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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고 현시대를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함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이 우리에게 소중하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할 것이다.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것과 주님 자신을 사모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것, 곧 그분께서 돌아오시는 것은 우리에게 경고가 되고, 우리를 격려하며,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해야 하며, 간절한 기대와 기쁨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러한 생활을 할 때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변함없이 신실할 수 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구라도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 요일 2:15.

세상은 사탄에 의해 조직적으로 배열된 악한 체계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셔서 땅에 살게 하신 것은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수 사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강탈하기 위해서 문화와 교육과 산업과 상업과 오락과 종교로 사람들을 체계화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상 체계를 형성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것, 특히 인류와 관련된 것과 공중에 있는 모든 것은 사탄이 그의 어둠의 왕국으로 체계화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게 사람들을 점유하고 좌절시키며, 그들을 하나님에 대한 누림에서 빗나가게 한다.

세상은 아버지 하나님을 반대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며,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수이다.

‘온 세상’ 곧 사탄적인 체계는 ‘악한 자 안에 놓여 있다’ ― 요일 5:19하.

‘온 세상’은 사탄적인 세상 체계와 세상 사람들, 곧 타락한 인류로 구성된다.

‘놓여 있다’는 것은 악한 자에게 강탈당하고 조종받는 영역 안에 수동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온 세상과 세상 사람들은 악한 자인 사탄의 강탈하고 조종하는 손 아래 수동적으로 놓여 있다.

요한일서 5장 19절에서 ‘악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치명적이고 해악을 끼치는 자를 가리킨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주어 사람들을 사악하고 악독하게 만드는 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악한 자가 바로 사탄 마귀이며, 온 세상이 그 안에 놓여 있다.

사탄은 물질적인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이용하여, 결국에는 적그리스도의 왕국에서 모든 것을 그의 머리 아래로 통일할 것이다. 바로 그때에 세상 체계는 그 정점에 이를 것이고, 세상 체계를 이루는 모든 단위가 그리스도인을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것은 현시대를 사랑하는 것과 대조된다.

시대는 사탄의 세상 체계의 한 부분이나 한 단면 혹은 한 방면이다. 이것은 사탄이 사람들을 강탈하고 점유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사용된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서 ‘현시대’는 우리를 둘러싸고 매혹하고 유혹하는 세상을 가리킨다. 우리가 세상의 현시대를 접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접할 수 없다.

데마는 현시대를 사랑했다. 그는 현시대에 매혹되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버렸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생각이 새로워짐으로 변화되라고 권면한다.

2절에서 ‘이 시대’는 세상의 현존하는 실지적인 부분을 나타낸다. 이것은 몸의 생활과 대립되며 몸의 생활을 대치한다.

이 시대를 본받는 것은 현시대의 현대적인 유행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되는 것은 유기적인 요소가 우리의 존재 안으로 일해 넣어지도록 하여, 내적이며 신진대사적인 변화를 산출하는 것이다.

현시대는 하나님의 뜻인 교회를 반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현시대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현시대를 따르지 말아야 하며 이 시대를 본받거나 닮지 말아야 한다.

현시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세상 편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한다면, 주님 편에 서서 주님의 권익을 위해 주님과 함께 싸울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이들은 승리할 것이다.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따라서 그것은 또한 우리가 그분의 보상을 받기 위한 조건이 된다.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도리어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할수록, 우리는 오늘 더욱더 정상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우리의 생명으로 취하며, 그분을 살고, 그분을 확대하는 이들로서 우리는 그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해야 한다. 주님의 기쁨에 참여하고 주님의 하늘에 속한 왕국 안으로 구원받으며 의의 면류관을 받기를 바라는 이들로서,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마음의 갈망과 생활이 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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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고 현시대를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함”

6일

딤후 4:8 …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나에게 그것을 보상으로 주실 것인데, 나에게만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실 것입니다.

계 22:12 “보아라, 내가 속히 가겠다. 내가 줄 상벌이 나에게 있으니, 각 사람에게 그의 일에 따라 갚아 주겠다.

고전 16:22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므로 보상을 받을 것이다(딤후 4:8).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것과 주님 자신을 사모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진심으로 주님을 사모한다면 반드시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할 것이다.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모든 사람은 또한 주님께서 오시기를 사모하기 때문에 주님께 보상을 받을 것이다. 주님을 사모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거나 죄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따라서 그것은 또한 우리가 그분의 보상을 받기 위한 조건이 된다.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나타나심, 즉 그분의 오심을 사모해야 한다. 요한복음 21장은 주님을 사랑하는 문제를 계시한다. 거기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그분을 사랑하는지 물으셨다(15-17절). 디모데후서 4장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문제를 계시한다(8절). 우리가 진심으로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가 오기를 간절히 기대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를 밀쳐 낸다면, 우리의 사랑은 거짓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님의 오심을 연결한다. 헬라어 원문에서 “주님께서 오십니다!”라고 번역한 문장은 “우리 주님, 오십시오!”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이 절에서 바울은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매우 강하게 선포할 뿐 아니라, 주님의 다시 오심을 위해 기도했다. 이 절에서 두 항목,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님의 오심이 연결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선포할 때, 우리의 선포는 또한 우리가 그분의 오심을 사모한다는 뜻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나타나심을 사모합니다. 저는 당신의 오심을 갈망합니다.”라고 선포할 수 있다.

