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은 것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져 그분과 함께 하늘들의 영역 안에 앉혀진 것과,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은 주님 안에 있는 성전으로 자람으로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살리셨을 때, 우리도 함께 살리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이다.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참한 죽음의 위치에서 놀라운 생명의 영역 안으로 구원받았다.
성취하시는 분이시요 수단이신 아들 하나님을 통하여, 집행하시는 분이시요 적용이신 영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기원이신 분이시요 유일한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
위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체험적으로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간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구원받는 것이다.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접촉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영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으로 그분께 간다. 이분은 우리의 체험 안에 계시고 우리의 누림을 위하시는 삼일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그 영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고, 이제 그 영은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아버지께로 이끄신다. 이 놀라운 양방 통행을 통하여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분배를 누린다.
‘아들을 통하여’는 ‘삼일 하나님을 통하여’이고, ‘그 영 안에서’는 ‘삼일 하나님 안에서’이며, ‘아버지께’는 ‘삼일 하나님께’이다. 우리는 이렇게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며, 이것이 우리가 건축될 수 있는 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이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우리는 ‘사도들과 신언자들의 기초 위에 건축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자신은 모퉁이 돌이시다’ ― 엡 2:20.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가 사도들에게 계시되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받은 계시는 교회가 건축되는 기초로 여겨진다.
이것은 마태복음 16장 18절에 있는 반석과 일치하는데, 이 반석은 그리스도 자신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이며, 그리스도는 이 계시 위에 그분의 교회를 건축하실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과 신언자들 위에 교회를 건축해야 한다.
에베소서 2장 20절에서 그리스도는 모퉁이 돌로 언급되신다.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는 유대인 믿는 이들과 이방인 믿는 이들을 함께 연결하시어 주님 안에 있는 성전이 되게 하신다.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는 신약 시대의 교회 건축을 위한 분이시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우리는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건축물 전체가 주님 안에 있는 성전으로 자라 가고 있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서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면서(행 4:10-12) 먼저는 우리를 하나님의 영적인 집을 건축하기 위한 살아 있는 돌들이 되게 하시고(마 16:18, 요 1:42, 벧전 2:4-7), 그런 다음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과정에서(롬 12:2상, 고후 3:18) 우리를 하나님의 거처로 건축하시어(엡 2:19-22), 하나님의 선한 기쁨을 위해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수행하신다(엡 1:9, 3:9-11).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건축물 전체가 함께 연결되어 주님 안에 있는 성전으로 자라 가고 있다’ ― 엡 2:21.
‘건축물 전체’라는 표현은 우주적인 건축물, 곧 우주를 범위로 하는 교회를 의미한다.
‘연결되어’라는 말은 건축물의 상태와 상황에 알맞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함께 연결되는 것은 몸이라는 틀의 모든 부분이 함께 연결되어 하나의 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건축 안에서 모든 재료가 함께 연결된다. 이것은 단지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건축하는 것이다.
이 건축물은 살아 있기 때문에 유기적이다. 그러므로 자란다.
이 건축물은 성전 곧 하나님의 거룩한 거처로 자라고 있다. 이것은 성전이 살아 있는 건축물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장과 건축이 분리된 것이지만, 사실상 집의 건축은 몸의 성장이다.
성전 곧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건축은 믿는 이들의 생명의 성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몸은 하나님께서 자라심으로써 자란다.
몸의 성장은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자라시고 더해지시며 증가하시는 것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주관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장하게 하시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더 많이 더해지실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더 많이 자라게 하신다.
교회는 생명의 분배 곧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로 자란다.
삼중(三重)의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생명과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우리 안에 분배하고 계신다.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생명으로 분배하시는 동안, 우리는 자양분을 얻고 자란다.
교회들 안에서 우리는 신성한 생명의 분배를 통한 참된 성장에 주의해야 한다.
건축물 전체가 거룩해지고 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신 그분 자신을 우리의 존재 안으로 분배하심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데, 이것은 우리의 전 존재가 그분의 거룩한 본성으로 침투되고 적셔지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들인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여 우리의 전 존재가 하나님 자신으로 침투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를 하나님의 본성과 특성 안에서 그분 자신과 똑같이 거룩하게 한다.
건축물 전체가 주님 안에 있는 성전으로 자라 가고 있다.
에베소서 2장 21절에서 ‘성전’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성소, 즉 성전의 내부를 의미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성전인 교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소, 즉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의 ‘하나님의 성전’은 어떤 지방에 있는 믿는 이들을 단체적으로 가리키며, 17절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은 우주적으로 모든 믿는 이를 가리킨다.
우주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영적인 성전은 땅 위에 있는 많은 지방에서 표현된다. 각각의 표현은 그 지방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새 예루살렘 안에는 성전이 없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그 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전체가 지성소일 것이다. 따라서 그 안에는 성전이 없을 것이다.
이 안쪽 성전은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다.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의 성소라는 건축물 전체가 주 그리스도 안에 있다.
에베소에 있는 그 지방의 성도들을 가리키면서 바울은 “그분 안에서 여러분 또한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건축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 엡 2:22.
