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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참다운 교회생활을 위해 하나님의 최고의 보배이신 영광스럽고 탁월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과 체험과 누림을 가짐

이사야는 낙심해 있었을 때 영광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을 보았다.

“악을 선이라 하고 / 선을 악이라 하는 이들, / 어둠을 빛에 두고 / 빛을 어둠에 두는 이들, / 쓴 것을 단것에 두고 / 단것을 쓴 것에 두는 이들에게 화가 있으리라!”라고 하신 주님의 경고의 말씀에서 우리는 이사야 시대에 있었던 악한 상황을 볼 수 있다 ― 사 5:20.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사랑하신 백성의 반역과 죄악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주님이시자 왕이시자 만군의 여호와이신 그리스도는 여전히 영광 가운데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신다.

이사야가 본 분은 그리스도였다.

요한은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생활과 일을 설명하면서, “이사야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그분에 대하여 말한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 요 12:41.

보좌에 앉으신 영광스러우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을 보려면,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이사야의 경고의 말씀(사 6:9-10)에 주의를 기울여, 주님께서 우리의 내적 눈을 열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돌이키게 하심으로, 우리의 눈멂과 질병을 내적으로 치료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긴 옷은 주로 그분의 인성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인성을 통해 표현되는 그분의 미덕의 광채를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 긴 옷을 입으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사람의 형상으로 이사야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인간 미덕들 안에서 표현된 신성한 영광을 지니시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사람이시다.

이사야는 의에 근거한 거룩함을 지니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스랍들은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상징하거나 대표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위하여 거기 서 있었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은 그분의 의에 근거한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의로우시므로, 그분은 속된 사람들로부터 거룩하게 되시고 구별되셨다.

이 이상을 본 결과 이사야는 종결되고 죽게 되었으며,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고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거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사 6:5.

신약의 의미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요소와 생명과 본성을 받아들여 하나님으로 조성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볼 때 하나님을 얻고 그분의 요소를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며 우리의 낡은 요소가 배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진대사적인 과정이 변화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우리 자신을 더욱 혐오하고 더욱 부인하게 된다.

자신이 더럽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상징하는 스랍들 중 하나가 제단에서 가져온 타고 있는 숯으로 정결하게 되었다.

스랍이 타고 있는 이 숯을 (이사야의 입에) 갖다 댄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능을 상징하는데, 이 구속은 십자가에서 성취되었고, 심판하고 태우고 거룩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신 ‘그 영, 거룩하신 분’에 의해 적용된다.

하나님을 본 결과는 하나님에 의해 정결하게 되고 깨끗하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에 의해 깨끗하게 된 결과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의 선민을 그리스도를 사는 상태 안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럴 때 하나님의 선민은 그분의 영광 안에서 그분을 표현하고, 그분의 거룩함으로 적셔지며, 그분의 의 안에서 살게 된다.

한 사람으로서 지극히 보배로운 분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신 탁월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은 다니엘에게 감상과 위로와 격려와 안정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포로 되어 있는 그분의 선민을 돌보시기 위해 세마포 겉옷으로 상징된, 인성을 지니신 제사장으로 나타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시기 위해 금띠로 상징된, 신성 안에 있는 왕의 직분을 가지시고 나타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귀하게 여기도록, 녹주석 같은 그분의 몸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보배로움과 존엄함을 지니시고 나타나셨다. ‘녹주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청록색이나 황색 빛의 보석을 가리킬 수 있는데, 이것은 체현되신 그리스도께서 신성하시고(황색) 생명으로 충만하시며(녹색) 하늘에 속하심(청색)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또한 번개의 모습 같은 그분의 얼굴로 상징되는 것처럼, 그분의 백성에게 빛을 비추시기 위해서 광채를 지니시고 나타나셨으며, 횃불 같은 그분의 눈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살피시고 심판하시기 위한 빛 비추는 시선을 지니시고 나타나셨다.

그리스도는 광낸 놋이 빛나는 것 같은 팔과 발로 상징되는 것처럼, 빛나는 일과 움직임 가운데 다니엘에게 나타나셨다.

그리스도는 무리의 소리와 같은 그분의 말소리로 상징되는 것처럼, 백성을 심판하시는 강한 말씀 가운데 나타나셨다.

세계정세 전체는 하늘들의 하나님에 의한 하늘들의 다스림 아래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만물 안에서 으뜸이 되시고 모든 것에서 첫째 위치를 얻으시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개인적인 우주 안에서 반드시 첫째 위치, 으뜸의 위치를 얻으셔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으뜸이신 분으로서 우리의 교회생활과 가정생활과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중심과 전부가 되셔야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중심(첫째)과 전부(모든 것)가 되게 하시려고 그분의 하늘에 속한 다스림 아래서 환경을 사용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으뜸이 되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우리를 그분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으며, 이러한 사람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하늘에 속한 다스림 아래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으뜸이 되시게 하고, 그분께서 모든 일에서 첫째 위치를 얻으시게 해 드린다.

요한은 그의 영 안에서 영광스러우신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금등잔대들 사이를 거닐고 계신 것에 대한 이상을 받았다(계 1:9-2:1). 이 이상을 통해 요한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아들로서 ‘발까지 닿는 옷을 입으시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신 것’을 보았다.

사람의 아들은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이시고, 금띠는 그분의 신성을 상징하며, 가슴은 사랑의 상징이다.

다니엘서 10장에서 그리스도는 신성한 일을 위해 허리에 띠를 띠심으로 강화되셨는데(출 28:4, 단 10:5), 이것은 교회들을 산출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장에서 그리스도는 가슴에 띠를 띠시고, 그분께서 그분의 사랑으로 산출하신 교회들을 돌보고 계신다.

금띠는 그리스도의 신성한 힘인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며, 가슴은 금에 속한 이 힘이 그분의 사랑에 의해, 그분의 사랑으로 발휘되고 유발되어 교회들을 보양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로서 그분의 인성 안에서 교회들을 돌보시며 보살피신다.

그리스도는 등잔대들의 등잔들을 손질하심으로 적합하게 하시면서, 우리를 보살피심으로 행복하고 기쁘고 편안하게 하신다.

주님의 임재는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를 제공함으로 우리의 존재를 보살펴, 우리에게 안식과 위로와 치료와 씻김과 격려를 준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주님의 임재의 보살피는 분위기를 누리면서, 보양하는 생명 공급을 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등잔대의 등잔들의 심지를 정돈하시면서, 우리가 빛을 비추는 데 방해되는 부정적인 모든 것을 잘라 내신다.

심지의 검게 탄 부분, 곧 불똥은 우리의 육체와 타고난 사람과 자아와 옛 창조물과 같이 하나님의 목적에 맞지 않아 잘라 낼 필요가 있는 것들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교회들 사이의 모든 차이점(잘못된 행위와 결함과 실패와 결점)을 잘라 내 버리심으로, 교회들을 본질과 외양과 표현에서 똑같이 되게 하신다.

그리스도는 가슴에 있는 금띠로 상징된 그분의 신성과 신성한 사랑으로 교회들을 돌보시면서 보양하신다.

그리스도는 육체 되심과 포함과 강화, 이렇게 세 단계로 된 그분의 충만한 사역 안에서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이신 그분 자신으로 우리를 보양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신성한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하여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는 그분의 이기는 이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거니시는 그리스도로서 그분은 각 교회의 상태를 알게 되시며, 말씀하시는 영으로서 그분은 등잔대들을 정돈하시고 신선한 기름이신 그 영을 공급하시어 등잔대들을 채우신다.

주님의 일곱 눈은 불꽃과 같으며, 지켜보고, 감찰하고, 살피고, 빛 비춤으로써 심판하고, 주입하기 위한 것이다. 일곱(7)은 하나님의 움직임에 있어서 완성을 의미하는 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일곱 눈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임과 운행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분이시다. 주님을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하나님으로 앎으로써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영 안에 계시는 그분의 임재를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주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보다 우리를 더욱 견고하게 세워 주는 것은 없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서들에서 지극히 보배로우신 그리스도와, 그분과 유기적으로 연관된 항목들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분의 믿는 이들에게 보배이시다.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한 보배로운 돌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헛된 생활 방식에서 우리를 구속했다.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할당해 주셨다.

우리의 믿음은 많은 고난을 통해 오는 시련을 통해 보배롭게 입증된다.

