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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참다운 교회생활을 위해 그리스도 자신께로 돌아옴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이자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빗나가게 하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 자신께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중심이 되시고 만물 가운데 으뜸이 되기를 원하신다. 즉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는 놀라우시다. 그분은 온 우주의 놀라움이시며, 그리스도의 존재의 각 항목이 모두 놀랍다.

우주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갈망, 곧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고,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으로 우리 안에 일해 넣어지시는 것이다.

바울은 교리와 윤리와 도덕과 가르침과 문화와 같은 좋은 많은 것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빗나가게 하는 것들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서신서들을 썼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며, 그것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빗나가게 한다면 그리스도와 대립되는 것임을 지적한다.

우리가 빗나가게 하는 모든 것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향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께로 돌아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그리스도로 조성될 것이다.

빌립보서 3장 3절부터 16절까지에서 그리스도는 믿는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로 제시되신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바울의 간절한 바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우리 자신의 의를 갖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가지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기를 열망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의 생활의 틀로 취하기를 갈망했음을 시사한다.

바울은 전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여, 성도들의 믿음의 희생 제물과 믿음의 봉사 위에 부어지는 전제물이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하늘에 속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에게서 새로운 긍휼과 은혜를 얻는다면 모든 좋은 것들, 심지어 최상의 것들까지도 버리고 그리스도 자신을 붙잡으려고 힘을 다해 수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는 동안에, 우리가 하는 일에서 그리스도를 적용해야 한다.

매일 우리는 그리스도, 곧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을 새롭게 체험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큰 필요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께로 돌아온 결과는 참다운 교회생활이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모든 성도들이 단체적인 방식으로 깨닫고 체험하고 표현한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목적을 위해 교회를 계획하셨다.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표현이다.

교회생활은 다름 아닌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지니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체험하고 누리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표현되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교회생활을 하려면, 우리의 전 존재와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다만 모든 것이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신 그리스도 자신이 될 때까지, 그리스도로 조성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생활의 본질과 실질이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그리스도의 생활, 곧 그리스도 자신이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가르침이나 교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을 깨닫고 체험하고 누리고 표현하고 전람하는 생활이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참다운 교회생활을 실현하는 길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내적 체험에서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내적 존재 안으로 발전되신 결과가 참다운 교회생활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교회생활을 하려면 우리의 혼이 그 영이신 그리스도께 굴복되고 그 영이신 그리스도로 적셔져야 한다.

참다운 교회생활을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 요구된다.

그분의 믿는 이들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이제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

자아는 반드시 십자가로 제해져야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교회생활의 실재가 되실 수 있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과 혼생명을 부인하고 우리의 영 안에 계신 주님을 따르는 것 외에는 참다운 교회생활을 실현할 다른 길이 없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내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통해 존재한다.

신약 전체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로 가득 차 있다.

에베소서 3장 16절부터 21절까지에서 바울은 우리가 능력으로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되고, 그 결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심으로써 우리의 내적 존재 전체를 그분 자신이 점유하시고 소유하시고 침투하시고 적시시기를 기도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심으로 우리 존재의 모든 속부분을 점유하실 수 있을 때, 우리는 참다운 교회생활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참다운 교회생활을 갖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체험하고 누려야 한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어떤 조직이 아니며, 우리의 영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될 때까지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보양받는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 곧 삼일 하나님의 표현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채워진, 추구하는 믿는 이들의 단체적인 생활이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내적 체험을 통해, 우리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무한한 분량을 깨닫고 참다운 교회생활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된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풍성을 체험하고 누린다면, 그리스도의 충만 곧 그리스도의 표현인 참다운 교회생활이 자연히 산출될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무언가를 체험해야 하며, 자신이 체험한 그리스도를 가지고 함께 모여 이 그리스도를 전람하고, 이 그리스도를 서로 나누며,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그분을 누려야 한다. 이것이 참다운 교회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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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엡 3:16-19 아버지께서 … 그분의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여러분을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해 주시고,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는 충분한 역량과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이 있게 하시어,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여러분이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거듭났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영에 이르도록 강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의 영에서부터 우리의 마음 전체, 곧 우리의 내적 존재 전체 안으로 확장되시도록 해야 한다(엡 3:16-17). 그리스도는 이렇게 우리 안에서 확장되심으로써 우리 마음을 점유하시고, 우리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신 결과로 우리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차원, 곧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을 수 있는 역량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될 것이다. 이 충만이 교회, 곧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비밀이다.

우리의 영이 강하게 될 때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길과 입지를 얻으시게 되고, 그 결과 그분께서 우리의 온 존재를 점유하시고 적시시고 침투하셔서 우리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무한하신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물리학자와 수학자도 알지 못하는 것, 즉 그리스도께서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이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측량할 수 없으시고 무한하시다. 그분은 심오하시고 우리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으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분을 누릴 수 있다. 그분을 누리는 것을 통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될 것이다. 이 충만이 곧 교회이다.