주님의 오심을 말하기 위하여 신약은 세 개의 다른 헬라어 단어를 사용한다. 세 단어가 모두 거의 대부분 ‘오다’라고 번역되지만, 헬라어 단어의 의미는 다르다. 이 세 헬라어 단어 중 하나는 ‘파루시아(parousia)’인데 ‘임재’를 의미한다. 이것은 주님의 오심을 사모한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따르면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왜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기다리느냐고 물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주님의 임재가 있는데 왜 여전히 주님의 임재를 바라는가? 이 질문은 교리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과 주님께서 오시는 것은 둘 다 사실이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에서 바울은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 예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도리어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할수록, 우리는 오늘 더욱더 정상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주님께서 오시면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형시켜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하실 것이고’(빌 3:20-21), 우리를 그분의 영광 안으로 이끄셔서 우리가 완전히 그분을 얻고 누리게 하실 것이다(히 2:10).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우리의 생명으로 취하며, 그분 안에서 살고, 우리의 몸에서 그분을 확대하는 이들로서 우리는 그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해야 한다(딤후 4:8).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주님을 누리기를 바라는 이들로서,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마음의 갈망과 생활이 되게 해야 한다.

5일

롬 12:2 여러분은 이 시대를 본받지 마십시오. 오직 여러분은 생각이 새로워짐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선한 뜻,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딤후 4:10 데마는 현시대를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으며 …

로마서 12장 2절에서 바울은 믿는 이들에게 ‘이 시대를 본받지 마라’고 명령한다. ‘시대’로 번역한 헬라어는 ‘현대’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이 시대는 우리가 접촉하고 있는 세상의 현존하는 실지적인 부분이다. 이 시대를 본받는 것은 외적으로 현대적인 유행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밖에 있는 모든 사람과 움직임과 사물을 결합한 것이 세상이라 불린다. 시대는 우리가 접촉하는 세상의 일부를 가리킨다. 세상은 사탄이 사람을 강탈하는 데 사용하는 조직 전체인 데 비해, 시대는 세상의 한 단면, 한 방면이자 세상의 현재의 현대적인 모습이다. 사탄은 사람들을 강탈하고 점유하여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이 시대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2절은 ‘이 세상의 풍조’를 말한다. 우리는 세상 전체가 아닌, 세상의 일부인 시대만을 접촉할 수 있을 뿐이다. 보통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점유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온 세상이 아니라 시대가 우리를 점유한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명령한 이유를 발견한다. “데마는 현시대를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으며,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갔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으며”. 현시대 곧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8절에 있는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세상 곧 코스모스는 많은 시대로 구성된다. 매 십 년이 다른 시대인 것 같다. 현시대는 우리를 둘러싸고 매혹하고 유혹하는 세상이다. 데마는 현시대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어떤 이들은 데마가 데살로니가에서 왔으며 이것이 그가 바울을 버린 후에 데살로니가로 간 이유였다고 믿는다. 그러나 데마가 데살로니가 출신이든 아니든 간에, 분명한 것은 그가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를 버렸기 때문에 그곳에 갔다는 것이다.

데마는 현시대에 매혹되었기 때문에 사도를 버렸다. 디모데후서 4장 8절과 10절에는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것과 현시대를 사랑하는 것의 대조가 있다. 우리가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한다면, 우리는 그분 편에 서서 그분의 권익을 위해 그분과 함께 싸울 것이다. 그러나 현시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세상 편에 설 것이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생각이 새로워짐으로 변화되라고 권면한다. ‘이 시대’는 세상의 현존하는 실지적인 부분을 나타낸다. 이것은 몸의 생활과 대립되며 몸의 생활을 대치한다. 온 세상은 다 사탄에게 속한 체계이며, 시대는 이 세상 체계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세상의 현시대를 접촉할 때에만 세상을 접촉할 수 있다. 이 시대를 본받는 것은 현시대의 현대적인 유행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되는 것은 유기적인 요소가 우리의 존재 안으로 일해 넣어지도록 하여, 내적이며 신진대사적인 변화를 산출하는 것이다. 현시대는 하나님의 뜻인 교회를 반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현시대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현시대를 따르지 말아야 하며 이 시대를 본받거나 닮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뜻,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생각이 새로워지고 혼이 변화되어야 한다.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상황, 즉 결혼 문제나 직업 문제나 주택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로마서 12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뜻은 몸의 생활이다. 생각이 새로워짐으로 변화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몸을 얻는 것임을 입증하고 분별할 수 있다.

4일

요일 2:15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구라도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요일 5:19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고,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즉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므로, 그분의 생명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분의 본성에 참여한다.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우리는 악한 자 안에 놓여 있는 사탄적인 세상에서 나와서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된다.

‘온 세상’은 사탄적인 세상 체계와 세상 사람들, 곧 타락한 인류로 구성된다.

‘놓여 있다’는 것은 악한 자의 영향권 안에 수동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악한 자에게 강탈당하고 조종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능동적으로 살고 움직이지만, 온 세상(특별히 세상 사람들)은 악한 자 사탄의 강탈하고 조종하는 손 아래 수동적으로 놓여 있다.