우리는 반드시 시간을 아껴서 하나님의 최고의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으로 조성되어 하나님의 개인적인 보물인 보배로운 사람들, 심지어 보배 자체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보배롭고 기적적인 구조물인 새 예루살렘이 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이 철저하게 바뀌도록 주님께 빛을 구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온 존재를 우리의 지극히 뛰어난 몫으로 계속 선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할 때, “네가 가치 없는 것에서 귀한 것을 분별해 내면 / 네가 나의 입이 되어”라고 한 예레미야서의 훈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말씀을 땅에 속한 모든 재물보다 더 귀히 여겨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을 말함으로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이신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그분의 백성 안으로 분배할 수 있다.

성경 전체의 결론인 새 예루살렘은 삼일 하나님 곧 신성한 삼일성이 세 가지 기본 요인으로서 그분께 구속받은 사람들 안으로 일해 넣어지시고 그들과 함께 짜이신 것이며, 세 가지 기본 요인 중에서 금은 성의 기반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을 상징하고, 진주는 성의 문으로서 아들 하나님을 상징하며, 성의 벽옥 성벽은 영 하나님을 상징한다. 이것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이상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분의 소중한 현재의 임재 안에 살면서, 그분께서 우리를 그분의 보물로 누리시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몫이신 그분을 누릴 때, 그분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건축하심으로 우리를 그분의 영적인 집과 왕들인 거룩한 제사장 체계가 되게 하셔서 그분의 마음의 갈망을 성취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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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렘 15:19 … “… 네가 가치 없는 것에서 귀한 것을 분별해 내면 네가 나의 입이 되어 ….

계 21:18 성벽은 벽옥으로 건축되어 있었고, 그 성은 맑은 유리와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계 21:21 또 열두 문은 열두 진주로 되어 있었는데 …

빌립보서 3장 7절과 8절에서 우리는 바울의 가치관이 바뀌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이전에 그에게 유익이 되었던 것을 지금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울은 어떻게 그에게 유익이 되었던 것을 거절할 수 있었는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해로운 것으로 여길 수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분이신 그리스도를 주님과 왕과 가장 탁월하신 분으로 여겼다. 그분을 위하여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이러한 종류의 가치관의 변화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의 변화이다. 만일 우리가 합당한 가치를 지닌 것을 구별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거절하시고 내버리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치 없는 것에서 귀한 것을 분별해 내어서 그분의 입이 되기를 원하신다(렘 15:19). 주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셔서 우리의 가치관이 철저하게 바뀌고 우리가 지극히 뛰어난 몫을 선택하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새 예루살렘의 구조의 기본 요소들은 금과 진주와 보석이다. 금은 아버지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을 가리키고, 진주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승리하시는 죽음과 생명을 분비하시는 부활 안에서 산출하신 산출물을 가리킨다. 보석은 그 영께서 하나님의 건축물을 건축하시기 위해 그분의 신성한 요소로 변화시키는 일을 하시면서 산출하신 산출물을 상징한다.

아들 하나님의 구속의 일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분의 갈망은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에 머묾으로써 그분께서 ‘생명 즙’을 우리 위에 분비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분비하시는 일이다. 이 일은 우리가 깨닫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가 필요하다. 이러한 비유가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사실상 신성한 생명의 요소로서 우리를 진주로 만들기 위해 우리 위에 분비되었음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체험을 점검해 보면, 그리스도의 분비하시는 일을 더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젊은 형제가 그의 아버지가 어떤 일을 잘못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는 항의하고 반대해야 한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다. 반대로, 만일 이 형제가 십자가 아래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머물면서 “주님, 저를 당신의 죽음 안에 붙잡아 두신 것으로 인해 당신을 찬양합니다. 지금 당신의 모든 것을 포함한 죽음 안에 거하고 있는 것으로 인해 당신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즉시 그의 안에 있는 어떤 것이 그의 내적 존재 주위에 분비될 것이고, 그는 내적인 공급을 느낄 것이다. 그가 이러한 내적인 분비를 계속 체험할 때, 점점 더 진주가 되어 갈 것이다. 이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부활 생명을 분비해 주시는 것이다.

심지어 결혼 생활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음을 통해 그분의 부활 안에서 분비하시는 일을 누리려면 반드시 그분의 죽음 안에 머무르고 남아 있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도망가지 말라.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포함한 놀라운 죽음이 우리의 ‘달콤한 집’임을 볼 필요가 있다. 남편이 아내에게 무엇을 말하든지 그녀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머무르고 남아 있을 필요가 있다. 만일 그녀가 이렇게 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의 분비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녀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머무는 한, 남편이 그녀를 더 괴롭힐수록 그녀는 더 많은 누림을 갖게 될 것이다. 이 교통은 교리나 가르침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을 설명하는 것이다. 오늘날 주님께서 휘장들을 여셔서, 승리하고 이기는 이가 되는 길을 보여 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우리는 ‘이를 악물면서’ 노력하고 분투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오직 집에, 즉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부활 안에서 신성한 생명의 분비를 누린다.

5일

계 1:14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눈같이 희었고, 그분의 눈은 불꽃과 같았으며,

계 1:18 살아 있는 이이다. 내가 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보아라, 영원토록 살아 있으며 …

그리스도는 인간적이실 뿐 아니라 신성하시다. 그분은 사람의 아들로서 금띠를 띠고 계시는데, 이 금띠는 그분의 신성한 힘인 그분의 신성을 상징한다. 그분의 신성한 힘인 그분의 신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교회들을 보양한다.

그분은 ‘힘 있는 띠’인 신성을 가지신 대제사장으로서, 세 단계의 충만한 사역 안에 계시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이신 그분 자신으로 우리를 보양하신다.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그분은 인성 안에서 우리를 보살피고 계신다. 동시에, 신성 안에서 그분은 그분의 인격의 모든 긍정적인 방면으로 우리를 보양하고 계신다. 그분은 회복 안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교회들을 돌보고 계신다. 인성 안에서 그분은 우리를 보살피셔서 합당하게 하시면서, 행복하고 기쁘고 편안하게 하신다. 신성 안에서 그분은 우리를 보양하셔서 우리가 신성한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함으로 그분의 이기는 이들이 되어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눈은 지켜보고, 감찰하고, 살피고, 빛 비춤으로써 심판하고, 주입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분의 눈에 대한 모든 방면, 특별히 주입하는 방면을 체험해야 한다. 그분의 눈은 그분의 존재 전체를 우리에게 주입한다. 그분의 주입하는 눈은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꽃이다. 이것은 우리의 체험에 의해 입증될 수 있다. 우리가 구원받은 날 이후로 그리스도의 눈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고 주입하는 타오르는 불과 같았다. 또한 그분의 눈은 우리를 분발시켜 뜨거워지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면 우리는 결코 전처럼 차가워질 수 없다. 우리를 바라보심으로써 그분은 우리를 불태우시고 주님 안에서 우리를 분발시키신다. 우리가 아내에게 무언가를 숨기려고 할 때, 주님께서 오셔서 빛을 발하는 일곱 눈으로 우리의 존재를 꿰뚫어 보시고 우리의 참상태를 드러내실 것이다. 나는 이러한 체험을 수백 번 가졌다. 내가 다른 이들, 특히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 다투려고 할 때,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는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나는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분께서 빛을 발하셔서 나의 입을 다물게 하셨다.

주님께서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만 비로소 우리의 영 안에서 주님의 실지적인 임재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은 결코 어떤 느낌이나 상상이나 심리 작용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오랫동안 따른 후에 하나님을 깊이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그곳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21:33) 다니엘은 사람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종’이라 불렸다(단 6:20). 그가 사자 굴에 던져졌을 때 그의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으시니, 사자들이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22절). 조지 뮐러(George Mueller)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서 때맞추어 도움을 얻기를 앙망한다면,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못 인도하지 않으실 것임을 보증해 주실 것이다. 주님 안에서 연장한 한 형제는 하나님께서 한 번도 그를 잘못 인도하신 적이 없다고 간증했다. 심한 어려움과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과 극심한 가난과 궁핍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지금까지 한 번도 나의 일을 잘못되게 하신 적이 없다. 내가 그분의 은혜를 통해 그분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 항상 나에게 공급해 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기쁘게 그분의 이름에 대해 말할 것이다.” 어떤 저자는 마르틴 루터가 겪은 일을 말했다. 루터가 한번은 그의 앞에 위험이 도처에 숨어 있음을 느껴 마음에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이때 그는 자신이 높은 곳에서 오는 힘을 붙잡아야만 해방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혼자 앉아서 탁자 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분은 영원히 살아 계신다!” 이러한 말로 그는 기쁘게 되고 부흥되었다. 사람은 켜져 있는 등과 같기 때문에 늦든 빠르든 꺼질 것이다. 오직 그분만이 참빛이시고, 모든 빛의 근원이시며,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다. 형제자매들이여, 아브라함이 부르고, 다니엘이 섬기며, 뮐러가 믿고, 마르틴 루터가 알았던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가 속해 있고 섬기고 있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마땅히 그분께 경배하고 즐거이 그분의 이름을 찬송해야 한다!

