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대를 바꾸고 그리스도를 다시 모셔 오기 위해 ‘현재의 진리’, ‘최신의’ 진리를 보고 살아 내고 실행해야 한다. 우리는 그 영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 곧 지금 이 시간의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모든 진리들이 성경에 있지만, 사람의 어리석음과 불성실함과 부주의함과 불순종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많은 진리들이 상실되었고 사람에게 감추어졌다.
이렇게 새롭게 계시된 진리들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발명하신 것이 아니다. 그보다 그 진리들은 사람이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주님의 모든 일꾼은 현재의 진리가 무엇인지에 관해 하나님 앞에 여쭈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들은 축적된다. 따라서 이후의 진리들은 이전의 진리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님의 축적된 계시들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의 조류 안에 살고 있으며, 이 조류는 하나님께서 이전 시대들에서 행하신, 과거의 모든 일들의 연속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가 ‘현재의 진리’에 뒤처진 사람들이 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란다.
주님의 최신의 궁극적인 회복의 현재 진리는 우리를 새로운 부흥 안으로 이끌어 시대를 전환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시대를 전환하는 것은 우리가 빌라델비아의 길을 가겠다고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오직 회복된 교회, 곧 빌라델비아에 있는 교회로 상징된 형제 사랑의 교회만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룰 수 있고 그분의 마음의 갈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기는 이들(계 3:7-13)의 특징은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신성한 계시의 최고봉에 이르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이 최고봉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사람을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시어 그리스도의 몸이 산출되고 신부가 준비되며 새 예루살렘이 완결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비록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사역을 버리고 떠났지만(딤후 1:15), 유일하게 한 교회만 주님께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바로 빌라델비아에 있는 교회이다. 주님은 그들이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그들을 높게 평가하시고 감상하기까지 하셨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사도 바울의 건강한 가르침의 말씀, 곧 신성한 계시의 최고봉을 버리고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사람을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과 같게 하며, 하나님 자신을 사람과 하나 되게 하고 사람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표현이 확대되고 확장되어 그분의 모든 신성한 속성들이 사람의 미덕들 안에서 표현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미리 정하시고 구속하신 사람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그들의 생명과 생명 공급과 모든 것으로 분배하시어,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을 산출하시고 조성하시며 건축하시려는 그분의 계획이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로 읽고 읊조림으로써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간직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부요하다’(눅 12:21).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손을 드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렬하고 기쁘게 받아들이며 그 말씀에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기는 이들이 성전에서 기둥들이라는 것은 그들이 삼일 하나님 안에서 기둥들일 것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기는 이들 안으로 건축되시어 그들을 살아 있는 돌들이자 보석들로 만드시고, 그들은 하나님 안으로 건축되어 하나님 안에 있는 돌기둥들이 되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합병되어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 거처가 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이 이기는 이 위에 기록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새 예루살렘과 주님께서 이기는 이를 소유하신다는 것을 가리키고,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성(새 예루살렘)과 주님 자신, 이 모두가 이기는 이에게 속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이 이기는 이들 위에 기록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새 예루살렘의 본성과 주님의 인격, 이 모두가 이기는 이들 안으로 일해 넣어져서, 그들에게 삼일 하나님이라는 ‘이름표’가 붙여지고 그들이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된 것을 가리킨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기는 이들의 특징은 자신들 안에 내주하는 보배이신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림으로써 하나님-사람의 생활 안에 들어가려고 분투하는 것이다.
이사야서 22장에서 하나님은 왕궁의 청지기였던 셉나를 해고하시고(15-19절) 엘리아김으로 대치하셨다. 엘리아김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 청지기, 곧 어깨 위에 하나님의 집의 열쇠가 놓인 분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사 22:20-25, 계 3:7-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물 창고의 문을 여닫는 열쇠를 갖고 계신다. 이 보물 창고 안에는 우리의 누림을 위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풍성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고용하셨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십자가 위에 두셨을 때 해고하셨다.
그리스도가 아닌 것은 무엇이든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다 해고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구약 경륜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대치하셨다.
참된 교회생활은 모든 성도가 해고되고 그리스도로 대치됨으로써 그리스도를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게 하는 생활이다. 우리는 모두 셉나로서 참엘리아김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파면당하고 대치되어야 한다. 그럴 때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의 비밀들과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맡은 청지기들인 그분의 복사판이 되게 하신다.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치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접붙여진 생명의 문제이다. 야생올리브나무 가지들이었던 우리는 참올리브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졌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었고, 이 연결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치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합되었고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와 결합하시어 우리와 연결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고 끝났다. 이제 우리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서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에 의해, 우리를 통하여 사심으로써 우리를 대치하신다.
우리가 살지만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에 의해 산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연결을 가리킨다. 우리는 한 면으로 해고되었지만 다른 한 면으로 쫓겨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에 의해, 우리를 통하여 사시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갈 2:20). 이렇듯 임마누엘(사 7:14)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모든 것을 대치하시고 모든 것이 되신다.
보배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풍성을 누리기 위하여, 우리는 생명의 느낌에 따라 주님과의 접촉 안에 머물면서 주님을 계속 만져야 하고, 영 안에서 가난하고 마음이 순수하기를 훈련해야 한다.
보배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풍성을 누리기 위하여, 우리는 자아를 부인함과 십자가를 짐과 혼생명을 잃음이라는 ‘열쇠들’을 사용해야 한다.
주님께서 다윗의 열쇠를 사용하셔서 그분의 회복의 확산을 위한 문을 여시는 것은 우리에게 객관적인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또한 다윗의 열쇠를 사용하셔서 주관적으로 우리의 내적 존재의 문을 여심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을 지닌 기둥으로서 하나님의 집 안으로 건축되게 하신다.
‘나의 하나님의 이름’은 기둥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나의 하나님의 성의 이름’은 기둥이 새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가리키며, ‘나의 새 이름’은 기둥이 새로운 의미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리킨다. 기둥인 이기는 이는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고, 새 예루살렘의 구성 요소가 되며, 체험적으로 새로운 의미로 그리스도가 된다.
