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나고 서로에 대한 여러분 각 사람의 사랑도 증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칭찬했다 ― 살후 1:3.
주님을 믿는 것은 생명이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받아들인 바로 그 인격을 누리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랑은 이렇게 놀라운 믿음에서 나오고,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의 모든 풍성을 살아 낼 수 있게 된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은혜가 ‘더욱더 넘쳐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을 가지게 되었다’(딤전 1:14).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주님을 받아들이고(요 1:12), 사랑을 통하여 우리가 받아들인 주님을 누린다.
우리는 이 놀라운 믿음 안에서 또한 삼일 하나님의 이 지극히 탁월한 사랑으로 그분과 그분께 속한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오직 이 방법으로만 우리는 교회 타락의 흐름 가운데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주님께서 부르시고 얻기를 갈망하시는 이기는 이들이 될 수 있다.
주님의 회복은 첫째가는 사랑 곧 제일 좋은 사랑으로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을 건축하기 위한 것, 즉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목표인 새 예루살렘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그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교회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향한 첫째가는 사랑을 버리게 될 때, 교회의 타락이 시작된다. 첫째가는 사랑 곧 제일 좋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것에서 주님께 으뜸의 위치 곧 첫째 위치를 드리며, 그분의 사랑에 강권되어 우리의 생활에서 그분을 모든 것으로 여기고 취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을 때 받아들인 바로 그 생명은 인격이며, 이 인격을 적용하고 누리는 유일한 길은 첫째가는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신 주 예수님께서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이 순간 그리고 날마다 그분을 새롭게 접촉하여 그분의 현재의 임재를 누려야 한다.
우리는 홍수와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잠기고 떠밀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신성한 사랑은 분명 우리를 향해 밀려오는 큰 파도와 같아서, 우리를 강권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살게 하고 우리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만큼 극도로 그분을 사랑하게 한다.
우리가 주님을 극도로 사랑하려면 일평생에 하나님의 집에 거주하며, 그분의 아름다움(사랑스러움, 즐거움, 유쾌함)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분께 여쭙기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여쭙는 것은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점검받는 것이다.
동역자들과 장로들과 책임 형제들과 활력 그룹의 모든 사람 사이에 사랑이 편만해야 한다.
우리는 거듭나 하나님 종(種) 곧 하나님의 종류가 되었으며(요 1:12-13),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16). 우리가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므로, 우리는 또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되어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그분의 사랑을 우리 안에 주입하시고, 또 우리 안에 사랑을 산출하셨다. 우리는 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한다(요일 4:19-21).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인 그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습관적으로 사랑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표현되시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야심과 교만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오랫동안 주님의 손안에서 유용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축복을 가져올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순수한지에 달려 있다.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서 의도와 목적과 동기와 행동에 어떤 형태의 교묘한 야심도 없도록 정결하게 된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교만은 파멸을 의미하며, 교만한 것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겸손은 우리를 온갖 종류의 파멸에서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한다.
우리는 결코 주님을 위한 어떤 일에서도 으뜸이 되기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요삼 9). 주님의 일에서 경쟁하는 것은 야심의 표시일 뿐 아니라 교만의 표시이다. 자신의 역량, 성공, 온전함, 미덕을 언급하는 것은 교만의 경솔한 모습이다.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 이상으로 자신을 더 높게 생각하는 것은 교만의 또 다른 모습이다(롬 12:3).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높이며,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고, 자신의 뜻을 좇으며,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신의 의를 세우며, 헛된 영광을 탐내는 것은 모두 교만의 추악하고 비열한 표현이다.
크게 되기를 원하고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으뜸이 되기를 원하고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 또한 교만의 표시이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에 대해 친밀한 관심을 가지며, 서로 소중히 보살피고 보양하며, 항상 서로 덮어 주고, 서로에 대해 좋게 말해야 하며, 결코 다른 사람의 실패나 결점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서로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한 면으로는 강한 분별력을 지니고 우리가 돌보는 사람들을 살피는 분명한 안목이 있어야 하고, 또 한 면으로는 영적으로 눈멀어야 한다.
우리는 비방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비방하는 것은 심하게 혹은 지나치게 꾸짖거나 비평하는 것이다. 비방하는 것은 어떤 사람을 더러운 말로 비난하는 것이다. 비방하는 것은 단지 어떤 사람을 꾸짖는 것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오만한 나머지 그를 대놓고 무례하게 대하거나 경멸함으로써 그에게 심한 상처를 주고 그를 짓밟는 것이다.
비방하는 사람들은 동료 노예들을 때리는 이들이다. 이것은 그들이 동료 믿는 이들을 습관적으로 학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비방하는 말을 수용하는 사람도 비방하는 말을 하는 사람과 같은 책임이 있다. 교회가 하나를 유지하려면 형제자매들은 반드시 비방하는 말들을 이겨 내야 한다.
죄에 대한 의식은 하나님을 아는 데서 온다. 마찬가지로 비방하는 말들에 대한 의식은 몸을 아는 데서 온다. 비방하는 말들은 몸의 증거에 반대된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하든 가장 뛰어난 길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묘사한 사랑은 신성한 사랑에 대한 표현이다(고전 13:4-8상). 더 나아가 사랑이 그 영의 열매라는 사실은 사랑의 실질이 틀림없이 그 영임을 가리킨다(갈 5:22). 우리에게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하는 말은 생명이 없이 소리만 내는 울리는 징과 큰 소리 나는 제금과 같게 된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남의 잘못을 마음에 두지 않고,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견디고, 모든 것보다 오래 남아 있으며, 가장 큰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하나님처럼 어떠한 차별도 없이 사랑해야 한다(마 5:43-48).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가장 먼저 구원하신 사람은 신사가 아니라 사형 선고를 받은 범죄자인 강도였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
생명의 영의 법은 사랑의 법인 그리스도의 법이다.
사랑의 법은 우리가 서로의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도록 생명의 영의 법으로 말미암아 구체화되어야 한다(갈 6:2, 롬 8:2). 그러나 우리에게 교만이 가득하다면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져 줄 수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면서도 무엇이 된 줄로 생각하며 자신을 속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법이 우리 안에서 작용할 때, 우리는 자동적이고도 자연스럽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며 용서하는 마음과 우리 구주 그리스도의 목양하며 찾는 영을 가진 목자들이 될 것이다.
