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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그분을 아는 지식의 탁월함 때문에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김

Having No Confidence in the Flesh
and Counting All Things
to Be Loss
on Account of Christ
and the Excellency of the Knowledge of Christ
그 육체 안에 어떤 확신도 가지지 않음과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와
또 그리스도를 앎의
(그리스도의 그 지식의)
그 탁월함 때문에
잃어버린 것으로(손실로, 손해로) 여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육체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전적으로
주님께 신뢰를 두어야 한다
― 빌 3:3하.

빌립보서 3장
3절과 4절에서 말하는
육체는
우리의
모든 어떠함과
타고난 존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

이 절들에서
‘육체를 신뢰하는 것’은
육체 안에 있는
모든 선한 항목들이나 자격들을
가리킨다.
우리의 타고난 존재의
존경할 만하고
사랑스럽고
뛰어난 면들도
여전히 육체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가장 큰 문제들은
그들이
육체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과
그들의 육체가
처리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 롬 8:8, 갈 5:24.

자기 확신은
육체의 특징이다.
억제되지 않는
육체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자기 확신이다
― 갈 3:2-3.

육체를 신뢰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진다
― 빌 3:3-4, 10.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이들,
곧 우리의
타고난 재능이나 천성을
신뢰하지 않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 빌 3:3-6.

비록 우리가
거듭났을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서
살고,
육체 안에서 행하는 것을
자랑하며,
우리의 타고난 자격들을
신뢰할 수 있다
― 갈 3:2-3.

하나님에 의해
빛 비춤을 받았을 때에만,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자격들이나 재능이나 총명을
참으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우리의 신뢰를
전적으로 주님께 둔다고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 빌 3:3, 잠 3:5-6.

그리스도를 체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결코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주님만 신뢰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비결이다
― 빌 3:3.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탁월한 것은
그분의 인격이
탁월한 것에 기인한다
― 빌 3:8, 마 17:5, 골 1:13.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은
그리스도께 속한 지식이나
그리스도 자신이 가진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이 지식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아는 것을 가리킨다
― 요 17:3.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지식’은 사실상
그리스도와
그분의 탁월함에 관한
계시 혹은 이상을
의미한다
― 갈 1:15-16, 엡 1:17-23.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하셨을 때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극도로 고귀하시고
지극히 보배로우시고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계신다는 것을
보았다
― 행 9:3-5, 20, 22, 22:13-16, 26:13-16.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은
우리가 깨달은
그리스도의 탁월함이다
― 요 16:13-14, 갈 1:15-16.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중함에 대한 이상과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무한하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에 대한 이상을
볼 필요가 있다
― 벧전 2:4, 7, 골 1:12, 15-19,
2:2-3, 9, 16-17, 3:4, 10.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은
계시를 통해 온다.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가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
― 마 16:17, 11:27,
갈 1:15-16, 요 17:3.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가져야 한다
― 빌 3:7-10.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없다
― 갈 1:15-16, 2:20, 4:19.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더 높은 계시가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더 높은 체험을
가질 수 없다
― 요일 5:20.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우리가 가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능가할 수 없다
― 엡 1:17-21, 3:14-19.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 때문에
바울은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
― 빌 3:8상.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탁월함에
큰 가치를 두었다.
이것은
‘내 주’라는 말에
암시되어 있는데,
‘내 주’라는 표현은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친밀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전달해 준다.

바울은
눈이 열려
놀라우시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보았다.
이러한 탁월함 때문에
그는
종교적으로 유익한 것이든
천연적으로 유익한 것이든,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모든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탁월함 때문에
종교적인 것들뿐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았음을
가리킨다.
이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모든 것 하나하나,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더욱더 알수록,
종교적인 모든 것과
천연적인 모든 것을
더욱더
해로운 것으로
여길 것이다
― 빌 3:4-8상.

그리스도 때문에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며,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 빌 3:7-8하.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모든 것’은
종교와 철학과 문화에 속한 것들을
포함한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는데,
이것은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대치물,
즉 사탄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그분에 대한 체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사용하는
낚싯바늘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때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배설물로 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얻는다
― 빌 3:4, 8.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얻고’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확보하다’, ‘획득하다’, ‘붙잡다’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그분의 인격을 얻는 것,
즉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모든 풍성을
체험하고 누리고 소유하는 것이다
― 엡 3:8.

