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ing in the Reality
of the Body of Christ
by Living
in the Organic Union
and in the Mingled Spirit
and by Being Conformed
to Christ’s Death
그 유기적인 합일 안에서
생활함에 의하여
또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이 됨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에 있음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
삶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으로
들어간다
— 요 15:4-5, 고전 1:30, 롬 12:4-5.
하나님께서
사람과
맺기를 갈망하시는
관계는
그분과 사람이
함께 접붙여짐으로
유기적인 연결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 롬 6:3-5.
하나님은
신성한 생명과
사람의 생명이
함께 결합되어
한 생명이 되기를
갈망하신다.
이러한 하나는
유기적인 연결
혹은 생명 안에서의 연결,
곧 접붙여진 생명이다
— 롬 6:3-5, 11:17-24.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 들어가는 것은
신성한 생명이신
그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임으로,
우리가
신성한 생명 안에서
그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 요 3:15, 15:4-5.
로마서 12장은
유기적인 연결의 각도,
연결하는 생명의 각도,
즉 우리를
그리스도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다른 모든 지체들과
함께 연결하는
생명의 각도에서
몸에 대해 말한다
— 롬 12:4-5.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초점 곧 중심은
하나님의 계시의
높은 중점이자
하나님의 계속적인 일의
궁극적인 항목인
몸이다
— 고전 12:12, 27, 엡 1:22-23,
4:4, 12, 16, 5:23, 30, 골 2:19.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한 몸으로서
그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 롬 12:4-5.
‘그리스도 안에서’는
항상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이러한 연결은
우리를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고,
또 그분의 몸의
다른 모든 지체들과
하나가 되게 한다.
몸이란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 안에서
연결되어
산출된
유기체이다
— 고전 6:17, 12:27.
몸 안에서
합당하게 유기적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 롬 12:4-5.
몸은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몸의 실지 상태는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
머무는 것이다
— 요 15:4-5.
우리는
연합된 영 안에
삶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산다
— 롬 8:4, 고전 6:17.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그분 자신을
우리와 연합시키심으로,
그분께서
우리의
생명과 본성과 내용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 요 14:20, 15:4-5,
엡 3:16-21, 4:4-6.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신 분의
확대이다
— 눅 1:31-35, 엡 1:22-23, 4:16.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라는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해해야 한다
— 고전 6:17.
복음서들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은
머리를 산출했고,
사도행전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확대는
그리스도의 몸을
산출했다
— 엡 1:22-23, 4:15-16.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인성을 가진
그분의 선민과
연합시키시며,
이러한 연합이
그리스도의 몸의
진정한 하나이다
— 엡 4:3, 요 17:21-23.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께
자신들과 연합하시도록
허락해 드리고,
하나님과 연합된
한 무리의 사람들이다
— 엡 3:16-21.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인성과 신성,
신성과 인성의
연합에 의해
하나님과 함께
연결되고
연합되며
하나님으로 조성된
하나님-사람들의
생활이다
— 엡 4:1-6, 15-16.
그리스도의 몸은
전적으로
연합된 영 안에
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있는 것은
연합된 영 안에
사는 것이다
— 롬 8:4, 12:4-5,
고전 6:17, 12:12-13, 27,
엡 2:22, 4:16, 23.
하나님과 사람의
연결은
두 영,
곧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의
연결이다
(고전 2:11-16).
이 두 영의 연결이
성경에서
가장 깊은
비밀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초점은
연합된 영,
곧 사람의 영과 연합되신
신성한 영이다.
하나님께서
행하거나 성취하기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 초점과
관련되어 있다
— 엡 3:9, 5, 1:17,
2:22, 4:23, 5:18, 6:18.
고린도전서 6장 17절에
함축된 내용들은
기묘하고도 광범위하다.
주님과
한 영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있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을
함축한다
— 요 15:4-5.
우리와 그분은
유기적으로
연합되고 섞임으로써
생명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우리와 그리스도는
놀랍고 살아 있는
한 실체이다
— 고전 12:12.
