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이가 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비결은 우리가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누리는 길을 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유일한 갈망은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시는 것이다. 오직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길을 취한 이들만이 그들의 생활과 일이 새 예루살렘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온갖 기도로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읊조림으로 영과 생명에 속한 주님의 말씀을 먹는 것을 통하여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신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누림을 위한 영적 양식이신 주 예수님을 먹을 수 있다.
우리는 영과 생명에 속한 주님의 말씀을 먹음으로써 주 예수님을 먹을 때, 그분으로 ‘말미암아(because of)’ 산다(요 6:57-63). 즉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by)’가 아니라, 우리에게 힘을 주는 요소이시자 공급을 주는 요인이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그리스도를 산다.
주 예수님의 말씀을 먹음으로 그분을 먹을 때, 우리는 합당한 영적 소화력을 가져야 한다.
우리에게 좋은 소화력이 있다면, 음식이 우리의 내적 존재의 각 부분 안으로 도달할 수 있는 통로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먹음으로써 소화하고, 소화함으로써 동화한다. 또한 동화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의 실질적인 자양분을 우리 존재 안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소화 불량이란 영적인 음식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내적 부분들 안으로 도달하실 길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음식이 우리의 내적 부분들 안에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없을 때, 우리는 소화 불량에 걸릴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전 존재와 함께 우리의 모든 내적 부분들을 주님께 열어 두어야 한다. 그럴 때 영적인 음식이 우리 안에서 통로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합당한 소화와 동화를 하게 될 것이고, 영적인 자양분이신 그리스도를 흡수할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표현을 위한 우리의 조성 성분이 되실 것이다.
우리는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을 만족시키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함으로써, 또한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하여 이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함으로써 그분을 먹을 수 있다.
“나에게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먹을 음식이 있습니다. … 나의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 요 4:32, 34.
“아버지께서 나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내가 완성하여, 이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요 17:4)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주님은 그분의 인간 생활에서 버터(가장 풍성한 은혜)와 꿀(가장 달콤한 사랑)을 드셨다. 이것들은 주님께 힘을 주어 항상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시게 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를 배우는 사람들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는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일생의 실지 상태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그분의 일생에서 이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어 그분의 믿는 이들을 위한 모형을 세우셨다.
예수님의 생활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는 삶이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생활 안에 계셨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셨다. 예수님은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는데, 이것은 그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타고난 생명에 의해 그분께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활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되신 그분에 의해 그분의 본을 따라 그분께 배운다.
주 예수님은 결코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으셨고(요 5:19),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셨으며(4:34, 17:4), 자신의 말을 하지 않으셨고(14:10, 24), 자신의 뜻을 행하지 않으셨으며(5:30),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다(7:18).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라는 틀 안으로 넣어져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은 형상이 되는 것이다. 내주하시는 영 곧 생명의 영의 법이신 그리스도 자신께서 그분의 생명의 모든 풍성을 가지고 우리 안에 그분 자신을 재생산하신다.
이사야서 43장 7절은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이들을 / 내가 창조하고 지었으며 심지어 내 영광을 위해 만든 이들을.”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그분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시고 여러분을 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요일 4:13)께서 그분의 성전인 우리 몸(고전 6:19)을 점유하시고 적시시며 그분 자신을 우리의 몸을 통해 표현하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은 “여러분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합당한 사람들을 접촉함으로써 그분을 먹을 수 있다.
먹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접촉하고 그것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결국 우리의 내적 조성이 된다. 레위기 11장에서 모든 동물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상징하며, 먹는 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접촉하는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종류의 사람을 접촉할지를 주의해야 한다.
굽이 갈라져 있고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레 11:3, 비교 레 11:4-8, 26-28)은 분별력 있게 행동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숙고하며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수중 동물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활동하는 동시에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을 상징한다(지느러미는 물고기가 물속에서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도록 돕고, 비늘은 물고기를 보호하고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가 소금에 절지 않도록 지켜 줌).
