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마음이 갈망하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갈망하는 것은 우주 안의 모든 사람과 모든 일과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머리이신 그분 아래 통일될 때 완전한 평화와 조화가 있을 것이고, 우주 안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표현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며,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한다. 우리의 일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있으며, 교회는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있다.
그리스도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긍정적인 것의 실재이시다.
온 우주는 하나님께서 그리신 거대한 한 폭의 그림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고, 매주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과 안식을 가지며, 매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체험하고, 일 년 내내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쁨과 누림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자신 외에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내적으로 보고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회복 안에서 갖고 계신 목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신 그리스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때 우리의 생명이 되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의 숨(요 20:22), 생명의 물(4:14, 7:37-39), 생명의 떡(6:35, 48), 생명의 빛(1:4, 8:12), 생명의 거처(14:23, 15:1, 4-5)이시다.
우리는 주님께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각 방면에서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자라게 하며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그리스도를 번식시킴으로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정도까지, 즉 우리의 큰 기쁨과 우리의 지극히 큰 보상이 되시는 정도까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 안으로 일해 넣으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 안에 내주하시는 그 영이심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 중점을 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단지 객관적인 교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또한 말씀이시다.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주님의 말씀을 접촉할 때 그분의 말씀은 영이 되고, 그분의 말씀이 영이 될 때 그 영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가 그분께 완전히 점유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그분과 연합되어,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하신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누리는 비결을 배울 때 주님의 회복에 신실할 것이다.
우리는 그분 이외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나 일에 집중하지 말고 그분께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중심으로 세우신 그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그럴 때 믿는 이들 사이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회복을 떠난다는 것은 그가 주님의 회복이 무엇인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님의 회복 안에 안전히 지켜지고 분열을 일으키는 데서 보호받을지의 여부는 우리가 본 이상에 달려 있다. 오직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출 때에만 우리는 분열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유일한 중심과 선택과 선호와 입맛과 누림이신 그리스도만 주의한다면, 이것에 의해 우리는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주님의 회복 안의 교회 안에 보존될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망하거나 빗나가 주님의 회복을 저버릴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빌립보서에 나오는 바울의 본을 따라 그리스도를 모든 것으로 취해야 한다.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생활로 취했다 ― 빌 1:21상.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매사에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표현으로 취했다 ― 빌 1:20.
“여러분 안에 이 생각이 있도록 하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각입니다.” ― 바울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그의 생각으로 취했다 ― 빌 2:5.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나온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입니다.” ― 바울은 그리스도를 자신이 살아 낸 의로 취했다 ― 빌 3:9.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탁월한 것으로 여겼다 ― 빌 3:8.
“나는 오직 한 가지 일만을 합니다. 즉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함으로써, 나에게 주실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상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위로 부르셨습니다.” ―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푯대로 취했다 ― 빌 3:13-14.
“형제님들, 무슨 일에든지 참되며, 무슨 일에든지 장중하며, 무슨 일에든지 의로우며, 무슨 일에든지 순수하며, 무슨 일에든지 사랑스러우며, 무슨 일에든지 평판이 좋아야 하며, 그리고 어떤 미덕과 어떤 칭찬이 있거든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미덕들로 취했다 ― 빌 4:8.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능력으로 취하여 그의 품위 있는 생활로 살아 내었다 ― 빌 4:13.
“왜냐하면 나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만족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천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고 풍부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각각의 일과 모든 일에 있어서 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비결로 취했다 ― 빌 4:11-12.
“우리의 국적은 하늘들에 있으므로, 우리는 거기에서 오실 구주,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분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자신의 운행에 따라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형시켜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기대로 취했다 ― 빌 3:20-21.
우리는 다음의 방면들에 따라 그리스도를 얻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얻으시도록 한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를 감지하도록 한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곧 우리 주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것만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분께서 이틀 뒤에 우리를 살아나게 하시고 / 제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살게 되리라.”(호 6:2) ― 셋째 날의 실재는 부흥의 실재를 가지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인격, 임재이다(합 3:2).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우리가 내적으로 밝고 분명하다는 느낌을 가지도록 한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음식과 영적인 음료이신 그리스도를 내적으로 공급받았다는 느낌을 가지도록 한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우리가 생명이 자라서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되도록 한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우리가 활력을 가지고 행동을 취하도록 한다.
그리스도를 모든 것으로 취하고 모든 일에서 그분을 얻으려면, 반드시 계속 우리의 자아를 부인하고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기를 배워야 한다.
몸의 실재이신 주님께서 그 영으로서 우리의 영 안에 계시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교회생활을 위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실지적인 비결은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는 것이다.
영으로 돌이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결이다.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풍성을 누리며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살고 신약 사역 안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길은 계속 우리의 자아를 거절하고 우리의 혼생명을 잃어버리며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기를 훈련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에 의해 수행하는 주님의 일은 영으로 시작해서 영으로 끝나는 일이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영에서 시작하여 다른 사람들의 영으로 끝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접촉하고 받아들이는 영이 있고, 하나님을 살아 내고 표현하는 혼이 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살아 내고 표현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과 오락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혼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을 표현할 목적을 위해서이지, 혼 자체의 누림이나 선호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는 이기적인 누림이 없다. 바울의 사역은 믿는 이들의 누림을 위해 그리스도의 풍성을 은혜로 믿는 이들에게 분배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자아를 부인한다는 것은 혼의 갈망과 선호와 선택을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첫 번째 죄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한 것, 곧 자아를 만족시킨 것이었다.
우리의 자아(우리의 타락한 혼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서 나온 것은 무엇이든 사탄과 연결되어 있고 귀신들과 연결되어 있다.
