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장에서 주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써 그들에게 보여 주신 후에(1절), 그들도 사랑 안에서 서로에게 똑같이 행하라고 명령하셨다(14절). 그런 후에 주님은 “내가 새 계명을 여러분에게 줍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이것으로써 여러분이 내 제자인 것을 알 것입니다.”(34-35절)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3장 34절의 계명은 신약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으로서 구약에 있는 옛 계명들과 다르다.
주님의 신약 계명들은 단지 명령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공급이 되는 영과 생명인 그분의 말씀이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어 우리의 체험과 누림이 된 신성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자녀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체험하고 누리는 길은 서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그분의 제자인 것을 알게 한다.
참된 사랑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신성한 분배 안에서 누린 결과이다.
우리가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요일 1:1-3) 즉 삼일 하나님에 대한 누림 안에 있을 때, 이러한 누림의 결과는 신성한 사랑이다. 이 신성한 사랑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 특별히 우리는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와 유기적으로 관계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요일 5:1). 이러한 사랑은 오직 우리가 신성한 출생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 하나님에게서 난 모든 이들을 포함한 세 인격 사이의 사랑을 가진다. 이러한 사랑은 사랑이신 삼일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신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내적인 본질이자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의 근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성한 아들의 자격에 이르도록 미리 정하신 것은 신성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성취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법리적으로 멸망에서 구원받고, 그분의 부활 안에서 유기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은 신성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분의 피로 우리를 죄들에서 구원하실 뿐 아니라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분의 아들을 우리의 죄들에 대한 화해 제물로 보내셔서 법리적으로 우리를 구속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 안에서 생명을 얻고 그분을 통해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뛰어난 사랑은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에 대한 화해 제물이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주입받는 화해 장소가 되신 것에서 나타난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화해시키시고 구속하시고 빛 비추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는 사랑과 긍휼과 은혜이신 그분을 주입받아 그분의 찬란하고 빛나는 영광을 나타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을 얻고 그분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생활 안에서 우리를 인도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과 함께 이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셨다. 이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원동력으로서 우리가 모든 환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토록 우리를 위하여 일한다.
요한일서 2장 7절과 8절에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3장 34절에 있는 주님의 계명과 관련하여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옛 계명이니, 그 옛 계명은 여러분이 들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주님께도 여러분에게도 참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둠이 지나가고 있고 참빛이 벌써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형제 사랑에 관한 계명은 옛 계명이면서 또 새 계명이기도 하다. 옛 계명인 이유는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그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새 계명인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할 때에 이 계명이 새로운 서광으로 비치고, 그 후에도 새로운 빛과 신선한 능력으로 계속해서 비쳐 주기 때문이다.
옛 계명이 새롭다는 사실은 주님께 참된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계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매일 행할 때에 그 계명을 계속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는 이들에게도 참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번 만에 영원히 그 계명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계명으로 말미암아 반복해서 빛 비춤을 받고 신선해지기 때문이다.
요한일서에서 우리는 신성한 사랑을 실행하는 것이 우리가 삼일 하나님을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으로 누린 결과라는 것을 본다.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은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서 기름바름으로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고 운행하심으로써, 삼일 하나님의 온 존재와 그분께서 성취하시고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모든 것으로 우리를 적시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신성한 사랑을 체험하고 누리며 이 신성한 사랑을 우리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사랑이 되게 하려면, 지속적으로 신성한 생명 안에서 삶으로써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
신성한 생명의 미덕인 신성한 사랑을 실행하려면, 우리 존재 안에 신성한 씨로 뿌려진 신성한 생명이 필요하며, 또한 신성한 영이 필요하다. 신성한 생명은 근원이고, 신성한 영은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일을 실지로 수행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타고난 사랑이 아닌 신성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자녀들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타고난 사랑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타고난 사랑의 한 가지 차이점은 우리의 타고난 사랑이 매우 쉽게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향하여 사는 생활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고 완전하게 나타나도록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유기적으로 건축하는 교회생활은 형제 사랑의 생활이다.
하나님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신성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탄적인 어둠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혼생명을 버리심으로 우리가 신성한 생명을 얻도록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혼생명을 잃어버리고 자아를 부인함으로 몸의 생활의 실행 안에서 형제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생명을 공급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과 그 쾌락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우리의 혼생명을 잃어버려야 한다. 세상과 그 쾌락을 사랑하는 대신, 형제 사랑의 교회생활 안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사랑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과 오락과 행복이 되어야 한다.
교회생활에서 형제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려는 목적이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없이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를 돌보는 것에서 실지적으로 표현된다. 가난한 성도들과 물질적인 것들을 함께 나눌 때, 주님의 생명의 은혜와 함께 그분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가운데 흐르고 그들 안으로 주입된다.
