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는 제사장이자 율법학자였다. 따라서 그는 율법 조문만을 아는 율법학자가 아니라 제사장 겸 율법학자였다.
제사장은 주님과 연합되고 주님으로 적셔진 사람이다. 에스라는 이러한 사람이었다.
에스라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 하나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갈망과 하나님의 경륜을 아는 사람이었다.
제사장 겸 율법학자로서 에스라는 주님을 계속 접촉함으로써 주님과 하나 되었다.
에스라는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것은 모세가 이미 말한 것이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율법의 말씀에 대한 통찰력을 얻으려고 율법학자인 에스라에게 모여들었다. 느헤미야기 8장 13절에서 ‘통찰력’은 내재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가리킨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늘에 속한 진리로 교육함으로 재조성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증거가 될 수 있게 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이 땅에서 그분의 증거가 될 신성하게 조성된 한 백성,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조성된 한 백성을 얻으시는 것이었다.
포로 된 데에서 돌아온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제멋대로 행동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바빌론에서 태어나서 자라, 조성에 있어서 바빌론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빌론의 요소가 그들 안으로 일해 넣어져 그들의 존재를 조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상의 땅에 돌아와 이스라엘 나라의 시민이 된 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조성될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과 부합하는 문화, 곧 하나님을 표현하는 문화 안으로 이끌려면, 그들을 가르치고 재조성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문화에는 많은 교육이 필요하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성하는 일에 매우 유용한 사람이었는데, 이것은 그가 하늘에 속한 신성한 조성과 문화를 모두 소유하고 있었고, 그를 통해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조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라는 백성이 신성한 말씀 안의 하늘에 속한 진리로 재교육되고 재조성되도록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게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성하려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씀으로 그들을 교육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성하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 넣음으로써 말씀으로 적셔지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일할 때, 하나님 자신이신 하나님의 영은 말씀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요소와 함께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의 존재 안으로 분배하신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재조성된다.
에스라의 사역을 통해 재조성된 결과로 이스라엘은 (예표상으로) 특별한 나라, 곧 하나님께 거룩하게 되고 분별되어 하나님을 표현하는 나라가 되었다.
포로 되어 있다가 돌아온 이들은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단체적으로 재조성되어 하나님의 증거가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상, 하나님의 견해, 하나님의 온 존재를 주입받았다. 이것에 의해 그들은 하나님의 재생산이 되었다.
이러한 방식의 신성한 재조성에 의해 모든 사람이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신성한 특성을 표현하는 신성한 나라가 되었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에스라들, 곧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으로 적셔지고, 하나님과 하나이고, 하나님과 연합되고, 하나님으로 충만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한 제사장 겸 교사들이 필요하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회복 안에서 교사가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주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탄의 어둠에서 신성한 빛 안으로 이끄시기 위해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사람은 죄에 빠짐으로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졌고, 그 결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런 무지함의 결과는 어둠과 죽음이다.
세상의 빛이신 주님은 큰 빛으로 오셔서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셨다.
주님의 가르침은 빛의 말씀을 해방함으로, 어둠과 죽음 속에 있는 사람들이 생명의 빛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가르침은 너울을 벗겨 주는 계시와 동일한 것이다.
가르치는 것은 너울을 걷어 주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 그들이 삼일 하나님에 관한 것을 볼 수 있도록 너울을 제거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교회 집회에서 무언가를 말할 때, 우리가 하는 말은 너울을 걷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가르침이 계시를 제시하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에스라들은 진리로 하나님의 백성을 교육하여 조성해 주는 수고를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증거, 곧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이 될 수 있다.
회복에는 가장 높은 진리, 곧 지난 수 세기에 걸쳐 회복된 진리들의 완결인 진리가 있다.
우리가 반드시 채워야 할 가장 큰 필요는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성도들을 진리 안으로 이끌어 회복을 계속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객관적인 진리들과 주관적인 진리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성경을 연구할 때 우리는 단지 ‘가지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뿌리들’과 ‘줄기’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단계들과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결정화된 의미를 보아야 한다.
진리로 조성되는 것은 진리가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져 우리의 내재적인 존재, 곧 우리의 유기적인 조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신성한 계시의 내재적인 요소가 반드시 우리의 존재 안으로 일해 넣어지고 조성되어야 한다.
일단 진리가 우리의 이해를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오면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되며,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의 기억 속에 진리를 간직함으로써 진리를 축적하게 된다.
진리가 우리의 기억 속으로 들어온 후에는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자양분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진리를 축적하게 되며 지속적으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신성한 계시로 훈련받아야 한다.