바울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길 뿐 아니라
(빌 3:7),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겨야 한다
(8절).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배설물로 여길수록,
우리는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해
그리스도를 더 많이 얻을 것이다
― 빌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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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빌 3:7-8
그러나
나에게 유익이 되었던 것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바로
그분의 인격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격의 충만의 체현이시며
(골 2:9),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그림자의
실재이시다
(16-17절).
그분을 얻는 것은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엡 3:8)
체험하고 누리고 소유하는 것이다.

어떤 유익한 것도
그리스도와 비교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비교를 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길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것을
유익한 것으로 여겼던 까닭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열려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우리는
다른 것들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한때 바울에게 유익이 되었던
모든 것이
그가
그리스도께 참여하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막고 방해했다.
그러므로 모든 유익한 것이
그리스도 때문에
그에게 해로운 것이 되었다.
바울은
그의 이전의
종교에 속한 것들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도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

우리는
빌립보서 3장 8절의
‘그 모든 것’이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이해는
부분적으로 옳다.
그러나 … 5절과 6절에 따르면,
바울의 관념은 주로
물질적인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물론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사람들을 점유해서
그리스도를 체험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주로 종교나 철학이나 문화에 속한 것들임을
깨달았다.
우리가
빌립보서 3장에 있는
바울의 영과 사상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가
이 서신을 쓰면서
‘그 모든 것’이라고 말할 때
종교와 철학과 문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8절에 있는
‘그 모든 것’은 틀림없이
세 범주,
곧 종교적인 것들과
철학적인 것들과
문화적인 것들을
포함한다.
우리가
우리의 종교와 철학과 문화를
버리게 된다면
참으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범주를 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실상
종교와 철학과 문화에 지배되고 있는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자연히 버리게 될 것이다.
물질적인 것들의 영향을
극복하기는 쉽지만,
종교와 철학과 문화를 극복하기란
매우 어렵다.
우리는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만을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면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는
종교와 철학과 문화를 포함한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겨야 한다.

바울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길 뿐 아니라
또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겨야 한다.
‘배설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개들에게 던져 주는
찌꺼기, 쓰레기, 오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가 먹는 것, 곧 똥을
의미한다.
그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와 결코 비교될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배설물로 여길수록,
우리는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해
그리스도를 더 많이 얻게 될 것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어떤 형제자매들은
아이쇼핑을 하는 방식으로
집회에 참석한다.
그들은
메시지를 듣는 것은 즐기지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지는 않는다.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기꺼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먼저 바울은
모든 종교적인 유익과,
출생으로 인해 받은 모든 유익을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
그런 다음에 그는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겼고,
모든 것을 잃는 것을 감수했다.
그는
그가 본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그렇게 했다.
나는
어떤 특별한 물품을 사기 위해
몇 차례 큰 금액의 돈을
지불한 적이 있다.
구입한 물품을
집에 가져온 후에,
나는
지불한 값에 대해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물품을 잘 살펴보고
그것의 뛰어난 가치를 깨달았을 때,
나는
지불한 값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이것이
바울이 모든 것을 기꺼이 잃은 후에
그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한 이유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지불했던 것은
단지 배설물이고,
개의
먹이이며, 쓰레기이고, 찌꺼기이며,
무가치한 것들이었다.
그는
그가 지불한 대가로 인해
후회하지 않았다.

 

5일

갈 1:15-16
그러나 나를
모태에서부터
따로 분별하시고
그분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내가
그분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으로
전파하도록 하시려고,
그분의 아들을
내 안에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나는 즉시
어떤 사람과도
의논하지 않았고,

빌립보서의 많은 독자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리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기 위해
3장 8절에 나오는
‘탁월함’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바울은
정확하고 명확하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언급한다.