교회 안에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은 모든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반대된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표시이다. 우리가 주님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자 한다면, 반드시 서로 사랑해야 하고 교회생활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열매를 맺는 가장 좋은 길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과 생명으로 삼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진정한 복음 전파는 몸의 일이기 때문에 교통 안에 있는 일이다. 나무의 가지들은 교통의 방식으로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더 많이 몸의 생활 안에서 살고 몸의 생활의 실재를 가질수록 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활력 그룹의 상태는 하나 안에서, 그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활력 그룹의 실행을 위하여 성도들은 전적으로 하나와 한마음 한뜻에 기초한 교통을 가지는 법을 훈련받아야 한다.
형제 사랑의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서로 받아들이고,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며, 서로 건축하는 일을 추구하고, 서로의 무거운 짐을 져 주며,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지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건축하며, 서로 죄들을 자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며, 서로 용서하고, 서로 복종한다.
합당한 교회 집회는 ‘서로’의 집회 곧 ‘원탁’의 집회이며, 이 집회에서 우리는 서로 화답하고,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 서로 관심하고 서로 권유하며, 서로에게 귀 기울인다. 우리는 집회에서 서로 합당하게 돌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처리받고 주님에 의해 건축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교회를 돌보고 말씀을 공급한 결과로 형제자매들이 자연스럽게 교회 건축을 위하여 서로 사랑할 것이다. 성도들이 참되게 영적 생명 안에서 자랄 때, 신성한 생명을 체험한 결과로 사랑이 증가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생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교회생활은 살아 있고, 유력하고, 기능을 발휘하고, 능력이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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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요한복음 15장은 모든 가지들이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1-5절). 한 나무에는 단지 가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많은 가지들이 있으며, 모든 가지들은 교통의 방식으로 열매를 맺는다.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 15장 후반부에서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12, 17절).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 것이다(13:34-35).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깊은 속에서 진정한 상호성을 지닌 삶과 사랑을 찾고 있다. 이러한 상호성에 대한 갈망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본성 안에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개인적으로 혼자 사는 것을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 때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이 상호적인 사랑은 강한 증거가 될 것이다. 이것은 내적 생명이 이루어 낸 것이며 열매를 맺는 능력이다.
우리가 복음 전파에서 충격력을 갖고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몸의 생활에 모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몸의 생활 안에서 살수록, 또한 몸의 생활의 실재를 가질수록 열매를 더 많이 맺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우리의 친척과 친구와 급우와 이웃들에게 강한 증거가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형제들 가운데 있는 이러한 상호적인 사랑을 볼 때, 매우 인상을 받고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 안에서 일하실 수 있도록 길을 닦고 문을 열 것이다. 참된 몸의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가 충격력을 갖도록 돕는다. 나는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장 5절에서 ‘교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믿는다. 모든 가지들은 서로서로 함께 열매를 맺는다. 어떤 가지도 개인적으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활력 그룹의 상태는 하나 안에서, 그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다(요 13:34-35).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해마다 함께 집회를 하기 때문에 분명 서로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활력 그룹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상태는 이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상태여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뿐 아니라 하나 안에서, 그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를 사랑한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이 삼일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온 세상이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1, 23절). 이것이 사람들을 얻는 길이다. 우리 중 둘이나 셋이 한 사람처럼 나간다면, 우리가 방문하는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 역동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충격력이 있을 것이고, 그들은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모든 방해와 속박과 좌절시키는 요소들을 버린다면 성령은 움직이실 자유로운 길을 얻으실 것이다. 성령께서 자유로운 길을 얻으시면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많은 새로운 믿는 이들이 교회 안으로 인도될 것이다. 또 다른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곧 성도들이 참되게 영적 생명 안에서 자랄 것이고, 그들의 영적인 은사가 표현되기 시작할 것이다. 더욱이 성도들은 서로를 더욱 사랑할 것이다. 신성한 생명을 체험한 결과로 사랑이 증가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생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요일 3:14). 이렇게 하여 교회생활은 살아 있고, 유력하고, 기능을 발휘하고, 능력이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깊은 영 안에서 이것을 갈망하고 있다.
5일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생활이 단체적인 생활, 곧 형제들과 관련된 생활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형제 사랑을 잃어버리고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교회생활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 대답은 교회생활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형제 사랑이 없는 곳에서 교회생활은 끝난다. 사실상 형제 사랑이 교회생활이다. 교회생활은 형제 사랑의 생활이다.