4일

계 1:12-13 나는 … 일곱 금등잔대를 보았는데, 그 등잔대들 가운데 사람의 아들과 같은 분께서 발까지 닿는 옷을 입으시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엡 5:29 아무도 자기 육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양하고 보살펴 줍니다. 그리스도도 교회를 이같이 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는 보살피고 보양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본이시다. 12절과 13절은 그리스도께서 긴 옷을 입은 사람의 아들로서 등잔대들을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옷은 제사장의 의복이며(출 28:33-35)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심을 보여 준다.

그분은 또한 가슴에 금띠를 띠셨다. 금띠는 한 덩이의 금이 띠가 된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인성을 지니고 계시며, 금띠는 그분의 신성을 상징한다. 이 금띠는 그분의 가슴 위에 있고, 가슴은 사랑의 상징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그들의 직무를 위해 허리에 띠를 띠었다(출 28:4). 다니엘서 10장 5절에서 그리스도 또한 허리에 정금 띠를 띠셨다. 허리에 띠를 띠는 것은 일을 위해 강화되는 것이다. 교회들을 산출하시는 일에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한 일을 끝내셨다. 이제 그분은 그분께서 산출하신 교회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계신다. 이런 이유로, 그분은 가슴에 금띠를 띠셨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그분의 수고로 세워진 그분의 교회들을 돌보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허리가 아닌, 사랑을 상징하는 그분의 가슴에 띠를 띠시고 교회들을 돌보고 계신다. 나는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서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신다는 것을 모두가 깨닫기를 바란다.

금띠는 하나의 표징으로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분의 힘이 됨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힘은 총체적으로 그분의 신성이다. 한 덩이의 금이 이제 띠이다. 신성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총체가 띠가 되었다. 금띠는 그리스도의 힘이 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며, 가슴은 금에 속한 이 힘이 그분의 사랑에 의해 발휘되고 유발되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신성한 힘은 그분의 사랑에 의해, 그분의 사랑으로 발휘되어 교회들을 보양한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로서 그분의 인성 안에서 등잔대들인 교회들을 돌보시며 보살피신다(계 1:13상).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교회들을 돌보신다. 먼저 그분은 그분의 인성 안에서 확실하게 교회들을 보살피신다. 즉 교회들을 행복하고 기쁘고 편안하게 하신다.

그분은 등잔대의 등잔들을 손질하심으로 교회들을 보살피신다. 구약에 있는 대제사장은 매일 아침 등잔대들의 등잔들을 손질함으로 등불을 정돈했다(출 30:7). 등잔들을 손질하는 것은 그것을 적합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등잔대의 등잔의 심지를 정돈하심으로 등잔대들을 돌보신다. 이것은 구약에 있는 예표에 따라 제사장들이 했던 것과 같다(출 25:38). 심지가 타면 그것은 검게 되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와서 심지의 검은 부분을 정돈해야 했다. 이것이 등불이 더 밝게 빛나도록 심지를 정돈한다는 것의 의미이다. 심지의 검게 탄 부분, 곧 불똥은 우리의 육체와 타고난 사람과 자아와 옛 창조물과 같이 하나님의 목적에 맞지 않아 잘라 낼 필요가 있는 것들을 상징한다. 검게 탄 심지가 있는 교회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오늘날 주님께서 그분의 회복 안에서 인성 안에 계신 대제사장이신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히브리서 4장은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우리의 연약한 느낌을 공감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혹을 받으신 분이시지만 죄는 없으시다고 말한다(15절). 우리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으시다. 그분은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혹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쉽게 우리의 연약한 느낌을 공감하실 수 있다. 이것은 그분께서 항상 인성 안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인성 안에 계신 대제사장으로서 항상 우리를 보살피심으로 돌보시는 분이시다.

3일

단 10:5-6 내가 눈을 들어 보니, 세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 우바스의 정금 띠를 띤 한 사람이 있었다. 그분의 몸은 또한 녹주석 같고, 그분의 얼굴은 번개의 모습 같으며, 그분의 눈은 횃불 같고, 그분의 팔과 발은 광낸 놋이 빛나는 것 같으며, 그분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 같았다.

다니엘서 10장 4절부터 9절까지에서 다니엘은 특별한 이상을 보았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움직임의 중심과 전부이신 탁월하신 그리스도께서 다니엘의 감상과 위로와 격려와 기대와 안정을 위해 그에게 나타나셨다.

나는 다니엘이 이분께서 사람이신 주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믿는다. 그 사람은 여호와이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되신 여호와이셨다. 하나님의 관점에는 시간의 요소가 없고 사실만 있다. 우주 가운데 삼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이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계시된다. 그러나 창세기 18장에서 세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왔을 때, 그들 중에 예수님이셨던 (평범한) 한 사람이 있었다. 다니엘서 10장에서 이 사람은 다니엘에게 (탁월하신 그리스도로) 나타나셨다.

첫째로, 탁월하신 그리스도는 포로 되어 있는 그분의 선민을 돌보시기 위해 제사장 직분을 지니시고 나타나셨다(단 10:5상). 그분은 전쟁을 위한 갑옷이 아닌, 구약의 제사장 의복인 세마포 옷을 입으시고 다니엘에게 나타나셨다. 다니엘서 10장이 기록된 때에, 하나님의 중심과 전부이신 그리스도는 포로 상태에 있었던 이스라엘 자손을 친히 돌보는 제사장이셨다. 그분은 포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인성 안에서 돌보시는 제사장이시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모든 백성을 다스리시기 위해 (금띠로 상징된) 왕의 직분을 가지시고 다니엘에게 나타나셨다(단 10:5하). 띠는 강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은 세마포가 아닌 금으로 상징된다. 그분의 제사장 직분은 인간적이지만, 그분의 왕의 직분은 신성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귀하게 여기도록, 녹주석 같은 그분의 몸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보배로움과 존엄함을 지니시고 나타나셨다(단 10:6상). 여기서 ‘녹주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청록색이나 황색 빛의 보석을 가리킬 수 있는데, 이것은 체현되신 그리스도께서 신성하시고(황색) 생명으로 충만하시며(녹색) 하늘에 속하심(청색)을 상징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또한 번개의 모습 같은 그분의 얼굴로 상징되는 것처럼, 그분의 백성에게 빛을 비추시기 위해서 광채를 지니시고 나타나셨다(단 10:6상).

그리스도의 살피시고 심판하시기 위한 빛 비추는 시선은 횃불 같은 그분의 눈으로 상징된다(단 10:6중).

그리스도는 또한 (광낸 놋이 빛나는 것처럼) 빛나는 일과 움직임 가운데 나타나시는데(단 10:6중), 이러한 그분의 일과 움직임은 사람들에게 시험받으며 사람들을 시험한다. 예표에서 놋은 사람들을 빛나게 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심판받고 시험받으셨으며, 하나님의 시험과 심판은 그분을 광낸 놋처럼 빛나게 했다. 그러한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험받으셨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시험하신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백성을 심판하는 강한 말씀 가운데 다니엘에게 나타나셨다. 그분의 강한 말씀은 무리의 소리와 같은 그분의 말소리로 상징된다(단 10:6하).

다니엘이 본 그리스도는 그러한 분이시다. 그분은 보배로우시고, 소중하시며, 완전하시고, 온전하시다. 사람으로서 그분은 하나님의 움직임의 중심과 전부 자체로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신다. 제사장으로서 그분은 우리를 돌보고 계시며, 왕으로서 그분은 우리를 다스리고 계신다. 그분은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가!

