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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 ― 감추어지신 하나님

“오, 구원자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여, / 정녕 주님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 사 45:15.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이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분이시라는 것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며, 은혜와 자애로 가득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알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알지 못할 수 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시고 전능하시며 용서로 가득하실지라도, 그분은 또한 에스더기가 암시하는 것처럼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나서 우주 안에 자신을 숨기셔서, 결국 우리는 어디에서 그분을 찾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수없이 많은 일을 하셨고 그들의 개인 생활 안에서도 수없이 많은 일을 하셨지만 자신을 감추셨다. 그분은 끊임없이 일하시지만 항상 감추어져 계셨다.

우리는 우리가 섬기고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특히 우리를 돕고 계실 때 여전히 자신을 숨기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볼 수 없고, 겉으로 보기에 그분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사실상, 하나님은 그분의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우리를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해 주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는 동안, 숨겨진 방식으로 우리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계신다.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은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우리 안에서 운행하고 계신다.

우리의 책임은 우리의 깊은 속에 있는 내적 느낌에 반응함으로써 그분과 협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고 활동하시는 것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아멘.”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 존재의 깊은 부분에서 은밀하고도 끊임없이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시하기를 싫어하시는 그러한 성향을 갖고 계심을 보게 될 것이다. 그분은 드러내어 일하시기보다 은밀하게 일하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우리의 기질은 하나님의 기질, 곧 숨으려고 하는 기질과 정반대이다.

하나님은 감춰지기를 좋아하시지만, 우리는 드러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내려는 갈망이 조금도 없으시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이 없이는 만족하지 못한다.

이러한 신성한 기질이 우리에게 큰 시험과 점검이 된다.

에스더기는 숨어 계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흩어져 억압당하는 그분의 선민을 은밀히 돌보시며 포로 되어 박해당하는 그분의 선민을 공개적으로 구원하시는 것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제시한다.

이 책의 핵심 중점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자신의 선민으로 삼으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방 민족들에게 포로로 주신 이후에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 되시어, 은밀하게 행동하시면서 그들을 은밀히 돌보시고 공개적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에스더기는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해야 하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한 면에서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분의 백성을 징계하셨지만, 또 다른 면에서 숨어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돌보고 계셨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은밀한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이방 세계에 최고의 왕을 세우셔서 인도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다스리는 권력을 갖게 하셨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그 최고의 왕이 자기 왕후를 폐위하게 하셨는데, 그것은 왕후가 왕의 말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그분의 은밀한 돌보심으로 부모 없는 한 유대인 처녀인 에스더를 일으키시어, 최고의 왕으로 하여금 왕후의 관을 씌우게 하셨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숨어 계셨으며, 여전히 숨어 계신다. 심지어 오늘날 교회 시대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고 계신다.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까지에 나오는 비유의 의미는 심오하며, 우리는 감추어지신 하나님으로 계시되신 이러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누가복음 18장 3절에서 과부는 믿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은 현시대에 그들의 남편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과부이다.

이 비유의 과부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원수인 마귀 사탄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시는 것이 필요하다.

이 비유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에 우리가 우리의 원수로부터 받는 고난을 보여 준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에, 우리는 원수에게서 항상 괴롭힘을 당하는 과부이다.

우리의 원수가 우리를 박해하는 동안에 우리의 하나님은 의롭지 않으신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이 불의하게 박해당하는 것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수 세기에 걸쳐 주 예수님을 따르는 정직하고 신실한 수많은 사람들이 불의한 박해를 당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불의한 대우를 받고 있다.

우리의 하나님은 공정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심판하시고 입증해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주 예수님은 자신의 박해받는 백성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시는 하나님에 대한 상징으로 불의한 재판관을 사용하셨다.

이 비유에서 과부는 계속해서 불의한 재판관에게 와서는 그녀의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렇게 원한을 풀기 위해서 우리는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남편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가 이 땅에 과부로 남아 있을 때, 일시적으로 우리의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처럼 보이신다.

비록 하나님께서 불의하게 보이실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께 호소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며 거듭거듭 그분을 괴롭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밤낮 자기에게 부르짖는’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의 원한을 속히 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8장 5절에서 암시하는 것은 이것이 6장 9절부터 11절까지와 누가복음 18장 7절과 8절에 언급된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8장 3절과 4절에 나오는 성도들의 기도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경륜을 반대하는 땅을 심판하기 위한 기도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심판하시는 것, 곧 불을 땅에 던지시는 것은 성도들이 향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를 드린 것에 대한 응답이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보겠습니까?” ― 눅 18:8하.

‘믿음’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직역하면 ‘그 믿음’이다. 이것은 과부의 믿음과도 같이 끈질기게 기도하기 위한 우리의 지속적인 믿음을 의미한다.

우리를 구원받게 한 믿음은 믿음의 시작 단계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결 안으로 이끈 믿음은 연결하는 믿음이다. 연결하는 믿음은 우리가 계속해서 삼일 하나님을 접촉하는 것을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살도록 하는 믿음이다.

연결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승리에 차서 돌아오실 때 이기는 이들이 그분을 만나기 위한 신성한 요구 조건이다.

연결하는 믿음은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면서 우리를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에 연결하시는 것이다.

연결하는 믿음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는 이들의 믿음이다.

주 예수님께서 돌아오실 때, 그분은 연결하는 믿음에 의해 사는 많은 이기는 이들을 찾으실 것이고, 그분께서 천 년 동안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그분의 왕국을 위해 그들을 보물들로 여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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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눅 18:8 …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보겠습니까?”