요한일서 3장 14절에 언급된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탄적인 죽음이라는 근원, 본질, 요소, 범위에서 벗어나 신성한 생명이라는 근원, 본질, 요소, 범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났다. 주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형제들을 향한 사랑은 우리가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 안으로 들어갔다는 증거이다. 믿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며 이 생명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반석이시고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한 돌들이라는 계시가 있은 후, 몇 절 뒤에서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십시오.”(마 16:24)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6장 25절은 계속해서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 혼생명을 구하고자 하면 혼생명을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혼생명을 잃으면 혼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24절에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하고, 그다음 절에서 주님을 위하여 우리의 혼생명을 잃어야 한다고 말한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24절에 언급된 ‘자기’는 25절에 언급된 ‘혼생명’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의 혼생명을 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혼생명은 자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혼생명을 부인하고 잃어야 한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우리의 자아를 부인하고 우리의 혼생명을 잃어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취해야 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우리가 교회 건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를 합당하게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 건축을 실현하고 교회생활을 하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항상 우리의 혼생명, 우리의 자아에 적용하고 그분을 따라야만 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다만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인데, 그것은 부활 안에서 주님께서 우리의 영 안에 계신 그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영 안에서 행하고 살고 일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주님을 따를수록 우리는 다른 성도들과 교통하기를 더욱더 갈망할 것이다. 우리는 자아를 부인할수록 형제들을 더욱더 사랑할 것이고, 십자가를 질수록 더욱더 교회 안에 있기를 원할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법칙이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다른 성도들을 사랑할 것이다. 오늘 아침에 살아 있는 방식으로 주님께 기도했다면, 우리는 낮 시간에 형제들을 만나고자 할 것이다. 언제든지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주님은 우리가 형제들을 향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의도는 사람이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표현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사람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행복과 오락은 하나님 그분 자신이어야 한다. 그러면 그분은 객관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주관적인 하나님이 되신다.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살아 나타내는 것이 사람의 기쁨이다. 하나님은 오락에 대한 욕구를 지닌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오락은 반드시 하나님 그분 자신이어야 한다. 하나님 그분 자신이 오락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4일
신성한 생명의 미덕인 신성한 사랑을 실행하려면, 우리에게는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영이 필요하다. 신성한 생명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 소유한 신성한 씨이다. 우리 존재 안에 신성한 씨로 뿌려진 신성한 생명에 더하여 우리는 또한 우리 영 안에 신성한 영을 소유하고 있다. 신성한 생명은 근원이고, 신성한 영은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일을 실지로 수행하시는 분이시다.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영에 의해 수행되는 신성한 생명의 표현으로서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들을 우리의 타고난 사랑으로 사랑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우리의 타고난 사랑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어 우리의 체험과 누림이 된 신성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자녀들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객관적이며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관적으로 체험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하고 누려서 우리의 사랑이 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럴 때 이 사랑은 하나님과 다른 이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다면, 이 체험을 통해 우리의 사랑이 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타고난 사랑과는 매우 다른 것임을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타고난 사랑의 한 가지 차이점은 우리의 타고난 사랑이 매우 쉽게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할 때 그들과 뒤얽히게 된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천연적인 방식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우리의 원수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타고난 사랑이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현명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사랑한다. 그들은 어리석은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할 때 조만간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체험하고 누린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다면, 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동일한 이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부디 우리 모두가 우리의 체험과 누림이 된 신성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을 사랑해야 함을 보기 바란다.
신성한 생명의 교통의 이러한 조건,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을 이루려면, 우리는 지속적이고도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신성한 생명 안에서 지속적으로 삶으로써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아는 생활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을 살아 내는 생활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을 살아 낼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신성한 사랑을 체험하고 누리며 이 신성한 사랑을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사랑이 되게 하려면,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되기 위한 기본적인 요구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분의 공급을 받을 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공급받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누림이 되고, 이 누림이 하나님과 형제들을 향한 사랑을 낳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성한 교통의 두 번째 조건,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요구를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분을 안다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지킬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면, 우리는 그분의 생명 공급을 받을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체험과 누림은 하나님과 형제들을 향한 사랑을 낳을 것이다. 이것이 신성한 교통을 유지하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을 이룬다.
3일
은혜의 영역에서 우리가 첫 번째로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롬 5:5).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면서 우리에게 격려와 확증이 필요할 때가 아주 많다. 우리가 고난의 시기를 통과할 때, 우리에게는 의문과 의심이 생길 수 있다. 아마 우리는 “왜 나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이렇게도 많은 어려움이 있는가? 왜 이렇게 많은 시련과 시험이 있는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런 의심이 생기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처음 주 예수님을 불렀던 날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지고 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시고 확인해 주시며 확증해 주신다. 내주하시는 성령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의심하지 마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다. 지금은 네가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아버지, 제가 통과했던 괴로움과 시험으로 인하여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의 문에 들어갈 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의 여정에서 저에게 닥쳐왔던 고난과 시험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저를 변화시키시려고 그것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처럼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 우리가 원수였을 때,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이것은 어떠한 사랑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친아들을 주셨다면, 확실히 그분은 우리를 해치는 일을 전혀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제일 좋은지를 아신다. 선택은 그분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선호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것은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우리와 관계된 모든 것을 우리 아버지께서 예비하셨다. 우리는 다만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다만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합니다. 저는 모든 것을 전부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과 그분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반응할 것이다.