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라고 말하지만,
8절에서는 더 나아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내 주’라는 말을
더한 것은
이 서신서를 쓰고 있을 때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친밀하고 다정한 감정으로
가득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주 예수님에 대한
다정한 감정이
바울 안에서 일어났고,
이러한 감정이
그로 하여금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말하게 했다.
바울은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에
큰 가치를 두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민족적인 철학과
국민적인 논리를
붙잡고 있다.
어느 국가의
한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논리를
고수하고 있고,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그들의 철학을
붙잡고 있다.
우리가
국민적인 논리와
민족적인 철학을
고수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를 빼앗아 간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떠나시게 만든다.
종교적이고 철학적이고 문화적인 것들은
교묘하고 은밀하고 감추어진 방식으로
믿는 이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의
가장 신실한 이들까지도
사로잡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체험하지 못하게 한다.
여러분은 오늘날
세상 어디에 가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어떤 민족이나
어떤 단체에서도
길을 얻지 못하신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것이다.
세상 모든 곳에서
민족적인 철학과
국민적인 논리가
너무 강해서
믿는 이들 안에
그리스도를 위하는
여지가 거의 없다.

빌립보서 3장
7절과 8절에 있는
바울의 사상 안으로
깊이 들어간다면,
우리는
바울이
종교와 철학과 문화에 관한
문제를 매우 염려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절에 있는
개들과
악한 일꾼들과
살이나 베어 내는 이들에 관한
바울의 말이
이것을 확증해 준다.
할례자에 대한
경멸적인 표현인
‘살이나 베어 내는 이’는
종교에 관련된 문제일 뿐만 아니라
특히 유대 문화에 관련된 문제이다.
더 나아가 유대 문화는
유대 철학과 논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다음에 그는 계속해서
유대 종교와
유대 철학과
유대 문화에 관련된
일곱 가지 항목들을 나열하면서,
그가
전에 육체를 신뢰했던
이유를 설명한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것들을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
여러분은
바울이
그러한 것들을
해로운 것으로 여긴
이유를 아는가?
그것은
그러한 것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대치물,
즉 사탄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그분에 대한 체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사용하는
낚싯바늘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체험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대적은
얼마나 간교한지!

오! 대적의 간교함은
폭로되어야 한다.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 안에 아직도
간교하고 은밀하게
그리스도를 대치하는
어떤 것들이 있다.
이러한 대치물들은 주로
종교와 철학과 문화와 관련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아직도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그리스도께 사로잡히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만을 버려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없다.
빌립보서 3장 8절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그러한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여기에 계시된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이 절들의 내용은
얕지 않다.
문맥에 따르면,
바울은
피상적이고 외적인 것들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의 주된 관심은
물질적인 것들에 있지 않다.
그의 관념은
더 깊으며,
종교적이고 철학적이고 문화적인 것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심지어 우리 속 깊은 곳에 감추어진
우리의
국민적인 논리와
민족적인 철학과
관련되어 있다.
… 우리가
그리스도께 근거를 드리고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이러한 것들을 제쳐 두기는
매우 어렵다.
나는
일생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났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자신의
민족적인 철학과
국민적인 논리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을
많이 만나지 못했다.

 

4일

마 16:17
…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이여,
그대가
복이 있습니다!
이것을
그대에게 계시하신 분은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나에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온전히 아는 사람이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해 주고자 하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를
온전히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에 대해
말한다.
…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는 반드시
그분을 알아야 한다.
이 장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매우 강조한다.
10절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분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분을 체험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탁월하며,
심지어 탁월함 자체이다.
…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친히
그분의 교회를
반석이신 그분 자신만이 아닌
그분에 관한 계시 위에
건축하시겠다고
강조하셨다.
계시는
알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가 없이는
분명 우리는
그분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이 계시가 필요하다.

거룩한 계시의
심장을 이루는
네 서신서인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와
빌립보서와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시고
무엇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
너울을 열어 준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모든 것에 미치시는 분으로서
우주 안의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실재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사람,
영원, 빛, 생명의
실재이시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시고
무엇이신지를
표현할
적절한 말이 없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나는
그리스도의 광대함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어느 날 내가
골로새서에서 계시되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광대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전 우주보다 더 광대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관한
골로새서의 계시는
광대할 뿐 아니라
심지어 모든 것에 미친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분은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것을 포함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미치신다.