‘악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본질적으로 가치 없고 사악한 특성을 가리키는 단어도 아니고, 또 무가치함, 부패함, 본래의 미덕이 변질됨을 가리키는 단어도 아니다. 이 단어는 치명적이고 해악을 끼치는 자를 가리킨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주어 사람들을 사악하고 악독하게 만드는 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악한 자가 바로 사탄, 곧 마귀이며 온 세상이 그 안에 놓여 있다.

정치, 교육, 문학, 과학, 예술, 법률, 상업, 음악 등은 ‘세상’을 구성하는 것들이며, 우리가 날마다 접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을 제해 버린다면, 이러한 것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체계인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세상의 이러한 각 부분에서 현저한 진보가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진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고, 또 이 모든 발전의 최종 목표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요한은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일어나 이 세상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 할 것임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사탄은 물질적인 세상과 세상 사람들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이용하여, 결국에는 적그리스도의 왕국에서 모든 것을 그의 머리 아래로 통일할 것이다. 바로 그때에 세상 체계는 그 정점에 이를 것이고, 세상 체계를 이루는 모든 단위가 그리스도인을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오늘날에는 세상이 우리를 찾아온다. 오늘날 도처에 사람을 사로잡는 세력이 있다. … 여러분은 돈에 관해 이렇게 많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먹는 것과 입는 것에 관해 이렇게 많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어디를 가든지,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화제의 중심이 다 세상적인 것들이다. 세상은 이미 교회의 문 앞에까지 와 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성도를 그의 손아귀로 이끌 방도를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일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아는 것이 지금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적이 없었다.

우리가 신약에 있는 ‘세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의 여러 가지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이 단어가 물질적인 우주, 또한 사탄이 부패시키고 강탈한 타락한 인류,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려고 창조하신 사람을 사탄이 강탈하려고 만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체계를 의미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마지막에 언급된 ‘세상’의 의미가 요한일서 2장 15절에 적용된다. 이 절에서 세상은 사탄이 형성한,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상 체계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대적인 악한 자는 모든 것, 모든 사람, 모든 일을 체계화했을 뿐 아니라 그의 세상 체계의 일부분으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는 삼일 하나님께 가야 한다. 오직 삼일 하나님만이 사탄에게 체계화되지 않으신다. 삼일 하나님께 가야 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나아가야 한다. 사탄이 모든 것과 모든 사람과 모든 일을 체계화했기 때문에, 우리는 삼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안으로 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피난처이며 우리의 보호이다.

3일

요일 2:15-17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구라도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생활의 허세는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거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세상을 심판하셨고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을 내쫓으셨다(비교 요 12:31). 세상은 사탄에 의해 조직적으로 배열된 악한 체계이다. 사탄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 특히 인류와 관련된 것과 공중에 있는 모든 것을 그의 어둠의 왕국으로 체계화함으로써,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게 사람들을 점유하고 좌절시키며, 그들을 하나님에 대한 누림에서 빗나가게 한다. 이 악한 체계인 어둠의 왕국은 주님께서 육체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그 통치자인 사탄이 쫓겨났을 때 심판받았다. 사람의 아들이신 주님(23절)은 십자가에 뱀의 모습으로(3:14), 즉 ‘죄의 육체의 모양으로’(롬 8:3) 들려 올려지셨다. ‘옛 뱀’(계 12:9, 20:2)이고 이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은 자신을 사람의 육체 안으로 주입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죄의 육체의 모양으로’ 죽으심으로, 사람의 육체 안에 있는 사탄을 멸망시키셨다(히 2:14). 이와 같이 사탄을 심판하심으로써(요 16:11) 주님은 또한 사탄에게 속한 세상을 심판하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들려 올려지심으로 세상은 심판을 받았고, 이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은 쫓겨났다. 주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서 뱀의 모습으로 들려 올려지셨을 때, 우리의 죄들을 없애시고 우리의 뱀의 본성을 처리하셨을 뿐 아니라 사탄과 그에게 속한 사탄적인 세상 체계도 멸망시키셨다. 이제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는 구속받았고 구출되었으며, 신성한 생명을 얻고 세상을 이긴다.

‘세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코스모스(kosmos)’로서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 25장 34절, 요한복음 17장 15절, 사도행전 17장 24절, 에베소서 1장 4절, 요한계시록 13장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체계인 물질적인 우주를 가리킨다. 요한복음 1장 29절, 3장 16절, 로마서 5장 12절에서는 사탄이 부패시키고 강탈하여 그의 악한 세상 체계의 구성원들이 된 타락한 인류를 가리킨다. 베드로전서 3장 3절에서는 단장하는 것, 장식품들을 가리킨다.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는 요한복음 15장 19절, 17장 14절, 야고보서 4장 4절에서와 같이 어떤 질서, 고정된 형식, 질서 있는 배열을 가리키며, 따라서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 사탄이 세운) 질서 있게 만든 체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셔서 땅에 살게 하신 것은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수 사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강탈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그들의 타락한 본성을 통하여 정욕과 쾌락과 오락에 빠지게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음식과 의복과 주택과 교통수단과 같은 생활필수품에도 빠지게 하고, 종교와 문화와 교육과 산업과 상업과 오락으로 사람들을 체계화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상 체계를 형성했다. 이러한 사탄적인 체계 전체가 악한 자 안에 놓여 있다(요일 5:19). 이러한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악한 자를 이기는 근거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것은 악한 자에게 우리를 패배시키고 점유하도록 근거를 주는 것이다.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 요한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 안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말한다. 이 절에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사랑으로 생겨난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요한일서 2장 17절에서 요한은 계속하여 “이 세상도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거합니다.”라고 말한다. 세상이 아버지 하나님을 반대하기 때문에, 세상의 욕망인 세상에 있는 것들(15절)은 하나님의 뜻을 반대한다. 긍정적인 면에서 우리에게는 아버지와 그분의 뜻이 있다. 부정적인 면에서 우리에게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있다. 세상은 아버지를 반대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은 아버지의 뜻을 반대한다. 세상과 그 욕망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지나간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분의 뜻과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거한다(17절).

