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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이스라엘이 대형을 이루어 진을 친 것은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이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것을 보여 주는 예표임

Israel’s Encamping in Array
Typifying God’s Redeemed People
Being Consummated
as the New Jerusalem
이스라엘의
배열(배치, 배진[配陣], 대형) 안에
진을 침은
그 새 예루살렘으로서
완결되는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을
예표함
 

민수기 2장 2절에서
여호와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 자손은 각자
자기 조상의
집안 표지로 세운
깃발에 따라
진을 치되,
사방에서
회막을 향하여
진을 쳐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다.

대형을 이루어
진을 치는 일에서는
사람의 선택이 없었다.
이스라엘 사람은
어느 지파에서 태어났든지
그 지파의 깃발에 따라
진을 쳐야 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 비교 고전 12:18.

이 예표의
영적인 의미는
교회 안에서
안배하는 데 있어서
믿는 이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안배는 반드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정하심과 배열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는
(회막의 네 면 각각에 세 개씩)
열두 개의 깃발이 있었지만,
오직 하나의 중심 목표가
있었다.
그들은
회막과
하나님의 증거를
그들의 중심으로 삼았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모이는 것과 관련해서
성막은
회막이라고 불렸다
― 레 1:1.

하나님의 증거와 관련해서
성막은
증거의 성막이라고 불렸다
― 민 1:50, 53.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확대인 교회는
모두
이 두 방면을 지닌
성막의 실재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대형을 이루어
진을 친 것은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이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것을
보여 주는
예표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동쪽과 남쪽과 서쪽과 북쪽,
이렇게 네 방향에서
회막을 향해
진을 쳤다.
이것은
하나님의 증거가
사면 모두를 향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민 2:1-34.

네 면 각각에
세 개의 진영이 있었다.
숫자 3은
삼일 하나님을 의미하고,
숫자 4는
창조된 사람을 의미한다.
3 곱하기 4는
신성한 삼일성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창조된 사람과
하나로 연합되시는 것을
상징한다.

3 곱하기 4는
12인데,
숫자 12는
행정과 통치를
의미할 뿐 아니라
영원과 완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대형을 이루어
진을 친 것과 관련된
숫자에 따르면,
그들의 편성은
신성한 삼일성 안에 계신 하나님과
창조된 사람이
연합하여
영원하고 완전한
통치 단위를 형성하는 것을
상징한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은
네 면이 있고,
각 면에
세 개의 문이 있다.
새 예루살렘의
네 면에 있는 문은
총 열두 개이며,
열두 문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계 21:12-13.

요한계시록 21장
2절과 3절에 따르면,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장막
곧 하나님의 성막이다.
민수기 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 주위에
진을 쳤다.
이 그림은
요한계시록 21장에
묘사되어 있는
새 예루살렘과
일치한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새 예루살렘에
네 면이 있듯이,
민수기 2장에서
친 진에도
네 면이 있었다.

새 예루살렘의
네 면 각각에
세 개의 문이 있으며,
이 문들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와 유사하게
민수기 2장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진을 친 것에서도
네 면 각각에
세 지파씩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영원 안에서의
장면을 묘사하고,
우주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사람과 연합하여
하나의 통치 단위가
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이러한 통치 단위가
하나님의 증거를 위해
싸울 수 있다.

열두 지파가
진을 쳤을 때
그들은
성과 같았다.
새 예루살렘의
네 면에 있는
성벽은
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민수기에서
대형을 이루어
진을 친
군대의 열두 진영은
새 예루살렘의
성벽과
일치한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의 안배는
하나님의 증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의 행정은
한 지방에 있는
신성한 행정을 위해
‘3 곱하기 4’
곧 ‘12’여야 한다.
이러한 행정이
하나님을 위해 싸우고
하나님의 증거를 지키는
군대이다.

“그 성(새 예루살렘)에는
크고 높은 성벽이 있었고,
열두 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들에는
열두 천사가 있었으며,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 계 21:12.

성벽은
분별과 보호를 위한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되고
또 하나님의 권익을
완전히 보호할 것이다.

그 성벽은
크고 높을 것이다.
오늘날
모든 믿는 이는
분별되고 보호받기 위해
이러한 크고 높은
성벽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안에서
천사들은
섬기는 영들이다
(히 1:14).
그들은
구원을 상속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인
새 예루살렘의
영원한 축복에 참여하는
이들을 섬긴다.

이 천사들은
우리의 소유를 지키는
문지기가 될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안에서
풍성한 유업을 누리는
이들이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 12절에서
이스라엘은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며,
이것은
새 예루살렘의 문에
율법을 대표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율법은
거룩한 성의
모든 교통
곧 모든 출입을
감시하고 관찰함으로써,
그러한 출입이
율법의 요구에
부합된다는 것을
보증한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열두 문에
새겨져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거룩한 성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복음 전파를 통해
사람들을
삼일 하나님의
풍성 안으로 인도하여
그 성의 공급을
누리게 한다
― 계 22:14.

“열두 문은
열두 진주로
되어 있었는데,
그 문들은 각각
하나의 진주로
되어 있었습니다.”
― 계 21:21상.

진주는
죽음의 물속에 있는
조개에서
산출된다.

조개 안에
작은 모래알이
들어와
상처를 주게 되면,
조개는
모래알 주위에
생명의 즙을
분비하여
그것을
귀한 진주로
만든다.

조개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물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로부터
상처를 받으시고
(비교 사 53:5)
우리 위에
그분의 생명을
분비하시어,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와 표현을
건축하기 위해
우리를
귀한 진주로
만드시는 것을
묘사한다.