신성한 영과
사람의 영이
우리 안에서
하나로 연합됨으로,
우리는
하나님-사람의 생활,
곧 하나님이지만 사람이며
사람이지만 하나님인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이다
— 갈 2:20, 빌 1:19-21상.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단체적인 생활이다
— 빌 3:10, 롬 12:4-5,
고전 12:12-13, 27.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틀로
취하는 것이다
— 빌 3:10.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은
아버지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사시기 위해,
자신의 인간 생명을
계속적으로
죽음에 넣으신
그리스도의 체험을
가리킨다
— 요 6:57, 5:19, 4:34,
5:30, 7:18, 17:4.
예수님의 생활은
우리를 위한
하나의 틀이며,
우리는
이 틀의
대량 재생산이
되어야 한다
— 벧전 2:21, 롬 8:29.
신성한 생명을
살기 위해
매일
우리의
인간 생명에 대해
죽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생활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해야 한다
— 눅 9:23, 요 12:25-26.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있기 위해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 빌 3:10.
십자가,
곧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길의
중심과 전부이다.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에서의
전환점은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연속으로서
우리는
매일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살아야 한다
— 고전 15:31, 고후 4:10-11.
우리 자신을 향해
죽고
하나님을 향해
사는
그러한 삶은
첫 번째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많은 지체들인
많은 하나님-사람들 안에
그분의 형상을
이루시는 것이며,
이것은
그분의 유기적인 몸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 갈 4:19, 엡 4:12, 16.
우리는 반드시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삶의
틀로 취함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종류의
단체적인 생활에 의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가질 수 있다
— 빌 3:10, 롬 12:5,
고전 2:2, 12:27.
Hits: 12
7 replies on “유기적인 연결과 연합된 영 안에 살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있음”
6일
고후 4:10-11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을
우리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서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우리가
항상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으로써,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 생활을 하실 때
그러하셨던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
곧 십자가 아래서의 생활을
계속했다.
우리는
이러한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기 위해
(요 6:57),
인간 생명을
계속적으로
죽음에 넣으신
그리스도의 체험을
가리킨다.
우리의 생활은
인간 생명에 대하여 죽고
신성한 생명을 삶으로써,
이러한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체험하기 위한
조건이다
(빌 3:10).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길의
중심과 전부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길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성되고(is composed of)
조성된다(is … constituted with).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옳다.
그러나 나는 또한
여전히 살아 있다.
나는
여전히 살아서
많은 일을 하지만,
더 이상 나 혼자서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내 안에 살고 계신
그리스도와 한다.
이런 식으로
나는
접붙여진 생명을
산다.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에서의
전환점은
십자가이다.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는 살지만
그리스도는 사시지 않는다.
그러나 십자가가 있다면,
우리가 여전히 살지만
더 이상 스스로 살지 않는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사신다.
메시지를 전하려고
준비할 때,
…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과,
더 이상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생활을
실행한다면,
우리는
체험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바울과 함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더 이상 우리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갈 2:20).
바울은
감옥에 갇혔을 때
그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라고
선포할 수 있었다
(빌 1:21).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였으며,
그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살고
확대했다
(19-20절).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셨을 때
그분의 생활은
순수하고
거룩했지만,
그분은 결코
어떤 것도
스스로 행하지 않으셨고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행하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에 의한 것이었다
(요 5:19, 30, 7:16, 8:28, 12:49-50).
그분은
삼십삼 년 반 동안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셨고,
언제나
아버지에 의해
사셨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속으로서
매일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자신을 향해
죽고
하나님을 향해
사는
그러한 삶은
첫 번째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많은 지체들인
많은 하나님-사람들 안에
그분의 형상을
이루시는 것이며,
이것은
그분의
유기적인 몸을
건축함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삶의
틀로 취함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종류의
생활에 의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가질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란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이 이상을
보게 하시기를
바란다.
오직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사람만이
눈이 열릴 수 있으며,
그들이 본
계시에 의해
행할 수 있다.
이러한 생활만이
하나님-사람의 생활이며,
이러한 생활만이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살아 낼 수 있다.
5일
빌 3:1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롬 8:29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
가장 위대한 절들 중의 하나인
고린도전서 6장 17절은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 영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 절에 함축된 내용들은
기묘하고도 광범위하다.
우리 믿는 이들은
주님과 한 영이다.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이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있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을
함축한다.
또한 이것은
우리와 그분이
유기적으로
연합되고 섞임으로써
생명 안에서
하나가 되었음을
함축한다.
주님과
한 영이라는 것은
우리와 그분이
살아 있는 한 실체임을
함축한다.