여호와의 정숙하지 못한 아내인 이스라엘은 악하게 되었다. 우리도 하나님을 저버리면 온갖 종류의 악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고 육체 안에 있을 수 있으며 세상 사람들처럼 처신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에서 휴가를 가질 수 없다. 우리 스스로는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이다.
기도는 진정한 자아 부인이다.
사실상 우리는 기도를 길게 할 필요가 없다.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비록 짧은 기도이지만 이러한 기도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귀신들을 내쫓기’ 위해) 우리 자신의 노력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적용한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치물이 되신 것에 대한 이상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완전히 ‘그리스도화’되어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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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우리의 자아를 부인하고 우리의 영으로 돌이킴으로 그리스도를 모든 것으로 취하여 그리스도를 얻음”
6일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길, 영적인 사람이 되는 길, 승리에 이르는 길, 거룩하게 되는 길, 생명에 이르는 길, 주님의 풍성을 누리는 길이 우리의 혼을 거절하고 영으로 돌이키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혼을 거절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 그 일을 하기 전에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영에서 나오는 순간, 우리는 방황할 것이고 안식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안식이 있는데, 이 안식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안식 안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교통하기 전에, 성경을 읽기 전에, 기도하기 전에, 반드시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계획하든, 먼저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가 자신의 혼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혼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사탄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 순간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 대신에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기를 배워야 한다. 크고 작은 모든 일에서 우리는 먼저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마가복음 9장에서 한 아이의 아버지가 주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 달라고 구했으나 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18절). … 변형의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주님께서 그 상황을 마주하셨다. 그러자 그분은 바로 말 못 하고 귀먹은 영을 쫓아내셨다. 마가복음 9장 28절은 “예수님께서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따로 그분께 여쭈었다. ‘우리는 왜 쫓아낼 수 없었습니까?’ ”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29절에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있다. “이런 종류의 것은 기도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쫓아낼 수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그들이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던 이유라는 것을 보여 준다.
기도의 의미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가 진정한 자아 부인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기도하는 것은 사실상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아마도 제자들은 스스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년 이상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았고 그분에게서 배웠다. 우리는 이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려고 할 때 이를 위해 꼭 필요한 능력과 힘과 신성한 전기가 없는 채로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마가복음 9장 29절에 있는 ‘기도’라는 단어가 사실상 ‘이제는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왜 이 사례가 우리의 대치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와 자신을 부인하는 것에 관한 주님의 말씀(막 8:27-38) 다음에 나오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가복음 9장 14절부터 50절까지는 사실 우리의 대치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적용하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계시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전한 대치물이 되신다는 것이었다. 죽음은 우리를 끝내며, 부활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로 이끈다. 그 결과는 ‘이제는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이 계시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그 남자의 아들에게서 말 못 하는 영을 쫓아내는 사례에 따르면, 그 이상은 기도에 의해 적용된다. 어떤 ‘귀신들’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내쫓을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예로서 우리는 성질의 문제, 특별히 결혼 생활에서의 성질 문제를 들 수 있다.
주님께 왜 여러분의 성질의 귀신을 쫓아낼 수 없느냐고 묻는다면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이다. “이런 종류의 것은 기도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쫓아낼 수 없다. 너는 기도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는 장황하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 단지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비록 짧은 기도이지만 이러한 기도는 ‘이제는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임을 나타낸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노력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적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기도하는 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치물이 되신 것에 대한 이상을 실행하는 것이다.
5일
사탄은 우리 육신적인 몸의 지체들 안에 거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영 안에 계신다. 로마서 8장 6절에 참된 비결이 담겨 있다. 이 절에는 세 가지 항목, 곧 생각과 육체와 영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영에 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의지하기를 배워야 한다.
비록 우리가 이야기와 가르침이 있는 성경을 반드시 연구해야 하지만, 참된 비결은 로마서 8장 6절에 있다. 우리에게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다 해도 로마서 8장 6절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주님, 제가 당신을 선택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을 의지하며, 자신의 노력과 분투를 중단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결코 악이나 유혹을 이기려고 스스로 어떤 일도 행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오히려 제가 당신을 항상 의지하고, 당신과 함께 서며, 당신을 신뢰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제가 항상 당신께 제 자신을 맡기고 당신을 의지하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한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창조된 영뿐만 아니라 거듭난 영, 즉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영이 있다. 우리 안에는 우리의 보배와 우리의 소유와 우리의 영적인 역량과 무기가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한 가지 잘못된 관념이 있다. 그들은 장시간 기도를 드려야만 마치 원자 폭탄 같은 능력이 하늘에서 그들 위에 임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능력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4장 16절은 우리가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히브리서 10장은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과 지성소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19, 22절). 이 지성소는 바로 우리의 영이다(히 4:12, 딤후 4:22).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말씀을 공급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자신의 영으로 돌이키는 것과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신의 영으로 돌이키는 것에 숙련된 사람은 능력 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 영의 느낌을 감지한 다음 그의 영으로부터 무언가를 말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으로 돌이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결이다. 우리 모두가 이 비결을 배우고 진지하게 적용하기를 바란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통제해야 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성경을 읽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통제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 대신 우리는 다만 우리의 영으로 돌이킴으로써 그 생각들을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는 순간, 육체가 아닌 영을 따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하게 됨과 영적인 승리와 생명의 성장과 능력과 주님을 누리는 것의 비결은 영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우리의 혀를 다스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입을 통제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단지 비결을 배우고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즉 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마다 반드시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자신이 하는 말이 맞는지 틀린지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고 있는지를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입을 열기 전에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이것이 비결이다.
사람의 첫 번째 죄는 간음이나 도둑질이나 살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선호에 따라 무언가를 취한 것이었다. 열매를 취한 것이 틀린 일은 아니지만, 혼의 선호에 따라 열매를 취한 것은 자아의 활동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의 첫 번째 죄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한 것, 곧 자아를 만족시킨 것이었다.