사도 바울은 놀라운 저자이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그는 “술 취하지 마십시오. 술 취하는 것은 사람을 방탕하게 합니다. 다만 영 안에서 충만해지십시오.”라고 말했다. 이 절에 언급된 영은 하나님의 영이 아닌 사람의 거듭난 영이다. 술에 취하는 것은 몸 안에서 충만하게 되는 것이지만,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서 충만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우리의 영 안에서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영 안에서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충만하게 되는 길은 에베소서 6장 17절과 18절에서 발견되는데, 그 절들은 “그리고 온갖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구원의 투구와 그 영의 검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영은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항상 영 안에서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고 그분의 풍성을 누리는 길은 온갖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항상 영 안에서 기도하는 데 있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을 누리는 비결, 곧 열쇠라고 여길 수 있다. 날마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그 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은 하나님의 숨이며, 이 숨은 곧 그 영이기 때문이다. 온갖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한 종류의 기도가 아니라 많은 종류의 기도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온갖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말씀을 기도로 읽어야 한다. 우리는 말씀을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함께 섞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말로 기도를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 단순히 성경을 들고 편 다음 우리가 읽는 말씀으로 기도하면 된다. 나의 체험에 기초해 볼 때 말씀을 기도로 읽는 최상의 길은 성경 말씀 하나하나에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씀을 기도로 읽고 있는 동안 어떤 때는 기쁨으로 아주 충만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할렐루야.”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이런 식으로 성경을 대한다면, 내가 단언하는데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릴 것이고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이러한 누림으로부터 교회생활이 나오게 될 것이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서 산출된다.

5일

마 16:24-25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십시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 혼생명을 구하고자 하면 혼생명을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혼생명을 잃으면 혼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 6:5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 안에서 그분과 연결되어 자랐다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 안에서도 그분과 연결되어 자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아를 거절하고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6:24). 우리 속에는 성경에서 ‘자아’라고 부르는 타고난 생명, 혼적인 생명이 있으며, 이 자아 안에 사탄의 ‘발’이 놓여 있다. 사탄이 거기에 있다. 우리가 자신의 자아에 관심하고, 자아를 동정하며, 자아를 위하여 무언가를 하고, 자아에 동조할 때마다 우리는 사탄의 수하에 있게 된다. 그러하다면 교회생활을 하기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자아, 혼적인 생명, 타고난 생명이 교회생활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드시 교회생활이 타고난 생명이 아닌 영적인 생명으로 건축되며, 혼이 아닌 영에 의해서 건축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부인해야 하는 자아는 혼이다. 그것은 바로 다음 절에서 주님께서 “누구든지 자기 혼생명(헬라어로 ‘프쉬케(psuche)’로서 문자적인 의미는 ‘혼’임)을 구하고자 하면 혼생명을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혼생명을 잃으면 혼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25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5절에 있는 혼 또는 혼생명은 24절에 있는 자아이다. 혼생명은 우리의 존재 자체이며 우리의 자아인 타고난 생명이다.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따라 행하고 말할 때마다, 우리는 사탄과 함께 서서 교회의 건축을 손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몇 분 전에 교회에 대한 하늘에 속한 계시를 받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아, 혼생명, 타고난 생명 안에 있다면, 나는 사실상 교회를 대적하고 주님께서 교회를 건축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하라고 말씀하신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부인해야 하고, 둘째로 십자가를 져야 하며, 셋째로 그분을 따라야 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자아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먼저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다음에 십자가를 진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에 두셨지만 이제 우리가 그 십자가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하고, 주님의 죽음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하며, 주님 안에서 우리의 타고난 생명과 자아와 옛사람이 십자가에 두어졌다는 것(롬 6:6, 갈 2:20)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는 자아를 죽음에 둔다.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죽음에 두셨다는 영광스러운 사실을 다만 인정하고 우리의 자아에 어떤 입지도 주지 않음으로 이 사실을 자신에게 적용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십자가에 두셨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타고난 사람인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자아는 끝났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을 따릅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 안에서, 영 안에서 행하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영, 곧 그 영이신 주님과 연합된 거듭난 사람의 영 안에서 살고 행할 때에만 주님을 따를 수 있다. 오늘 주님은 우리의 영 안에 계시며(딤후 4:22), 그분은 교회를 위하신다. 주님을 따르려면 우리는 영 안에서, 교회를 위해 행하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참다운 교회생활을 실현하는 길이다. 이 길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부인하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죽음에 넘겨졌고 이제 우리는 타고난 생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생명에 의해서 살고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즉 우리는 영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 살고 행한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그리스도의 생활임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참다운 교회생활은 우리가 깨닫고 체험하고 누리고 표현한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을 실현하는 길은 우리의 자아를 부인하고, 타고난 생명은 돌이 아닌 진흙에 불과하기 때문에 원수 사탄의 건축물인 바벨성에나 적합하고 하나님의 건축물인 새 예루살렘을 위해서는 전혀 쓸모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4일

엡 3:8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 중에 가장 작은 이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으로 전하게 하시고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여진 부름받은 성도들에게와, 각처에서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도 함께 편지합니다.