골로새서 2장
16절과 17절은
“그러므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에 관하여,
아무도
여러분을 판단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런 것들은
장래 일들의 그림자이며,
그 실체는
그리스도께 속한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 절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먹는 것, 우리가 마시는 것,
명절, 초승달 축제, 안식일이심을
가리킨다.
그분은
우주 가운데 있는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몸이요 실재요 실체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누리는 햇빛의
실재이시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은
삼일 하나님의 실재이시자
사람의 실재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우주 안의 모든 긍정적인 것의 실재이시라고
가르칠 때,
어떤 이들은
우리가
범신론을 가르친다고
비난하기까지 한다.
… 우리는
범신론을 강력히 부인하며
그것이 마귀에 속한 가르침임을
선포한다.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범신론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며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실재이심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우주 가운데 있는
물질적인 것들이
하나님 자신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며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며,
매우 실지적인 의미에서
그분은
우리가 되시기까지 한다.
골로새서 3장
10절과 11절은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 새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에 따라
온전한 지식에 이르도록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자와 무할례자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라고 말한다.
이 절들도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포함하신 분이심을
지적한다.
새사람과 몸과 교회 안에는
헬라인과 유대인이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중국인이나 미국인이나
독일인이나 프랑스인이
있을 수 없다.
새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신다.
그분은
모든 지체들이시고
모든 지체들 안에 계신다.
이것은
새사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진실로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모든 것에 미치신다.

 

3일

빌 3:8
… 내가
모든 것을 또한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마 17:5
…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를 기쁘게 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탁월한 것은
그분의 인격이
탁월한 것에 기인한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을
역사상 가장 탁월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에 대해
열심을 가졌다.
바울도
그러한 열심을 가졌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가 계시되었을 때
(갈 1:15-16),
그는
그리스도의
탁월함과 빼어남과
지극히 소중함과 뛰어난 가치가
율법의 탁월함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을
알았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안 결과로
그분을 아는
지식이 탁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율법과 율법에 기초한 종교를
해로운 것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

여기서 바울은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의 탁월함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에 대해
언급한다.
빌립보서 3장 8절에 있는
지식은
그리스도께 속한 지식이나
그리스도 자신이 가진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아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탁월한 것이
그리스도의 인격이
탁월한 것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스도 자신이
탁월하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그분의 탁월함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의 체험 이전에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율법을 귀하게 여겼고
가장 탁월한 것으로 생각했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열심은
그가
율법을
귀하게 여겼다는 표시이다.
그가
율법에 대해
열심을 가진 것은
그가
율법을
귀하게 여긴 것에서
기인했다.
바울은 확실히
율법에 대한
그의 탁월한 지식을
자랑했다.
그리스도가
율법보다
훨씬 더 탁월하시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회심할 때
이러한 탁월한 분이
그에게 계시되셨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계시로 인해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얻은 후,
바울은
가말리엘을 통해 얻은
율법에 대한 지식이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비교를 의식하면서
빌립보서 3장
5절부터 8절까지를 썼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에 대해
그리고 이러한 탁월함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고
말할 수 있었다.

확실히 탁월함은 바로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과 관련해서
이러한 탁월함을 깨닫는 것은
우리의 지식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지식이 없다면
그분의 인격이
탁월하다는 것을
깨달을 길이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알게 될 때에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를 아는
이러한 지식의 탁월함은
얼마나 귀한가!

우리는
홍콩에서 물건을 사는
관광객의 체험을 예로 들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얻는 것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홍콩의 상인들은
물건들, 특히 옥(玉)을
관광객이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진열하는 법을 안다.
자주 관광객들은
진열된 귀한 물건들을 볼 때
흥분하게 된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러한 물건들이
탁월하다는 지식을
얻게 된다.
그들이
상점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 귀한 물건들의
탁월함에 대해 모른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귀한 물건들을 보고
그것들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얻은 후에는
기꺼이 값을 지불하고
그것들을 산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탁월함에 관한 계시,
그분의 뛰어난 가치에 관한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탁월함에 관한
계시를 가지게 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지식은 사실상
그리스도와
그분의 탁월함에 관한
계시 혹은 이상을 의미한다.
…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에 사로잡혔고,
이러한 지식으로 인하여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

 

2일

빌 3:3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골 2:11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곧
육체의 몸을 벗어 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입니다.