날 수 있는 날개가 있고 생명의 씨를 음식으로 먹는 새들은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세상을 초월한 생명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생명에 속한 것들을 그들의 생명 공급으로 삼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날개가 있고 또 땅에서 뛸 수 있도록 그 발 뒤에 다리가 있는 곤충은 세상을 초월한 생명 안에서 살고 움직일 수 있으며, 세상에서 그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우리는 하나라는 터 위에서 갖는 집회들 안에서 그분을 잔치로 누림으로써 그분을 먹을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은 좋은 땅의 풍성한 소산을 두 가지 방식으로 누릴 수 있었다. 일반적이고도 개인적인 방식의 누림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사람과도 그것을 일반적인 몫으로 누리는 것이었다. 특별하고도 단체적인 방식의 누림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정해진 명절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장소에서 최상의 몫인 첫 열매와 첫 새끼를 누리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믿는 이들도 두 방면으로 그리스도를 누린다. 한 방면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일반적이며 개인적인 방식으로 누리는 것이고, 다른 한 방면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장소인 유일한 하나의 터 위에 있는 합당한 교회생활의 집회들 가운데에서 최상의 몫이신 그리스도를 특별하며 단체적인 방식으로 누리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생명나무이신 그분 자신을 사람에게 주어 사람이 누리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문제라는 것을 보는 것이다. 우리의 관념이 바뀌어 이 두 중점을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누리는 생활을 하기가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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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누림의 문제라는 것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을 누리기 위한 것이고, 우리의 영적인 진보는 하나님을 누리는 것에 달려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조차도 모두가 하나님 자신을 누리는 것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게 하시려는 의도가 없으시며, 전적으로 우리가 그분 자신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그럴 때 그분은 우리 밖에서 우리의 누림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음식과 물처럼 완전히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누림이 되신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두 가지를 분명하게 보아야만,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분 자신을 누리고 흡수하고 취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우리의 관념이 바뀌어 이 두 중점을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누리는 생활을 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에는 두 면이 있다. 첫째는 일반적인 면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 시간과 장소가 어떠하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의 또 다른 면은 그리스도의 최상의 몫, 특별히 뛰어난 몫, 곧 첫 열매와 처음 난 것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합당한 교회생활 안에서만 이 방면의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가질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항상 같으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는 특별히 뛰어난 몫과 일반적인 몫이 있다. 여러분은 차를 몰고 갈 때에도 그분을 이렇게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최상의 몫을 결코 혼자서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여러분이 혼자 집에서 삼 일 동안 밤낮 금식하고 기도하며 그분을 부른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특별히 뛰어난 몫은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이 몫을 누리고 싶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곳인 교회에 와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좋은 땅의 풍성한 소산을 두 가지 방식으로 누릴 수 있었다. 일반적인 방식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사람과도 좋은 땅의 풍성한 산물의 일반적인 몫을 누리는 것이었다. 특별한 방식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장소에서 최상의 몫, 즉 첫 열매와 처음 난 것을 누리는 것이었다. 이곳의 두드러진 특징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거처였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대한 분명한 그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데에도 두 면이 있다.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누리는 일반적인 면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곳에서 그리스도를 누리는 특별한 면이 그것이다. 이 유일한 곳에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거처가 있다.
우리는 합당한 교회생활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누림을 체험해 왔다. 우리가 교회 집회에 올 때에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높고 풍성하게 누린다. 우리는 모두 개인 생활과 교회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 교회생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놀랍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우리의 개인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대치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개인 생활에서의 누림이 공동의 생활인 교회생활에서의 누림을 대치할 수 없다.
교회생활에서의 누림은 개인 생활에서의 누림과 비교될 수 없다. 이것은 내가 이제 더 이상 개인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누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그 맛은 교회생활에서의 맛처럼 달콤하지 않다. 나는 항상 그리스도의 최상의 몫을 누리기 위하여 집회에 참석하기를 갈망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다소 빈약한 것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그분을 누리는 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단체적으로 그분을 누리는 데에는 시간을 거의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5일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수중 동물(레 11:9)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활동하는 동시에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을 상징한다. 지느러미는 물고기가 물속에서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물고기는 지느러미가 있기 때문에, 심지어 조류를 거슬러 헤엄칠 수 있다.
지느러미는 물고기에게 움직일 힘을 주고, 비늘은 소금에 절지 않도록 물고기를 보호해 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로서, 우리에게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 한다. 그 결과 우리는 세상이라는 바다에 절여지지 않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친구들과 이웃들, 심지어 친척들을 주의하라. 어떤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집을 방문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문 두드리기 자체가 우리를 보호하는 큰 비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조차도 우리가 접촉하는 사람들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인 소금에 절여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날 수 있는 날개가 있고 생명의 씨를 음식으로 먹는 새들(비교 레 11:13-19)은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세상을 초월한 생명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생명에 속한 것들을 그들의 생명 공급으로 삼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반대로 레위기 11장 13절부터 19절까지에 언급된 부정한 새들은 씨를 먹지 않는다. 생명의 씨가 부정한 새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부정한 새들은 사체를 먹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날개가 있고 생명의 씨를 먹는 새들과 같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세상을 초월한 생명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생명에 속한 것들을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삼아야 함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접촉할 때, 심지어 다른 믿는 이들을 접촉할 때조차도 그들이 씨를 먹는 참새와 같은 정결한 새들인지 아니면 죽음에 속한 것을 먹기 좋아하는 수리매와 같은 부정한 새들인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부정한 새들을 접촉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입맛에 영향을 받아 결국에는 우리도 부정한 새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죽음에 속한 것을 먹는 사람들을 접촉할 때 주의해야 한다.