성경 안에 있는 중요한 계시들은 거의 모두 워치만 니 형제님과 위트니스 리 형제님의 사역에서 다루어졌다. 우리는 이러한 순수하고 건강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독성이 있는 야생 박’을 모으는 데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성경 말씀의 내재적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라이프 스타디》와 각주가 있는 〈회복역 성경〉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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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진리로 건축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회복역 성경〉의 본문과 모든 각주를 연구해야 한다. 관주를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를 연구해야 한다. 각주가 있는 〈회복역 성경〉의 본문과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를 교과서로 삼으라. 이것들은 나의 저작이기 때문에 나는 이것들의 특성을 알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우리의 출판물이 저술된 방식을 알 수 있도록 이것을 여러분에게 교통해 주는 것이다. 그것들을 단지 가벼운 방식으로 읽는다면, 여러분은 그것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라이프 스타디》를 연구하지 않고 그저 읽기만 한다면, 일시적인 자양분만 얻게 될 것이다. 그것은 대기의 수증기와 같은 일종의 영감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읽은 것이 우리의 존재 안에서 진리가 될 때, 영원히 남아 있는 자양분이 된다. 나는 주님에게서 항상 견고한 진리를 받았다. 이것이 내 안에 남아 있으면서 늘 내게 자양분을 준다. 여러분은 진리를 소유해야 한다. 진리가 여러분 안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의 사고(思考)를 통해서이다. 그럴 때 진리는 여러분의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된다.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한 진리는 여러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진리는 여러분의 사고, 이해를 통해 여러분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진리가 우리의 기억 속으로 들어올 때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자양분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진리를 축적하게 되며 지속적으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진리를 제시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고, 다만 그들에게 영감이나 감동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견고하게 하고 진리로 조성되게 할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에서 사람들에게 참고 인내하며 친절하고 의로우며 절제하라고 가르치는 것만 본다. 그들은 이런 종류의 가르침이 선하고 합당하다고 생각하며, 중국 유생(儒生)들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비밀들에 관한 성경의 계시는 전혀 알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미국과 대만의 모든 성도들에게 하루에 두 시간 정도를 내어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연구하라고 격려하였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신약 전체를 사 년 만에 통독할 수 있다. 나는 모든 젊은이가 이렇게 하는 데에 시간을 사용하기 바란다. 그러면 사 년 후에 여러분은 신약성경을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뛰어난 성경 교사가 되어 각처에서 주님의 큰 필요를 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열다섯 살 때에 게을렀던 젊은이는 열여덟 살이 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고등학생 때 기꺼이 열심히 공부한다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사 년 동안 대학 생활을 한다면, 스물두 살 때는 내적으로 더 많이 깨달을 것이고,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다면 학교로 돌아가 대학 교육을 받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지 않으면 여러분이 다른 이들을 확신시키기가 어려울 것이다.
솔로몬이 젊은 날에 우리의 주님을 기억하라고(전 12:1) 말했듯이, 열여덟 살인 이들은 더 깊은 방식으로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젊은이들은 아직 젊을 때 최고봉의 진리들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5일
우리에게 합당하고 충분한 영적인 체험이 있다면,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있는 가르침이 계시와 동일한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사실상 가르침은 바로 신성한 계시이다. 우리는 여름 진리 학교에서 우리 반에 있는 청소년들을 가르칠 때 그들에게 계시를 제시해야 한다.
계시는 너울을 벗겨 주는 것이다. 우리는 청소년들을 가르칠 때, 그들이 삼일 하나님에 관한 것을 볼 수 있도록 너울을 제거해 주어야 한다. 어떤 중요한 것이 너울에 의해 시야에서 가려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르침으로써 서서히 그 너울을 벗겨 주어야 한다. 이것이 가르치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우리의 말을 들을 때 너울이 조금씩 걷혀야 한다. 가르치는 것은 너울을 걷어 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데 유익하다는 말이 너울을 벗기고 걷어 내는 데 유익하다는 뜻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분반 활동 때마다 거듭해서 우리는 너울을 서서히 벗길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너울을 벗기는 방식으로 가르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가르칠 때마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계시를 제시할 것이다. 이렇게 가르침을 받는 이들은 삼일 하나님에 관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교회 집회에서 무언가를 말할 때, 우리가 하는 말은 너울을 걷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가르침이 계시를 제시하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가르침에 이어서 가책받게 함 혹은 책망함이 언급된 것은 의미가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속한 것을 보게 되면 반드시 자신이 본 것에 의해 가책을 받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볼 때마다 자신의 실수와 악행과 부족과 죄들을 깨닫는다. 그 결과 우리는 가책받게 된다. 즉 책망받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계시를 얻는다면, 그 계시는 우리를 가책받게 하고 책망할 것이다.
가르침 또는 계시는 우리를 가책받게 하며, 가책받은 결과 바로잡히게 된다. 바로잡는 것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 어떤 사람을 옳은 길로 돌이키게 하는 것, 올바른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잡히고 나서 합당하게 교육받는다. 즉 의로 교육받는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가르치고’, ‘가책받게 하고’, ‘바로잡는 것’에는 수식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교육하는 것’에는 수식어를 사용한다. 그는 의로 교육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의로움은 옳게 되는 것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교육은 우리가 옳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책받고 책망받는 이유는 여러 방식과 방면에서 우리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나 그 영에 대해 올바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교회나 형제자매들이나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님이나 자녀나 이웃에 대해,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 올바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돈을 쓰는 방식이나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나 옷 입는 방식이나 머리를 손질하는 방식에서 올바르지 못할 수 있다. 우리가 아주 많은 것에서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받은 계시에서 책망을 받게 된다.
디모데후서 3장 17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며, 온갖 선한 일을 위하여 충분히 준비되게 합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사람, 곧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하고(요 1:13, 벧후 1:4),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고전 6:17), 그 결과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하나님-사람, 곧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내쉬심으로 산출된다.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심으로써 하나님-사람들이 산출된다.