계 6:9-10 … 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지닌 증거 때문에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혼들이 제단 아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큰 음성으로 부르짖으며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재자시여, 땅에 거하는 사람들을 언제쯤 심판하시어 우리 피의 원한을 갚아 주시겠습니까?”라고 하니,

누가복음 18장 8절에서 ‘믿음’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직역하면 ‘그 믿음’이다. 이것은 3절에 언급된 과부의 믿음과도 같이 끈질기게 기도하기 위한 우리의 지속적인 믿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절의 믿음은 객관적인 믿음이 아닌 주관적인 믿음이다.

요한계시록 6장 9절과 10절에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끈질긴 기도가 순교한 성도들의 혼들에 의해 수행되는 것을 본다. 성경의 그림에서 제단은 성막과 성전의 바깥뜰에 있는데, 바깥뜰은 땅을 상징한다. 따라서 ‘제단 아래’라는 말은 순교한 성도들의 혼이 있는 땅 아래를 가리킨다. 그곳은 주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가셨던 낙원이다(눅 23:43). 낙원은 음부의 안락한 부분으로서(행 2:27) 아브라함이 있는 곳이다(눅 16:22-26). 여기서 순교한 성도들의 혼들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주님, 얼마나 오랫동안 침묵하시렵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불의하신 것처럼 계실 것입니까? 당신은 의로운 재판관이십니다. 이 땅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불의한 박해를 어떻게 당신께서 용납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연결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승리에 차서 돌아오실 때 이기는 이들이 그분을 만나기 위한 신성한 요구 조건이다. 이것은 누가복음 18장 8절에 근거한 것이다. 오늘날 온 세상이 믿지 않고 있다. 오늘날 이방인들 곧 이교도들 가운데서뿐 아니라, 유대교와 로마 가톨릭교와 개신교와 오순절파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디에 믿음이 있는가? 오늘 주님께서 오신다면 어디에서 믿음을 발견하실 수 있겠는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 땅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긍휼로, 과거 여러 해 동안 우리는 니 형제님의 인도 직분을 통하여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우리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심을 신뢰하도록 배울 수 있는 상황 안으로 이끌렸다.

나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믿는 이들로서 항상 자신이 아닌 그분을 신뢰하는 이들로, 또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확신도 갖지 않는 이들로 그분께 발견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완전한 확신은 그분 안에 있다. 바로 이것이 연결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이기는 이들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준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승리에 차서 돌아오실 때, 여러분과 내가 이기는 이들로서 그분을 만나기 위한 요구 조건이다.

결국 주님은 돌아오실 때, 연결하는 믿음에 의해 살고 있는 소수의 이기는 이들을 발견하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분의 감추어진 이기는 이들로 발견되기를 기대하신다.

연결하는 믿음으로 이기고 크게 기뻐하는 생활을 하는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믿음의 결말(결과)인 혼의 구원을 받도록(벧전 1:8-9) 준비된 보물들로서 그분께 발견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연결하는 믿음으로 어떻게 이기는지, 어떻게 크게 기뻐하는지를 알 뿐이다. 오늘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결국 그들의 믿음의 결말인 혼의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이것은 단지 초기의 구원에 불과하다. 구원의 전진 단계는 변화의 단계이다. 구원의 완성 단계는 영광스럽게 되는 단계이다. 우리가 전진 단계에서 연결하는 믿음으로 살면서 변화된다면,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들이 될 것이다.

연결하는 믿음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면서 우리를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에 연결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는 믿음이 주님의 이기는 이들의 자격이다. 주님의 이기는 이들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오실 때, 그들을 그분의 연결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눅 18:8), 그분께서 다스리시는 천 년 동안 그분의 왕국을 위한 보물들로 찾으실 것이다.

5일

눅 18:7-8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자기에게 부르짖는 선택하신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않으시고 오래 참고만 계시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한을 속히 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보겠습니까?”

우리의 원수가 우리를 박해하는 동안에 우리의 하나님은 의롭지 않으신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이 불의하게 박해당하는 것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침례자 요한은 목 베임을 당하였고, 베드로는 순교당했으며, 바울은 감옥에 갇혔고, 요한은 유배되었다. 수 세기에 걸쳐 사람-구주를 따르는 정직하고 신실한 수많은 사람들이 불의한 박해를 당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우리는 불의한 대우를 받고 있다. 우리의 하나님은 공정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심판하시고 입증해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 계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왜 그분은 이러한 상황을 용인하시는가? 왜 그분은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을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이러한 상황 때문에,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까지에서 사람-구주는 자신의 박해받는 백성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시는 하나님에 대한 상징으로 불의한 재판관을 사용하셨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괴롭게 하는 과부, 즉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여러 번 나는 주님께 그분의 회복을 변호해 달라고 지칠 때까지 기도했다. 내가 주님께 변호해 달라고 기도할수록 더욱더 변호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가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을 괴롭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까지에서 우리는 보이는 영역에서의 기도를 본다. 이런 종류의 기도는 우리가 희년을 누리는 것과 관계있다.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이들의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왜 그들이 박해를 받고 있는지를 종종 물어본다. 자녀들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이렇게 많이 사랑하는데 왜 고난을 당해야 하나요?” 자녀들에게는 부모가 따르는 주님께서 의롭지 않으신 것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 또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데 왜 고난을 당하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비유가 우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우리의 남편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가 이 땅에 과부로 남아 있을 때, 일시적으로 우리의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처럼 보이신다. 비록 하나님께서 불의하게 보이실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께 호소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며 거듭거듭 그분을 괴롭혀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비유는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함으로써 주님을 괴롭혀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그분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님, 기도하는 것은 당신께 달린 것이 아니라 저에게 달린 것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결코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당신은 저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저는 지금 당신의 변호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의미는 심오하다.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이 비유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인류가 처음 타락한 이래로 여전히 하나님은 심판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본성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견디지 못할 것이고 흔들릴 것이며 불로 멸망당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만이 하나님의 본성에 일치하며 흔들리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기 원하신다. 그분은 이 땅의 부패와 죄악, 그리고 그분을 반대하고 그분께 득죄하는 것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시련을 겪게 하시는 것 같다.

