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허락해야 한다 ― 골 3:12-15.
‘판정을 내리다’에 대한 헬라어는 ‘심판을 보다’, ‘다스리다’, ‘모든 일의 통치자와 결정자로서 보좌에 앉다’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화평이 판정을 내리도록 할 때, 누군가에 대한 우리의 불만은 해결된다.
종종 우리는 우리 속에 세 편, 곧 긍정적인 편과 부정적인 편과 중립적인 편이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있는 다툼을 끝내는 내적 중재가 필요하다.
언제든지 우리의 존재 속에서 서로 다른 편들이 다투거나 싸우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다스리는 화평에 지위를 내어 주고, 새사람의 하나(oneness)라는 이 화평이 우리 안에서 통치하고 최종 결정을 내리도록 허락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견 곧 우리의 관념을 제쳐 두고, 내주하시는 심판관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허락한다면, 이 화평이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다툼을 해결할 것이고, 우리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수평적으로는 성도들과 화평을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화평이 판정을 내림으로 우리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성도들 간의 마찰이 사라진다. 그럴 때 교회생활은 달콤함 속에 보존되고 새사람은 실지적으로 유지된다.
그리스도의 화평이 판정을 내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면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마지막 발언을 하시며, 최종 결정을 내리시는 것이다.
우리가 보좌의 위치를 가진 그리스도의 화평의 다스림 아래 머문다면, 다른 사람들을 마음 상하게 하거나 손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의해 그분의 화평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할 것이다.
이러한 화평이 모든 믿는 이들을 함께 묶어 주어 매는 띠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첫째 위치를 차지하고 우리 안에 거주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운행하면서 우리의 존재 안으로 그리스도의 풍성을 공급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여러 기능을 체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고, 우리를 양육하며, 우리를 적시어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강건하게 하고, 씻겨 주며, 건축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완전하게 하고 온전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여 삼일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 안으로 이끈다.
골로새서 3장 16절은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들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고 우리의 마음에서 은혜로 하나님께 찬송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하는 한 가지 길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노래하는 것이다.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에 더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로 읽고 찬송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는 것에는 말씀을 숙고하고 읊조리고 누림으로써 말씀이 우리를 적실 기회를 더 많이 얻도록 하는 것이 포함된다(시 119:15). 말씀을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은 우리의 영을 훈련하고 그 영 안으로 이끌리는 탁월한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찬송할 때, 우리는 어떤 곡이든 심지어 자신이 즉흥적으로 만든 곡도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말씀을 노래하고 찬송하는 습관을 세워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찬송할수록, 우리는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 속에 스며들며 우리를 신성한 요소로 적시도록 더 많은 기회를 얻게 한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 것이다.
매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명의 원칙들에 따라,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안에 살아 있는 말씀으로 계신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를 실행해야 한다. 이럴 때 그리스도께서 그 영의 적용된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어 우리 안에 그분 자신을 주입하시게 된다.
우리는 신성한 빛의 내적인 비춤과 신성한 생명의 공급을 받기 위해 반드시 우리의 전 존재를 주님께 열어 드려야 한다. 가장 많이 변화를 체험하는 사람은 주님께 전적으로 열려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주님에게서 분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 자기 확신과 자기 과신을 버리고, 주님의 긍휼과 은혜를 얻도록 주님을 앙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해야 하며, 우리의 전 존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찬송하며 읊조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주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숨으로 가득 채워진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교회의 하락에 대한 신성한 해독제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장비될 수 있다.
우리는 기도에 꾸준히 힘써야 한다.
우리는 기도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이렇게 충분히 기도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한 땅이신 그리스도의 풍성을 더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들여 주님을 흡수하고, 구체적이고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그분을 접촉해야 한다.
아침에 하나님과 만나는 것은 하루의 이른 시간에 그분과 만나는 것만이 아니라, 빛이 가득한 상황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분산하거나 우리를 점유하는 어떤 사람이나 일이나 사물 없이 혼자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기도하여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때, 은혜가 우리 안에서 흐르고 우리에게 공급하는 강이 될 것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사탄과 맞서 싸우려면 우리는 기도에 꾸준히 힘써야 한다.
하나님 편에 선 이들로서 우리는 타락한 우주 전체가 우리를 대적하며,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대적하는 것을 발견한다. 기도에 대항하는 것은 우리 밖에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속에도 있다.
기도하는 것은 타락한 우주 안에 있는 조류와 경향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를 위해 명확한 시간을 떼어 놓아야 한다. 우리는 기도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이며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계속 우리의 영을 훈련함으로써 기도의 분위기 안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도에 꾸준히 힘씀으로써 계속 주님과의 친밀한 연결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장 사소한 문제도 주님께 여쭈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기도에 꾸준히 힘씀으로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에 꾸준히 힘씀으로 그리스도의 화평의 다스림을 받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주하도록 할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침투하시고 그분 자신으로 우리를 대치하시어, 결국 우리가 참다운 교회생활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의 타고난 모든 차이점을 제거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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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참다운 교회생활을 위해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허락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하며, 기도에 꾸준히 힘씀”
6일
우주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맹렬한 전투는 하나님과 사탄의 전투이지만, 제삼자가 개입되었다. 이 제삼자는 하나님께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로 구성되는데, 이들이 사실상 이 전투의 결과를 결정할 것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사탄과 맞서 싸우려면 우리는 기도에 꾸준히 힘써야 한다. 온 세상의 추세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에 꾸준히 힘쓰는 것이 요구된다. 기도하는 것은 타락한 우주 안에 있는 흐름과 추세에 대항하는 것이다. 기도에 꾸준히 힘쓰는 것은 흐름을 거슬러 배를 젓는 것과 같다. 의심할 바 없이 노를 젓거나 기도하는 것에 꾸준히 힘쓰는 데에는 상당한 힘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는 강한 흐름이 있다. 하나님 편에 선 이들로서 우리는 우주 전체가 우리를 대적하며,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대적하는 것을 발견한다.