형제 사랑에 관한 계명은 옛 계명이면서 또 새 계명이기도 하다. 옛 계명인 이유는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그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새 계명인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할 때에 이 계명이 새로운 서광으로 비치고, 그 후에도 새로운 빛과 신선한 능력으로 계속해서 비쳐 주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2장 8절의 ‘그것’은 … 형제를 사랑하라는 옛 계명이 믿는 이들의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새롭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옛 계명이 새롭다는 것은 주님께 참된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계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매일 행할 때에 그 계명을 계속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는 이들에게도 참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번 만에 영원히 그 계명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계명으로 말미암아 반복해서 빛 비춤을 받고 신선해지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2장 8절에서 요한은 어둠이 지나가고 있고 참빛이 벌써 비치고 있다고 말한다. 어둠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은 참빛이 비치는 가운데 어둠이 사라지는 것이다. 참빛은 주님의 계명의 빛이다. 이 빛이 비치기 때문에 형제 사랑에 관한 계명의 서광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옛 계명은 그리스도인 생활 전반에 걸쳐 항상 새롭고 신선하게 된다.
어떤 종류이든 간에 사람의 계명은 주어진 다음에는 점점 옛것이 된다. 사람의 계명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계명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밝아지거나 빛이 비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계명은 그분의 살아 있는 말씀이다. 그분의 계명은 그분의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빛을 비춘다. 이 살아 있는 말씀이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출 때 하늘에 속한 빛이 비치게 된다. 하늘에 속한 빛이 비칠 때 옛것은 새롭게 된다. 특히 그것은 옛 계명을 새롭게 하고 신선하게 하며 빛이 충만하게 한다.
2일
사람의 상태는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의 근원을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의 근원이다. 하나님께 사랑이 없다면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본성에 있어서 의로우시고 거룩하시지만 그분의 마음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일하실 때 반드시 그분의 의로운 절차에 따라 그분의 거룩한 본성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일하셔야 한다. 그분의 의에 따르면, 죄인들은 마땅히 심판받아야 한다. 그분의 거룩함에 따르면, 그처럼 더러운 죄인들은 오직 그분 앞에서 쓰러져 죽기에만 적합하다. 그분의 의는 우리를 유죄판결 하고 그분의 거룩함은 우리를 거절하지만, 그분의 마음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다’. 그분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를 주셔서 우리를 위한 구원을 예비하셨다.
에베소서 2장 4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큰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분은 이 큰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셨다. 그분의 이러한 큰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죄인들을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허물과 죄들로 죽었던 이들까지도 사랑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나타났을 때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딛 3:4-5).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날 때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손길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큰 능력의 손으로 나타나며 결국 우리의 구원이 된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으로 인하여 그분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요 3:16).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하시지 않고 사랑만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구원을 성취하시려고 특별히 우리에게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구원이 귀중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큰 사랑이 우리를 위해 이 귀중한 구원을 성취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고 우리가 생명을 얻도록 하셨다(요일 4:9).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구원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단순한 이유 때문에 기꺼이 그 일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려고 그분의 독생자를 보내시는 아픔을 기꺼이 겪으셨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우리의 죄들에 대한 화해 제물로 보내셨다(요일 4:10).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일을 하셨다. 우리는 죄를 지어 하나님과 문제가 생겼지만,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우리가 이 관계를 회복하기 원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능력이나 방법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이 일을 성취하시려고 그분의 독생자를 보내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구원을 성취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을 얻는 길을 열어 주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여 얼마나 낮아졌는지를 보라! 그 사랑이 우리의 구원을 성취했고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한 길을 열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조금이라도 덜 일하셨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신 후 즉시 우리에게 그분과 화목하기를 간청하신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분을 거절하며 대적했던 그분의 원수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과 화목하라고 간청하신다. 이 간청은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이들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들이 믿는 이들을 통하여 그분의 구원을 얻기 원하신다는 것을 증명한다.
신언노트, 2022 12 04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 서로 사랑함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새 계명
― 우리가 서로 사랑함
주님의 계명은
주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주님의 계명이 단지
명령에 불과한 것만이 아님을
의미한다.
주님의 계명은 또한
생명 공급을 전달하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주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 영이십니다.
육체는 무익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한 말이
영이요 생명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2장 7절의 ‘말씀’은
생명 공급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우리에게
생명과 영을
공급하는 말씀이다.
주님의 어떤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지시하는
명령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명령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분의 입에서 나온 것인 한,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지킬 때마다
생명 공급을 받는다.
요한복음 13장
34절과 35절에서
이 계명은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메시지’로서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루려고
천연적인 방식으로
노력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신 것과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우리는
천연적이고
종교적이며
윤리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모방하여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런 유형의 사랑은
윤리적이고,
천연적이며,
심지어 문화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신성한 분배 안에서
누린 결과이다.
우리가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
즉 삼일 하나님에 대한 누림 안에
있을 때,
이러한 누림은
어떤 산출,
어떤 결과를
가지게 될 것이다.
삼일 하나님을 누린 결과는
신성한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
특별히 우리는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와
유기적으로 관계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으며,
많은 다른 사람들 또한
그분에게서 태어났다.
우리가
그분을 누린다면,
그 결과
그분의 모든 자녀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은
삼일 하나님을 누린 결과이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모방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사랑이신 삼일 하나님으로
조성되어야 한다.
이분은
우리가
사랑이신 그분을
내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분 자신을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하시고
그분 자신으로
우리를 적시시기를
원하신다.