우리는
이 절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어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오늘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이
우리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지만 사람이며
사람이지만 하나님인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사람의
생활은
하나로 연결되고 연합된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
이 두 영의
생활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빌 3:10하)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들의 생활의 틀로
취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사시기 위해
자신의 인간 생명을
계속적으로
죽음에 넣으신 것을
가리킨다.
만일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이
변화의 과정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과정을
체험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 안에서
일생 동안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믿는 이들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을
매일
체험해야 한다.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변화의
최종 결과이다.
이것은
우리의
내적 본질과 본성이
바뀌는 것을
포함하고
또한 외적 모습이
바뀌는 것도
포함하는데,
그 목적은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럽게 된 형상과
걸맞게 되기 위한 것이다.
그분은
원형이시고
우리는
대량 생산품이라고
할 수 있다.
생산품인
우리 안에서의
내적, 외적 변화는
모두
생명의 영의 법(롬 8:2)이
우리 존재 안에서
운행한 결과이다
(롬 8:29).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생활의
틀로
취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
사시기 위해
그분의 인간 생명을
계속적으로
죽음에 넣으신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지금
우리가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할
틀이다.
우리의
인간 생활이
그러한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룰 때,
우리는
신성한 생명을
살기 위해
우리의 인간 생명에 대해
죽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룰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일종의 틀이며,
우리는
이 틀 안에서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그분의 형상으로
빚어지고 있다.
우리는
변화의 과정과,
같은 형상이 되는 과정을
통과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간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의
온 일생에 걸쳐
일어났다.
그분은
사시면서
또한 동시에
죽으셨다.
그분은
날마다,
심지어 나사렛의 목수의 집에서
한 아이로
사셨을 때에도
십자가의 틀 안에
계셨다.
그분은
계속해서
십자가로
죽음에 넣어지셨다.
그분은
그분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에 의해,
그리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이라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었던
제자들에 의해
죽음에 넣어지셨다.
날마다
그리스도는
새 창조물 안에서
사시기 위해
옛 창조물을 향해
죽으셨다.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을
반드시 우리의
매일의 체험이
되게 해야 한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죽음에 넣어질수록
우리 안의
신성한 생명은
더 많이
해방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체험 가운데서
더 많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것이다.
4일
엡 4:15-16
오직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고,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야 합니다.
온몸은
그분에게서 나온
그 풍성한 공급을 해 주는
각 마디를 통하여,
그리고 각 지체가
분량에 따라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하여
함께 결합되고
함께 짜입니다.
그래서 몸이 자람으로써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명칭이나 위치나 장소의
문제가 아니고,
더 나아가
신조나 조직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께
자신들과 연합하시도록
허락해 드리고,
하나님과 연합된
한 무리의 사람들이다.
이것이
초기 사도들의
상황이었다.
… 그들은
갈릴리 사람의
형상을 가졌지만,
더 나아가
하늘의 하나님의
표현을 가졌다.
하늘의 하나님의
영광이
배우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 안에서
표현되었다.
배우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이
여전히 거기에 있었지만,
동시에
하늘의 하나님의
영광이 표현되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들의 무지함이
사라졌고,
평범한 사람들이
파쇄되었다.
지금은
영광스럽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평범한 사람들과
연합되셔서,
그들을 통해
빛을 비추시고
표현되신다.
교회에게
하나님의
권위와 형상이 있다.
몸의 원칙은
우리라는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파쇄되고
굴복되고
허물어져서,
하나님께
우리와 연합하시고
우리 안에서부터
빛을 비추어 내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한번
세상에 태어나시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에서
번식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
곧 그리스도의 확대이다.
이러한 것이
있을 때마다,
또한 이러한 것이
있는 곳마다
교회가
나타나게 된다.
즉 참되고
실지적이며
현존하고
능력 있는
교회가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권위와 형상을
가진 교회는
실재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인성과 신성,
신성과 인성의
연합에 의해
하나님과 함께
연결되고
연합되며
하나님으로 조성된
모든 하나님-사람들의
생활이다.
실지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연합된 영이다.
… 이것을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 몸의 실재가
바로 제 안에 있습니다.
거듭난 영과
내주하시는 영이
이제
제 안에서
실지로 하나 되고
함께 연합되어 있습니다.