새 예루살렘은 새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확대와 확장인 우리는 새 예루살렘으로서 새로운 의미로 그리스도이다. 새 그리스도는 사복음서의 그리스도와 같지 않다. 신랑의 증가인 신부는 새 예루살렘으로서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신 모든 이들을 포함한다.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건축되고, 새 예루살렘의 구성 요소가 되며, 새 그리스도의 일부가 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에는 불가능한 것을 해결하는 요소가 담겨 있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기는 이들은 일보다 생명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며, 양보다 질에 더 관심을 둔다. 그들은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그들이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그분을 위하여 그들이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했는가에 달려 있다는 인식이 있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기는 이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의 다른 모든 이름을 버렸고, 누구든지 부를 때 풍성한 분이 되어 주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며’(빌 2:11), 그들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것과 그들 자신이 예수님을 위하여 믿는 이들의 노예가 된 것을 전파한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기는 이들의 특징은 형제 사랑이다. 사랑이 그들 가운데 편만하기 때문에, 그들은 기운을 북돋아 주는 하나님의 임재로 사람들을 소중히 보살피고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건강한 가르침으로 그들을 보양함으로써 하나님을 따라 사람들을 목양한다.
빌라델비아에서의 주님의 회복은 질에 있어서의 회복, 곧 교회의 원래 실질이자 하나님의 내적 실질인 사랑(요일 4:8)의 회복이다. 하나라는 참된 터, 곧 교회의 터 위에 서는 것은 모든 형제를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은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의 회복이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기는 이들은 하나라는 참된 터 위에 서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계속 거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모든 형제를 사랑한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기는 이들은 주님의 유일한 신약 사역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계 3:8). 주님의 유일한 신약 사역은 그들을 이끌어 그들의 생명과 모든 것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귀한 인격을 참되게 감상하고 사랑하며 누리도록 한다.
우리가 교회 건축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고 승리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부흥된 생활을 하고 목양에 수고해야 한다. 이러한 생활과 수고는 주님과 형제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서 흘러나온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왜냐하면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압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요일 4:7-8.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가지신 사랑을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 요일 4:16.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그분의 사랑을 우리 안에 주입하시고, 또 우리 안에 사랑을 산출하셨다. 우리는 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한다.
여러분에게 할당된 하나님의 양 떼 위에 군림하지 말라. 교회들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장로들에게 할당된 토지, 위탁된 자산이다. 하나님은 장로들에게 이러한 교회들을 돌보도록 맡기셨다.
기꺼이 성도들의 노예가 되라.
장로들은 서로 목양하고 서로 사랑하여 몸의 생활의 본이 되어야 한다.
장로들은 성도들 안에 그리스도를 분배하기 위해 모든 일과 모든 측면에서 성도들을 돌보아야 한다.
장로들은 성도들을 접촉하고 방문하며 가정에서의 식사에 초대해야 한다.
“장로들은 서로 사랑해야 하고, 그들의 아내들도 서로 사랑해야 하며, 그들은 서로의 자녀들을 사랑해야 한다.”
빌라델비아의 길을 계속 가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라오디게아, 곧 타락하고 비뚤어진 빌라델비아의 길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라오디게아는 여전히 자신의 역사를 기억하지만 이전의 생명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현재의 임재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라오디게아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실지로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뜨겁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라오디게아는 명목상으로는 모든 것을 갖고 있지만, 그 무엇을 위해서도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수 없다. 라오디게아는 이전의 자신의 영광은 기억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현재 상태는 잊어버린다. 이전에 그것은 빌라델비아였지만, 지금은 미지근함과 영적인 교만이 가득한 라오디게아이다.
우리가 빌라델비아의 길을 계속 가고자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대가를 지불하여 금과 흰옷과 안약이신 삼일 하나님을 더욱 얻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인도하는 이기는 이로 계신 주님과 하나 되어, 천년왕국에서 주님의 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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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매우 높게 평가하지만, 주님은 그 교회가 ‘적은 능력’을 가졌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의 강함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적은 능력을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강해지려고 애쓰지 말라. 단순히 여러분이 주님께 받은 것을 쓰라. 주님의 은혜를 강탈하지 말라. 심지어 우리 중 가장 작은 이까지도 주님에게서 어느 정도 은혜를 받았다. 우리는 그 은혜를 써야 한다. 즉,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 은혜를 사용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감상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이다. “잘하였다. 너는 적은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너는 네가 가진 능력으로 나의 말을 지켰다.” 주님은 거인들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상당한 분량의 은혜를 가진 작은 이들을 기뻐하신다. 비록 그 은혜의 역량에 제한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그 은혜를 사용하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최대한으로 그 은혜를 쓴다면, 주님은 기뻐하실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실패할 때, 그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로 변한다.
라오디게아는 비뚤어진 빌라델비아이다. 형제 사랑을 잃을 때, 빌라델비아는 즉시 다수의 의견으로 변해 버린다. 이것이 바로 ‘라오디게아’의 의미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타락할 때, ‘형제들’이 ‘군중’으로 변하고 ‘형제 사랑’이 ‘다수의 의견’으로 변한다. 곧 사랑이 의견으로 퇴보한다. 형제 사랑은 살아 있는 것이지만, 군중의 의견은 죽어 있는 것이다. 형제 사랑이 사라질 때, 몸의 관계도 사라지게 된다. 사람의 의견만 남을 뿐 아니라 생명의 교통도 중단된다. 주님의 의견은 잃어버린 바 되었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다수결 투표나 무기명 투표, 거수가결뿐이다. 빌라델비아가 타락할 때 곧 라오디게아로 변한다.
우리가 빌라델비아의 길을 계속 가고자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가운데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할 때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나는 풍부하고 풍성하게 되어 부족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라오디게아의 냄새를 풍기게 된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없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가득하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이 충만하다는 사실을 의식해서는 안 된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가난할지라도, 우리는 자신이 풍성하다는 사실을 의식해서는 안 된다. 주님 앞에 사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풍성을 의식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사는 것을 배우게 하시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풍성하더라도 자신이 풍성하다는 것을 모르기를 바란다. 참으로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났지만, 모세 본인은 모르는 것이 더 좋았다!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될 때, 즉시 그 사람은 라오디게아가 된다. 그리고 그 결과 그 사람은 미지근하게 된다. 라오디게아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실지로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뜨겁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라오디게아는 명목상으로는 모든 것을 갖고 있지만, 그 무엇을 위해서도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수 없다. 라오디게아는 이전의 자신의 영광은 기억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현재 상태는 잊어버린다. 이전에 그것은 빌라델비아였지만, 지금은 라오디게아이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이들은 반드시 살아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들의 실패와 약함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데서 기인한다. 베드로는 불로 단련한 금이 바로 시련을 거친 믿음이라고 말한다(벧전 1:7). 여러분은 들은 말씀과 연합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여러분이 들은 말씀이 실지로 유용해지려면 여러분은 여러 가지 시련을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불에 제련한 금을 사야 한다. 여러분은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믿음을 갖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은 참으로 풍성하게 될 것이다.