이 사랑은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때까지
우리를 적셔야 한다.
신약에 있는
사랑에 대한 계시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과는
다르다.
사랑이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한다.
요한일서 3장 24절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영을 통해” 안다.
이 영은
우리를
사랑이신 삼일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
지켜 주심으로써,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
심지어 우리의 존재가
되시게 하신다.
더욱이 이 영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실질로
우리를 적시고 계신다.
결국 우리 존재의
섬유 조직들이(섬유질들이, 기질들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본질로
조성될(구성될) 것이다.
이것은
신성한 사랑이
우리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자발적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의 한 아이로서
우리는 분명
우리를 낳으신 분이신
우리 아버지를 사랑한다.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를 사랑하므로,
우리는 또한
그분에게서 난 이들을
사랑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
우리 자신들,
또 하나님께로부터 난 모든 이들을 포함하는
3자 간의(삼각형의) 사랑을 가진다.
이 3자 사이의 사랑은
사랑이신 삼일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합일(결합, 일치) 안에 있다.
믿는 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 신성한 출생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
이러한 출생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낳으신 분,
곧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뿐만 아니라
그분께로부터 난 이들도
사랑한다.
이것이
믿는 이들이
교회생활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이다.
요한복음 13장 34절의 계명은
신약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으로서
구약에 있는 옛 계명들과
다르다.
주님의 신약 계명들은
단지 명령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공급이 되는
영과 생명인
그분의 말씀이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어
우리의 체험과 누림이 된
신성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자녀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체험하고 누리는 길은
서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그분의 제자인 것을
알게 한다.
사람의 상태는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의 근원을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의 근원이다.
하나님께
사랑이 없다면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본성에 있어서
의로우시고
거룩하시지만
그분의 마음은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반드시
그분의 의로운 절차에 따라
그분의 거룩한 본성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일하셔야 한다.
그분의 의에 따르면,
죄인들은 마땅히
심판받아야 한다.
그분의 거룩함에 따르면,
그처럼 더러운 죄인들은 오직
그분 앞에서 쓰러져
죽기에만 적합하다.
그분의 의는
우리를 유죄판결 하고
그분의 거룩함은
우리를 거절하지만,
그분의 마음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다’.
그분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를 주셔서
우리를 위한
구원을 예비하셨다.
에베소서 2장 4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큰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분께서는
이 큰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셨다.
그분의 이러한 큰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분께서는
죄인들을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허물과 죄들로 죽었던 이들까지도 사랑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나타났을 때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날 때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손길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큰 능력의 손으로 나타나며
결국 우리의 구원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랑으로 인하여
그분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하시지 않고
사랑만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구원을 성취하시려고 특별히
우리에게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구원이
귀중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큰 사랑이
우리를 위해
이 귀중한 구원을 성취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고
우리가
생명을 얻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구원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단순한 이유 때문에 기꺼이
그 일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려고
그분의 독생자를 보내시는
아픔을
기꺼이 겪으셨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우리의 죄들에 대한
화해 제물로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일을 하셨다.
우리는
죄를 지어
하나님과 문제가 생겼지만,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우리가
이 관계를 회복하기 원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능력이나 방법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이 일을 성취하시려고
그분의 독생자를 보내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구원을 성취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을 얻는
길을 열어 주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여
얼마나 낮아졌는지를
보라!
그 사랑이
우리의 구원을 성취했고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한
길을 열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조금이라도 덜 일하셨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신 후 즉시
우리에게
그분과 화목하기를
간청하신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분을 거절하며 대적했던
그분의 원수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그분과 화목하라고
간청하신다.
이 간청은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이들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들이
믿는 이들을 통하여
그분의 구원을
얻기 원하신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신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내적인 본질이자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성한 아들의 자격에 이르도록
미리 정하신 것은
신성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성취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사법적으로(재판에 의하여)
멸망에서 구원받고,
그분의 부활 안에서
유기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은
신성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분의 피로
우리를
죄들에서 구원하실 뿐 아니라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분의 아들을
우리의 죄들에 대한
화해 제물로 보내셔서
사법적으로
우리를 구속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 안에서
생명을 얻고
그분을 통해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뛰어난 사랑은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에 대한
화해 제물이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주입받는
화해 장소가 되신 것에서
나타난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화해시키시고
구속하시고
빛 비추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는
사랑과 긍휼과 은혜이신
그분을 주입받아
그분의 찬란하고 빛나는 영광을
나타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고
그분의 아이들이 되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생활 안에서
우리를 인도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과 함께
이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셨다.
이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원동력으로서
우리가
모든 환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토록
우리를 위하여 일한다.
은혜의 영역에서
우리가
첫 번째로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면서
우리에게
격려와 확증이 필요할 때가
아주 많다.
우리가
고난의 시기를 통과할 때,
우리에게는
의문과 의심이
생길 수 있다.
아마 우리는
“왜 나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이렇게도 많은
어려움이 있는가?