다니엘서 10장 7절은 “나 다니엘만 홀로 그 이상을 보았고,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 이상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었으므로, 오직 다니엘만 그것을 보았고 물질적인 시력을 의지하는 이들은 보지 못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을 보는 데 있어서 물질적인 시야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런 이유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단지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 아래 있고 우리에게 영적인 시야가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고 보배로우신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2일

사 6:5-7 그때 내가 말하였다. “내게 화가 있겠구나, 내가 이제 죽게 되었음이라! 내가 입술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 부정한 백성 가운데 거주하면서 왕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내 눈으로 뵈었음이라!” 그러자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 그가 그것을 나의 입에 대며 말하였다. “이제 … 너의 죄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정결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사랑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의 반역과 죄악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여전히 영광 가운데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신다(사 6:1-4). 이 절들은 이 땅의 상황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백성의 부패와 타락이 어떠하든 그리스도는 여전히 그분의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있는 상황을 보았을 때 매우 낙심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주님은 그가 보좌에 앉아 계시는 영광의 주님을 볼 수 있도록 그를 이상 안으로 이끄셨다(사 6:1). 마치 주님은 이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상황을 내려다보지 마라. 내려다본다면 너는 낙심할 것이다. 나를 올려다보아라.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나는 우주 안에서 유일하게 좋은 존재이다. 나를 바라보아라.”

여러분은 교회생활 초기에 아마 교회의 ‘허니문’을 체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여러분에게 그렇게 달콤했던 것이 식초처럼 쓰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교회생활에 대해 실망할 때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계속해서 ‘허니문’을 체험할 수 있는 교회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언할 수 있다. 모든 교회에는 얼마간의 식초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상황을 내려다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올려다보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아닌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올려다보는 그리스도는 더 이상 십자가에 계시지 않는다. 오늘날 그분은 보좌 위에 계신다.

백성은 타락하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보좌는 그분의 영광 안에서 동일하게 남아 있었다(사 6:1상).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바뀌고 요동하지만, 그리스도는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게 남아 계신다(히 13:8).

요한은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생활과 일을 설명할 때, ‘이사야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면서(요 12:41) 이사야서 6장에 기록된 이사야의 이상을 언급했다.

이사야는 “내게 화가 있겠구나, 내가 이제 죽게 되었음이라!”(사 6:5상)라고 말함으로써 영광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에 반응했다. 이 이상을 본 결과로 이사야는 종결되었고 끝났다.

이사야서 6장 5절 하반절에서 우리는 우리의 입술, 즉 우리 말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악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은 대부분 비평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한담과 불평과 따지는 것과 같은 부정한 것들은 교회생활이 식초와 같은 맛을 내게 한다. 우리가 한담이나 불평이나 따지는 것을 제한다면, 우리에게 말할 것이 거의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이사야처럼 우리는 우리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참으로 주님의 이상을 본 사람은 누구나 빛 비춤을 받는다.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보았을 때, 그는 즉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8절)라고 주님께 말씀드렸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깨닫는 정도는 우리가 주님을 보는 정도에 달려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는 날마다 아침 부흥이 필요하다. 아침 부흥 시간은 우리가 주님을 다시 보는 시간이다. 우리가 주님을 더 볼수록, 우리는 더욱더 우리의 어떠함을 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과,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에 광채나 미덕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사야는 자신이 부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거룩함을 상징하는 한 스랍에 의해 정결하게 되었다.

우리의 체험에서 우리가 정결한지 부정한지는 우리 양심의 느낌에 달려 있으며, 우리 양심의 느낌은 우리가 주님을 본 것에 달려 있다. 우리가 주님을 본 정도가 우리가 정결하게 되는 정도를 결정한다. 우리가 주님을 보고 폭로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정결하게 된다.

    신언노트, 2023 06 25

    참다운 교회생활을 위해
    하나님의 최고의 보배이신
    영광스럽고 탁월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과 체험과 누림을 가짐
    그 진짜 교회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최고의
    귀중함이신(소중한 분이신)
    영광스러우시고 또 뛰어나신
    그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 체험, 또 누림

    이사야는
    낙심해 있었을 때
    영광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을 보았다(사 6:1, 5).
    이사야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을 사랑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고서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의 표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범했고,
    그들의 인간적인 미덕들은
    부패하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웃시야왕은 이미
    죽고 없었다.
    웃시야왕은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서
    매우 좋은 왕이었지만
    이미 죽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사야는 틀림없이
    매우 낙심했을 것이다.
    주님은
    낙심해 있는
    이사야에게 나타나셨다.

    이사야서 6장에서
    그리스도는
    영광 안에서
    왕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이 한 분께서 바로
    신성한 영광과
    인간 미덕들을 가지신
    그 하나님-사람이시다.

    그리스도의 인간 미덕들은
    그분의 긴 옷자락으로
    나타내진다.
    사복음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 주지만,
    사람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더 많이 보여 준다.
    그리스도는
    신성한 영광 안에서보다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서
    훨씬 더 많이 표현되신다.
    그렇지만 그분의 인간 미덕들에는
    근원이 되는
    신성한 영광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인간 미덕들 안에서 표현된
    신성한 영광을 지닌 사람이시다.
    이사야서 6장에서
    주님이시자 왕이시자 만군의 여호와이신
    그리스도는
    높이 들린
    왕좌에 앉아 계신다.
    그분께서 바로
    왕좌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2장에서
    이사야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만군의 여호와이시자 왕이시자 주님이심을
    의미한다.
    이 이상에서
    그리스도는
    긴 옷을 입고 계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옷자락은
    성전을 가득 채운다.
    이사야에게 나타나셨던
    주님은
    연기로 상징되는
    신성한 영광 안에서,
    그분의 옷자락으로 상징되는
    인간 미덕들을 지니시고
    높이 들린
    왕좌 위에 계셨다.
    그분의 거룩함은(신성함은)
    그 스랍들에 의해
    유지된다(받쳐진다, 붙잡힌다).

    이사야서 6장
    8절부터 10절까지에서
    우리는
    이사야가 보냄을 받은 것을
    본다.
    그는
    신성한 영광과
    인간 미덕들로 충만하시고
    거룩함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에 의해
    보냄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은
    그분의 의에 근거한다.
    5장 16절은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는
    심판으로 높아지시며
    /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신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
    거룩하게 되신다.
    의로운 사람은
    거룩하게 된 사람이다.
    그는
    속되지 않고 거룩하며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거룩하시며
    속된 사람들로부터
    거룩하게 되시고
    구별되신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항상
    의로우셨기 때문에
    확실히 구별되고 유일하며 특별한 분이셨다.
    따라서, 그분은
    거룩하시고(신성하시고),
    거룩하게 되신다(신성하게 되신다).

    이사야는
    신성한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신성한 거룩함을 범하며
    인간 미덕들이 부패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의해 보내어졌다(사 6:5).
    그는
    주님에 의해
    보냄을 받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거룩함 안에서
    그분의 인간 미덕들을 지니고
    신성한 영광을
    표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이 되어
    민족들에게서
    완전히 분별되기를 원하셨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기반과 기초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먼저
    우리를 의롭게 함으로
    의롭다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거룩하고, 거룩하게 되며, 분별될 것이다.
    자연스럽게(자발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한 영광의
    표현 안으로,
    즉 그리스도를 살도록
    이끌릴 것이다.

    보냄을 받은 모든 사람은
    동일한 일을 하도록
    주님에 의해
    보냄을 받는다.
    첫째로, 하나님은
    신언자들을 보내셨다.
    둘째로,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다.
    셋째로, 하나님은
    신약의 사도들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이들 모두를 보내셔서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사는 상태 안으로
    이끌고자 하셨다.
    하나님의 갈망은
    그분의 백성이
    의를 살아,
    자신이
    거룩한 백성이며
    민족들과 다르고 구분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분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신성한 영광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의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성한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로운 백성, 거룩한 백성이어야 하고,
    신성한 영광으로 충만한 백성이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는 이들일 것이다.

    이사야는
    낙심해 있었을 때
    영광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을 보았다.