5일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보낸 서신의 서문인 요한계시록 3장 7절에서 성경 교사들이 이해하기에 가장 어려운 용어는 ‘다윗의 열쇠’이다. 이 열쇠는 주님께서 그분의 회복된 교회를 위해 문을 여시는 데 사용된다. 오늘날에도 이 열쇠는 주님의 회복 안에서 주님을 추구하고 사랑하는 이들인 우리가 객관적으로 회복의 확산을 위해 열린 문을 갖도록 주님께서 사용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흰 돌(2:17)과 기둥이 되어 하나님의 성전으로 건축되고 세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을 지니도록(3:12) 주님께서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먼저는 현시대에 있는 교회를 가리킨다. 결국 영원 안에서 성전은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집은 오늘날 하나님의 거처를 위한 교회이고, 영원 안에서는 하나님의 거처를 위한 하나님의 장막과 성전 둘 다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우리가 흰 돌과 기둥이 되어 하나님의 집으로 건축되는 길은 무엇인가? ‘나의 하나님의 이름’은 기둥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나의 하나님의 성의 이름’은 기둥이 새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가리키며, ‘나의 새 이름’은 기둥이 새로운 의미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리킨다. 기둥인 이기는 이는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고, 새 예루살렘이 되며, 체험적으로 새로운 의미로 그리스도가 된다. 우리 자신 안에서는 이것을 수행할 길이 없다. 그러나 주 예수님께는 길이 있다. 즉 그분은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흰 돌로 변화되고 하나님의 집으로 건축되기 위한 열쇠이시다. 하나님의 집은 오늘날에는 교회이고 영원 안에서는 새 예루살렘이다.
주님을 사랑하여 추구하는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새 이름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그러한 사람이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고, 또한 새 예루살렘이 되며, 새로운 의미에서의 그리스도가 된다는 뜻이다. 우리 스스로는 이것이 불가능하지만,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께는 길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그분 자신의 형상대로 그분 자신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위를 주셨다(창 1:26).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길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다윗은 예표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길을 찾았다. 다윗은 모든 원수들을 패배시키고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건축할 터를 얻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권위의 열쇠를 주셨으므로 그 열쇠는 ‘다윗의 열쇠’라 불린다. 그 후 다윗에게는 자손, 즉 이 열쇠를 물려받은 그리스도가 있었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권위의 열쇠를 주신(마 28:18) 참다윗이시다(12:3-4).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분의 회복을 위하여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주님은 주관적으로 우리를 흰 돌들이 되게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집 안으로 건축된 기둥들, 곧 하나님의 일부이자 새 예루살렘의 일부이자 새로운 의미로 그리스도의 일부인 이들이 되게 하는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이러한 진리들의 개요들을 읽어 본다면, 우리는 이 개요들이 하나의 열쇠를 우리에게 제시한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열쇠는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일부, 새 예루살렘의 일부, 새로운 그리스도의 일부가 되게 하는 길을 여는 열쇠이다. 우리는 이러한 개요들을 기도로 읽고 연구하며 탐구하고 외우며 암송하고 이러한 개요들로 신언해야 한다. 그 결과 우리가 실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린 문이 있을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일부와 새 예루살렘의 일부와 그리스도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열린 문이 있을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완결되신 하나님과 새로운 그리스도이다. 이 그리스도는 사복음서 안에 계신 분께서 증가되시고 확대되시며 번성하심으로써,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단체적인 몸이 되신 것이다.
4일
하나님의 가족은 우주 가운데 가장 커다란 집으로서 역대의 모든 믿는 이를 포함한다. 이 광대하고 신성한 가족 안에서 그리스도는 유일한 청지기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가족을 각 방면에서 돌보심으로써 우리를 섬기신다. 엘리아김으로 예표되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님의 집의 열쇠(보물 창고의 열쇠)를 어깨 위에 지고 계신 분이시다. 사무엘기하 7장 16절은 다윗의 집이 다윗의 왕국을 위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며(딤전 3:15) 또한 하나님의 왕국이다. 하나님의 집으로 충분하게 건축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으로 나타날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이 집의 열쇠, 곧 이 왕국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이사야서 22장 22절은 여호와께서 다윗 집의 열쇠를 엘리아김의 어깨 위에 두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어깨 위에 두신 열쇠는 커다란 것이다. 그렇게 큰 열쇠는 열어야 할 문이 크고 두껍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한 문은 하나님의 집의 보물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요새일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집에 있는 보물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이다.
이사야서 22장에 따르면, 셉나는 ‘해고되었고’ 왕의 집을 맡은 청지기는 엘리아김으로 대치되었다. 다비는 셉나가 거짓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말했다. 거짓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에 의해 파면당해야 하고 그리스도로 대치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치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치하셔야 한다. 우리는 모두 ‘셉나’로서 참엘리아김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파면당하고 대치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결코 그 무엇도,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를 대치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대치되어야 한다. 그분 자신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셔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모든 풍성의 보물 창고를 열 수 있는 커다란 열쇠를 갖고 계신다. 그분께서 그 보물 창고를 여시면, 누구도 닫을 수 없을 것이다. 그분께서 그 보물 창고를 닫으시면, 누구도 열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 안에 체현되신 하나님의 모든 풍성을 우리에게 열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또한 이러한 풍성의 문을 닫으실 수도 있다. 종종 우리는 신성한 보물들의 문이 우리에게 열려서 우리 안으로 신성한 보물들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체험한다. 그러나 또 어떤 때에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을 한다. 그럴 때 문이 닫히고, 하나님의 풍성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 중단되었다는 느낌이 있다. 주님께서 여시고 닫으시는 것은 모두 한 가지 일, 곧 우리가 보물인 그분의 풍성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이사야서 22장 22절의 직접적인 적용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물 창고의 문을 여닫는 열쇠를 갖고 계시며 이 보물 창고 안에는 우리의 누림을 위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풍성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풍성을 열어 주시는 것과 닫으시는 것을 모두 체험했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풍성을 닫으실 때, 우리는 메마르고 내적으로 빈곤한 느낌을 갖는다. 우리의 체험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모든 풍성을 여닫는 열쇠를 가진 분이심을 보여 준다.