왜 이렇게 많은
시련과 시험이 있는가?”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런 의심이 생기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처음 주 예수님을 불렀던 날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지고 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시고
확인해 주시며
확증해 주신다.
내주하시는 성령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의심하지 마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다.
지금은 네가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아버지,
제가 통과했던
괴로움과 시험으로 인하여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의 문에 들어갈 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의 여정에서
저에게 닥쳐왔던
고난과 시험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변화시키시려고
그것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처럼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
우리가 원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이것은
어떠한 사랑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친아들을 주셨다면,
확실히 그분은
우리를 해치는 일을
전혀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제일 좋은지를
아신다.
선택은
그분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선호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것이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우리와 관계된
모든 것을
우리 아버지께서 예비하셨다.
우리는 다만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다만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합니다.
저는
모든 것을 전부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과
그분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반응할 것이다.
형제 사랑에 관한 계명은
옛 계명이면서
또 새 계명이기도 하다.
옛 계명인 이유는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그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새 계명인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할 때에
이 계명이
새 빛으로 밝아오고
(새로운 서광으로 시작되고),
그 후에도
새로운 빛 비춤과 또 신선한 능력으로
거듭거듭 빛나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2장 8절의
‘이는(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옛 계명이
믿는 이들의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새롭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옛 계명이 새롭다는 것은
주님께 참된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계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매일 행할 때에
그 계명을
계속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는 이들에게도
참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번 만에 영원히
그 계명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계명으로 말미암아
반복해서
빛 비춤을 받고
신선해지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2장 8절에서
요한은
어둠이 지나가고 있고
참빛이 벌써 빛나고 있다고
말한다.
어둠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은
참빛이 빛나는 가운데
어둠이 사라지는 것이다.
참빛은
주님의 계명의 빛이다.
이 빛이 빛나기 때문에
형제 사랑의 계명이
어둠 안에서 밝아오고,
또 옛 계명을
그리스도인 생애 전체에 통해
새롭고 또 신선하게 만든다.
어떤 종류이든 간에
사람의 계명은
주어진 다음에는
점점 옛것이 된다.
사람의 계명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계명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밝아지거나
빛이 비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계명은
그분의 살아 있는 말씀이다.
그분의 계명은
그분의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빛을 비춘다.
이 살아 있는 말씀이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출 때
하늘에 속한 빛이
비치게 된다.
하늘에 속한 빛이 비칠 때
옛것은 새롭게 된다.
특히 그것은
옛 계명을 새롭게 하고
신선하게 하며
빛이 충만하게 한다.
신성한 생명의 미덕인
신성한 사랑을 실행하려면,
우리에게는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영이
필요하다.
신성한 생명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 소유한
신성한 씨이다.
우리 존재 안에
신성한 씨로 뿌려진
신성한 생명에 더하여
우리는 또한
우리 영 안에
신성한 영을
소유하고 있다.
신성한 생명은
근원이고,
신성한 영은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일을
실지로 수행하시는 분이시다.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영에 의해 수행되는
신성한 생명의 표현으로서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들을
우리의 타고난 사랑으로
사랑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우리의 타고난 사랑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어
우리의 체험과 누림이 된
신성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자녀들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객관적이며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관적으로 체험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하고 누려서
우리의 사랑이 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럴 때 이 사랑은
하나님과 다른 이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다면,
이 체험을 통해
우리의 사랑이 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타고난 사랑과는
매우 다른 것임을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타고난 사랑의
한 가지 차이점은
우리의 타고난 사랑이
매우 쉽게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할 때
그들과 뒤얽히게(연관되게, 가깝게) 된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천연적인 방식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결국 우리의 적들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타고난 사랑이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인간적인 방식으로
현명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천천히 또 조심스럽게 사랑한다.
그들은
어리석은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할 때
조만간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인식한다(알아차린다).
우리는
자신이 체험하고 누린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다면,
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동일한 이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부디 우리 모두가
우리의 체험과 누림이 된
신성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을 사랑해야 함을
보기 바란다.
신성한 생명의 교통의
이러한 조건,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을 이루려면,
우리는
지속적이고도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신성한 생명 안에서
지속적으로 삶으로써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아는
생활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을 살아 내는
생활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을 살아 낼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을
끊임없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신성한 사랑을
체험하고 누리며
이 신성한 사랑을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사랑이 되게 하려면,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되기 위한
기본적인 요구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분의 공급을 받을 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공급받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누림이 되고,
이 누림이
하나님과 형제들을 향한
사랑을 낳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성한 교통의
두 번째 조건,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요구를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분을 안다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지킬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면,
우리는
그분의 생명 공급을 받을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체험과 누림은
하나님과 형제들을 향한
사랑을 낳을 것이다.
이것이
신성한 교통을 유지하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을 이룬다.
요한일서에서
우리는
신성한 사랑을 실행하는 것이
우리가
삼일 하나님을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영으로 누린
결과라는 것을
본다.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영은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서
기름바름으로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고 운행하심으로써,
삼일 하나님의 온 존재와
그분께서
성취하시고 획득하시고 도달하신
모든 것으로
우리를 적시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향하여 사는
생활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고 완전하게
나타나도록 한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생활이
단체적인 생활,
곧 형제들과 관련된 생활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형제 사랑을 잃어버리고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교회생활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 대답은
교회생활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형제 사랑이 없는 곳에서
교회생활은 끝난다.
