한 마리는
흐르는 물이 담긴
질그릇 안에서 잡는다.
살아 있는 다른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에 찍어,
그 피를
나병 환자에게 뿌린다.
죽음을 당한 새는
피를 흘리시고
죽음을 당하신
주 예수님을 예표하고,
살아 있는 새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예표하며,
흐르는 물은
우리 주님의
영원한 생명을 예표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고
그분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죽음을 당하셨음을
가리킨다.
이뿐 아니라
주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써
흘리신 피와
그분의 영원한 생명은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와서
우리 안에서
효력이 있게 된다.
피를
일곱 번 뿌리는 것은
주님의 피로 인한
정결하게 함이
완전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주님의 피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갖 죄의
기록을 없애 버릴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받아들이실 수 있게 한다.
살아 있는 새는
피에 찍은 후에
들판에 놓아주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을 대신한
주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인 후에
주님의 피가
그에게
효력을 나타내고
주님의 부활 능력이
그 안에 나타나
그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는 이들이
신성한 영광 안에서의 하나 안으로,
곧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아를
철저히 처리해야 한다.
나병은
몸의 원수인
사람의 자아에서 나온
심각한 죄를 상징한다.
나병은
사람의 거역과 불순종에서 비롯되고,
나병 환자를 정결하게 하는 것은
죄인을
자아로부터
하나님과의 교통과
사람들과의 교통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목표는
고난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끝내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끝났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후,
믿는 이들은
십자가 위에 머물면서
옛사람을 계속
십자가로 끝내야 한다.
그리스도는 먼저
십자가를 지셨고,
그다음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은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다음에
그들의 옛사람이
끝난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십자가를 진다.
믿는 이들은
그들의 생명과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이렇게 체험하고 누린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부활하게 되고 해방될 때
그는 구원받는다.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 내야 하고,
안팎의 어려움을 모두
처리해야 한다.
옷은
사람의 몸에 입는 것으로서,
우리의 생활과 행위와 행동을
예표한다.
그러므로 옷을 빠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모든 부적합하고 그릇된 행위를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생명의 체험의
처음 두 단계에 속하는
과거의 일소
그리고 죄와 세상과 양심의 처리를
포함한다.
털은
사람의 몸에서
자라난 것으로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어려움들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털을 미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자아에 속한
어려움을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일은
우리의 존재를 처리하는
십자가의 일이다.
어떤 사람이
십자가의 처리를 받고 나면,
그의 온 존재는
실지적으로 정결하게 된다.
이러한 처리는
한 번 만에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처리는
거듭거듭 반복됨으로써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계속해서 처리하는 것은
철저하고도 세부적이다.
즉, 이러한 처리에는
일반적으로 털을 미는 것이
있을 뿐 아니라
머리털, 턱수염, 눈썹, 온몸의 털을
구분하여 처리한다.
이러한 영역은
하나씩 하나씩
처리되어야 하며,
결국에는
온몸의 털을
완전히 밀어야 한다.
성경에서
여러 종류의 털은
각각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
머리털은
사람의 영광을 상징한다.
턱수염은
사람의 존귀를 상징한다.
눈썹은
사람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온몸의 털은
사람의 타고난 힘을 상징한다.
모든 사람은
특정 분야에서
자랑거리가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혈통을,
어떤 사람은 자신의 교육을,
어떤 사람은 자신의 미덕을,
어떤 사람은 주님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을
자랑한다.
모든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며
과시할 만한 분야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머리털로 예표된다.
이에 더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나 가문이나
심지어 영성에 관련하여
스스로를 존귀하다고 여긴다.
그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뛰어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이 턱수염이다.
또한 사람에게는
어떤 타고난 아름다움,
즉 어떤 타고난 선함과 강점이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출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눈썹이다.
마지막으로
사람인 우리는
타고난 힘,
타고난 방법과 의견으로 가득하여,
자신이
주님을 위해
이런저런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도
온몸에
매우 긴 털을 가지고 있고
털을 밀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이 모든 것은
외적으로 오염된 것이 아니라
타고난 출생의 문제이다.
외적으로 오염된 것은 다만
물로 씻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타고난 문제는
십자가의 처리를 의미하는
면도칼로 밀어야 한다.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려면
‘털을 모두
밀어야 하고,
머리털과 턱수염과 눈썹까지
모든 털을
밀어야 한다’
(레 14:9).