기도에 꾸준히 힘쓰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기도 생활에 관하여 주님과 약속해야 한다. 주님께 구체적인 방식으로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리라. “주님, 저는 기도하는 이 문제에서 당신께 진지합니다. 저는 이 시간부터 제가 기도의 생활을 가질 것임을 하늘과 땅을 불러 증인으로 삼습니다. 저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다. 반대로, 저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꾸준히 기도에 힘쓸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님, 저는 이것에 필사적입니다. 제가 기도 생활을 하도록 제 자신을 주님께 바칩니다. 주님, 저를 기도의 영 안에 지켜 주십시오. 제가 이것을 잊어버리거나 소홀히 여길지라도 당신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실 것을 압니다. 기도에 대해서 거듭거듭 상기시켜 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주님께 우리의 기도 생활에 관하여 서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님, 제가 이 서원을 잊어버릴지라도 당신께서 이 서원을 잊지 않으실 것을 압니다. 주님, 바로 지금 이 시작 때부터 저는 분명하게 당신께 이 책임을 넘겨드립니다. 주님, 저를 그냥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기도하는 것을 상기시켜 주십시오.”
우리가 기도에 관하여 주님과 이러한 약속을 한 후에, 우리는 기도를 위해 구체적인 시간을 따로 떼어 놓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매일 아침 십 분을 정해 놓을 수 있다. 우리는 기도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이며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태도를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도 생활을 성공적으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매일 꼭 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든지 간에 우리는 기도를 위하여 여기저기에서 최소한 몇 분씩이라도 떼어 놓을 수 있다. 우리는 아침에 조금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오나 일과 후나 저녁에 기도를 위한 시간을 또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루 동안 구체적으로 시간을 따로 떼어 놓음으로써 우리는 기도하기로 정한 삼십 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기도의 분위기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영 안으로 이끌리고, 영 안에서 주님과 하나 되며, 주님을 우리의 생명으로 취한다. 이런 체험은 매우 귀해서 우리가 이것을 누리고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이 끝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해 영 안에 남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 시간이 끝나자마자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인 생활 방식으로 돌아간다. 더 이상 우리는 기도의 분위기 안에 있지 않다. 자동적으로 우리는 또다시 거룩하고 영적이게 되며 승리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실패할 때마다 우리는 회개하고 주님께 자백하며 다시 노력하려고 결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의 일상생활은 우리가 참되게 기도할 때 갖는 체험과 동일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영 안으로 넣는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고, 주님의 임재를 누리며, 자연스럽게 주님을 살게 된다. 어떤 노력도 들이지 않고 우리는 거룩하고 영적이게 되며 승리하게 된다. 우리에게 문제가 없고 걱정이 없게 된다.
5일
우리는 참토양이신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린 식물이다(비교 골 2:7). 그리스도는 우리가 자라는 땅이시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심으로써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해지실수록 그분은 우리를 더 자라게 하신다. 몸의 성장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라시고 더해지시며 증가하시는 것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매우 주관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자라게 하시므로 우리는 시간을 들여 하나님을 흡수해야 한다. 매일 음식을 먹는 것처럼, 우리는 매일 시간을 들여 주님을 흡수하고, 시간을 들여 그리스도의 풍성을 동화해야 한다. 우리가 서두른다면, 그분의 풍성을 많이 흡수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따로 떼어 놓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을 더 많이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필요는 그 영으로 채워지고 적셔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영을 체험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음을 밝혀 준다. 하나님은 준비되셨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는 구체적이고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그분을 접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많은 믿는 이들이 오랫동안 기도했고 많은 시간을 들여 말씀을 읽었지만 결코 구체적이고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주님을 접촉한 적이 없을까 봐 염려된다.
주님과의 아침 시간이 성공적이려면 우리는 먼저 한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즉 주님께서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며 우리를 만나실 수 있도록 정해진 시간에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목적을 가지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주님께 나아가 그러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정상적이고 살아 있으며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갈망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분명하게 만나신다면, 그 결과 우리는 성령으로 채워질 것이며, 우리 일생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영 안에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전적으로 영 안에 있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기도할 때 우리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고 은혜의 보좌에 가까이 나아간다. 기도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길이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감으로 우리는 긍휼을 받고 은혜를 입어서 때맞추어 도움을 얻는다(비교 히 4:16). 우리가 기도하여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때, 은혜가 우리 안에서 흐르고 우리에게 공급하는 강이 될 것이다. 이 어떠한 보상인가! 기도 안에서 은혜의 흐름을 얻는 것은 사실상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의 기도의 응답 여부는 부차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은혜가 보좌로부터 우리 존재 안으로 강처럼 흐르는 것이다.
이 은혜의 강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전지가 하늘에 속한 전류로 충전되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전류, 즉 신성한 전기는 보좌로부터 우리 안으로 흐르는 은혜이신 삼일 하나님이다. 이 전류와 전기가 가져오는 공급과 누림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약한 이유는 그들의 영적인 전지가 충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전달이 부족하다. 온종일 우리는 거듭거듭 신성한 전류로 충전될 필요가 있다. 참으로 이것은 기도에 꾸준히 힘쓰는 것에 대한 보상이다.
4일
우리는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을 회복한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로 읽는 데까지 계속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기 위해 진정으로 살아 있는 말씀으로 적셔지기를 갈망한다면,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바울이 추천한 실행을 따라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생각에서 온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을 포함하여 우리의 영에서 나온 온갖 지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는 것에는 말씀을 읊조리고 누리는 것이 포함된다. 우리는 말씀을 찬송할 때 말씀을 숙고하고 읊조리고 누리게 되며, 그 결과 말씀이 우리를 적실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주게 된다.
