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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주님께 열려 있는 그릇이 되고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 안에서 평범한 일상을 삶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는 절차의 첫째 단계는 생명이신 그분 자신을 담는 그릇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삼일 하나님으로 채워진 존귀한 그릇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 담는 그릇으로 창조하셨고, 많은 그릇 중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존귀한 하나님이신 그분을 담게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를 존귀한 그릇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귀한 그릇들은 신성한 본성(금)과, 구속되고 거듭난 사람의 본성(은)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그릇들인 우리에게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심으로써 우리를 영광의 그릇들이 되게 하신다.

이 모든 것은 그분의 긍휼에서 나오고 그분의 긍휼에 따른 것이지, 우리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해야 하고, 그분의 긍휼에 대해 그분께 감사해야 한다.

바울의 열네 서신을 요약하면 두 단어, 곧 ‘열린 그릇’으로 표현할 수 있다.

신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원하심이 그릇들인 믿는 이들이 그분을 사랑하고 그들 자신을 그분께 계속 열어 두는 것임을 보여 준다.

우리 존재의 깊은 부분이 주님께 열려 있지 않으면, 주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시어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실 수 없다.

열린 그릇이 하는 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로 채워지도록 자신을 계속 열어 두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님을 사랑하며 자신을 주님께 계속 열어 두고 자신의 행함을 멈추는 생활이다.

그럴 때 주님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하신다. 그릇은 다만 주님을 담으며, 주님께서 채워 주시고 행하시는 것을 누린다.

우리는 단순히 주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주님께 계속 열어 두면서, 그분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도록 모든 기회를 그분께 드려야 한다.

이것이 합당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당신의 은혜로 저는 제 존재의 어떤 부분도 당신을 향해 닫아 두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당신께 완전하고 철저히 계속 열어 두기를 선택합니다.”

이러한 합당한 기도, 더욱 깊은 기도, 참된 기도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열려 있게 한다.

우리가 이러한 종류의 기도를 한다면, 우리는 살아 있고 열린 그릇이 될 것이고, 주님은 우리를 그분 자신으로 채울 길을 얻으실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채우실 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하신다.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 안에서 규칙적이고 정상적인 체험을 가지는 평범한 일상에 만족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신성한 분배를 조금씩 날마다 받아들이되, 천천히, 한결같이, 거듭거듭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안에 단 한 번에 성취되는 영적인 일은 거의 없다. 그보다 우리 신체의 생명에서 그러하듯이, 대부분의 영적인 일은 거듭 반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든지 한 번에 다 주시지 않는다. 그렇게 하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신성한 공급은 조금씩 조금씩 주어진다.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은 극적인 방식이 아니라 평범한 방식으로 우리 안에 계신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한결같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가 덜 특별하고 더 정상적일수록 더 좋다.

하나님께서 신성한 분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조용하고 차분하며, 믿는 이들로서 우리의 생활 또한 조용하고 차분해야 한다. 매일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살면서, 단순하게 신성한 분배를 받아들이는 평범한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의 운명은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 안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가 그분의 지속적인 분배 아래서 평범한 방식으로 살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를 믿음으로 체험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을 생명으로 취하며, 그분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도록 허락해 드림으로써 모든 일을 하기 원하신다.

이렇게 우리는 영적으로 정상적이 되며, 우리의 영성은 극적인 것이 전혀 없이 규칙적이고 정상적이 될 것이다.

신성한 분배 안에서의 평범한 일상은 신성한 경륜의 기적적인 정상에 부합한다.

그리스도, 그 영, 삼일 하나님,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에 대한 체험들은 전적으로 정상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해 마련해 주신, 영적이고 신성한 모든 것은 정상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상적인 것들은 기적적이며, 이런 이유로 우리는 신성한 경륜의 기적적인 정상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거듭남은 가장 큰 기적이지만 정상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이처럼 거듭남은 정상적이지만 기적적인 것, 곧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기적적인 정상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지만,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총체를 받는 것은 기적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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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롬 10:12-1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분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시고,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하시기 때문이니,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요 3:6 육체로 난 것은 육체이고 그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받아들인다. 우리가 입을 열어 부르는 것은 가장 정상적인 것이다.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방식으로든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오, 주 예수님!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상적인 것임으로 인하여 주님께 감사드리자. 그러나 우리가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를 때, 여러분은 우리가 무엇을 얻는지 아는가? 우리는 바로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얻는다! 이것이 기적이다.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얻는 것이 최고의 기적, 곧 모든 기적 중에서 가장 큰 기적이다. 나는 그분을 받아들이기 위해 옷을 차려입거나, 자신을 할 수 있는 만큼 단정하게 하거나, 격식을 차려 기도하려고 합당한 방식으로 무릎을 꿇고 경건해지려고 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분을 접촉하고 받아들이고 누리기 위해 며칠 동안 ‘주님을 시중들’ 필요가 없다. 내가 오직 해야 할 것은 다만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나의 누림으로 얻는다. 이것이 이 우주 안에서 가장 큰 기적이고, 모든 세대에 걸쳐 나타난 모든 기적의 총체이자 완전한 총합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기적적이면서도 정상적이다. 우리는 운전하고 있을 때나 잠들기 전에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거듭남은 하나의 기적적인 정상이다. 어떤 속생명파 교사들은 거듭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거듭남을 ‘최초의 축복’이라고 부른다. 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를 이해해 보려고 몇 권의 저술들을 읽어 보았지만, 오스틴 스팍스(T. Austin-Sparks)가 쓴 글을 읽고서야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거듭남이란 우리의 인간 생명 외에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정의(定義)를 읽고서 기뻤다. 그날부터 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거듭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서 그 영으로 나서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이들이 순간적으로 참되게 거듭나는 것을 목격했다. 이것은 기적적이지만 정상적이다. 그것은 기적적인 정상이다.