거룩한 성의
열두 문이
열두 진주라는 것은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분비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는 것이
그 성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율법의 요구에 부합되며,
그 율법은
이스라엘에 의해
대표되고 있고,
지키는 천사들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하는 죽음과
생명을 나누어 주는 부활에 의해
성취된,
한 번 만에 영원히 이루어진
거듭남을 통해서만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하나님의 권익 안으로,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하나님의 경륜 안으로
이끄는
한 입구 안에서
삼일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이끄시는 것은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삼일 하나님은
우리의
삼일의 입구이시다
― 눅 15:1-32, 엡 2:18, 벧전 1:1-2.

진주는
그리스도께서
두 방면,
곧 구속하고
생명을 해방하는
그분의 죽음과
생명을 분배하는
그분의 부활 안에서
분비하신 것의
산물을 상징한다.

이 두 종류의 분비(분배)는
추구하는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주관적으로
매일 체험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것을
요구한다
― 빌 3:10.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에 의해서만
그분의 죽음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의 가련한 자아를
십자가에
계속 둘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얻는다
― 아 2:8-9상, 14.

우리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부활의 실재)의
넘치는 공급에 의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주관적으로
매일
체험하기를
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맏아들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 빌 1:19, 롬 8:28-29.

그리스도의 죽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체험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실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돌이킬 때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데,
이 생명 주시는 영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재이시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함으로써
항상
우리의 영 안에서
그리스도를
접촉해야 한다
― 살전 5:17.

우리에게 적용된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그분의 죽음의 틀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할 것이며,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의 영은
우리를
그분의 형상
곧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의
영광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하여
그 영광 안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저를
당신의 죽음 안에
가두시며
항상 당신의 죽음 안에
저를
보존하소서.
저는
당신의 죽음을 떠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당신의 죽음을
저의
달콤하고 놀라운 거처로
삼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죽음 안에서
당신과 함께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분의 죽음은
일종의 장소로서
그리스도는
이곳에서
우리 주위에
그분 자신을
분비하실 수 있는
위치를 얻으시고,
우리는
이곳에서만
그분의 부활 생명을
누리고
체험할 수 있다.
그분의 부활 생명은
일종의 생명 즙으로서,
우리 존재의 주위에
분비됨으로써
우리를
놀라운 한 진주로
만들어
하나님의 건축물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상처를 입으신 것은
우리를
그분의 상처 안에
가두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온 일생 동안
우리 위에
분비하는 일을
거듭거듭 수행하시어,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를
건축하기 위한
진주들로
만드시려는 것이었다.

우리가
주관적으로
진주들이
되면 될수록,
더욱더
새 예루살렘 안에
있게 되고
더욱더
왕국 안에
있게 된다
― 마 13:45-46, 요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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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이스라엘이 대형을 이루어 진을 친 것은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이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것을 보여 주는 예표임”

6일

빌 3:1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빌 1:19
왜냐하면
여러분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이러한 일이
결국에는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을
나는
알기 때문입니다.

진주는
그리스도께서
두 방면,
곧 구속하고
생명을 해방하는
그분의 죽음과
생명을 분배하는
그분의 부활 안에서
분비하신 것의
산물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분비하고
분배하여
성의 문을
산출한다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
열두 문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분배하는
부활을 통해
분비하신 것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분은
부활하시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심으로
신성한 생명을
믿는 이들 안으로
분배하셨다
(고전 15:45하).
…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모두에는
어떤 산출물
혹은 분비가 있다.

이 두 종류의
분비(분배)는
추구하는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주관적으로
매일
체험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것을
요구한다
(빌 3: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자체뿐만 아니라
그분의 죽음에서 나오는
분비도
매일
주관적으로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매일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에 의해서만
그분의
죽음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어떻게 항상
십자가에
머물 수 있는가?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알지 못하고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부활 능력을
아는 사람들만이
이것을 실행할
역량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에 의해서,
우리는
가련한 자아를
십자가에
둘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얻는다.

믿는 이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부활의 실재)의
넘치는 공급에 의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주관적으로
매일
체험하기를
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맏아들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빌 1:19, 롬 8:29).

그리스도의 죽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체험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실재가 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고,
지금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돌이킬 때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데,
이 생명 주시는 영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재이시다.
이 영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는 것은
생명 주시는 영을
접촉하는 것이다.

이것을
적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영 안에
머물면서
부활의 실재이신
그 영이신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십자가에 머무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성의 문을
적용하는 것은
먼저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에 의해
십자가에 머무는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사시는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적용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그분을
접촉해야 한다.
이 때문에
성경은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말한다
(살전 5:17).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부활의 실재이신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접촉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늘 적용할 때,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십자가 위에 있는
죽은 사람의 형상을
지닐 것이다.
우리가
그 영을 만질 때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만지게 되고,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맏아들의
영광의 형상과
같은 형상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적용된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그분의 죽음의 틀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할 것이며,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의 영은
우리를
그분의 형상,
곧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의
영광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하여
그 영광 안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5일