날개가 있고 또 땅에서 뛸 수 있도록 그 발 뒤에 관절 있는 다리가 있는 곤충(레 11:21-22)은 세상을 초월한 생명 안에서 살고 움직일 수 있으며, 세상에서 그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우리가 이 곤충들로 상징되는 종류의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세상적이거나 죄가 있거나 육체에 속한 것들에서 멀리 날아갈 수 있는 날개를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초월하여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관절 있는 다리가 있어서 세상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날거나 뜀으로써 언제든지 세상을 떠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뛸 수 있고 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날개나 관절 있는 다리가 없는 사람들은 결코 세상을 떠날 수 없다. 그들은 이 땅에 서 있으면서 세상에 머무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거룩한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접촉하고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들에게 갈라진 굽이 있는가, 그리고 그들은 되새김질을 하는가? 그들에게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가? 그들에게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는가? 그들은 죽음에 속한 것들을 먹지 않고 생명의 씨를 먹는가? 그들에게 날개와 관절 있는 다리가 있는가?
우리가 거룩한 방식으로 살고자 한다면, 우리가 접촉하는 사람들을 주의하는 것을 훈련해야 한다. 사람들을 접촉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며,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부주의하게 다른 이들을 접촉해서는 안 되며, 부주의한 방식으로 친구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성경이 지적하듯이, 부주의한 친구 관계는 우리를 부패시킬 것이다.
4일
먹는 것은 다만 어떤 것을 접촉하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우리 안으로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우리 안으로 어떤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서 소화되어 우리의 조성 성분, 다시 말해서 우리의 존재와 조성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종류의 사람을 접촉할지를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어떠한 종류의 사람을 접촉한다면, 그 결과 재조성될 수 있고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음식을 분별하는 것은 식품을 분별하는 것, 즉 우리가 먹는 것을 분별하는 문제이다.
레위기 11장에 언급된 동물들은 사람들을 예표한다.
그것들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묘사하는 그림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10장 9절 하반절부터 14절까지와 27절부터 29절까지의 말씀들로 증명된다.
베드로는 “하늘이 열리면서, 큰 보자기 같은 어떤 그릇 하나가 내려와 네 귀퉁이로 땅 위에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그 안에는 땅의 온갖 네 발 가진 짐승들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이 있었다.”
(11-12절)
처음에 베드로는 이 짐승들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새들이 사람들의 그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고넬료의 집에 짐승들이 아닌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27-28절).
우리는 먹을 때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 곧 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을 접촉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것을 먹는다면, 그것은 우리 내면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레위기 11장에서 우리가 먹는 음식들은 사람들을 상징하며, 먹는 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접촉하는 것을 상징한다.
레위기 11장은 다섯 범주의 동물을 다룬다.
첫째는 가축을 포함하는 짐승이다.
둘째는 수중 동물, 즉 물속에 있는 동물이다.
셋째는 새들, 즉 공중에 있는 동물이다.
넷째는 곤충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기어 다니는 것들이다.
굽이 갈라져 있고 되새김질을 하는 짐승들은(레 11:2-3) 분별력 있게 행동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숙고하며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갈라진 굽은 분별력을 상징한다.
말은 갈라진 굽이 아닌 통으로 된 굽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말은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상징한다.
그런 사람은 어떤 것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고 어떤 것들이 사탄에게 속한 것들인지를 분별할 수 없고, 어떤 것들이 하늘에 속한 것들이고 어떤 것들이 땅에 속한 것들인지를 분별할 수 없으며, 어떤 것들이 영에 속한 것들이고 어떤 것들이 육체에 속한 것들인지를 분별할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할 뿐 아니라, 무엇이 우리의 영에 속한 것이고 무엇이 우리의 육체에 속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하고, 이에 더하여 무엇이 새사람에게 속한 것이고 무엇이 옛사람에게 속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극장에 가는 것은 땅에 속한 일을 하는 것이지만, 교회 집회에 가는 것은 하늘에 속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굽이 갈라져 있지 않다면, 심지어 그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극장에 가는 것과 교회 집회에 가는 것이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한 사람은 분별력 있게 행동하는 것이 부족하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접촉할 때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를 접촉할 때 우리가 더럽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닌지를 분별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하는 역량과 힘인 갈라진 굽을 가져야 한다.