고전 12:27 여러분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며, 여러분 각 사람은 그 지체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를 적용하고 우리에게 모든 것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지에 대한 계시가 필요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끝내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것을 여러 번 언급했다. 그는 우리가 죽었다는 것(2:20, 3:3)과, 장사되었다는 것(2:12)과, 옛사람을 벗어 버렸다는 것(3:9)과, 할례 받았다는 것(2:11)을 말했다. 왜 바울은 이 모든 체험들을 언급했는가? 바울은 하나님의 의도가 우리를 끝내는 것이며 사실상 우리가 이미 끝났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밝혀 주려고 이러한 체험들을 우리에게 언급했다. 우리가 ‘나가야만’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실 수 있다. 우리가 보좌에서 내려와야만 그리스도께서 왕관을 쓰실 수 있다. 우리가 끝나야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실 수 있다.

바울은 종교나 교리나 가르침을 전파하지 않았고, 살아 계시고 신성한 인격이신 그리스도의 풍성을 전파했다.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은 교회를 위한 것이다. 교회의 유일한 내용은 몸의 모든 지체가 깨닫고 체험한 그리스도의 풍성이다. 참다운 교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풍성을 체험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단지 하나의 조직이나 사회적인 모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참다운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풍성에서 나온다.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시다(엡 1:22-23). 왜냐하면 그분은 제한받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주적으로 위대하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충만이 될 한 몸이 필요하시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과 그리스도의 충만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풍성은 빛, 생명, 길, 어린양, 문, 풀밭, 목자, 구속자, 구주, 위대한 ‘나는 ?이다’ 등과 같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관련된 모든 항목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시다. 우리에게 사랑, 겸손, 인내, 지혜가 필요하다면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겸손과 인내와 지혜이시다. 그리스도는 또한 우리의 힘이시고 능력이시며 권위이시다. 그리스도의 풍성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신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의 충만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시고 몸은 그 머리의 충만이다. 몸은 반드시 머리와 부합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주적으로 크시기 때문에, 그분의 충만으로서 그분을 표현하는 그분의 몸인 교회가 필요하시다.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를 그들의 사랑과 인내와 겸손과 모든 것으로 체험하고 누릴 때, 이러한 누림에 의해 그리스도의 충만인 교회생활이 자연스럽게 산출될 것이다. 교회생활을 실행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교회생활이 조직이나 사회단체나 종교 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린 결과이자 산출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모일 때마다 우리는 여분의 그리스도를 가져와 서로에게 그리스도를 나누어 주어야 한다. 어떤 형제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사랑으로 누린 것을 가지고 올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형제자매들은 자신의 겸손, 인내, 지혜로 체험한 그리스도를 가지고 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이렇게 누린 그리스도의 몫을 가지고 모일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람하고 그리스도를 단체적으로 표현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합당하고 참다운 교회생활이며 그리스도의 충만인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할수록 참다운 교회생활이 더욱더 나타날 것이다. 합당하고 참다우며 만족스러운 교회생활을 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풍성을 충만하게 체험해야 한다.

3일

빌 3:13-15 … 나는 오직 한 가지 일만을 합니다. 즉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함으로써, 나에게 주실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상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위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충분히 성장한 사람들은 이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른 어떤 일을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이것도 여러분에게 계시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시며 모든 것이신 그리스도를 갖는 것임을 보게 하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악한 것에서 선한 것으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살지 않는 것에서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사는 것으로 돌이켜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하늘에 속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우리의 매일의 필요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그리스도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상을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난 자신의 겸손,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위한 열심, 심지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처럼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난 많은 선한 것들에서 회개할 것이다.

최근에 주님께서 그분의 회복 안에서 회복하고 계시는 주된 항목은 그리스도에 대한 참다운 체험이다. 주님께서 주로 관심하시는 것은 여러 가지 형식이나 교리의 회복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 계신 분이신 주님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생명이시며 모든 것이신 그분 자신을 체험하는 것을 회복하기 원하신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시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 문제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그분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지만,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할 때 그리스도에 의해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지만, 어떤 것을 하려고 할 때 그리스도에 의해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지만, 사람들과 말할 때 그리스도에 의해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좋은 차를 가지고 있지만 그 차를 운전할 줄 모르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안으로 받아들였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적용하지 않는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것을 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매일 그들은 주님의 뜻을 위해 주님을 추구함으로써 그들이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추구는 부족한 것이다. 우리는 다만 어떤 특정한 것을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를 알려고 추구하기보다 “이 일을 할 때 나 혼자 할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하실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어떤 특정한 활동에 참여할 때, 반드시 우리는 누가 그것을 하는지를 점검하며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혼자 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하시는가?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2:20)라고 간증한다. 우리는 종종 “주님, 제가 이것을 하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가 혼자 하는지, 아니면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어느 날 어떤 젊은 형제가 나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리 형제님, 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영화를 보면 안 된다고 말합니까?” 나는 이 젊은 형제의 질문에 길게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형제님이 영화를 보러 갈 때 그리스도께서 형제님과 함께 가십니까?” 그 젊은 형제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물론 그리스도는 저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가지 않으십니다.”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다시 묻고 싶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러 갈 때 전파하러 가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 혼자 복음을 전하러 가는가, 아니면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전하러 가시는가? 우리가 다른 성도를 방문할 때 우리 혼자 방문하는가, 아니면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방문하시는가?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모든 것을 할 때,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에 참으로 그리스도를 적용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시라는 계시를 보았다면, 우리는 점검할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하는 것이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인지를 점검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를 적용하고 있는지, 적용하고 있지 않는지를 점검할 것이다.