계 21:21
또 열두 문은
열두 진주로
되어 있었는데,
그 문들은 각각
하나의 진주로
되어 있었습니다. …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 있는
진주의 의미를
보기 원한다.
요한계시록 21장 21절은
우리에게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이
열두 진주임을
말한다.
진주는
창조되거나
제조된 것이 아니라
조개에 의해
산출된 것이다.
진주는
유기적으로
산출된 것이며,
이것은 마치
과일이
제조되거나
창조된 것이 아니라
유기체인 나무의
소산물인 것과 같다.
… 진주는
죽음의 물 안에 있는
조개에서
산출된다.
조개 안에
작은 모래알이
들어와
상처를 주게 되면,
조개는
모래알 주위에
생명의 즙을
분비하여
그것을
귀한 진주로
만든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그림을 볼
필요가 있다.
조개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묘사하는데,
이분은
죽음의 물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로부터
상처를 받으시고
우리 위에
그분의 생명을
분비하시어,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와 표현을
건축하기 위해
우리를
귀한 진주로
만드신다.
거룩한 성의
열두 문이
열두 진주라는 것은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분비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는 것이
그 성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한 성의
문들은 각각
하나의 진주로
되어 있다.
이것은
그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유일하며,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한 번 만에 영원히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을 분배하시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취된,
한 번 만에 영원히 이루어진
거듭남을 통해서만
그 성에
들어갈 수 있다
(계 21:21).

조개의 상처는
작은 돌로 인해
생긴
내적인 상처이다.
이 돌은
이 상처 안에,
혹은 이 죽음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
… 우리 모두는
순간순간
모든 것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머무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죽음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 우리는
어디에서
죄에 대하여,
우리의 성질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사탄에 대하여
승리를 얻을 수 있는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만
승리가 있다.

매일매일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의
분비를 누린다.
나는 항상
그분의 죽음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언제나 내 주위에는
어떤 분비가 있다.
죽음이 있는 곳에
부활이 있다.
부활은
죽음 안에서 운행하고
죽음을 통해서 운행한다.
이 부활은
조개가
진주를 산출하는
방식과 동일하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즙을
우리 온 존재의 주위에
분비한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 안에
머물면서
생명을 분비하는
부활을 누릴 때
새 예루살렘 안으로
더 들어가게 된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우리의 체험이
새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는
우리의 입구가 된다.

나는
우리 모두가
다음과 같이
기도하기를
바란다.
“주님,
저를
당신의 죽음 안에
가두시며
항상 당신의 죽음 안에
저를 보존하소서.
저는
당신의 죽음을 떠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당신의 죽음을
저의 달콤하고 놀라운 거처로
삼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죽음 안에서
당신과 함께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분의 죽음은
일종의 장소로서
그리스도는
이곳에서
우리 주위에
그분 자신을
분비하실 수 있는
위치를 얻으시고,
우리는
이곳에서만
그분의 부활 생명을
누리고
체험할 수 있다.
그분의 부활 생명은
일종의 생명의 즙으로서,
우리 존재의 주위에
분비됨으로써
우리를
놀라운 한 진주로
만든다.
우리는
진주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산출된
믿는 이들을 상징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구속의 일 안에서
그분의 분비하는 생명으로
믿는 이들을
하나님의 건축물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게 하신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은
우리가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미리 아신 바에 따라
… 그 영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어
그분의 피가 뿌려진
사람들”로
선택되었다고
말한다.
… 이 절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선택하심과
그 영의 거룩하게 하심과
아들의 피의 뿌림을
본다.
우리는
…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하나님의 권익 안으로,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하나님의 경륜 안으로
이끄는
한 입구 안에서
하나님께서
삼일(三一)이신 것을
본다.
하나님의 경륜은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성경은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삼일의 입구이심을
계시한다.

 

4일

계 21:12-13
그 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이 있었고,
열두 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들에는
열두 천사가
있었으며, …

눅 15:10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성벽은
분별과 보호를 위한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되고
또 하나님의 권익을
완전히 보호할 것이다.
그 성벽은
크고 높을 것이다.
오늘날
모든 믿는 이는
분별되고 보호받기 위해
이러한 크고 높은
성벽이 필요하다
(계 21:12).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안에서
천사들은
섬기는 영들이다
(히 1:14).
그들은
구원을 상속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인
새 예루살렘의
영원한 축복에 참여하는
이들을 섬긴다.
이 천사들은
우리의 소유를 지키는
문지기가 될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안에서
풍성한 유업을 누리는
이들이 될 것이다
(계 21:12).

요한계시록 21장 12절에서
이스라엘은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며,
이것은
새 예루살렘의 문에
율법을 대표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율법은
거룩한 성의
모든 교통
곧 모든 출입을
감시하고 관찰함으로써,
그러한 출입이
율법의 요구에
부합된다는 것을
보증한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열두 문에
새겨져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거룩한 성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복음 전파를 통해
사람들을
삼일 하나님의
풍성 안으로
인도하여
그 성의 공급을
누리게 한다
(계 21:12).