저는
기도할 필요가 없고,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 모든 것이
제 안에 있습니다.
저는 단지
이 연합된 영을 따라
행합니다.
저는 단지
제 생각을
영에 둡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고
여기에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는
‘연결(union; 합일)’이라는
이 용어를
아주 많이 사용했지만,
하나님과 사람의
연결에 관한
충분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결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
이 두 영의
연결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에게도 영이 있기 때문에,
두 영은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영의 연결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것이
성경에 있는
가장 깊은 비밀이고,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실상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은
신성한 영과 사람의 영
둘 다를 따라,
다시 말해서
하나로 연합된
두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 이것이
신성한 경륜의
초점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성취하시고자 하는
모든 것이
이 초점과
관련된다.
우리가
어떤 기본적인
영적 체험들을
가지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경륜의
초점이
바로 이 연합된 영,
즉 사람의 영과 연합되신
신성한 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양심에 따라
살 뿐 아니라
연합된 영을 따라
산다.
… 이러한
가장 높은 수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뿐 아니라
교회생활도 가진다.
… 우리는 이것을 따라,
즉 연합된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사도 요한처럼
영 안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10).
3일
롬 8:4
이것은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고전 6:17
그러나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 영입니다.
우주 가운데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그분 자신을
사람 안에
일해 넣으셔서,
사람에게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게 하고
사람이
내적으로
변화되게 하는 것이다
(벧후 1:3-4, 고후 3:18).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은
함께 연합되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게 된다
(롬 8:29).
하나님의
내적 존재는
사람의
내적 존재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외적 형상은
사람의
영광스러운 형상이 된다
(계 4:3, 21:11).
결국 사람의 안과 밖이 모두
하나님과 완전히 똑같아진다.
교회는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신 분의
확대이다.
교회가
정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연합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오순절날에
교회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은
본래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연합되신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베드로와 열한 제자들이
함께 일어나 말할 때,
분명 베드로가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말씀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계셨을 뿐 아니라
더욱이 그들과 연합하셔서
그들과 나누어지실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확대,
곧 사람과 하나님,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확대이다.
이 연합은
이전에
한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수많은 사람에게서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이 연합이
머리와만 관련되었지만
지금은
한 몸으로
확대되었다.
시간과 관련해서
이 확대는
연장되고 있고,
공간과 관련해서
이 확대는
퍼지고 있다.
만일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의
연합이 없다면
교회는 있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비록 구원받았고
그들 안에
하나님의 생명도 있지만,
그들의 생활 가운데에는
이러한 연합이
보이지 않으며,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실지적인 표현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더 쉽게 이해하리라고
믿는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있을 때
몸이 있고
실재가 있다.
이 실재가 바로
몸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과 연합하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시작이시다.
이러한 연합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산출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라는 원칙의
확대이고,
이 확대의 결과로
그리스도의 몸이
산출되었다.
복음서들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산출했고,
사도행전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확대는
그리스도의 몸을
산출했다.
하나님은
갈릴리 사람 예수님과
연합되셨으며,
이 예수님은
몸의 머리가 되셨다.
하나님은 또한
많은 갈릴리 사람들과
연합되셨으며,
그들은
머리의 몸이 되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더욱이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사도행전을
복음서들에
연결시켜야만
머리와 몸이 있는
완전한 한 사람을
볼 수 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자 사람이며
사람이자 하나님인
비밀하고 우주적인 사람이다.
신약의 계시들 가운데
가장 긍정적인 항목들 중 하나가
몸의 진정한 하나이다.
진정한 하나는 바로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
즉 구속받고 변화된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연합하신 분이시다.
몸의 진정한 하나는
다름 아닌
삼일 하나님이다.
…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인성을 가진
그분의 선민과 연합시키시며,
이러한 연합이
진정한 하나이다.
2일
요 15:4-5
내 안에
거하십시오.
그러면 나도
여러분 안에
거하겠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여러분도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여러분은
가지들입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은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떠나서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개관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 교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초점을 보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초점은
의롭게 됨이나
거룩하게 됨이 아니라
몸이다.
몸을 놓친다면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중심이 없는 것이고,
목적이 없는 것이며,
목표가 없는 것이고,
방향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거룩하게 되는가?
바로 실지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기 위해서이다.
몸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초점과 중심이다.