사랑의 법이 우리 안에서 작용할 때,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는 수고는 사랑의 수고이다(고전 15:58, 살전 1:3). 우리는 사랑의 수고를 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행 20:35) ‘연약한 사람들을 붙들어 준다’(살전 5:14). ‘연약한 사람들’은 영이나 혼이나 몸이 연약하든지, 아니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교회생활은 형제 사랑의 생활이며, 몸은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된다.
“지식은 교만에 빠지게 하지만, 사랑은 건축합니다.” 우리는 사역의 메시지들을 듣고 단지 지식만을 얻어 교만에 빠질 수도 있다 ― 고전 8:1하, 고후 3:6.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거듭난 영은 사랑의 영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의 타락을 정복하기 위하여 불타는 사랑의 영이 필요하다.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의 가지들로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여 열매를 맺어 신성한 생명을 표현해야 한다.
목양에 관한 장인 요한복음 21장은 요한복음의 완성과 완결이다. 부활 이후에 주님은 베드로를 목양하셨고, 그에게 그분의 어린양들을 먹이고 그분의 양들을 목양하는 위임을 주셨다. 이것은 사도들의 사역을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과 합병시켜 하나님의 양 떼인 교회를 돌보게 하려는 것이며, 이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러한 위임에 너무나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믿는 이들에게, 그들이 전에는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하였으나 이제는 그들의 혼의 목자이시며 감독이신 분(그리스도)께로 돌아왔다고 말한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하라고 권유한다. 이렇게 목양한다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 그들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벧전 5:1-4). 베드로의 말은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이 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귀결되는 하나님의 양 떼인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과 합병된 사도들의 사역의 주된 목적과 목표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도록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이다.
시편 22편부터 24편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부터 오는 시대의 그분의 왕권까지를 계시해 주는 한 부류의 시들이다. 시편 22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그분의 부활, 그리고 그분의 부활 안에서 많은 형제들이 산출되어 교회가 형성되는 것을 본다. 시편 23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목자이신 것을 본다. 시편 24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장차 오실 왕이신 것을 본다.
이 세 시편은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과 장차 그분께서 그분의 왕국 안에서 왕으로서 다시 오시는 것 사이에,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를 공기 같은 영이신 목자로서 누리고 체험하며 표현하는 것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목양이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과 두 번째 오심을 연결하는 다리라는 것을 계시한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하늘에서의 사역 안에서 지금 사람들을 목양하고 계신다. 또한 우리가 그분의 놀라운 목양에 참여한다면, 주님의 회복 안에 그리스도를 다시 모셔 올 큰 부흥, 새로운 부흥이 있을 것이다.
교회들을 돌보고 성도들을 목양하는 데 필요한 것은 공급하는 생명에서 나오는 친밀한 관심이다.
성도들을 목양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죽일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죽이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친밀한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젖, 곧 그리스도의 생명 공급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믿는 이들을 양육하는 데 사용되어야지 ‘삶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 벧전 2:2, 출 23:19하.
우리에게 일을 수행할 재능은 있지만 친밀한 관심이 부족하다면, 우리의 일은 열매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반드시 넓어져서, 상태가 어떠하든지 모든 믿는 이들을 포용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열매를 잘 맺고 많이 맺는가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친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공급하는 생명은 다른 사람들을 따뜻하게 하는 생명이다. 우리가 성도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려면 반드시 그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 즉 다정다감하고 깊고 친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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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시편 22편부터 24편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부터 오는 시대의 그분의 왕권까지를 계시해 주는 한 부류의 시들이다. 시편 22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그분의 부활, 그리고 그분의 부활 안에서 많은 형제들이 산출되어 교회가 형성되는 것을 본다. 시편 23편은 그리스도께서 목자이신 것에 관한 시편이다. 오늘날 이 목자는 부활 안에 계신다. 시편 24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장차 오실 왕이신 것에 관한 시편이다. 이 세 시편들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 교회를 산출하시는 그리스도, 목자이시며 자신의 양 떼를 목양하시는 그리스도, 그리고 장차 오셔서 왕이 되실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고린도후서 7장 2절부터 16절까지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공급하는 생명에서 나오는 친밀한 관심이다. 주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수준에 이르기를 갈망하는 모든 믿는 이들은 새 언약의 사역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런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건축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사람이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의 목표는 이렇게 모든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을 회복함으로써 교회가 건축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에베소서 4장에 있는 바울의 말에 근거한 것인데, 이 장에서 바울은 사도들과 신언자들과 복음 전파자들과 목자들 및 교사들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함으로써 성도들이 그 사역의 일을 하는 것,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모두가 교회를 건축하는 이들이 되고,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공급하려면, 우리에게는 공급하는 생명, … 즉 교회를 위해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생명이 필요하다.
고린도후서에서 우리가 보는 공급하는 생명은 열매 맺는 생명이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영적이고 거룩하며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시는데, 심지어 열매를 많이 맺고 남아 있는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이 공급하는 생명을 사는 것이다.
성도들을 목양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죽일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죽이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친밀한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가정을 방문하여 목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관심이 조금도 없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우리의 동기는 우리의 지식과 영성과 은사와 능력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는 죽이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을 수행할 재능은 있지만 친밀한 관심이 부족하다면, 우리의 일은 열매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열매를 잘 맺고 많이 맺는가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친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바울은 생명을 공급할 때 매우 인간적이며 다정다감했다. 바울은 그의 관심이 매우 깊고 친밀했기 때문에 매우 다정다감했다. 우리에게 이러한 관심이 없다면, 우리의 기쁨은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결코 더욱 넘치게 될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서리처럼 차갑게 될 것이고, 성도들을 향한 우리의 관심은 전적으로 부족해질 것이다. 또한 다른 이들을 따뜻하게 하기보다는 훨씬 더 차갑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얼어붙은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생명을 녹여 주고 따뜻하게 해 주는 봄 날씨가 필요하다. 다시 한번 여기에 공급하는 생명에 대한 필요가 있다. 공급하는 생명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따뜻하게 하는 생명이다. 다른 이들을 따뜻하게 해 주기를 배우라. 이것이 바로 다른 이들을 향하여 친밀한 관심을 갖는 것이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향한 이러한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내가 성도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려면 반드시 그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 즉 다정다감하고 깊고 친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는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남들이 보기에 내가 어리석거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오직 공급하는 생명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열매는 공급하는 생명의 결과이다.