우리 모두는 주님을 접촉하고 그분과 교통하며 그분을 만져야 한다.
가장 영적인 사람은 주님과의 접촉 안에 가장 많이 머무는 사람이다.
우리는 “주님, 저는 다만 당신을 접촉하기 원합니다. 저는 당신께 아무것도 요청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당신께 저를 위해 어떤 것을 해 주시기를 요청하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당신과의 접촉 안에 머물기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회복을 위해, 당신의 권익을 위해 기도할 어떤 부담이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이 접촉 안에 머물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해야 한다.
3일
그리스도는 엘리아김으로 예표된, 하나님의 집을 맡은 청지기이시다(사 22:20-24). 주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3장 7절에서 자신을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라고 언급하셨다. 그분은 다윗의 집의 열쇠를 가진 분이시다. 집은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귀중품을 보관하는 곳이다. 이사야서 39장 2절은 어떻게 히스기야가 바빌론에서 온 사절단에게 자신의 보물 창고를 보여 주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이 보물 창고는 문자적으로 ‘그의 귀중품의 집’을 뜻한다. 다윗의 집은 보물 창고였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집을 여는 열쇠를 가진 분이시다.
하나님은 왕궁의 청지기였던 셉나를 해고하셨고(사 22:15), 그를 그리스도의 예표인 엘리아김으로 대치하셨다.
온 우주 가운데 하나님의 집 안팎의 모든 것은 해고되어야 하고 그리스도로 대치되어야 한다. 민족들과 청지기와 그리고 왕의 집에 있는 모든 대접과 항아리는 대치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임마누엘로 대치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그리스도로 대치하셨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청지기로, 영광의 보좌로, 단단한 곳(벽)에 박힌 못으로 계시되시는 이유인데, 그 못 위에는 모든 기구와 그릇 곧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누리기 위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이 걸려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아닌 모든 사람과 사물을 해고하시는 것을 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고용하셨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십자가 위에 두셨을 때 해고하셨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을 해고하셨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로 대치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해고하시고 그리스도로 대치하신 후에, 먼저 왕국을 위한 복원이 있을 것이고 그다음으로 새 예루살렘이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복원이 있을 것이다. 참된 교회생활은 모든 성도가 해고되고 그리스도로 대치되는 생활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게 할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서 1장부터 23장까지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경륜의 이상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와 결합하시어 우리와 연결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고 끝났다.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치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접붙여진 생명의 문제이다. 이 접붙여진 생명은 요한복음 15장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정점이다.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들이다(5절). 야생올리브나무 가지들이었던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졌다(롬 11:17).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었고, 이 연결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치하신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에 의해, 우리를 통하여 사심으로써 우리를 대치하신다. 우리가 살지만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에 의해 산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결을 가리킨다.
모든 사람을 고용하셨던 하나님은 결국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로 대치하시려고 해고하셨다.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이 그리스도로 대치될 때,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 되신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해고하시고 파면하셨으며, 그런 다음 파면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대치하시려고 개입하신다. 이것이 골로새서 2장 16절과 17절에 있는 바울의 관념이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의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명절과 초하룻날과 안식일이 모두 그리스도의 그림자임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약 경륜의 모든 것을 대치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한 면으로 해고되었지만 다른 한 면으로 쫓겨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에 의해, 우리를 통하여 사시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분은 모든 것을 대치하시고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 임마누엘이시다.
2일
하나님은 그분의 마음의 갈망에 따라 영원한 경륜을 정하셨는데, 그것은 사람을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과 같게 하며, 하나님 자신을 사람과 하나 되게 하고 사람을 그분과 하나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표현이 확대되고 확장되어 그분의 모든 신성한 속성들이 사람의 미덕들 안에서 표현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여러 단계를 통하여 수행하신다. 먼저 하나님은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그분의 모양에 따라 창조하셨다(창 1:26-27).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육체 되심으로 사람이 되시어 사람의 본성에 참여하셨다(히 2:14상). 하나님은 인간 생활을 하심으로써 인간 미덕들을 통하여 그분의 속성들을 표현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포함한 죽음을 죽으셨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맏아들을 산출하시고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께 선택받은 백성 안으로 그분 자신을 그들의 생명으로 분배하심으로써, 그들을 거듭나게 하시어 많은 아들들 곧 많은 하나님-사람들을 산출하시어(벧전 1:3),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로 교회를 형성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그리스도의 형제들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며, 이 몸은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로서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확대와 표현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이상에 의해 통제받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 아닌 것은 어떤 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있는 일곱 서신들에서 교회들의 하락의 현저한 특징은 세 종류의 가르침, 곧 이방인 신언자인 발람의 가르침(2:14), 성직자 계급 제도를 세운 니골라당의 가르침(2:15), 이단과 음행으로 가득한 이세벨이라는 여자 곧 소위 여신언자의 가르침(2:20)이었다. 이 세 종류의 가르침이 기어들어 온 이유는 교회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떠났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 1장 3절과 6장 3절에서 바울은 다르게 가르치지 말라고 경고했다. 성도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가르쳐야 했다.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은 현저하게 바울의 가르침에서 돌아섰고(비교 딤후 1:15), 이렇게 돌아선 결과는 그들이 세 종류의 이단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디모데에게 바울이 마지막 서신을 보낸 지 삼십 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 이 교회들은 그러한 정도까지 하락하게 되었다. 사도의 가르침, 사도의 합당한 계시를 떠나거나 그것에서 돌아서는 것은 위험하다.
유일하게 한 교회만 주님께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바로 빌라델비아에 있는 교회이다. 주님은 그들이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계 3:8) 그들을 높게 평가하시고 감상하기까지 하셨는데, 이것은 그들이 사도의 합당한 가르침에서 돌아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그들은 약했지만, 주님은 여전히 그들을 높게 평가하시면서 그들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그분의 말씀을 지킨 것을 언급하셨다.
합당한 가르침에서 돌아서는 것은 끔찍한 일이며, 하락을 가져올 것이고 다른 가르침들을 붙잡게 할 것이다. 나는 회복 안에 있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의 사역에서 돌아섰던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을 뒤따르지 않기 바란다. 그보다 나는 우리가 빌라델비아 교회의 본, 곧 적은 능력밖에 없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지킨 본을 따르기 바란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자.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사도의 가르침들 안에 머무는 것이고, 건강한 말씀 안에 머무는 것이며, 합당한 인도 직분과 함께하고 주님에게서 온 유일한 계시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안전하다.