이 시대의 끝에서 그분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심판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다(계 4:2, 6:16). “우리 각 사람이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낱낱이 진술할 것이다.”(롬 14:12)

4일

눅 18:1-3 사람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드셔서 말씀하셨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는 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 사는 한 과부가 늘 그에게 가서, ‘나의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주십시오.’라고 하니,

누가복음 18장 3절에서 과부는 믿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은 현시대에 그들의 남편이신 그리스도(고후 11:2)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과부이다.

과부는 재판관에게 그녀의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했다. ‘-의 원한을 풀어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를 위해 공의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 비유에서 주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에게 원수가 있음을 암시하신다. 이 원수는 마귀 사탄이고,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시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원한을 풀기 위해서 우리는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 재판관은 얼마 동안 그 과부의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주려고 하지 않았다(눅 18:4). 그때 그는 속으로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괴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어야겠다. 그러지 않으면, 이 여인이 계속 와서 나를 못살게 굴겠구나.’(4-5절)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주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으십시오.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자기에게 부르짖는 선택하신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않으시고 오래 참고만 계시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한을 속히 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보겠습니까?”(6-8절) 8절의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구주께서 다시 오시는 때에 우리의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주실 것임을 암시한다.

오늘날의 악한 세대는 우리를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이 세대는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고 마취시켜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온 세상은 무감각해지고 있으며 마취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누림이 되시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느낌이나 의식이 없다.

삼일 하나님은 사람의 누림을 위해 계신다. 그렇지만 타락한 인류는 이에 관하여 조금도 인식이 없다. 그들은 그것에 관하여 전혀 느낌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집 짓느라 바쁘다(눅 17:27-28). 그들은 그들의 누림이신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 생각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마취되고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오래 여행하시는 동안 이 문제를 몇 차례 다루셨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4장에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 세대에 속한 것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의 혼생명까지도 미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을 미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17장에서 주님은 무감각한 세대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 중점을 반복하셨다. 무감각한 세대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신성한 유산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주님은 18장에서 이 문제를 다시 다루시기 전에, 우리의 누림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것을 밝혀 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원수에게서 오는 박해이다.

우리는 무감각하고 무감각하게 하는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과부와 같음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남편이신 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를 끊임없이 박해하는 원수가 있다.

주님은 또한 우리가 그분을 추구하는 중에 그분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물이나 일은 무엇이든지 미워해야 함을 제자들에게 계시하셨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분을 누릴 때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 이런 박해는 우리의 원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의 원수는 하나님의 원수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있다는 이유로 우리의 원수가 되었다.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까지에 기록된 이 비유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에 우리가 우리의 원수로부터 받는 고난을 보여 준다. 사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여기 계신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에, 우리는 원수에게서 항상 괴롭힘을 당하는 과부이다.

3일

에 4:14 이번에 왕후께서 침묵하시면, 유대인은 다른 어떤 데서 해방과 구출을 받겠지만 … 왕후께서 바로 이때를 위하여 왕국에 들어가신 것이 아닌지 누가 압니까?”

에 4:16 “가셔서, 수사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모아 저를 위해 함께 금식해 주십시오. … 저도 제 시녀들과 함께 그렇게 금식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법대로 하지 않고 왕께 나아가겠습니다. 죽어야 한다면 죽겠습니다.”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은 여기저기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들은 아마 그들이 살고 있던 곳의 이방인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방인들, 특히 그들의 통치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희의 여호와는 어디 계시느냐? 너희 여호와는 참되고 살아 계시느냐? 그분이 계신다면, 왜 너희는 여기에 노예로 사로잡혀 왔느냐?”라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숨어 계셨으며, 여전히 숨어 계신다. 심지어 오늘날 교회 시대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고 계신다. 이스라엘 자손에게나 오늘날 우리에게나 마치 이 우주 가운데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참되시지만 숨어 계신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분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하고 부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 민족들에게 노예로 넘겨주심으로써 징계와 형벌을 받게 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엄격하신 가운데서도 긍휼이 있으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되어서 흩어져 있던 동안에 하나님은 숨어서 그들을 돌보고 계셨으며, 적절한 때에 오셔서 공개적으로 그들을 구원하셨다. 심지어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낮은 상황, 곧 바닥에 있을 때도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 계셨으며, 그들과 함께 고통당하고 계셨다.

한 면에서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분의 백성을 징계하셨지만, 또 다른 면에서 숨어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돌보고 계셨다. 결국, 하나님은 바빌론 제국을 끌어내리시려고 메도-페르시아 제국을 사용하셨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심지어 하나님의 갈망을 이루어 드리는 이인 하나님의 목자이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섬기는 이인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라 불리기까지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숨어 계시는 하나님께서 은밀히 이스라엘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음을 본다.

에스더기는 숨어 계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흩어져 억압당하는 그분의 선민을 은밀히 돌보시며 포로 되어 박해당하는 그분의 선민을 공개적으로 구원하시는 것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제시한다.

에스더기의 핵심 중점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자신의 선민으로 삼으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방 민족들에게 포로로 주신 이후에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 되시어, 은밀하게 행동하시면서 그들을 은밀히 돌보시고 공개적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사 45:15). 이러한 이유로 이 책은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해야 하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억압받는 그분의 선민을 은밀히 돌보실 때, 먼저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이방 세계에 최고의 왕을 세우셔서 인도에서 에티오피아(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다스리는 권력과 번영과 영광을 갖게 하셨다.