5일
요한복음 전체는 그리스도의 땅에서의 사역을 다루는데, 그분의 육체 되심 곧 하나님의 말씀께서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되심으로 시작하여(1:1-14), 그분의 부활 곧 마지막 아담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심으로 마친다(20장). 따라서 21장은 분명 부록이다. 비록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21장이 요한복음의 완성과 완결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내재적이다. 21장이 없다면 요한복음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과 사도들의 땅에서의 사역이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 함께 협력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 요한복음 전체를 완결한다.
요한복음 10장 10절과 11절과 16절에서 주님은 그분께서 양들이 생명을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오신 선한 목자이시며, 그분께 있는 다른 양들(이방인 믿는 이들)을 그 양들(유대인 믿는 이들)과 연결되도록 이끄셔서 한 목자 아래 있는 한 양 떼(한 교회)가 되게 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혀 주셨다.
첫째로, 주님의 목양은 그분의 땅에서의 사역 안에 있었다(마 9:36). 주님은 양들인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시달리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이 내버려졌다. 하나님의 선민의 목자이신 주님은 기도하셨고, 하나님은 그분께서 보내신 분에게 하나님의 양들을 돌보도록 열두 사도를 세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0:1-6).
둘째로, 주님의 목양은 그분의 하늘에서의 사역 안에 있는데(벧전 5:4),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귀결되는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기 위한 것이다. 그분은 땅에 계실 때 목양하고 계셨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에도 여전히 목양하고 계신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부터 승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과 함께 머무실 때 여러 번 나타나셨는데, 한번은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그분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즉 하늘에 계시는 동안 그분의 어린양들을 먹이고 그분의 양들을 목양하도록 위임하셨다(요 21:15-17). 목양은 먹이는 것을 함축하고 있지만, 먹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목양하는 것은 모든 것을 포함한 부드러운 돌봄으로 양 떼를 돌보는 것이다.
목양하는 것은 사도들의 사역을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과 합병시켜 하나님의 양 떼인 교회를 돌보게 하려는 것이며, 이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성령께서 여러분을 온 양 떼의 감독들로 세우셨으니,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온 양 떼를 위해 스스로 조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 오신(또는 획득하신)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십시오.”라고 말했다.
히브리서 13장 20절에서 바울은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화평의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영원한 언약은 한 양 떼, 곧 몸으로 귀결되고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교회를 얻기 위한 언약 곧 신약이다.
베드로는 믿는 이들에게, 그들이 전에는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하였으나 이제는 그들의 혼의 목자이시며 감독이신 분(그리스도)께로 돌아왔다고 말한다(벧전 2:25).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양 떼를 목양하시는 것에는 외적인 것들뿐 아니라 내적 존재인 그들의 혼을 돌보시는 것도 포함된다. 그분은 우리의 내적 존재의 유익을 돌보시고 우리의 실제 인격인 우리 혼의 상태를 감독하심으로 우리를 목양하신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하라고 권유한다. 이렇게 목양한다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 그들, 곧 신실한 장로들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벧전 5:1-4).
베드로의 말은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이 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귀결되는 하나님의 양 떼인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4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하나님과 같아야 한다.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우리는 세리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더 높은 신성한 종(種)에 속하므로 선한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의 원수인 악한 사람들도 사랑한다. 이것은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기시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의 활력 그룹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가 차별 없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느 그리스도인 동역자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은행 강도와 같은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는 동안 두 강도가 그분과 함께 못 박혔다(마 27:38). 그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 주님의 왕국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눅 23:42)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진실로 그대에게 말합니다. 오늘 그대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43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가장 먼저 구원하신 사람은 신사가 아니라 사형 선고를 받은 범죄자인 강도였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은 성령에 의해 거듭나고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우리 사람의 영이다. 이 영은 사랑의 영이다. 따라서 그것은 능력의 영이고 맑은 생각의 영이다(딤후 1:7). 우리는 자신이 아주 능력이 있고 맑은 생각을 가졌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영은 사랑의 영이 아니다.
바울은 우리의 은사를 부채질하여 불타오르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딤후 1: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된 은사는 하나님의 영과 생명과 본성이 있는 거듭난 우리 사람의 영이다. 우리는 이 은사를 부채질하여 불타오르게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영을 분발시킴으로써 불타게 해야 함을 의미한다. 로마서 12장 11절은 우리가 영 안에서 불타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손상을 주는 불타는 권위의 영이 아닌 불타는 사랑의 영을 가져야 한다. 디모데후서에서 언급되는 것은 모두 교회의 타락을 마주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들이다. 오늘날 교회의 타락 가운데 우리 모두에게는 영 안에서 부채질되어 불타오르는 사랑의 영이 필요하다. 사랑은 이런 방식으로 이긴다.
우리에게는 오늘날의 교회의 하락을 이길 사랑의 영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에 항상 부채질되어 불타오르는 사랑의 영으로 말하고 행해야 한다. 이것이 회복에 필요하다.
고린도전서 12장의 마지막 절은 사랑이 가장 뛰어난 길이라는 것을 계시한다. 어떻게 장로가 될 수 있는가? 사랑이 가장 뛰어난 길이다. 어떻게 동역자가 될 수 있는가? 사랑이 가장 뛰어난 길이다. 어떻게 사람들을 목양하는가? 사랑이 가장 뛰어난 길이다. 사랑은 신언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가장 뛰어난 길이다. 사랑은 우리가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하든 가장 뛰어난 길이다.
사랑은 이긴다. 우리는 모든 사람,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동역자들과 장로들이 나쁜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은 할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온전해야 한다(마 5:48).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아들들이며 우리 아버지의 종(種)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온전해야 한다. 주 예수님은 자신이 건강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병든 사람들을 위해 의사로 왔다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은 “강건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합니다.”(마 9:12)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약한 사람들을 얻기 위하여 약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약하게 되었습니다.”(고전 9:22)라고 말했다. 이것이 사랑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은 약하지만 자신은 약하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덮어 주고 건축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무엇이 되든 무엇을 하든 가장 뛰어난 길이다.