2일

계 22:12 “보아라, 내가 속히 가겠다. 내가 줄 상벌이 나에게 있으니, 각 사람에게 그의 일에 따라 갚아 주겠다.

계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내가 속히 가겠다.” 아멘. 주 예수님, 오십시오!

빌 3:20 … 우리는 … 구주,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서 주 예수님은 “보아라, 내가 속히 가겠다.”라고 말씀하셨다. 20절에서도 주님은 “그렇다. 내가 속히 가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분명 “아멘. 주 예수님, 오십시오!”라고 반응할 것이다(계 22:20, 딤후 4:8). 우리는 항상 그분께 오시도록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그분의 돌아오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우리는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이 매우 소중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주 예수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합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하므로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합니다.”라고 말씀드려야 한다.

바울은 주님의 돌아오심을 기다리는 삶을 산 사람이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읽어 보면 이것을 볼 수 있다. 이 책은 다섯 장으로 되어 있는데, 각 장이 주님의 돌아오심으로 마친다. 이것은 바울이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가리킨다(딤후 4:8). 바울을 본으로 삼아, 우리는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므로 그분께서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려야 한다. 우리의 생활은 우리가 이 땅에서 다른 소망이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소망은 장차 오실 주님께 있다. 그분께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시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형제님들, … 때가 단축되었으니, 이제부터 아내 있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들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물건을 산 사람들은 소유하지 않은 사람처럼 하며, 세상 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전혀 쓰지 않는 사람처럼 하십시오. 왜냐하면 이 세상의 형태는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29-3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참된 소망이시다.

주님께서 돌아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그분을 경외하기를 배워야 한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주님은 자기 혼이 누림과 즐거움을 얻도록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기를 힘쓰는 어떤 부자에 관한 비유를 드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너에게서 너의 혼을 도로 찾아갈 것이다.”(눅 12:20)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매일 ‘오늘’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주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늘이 있는 한, 즉 우리가 아직 숨을 쉬는 한, 우리는 주님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빌 3:20), 주님의 오심으로 격려받아야 한다.

디모데후서 4장 1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하나님 앞에서, 또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분께서 나타나시는 것과 그분의 왕국을 두고 그대에게 엄숙히 명령합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순교하기 직전에 한 권유이다. 그는 디모데에게, 주님의 심판과 왕국을 두고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것은 또한 우리를 일깨워 주는 말씀으로서, 이러한 생활을 할 때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약해지지 않고 끝까지 변함없이 신실할 수 있다.

1세기 말에 주님은 “보아라, 내가 속히 가겠다.”(계 22:12)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분께서 돌아오실 때 받을 보상을 깊이 생각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주님께서 천구백 년 넘게 상황을 용인해 오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더디게 돌아오실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늘날의 세계정세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며칠 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 시대에는 일들이 매우 신속히 발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영 안에서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깨어 있고 기도하며 준비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덮어 주시기를 바란다.

주님께서 신랑으로서 오시려면 반드시 그분을 위해 신부가 준비되어야 한다. 신랑이 오시는 것에 대해 신부는 준비되어 있는가? 주님께서 오늘이라도 신랑으로서 오실 수 있는가? 신부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주님께서 빨리 오시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신언노트, 2023 04 16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고
현시대를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함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랑함과
또 그 현시대를 사랑하지 않음에 의하여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들을 준비함

우리는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보상으로 받을 수 있다.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것은
주님 자신을 사모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모한다면,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한다면,
밧모섬에 있던 요한처럼
우리는
주님을 위할 것이며
“주 예수님,
오십시오!”
(계 22:20)라고 말할 것이다.
요한처럼
우리가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한다면,
우리 또한
주님의 왕국에 참여할 것이다.

디모데후서 4장 1절에 있는
바울의 명령에 따르면,
디모데는
주님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왕국의 빛 가운데서
살아야 했다.
장래에
왕국이 거절하는 모든 것을
오늘
우리도
우리의 생활에서
거절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의 나타나심 안에서 산다면,
우리는 분명히
말다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말다툼하는 상태에서 발견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사도들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마음속에 두고 생활했다.
주님의 나타나심은
그들에게
지속적인 경고가 되었고
그들의 생활을 규제했다.
그들이
어떤 일들을
감히 하지 못한 것은
주님께서
언제라도 나타나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의 나타나심과
왕국이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의 매일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우리의 매일의 생활에서
기본적인 요인이 되어야 한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에서
영광을 상징하는 면류관은
경기에서 승리한 경주자에게
주님의 구원에 더하여
상으로 주는 것이다.
은혜에 속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는 달리,
이 상은
은혜에 속하거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의에 속하고
행위에 따른 것이다.
믿는 이들은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
그분의 의에 따라서
이와 같은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면류관은
의의 면류관이며,
보상을 주시는 분은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이시다.
바울은
이러한 상이
자신을 위하여 마련되어 있다는 것과
주님께서
두 번째 나타나시는 날에
그것을
보상으로 받게 된다는 것을
확신했다.