우리가 단지 말씀을 읽기만 한다면, 우리가 읽는 부분이 우리 안으로 스며들어와 우리의 존재를 적실 기회가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노래하고 특히 말씀을 찬송한다면, 말씀을 향하여 보다 완전히 우리의 존재를 열게 되고, 말씀이 우리 속에 스며들어 우리를 적실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찬송할 때, 우리의 목소리와 생각과 마음과 영을 훈련하자.
우리가 적은 시간이라도 말씀을 노래하는 데 사용한다면, 우리는 내적으로 말씀이 우리를 채우고 적신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 것이다.
우리의 상태가 정상적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올 때마다 도움을 받고 많은 축복을 얻을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신 것이다(딤후 3:16).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숨이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의 체현이신(골 2:9) 주 예수님은 직접 말씀이라 불리셨다(요 1:1, 14, 계 19:13). 따라서 말씀에 오는 것은 하나님께 오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 전체를 담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고 실질적이며 살아 있고 빛을 비추는 이유이다. 우리 안에 방해하는 문제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올 때마다 복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주님께 부르짖고 주님에게서 무언가를 얻고자 필사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장애물이나 방해물이 있을 수 있다. 우리를 괴롭히고 사로잡고 차지하는 어떤 특정한 죄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 다른 한 면에서 어떤 특정한 죄가 우리 마음에 은밀히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주님께서 그것을 처리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감추어진 죄는 우리가 말씀에서 복을 얻지 못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복을 얻기 원한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마음을 처리해야 하고 절대적으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돌이켜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처리하고 주님과 우리 사이의 부정적인 것들을 처리한다면, 우리의 상태는 정상이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말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성경은 다른 어떤 책보다도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 자기 확신과 자기 과신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말씀에 올 때 우리는 주님께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기도하기를 배우자. “주님, 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저는 무언가가 저를 가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주님과 저 사이에 무언가가 있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게 해 주십시오.” 이것은 우리의 기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주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여야 한다.
말씀에 올 때 우리는 어떠한 자기 확신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감히 우리와 주님 사이에 문제가 없다고 과신해서는 안 된다. 지금도 우리와 주님 사이에 수많은 문제가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은 교만한 이들을 대적하시나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약 4:6)라고 말한다. 우리가 말씀에 올 때 자신을 겸손히 낮추지 않는다면, 말씀에서 큰 도움을 얻지 못할 것이다.
3일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우리를 하나 안에 보존하기 위해 판정을 내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이 필요하다. 그런 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첫째 위치를 드려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능들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빛을 비춘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으로 충만하고 우리에게 빛을 비추기 때문에 우리를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게 할 수 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음식으로서 영양분이 가득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는 동안 우리를 양육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한다. 목마름은 굶주림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물이 없다면 결코 살 길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를 강건하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목마르고 영양실조에 걸렸기 때문에 약하다.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은 누구도 강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우리를 강건하게 하는 것을 체험한다면, 우리의 영뿐 아니라 혼도 강해질 것이다. 즉, 우리는 영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강해질 것이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심지어 신체적으로도 우리를 강건하게 한다. 나의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영을 강하고 기쁘게 만든다. 이 강함과 기쁨은 나를 신체적으로도 건강해지도록 돕는다. 우리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기쁠 때 우리의 몸 또한 건강하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과 혼을 강하게 한다. 우리의 영과 혼이 강건해질 때, 우리의 몸도 건강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좋은 치료제이며, 우리를 강건하게 하고 치료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를 씻겨 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기적이고 신진대사적으로 우리의 존재를 씻는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건축한다. 몸인 교회의 지체들로서 우리는 모두 건축되어야 한다. 우리는 특이하기 때문에 누구도 우리를 다루기가 어렵고 함께 건축하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내적으로 만질 수 있으며, 우리가 교회 안에서 건축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특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건축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 안에서 판정을 내리지만 우리를 건축하는 것은 화평이 아니다. 화평은 하나님의 말씀이 건축의 일을 하도록 우리를 합당한 상태 안에 계속 있게 한다. 우리를 건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해방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건축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완전하게 하고 온전하게 한다. 아기의 기관은 완전하지만 아기의 기능은 완전하지 않다. 어떤 아이의 신체 기관이 합당하게 기능을 발휘하려면 그 아이는 자라야 한다. 온전하게 되는 것은 항상 성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아이가 자랄수록 아이의 기능은 더 완전하게 되고 온전하게 된다. 영적인 체험도 참으로 동일하다. 몸의 지체들로서 우리는 모두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기능을 발휘하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장한다. 그리고 성장을 통하여 기능들이 산출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받은 영양 공급은 몸의 지체들인 우리를 완전하게 하며 온전하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온전하게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우리의 미덕들을 개발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미덕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의 친절과 인내와 지혜와 겸손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증가될 것이다.
2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허락한다면, 이 화평이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다툼을 해결할 것이다. 골로새의 성도들은 서로 다른 주의와 철학과 실행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문화와 주의와 실행을 다루는 골로새서에서만 바울이 그리스도의 화평이 내적으로 판정을 내리는 것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판정을 내리는 것은 우리의 문화에 근원을 둔 모든 의견을 잠잠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려면 반드시 통치자와 결정자로서 보좌에 앉아야 한다. 어떤 형제가 어떤 장로 때문에 마음이 상한 것을 예로 들어 보자. 주님은 그분의 긍휼 안에서 그 형제에게 오셔서 그 형제가 생각을 위에 있는 것들에 두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그 형제는 신성한 전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신성한 전달은 판정을 내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을 그 형제에게 가져올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화평이 다스림으로써, 그 형제는 장로가 잘못했지만 자신이 더 심하게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즉시 그 형제는 주님께 자백하고 은혜를 받으며 그 장로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화평이 판정을 내림으로 우리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성도들 간의 마찰이 사라진다.