이제 나는 성경에서 한 가지 예를 사용하여 영적 생명에 속한 일들이 정상적인 일들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 주겠다. 로마서 10장 6절과 7절은 아무도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모셔 내릴 수 없고, 그런 다음 그리스도를 무저갱으로 내려가시게 할 수도 없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게 할 수도 없음을 지적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이미 성취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분의 구원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예비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공기를 예비해 두신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렇게 공기가 예비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사람이 태어나서 울음을 터뜨리면 공기를 들이쉴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이 구원받기 원한다면 단지 입을 열어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기만 하면 된다. 그럴 때 그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영이신 주님은 이미 우리의 입에, 우리의 마음에 계신다. 말씀이신 주님 또한 이미 우리의 손에, 우리 안에 계신다. 이제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 영을 접촉하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의 공급이 되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구원받을 것이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며, 성령께서 우리 위에 내려오시도록 허락해 드릴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매일의 체험이어야 한다. 무디 형제는 “우주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은 사람이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영적인 생명 안에서 날마다 우리는 우주 안에 있는 이 위대한 일을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은 기적적이지만 정상적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적적인 정상이다.

5일

딤전 1:4 …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

엡 3:9 … 비밀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모든 사람에게 밝히게 하시어,

엡 3:16-17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분의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여러분을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해 주시고,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서

나의 성경 연구와 나의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통해, 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삼일 하나님과 그 영과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에 대한 체험들이 전적으로 나에게 정상적인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한 체험들은 정상적인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초기에 몇몇 속생명파 교사들의 저술들을 읽어 보았는데, 그들은 이와 같은 영적이고 신성한 것들이 모두 달성하기가 쉽지 않은 큰 기적들이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우리가 이러한 기적들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는 지점에 이르려면 몇 가지의 요구 조건들을 충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는 그들의 책들에서 제시한 지침들을 따라 이러한 것들을 체험하려고 했다. 결국 나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 있는 그 영에 대한 체험들이 그들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누림을 위해 마련해 주신, 영적이고 신성한 모든 것은 전적으로 정상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정상적인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정상적인 것들이 또한 극히 기적적인 것임을 발견했다.

나는 거룩한 계시에 따른 이러한 영적이고 신성한 것들에 관한 나의 체험들을 묘사하기 위해 어떤 용어를 사용해야 할 것인지를 고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정상’과 ‘기적’이라는 단어들을 취하여 ‘기적적인 정상’이라는 표현을 만들어 내었다. 만일 우리가 문 두드리기를 통하여 합당하고 충분하게 사람들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합당한 가정 집회를 갖기를 갈망한다면, 반드시 기적적이면서도 정상적인 체험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합당하게 갖출 수 있도록 반드시 기적적인 정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열아홉 살 때였다. 그 당시에 나는 구원과 그 영으로 채워지는 것이 틀림없이 특별하고 기적적인 일일 것이고, 또한 언젠가 나에게 어떤 큰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천연적인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체험을 하면서, 나는 결코 나에게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 대신 나의 영적인 체험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그저 정상적인 것들과 관계가 있었다. 오늘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러갔다. 체험이 쌓일수록 나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 있는 영적인 생명에 속한 이러한 문제들이 사람들에게 외적으로 충격을 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더 느낀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모두 정상적인 일처럼 보인다. 이제 나는 영적인 일들에 관해서 그것들이 정상적일수록 더욱 합당하고 참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영적인 일들은 정상적일수록 더욱 풍성하다.

나는 진실로 육십여 년의 체험에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이 실재라는 것을 증언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적인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고 우리 안에 태어나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신 것이다. 우리 겉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이지만, 우리 속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신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측면을 거의 버렸다. 그들은 또한 성령께서 사람들 위에 임하시고 성령께서 사람들을 충만하게 하시는 문제를 희귀하고 이상한 일로 만들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사람 안으로 들어오셔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이러한 영적인 일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구원받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4일

롬 8:2 왜냐하면 생명의 영의 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롬 8:10-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 영은 의 때문에 생명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고 경배하는 분은 우리를 자신의 신성한 분배에 동참하게 하시려는 목적을 위해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결이신 그 영이 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이며, 이 경륜은 하나님의 모든 풍성한 요소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분배하고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이제 이 하나님께서 과정을 거치시고 거룩한 숨이 되시어 땅의 모든 곳에 가득하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때에도 그분은 우리의 입에 계시고 우리의 마음에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실 것이고 우리의 말을 듣는 이들의 입으로 들어가실 것이다(롬 10:8-9). 그분은 그분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시는 성령, 삼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너무나 놀라운 분이시다.

