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을 가나안 땅으로 예표된 좋은 땅이신 그분 자신 안으로 이끄셨으며, 그러한 믿는 이들인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소유하고 그들에게 할당된 몫을 받은 후에, 그 땅에 대해 수고했다.
그들이 그 땅에 대해 기꺼이 수고하려고 하는지 그러지 않는지는 엄중한 문제였다. 그들은 그 땅에 대해 수고하며 그 땅을 경작해야 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포함한 풍성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해 부지런히 수고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 주는 그림이다.
우리가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후에 우리의 생활은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는 생활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 안에 사는 주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해야 하며,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
우리가 매우 풍성한 땅에 있지만 이 땅에 대해 수고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체험하고 누릴 소산이 없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산출하기 위해 땅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해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수고를 통해 우리 안에서 그분 자신을 산출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많은 소산을 주시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풍성한 체험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수확물은 우리가 수고하고 거두어들여 우리의 수확물이 되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매일 아침 우리는 기도하면서 주님께 그날의 은혜의 몫을 주시기를 구해야 하고, 주님에 대해 수고함으로 그분을 체험하고 누리기 위해 우리 자신을 주님께 헌신해야 한다.
온종일 우리는 주님과의 교통을 유지함으로써 그분을 접촉하고, 그분에 대해 수고하며, 그분을 적용하고, 그분을 체험하며, 그분을 누려야 한다.
우리의 영을 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고 그리스도를 체험하며 그리스도를 산출하는 열쇠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는 길은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좋은 땅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실재이신 그 영을 접촉하는 것이다.
온종일 우리의 모든 상황과 모든 환경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주님을 접촉하고 주님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용하여 주님을 믿고 사랑함으로써, 또한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주님을 접촉하고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의 실재, 곧 모든 것을 포함하신 생명 주시는 영의 분배를 받아들임으로써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한다.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인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젖과 꿀은 두 종류의 생명, 곧 식물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의 연합에서 산출된다.
신명기 8장 8절에서 꿀은 식물, 곧 밀과 보리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와 석류와 올리브나무와 함께 언급된다.
신명기 32장 14절에서 젖은 동물, 곧 소와 양과 함께 언급된다.
꿀은 대체로 식물의 생명과 관련되고, 젖의 성분 대부분은 동물의 생명과 관련된다.
이 두 생명이 함께 연합될 때, 벌에 의해 꽃의 화밀(花蜜)에서 꿀이 생산된다.
젖 또한 동물의 생명과 식물의 생명 모두에서 나온 산물이지만, 주로 동물의 생명에 속한다. 젖은 소와 양(동물의 생명)이 풀밭에서 풀(식물의 생명)을 먹음으로써 생산된다.
동물의 생명과 식물의 생명, 이 두 가지의 연합인 젖과 꿀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두 방면, 곧 구속하는 방면과 산출하는 방면을 상징한다.
식물의 생명은 산출하고 번성하는 생명이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산출하고 번성하는 생명을 상징한다.
동물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생명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구속하는 방면은 우리의 법리적인 구속을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의 산출하는 방면은 우리의 유기적인 구원을 위한 것이다.
주님의 상 위에 있는 상징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생명의 구속하는 방면과 산출하는 방면을 의미한다.
젖과 꿀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좋음과 달콤함을 말해 준다.
우리가 식물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 둘 다이신 그리스도를 동시에 체험하고 누릴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좋고 달콤하며 풍성하신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함과 달콤함, 즉 젖의 좋음과 꿀의 달콤함을 느낀다.
젖과 꿀의 땅이신 그리스도를 누림으로 우리는 젖과 꿀이신 그분으로 조성될 것이다. “나의 신부여, 그대의 입술은 신선한 꿀을 흘리고 / 그대의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으며”.
매일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여 여분 곧 수확물을 얻어서 교회 집회에 가져와 하나님 아버지께 단체적인 경배를 드려야 한다.
그 땅에서의 생활은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주님의 백성과 함께 단체적으로도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으로 충만한 생활이다.
좋은 땅에서의 생활은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고, 그리스도를 생산하고, 그리스도를 누리고, 다른 이들과 그리스도를 함께 나누고, 하나님께 그리스도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를 누리시도록 하는 생활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누리고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를 온 우주에 전람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는 경배가 되고 원수에게는 수치가 된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에 대해 부지런히 수고하고 우리의 손을 그리스도로 가득 채운 후에, 교회 집회에 와서 풍성하고 영광스러우신 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또한 하나님 자신과 함께 누리기를 바란다.
주님을 기념하고 아버지께 경배하려고 주님의 상에 올 때마다, 우리는 빈손으로 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손을 그리스도의 소산으로 가득 채워서 와야 한다.
그리스도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서로서로 그리스도를 누리고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누림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함께 단체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충분히 산출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여분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위해 소산물 중 최상의 부분을 그분께 드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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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고 그리스도의 풍성의 여분을 교회 집회에 가져와서 그리스도를 전람하고 하나님께 단체적인 경배를 드림”
6일
우리의 경배는 단지 창조주에 대한 경배가 아니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자신을 우리의 존재 안으로 넣으신 아버지에 대한 경배이다. 이제 우리의 경배는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우리 안으로 분배되심으로써 주관적인 것이 된다.