새사람의 생활인 교회생활은 단지 가르침에 의해서만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위에 있는 것들에 둠으로써, 또한 하늘에 속한 전달이 우리 안으로 신성한 요소를 분배하도록 허락함으로써 보존된다. 그럴 때 우리는 새사람의 새롭게 됨을 얻고, 우리 안에서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화평은 사실상 그리스도 자신의 특별한 방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화평이 판정을 내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면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마지막 발언을 하시며, 최종 결정을 내리시는 것이다. 장로 때문에 마음이 상한 형제의 경우, 그리스도는 그 장로를 사랑하고 교통을 추구하며 그 장로와 함께 주님을 누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화평으로서 보좌에 앉으시어 다스리시고 결정하시며 마지막 발언을 하시는 것이다.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행함을 갖고 교회생활을 보존하려면 우리에게는 판정을 내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이 필요하다. 화평이 없다면 마찰은 해결될 길이 없을 것이다. 오직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 즉 중보기도 하시고 공급하시며 행정을 수행하시는 분만이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마찰을 해소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보좌에 앉아 우리 안에서 유일한 심판관이 될 때, 우리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수평적으로는 성도들과 화평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화평을 누리고 있고, 이 화평 안에서 새사람인 교회생활이 보존됨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자!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다스릴 때 새사람의 새롭게 됨이 계속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보좌의 위치를 가진 그리스도의 화평의 다스림 아래 머문다면, 다른 사람들을 마음 상하게 하거나 손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의해 그분의 화평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할 것이다. 한 지방의 교회 안에 있는 하나와 교회들 가운데 있는 하나는 사람의 노력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 하나는 오직 판정을 내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모든 교회들과 회복 전체는 판정을 내리는 그리스도의 화평 아래 있다.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는 공급하는 은혜이시자 판정을 내리는 화평이시다.
우리는 판정을 내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이 가장 먼저 우리 안에서 보좌에 오르도록 허락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주님께 다스림을 받도록 기도하는 대신 주님께서 다른 이들을 다스려 주시기를 구한다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가장 먼저 네 안에서 나의 보좌를 세우게 하여라. 내가 너를 다스리고 너를 복종시키며 너를 위한 최종 결정을 내리게 하여라.” 우리가 보좌에 오른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허락한다면, 우리의 결혼 생활과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은 모두 하나 안에 보존될 것이다.
신언노트, 2023 06 11
참다운 교회생활을 위해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허락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하며,
기도에 꾸준히 힘씀
그 진짜 교회생활을 위해
그 평안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들 안에서
중재하여 결정하시도록
허용해 드림,
그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부유하게
우리 안에 거주하시도록
허락해 드림,
또 기도를
인내하며 계속함
골로새서 3장 15절에서
‘판정을 내리도록’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심판을 보도록’,
‘다스리도록’,
‘모든 일의 통치자와 결정자로서
왕좌에 앉도록’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우리의 마음에서
그리스도의 화평이
판정을 내리도록 할 때,
13절에 언급된
불만은 해결된다.
우리는
이 화평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
부름을 받았다.
합당한 몸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몸의 지체들을 대할 때에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일 가운데
판정을 내리고
조정하며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 또한
이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하는
동기가 되어야 한다.
각 편의 의견 충돌이나 분쟁을
해결하려면 항상
판정을 내리는 이가 필요하다.
종종 우리는
우리 속에
세 편,
곧 긍정적인 편과
부정적인 편과
중립적인 편이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복잡하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사탄 편의 통제 아래 있었다.
우리는
내적으로 다투는 느낌이 전혀 없이
세상적인 오락과 유흥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제는,
한 편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하도록 격려하지만
또 다른 편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하도록 격려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존재 안에서 일어나는
회의를 주관할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골로새서 3장 15절에 따르면,
이렇게 주관하는 것
즉 판정을 내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화평이다.
우리 모두 안에는
그리스도의 화평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그분 안에서
두 민족을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에베소서 2장 15절에서
바울이 언급한 화평이다.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심으로써
화평을 이루셨다.
이것이
골로새서 3장 15절에 있는
바로 그 화평이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국적을 가진
믿는 이들이
한 새사람으로 창조되었다.
새사람의 하나는
참다운 화평을 산출한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떠나서는
인종과 국적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참으로 하나가 될 수 없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이다.
우리는
그 새사람 안에 있으며,
여기에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자와 무할례자가 없다.
새사람 안에는
서로 다른
종족이나 계급이나 국적이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임이 있다.
이 하나임이
우리의 평안이다.
골로새서 3장 15절에 언급한
그리스도의 평안은 단순히
새사람 안에 있는
평안이 가득한 하나임이다.
우리 안에
판정을 내리는 분이 있음을
아는가?
골로새서에서 우리는
그 평안이신 그리스도께서
내적으로 판정을 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본다.
이렇게 판정을 내리시는 분이
우리 안의 모든 분쟁을
해결하시게 해야 한다.
언제든지 우리의 존재 속에서
서로 다른 편들이
논쟁하거나 말다툼하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그 주재하는(지배하는) 평안이신 그리스도께
지위를(자리를) 내어 드리고,
그 새사람의 하나임(oneness)이라는
이 평안이
우리 안에서 통치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이 평안, 곧 이 하나임이
그 마지막 말을 가지게 하자
(그 최종 결정을 내리게 하자).
그리스도의 평안은
여러 민족들로 이루어진
새사람의
바로 그(참된) 하나임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화평을 이루셨다.