그다음으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그 최고의 왕이 자기 왕후를 폐위하게 하셨는데, 그것은 왕후가 왕이 고관들을 초대하여 베푼 큰 연회에서 왕의 말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다(에 1:3-22). 왕은 연회에 참석한 이들에게 왕후를 보이려고, 왕후에게 왕후의 관을 쓰고 왕 앞에 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왕후는 왕의 명령에도 오려고 하지 않았다. 불순종한 결과 왕후는 폐위되었고, 왕후의 자리는 비어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그분의 은밀한 돌보심으로 부모 없는 한 유대인 처녀인 에스더를 일으키시어, 최고의 왕으로 하여금 왕후의 관을 씌우게 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분 자신을 숨기고 계시며, 특히 그분께서 우리를 돕고 계실 때 그러하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볼 수 없으며, 겉으로 보기에 그분은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사실, 그분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은밀한 방식으로 우리를 위해 많은 것을 하고 계신다.

2일

마 6:1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그들 앞에서 여러분의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

마 6:3-4 그대는 … 구제를 은밀한 가운데 하십시오.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그대의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입니다.

마 6:6 그러나 그대는 기도할 때, 그대의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십시오.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그대의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드러내지 않으신다. 그분은 너무도 위대하시다. 그분은 너무도 영광스러우시다. 그분은 너무도 위엄이 있으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분은 또한 정녕 숨어 계신다는 것이다. 온 우주는 비밀이고, 인생도 비밀이며, 모든 사람도 비밀이다. 이러한 것들이 비밀스러운 것은 그것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셨지만 우주로부터 숨어 계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지만 인류에게서 숨어 계신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목적을 갖고 계시지만, 그분 자신을 사람에게서 숨기셨다. 하나님은 인생의 의미이시지만 인생으로부터 숨어 계신다. 하나님은 우주 안에 존재하시지만 숨어 계신다. 그분은 잠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금 자신을 숨기신다.

하나님은 지극히 크시고 형언할 수 없이 위대하시지만, 나사렛 사람 예수님 안에 계실 정도로 그렇게 ‘축소되셨다’. 이 나사렛 사람은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처럼(사 53:2)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셨다. 삼십 년 동안 사람들은 그분께서 가난한 가정의 목수이신 것을 보았을 뿐 그분께서 하신 다른 어떤 일도 볼 수 없었다.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우시며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이 작고 유한한 사람 안에 숨어 계신다는 것을 그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기를 좋아하는 성격을 갖고 계신다. 그분은 끊임없이 놀라운 일을 행하시지만 자신을 나타내기를 결코 좋아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주를 통치하시지만 아무도 그분을 볼 수 없다. 그분은 지난 이천 년 동안 교회와 함께 계셨지만, 항상 존재하시는 이 하나님을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우리 또한 그분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우리의 체험을 통해 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일하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계시를 주신다. 그분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부축하시고 인도하신다. 그분은 또한 우리를 책망하시고 금지하시고 멈추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본 적이 없다. 그분은 숨어 계신다. 그분은 심지어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운행하시며 우리에게 어떤 것들을 감지하게 하실 때도 우리가 의심할 정도로 자신을 숨기신다. 그분께서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시는 것은 일하실 때의 그분의 성향이다. 이것은 그분의 신성한 특성 중 하나이다.

그분의 일은 참된 것일수록 더 숨겨진다. 그분의 일은 더 분명할수록 덜 눈에 띄고 덜 나타난다. 이것은 중요한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으로 인하여 우리는 종종 시련을 겪고, 이러한 원칙으로 인하여 우리는 종종 시험을 받는다. 사탄까지도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이러한 원칙을 이용한다. 우리의 성격은 하나님의 성격과는 정반대이다. 하나님은 숨기를 좋아하시지만 우리는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보이지 않을 때 만족하시지만, 우리는 모든 것이 보여야만 만족한다.

우리의 인격은 하나님의 인격과는 정반대이다. 하나님은 감춰지기를 좋아하시지만, 우리는 드러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내려는 갈망이 조금도 없으시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이 없이는 만족하지 못한다. 이러한 신성한 기질이 우리에게 큰 시험과 점검이 된다.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시하기를 싫어하시는 그러한 성향을 갖고 계심을 보게 될 것이다. 그분은 드러내어 일하시기보다 은밀하게 일하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밖으로 드러나는 어떤 일을 기대하지 말라. 왜냐하면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삶 속에서 강력하게 일하고 계신다. 우리의 책임은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음성에 반응함으로써 그분과 협력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음성은 우리 자신의 느낌의 일부처럼 느껴지고 좀처럼 음성이라고 인식조차 되지 않는 ‘부드럽고 나지막한 음성’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감지되는 그 음성에 “아멘.”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 존재의 깊은 부분에서 은밀하고도 끊임없이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신언노트, 2023 04 09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
― 감추어지신 하나님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
― 숨겨지신 그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여러 칭호를 사용한다.
이 여러 칭호를 통해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의 여러 칭호를
거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이 간과하는
한 가지 특별한 칭호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이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분이시라는 것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며,
은혜와 자애로 가득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알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알지 못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을 말해 주는
이사야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정녕 주님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 45:15)
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대단히 명확하다.
그뿐 아니라 이사야는
자신이 상상한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그의 말은
축적된 사실들에서 생긴
깨달음에 근거했다.
그는
그러한 사실들을
보고 연구한 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 신언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고려해 보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손 아래서
어떤 상황을 통과했는지를
관찰해 보았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무엇을 체험했는지를
지켜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사야는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는가?
이러한 결론을 근거로
그는 어떻게
그러한 말을 할 수 있었는가?
우리가
이사야서를
자세히 읽어 본다면
그 이유를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뿐 아니라
그들 개개인 안에서
많은 일을 하셨지만,
이스라엘 자손의
옆에나 뒤에 숨으시며
자신을 감추셨기 때문이다.
한 면에서 그분은
항상 일하고 계셨지만,
다른 한 면에서는
항상 자신을 숨기고 계셨다.
그분은
너무도 많은 일을 하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러한 일을 한 분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신언자 이사야는
이것을 발견했을 때
“정녕 주님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외쳤다.