이런 종류의 경배는 대부분 주님의 상 집회에서 실행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의 상 집회에서 우리가 떡과 잔에 참여한 후에 주님은 앞장서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가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그 영 안에서 아버지께로 다시 인도하신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경배가 아들을 통하여 그 영 안에서 아버지께로 향한 것임을 계시하는 에베소서 2장 18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누가복음 15장에 완전히 묘사되어 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오게 되는 것은 아들께서 목자로서 찾으시고 그 영께서 여인으로서 빛 비추시는 것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 이렇게 돌아오게 되는 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 안에서 이루어진다. 아들과 그 영은 돌아오는 탕자 안으로 일해 넣어지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분배 안에서 드리는 참된 경배이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시대가 바뀌었음을 지적하셨다. 예표에서 유일한 경배의 장소는 예루살렘이었지만, 성취에서 이 장소는 우리의 영이다. 오늘날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거처가 있는 사실상의 예루살렘이다. 또한 좋은 땅의 소산물의 풍성한 여분은 그리스도의 풍성의 예표이다. 그리스도는 번제물과 소제물과 화목제물과 속죄제물과 속건제물과 요제물과 거제물과 전제물을 포함하여 좋은 땅의 풍성에서 나오는 모든 제물들의 실재이시다. 이 모든 제물들은 좋은 땅의 소산물의 풍성한 여분이었으며, 참된 여분 곧 참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예표들이었다. 이처럼 요한복음 4장 23절과 24절에서 사람의 영은 유일한 경배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대치하며, 그리스도는 좋은 땅의 풍성한 여분인 모든 제물들을 대치하신다.
우리는 아들을 좋은 땅으로 체험함으로써 실재이신 아들 안에서 아버지께 경배한다.
우리는 좋은 땅의 풍성한 소산물인 아들의 풍성을 누림으로써 실재이신 아들 안에서 아버지께 경배한다.
우리는 집회에 올 때마다, 주님께 경배하러 올 때마다 빈손으로 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산을 한 아름 가지고 와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한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말고, 그 이상의 그리스도를 생산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하고 빈곤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충분하고 넘치도록 그리스도를 생산해 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 풍성한 소산 중에 가장 좋은 것은 주님을 위해 남겨 놓아야 한다.
그리스도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그리스도를 누리고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누림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함께 단체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좋은 땅을 얻은 후의 생활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며 일하고, 그리스도를 생산하며, 그리스도를 누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나누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를 누리시도록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이다. 이러한 누림과 나눔은 그리스도를 온 우주에 전람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는 경배가 되고 원수에게는 수치가 된다.
그 땅에서의 생활은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주님의 백성과 함께 단체적으로도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으로 충만한 생활이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에 대해 부지런히 수고하고 우리의 손을 그리스도로 가득 채운 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인 합일의 터에 와서 풍성하고 영광스러우신 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또한 하나님 자신과 함께 누리기를 바란다.
5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분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려고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젖과 꿀은 모두 두 종류의 생명의 연합, 즉 동물의 생명과 식물의 생명의 연합에서 산출된다. 젖은 동물의 생명에 속한 소에게서 산출된다. 그러나 젖은 동물의 생명만으로는 산출될 수 없다. 젖이 산출되려면 풀이라는 식물의 생명이 필요하다. 따라서 젖은 식물의 생명으로부터 영양 공급을 받은 동물의 생명에서 산출된 것이다. 꿀 역시 원칙은 같다. 벌은 동물이다. 그러나 식물의 생명인 꽃이 없다면, 벌은 꿀을 산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젖과 꿀’이라는 표현은 좋은 땅이 짐승이나 뱀이 가득한 땅이 아니라 소와 벌과 풀과 꽃이 가득한 땅임을 보여 준다.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은 이 땅이 동물의 생명과 식물의 생명으로 가득함을 의미한다. 예표에서 그리스도는 이 두 종류의 생명의 산출물이시다. 침례자 요한은 주 예수님을 보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 “보십시오, …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요 1:29) 이것은 동물의 생명을 말한다. 주님은 죽어야 하는 한 알의 밀(12:24)로 자신을 언급하셨다. 이것은 식물의 생명을 말한다. 그분은 두 종류의 생명의 연합이시며 젖과 꿀을 산출하신다. 이 모든 것은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충만하시고 극도로 풍성하시며,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우리의 공급이 되심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로 ‘젖과 꿀이 흐르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셔서 좋은 땅의 풍성을 묘사하신다. 젖과 꿀은 모두 식물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의 결합에서 산출된다. 젖은 풀을 먹는 소에게서 나온다. 동물의 생명은 식물의 생명의 공급을 받아 젖을 산출한다. 그러므로 젖은 두 종류의 생명의 연합에서 산출된 것이다. 꿀도 원칙은 동일하다. 꿀은 식물의 생명과 많은 관계가 있다. 꿀은 대부분 꽃과 나무에서 비롯된다. 물론 동물의 생명 중 일부가 또한 관련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작은 동물인 벌이다. 따라서 꿀이 산출되는 데에는 두 종류의 생명의 협력이 있다. 이 두 종류의 생명이 함께 연합될 때 꿀이 산출된다.
젖과 꿀은 그리스도의 풍성, 즉 그리스도의 생명의 두 방면에서 나오는 풍성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한 인격이시지만, 그분께는 동물의 생명으로 상징된 구속하는 생명과 식물의 생명으로 상징된 산출하는 생명이 있다. 그리스도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리떡으로서 우리에게 공급이 되신다. 이 두 종류의 생명은 유월절 음식의 일부였는데, 유월절에는 어린양과 무교병과 쓴 나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종류의 생명은 하나님께 구속받은 백성의 누림을 위해 결합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목적은 이집트에서 동물의 생명과 식물의 생명에 대한 약간의 누림을 그분의 백성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목적은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넓은 땅으로 데려가시는 것이다. 여러분은 오늘날 교회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좋은 땅으로 누리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나는 날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광대한 땅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고 있다고 간증할 수 있다.
“나의 신부여, 그대의 입술은 신선한 꿀을 흘리고 / 그대의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으며 / 그대의 옷 향기는 / 레바논의 향기 같다오.”(아 4:11) 사랑하는 분은 연인의 말을 신선한 꿀(약한 이들을 회복하기 위한 것)로 누리시는데, 이 신선한 꿀은 그녀의 입술에서 나온다. 그분은 또한 그녀의 말을 꿀과 젖(약한 이들을 회복하며 미성숙한 이들을 먹이기 위한 것들)으로 누리시는데, 이것들은 그녀의 혀 밑에 있다. 그분은 또한 승천의 향기와 같은 그녀의 행실의 향기를 누리신다.