4일
재교육을 받는 것에 더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양육받는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양육받는 것이 필요했다. 부모는 그들의 어떠함과 생각을 자녀들 안으로 주입한다. 결국 이것에 의해 자녀들은 부모의 어떠함과 똑같이 조성된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느헤미야는 에스라의 도움을 받아 이스라엘 나라를 완전히 재조성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특별한 나라, 곧 하나님께 거룩하게 되고 분별되어 하나님을 표현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상, 하나님의 견해, 하나님의 온 존재를 주입받아서 하나님의 재생산이 되었다. 이러한 방식의 신성한 재조성에 의해 모든 사람이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이 땅에서 신성한 특성을 표현하는 신성한 나라가 되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단체적으로 재조성되어 하나님의 증거가 되었다. 포로 되어 있다가 돌아온 이들은 느헤미야의 인도 아래 이루어진 재조성을 통해 하나님의 증거가 되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여 성경을 읽고 배우는 장소이다.
회당에서 주 예수님은 권위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사람은 죄에 빠짐으로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졌으며, 그 결과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무지함의 결과는 첫째가 어둠이고 다음은 죽음이다. 세상의 빛이신 노예-구주는 사람들이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어둠의 땅 갈릴리에 오셨다. 주님은 큰 빛으로 오셔서 그들을 비추셨다. 그분의 가르침은 죽음의 어둠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는 빛의 말씀을 해방함으로, 그들이 생명의 빛(요 1:4)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노예-구주께서 하나님을 섬기실 때 하신 첫 번째 일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노예께서 노예-구주로서 타락한 사람들을 섬기실 때 하신 두 번째 일은 사람들을 사탄의 어둠에서 신성한 빛 안으로 이끄시기 위해(행 26:18), 이 같은 가르침을 수행하시는 것이었다.
주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자라시고, 유대가 아닌 갈릴리에서 전파하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갈릴리는 멸시받는 지역일 뿐 아니라 어둠의 장소였다. 마태복음 4장 15절과 16절은 이렇게 말한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해변 길, 요단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리야,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땅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주 예수님은 갈릴리를 두루 다니실 때, 큰 빛으로서 어둠을 비추시고 죽음의 땅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비추셨다. 특별히 노예-구주의 가르침은 큰 빛의 비춤이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비추는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빛이 그들을 비추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어둠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빛 비춤을 받았다.
마가복음 1장 22절에 따르면,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크게 놀랐다. 그들은 주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는 분으로서 가르치셨다고 말했다. 스스로 공허한 지식을 가르쳤던 자칭 율법학자들에게는 권위도 능력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신 이 노예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실재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분은 사람들을 굴복시키시는 영적인 능력이 있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신성한 다스림에 복종시키시는 신성한 권위도 있으셨다.
3일
시나이산에서 교육받고 훈련받은 시간을 가진 결과, 이스라엘 나라는 단지 형성되고 조직됨으로 군대가 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 사람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조성됨으로 군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예표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사람들이었다. 그들과 관련된 모든 것, 심지어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 기둥이 있는 그들의 환경까지도 하나님의 표현이었다. 그들이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아가시는 것이었다(시 68편).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하나님을 표현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 내버려 두셨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그다음 세대를 일으키셨고, 그들은 큰 기적을 통해 요단강을 건넜다. 하늘에 속한 군대로 조성된 그들은 여리고에 이르렀다. 그들이 외쳤을 때 여리고성은 무너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증거였다. 이것은 하나님-사람들의 움직임이요 생활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진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이성에 이르렀을 때, 그들 중 한 사람 때문에 실패하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계속해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는 타락만 있었다. 하나님은 신언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에게 경고하시고 그들을 돌이키게 하려고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거절했다. 결국 하나님은 바빌론 사람들을 데려와 그 좋은 땅을 차지하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바빌론으로 데려가 징계와 형벌을 받게 하셨다.
하나님은 좋은 땅, 약속하신 땅, 임마누엘의 땅을 잊으실 수 없었다(사 8:8). 좋은 땅은 하나님의 증거를 위한 하나님-사람들의 땅이어야 했다. 먼저는 왕가의 후손인 스룹바벨의 인도 직분 아래서 귀환이 이루어졌다. 스룹바벨은 행정을 수행하고 통치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에 첫 번째 귀환을 인도하기에 합당했다. 그는 유능한 통치자였고, 백성을 이끌어서 제단과 성전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백성은 여전히 제멋대로 행동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조성에 있어서 바빌론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스라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자 하나님의 말씀 곧 모세의 율법에 통달한 율법학자가 필요했다(스 7:6, 11). 에스라는 하늘에 속한 신성한 조성과 문화를 모두 소유하고 있었다. 에스라는 백성을 함께 불러 모아 놓고 에스라 자신의 죄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자백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게 하였다.
오늘날 교회생활 안에서 장로들의 주된 책임은 진리를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성경은 장로의 자격 중 하나가 가르치기를 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딤전 3:2). 바울은 어떤 장로들이 직업을 갖지 않고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할 수 있으며, 그러하다면 교회는 그들을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5:17-18). 그러나 나는 어떤 장로들이 진리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고 심지어 특정한 문제가 진리의 항목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는 것을 목격했다.
주님을 부르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고,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실행해야 하지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진리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침례와 장로들에 의한 행정과 발 씻는 것과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은 진리이다. 거듭남, 거룩하게 됨, 새롭게 됨, 변화됨, 같은 형상을 이룸, 변형됨, 신격에서가 아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됨과 같은 이 모든 것들은 진리이다.
모든 장로들과 동역자들은 에스라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해야 한다. 니 형제님과 나는 말씀에 통달하기 위해 말씀을 배우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오늘날에는 스룹바벨뿐 아니라 더 많은 에스라가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교육하며, 하늘에 속한 진리로 그들을 조성할 수 있는 에스라들이 필요하다.