여러분은
이 우주 안에서
하나님께서 산출하신
최고의 항목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하늘들이
산출되었으며,
땅이
산출되었고,
사람이
산출되었고,
심지어 수천 가지 항목들이
산출되었다.
하나님은
창조 안에서 일하셨고,
모든 세대에 걸쳐
일해 오셨다.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결국 하나님의
이러한 지속적인 일을 통해
산출될 궁극적인 항목은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 모든 세기와
모든 세대에 걸쳐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산출될 것은 바로
한 몸일 것이다.
이 몸의 머리는
누구인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몸의 머리이시다.
… 몸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일의
궁극적인 항목이다.
그러므로 몸은
하나님의 계시 전체에서
최고 항목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서
그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항상 우리가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을
함축한다.
이러한 연결은
우리를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고,
또 그분의 몸의
다른 모든 지체들과
하나가 되게 한다.
몸이란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 안에서
연결되어
산출된
유기체이다.
몸 안에서
합당하게
유기적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침례를 받고
소위 교회에 가입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유기적으로
합당하게 심어진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의
합당한
유기적인 연결을
가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몸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전적으로
생명의 문제이고,
그리스도와 우리가
유기적인 연결 안에
머무는 문제이다.
우리가
이러한 유기적인 연결 안에
머물 때,
우리는
몸 안에 있다.
우리가
이러한 유기적인 연결 안에
머물지 않을 때,
우리는
실지적으로나
체험적으로
몸 밖에 있다.
몸의
실지 상태는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유기적인 연결 안에
머무는 것이다.
실지로
몸의 생활 안에서
살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
머물러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이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이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들이며,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4-5절).
그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과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유기적인 연결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실지로
몸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유기적인 연결 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어떤 실지적인 이유들 때문에
몸을 떠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
우리 스스로 말할 때,
우리는
몸을 떠난 것이다.
우리의 잡담과
제멋대로 하는 말들과
느슨한 대화는
모두
우리가
몸을 떠났다는
표시이다.
몸은 단지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인 것이 아니다.
몸은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몸을
실현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유기적으로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철저한 이해를 가지고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연결을
충분히 체험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기적인 연결을
실재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지 상태에 있어서
몸 밖에 있고
몸을 떠나 있는 것이다.
신언노트, 2019 01 06
그 유기적인 합일 안에서
생활함에 의하여
또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이 됨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에 있음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그 합일 안에서
(in the … union;
그 합병[합체, 결합, 연합, 화합, 일치] 안에서)
생활함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가지기를
갈망하시는
그 관계는
그분과 사람이
함께 접붙여지고
(be grafted; 접목되고)
또 따라서
(thus; 이와 같이)
한 유기적인 합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성한 그 생명과
사람의 그 생명이
함께 연결되어
(be joined;
접합되어, 붙여져, 합쳐져, 결합되어, 연합되어)
한 생명이 되기를
갈망하십니다;
이 하나임은
(this oneness;
이 하나는[단일성은, 동일성은, 일치는])
한 유기적인 연결,
곧 생명 안에 있는 한 합일
—한 접붙여진 생명입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믿는 것은
그 신성한 생명이신
그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래서(that)
우리가
그 신성한 생명 안에서
그분과의
한 유기적인 합일을
가질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은
그 유기적인 합일의 그 각도로부터
(from the angle; 그 관점으로부터),
곧 결합시키는 그 생명으로부터,
곧 그리스도와 함께뿐만 아니라
(not only with Christ)
그리스도의 그 모든 다른 지체들과
함께 우리를 결합시키는
(unites us together;
우리를 함께 연합시키는[합병시키는, 연결하는])
한 생명으로부터
그 몸에 관하여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그 생활의
그 초점, 곧 그 중심은(the center),
하나님의
계시의
그 높은 요점이고
(point; 중점이고, 목적이고)
또 하나님의
계속적인 일하심의
궁극적인 그 항목인,
그 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의 몸이고,
그분과 (함께)
한 유기적인 합일을
(union; 결합을, 연합을, 합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하나임의
그 사실을
항상 내포합니다
(implies; 함축합니다, 암시합니다).
이 합일은
우리를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와
또 그분의 몸의
다른 그 모든 지체들과
하나로 만듭니다.