4일
좋은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젖과 꿀은 어떤 생명에 속하는가? 그것들은 동물의 생명에 속하는가, 식물의 생명에 속하는가? 성령께서 말씀 안에서 어떻게 배열하셨는지 주의해 보자. 신명기 8장 8절에서 꿀은 식물, 곧 밀과 보리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와 석류와 올리브나무와 함께 언급된다. 그리고 신명기 32장 14절에서 젖은 동물과 함께 언급된다. 즉 소와 양과 젖과 엉긴 젖이 나온다. 성령은 아주 공정하시다. 그분은 꿀은 식물들과 함께 두시고, 젖은 엉긴 젖과 동물들과 함께 두셨다. 그것은 꿀이 대체로 식물의 생명과 관련된다는 것을 성령께서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꿀은 대개 꽃과 나무에서 추출된다. 물론 동물의 생명의 일부, 즉 작은 동물인 벌이 포함되어 있다. 꽃이 없으면 꿀이 있을 수 없고 벌이 없어도 역시 꿀이 있을 수 없다. 꽃도 있어야 하고 벌도 있어야 한다. 이 둘은 서로 협력한다. 이 두 생명이 함께 연합될 때 꿀이 생산된다. 그러나 대개 꿀은 식물의 생명에 속해 있다.
젖은 어떠한가? 우리는 젖의 성분 대부분은 동물의 생명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지로 젖은 동물의 생명과 식물의 생명 모두에서 나온 산물이다. 만일 우리에게 목장과 풀이 없다면 소 떼와 양 떼가 있더라도 젖과 엉긴 젖을 얻을 수 없다. 모든 나무의 열매들과 젖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은 양식인가? 물론 그것들 모두가 좋은 양식이지만, 어느 것이 더 나은 양식인가? 우리는 모든 식물의 생명의 열매보다 젖이 더 좋은 양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가 젖과 꿀로 인해 두 가지 생명의 연합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 두 가지가 식물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젖과 꿀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어떤 방면을 나타내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밀과 보리와 포도나무 등으로 누리며 동시에 그분을 황소와 어린양으로 누릴 때, 우리는 주님께서 젖과 꿀같이 좋으시고 달콤하시며 풍성하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영적으로 약할 때 주님께 가서 주님을 누리고 체험하며 적용한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바로 젖과 꿀이시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함과 달콤함, 즉 젖의 좋음과 꿀의 달콤함을 느낀다. 그리스도는 그토록 좋으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달콤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밀과 보리 등으로 깨닫고 동시에 소 떼와 양 떼로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리스도를 젖과 꿀로 더욱더 누릴 것이다.
집회에 오기 전에 우리는 주님에 대한 체험이나 또는 말씀을 누리고 기도 안에서 그분과 교통하는 가운데 주님께 받은 것과 주님께 속한 것으로 집회를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집회에 온 다음에는 영감을 받기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된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과 만족을 위해 예비한 것을 주님께 드리고 참석자들의 유익―빛 비춤과 영양 공급과 건축―을 위해 예비한 것을 그들에게 내놓을 때, 영을 사용하고 또한 훈련된 생각을 사용하여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집회는 풍성한 그리스도의 전람이 될 것이며, 성도들과 교회의 건축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또 하나님과 함께 모든 참석자들이 공유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상호 누림이 될 것이다.
3일
유감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에게 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며 더욱이 자신의 영을 사용하는 법과 영과 혼의 차이를 구분하는 법(히 4:12)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경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
길을 걷고 있든지 집에 있든지 교회 집회소에 있든지, 우리가 영을 사용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오늘날 진정한 경배는 어떤 장소에서 경배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영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 있고 영을 사용한다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우리의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함으로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기를 배운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많은 풍성을 얻을 것이며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집회에 올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가지고 와서 다른 이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나눌 것이다.
우리가 영을 훈련할 때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공과는 우리의 혼에서 나오는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선호 등에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이뿐 아니라 우리의 환경이나 상황이나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에도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 이러한 문제에 신경을 쓰지 말고 단순히 우리의 영 안에 있는 깊은 느낌에만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은 다 잊어버리고 영 안에 있는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영을 훈련하는 것이다.
사실 환경 가운데 우리에게 발생하는 무수한 일들을 피해 가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우리가 천연적으로 너무나 쉽게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빗나가기 쉬운 사람들일지라도,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내적인 느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를 들면 아내가 아플 때, 물론 나는 아내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아내의 아픈 상황으로 인해 빗나가서는 안 된다. 나의 영 안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려면, 반드시 아내의 병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만 단순하게 나의 영 안에 있는 깊은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배워야 한다. 나의 생각이나 감정은 아내를 위해 기도하려고 할지라도, 나의 영 안에 있는 느낌은 어느 도시에 있는 교회에 대해 기도하도록 나를 이끌 수도 있다.
우리가 영이 아닌 우리 존재의 다른 부분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기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환경과 상황을 잊어버리는 공과를 배워야 한다. 집회에 올 때 우리는 혼의 느낌이 아닌 영의 느낌에 관심함으로써 우리의 영을 사용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고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깊은 느낌이 우리에게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할 때, 우리의 환경이나 가족이나 성공이나 실패를 잊어버리고 하늘에 속한 영역 안으로 이끌릴 것이다. 우리는 영 안에서 이렇게 선포할 것이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리스도는 승리자이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찬양한다면, 배우자 때문에 괴로워하던 이들과 좋은 소식으로 격려를 받던 이들과 내적으로 혼란한 이들이 이렇게 선포할 것이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모든 성도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영을 사용한다면, 집회는 영 안으로 이끌릴 것이고 성도들은 영 안에서 하나님께 경배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집회에서 취해야 하는 길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이것을 실행하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러한 공과를 배우는 것이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하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반드시 영 안에 있고 영을 훈련해야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의 느낌과 생각과 관념과 모든 주변 환경에 대해 잊어버리고, 다만 우리 존재 안에 있는 가장 깊은 느낌, 즉 영 안에 있는 느낌에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2일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백성을 초대하여 함께 모이게 하셨지만, 요리는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음식을 요리하지 않으셨으나 이미 모든 음식을 주셨다. 그분은 일 년 내내 햇빛과 공기와 비를 보내심으로써 그들에게 음식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내 주셨지만, 소산물을 내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과 동역할 필요가 있었다. 그럴 때 그 소산물은 십일조가 되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기 위해 십일조를 가져갔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집에 초대받았다. 그들은 아버지께 음식을 드리고 그분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 하나님의 집에 왔다. 이 얼마나 즐거운 시간이었겠는가!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가지고 와야 한다. 그리스도를 얼마나 많이 집회에 가지고 오느냐는 그리스도를 얼마나 많이 산출하고 그리스도를 얼마나 많이 자라게 했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땅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해서 그리스도를 산출해야 한다.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수고를 통해 그분 자신을 산출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가련한 것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빈손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교통을 통해 어떻게 모여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그림을 제시했다고 믿는다. 집회는 합당한 교회생활이다. 집회는 실지적인 교회생활이다. 이러한 종류의 집회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실지적인 교회생활이 없다. 우리에게는 단지 공동의 활동들이 있는 일종의 조직만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합당한 교회생활은 집회 생활이어야 한다. 집회에 오기 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경작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수확해야 한다. 우리는 얼마만큼의 그리스도를 거두어 그리스도로 채워져서 집회에 와야 한다.