2일
재조성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옴으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느 8장).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지 않고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재조성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기질과 습관적인 행동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재조성하실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점진적으로 우리의 생각과 사고방식을 바꾼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영과 하나이다(엡 6:17).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일할 때, 그 영은 말씀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요소와 함께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의 존재 안으로 분배하신다. 우리는 그러한 분배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재조성된다.
바빌론에서 포로 된 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 중 대부분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빌론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바빌론의 요소가 그들 안으로 일해 넣어져 그들의 존재를 조성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조상의 땅에 돌아와 이스라엘 나라의 시민이 된 후에 재조성될 필요가 있었다. 에스라는 이 시점에서 매우 유용한 사람이었는데, 이것은 그를 통해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조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이 땅에서 그분의 증거가 될 신성하게 조성된 한 백성을 얻으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증거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조성되어야 한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인도하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단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으로 조성되어 하나님의 증거인 나라가 되었다.
느헤미야기 8장 1절부터 8절까지에 따르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일제히 ‘물 문’ 앞에 모여서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와 읽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에스라는 그렇게 하였다. 그가 여호와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면, 온 백성은 모두 손을 들어 “아멘, 아멘.” 하며 응답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다. 이것은 거역적인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설득되고 굴복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신 하나님의 영께서 하나님의 요소를 우리 안으로 분배하실 수 있는 견고한 기초이다. 이러한 분배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으로 조성될 수 있다. 이것이 매일매일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어야 한다. 함께 모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읽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신성한 조성의 방식에 따라 함께 모이는 것이다.
재조성되려면, 우리는 성경 육십육 권을 거듭거듭 읽어야 한다. 육십여 년 이상 말씀을 읽은 사람으로서, 나는 매일 말씀을 읽는 것을 통하여 재조성되었다고 간증할 수 있다. 매일 나는 조금씩 더 재조성된다.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이자 율법학자인 에스라와 백성의 이해를 도운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그날은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거나 울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왜냐하면 온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울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슬퍼하지 말고 기쁨으로 가득한 명절을 지내라고 명령했다. 백성은 말씀에 설득되고 굴복되어 자신들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웠다(느 8:9-10상).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슬퍼하지 마십시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여러분의 힘입니다.”(10하절)라고 말했다. 그러자 ‘온 백성은 저마다 가서 먹고 마시고 몫을 보내 주며 크게 기뻐하였다’(12절).
신언노트, 2023 02 19
제사장 겸 율법학자인 에스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한 이들인
에스라들의 필요성
에스라, 곧 한 제사장인 율법학자와,
또 에스라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숙련된 사람들—에 대한 필요
에스라는
제사장
곧 아론의 후손이었고,
또한 율법학자였다.
구약의 율법학자는
신약의 교사와 동등하다.
신언자는
하나님께 직접 받아서
말하는 사람이고,
교사는
신언자가 말한 것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모세가 신언자였다는 것을
아는데,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직접 받아서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학자는
모세가 말한 것들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학개와 스가랴는
하나님께 직접 받아서
말하였기 때문에
신언자들이었다.
학개가 말한 것은
다른 누구에게도
계시된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스가랴의 메시지는
훨씬 더 놀랍다.
스가랴는
그리스도께서
순이시고,
일곱 눈을 가진 기초 돌이시며,
꼭대기 돌이시라고
말했다.
모세가
이것을 말했는가?
아니다.
그것을 말한
첫 번째 사람은
스가랴이다.
스가랴는
교사가 아닌 신언자로서,
하나님의
즉각적이고 현재적이며
최신의 영감에서 나온
말을 하였다.
그러나 에스라는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것은
모세가 이미
말한 것이었다.
그는
율법학자이자 교사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회복의
원칙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진부한 교사가 아닌
제사장 겸 교사가
필요하다.
에스라는
제사장이기도 하였다.
제사장은
주님과 연합되고
주님으로 적셔지며
주님을 먹고
온종일 주님을 호흡하는
사람이다.
제사장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주님 자신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교사들은 바로
이러한 이들이어야 한다.
에스라는
이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금식할 것을 선포했고
자신도 금식했다.
그는 단순히
주님을 계속 접촉함으로써
주님과 하나 되었다.
그는
율법 조문만을 아는
율법학자가 아니라
제사장 겸 율법학자였다.
어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아는 것을
가르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그들이 가진 지식이나
그들이 가르치는 것과
같지 않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에
이런 교사는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제사장 겸 율법학자,
즉 제사장 겸 교사인
에스라가 필요하다.
이런 사람은
즉각적이고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으로 적셔지며,
하나님과 하나인
교사이다.
에스라는 아주 많이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왕에게
자신을 보호할
군대를 보내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을 신뢰했다.
이러한 사람이
회복 안에서
교사가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
주님의 건축물을
회복하는 데에는
객관적인 것만 가르치는
교사들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필요하다.
즉 제사장 직분이
가르침과 섞이는 것이
필요하다.
지식만으로는
건축하지 못한다.
지식은
죽이는 것이다.
바로 제사장 겸 교사가
건축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인수 증가를 통해
회복을 강화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풍성한 체험들로
회복을 부유하게 할 수 있다.
이런 에스라들이 있는 것에 대해
주님을 찬양하자.
나는
주님께서
점점 더 많은 에스라들,
즉 하나님과 하나이고
하나님으로 적셔지며
하나님으로 충만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한
사람들을 산출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사람들이
포로 된 이들을 이끌어
돌아오게 하고,
더 많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주님의 회복 안으로 가져오는 데
적합한 사람들이다.