여러 종류의 털은 각각
자아의 서로 다른 방면을
상징한다.
머리털은
사람의 영광을 과시하는 것을
상징한다.
턱수염은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을
상징한다.
눈썹은
사람의 타고난 아름다움,
사람의 탁월함,
공로, 미덕, 강점을
상징한다.
온몸의 털은
사람의 타고난 힘과 역량을
상징한다.
자아에 속한 이러한 문제들은 반드시
‘면도칼’로 밀어야 한다.
이것은
그러한 것들이 반드시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를 처리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를 지는 이들이 되어,
십자가가
우리 위에 계속 운행하도록
허락함으로
우리의 자아를
죽음에 넘겨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머물며
매일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의 종결 아래
두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주관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우리의 영을 사용함으로써
복합되신 영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죽음
(흐르는 몰약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죽음을
상징하고,
향기로운 육계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달콤함과 효능을 상징함)을
적용할 수 있다.
찬송가 628장
5절과 6절은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할 때
어떻게 자아에서 해방되는지를
보여 준다.
“영 안에 해방돼
/ 자기 의 벗고
/ 자기 느낌 책망
/ 벗어 버리라”.
“영 안에 해방돼
/ 자기 뜻 벗고
/ 자기 사랑 교만
/ 내려놓으라”.
우리는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고전 15:31)라고 말한
바울의 본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매일
자신을 향해 죽을 때,
우리는
우리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전파하지 않고
주님의 신성한 영광을 위해
주님을 향해 산다.
더 나아가
참다운 교회생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는 동안
우리는
변형되고 있으며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과 봉사의
목적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생활과 봉사는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을 위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다.
1일
빌립보서 1장 19절에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말하는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살고 확대하기 위해 우리가 격려받고 강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이 필요하다.
이 간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공급이다. 바울은 비록 갇혀 지냈지만, 그리스도의 몸에서 고립되지도 않았고, 몸의 공급에서 끊어지지도 않았다.
원문에 따르면, 빌립보서 1장 18절부터 21절까지는 한 문장이다. 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어떤 방식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시는 것이니, 이것으로 나는 기뻐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19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이것은 19절이 18절의 설명임을 가리킨다. 1장 19절에서 ‘이러한 일’이라는 어구는 바울이 앞의 절들에서 언급한, 그리스도를 여러 가지로 전파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도들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바울은 이처럼 여러 가지로 전파하는 것이 그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임을 알았다. 그다음 20절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이라는 어구로 시작한다. 이 어구는 19절의 ‘구원’을 수식한다. 소망으로 가득했던 바울은 구원을 누리기를 기대했다. 20절에서 바울이 누리기를 기대한 구원은 어떤 일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매사에 담대하여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서신을 썼을 때, 그는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외국의 감옥에 있었다. 바울에게는 걱정하고 슬퍼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바울은 매우 힘든 환경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상황에 대해 쉽게 눈물을 흘릴 수도 있었다. 만일 바울이 기뻐하는 대신 눈물을 흘렸다면 그러한 환경에서 구원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러분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유대인이라면 기뻐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눈물을 흘리는 대신 주님 안에서 기뻐했다. 바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그를 구원에 이르게 했다.
이 절들의 문맥에 따르면, 구원은 바울이 어떤 일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 자신이 부끄럽다고 느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떤 일에서도 그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바울의 몸에서 확대되셨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확대는 바로 19절에 언급된 구원이다. 이것은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따른 구원이 그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게 하는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20절에서 우리는 구원의 실지적인 누림에 대한 정의를 본다.
이러한 구원을 누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라고 말한다.
바울이 겪은 고난은 바울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고난은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확대할 기회를 주었다. 우리가 이 절들에 언급된 구원을 체험한다면, 이후에 고난을 겪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확대할 것이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패배하고, 고난 때문에 억눌리며 근심으로 가득하다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그리스도를 확대한다면, 이러한 구원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바울이 구원을 체험한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이었다. 이 넘치는 공급으로, 바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그를 구원에 이르게 했다. 우리의 체험에서 구원과 그리스도와 그 영의 넘치는 공급은 사실상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환경에서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으로 체험하려면, 우리에게는 그 영의 넘치는 공급이 필요하다. 이 영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바울 안에 거하셨고, 오늘날 우리 안에도 거하고 계신다. 그러한 영의 공급으로 바울은 구원을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