신언노트, 2022 12 18
우리를
시대를 전환하는
새로운 부흥 안으로
이끌어 줄
주님의
최신의 궁극적인 회복에 따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정해 주신 노정인
빌라델비아의 길을
취함
그 시대를 전환하는
한 새로운 부흥 안으로
우리를 이끄는
주님의
최신의 또 궁극적인
그 회복에 따라
그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좁은 길-빌라델비아의 길-을
취함
베드로후서 1장 12절에 언급된
‘현재의 진리’를
‘최신의 진리’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모든 진리들이
성경에 있다.
모든 진리들이
성경에 기록되었지만,
사람의
어리석음과 불성실함과
부주의함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진리들이 상실되었고
사람에게 감추어졌다.
진리는 여전히
거기에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한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때가 찼을 때
어떤 진리들을
열어 주심으로써
다시 그것들을 드러내신다.
이렇게
새롭게 계시된 진리들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발명하신 것이 아니다.
그보다 그 진리들은
사람이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지나간 세대에
하나님은
여러 진리들을 계시하셨다.
그분은
어느 특별한 시대에
사람들이
특별한 진리를
발견하게 하셨다.
우리는
이런 진리들을
교회사에서
매우 분명히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6세기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하나님에 의해
일으켜졌을 때,
하나님은
그의 눈을 여셔서
그에게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다.
루터 전에도
이 사실이 있었지만,
루터는
이 진리를
더 강하게 깨달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는 특별히
이 진리에 대해서 탁월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진리가
그 시대에서는
‘현재의 진리’였다.
주님의 모든 일꾼은
현재의 진리가 무엇인지에 관해
하나님 앞에 여쭈어야 한다.
물론 성경에는
중요하고 중대한 진리들이 많지만,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현재의 진리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가
축적되는 것임을
안다.
새로운 진리는
과거의 진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과거의 모든 진리들은
오늘날의 기초이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님의 축적된 계시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여셔서
우리가
이 사실을 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의
조류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조류는
하나님께서
이전 시대들에서 행하신,
과거의 모든 일들의
연속이다.
1926년부터
우리는
구원과 교회와 십자가에 관한
메시지를
많이 해방했고,
또 이것들에 관하여
많이 증언했다.
1927년에
우리는
십자가의 주관적인 일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했다.
우리는
십자가에,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진리가 있을 뿐 아니라
부활의 사실도 있음을
보았다.
과거에 우리가 전한
부활은 주로
믿음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고
우리의 체험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부활은
부활이
생명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교리가 아니라
영적인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원칙이다.
이후에 하나님은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이고
그 실재가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이것은
바울이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갈 1:12)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에게서
도움을 얻었지만
우리의 계시는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님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마르틴 루터,
친첸도르프(Zinzendorf),
모라비아 형제회,
케직(Keswick) 사경회 메시지들에서
도움을 받았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최종 목표가
그리스도를
모든 것이 되시게 하는 것임을
믿는다.
나는 오늘날
하나님께
오직 한 가지 일만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골로새서 1장 18절의 메시지이다.
이 절은
하나님께서
보기를 갈망하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다.
그리스도 외에는
영적 실재가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현재의 진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만질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낮추고
엎드리며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일이 단지
몇몇 사람을 구원하거나
다른 이들이 영적이게 되도록
돕는 것만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현재의 진리’를
알게 하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가
‘현재의 진리’에
뒤처진 사람들이 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시대를 바꾸고
그리스도를 다시 모셔 오기 위해
‘현재의 진리’,
‘최신의’ 진리를
보고
살아 내고
실행해야 한다.
우리는
그 영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
곧 지금 이 시간의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주님의
최신의 궁극적인 회복의
현재 진리는
우리를
새로운 부흥 안으로 이끌어
시대를 전환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시대를 전환하는 것은
우리가
빌라델비아의 길을 가겠다고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오직 회복된 교회,
곧 빌라델비아에 있는 교회로 상징된
형제 사랑의 교회만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룰 수 있고
그분의 마음의 갈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마음의 갈망에 따라
영원한 경륜을
정하셨는데,
그것은
사람을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과 같게 하며,
하나님 자신을
사람과 하나 되게 하고
사람을
그분과 하나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표현이
확대되고 확장되어
그분의 모든 신성한 속성들이
사람의 미덕들 안에서
표현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여러 단계를 통하여
수행하신다.
먼저 하나님은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그분의 모양에 따라
창조하셨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육체 되심으로
사람이 되시어
사람의 본성에 참여하셨다.
하나님은
인간 생활을 하심으로써
인간 미덕들을 통하여
그분의 속성들을 표현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포함한
죽음을 죽으셨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맏아들을 산출하시고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께 선택받은 백성 안으로
그분 자신을
그들의 생명으로 분배하심으로써,
그들을
거듭나게 하시어
많은 아들들
곧 많은 하나님-사람들을 산출하셔서,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로
교회를 형성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그리스도의 형제들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며,
이 몸은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로서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확대와 표현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이상에 의해
통제받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 아닌 것은
어떤 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있는
일곱 서신들에서
교회들의 하락의
현저한 특징은
세 종류의 가르침,
곧 이방인 신언자인
발람의 가르침,
성직자 계급 제도를 세운
니골라당의 가르침,
이단과 음행으로 가득한
이세벨이라는 여자
곧 소위 여신언자의 가르침이었다.
이 세 종류의 가르침이
기어들어 온 이유는
교회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떠났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 1장 3절과
6장 3절에서
바울은
다르게 가르치지 말라고
경고했다.
성도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가르쳐야 했다.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은 현저하게
바울의 가르침에서 돌아섰고,
이렇게 돌아선 결과는
그들이
세 종류의 이단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디모데에게
바울이
마지막 서신을 보낸 지
삼십 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
이 교회들은
그러한 정도까지
하락하게 되었다.
사도의 가르침,
사도의 합당한 계시를
떠나거나
그것에서 돌아서는 것은
위험하다.
유일하게 한 교회만
주님께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바로 빌라델비아에 있는 교회이다.