되새김질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숙고하고 거듭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상징한다.
소가 되새김질을 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고 거듭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아침에 일찍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이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말씀을 숙고하고 거듭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받은 것을 거듭 생각함으로써 되새김질을 하여 자양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갈라진 굽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도 접촉해 본 적이 없다.
우리는 갈라진 굽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접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거나 우리를 좌지우지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피해야 한다.
3일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 곧 진리’는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일생의 실지 상태이다.
예수님의 경건한 생활에는 진리, 곧 실재가 있다.
예수님의 생활은 항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는 삶이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삶 안에 계셨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였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이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를 따라 예수님께 배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틀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넣으셨다.
이 틀은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일생이며, 절대적으로 실재 곧 진리에 따른 삶이다.
진리란 빛이 비치는 것이며, 빛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요일 1:5), 진리는 하나님의 표현이다.
복음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일생의 모든 방면이 하나님의 표현이다.
그분은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표현하셨다.
이 하나님의 표현은 빛이 비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리, 곧 실재이다.
이러한 실재에 따른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의 모형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모형 안에 우리를 두셨다.
이 모형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 곧 진리대로 그리스도를 배우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난 진리에 따라, 즉 전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에 따른 주 예수님의 삶에 따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우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삶은 빛의 비침이다.
빛의 비침은 진리이고, 진리는 하나님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에는 진리가 있다.
주 예수님께서 세우신 모형의 본질이 진리이며, 이것은 예수님의 삶의 본질이 진리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 곧 진리대로 그리스도를 배운다.
사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주 예수님의 삶은 진리의 삶이었다.
진리는 빛의 비침이다.
빛은 근원이고 진리는 그것의 표현이다.
이 땅에서 주님의 삶의 모든 면에는 빛의 비침이 있었으며, 그분의 삶은 진리의 삶, 즉 하나님 자신을 비추는 삶이었다.
그 진리의 삶은 바로 하나님의 표현이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 곧 진리대로 그리스도를 배운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이라는 틀에 따라 그리스도를 배운다.
예수님의 삶이라는 틀은 바로 진리이다.
그리스도는 이 틀을 세우시고 나서,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셨고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그러한 영으로서 그분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어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침례 받았을 때, 하나님은 마치 하나의 반죽을 틀 안에 넣는 것처럼, 틀이신 그분 안으로 우리를 넣으셨다.
우리는 틀 안에 넣어짐으로써 그 틀을 배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짐으로써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넣으셨고,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어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넣으신 틀에 따라 그리스도에 의해 살 수 있다.
우리가 복음서들에서 주 예수님께서 형성하신 틀을 읽을 때, 그 틀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접촉하고 그분께 기도할 때, 자동적으로 복음서들에 묘사된 틀에 따라 그분을 산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이 틀의 형상에 따라 빚어지고 이 틀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의 의미이다.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는 생명으로서 우리의 존재 안으로 들어오셨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접촉할수록 이 틀에 따라 그분을 더 살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틀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과 같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빌 1:21)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의 삶의 형태 안에서, 곧 복음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형태 안에서 그리스도를 산다.
신언노트, 2022 07 31
생명나무를 접촉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접촉하는 것입니다.
또 선과 악인
지식나무를 접촉하는 것은
불과 죽음을 접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
한 그리스도인은
선과 악인 그 지식나무에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오직 생명나무를 접촉하는
그들만이
그 새 예루살렘 안에
남아 있는
그들의 생활과(생명과) 일을
볼 것입니다.
생명나무 안에는
확실히 사랑과 겸허가 있지만,
그 지식나무인 선과 악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그 사랑과 겸허는
불못 안으로
도달할(이를) 것입니다.
오직 생명나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그 미덕들만이
영원 안에
지속될(존속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너무 빠르게 섭취한다면,
우리가
아주 많은 누림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말씀을 섭취할 때
‘그 되새김질 거리를 씹는다면’,
우리의 누림이
증가할 것입니다.