그 몸은
한 조직 또는 한 사회집단이 아니고
오직 전적으로 한 유기체인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가지고 있는
생명 안에 있는
그 합일에 의하여
산출됩니다
(produced; 생산됩니다).
그 몸 안에서
적절하게 유기적인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유기적으로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 몸은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그 합일 안에
함께 붙잡혀 있는
(held together;
함께 뭉쳐진, 단결된, 결합된)
어떤 것입니다.
그 몸의
그 실제는
(actuality;
실재는, 현실은, 사실은, 현상은)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그 합일 안에
남아 있음입니다
(the remaining in …;
… 안에의 그 머무름입니다).
우리는
그 섞인 영 안에
(in the mingled Spirit)
생활함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에 삽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그분 자신을
우리와 섞으셔서
그분께서
우리의 생명,
우리의 본성,
또 우리의 내용이(content) 되시고,
또 우리가
그분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은
그리스도,
곧 그 하나님-사람,
곧 하나님과 또 사람의
그 섞임이신
그 한 분의
그 확대입니다
(the enlargement; 그 확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또 사람의
그 섞임의 관점에서부터
그리스도의 그 몸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들 안에서
하나님과 또 사람의
그 섞임은
그 머리를 산출했습니다;
사도행전 안에서
하나님과 또 사람의
그 섞임의 확대는
그리스도의 그 몸을
산출했습니다.
과정을 거치셨고
완결되신
그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그들의 인성 안에 있는
그분의 선택된 백성과 함께
섞으시고,
또 그 섞음이
(the mingling; 그 섞임이)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진짜 하나임입니다
(the genuine oneness;
그 진정한[진실한, 참된]
하나[단일성, 동일성, 일치]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인
그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섞이시도록
허락해 드리고
또 하나님과 섞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입니다
(people;
백성[국민, 민족, 종족]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는
인성과 신성의,
또 신성과 인성의
그 섞임에 의하여
하나님과 함께
결합되고,
섞이며,
또 (하나님으로) 구성되는,
그 하나님-사람들에 의한
한 생활함입니다
(a living).
그리스도의 그 몸은
절대적으로
(absolutely; 전적으로, 완전히)
그 섞인 영 안에 있는
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에 있는 것은
그 섞인 영 안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또 사람의
그 합일은
그 두 영들,
곧 하나님의 그 영과
또 사람의 그 영의
한 합일입니다;
이 두 영들의 그 합일은
성경 안에서
그 가장 깊은
비밀입니다
(mystery; 신비[불가사의]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그 초점은
그 섞인 영,
곧 그 사람의 영과 섞이신
그 신성한 영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또는 성취하시려고
의도하시는 것은
(intends to …; 작정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 초점에
관련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7절의
그 함축들은
(The implications;
내포된 뜻들은, 암시들은,
영향들은, 결과들은)
기묘하고
(marvelous;
놀랍고, 경탄할 만하고)
또 멀리까지 이릅니다
(far-reaching;
광범위합니다, 원대합니다,
지대한 영향을 가져옵니다).
주님과
한 영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있고
또 그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함축합니다.
우리와 또 그분은
유기적으로
섞였고
(have been … mingled;
혼합되었고, 어우러졌고),
조합되었으며
(… blended;
섞였으며, 잘 어우러졌으며),
생명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와 또 그리스도는
하나의(one)
경이롭고
(wonderful;
놀랄 만하고, 불가사의하고),
살아 있는
실체입니다
(entity; 실재물입니다, 독립체입니다),
그 신성한 영과
또 그 사람의 영이
우리 안에서(within us)
하나로 섞여서
(그 결과)
우리는
한 하나님-사람의
그 생명(the life; 그 생활),
곧 하나님이지만 사람이며
또 사람이지만 하나님인
한 생명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는
그리스도의 그 죽음과(to)
같은 형상이 됨의
(of conformity;
닮음의, 부합함의, 순응의, 일치의)
한 단체적인 생활함입니다(living):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한 틀로
(as a mold;
한 거푸집[주형]으로서)
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그 틀은
그 아버지의
그 생명에 의하여
사실 수 있도록(might live)
그분의 사람의 생명을
계속적으로
죽음에 두심의
그리스도의 체험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의 그 생활은
(the life; 그 생명은)
우리를 위한
한 본이고
(a model; 한 원형[전형]이고),
또 우리는
이 본의
그 대량의 재생산이
(the mass reproduction;
그 많은[덩어리] 번식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사람의 생명을 향하여
(to; …에, …에 대하여)
우리가 매일 죽고
그 신성한 생명을
사는 것에 의하여
우리의 생활이(life; 생명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그 틀과
같은 형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에 있기 위하여,
우리는
그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그 죽음과
같은 형상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그 죽음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사는
우리의 길의
(of … way; 방식의)
그 중심임과
(the centrality;
그 구심성과, 그 중요성과, 그 중심적 역할과)
또 보편성입니다
(… universality;
일반성[다면성, 광범위함, 만능]입니다).