혼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혼이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할 때,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 된다. 우리 자아를 부인한다는 것은 혼의 갈망과 선호와 선택을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혼이 자기를 위해 무언가를 원할 때마다, 우리는 반드시 혼을 부인해야 한다.
4일
우리가 실지로 그리스도를 얻었는지의 여부는 다섯 요점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 첫째,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들이쉰 신선한 공기 같으시다고 느낄 것이다. 둘째, 우리는 자신이 빛 가운데 있고 내적으로 빛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셋째, 우리는 내적으로 공급받았다고 느낄 것이다. 즉 우리에게 우리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생수가 있고 배고픔을 만족시켜 주는 살아 있는 떡이 있는 것이다. 넷째, 긍정적인 항목과 부정적인 항목에 관련된 요구들이 점점 높아질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온도계의 온도가 상승하는 것과 같으며, 생명이 계속 자라고 있음을 가리킨다. 다섯째, 우리에게 내적인 활력이 있을 것이다. 집회에 올 때마다 우리에게는 기도하고 찬송해야 한다는 느낌이 있을 것이다. 즉 자신에게 반드시 적극적인 태도가 있어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이 다섯 가지 방면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었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는 것의 첫째 방면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주님의 말씀을 기도로 읽은 후에 우리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고,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느낌이 있다고 해 보자. 하나님은 마치 구름 같으시며, 그분께서 우리를 덮어 주시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를 둘러싸는 공기와 같으시며, 우리에게는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의식, 곧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하다는 느낌이 생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다음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얻었을 때 또 하나의 느낌을 갖게 된다. 우리는 내적으로 분명하고 밝고 빛으로 충만하다고 느낀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시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기 때문이다(요 1:4). 우리는 말씀을 기도로 읽고 난 후에 내적으로 밝아졌다고 느낀다. 말씀을 기도로 읽기 전에는 우리 안에 어둠이 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씀을 더 많이 기도로 읽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안에서부터 빛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었다는 증거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얻는 길이다.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체험하는 것의 셋째 방면은 우리가 내적으로 공급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생수이시며 살아 있는 떡이시다. 우리가 내적으로 공급을 받을 때 생수가 우리의 목마름을 해소하고 영적인 떡이 우리의 배고픔을 만족시킨다. 일단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체험하면 우리는 내적인 공급을 받는다. 갈증이나 배고픔을 느끼는 대신 만족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체험하는 것과 관련된 넷째 방면은 우리 안에서 자라는 생명의 능력과 관련된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그다지 많이 얻지 못하고 생명의 성장의 정도가 낮을 경우, 그에게 자신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을 향한 합당한 태도가 없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태도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말씀을 기도로 읽은 후에 주님의 생명이 그의 안에서 자라기 시작할 것이다. 생명의 성장이 약간 있은 후에 그는 부모님을 향한 자신의 태도가 합당하지 않음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다른 사람의 책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내적인 생명의 성장이 이러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죄들과 잘못들을 처리하는 것은 부정적인 방면과 관련하여 생명의 성장이 나타난 것이다. 긍정적인 방면에서, 생명의 성장의 결과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한 헌신이 너무 낮고 얕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보류한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다시 헌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헌신의 표준을 정할 방법은 없지만, 헌신의 척도는 우리의 생명 성장의 정도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의 다섯째 방면은 생명은 활동적이고 행동을 취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주님의 생명을 체험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죽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발하게 우리를 자극하신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속에서 죽어 있다면, 집회에 왔을 때 비록 겉으로는 괜찮아 보일지 모르지만 마치 죽은 사람처럼 행동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체험하고 있다면 그것이 찬송이든 기도든 분명히 우리 안에는 생명과 관련된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죽어 있는 그리스도인인지의 여부는 우리가 움직이느냐 그러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체험한다면 이 생명은 분명히 우리를 움직이게 만들 것이다.
3일
신약에서 특히 바울이 쓴 서신서의 주된 계시는 바로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우리가 체험하도록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그리스도이다.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빌 1:21).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풍성하고 넘치게 누렸던 바울이 그리스도를 그의 생활로 취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살았다.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빌 1:20) 이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풍성했던 바울이 또한 그리스도를 그의 표현으로 취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의 모든 생활과 일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거나 그의 지식이나 능력이나 그의 다른 장점과 강점을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와 일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하여 표현되실 뿐 아니라 심지어 그의 안에서 확대되시기 위한 것이었다.
“여러분 안에 이 생각이 있도록 하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각입니다.”(빌 2:5) 바울은 외적으로 그리스도를 그의 생활과 표현으로 취했을 뿐 아니라 또한 내적으로 그리스도의 생각을 그의 생각으로 취했다. 그다음 이어지는 말씀에 따르면, 이 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생각이란, 사람이 되시려고 하나님의 모습에서 사람과 같은 모양이 되셨고, 심지어 자신을 비우셔서 노예의 모습을 가지시어 자신을 낮추시고 순종하시어 죽기까지 하셨으며,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의 생각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나온 의가 아니라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입니다.”(빌 3:9) 그리스도를 체험함에 있어서 바울은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발견되었으며, 그가 가진 의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얻은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였다. 이 의는 그가 살아 낸, 그의 의로 표현되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자신이 살아 낸 의로 취했다.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체험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알기를 추구했던 바울은,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을 자신의 유일한 일로 여겼다. 그러므로 그는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함으로써 추구하였다(빌 3:13-14). 그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목표로 취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높은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해 추구했다. 이 상 역시 그리스도, 곧 그분을 추구하는 이들의 누림이신 그리스도이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3) 그리스도를 체험했던 바울은 그리스도에 의해 능력을 얻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주로 이 말씀 앞에 있는 빌립보서 4장 8절에 언급된 하나님의 속성들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미덕들을 살아 내는 것이다. 이 말씀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품위 있는 생활로 살아 내기 위해 그분을 능력으로 취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체험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만족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천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고 풍부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각각의 일과 모든 일에 있어서 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빌 4:11-12) 그리스도를 풍성하고 넘치게 체험한 바울은 어떤 환경이나 어떤 일에서든지 만족하고 항상 기뻐하는 비결을 배웠다. 그가 배운 비결은 다만 그리스도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그리스도 자신을 비결로 취했고, 그 결과 어떤 상황이나 어떤 일에서든지 만족하고 항상 기뻐하였다.