3일
우리는 하나님 종(種)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요 1:12-13). 우리는 거듭나 하나님 종 곧 하나님의 종류가 되었으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므로, 우리는 또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종으로서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일 4:8, 19).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사랑이신 그분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1:26).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존재에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속성들에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그분의 속성들 중 첫 번째 속성이 사랑이다. 창조된 사람이 사랑의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창조된 사람의 존재 안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원하는 어떤 것이 있다. 심지어 타락한 사람 안에도 사랑하려는 갈망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신성한 속성의 표현인 인간 미덕일 뿐이다. 우리가 거듭났을 때, 하나님은 사랑이신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입하셨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사랑을 시작하셨다.
동역자나 장로의 책임을 이행하기 위해,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서 의도와 목적과 동기와 행동에 어떤 형태의 교묘한 야심도 없도록 정결하게 된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야심이 없이 겸손한 사람들만이 주님에 의해 사용될 수 있고, 주님에게서 은사들을 받을 수 있으며, 주님의 사역을 위임받을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주님을 위한 어떤 일에서도 으뜸이 되기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서 때때로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게 일정한 책임을 맡도록 안배할 필요가 있다. 책임이 맡겨지지 않은 사람들은 어조나 표현에서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침체되고 기분 나빠 한다. 이것은 바로 첫째가 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감추어진 야심의 교활한 일이다.
첫째로 우리는 야심을 주의해야 하고, 둘째로 교만을 주의해야 한다. 교만은 우리가 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타락한 본성의 한 속성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속성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도 우리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누가 교만하지 않은가? 자존심이 없는 사람은 누구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러나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교만한 데서 지켜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겸손이 모든 종류의 멸망에서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불러온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하나님은 교만한 이들을 대적하시나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약 4:6). 만일 우리가 겸손하다면 은혜가 오게 된다. 만일 우리가 교만하다면 은혜는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은혜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교만한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이가 되는 것이다.
주님의 일에서 경쟁하는 것은 야심의 표시일 뿐 아니라 교만의 표시이다. 우리는 자주 주님의 일에서 사람들과 경쟁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무익한 노예들임을 인정해야 한다(눅 17:10).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되며 또한 다른 이들과 경쟁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역량, 성공, 온전함, 미덕을 언급하는 것은 교만의 경솔한 모습이다. 그 대신에 항상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리라. “주님, 저에게는 조금도 역량이 없고, 당신의 일에서 조금도 성과가 없습니다. 더욱이 저에게는 조금도 완전함이 없습니다. 제가 가진 것은 불완전함뿐입니다. 또한 제게는 조금도 미덕이 없습니다. 제가 가진 것은 실패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교만해지는 것에서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 이상으로 자신을 더 높게 생각하는 것은 교만의 또 다른 모습이다(롬 12:3).
크게 되기를 원하고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으뜸이 되기를 원하고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 또한 교만의 표시이다(마 20:26-27).
게다가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높이며,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고, 헛된 영광을 탐내는 것은 모두 교만의 추악하고 비열한 표현임을 보아야 한다(갈 5:26).
2일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주목하지만, 에베소서 5장 25절은 주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을 본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를 교회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체험할 필요가 있다. 우리 역시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회복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고 또한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일에서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오,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시는지!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로서 우리 안에 계신다.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기꺼이 우리의 모든 것을 교회생활의 회복을 위해 드리게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종류의 종교를 이기라고 명령하신다. 또한 이 일곱 서신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몇몇 다른 문제들도 이기라고 명령하신다. 우리가 이기도록 명령받은 첫 번째 것은 첫째가는 사랑을 버리는 것, 곧 잃어버리는 것이다.
첫째가는 사랑을 가지는 것은 모든 일에서, 심지어 모든 사소한 일들에서도 주 예수님께 으뜸의 지위, 곧 첫째 위치를 드리는 것이다. 형제들은 넥타이를 살 때, 그리스도께 으뜸의 지위를 드려야 한다. 자매들은 물건을 사러 갈 때, 그리스도께 첫째 위치를 드려야 한다. 토요 신문이 나오면, 어떤 자매들은 신문을 읽고서 모든 백화점 할인 판매를 알아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러한 자매들이 주님께 으뜸의 지위를 드리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물건을 살 때 주님께서 첫째 위치를 가지시도록 허락해 드리지 않는다. 우리에게 무언가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상점에 가서 다른 것은 사지 말고 그것만 사야 한다. 자매들은 백화점의 유혹을 이길 필요가 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라고 말한다. 바울이 주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이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을 강권했기 때문이다(15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떠밀리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과 15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나타내신 사랑이 우리를 향해 밀려오는 큰 파도와 같아서, 우리를 강권하여 우리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만큼 그리스도를 향하여 살게 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강권되는 것은 큰 파도의 물에 떠밀리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큰 파도의 물처럼 강해서 우리를 정복하고 떠민다. 우리는 홍수와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잠겨야 한다. 우리는 선택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강권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저에게는 달리 갈 길이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저를 강권하므로 저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제가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홍수가 밀려올 때, 우리에게는 홍수를 받아들일 것인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할 여지가 없다. 홍수는 우리에게 선택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되어야 한다.
우리 가운데 있는 젊은 성도들은 그들이 오늘 주님을 사랑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항상 교차로에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는 선택하고 취할 수 있는 많은 방향이 있다. 그들에게 선택할 여지가 많이 있겠지만, 일단 그들이 홍수와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잠기게 되면 선택할 여지를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어떠함이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의해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인 영원한 생명에 의해 살아야 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큰 뜻을 품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홍수와 같은 그리스도의 강권하는 사랑에 잠기고 떠밀려야 하며, 겉모습이 아니라 영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내적인 분량에 의해 사물을 인식하고 분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권위와 유익을 대표하는 그리스도의 대사가 될 것이다.
신언노트, 2022 10 30
주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유기적으로 건축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하든
가장 뛰어난 길임
주님을 사랑함과
또 서로 사랑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유기적인 건축을 위하여
우리가 어떤 것이든 되고
또 어떤 것이든 하는
가장 뛰어난 길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주님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통하여
우리가 받아들인
주님을 누린다.
주관적인 믿음,
곧 우리의 믿는 행위는
우리를
주님과의 유기적인 연결 안으로
인도하며,
사랑을 통하여
작용한다.
주님께서
관심하시는 일에서
주님과 하나였던
성도들은
바로 이 믿음의
요소와 작용 안에서
고난받는
신실한 사도를
사랑한 것이다.
믿음과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이 지닌,
분리할 수 없는
두 가지 뛰어난 미덕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삼일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그분과
하나로 연결되며,
그분을
우리의
생명과
생명 공급과
모든 것으로
얻게 된다.