즉 하나를 산출하셨다.
새사람의 이러한 하나는 이제
우리 안에 있다.
이제 우리는
이 하나임,
즉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허락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견
곧 우리의 관념을 제쳐 두고,
내주하시는 심판관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다투거나 의견을 표현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평안이
최종 결정을 내리도록
허락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들 안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허락해야 한다.
‘판정을 내리다’에 대한
헬라어는
‘심판을 보다’,
‘다스리다’,
‘모든 일의 통치자와 결정자로서
왕좌에 앉다’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화평이
판정을 내리도록 할 때,
누군가에 대한
우리의 불만은
해결된다.
종종 우리는
우리 속에
세 편,
곧 긍정적인 편과
부정적인 편과
중립적인 편이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있는
다툼을 끝내는
내적 중재가 필요하다.
언제든지 우리의 존재 속에서
서로 다른 편들이
다투거나 싸우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다스리는 화평에
지위를 내어 주고,
새사람의 하나(oneness)라는
이 화평이
우리 안에서 통치하고
최종 결정을 내리도록
허락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견
곧 우리의 관념을 제쳐 두고,
내주하시는 심판관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허락한다면,
이 화평이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다툼을 해결할 것이다.
골로새의 성도들은
서로 다른 주의와 철학과 실행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문화와 주의와 실행을 다루는
골로새서에서만
바울이
그리스도의 화평이
내적으로 판정을 내리는 것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판정을 내리는 것은
우리의 문화에 근원을 둔
모든 의견을
잠잠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려면 반드시
통치자와 결정자로서
왕좌에 앉아야 한다.
어떤 형제가
어떤 장로 때문에
마음이 상한 것을
예로 들어 보자.
주님은
그분의 긍휼 안에서
그 형제에게 오셔서
그 형제가
생각을
위에 있는 것들에
두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그 형제는
신성한 전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신성한 전달은
판정을 내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을
그 형제에게
가져올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화평이 다스림으로써,
그 형제는
장로가 잘못했지만
자신이 더 심하게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즉시 그 형제는
주님께 자백하고
은혜를 받으며
그 장로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화평이
판정을 내림으로
우리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성도들 간의 마찰이 사라진다.
새사람의 생활인 교회생활은 단지
가르침에 의해서만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위에 있는 것들에 둠으로써,
또한 하늘에 속한 전달이
우리 안으로
신성한 요소를 분배하도록 허락함으로써
보존된다.
그럴 때 우리는
새사람의 새롭게 됨을 얻고,
우리 안에서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화평은 사실상
그리스도 자신의 특별한 방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화평이
판정을 내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면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마지막 발언을 하시며,
최종 결정을 내리시는 것이다.
장로 때문에 마음이 상한
형제의 경우,
그리스도는
그 장로를 사랑하고
교통을 추구하며
그 장로와 함께 주님을 누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화평으로서
왕좌에 앉으셔서
다스리시고
결정하시며
마지막 발언을 하시는 것이다.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행함을 가지고
교회생활을 보존하려면
우리에게는
판정을 내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이 필요하다.
화평이 없다면
마찰은
해결될 길이 없을 것이다.
오직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
즉 중보기도 하시고
공급하시며
행정을 수행하시는 분만이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마찰을 해소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왕좌에 앉아
우리 안에서
유일한 심판관이 될 때,
우리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수평적으로는 성도들과
화평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화평을 누리고 있고,
이 화평 안에서
새사람인 교회생활이 보존됨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자!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다스릴 때
새사람의 새롭게 됨이
계속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왕좌의 위치를 가진
그리스도의 화평의 다스림 아래 머문다면,
다른 사람들을
마음 상하게 하거나
손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의해
그분의 화평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할 것이다.
지방의 한 교회 안에 있는 하나임과
그 교회들 가운데 있는 하나임은
사람의 노력함에 의해
유지되지 않는다.
그 하나임은 오직
판정을 내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그 모든 교회들과 또 그 회복 전체는
판정을 내리는
그리스도의 화평 아래 있다.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는
공급하는 은혜이시자
판정을 내리는 화평이시다.
우리는
판정을 내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이
가장 먼저
우리 안에서
왕좌에 오르도록
허락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주님께 다스림을 받도록
기도하는 대신
주님께서
다른 이들을 다스려 주시기를
구한다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가장 먼저
네 안에서
나의 왕좌를 세우게 하여라.
내가
너를 다스리고
너를 복종시키며
너를 위한 최종 결정을
내리게 하여라.”
우리가
왕좌에 오른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허락한다면,
우리의
결혼 생활과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은 모두
하나임 안에
보존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허락한다면,
이 화평이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다툼을 해결할 것이고,
우리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수평적으로는 성도들과
화평을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화평이
판정을 내림으로
우리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성도들 간의 마찰이 사라진다.
그럴 때 교회생활은
달콤함 속에 보존되고
새사람은
실지적으로 유지된다.
그리스도의 화평이
판정을 내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면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마지막 발언을 하시며,
최종 결정을 내리시는 것이다.
우리가
왕좌의 위치를 가진
그리스도의 화평의 다스림 아래 머문다면,
다른 사람들을
마음 상하게 하거나
손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의해
그분의 화평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할 것이다.
이러한 화평이
모든 믿는 이들을
함께 묶어 주고
또 그 매는 띠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우리를
하나 안에 보존하기 위해
판정을 내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이 필요하다.
그런 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첫째 위치를 드려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능들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빛을 비춘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으로 충만하고
우리에게
빛을 비추기 때문에
우리를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게 할 수 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음식으로서
영양분이 가득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는 동안
우리를 양육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한다.