“우리의 국적은 하늘들에 있으므로, 우리는 거기에서 오실 구주,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립니다.”(빌 3:20) 그리스도를 체험하면서 살았던 바울의 삶은 그의 비천한 몸을 변형시켜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하시려고 하늘들에서 오실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이었다. 이와 같이 그는 그가 체험한 그리스도를 그의 기대로 취했다.
2일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때 우리의 생명이 되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은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 복음서는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이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모든 것이시라는 것을 보여 준다. 요한복음은 주님께서 생명이실 뿐 아니라 생명의 빛(요 1:14, 8:12)이시고, 생명의 숨(20:22)이시며, 생명의 물(4:14, 7:38)이시고, 생명의 떡(6:35, 48)이시라고 말한다. 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반드시 햇빛과 공기와 물과 음식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영적 생명을 얻지만, 그리스도는 또한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유지하시는 분이시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주님은 자신이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가지들의 모든 것은 포도나무에서 온다. 포도나무는 가지들에게 생명뿐 아니라 생명 공급도 준다.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그 영이시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고전 15:45하).
주님께서 그 영이시기 때문에(고후 3:17) 바울은 “주님께서 그대의 영과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딤후 4:22)라고 말했다. 더욱이 우리는 ‘주님과 합하여’ 주님과 ‘한 영’이 되었다(고전 6:17). 우리가 참되게 하나님께 경배하려면 ‘영 안에서 경배해야’ 한다(요 4:24).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영을 접촉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주님께서 “내가 여러분에게 한 말이 영…입니다.”(요 6:6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열쇠는 ‘영을 따라’ 행하는 것(롬 8:4)에 달려 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 영을 끄지’ 말아야 한다(살전 5:19).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필요는 주 예수님께서 그 영이시라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분은 육체 되심과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셨고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성장과 봉사의 열쇠이다. 만일 우리가 이 요점을 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시라는 것, 그리스도께서 모든 긍정적인 것의 실재이시라는 것,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것,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시라는 것 등을 포함하여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 교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신 그리스도, 모든 것의 실재이신 그리스도,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우리에게 모든 것이신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그 영이심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같은 의견으로 조율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위치에 대한 이상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분을 누리는 비결을 배웠다면, 우리의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이 변화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순수하고 단순해질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대신에, 다만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분에 대해 말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주님의 회복에 신실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생활을 포기할 수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결코 교회를 보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교회의 상태가 좋든 나쁘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교회는 여전히 교회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유일한 중심이심을 보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주님의 회복 안에 안전히 지켜지고 분열을 일으키는 데서 보호받을지의 여부는 우리가 본 이상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중심이심을 보았다면 우리는 안전히 지켜질 것이다. 회복 안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우리는 교회생활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주님의 회복 안에 있다는 내적인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선택이나 선호나 입맛을 갖지 않기를 배우자.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선택과 선호와 입맛과 누림이시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주님의 회복 안의 교회 안에 보존될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실망하거나 빗나가 주님의 회복을 저버릴 것이다.
신언노트, 2023 07 02
우리의 자아를 부인하고
우리의 영으로 돌이킴으로
그리스도를 모든 것으로 취하여
그리스도를 얻음
장로들과 동역자들은
주님과 함께 전진할 때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
오직 그리스도라는 것에 대해
더욱더 분명해져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 안에서 표현되시고,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며,
심지어 모든 것이 되시는 정도까지
일하시는 것이다.
아마도 여러분은
“나는
내가 먹는 음식과
내가 입는 옷으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기독교에서는 일반적이지만,
그 깊이가 너무 얕다.
또한 여러분은
“음식과 옷은 사실
우리의 생활을 가리키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의 삶과 일과 봉사가
그리스도를 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말조차도
우리가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음식과 옷과 관련한 문제에서조차
우리가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모든 일과 모든 사물이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긍정적인 것이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골로새서 1장 19절은
“왜냐하면 모든 충만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을
기뻐하며”라고 말한다.
또한 18절은
그리스도께서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는 것’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며,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한다.
우리의 일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있으며,
교회는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있다.
구약의 예표와 계명은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는데,
안식일의 실재는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해야 한다고 명령하셨는데,
거룩함의 실재는
그리스도이다.
성경 전체의 모든 문장은
그리스도 자신의
실재를 가리킨다.
온 우주와
심지어 모든 나무와 꽃과 풀잎도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
꽃의 아름다움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아름다움의 실재가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기 때문이다.
열매의 달콤함은
그리스도의 달콤함을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달콤함의 실재가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의 많은 방면을
보여 주기 위해
여러 꽃과 열매를 사용한다.
의가 그리스도이고,
거룩함이 그리스도이며,
순수함이 그리스도이고,
인내가 그리스도이며,
능력이 그리스도이고,
수고가 그리스도이며,
우주 안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표현이다.
온 우주는
하나님께서 그리신
거대한 한 폭의 그림이다.
이 그림 안에 있는
다채로운 모든 사물과 모든 일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이다.
주인과 종의 관계도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이상은 반드시
매우 분명해져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긍정적인 모든 것과 모든 일과 모든 사람의
실재이시라는 것을
보는 정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한다.