2일

빌 3:9-10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나온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얻는 것은 물건을 사는 관광객의 체험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자주 관광객들은 진열 중인 귀한 물건들을 볼 때 흥분하게 된다. 그들이 상점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러한 귀한 물건들이 가장 탁월하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귀한 물건들을 보고 그것들이 가장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꺼이 값을 지불하고 그것들을 사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가장 탁월하시고 지극히 보배로우시다는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가장 탁월하시다는 계시가 있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하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을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 집을 방문한다면 우리는 어디서 발견되겠는가? 우리가 문화 안에서 산다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문화 안에서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선한 행동 안에서 산다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우리의 선한 행동 안에서 발견할 것이다. 바울이 아직 율법을 따라 살고 있었을 때, 그는 율법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가장 탁월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것이 되셔야 한다는 이상, 즉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랑과 친절과 겸손과 지혜와 인내와 의도와 태도가 되셔야 하고 심지어 그의 말과 어조와 표현도 되셔야 한다는 이상을 보았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기꺼이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 더 나아가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귀중함에 대한 이상을 가져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가 본 그 그리스도를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만이 아니라, 바로 그분의 인격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격의 충만이 체현되신 분이시며(골 2:9),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그림자의 실재이시다(골 2:16-17).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모든 풍성(엡 3:8)을 체험하고 누리고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얻을 때,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 살고 체험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거나 관찰한다면, 그들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미덕 안에서 발견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것이다. 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기를 바란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면,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 모두 앞에서 우리의 표현이 되실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단지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의 안에서, 곧 우리에게서 살아 내어지신 그리스도 그분 자신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에만 주님은 만족하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직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에만 주님을 섬기는 이들 역시 기뻐하고 만족할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밀가루 반죽을 과자 틀에 넣으면, 밀가루 반죽은 그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하는 틀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 생활을 하실 때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 곧 십자가 아래 있는 생활을 계속했다. 우리는 이러한 생활을 통해 부활 능력을 체험하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사시기 위해(요 6:57) 인간 생명을 계속적으로 죽음에 넣으신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생활은 인간 생명에 대하여 죽고 신성한 생명을 삶으로써, 이러한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체험하기 위한 조건이다.

신언노트, 2023 05 07

참다운 교회생활을 위해
그리스도 자신께로 돌아옴
그 진짜 교회 생활을 위해
그리스도 그분 자신께로 다시 데려와짐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과 사람과
창조주와 창조물과
구속자와 구속과
신성한 생명과 인간 생명과
그 외의 많은 긍정적인 항목들이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에는
우리를
죄들에서 깨끗하게 하고,
게헨나에서 구하며,
슬픔에서 구출하는 것 이상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자신이 죄로 가득하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불 못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화평이나 기쁨처럼
하나님께 속한 어떤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힘과 빛과
인도와 건강과
지식과 지혜와
모든 것으로
우리 안에 일해 넣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자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라는 것은
결코 깨닫지 못했을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대로
우리를 그릇으로 창조하셔서
우리의 내용이신
그분을 담을 수 있도록 하셨다.

전반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방향은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벗어나 있다.
그리스도 자신만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방향이셔야 한다.
오늘날 많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 아닌
많은 선한 것들을 위한다.
그들에게
명목상의 그리스도가 있을지라도
그리스도는
그들의 매일의 체험에 있어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계신다.

나는 다만
이 문제를
여러분 앞에 내놓고,
여러분에게
주님께 가서
여러분 자신을 열기를
간청한다.
여러분은
“주님,
저는
당신에 관해
무언가를 들었고
당신의 영원한 목적에 관한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모든 것이 되시고자 합니다.
주님,
당신의 빛과
당신의 임재 안에서
저를 드러내십시오.
제가 어디에 있는지,
제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그분께 말씀드릴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께서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신다는
이상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현재의 빛,
현재의 계시,
현재의 이상,
그리스도에 관해 현재 본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에게서
새로운 긍휼과 은혜를 얻는다면,
모든 좋은 것들
심지어 최상의 것들까지도 버리고
그리스도 자신을 붙잡으려고
힘을 다해
수고할 수 있을 것이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는
그들이 달성한 것에
만족했다.
라오디게아의 성도들이 소유한 것이
그들의 눈을 가리는
너울이 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주님은
그들에게
안약을 사서 발라
볼 수 있게 하라고
권면하셨다.
참된 안약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 눈이
손수건으로 가려져 있을 때
최고의 ‘안약’은 다만
손수건을 내려놓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들 중
많은 것들이 원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낡은 것이 되었기 때문에,
체험에 있어서 죽은 것이 되었고
우리에게 너울이 되었다.
악한 것과 잘못된 것을 내려놓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선하고 합당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낡아졌다면
반드시 내려놓아야 한다.
어떤 것이 좋을지라도
그것이
낡아지고 맛을 잃었다면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현재의, 살아 계신, 최신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 자신은
변함이 없으시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살아 계시고 새로우시며
신선하시고 최신이신,
현재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과 체험을
가져야 한다.
나의 부담은
주님의 자녀들에게
교리와 가르침을
더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그분에 대한 새로운 체험 안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든 낡은 체험들을 내려놓고
과거에 달성한 것들을 내려놓아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손에
어떤 것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
다만 자신을
주님께 열고
빈손이 되어,
살아 계신 분이신
주님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위하여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이자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빗나가게 하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 자신께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중심이 되시고
만물 가운데 으뜸이 되기를
원하신다.
즉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는 놀라우시다.
그분은
온 우주의 놀라움이시며,
그리스도의 존재의
각 항목이 모두 놀랍다.