이튿날
조상 집안의
우두머리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율법의 말씀에 대한
통찰력을 얻고자
율법학자인
에스라에게 모여들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통찰력 없이
성경을 읽는다.
여기 느헤미야기 8장 13절에서
‘통찰력’은
내재적인 의미를 가리킨다.
우리는 모두
성경 말씀의
내재적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자 율법학자였다.
따라서 그는
율법 조문만을 아는
율법학자가 아니라
제사장 겸 율법학자였다.
제사장은
주님과 연합되고
주님으로 적셔진 사람이다.
에스라는
이러한 사람이었다.
에스라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 하나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갈망과
하나님의 경륜을
아는 사람이었다.
제사장 겸 율법학자로서
에스라는
주님을 계속 접촉함으로써
주님과 하나 되었다.
에스라는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것은
모세가 이미 말한 것이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율법의 말씀에 대한
통찰력을 얻으려고
율법학자인
에스라에게 모여들었다.
느헤미야기 8장 13절에서
‘통찰력’은
내재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가리킨다.
재조성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옴으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지 않고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재조성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기질과
습관적인 행동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재조성하실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점진적으로
우리의 생각과 사고방식을
바꾼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영과 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일할 때,
그 영은
말씀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요소와 함께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의 존재 안으로
분배하신다.
우리는
그러한 분배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재조성된다.
바빌론에서 포로 된 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 중 대부분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빌론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바빌론의 요소가
그들 안으로 일해 넣어져
그들의 존재를 조성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조상의 땅에 돌아와
이스라엘 나라의 시민이 된 후에
재조성될 필요가 있었다.
에스라는
이 시점에서
매우 유용한 사람이었는데,
이것은
그를 통해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조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이 땅에서
그분의 증거가 될
신성하게 조성된
한 백성을 얻으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증거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조성되어야 한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인도하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단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으로 조성되어
하나님의 증거인
한 나라가 되었다.
느헤미야기 8장
1절부터 8절까지에 따르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일제히
‘물 문’ 앞에 모여서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와
읽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에스라는
그렇게 하였다.
그가
여호와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면,
온 백성은
모두 손을 들어
“아멘, 아멘.” 하며 응답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다.
이것은
거역적인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설득되고 굴복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신
하나님의 영께서
하나님의 요소를
우리 안으로 분배하실 수 있는
견고한 기초이다.
이러한 분배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으로 조성될 수 있다.
이것이
매일매일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어야 한다.
함께 모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읽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신성한 조성의 방식에 따라
함께 모이는 것이다.
재조성되려면,
우리는
성경 육십육 권을
거듭거듭 읽어야 한다.
육십여 년 이상
말씀을 읽은 사람으로서,
나는
매일 말씀을 읽는 것을 통하여
재조성되었다고
간증할 수 있다.
매일 나는
조금씩 더 재조성된다.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이자 율법학자인 에스라와
백성의 이해를 도운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그날은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거나 울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왜냐하면 온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울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슬퍼하지 말고
기쁨으로 가득한
명절을 지내라고
명령했다.
백성은
말씀에 설득되고 굴복되어
자신들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웠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슬퍼하지 마십시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여러분의 힘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온 백성은 저마다 가서
먹고
마시고
몫을 보내 주며
크게 기뻐하였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늘에 속한 진리로 교육함으로
재조성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증거가 될 수 있게 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이 땅에서
그분의 증거가 될
신성하게 조성된 한 백성,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조성된
한 백성을 얻으시는 것이었다.
포로 된 데에서 돌아온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제멋대로 행동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바빌론에서 태어나서 자라,
조성에 있어서
바빌론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빌론의 요소가
그들 안으로 일해 넣어져
그들의 존재를
조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상의 땅에 돌아와
이스라엘 나라의 시민이 된 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조성될 필요가 있었다.
시나이산에서
교육받고 훈련받은 시간을 가진 결과,
이스라엘 나라는 단지
형성되고 조직됨으로
군대가 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
사람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조성됨으로
군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예표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사람들이었다.
그들과 관련된 모든 것,
심지어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 기둥이 있는
그들의 환경까지도
하나님의 표현이었다.
그들이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아가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하나님을 표현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 내버려 두셨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그다음 세대를 일으키셨고,
그들은
큰 기적을 통해
요단강을 건넜다.
하늘에 속한 군대로
조성된 그들은
여리고에 이르렀다.
그들이
외쳤을 때
여리고성은 무너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증거였다.
이것은
하나님-사람들의
움직임이요 생활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진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이성에 이르렀을 때,
그들 중 한 사람 때문에
실패하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계속해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는
타락만 있었다.
하나님은
신언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에게 경고하시고
그들을
돌이키게 하려고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거절했다.
결국 하나님은
바빌론 사람들을 데려와
그 좋은 땅을 차지하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바빌론으로 데려가
징계와 형벌을
받게 하셨다.
하나님은
좋은 땅,
약속하신 땅,
임마누엘의 땅을
잊으실 수 없었다.
좋은 땅은
하나님의 증거를 위한
하나님-사람들의 땅이어야 했다.
먼저는
왕가의 후손인
스룹바벨의 인도 직분 아래서
귀환이 이루어졌다.
스룹바벨은
행정을 수행하고
통치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에
첫 번째 귀환을 인도하기에
합당했다.
그는
유능한 통치자였고,
백성을 이끌어서
제단과 성전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백성은 여전히
제멋대로 행동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조성에 있어서
바빌론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스라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자
하나님의 말씀
곧 모세의 율법에 통달한
율법학자가 필요했다.