메시지를 전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말해 내야 한다.
우리가
교회의 행정을 수행할 때,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사람들 안에 공급하고,
그런 다음
그 사람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다른 이들에게
공급되시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우리에게
거룩하고 다정하고
의롭고 인내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항목들은
실재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성경이
인내에 대하여 말할 때,
그 의미는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께 돌이켜
인내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살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사실
그리스도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아 냄으로써
정직하기를 원하신다.
의와 진실함과 거룩함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와 진실함과 거룩함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마음이 갈망하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갈망하는 것은
우주 안의
모든 사람과 모든 일과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머리이신 그분 아래 통일될 때
완전한 평화와 조화가 있을 것이고,
우주 안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표현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긍정적인 것의
실재이시다.
온 우주는
하나님께서 그리신
거대한 한 폭의 그림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고,
매주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과 안식을 가지며,
매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체험하고,
일 년 내내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쁨과 누림이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때
우리의 생명이 되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은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 복음서는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이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모든 것이시라는 것을
보여 준다.
요한복음은
주님께서
생명이실 뿐 아니라
생명의 빛이시고,
생명의 숨이시며,
생명의 물이시고,
생명의 떡이시라고 말한다.
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반드시
햇빛과 공기와
물과 음식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영적 생명을 얻지만,
그리스도는 또한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유지하시는 분이시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주님은
자신이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가지들의 모든 것은
포도나무에서 온다.
포도나무는
가지들에게
생명뿐 아니라
생명 공급도 준다.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그 영이시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그 영이시기 때문에
바울은
“주님께서
그대의 영과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딤후 4:22)라고 말했다.
더욱이 우리는
‘주님과 합하여’
주님과 ‘한 영’이 되었다
(고전 6:17).
우리가 참되게
하나님께 경배하려면
‘영 안에서 경배해야’ 한다
(요 4:24).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영을 접촉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주님께서
“내가 여러분에게 한 말이
영…입니다.”(요 6:6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열쇠는
‘영을 따라’ 행하는 것(롬 8:4)에
달려 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 영을 끄지’ 말아야 한다
(살전 5:19).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필요는
주 예수님께서 그 영이시라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분은
육체 되심과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셨고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성장과 봉사의
열쇠이다.
만일 우리가
이 요점을 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시라는 것,
그리스도께서
모든 긍정적인 것의 실재이시라는 것,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것,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시라는 것 등을 포함하여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
교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신 그리스도,
모든 것의 실재이신 그리스도,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우리에게 모든 것이신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그 영이심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같은 의견으로 조율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위치에 대한
이상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분을 누리는 비결을 배웠다면,
우리의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이
변화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순수하고 단순해질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대신에,
다만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분에 대해 말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주님의 회복에
신실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생활을 포기할 수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결코
교회를 보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교회의 상태가
좋든 나쁘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교회는 여전히 교회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유일한 중심이심을
보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주님의 회복 안에
안전히 지켜지고
분열을 일으키는 데서
보호받을지의 여부는
우리가 본
이상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중심이심을 보았다면
우리는
안전히 지켜질 것이다.
회복 안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우리는
교회생활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주님의 회복 안에 있다는
내적인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선택이나 선호나 입맛을
가지지 않기를 배우자.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선택과 선호와
입맛과 누림이시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주님의 회복 안의 교회 안에
보존될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실망하거나 빗나가
주님의 회복을 저버릴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자신 외에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내적으로 보고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회복 안에서
가지고 계신 목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신
그리스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때
우리의 생명이 되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의 숨,
생명의 물,
생명의 떡,
생명의 빛,
생명의 거처이시다.
우리는
주님께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각 방면에서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자라게 하며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그리스도를 번식시킴으로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정도까지,
즉 우리의 큰 기쁨과
우리의 지극히 큰 보상이 되시는 정도까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 안으로 일해 넣으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 안에 내주하시는
그 영이심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 중점을 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단지
객관적인 교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또한
말씀이시다.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주님의 말씀을 접촉할 때
그분의 말씀은
영이 되고,
그분의 말씀이
영이 될 때
그 영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가
그분께 완전히 점유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그분과 연합되어,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하신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누리는 비결을 배울 때
주님의 회복에 신실할 것이다.
우리는
그분 이외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나 일에
집중하지 말고
그분께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중심으로 세우신
그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그럴 때
믿는 이들 사이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회복을 떠난다는 것은
그가
주님의 회복이 무엇인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님의 회복 안에
안전히 지켜지고
분열을 일으키는 데서
보호받을지의 여부는
우리가 본
이상에 달려 있다.
오직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출 때에만
우리는
분열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유일한
중심과 선택과 선호와
입맛과 누림이신
그리스도만 주의한다면,
이것에 의해
우리는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주님의 회복 안의 교회 안에
보존될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망하거나 빗나가
주님의 회복을 저버릴 것이다.
신약에서
특히 바울이 쓴 서신서의
주된 계시는 바로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우리가 체험하도록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그리스도이다.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빌 1:21).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풍성하고 넘치게 누렸던
바울이
그리스도를
그의 생활로 취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살았다.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빌 1:20)
이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풍성했던
바울이 또한
그리스도를
그의 표현으로 취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의 모든 생활과 일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거나
그의 지식이나 능력이나
그의 다른 장점과 강점을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와 일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하여
표현되실 뿐 아니라 심지어
그의 안에서
확대되시기 위한 것이었다.
“여러분 안에
이 생각이 있도록 하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각입니다.”
(빌 2:5)
바울은
외적으로
그리스도를
그의 생활과 표현으로
취했을 뿐 아니라
또한 내적으로
그리스도의 생각을
그의 생각으로 취했다.