빌립보서 3장
1절부터 6절까지에 있는
바울의 말은
…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과
관련된다.
바울이
유대교도로 있었다면
그리스도를 체험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종류의 사람,
즉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매우 풍성하게 누리고
체험할 수 있었다.
우리도 또한
육체나 타고난 재능이나
천성이나 전통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일 때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체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거듭났을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서
살고,
육체 안에서 행하는 것을
자랑하며,
우리의 타고난 자격들을
신뢰할 수 있다.
우리는
빌립보서 3장 2절에서
‘개들’과
‘악한 일꾼들’과
‘살이나 베어 내는 이들’이
각각 타락한 본성과 행동과 종교를
언급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의 옛 본성에 따라
살고
우리 스스로 하는 것을
자랑하며
우리의 자격들을
신뢰한다면,
우리도
유대교도들과 똑같을 것이다.
결국에는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되고
그리스도를 체험함에 있어서
전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려면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아닌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고,
우리 자신의 행함이 아닌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우리의 타고난 자격들이 아닌
주님만을 신뢰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비결이다.

우리는
유대교도들과 다르다고
속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옛 본성 안에서
살고
우리의 행위를
자랑하며
타고난 자격들을
신뢰할지도 모른다.
나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들의 타락한 본성을
완전히 유죄 판결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많은 성도들이 여전히
‘개’의 본성에 따라
살고 움직이며 행동할지도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최소한 어느 정도는
우리가 여전히
우리의 행위를
자랑하고,
우리 자신을
지적이고 유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더군다나 우리는 또한
우리의 육체,
즉 우리의 타고난 자격들을
신뢰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빌립보서 3장에 있는
이러한 절들에 의해
개인적으로
깊이 만져지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본성,
우리의 행위,
육체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관하여
주님께서
빛을 비춰 주시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주님에게서
빛 비춤을 받는다면,
우리는
거듭나서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개’의 본성 안에서
너무나 많이 산다는 것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선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선포가
우리의 매일의 체험과
극명하게 차이를 보인다면,
그러한 선포는
우리에게 단지
교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느 날
이것에 관한
빛이 우리를 비출 때,
우리는
주님 앞에 엎드려
우리의 본성이
얼마나 더러운지
자백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본성에서 하는
모든 것을 유죄 판결할 것이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 안에서 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하고
유죄 판결을 받을 만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전에 우리는
우리의 행위와 자격을
자랑했다.
그러나 자격이 있는
육체를 자랑하지 않고
유죄 판결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 안에는
자랑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만
자랑할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빛 비춤을 받았을 때에만,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자격들이나 재능이나 총명을
참으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우리의 신뢰를
주님께 둔다고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빛 비춤을 받은 후에야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빛을
보기 바라며,
이러한 절들을
객관적으로만 이해하는 데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누리고 체험하는 데로
전환하기를 바란다.

 

신언노트, 2019 08 04

그 육체 안에 어떤 확신도 가지지 않음과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와
또 그리스도를 앎의
(그리스도의 그 지식의)
그 탁월함 때문에
잃어버린 것으로 여김

그리스도 안에 믿는
 우리는
 그 육체 안에
 확신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확신은
 전적으로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3절과 또 4절 안에 있는
 그 육체는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존재 안에서
 무엇인
 또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로 구성됩니다
 (comprises;
 이루어집니다, …을 포함합니다).

이 절들 안에서
 ‘그 육체 안에 있는 확신’은
 우리가
 그 육체 안에서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좋은
 항목들 또는 자질들을
 (qualities;
 뛰어난 소질들을, 재능들을, 장점들을, 속성들을)
 언급합니다;
우리의 타고난 존재의
 존경할 만하고
 (honorable;
 명예롭고, 영광스럽고, 고귀하고, 자랑이 되고),
 사랑스러우며,
 우수한
 (superior;
 더 나은, 우월한, 우세한, 고급의)
 그 측면들이 역시
 (still;
 여전히, 그래도, 더욱)
 그 육체입니다.

하나님의 아이들 중에서
 (among; 가운데에)
 그 가장 큰 문제들은
그들이
 그 육체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과
또 그들의 육체가
 처리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기-확신은
 그 육체의 그 특징입니다;
억제되지 않는
 (unchecked;
 점검받지 않은, 시험되지 않은)
 육체의
 그 가장 명백한 표시는
 (sign;
 징후는, 징조는, 조짐은, 신호는, 몸짓은)
 자기-확신입니다.