이렇게 놀라운 분께서 주로 우리의 생명으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조용히 부드럽게 운행하시며 일하고 계신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의 생명에 비유할 수 있다. 날마다 하루 스물네 시간 동안 우리의 육신의 생명은 조용히 부드럽게 우리 안에서 운행한다. 우리가 여기에 앉아 있을 때도 속에서는 어떤 운행이 일어나고 있는데, 바로 소화 작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소화 작용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소화 작용이 있을 뿐 아니라 동화 작용도 있는데, 그것은 소화된 음식의 요소들을 우리의 피의 일부로 만들고 이 요소들을 우리의 몸의 세포와 조직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실 때도 유사한 방식으로 운행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 즉 우리의 인격이 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신다.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셔서 거처를 정하시고, 우리의 온 존재 안에 자리 잡으셔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실 수 있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항상 우리가 그분께 돌이켜 그분의 공급을 받아들이기를 우리 안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어떤 사람들은 항상 주님께서 그들을 다루시고 꾸짖으시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내가 육십 년 이상 주님을 따르면서 체험한 것에 의하면, 주님은 한 번도 나를 심하게 꾸짖으신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참으로 많은 때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그러나 그분은 항상 기꺼이 나에게 공급을 주시고 그분 자신을 내 안으로 분배하신다. 오늘 주님은 분명히 내 안에 살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으로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 그분은 우리의 인격이시고,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의 남편이시고,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분은 우리 안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온 인격을 그분의 안식처로 만들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경륜, 즉 그분의 갈망을 성취하기 위한 그분의 계획과 목적과 안배는 우리의 방식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수행된다. 예를 들어 보자.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읽을 때 즉시 결심하고 기도하고 금식까지 하면서 “하나님,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게는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갈망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온갖 장애물과 문제와 약함이 있습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릴 것이다.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시지만,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심지어 그분 자신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을 통해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신다. 찬송가 378장 1절에는 이러한 가사가 있다. “오 놀라운 참 생명과 평안 그리스도 내 안에 사네”. 위의 찬송에서는 계속해서 “내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영광의 묘한 구원”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영광스럽다는 말인가? “이제는 나 사는 것 아니요 내 안에 주 그리스도 내 안에서 살고 계시네”. 이제 더 이상 내가 살지 않는다. 이것은 참으로 놀랍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 대부분은 때때로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가 산다. 이것이 우리의 참된 상태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많은 것을 하기를 요구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들을 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3일

마 22:37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그대는 온 마음과 온 혼과 온 생각으로 주 그대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갈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이제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생명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주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주님께 계속 열어 두면서, 그분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도록 모든 기회를 그분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누리는 사람, 곧 그분을 누리며 그분의 행하심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께 너무나 감사하므로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입에서 감사가 나올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승리이시고, 우리의 거룩하게 됨이시며,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심을 체험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인격과 주님의 행하심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게으르거나 무관심하거나 침묵하거나 생기가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깨어 있으며 매우 냉철하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며, 우리 자신을 그분께 항상 열어 둔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분께서 모든 것을 하실 것이다. 이것은 가능할 뿐 아니라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행함을 멈추기를 요구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생기가 없거나 무관심하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우리가 아주 많이 깨어 있기를 원하신다.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여러분 자신을 열어 두라. 그분께 날마다 이렇게 말하라.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지금 저는 당신께 열려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긍휼을 구하며, 당신의 은혜로 저는 제 존재의 어떤 부분도 당신을 향해 닫아 두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당신께 완전하고 철저히 열어 두기를 선택합니다.” 이렇게 해 본다면 여러분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승리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화를 내는 것에 대해 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그릇이다. 생명으로 충만한 그릇인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의 감정을 훈련할 필요가 있다. 온 마음…으로 주 그대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그릇인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지만, 자신을 열어 놓을 필요는 있다. 우리 모두는 자유 의지의 원칙을 알고 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을 사랑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열어 두지 않으면, 주님은 결코 우리에게 자신을 열어 두라고 강요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 자신을 열어 두어야 한다. 그러나 행함에서는 멀리 떨어지라. 여러분의 나쁜 성질을 잊어버리라! 여러분을 따라다니는 죄들을 잊어버리라! 여러분의 약점들을 잊어버리라! 주님을 사랑하고, 여러분 자신을 열어 두며, 행함을 멈추라. 우리의 특이함이라는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우리가 내적으로 주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우리 자신을 항상 그분께 열어 두는 것에 달려 있다. 합당한 기도, 더욱 깊은 기도, 참된 기도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열려 있게 한다. … 우리의 행함을 멈추기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주님의 긍휼로 그리고 참된 기도를 통해 우리의 행함은 멈추어질 것이다. 참된 기도는 언제나 죽이는 기도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행함을 죽인다. 이렇게 참된 기도 안에서 기도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죽게 된다. 사실상 죽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활동이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우리가 아니라 행함 안에 있는 우리가 죽음당할 것이다. 우리의 참된 기도는 우리의 모든 활동을 하나씩 하나씩 죽일 것이며, 우리를 잠잠하게 할 것이다. 때로 그것은 우리의 부담도 죽일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정결하고, 비어 있고, 열려 있는 그릇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께서 우리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완전히 자유로운 길을 가지실 수 있도록, 완전히 잠잠한 살아 있는 그릇이 될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가득 채우실 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단순히 그분의 행하심을 누린다. 이것이 합당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님을 사랑하며 자신을 주님께 계속 열어 두고 자신의 행함을 멈추는 생활이다. 그럴 때 주님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하신다. 그릇은 다만 주님을 담으며, 주님께서 채워 주시고 행하시는 것을 누린다. 이것이 합당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2일

고후 4:7 그러나 우리는 이 보배를 질그릇 속에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탁월한 능력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엡 3:17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서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다만 우리가 살아 있는 그릇이 되기를 원하신다. 만일 우리가 단지처럼 생명이 없는 그릇이라면, 의지나 생각이나 감정이 없으므로 주인이 사용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있는 것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강한 의지와 생각을 가지고 있고 감정이 가득한 살아 있는 단지를 창조하셨다. 타락한 후에 이 살아 있는 단지는 하나님께 문젯거리가 되었다. 이 문제는 역대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계속 있어 왔다. 그리스도인들은 무관심하든지 아니면 알려고 하고 행하려고 하는 일에 너무 열성적이다. 어느 쪽이든 주님은 그릇을 얻으실 수 없다.