우리가
우주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와
구약의 역사와
신약의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우주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하늘들이
그분의 작품이고
땅도
그분께서 만드신 것이다.
우주 안에는
많은 것들과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육천 년 동안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
요한복음 1장 18절은
구약 시대에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음을
분명히 말해 준다.
신약 시대에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는
독생자께서 오셔서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셨지만,
이것 역시
숨겨져 있었다.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시려는
바로 그 목적으로
독생자께서 오셨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 안에,
심지어 그분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 안에
숨어 계셨다.
이 사람의 용모와 모습은 상하였고,
이 사람에게는
매력적인 모습이나
멋진 풍채가 없었다.
이 사람은
갈릴리라는 하찮은 지방에 있는
나사렛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유대인들은
나사렛에서
신언자나 유명한 사람이
나온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나사렛 사람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사하고
예수님이
신언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숨어 계셨다.

하나님께서
사천 년 동안
그분 자신을
사람에게서 숨기신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창세기부터 구약의 끝까지
그분은 내내
사람에게서 숨어 계셨다.
그러다가 신약 시대에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사람에게 나타내셔서
그분 자신을 알리실 목적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오셨지만,
한 사람 안에
그분 자신을 숨기셨다.
그분은
나타나셨다가
다시 숨으셨으며,
그분 자신을
매우 은밀하게 숨기셔서
아무도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분은
이렇게 행하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다.

“오, 구원자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여,
/ 정녕 주님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 사 45:15.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이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분이시라는 것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며,
은혜와 자애로 가득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알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알지 못할 수 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시고
전능하시며
용서로 가득하실지라도,
그분은 또한
에스더기가 암시하는 것처럼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나서
우주 안에
자신을 숨기셔서,
결국 우리는
어디에서 그분을 찾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수없이 많은 일을 하셨고
그들의 개인 생활 안에서도
수없이 많은 일을 하셨지만
자신을 감추셨다.
그분은
끊임없이 일하시지만
항상 감추어져 계셨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드러내지 않으신다.
그분은
너무도 위대하시다.
그분은
너무도 영광스러우시다.
그분은
너무도 위엄이 있으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분은 또한
정녕 숨어 계신다는 것이다.
온 우주가 비밀이고,
인생도 비밀이며,
모든 사람도 비밀이다.
이러한 것들이 비밀스러운 것은
그것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지만
우주로부터 숨어 계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지만
인류에게서 숨어 계신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분 자신을
사람에게서 숨기셨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의미이시지만
인생으로부터 숨어 계신다.
하나님은
우주 안에 존재하시지만
숨어 계신다.
그분은
잠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금 자신을 숨기신다.

하나님은
지극히 크시고
형언할 수 없이 위대하시지만,
나사렛 사람 예수님 안에 계실 정도로
그렇게 ‘축소되셨다’.
이 나사렛 사람은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처럼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셨다.
삼십 년 동안 사람들은
그분께서
가난한 가정의 목수이신 것을 보았을 뿐
그분께서 하신
다른 어떤 일도 볼 수 없었다.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우시며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이 작고 유한한
사람 안에
숨어 계신다는 것을
그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기를 좋아하는
성격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끊임없이
놀라운 일을 행하시지만
자신을 나타내기를
결코 좋아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주를 통치하시지만
아무도
그분을 볼 수 없다.
그분은
지난 이천 년 동안
교회와 함께 계셨지만,
항상 존재하시는 이 하나님을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우리 또한
그분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우리의 체험을 통해
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일하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계시를 주신다.
그분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부축하시고 인도하신다.
그분은 또한
우리를
책망하시고 금지하시며 멈추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본 적이 없다.
그분은 숨어 계신다.
그분은 심지어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운행하시며
우리에게
어떤 것들을 감지하게 하실 때도
우리가 의심할 정도로
자신을 숨기신다.
그분께서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시는 것은
일하실 때의
그분의 성향이다.
이것은
그분의 신성한 특성 중 하나이다.

그분의 일은
참된 것일수록
더 숨겨진다.
그분의 일은
더 분명할수록
덜 눈에 띄고
덜 나타난다.
이것은 중요한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으로 인하여
우리는 종종
시련을 겪고,
이러한 원칙으로 인하여
우리는 종종
시험을 받는다.
사탄까지도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이러한 원칙을 이용한다.
우리의 성격은
하나님의 성격과는
정반대이다.
하나님은
숨기를 좋아하시지만
우리는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보이지 않을 때 만족하시지만,
우리는
모든 것이 보여야만 만족한다.

우리의 인격은
하나님의 인격과는
정반대이다.
하나님은
감춰지기를 좋아하시지만,
우리는
드러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내려는
갈망이 조금도 없으시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이 없이는
만족하지 못한다.
이러한 신성한 기질이
우리에게
큰 시험과 점검이 된다.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시하기를 싫어하시는
그러한 성향을 가지고 계심을
보게 될 것이다.
그분은
드러내어 일하시기보다
은밀하게 일하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밖으로 드러나는
어떤 일을 기대하지 말라.
왜냐하면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삶 속에서
강력하게 일하고 계신다.
우리의 책임은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음성에 반응함으로써
그분과 협력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음성은
우리 자신의 느낌의
일부처럼 느껴지고
좀처럼 음성이라고 인식조차 되지 않는
‘부드럽고 나지막한 음성’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감지되는
그 음성에
“아멘.”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 존재의 깊은 부분에서
은밀하고도 끊임없이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섬기고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특히 우리를 돕고 계실 때
여전히 자신을 숨기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볼 수 없고,
겉으로 보기에
그분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사실상, 하나님은
그분의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우리를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해 주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집을 짓게 하시는 동안,
숨겨진 방식으로
우리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계신다.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은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우리 안에서
운행하고 계신다.