매일 아침에 우리는 “주님, 당신을 위하여 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누리기 위해서 제 자신을 당신께 다시 한번 헌신합니다.”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만을 단순하게 누리고 체험하기 위해 주님께 자신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아침에 깨어나는 순간부터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을 누리기 위해서 제 자신을 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온종일 모든 환경 가운데서 당신을 체험하고 당신만 적용하게 해 주십시오. 내일의 일을 위해서도 구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하루 당신을 누릴 수 있도록 은혜를 구합니다. 주님, 땅을 경작하고, 씨를 뿌리며, 주님의 농작물에 물을 주는 법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온종일, 순간순간 주님과의 교통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실지로 주님 안에 살며, 주님에 대해 수고하고, 주님을 적용하며, 주님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우리의 ‘농장’은 열매가 얼마나 많고 아름답겠는가! 주일이 되어 우리가 성도들과 함께 주님께 경배하러 갈 때, 우리는 “나는 지금 나의 하나님을 만나러 갑니다. 나의 주님께 경배하러 갑니다. 빈손으로 가지 않고 두 손에 그리스도를 가득 담아 갑니다. 나에게는 여분이 있고, 오른손에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남겨 둔 가장 좋은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집회가 시작될 때 우리는 주님을 위해 남겨 둔 것으로 주님께 기도와 찬양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의 풍성한 소산 중 최상의 것이며, 그것을 주님의 누림과 만족을 위해 성도들과 주님께 즐거이 드린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와 주님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충분히 수확해 두었다. 우리는 장래 자신에게 크게 도움이 될 상당한 몫까지 저장해 놓았다.
신언노트, 2023 06 18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고
그리스도의 풍성의 여분을
교회 집회에 가져와서
그리스도를 전람하고
하나님께 단체적인 경배를 드림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그리스도,
곧 ‘젖과 꿀이 흐르는
한 땅’에 대해 수고함
또 그리스도를 전람함과
하나님께 단체적으로 경배함을 위해
그 교회의 집회들에
그리스도의 부의 여분을 가져옴
우리의 필요는
그리스도를 누리고 체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후에 모두
그 땅을 할당받았다.
그들이
그 땅에 대해
기꺼이 수고하려고 하는지
그러지 않는지는
엄중한 문제였다.
만일 내가
게으른 이스라엘 백성이어서
일찍 일어나지도 않고
열심히 일하지도 않는다면,
내가 할당받은 땅은
틀림없이 황폐해지고,
일 년 내내
아무것도 수확하지 못할 것이다.
오순절이나 초막절이 될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큰 단이나 작은 단을 가져가서
하나님께 경배하지만,
나는
빈손이어서
자신이 배불리 먹을 것도 없어
가련하기가 그지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믿는 이들로서
우리 각 사람 모두에게는
할당된 그리스도의 몫이 있다.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한 몫이 있고,
나에게도
그리스도의 한 몫이 있다.
그러나 아침에 주님을 접촉하지 않고
하루 종일 주님과 교통하지 않으며
주님을 누리지 않아
주님에 대한 체험이 없다면,
우리는
매우 가난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기꺼이
주님과 교통하고,
아침에 주님을 누리고
낮에 주님을 체험하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님을 체험한다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분이
증가될 것이다.
그러면 그 좋은 땅을 누리는 데 필요한
생활은 어떤 생활인가?
그 생활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는 생활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주님의 백성인 우리는
한 가지 산업 즉 그리스도만을
소유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산업이시다.
우리는
주님에 대해
수고해야 한다.
학생인 이들은
공부하는 동안에도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며 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체험해야 한다.
트럭 운전사인 이들은
트럭 운전이
그들의 참직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의 참직업은
그리스도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분에 대해
수고하며 일해야 한다.
가정주부는
그들의 참된 일이
집과 가족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를 돌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항상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며 일하고 있는가?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분을 체험하려고 하는가?
좋은 땅을 차지한 이후의 생활은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는 생활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산업으로 삼는 생활이며,
그리스도를
대량으로 산출하는 생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주식회사’를 위해
일하고 있으며
매일 그리스도를 산출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재배하는 사람들이며
그리스도를 산출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농장에서
불철주야로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으며,
이 일은
우리에게
안식이다.
좋은 땅을 정복하고
모든 원수를 굴복시킨 후의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오직
그 땅에서 수고했다.
그들은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포도나무를 키우고,
나무들을 가꾸었다.
이것들은 모두
그 땅을 누리기 위한
필수적인 일들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포함한 풍성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부지런히 수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그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산출하기 위해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 좋은 땅이
여러 면에서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았다.
그러나 그 땅에서
수고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땅의 풍성이 산출되고
충분히 생산되겠는가?
풍성하신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과
계속해서 이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땅을
경작해야 한다.
영적인 씨앗을
뿌려야 하고,
영적인 나무에
물을 주어야 한다.