사실상 형제 사랑이
교회생활이다.
교회생활은
형제 사랑의 생활이다.
요한일서 3장 14절에 언급된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탄적인 죽음이라는
근원, 본질, 요소, 범위에서
벗어나
신성한 생명이라는
근원, 본질, 요소, 범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났다.
주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형제들을 향한 사랑은
우리가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 안으로 들어갔다는
증거이다.
믿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며
이 생명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반석이시고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한 돌들이라는
계시가 있은 후,
몇 절 뒤에서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십시오.”
(마 16:24)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6장 25절은 계속해서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 혼생명을 구하고자 하면
혼생명을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혼생명을 잃으면
혼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24절에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하고,
그다음 절에서
주님을 위하여
우리의 혼생명을 잃어야 한다고 말한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24절에 언급된 ‘자기’는
25절에 언급된 ‘혼생명’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의 혼생명을 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혼생명은
자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혼생명을
부인하고
잃어야 한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우리의 자아를 부인하고
우리의 혼생명을 잃어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취해야 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우리가
교회 건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를
합당하게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 건축을 실현하고
교회생활을 하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항상
우리의 혼생명, 우리의 자아에 적용하고
그분을 따라야만 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다만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인데,
그것은
부활 안에서
주님께서
우리의 영 안에 계신
그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영 안에서
행하고 살고 일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주님을 따를수록
우리는
다른 성도들과 교통하기를
더욱더 갈망할 것이다.
우리는
자아를 부인할수록
형제들을
더욱더 사랑할 것이고,
십자가를 질수록
더욱더 교회 안에 있기를
원할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법칙이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다른 성도들을 사랑할 것이다.
오늘 아침에
살아 있는 방식으로
주님께 기도했다면,
우리는
낮 시간에
형제들을 만나고자 할 것이다.
언제든지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형제들을 향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의도는
사람이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표현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사람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행복과 오락은
하나님 그분 자신이어야 한다.
그러면 그분께서
객관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주관적인 하나님이 되신다.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살아 나타내는 것이
사람의 기쁨이다.
하나님께서
오락에 대한 욕구를 지닌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오락은 반드시
하나님 그분 자신이어야 한다.
하나님 그분 자신이
오락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몸을
유기적으로 건축하는
교회생활은
형제 사랑의 생활이다.
하나님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신성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탄적인 어둠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혼생명을 버리심으로
우리가
신성한 생명을 얻도록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혼생명을 잃어버리고
자아를 부인함으로
몸의 생활의 실행 안에서
형제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생명을 공급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과 그 쾌락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우리의 혼생명을 잃어버려야 한다.
세상과 그 쾌락을
사랑하는 대신,
형제 사랑의 교회생활 안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사랑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과
오락과 행복이
되어야 한다.
교회생활에서 형제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려는 목적이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없이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를 돌보는 것에서
실지적으로 표현된다.
가난한 성도들과
물질적인 것들을
함께 나눌 때,
주님의 생명의 은혜와 함께
그분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가운데 흐르고
그들 안으로 주입된다.
교회 안에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은
모든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반대된다.
요한복음 15장은
모든 가지들이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한 나무에는
단지 가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많은 가지들이 있으며,
모든 가지들은
교통의 방식으로
열매를 맺는다.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 15장 후반부에서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 것이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깊은 속에서
진정한 상호성을 지닌
삶과 사랑을
찾고 있다.
이러한 상호성에 대한 갈망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본성 안에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개인적으로
혼자 사는 것을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 때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이 상호적인 사랑은
강한 증거가 될 것이다.
이것은
내적 생명이 이루어 낸 것이며
열매를 맺는 능력이다.
우리가
복음 전파에서
충격력을 가지고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몸의 생활에
모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몸의 생활 안에서 살수록,
또한 몸의 생활의
실재를 가질수록
열매를
더 많이 맺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우리의
친척과 친구와
급우와 이웃들에게
강한 증거가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형제들 가운데 있는
이러한 상호적인 사랑을 볼 때,
매우 인상을 받고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 안에서 일하실 수 있도록
길을 닦고
문을 열 것이다.
참된 몸의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가
충격력을 가지도록
돕는다.
나는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장 5절에서
‘교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믿는다.
모든 가지들은
서로서로 함께 열매를 맺는다.
어떤 가지도
개인적으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활력 그룹의 상태는
하나 안에서,
그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해마다
함께 집회를 하기 때문에
분명 서로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활력 그룹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상태는
이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상태여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뿐 아니라
하나 안에서,
그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를 사랑한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이
삼일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온 세상이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사람들을 얻는 길이다.