보통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묵상하는, 읊조리는,
낮은 목소리로 읊는) 것은
그 말씀을 기도하며 읽는 것보다
더 느리고
또 더 섬세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서,
주님께 이야기하거나
우리 자신들과 대화할 때마다,
우리는
자연스럽고
(자발적이고, 마음에서 우러나고)
또 누림이 충만할 것입니다.
우리는
절하여 주님께 경배하거나,
그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거나,
기억하거나,
또는 우리 자신들에게
꾸짖음을 줄 것입니다.
그 십계명들을
살아 있는 한 방식으로
깊이 생각하는
주님을 참되게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을 누리고,
그분을 경배하며,
기도하고,
주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과 함께 대화하며,
또한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확실히 그러한 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취하는
한 사람은
그것을
죽은 문자들로
적용하지 않을 것이고,
오직 그것을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취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숨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하고,
또 그분과 교통을 가지며,
그분을 경배하고,
또 그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그 말씀을 가지고
그분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함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으로(하나님에 의하여)
주입 받을 것이고,
우리 안으로
그분을
숨쉴 것이며(호흡할 것이며),
또 영적인 영양 공급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먹은 후에는 또한
소화를 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먹을 때,
우리는 또한
합당한 방식으로
영적으로
그분을 소화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을 부르고
그분의 말씀을 기도로 읽은 후,
우리는
“주님,
제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저의
모든 내적 부분들을 포함한
전 존재가
당신께
열려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 예수님!”이라고 부를 때,
그분은
여러분 안에 들어오셔서
여러분을 채우십니다.
여러분이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동안,
이 실지적이고도 살아 계신
예수님은
여러분의 타고난 존재를
만지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 예수님을 부른 후
여러분 안에
어떤 감각이 생긴다면,
곧 어떤 느낌이 든다면,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움직이고 계심을
의미하고,
여러분 안에서
소화 작용이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내적 감각을
따라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감각을 따른다면
기쁠 것이고,
그리스도에 대해
더 좋고 더 크고
더 깊고 더 높은
입맛을 가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적 감각에 반응하고
따른다면,
주 예수님에 대한
식욕이 되돌아오고,
여러분의 영적 소화력이
좋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주 예수님의 풍성이
여러분의 세포들이 되고,
이 세포들이 자라서
유기적인 조직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은
신성한 생명 안에서
자라게 되고
주님 안에서 강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에
서 있기는 쉽지만
뒤로 물러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충분히 자란 사람은
자기가 먹은
영적인 음식에 들어 있는
모든 자양분을 동화할
좋은 소화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먹음으로써 소화하고,
소화함으로써 동화합니다.
또한 동화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풍성의
실질적인 자양분을
우리 존재 안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이 결국
자라서
우리의
유기적인 조직이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가 됩니다.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내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을 부른 후에,
즉 그분을 먹고 마신 후에
여러분은
“주님,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제 존재의 모든 부분이
주님께 열려 있게 해 주십시오.
제 전 존재 안에서
통로를 얻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좋은 소화력을
가지게 되어
동화를 잘할 것이고,
그리스도의 풍성의
모든 자양분을
누리고 흡수할 것입니다.
그때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존재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유일한 갈망은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길을 취한 이들만이
그들의 생활과 일이
새 예루살렘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기도로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읊조림으로
영과 생명에 속한
주님의 말씀을 먹는 것을 통하여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신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누림을 위한
영적 양식이신
주 예수님을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과 생명에 속한
주님의 말씀을 먹음으로써
주 예수님을 먹을 때,
그분 때문에(그분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by)’가 아니라,
우리에게 힘을 주는 요소이시자
공급을 주는 요인이 되시는
그리스도 ‘때문에(because of)’ 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그리스도를 삽니다.
주 예수님의 말씀을 먹음으로
그분을 먹을 때,
우리는
합당한 영적 소화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좋은 소화력이 있다면,
음식이
우리의 내적 존재의
각 부분 안으로
도달할 수 있는
통로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먹음으로써 소화하고,
소화함으로써 동화합니다.
또한 동화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의
실질적인 자양분을
우리 존재 안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 존재와 함께
우리의 모든 내적 부분들을
주님께
열어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영적인 음식이
우리 안에서
통로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합당한 소화와 동화를
하게 될 것이고,
영적인 자양분이신
그리스도를 흡수할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표현을 위한
우리의 조성 성분이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 곧 진리’는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일생의
실지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경건한 생활에는
진리, 곧 실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항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삶 안에 계셨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입니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를 따라
예수님께 배웁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틀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넣으셨습니다.
이 틀은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일생이며,
절대적으로
실재 곧 진리에 따른 삶입니다.