에스라는
하늘에 속한
신성한 조성과 문화를 모두
소유하고 있었다.
에스라는
백성을 함께 불러 모아 놓고
에스라 자신의 죄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자백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게 하였다.
오늘날 교회생활 안에서
장로들의 주된 책임은
진리를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성경은
장로의 자격 중 하나가
가르치기를 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어떤 장로들이
직업을 가지지 않고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할 수 있으며,
그러하다면 교회는
그들을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어떤 장로들이
진리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고
심지어 특정한 문제가
진리의 항목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는 것을
목격했다.
주님을 부르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고,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실행해야 하지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진리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침례와
장로들에 의한 행정과
발 씻는 것과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은
진리이다.
거듭남, 거룩하게 됨,
새롭게 됨, 변화됨,
같은 형상을 이룸, 변형됨,
신격에서가 아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됨과 같은
이 모든 것들은
진리이다.
모든 장로들과 동역자들은
에스라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해야 한다.
니 형제님과 나는
말씀에 통달하기 위해
말씀을 배우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오늘날에는
스룹바벨뿐 아니라
더 많은 에스라가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교육하며,
하늘에 속한 진리로
그들을 조성할 수 있는
에스라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과 부합하는 문화,
곧 하나님을 표현하는 문화 안으로
이끌려면,
그들을
가르치고
재조성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문화에는
많은 교육이 필요하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성하는 일에
매우 유용한 사람이었는데,
이것은
그가
하늘에 속한
신성한 조성과 문화를 모두
소유하고 있었고,
그를 통해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조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라는
백성이
신성한 말씀 안의
하늘에 속한 진리로
재교육되고 재조성되도록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게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성하려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씀으로
그들을 교육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성하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 넣음으로써
말씀으로 적셔지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일할 때,
하나님 자신이신
하나님의 영은
말씀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요소와 함께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의 존재 안으로
분배하신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재조성된다.
재교육을 받는 것에 더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양육받는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양육받는 것이 필요했다.
부모는
그들의 어떠함과 생각을
자녀들 안으로 주입한다.
결국 이것에 의해
자녀들은
부모의 어떠함과 똑같이 조성된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느헤미야는
에스라의 도움을 받아
이스라엘 나라를
완전히 재조성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특별한 나라,
곧 하나님께 거룩하게 되고 분별되어
하나님을 표현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상,
하나님의 견해,
하나님의 온 존재를
주입받아서
하나님의 재생산이 되었다.
이러한 방식의
신성한 재조성에 의해
모든 사람이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이 땅에서
신성한 특성을 표현하는
신성한 나라가 되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단체적으로
재조성되어
하나님의 증거가 되었다.
포로 되어 있다가 돌아온 이들은
느헤미야의 인도 아래 이루어진
재조성을 통해
하나님의 증거가 되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여
성경을 읽고 배우는 장소이다.
회당에서
주 예수님은
권위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사람은
죄에 빠짐으로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졌으며,
그 결과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무지함의 결과는
첫째가 어둠이고
다음은 죽음이다.
세상의 빛이신 노예-구주는
사람들이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어둠의 땅 갈릴리에 오셨다.
주님은
큰 빛으로 오셔서
그들을 비추셨다.
그분의 가르침은
죽음의 어둠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는
빛의 말씀을 해방함으로,
그들이
생명의 빛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노예-구주께서
하나님을 섬기실 때 하신
첫 번째 일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노예께서
노예-구주로서
타락한 사람들을 섬기실 때 하신
두 번째 일은
사람들을
사탄의 어둠에서
신성한 빛 안으로 이끄시기 위해,
이 같은 가르침을
수행하시는 것이었다.
주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자라시고,
유대가 아닌
갈릴리에서
전파하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갈릴리는
멸시받는 지역일 뿐 아니라
어둠의 장소였다.
마태복음 4장
15절과 16절은
이렇게 말한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해변 길, 요단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리야,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땅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주 예수님은
갈릴리를 두루 다니실 때,
큰 빛으로서
어둠을 비추시고
죽음의 땅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비추셨다.
특별히 노예-구주의 가르침은
큰 빛의 비춤이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비추는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빛이
그들을 비추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어둠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빛 비춤을 받았다.
마가복음 1장 22절에 따르면,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크게 놀랐다.
그들은
주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는 분으로서
가르치셨다고 말했다.
스스로 공허한 지식을 가르쳤던
자칭 율법학자들에게는
권위도 능력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신
이 노예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실재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분은
사람들을 굴복시키시는
영적인 능력이 있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신성한 다스림에 복종시키시는
신성한 권위도 있으셨다.
에스라의 사역을 통해
재조성된 결과로
이스라엘은
(예표상으로) 한 특별한 나라,
곧 하나님께
거룩하게 되고 분별되어
하나님을 표현하는
한 나라가 되었다.
포로 되어 있다가 돌아온 이들은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단체적으로
재조성되어
하나님의 증거가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상,
하나님의 견해,
하나님의 온 존재를
주입받았다.
이것에 의해 그들은
하나님의 재생산이 되었다.
이러한 방식의
신성한 재조성에 의해
모든 사람이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신성한 특성을 표현하는
신성한 나라가 되었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에스라들,
곧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으로 적셔지고,
하나님과 하나이고,
하나님과 연합되고,
하나님으로 충만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한
제사장 겸 교사들이 필요하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회복 안에서
교사가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주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탄의 어둠에서
신성한 빛 안으로
이끄시기 위해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사람은
죄에 빠짐으로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졌고,
그 결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런 무지함의 결과는
어둠과 죽음이다.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서
큰 빛으로 오셔서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셨다.