그 열두 문들은
 그 구약의 그 율법의 대표들이었던,
 이스라엘의 그 열두 지파들의
 그 이름들이 새겨지는데,
 (이는)
 하나님의 그 왕국 안으로의
 그 입구에 있는
 그 율법의 그 요구를
 의미합니다.
… 이것은
 그 율법이
 그 열두 문들 위에
 지켜보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 율법에는(with)
 공급하거나
 또는 영양분을 주는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 율법은 오직
 우리에게서
 어떤 것을
 요구할 뿐입니다.
그 율법은
 그 문 위에
 지켜보고 있습니다.
만약 한 죄인이
 그 거룩한 도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is to come),
 그 율법의 그 요구가
 반드시 충족되어야만 합니다.
그 율법은
 그 문 파수꾼,
 또는 그 문에 있는 경비원이며,
 여러분이
 그것의 요구를
 충족시켰는지를
 확실하게 합니다
 (to ensure; 책임집니다).
여러분이
 “그 문을 통하여
 걷고” 있으면서
 또 여러분이
 주 예수님의 그 이름을
 부를 때,
그 율법이
 여러분은 괜찮다고
 (are okay;
 좋다고, 오케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그 율법의 그 요구의
 각각의 모든 부분들이
 충족되고,
 또 여러분은
 괜찮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 거룩한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 우리가
 그 삼일의 입구에
 왔을 때,,
 우리는
 한 ‘무료 입장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대가를 지불하셨고,
 또 그 문에 있는
 그 경비원(그 율법)이
 그리스도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 율법은
 그 문에 있는
 한 파수꾼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입구의
 그 아이-안내자입니다
 (the child-conductor;
 그 아이-호송인[지도자]입니다)
 (갈 3:24).
… 그 율법은
 우리가
 지키라고
 주어졌던 것이 아니고,
 오직 그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안내하기 위하여
 (to conduct;
 인도하기[이끌기, 호송하기] 위하여)
 주어졌습니다.
그 율법은
 여러분을
 그 문으로
 데리고 가는
 그 안내자입니다;
그 율법은
 또한 그 경비원이고
 여러분의 입장에
 “괜찮다”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열두 문에서
열두 천사를
보는데
(계 21:12),
이것은
천사들이
새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음을
상징한다
(눅 15:7, 10, 히 1:14).
각 문에는
열두 지파 중
하나의 이름이
있을 뿐 아니라
천사가 있다.
율법은
요구하고,
천사는
지켜본다.
천사들은
관객들이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영역 전체가 사실상
‘큰 공연’이다.
이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리에게는
무료 입장권이
필요하며,
이 공연장에는
관객들이 있다.
이 관객들은
천사들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시인하지 않으면
무료 입장권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거룩한 성 안으로
들어가는
무료 입장권을
얻게 되며,
천사 관객들은
기뻐하면서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환영할 것이다.
문에 있는
한 천사는 사실상
천사들의 영역 전체를
대표한다.
누가복음 15장 10절에서
주 예수님은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었을 때,
즉 우리가
회개하고
그분의 보배로운 이름을
불렀을 때,
아마도 우리는
하늘에 있는
허다한 천사들이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있었음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3일

계 21:12-13
그 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이 있었고,
열두 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들에는
열두 천사가 있었으며,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은
네 면이 있고,
각 면에
세 개의 문이 있다.
새 예루살렘의
네 면에 있는
문은
총 열두 개이며,
열두 문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2-13절).
2절과 3절에 따르면,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장막
곧 하나님의 성막이다.
민수기 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 주위에
진을 쳤다.
이 그림은
요한계시록 21장에
묘사되어 있는
새 예루살렘과 일치한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새 예루살렘에
네 면이 있듯이,
민수기 2장에서
친 진에도
네 면이 있었다.
새 예루살렘의
네 면 각각에
세 개의 문이 있으며,
이 문들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와 유사하게
민수기 2장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진을 친 것에서도
네 면 각각에
세 지파씩 있었다.

민수기 2장에서
진을 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영원 안에서의
장면을 묘사한다.
우주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사람과 연합하여
하나의 통치 단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통치 단위가
하나님의 증거를 위해
싸울 수 있다.
열두 지파가
진을 쳤을 때
그들은
성과 같았다.
새 예루살렘의
네 면에 있는
성벽은
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민수기에서
대형을 이루어
진을 친
군대의 열두 진영은
새 예루살렘의
성벽과 일치한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의 안배는
하나님의 증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의 행정은
한 지방에 있는
신성한 행정을 위해
‘3 곱하기 4’
곧 ‘12’여야 한다.
이러한 행정이
하나님을 위해 싸우고
하나님의 증거를 지키는
군대이다.

마태복음 13장에는
부정적인 것들,
곧 가라지와 누룩과 큰 나무가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안에서
이러한 것들을
주의하지 않으시고
밀(식물의 생명)을
주의하신다.
이 밀은
본성이 변화되어
금과 진주와 보석(광물)이
될 것이다.
이러한 귀한 것들은 모두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대형을 이루어
진을 친 것은
하나님께 구속받은 사람들이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것을
예표한다.
우리의 관찰과
오늘날 교회의
외적인 상황을 볼 때
조금도
대형을 이루어
진을 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 물론 하나님의
편성된 군대에는
가라지들이
포함되지 않는다.
역대로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은 이들만이
계수된다.
이 모든 믿는 이들은
구원받고,
거룩하게 되고,
새로워지고,
변화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이룬 후에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이 영광스럽게 됨 안에서
새 예루살렘의 실재가
나타날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약 경륜 안에서,
옛 창조물 안에서
새 창조물을
이루어 내는
그분의 일의
완결일 것이다.

결국 새 창조물을
이루어 내는
하나님의 일은
한 실체,
곧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구속받은 이들이
대형을 이루어
진을 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있는
상황은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우리를
슬프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눈물을 흘리는 데서 벗어나
희년이 있게 될 것임을
믿는다.
먼저 천년왕국 동안
작은 규모로
희년이 있을 것이고,
그런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완전한 규모의
희년이 있을 것이다.

성경 전체는
우리에게
한 가지,
곧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경륜은 먼저
옛 창조물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다음은
옛 창조물로부터
새 창조물을
산출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를 위해
네 시대를
사용하신다.
오늘날 이 새 창조물은
교회로
완결되었고,
천년왕국에서는
작은 규모의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완전한 규모의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적인 그림은
새 예루살렘이다.