이러한 실재에 따른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의 모형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모형 안에
우리를 두셨습니다.
이 모형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 곧 진리대로
그리스도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난
진리에 따라,
즉 전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에 따른
주 예수님의 삶에 따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우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삶은
빛의 비침입니다.
빛의 비침은
진리이고,
진리는
하나님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세우신
모형의 본질이 진리이며,
이것은
예수님의 삶의
본질이
진리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 곧 진리대로
그리스도를 배웁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 곧 진리대로
그리스도를 배운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이라는
틀에 따라
그리스도를 배웁니다.
예수님의 삶이라는
틀은 바로
진리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틀을 세우시고 나서,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셨고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러한 영으로서
그분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어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침례 받았을 때,
하나님은 마치
하나의 반죽을
틀 안에 넣는 것처럼,
틀이신 그분 안으로
우리를 넣으셨습니다.
우리는
틀 안에 넣어짐으로써
그 틀을 배웁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짐으로써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넣으셨고,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어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넣으신
틀에 따라
그리스도에 의해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들에서
주 예수님께서 형성하신
틀을 읽을 때,
그 틀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접촉하고
그분께 기도할 때,
자동적으로
복음서들에 묘사된
틀에 따라
그분을 삽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이 틀의 형상에 따라
빚어지고
이 틀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서
우리의 존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접촉할수록
이 틀에 따라
그분을 더 살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틀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과 같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빌 1:21)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의
삶의 형태 안에서,
곧 복음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형태 안에서
그리스도를 삽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를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는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일생의
실지 상태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일생에서
이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셔서
그분의 믿는 이들을 위한
모형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생활 안에 계셨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는데,
이것은
그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타고난 생명에 의해
그분께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활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되신
그분에 의해
그분의 본을 따라
그분께 배웁니다.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라는
틀 안으로 넣어져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은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내주하시는 영 곧 생명의 영의
법이신 그리스도 자신께서
그분의 생명의
모든 풍성을 가지고
우리 안에
그분 자신을
재생산하십니다.
이사야서 43장 7절은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이들을
/ 내가 창조하고 지었으며
심지어 내 영광을 위해
만든 이들을.”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그분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시고
여러분을 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요일 4:13)께서
그분의 성전인
우리 몸(고전 6:19)을
점유하시고
적시시며
그분 자신을
우리의 몸을 통해
표현하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합당한 사람들을 접촉함으로써
그분을 먹을 수 있습니다.
먹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접촉하고
그것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결국
우리의 내적 조성이 됩니다.
레위기 11장에서
모든 동물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상징하며,
먹는 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접촉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종류의 사람을
접촉할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일단 우리가
우리 안으로
어떤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서 소화되어
우리의 조성 성분,
다시 말해서 우리의 존재와 조성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종류의 사람을 접촉할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종류의 사람을 접촉한다면,
그 결과 재조성될 수 있고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이 짐승들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새들이
사람들의 그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고넬료의 집에
짐승들이 아닌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굽이 갈라져 있고
되새김질을 하는
짐승들은(레 11:2-3)
분별력 있게 행동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숙고하며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할 뿐 아니라,
무엇이
우리의 영에 속한 것이고
무엇이
우리의 육체에 속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하고,
이에 더하여
무엇이
새사람에게 속한 것이고
무엇이
옛사람에게 속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닌지를
분별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하는
역량과 힘인
갈라진 굽을
가져야 합니다.
되새김질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숙고하고
거듭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상징합니다.