우리의 책임은
우리의 깊은 속에 있는
내적 느낌에 반응함으로써
그분과 협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고 활동하시는 것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아멘.”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 존재의 깊은 부분에서
은밀하고도 끊임없이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시하기를 싫어하시는
그러한 성향을 가지고 계심을
보게 될 것이다.
그분은
드러내어 일하시기보다
은밀하게 일하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우리의 기질은
하나님의 기질,
곧 숨으려고 하는 기질과
정반대이다.

하나님은
감춰지기를 좋아하시지만,
우리는
드러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내려는
갈망이 조금도 없으시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이 없이는
만족하지 못한다.

이러한 신성한 기질이
우리에게
큰 시험과 점검이 된다.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은
여기저기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들은 아마
그들이 살고 있던 곳의 이방인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방인들, 특히 그들의 통치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희의 여호와는
어디 계시느냐?
너희 여호와는
참되고 살아 계시느냐?
그분이 계신다면,
왜 너희는
여기에 노예로 사로잡혀 왔느냐?”
라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숨어 계셨으며,
여전히 숨어 계신다.
심지어 오늘날 교회 시대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고 계신다.
이스라엘 자손에게나
오늘날 우리에게나
마치 이 우주 가운데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참되시지만
숨어 계신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분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하고 부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 민족들에게
노예로 넘겨주심으로써
징계와 형벌을 받게 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엄격하신 가운데서도
긍휼이 있으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되어서
흩어져 있던 동안에
하나님은
숨어서
그들을 돌보고 계셨으며,
적절한 때에 오셔서
공개적으로 그들을 구원하셨다.
심지어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낮은 상황,
곧 바닥에 있을 때도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 계셨으며,
그들과 함께
고통당하고 계셨다.

한 면에서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분의 백성을 징계하셨지만,
또 다른 면에서
숨어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돌보고 계셨다.
결국, 하나님은
바빌론 제국을 끌어내리시려고
메도-페르시아 제국을 사용하셨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심지어
하나님의 갈망을 이루어 드리는 이인
하나님의 목자이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섬기는 이인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라
불리기까지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숨어 계시는 하나님께서
은밀히
이스라엘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음을 본다.

에스더기는
숨어 계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흩어져 억압당하는 그분의 선민을
은밀히 돌보시며
포로 되어 박해당하는 그분의 선민을
공개적으로 구원하시는 것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제시한다.

에스더기의 핵심 중점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자신의 선민으로 삼으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방 민족들에게 포로로 주신 이후에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 되셔서,
은밀하게 행동하시면서
그들을 은밀히 돌보시고
공개적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은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해야 하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억압받는 그분의 선민을
은밀히 돌보실 때,
먼저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이방 세계에
최고의 왕을 세우셔서
인도에서 에티오피아(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다스리는
권력과 번영과 영광을
가지게 하셨다.

그다음으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그 최고의 왕이
자기 왕후를 폐위하게 하셨는데,
그것은
왕후가
왕이 고관들을 초대하여 베푼 큰 연회에서
왕의 말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왕은
연회에 참석한 이들에게
왕후를 보이려고,
왕후에게
왕후의 관을 쓰고
왕 앞에 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왕후는
왕의 명령에도
오려고 하지 않았다.
불순종한 결과
왕후는 폐위되었고,
왕후의 자리는
비어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그분의 은밀한 돌보심으로
부모 없는 한 유대인 처녀인
에스더를 일으키셔서,
최고의 왕으로 하여금
왕후의 관을 씌우게 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분 자신을 숨기고 계시며,
특히 그분께서
우리를 돕고 계실 때 그러하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볼 수 없으며,
겉으로 보기에 그분은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사실, 그분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은밀한 방식으로
우리를 위해
많은 것을 하고 계신다.

누가복음 18장 3절에서
과부는
믿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은
현시대에
그들의 남편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과부이다.

과부는
재판관에게
그녀의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했다.
‘-의 원한을 풀어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를 위해 공의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 비유에서 주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에게
원수가 있음을 암시하신다.
이 원수는
마귀 사탄이고,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시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원한을 풀기 위해서
우리는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 재판관은 얼마 동안
그 과부의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속으로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괴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어야겠다.
그러지 않으면,
이 여인이
계속 와서
나를 못살게 굴겠구나.’
(4-5절)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주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으십시오.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자기에게 부르짖는
선택하신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않으시고
오래 참고만 계시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한을
속히 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보겠습니까?”
(6-8절)
8절의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구주께서 다시 오시는 때에
우리의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주실 것임을
암시한다.

오늘날의 악한 세대는
우리를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이 세대는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고
마취시켜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온 세상은
무감각해지고 있으며
마취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누림이 되시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느낌이나 의식이 없다.

삼일 하나님은
사람의 누림을 위해 계신다.
그렇지만 타락한 인류는
이에 관하여
조금도 인식이 없다.
그들은
그것에 관하여
전혀 느낌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장가들고 시집가며
사고팔고 심으며
집 짓느라 바쁘다.
그들은
그들의 누림이신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 생각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마취되고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오래 여행하시는 동안
이 문제를
몇 차례 다루셨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4장에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 세대에 속한 것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의 혼생명까지도
미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을
미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17장에서 주님은
무감각한 세대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 중점을 반복하셨다.
무감각한 세대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신성한 유산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주님은
18장에서
이 문제를
다시 다루시기 전에,
우리의 누림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것을 밝혀 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원수에게서 오는 박해이다.

우리는
마비되었고
또 마비시키는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한 과부와 같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남편,
곧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부재중이시다).
게다가 우리는
지속적으로 우리를 박해하는
한 반대자를(대항자를, 적대자를)
가지고 있다.