사랑은
이렇게 놀라운 믿음에서 나오고,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으로 들어간
이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의
모든 풍성을
살아 낼 수 있고,
삼일 하나님―아버지, 아들, 영―은
영광스럽게 표현되실 수 있다.
믿음은
삼일 하나님의
무한한 풍성을
감상하고
실질화하며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고,
사랑은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한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고
누리며
살아 내기 위한 것이다.
믿음은
믿는 이들에게
모든 것 되시는
삼일 하나님과
믿는 이들을
서로 연결하기 위한 것이며,
사랑은
믿는 이들이
동료 믿는 이들에게
삼일 하나님을
공급하고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놀랍고 강력한 믿음 안에서
모든 믿는 이는
신성하고 뛰어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단체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디도서는
놀라운 믿음과
지극히 탁월한 사랑으로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교회 타락의 흐름 가운데
우리가
효과적으로
굳게 서서
교회 안의
하락하는 경향과 요인을 이기려면,
이 놀라운 믿음과
지극히 탁월한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행하거나
밖의 상황을 주의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이 놀라운 믿음 안에서
믿음의 근원이신
삼일 하나님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이 믿음을 통하여
그분과 연결되었다.
또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이 지극히 탁월한 사랑으로
그분과
그분께 속한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오직 이 방법으로만
우리가
교회 타락의 흐름 가운데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주님께서
부르시고
얻기를 갈망하시는
이기는 이들이
될 수 있다.
이 놀라운 믿음과
지극히 탁월한 사랑은
우리와 연결되어
우리의 모든 것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삼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삼일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을 주목할 때,
삼일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주입하시어,
우리 안에서는
그분을 향한
믿음이 되시고,
우리 밖에서는
그분께 속한 이들을 향한
사랑이 되신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우리가 믿고 경배하며 받아들이는
삼일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실재요 표현이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연결되어
함께한다.
사랑은
믿음에서 나오고,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작용하며
일한다.
우리에게
믿음을 겸한
사랑이 있을 때,
부패하지 않는 가운데
우리의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에 대하여 가지신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이루는
이기는 교회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바로 이 사랑 안에서
주님의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이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기를 바란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주목하지만,
에베소서 5장 25절은
주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셨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을
본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를
교회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체험할 필요가 있다.
우리 역시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회복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고
또한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일에서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오,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시는지!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로서
우리 안에 계신다.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기꺼이
우리의 모든 것을
교회생활의 회복을 위해
드리게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종류의 종교를 이기라고
명령하신다.
또한 이 일곱 서신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몇몇 다른 문제들도 이기라고
명령하신다.
우리가 이기도록 명령받은
첫 번째 것은
첫째가는 사랑을
버리는 것,
곧 잃어버리는 것이다.
첫째가는 사랑을
가지는 것은
모든 일에서,
심지어 모든 사소한 일들에서도
주 예수님께
으뜸의 지위,
곧 첫째 위치를
드리는 것이다.
형제들이
넥타이를 살 때,
그리스도께
으뜸의 지위를
드려야 한다.
자매들이
물건을 사러 갈 때,
그리스도께
첫째 위치를
드려야 한다.
토요 신문이 나오면,
어떤 자매들은
신문을 읽고서
모든 백화점 할인 판매를
알아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러한 자매들이
주님께
으뜸의 지위를
드리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물건을 살 때
주님께서
첫째 위치를 가지시도록
허락해 드리지 않는다.
우리에게
무언가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상점에 가서
다른 것은 사지 말고
그것만 사야 한다.
자매들은
백화점의 유혹을 이길
필요가 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라고 말한다.
바울이
주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이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을 강권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떠밀리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과 15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나타내신
사랑이
우리를 향해 밀려오는
큰 파도와 같아서,
우리를 강권하여
우리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만큼
그리스도를 향하여 살게 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강권되는 것은
큰 파도의 물에
떠밀리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큰 파도의 물처럼 강해서
우리를
정복하고
떠민다.
우리는
홍수와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잠겨야 한다.
우리는
선택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강권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저에게는
달리 갈 길이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저를 강권하므로
저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제가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홍수가 밀려올 때,
우리에게는
홍수를
받아들일 것인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할 여지가 없다.
홍수는
우리에게
선택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되어야 한다.
우리 가운데 있는
젊은 성도들은
그들이 오늘
주님을 사랑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항상 교차로에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는
선택하고
취할 수 있는
많은 방향이 있다.
그들에게
선택할 여지가
많이 있겠지만,
일단 그들이
홍수와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잠기게 되면
선택할 여지를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어떠함이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의해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인
영원한 생명에 의해
살아야 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큰 뜻을 품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홍수와 같은
그리스도의 강권하는 사랑에
잠기고
떠밀려야 하며,
겉모습이 아니라
영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내적인 분량에 의해
사물을
인식하고
분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권위와 유익을 대표하는
그리스도의 대사가
될 것이다.
주님의 회복은
첫째가는 사랑
곧 제일 좋은 사랑으로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을
건축하기 위한 것,
즉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목표인
새 예루살렘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그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교회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향한
첫째가는 사랑을
버리게 될 때,
교회의 타락이 시작된다.
첫째가는 사랑
곧 제일 좋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것에서
주님께
으뜸의 위치
곧 첫째 위치를 드리며,
그분의 사랑에 강권되어
우리의 생활에서
그분을
모든 것으로
여기고
취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을 때 받아들인
바로 그 생명이
인격이며,
이 인격을
적용하고
누리는
유일한 길은
첫째가는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신
주 예수님께서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이 순간
그리고 날마다
그분을
새롭게 접촉하여
그분의 현재의 임재를
누려야 한다.
우리는
홍수와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잠기고
떠밀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신성한 사랑은 분명
우리를 향해 밀려오는
큰 파도와 같아서,
우리를 강권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살게 하고
우리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만큼
극도로 그분을 사랑하게 한다.
우리가
주님을
극도로 사랑하려면
일평생에
하나님의 집에 거주하며,
그분의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즐거움,
유쾌함)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분께 여쭙기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여쭙는 것은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점검받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종(種)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듭나
하나님 종
곧 하나님의 종류가 되었으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므로,
우리는 또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종으로서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사랑이신
그분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존재에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속성들에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그분의 속성들 중
첫 번째 속성이
사랑이다.