 

2일

민 2:3
동쪽 곧 해 뜨는 쪽에는
유다 진영의
깃발에 속한 사람들이
부대별로
진을 쳐야 한다.
유다 자손의 인도자는 …

민 2:9
이와 같이 부대별로
유다 진영에서
그 수에 든 사람은 모두
십팔만 육천 사백 명이다.
그들은
첫 번째로
진군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동쪽과 남쪽과 서쪽과 북쪽,
이렇게 네 방향에서
회막을 향해
진을 쳤다.
이것은
하나님의 증거가
사면 모두를 향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 면 각각에
세 개의 진영이 있었다.
이러한 대형과 관련된
숫자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숫자 3은
삼일 하나님을
의미하고,
숫자 4는
창조된 사람을
의미한다.
3 곱하기 4는
신성한 삼일성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창조된 사람과
하나로 연합되시는 것을
상징한다.
3 곱하기 4는
12인데,
숫자 12는
행정과 통치를
의미할 뿐 아니라
영원과 완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대형을 이루어
진을 친 것과 관련된
숫자에 따르면,
그들의 편성은
신성한 삼일성 안에 계신 하나님과
창조된 사람이
연합하여
영원하고 완전한
통치 단위를
형성하는 것을
상징한다.

해 뜨는 곳인 동쪽에는
… 유다 진영의 깃발이 있었다.
이들은
가장 먼저 진군했다
(민 2:3-9).
남쪽에는
… 르우벤 진영의 깃발이 있었다.
이들은
두 번째로 진군했다
(10-16 절).
서쪽에는
… 에브라임 진영의 깃발이 있었다.
이들은
세 번째로 진군했다
(18-24절).
북쪽에는
… 단 진영의 깃발이 있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진군했다
(25-31절).

네 진영의 진군 순서는
출생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상태에 따른 것이었다.
르우벤은
맏아들이었지만
(창 29:31-32)
음행을 저질러
장자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창49:3-4, 대상 5:1-2)
두 번째로 진군하였다.
유다는
넷째로 태어났지만
(창 29:31-35)
첫 번째로 진군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열두 형제들 가운데서
이기는 사자였기 때문이다
(49:8-9).
유다는,
싸움에서 이기는 분이시고
유다 지파의 사자이시며
(계 5:5)
하나님의 원수를 패배시키는 분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은
세 번째로 진군하였는데,
이것은
요셉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진영들 가운데
단이
맨 마지막으로 진군했다.
단은
가장 나빴는데,
그 이유는
그가 뱀이었고
(창 49:17),
하나님의 왕국에 대항하여
처음으로 반역하였으며,
두 번째 경배의 중심지를
세웠기 때문이다
(왕상 12:26-30).

각각 세 군대씩 네 진영은
12라는 숫자를
산출한다.
3 곱하기 4로 구성된
이 숫자는
삼일 하나님(3)과
그분의 피조물(4)이
연합하여
영원하고 완전한
통치 단위를
형성하는 것을
상징한다.
12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완전하고 온전한
통치의 숫자이다.
예를 들어
열두 사도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위한 것이다.

회막은
네 진영들 가운데 있으며,
레위인들의 진영과 함께
다른 진영들 한가운데에서
진군해야 했다
(민 2:17).
레위인들은
성막 세 면에
… 진을 쳤으며
(3:29, 35),
동편은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두 아들들을 위해
남겨졌다
(38절).

이스라엘 자손이
성막 둘레에
대형을 이루어
진을 친
그림을 살펴보면 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과 창조의 능력으로 인해
그분을
더욱더 경배하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의해
야곱은
열두 아들들을 가졌으며
그들은 각기
한 지파를 이루었다.
그중 한 지파
곧 레위 지파는
제사장들(레위인들)이 되기 위해
분별되었지만,
요셉의 두 아들들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레위에게는
세 아들들이 있었으며
그들이
성막의 세 면을 채웠고,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을 위해
한 면이 남겨졌다.

구약에
많은 그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들을
신약에 기록된 것에
적용하는 법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없었다.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을
주의 깊게 읽어 본다면,
우리는
이 장들에서
구약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구약의 그림들이 없다면
신약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 관한
계시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신언노트, 2019 02 03

이스라엘의
배열(배치, 배진[配陣], 대형) 안에
진을 침은
그 새 예루살렘으로서
완결되는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을
예표함

민수기 2장 2절 안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와 또 아론에게
“이스라엘의 그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들의
 가정들의 그 깃발들과 함께
 (with the ensigns;
 국기들[문장들]과 함께)
 그 자신의 군기들 옆에
 (by … standards;
 부대기들[왕기들] 곁에서[가까이에])
 각각 진을 칠 것이고
 (shall encamp;
 야영해야만 하고);
각각의 모든 면들에
 (on every side;
 사방에서)
 그 회막을 향하여
 (facing the Tent of Meeting;
 만남의 그 천막을 마주보게)
 진을 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배열 안에 진을 침의
 그 문제 안에,
 사람의 선택이 없었습니다;
한 이스라엘 사람이
 어느 지파에서(tribe … of; 종족에서)
 태어났든지,
 그는 반드시
 그 종족의 그 군기 옆에
 진을 쳐야만 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의 선택을 가지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 예표의
 영적인 그 의미는
 그 교회 안에 있는
 그 동역 안에서
 (in the coordination;
 공동 작업[조정, 조화, 일치] 안에서),
 그 믿는 이들은
 그들 자신의 선택을 가지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동역은 반드시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정하심과
 (ordination;
 섭리와, 명령과, 정리와, 배열과, 배치와)
 또 배열에서부터
 (out of … arrangement;
 배치[정리, 준비]에서 밖으로)
 나와야만 합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에
 (among;
 중에, 사이에, …에 둘러싸여)
 (그 회막의 그 네 면들의 각각에 셋씩)
 열두 군기들이 있었지만,
 오직 하나의
 중심적인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회막과
 또 하나님의 그 증거를
 그들의 중심으로(as)
 취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하나님과의
 그 만남에 대하여는
 (For; 있어서, …을 위하여),
 그 성막이
 그 회막이라고
 불렸습니다.