여기에서 이것은
은혜의 면류관이 아니라
의의 면류관이다.
의의 면류관은
왕이 되게 하는 면류관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바울이
천국의 출현을
보상으로 받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러한 상이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것,
곧 그분께서 돌아오시는 것은
우리에게 경고가 되고,
우리를 격려하며,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돌아오시기를
사모해야 하고,
간절한 기대와 기쁨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나
은혜로우신 구주로서가 아니라
의로우신 재판장으로서 오신다는 것을
아는 믿는 이들이
많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재판장 앞에 서기 위해
경고와 격려를 받고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이 어두운 시대에
그러한 엄숙한 명령을
주님의 백성에게 전할
부담을 가져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또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이러한 명령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 모두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선포해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따르면
주님의 모든 노예들은
그분과 계산해야 한다.
주님은
“잘하였다,
착하고 신실한 노예야.”
(21절)라고 하시든지
“악하고 게으른 노예야”
(26절)라고 하실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보상을 받을 것인지
받지 못할 것인지의 여부를
그분의 의에 따라
결정하실 것이다.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이
우리에게 소중하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할 것이다.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것과
주님 자신을 사모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러한 생활을 할 때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변함없이
신실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서
주 예수님은
“보아라,
내가 속히 가겠다.”
라고 말씀하셨다.
20절에서도
주님은
“그렇다.
내가 속히 가겠다.”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분명
“아멘. 주 예수님,
오십시오!”
라고 반응할 것이다
(계 22:20, 딤후 4:8).
우리는 항상
그분께
오시도록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그분의 돌아오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우리는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이
매우 소중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주 예수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합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하므로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합니다.”
라고 말씀드려야 한다.

바울은
주님의 돌아오심을 기다리는
삶을 산 사람이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읽어 보면
이것을 볼 수 있다.
이 책은
다섯 장으로 되어 있는데,
각 장이
주님의 돌아오심으로 마친다.
이것은
바울이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을 본으로 삼아,
우리는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므로
그분께서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려야 한다.
우리의 생활은
우리가
이 땅에서
다른 소망이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소망은
장차 오실 주님께 있다.
그분께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시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형제님들, …
때가 단축되었으니,
이제부터
아내 있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들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물건을 산 사람들은
소유하지 않은 사람처럼 하며,
세상 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전혀 쓰지 않는 사람처럼 하십시오.
왜냐하면 이 세상의 형태는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29-3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참된 소망이시다.

주님께서 돌아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그분을 경외하기를
배워야 한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주님은
자기 혼이
누림과 즐거움을 얻도록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기를 힘쓰는
어떤 부자에 관한
비유를 드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너에게서
너의 혼을
도로 찾아갈 것이다.”
(눅 12:20)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매일 ‘오늘’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주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늘이 있는 한,
즉 우리가
아직 숨을 쉬는 한,
우리는
주님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주님의 오심으로
격려받아야 한다.

디모데후서 4장 1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하나님 앞에서,
또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분께서 나타나시는 것과
그분의 왕국을 두고
그대에게
엄숙히 명령합니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순교하기 직전에 한
권유이다.
그는
디모데에게,
주님의 심판과 왕국을 두고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것은 또한
우리를 일깨워 주는 말씀으로서,
이러한 생활을 할 때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약해지지 않고
끝까지 변함없이
신실할 수 있다.

1세기 말에
주님은
“보아라,
내가
속히 가겠다.”
(계 22:12)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분께서 돌아오실 때 받을
보상을 깊이 생각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주님께서
천구백 년 넘게
상황을 용인해 오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더디게 돌아오실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늘날의 세계정세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며칠 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 시대에는
일들이
매우 신속히 발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영 안에서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깨어 있고 기도하며 준비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덮어 주시기를
바란다.

주님께서
신랑으로서 오시려면
반드시 그분을 위해
신부가 준비되어야 한다.
신랑이 오시는 것에 대해
신부는 준비되어 있는가?
주님께서
오늘이라도
신랑으로서 오실 수 있는가?
신부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주님께서
빨리 오시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세상을 심판하셨고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을 내쫓으셨다.
세상은
사탄에 의해
조직적으로 배열된
악한 체계이다.
사탄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
특히 인류와 관련된 것과
공중에 있는 모든 것을
그의 어둠의 왕국으로
체계화함으로써,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게
사람들을
점유하고 좌절시키며,
그들을
하나님에 대한 누림에서
빗나가게 한다.
이 악한 체계인
어둠의 왕국은
주님께서
육체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그 통치자인 사탄이
쫓겨났을 때
심판받았다.
사람의 아들이신 주님은
십자가에
뱀의 모습으로,
즉 ‘죄의 육체의 모양으로’(롬 8:3)
들려 올려지셨다.
‘옛 뱀’이고
이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은
자신을
사람의 육체 안으로 주입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죄의 육체의 모양으로’
죽으심으로,
사람의 육체 안에 있는
사탄을 멸망시키셨다.
이와 같이
사탄을 심판하심으로써
주님은 또한
사탄에게 속한
세상을 심판하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들려 올려지심으로
세상은
심판을 받았고,
이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은 쫓겨났다.
주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서
뱀의 모습으로
들려 올려지셨을 때,
우리의 죄들을 없애셨고
우리의 뱀의 본성을 처리하셨을 뿐 아니라
사탄과
그에게 속한 사탄적인 세상 체계도
멸망시키셨다.
이제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는
구속받았고
구출되었으며,
신성한 생명을 얻고
세상을 이긴다.