창조된 사람이
사랑의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창조된 사람의 존재 안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원하는
어떤 것이 있다.
심지어 타락한 사람 안에도
사랑하려는 갈망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신성한 속성의 표현인
인간 미덕일 뿐이다.
우리가 거듭났을 때,
하나님께서
사랑이신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입하셨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사랑을 시작하셨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되어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그분의 사랑을
우리 안에 주입하시고,
또 우리 안에
사랑을 산출하셨다.
우리는
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한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인 그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습관적으로 사랑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표현되시도록 하는 것이다.
동역자나 장로의
책임을 이행하기 위해,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서
의도와 목적과
동기와 행동에
어떤 형태의 교묘한 야심도 없도록
정결하게 된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야심이 없이
겸손한 사람들만이
주님에 의해
사용될 수 있고,
주님에게서
은사들을 받을 수 있으며,
주님의 사역을
위임받을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주님을 위한 어떤 일에서도
으뜸이 되기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서 때때로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게
일정한 책임을 맡도록
안배할 필요가 있다.
책임이 맡겨지지 않은 사람들은
어조나 표현에서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침체되고
기분 나빠 한다.
이것은 바로
첫째가 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감추어진 야심의 교활한 일이다.
첫째로 우리는
야심을 주의해야 하고,
둘째로
교만을 주의해야 한다.
교만은
우리가 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타락한 본성의
한 속성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속성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도
우리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누가
교만하지 않은가?
교만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든
어떤 것에 대해서도 좋지 않다.
주님의 일 안에서,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서
교만을 경계해야만 한다.
겸허함이
모든 종류의 파괴에서
여러분을 구원하고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를
초대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들을
물리치시지만
겸허한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만일 여러분이 겸허하다면
은혜가 온다.
만일 여러분이 교만하다면
은혜는 가버린다;
여러분이
은혜를 방해했다.
교만한 것은
최고의 바보인 것이다.
주님의 일에서
경쟁은
야심의 표시일 뿐 아니라
또한 교만의 표시이다.
우리는 자주
주님의 일에서
사람들과
경쟁 안에 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무익한(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종들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도
또는 경쟁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역량, 성공,
온전함, 미덕을
언급하는 것은
교만의
부주의한 한 형태이다.
대신에, 항상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리라.
“주님,
저에게는
어떤 역량이 없고,
당신의 일에서
어떤 성공도 없습니다.
더욱이, 저에게는
어떤 온전함이 없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은
불완전함(결함)입니다.
또한, 제게는
어떤 미덕이 없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은
실패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교만함으로부터
여러분을 지킬(보존할) 것이다.
한 사람이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보다
자신에 대해
더 높게 생각하는 것은
교만의 다른 형태이다.
크게 되기를
또 종이 되지 않기를
원하고,
또 그 첫번째가 되기를
또 노예가 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은
또한 교만의 한 표시이다.
게다가,
자신을 자랑함,
자신을 높임,
자신을 영광스럽게 함,
또 헛된 영광을 열망하는 것은
모두
교만의
추하고 비열한 표현들임을
우리가
반드시 보아야만 한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에 대해 친밀한 관심을 가지며,
서로 소중히 보살피고 보양하며,
항상 서로 덮어 주고,
서로에 대해 좋게 말해야 하며,
결코 다른 사람의 실패나 결점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서로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한 면으로는
강한 분별력을 지니고
우리가 돌보는 사람들을 살피는
분명한 안목이 있어야 하고,
또 한 면으로는
영적으로 눈멀어야 한다.
죄에 대한 의식은
하나님을 아는 데서 온다.
마찬가지로 비방하는 말들에 대한 의식은
몸을 아는 데서 온다.
비방하는 말들은
몸의 증거에 반대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하나님과 같아야 한다.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우리는
세리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더 높은 신성한 종(種)에 속하므로
선한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의 원수인
악한 사람들도 사랑한다.
이것은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기시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의 활력 그룹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가
차별 없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느 그리스도인 동역자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은행 강도와 같은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는 동안
두 강도가
그분과 함께
못 박혔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
주님의 왕국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눅 23:42)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진실로 그대에게 말합니다.
오늘 그대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
(43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가장 먼저 구원하신 사람은
신사가 아니라
사형 선고를 받은
범죄자인
강도였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은
성령에 의해 거듭나고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우리 사람의 영이다.
이 영은
사랑의 영이다.
따라서 그것은
능력의 영이고
맑은 생각의 영이다.
우리는
자신이
아주 능력이 있고
맑은 생각을 가졌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영은
사랑의 영이 아니다.
바울은
우리의 은사를 부채질하여
불타오르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된 은사는
하나님의
영과 생명과 본성이 있는
거듭난 우리 사람의 영이다.
우리는
이 은사를
부채질하여
불타오르게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영을 분발시킴으로써
불타게 해야 함을
의미한다.
로마서 12장 11절은
우리가
영 안에서 불타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손상을 주는
불타는 권위의 영이 아닌
불타는 사랑의 영을
가져야 한다.
디모데후서에서 언급되는 것은 모두
교회의 타락을 마주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들이다.
오늘날 교회의 타락 가운데
우리 모두에게는
영 안에서 부채질되어 불타오르는
사랑의 영이 필요하다.
사랑은
이런 방식으로 이긴다.
우리에게는
오늘날의 교회의 하락을 이길
사랑의 영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에 항상
부채질되어 불타오르는
사랑의 영으로
말하고
행해야 한다.
이것이
회복에 필요하다.
고린도전서 12장의
마지막 절은
사랑이
가장 뛰어난 길이라는 것을
계시한다.
어떻게 장로가 될 수 있는가?
사랑이
가장 뛰어난 길이다.
어떻게 동역자가 될 수 있는가?
사랑이
가장 뛰어난 길이다.
어떻게 사람들을 목양하는가?
사랑이
가장 뛰어난 길이다.
사랑은
신언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가장 뛰어난 길이다.
사랑은
우리가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하든
가장 뛰어난 길이다.
사랑은
이긴다.
우리는
모든 사람,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동역자들과 장로들이
나쁜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은
할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온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아들들이며
우리 아버지의 종(種)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온전해야 한다.
주 예수님은
자신이
건강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병든 사람들을 위해
의사로 왔다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은
“강건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합니다.”
(마 9:12)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약한 사람들을 얻기 위하여
약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약하게 되었습니다.”