성전과 거처는 동일한 것의 두 방면을 가리킨다.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분의 신탁의 말씀을 듣는 곳이다.
하나님의 거처는 안식의 장소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거처에서 안식하신다.
성전과 거처는 구별된 두 장소가 아니다. 그보다 성전과 거처는 동일한 건축물의 두 방면, 곧 두 기능 혹은 두 용도이다.
에베소서 2장 22절에 있는 ‘또한’이라는 말은, 21절에 있는 건축물은 우주적인 것이고 이 절에 있는 건축물은 지방적인 것임을 가리킨다.
문맥에 따르면, 에베소서 2장 21절에 있는 성전은 우주적인 것이고, 22절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는 지방적인 것이다.
우주적으로 교회는 유일하게 하나이며, 우주적으로 계속 자라고 있다. 지방적으로 특정 지방에 있는 교회도 또한 하나이며, 그 지방의 성도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지방에서 함께 건축되고 있다.
하나님의 거처는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에베소서 2장 21절에서는 성전이 주님 안에 있다고 말하고, 22절에서는 하나님의 거처가 영 안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처를 건축하기 위해 주님께서 우리의 영과 하나이시며, 또한 우리의 영이 주님과 하나라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거처가 건축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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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사실상 에베소서 2장 21절의 ‘성전’이라는 단어는 주님 안에 있는 성전의 중심 부분을 의미하는 ‘성소(sanctuary)’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한 성소는 우리의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이다(22절). 오늘날 교회생활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여러분이 영 안에 있지 않다면, 집회 안에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실지적인 면에서 교회 안에 있지 않다. 교회생활은 우리 사람의 영 안에 있다. 우리는 항상 영으로 돌이키고, 영을 사용하며,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영에서 나와서도 안 되고 영을 떠나 처신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 안에서 행하고 살고 행동하며 처신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영을 훈련할 때, 우리는 교회 안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생명으로 분배하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분배와 우리의 자람은 모두 영 안에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22절에서 한 지방의 성도들을 가리키는 ‘여러분’이라는 단어는, 21절에 있는 건축물은 우주적인 것이고 22절에 있는 건축물은 지방적인 것임을 나타낸다. 이 절에서 바울은 그 지방에 있는 성도들, 곧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건축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절들에서 바울은 교회의 우주적인 방면과 지방적인 방면을 모두 다루고 있다. 건축물 전체가 자라 가고 있다는 것은 우주적인 방면을 가리킨다. 특정 지방에 있는 성도들이 함께 건축되고 있다는 것은 지방적인 방면이다.
왜 바울은 우주적인 방면을 언급할 때는 ‘성전’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지방적인 방면을 말할 때는 ‘하나님의 거처’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우주적인 성전 외에는 지방에 있는 성전이라고 불리는 다른 성전이 없다. 성전과 거처는 동일한 것의 두 방면을 가리킨다.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분의 신탁의 말씀을 듣는 곳이다. 거처는 안식의 장소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거처에서 안식하신다. 그러나 성전과 거처는 구별된 두 장소가 아니다. 그보다 성전과 거처는 동일한 건축물의 두 방면, 곧 두 기능 혹은 두 용도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장소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장소이다.
각지에 있는 모든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의 일부이며, 우주적인 교회에 더해진 것이나 우주적인 교회에서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각지에 있는 모든 교회를 함께 더한 것은 우주적인 교회와 같다. 이것은 각지에 있는 교회들 없이 우주적인 교회가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각 지방에 있는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우주적인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다. 각지에 있는 모든 교회에는 오직 하나의 건축물만 있다. 애너하임에 있는 교회에 하나의 건축물이 있고, 시카고에 있는 교회에 또 다른 건축물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건축물에 대하여 우리는 각 지방에 다른 건축물이 있다는 타고난 관념을 갖고 있다. 이 우주 안에는 우주적인 방면과 지방적인 방면을 지닌 단 하나의 건축물만 있다. 이 땅에 아무리 많은 교회가 있다고 해도, 이 두 방면을 지닌 오직 한 건축물만 있을 뿐이다.
에베소서 2장 22절은 우리가 영 안에서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건축되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의 영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믿는 이들의 영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영은 거하시는 분을 가리키며 거처를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처는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에베소서 2장 21절에서는 성전이 주님 안에 있다고 말하고, 22절에서는 하나님의 거처가 영 안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영과 하나이시며, 또한 우리의 영이 주님과 하나라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의 영 안에 있는 것은 사실상 주님 안에 있는 것이다. 또한 주님 안에 있는 것은 영 안에 있는 것이다.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 영이다(고전 6:17). 우리는 참으로 우리의 영을 주님에게서 분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은 교회가 건축되는 곳이다. 건축은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혼이나 마음 안에 있지 않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영 안에 있다.