주님은 또한
우리가
그분을 추구하는 중에
그분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물이나 일은 무엇이든지
미워해야 함을
제자들에게 계시하셨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분을 누릴 때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
이런 박해는
우리의 원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의 원수는
하나님의 원수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있다는 이유로
우리의 원수가 되었다.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까지에 기록된
이 비유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에
우리가
우리의 원수로부터 받는
고난을 보여 준다.
사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여기 계신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에,
우리는
원수에게서 항상
괴롭힘을 당하는 과부이다.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까지에 나오는
비유의 의미는
심오하며,
우리는
감추어지신 하나님으로 계시되신
이러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원수가
우리를 박해하는 동안에
우리의 하나님은
의롭지 않으신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이
불의하게 박해당하는 것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침례자 요한은
목 베임을 당하였고,
베드로는
순교당했으며,
바울은
감옥에 갇혔고,
요한은 유배되었다.
수 세기에 걸쳐
사람-구주를 따르는
정직하고 신실한
수많은 사람들이
불의한 박해를 당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우리는
불의한 대우를 받고 있다.
우리의 하나님은
공정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심판하시고 입증해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 계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왜 그분은
이러한 상황을 용인하시는가?
왜 그분은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을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이러한 상황 때문에,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까지에서
사람-구주는
자신의 박해받는 백성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시는
하나님에 대한 상징으로
불의한 재판관을 사용하셨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괴롭게 하는 과부,
즉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여러 번 나는
주님께
그분의 회복을 변호해 달라고
지칠 때까지 기도했다.
내가
주님께
변호해 달라고 기도할수록
더욱더 변호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가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을 괴롭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까지에서
우리는
보이는 영역에서의
기도를 본다.
이런 종류의 기도는
우리가
희년을 누리는 것과
관계있다.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이들의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왜 그들이 박해를 받고 있는지를
종종 물어본다.
자녀들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이렇게 많이 사랑하는데
왜 고난을 당해야 하나요?”
자녀들에게는
부모가 따르는
주님께서 의롭지 않으신 것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 또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데
왜 고난을 당하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비유가
우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우리의 남편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가
이 땅에 과부로 남아 있을 때,
일시적으로
우리의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처럼 보이신다.
비록 하나님께서
불의하게 보이실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께
호소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며
거듭거듭 그분을
괴롭혀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비유는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함으로써
주님을 괴롭혀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그분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님,
기도하는 것은
당신께 달린 것이 아니라
저에게 달린 것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결코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당신은
저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저는 지금
당신의 변호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의미는
심오하다.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이 비유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인류가
처음 타락한 이래로 여전히
하나님은 심판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본성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견디지 못할 것이고
흔들릴 것이며
불로 멸망당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만이
하나님의 본성에 일치하며
흔들리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기 원하신다.
그분은
이 땅의 부패와 죄악,
그리고 그분을 반대하고
그분께 득죄하는 것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시련을 겪게 하시는 것 같다.

이 시대의 끝에서
그분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심판의 왕좌에
앉으실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이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낱낱이 진술할 것이다.”
(롬 14:12)

수 세기에 걸쳐
주 예수님을 따르는
정직하고 신실한
수많은 사람들이
불의한 박해를 당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불의한 대우를 받고 있다.

이 비유에서
과부는 계속해서
불의한 재판관에게 와서는
그녀의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렇게 원한을 풀기 위해서
우리는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하나님께서
불의하게 보이실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께 호소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며
거듭거듭 그분을 괴롭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밤낮 자기에게 부르짖는’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의 원한을
속히 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8장 8절에서
‘믿음’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직역하면
‘그 믿음’이다.
이것은
3절에 언급된
과부의 믿음과도 같이
끈질기게 기도하기 위한
우리의 지속적인 믿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절의 믿음은
객관적인 믿음이 아닌
주관적인 믿음이다.

요한계시록 6장
9절과 10절에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끈질긴 기도가
순교한 성도들의
혼들에 의해 수행되는 것을
본다.
성경의 그림에서
제단은
성막과 성전의 바깥뜰에 있는데,
바깥뜰은
땅을 상징한다.
따라서 ‘제단 아래’라는 말은
순교한 성도들의 혼이 있는
땅 아래를 가리킨다.
그곳은
주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가셨던 낙원이다.
낙원은
음부의 안락한 부분으로서
아브라함이 있는 곳이다.
여기서 순교한 성도들의 혼들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주님,
얼마나 오랫동안
침묵하시렵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불의하신 것처럼 계실 것입니까?
당신은
의로운 재판관이십니다.
이 땅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불의한 박해를
어떻게 당신께서
용납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연결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승리에 차서
(크게 승리하여, 의기양양하게)
돌아오실 때
이기는 이들이
그분을 만나기 위한
신성한 요구 조건이다.
이것은
누가복음 18장 8절에
근거한 것이다.
오늘날 그 온 세상이
믿고 있지 않다.
오늘날 이방인들
곧 이교도들 가운데서뿐 아니라,
또한 유대교와 로마 가톨릭교와
개신교와 오순절파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디에 믿음이 있는가?
오늘 주님께서 오셨다면
어디에서
그분께서 믿음을 발견하실 수 있는가?
이 땅 위에
거의 아무도
믿고 있지 않다.
그러나 주님의 긍휼로,
지난 여러 해 동안
니 형제님의 인도 직분을 통하여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들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우리의 하나님께서
각각의 모든 것들이심을 신뢰하도록
배움의
한 상황 안으로
이끌려 왔다.

나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믿는 이들로서 항상
자신이 아닌 그분을 신뢰하는 이들로,
또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확신도 가지지 않는 이들로
그분께 발견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완전한 확신은
그분 안에 있다.
바로 이것이
그 연결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이기는 이들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준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승리에 차서 돌아오실 때,
여러분과 내가
이기는 이들로서
그분을 만나기 위한
요구 조건이다.