그다음 이어지는
말씀에 따르면,
이 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생각이란,
사람이 되시려고
하나님의 모습에서
사람과 같은 모양이 되셨고,
심지어 자신을 비우셔서
노예의 모습을 가지시어
자신을 낮추시고 순종하시어
죽기까지 하셨으며,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의
생각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나온 의가 아니라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입니다.”
(빌 3:9)
그리스도를 체험함에 있어서
바울은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발견되었으며,
그가 가진 의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얻은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였다.
이 의는
그가 살아 낸,
그의 의로 표현되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자신이 살아 낸
의로 취했다.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체험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알기를
추구했던 바울은,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을
자신의 유일한 일로 여겼다.
그러므로 그는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함으로써
추구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목표로 취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높은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해 추구했다.
이 상 역시
그리스도,
곧 그분을 추구하는 이들의
누림이신 그리스도이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 4:13)
그리스도를 체험했던
바울은
그리스도에 의해
능력을 얻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주로
이 말씀 앞에 있는
빌립보서 4장 8절에 언급된
하나님의 속성들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미덕들을
살아 내는 것이다.
이 말씀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품위 있는 생활로
살아 내기 위해
그분을
능력으로 취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체험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만족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천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고
풍부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각각의 일과 모든 일에 있어서
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빌 4:11-12)
그리스도를
풍성하고 넘치게 체험한
바울은
어떤 환경이나
어떤 일에서든지
만족하고 항상 기뻐하는
비결을 배웠다.
그가 배운 비결은 다만
그리스도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그리스도 자신을
비결로 취했고,
그 결과
어떤 상황이나 어떤 일에서든지
만족하고
항상 기뻐하였다.
“우리의 국적은
하늘들에 있으므로,
우리는
거기에서 오실 구주,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빌 3:20)
그리스도를 체험하면서 살았던
바울의 삶은
그의 비천한 몸을 변형시켜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하시려고
하늘들에서 오실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이었다.
이와 같이 그는
그가 체험한 그리스도를
그의 기대로 취했다.
우리는 반드시
빌립보서에 나오는
바울의 본을 따라
그리스도를
모든 것으로 취해야 한다.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생활로 취했다
― 빌 1:21상.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매사에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표현으로 취했다
― 빌 1:20.
“여러분 안에
이 생각이 있도록 하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각입니다.”
― 바울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그의 생각으로 취했다
― 빌 2:5.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나온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입니다.”
― 바울은
그리스도를
자신이 살아 낸
의로 취했다
― 빌 3:9.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탁월한 것으로 여겼다
― 빌 3:8.
“나는 오직
한 가지 일만을 합니다.
즉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함으로써,
나에게 주실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상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위로 부르셨습니다.”
―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푯대로 취했다
― 빌 3:13-14.
“형제님들,
무슨 일에든지 참되며,
무슨 일에든지 장중하며,
무슨 일에든지 의로우며,
무슨 일에든지 순수하며,
무슨 일에든지 사랑스러우며,
무슨 일에든지 평판이 좋아야 하며,
그리고 어떤 미덕과 어떤 칭찬이 있거든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미덕들로 취했다
― 빌 4:8.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능력으로 취하여
그의 품위 있는 생활로
살아 내었다
― 빌 4:13.
“왜냐하면 나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만족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천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고
풍부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각각의 일과 모든 일에 있어서
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비결로 취했다
― 빌 4:11-12.
“우리의 국적은
하늘들에 있으므로,
우리는
거기에서 오실 구주,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분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자신의 운행에 따라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형시켜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기대로 취했다
― 빌 3:20-21.
우리가 실지로
그리스도를 얻었는지의 여부는
다섯 요점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
첫째,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들이쉰
신선한 공기 같으시다고
느낄 것이다.
둘째, 우리는
자신이
빛 가운데 있고
내적으로 빛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셋째, 우리는
내적으로 공급받았다고
느낄 것이다.
즉 우리에게
우리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생수가 있고
배고픔을 만족시켜 주는
살아 있는 떡이 있는 것이다.
넷째, 긍정적인 항목과
부정적인 항목에 관련된
요구들이 점점 높아질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온도계의 온도가
상승하는 것과 같으며,
생명이 계속
자라고 있음을 가리킨다.
다섯째, 우리에게
내적인 활력이 있을 것이다.
집회에 올 때마다
우리에게는
기도하고 찬송해야 한다는
느낌이 있을 것이다.
즉 자신에게 반드시
적극적인 태도가 있어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이 다섯 가지 방면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었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는 것의
첫째 방면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주님의 말씀을 기도로 읽은 후에
우리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고,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느낌이 있다고 해 보자.
하나님은 마치
구름 같으시며,
그분께서
우리를 덮어 주시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를 둘러싸는
공기와 같으시며,
우리에게는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의식,
곧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하다는
느낌이 생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다음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얻었을 때
또 하나의 느낌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내적으로 분명하고
밝고
빛으로 충만하다고 느낀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시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을 기도로 읽고 난 후에
내적으로 밝아졌다고 느낀다.
말씀을 기도로 읽기 전에는
우리 안에
어둠이 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씀을 더 많이
기도로 읽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안에서부터 빛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었다는 증거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얻는 길이다.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체험하는 것의
셋째 방면은
우리가
내적으로 공급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생수이시며
살아 있는 떡이시다.
우리가
내적으로 공급을 받을 때
생수가
우리의 목마름을 해소하고
영적인 떡이
우리의 배고픔을 만족시킨다.
일단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체험하면
우리는
내적인 공급을 받는다.
갈증이나 배고픔을 느끼는 대신
만족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체험하는 것과 관련된
넷째 방면은
우리 안에서 자라는
생명의 능력과 관련된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그다지 많이 얻지 못하고
생명의 성장의 정도가 낮을 경우,
그에게
자신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을 향한
합당한 태도가 없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태도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말씀을 기도로 읽은 후에
주님의 생명이
그의 안에서
자라기 시작할 것이다.