항상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위해
그 일을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오늘 아침에
말씀을 기도로 읽었는가?
형제들이여,
오늘 몇 번이나
주님을 접촉했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상황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경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우 기름진 땅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땅에 대해
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출이
조금도 없다.
우리는
자원에 있어서
참으로 부유하지만
산출에 있어서
가난하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을
가나안 땅으로 예표된
좋은 땅이신 그분 자신 안으로
이끄셨으며,
그러한 믿는 이들인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소유하고
그들에게 할당된
몫을 받은 후에,
그 땅에 대해
수고했다.
그들이
그 땅에 대해
기꺼이 수고하려고 하는지
그러지 않는지는
엄중한 문제였다.
그들은
그 땅에 대해
수고하며
그 땅을
경작해야 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포함한
풍성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해
부지런히 수고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 주는 그림이다.
우리가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후에
우리의 생활은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는 생활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 안에 사는
주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해야 하며,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
우리가
매우 풍성한 땅에 있지만
이 땅에 대해
수고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체험하고 누릴
산물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백성을 초대하여
함께 모이게 하셨지만,
요리는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음식을 요리하지 않으셨으나
이미 모든 음식을 주셨다.
그분은
일 년 내내
햇빛과 공기와 비를 보내심으로써
그들에게 음식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내 주셨지만,
소산물을 내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과 동역할
필요가 있었다.
그럴 때 그 소산물은
십일조가 되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기 위해
십일조를 가져갔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집에 초대받았다.
그들은
아버지께 음식을 드리고
그분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
하나님의 집에 왔다.
이 얼마나
즐거운 시간이었겠는가!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가지고 와야 한다.
그리스도를
얼마나 많이
집회에 가지고 오느냐는
그리스도를
얼마나 많이 산출하고
그리스도를
얼마나 많이 자라게 했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땅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해서
그리스도를 산출해야 한다.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수고를 통해
그분 자신을 산출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가련한 것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빈손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교통을 통해
어떻게 모여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그림을
제시했다고 믿는다.
집회는
합당한 교회생활이다.
집회는
실지적인 교회생활이다.
이러한 종류의 집회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실지적인 교회생활이 없다.
우리에게는 단지
공동의 활동들이 있는
일종의 조직만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합당한 교회생활은
집회 생활이어야 한다.
집회에 오기 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경작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수확해야 한다.
우리는
얼마만큼의 그리스도를 거두어
그리스도로 채워져서
집회에 와야 한다.
매일 아침에 우리는
“주님,
당신을 위하여 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누리기 위해서
제 자신을
당신께
다시 한번 헌신합니다.”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만을
단순하게 누리고 체험하기 위해
주님께
자신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아침에 깨어나는 순간부터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을 누리기 위해서
제 자신을 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온종일
모든 환경 가운데서
당신을 체험하고
당신만 적용하게 해 주십시오.
내일의 일을 위해서도
구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하루
당신을 누릴 수 있도록
은혜를 구합니다.
주님,
땅을 경작하고,
씨를 뿌리며,
주님의 농작물에 물을 주는
법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온종일, 순간순간
주님과의 교통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실지로 주님 안에 살며,
주님에 대해 수고하고,
주님을 적용하며,
주님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우리의 ‘농장’은
열매가
얼마나 많고
아름답겠는가!
주일이 되어
우리가
성도들과 함께
주님께 경배하러 갈 때,
우리는
“나는 지금
나의 하나님을 만나러 갑니다.
나의 주님께 경배하러 갑니다.
빈손으로 가지 않고
두 손에
그리스도를 가득 담아 갑니다.
나에게는
여분이 있고,
오른손에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남겨 둔
가장 좋은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집회가 시작될 때
우리는
주님을 위해 남겨 둔 것으로
주님께
기도와 찬양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의 풍성한 소산 중
최상의 것이며,
그것을
주님의 누림과 만족을 위해
성도들과 주님께
즐거이 드린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와
또 주님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충분히 수확했다.
우리는 게다가
미래의 날들에
우리에게
크게 도움이 될
(좋은 이득으로[위치에서]
우리를 서 있게 할)
상당한 몫을
따로 떼어 놓았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산출하기 위해
땅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해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수고를 통해
우리 안에서
그분 자신을 산출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많은 소산을 주시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풍성한 체험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수확물은
우리가 수고하고 거두어들여
우리의 수확물이 되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매일 아침 우리는
기도하면서
주님께
그날의 은혜의 몫을 주시기를
구해야 하고,
주님에 대해 수고함으로
그분을 체험하고 누리기 위해
우리 자신을
주님께 헌신해야 한다.
온종일 우리는
주님과의 교통을 유지함으로써
그분을 접촉하고,
그분에 대해 수고하며,
그분을 적용하고,
그분을 체험하며,
그분을 누려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에게 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며
더욱이 자신의 영을 사용하는 법과
영과 혼의 차이를 구분하는 법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경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
길을 걷고 있든지
집에 있든지
교회 집회소에 있든지,
우리가
영을 사용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오늘날
진정한 경배는
어떤 장소에서 경배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영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 있고
영을 사용한다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우리의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함으로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기를 배운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많은 풍성을
얻을 것이며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집회에 올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가지고 와서
다른 이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나눌 것이다.
우리가
영을 훈련할 때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공과는
우리의 혼에서 나오는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선호 등에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이뿐 아니라
우리의 환경이나 상황이나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에도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
이러한 문제에
신경을 쓰지 말고 단순히
우리의 영 안에 있는
깊은 느낌에만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은
다 잊어버리고
영 안에 있는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영을
훈련하는 것이다.
사실 환경 가운데
우리에게 발생하는
무수한 일들을
피해 가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우리가 천연적으로
너무나 쉽게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빗나가기 쉬운 사람들일지라도,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내적인 느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를 들면 아내가 아플 때,
물론 나는
아내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아내의 아픈 상황으로 인해
빗나가서는 안 된다.
나의 영 안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려면,
반드시 아내의 병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만 단순하게
나의 영 안에 있는
깊은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배워야 한다.