    “악을 선이라 하고
    / 선을 악이라 하는 이들,
    / 어둠을 빛에 두고
    / 빛을 어둠에 두는 이들,
    / 쓴 것을 단것에 두고
    / 단것을 쓴 것에 두는 이들에게
    화가 있으리라!”라고 하신
    주님의 경고의 말씀에서
    우리는
    이사야 시대에 있었던
    악한 상황을 볼 수 있다
    ― 사 5:20.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사랑하신
    백성의 반역과 죄악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주님이시자 왕이시자 만군의 여호와이신
    그리스도는 여전히
    영광 가운데서
    높이 들린 왕좌에
    앉아 계신다.

    이사야가 본 분은
    그리스도였다.

    요한은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생활과 일을 설명하면서,
    “이사야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그분에 대하여
    말한 것이었다.”
    라고 하였다 ― 요 12:41.

    왕좌에 앉으신
    영광스러우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을 보려면,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이사야의
    경고의 말씀(사 6:9-10)에
    주의를 기울여,
    주님께서
    우리의 내적 눈을 열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돌이키게 하심으로,
    우리의 눈멂과 질병을
    내적으로 치료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긴 옷은 주로
    그분의 인성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인성을 통해 표현되는
    그분의 미덕의 광채를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
    긴 옷을 입으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사람의 형상으로
    이사야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인간 미덕들 안에서 표현된
    신성한 영광을 지니시고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사람이시다.

    이사야는
    의에 근거한
    거룩함을 지니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스랍들은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상징하거나 대표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위하여
    거기 서 있었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은
    그분의 의에 근거한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의로우시므로,
    그분은
    그 속된 사람들로부터
    거룩하게 되셨고
    구별되셨다.

    이 이상을 본 결과
    이사야는
    종결되고 죽게 되었으며,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고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거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사 6:5.

    신약의 의미에서,
    하나님을 봄이
    하나님을 얻음과 같다.
    하나님을 얻는 것은
    그분의 요소 안에서,
    그분의 생명 안에서,
    또 그분의 본성 안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여서
    우리가
    하나님으로
    조성되는(조성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우리를 변형시키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얻고
    그분의 요소를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며,
    또 우리의 낡은 요소가
    배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진대사적인 과정이
    변형이다.

    더 많이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알며,
    또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더 많이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혐오하고,
    또 더 많이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부인한다.

    자신이 더럽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스랍들 중 하나가
    제단에서 가져온
    타고 있는 숯으로
    정결하게 되었다.

    스랍이
    타고 있는 이 숯을
    (이사야의 입에) 갖다 댄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능을 상징하는데,
    이 구속은
    십자가에서 성취되었고,
    심판하고 태우고 거룩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신
    ‘그 영(,) 거룩하신 분’에 의해
    적용된다.

    하나님을 본 결과는
    하나님에 의해
    정결하게 되고
    깨끗하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에 의해
    깨끗하게 된 결과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의 선민을
    그리스도를 사는 상태 안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럴 때
    하나님의 선민은
    그분의 영광 안에서
    그분을 표현하고,
    그분의 거룩함으로 적셔지며,
    그분의 의 안에서 살게 된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고 사랑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의
    반역과 죄악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여전히
    영광 가운데서
    높이 들린 왕좌에
    앉아 계신다.
    이 절들은
    이 땅의 상황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백성의 부패와 타락이 어떠하든
    그리스도는 여전히
    그분의 영광의 왕좌에
    앉아 계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있는
    상황을 보았을 때
    매우 낙심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주님은
    그가
    왕좌에 앉아 계시는
    영광의 주님을 볼 수 있도록
    그를
    한 이상 안으로 이끄셨다.
    마치 주님은
    이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상황을 내려다보지 마라.
    내려다본다면
    너는 낙심할 것이다.
    나를 올려다보아라.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나는
    우주 안에서
    유일하게 좋은 그 존재(실재)이다.
    나를 바라보아라.”

    여러분은
    교회생활 초기에 아마
    교회의 ‘허니문’을
    체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여러분에게
    그렇게 달콤했던 것이
    식초처럼
    쓰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교회생활에 대해
    실망할 때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계속해서
    ‘허니문’을 체험할 수 있는
    교회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언할 수 있다.
    각각의 모든 교회들에는
    얼마간의 식초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상황을 내려다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올려다보기를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아닌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올려다보는 그리스도는 더 이상
    십자가 위에 계시지 않는다.
    오늘날 그분은
    왕좌 위에 계신다.

    백성은
    타락하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좌는
    그분의 영광 안에서
    동일하게 남아 있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바뀌고 요동하지만,
    그리스도는
    오늘 그리고 영원히
    동일하게 남아 계신다.

    요한은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생활과 일을 설명할 때,
    ‘이사야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면서
    (요 12:41)
    이사야서 6장에 기록된
    이사야의 이상을 언급했다.

    이사야는
    “내게 화가 있겠구나,
    내가 이제
    죽게 되었음이라!”
    (사 6:5상)라고 말함으로써
    영광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에 반응했다.
    이 이상을 본 결과로
    이사야는
    종결되었고 끝났다.

    이사야서 6장 5절 하반절에서
    우리는
    우리의 입술,
    즉 우리 말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악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은 대부분
    비평의(비난의) 말이기 때문이다.
    한담과 불평과 따지는 것과 같은
    부정한 것들은
    교회생활이
    식초와 같은 맛을 내게 한다.
    우리가
    한담이나 불평이나 따지는 것을 제한다면,
    우리에게
    말할 것이 거의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이사야처럼
    우리는
    우리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참으로 주님의 이상을 본 사람은 누구나
    빛 비춤을 받는다.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보았을 때,
    그는 즉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8절)라고
    주님께 말씀드렸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깨닫는 정도는
    우리가
    주님을 보는
    정도에 달려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는 날마다
    아침 부흥이 필요하다.
    아침 부흥 시간은
    우리가
    주님을 다시 보는 시간이다.
    우리가
    주님을 더 볼수록,
    우리는 더욱더
    우리의 어떠함을 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과,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에
    광채나 미덕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사야는
    자신이 부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거룩함을 상징하는
    한 스랍에 의해
    정결하게 되었다.

    우리의 체험에서
    우리가
    정결한지 부정한지는
    우리 양심의 느낌에 달려 있으며,
    우리 양심의 느낌은
    우리가
    주님을 본 것에 달려 있다.
    우리가
    주님을 본 정도가
    우리가 정결하게 되는
    정도를 결정한다.
    우리가
    주님을 보고 폭로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정결하게 된다.

    다니엘서 10장
    4절부터 9절까지에서
    다니엘은
    특별한 이상을 보았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움직임의 중심과 전부이신
    탁월하신 그리스도께서
    다니엘의
    감상과 위로와
    격려와 기대와
    안정을 위해
    그에게 나타나셨다.

    나는
    다니엘이
    이분께서
    사람이신 주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믿는다.
    그 사람은
    여호와이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되신 여호와이셨다.
    하나님의 관점에는
    시간의 요소가 없고
    사실만 있다.
    우주 가운데
    삼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이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계시된다.
    그러나 창세기 18장에서
    세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왔을 때,
    그 셋 중에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한 평범한 사람이신)
    예수이셨다.
    다니엘서 10장에서
    이 사람은
    다니엘에게
    (그 탁월하신 그리스도로서)
    나타나셨다.

    첫째로, 탁월하신 그리스도는
    포로 되어 있는
    그분의 선민을 돌보시기 위해
    제사장 직분을 지니시고
    나타나셨다.
    그분은
    전쟁을 위한 갑옷이 아닌,
    구약의 제사장 의복인
    세마포 옷을 입으신 채로
    다니엘에게 나타나셨다.
    다니엘서 10장이
    기록된 때에,
    하나님의 중심과 전부이신
    그리스도는
    포로 상태에 있었던
    이스라엘 자손을
    친히 돌보는 제사장이셨다.
    그분은
    포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인성 안에서 돌보시는
    제사장이시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모든 백성을 다스리시기 위해
    (금띠로 상징된)
    왕의 직분을 가지시고
    다니엘에게 나타나셨다.
    띠는 강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은
    세마포가 아닌
    금으로 상징된다.
    그분의 제사장 직분은
    인간적이지만,
    그분의 왕의 직분은
    신성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귀하게 여기도록,
    녹주석 같은
    그분의 몸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보배로움과 존엄함을 지니시고
    나타나셨다.
    여기서 ‘녹주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청록색이나 황색 빛의 보석을
    가리킬 수 있는데,
    이것은
    체현되신 그리스도께서
    신성하시고(황색)
    생명으로 충만하시며(녹색)
    하늘에 속하심(청색)을
    상징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또한
    번개의 모습 같은
    그분의 얼굴로 상징되는 것처럼,
    그분의 백성에게
    빛을 비추시기 위해서
    광채를 지니시고
    나타나셨다.