이 요점은 신약에서, 특히 사도 바울의 열네 서신서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 우리는 바울의 열네 서신을 요약하면 두 단어, 곧 ‘열린 그릇’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열린 그릇을 원하신다. 로마서 9장 2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들로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4장 7절은 “우리는 이 보배를 질그릇 속에 담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두 절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체험하는 기본적인 비결로 간주될 수 있다.

열린 그릇이 하는 것은 채워지도록 자신을 계속 열어 두는 것이다.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 삼일 하나님,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 복합되신 영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 우리가 열어 드리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분께서 얼마나 많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지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그분께 열어 드리는지에 달려 있다.

여러분은 주님께 모든 것을 드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아내와 자녀들과 자신의 눈과 귀와 손을 드렸다. 나도 역시 많은 때에 이러한 세세한 헌신을 했었다. 심지어 나는 내 몸의 모든 머리카락과 모든 세포까지도 주님께 드렸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렇게 철저하고 세세하게 헌신한 후에도 여전히 주님께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는가? 겉으로 볼 때 우리는 자신을 주님께 헌신했지만, 사실상 자신에게 헌신했다. 우리의 헌신은 우리를 그분께 열려 있게 하지 못했다. 우리의 헌신은 여전히 자신을 지식과 행함 아래 있게 했다. 이것이 참된 문제이며, 또한 이 온전케 하는 훈련의 참된 부담이다. 이 훈련의 참된 부담은 여러분의 상태를 지적해 내어 여러분의 참된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것이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며, 이상을 보았다고 강하게 선포할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이 열려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님께 열려 있지 않다. 여러분은 자신의 지식과 행함에 열려 있다. 한 면으로는 주님께 절대적으로 열려 있고 다른 한 면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한 사람을 얻기란 참으로 어렵다. 주님을 사랑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일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틀림없이 그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려고 할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철학과 논리는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논리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그분을 위해 스스로 어떤 것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주님을 최고도로 사랑해야 하지만, 그분을 위해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말라. 이것은 그리 쉽지 않다. 때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그분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종교적인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너무 활동적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능동-수동적이어야 한다. 주님을 최고도로 사랑하는 것은 능동적인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수동적인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고, 강하게 되고, 거룩하게 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도록 허락해 드릴 필요가 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 있는 것은 단지 알려고 하는 것과 일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열어 두는 것이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말라. 그분께서 오시게 하라. 그러나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하기를 좋아하고 우리 자신을 닫아 두어서, 주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길이 없게 한다.

신언노트, 2023 01 15

주님께 열려 있는 그릇이 되고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 안에서
평범한 일상을 삶
주님께 열려 있는 한 그릇이 됨과
그 신성하신 삼일의 신성한 분배하심 안에서
평범한 날들을 삶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그분을 담는
존귀한 그릇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 담는 그릇으로 창조하셨고,
많은 그릇 중에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존귀한 하나님이신
그분을 담게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를
존귀한 그릇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릇들인 우리에게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심으로써
우리를
그분의 영광의 그릇들이
되게 하신다.
이 모든 것이
그분의 긍휼에서 나오고
그분의 긍휼에 따른 것이지,
우리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해야 하고,
그분의 긍휼에 대해
그분께 경배해야 한다!

귀한 그릇들은
신성한 본성(금)과,
구속되고 거듭난
사람의 본성(은)으로
이루어진다.
디모데와
또 다른 참된 믿는 이들과 같은
이들이(이 귀한 그릇들이)
진리를 붙들어 주는
확실한 기초이다.

나의 체험에 따르면,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다.
주님께서는 다만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열어 드리며,
그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허락해 드리기를
원하신다.
이 말은
여러분에게
꽤 익숙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이 문장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이 말이 그리
일반적이지 않음을
깨달을 것이다.
이것은 그다지
여러분에게
익숙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사람에게
그분을 위하여
무엇을 하도록 요구하시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셨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을 담는
그릇을 창조하여
그분을 표현하게 하시는 것인데,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다만
열려 있는 그릇을
원하신다.
그릇이
열려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실 수 있지만,
그릇이
닫혀 있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좌절된다.

사람의 타락의
참된 의미와
참된 본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로
사람이
알기를 원하는 것이며,
둘째로
사람이
행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알려고 하는 것이며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두 측면이
사람의 타락의
참된 의미이다.
원수는
사람에게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유혹한다.
사람이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알고
무언가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사람의 타락의
참된 의미이다.
일단 사람이 타락하자,
알려고 하고
행하려고 하는
악한 본성이
사람 안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이고 종교적인
관념에 따라
우상숭배나 마술,
곧 이 귀신적인 것들이
혐오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교묘하고
혐오스러운 것은
무엇을 알고자 하고
무엇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의 시도이다.
바로 이러한 악한 것이
그 적의(원수의) 유혹에 의해
사람의 본성 안에
들어왔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
알기를 좋아하고
행하기를 좋아하는
그러한 악한 본질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종교는 대부분
이 두 가지를 주의한다.
종교는
사람들이
알도록 도와주고
행하도록 도와준다.
심지어 오늘날 기독교는
알고 행하는 데
매우 활동적인
종교가 되어 버렸다.
신학교는 다만
알고 행하도록
사람들을 교육한다.
신학교는
사람들을
알고 행하도록
훈련시키고 분발시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전적으로 반대되는 교육이다.
수천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거나 행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아는
한 사람을 발견하기가
거의(무척) 어렵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만 그분을 사랑하고
또 그분께 열려 있는 채로
우리 자신들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다만
빈 그릇이지만,
이 질그릇이(흙으로 된 그릇이)
당신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당신의 마음의 갈망을 성취하기 위해
당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므로,
당신께서
이 질그릇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았습니다.
주님, 다만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담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으로
가득 채워지기 원합니다.
당신에 의해 침투되고
당신으로 흠뻑 적셔지기를 원합니다.
제가 당신께
항상 열려 있을 수 있도록
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는
절차의 첫째 단계는
생명이신 그분 자신을
담는 그릇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삼일 하나님으로 채워진
존귀한 그릇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 담는 그릇으로 창조하셨고,
많은 그릇들 중에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존귀한 하나님이신
그분을 담게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를
존귀한 그릇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귀한 그릇들은
신성한 본성(금)과,
구속되고 거듭난 사람의 본성(은)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그릇들인 우리에게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심으로써
우리를
영광의 그릇들이
되게 하신다.