우리의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생명을 삶 안에서
(in living a life;
한 생활을 생활함 안에서)
그 전환점은
그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계속으로서
(As … continuation;
… 연속으로서),
우리는
매일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생활을
(live a … life;
… 한 생명을)
살아야만 합니다.
우리 자신을 향하여
죽음의
또 하나님을 향하여
삶의
그러한 한 생활은
그리스도,
곧 그 첫 번째 하나님-사람께서
그분의 많은 지체들,
곧 그 많은 하나님-사람들 안에
형성되시는 것이고
(to be formed;
형태가 만들어지시는 것이고,
구성되시는 것이고),
그분의 유기적인 몸을
건축함을 위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생활의
그 틀로
계속적으로
(continually; 끊임없이)
취함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생활을(생명을)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종류의
단체적인 생활함에 의해서입니다.
1일
롬 6:4-5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장사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으로
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 안에서
그분과 연결되어
자랐다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 안에서도
그분과 연결되어
자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은
신성한 생명 안에서
하나님께
의무를 다하고,
부활 생명 안에서
하나님께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서
우리는
부활 생명을
체험한다.
이 부활 생명 안에서
우리는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붙잡히고
하나님께
의무를 다한다.
이것 또한
유기적인 연결에
달려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므로 더 이상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
우리는 더 이상
옛사람인
타고난 사람 안에
살지 않는다.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
그때 우리는
부활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산다.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그분과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영을 통하여
(갈 5:16, 25)
그리스도와 함께
(롬 6:8, 10)
하나님을 향하여
산다.
이것이
우리의 체험 안에서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주님을 떠나
독립적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육체에 속한 것이다.
우리가
삼일 하나님께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음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과 우리,
우리와 하나님은
서로 하나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유기적인 연결이
우리의 영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그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약 경륜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 길이다.
식물학에서
접붙임은
두 나무를 연결하는 것,
예를 들면
단 열매를 맺는
나무의 가지를
떫은 열매를 맺는
나무의 가지에
연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 결국 이 두 나무의 생명은
함께 결합되어
한 생명이 된다.
이후에 맺히는 열매는,
떫은 열매를 맺는 나무를 통해
단 열매를 맺는 나무가
표현된 것이다.
단 열매를 맺는 나무가
떫은 열매를 맺는 나무의
생명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떫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단 열매를 맺는 나무가
그 안에 사는 것이다.
만일 떫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선포할 것이다.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바람이 불든,
서리가 내리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내 몸에서
단 열매를 맺는 나무가
확대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우리가 영접했고
매일 체험하고 있는
구원은 바로
신성한 삼일성과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 있다.
…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 안에서
유기적인 연결이 일어난다.
… 우리와 주님 사이에는
생명의 연결,
곧 유기적인 연결이 있다.
… 주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주님과 분리되어
홀로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놀라운 어떤 일이
우리 안에서 일어났다.
또 다른 분이
우리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계신다.
우리는
그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우리는
주 예수님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유기적인 연결은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그분의 이름을 불렀을 때,
우리 안에서
발생하고 성취되었다
(롬 10:9).
로마서 12장은
유기적인 연결의 각도,
연결하는 생명의 각도,
즉 우리를
그리스도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다른 모든 지체들과
함께 연결하는
생명의 각도에서
몸에 대해
말한다.
과거에 우리는
아담 안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심으로
아담에게서
건져 내어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 심으셨다.
바로 재출생 곧 거듭남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연결 안으로
이끌려
그리스도의 일부가
되었다.
몸 안에서
유기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결됨으로
그분의 몸 안으로
심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유기적인 연결을 가지고
몸의 일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