결국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연결하는 믿음에 의해 살고 있는
소수의 이기는 이들을
발견하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분의 감추어진 이기는 이들로 발견되기를
기대하신다.

연결하는 믿음으로
이기고 크게 기뻐하는
생활을 하는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그들의 믿음의 결말(결과)인
그들의 혼들의 구원을 받도록
준비된 그 보물들로
그리스도에 의해
발견될(찾아질)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거나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그 연결하는 믿음으로
어떻게 이기는지,
어떻게 크게 기뻐하는지를
알 뿐이다.
오늘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결국
그들의 믿음의 결말,
곧 그들의 혼들의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한 구원을 받았지만,
이것은 단지
그 초기의 구원이다.
구원의 전진하는 단계는
변형의 단계이다.
구원의 완성하는 단계는
영광스럽게 됨의 단계이다.
만약 우리가
그 전진하는 단계에서
그 연결하는 믿음으로 살아서
변형된다면,
그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들이 될 것이다.

그 연결하는 믿음은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면서
우리를
그분의 모든 헤아릴 수 없는 부에
연결하시는
그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다.
이러한 이기는 믿음이
주님의 이기는 이들에게
자격을 준다.
주님의 이기는 이들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또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
주님께서
오실 때,
그분의 연결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곧 그분께서 다스리심의
그 천 년 안에 있는
그분의 왕국을 위한 보물들로
그들을 발견하실(찾으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8장 5절에서 암시하는 것은
이것이
6장 9절부터 11절까지와
누가복음 18장 7절과 8절에 언급된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8장
3절과 4절에 나오는
성도들의 기도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경륜을 반대하는
그 땅을 심판하기 위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그 땅 위에의 심판,
곧 그 땅에 불을 던지심은
그 향이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그 성도들의 기도들에 대한
응답이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그가
그 땅 위에서
믿음을 발견할 것입니까?”
― 눅 18:8하.

문자 그대로,
‘믿음’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그 믿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 과부의 믿음과 같이,
우리의 지속하는 기도를 위한
그 지속하는 믿음을
나타낸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은
그 믿음은
그 초기 단계의 믿음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한 생명 합일 안으로 이끈
그 믿음은
그 연결하는 믿음,
곧 우리가 지속적으로
그 삼일 하나님을 접촉하는 것을 통해
우리 안으로 와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살 수 있게 하는
그 믿음이다.

연결하는 믿음은
자신들 안에
신뢰를 가지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신뢰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믿는 이들의 믿음이다.

주 예수님께서
돌아오실 때,
그분께서는
그 연결하는 믿음에 의해
살고 있는
많은 이기는 이들을
발견하실 것이고,
또 그들을
그분의 다스리심의
그 천 년 안에 있는
그분의 왕국을 위한
보물들로
여기실 것이다.

1일

사 45:15 오, 구원자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여, 정녕 주님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 1:18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으나,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는 독생자이신 그분께서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셨다.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여러 칭호를 사용한다. 이 여러 칭호를 통해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의 여러 칭호를 거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이 간과하는 한 가지 특별한 칭호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이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분이시라는 것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며, 은혜와 자애로 가득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알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알지 못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을 말해 주는 이사야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정녕 주님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사 45:15)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대단히 명확하다. 그뿐 아니라 이사야는 자신이 상상한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그의 말은 축적된 사실들에서 생긴 깨달음에 근거했다. 그는 그러한 사실들을 보고 연구한 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 신언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고려해 보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손 아래서 어떤 상황을 통과했는지를 관찰해 보았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무엇을 체험했는지를 지켜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사야는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는가? 이러한 결론을 근거로 그는 어떻게 그러한 말을 할 수 있었는가? 우리가 이사야서를 자세히 읽어 본다면 그 이유를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뿐 아니라 그들 개개인 안에서 많은 일을 하셨지만, 이스라엘 자손의 옆에나 뒤에 숨으시며 자신을 감추셨기 때문이다. 한 면에서 그분은 항상 일하고 계셨지만, 다른 한 면에서는 항상 자신을 숨기고 계셨다. 그분은 너무도 많은 일을 하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러한 일을 한 분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신언자 이사야는 이것을 발견했을 때 “정녕 주님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외쳤다.

우리가 우주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와 구약의 역사와 신약의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우주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하늘들은 그분의 작품이고 땅도 그분께서 만드신 것이다. 우주 안에는 많은 것들과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육천 년 동안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 요한복음 1장 18절은 구약 시대에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음을 분명히 말해 준다. 신약 시대에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는 독생자께서 오셔서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셨지만, 이것 역시 숨겨져 있었다.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시려는 바로 그 목적으로 독생자께서 오셨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 안에, 심지어 그분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 안에 숨어 계셨다. 이 사람의 용모와 모습은 상하였고, 이 사람에게는 매력적인 모습이나 멋진 풍채가 없었다(사 53:2). 이 사람은 갈릴리라는 하찮은 지방에 있는 나사렛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유대인들은 나사렛에서 신언자나 유명한 사람이 나온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요 1:46). 그러므로 나사렛 사람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사하고 예수님이 신언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숨어 계셨다.

하나님께서 사천 년 동안 그분 자신을 사람에게서 숨기신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창세기부터 구약의 끝까지 그분은 내내 사람에게서 숨어 계셨다. 그러다가 신약 시대에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사람에게 나타내시어 그분 자신을 알리실 목적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오셨지만, 한 사람 안에 그분 자신을 숨기셨다. 그분은 나타나셨다가 다시 숨으셨으며, 그분 자신을 매우 은밀하게 숨기셔서 아무도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분은 이렇게 행하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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