5일
고린도전서 3장에서 하나님의 건축물인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이 성전 안에 거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시다(16-17절). 고린도전서 3장 16절의 ‘하나님의 성전’은 어떤 지방에 있는 믿는 이들을 단체적으로 가리키며, 17절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은 우주적으로 모든 믿는 이를 가리킨다. 우주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영적인 성전은 땅 위에 있는 많은 지방에서 표현된다. 각각의 표현은 그 지방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요한계시록 21장 22절은 새 예루살렘 안에는 성전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그 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장막은 하나님의 성전의 전신(前身) 또는 전조였다. 하나님의 장막(3절)인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될 것이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성으로 확대되리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 성의 세 치수인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것(16절)은 성 전체가 지성소, 곧 안쪽 성전이 되리라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안에는 성전이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 22절의 ‘성전’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나오스(naos)’는 안쪽 성전인 지성소를 의미한다. 이 안쪽 성전은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과 어린양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장막인 거룩한 성은 하나님께서 거주하시기 위한 곳이고, 성전이신 하나님과 어린양은 우리가 거주하기 위한 분이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은 영원토록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위한 상호 거처가 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성 전체는 지성소이며, 하나님과 어린양은 이 성의 성전이시다. 이 두 중점을 함께 둘 때, 우리는 이 성이 하나님과 어린양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 전체가 지성소이고 안쪽 성전이 하나님과 어린양이기 때문에, 그 성은 하나님과 어린양이다.
성 전체는 장막이라 불린다(계 21:3). 장막, 곧 성막은 성전의 전신이다. 성전이 나타나기 전에 성막이 있다. 그러나 성막이 그 충만에 이를 때, 성막은 성전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 전체가 지성소이고, 성전은 하나님 자신과 어린양이며, 성 전체가 장막이라는 세 중점을 우리 앞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이 모든 중점을 함께 둘 때, 하나님 자신께서 새 예루살렘성 전체이심을 본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성 전체는 또한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모든 사람으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구성체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그 성 전체이시며, 다른 한편으로 그 성은 구속받은 이들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구성체이다. 만일 여러분이 타고난 생각으로 이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면, 이렇게 질문하겠다.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않는가? 또한 교회가 모든 믿는 이들로 이루어진 구성체라고 말하지 않는가?” 한편으로 교회는 모든 믿는 이들로 이루어진 구성체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는 머리와 몸 둘 다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몸-그리스도’라는 용어가 있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은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실 뿐 아니라 또한 몸이심을 말한다. 교회와 새 예루살렘 모두가 원칙에 있어서 동일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확대이다. 그리스도 자신은 개인적인 그리스도이시지만, 교회는 단체적인 그리스도, 곧 확대되시고 확장되신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확장이며 그리스도의 확대이다. 마찬가지로 새 예루살렘은 삼일 하나님의 확대이며 확장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일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과 어린양일 것이다. 오늘날 교회 또한 원칙에 있어서 동일하다. 한편으로 우리는 교회이며,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이다.
4일
건축물 전체가 성전으로 자라 가고 있다(엡 2:21). ‘성전’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성소, 즉 성전의 내부를 의미한다. 주님 안에서 건축물이 성전으로 자라 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소인 하나님의 집이라는 건축물 전체가 주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성전이 지금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우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건축물 전체’(엡 2:21)라는 표현은 우주적인 건축물을 가리킨다. 우주적인 건축물은 지금도 자라고 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언급된 교회의 건축이 바로 에베소서 2장 21절에 나오는 건축물이다. 비록 건축물이 자라는 것이 느리고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이 일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거룩하게 되려면, 첫째로는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되어야 하고, 둘째로는 하나님께 넘겨져야 하며, 셋째로는 하나님께서 소유하셔야 하고, 넷째로는 하나님으로 적셔지고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 마침내 성경에는 거룩하게 됨의 결과인 새 예루살렘이 있는데, 새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라 불린다. 이 성은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을 위한 성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소유하시며 하나님으로 적셔지고 하나님과 하나인 성이다.
거룩하게 되려면, 우리는 첫째로 위치에 있어서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았지만 분별되지 않았다. 정상적이라면, 구원받을 때 또한 분별된다. 이러한 이유로, 믿는 이를 성도라고 부른다.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거의 세상 사람들과 같다. 심지어 그들의 친척이나 친구 중에 많은 이들이 그들이 그리스도인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위치의 문제이다.
이제 우리는 기질에 있어서 거룩하게 되는 것에 왔다. 기질에 있어서 거룩하게 되는 것은 의롭게 됨 뒤에 온다(롬 6:19, 22). 이것은 단지 우리의 위치만이 아니라, 우리의 기질에 있어서도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위치에 있어서 거룩하게 되는 것보다 더 깊고 주관적이다.