‘세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코스모스(kosmos)’로서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 25장 34절,
요한복음 17장 15절,
사도행전 17장 24절,
에베소서 1장 4절,
요한계시록 13장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체계인
물질적인 우주를 가리킨다.
요한복음 1장 29절, 3장 16절,
로마서 5장 12절에서는
사탄이 부패시키고 강탈하여
그의 악한 세상 체계의 구성원들이 된
타락한 인류를 가리킨다.
베드로전서 3장 3절에서는
단장하는 것, 장식품들을
가리킨다.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는
요한복음 15장 19절, 17장 14절,
야고보서 4장 4절에서와 같이
어떤 질서,
고정된 형식,
질서 있는 배열을
가리키며,
따라서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 사탄이 세운)
질서 있게 만든
체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셔서
땅에 살게 하신 것은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수 사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강탈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그들의 타락한 본성을 통하여
정욕과 쾌락과 오락에
빠지게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음식과 의복과
주택과 교통수단과 같은
생활필수품에도 빠지게 하고,
종교와 문화와
교육과 산업과
상업과 오락으로
사람들을 체계화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상 체계를 형성했다.
이러한 사탄적인 체계 전체가
악한 자 안에
놓여 있다.
이러한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악한 자를 이기는
근거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것은
악한 자에게
우리를
패배시키고 점유하도록
근거를 주는 것이다.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
요한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 안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말한다.
이 절에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사랑으로 생겨난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요한일서 2장 17절에서
요한은 계속하여
“이 세상도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거합니다.”
라고 말한다.
세상이
아버지 하나님을 반대하기 때문에,
세상의 욕망인
세상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반대한다.
긍정적인 면에서
우리에게는
아버지와 그분의 뜻이 있다.
부정적인 면에서
우리에게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있다.
세상은
아버지를 반대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은
아버지의 뜻을 반대한다.
세상과
그 욕망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지나간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분의 뜻과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거한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구라도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 요일 2:15.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셔서
땅에 살게 하신 것은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수 사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강탈하기 위해서
문화와 교육과
산업과 상업과
오락과 종교로
사람들을 체계화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상 체계를 형성했다.

세상은
아버지 하나님을 반대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며,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수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즉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므로,
그분의 생명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분의 본성에 참여한다.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우리는
악한 자 안에 놓여 있는
사탄적인 세상에서 나와서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된다.

‘온 세상’은
사탄적인 세상 체계와
세상 사람들, 곧 타락한 인류로
구성된다.

‘놓여 있다’는 것은
악한 자의 영향권 안에
수동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악한 자에게
강탈당하고
조종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능동적으로
살고 움직이지만,
온 세상은(특별히 세상 사람들은)
악한 자 사탄의
강탈하고 조종하는 손 아래
수동적으로 놓여 있다.

요한일서 5장 19절에서
‘악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본질적으로 가치 없고 사악한
특성을 가리키는 단어도 아니고,
또 무가치함, 부패함,
본래의 미덕이 변질됨을
가리키는 단어도 아니다.
이 단어는
치명적이고
해악을 끼치는 자를
가리킨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주어
사람들을
사악하고 악독하게
만드는 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악한 자가 바로
사탄, 곧 마귀이며
온 세상이
그 안에 놓여 있다.

정치, 교육,
문학, 과학,
예술, 법률,
상업, 음악 등은
‘세상’을 구성하는 것들이며,
우리가
날마다 접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을
제해 버린다면,
이러한 것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체계인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세상의 이러한 각 부분에서
현저한 진보가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진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고,
또 이 모든 발전의
최종 목표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요한은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일어나
이 세상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 할 것임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사탄은
물질적인 세상과
세상 사람들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이용하여,
결국에는
적그리스도의 왕국에서
모든 것을
그의 머리 아래로
통일할 것이다.
바로 그때에
세상 체계는
그 정점에 이를 것이고,
세상 체계를 이루는
모든 단위가
그리스도인을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오늘날에는
세상이
우리를 찾아온다.
오늘날 도처에
사람을 사로잡는
세력이 있다.
여러분은
돈에 관해
이렇게 많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먹는 것과 입는 것에 관해
이렇게 많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어디를 가든지,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화제의 중심이 다
세상적인 것들이다.
세상은 이미
교회의 문 앞에까지 와 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성도를
그의 손아귀로 이끌
방도를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일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아는 것이
지금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적이 없었다.

우리가
신약에 있는
‘세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의
여러 가지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이 단어가
물질적인 우주,
또한 사탄이
부패시키고 강탈한
타락한 인류,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려고
창조하신 사람을
사탄이
강탈하려고 만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체계를
의미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마지막에 언급된
‘세상’의 의미가
요한일서 2장 15절에
적용된다.
이 절에서
세상은
사탄이 형성한,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상 체계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대적인 악한 자는
모든 것, 모든 사람, 모든 일을
체계화했을 뿐 아니라
그의 세상 체계의
일부분으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는
삼일 하나님께
가야 한다.
오직 삼일 하나님만이
사탄에게
체계화되지 않으신다.
삼일 하나님께
가야 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나아가야 한다.
사탄이
모든 것과 모든 사람과 모든 일을
체계화했기 때문에,
우리는
삼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안으로
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피난처이며
우리의 보호이다.