목마름은
굶주림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물이 없다면
결코 살 길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를 강건하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목마르고
영양실조에 걸렸기 때문에
약하다.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은 누구도
강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우리를 강건하게 하는 것을 체험한다면,
우리의 영뿐 아니라
혼도 강해질 것이다.
즉, 우리는
영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강해질 것이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심지어
신체적으로도
우리를 강건하게 한다.
나의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영을
강하고 기쁘게 만든다.
이 강함과 기쁨은
나를
신체적으로도
건강해지도록 돕는다.
우리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기쁠 때
우리의 몸 또한 건강하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과 혼을
강하게 한다.
우리의 영과 혼이 강건해질 때,
우리의 몸도 건강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좋은 치료제이며,
우리를
강건하게 하고
치료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를 씻겨 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기적이고
신진대사적으로
우리의 존재를 씻는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건축한다.
몸인 교회의 지체들로서
우리는 모두
건축되어야 한다.
우리는 특이하기 때문에
누구도
우리를 다루기가 어렵고
함께 건축하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내적으로 만질 수 있으며,
우리가
교회 안에서 건축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특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건축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 안에서 판정을 내리지만
우리를 건축하는 것은
화평이 아니다.
화평은
하나님의 말씀이
건축의 일을 하도록
우리를 합당한 상태 안에
계속 있게 한다.
우리를 건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해방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건축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완전하게 하고
온전하게 한다.
아기의 기관은 완전하지만
아기의 기능은 완전하지 않다.
어떤 아이의 신체 기관이
합당하게 기능을 발휘하려면
그 아이는 자라야 한다.
온전하게 되는 것은 항상
성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아이가 자랄수록
아이의 기능은 더
완전하게 되고
온전하게 된다.
영적인 체험도
참으로 동일하다.
몸의 지체들로서 우리는 모두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기능을 발휘하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장한다.
그리고 성장을 통하여
기능들이 산출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받은
영양 공급은
몸의 지체들인 우리를
완전하게 하며
온전하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온전하게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우리의 미덕들을 개발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미덕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친절과 인내와
지혜와 겸손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증가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첫째 위치를 차지하고
우리 안에 거주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움직이면서
우리의 존재 안으로
그리스도의 풍성을 공급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그 기능들을
체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고,
우리를 양육하며,
우리를 적셔서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강건하게 하고,
씻겨 주며,
건축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완전하게 하고
온전하게 하며
거룩하게 하여
삼일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 안으로 이끈다.
우리는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을
회복한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로 읽는 데까지
계속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기 위해
진정으로
살아 있는 말씀으로
적셔지기를 갈망한다면,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바울이 추천한
실행을 따라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생각에서 온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을 포함하여
우리의 영에서 나온
온갖 지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는 것에는
말씀을 읊조리고 누리는 것이
포함된다.
우리는
말씀을 찬송할 때
말씀을
숙고하고 읊조리며 누리게 되고,
그 결과
말씀이
우리를 적실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주게 된다.
우리가 단지
말씀을 읽기만 한다면,
우리가 읽는 부분이
우리 안으로 스며들어와
우리의 존재를 적실
기회가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노래하고
특히 말씀을 찬송한다면,
말씀을 향하여
보다 완전히
우리의 존재를 열게 되고,
말씀이
우리 속에 스며들어
우리를 적실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찬송할 때,
우리의
목소리와 생각과
마음과 영을
훈련하자.
우리가
적은 시간이라도
말씀을 노래하는 데
사용한다면,
우리는
내적으로
말씀이
우리를 채우고 적신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 것이다.
우리의 상태가
정상적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올 때마다
도움을 받고
많은 축복을 얻을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숨이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의 체현이신
주 예수님은 직접
말씀이라 불리셨다.
따라서 말씀에 오는 것은
하나님께 오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 전체를
담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고 실질적이며
살아 있고 빛을 비추는
이유이다.
우리 안에
방해하는 문제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올 때마다
복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주님께 부르짖고
주님에게서
무언가를 얻고자
필사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장애물이나 방해물이
있을 수 있다.
우리를
괴롭히고 사로잡으며 차지하는
어떤 특정한 죄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
다른 한 면에서
어떤 특정한 죄가
우리 마음에
은밀히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주님께서
그것을 처리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감추어진 죄는
우리가
말씀에서
복을 얻지 못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복을 얻기 원한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마음을 처리해야 하고
절대적으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돌이켜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처리하고
주님과 우리 사이의
부정적인 것들을 처리한다면,
우리의 상태는
정상이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말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성경은
다른 어떤 책보다도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
자기 확신과 자기 과신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말씀에 올 때
우리는
주님께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기도하기를
배우자.
“주님,
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저는
무언가가
저를 가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주님과 저 사이에
무언가가 있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게 해 주십시오.”
이것은
우리의 기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주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여야 한다.
말씀에 올 때
우리는
어떠한 자기 확신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감히
우리와 주님 사이에
문제가 없다고
과신해서는 안 된다.
지금도
우리와 주님 사이에
수많은 문제가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은
교만한 이들을 대적하시나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약 4:6)라고 말한다.
우리가
말씀에 올 때
자신을
겸손히 낮추지 않는다면,
말씀에서
큰 도움을
얻지 못할 것이다.
골로새서 3장 16절은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들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고
우리의 마음에서
은혜로
하나님께 찬송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하는
한 가지 길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노래하는 것이다.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에 더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로 읽고
찬송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는 것에는
말씀을 숙고하고 읊조리고 누림으로써
말씀이 우리를 적실 기회를
더 많이 얻도록 하는 것이
포함된다.