우주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갈망,
곧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고,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으로
우리 안에 일해 넣어지시는 것이다.

바울은
교리와 윤리와
도덕과 가르침과
문화와 같은 좋은 많은 것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빗나가게 하는 것들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서신서들을 썼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며,
그것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빗나가게 한다면
그리스도와 대립되는 것임을
지적한다.

우리가
빗나가게 하는 모든 것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향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께로 돌아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체험하며,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를 표현하며,
그리스도로 조성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얻는 것은
물건을 사는 관광객의 체험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자주 관광객들은
진열 중인 귀한 물건들을 볼 때
흥분하게 된다.
그들이
상점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러한 귀한 물건들이
가장 탁월하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귀한 물건들을 보고
그것들이 가장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꺼이 값을 지불하고
그것들을 사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가장 탁월하시고
지극히 보배로우시다는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가장 탁월하시다는
계시가 있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하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을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 집을 방문한다면
우리는
어디서 발견되겠는가?
우리가
문화 안에서 산다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문화 안에서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선한 행동 안에서 산다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우리의 선한 행동 안에서
발견할 것이다.
바울이 아직
율법을 따라 살고 있었을 때,
그는
율법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가장 탁월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것이 되셔야 한다는 이상,
즉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랑과 친절과
겸손과 지혜와
인내와 의도와
태도가 되셔야 하고
심지어 그의
말과 어조와
표현도 되셔야 한다는
이상을 보았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기꺼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손실로) 여겼다.
더 나아가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모든 것들을
잃어버림을 겪었고
그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귀중함에 대한
한 이상을 가져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가 본
바로 그 그리스도를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만이 아니라,
바로 그분의
인격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격의 충만이
체현되신 분이시며,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그림자의
실재이시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모든 풍성을
체험하고 누리고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얻을 때,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 살고
체험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거나 관찰한다면,
그들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미덕 안에서
발견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것이다.
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기를 바란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면,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 모두 앞에서
우리의 표현이 되실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단지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의 안에서,
곧 우리에게서 살아 내어지신
그리스도 그분 자신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에만
주님께서
만족하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직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에만
주님을 섬기는 이들 역시
기뻐하고 만족할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밀가루 반죽을
과자 틀에 넣으면,
밀가루 반죽은
그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하는
틀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 생활을 하실 때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
곧 십자가 아래 있는 생활을
계속했다.
우리는
이러한 생활을 통해
부활 능력을
체험하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사시기 위해
인간 생명을
계속적으로
죽음에 넣으신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생활은
인간 생명에 대하여 죽고
신성한 생명을 삶으로써,
이러한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체험하기 위한
조건이다.

빌립보서 3장
3절부터 16절까지에서
그리스도는
믿는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로 제시되신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여겼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들을 잃어버림을 겪었고
또 그것들을
배설물로(쓰레기로) 여겼다.

바울의 간절한 바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가지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기를 열망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의 생활의 틀로 취하기를
갈망했음을 시사한다.

바울은
전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여,
성도들의
믿음의 희생 제물과
믿음의 봉사 위에 부어지는
전제물이 되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시며
모든 것이신
그리스도를 가지는 것임을
보게 하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악한 것에서
선한 것으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살지 않는 것에서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사는 것으로 돌이켜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하늘에 속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우리의 매일의 필요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그리스도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상을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난
자신의 겸손,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위한 열심,
심지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처럼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난
많은 선한 것들에서
회개할 것이다.

최근에 주님께서
그분의 회복 안에서
회복하고 계시는
주된 항목은
그리스도에 대한
참다운 체험이다.
주님께서 주로
관심하시는 것은
여러 가지 형식이나 교리의
회복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 계신 분이신 주님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생명이시며 모든 것이신
그분 자신을 체험하는 것을
회복하기 원하신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시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 문제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그분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지만,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할 때
그리스도에 의해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지만,
어떤 것을 하려고 할 때
그리스도에 의해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지만,
사람들과 말할 때
그리스도에 의해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좋은 차를 가지고 있지만
그 차를
운전할 줄 모르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안으로 받아들였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적용하지 않는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것을 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매일 그들은
주님의 뜻을 위해
주님을 추구함으로써
그들이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추구는
부족한 것이다.
우리는 다만
어떤 특정한 것을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를
알려고 추구하기보다
“이 일을 할 때
나 혼자 할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하실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어떤 특정한 활동에 참여할 때,
반드시 우리는
누가 그것을 하는지를
점검하며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혼자 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하시는가?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2:20)라고 간증한다.
우리는 종종
“주님,
제가
이것을 하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가 혼자 하는지,
아니면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어느 날
어떤 젊은 형제가
나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리 형제님,
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영화를 보면 안 된다고
말합니까?”
나는
이 젊은 형제의 질문에
길게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형제님이
영화를 보러 갈 때
그리스도께서
형제님과 함께 가십니까?”
그 젊은 형제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물론 그리스도는
저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가지 않으십니다.”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다시
묻고 싶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러 갈 때
전파하러 가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가 혼자서
복음을 전하러 가는가,
아니면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전하러 가시는가?
우리가
다른 성도를 방문할 때
우리가 혼자 방문하는가,
아니면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방문하시는가?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모든 것들을 할 때,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에 참으로
그리스도를 적용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각각의 모든 것들이시라는
계시를 보았다면,
우리는 점검할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하는 것이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인지를
점검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를
적용하고 있는지,
적용하고 있지 않는지를
점검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하늘에 속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에게서
새로운 긍휼과 은혜를 얻는다면
모든 좋은 것들,
심지어 최상의 것들까지도
버리고
그리스도 자신을
붙잡으려고
힘을 다해
수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각각의 모든 것들이 되실 것을
기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는 동안에,
우리가 하는 일에서
그리스도를 적용해야 한다.