분별되는 것은 다소 쉽게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기질에 있어서 적셔지는 것은 긴 시간이 걸린다. 우리가 주님께 신실하다면, 날마다 하나님의 본성으로 적셔질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 자신으로 적시고자 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존재 안으로 흡수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게 되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으로 흠뻑 적시시려고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존재 안으로 그분 자신을 일해 넣기를 원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될 것이다. 나는 오십여 년 이상 이러한 과정에 있었고, 지금도 이러한 과정에 있으면서 날마다 하나님을 흡수하고 있다. 때때로 나의 아내나 형제자매들은 내가 그분을 흡수하는 것을 돕는다. 심지어 내가 자신 안에서는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을 때에도, 그들은 내가 그분을 흡수하는 것을 원하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님은 나를 그분 자신으로 적시시고, 내가 그분을 흡수하게 하신다. 우리 가운데 오랫동안 기독교 안에 있었던 많은 사람이 기독교에 있었을 때는 이러한 적심을 아주 많이 체험하지 못했음을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생활 안으로 들어온 때부터 점점 더 하나님으로 적셔지고 있다. 교회생활은 하나님을 흡수하는 생활이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신성한 요소로 적셔지고 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되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으로 적셔진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 된다. 어느 날 우리는 그분과 똑같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이 완성되었다는 표시일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과정은 분별됨으로 시작하여 적셔짐으로 계속되며 우리 몸의 완전한 구속으로 완성된다. 그때 우리는 안팎으로 그분과 똑같게 될 것이다. 우리는 거룩하게 될 것이다.
3일
에베소서 2장 21절에서 우리는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 믿는 이들과 이방인 믿는 이들을 포함하는 건축물 전체가 함께 연결되어 성전으로 자라 가고 있음을 본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실지적인 건축은 믿는 이들의 생명이 성장함으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교회는 자라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자라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 안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며 신성한 생명, 영적인 생명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연결되어’라는 말은 건축물의 상태와 상황에 알맞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거듭났고, 하나님의 집으로서 교회는 건축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장과 건축이 분리된 것이지만, 사실상 집의 건축은 몸의 성장이다. 몸이 자라지 않는다면 집은 건축될 수 없다.
우리는 종종 성경에서 성장과 건축이 함께 연결된 것을 본다.
고린도전서 3장 9절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경작지이며, 하나님의 건축물입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경작지로서 우리는 자라야 하고, 하나님의 건축물로서 우리는 건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은 우리의 몸이 자람으로써 충만한 신장에 이르는 것처럼, 이 영적인 집 곧 이 하나님의 거처는 자람으로써 건축된다고 말한다(21-22절). 더욱이 베드로전서 2장은 우리가 구원받고 죄들을 버렸다면 영적인 젖을 사모함으로써 자라야 한다고 말하고(1-2절), 그런 다음에 계속해서 우리가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있다고 말한다(5절). 에베소서 4장 12절과 13절은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 충분히 성장한 사람에 이르게 …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랄수록 더욱더 건축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자라시고 우리와 연합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건축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심으로써 자라게 하신다. 몸의 성장은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자라시고 더해지시며 증가하시는 것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매우 주관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
우리는 매일 주님을 흡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그리스도의 풍성을 동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접촉할 때 서둘러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서두른다면, 그분의 풍성을 많이 흡수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정해 두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풍성을 더 많이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시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이시며, 우리에게는 그분을 흡수할 수 있는 영이 있다. 이처럼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물면서 그분을 흡수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시간을 들여야 한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풍성을 흡수하는 것을 체험하기는 했지만, 아직 충분히 체험한 것은 아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지 말고, 영 안에서 주님을 칭송하고 찬양하며 그분께 감사드리고 자유롭게 그분께 말씀드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 이런 식으로 주님과 교통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풍성을 흡수하게 될 것이고, 주님은 우리 안으로 그분 자신을 더 많이 더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더 많이 더해지실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더 많이 자라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방법이다.
오직 하나님만 자라게 하실 수 있다. 나의 사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심거나 물 주는 것이다. 나는 누구도 자라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 그분 자신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양식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식탁에서 하나님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식탁에서 우리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하나님을 먹어야 한다. 그럴 때 그분은 더 많이 우리 안으로 더해지실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더해지시는 것이 바로 그분께서 자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는 것은 사실상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2일
우리는 하나님의 건축물인 교회를 고려할 때, 기초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에베소서 2장 20절에서 언급하는 기초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스도는 유일한 기초이시다(고전 3:11). 그런데도 에베소서 2장 20절은 사도들과 신언자들의 기초에 대하여 말한다. 사도들이라는 사람들이 기초라고 말하는 요한계시록 21장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서의 기초는 사도들과 신언자들 자신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가 사도들에게 계시되었기 때문에(엡 3:4-5), 사도들이 받은 계시는 교회가 건축되는 기초로 여겨진다. 이것은 마태복음 16장 18절에 있는 반석과 일치하는데, 이 반석은 그리스도 자신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이며, 그리스도는 이 계시 위에 그분의 교회를 건축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신언자들의 기초는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그들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하여 받은 계시이다. 교회는 이 계시 위에 건축된다.
우리는 사도들과 신언자들이 받은 계시 위에 교회를 건축해야 한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회복 안에 있는 교회들이 사도들과 신언자들의 기초 위에 건축되었다고 강하게 확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교회들이 사도들과 신언자들이 받은 계시에 따라 건축되었음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2장 20절은 하나님의 건축물에서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심을 계시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기초(사 28:16)가 아닌 모퉁이 돌로 언급되신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로 관심하는 것은 기초가 아니라 모퉁이 돌이기 때문이다. 이 모퉁이 돌은 주된 두 벽, 곧 유대인 믿는 이들이라는 벽과 이방인 믿는 이들이라는 벽을 함께 연결해 준다.