‘온 세상’
곧 사탄적인 체계는
‘악한 자 안에
놓여 있다’
― 요일 5:19하.

‘온 세상’은
사탄적인 세상 체계와
세상 사람들, 곧 타락한 인류로
구성된다.

‘놓여 있다’는 것은
악한 자에게
강탈당하고 조종받는
영역 안에
수동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온 세상과 세상 사람들은
악한 자인 사탄의
강탈하고 조종하는 손 아래
수동적으로
놓여 있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바울은
믿는 이들에게
‘이 시대를 본받지 마라’고
명령한다.
‘시대’로 번역한 헬라어는
‘현대’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이 시대는
우리가 접촉하고 있는 세상의
현존하는 실지적인 부분이다.
이 시대를 본받는 것은
외적으로
현대적인 유행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밖에 있는
모든 사람과 움직임과 사물을
결합한 것이
세상이라 불린다.
시대는
우리가 접촉하는 세상의
일부를 가리킨다.
세상은
사탄이
사람을 강탈하는 데 사용하는
조직 전체인 데 비해,
시대는
세상의 한 단면, 한 방면이자
세상의 현재의 현대적인 모습이다.
사탄은
사람들을
강탈하고 점유하여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이 시대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2절은
‘이 세상의 풍조’를
말한다.
우리는
세상 전체가 아닌,
세상의 일부인
시대만을 접촉할 수 있을 뿐이다.
보통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점유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온 세상이 아니라
시대가
우리를 점유한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명령한
이유를 발견한다.
“데마는
현시대를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으며,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갔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으며”.
현시대
곧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8절에 있는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세상 곧 코스모스는
많은 시대로 구성된다.
매 십 년이
다른 시대인 것 같다.
현시대는
우리를
둘러싸고 매혹하고 유혹하는
세상이다.
데마는
현시대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어떤 이들은
데마가
데살로니가에서 왔으며
이것이
그가
바울을 버린 후에
데살로니가로 간
이유였다고 믿는다.
그러나 데마가
데살로니가 출신이든 아니든 간에,
분명한 것은
그가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를 버렸기 때문에
그곳에 갔다는 것이다.

데마는
현시대에 매혹되었기 때문에
사도를 버렸다.
디모데후서 4장
8절과 10절에는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것과
현시대를 사랑하는 것의
대조가 있다.
우리가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한다면,
우리는
그분 편에 서서
그분의 권익을 위해
그분과 함께 싸울 것이다.
그러나 현시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세상 편에 설 것이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생각이 새로워짐으로
변형되라고 권면한다.
‘이 시대’는
세상의
현존하는 실지적인 부분을
나타낸다.
이것은
몸의 생활과 대립되며
몸의 생활을 대치한다.
온 세상은 다
사탄에게 속한 체계이며,
시대는
이 세상 체계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세상의 현시대를 접촉할 때에만
세상을 접촉할 수 있다.
이 시대를 본받는 것은
현시대의 현대적인 유행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변형되는 것은
한 유기적인 요소가
우리의 존재 안으로
일해 넣어지도록 하여,
내적이며 신진대사적인
한 변화를 산출하는 것이다.
현시대는
하나님의 뜻인
교회를 반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현시대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현시대를 따르지 말아야 하며
이 시대를
본받거나 닮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뜻,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생각이 다시 새로워지고
혼이 변형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상황,
즉 결혼 문제나
직업 문제나
주택 문제에 관한
문제들이 아니다.
로마서 12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뜻은
그 몸 생활이다.
그 생각이 다시 새로워짐에 의하여
변형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그 몸을 얻는 것임을
입증하고
분별할 수 있다.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것은
현시대를 사랑하는 것과
대조된다.

한 시대는
사탄의 세상 체계의
한 부분이나
한 단면
혹은 한 방면이다.
이것은
사탄이
사람들을
강탈하고
또 점유하며
또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서
떨어져 있게 하는 데
사용된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서
‘그 현시대’는
우리를
둘러싸고 매혹하고 유혹하는
세상을 가리킨다.
우리가
세상의 현시대를
접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접할 수 없다.

데마는
그 현시대를 사랑했다.
그 현시대의 매력 때문에
그는
사도 바울을 버렸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생각이 다시 새로워짐으로
변형되라고
권면한다.

2절에서 ‘이 시대’는
세상의
현존하는 실지적인 부분을
나타낸다.
이것은
그 몸 생활과 대립되며
그 몸 생활을 대치한다.