매일 우리는
그리스도,
곧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을
새롭게 체험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큰 필요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께로
다시 데려와짐의 결과는
그 진짜 교회생활이다
(참다운 교회생활이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모든 성도들이
단체적인 방식으로
깨닫고 체험하고 표현한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목적을 위해
그 교회를 계획하셨다.
이처럼,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표현이다.

교회생활은
다름 아닌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지니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체험하고 누리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표현되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교회생활을 가지려면,
우리의 전 존재와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다만 모든 것이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자신이 될 때까지,
그리스도로 조성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그 교회생활의
본질과 실질이다.

그 진짜 교회생활은
그리스도의 생활(생명),
곧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가르침이나 교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그 안에서
그리스도 자신께서
실재화되시고(깨달아지시고),
체험되시며,
누린 바 되시고,
표현되시며,
전람되시는
생활이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의해서만
실현될(실재화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를 적용하고
우리에게 모든 것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지에 대한
계시가 필요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끝내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것을 여러 번 언급했다.
그는
우리가 죽었다는 것과,
매장되었다는 것과,
옛사람을 벗어 버렸다는 것과,
할례 받았다는 것을 말했다.
왜 바울은
이 모든 체험들을
언급했는가?
바울은
하나님의 의도가
우리를 끝내는 것이며
사실상 우리가
이미 끝났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밝혀 주려고
이러한 체험들을
우리에게 언급했다.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실 수 있으려면
우리가 ‘나가야만(없어져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왕관이 씌워지실 수 있으려면
우리가
왕좌에서 내려와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각각의 모든 것들이
되실 수 있으려면
우리가
우리의 끝에
데려가져야만 한다.