하나님의 그 증거에 대하여는,
 그것이
 그 증거의 그 성막이라고
 불렸습니다.

그 신약 안에서
 그리스도와
 또 그 교회,
 곧 그리스도의 그 확대는(the enlargement)
 둘 다,
 이(these) 두 측면들 안에 있는
 그 성막의 그 실재입니다.

이스라엘의 그 아이들이
 배열 안에
 진을 친 것은
 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을
 예표합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네 방향들 안에서
 그 회막을 향하여
 (facing; 마주보며)
 진을 쳤습니다:
 동쪽, 남쪽, 서쪽, 또 북쪽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그 증거가
 모든 면들을 향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네 면들의 각각 안에
 세 진영들이
 (three camps; 세 야영지들이)
 있었습니다;
셋은
 그 삼일 하나님을 의미하고,
 또 넷은
 그 창조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셋 곱하기 넷은
 그 창조된 사람과
 하나로(as)
 섞이고 계시는
 그분의 신성한 삼일(Trinity)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셋 곱하기 넷은
 열둘인데,
 이는
 행정과 또 통치뿐만 아니라
 또한 영원과 또 완성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그 이스라엘 사람들의
 배열 안에 진을 침 안에서의
 그 숫자들에 따라서,
그들의 대형은
 (formation;
 진형은, 포메이션은, 편성은, 형성은)
 그 창조된 사람과
 섞이고 계시는,
 곧 영원하고 또 완전한
 통치의
 한 구성 단위를
 (a unit; 한 편성 단위를, 한 부대를)
 형성하시는
 그분의 신성한 삼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안에 있는
 그 새 예루살렘은
 네 면들을 가지고 있고,
 또 각 면은
 세 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새 예루살렘의
 그 네 면들에 있는(on) 문들의
 그 총계는
 (the total number; 총수는)
 열둘이고,
또 그 열두 문들 위에
 이스라엘의
 그 열두 지파들의
 그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2절과 3절에 따라,
 그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막입니다;
민수기 2장 안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진을 침은
 그 성막 둘레에
 (around; ..을 삥 둘러)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요한계시록 21장 안에 있는
 그 새 예루살렘의
 그 묘사와
 (to the description;
 그 기술[서술, 설명]에)
 일치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안에 있는
 그 새 예루살렘이
 네 면들을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이(just as),
또한 민수기 2장 안에 있는
 그 친을 침도(the encamping)
 네 면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새 예루살렘은
 그녀의 네 면들의
 각각 위에
 세 문들을 가지고 있고,
이 위에(on which)
 그 열두 지파들의
 그 이름들이 있습니다;
유사하게(similarly),
 민수기 2장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그 열두 지파의
 그 진을 침도
그것의 네 면들의
 각각 위에
 세 지파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영원 안에 있는
 그 장면을
 묘사하고,
그 우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이
통치의 한 구성 단위가
 되기 위하여
 그분의 신성한 삼일 안에서
 사람과 섞이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통치의 구성 단위가
 그분의 증거를 위하여
 싸울 수 있습니다.

그 열두 지파가
 진을 치게 되었던 때에,
 그들은
 한 도시와 같았습니다;
그 새 예루살렘의
 그 네 면들의
 그 벽들은
 그 도시의
 그 안전 장치입니다
 (the safeguard;
 그 보호 수단입니다).

민수기 안에 있는
 배열 안에
 진을 치게 된
 그 군대의
 그 열두 진영들은
 그 새 예루살렘의
 벽들과
 일치합니다;
마찬가지로
 (likewise; 비슷하게, 똑같이),
 그 교회 안에 있는
 그 동역은(the coordination)
 하나님의 증거를
 보호하기 위하여 있습니다
 (is for safeguarding …).

지방의 각 교회의
 그 행정은
 (The administraion;
 그 관리는, 그 집행은)
 “삼 곱하기 사”가
 되어야만 하고,
 이는(which)
 “열둘”과 같은데,
 한 지방 안에서의
 그 신성한 행정을 위해서입니다;
이 행정은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고
 또 하나님의 증거를
 유지하는
 (maintains;
 지속하는, 관리하는, 지지하는, 지키는)
 한 군대입니다.

그 새 예루살렘은
 “크고 또 높은
 한 벽을
 가지고 있었고,
 또 열두 문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그 문들에(at)
 열두 천사들을
 (가지고 있었고),
 또 새겨진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그 아들들의(of; …인)
 그 열두 지파들의
 그 이름들입니다.”
 ― 계 21:12.

그 벽은
 분별과
 (separation; 분리와, 구분과)
 또 보호를
 위하여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이르도록
 (unto God;
 하나님을 향하여)
 분별될 것이고
또 하나님의 그 이익들을
 (the interests;
 그 관심사들을[권리들을, 관계자들을])
 완전히 보호할 것입니다.