말씀을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은
우리의 영을 훈련하고
그 영 안으로 이끌리는
탁월한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찬송할 때,
우리는
어떤 곡이든
심지어 자신이 즉흥적으로 만든 곡도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말씀을 노래하고 찬송하는
습관을 세워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찬송할수록,
우리는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 속에 스며들며
우리를
신성한 요소로 적시도록
더 많은 기회를 얻게 한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 것이다.
매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명 원칙들에 따라,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안에 있는
살아 있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옴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이럴 때(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그 영의 적용된 말씀으로서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셔서
그분께서
우리 안으로
주입되실 수 있다.
우리는
신성한 빛의
내적인 비춤과
신성한 생명의
공급을 받기 위해 반드시
우리의 전 존재를
주님께 열어 드려야 한다.
가장 많이 변화를 체험하는 사람은
주님께
전적으로 열려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주님에게서 분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
자기 확신과 자기 과신을 버리고,
주님의 긍휼과 은혜를 얻도록
주님을 앙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해야 하며,
우리의 전 존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찬송하며 읊조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주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숨으로 가득 채워진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교회의 하락에 대한
신성한 해독제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장비될 수 있다.
우리는
참토양이신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린 식물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자라는
땅이시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심으로써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해지실수록
그분은
우리를
더 자라게 하신다.
몸의 성장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라시고 더해지시며 증가하시는 것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매우 주관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자라게 하시므로
우리는
시간을 들여
하나님을 흡수해야 한다.
매일 음식을 먹는 것처럼,
우리는 매일
시간을 들여
주님을 흡수하고,
시간을 들여
그리스도의 풍성을
동화해야 한다.
우리가 서두른다면,
그분의 풍성을
많이 흡수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따로 떼어 놓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을
더 많이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필요는
그 영으로
채워지고 적셔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영을 체험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음을
밝혀 준다.
하나님은 준비되셨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는
구체적이고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그분을 접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많은 믿는 이들이
오랫동안 기도했고
많은 시간을 들여
말씀을 읽었지만 결코
구체적이고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주님을 접촉한 적이 없을까 봐
염려된다.
주님과의 아침 시간이
성공적이려면
우리는 먼저
한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즉 주님께서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며
우리를 만나실 수 있도록
정해진 시간에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목적을 가지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주님께 나아가
그러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정상적이고 살아 있으며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갈망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분명하게 만나신다면,
그 결과 우리는
성령으로 채워질 것이며,
우리 일생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영 안에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전적으로
영 안에 있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기도할 때 우리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고
은혜의 왕좌에 가까이 나아간다.
기도는
은혜의 왕좌 앞에
나아가는 길이다.
은혜의 왕좌 앞에 나아감으로
우리는
긍휼을 받고
은혜를 입어서
때맞추어 도움을 얻는다.
우리가
기도하여
은혜의 왕좌로 나아갈 때,
은혜가
우리 안에서 흐르고
우리에게 공급하는
강이 될 것이다.
이 어떠한 보상인가!
기도 안에서
은혜의 흐름을 얻는 것은 사실상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의 기도의 응답 여부는
부차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은혜가
왕좌로부터
우리 존재 안으로
강처럼 흐르는 것이다.
이 은혜의 강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전지가
하늘에 속한 전류로
충전되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전류,
즉 신성한 전기는
왕좌로부터
우리 안으로 흐르는
은혜이신 삼일 하나님이다.
이 전류와 전기가 가져오는
공급과 누림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약한 이유는
그들의 영적인 전지가
충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전달이 부족하다.
온종일 우리는 거듭거듭
신성한 전류로
충전될 필요가 있다.
참으로 이것은
기도에 꾸준히 힘쓰는 것에 대한
보상이다.
우리는
기도에 꾸준히 힘써야 한다.
우리는
기도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이렇게 충분히 기도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한 땅이신
그리스도의 풍성을
더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들여
주님을 흡수하고,
구체적이고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그분을 접촉해야 한다.
아침에 하나님과 만나는 것은
하루의 이른 시간에
그분과 만나는 것만이 아니라,
빛이 가득한 상황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분산하거나
우리를 점유하는
어떤 사람이나 일이나 사물 없이
혼자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주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맹렬한 전투는 하나님과 사탄의 전투이지만, 제삼자가 개입되었다. 이 제삼자는 하나님께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로 구성되는데, 이들이 사실상 이 전투의 결과를 결정할 것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사탄과 맞서 싸우려면 우리는 기도에 꾸준히 힘써야 한다. 온 세상의 추세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에 꾸준히 힘쓰는 것이 요구된다. 기도하는 것은 타락한 우주 안에 있는 흐름과 추세에 대항하는 것이다. 기도에 꾸준히 힘쓰는 것은 흐름을 거슬러 배를 젓는 것과 같다. 의심할 바 없이 노를 젓거나 기도하는 것에 꾸준히 힘쓰는 데에는 상당한 힘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는 강한 흐름이 있다. 하나님 편에 선 이들로서 우리는 우주 전체가 우리를 대적하며,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대적하는 것을 발견한다.
기도에 꾸준히 힘쓰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기도 생활에 관하여 주님과 약속해야 한다. 주님께 구체적인 방식으로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리라. “주님, 저는 기도하는 이 문제에서 당신께 진지합니다. 저는 이 시간부터 제가 기도의 생활을 가질 것임을 하늘과 땅을 불러 증인으로 삼습니다. 저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다. 반대로, 저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꾸준히 기도에 힘쓸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님, 저는 이것에 필사적입니다. 제가 기도 생활을 하도록 제 자신을 주님께 바칩니다. 주님, 저를 기도의 영 안에 지켜 주십시오. 제가 이것을 잊어버리거나 소홀히 여길지라도 당신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실 것을 압니다. 기도에 대해서 거듭거듭 상기시켜 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주님께 우리의 기도 생활에 관하여 서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님, 제가 이 서원을 잊어버릴지라도 당신께서 이 서원을 잊지 않으실 것을 압니다. 주님, 바로 지금 이 시작 때부터 저는 분명하게 당신께 이 책임을 넘겨드립니다. 주님, 저를 그냥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기도하는 것을 상기시켜 주십시오.”