(고전 9:22)라고 말했다.
이것이 사랑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은 약하지만
자신은 약하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덮어 주고
건축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무엇이 되든
무엇을 하든
가장 뛰어난 길이다.
요한복음 전체는
그리스도의
땅에서의 사역을
다루는데,
그분의 육체 되심
곧 하나님의 말씀께서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되심으로
시작하여,
그분의 부활
곧 마지막 아담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심으로
마친다.
따라서 21장은
분명 부록이다.
비록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21장이
요한복음의 완성과 완결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내재적이다.
21장이 없다면
요한복음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과
사도들의 땅에서의 사역이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
함께 협력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
요한복음 전체를
완결한다.
요한복음 10장
10절과 11절과 16절에서
주님은
그분께서
양들이
생명을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오신
선한 목자이시며,
그분께 있는
다른 양들(이방인 믿는 이들)을
그 양들(유대인 믿는 이들)과
연결되도록
이끄셔서
한 목자 아래 있는
한 양 떼(한 교회)가
되게 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혀 주셨다.
첫째로,
주님의 목양은
그분의 땅에서의 사역 안에
있었다.
주님은
양들인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시달리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이
내버려졌다.
하나님의 선민의
목자이신 주님은
기도하셨고,
하나님은
그분께서 보내신 분에게
하나님의 양들을 돌보도록
열두 사도를 세우라고
말씀하셨다.
둘째로,
주님의 목양은
그분의 하늘에서의 사역 안에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귀결되는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기 위한 것이다.
그분은
땅에 계실 때
목양하고 계셨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에도
여전히 목양하고 계신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부터
승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과 함께 머무실 때
여러 번 나타나셨는데,
한번은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그분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즉 하늘에 계시는 동안
그분의 어린양들을 먹이고
그분의 양들을 목양하도록
위임하셨다.
목양은
먹이는 것을 함축하고 있지만,
먹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목양하는 것은
모든 것을 포함한
부드러운 돌봄으로
양 떼를 돌보는 것이다.
목양하는 것은
사도들의 사역을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과
합병시켜
하나님의 양 떼인
교회를 돌보게 하려는 것이며,
이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성령께서
여러분을
온 양 떼의 감독들로
세우셨으니,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온 양 떼를 위해
스스로 조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 오신(또는 획득하신)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십시오.”
라고 말했다.
히브리서 13장 20절에서
바울은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화평의 하나님”
이라고 말했다.
영원한 언약은
한 양 떼,
곧 몸으로 귀결되고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교회를 얻기 위한
언약 곧 신약이다.
베드로는
믿는 이들에게,
그들이
전에는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하였으나
이제는
그들의 혼의
목자이시며
감독이신 분(그리스도)께로
돌아왔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양 떼를 목양하시는 것에는
외적인 것들뿐 아니라
내적 존재인
그들의 혼을 돌보시는 것도
포함된다.
그분은
우리의 내적 존재의
유익을 돌보시고
우리의 실제 인격인
우리 혼의 상태를 감독하심으로
우리를 목양하신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하라고
권유한다.
이렇게 목양한다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
그들,
곧 신실한 장로들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베드로의 말은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이 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귀결되는
하나님의 양 떼인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시편 22편부터 24편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부터
오는 시대의
그분의 왕권까지를
계시해 주는
한 부류의 시들이다.
시편 22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그분의 부활,
그리고 그분의 부활 안에서
많은 형제들이 산출되어
교회가 형성되는 것을
본다.
시편 23편은
그리스도께서
목자이신 것에 관한
시편이다.
오늘날 이 목자는
부활 안에 계신다.
시편 24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장차 오실 왕이신 것에 관한
시편이다.
이 세 시편들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
교회를 산출하시는 그리스도,
목자이시며
자신의 양 떼를 목양하시는 그리스도,
그리고 장차 오셔서
왕이 되실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고린도후서 7장
2절부터 16절까지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공급하는 생명에서 나오는
친밀한 관심이다.
주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수준에 이르기를 갈망하는
모든 믿는 이들은
새 언약의 사역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런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건축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사람이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의 목표는
이렇게
모든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을
회복함으로써
교회가
건축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에베소서 4장에 있는
바울의 말에 근거한 것인데,
이 장에서
바울은
사도들과
신언자들과
복음 전파자들과
목자들 및 교사들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함으로써
성도들이
그 사역의 일을 하는 것,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모두가
교회를 건축하는 이들이 되고,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공급하려면,
우리에게는
공급하는 생명,
즉 교회를 위해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생명이
필요하다.
고린도후서에서
우리가 보는
공급하는 생명은
열매 맺는 생명이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영적이고
거룩하며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시는데,
심지어 열매를 많이 맺고
남아 있는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이
공급하는 생명을
사는 것이다.
성도들을 목양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죽일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죽이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친밀한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가정을 방문하여
목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관심이
조금도 없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우리의 동기는
우리의
지식과 영성과
은사와 능력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는
죽이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을 수행할
재능은 있지만
친밀한 관심이
부족하다면,
우리의 일은
열매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열매를 잘 맺고
많이 맺는가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친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바울은
생명을 공급할 때
매우 인간적이며
다정다감했다.
바울은
그의 관심이
매우 깊고
친밀했기 때문에
매우 다정다감했다.
우리에게
이러한 관심이 없다면,
우리의 기쁨은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결코 더욱 넘치게 될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서리처럼
차갑게 될 것이고,
성도들을 향한
우리의 관심은
전적으로 부족해질 것이다.
또한 다른 이들을
따뜻하게 하기보다는
훨씬 더 차갑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얼어붙은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생명을 녹여 주고
따뜻하게 해 주는
봄 날씨가 필요하다.
다시 한번 여기에
공급하는 생명에 대한
필요가 있다.
공급하는 생명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따뜻하게 하는 생명이다.
다른 이들을
따뜻하게 해 주기를
배우라.
이것이 바로
다른 이들을 향하여
친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향한
이러한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내가
성도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려면 반드시
그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
즉 다정다감하고
깊고
친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는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남들이 보기에
내가
어리석거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오직 공급하는 생명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열매는
공급하는 생명의
결과이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생활하는 것과
더 나아가
휘장 안에 생활하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분명하게 체험함으로써
천체로 변화된다.