주님은
그들이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그들을
높게 평가하시고
감상하기까지 하셨는데,
이것은
그들이
사도의 합당한 가르침에서
돌아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그들이 약했지만,
주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높게 평가하시면서
그들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그분의 말씀을 지킨 것을
언급하셨다.
합당한 가르침에서 돌아서는 것은
끔찍한 일이며,
하락을 가져올 것이고
다른 가르침들을 붙잡게 할 것이다.
나는
회복 안에 있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의 사역에서 돌아섰던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을
뒤따르지 않기 바란다.
그보다 나는
우리가
빌라델비아 교회의 본,
곧 적은 능력밖에 없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지킨 본을
따르기 바란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자.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사도의 가르침들 안에
머무는 것이고,
건강한 말씀 안에
머무는 것이며,
합당한 인도 직분과
함께하고
주님에게서 온
유일한 계시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안전하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기는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신성한 계시의
최고봉에 이르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이 최고봉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사람을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시어
그리스도의 몸이 산출되고
신부가 준비되며
새 예루살렘이 완결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비록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사역을 버리고
떠났지만,
유일하게 한 교회만
주님께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바로 빌라델비아에 있는 교회이다.
주님은
그들이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그들을 높게 평가하시고
감상하기까지 하셨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사도 바울의
건강한 가르침의 말씀,
곧 신성한 계시의 최고봉을
버리고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로 읽고
읊조림으로써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간직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부요하다’
(눅 12:21).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손을 드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렬하고 기쁘게 받아들이며
그 말씀에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기는 이들이
성전에서
기둥들이라는 것은
그들이
삼일 하나님 안에서
기둥들일 것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기는 이들 안으로 건축되시어
그들을
살아 있는 돌들이자
보석들로 만드시고,
그들은
하나님 안으로 건축되어
하나님 안에 있는
돌기둥들이 되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합병되어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 거처가 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이
이기는 이 위에 기록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새 예루살렘과
주님께서
이기는 이를
소유하신다는 것을
가리키고,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도시(새 예루살렘)와
주님 자신,
이 모두가
이기는 이에게 속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이
이기는 이들 위에
기록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새 예루살렘의 본성과
주님의 인격,
이 모두가
이기는 이들 안으로
일해 넣어져서,
그들에게
삼일 하나님이라는
‘이름표’가 붙여지고
그들이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된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엘리아김으로 예표된,
하나님의 집을 맡은
청지기이시다.
주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3장 7절에서
자신을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라고
언급하셨다.
그분은
다윗의 집의
열쇠를 가진 분이시다.
집은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귀중품을 보관하는 곳이다.
이사야서 39장 2절은
어떻게 히스기야가
바빌론에서 온 사절단에게
자신의 보물 창고를 보여 주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이 보물 창고는 문자적으로
‘그의 귀중품의 집’을 뜻한다.
다윗의 집은
보물 창고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집을 여는
열쇠를 가진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왕궁의 청지기였던
셉나를 해고하셨고,
그를
그리스도의 예표인
엘리아김으로 대치하셨다.
온 우주 가운데
하나님의 집 안팎의
모든 것은 해고되어야 하고
그리스도로 대치되어야 한다.
민족들과 청지기와
그리고 왕의 집에 있는
모든 대접과 항아리는
대치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임마누엘로 대치하셨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그리스도로 대치하셨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청지기로,
영광의 보좌로,
단단한 곳(벽)에 박힌 못으로
계시되시는 이유인데,
그 못 위에는
모든 기구와 그릇
곧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누리기 위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이 걸려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아닌
모든 사람과 사물을
해고하시는 것을
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고용하셨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십자가 위에 두셨을 때
해고하셨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을 해고하셨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로 대치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해고하시고
그리스도로 대치하신 후에,
먼저 왕국을 위한
복원이 있을 것이고
그다음으로 새 예루살렘이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복원이 있을 것이다.
참된 교회생활은
모든 성도가 해고되고
그리스도로 대치되는
생활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게 할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서 1장부터 23장까지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경륜의 이상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와 결합하셔서
우리와 연결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고 끝났다.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치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접붙여진 생명의 문제이다.
이 접붙여진 생명은
요한복음 15장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정점이다.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들이다.
야생올리브나무 가지들이었던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졌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었고,
이 연결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치하신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에 의해,
우리를 통하여
사심으로써
우리를 대치하신다.
우리가 살지만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에 의해 산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결을
가리킨다.
모든 사람을 고용하셨던 하나님은 결국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로 대치하시려고
해고하셨다.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이
그리스도로 대치될 때,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 되신다.
이사야서에서
각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해고되고, 파면되며,
그런 다음 파면하시는 하나님께서
안으로 오셔서(개입하셔서)
각각의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로 대치하신다.
이것이 골로새서 2장
16절과 17절에 있는
바울의 관념이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의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명절과 초하룻날과 안식일이 모두
그리스도의 그림자임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구약 경륜의
모든 것을 대치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한 면으로 해고되었지만
다른 한 면으로 쫓겨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에 의해, 우리를 통하여
사시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분께서는
모든 것을 대치하시고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
임마누엘이시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기는 이들의 특징은
그들의 내주하시는 보배이신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림으로써
하나님-사람의 생활 안에 들어가기 위한
그들의 분투함(애씀, 노력함)이다.
이사야서 2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왕궁의 청지기였던
셉나를 해고하셨고
그를 엘리아김으로 대치하셨다.
엘리아김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 청지기,
곧 그분의 어깨 위에
하나님의 집의 열쇠가 놓인
그 한 분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보물 창고의
문을 여닫는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이 보물 창고 안에는
우리의 누림을 위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풍성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고용하셨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십자가 위에 두셨을 때
해고하셨다.
그리스도가 아닌 것은
무엇이든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다 해고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구약 경륜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대치하셨다.
참된 교회생활은
모든 성도가 해고되고
그리스도로 대치됨으로써
그리스도를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게 하는 생활이다.
우리는 모두 셉나로서
참엘리아김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파면당하고 대치되어야 한다.
그럴 때 그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비밀들과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맡은
청지기들인 그분의 복사판이
되게 하신다.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치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접붙여진 생명의 문제이다.
야생올리브나무 가지들이었던
우리는
참올리브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졌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었고,
이 연결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치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결되었고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와 연결하셨고,
그분 자신을
우리와 결합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었고 또 끝났다;
이제 우리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합일 안에서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에 의해(우리 곁에), 우리를 통하여
사심으로써
우리를 대치하신다.