유대인 건축자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해 그들과 이방인을 연결하는 모퉁이 돌(행 4:11, 벧전 2:7)이신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이다.
마태복음 21장 42절에서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그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연결하는 모퉁이 돌이 되실 것을 계시하셨다. 사도행전 4장 11절과 12절에서 베드로가 한 말은 구원에 건축이 함축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를 하늘나라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유대인과 연결하셔서 그분의 건축물을 얻으시는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연결되기 위해 구원받았다.
신언노트, 2022 09 25
주님 안에 있는 성전으로 자람
주님 안에 있는 한 성전 안으로 자람
로마서에
계시되어 있듯이,
죄인들인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것과
의롭다 하시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죽은 이들인
우리에게는
살아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죄들이 용서받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려,
그분의 은혜를 누리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한다.
또 한편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살아 있는 지체들이 되어
그분을 표현한다.
하나님은
생명의 영을 통하여,
그리스도 자신인
그분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의 죽은 영 안에
분배하심으로써
우리를 살리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살리셨을 때,
우리도 함께 살리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이다.
에베소서 2장 5절에서
‘은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우리 안으로
거저 분배되신
하나님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거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가리킨다.
이러한 은혜로
우리는
비참한 죽음의 위치에서
놀라운 생명의 영역 안으로
구원받았다.
위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체험적으로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간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구원받는 것이다.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아버지는
생명의 근원으로서
우리가
그분의 아들들이 되도록
거듭나게 하셨다.
우리는
그 하나의 몸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가서 직접
그분을 접촉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체험이다.
우리는
위치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으로써
구원받았고,
체험적으로
아버지께 나아감으로써
누림을 얻는다.
에베소서 2장 18절에는
신격의 삼일성이
함축되어 있다.
성취하시는 분이시요
수단이신
아들 하나님을 통하여,
집행하시는 분이시요
적용이신
영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기원이신 분이시요
우리 누림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후에,
계속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아버지께 나아가
누리는 것이 필요했다.
몸 안에 있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 영 안에 있는 것은
하나의 체험이다.
우리는
몸 안에 있으면서도
그 영 안에 있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의 방황하는
생각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에 있어서
우리는
몸 안에 있음으로써
하나님을 얻었지만,
체험에 있어서
아버지를 누리려면 반드시
그 영 안에 있어야 한다.
한때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위치적으로
우리는
그분과 화목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어떠한 분리나 구분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영 안에 있지 않을 때,
이 사실은
우리의 누림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위치적으로 소유한 것을
체험적으로 누리려면,
반드시 그 영 안에
있어야 한다.
에베소서 2장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스도를 아들로
계시한다.
죽고 부활하신 후에
아들 그리스도는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그 영으로 오셨다.
그 영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아들의 이름으로 오셨다.
이것은
그 영께서 오셨을 때
아들께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들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실 때
그 영 또한 오신다.
우리가
아들의 전하심 안에서
아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 영을 받는다.
그럴 때
그 영은
우리를
아들을 통해 다시
아버지께로 이끄신다.
이것은 놀랍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그 영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고,
이제 그 영은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아버지께로 이끄신다.
이 놀라운 양방 통행을 통하여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분배를 누린다.
우리는
하나님의 건축물인
교회를 고려할 때,
기초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에베소서 2장 20절에서 언급하는
기초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스도는
유일한 기초이시다.
그런데도 에베소서 2장 20절은
사도들과 신언자들의 기초에 대하여 말한다.
사도들이라는 사람들이
기초라고 말하는
요한계시록 21장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서의 기초는
사도들과 신언자들 자신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가
사도들에게 계시되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받은 계시는
교회가 건축되는
기초로 여겨진다.
이것은
마태복음 16장 18절에 있는
반석과 일치하는데,
이 반석은
그리스도 자신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이며,
그리스도는
이 계시 위에
그분의 교회를
건축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신언자들의 기초는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그들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하여
받은 계시이다.
교회는
이 계시 위에 건축된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회복 안에 있는 교회들이
사도들과 신언자들의 기초 위에
건축되었다고
강하게 확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교회들이
사도들과 신언자들이 받은
계시에 따라 건축되었음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2장 20절은
하나님의 건축물에서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심을
계시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기초가 아닌
모퉁이 돌로 언급되신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로 관심하는 것은
기초가 아니라
모퉁이 돌이기 때문이다.
이 모퉁이 돌은
주된 두 벽,
곧 유대인 믿는 이들이라는 벽과
이방인 믿는 이들이라는 벽을
함께 연결해 준다.
유대인 건축자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해
그들과 이방인을 연결하는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이다.
마태복음 21장 42절에서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그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연결하는
모퉁이 돌이 되실 것을
계시하셨다.
사도행전 4장
11절과 12절에서
베드로가 한 말은
구원에
건축이 함축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를
그 하늘들 안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그 유대인에게 연결시키셔서
그분께서
그분의 건축물을
가지시는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든 또는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연결되기 위해
우리가 구원받았다.