이기는 믿는 이들은
교회 시대에
햇빛을 반사하는 달과 같은
발광체들이 될 수 있다.
이기는 믿는 이들은
왕국 시대에
해처럼 빛날 것이다.
이기는 이들(사내아이)을 산출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해를 옷으로 입고 있고,
발 바로 밑에는 달이 있다.
요한계시록 12장의 여자는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총체를
상징한다.
이 여자는
사내아이
곧 이기는 이들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해와 달과 별들로
빛난다.
이러한 광경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
하늘에 속해야 하고
밝게 빛나야 한다는
사상을 전달한다.
아가 6장 13절에서
술람미는
춤추는 두 군대,
혹은 두 진영에
비유된다.
‘두 군대’라는 어구는
히브리어로 ‘마하나임’이다.
이것은
범상한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구약의 창세기 32장 2절에 나온
역사적인 이름이다.
야곱은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때 그에게는
네 아내와 많은 자녀들뿐 아니라
많은 종들과
양 떼와 소 떼가 있었다.
야곱은
에서가 아직도
자신을 죽이기 원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하면서 돌아가고 있었다.
야곱이
가족과 함께 여행했을 때,
그에게는
강한 사람들이 없었다.
오직 연약한 이들,
곧 여자들과 어린아이들만 있었다.
길에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에게 나타났다.
야곱은
그들을 보고 말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영이로구나.’
그리하여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였다.”
야곱은
하나님의 두 군대를 만난 후에
놀라운 일을 했다.
그는
자신의 아내들과 자녀들과
나머지 소유를
두 무리,
또는 ‘두 군대’로
나누었다.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가득하다.
이것은
우리가
넉넉히 이기고
정복하는
이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분명한 증거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거인들’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연약한 이들,
더 약한 이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원하신다.
이들이
그분의 군대가 될 수 있는 것은
싸움이
그들의 손이 아닌
그분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기는 이들로 간주되는 이들은
더 약한 이들,
즉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이들일 것이다.
“주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우리가 마땅히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계시하는
이 모든 최고봉의 진리들을
해방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휘장 안에 살면서
지성소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당신과의 하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거처이시고,
우리는
당신의 거주자들입니다.
저는
이것에
도달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다만
작은 이이며
연약한 이입니다.”
군대는
몸의 원칙을 시사한다.
디르사와 예루살렘은 모두
개별적인 돌 조각들이 아니라
건축물들이다.
우리는
자신을 낮추고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저를 위해
당신께서
모든 것을 하시고,
또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것이
어떠한 기쁨인지요!”
모든 이기는 이들은 반드시
하나님과 하나여야 하고,
그리스도와 하나여야 한다.
솔로몬의 배필로서
술람미는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에서
솔로몬과 동일하게 되었다.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이라는
이 네 가지 항목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똑같이 되지만,
신격에서는 아니다.
우리가
신격에서
하나님과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크나큰 신성 모독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에서
하나님과 똑같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불신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하나 되기 원하시고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하기를 원하신다고
거듭거듭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영적인 의미에 따르면,
두 군대는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원칙에 따라
넉넉히 이긴다는 것,
곧 ‘대승을 거둔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다.
하나님은
그들 자신 안에서
강한 사람들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연약한 이들,
더 약한 이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원하신다.
이기는 이들로
여겨지는 이들은
주님을 의지하는
더 약한 이들일 것이다.
1일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주님을 받아들이고(요 1:12), 사랑을 통하여 우리가 받아들인 주님을 누린다.
주관적인 믿음, 곧 우리의 믿는 행위는 우리를 주님과의 유기적인 연결 안으로 인도하며, 사랑을 통하여 작용한다(갈 5:6). 주님께서 관심하시는 일에서 주님과 하나였던 성도들은 바로 이 믿음의 요소와 작용 안에서 고난받는 신실한 사도를 사랑한 것이다.
믿음과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이 지닌, 분리할 수 없는 두 가지 뛰어난 미덕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벧후 1:1 각주 8),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체현(골 2:9)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요 1:12), 삼일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그분과 하나로 연결되며, 그분을 우리의 생명과 생명 공급과 모든 것으로 얻게 된다. 사랑은 이렇게 놀라운 믿음에서 나오고,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으로 들어간 이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의 모든 풍성을 살아 낼 수 있고, 삼일 하나님―아버지, 아들, 영―은 영광스럽게 표현되실 수 있다. 믿음은 삼일 하나님의 무한한 풍성을 감상하고 실질화하며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고, 사랑은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한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고 누리며 살아 내기 위한 것이다. 믿음은 믿는 이들에게 모든 것 되시는 삼일 하나님과 믿는 이들을 서로 연결하기 위한 것이며, 사랑은 믿는 이들이 동료 믿는 이들에게 삼일 하나님을 공급하고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놀랍고 강력한 믿음 안에서 모든 믿는 이는 신성하고 뛰어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단체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디도서는 놀라운 믿음과 지극히 탁월한 사랑으로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교회 타락의 흐름 가운데 우리가 효과적으로 굳게 서서 교회 안의 하락하는 경향과 요인을 이기려면, 이 놀라운 믿음과 지극히 탁월한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행하거나 밖의 상황을 주의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이 놀라운 믿음 안에서 믿음의 근원이신 삼일 하나님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이 믿음을 통하여 그분과 연결되었다. 또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이 지극히 탁월한 사랑으로 그분과 그분께 속한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오직 이 방법으로만 우리는 교회 타락의 흐름 가운데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주님께서 부르시고 얻기를 갈망하시는 이기는 이들이 될 수 있다.
이 놀라운 믿음과 지극히 탁월한 사랑은 우리와 연결되어 우리의 모든 것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삼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삼일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을 주목할 때, 삼일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주입하시어, 우리 안에서는 그분을 향한 믿음이 되시고, 우리 밖에서는 그분께 속한 이들을 향한 사랑이 되신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우리가 믿고 경배하며 받아들이는 삼일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실재요 표현이다(요일 4:8, 16).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연결되어 함께한다. 사랑은 믿음에서 나오고,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작용하며 일한다(갈 5:6). 우리에게 믿음을 겸한 사랑이 있을 때, 부패하지 않는 가운데 우리의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에 대하여 가지신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이루는 이기는 교회생활(엡 6:23-24)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히 11:6), 바로 이 사랑 안에서 주님의 축복을 받는다(고전 16:2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이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기를 바란다(엡 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