우리가 살지만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에 의해 산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한 합일을
가리킨다.
우리는
한 면으로 해고되었지만
다른 한 면으로 쫓겨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에 의해, 우리를 통하여
사시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따라서)
임마누엘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각각의 모든 것들을 대치하시고
또 각각의 모든 것들이 되신다.
보배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풍성을 누리기 위하여,
우리는
생명의 느낌에 따라
주님과의 접촉 안에 머무르면서
또 영 안에서 가난하고
마음 안에서 순수하도록
훈련하면서
주님과의 접촉 안에
남아 있을 필요가 있다.
보배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풍성을 누리기 위하여,
우리는
자기를 부인함,
십자가를 짐,
또 혼생명을 잃음의
‘열쇠들’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가족은
그 우주 안에서
가장 큰 집으로서
그 시대들 전체에 걸쳐
모든 믿는 이들을
포함한다.
이 광대하고 신성한 가족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유일한 청지기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가족을
각 방면에서 돌보심으로써
우리를 섬기신다.
엘리아김으로 예표되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님의 집의 열쇠(보물 창고의 열쇠)를
어깨 위에 지고 계신 분이시다.
사무엘기하 7장 16절은
다윗의 집이
다윗의 왕국을 위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며
또한 하나님의 왕국이다.
하나님의 집으로
충분하게 건축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으로
나타날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이 집의 열쇠,
곧 이 왕국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이사야서 22장 22절은
여호와께서
다윗 집의 열쇠를
엘리아김의 어깨 위에
두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어깨 위에 두신
열쇠는
커다란 것이다.
그렇게 큰 열쇠는
열어야 할 문이
크고 두껍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한 문은
하나님의 집의 보물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요새일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집에 있는
보물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이다.
이사야서 22장에 따르면,
셉나는 ‘해고되었고’
왕의 집을 맡은 청지기는
엘리아김으로 대치되었다.
다비는
셉나가
거짓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말했다.
거짓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에 의해
파면당해야 하고
그리스도로
대치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치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치하셔야 한다.
우리는 모두
‘셉나’로서
참엘리아김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파면당하고
대치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결코
그 무엇도,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를 대치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대치되어야 한다.
그분 자신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셔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모든 풍성의
보물 창고를 열 수 있는
커다란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그분께서
그 보물 창고를 여시면,
누구도
닫을 수 없을 것이다.
그분께서
그 보물 창고를 닫으시면,
누구도
열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 안에 체현되신
하나님의 모든 풍성을
우리에게
열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또한
이러한 풍성의 문을
닫으실 수도 있다.
종종 우리는
신성한 보물들의 문이
우리에게 열려서
우리 안으로
신성한 보물들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체험한다.
그러나 또 어떤 때에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을 한다.
그럴 때
문이 닫히고,
하나님의 풍성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
중단되었다는
느낌이 있다.
주님께서
여시고 닫으시는 것은 모두
한 가지 일,
곧 우리가
보물인 그분의
풍성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이사야서 22장 22절의
직접적인 적용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물 창고의 문을 여닫는
열쇠를 가지고 계시며
이 보물 창고 안에는
우리의 누림을 위한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풍성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풍성을
열어 주시는 것과
닫으시는 것을 모두
체험했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풍성을 닫으실 때,
우리는
메마르고
내적으로 빈곤한
느낌을 가진다.
우리의 체험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모든 풍성을 여닫는
열쇠를 가지신 분임을
보여 준다.
우리 모두는
주님을 접촉하고
그분과 교통하며
그분을 만져야 한다.
가장 영적인 사람은
주님과의 접촉 안에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주님,
저는 단지(그저) 와서
당신을 접촉합니다.
저는
당신께
요청할(구할, 여쭐)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심지어
당신께서
저를 위해
어떤 것을 해 주시기를
요청하는 것조차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당신과의 그 접촉 안에
남아 있기를 좋아합니다.
저는
당신의 회복을 위해,
당신의 이익을(관심사를) 위해
기도할
어떤(상당한, 약간의) 부담이 있지만,
그것을 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이 접촉 안에
남아 있기를 좋아합니다.”
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보낸
서신의 서문인
요한계시록 3장 7절에서
성경 교사들이
이해하기에 가장 어려운 용어는
‘다윗의 열쇠’이다.
이 열쇠는
주님께서
그분의 회복된 교회를 위해
문을 여시는 데
사용된다.
오늘날에도
이 열쇠는
주님의 회복 안에서
주님을 추구하고 사랑하는 이들인
우리가 객관적으로
회복의 확산을 위해 열린 문을 가지도록
주님께서 사용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흰 돌과 기둥이 되어
하나님의 성전으로 건축되고
세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도시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을 지니도록
주님께서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먼저는
현시대에 있는 교회를
가리킨다.
결국 영원 안에서
성전은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집은 오늘날
하나님의 거처를 위한
교회이고,
영원 안에서는
하나님의 거처를 위한
하나님의 장막과 성전 둘 다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우리가
흰 돌과 기둥이 되어
하나님의 집으로 건축되는
길은 무엇인가?
‘나의 하나님의 이름’은
그 기둥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나의 하나님의 도시의 이름’은
그 기둥이
새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가리키며,
또 ‘나의 새 이름’은
그 기둥이
한 새로운 의미에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리킨다.
한 기둥인
그 이기는 이는
(신격 안에서가 아니라
생명 안에서 또 본성 안에서)
하나님이 되고,
새 예루살렘이 되며,
또 한 새로운 경험적인 의미에서
(체험적으로 새로운 의미로)
그리스도가 된다.
우리 자신 안에서는
이것을 수행할 길이 없다.
그러나 주 예수님께는
길이 있다.
즉 그분은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흰 돌로 변형되고
하나님의 집으로 건축되기 위한
열쇠이시다.
하나님의 집은
오늘날에는 교회이고
영원 안에서는 새 예루살렘이다.
주님을 사랑하여 추구하는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새 이름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그러한 사람이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고,
또한 새 예루살렘이 되며,
한 새로운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된다는 뜻이다.
우리 스스로는
이것이 불가능하지만,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께는
길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그분 자신의 형상대로
그분 자신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위를 주셨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길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다윗은
예표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길을 찾았다.
다윗은
모든 원수들을 패배시키고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건축할
터를 얻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권위의 열쇠를 주셨으므로
그 열쇠는
‘다윗의 열쇠’라 불린다.