주님의 가르침은
빛의 말씀을 해방함으로,
어둠과 죽음 속에 있는 사람들이
생명의 빛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우리에게
합당하고 충분한
영적인 체험이 있다면,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있는 가르침이
계시와 동일한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사실상 가르침은 바로
신성한 계시이다.
우리는
여름 진리 학교에서
우리 반에 있는
청소년들을 가르칠 때
그들에게
계시를 제시해야 한다.
계시는
너울을 벗겨 주는 것이다.
우리는
청소년들을 가르칠 때,
그들이
삼일 하나님에 관한 것을
볼 수 있도록
너울을 제거해 주어야 한다.
어떤 중요한 것이
너울에 의해
시야에서 가려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르침으로써
서서히
그 너울을
벗겨 주어야 한다.
이것이
가르치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우리의 말을 들을 때
너울이
조금씩
걷혀야 한다.
가르치는 것은
너울을 걷어 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데
유익하다는 말이
너울을
벗기고 걷어 내는 데
유익하다는 뜻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분반 활동 때마다 거듭해서
우리는
너울을
서서히 벗길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너울을 벗기는 방식으로
가르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가르칠 때마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계시를 제시할 것이다.
이렇게
가르침을 받는 이들은
삼일 하나님에 관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교회 집회에서
무언가를 말할 때,
우리가 하는 말은
너울을
걷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가르침이
계시를 제시하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가르침에 이어서
가책받게 함
혹은 책망함이
언급된 것은
의미가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속한 것을
보게 되면 반드시
자신이 본 것에 의해
가책을 받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볼 때마다
자신의
실수와 악행과
부족과 죄들을
깨닫는다.
그 결과 우리는
가책받게 된다.
즉 책망받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계시를 얻는다면,
그 계시는
우리를
가책받게 하고
책망할 것이다.
가르침 또는 계시는
우리를 가책받게 하며,
가책받은 결과
바로잡히게 된다.
바로잡는 것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
어떤 사람을
옳은 길로 돌이키게 하는 것,
올바른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잡히고 나서
합당하게 교육받는다.
즉 의로 교육받는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가르치고’,
‘가책받게 하고’,
‘바로잡는 것’에는
수식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교육하는 것’에는
수식어를 사용한다.
그는
의로 교육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의로움은
옳게 되는 것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교육은
우리가
옳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책받고 책망받는 이유는
여러 방식과 방면에서
우리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나 그 영에 대해
올바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교회나 형제자매들이나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님이나 자녀나 이웃에 대해,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
올바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돈을 쓰는 방식이나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나
옷 입는 방식이나
머리를 손질하는 방식에서
올바르지 못할 수 있다.
우리가
아주 많은 것에서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받은
계시에서
책망을 받게 된다.
디모데후서 3장 17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며,
온갖 선한 일을 위하여
충분히 준비되게 합니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사람,
곧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
그 결과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하나님-사람,
곧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내쉬심으로
산출된다.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심으로써
하나님-사람들이 산출된다.
가르침은
너울을 벗겨 주는
계시와 동일한 것이다.
가르치는 것은
너울을 걷어 주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
그들이
삼일 하나님에 관한 것을
볼 수 있도록
너울을 제거해 주어야 한다.
오늘날의 에스라들은
진리로
하나님의 백성을
교육하여
조성해 주는
수고를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증거,
곧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이
될 수 있다.
진리로 건축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회복역 성경〉의
본문과 모든 각주를
연구해야 한다.
관주를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를
연구해야 한다.
각주가 있는 〈회복역 성경〉의 본문과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를
교과서로 삼으라.
이것들은
나의 저작이기 때문에
나는
이것들의 특성을
알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우리의 출판물이 저술된
방식을 알 수 있도록
이것을
여러분에게
교통해 주는 것이다.
그것들을 단지
가벼운 방식으로 읽는다면,
여러분은
그것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라이프 스타디》를
연구하지 않고
그저 읽기만 한다면,
일시적인 자양분만
얻게 될 것이다.
그것은
대기의 수증기와 같은
일종의 영감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읽은 것이
우리의 존재 안에서
진리가 될 때,
영원히 남아 있는
자양분이 된다.
나는
주님에게서 항상
견고한 진리를 받았다.
이것이
내 안에 남아 있으면서 늘
내게 자양분을 준다.
여러분은
진리를 소유해야 한다.
진리가
여러분 안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의 사고(思考)를 통해서이다.
그럴 때 진리는
여러분의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된다.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한 진리는
여러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진리는
여러분의
사고, 이해를 통해
여러분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진리가
우리의 기억 속으로 들어올 때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자양분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진리를 축적하게 되며
지속적으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진리를 제시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고,
다만 그들에게
영감이나 감동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견고하게 하고
진리로 조성되게 할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에서
사람들에게
참고 인내하며
친절하고 의로우며
절제하라고 가르치는 것만
본다.
그들은
이런 종류의 가르침이
선하고 합당하다고 생각하며,
중국 유생(儒生)들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비밀들에 관한
성경의 계시는
전혀 알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미국과 대만의
모든 성도들에게
하루에 두 시간 정도를 내어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연구하라고
격려하였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신약 전체를
사 년 만에
통독할 수 있다.
나는
모든 젊은이가
이렇게 하는 데에
시간을 사용하기
바란다.