바울은
종교나 교리나 가르침을
전파하지 않았고,
살아 계시고 신성한 한 인격이신
그리스도의 풍성을(부를, 많음을)
전파했다.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은
교회를 위한 것이다.
교회의 유일한 내용은
몸의 모든 지체가
깨닫고 체험한
그리스도의 풍성이다.
진짜 교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풍성을
체험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단지
하나의 조직이나
사회적인 모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진짜인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풍성에서 나온다.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제한받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주적으로 위대하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충만이 될
한 몸이 필요하시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과
그리스도의 충만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풍성은
빛, 생명,
길, 어린양,
문, 풀밭,
목자, 구속자,
구주, 위대한 ‘나는 ?이다’ 등과 같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관련된
(그리스도께서 무엇이신지의)
모든 항목들이다.
그리스도께서
각각의 모든 것들이시다.
우리에게
사랑, 겸손,
인내, 지혜가 필요하다면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겸손과
인내와 지혜이시다.
그리스도는 또한
우리의
힘이시고 능력이시며 권위이시다.
그리스도의 풍성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신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의 충만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머리이시고
그 몸은 그 머리의 충만이다.
그 몸은 반드시
그 머리와 어울려야(일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주적으로 크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그분의 충만으로서
그분을 표현하는
그분의 몸인
그 교회를 필요로 하신다.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사랑과 인내와
겸손과 또 각각의 모든 것들로
체험하고 누릴 때,
이 누림이
그리스도의 충만인
그 교회생활을
자연스럽게 산출할 것이다.
그 교회생활을 실행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교회생활이
조직이나 사회단체나 종교 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린
결과이자 산출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모일 때마다
우리는
여분의(초과의) 그리스도를 가지고 모여서,
그리스도를 가져와
서로서로
그리스도를
나누어 가져야 한다.
어떤 형제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사랑으로 누린 것을
가지고 올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형제자매들은
자신의 겸손, 인내, 지혜로 체험한
그리스도를
가지고 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이렇게 누린
그리스도의 몫을
가지고 모일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람하고
그리스도를 단체적으로 표현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합당하고 참다운 교회생활이며
그리스도의 충만인 그리스도의 몸이다.
더 많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할수록
더 많이
우리의 진짜 교회생활이
있을 것이다.
진짜인, 합당한(고유의), 또 적절한(충분한)
한 교회생활을 가지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풍성의
충만한 체험을
가져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아를
거절하고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속에는
성경이 그 ‘자아’라고 부르는
타고난, 곧 혼적인 한 생명이 있으며,
이 자아 안에
사탄의 ‘발들’이 있다.
사탄이 거기에 있다.
우리가
자신의 자아에 관심하고,
자아를 동정하며,
자아를 위하여 무언가를 하고,
자아에 동조할 때마다
우리는
사탄의 수하에 있게 된다.
그러하다면 교회생활을 하기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자아, 혼적인 생명, 타고난 생명이
교회생활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드시
교회생활이
타고난 생명이 아닌
영적인 생명으로 건축되며,
혼이 아닌
영에 의해서 건축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부인해야 하는
자아는 혼이다.
그것은
바로 다음 절에서
주님께서
“누구든지
자기 혼생명을
(헬라어로 ‘프쉬케(psuche)’로서
문자적인 의미는 ‘혼’을)
구하고자 하면
혼생명을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혼생명을 잃으면
혼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5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5절에 있는
혼 또는 혼생명은
24절에 있는 자아이다.
혼생명은
우리의 존재 자체이며
우리의 자아인
타고난 생명이다.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따라
행하고 말할 때마다,
우리는
사탄과 함께 서서
교회의 건축을
손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몇 분 전에
교회에 대한 하늘에 속한 계시를 받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아, 혼생명, 타고난 생명 안에 있다면,
나는 사실상
교회를 대적하고
주님께서 교회를 건축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하라고
말씀하신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부인해야 하고,
둘째로
십자가를 져야 하며,
셋째로
그분을 따라야 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자아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먼저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다음에 십자가를 진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에 두셨지만
이제 우리가
그 십자가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하고,
주님의 죽음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하며,
주님 안에서
우리의 타고난 생명과 자아와 옛사람이
십자가에 두어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는
자아를 죽음에 둔다.
우리는
우리를 죽음에 두심 안에서(두심으로)
주님께서
그분의 십자가 위에서 성취하신 것인
그 영광스러운 사실을
다만 인정하고
우리의 자아에
어떤 입지도 주지 않음으로
이 사실을
자신에게 적용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십자가에 두셨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타고난 사람인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자아는 끝났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을 따릅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 안에서,
영 안에서
행하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영,
곧 그 영이신 주님과 연합된
거듭난 사람의 영 안에서
살고 행할 때에만
주님을 따를 수 있다.
오늘 주님은
우리의 영 안에 계시며,
그분은
교회를 위하신다.
주님을 따르려면
우리는
영 안에서,
교회를 위해
행하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참다운 교회생활을
실현하는 길이다.
이 길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부인하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죽음에 넘겨졌고
이제 우리는
타고난 생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생명에 의해서
살고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즉 우리는
영 안에서
또 교회를 위해
살고 행한다.
그 진짜 교회생활은
그리스도의 생활임을
우리가 보는 것은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그 진짜 교회생활은
우리에 의해
깨달아지고 체험되며
누려지고 표현된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을 실현하는 길은
우리의 자아를 부인하고,
타고난 생명은
단지 진흙이고
돌이 아니기 때문에
원수 사탄의 건축물인
바벨시를 위해 좋고
하나님의 건축물인
새 예루살렘을 위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참다운 교회생활을
실현하는(깨닫는) 길은
우리에게 각각의 모든 것들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내적 체험에서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내적 존재 안으로
발전되신 결과가
참다운 교회생활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교회생활을 하려면
우리의 혼이
그 영이신 그리스도께 굴복되고
그 영이신 그리스도로 흠뻑 적셔져야 한다.

참다운 교회생활을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
요구된다.

그분의 믿는 이들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이제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

자아는 반드시
십자가로 제해져야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오실 수 있고
그 교회생활의 실재가 되신다.

오직 우리의 타고난 생명과
또 그 혼생명을 부인하고
또 우리의 영 안에 계시는(영 안에서)
주님을 따르는 것 외에는
그 진짜 교회생활을 실현할
다른 길이 없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거듭났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영에 이르도록 강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의 영에서부터
우리의 마음 전체,
곧 우리의 내적 존재 전체 안으로
확장되시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우리 안에서 확장되심으로써
우리 마음을 점유하시고,
우리 마음에 그분의 집을 지으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신 결과로
우리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차원,
곧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을 수 있는
역량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될 것이다.
이 충만이
교회,
곧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비밀이다.

우리의 영이
강하게 될 때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길과 입지를 얻으시게 되고,
그 결과
그분께서
우리의 온 존재를
점유하시고 적시시고 침투하셔서
우리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무한하신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물리학자와 수학자도 알지 못하는 것,
즉 그리스도께서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이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측량할 수 없으시고 무한하시다.
그분은
심오하시고
우리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으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분을 누릴 수 있다.
그분을 누리는 것을 통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될 것이다.
이 충만이 곧
교회이다.