그것의 벽은
 크고 또 높을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믿는 이들이
 그들의
 분별과 또 보호를 위한
 그러한 크고 높은
 한 벽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안에서,
 천사들은
 섬기는
 (ministering;
 시중드는, 도와주는, 공급하는)
 영들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상속하는
 또 그 새 예루살렘,
 곧 그 새 하늘과 또 새 땅의
 그 중심의
 그 영원한 축복(blessing) 안에
 참여하는
 (participate in;
 함께하는)
 사람들을
 섬깁니다
 (serve; 시중듭니다, 돕습니다,
 공급합니다, …을 위해 봉사합니다).

이 천사들은
 우리의 소유의
 그 문지기들이
 될 것인데
 (…, while; 될 것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안에 있는
 그 부유한 상속 재산을
 누리는 이들이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2절 안에 있는
 이스라엘은
 그 구약의 그 율법을
 대표하고,
그 율법이
 그 새 예루살렘의
 그 문들에서(at)
 대표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율법은
 지켜보고
 (watches; 망보고, 조심하고)
 또 관찰하여
 (observes; 주시하여, 감시하여)
그 거룩한 도시의
 그 모든 교통들,
 곧 그(the) 안으로 들어옴들과
 또 밖으로 나감들이
 그 율법의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을
 확실하게 합니다
 (to insure;
 안전하게 합니다, 보증합니다, 책임집니다).

이스라엘의
 그 열두 지파들의
 그 이름들이
 그 열두 문들 위에
 새겨진다는 것은
그 열두 지파들이
 그 거룩한 도시 안으로의
 그 입구라는 것을
 (the entrance;
 그 들어감[새 출발, 첫 출발,
 문, 문간, 현관, 입장, 입장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것으로서
 (as such; 그런 사람들로서, 그렇게),
 그들은
 그 복음을 전파함을 통하여,
 그 삼일 하나님의
 그 부유함 안으로,
 사람들을
 (people; 백성을)
 인도하여,
 그 도시 안에 있는
 그 공급을
 누리게 합니다.

“그 열두 문들은
 열두 진주들이었습니다;
그 문들의 각 하나는,
 각각,
 하나의 진주에
 속하였습니다
 (was … of;
 …에서부터 있었습니다)”
 (계 21:21상):

진주들은
 죽음의 그 물들 안에 있는
 굴들(oysters; 진주 조개들)에 의하여
 산출됩니다:

한 굴이
 모래의 한 알갱이에 의하여
 상처를 입을 때,
그것은
 그 모래알 둘레에(around)
 그것의 생명-즙을
 분비하고
 또 그것을
 한 귀한 진주로
 만듭니다
 (makes … into;
 …가 되게 합니다).

그 굴은
 그 죽음 물들 안으로 오시고,
 우리에 의하여
 상처를 입으시며,
 또 그분의 생명을
 우리 위에
 분비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와 또 표현의
 그 건축물을 위한
 (for the building;
 그 건축함을 위한)
 귀중한 진주들로
 만드시는
그 살아 계시는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묘사합니다.

그 거룩한 도시의
 그 열두 문들이
 열두 진주들이라는 것은
죽음을 이기시는
 또 생명을 분비하시는
 그 그리스도를 통한(through)
 거듭남이
 그 도시 안으로의
 그 입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이는(which; 그 율법은)
 이스라엘에 의하여
 대표되며,
 또 그 보호하는 천사들의
 그 관찰함
 (the observing;
 그 주시함[감시함])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이기는
 죽음과
 또 생명을 나누어 주는
 부활에 의하여
 성취된
 한 번만에 영원한
 (once-for-all;
 한 번에 최종적인)
 그 거듭남을 통해서만
그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의 입구 안에서
 삼일이시고
 (… to …; 삼일이셔서)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하나님의 이익(interest; 관심사) 안으로,
 하나님의 그 왕국 안으로,
 또 하나님의 그 경륜 안으로
 데리고 가시는데,
이는(which)
 그 새 예루살렘 안에(in; …으로)
 완결될 것입니다;
그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삼일 입구이십니다
 (triune entrance;
 셋하나의[셋이 한 조인]
 입구이십니다).

진주들은
 두 측면들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분비의
 그 유출을
 (the issue;
 그 결과를[자식을, 유출점을, 사안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구속하시는
 또 생명을 해방하시는
 죽음과
 또 그분의
 생명을 분배하시는
 부활입니다:

두 종류들 모두의
 분비(분배함)는
그 추구하는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그 능력에 의하여
 주관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매일 체험함을
 필요로 하고
이는(that)
 그들이
 그리스도의 그 죽음과
 같은 형상이 될 수 있게(may)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그 부활의
 그 능력에 의해서만
 그분의 죽음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그 부활의
 그 능력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의 불쌍한
 (pitiful;
 가련한, 한심한, 초라한)
 자아를
 그 십자가 위에
 계속 있게 하는
 (to keep;
 계속 유지하는)
 그 능력과 또 그 힘을
 가집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부활의 그 실재)의
 그 넘치는
 (bountiful;
 아낌없이 주는, 풍부한)
 공급에 의하여
 주관적으로
 그리스도의 그 부활을
 매일 체험함을
 추구해야만 하고
이는(that)
 우리가
 하나님의
 그 첫 번째로 나신 아들의
 (the firstborn Son;
 그 맏아들의)
 그 형상과
 같은 형상이 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만
 우리에 의하여
 체험될 수 있고,
또 그리스도의 부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의
 그 넘치는 공급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실재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돌이킬 때,
우리는
 그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데,
그분께서는(who)
 그리스도의 부활의
 바로 그 실재이십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함에 의하여
 언제나
 (all the time;
 내내, 줄곧, 늘, 항상)
 우리의 영 안에서
 그리스도를
 접촉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적용되는
 그분의 죽음은
 우리를
 그분의 죽음의
 그 틀과
 (to the mold; 그 틀에)
 같은 형상이
 되게 할 것이고,
또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의 영께서
 그분의 형상,
 곧 하나님의
 첫 번째로 나신 아들의 그 형상의
 그 영광 안으로(into the glory)
 우리를
 같은 형상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죽음 안에
 항상(always; 언제나, 늘)
 저를 감금하여 주시고
 또 저를 지켜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죽음을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오직
 당신의 죽음을
 저의
 달콤하고 경이로운(wonderful)
 거처로(dwelling place)
 만드는 것을
 원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죽음 안에
 당신과 함께
 머무르는 것을
 (to stay;
 계속 있기를)
 원합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곳에
 그분께서
 우리 둘레에
 그분 자신을 분비하시는
 그 위치를 가지시는
 그 장소이고,
또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부활 생명을
 한 종류의
 (a kind of;
 일종의, 어떤)
 생명-수액(樹液)으로
 (as … life-sap)
 누리고
 또 체험할 수 있는
 그 유일한 장소인데
(이 생명-수액은)
 그 자체를
 우리의 존재 둘레에
 분비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건축물 안으로의
 그 입구를 위한
 진주의
 경이로운 한 부분으로
 (a … piece; 한 조각[작품]으로)
 만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분의 상처 안에
 감금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해
 상처를 입으셨고
이는(so that)
 그분께서
 우리의 전체 생애 내내(throughout)
 거듭거듭
 (again and again;
 다시 또 다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우리 위에
 그분의 분비를
 수행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의
 그 건축물을 위한
 (for the building;
 그 건축함을 위한)
 진주들로
 만드실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might).

더 많이(The more)
 우리가
 주관적으로
 진주들이 될수록
 (are made),
더 많이
 우리가
 그 새 예루살렘 안에 있고,
또 더 많이
 우리가
 그 왕국 안에
 있습니다.

 

1일

민 2: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은 각자
자기 조상의
집안 표지로 세운
깃발에 따라
진을 치되,
사방에서
회막을 향하여
진을 쳐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군대로 편성하는 것과 관련된
두 번째 요점은
그들이
대형을 이루어
진을 쳤다는 것이다.
계수하는 것은
대형을 이루어
진을 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에 의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군대가 되었다.

민수기 2장 2절에 있는 말씀은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 우리는
대형을 이루어
진을 치는 일에서는
사람의 선택이 없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 어느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지파로 태어났다면,
그가 유다 지파를
싫어한다 해도
납달리 지파의 깃발 옆에
진을 칠 수 없었다.
각 지파는
하나의 깃발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은
어느 지파에서 태어났든지
그 지파의 깃발에 따라
진을 쳐야 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 예표의
영적인 의미는
교회 안에서
안배하는 데 있어서
믿는 이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안배는 반드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정하심과 배열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민수기 2장 2절은 계속해서
“사방에서
회막을 향하여
진을 쳐야 한다.”
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의 지파의 깃발에 따라
진을 쳤을지라도,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중심이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는
열두 개의 깃발이 있었지만,
오직 하나의
중심 목표가 있었다.
모든 깃발들은
하나님의 증거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깃발들 중 어느 것도
자신의 지파를 위해
있지 않았다.
열두 지파는
각자의 깃발을
개인적으로 들지 않았다.
그 대신에
열두 지파는
성막을 향해,
성막 주위에
진을 쳤다.
그들은
회막과
하나님의 증거를
그들의 중심으로 삼았다.

민수기에서
성막은
두 가지 이름이 있었는데,
바로 회막(1:1, 4:23)과
증거의 성막(1:50, 53, 10:11)이었다.
회막은
성막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만나시는 장소라는 것을
강조하는 반면에,
증거의 성막은
증거궤가
성막의 중심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레위기는 주로
회막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이 책의 강조점이
하나님의 증거가 아니라,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거룩한 생활을 하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수기는
하나님의 증거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증거는
증거궤 안에 있는
두 돌판을 가리킨다.
증거궤는
성막의 중심이었다.
그러므로 성막은
증거의 성막이라 불리었다.
증거의 성막은
우주의 중심이었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증거였다.
이 땅에 있는
이 증거는
보호받을 필요가 있었다.
증거의 성막이
광야에 세워졌을 때,
그것을
주위에서
보호해 주는
강한 군대가 없다면
쉽게 파괴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증거의 성막이
이 땅에
서 있고
보존되기 위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군대로 편성되어
그 주위에
진을 치고
그것을 보호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런 식으로
성막은
안전하게 지켜졌고,
그 결과
우주 안에서의
하나님의 증거는
이 땅에서
보존될 수 있었다.

교회는
회막일 뿐 아니라
증거의 성막이다.
한 면으로,
성막을 중심으로 취하여
하나님의 증거를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영적인 군대가 있다.
또 한 면으로는,
모든 봉사의 중심인
증거를 위한
봉사가 있다.
오늘날
교회에게는
이중의 책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전쟁하는 것과
하나님의 증거를
보존하는 것이다.
전자는 후자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모두
영적 전쟁에
참여해야 하며
하나님을 위한
증거가 되어야 한다.
영적 전쟁은,
교회가
사탄에게
공격을 받을 때
교회 안에
생명이 성숙한 이들이
사탄의 공격을 간파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에베소서 6장
10절부터 20절까지에서 말하는
악한 영적인 세력들에 대항해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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