나의 생각이나 감정은
아내를 위해
기도하려고 할지라도,
나의 영 안에 있는 느낌은
어느 도시에 있는 교회에 대해
기도하도록
나를 이끌 수도 있다.
우리가
영이 아닌
우리 존재의 다른 부분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기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환경과 상황을 잊어버리는
공과를 배워야 한다.
집회에 올 때
우리는
혼의 느낌이 아닌
영의 느낌에 관심함으로써
우리의 영을 사용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고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깊은 느낌이
우리에게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할 때,
우리의 환경이나 가족이나
성공이나 실패를 잊어버리고
하늘에 속한 영역 안으로
이끌릴 것이다.
우리는
영 안에서
이렇게 선포할 것이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리스도는 승리자이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찬양한다면,
그들의 배우자들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과
좋은 소식으로 격려를 받는 이들과
내적으로 혼란에 직면한 이들이
격려받아 이렇게 선포할 수 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 모든 성도들이
이런 식으로
그들의 영을 사용할 때,
그 집회는
그 영[소문자] 안으로 이끌리고,
그 성도들은
영 안에서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 집회들 안에서
취해야만 하는
그 길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이것을 실행하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러한 공과를 배우는 것이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하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반드시
영 안에 있고
영을 훈련해야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의 느낌들과 생각들과 관념들(개념들)과 함께
주변 환경을 잊어버리고,
다만(그저) 우리 존재 안에 있는
가장 깊은 느낌,
즉 영 안에 있는 느낌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영을 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고
그리스도를 체험하며
그리스도를 산출하는
열쇠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는 길은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좋은 땅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리스도의
실재이신 그 영을
접촉하는 것이다.
온종일
우리의 모든 상황과
모든 환경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주님을 접촉하고
주님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용하여
주님을 믿고 사랑함으로써,
또한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주님을 접촉하고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의 실재,
곧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생명 주시는 영의
분배를 받아들임으로써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한다.
좋은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젖과 꿀은
어떤 생명에 속하는가?
그것들은
동물의 생명에 속하는가,
식물의 생명에 속하는가?
성령께서
말씀 안에서
어떻게 배열하셨는지
주의해 보자.
신명기 8장 8절에서
꿀은
식물,
곧 밀과 보리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와
석류와 올리브나무와 함께 언급된다.
그리고 신명기 32장 14절에서
젖은
동물과 함께 언급된다.
즉 소와 양과
젖과 엉긴 젖이 나온다.
성령은
아주 공정하시다.
그분은
꿀은
식물들과 함께 두시고,
젖은
엉긴 젖과 동물들과 함께 두셨다.
그것은
꿀이 대체로
식물의 생명과 관련된다는 것을
성령께서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꿀은 대개
꽃과 나무에서 추출된다.
물론 동물의 생명의 일부,
즉 작은 동물인
벌이 포함되어 있다.
꽃이 없으면
꿀이 있을 수 없고
벌이 없어도 역시
꿀이 있을 수 없다.
꽃도 있어야 하고
벌도 있어야 한다.
이 둘은
서로 협력한다.
이 두 생명들이
함께 섞이고,
꿀이 생산된다.
그러나 꿀은, 대개(보통),
그 식물 생명에 속한다.
그 젖은 어떠한가?
우리는
젖의 더 큰 부분이
그 동물 생명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지로
젖은
그 동물 생명과
그 식물 생명
둘 다의 산물이다.
만일 우리에게
그 목초지가 없다면,
곧 우리에게
그 풀이(꼴이) 없다면,
우리에게
소 떼와 양 떼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젖과 엉긴 젖을(버터를)
가질 수 없다.
모든 나무의 열매들과 젖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은 양식인가?
물론 그것들 모두가
좋은 양식이지만,
어느 것이
더 나은 양식인가?
우리는
모든 식물의 생명의 열매보다
젖이 더 좋은 양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가
젖과 꿀로 인해
두 가지 생명의 섞임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 두 가지가
식물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젖과 꿀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어떤 방면을 나타내는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그 밀과 그 보리와 그 포도나무 등으로 누리며
동시에 그분을
그 황소와 그 어린양으로 누릴 때,
여러분은
주님께서
정말 좋으시다는 것을,
곧 주님께서
젖과 또 꿀과 똑같이,
정말 달콤하시며 또 정말 풍성하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특별히 여러분이
영 안에서 약할 때
주님께 가서
주님을
누리고 체험하며 적용한다면,
여러분은
그분께서 바로
젖과 꿀이시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성함과 달콤함,
즉 젖의 좋음과 꿀의 달콤함을
느낀다.
그리스도는
정말 좋으시다.
그리스도는
정말 달콤하시다.
그분은
젖과 꿀이 흐르는 한 땅이시다.
여러분이 더 많이
주님을
밀과 보리 등으로 깨닫고
또 동시에
소 떼와 양 떼로 깨달을수록,
여러분이 더 많이
그리스도를
젖과 꿀로
누릴 것이다.
집회에 오기 전에
우리는
주님에 대한 체험이나
또는 말씀을 누리고
기도 안에서
그분과 교통하는 가운데
주님께 받은 것과
주님께 속한 것으로
집회를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집회에 온 다음에는
영감을 받기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된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과 만족을 위해
예비한 것을
주님께 드리고
참석자들의 유익
―빛 비춤과 영양 공급과 건축―을 위해
예비한 것을
그들에게 내놓을 때,
영을 사용하고
또한 훈련된 생각을 사용하여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집회는
풍성한 그리스도의 전람이 될 것이며,
성도들과 교회의 건축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또 하나님과 함께
모든 참석자들이 공유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상호 누림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리스도의 한 예표인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한 땅’이다.
젖과 꿀은
두 종류의 생명들,
곧 식물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의
섞임에서 산출된다.
신명기 8장 8절에서
꿀은
식물,
곧 밀과 보리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와
석류와 올리브나무와 함께 언급된다.
신명기 32장 14절에서
젖은
동물,
곧 소와 양과 함께 언급된다.