에베소서 2장 21절에서
우리는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 믿는 이들과
이방인 믿는 이들을 포함하는
건축물 전체가
함께 연결되어
성전으로 자라 가고 있음을
본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실지적인 건축은
믿는 이들의
생명이 성장함으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교회는
자라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자라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 안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며
신성한 생명,
영적인 생명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꼭 맞게 되어(연결되어)’라는 말은
건축물의 상태와 상황에
알맞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거듭났고,
하나님의 집으로서
교회는
건축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장과 건축이
분리된 것이지만,
사실상 집의 건축은
몸의 성장이다.
몸이 자라지 않는다면
집은 건축될 수 없다.
우리는 종종
성경에서
성장과 건축이
함께 연결된 것을
본다.
고린도전서 3장 9절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경작지이며,
하나님의 건축물입니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경작지로서
우리는
자라야 하고,
하나님의 건축물로서
우리는
건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은
우리의 몸이 자람으로써
충만한 신장에(완전한 키에)
이르는 것처럼,
이 영적인 집
곧 이 하나님의 거처는
자람으로써 건축된다고
말한다.
더욱이 베드로전서 2장은
우리가
구원받고
죄들을 버렸다면
영적인 젖을 사모함으로써
자라야 한다고
말하고,
그런 다음에 계속해서
우리가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있다고
말한다.
에베소서 4장
12절과 13절은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 충분히 성장한 사람에
이르게 … 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랄수록
더욱더 건축된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라심과
섞이심이(연합하심이)
하나님의 건축물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심으로써
자라게 하신다.
몸의 성장은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자라시고
더해지시며
증가하시는 것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매우 주관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
우리는 매일
주님을 흡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그리스도의 풍성을 동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접촉할 때
서둘러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서두른다면,
그분의 풍성을
많이 흡수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정해 두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풍성을
더 많이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셨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영이시며,
우리에게는
그분을 흡수할 수 있는
한 영이 있다.
이처럼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물면서
그분을 흡수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시간을 들여야 한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풍성을 흡수하는 것을
체험하기는 했지만,
아직
충분히 체험한 것은 아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지 말고,
영 안에서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아주 좋아하고, 깊이 흠모하고,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분께 감사드리고
자유롭게 그분께 말씀드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
이런 식으로
주님과 교통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풍성을
흡수하게 될 것이고,
주님은
우리 안으로
그분 자신을
더 많이 더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더 많이 더해지실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더 많이 자라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방법이다.
오직 하나님만
자라게 하실 수 있다.
나의 사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심거나
물 주는 것이다.
나는
누구도
자라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
그분 자신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음식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식탁에서
하나님을 찾아야(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식탁에서
우리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하나님을 먹어야 한다.
그럴 때 그분은
더 많이
우리 안으로
더해지실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더해지시는 것이 바로
그분께서 자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는 것은 사실상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축물 전체가
성전으로
자라 가고 있다.
‘성전’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성소,
즉 성전의 내부를
의미한다.
주님 안에서
건축물이
성전으로 자라 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소인
하나님의 집이라는
건축물 전체가
주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성전이
지금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우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건축물 전체’라는 표현은
우주적인 건축물을
가리킨다.
우주적인 건축물은
지금도 자라고 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언급된
교회의 건축이 바로
에베소서 2장 21절에 나오는
건축물이다.
비록 건축물이 자라는 것이
느리고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이 일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거룩하게 되려면,
첫째로는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되어야 하고,
둘째로는
하나님께 넘겨져야 하며,
셋째로는
하나님께서 소유하셔야 하고,
넷째로는
하나님으로 적셔지고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
마침내 성경에는
거룩하게 됨의 결과인
새 예루살렘이 있는데,
새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라 불린다.
이 성은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을 위한
성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소유하시며
하나님으로 적셔지고
하나님과 하나인
성이다.
거룩하게 되려면,
우리는 첫째로
위치에 있어서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았지만
분별되지 않았다.
정상적이라면,
구원받을 때 또한
분별된다.
이러한 이유로,
믿는 이를
성도라고 부른다.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거의 세상 사람들과 같다.
심지어 그들의 친척이나 친구 중에
많은 이들이
그들이 그리스도인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위치의 문제이다.
이제 우리는
기질에 있어서
거룩하게 되는 것에 왔다.
기질에 있어서
거룩하게 되는 것은
의롭게 됨 뒤에 온다.
이것은 단지
우리의 위치만이 아니라,
우리의 기질에 있어서도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위치에 있어서 거룩하게 되는 것보다
더 깊고
주관적이다.
분별되는 것은
다소 쉽게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기질에 있어서
적셔지는 것은
긴 시간이 걸린다.
우리가
주님께 신실하다면,
날마다
하나님의 본성으로
적셔질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 자신으로
적시고자 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존재 안으로
흡수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게 되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으로
흠뻑 적시시려고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존재 안으로
그분 자신을
일해 넣기를
원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될 것이다.