그 육체 안에의 확신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합니다
 (keeps us from;
 거리를 두게 합니다, …께로부터 감춥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육체 안에
 확신을(confidence)
 가지지 않는,
 곧 우리의 타고난
 능력 또는 유산 안에
 (heritage;
 물려받은 것[전통, 상속 재산] 안에)
 신뢰를(trust)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거듭나게 되었지만
 (have been regenerated; 거듭났더라도),
우리는 계속하여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서
 살 수 있고,
 그 육체 안에서 하는
 무엇 안에서
 자랑할 수 있으며,
 우리의 타고난 자격들 안에
 (in … qualifications;
 … 능력들로, 자질들 안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하여
 빛 비춤을 받았을 때에만
 (Only when we have been enlightened),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자격들, 능력, 또는 지능 안에
 (in … intelligence;
 지성[지력, 이해력, 총명, 지혜] 안에)
 신뢰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참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그때에
 (then; 그러고 나서)
 우리가
 그 육체 안에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과
 또 우리의 확신이
 전적으로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결코 그 육체 안에
 신뢰를 가지지 말아야만 하고
 오직 주님 안에
 신뢰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그 체험에의
 그 비결입니다.

그리스도를 앎의
 (the knowledge of Christ;
 그리스도의 그 지식의)
 그 탁월함은
 그분의 인격의
 그 탁월하심에서부터 이끌어 내집니다
 (is derived from;
 얻어집니다, 유래합니다):

그리스도를 앎의
 그 탁월함은
 그리스도께 속한 그 지식,
 곧 그리스도 그분 자신께서
 가지고 계시는 그 지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rather;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분명히)
 이 지식은
 우리의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앎입니다:

빌립보서 3장 8절 안에서
 ‘지식’이 사실은
 (actually;
 정말로, 실제로, 실은, 지금)
 그리스도와
 또 그분의 탁월하심에 관한,
 한 계시, 곧 한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의하여
 그에게
 (to him; 바울에게)
 계시되셨을 때,
바울은
 그리스도의
 그 최고의 탁월하심
 (the supereminence; 그 극도의 고귀하심),
 그 최고의 귀중하심
 (the supreme preciousness),
 또 그 초월하는 가치를
 (the surpassing worth)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앎의
 그 탁월함은
 우리에 의하여 깨달아지는
 (realized; 실재화되시는)
 그리스도의 그 탁월하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귀중하심
 또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곧 무한하신
 그 그리스도를 앎의
 그 탁월함에 관한
 한 이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앎의
 그 탁월함은
 계시에 의하여 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그 계시가 없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맨 먼저
 그리스도를 앎의
 그 탁월함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of Him; 그분의)
 한 계시를 통하여
 그분을 앎 없이는,
우리가
 그분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한
 (of Christ; 그리스도의)
 더 높은 한 계시를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더 높은 한 체험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에 관한
 (of Christ; 그리스도의)
 체험은
우리의
 그리스도를 앎의
 그 탁월함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cannot surpass;
 능가할 수[넘을 수,
 …보다 뛰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앎의
 그 탁월함 때문에,
바울은
 모든 것들을
 잃어버린 것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앎의
 그 탁월함 위에
 큰 가치를 두었습니다;
이것은
 그 단어들 ‘내 주’에 의하여
 가리켜지고,
이는(which)
 그의
 그리스도에 관한
 친밀한,
 곧 다정한
 (tender;
 부드러운, 연한, 상냥한, 애정 어린)
 느낌들을
 전달합니다.

바울의 눈들이
 열렸고
 (그 결과; to)
 놀라우신,
 곧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그리스도의
 그 탁월하심을
 보았습니다;
이 탁월함 때문에,
 그는
 모든 것들,
 그것들이 종교적인 얻음이나
 (gain;
 이익[이득, 수익, 증가, 개선]이나)
 또는 타고난 얻음에
 관계된 것이든 아니든,
 모든 것들을
 잃어버린 것으로
 여겼습니다.

빌립보서 3장 8절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앎의
 그 탁월함 때문에
 종교적인 것들뿐 아니라
 모든 것들을
 떨어뜨렸다는 것을
 (dropped;
 내려놓았다는[멈췄다는, 그만두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하여, 바울에게,
 모든 것들을 잃어버림은
 각각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림이었습니다.