우리가 기도에 관하여 주님과 이러한 약속을 한 후에, 우리는 기도를 위해 구체적인 시간을 따로 떼어 놓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매일 아침 십 분을 정해 놓을 수 있다. 우리는 기도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이며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태도를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도 생활을 성공적으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매일 꼭 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든지 간에 우리는 기도를 위하여 여기저기에서 최소한 몇 분씩이라도 떼어 놓을 수 있다. 우리는 아침에 조금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오나 일과 후나 저녁에 기도를 위한 시간을 또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루 동안 구체적으로 시간을 따로 떼어 놓음으로써 우리는 기도하기로 정한 삼십 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기도의 분위기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영 안으로 이끌리고, 영 안에서 주님과 하나 되며, 주님을 우리의 생명으로 취한다. 이런 체험은 매우 귀해서 우리가 이것을 누리고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이 끝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해 영 안에 남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 시간이 끝나자마자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인 생활 방식으로 돌아간다. 더 이상 우리는 기도의 분위기 안에 있지 않다. 자동적으로 우리는 또다시 거룩하고 영적이게 되며 승리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실패할 때마다 우리는 회개하고 주님께 자백하며 다시 노력하려고 결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의 일상생활은 우리가 참되게 기도할 때 갖는 체험과 동일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영 안으로 넣는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고, 주님의 임재를 누리며, 자연스럽게 주님을 살게 된다. 어떤 노력도 들이지 않고 우리는 거룩하고 영적이게 되며 승리하게 된다. 우리에게 문제가 없고 걱정이 없게 된다.
하나님 편에 서서 사탄과 맞서 싸우려면 우리는 기도에 꾸준히 힘써야 한다.
하나님 편에 선 이들로서 우리는 타락한 우주 전체가 우리를 대적하며,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대적하는 것을 발견한다. 기도에 대항하는 것은 우리 밖에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속에도 있다.
기도하는 것은 타락한 우주 안에 있는 조류와 경향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를 위해 명확한 시간을 떼어 놓아야 한다. 우리는 기도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이며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계속 우리의 영을 훈련함으로써 기도의 분위기 안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도에 꾸준히 힘씀으로써 계속 주님과의 친밀한 연결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장 사소한 문제도 주님께 여쭈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기도에 꾸준히 힘씀으로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에 꾸준히 힘씀으로 그리스도의 화평의 다스림을 받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주하도록 할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침투하시고 그분 자신으로 우리를 대치하시어, 결국 우리가 참다운 교회생활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의 타고난 모든 차이점을 제거하실 것이다.
1일
골로새서 3장 15절에서 ‘판정을 내리도록’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심판을 보도록’, ‘다스리도록’, ‘모든 일의 통치자와 결정자로서 보좌에 앉도록’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우리의 마음에서 그리스도의 화평이 판정을 내리도록 할 때, 13절에 언급된 불만은 해결된다.
우리는 이 화평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 부름을 받았다. 합당한 몸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몸의 지체들을 대할 때에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일 가운데 판정을 내리고 조정하며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 또한 이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하는 동기가 되어야 한다.
각 편의 의견 충돌이나 분쟁을 해결하려면 항상 판정을 내리는 이가 필요하다. 종종 우리는 우리 속에 세 편, 곧 긍정적인 편과 부정적인 편과 중립적인 편이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복잡하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사탄 편의 통제 아래 있었다. 우리는 내적으로 다투는 느낌이 전혀 없이 세상적인 오락과 유흥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제는, 한 편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하도록 격려하지만 또 다른 편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하도록 격려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존재 안에서 일어나는 회의를 주관할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골로새서 3장 15절에 따르면, 이렇게 주관하는 것 즉 판정을 내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화평이다.
우리 모두 안에는 그리스도의 화평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그분 안에서 두 민족을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에베소서 2장 15절에서 바울이 언급한 화평이다.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심으로써 화평을 이루셨다. 이것이 골로새서 3장 15절에 있는 바로 그 화평이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국적을 가진 믿는 이들이 한 새사람으로 창조되었다. 새사람의 하나는 참다운 화평을 산출한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떠나서는 인종과 국적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참으로 하나가 될 수 없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이다. 우리는 새사람 안에 있으며, 여기에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자와 무할례자가 없다. 새사람 안에는 서로 다른 종족이나 계급이나 국적이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가 있다. 이 하나가 우리의 화평이다. 골로새서 3장 15절에 언급한 그리스도의 화평은 단순히 새사람 안에 있는 화평이 가득한 하나이다.
우리 안에 판정을 내리는 분이 있음을 아는가? 골로새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이 내적으로 판정을 내리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본다. 이렇게 판정을 내리는 분이 우리 안의 모든 분쟁을 해결하시게 해야 한다. 언제든지 우리의 존재 속에서 서로 다른 편들이 다투거나 싸우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다스리는 화평에 지위를 내어 주고, 새사람의 하나(oneness)라는 이 화평이 우리 안에서 통치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이 화평이 최종 결정을 내리게 하자.
그리스도의 화평은 여러 민족들로 이루어진 새사람의 참된 하나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화평을 이루셨다. 즉 하나를 산출하셨다. 새사람의 이러한 하나는 이제 우리 안에 있다. 이제 우리는 이 하나, 즉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허락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견 곧 우리의 관념을 제쳐 두고, 내주하시는 심판관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다투거나 의견을 표현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화평이 최종 결정을 내리도록 허락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