현시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세상 편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한다면,
주님 편에 서서
주님의 이익을 위해
주님과 함께 싸울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므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것과
주님 자신을 사모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진심으로 주님을 사모한다면 반드시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할 것이다.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모든 사람은 또한
주님께서 오시기를
사모하기 때문에
주님께 보상을 받을 것이다.
주님을 사모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거나
죄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따라서 그것은 또한
우리가
그분의 보상을 받기 위한
조건이 된다.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나타나심,
즉 그분의 오심을
사모해야 한다.
요한복음 21장은
주님을 사랑하는
문제를 계시한다.
거기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그분을 사랑하는지
물으셨다.
디모데후서 4장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문제를
계시한다.
우리가
진심으로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가 오기를
간절히 기대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를 밀쳐 낸다면,
우리의 사랑은 거짓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님의 오심을
연결한다.
헬라어 원문에서
“주님께서 오십니다!”
라고 번역한 문장은
“우리 주님, 오십시오!”
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이 절에서 바울은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매우 강하게 선포할 뿐 아니라,
주님의 다시 오심을 위해
기도했다.
이 절에서
두 항목,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님의 오심이
연결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선포할 때,
우리의 선포는 또한
우리가
그분의 오심을 사모한다는 뜻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나타나심을 사모합니다.
저는
당신의 오심을 갈망합니다.”
라고 선포할 수 있다.

주님의 오심을
말하기 위하여
신약은
세 개의 다른 헬라어 단어를
사용한다.
세 단어가 모두
거의 대부분
‘오다’라고 번역되지만,
헬라어 단어의
의미는 다르다.
이 세 헬라어 단어 중
하나는
‘파루시아(parousia)’인데
‘임재’를 의미한다.
이것은
주님의 오심을
사모한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따르면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왜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기다리느냐고
물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주님의 임재가 있는데
왜 여전히
주님의 임재를 바라는가?
이 질문은
교리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과
주님께서
오시는 것은
둘 다 사실이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에서
바울은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 예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도리어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할수록,
우리는 오늘 더욱더
정상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주님께서 오시면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형시켜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하실 것이고’,
우리를
그분의 영광 안으로
이끄셔서
우리가 완전히
그분을
얻고 누리게 하실 것이다.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우리의 생명으로 취하며,
그분 안에서 살고,
우리의 몸에서
그분을 확대하는 이들로서
우리는
그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해야 한다.
그분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고
그분을 누리기를
바라는 이들로서,
이것이
우리의 마음의 갈망과
또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만 한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이들은
승리할 것이다.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우리의 생명으로 취하며,
그분을 살고,
그분을 확대하는 이들로서
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기다려야만 하며
또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모해야만 한다;
그분의 기쁨 안으로 들어가고,
주님의 하늘에 속한 왕국 안으로 구원받으며,
또 의의 면류관을 받기를
소망하는 이들로서,
이것이
우리의 마음의 갈망과
또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만 한다.

1일

딤후 4:1 내가 하나님 앞에서, 또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분께서 나타나시는 것과 그분의 왕국을 두고 그대에게 엄숙히 명령합니다.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나에게 그것을 보상으로 주실 것인데, 나에게만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보상으로 받을 수 있다.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것은 주님 자신을 사모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모한다면,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한다면, 밧모섬에 있던 요한처럼 우리는 주님을 위할 것이며 “주 예수님, 오십시오!”(계 22:20)라고 말할 것이다. 요한처럼 우리가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한다면, 우리 또한 주님의 왕국에 참여할 것이다.

디모데후서 4장 1절에 있는 바울의 명령에 따르면, 디모데는 주님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왕국의 빛 가운데서 살아야 했다. 장래에 왕국이 거절하는 모든 것을 오늘 우리도 우리의 생활에서 거절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의 나타나심 안에서 산다면, 우리는 분명히 말다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말다툼하는 상태에서 발견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사도들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마음속에 두고 생활했다. 주님의 나타나심은 그들에게 지속적인 경고가 되었고 그들의 생활을 규제했다. 그들이 어떤 일들을 감히 하지 못한 것은 주님께서 언제라도 나타나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의 나타나심과 왕국이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의 매일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우리의 매일의 생활에서 기본적인 요인이 되어야 한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에서 영광을 상징하는 면류관은 경기에서 승리한 경주자에게 주님의 구원에 더하여 상으로 주는 것이다. 은혜에 속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는 달리, 이 상은 은혜에 속하거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의에 속하고 행위에 따른 것이다. 믿는 이들은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 그분의 의에 따라서 이와 같은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면류관은 의의 면류관이며, 보상을 주시는 분은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이시다. 바울은 이러한 상이 자신을 위하여 마련되어 있다는 것과 주님께서 두 번째 나타나시는 날에 그것을 보상으로 받게 된다는 것을 확신했다.

여기에서 이것은 은혜의 면류관이 아니라 의의 면류관이다. 의의 면류관은 왕이 되게 하는 면류관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바울이 천국의 출현을 보상으로 받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러한 상이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것, 곧 그분께서 돌아오시는 것은 우리에게 경고가 되고, 우리를 격려하며,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돌아오시기를 사모해야 하고, 간절한 기대와 기쁨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나 은혜로우신 구주로서가 아니라 의로우신 재판장으로서 오신다는 것을 아는 믿는 이들이 많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재판장 앞에 서기 위해 경고와 격려를 받고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이 어두운 시대에 그러한 엄숙한 명령을 주님의 백성에게 전할 부담을 가져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또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이러한 명령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 모두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선포해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따르면 주님의 모든 노예들은 그분과 계산해야 한다. 주님은 “잘하였다, 착하고 신실한 노예야.”(21절)라고 하시든지 “악하고 게으른 노예야”(26절)라고 하실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보상을 받을 것인지 받지 못할 것인지의 여부를 그분의 의에 따라 결정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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