사도 바울은
놀라운 저자이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그는
“술 취하지 마십시오.
술 취하는 것은
사람을 방탕하게 합니다.
다만 영 안에서 충만해지십시오.”
라고 말했다.
이 절에 언급된 영은
하나님의 영이 아닌
사람의 거듭난 영이다.
술에 취하는 것은
몸 안에서 충만하게 되는 것이지만,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서 충만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우리의 영 안에서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영 안에서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충만하게 되는 길은
에베소서 6장
17절과 18절에서 발견되는데,
그 절들은
“그리고 온갖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구원의 투구와
그 영의 검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영은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항상 영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고
그분의 풍성을 누리는 길은
온갖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항상 영 안에서 기도하는 데 있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을 누리는
비결, 곧 열쇠라고
여길 수 있다.
날마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그 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은
하나님의 숨이며,
이 숨은 곧
그 영이기 때문이다.
온갖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한 종류의 기도가 아니라
많은 종류의 기도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온갖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말씀을
기도로 읽어야 한다.
우리는
말씀을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함께 섞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말로
기도를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
단순히 성경을 들고
편 다음
우리가 읽는 말씀으로
기도하면 된다.
나의 체험에 기초해 볼 때
말씀을 기도로 읽는
최상의 길은
성경 말씀 하나하나에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씀을 기도로 읽고 있는 동안
어떤 때는 기쁨으로 아주 충만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할렐루야.”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이런 식으로 성경을 대한다면,
내가 단언하는데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릴 것이고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이러한 누림으로부터
교회생활이 나오게 될 것이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서
산출된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내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통해
존재한다.

신약 전체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로 가득 차 있다.

에베소서 3장
16절부터 21절까지에서
바울은
우리가
능력으로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되고,
그 결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심으로써
우리의 내적 존재 전체를
그분 자신이
점유하시고 소유하시며
침투하시고 적시시기를
기도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심으로
우리 존재의 모든 속부분을
점유하실 수 있을 때,
우리는
참다운 교회생활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참다운 교회생활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체험하고 누려야 한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어떤 조직이 아니며,
우리의 영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될 때까지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보양받는다.

참다운 교회생활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
곧 삼일 하나님의 표현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채워진,
추구하는 믿는 이들의
단체적인 생활이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내적 체험을 통해,
우리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무한한 분량을 깨닫고
참다운 교회생활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된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풍성을
체험하고 누린다면,
그리스도의 충만
곧 그리스도의 표현인
참다운 교회생활이
자연히 산출될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무언가를 체험해야 하며,
자신이 체험한
그리스도를 가지고
함께 모여
이 그리스도를 전람하고,
이 그리스도를 서로 나누며,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그분을 누려야 한다.
이것이
참다운 교회생활이다.

1일

빌 3:7-8 그러나 나에게 유익이 되었던 것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 내가 모든 것을 또한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과 사람과 창조주와 창조물과 구속자와 구속과 신성한 생명과 인간 생명과 그 외의 많은 긍정적인 항목들이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에는 우리를 죄들에서 깨끗하게 하고, 게헨나에서 구하며, 슬픔에서 구출하는 것 이상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자신이 죄로 가득하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불 못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화평이나 기쁨처럼 하나님께 속한 어떤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힘과 빛과 인도와 건강과 지식과 지혜와 모든 것으로 우리 안에 일해 넣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자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라는 것은 결코 깨닫지 못했을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대로 우리를 그릇으로 창조하시어 우리의 내용이신 그분을 담을 수 있도록 하셨다.

전반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방향은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벗어나 있다. 그리스도 자신만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방향이셔야 한다. 오늘날 많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 아닌 많은 선한 것들을 위한다. 그들에게 명목상의 그리스도가 있을지라도 그리스도는 그들의 매일의 체험에 있어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계신다.

나는 다만 이 문제를 여러분 앞에 내놓고, 여러분에게 주님께 가서 여러분 자신을 열기를 간청한다. 여러분은 “주님, 저는 당신에 관해 무언가를 들었고 당신의 영원한 목적에 관한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모든 것이 되시고자 합니다. 주님, 당신의 빛과 당신의 임재 안에서 저를 드러내십시오. 제가 어디에 있는지, 제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그분께 말씀드릴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께서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신다는 이상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현재의 빛, 현재의 계시, 현재의 이상, 그리스도에 관해 현재 본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에게서 새로운 긍휼과 은혜를 얻는다면, 모든 좋은 것들 심지어 최상의 것들까지도 버리고 그리스도 자신을 붙잡으려고 힘을 다해 수고할 수 있을 것이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는 그들이 달성한 것에 만족했다(계 3:17). 라오디게아의 성도들이 소유한 것이 그들의 눈을 가리는 너울이 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주님은 그들에게 안약을 사서 발라 볼 수 있게 하라고 권면하셨다. 참된 안약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 눈이 손수건으로 가려져 있을 때 최고의 ‘안약’은 다만 손수건을 내려놓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들 중 많은 것들이 원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낡은 것이 되었기 때문에, 체험에 있어서 죽은 것이 되었고 우리에게 너울이 되었다. 악한 것과 잘못된 것을 내려놓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선하고 합당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낡아졌다면 반드시 내려놓아야 한다. 어떤 것이 좋을지라도 그것이 낡아지고 맛을 잃었다면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현재의, 살아 계신, 최신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 자신은 변함이 없으시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살아 계시고 새로우시며 신선하시고 최신이신, 현재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과 체험을 가져야 한다. 나의 부담은 주님의 자녀들에게 교리와 가르침을 더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그분에 대한 새로운 체험 안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든 낡은 체험들을 내려놓고 과거에 달성한 것들을 내려놓아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손에 어떤 것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 다만 자신을 주님께 열고 빈손이 되어, 살아 계신 분이신 주님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위하여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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