    그리스도의
    살피시고 심판하시기 위한
    빛 비추는 시선은
    횃불 같은 그분의 눈으로
    상징된다.

    그리스도는 또한
    (광낸 놋이 빛나는 것처럼)
    빛나는 일과 움직임 가운데 나타나시는데,
    이러한 그분의 일과 움직임은
    사람들에게 시험받으며
    사람들을 시험한다.
    예표에서 놋은
    사람들을 빛나게 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심판받고 시험받으셨으며,
    하나님의 시험과 심판은
    그분을 광낸 놋처럼 빛나게 했다.
    그러한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험받으셨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시험하신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백성을 심판하는
    강한 말씀 가운데
    다니엘에게 나타나셨다.
    그분의 강한 말씀은
    무리의 소리와 같은
    그분의 말소리로 상징된다.

    다니엘이 본 그리스도는
    그러한 분이시다.
    그분은
    보배로우시고, 소중하시며,
    완전하시고, 온전하시다.
    사람으로서 그분은
    하나님의 움직임의
    중심과 전부 자체로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신다.
    제사장으로서 그분은
    우리를 돌보고 계시며,
    왕으로서 그분은
    우리를 다스리고 계신다.
    그분은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가!

    다니엘서 10장 7절은
    “나 다니엘만 홀로
    그 이상을 보았고,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 이상을 보지 못하였다.”
    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었으므로,
    오직 다니엘만
    그것을 보았고
    물질적인 시력을 의지하는 이들은
    보지 못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을 보는 데 있어서
    물질적인 시야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런 이유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단지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 아래 있고
    우리에게
    영적인 시야가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고 보배로우신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으로서
    지극히 보배로운 분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신
    탁월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은
    다니엘에게
    감상과 위로와
    격려와 안정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포로 되어 있는
    그분의 선민을 돌보시기 위해
    세마포 겉옷으로 상징된,
    인성을 지니신
    제사장으로 나타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시기 위해
    금띠로 상징된,
    신성 안에 있는
    왕의 직분을 가지시고
    나타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귀하게 여기도록,
    녹주석 같은
    그분의 몸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보배로움과 존엄함을 지니시고
    나타나셨다.
    ‘녹주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청록색이나 황색 빛의 보석을
    가리킬 수 있는데,
    이것은
    체현되신 그리스도께서
    신성하시고(황색)
    생명으로 충만하시며(녹색)
    하늘에 속하심(청색)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또한
    번개의 모습 같은
    그분의 얼굴로 상징되는 것처럼,
    그분의 백성에게
    빛을 비추시기 위해서
    광채를 지니시고
    나타나셨으며,
    횃불 같은
    그분의 눈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살피시고 심판하시기 위한
    빛 비추는 시선을 지니시고
    나타나셨다.

    그리스도는
    광낸 놋이 빛나는 것 같은
    팔과 발로 상징되는 것처럼,
    빛나는 일과 움직임 가운데
    다니엘에게 나타나셨다.

    그리스도는
    무리의 소리와 같은
    그분의 말소리로 상징되는 것처럼,
    백성을 심판하시는
    강한 말씀 가운데
    나타나셨다.

    세계정세 전체는
    하늘들의 하나님에 의한
    하늘들의 다스림 아래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만물 안에서 으뜸이 되시고
    모든 것에서 첫째 위치를 얻으시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개인적인 우주 안에서
    반드시 첫째 위치, 으뜸의 위치를
    얻으셔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으뜸이신 분으로서
    우리의 교회생활과 가정생활과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중심과 전부가 되셔야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중심(첫째)과 전부(모든 것)가
    되게 하시려고
    그분의 하늘에 속한 다스림 아래서
    환경을 사용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으뜸이 되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우리를
    그분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으며,
    이러한 사람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하늘에 속한 다스림 아래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으뜸이 되시게 하고,
    그분께서
    모든 일에서
    첫째 위치를
    얻으시게 해 드린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는
    보살피고 보양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본이시다.
    12절과 13절은
    그리스도께서
    긴 옷을 입은 사람의 아들로서
    등잔대들을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옷은
    제사장의 의복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심을
    보여 준다.

    그분은 또한
    가슴에 금띠를 띠셨다.
    금띠는
    한 덩이의 금이
    띠가 된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인성을 지니고 계시며,
    금띠는
    그분의 신성을 상징한다.
    이 금띠는
    그분의 가슴 위에 있고,
    가슴은
    사랑의 상징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그들의 직무를 위해
    허리에 띠를 띠었다.
    다니엘서 10장 5절에서
    그리스도 또한
    허리에 정금 띠를 띠셨다.
    허리에 띠를 띠는 것은
    일을 위해 강화되는 것이다.
    교회들을 산출하시는 일에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한 일을 끝내셨다.
    이제 그분은
    그분께서 산출하신 교회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계신다.
    이런 이유로, 그분은
    가슴에 금띠를 띠셨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그분의 수고로 세워진
    그분의 교회들을 돌보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허리가 아닌,
    사랑을 상징하는
    그분의 가슴에
    띠를 띠시고
    교회들을 돌보고 계신다.
    나는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서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신다는 것을
    모두가 깨닫기를 바란다.

    금띠는
    하나의 표징으로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분의 힘이 됨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힘은
    총체적으로
    그분의 신성이다.
    한 덩이의 금이
    이제 띠이다.
    신성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총체가
    띠가 되었다.
    금띠는
    그리스도의 힘이 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며,
    가슴은
    금에 속한 이 힘이
    그분의 사랑에 의해
    발휘되고 유발되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신성한 힘은
    그분의 사랑에 의해,
    그분의 사랑으로 발휘되어
    교회들을 보양한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로서
    그분의 인성 안에서
    등잔대들인 교회들을
    돌보시며 보살피신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교회들을 돌보신다.
    먼저 그분은
    그분의 인성 안에서 확실하게
    교회들을 보살피신다.
    즉 교회들을
    행복하고 기쁘고 편안하게 하신다.

    그분은
    등잔대의 등잔들을 손질하심으로
    교회들을 보살피신다.
    구약에 있는 대제사장은
    매일 아침
    등잔대들의 등잔들을 손질함으로
    등불을 정돈했다.
    등잔들을 손질하는 것은
    그것을
    적합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등잔대의 등잔의 심지를 정돈하심으로
    등잔대들을 돌보신다.
    이것은
    구약에 있는 예표에 따라
    제사장들이 했던 것과 같다.
    심지가 타면
    그것은 검게 되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와서
    심지의 검은 부분을
    정돈해야 했다.
    이것이
    등불이 더 밝게 빛나도록
    심지를 정돈한다는 것의 의미이다.
    심지의 검게 탄 부분, 곧 불똥은
    우리의
    육체와 타고난 사람과
    자아와 옛 창조물과 같이
    하나님의 목적에 맞지 않아
    잘라 낼 필요가 있는 것들을 상징한다.
    검게 탄 심지가 있는 교회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오늘날
    주님께서
    그분의 회복 안에서
    인성 안에 계신 대제사장이신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히브리서 4장은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우리의 연약한 느낌을
    공감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혹을 받으신 분이시지만
    죄는 없으시다고 말한다.
    우리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으시다.
    그분은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혹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쉽게
    우리의 연약한 느낌을
    공감하실 수 있다.
    이것은
    그분께서 항상
    인성 안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인성 안에 계신 대제사장으로서 항상
    우리를 보살피심으로
    돌보시는 분이시다.

    요한은
    그의 영 안에서
    영광스러우신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금등잔대들 사이를 거닐고 계신 것에 대한
    이상을 받았다.
    이 이상을 통해
    요한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아들로서
    ‘발까지 닿는
    옷을 입으시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신 것’을
    보았다.

    사람의 아들은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이시고,
    금띠는
    그분의 신성을 상징하며,
    가슴은
    사랑의 상징이다.