이 모든 것은
그분의 긍휼에서 나오고
그분의 긍휼에 따른 것이지,
우리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해야 하고,
그분의 긍휼에 대해
그분께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다만 우리가
살아 있는 그릇이 되기를
원하신다.
만일 우리가
단지처럼
생명이 없는 그릇이라면,
의지나 생각이나 감정이 없으므로
주인이 사용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 있는 것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강한 의지와 생각을 가지고 있고
감정이 가득한
살아 있는 단지를 창조하셨다.
타락한 후에
이 살아 있는 단지는
하나님께
문젯거리가 되었다.
이 문제는
역대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계속 있어 왔다.
그리스도인들은
무관심하든지
아니면 알려고 하고
행하려고 하는
일에 너무 열성적이다.
어느 쪽이든
주님께서
그릇을 얻으실 수 없다.

이 요점은
신약에서,
특히 사도 바울의
열네 서신서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
우리는
바울의 열네 서신을 요약하면
두 단어,
곧 ‘열린 그릇’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열린 그릇을 원하신다.
로마서 9장 2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들로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4장 7절은
“우리는
이 보배를
질그릇 속에
담고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이 두 절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체험하는
기본적인 비결로
간주될 수 있다.

열린 그릇이 하는 것은
채워지도록
자신을
계속 열어 두는 것이다.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
삼일 하나님,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영,
복합되신 영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
우리가 열어 드리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분께서
얼마나 많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지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그분께
열어 드리는지에
달려 있다.

여러분은
주님께
모든 것을 드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아내와 자녀들과
자신의 눈과 귀와 손을
드렸다.
나도 역시
많은 때에
이러한 세세한 헌신을 했었다.
심지어 나는
내 몸의
모든 머리카락과
모든 세포까지도
주님께 드렸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렇게 철저하고 세세하게
헌신한 후에도
여전히 주님께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는가?
겉으로 볼 때
우리는
자신을
주님께 헌신했지만,
사실상
자신에게 헌신했다.
우리의 헌신은
우리를
그분께
열려 있게 하지 못했다.
우리의 헌신은 여전히
자신을
지식과 행함 아래
있게 했다.
이것이
참된 문제이며,
또한 이 온전케 하는 훈련의
참된 부담이다.
이 훈련의 참된 부담은
여러분의 상태를 지적해 내어
여러분의 참된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것이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며,
이상을 보았다고
강하게 선포할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이
열려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님께 열려 있지 않다.
여러분은
자신의 지식과 행함에
열려 있다.
한 면으로는
주님께
절대적으로 열려 있고
다른 한 면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한 사람을 얻기란
참으로 어렵다.
주님을 사랑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일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틀림없이 그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려고 할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철학과 논리는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논리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그분을 위해
스스로 어떤 것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주님을
최고도로 사랑해야 하지만,
그분을 위해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말라.
이것은
그리 쉽지 않다.
때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그분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종교적인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너무
활동적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능동-수동적이어야 한다.
주님을 최고도로 사랑하는 것은
능동적인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수동적인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고,
강하게 되며,
거룩하게 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도록
허락해 드릴
필요가 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 있는 것은
단지 알려고 하는 것과
일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열어 두는 것이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말라.
그분께서
오시게 하라.
그러나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하기를 좋아하고
우리 자신을 닫아 두어서,
주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길이 없게 한다.

바울의 열네 서신을
요약하면
두 단어,
곧 ‘열린 그릇’으로
표현할 수 있다.

신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원하심이
그릇들인 믿는 이들이
그분을 사랑하고
그들 자신을
그분께 계속 열어 두는 것임을
보여 준다.

우리 존재의 깊은 부분이
주님께 열려 있지 않으면,
주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셔서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집을
지으실 수 없다.