소가
되새김질을 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고
거듭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찍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말씀을 숙고하고
거듭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받은 것을
거듭 생각함으로써
되새김질을 하여
자양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갈라진 굽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되새김질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도 접촉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갈라진 굽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접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거나
우리를 좌지우지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피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로서,
우리에게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세상이라는 바다에
절여지지 않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날개가 있고
생명의 씨를 먹는
새들과 같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세상을 초월한 생명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생명에 속한 것들을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삼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접촉할 때,
심지어 다른 믿는 이들을 접촉할 때조차도
그들이
씨를 먹는
참새와 같은
정결한 새들인지
아니면 죽음에 속한 것을
먹기 좋아하는
수리매와 같은
부정한 새들인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부정한 새들을 접촉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입맛에 영향을 받아
결국에는 우리도
부정한 새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죽음에 속한 것을 먹는
사람들을 접촉할 때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뛸 수 있고
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날개나
관절 있는 다리가
없는 사람들은
결코 세상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서 있으면서
세상에 머무를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방식으로
살고자 한다면,
우리가 접촉하는
사람들을 주의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접촉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며,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주의하게
다른 이들을 접촉해서는 안 되며,
부주의한 방식으로
친구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지적하듯이,
부주의한 친구 관계는
우리를 부패시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누림의 문제라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을 누리기 위한 것이고,
우리의
영적인 진보는
하나님을 누리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조차도
모두가
하나님 자신을 누리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게 하시려는
의도가 없으시며,
전적으로 우리가
그분 자신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럴 때 그분은
우리 밖에서
우리의 누림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음식과 물처럼
완전히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누림이 되십니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두 가지를 분명하게 보아야만,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분 자신을
누리고 흡수하며 취하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념이 바뀌어서
이 두 중점을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누리는 생활을
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에는
두 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일반적인 면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
시간과 장소가 어떠하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의
또 다른 면은
그리스도의
최상의 몫,
특별히 뛰어난 몫,
곧 첫 열매와 처음 난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합당한 교회생활 안에서만
이 방면의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항상 같으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는
특별히 뛰어난 몫과
일반적인 몫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차를 몰고 갈 때에도
그분을
이렇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최상의 몫을
결코 혼자서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혼자 집에서
삼 일 동안 밤낮
금식하고
기도하며
그분을 부른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특별히 뛰어난 몫은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몫을
누리고 싶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곳인
교회에 와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좋은 땅의 풍성한 소산을
두 가지 방식으로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방식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사람과도
좋은 땅의
풍성한 산물의
일반적인 몫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한 방식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장소에서
최상의 몫,
즉 첫 열매와
처음 난 것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의 두드러진 특징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거처였습니다.
우리는
합당한 교회생활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누림을
체험해 왔습니다.
우리가
교회 집회에 올 때에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높고 풍성하게 누립니다.
우리는 모두
개인 생활과
교회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누려야 합니다.
교회생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놀랍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우리의 개인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대치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개인 생활에서의 누림이
공동의 생활인
교회생활에서의 누림을
대치할 수 없습니다.
교회생활에서의 누림은
개인 생활에서의 누림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이제 더 이상
개인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누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맛은
교회생활에서의 맛처럼
달콤하지 않습니다.
나는 항상
그리스도의 최상의 몫을
누리기 위하여
집회에 참석하기를
갈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다소 빈약한 것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그분을 누리는 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단체적으로 그분을 누리는 데에는
시간을 거의 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2일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먹은 후에는 또한 소화를 잘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먹을 때, 우리는 또한 합당한 방식으로 영적으로 그분을 소화해야 한다.
합당하게 소화한다면 여러분이 먹은 음식은 여러분의 신체의 각 부분에 도달할 수 있다.
소화 불량은 음식물을 위한 통로가 없음을 뜻한다.
몇몇 사랑스러운 성도들은 처음에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을 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이것에 대한 입맛과 욕구를 잃는다.
이것은 주 예수님을 안에 받아들인 후에 그들 속에 어떤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께서 통과하실 통로가 없다.
주 예수님을 부르고 그분의 말씀을 기도로 읽은 후, 우리는
“주님, 제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저의 모든 내적 부분들을 포함한 전 존재가 당신께 열려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한다.
여러분이 “주 예수님!”이라고 부를 때, 그분은 여러분 안에 들어오셔서 여러분을 채우신다.
여러분이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동안, 이 실지적이고도 살아 계신 예수님은 여러분의 타고난 존재를 만지실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안 됩니다, 주님.
이 부분만큼은 저를 만지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계신 그곳에 머무십시오.
주님은 저의 손님이시며 거실에 머무셔야 합니다.
제 개인의 침실에는 들어오지 마십시오.
이곳은 저를 위한 곳이지 주님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이것은 소화 불량이 있음을 의미한다.
영적인 음식이신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 도달하실 길이 없다.
음식이 여러분의 내적 부분들 안에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소화 불량에 걸린다.
어떤 젊은 형제는 주님을 부른 후, 마침내 이발하는 방식이 처리되어야 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만일 그가 이 느낌에 반응하는 것이 더디다면, 이것은 그가 주님께서 통과하시도록 허락해 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야 한다.
여러분이 주 예수님을 부른 후 여러분 안에 어떤 감각이 생긴다면, 곧 어떤 느낌이 든다면,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움직이고 계심을 의미하고, 여러분 안에서 소화 작용이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러분은 이러한 내적 감각을 따라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이 감각을 따른다면 기쁠 것이고, 그리스도에 대해 더 좋고 더 크고 더 깊고 더 높은 입맛을 가질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내적 감각과 다툰다면, 이것은 소화 불량을 가져온다.