나는 오십여 년 이상
이러한 과정에 있었고,
지금도
이러한 과정에 있으면서
날마다
하나님을 흡수하고 있다.
때때로 나의 아내나 형제자매들은
내가 그분을 흡수하는 것을
돕는다.
심지어 내가
자신 안에서는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을 때에도,
그들은
내가
그분을 흡수하는 것을
원하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님은
나를
그분 자신으로 적시시고,
내가
그분을 흡수하게 하신다.
우리 가운데
오랫동안 기독교 안에 있었던
많은 사람이
기독교에 있었을 때는
이러한 적심을
아주 많이 체험하지 못했음을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생활 안으로 들어온 때부터
점점 더
하나님으로
적셔지고 있다.
교회생활은
하나님을 흡수하는 생활이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신성한 요소로
적셔지고 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되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으로 적셔진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 된다.
어느 날 우리는
그분과 똑같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이
완성되었다는
표시일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과정은
분별됨으로
시작하여
적셔짐으로
계속되며
우리 몸의 완전한 구속으로
완성된다.
그때 우리는
안팎으로
그분과 똑같게 될 것이다.
우리는
거룩하게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하나님의 건축물인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이 성전 안에 거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의
‘하나님의 성전’은
어떤 지방에 있는
믿는 이들을
단체적으로 가리키며,
17절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은
우주적으로
모든 믿는 이를
가리킨다.
우주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영적인 성전은
땅 위에 있는
많은 지방에서 표현된다.
각각의 표현은
그 지방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요한계시록 21장 22절은
새 예루살렘 안에는
성전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그 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장막은
하나님의 성전의
전신(前身) 또는 전조였다.
하나님의 장막인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될 것이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성으로 확대되리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 성의 세 치수인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것은
성 전체가
지성소, 곧 안쪽 성전이
되리라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안에는
성전이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 22절의
‘성전’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나오스(naos)’는
안쪽 성전인
지성소를 의미한다.
이 안쪽 성전은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과 어린양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장막인
거룩한 성은
하나님께서
거주하시기 위한 곳이고,
성전이신
하나님과 어린양은
우리가
거주하기 위한 분이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은
영원토록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위한
상호 거처가 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성 전체는
지성소이며,
하나님과 어린양은
이 성의 성전이시다.
이 두 중점을
함께 둘 때,
우리는
이 성이
하나님과 어린양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 전체가
지성소이고
안쪽 성전이
하나님과 어린양이기 때문에,
그 성은
하나님과 어린양이다.
성 전체는
장막이라 불린다.
장막, 곧 성막은
성전의 전신이다.
성전이 나타나기 전에
성막이 있다.
그러나 성막이
그 충만에 이를 때,
성막은
성전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 전체가
지성소이고,
성전은
하나님 자신과 어린양이며,
성 전체가
장막이라는
세 중점을
우리 앞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이 모든 중점을
함께 둘 때,
하나님 자신께서
새 예루살렘성 전체이심을
본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성 전체는 또한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모든 사람으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구성체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그 성 전체이시며,
다른 한편으로
그 도시는
구속받은 이들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구성체이다.
만일 여러분이
타고난 생각으로
이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면,
이렇게 질문하겠다.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않는가?
또한 교회가
모든 믿는 이들로 이루어진
구성체라고
말하지 않는가?”
한편으로 교회는
모든 믿는 이들로 이루어진
구성체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는
머리와 몸 둘 다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몸-그리스도’라는
용어가 있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은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실 뿐 아니라
또한 몸이심을
말한다.
교회와 새 예루살렘 모두가
원칙에 있어서 동일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확대이다.
그리스도 자신은
개인적인 그리스도이시지만,
교회는
단체적인 그리스도,
곧 확대되시고 확장되신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확장이며
그리스도의 확대이다.
마찬가지로 새 예루살렘은
삼일 하나님의 확대이며 확장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일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과 어린양일 것이다.
오늘날 교회 또한
원칙에 있어서 동일하다.
한편으로 우리는
교회이며,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이다.
사실상 에베소서 2장 21절의
‘성전’이라는 단어는
주님 안에 있는
성전의 중심 부분을 의미하는
성소(sanctuary)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한 성소는
우리의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이다.
오늘날 교회생활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여러분이 영 안에 있지 않다면,
집회 안에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실지적인 면에서
교회 안에 있지 않다.
교회생활은
우리 사람의 영 안에 있다.
우리는 항상
영으로 돌이키고,
영을 사용하며,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영에서 나와서도 안 되고
영을 떠나 처신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 안에서
행하고
살며
행동하고
처신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영을 훈련할 때,
우리는
교회 안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생명으로
분배하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분배와
우리의 자람은
모두 영 안에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22절에서
한 지방의 성도들을 가리키는
‘여러분’이라는 단어는,
21절에 있는 건축물은
우주적인 것이고
22절에 있는 건축물은
지방적인 것임을
나타낸다.
이 절에서
바울은
그 지방에 있는 성도들,
곧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건축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절들에서
바울은
교회의
우주적인 방면과
지방적인 방면을
모두 다루고 있다.