    다니엘서 10장에서
    그리스도는
    신성한 일을 위해
    허리에 띠를 띠심으로
    강화되셨는데,
    이것은
    교회들을 산출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장에서
    그리스도는
    가슴에 띠를 띠시고,
    그분께서
    그분의 사랑으로 산출하신
    교회들을 돌보고 계신다.

    금띠는
    그리스도의 신성한 힘인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며,
    가슴은
    금에 속한 이 힘이
    그분의 사랑에 의해,
    그분의 사랑으로
    발휘되고 유발되어
    교회들을 보양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로서
    그분의 인성 안에서
    교회들을
    돌보시며 보살피신다.

    그리스도는
    등잔대들의 등잔들을 손질하심으로
    적합하게 하시면서,
    우리를 보살피심으로
    행복하고 기쁘고 편안하게 하신다.

    주님의 임재는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를 제공함으로
    우리의 존재를 보살펴,
    우리에게
    안식과 위로와
    치료와 씻김과
    격려를 준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주님의 임재의
    보살피는 분위기를 누리면서,
    보양하는 생명 공급을
    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등잔대의 등잔들의
    심지를 정돈하시면서,
    우리가
    빛을 비추는 데 방해되는
    부정적인 모든 것을
    잘라 내신다.

    심지의 검게 탄 부분, 곧 불똥은
    우리의
    육체와 타고난 사람과
    자아와 옛 창조물과 같이
    하나님의 목적에 맞지 않아
    잘라 낼 필요가 있는 것들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교회들 사이의
    모든 차이점
    (잘못된 행위와 결함과
    실패와 결점)을
    잘라 내 버리심으로,
    교회들을
    본질과 외양과 표현에서
    똑같이 되게 하신다.

    그리스도는
    인간적이실 뿐 아니라
    신성하시다.
    그분은
    사람의 아들로서
    금띠를 띠고 계시는데,
    이 금띠는
    그분의 신성한 힘인
    그분의 신성을 상징한다.
    그분의 신성한 힘인
    그분의 신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교회들을 보양한다.

    그분은
    ‘힘 있는 띠’인
    신성을 가지신
    대제사장으로서,
    세 단계의 충만한 사역 안에 계시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이신
    그분 자신으로
    우리를 보양하신다.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그분은
    인성 안에서
    우리를 보살피고 계신다.
    동시에, 신성 안에서
    그분은
    그분의 인격의 모든 긍정적인 방면으로
    우리를 보양하고 계신다.
    그분은
    회복 안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교회들을 돌보고 계신다.
    인성 안에서 그분은
    우리를 보살피셔서
    합당하게 하시면서,
    행복하고 기쁘고 편안하게 하신다.
    신성 안에서 그분은
    우리를 보양하셔서
    우리가
    신성한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함으로
    그분의 이기는 이들이 되어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눈은
    지켜보고, 감찰하고,
    살피고, 빛 비춤으로써 심판하고,
    주입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분의 눈에 대한 모든 방면,
    특별히 주입하는 방면을
    체험해야 한다.
    그분의 눈은
    그분의 존재 전체를
    우리에게 주입한다.
    그분의 주입하는 눈은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꽃이다.
    이것은
    우리의 체험에 의해
    입증될 수 있다.
    우리가 구원받은 날 이후로
    그리스도의 눈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고 주입하는
    타오르는 불과 같았다.
    또한 그분의 눈은
    우리를 분발시켜
    뜨거워지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면
    우리는 결코
    전처럼 차가워질 수 없다.
    우리를 바라보심으로써
    그분은
    우리를 불태우시고
    주님 안에서
    우리를 분발시키신다.
    우리가
    아내에게
    무언가를 숨기려고 할 때,
    주님께서 오셔서
    빛을 발하는 일곱 눈으로
    우리의 존재를 꿰뚫어 보시고
    우리의 참상태를 드러내실 것이다.
    나는
    이러한 체험을
    수백 번 가졌다.
    내가
    다른 이들,
    특히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
    다투려고 할 때,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는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나는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분께서
    빛을 발하셔서
    나의 입을
    다물게 하셨다.

    주님께서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만
    비로소 우리의 영 안에서
    주님의 실지적인 임재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은 결코
    어떤 느낌이나
    상상이나
    심리 작용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오랫동안 따른 후에
    하나님을
    깊이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그곳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창 21:33)
    다니엘은
    사람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종’이라
    불렸다.
    그가
    사자 굴에 던져졌을 때
    그의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으시니,
    사자들이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
    조지 뮐러(George Mueller)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서
    때맞추어 도움을 얻기를
    앙망한다면,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못 인도하지 않으실 것임을
    보증해 주실 것이다.
    주님 안에서 연장한
    한 형제는
    하나님께서 한 번도
    그를 잘못 인도하신 적이 없다고
    간증했다.
    심한 어려움과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과
    극심한 가난과 궁핍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지금까지 한 번도
    나의 일을 잘못되게 하신 적이 없다.
    내가
    그분의 은혜를 통해
    그분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 항상
    나에게 공급해 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기쁘게
    그분의 이름에 대해
    말할 것이다.”
    어떤 저자는
    마르틴 루터가 겪은 일을
    말했다.
    루터가 한번은
    그의 앞에
    위험이 도처에 숨어 있음을 느껴
    마음에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이때 그는
    자신이
    높은 곳에서 오는 힘을 붙잡아야만
    해방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혼자 앉아서
    탁자 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분은
    영원히 살아 계신다!”
    이러한 말로
    그는
    기쁘게 되고
    부흥되었다.
    사람은
    켜져 있는 등과 같기 때문에
    늦든 빠르든
    꺼질 것이다.
    오직 그분만이
    참빛이시고,
    모든 빛의 근원이시며,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다.
    형제자매들이여,
    아브라함이 부르고,
    다니엘이 섬기며,
    뮐러가 믿고,
    마르틴 루터가 알았던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가
    속해 있고
    섬기고 있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마땅히
    그분께 경배하고
    즐거이
    그분의 이름을
    찬송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가슴에 있는
    금띠로 상징된
    그분의 신성과
    신성한 사랑으로
    교회들을
    돌보시면서 보양하신다.

    그리스도는
    육체 되심과 포함과 강화,
    이렇게 세 단계로 된
    그분의 충만한 사역 안에서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이신 그분 자신으로
    우리를 보양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신성한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하여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는
    그분의 이기는 이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거니시는 그리스도로서
    그분은
    각 교회의 상태를
    알게 되시며,
    말씀하시는 영으로서
    그분은
    등잔대들을 정돈하시고
    신선한 기름이신
    그 영을 공급하셔서
    등잔대들을 채우신다.

    주님의 일곱 눈은
    불꽃과 같으며,
    지켜보고, 감찰하고,
    살피고, 빛 비춤으로써 심판하고,
    주입하기 위한 것이다.
    일곱(7)은
    하나님의 움직임에 있어서
    완성을 의미하는 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일곱 눈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임과 운행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분이시다.
    주님을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하나님으로
    앎으로써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영 안에 계시는
    그분의 임재를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주님의 확실한(보장받는) 임재보다
    더 많이
    우리를
    세우는(확고히 하는, 안정시키는) 것은 없다.

    빌립보서 3장
    7절과 8절에서
    우리는
    바울의 가치관이 바뀌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이전에
    그에게 이익들이었던 것을
    그리스도 때문에
    잃어버린 것으로 여겼다.
    바울은 왜
    그에게 이익들이었던 것을
    거절할 수 있었는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탁월함 때문에
    그가
    그것들을
    잃어버린 것으로
    여길 수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그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왕으로,
    또 그 가장 탁월하신 분으로
    여겼다.
    그분을 위하여(그분 때문에)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림의 고통을 겪었고
    그것들을
    배설물로(쓰레기로) 여겼다.
    이것이
    한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나는
    가치 판단에 있어서의
    변화의 종류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것들의
    적절한 가치를
    말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절하실 것이고
    또 내던지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치 없는 것에서부터
    귀한 것을 끌어내서
    우리가
    그분의 입이 될 수 있기를
    요구하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빛을 주셔서
    우리의 가치관에 있어서
    한 철저한 변화를 가져
    우리가
    그 가장 뛰어난 몫을
    선택하는 것을
    알게 되기 바란다.