열린 그릇이 하는 것은
신성한 삼일의
신성한 분배로 채워지도록
자신을 계속
열어 두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주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주님께 계속 열어 두면서,
그분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도록
모든 기회를
그분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누리는 사람,
곧 그분을 누리며
그분의 행하심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께 너무나 감사하므로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입에서
감사가 나올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승리이시고,
우리의 거룩하게 됨이시며,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심을
체험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인격과
주님의 행하심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게으르거나 무관심하거나
침묵하거나 생기가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깨어 있으며
매우 냉철하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며,
우리 자신을
그분께 항상 열어 둔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분께서
모든 것을 하실 것이다.
이것은
가능할 뿐 아니라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행함을 멈추기를
요구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가
생기가 없거나
무관심하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우리가
아주 많이 깨어 있기를
원하신다.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여러분 자신을 열어 두라.
그분께 날마다
이렇게 말하라.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지금 저는
당신께 열려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긍휼을 구하며,
당신의 은혜로
저는
제 존재의 어떤 부분도
당신을 향해
닫아 두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당신께
완전하고 철저히 열어 두기를
선택합니다.”
이렇게 해 본다면
여러분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승리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화를 내는 것에 대해
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그릇이다.
생명으로 충만한
그릇인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의 감정을
훈련할 필요가 있다.
온 마음…으로
주 그대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 22:37).
그릇인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지만,
자신을 열어 놓을
필요는 있다.
우리 모두는
자유 의지의 원칙을
알고 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을 사랑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열어 두지 않으면,
주님은 결코
우리에게
자신을 열어 두라고
강요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 자신을
열어 두어야 한다.
그러나 행함에서는
멀리 떨어지라.
여러분의 나쁜 성질을
잊어버리라!
여러분을 따라다니는
죄들을 잊어버리라!
여러분의 약점들을 잊어버리라!
주님을 사랑하고,
여러분 자신을 열어 두며,
행함을 멈추라.
우리의 특이함이라는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우리가
내적으로
주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우리 자신을 항상
그분께 열어 두는 것에
달려 있다.
합당한 기도,
더욱 깊은 기도,
참된 기도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열려 있게 한다.
우리의 행함을 멈추기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주님의 긍휼로
그리고 참된 기도를 통해
우리의 행함은
멈추어질 것이다.
참된 기도는 언제나
죽이는 기도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행함을 죽인다.
이렇게 참된 기도 안에서
기도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죽게 된다.
사실상 죽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활동이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우리가 아니라
행함 안에 있는 우리가
죽음당할 것이다.
우리의 참된 기도는
우리의 모든 활동을
하나씩 하나씩 죽일 것이며,
우리를 잠잠하게 할 것이다.
때로 그것은
우리의 부담도 죽일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정결하고, 비어 있고, 열려 있는
그릇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께서
우리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완전히 자유로운 길을
가지실 수 있도록,
완전히 잠잠한
살아 있는 그릇이 될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가득 채우실 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단순히
그분의 행하심을 누린다.
이것이
합당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님을 사랑하며
자신을
주님께 계속 열어 두고
자신의 행함을
멈추는 생활이다.
그럴 때
주님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하신다.
그릇은 다만
주님을 담으며,
주님께서
채워 주시고
행하시는 것을 누린다.
이것이
합당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당신의 은혜로
저는
제 존재의 어떤 부분도
당신을 향해
닫아 두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당신께
완전하고 철저히
계속 열어 두기를
선택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종류의 기도를 한다면,
우리는
살아 있고 열린
그릇이 될 것이고,
주님은
우리를
그분 자신으로 채울
길을 얻으실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채우실 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하신다.

오늘 우리가
믿고 경배하는 분은
우리를
자신의 신성한 분배에
동참하게 하시려는
목적을 위해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결이신
그 영이 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이며,
이 경륜은
하나님의 모든 풍성한 요소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분배하고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이제 이 하나님께서
과정을 거치셨고
거룩한 숨이 되셨으며,
도처에서(각각의 모든 곳들에서)
그 땅을
가득 채우신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때에도
그분께서
우리의 입에 계시고
우리의 마음에 계신다.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밖으로
나오실 것이고
우리의 말을 듣는 이들의 입으로
들어가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그분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시는
성령,
삼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께서는
너무나 놀라우시다.

이렇게 놀라운 분께서 주로
우리의 생명으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조용히 부드럽게
운행하시며
일하고 계신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의 생명에
비유할 수 있다.
날마다
하루 스물네 시간 동안
우리의 육신의 생명은
조용히 부드럽게
우리 안에서
움직인다(운행한다).
우리가
여기에 앉아 있을 때도
한 움직임이(어떤 운행이)
안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의 소화 작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소화 작용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소화 작용이 있을 뿐 아니라
동화 작용도 있는데,
그것은 소화된 음식의 요소들을
우리의 피의 일부로 만들고
이 요소들을
우리의 몸의 세포와 조직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실 때도
유사한 방식으로
움직이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
즉 우리의 인격이 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신다.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셔서
집을 지으시고,
우리의 온 존재 안에
정착하셔서(자리 잡으셔서)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실 수 있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항상
우리가
그분께 돌이켜
그분의 공급을 받아들이기를
우리 안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어떤 사람들은 항상
주님께서
그들을
다루시고
꾸짖으시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내가
육십 년 이상
주님을 따르면서
체험한 것에 의하면,
주님은 한 번도
나를 심하게 꾸짖으신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참으로 많은 때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그러나 그분은 항상
기꺼이 나에게
공급을 주시고
그분 자신을
내 안으로 분배하신다.
오늘 주님께서는 분명히
내 안에 살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생명으로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인격이시고,
우리의 머리이시며,
우리의 남편이시고,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그분의 집을 지으시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온 인격을
그분의 안식처로 만들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경륜,
즉 그분의 갈망을
성취하기 위한
그분의 계획과 목적과 안배는
우리의 방식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수행된다.
예를 들어 보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읽을 때 즉시
결심하고 기도하고 금식까지 하면서
“하나님,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게는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갈망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온갖 장애물과 문제와 약함이 있습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시지만,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생명에 의해,
또 심지어 그분 자신에 의해
사는 것을 통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신다.
찬송가 378장 1절에는
이러한 가사가 있다.
“오 놀라운 참 생명과 평안
그리스도
내 안에 사네”.
위의 찬송에서는 계속해서
“내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영광의 묘한 구원”
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영광스럽다는 말인가?
“이제는
나 사는 것 아니요
내 안에
주 그리스도
내 안에서 살고 계시네”.
이제 더 이상
내가 살지 않는다.
이것은 참으로
놀랍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 대부분은
가끔(때때로)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의 대부분에(대부분의 경우)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가 산다.
이것이
우리의 참된 상태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많은 것을 하기를
요구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사람이
그 스스로의 힘으로(혼자서)
그것들을 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신성한 삼일의
신성한 분배 안에서
규칙적이고 정상적인
체험을 가지는
평범한 일상에 만족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신성한 분배를
조금씩 날마다 받아들이되,
천천히, 한결같이, 거듭거듭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안에
단 한 번에 성취되는
영적인 일은
거의 없다.
그보다 우리 신체의 생명에서 그러하듯이,
대부분의 영적인 일은
거듭 반복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든지
한 번에 다 주시지 않는다.
그렇게 하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신성한 공급은
조금씩 조금씩 주어진다.