건축물 전체가
자라 가고 있다는 것은
우주적인 방면을 가리킨다.
특정 지방에 있는 성도들이
함께 건축되고 있다는 것은
지방적인 방면이다.
왜 바울은
우주적인 방면을 언급할 때는
‘성전’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지방적인 방면을 말할 때는
‘하나님의 거처’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우주적인 성전 외에는
지방에 있는 성전이라고 불리는
다른 성전이 없다.
성전과 거처는
동일한 것의 두 방면을
가리킨다.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분의 신탁의 말씀을 듣는 곳이다.
거처는
안식의 장소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거처에서 안식하신다.
그러나 성전과 거처는
구별된 두 장소가 아니다.
그보다 성전과 거처는
동일한 건축물의
두 방면,
곧 두 기능
혹은 두 용도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장소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장소이다.
각지에 있는
모든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의 일부이며,
우주적인 교회에 더해진 것이나
우주적인 교회에서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각지에 있는 모든 교회를
함께 더한 것은
우주적인 교회와 같다.
이것은
각지에 있는 교회들 없이
우주적인 교회가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각 지방에 있는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우주적인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다.
각지에 있는 모든 교회에는
오직 하나의 건축물만 있다.
애너하임에 있는 교회에
하나의 건축물이 있고,
시카고에 있는 교회에
또 다른 건축물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건축물에 대하여
우리는
각 지방에
다른 건축물이 있다는
타고난 관념을 갖고 있다.
이 우주 안에는
우주적인 방면과
지방적인 방면을 지닌
단 하나의 건축물만 있다.
이 땅에
아무리 많은 교회가 있다고 해도,
이 두 방면을 지닌
오직 한 건축물만
있을 뿐이다.
에베소서 2장 22절은
우리가
영 안에서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건축되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의 영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믿는 이들의 영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영은
거하시는 분을 가리키며
거처를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처는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에베소서 2장 21절에서는
성전이
주님 안에 있다고 말하고,
22절에서는
하나님의 거처가
영 안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영과 하나이시며,
또한 우리의 영이
주님과 하나라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의 영 안에 있는 것은 사실상
주님 안에 있는 것이다.
또한 주님 안에 있는 것은
영 안에 있는 것이다.
주님께 결합되는 그는
한 영이다.
우리는 참으로
우리의 영을
주님에게서 분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은
교회가 건축되는 곳이다.
건축은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혼이나
마음 안에
있지 않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영 안에 있다.
1일
로마서에 계시되어 있듯이, 죄인들인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것과 의롭다 하시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죽은 이들인 우리에게는 살아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죄들이 용서받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려, 그분의 은혜를 누리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한다. 또 한편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살아 있는 지체들이 되어 그분을 표현한다. 하나님은 생명의 영(롬 8:2)을 통하여, 그리스도 자신(골 3:4)인 그분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의 죽은 영 안에 분배하심으로써 우리를 살리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살리셨을 때, 우리도 함께 살리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이다.
에베소서 2장 5절에서 ‘은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우리 안으로 거저 분배되신 하나님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거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가리킨다. 이러한 은혜로 우리는 비참한 죽음의 위치에서 놀라운 생명의 영역 안으로 구원받았다.
위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체험적으로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간다(엡 2:18).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구원받는 것이다.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아버지는 생명의 근원으로서 우리가 그분의 아들들이 되도록 거듭나게 하셨다.
우리는 한 몸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가서 직접 그분을 접촉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체험이다. 우리는 위치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으로써 구원받았고, 체험적으로 아버지께 나아감으로써 누림을 얻는다.
에베소서 2장 18절에는 신격의 삼일성이 함축되어 있다. 성취하시는 분이시요 수단이신 아들 하나님을 통하여, 집행하시는 분이시요 적용이신 영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기원이신 분이시요 우리 누림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후에, 계속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아버지께 나아가 누리는 것이 필요했다. 몸 안에 있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 영 안에 있는 것은 하나의 체험이다. 우리는 몸 안에 있으면서도 그 영 안에 있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의 방황하는 생각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에 있어서 우리는 몸 안에 있음으로써 하나님을 얻었지만, 체험에 있어서 아버지를 누리려면 반드시 그 영 안에 있어야 한다. 한때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위치적으로 우리는 그분과 화목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어떠한 분리나 구분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영 안에 있지 않을 때, 이 사실은 우리의 누림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위치적으로 소유한 것을 체험적으로 누리려면, 반드시 그 영 안에 있어야 한다.
에베소서 2장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스도를 아들로 계시한다. 죽고 부활하신 후에 아들 그리스도는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그 영으로 오셨다. 그 영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요 15:26과 각주 1) 아들의 이름으로 오셨다(14:26). 이것은 그 영께서 오셨을 때 아들께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들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실 때 그 영 또한 오신다. 우리가 아들의 전하심 안에서 아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 영을 받는다. 그럴 때 그 영은 우리를 아들을 통해 다시 아버지께로 이끄신다. 이것은 놀랍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그 영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고, 이제 그 영은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아버지께로 이끄신다. 이 놀라운 양방 통행을 통하여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분배를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