그러면 사 년 후에
여러분은
신약성경을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뛰어난 성경 교사가 되어
각처에서
주님의 큰 필요를
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열다섯 살 때에 게을렀던 젊은이는
열여덟 살이 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고등학생 때 기꺼이
열심히 공부한다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사 년 동안
대학 생활을 한다면,
스물두 살 때는
내적으로 더 많이
깨달을 것이고,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다면 학교로 돌아가
대학 교육을 받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지 않으면 여러분이
다른 이들을 확신시키기가
어려울 것이다.
솔로몬이
젊은 날에
우리의 주님을 기억하라고
말했듯이,
열여덟 살인 이들은
더 깊은 방식으로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젊은이들은
아직 젊을 때
최고봉의 진리들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회복에는
가장 높은 진리,
곧 지난 수 세기에 걸쳐 회복된
진리들의 완결인
그 진리가 있다.
우리가 반드시 채워야 할
가장 큰 필요는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성도들을
진리 안으로 이끌어
회복을
계속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객관적인 진리들과
주관적인 진리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성경을 연구할 때
우리는 단지
그 ‘가지들’에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 ‘뿌리들’과 그 ‘몸통(줄기)’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단계들과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결정화된 의미를
보아야 한다.
진리로 조성되는 것은
진리가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져
우리의 내재적인 존재,
곧 우리의 유기적인 조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신성한 계시의
내재적인 요소가 반드시
우리의 존재 안으로
일해 넣어지고
조성되어야 한다.
일단 진리가
우리의 이해를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오면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되며,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의 기억 속에
진리를 간직함으로써
진리를 축적하게 된다.
진리가
우리의 기억 속으로
들어온 후에는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자양분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진리를 축적하게 되며
지속적으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신성한 계시로
훈련받아야 한다.
성경 안에 있는
중요한 계시들은 거의 모두
워치만 니 형제님과
위트니스 리 형제님의 사역에서
다루어졌다.
우리는
이러한 순수하고 건강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독성이 있는 야생 박’을
모으는 데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성경 말씀의
내재적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라이프 스타디》와
각주가 있는 〈회복역 성경〉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1일
에스라는 제사장 곧 아론의 후손이었고, 또한 율법학자였다. 구약의 율법학자는 신약의 교사와 동등하다. 신언자는 하나님께 직접 받아서 말하는 사람이고, 교사는 신언자가 말한 것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모세가 신언자였다는 것을 아는데,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직접 받아서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학자는 모세가 말한 것들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학개와 스가랴는 하나님께 직접 받아서 말하였기 때문에 신언자들이었다. 학개가 말한 것은 다른 누구에게도 계시된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스가랴의 메시지는 훨씬 더 놀랍다. 스가랴는 그리스도께서 순이시고, 일곱 눈을 가진 기초 돌이시며, 꼭대기 돌이시라고 말했다. 모세가 이것을 말했는가? 아니다. 그것을 말한 첫 번째 사람은 스가랴이다. 스가랴는 교사가 아닌 신언자로서, 하나님의 즉각적이고 현재적이며 최신의 영감에서 나온 말을 하였다. 그러나 에스라는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것은 모세가 이미 말한 것이었다. 그는 율법학자이자 교사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회복의 원칙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진부한 교사가 아닌 제사장 겸 교사가 필요하다. 에스라는 제사장이기도 하였다.
제사장은 주님과 연합되고 주님으로 적셔지고 주님을 먹고 온종일 주님을 호흡하는 사람이다. 제사장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주님 자신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교사들은 바로 이러한 이들이어야 한다. 에스라는 이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금식할 것을 선포했고 자신도 금식했다. 그는 단순히 주님을 계속 접촉함으로써 주님과 하나 되었다. 그는 율법 조문만을 아는 율법학자가 아니라 제사장 겸 율법학자였다.
어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아는 것을 가르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그들이 가진 지식이나 그들이 가르치는 것과 같지 않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에 이런 교사는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제사장 겸 율법학자, 즉 제사장 겸 교사인 에스라가 필요하다. 이런 사람은 즉각적이고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으로 적셔지며, 하나님과 하나인 교사이다. 에스라는 아주 많이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왕에게 자신을 보호할 군대를 보내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을 신뢰했다. 이러한 사람이 회복 안에서 교사가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 주님의 건축물을 회복하는 데에는 객관적인 것만 가르치는 교사들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필요하다. 즉 제사장 직분이 가르침과 섞이는 것이 필요하다. 지식만으로는 건축하지 못한다. 지식은 죽이는 것이다. 바로 제사장 겸 교사가 건축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인수 증가를 통해 회복을 강화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풍성한 체험들로 회복을 부유하게 할 수 있다. 이런 에스라들이 있는 것에 대해 주님을 찬양하자. 나는 주님께서 점점 더 많은 에스라들, 즉 하나님과 하나이고 하나님으로 적셔지고 하나님으로 충만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한 사람들을 산출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사람들이 포로 된 이들을 이끌어 돌아오게 하고, 더 많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주님의 회복 안으로 가져오는 데 적합한 사람들이다.
이튿날 조상 집안의 우두머리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율법의 말씀에 대한 통찰력을 얻고자 율법학자인 에스라에게 모여들었다(느 8:13). 오늘날 많은 사람이 통찰력 없이 성경을 읽는다. 여기 느헤미야기 8장 13절에서 ‘통찰력’은 내재적인 의미를 가리킨다. 우리는 모두 성경 말씀의 내재적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