그러면 여러분은 말씀을 기도로 읽는 데 그렇게 간절하지 않을 것이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렇게 달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내적 감각에 반응하고 따른다면, 주 예수님에 대한 식욕이 되돌아오고, 여러분의 영적 소화력이 좋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주 예수님의 풍성이 여러분의 세포들이 되고, 이 세포들이 자라서 유기적인 조직이 된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은 신성한 생명 안에서 자라게 되고 주님 안에서 강하게 된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에 서 있기는 쉽지만 뒤로 물러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충분히 자란 사람은 자기가 먹은 영적인 음식에 들어 있는 모든 자양분을 동화할 좋은 소화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먹음으로써 소화하고, 소화함으로써 동화한다.
또한 동화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풍성의 실질적인 자양분을 우리 존재 안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이 결국 자라서 우리의 유기적인 조직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다.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내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다.
주님을 부른 후에, 즉 그분을 먹고 마신 후에 여러분은
“주님,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제 존재의 모든 부분이 주님께 열려 있게 해 주십시오.
제 전 존재 안에서 통로를 얻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좋은 소화력을 가지게 되어 동화를 잘할 것이고, 그리스도의 풍성의 모든 자양분을 누리고 흡수할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존재가 되실 것이다.
1일
생명나무를 만지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만지는 것이다.
사람이 선과 악의 지식나무를 만질 때마다 불을 만지게 되며 죽음을 만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일하려면, 선과 악의 지식나무를 가까이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만일 한 부부가 서로 다투고 있다면, 우리의 타고난 관념은 그들을 권면하여 화해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생명나무의 원칙을 알고 있다면, 그들에게 인내하고 겸손하라고 권면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생명나무의 원칙을 알고 있다면, 이 부부를 생명 안으로 이끌 것이다.
오직 생명나무를 만지는 이들만이 그들의 생활과 일이 새 예루살렘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죄 있는 이들은 불 못에 들어갈 것이다.
도덕적이기만 한 이들도 불 못에 들어갈 것이다.
생명나무 안에는 사랑도 있고 겸손도 있다.
그러나 선과 악의 지식나무에서 나온 사랑과 겸손의 결말은 불 못일 것이며, 오직 생명나무에서 나온 미덕만이 영원토록 남아 있을 것이다.
말씀을 읊조리는 것은 소가 풀을 먹듯이 ‘되새김질’하는 것이다(레 11:3).
우리가 너무 빨리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많은 누림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일 때 ‘되새김질’한다면, 우리의 누림은 증가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릴 때 자연스럽게 기도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자기 자신과 대화하거나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주님께 큰 소리로 찬양하기를 원하게 된다.
말씀을 읊조리는 것은 대개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보다 더 느리고 섬세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출애굽기 20장 2절을 읊조릴 때,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의 주님이심을 기억해라.
그분은 너를 이집트 땅, 곧 노예살이하던 집에서, 속박의 집에서 이끌어 내셨다.
이제 너는 나왔다.
아멘! 오, 주님, 저를 속박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께 경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면서 주님과 대화하고 우리 자신과 대화할 때, 자연스럽고도 누림이 충만할 것이다.
우리는 머리를 숙이고 주님께 경배하거나 말씀을 깊이 생각하거나 기억하거나 자신을 꾸짖을 것이다.
참으로 주님을 추구하는 어떤 사람이 살아 있는 방식으로 십계명을 읊조린다면, 주님을 누리고 주님께 경배하며 기도하고 주님의 임재 안에서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확실히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취하는 사람은 그것을 죽은 문자로 적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취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숨으로 누리는 것이다.
그것은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하고, 그분과 교통하며, 그분께 경배하고, 말씀을 통하여 말씀으로 그분께 기도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림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주입받고, 그분을 우리 안으로 들이쉬며, 그분을 영적인 자양분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말씀을 읊조림에 관하여 시편 119편 147절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새벽을 고대하며 부르짖고 / 주님의 말씀들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편 작가가 새벽 전에 일어나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소망을 두었음을 본다.
말씀을 읊조리는 것은 단지 묵상하는 것 이상을 포함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분께 경배하며, 그분을 누리고, 그분에게서 은혜를 받으며, 주님의 임재 안에서 우리 자신과 대화함으로써 말씀을 읊조린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린다면 말씀을 즐거워할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그분을 향하여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