    새 예루살렘의 구조의 기본 요소들은
    금과 진주들과 보석들이다.
    금은
    그 아버지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을 가리키고,
    또 진주들은
    그리스도의 승리하시는 죽음과
    생명을 분비하시는 부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산출물을 가리킨다.
    보석들은
    하나님의 건축물을 건축하시기 위해
    그분의 신성한 요소로
    변형시키는 일 안에 있는
    그 영의 산출물을 나타낸다.

    아들 하나님의 구속의 일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분의 갈망은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에 머묾으로써
    그분께서
    ‘생명 즙’을
    우리 위에 분비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분비하시는 일이다.
    이 일은
    우리가 깨닫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가 필요하다.
    이러한 비유가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사실상 신성한 생명의 요소로서
    우리를 진주로 만들기 위해
    우리 위에 분비되었음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체험을 점검해 보면,
    그리스도의 분비하시는 일을
    더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젊은 형제가
    그의 아버지가
    어떤 일을 잘못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는
    항의하고 반대해야 한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다.
    반대로, 만일 이 형제가
    십자가 아래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머물면서
    “주님,
    저를
    당신의 죽음 안에
    붙잡아 두신 것으로 인해
    당신을 찬양합니다.
    지금 당신의 모든 것을 포함한 죽음 안에
    거하고 있는 것으로 인해
    당신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즉시 그의 안에 있는 어떤 것이
    그의 내적 존재 주위에
    분비될 것이고,
    그는
    내적인 공급을
    느낄 것이다.
    그가
    이러한 내적인 분비를
    계속 체험할 때,
    점점 더 진주가 되어 갈 것이다.
    이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부활 생명을
    분비해 주시는 것이다.

    심지어 결혼 생활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음을 통해
    그분의 부활 안에서
    분비하시는 일을 누리려면 반드시
    그분의 죽음 안에
    머무르고 남아 있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도망가지 말라.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포함한 놀라운 죽음이
    우리의 ‘집 달콤한 집’임을
    볼 필요가 있다.
    남편이
    아내에게 무엇을 말하든지
    그녀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머무르고 남아 있을
    필요가 있다.
    만일 그녀가
    이렇게 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의
    분비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녀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머무는 한,
    남편이
    그녀를 더 괴롭힐수록
    그녀는
    더 많은 누림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교통은
    교리나 가르침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을
    설명하는 것이다.
    오늘날 주님께서
    그 휘장들을 여셔서,
    승리하고 이기는 이가 되는
    길을 보여 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우리는
    ‘이를 악물면서’
    노력하고 분투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오직
    집에,
    즉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부활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의
    분비함을 누린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서들에서
    지극히 보배로우신 그리스도와,
    그분과 유기적으로 연관된
    항목들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분의 믿는 이들에게
    그 귀중함이시다.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한
    그 귀중한 돌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의 귀한 피는
    헛된 생활 방식에서
    우리를 구속했다.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귀하고 또 지극히 큰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동일하게 귀한 믿음을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할당해 주셨다.

    우리의 믿음의
    귀한 증명은
    고난들을 겪음을 통해 오는
    시련들에 의해 있다.

    우리는 반드시
    시간을 구속해서(구해서, 아껴서)
    하나님의 최고의 귀중함이신
    그리스도를 누려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으로 조성되어
    하나님의 개인적인 보물인,
    귀중함의 사람들,
    심지어 귀중함 그 자체가 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보물의 한 기적적인 구조물인
    그 새 예루살렘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이
    철저하게 바뀌도록
    주님께
    빛을 구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온 존재를
    우리의 지극히 뛰어난 몫으로
    계속 선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할 때,
    “네가
    가치 없는 것에서
    귀한 것을 분별해 내면
    / 네가
    나의 입이 되어”라고 한
    예레미야서의 훈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말씀을
    땅에 속한 모든 재물보다
    더 귀히 여겨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을 말함으로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이신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그분의 백성 안으로
    분배할 수 있다.

    성경 전체의 결론인
    그 새 예루살렘은
    삼일 하나님
    곧 신성한 삼일이
    세 가지 기본 요인으로서
    그분께 구속받은 사람들 안으로
    일해 넣어지시고
    그들과 함께
    짜이신 것이며,
    세 가지 기본 요인 중에서
    금은
    성의 기반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을 상징하고,
    진주는
    성의 문으로서
    아들 하나님을 상징하며,
    성의 벽옥 성벽은
    영 하나님을 상징한다.
    이것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이상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분의 보물로 누리시는 것과 똑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귀하고 또 현존하는 임재 안에 살면서,
    그분의 임재를 누리며,
    우리의 몫이신
    그분을 누릴 때,
    그분은
    그분의 마음의 갈망의 성취를 위해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건축하셔서
    우리를
    그분의 영적인 집과
    그분의 거룩한 또 왕다운 제사장 체계가
    되게 하신다.

1일

사 6:1 웃시야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요 12:41 이러한 말은 이사야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그분에 대하여 말한 것이었다.

이사야는 낙심해 있었을 때 영광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을 보았다(사 6:1, 5). 이사야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을 사랑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고서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의 표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범했고, 그들의 인간적인 미덕들은 부패하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웃시야왕은 이미 죽고 없었다. 웃시야왕은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서 매우 좋은 왕이었지만 이미 죽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사야는 틀림없이 매우 낙심했을 것이다. 주님은 낙심해 있는 이사야에게 나타나셨다.

이사야서 6장에서 그리스도는 영광 안에서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이분께서 바로 신성한 영광과 인간 미덕들을 지닌 하나님-사람이시다.

그리스도의 인간 미덕들은 그분의 긴 옷자락으로 상징된다. 사복음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 주지만, 사람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더 많이 보여 준다. … 그리스도는 신성한 영광 안에서보다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서 훨씬 더 많이 표현되신다. 그렇지만 그분의 인간 미덕들에는 근원이 되는 신성한 영광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인간 미덕들 안에서 표현된 신성한 영광을 지닌 사람이시다. 이사야서 6장에서 주님이시자 왕이시자 만군의 여호와이신 그리스도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분께서 바로 보좌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2장에서 이사야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만군의 여호와이시자 왕이시자 주님이심을 의미한다. 이 이상에서 그리스도는 긴 옷을 입고 계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옷자락은 성전을 가득 채운다. 이사야에게 나타나셨던 주님은 연기로 상징되는 신성한 영광 안에서(요 12:39-41), 그분의 옷자락으로 상징되는 인간 미덕들을 지니시고 높이 들린 보좌 위에 계셨다. 그분의 거룩함은 스랍들이 유지하고 있었다(사 6:2-3).

이사야서 6장 8절부터 10절까지에서 우리는 이사야가 보냄을 받은 것을 본다. 그는 신성한 영광과 인간 미덕들로 충만하시고 거룩함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1-4절)에 의해 보냄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은 그분의 의에 근거한다. 5장 16절은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는 심판으로 높아지시며 /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신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 거룩하게 되신다. 의로운 사람은 거룩하게 된 사람이다. 그는 속되지 않고 거룩하며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거룩하시며 속된 사람들로부터 거룩하게 되시고 구별되신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항상 의로우셨기 때문에 확실히 구별되고 유일하며 특별한 분이셨다. 따라서 그분은 거룩하시고 성별되신다.

이사야는 신성한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신성한 거룩함을 범하며 인간 미덕들이 부패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의해 보내어졌다(사 6:5). 그는 주님에 의해 보냄을 받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거룩함 안에서 그분의 인간 미덕들을 지니고 신성한 영광을 표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5:16하).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이 되어 민족들에게서 완전히 분별되기를 원하셨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기반과 기초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먼저 우리를 의롭게 함으로 의롭다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거룩하게 되고 성별되며 분별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한 영광의 표현 안으로, 즉 그리스도를 살도록 이끌릴 것이다.

보냄을 받은 모든 사람은 동일한 일을 하도록 주님에 의해 보냄을 받는다. 첫째로, 하나님은 신언자들을 보내셨다. 둘째로,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다. 셋째로, 하나님은 신약의 사도들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이들 모두를 보내셔서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사는 상태 안으로 이끌고자 하셨다. 하나님의 갈망은 그분의 백성이 의를 살아, 자신이 거룩한 백성이며 민족들과 다르고 구분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분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신성한 영광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의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성한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로운 백성, 거룩한 백성이어야 하고, 신성한 영광으로 충만한 백성이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는 이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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