우리 중 둘이나 셋이
한 사람처럼 나간다면,
우리가 방문하는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
역동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충격력이 있을 것이고,
그들은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모든 방해와 속박과 좌절시키는 요소들을
버린다면
성령께서는
움직이실 자유로운 길을
얻으실 것이다.
성령께서
자유로운 길을 얻으시면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많은 새로운 믿는 이들이
교회 안으로 인도될 것이다.
또 다른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곧 성도들이
참되게 영적 생명 안에서 자랄 것이고,
그들의 영적인 은사가
표현되기 시작할 것이다.
더욱이 성도들은
서로를 더욱 사랑할 것이다.
신성한 생명을 체험한 결과로
사랑이 증가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생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교회생활은
살아 있고,
유력하며,
기능을 발휘하고,
능력이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깊은 영 안에서
이것을 갈망하고 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표시이다.
우리가
주님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자 한다면,
반드시 서로 사랑해야 하고
교회생활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열매를 맺는
가장 좋은 길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과 생명으로 삼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진정한 복음 전파는
몸의 일이기 때문에
교통 안에 있는 일이다.
나무의 가지들은
교통의 방식으로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더 많이
몸의 생활 안에서 살고
몸의 생활의 실재를 가질수록
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활력 그룹의 상태는
하나 안에서,
그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활력 그룹의 실행을 위하여
성도들은
전적으로
하나와 한마음 한뜻에 기초한
교통을 가지는 법을
훈련받아야 한다.
형제 사랑의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서로 받아들이고,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며,
서로 건축하는 일을 추구하고,
서로의 무거운 짐을 져 주며,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지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건축하며,
서로 죄들을 자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며,
서로 용서하고,
서로 복종한다.
합당한 교회 집회는
‘서로’의 집회
곧 ‘원탁’의 집회이며,
이 집회에서 우리는
서로 화답하고,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
서로 관심하고 서로 권유하며,
서로에게 귀 기울인다.
우리는
집회에서
서로 합당하게 돌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처리받고
주님에 의해 건축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교회를 돌보고
말씀을 공급한 결과로
형제자매들이
자연스럽게
교회 건축을 위하여
서로 사랑할 것이다.
성도들이
참되게 영적 생명 안에서 자랄 때,
신성한 생명을 체험한 결과로
사랑이 증가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생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교회생활은
살아 있고,
유력하며,
기능을 발휘하고,
능력이 있게 될 것이다.
1일
주님의 계명은 주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주님의 계명이 단지 명령에 불과한 것만이 아님을 의미한다. 주님의 계명은 또한 생명 공급을 전달하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주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 영이십니다. 육체는 무익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한 말이 영이요 생명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2장 7절의 ‘말씀’은 생명 공급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우리에게 생명과 영을 공급하는 말씀이다. 주님의 어떤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지시하는 명령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명령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분의 입에서 나온 것인 한,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지킬 때마다 생명 공급을 받는다.
요한복음 13장 34절과 35절에서 이 계명은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메시지’로서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요일 3:11). 우리는 이 말씀을 이루려고 천연적인 방식으로 노력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신 것(요일 4:8)과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우리는 천연적이고 종교적이며 윤리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모방하여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런 유형의 사랑은 윤리적이고, 천연적이며, 심지어 문화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신성한 분배 안에서 누린 결과이다. 우리가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 즉 삼일 하나님에 대한 누림 안에 있을 때, 이러한 누림은 어떤 산출, 어떤 결과를 갖게 될 것이다. 삼일 하나님을 누린 결과는 신성한 사랑이다. … 이 사랑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 특별히 우리는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와 유기적으로 관계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요일 5:1).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으며, 많은 다른 사람들 또한 그분에게서 태어났다. 우리가 그분을 누린다면, 그 결과 그분의 모든 자녀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은 삼일 하나님을 누린 결과이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모방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사랑이신 삼일 하나님으로 조성되어야 한다. 이분은 우리가 사랑이신 그분을 내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분 자신을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하시고 그분 자신으로 우리를 적시시기를 원하신다. 이 사랑은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때까지 우리를 적셔야 한다.
신약에 있는 사랑에 대한 계시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과는 다르다. 사랑이신 바로 그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한다. 요한일서 3장 24절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영을 통해” 안다. 이 영은 우리를 사랑이신 삼일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 지켜 주심으로써,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 심지어 우리의 존재가 되시게 하신다. 더욱이 이 영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실질로 우리를 적시고 계신다. 결국 우리 존재의 섬유 조직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본질로 조성될 것이다. 이것은 신성한 사랑이 우리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분명 우리를 낳으신 분이신 우리 아버지를 사랑한다.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를 사랑하므로, 우리는 또한 그분에게서 난 이들을 사랑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 하나님에게서 난 모든 이들을 포함한 세 인격 사이의 사랑을 갖는다. 이러한 세 인격 사이의 사랑은 사랑이신 삼일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 있다.
믿는 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오직 우리가 신성한 출생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 이러한 출생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낳으신 분, 곧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뿐만 아니라 그분에게서 난 이들도 사랑한다. 이것이 믿는 이들이 교회생활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