더 많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앎의
 그 탁월함을 가질수록,
더 많이 우리가
 종교적인
 또 타고난
 각각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린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림의
 고통을 겪었고
 또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그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빌립보서 3장 8절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종교, 철학, 또 문화에 속한 것들을
 포함합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잃어버림의
 고통을 겪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리스도에 대한(for)
 대치물들,
곧 그리스도와
 또 그리스도를 체험함에
 (from … the experience of Christ;
 그리스도의 그 체험에,
 그리스도에 관한 그 체험에)
 사람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려고
 (to keep … from; 거리를 두게 하려고)
 사탄에 의하여 이용되는
 낚싯바늘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때 우리를 위한 한 얻음이었던
 (a gain; 한 이익이었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림의
 고통을 겪음에 의하여
또 그것들을
 배설물로 여김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얻습니다:

빌립보서 3장 8절 안에 있는
 ‘얻고’에 대한
 그 헬라어 단어는
 “확보하고(to secure),
 획득하고(to obtain),
 붙잡고(to lay hold of; 손에 넣고)”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그분의 인격을
 (person;
 인품을, 사람됨을)
 얻는 것,
 곧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unsearchable;
 탐지할[찾아낼, {측량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모든 부를
 체험하고,
 누리며,
 또 소유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들을
 잃어버린 것으로
 여길 뿐 아니라
 또한 모든 것들을 잃어버림의
 고통을 겪고
 또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겨야 합니다.

더 많이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들을 잃어버림의
 고통을 겪고
 그것들을
 배설물로 여길수록,
더 많이
 우리가
 우리의 체험과 또 누림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얻을 것입니다.

 

1일

빌 3:3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롬 8:8
육체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를 신뢰하는 것이
우리 인간 본성의
죄악으로 가득한 요소들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빌립보서 3장 3절에 나오는
‘육체’의 의미가 아니다.
…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한 후에,
계속하여 자신이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의 베냐민 지파이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 말하자면
바리새인이며,
열성으로 말하자면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 말하자면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들은
바울의 육체의 방면들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여러분은
그러한 것들을
육체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육체가
선한 것이 아닌
악한 것들만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타고난 존재의
존경할 만하고
사랑스럽고
뛰어난 면들도
여전히 육체이다.
바울이
율법으로 행한 것과
열성으로 행한 모든 것은
육체였고
육체에 속한 것이었다.
율법에 따른 그의 의 또한
육체였다.
이 절들에서
바울이 열거한
일곱 가지 특징들은
모두 타고난 것이며,
그리스도께 속한 것도
하나님의 영께 속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육체의 방면들이다.
타고난 것은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두 육체이다.
유대인들은
천연적인 출생에 의한
자신들의 어떠함을 신뢰했고,
그들의 육체를 신뢰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천연적인 출생에 의한
어떤 것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천연적인 출생에서 나온 것은 무엇이든
육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에 신뢰를 두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볼 필요가 있다.
… 어리석음은
육체에 속하고,
지혜는 반드시
그 영께 속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이 타고난 것인 한,
지혜도
어리석음과 마찬가지로
육체에 속한 것이다.
… 바울에게는
그의 천연적인 출생에 의한 것은 무엇이든지
육체였다.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존재에
어떤 신뢰도 두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타고난 존재를 신뢰하는 한,
그리스도를
체험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육체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육체는
단지 범죄와 관련된다.
육체가
사람이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이 단지
죄만 짓게 하는 것은 아니다.
로마서 8장 8절은
“육체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육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경우
육체의 목적은
하나님의 심기를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 그러나 육체는
그것을 할 수 없다.
우리의 체험은
우리에게 죄를 짓는
육체를 처리하기는 비교적 쉽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육체를 처리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말해 준다.

억제되지 않는
육체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자기 확신이다.
자기 확신은
육체의 특징이다.
빌립보서 3장 3절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라고 말한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육체에 대해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로 매 맞은 사람은
비록 아직 살아 있지만
이미 파쇄되었고,
두려워하고 떠는 사람이 되며,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께 다루심을 받기 전에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날 때마다
쉽게 결정을 내렸고,
입을 열 때마다
쉽게 결정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다루심을 받은 후에
우리는
함부로 결정을 내리지 않게 되고
확신이 없다고 느낀다.
급히 제안을 하고
자신이 능력 있다고
믿는 사람 중에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사람은
십자가의 일을
체험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일단 우리의 육체가
할례를 받으면,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확신에 차 있지 않을 것이며,
함부로 우리의 의견을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약하고
아무런 능력이 없으며
무력하고
쉽게 흔들린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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