꿀은 대체로
식물의 생명과 관련되고,
젖의 성분 대부분은
동물의 생명과 관련된다.
이 두 생명들이
함께 섞일 때,
벌에 의해
꽃의 화밀(花蜜)에서
꿀이 생산된다.
젖 또한
동물의 생명과 식물의 생명 둘 다에서 나온
산물이지만,
주로 동물의 생명에 속한다.
젖은
소와 양이(동물의 생명이)
목초지에서(식물의 생명에서)
풀을 뜯음으로부터
생산된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분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려고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젖과 꿀은 모두
두 종류의 생명들의 조합(결합),
즉 동물의 생명과
또 식물의 생명에서 산출된다.
젖은
동물의 생명에 속한
소에게서 산출된다.
그러나 젖은
동물의 생명만으로는
산출될 수 없다.
그것은 또한
식물의 생명, 곧 풀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젖은
식물의 생명으로부터
영양 공급을 받은
동물의 생명에서
산출된 것이다.
꿀 역시
원칙은 같다.
벌은 동물이다.
그러나 식물의 생명인
꽃이 없다면,
벌은
꿀을 산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젖과 꿀’이라는 표현은
좋은 땅이
짐승과 뱀이 가득한 땅이 아니라
소와 벌과 풀과 꽃이 가득한 땅임을
보여 준다.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은
이 땅이
동물의 생명과
식물의 생명으로 가득함을
의미한다.
예표에서
그리스도는
이 두 종류의 생명의
산출물이시다.
침례자 요한은
주 예수님을 보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
“보십시오,
…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요 1:29)
이것은
동물의 생명을 말한다.
주님은
죽어야 하는
한 알의 밀로
자신을 언급하셨다.
이것은
식물의 생명을 말한다.
그분은
두 종류의 생명들의 섞임이시며
젖과 꿀을 산출하신다.
이 모든 것은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충만하시고
극도로 풍부하시며,
우리의 누림을 위한
우리의 공급이 되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로
‘젖과 꿀이 흐르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셔서
좋은 땅의 풍성을
묘사하신다.
젖과 꿀은 모두
그 식물 생명과
그 동물 생명의
한 조합에서부터의 산물들이다.
젖은
풀을 먹는 소에게서 나온다.
동물의 생명은
식물의 생명의 공급을 받아
젖을 산출한다.
그러므로 젖은
두 종류의 생명의
섞임의 한 산물이다.
꿀도
원칙은 동일하다.
꿀은
식물의 생명과
많은 관계가 있다.
꿀은 대부분
꽃과 나무에서 비롯된다.
물론 동물의 생명 중 일부가 또한
관련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작은 동물인 벌이다.
따라서 꿀의 산출에 있어서
두 종류의 생명이
협력한다.
이 두 종류의 생명이
함께 섞이고,
꿀이 산출된다.
젖과 꿀은
그리스도의 풍부,
즉 그리스도의 생명의
두 방면들에서부터 오는
풍부를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한 인격이시지만,
그분께는
동물의 생명으로 상징된
구속하는 생명과
식물의 생명으로 상징된
산출하는 생명이 있다.
그리스도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리떡으로서
우리를 공급하신다.
두 종류의 생명은
유월절 음식의 일부였는데,
유월절에는
그 어린양과 그 무교병과 함께
그 쓴 나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생명들은
하나님께 구속받은 백성의
누림을 위해
조합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목적은
이집트에서
동물의 생명과 식물의 생명에 대한
약간의 누림을
그분의 백성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목적은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넓은 땅으로 데려가시는 것이다.
여러분은
오늘날 교회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좋은 땅으로 누리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나는 날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광대한 땅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고 있다고
간증할 수 있다.
“나의 신부여,
그대의 입술은
신선한 꿀을 흘리고
/ 그대의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으며
/ 그대의 옷 향기는
/ 레바논의 향기 같다오.”
(아 4:11)
사랑하는 분은
연인의 말을
(약한 이들을 회복하기 위한)
신선한 꿀로
누리시는데,
이 신선한 꿀은
그녀의 입술에서 나온다.
그분은 또한
그녀의 말을
(약한 이들을 회복하며
미성숙한 이들을 먹이기 위한)
꿀과 젖으로
누리시는데,
이것들은
그녀의 혀 밑에 있다.
그분은 또한
승천의 향기와 같은
그녀의 행실의 향기를
누리신다.
동물의 생명과 식물의 생명,
이 두 가지의 연합인
젖과 꿀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두 방면들,
곧 구속하는 방면과
산출하는 방면을 나타낸다.
식물의 생명은
산출하고 번성하는 생명이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산출하고 번성하는 생명을 나타낸다.
동물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생명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구속하는 방면은
우리의 사법적인 구속을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의
산출하는 방면은
우리의 유기적인 구원을 위한 것이다.
주님의 상의 상징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생명의
구속하는 방면과
산출하는 방면을 나타낸다.
젖과 꿀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좋음과 달콤함을
말해 준다.
우리가
식물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 둘 다이신
그리스도를
동시에 체험하고 누릴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좋고 달콤하며 풍성하신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함과 달콤함,
즉 젖의 좋음과 꿀의 달콤함을
느낀다.
젖과 꿀의 땅이신
그리스도를 누림으로
우리는
젖과 꿀이신
그분으로 조성될 것이다.
우리의 경배는 단지
창조주에 대한 경배가 아니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자신을 우리의 존재 안으로 넣으신
아버지에 대한 경배이다.
이제 우리의 경배는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우리 안으로 분배되심으로써
주관적인 것이 된다.
이런 종류의 경배는 대부분
주님의 상 집회에서
실행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의 상 집회에서
우리가 떡과 잔에 참여한 후에
주님은 앞장서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가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그 영 안에서
아버지께로 다시 인도하신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경배가
아들을 통하여
그 영 안에서
아버지께로 향한 것임을 계시하는
에베소서 2장 18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누가복음 15장에
완전히 묘사되어 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오게 되는 것은
아들께서
목자로서 찾으시고
그 영께서
여인으로서 빛 비추시는 것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
이렇게 돌아오게 되는 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 안에서 이루어진다.