과정을 거치셨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께서는
극적인(화려한) 방식이 아니라
평범한 방식으로
우리 안에 계신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꾸준하고(한결같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가
덜 특별하고
또 더 정상적일수록
더 좋다.

하나님께서
신성한 분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조용하고 차분하며,
믿는 이들로서
우리의 생활 또한
조용하고 차분해야 한다.
매일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살면서,
단순하게
신성한 분배를 받아들이는
평범한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의 운명은
신성한 삼일의
신성한 분배 안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가
그분의 지속적인 분배 아래서
평범한 방식으로 살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신성한 삼일의
신성한 분배를
믿음에 의해서(믿음으로)
체험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의존하고,
그분을 생명으로 취하며,
그분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도록
허락해 드림으로써
모든 일을 하기
원하신다.

이렇게 우리는
영적으로
정상적이 되며,
우리의 영적임은
극적인 것이 전혀 없이
규칙적이고
정상적이 될 것이다.

나의 성경 연구와
나의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통해,
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삼일 하나님과
그 영과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에 대한 체험들이 전적으로
나에게 평범한(일반적인, 정상적인)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한 체험들은
평범한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초기에
몇몇 속생명파 교사들의
저술들을 읽어 보았는데,
그들은
이와 같은
영적이고 신성한 것들이 모두
달성하기가 쉽지 않은
큰 기적들이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우리가
이러한 기적들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지는
지점에 이르려면
몇 가지의 요구 조건들을
충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는
그들의 책들에서 제시한
지침들을 따라
이러한 것들을
체험하려고 했다.
결국 나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 있는
그 영에 대한 체험들이
그들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누림을 위해
마련해 주신,
영적이고 신성한 모든 것은 전적으로
평범한 것이다.
그것들은
평범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평범한 것들이 또한
극도로 기적적임을
발견했다.

나는
거룩한 계시에 따른
이러한 영적이고 신성한 것들에 관한
나의 체험들을 묘사하기 위해
어떤 용어를 사용해야 할 것인지를
고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평범한’과 ‘기적적인’이라는
단어들을 취하여
‘기적적인 평범함’이라는
구를 제시했다(찾아냈다, 내놓았다).
만일 우리가
문 두드리기를 통하여
합당하고 충분하게
사람들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합당한 가정 집회를 가지기를
갈망한다면,
반드시 그 기적적인 평범함을
체험해야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합당하게 갖출 수 있도록 반드시
기적적인 평범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열아홉 살 때였다.
그 당시에 나는
구원과 그 영으로 채워지는 것이 틀림없이
비범하게 기적적인
일(들)일 것이고,
또한 언젠가 나에게
어떤 큰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천연적인 상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많은 경험들을 통과한 후에
나는 결코
나에게 일어나는
평범하지 않은 어떤 일을
가지지 못했다.
그 대신,
나의 영적인 체험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은 그저
평범한 것들과 관계가 있었다.
오늘,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러갔다.
체험이 쌓일수록 나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 있는
영적인 생명에 속한
이러한 문제들이
사람들에게
외적으로 충격을 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더 느낀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모두
평범한 일처럼 보인다.
이제 나는
영적인 일들에 관계되는 한,
그것들이 더 많이 평범할수록,
그것들이 더 많이 적절하고
또 더 많이 참되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영적인 일들은
그것들이 더 많이 평범할수록
그것들이 더 많이 풍부하다(부유하다).

나는 육십 삼 년 이상의 체험에서부터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이
한 실재라는 것을
참으로(정말로, 진심으로) 증언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적인(신체적인)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고
우리 안에 태어나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신 것이다.
우리 겉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이지만,
우리 속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신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신 하나님이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측면을
거의 버렸다.
그들은 또한 성령께서
사람들 위에 임하시고
성령께서
사람들을 충만하게 하시는
문제를(일을)
드물고도 이상한 일로
만들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사람 안으로 들어오셔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이 영적인 문제는
매우 평범한 문제이다.
구원받는 것은
매우 평범한 문제이다.

신성한 분배하심 안에서의
일상적인(평범한) 날들의 한 생활은
그 신성한 경륜의
기적적인 평범함에 일치한다(따른다).

그리스도, 그 영,
삼일 하나님,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에 대한
체험들은 전적으로
평범하다(일반적이다, 보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해
마련해 주신,
영적이고 신성한
모든 것들은
평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평범한 것들은
기적적이며,
이런 이유로 우리는
신성한 경륜의
기적적인 평범함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받아들인다.
우리가
입을 열어 부르는 것은
가장 정상적인 것이다.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방식으로든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오, 주 예수님!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상적인 것임으로 인하여
주님께 감사드리자.
그러나 우리가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를 때,
여러분은
우리가 무엇을 얻는지
아는가?
우리는 바로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얻는다!
이것이 기적이다.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얻는 것이
최고의 기적,
곧 모든 기적 중에서
가장 큰 기적이다.
나는
그분을 받아들이기 위해
옷을 차려입거나,
자신을 할 수 있는 만큼
단정하게 하거나,
격식을 차려 기도하려고
합당한 방식으로
무릎을 꿇고
경건해지려고 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분을
접촉하고 받아들이고 누리기 위해
며칠 동안 ‘주님을 시중들’
필요가 없다.
내가
오직 해야 할 것은 다만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나의 누림으로 얻는다.
이것이
이 우주 안에서
가장 큰 기적이고,
모든 세대에 걸쳐 나타난
모든 기적의
총체이자 완전한 총합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기적적이면서도 정상적이다.
우리는
운전하고 있을 때나
잠들기 전에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거듭남은
하나의 기적적인 정상이다.
어떤 속생명파 교사들은
거듭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거듭남을
‘최초의 축복’이라고 부른다.
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를
이해해 보려고
몇 권의 저술들을
읽어 보았지만,
오스틴 스팍스(T. Austin-Sparks)가 쓴
글을 읽고서야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거듭남이란
우리의 인간 생명 외에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정의(定義)를 읽고서
기뻤다.
그날부터 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거듭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서
그 영으로 나서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이들이
순간적으로 참되게 거듭나는 것을
목격했다.
이것은
기적적이지만 정상적이다.
그것은
기적적인 정상이다.