생명의 성장이
약간 있은 후에
그는
부모님을 향한
자신의 태도가
합당하지 않음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다른 사람의 책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내적인 생명의 성장이
이러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죄들과 잘못들을 처리하는 것은
부정적인 방면과 관련하여
생명의 성장이 나타난 것이다.
긍정적인 방면에서,
생명의 성장의 결과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한 헌신이
너무 낮고 얕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보류한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다시 헌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헌신의 표준을 정할
방법은 없지만,
헌신의 척도는
우리의 생명 성장의
정도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의
다섯째 방면은
생명은
활동적이고
행동을 취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주님의 생명을 체험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죽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발하게
우리를 자극하신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속에서 죽어 있다면,
집회에 왔을 때
비록 겉으로는 괜찮아 보일지 모르지만
마치 죽은 사람처럼
행동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체험하고 있다면
그것이 찬송이든 기도든 분명히
우리 안에는
생명과 관련된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죽어 있는 그리스도인인지의 여부는
우리가
움직이느냐
그러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체험한다면
이 생명은 분명히
우리를
움직이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다음의 방면들에 따라
그리스도를 얻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얻으시도록 한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를
감지하도록 한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곧 우리 주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것만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분께서
이틀 뒤에
우리를 살아나게 하시고
/ 제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살게 되리라.”
(호 6:2)
― 셋째 날의 실재는
부흥의 실재를 가지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인격, 임재이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우리가
내적으로
밝고 분명하다는
느낌을 가지도록 한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음식과
영적인 음료이신
그리스도를
내적으로 공급받았다는
느낌을 가지도록 한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우리가
생명이 자라서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되도록 한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우리가
활력을 가지고
행동을 취하도록 한다.
사탄은
우리 육신적인 몸의 지체들 안에 거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영 안에 계신다.
로마서 8장 6절에
참된 비결이 담겨 있다.
이 절에는
세 가지 항목,
곧 생각과 육체와 영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영에 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의지하기를
배워야 한다.
비록 우리가
이야기와 가르침이 있는
성경을 반드시 연구해야 하지만,
참된 비결은
로마서 8장 6절에 있다.
우리에게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다 해도
로마서 8장 6절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주님,
제가
당신을 선택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을 의지하며,
자신의 노력과 분투를 중단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결코
악이나 유혹을 이기려고
스스로 어떤 일도 행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오히려 제가
당신을 항상 의지하고,
당신과 함께 서며,
당신을 신뢰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제가 항상
당신께
제 자신을 맡기고
당신을 의지하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한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창조된 영뿐만 아니라
거듭난 영,
즉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영이 있다.
우리 안에는
우리의 보배와
우리의 소유와
우리의 영적인 역량과 무기가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한 가지 잘못된 관념이 있다.
그들은
장시간 기도를 드려야만
마치 원자 폭탄 같은 능력이
하늘에서
그들 위에 임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능력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4장 16절은
우리가
담대히
은혜의 왕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히브리서 10장은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과
지성소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 지성소는 바로
우리의 영이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말씀을 공급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자신의 영으로 돌이키는 것과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신의 영으로 돌이키는 것에
숙련된 사람은
능력 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 영의 느낌을 감지한 다음
그의 영으로부터
무언가를 말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으로 돌이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결이다.
우리 모두가
이 비결을 배우고
진지하게 적용하기를
바란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통제해야 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성경을 읽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통제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 대신 우리는 다만
우리의 영으로 돌이킴으로써
그 생각들을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는 순간,
육체가 아닌
영을 따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하게 됨과
영적인 승리와
생명의 성장과
능력과
주님을 누리는 것의
비결은
영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우리의 혀를 다스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입을 통제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단지
비결을 배우고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즉 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마다 반드시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자신이 하는 말이
맞는지 틀린지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고 있는지를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입을 열기 전에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이것이 비결이다.
사람의 첫 번째 죄는
간음이나 도둑질이나 살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선호에 따라
무언가를 취한 것이었다.
열매를 취한 것이
틀린 일은 아니지만,
혼의 선호에 따라
열매를 취한 것은
자아의 활동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의 첫 번째 죄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한 것,
곧 자아를 만족시킨 것이었다.
혼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혼이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할 때,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 된다.
우리 자아를 부인한다는 것은
혼의 갈망과 선호와 선택을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혼이
자기를 위해
무언가를 원할 때마다,
우리는 반드시
혼을 부인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모든 것으로 취하고
모든 일에서
그분을 얻으려면,
반드시 계속
우리의 자아를 부인하고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기를
배워야 한다.
몸의 실재이신 주님께서
그 영으로서
우리의 영 안에 계시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교회생활을 위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실지적인 비결은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는 것이다.
영으로 돌이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결이다.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풍성을 누리며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살고
신약 사역 안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길은
계속 우리의 자아를 거절하고
우리의 혼생명을 잃어버리며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기를
훈련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에 의해 수행하는
주님의 일은
영으로 시작해서
영으로 끝나는 일이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영에서 시작하여
다른 사람들의 영으로 끝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접촉하고 받아들이는
영이 있고,
하나님을 살아 내고 표현하는
혼이 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살아 내고 표현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과 오락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혼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을 표현할 목적을 위해서이지,
혼 자체의 누림이나
선호를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는
이기적인 누림이 없다.