아들과 그 영은
돌아오는 탕자 안으로
일해 넣어지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분배 안에서 드리는
참된 경배이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시대가 바뀌었음을 지적하셨다.
예표에서
유일한 경배의 장소는
예루살렘이었지만,
성취에서
이 장소는 우리의 영이다.
오늘날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거처가 있는
사실상의 예루살렘이다.
또한 좋은 땅의 소산물의
풍성한 여분은
그리스도의 풍성의 예표이다.
그리스도는
번제물과 소제물과
화목제물과 속죄제물과
속건제물과 요제물과
거제물과 전제물을 포함하여
좋은 땅의 풍성에서 나오는
모든 제물들의 실재이시다.
이 모든 제물들은
좋은 땅의 소산물의
풍성한 여분이었으며,
참된 여분 곧 참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예표들이었다.
이처럼 요한복음 4장
23절과 24절에서
사람의 영은
유일한 경배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대치하며,
그리스도는
좋은 땅의 풍성한 여분인
모든 제물들을 대치하신다.
우리는
아들을
좋은 땅으로 체험함으로써
실재이신 아들 안에서
아버지께 경배한다.
우리는
좋은 땅의 풍성한 소산물인
아들의 풍성을 누림으로써
실재이신 아들 안에서
아버지께 경배한다.
우리는
집회에 올 때마다,
주님께 경배하러 올 때마다
빈손으로 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산을
한 아름 가지고 와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한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말고,
그 이상의 그리스도를
생산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하고 빈곤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충분하고 넘치도록
그리스도를 생산해 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 풍성한 소산 중에
가장 좋은 것은
주님을 위해
남겨 놓아야 한다.
그리스도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그리스도를 누리고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누림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함께
단체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좋은 땅을 얻은 후의 생활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며 일하고,
그리스도를 생산하며,
그리스도를 누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나누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를 누리시도록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이다.
이러한 누림과 나눔은
그리스도를
온 우주에 전람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는 경배가 되고
원수에게는 수치가 된다.
그 땅에서의 생활은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주님의 백성과 함께 단체적으로도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으로
충만한 생활이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에 대해
부지런히 수고하고
우리의 손을
그리스도로 가득 채운 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인
합일의 터에 와서
풍성하고 영광스러우신
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또한 하나님 자신과 함께
누리기를 바란다.
매일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여
여분 곧 수확물을 얻어서
교회 집회에 가져와
하나님 아버지께
단체적인 경배를 드려야 한다.
주님을 기념하고
아버지께 경배하려고
주님의 상에 올 때마다,
우리는
빈손으로 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손을
그리스도의 소산으로 가득 채워서
와야 한다.
그리스도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서로서로 그리스도를 누리고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누림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함께
단체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충분히 산출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여분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위해
소산물 중 최상의 부분을
그분께 드릴 것이다.
1일
우리의 필요는 그리스도를 누리고 체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후에 모두 그 땅을 할당받았다. 그들이 그 땅에 대해 기꺼이 수고하려고 하는지 그러지 않는지는 엄중한 문제였다. 만일 내가 게으른 이스라엘 백성이어서 일찍 일어나지도 않고 열심히 일하지도 않는다면, 내가 할당받은 땅은 틀림없이 황폐해지고, 일 년 내내 아무것도 수확하지 못할 것이다. 오순절이나 초막절이 될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큰 단이나 작은 단을 가져가서 하나님께 경배하지만, 나는 빈손이어서 자신이 배불리 먹을 것도 없어 가련하기가 그지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믿는 이들로서 우리 각 사람 모두에게는 할당된 그리스도의 몫이 있다.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한 몫이 있고, 나에게도 그리스도의 한 몫이 있다. 그러나 아침에 주님을 접촉하지 않고 하루 종일 주님과 교통하지 않으며 주님을 누리지 않아 주님에 대한 체험이 없다면, 우리는 매우 가난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기꺼이 주님과 교통하고, 아침에 주님을 누리고 낮에 주님을 체험하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님을 체험한다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분이 증가될 것이다.
그러면 그 좋은 땅을 누리는 데 필요한 생활은 어떤 생활인가? 그 생활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는 생활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주님의 백성인 우리는 한 가지 산업 즉 그리스도만을 소유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산업이시다. 우리는 주님에 대해 수고해야 한다.
학생인 이들은 공부하는 동안에도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며 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체험해야 한다. 트럭 운전사인 이들은 트럭 운전이 그들의 참직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의 참직업은 그리스도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분에 대해 수고하며 일해야 한다. 가정주부는 그들의 참된 일이 집과 가족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를 돌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항상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며 일하고 있는가?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분을 체험하려고 하는가?
좋은 땅을 차지한 이후의 생활은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는 생활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산업으로 삼는 생활이며, 그리스도를 대량으로 산출하는 생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주식회사’를 위해 일하고 있으며 매일 그리스도를 산출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재배하는 사람들이며 그리스도를 산출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농장에서 불철주야로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으며, 이 일은 우리에게 안식이다.
좋은 땅을 정복하고 모든 원수를 굴복시킨 후의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오직 그 땅에서 수고했다. 그들은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포도나무를 키우고, 나무들을 가꾸었다. 이것들은 모두 그 땅을 누리기 위한 필수적인 일들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포함한 풍성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부지런히 수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그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산출하기 위해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 좋은 땅이 여러 면에서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았다. 그러나 그 땅에서 수고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땅의 풍성이 산출되고 충분히 생산되겠는가? 풍성하신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과 계속해서 이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땅을 경작해야 한다. 영적인 씨앗을 뿌려야 하고, 영적인 나무에 물을 주어야 한다. 항상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위해 그 일을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오늘 아침에 말씀을 기도로 읽었는가? 형제들이여, 오늘 몇 번이나 주님을 접촉했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상황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경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우 기름진 땅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땅에 대해 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출이 조금도 없다. 자원은 실로 풍부하지만 산출은 얼마나 빈곤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