이제 나는
성경에서
한 가지 예를 사용하여
영적 생명에 속한 일들이
정상적인 일들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 주겠다.
로마서 10장
6절과 7절은
아무도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모셔 내릴 수 없고,
그런 다음 그리스도를
무저갱으로 내려가시게 할 수도 없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게 할 수도 없음을
지적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이미 성취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분의 구원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예비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공기를 예비해 두신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렇게 공기가
예비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사람이 태어나서
울음을 터뜨리면
공기를 들이쉴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이
구원받기 원한다면
단지 입을 열어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기만 하면 된다.
그럴 때 그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영이신 주님은 이미
우리의 입에,
우리의 마음에 계신다.
말씀이신 주님 또한 이미
우리의 손에,
우리 안에 계신다.
이제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 영을 접촉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공급이 되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구원받을 것이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며,
성령께서 우리 위에 내려오시도록
허락해 드릴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매일의 체험이어야 한다.
무디 형제는
“우주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은
사람이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영적인 생명 안에서 날마다
우리는
우주 안에 있는
이 위대한 일을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은
기적적이지만 정상적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적적인 정상이다.

거듭남은
가장 큰 기적이지만
정상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이처럼 거듭남은
정상적이지만 기적적인 것,
곧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기적적인 정상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지만,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과정을 거치셨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총체를 받는 것은
기적적인 것이다.

1일

롬 9:23 하나님께서 또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들에 대하여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어찌하겠습니까?

딤후 2:20 그렇지만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이 있을 뿐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은 귀하게 되고 어떤 것은 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그분을 담는 존귀한 그릇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 담는 그릇으로 창조하셨고, 많은 그릇 중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존귀한 하나님이신 그분을 담게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를 존귀한 그릇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릇들인 우리에게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심으로써 우리를 그분의 영광의 그릇들이 되게 하신다(롬 9:23). 이 모든 것이 그분의 긍휼에서 나오고 그분의 긍휼에 따른 것이지, 우리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해야 하고, 그분의 긍휼에 대해 그분께 경배해야 한다!

귀한 그릇들은 신성한 본성(금)과, 구속되고 거듭난 사람의 본성(은)으로 이루어진다. 디모데와 그 외 참된 믿는 이들과 같은 이러한 귀한 그릇들이 진리를 붙들어 주는 확실한 기초를 이룬다.

나의 체험에 따르면,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다. 주님은 다만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열어 드리며, 그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허락해 드리기를 원하신다. 이 말은 여러분에게 꽤 익숙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이 문장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이 말이 그리 일반적이지 않음을 깨달을 것이다. 이것은 그다지 여러분에게 익숙하지 않다. 하나님은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사람에게 그분을 위하여 무엇을 하도록 요구하시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셨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을 담는 그릇을 창조하여 그분을 표현하게 하시는 것인데,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다만 열려 있는 그릇을 원하신다. 그릇이 열려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실 수 있지만, 그릇이 닫혀 있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좌절된다.

사람의 타락의 참된 의미와 참된 본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로 사람이 알기를 원하는 것이며, 둘째로 사람이 행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알려고 하는 것이며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두 측면이 사람의 타락의 참된 의미이다. 원수는 사람에게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유혹한다. 사람이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알고 무언가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사람의 타락의 참된 의미이다. 일단 사람이 타락하자, 알려고 하고 행하려고 하는 악한 본성이 사람 안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이고 종교적인 관념에 따라 우상숭배나 주술과 같은 귀신적인 것들을 혐오스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교묘하고 혐오스러운 것은 무엇을 알고자 하고 무엇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의 시도이다. 바로 이러한 악한 것이 원수의 유혹에 의해 사람의 본성 안에 들어온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 알기를 좋아하고 행하기를 좋아하는 악한 본질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종교는 대부분 이 두 가지를 주의한다. 종교는 사람들이 알도록 도와주고 행하도록 도와준다. 심지어 오늘날 기독교는 알고 행하는 데 매우 활동적인 종교가 되어 버렸다. 신학교는 다만 알고 행하도록 사람들을 교육한다. 신학교는 사람들을 알고 행하도록 훈련시키고 분발시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전적으로 반대되는 교육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가 알거나 행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과, 다만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열어 드리기만을 원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거의 발견하실 수 없는데, 이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다만 빈 그릇이지만, 이 질그릇이 당신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당신의 마음의 갈망을 성취하기 위해 당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므로, 당신께서 이 질그릇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았습니다. 주님, 다만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담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으로 가득 채워지기 원합니다. 당신에 의해 침투되고 당신으로 흠뻑 적셔지기를 원합니다. 제가 당신께 항상 열려 있을 수 있도록 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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