바울의 사역은
믿는 이들의 누림을 위해
그리스도의 풍성을
은혜로
믿는 이들에게
분배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자아를 부인한다는 것은
혼의 갈망과 선호와 선택을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첫 번째 죄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한 것,
곧 자아를 만족시킨 것이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길,
영적인 사람이 되는 길,
승리에 이르는 길,
거룩하게 되는 길,
생명에 이르는 길,
주님의 풍성을 누리는 길이
우리의 혼을 거절하고
영으로 돌이키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혼을 거절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
그 일을 하기 전에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영에서 나오는 순간,
우리는
방황할 것이고
안식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안식이 있는데,
이 안식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안식 안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교통하기 전에,
성경을 읽기 전에,
기도하기 전에,
반드시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계획하든,
먼저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가
자신의 혼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혼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사탄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 순간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 대신에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기를
배워야 한다.
크고 작은 모든 일에서
우리는 먼저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마가복음 9장에서
한 아이의 아버지가
주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 달라고 구했으나
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변형의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주님께서
그 상황을 마주하셨다.
그러자 그분은 바로
말 못 하고 귀먹은 영을 쫓아내셨다.
마가복음 9장 28절은
“예수님께서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따로
그분께 여쭈었다.
‘우리는
왜 쫓아낼 수 없었습니까?’ ”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29절에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있다.
“이런 종류의 것은
기도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쫓아낼 수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그들이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던
이유라는 것을
보여 준다.
기도의 의미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가
진정한 자아 부인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기도하는 것은 사실상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아마도 제자들은 스스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년 이상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았고
그분에게서 배웠다.
우리는
이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려고 할 때
이를 위해 꼭 필요한
능력과 힘과 신성한 전기가
없는 채로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마가복음 9장 29절에 있는
‘기도’라는 단어가 사실상
‘이제는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왜 이 사례가
우리의 대치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와
자신을 부인하는 것에 관한
주님의 말씀(막 8:27-38) 다음에 나오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가복음 9장
14절부터 50절까지는 사실
우리의 대치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적용하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계시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전한 대치물이 되신다는 것이었다.
죽음은
우리를 끝내며,
부활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로 이끈다.
그 결과는
‘이제는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이 계시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그 남자의 아들에게서
말 못 하는 영을 쫓아내는
사례에 따르면,
그 이상은
기도에 의해 적용된다.
어떤 ‘귀신들’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내쫓을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예로서
우리는
성질의 문제,
특별히 결혼 생활에서의 성질 문제를
들 수 있다.
주님께
왜 여러분의 성질의 귀신을
쫓아낼 수 없느냐고 묻는다면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이다.
“이런 종류의 것은
기도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쫓아낼 수 없다.
너는
기도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는
장황하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
단지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비록 짧은 기도이지만
이러한 기도는
‘이제는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임을
나타낸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노력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적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기도하는 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치물이 되신 것에 대한
이상을 실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
(우리의 타락한 혼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서
나온 것은 무엇이든
사탄과 연결되어 있고
귀신들과 연결되어 있다.
여호와의 정숙하지 못한 아내인
이스라엘은
악하게 되었다.
우리도
하나님을 저버리면
온갖 종류의 악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고
육체 안에 있을 수 있으며
세상 사람들처럼 처신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에서
휴가를 가질 수 없다.
우리 스스로는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이다.
기도는
진정한 자아 부인이다.
사실상 우리는
기도를 길게 할
필요가 없다.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비록 짧은 기도이지만
이러한 기도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귀신들을 내쫓기’ 위해)
우리 자신의 노력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적용한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치물이 되신 것에 대한
이상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완전히 ‘그리스도화’되어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
1일
장로들과 동역자들은 주님과 함께 전진할 때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 오직 그리스도라는 것에 대해 더욱더 분명해져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 안에서 표현되시고,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며, 심지어 모든 것이 되시는 정도까지 일하시는 것이다.
아마도 여러분은 “나는 내가 먹는 음식과 내가 입는 옷으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기독교에서는 일반적이지만, 그 깊이가 너무 얕다. 또한 여러분은 “음식과 옷은 사실 우리의 생활을 가리키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의 삶과 일과 봉사가 그리스도를 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말조차도 우리가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음식과 옷과 관련한 문제에서조차 우리가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모든 일과 모든 사물이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긍정적인 것이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골로새서 1장 19절은 “왜냐하면 모든 충만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을 기뻐하며”라고 말한다. 또한 18절은 그리스도께서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는 것’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며,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한다. 우리의 일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있으며, 교회는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있다.
구약의 예표와 계명은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는데, 안식일의 실재는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해야 한다고 명령하셨는데, 거룩함의 실재는 그리스도이다. 성경 전체의 모든 문장은 그리스도 자신의 실재를 가리킨다. 온 우주와 심지어 모든 나무와 꽃과 풀잎도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 꽃의 아름다움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아름다움의 실재가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기 때문이다. 열매의 달콤함은 그리스도의 달콤함을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달콤함의 실재가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의 많은 방면을 보여 주기 위해 여러 꽃과 열매를 사용한다. 의가 그리스도이고, 거룩함이 그리스도이며, 순수함이 그리스도이고, 인내가 그리스도이며, 능력이 그리스도이고, 수고가 그리스도이며, 우주 안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표현이다.
온 우주는 하나님께서 그리신 거대한 한 폭의 그림이다. 이 그림 안에 있는 다채로운 모든 사물과 모든 일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이다. 주인과 종의 관계도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이상은 반드시 매우 분명해져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긍정적인 모든 것과 모든 일과 모든 사람의 실재이시라는 것을 보는 정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한다. 메시지를 전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말해 내야 한다. 우리가 교회의 행정을 수행할 때,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사람들 안에 공급하고, 그런 다음 그 사람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다른 이들에게 공급되시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우리에게 거룩하고 다정하고 의롭고 인내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항목들은 실재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성경이 인내에 대하여 말할 때, 그 의미는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께 돌이켜 인내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살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사실 그리스도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아 냄으로써 정직하기를 원하신다. 의와 진실함과 거룩함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와 진실함과 거룩함이 되기를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