그 후 다윗에게는
자손,
즉 이 열쇠를 물려받은
그리스도가 있었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권위의 열쇠를 주신
참다윗이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분의 회복을 위하여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흰 돌들로,
또 하나님의,
새 예루살렘의,
또 한 새로운 의미로
그리스도의
일부인 사람들인
하나님의 집 안으로 건축된
기둥들로
주관적으로 만드시는
그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이러한 진리들의
개요들을 읽어 본다면,
우리는
이 개요들이
하나의 열쇠를
우리에게 제시한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열쇠는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일부,
새 예루살렘의 일부,
새로운 그리스도의 일부가 되게 하는
길을 여는
열쇠이다.
우리는
이러한 개요들을
기도로 읽고
연구하며
탐구하고
외우며
암송하고
이러한 개요들로
신언해야 한다.
그 결과 우리가
실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린 문이 있을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일부와
새 예루살렘의 일부와
그리스도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열린
문이 있을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완결되신 하나님과
새로운 그리스도이다.
이 그리스도는
사복음서 안에 계신 분께서
증가되시고 확대되시며 번성하심으로써,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단체적인 몸이 되신 것이다.
주님께서
다윗의 열쇠를 사용하셔서
그분의 회복의 확산을 위한
문을 여시는 것은
우리에게 객관적인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다윗의 열쇠를 사용하셔서
우리의 내적 존재 안에 있는
그 문을
주관적으로 여심으로써,
우리가
변형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또 주님의 새 이름을
가진 한 기둥으로서
하나님의 집 안으로
건축되게 하신다.
‘나의 하나님의 이름’은
기둥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나의 하나님의 도시의 이름’은
기둥이
새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가리키며,
‘나의 새 이름’은
기둥이
한 새로운 의미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리킨다.
한 기둥인
그 이기는 이는
신격에서가 아니라
생명에서
또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고,
새 예루살렘의 구성 요소가 되며,
한 새로운 체험적인 의미로
그리스도가 된다.
새 예루살렘은
새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확대와 확장인
우리는
새 예루살렘으로서
한 새로운 의미로
그리스도이다.
새 그리스도는
사복음서의 그리스도와 같지 않다.
신랑의 증가인 신부는
새 예루살렘으로서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신
모든 이들을 포함한다.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건축되고,
새 예루살렘의 구성 요소가 되며,
새 그리스도의 일부가 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그 법은
불가능을 처리하는
한 요소를 함유한다(포함한다).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매우 높게 평가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교회가
‘적은 능력’을 가졌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의 강함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적은 능력을
사용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강해지려고 애쓰지 말라.
단순히 여러분이
주님께 받은 것을 쓰라.
주님의 은혜를
강탈하지 말라.
심지어 우리 중 가장 작은 이까지도
주님에게서
일정량의 은혜를 받았다.
여러분은
그 은혜를 써야만 하고,
그것을 사용하여
여러분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한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감상하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이다.
“잘하였다.
너는
적은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너는
네가 가진 능력으로
나의 말을 지켰다.”
주님께서는
거인들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상당한 분량의 은혜를 가진
그 작은 이들을 기뻐하신다.
비록 그 은혜의 역량에(용량에)
제한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그 은혜를 사용하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그것을 쓰는 한,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실패할 때,
그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로 변한다.
라오디게아는
비뚤어진 빌라델비아이다.
형제 사랑을 잃을 때,
빌라델비아는 즉시
다수의 의견들로
변해 버린다.
이것이 바로
‘라오디게아’의 의미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타락할 때,
‘형제들’이
‘다수의 사람들’으로 변하고
‘형제 사랑’이
‘다수의 의견들’로 변한다.
곧 사랑이
의견으로 퇴보한다.
형제 사랑은
살아 있는 어떤 것이지만,
군중의 의견은
죽어 있는 어떤 것이다.
형제 사랑을
잃을 때,
몸의 관계도
잃는다.
사람들의 의견만 남을 뿐 아니라
생명의 교통도 잘라져 버린다.
주님의 의견은
잃어버린 바 되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그 다수의 투표,
무기명 투표,
또 거수 투표뿐이다.
일단 빌라델비아가 타락하면
그것은
라오디게아가 된다.
여러분이
빌라델비아의 길 안에서
계속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들을
겸허하게 하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와 함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말할 때
우리는 주의해야만 한다.
조심하지 않으면 곧,
우리는
“우리는
재산이 많고
또 부유하게 되었으며
부족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라오디게아의 맛을
가진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우리가 받지 않은 것이 없음을
부디 명심하기 바란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죽음이 가득할 수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생명이 충만하다는
사실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가난할 수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부유하다는
사실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주님 앞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부를
의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사는 것을
배우게 하시기를
바란다.
우리가 부유하지만
우리가 부유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를
바란다.
참으로 모세의 얼굴이
빛났을지라도,
모세가
그의 얼굴이 빛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더 좋았다!
일단 한 사람이
그 자신을 알게 되면,
그는
라오디게아가 되고,
또 그 결과는
미지근함이다.
라오디게아는
각각의 모든 것들을 알지만,
실제로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뜨겁지 않은(불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명목상으로는(이름 안에서는)
그것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어떤 것을 위해서도
그 생명을
희생할 수 없다.
그것은(라오디게아는)
그것의 이전의 영광은
기억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그것의 현재 상태는
잊어버린다.
전에, 그것은 빌라델비아였고;
오늘, 그것은 라오디게아이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이들은 반드시
살아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그들의 실패와 약함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데서
기인한다.
베드로는
불로 단련한 금이 바로
시련을 거친 믿음이라고
말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들은 말씀과
섞이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여러분이 들은 말씀이
실지로 유용해지려면
여러분은
모든 종류의 시련들을(고난들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불에 제련한(그 불 안에서 시험된)
금을 사야만 한다.
여러분은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믿음을 가지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은
참으로 부유하게 될 것이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기는 이들은
일보다 생명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며,
양보다 질에
더 관심을 둔다.
그들은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그들이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그분을 위하여
그들이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했는가에
달려 있다는
인식이 있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기는 이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의
다른 모든 이름을 버렸고,
누구든지 부를 때
풍성한 분이 되어 주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며’,
그들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것과
그들 자신이
예수님을 위하여
믿는 이들의 노예가 된 것을
전파한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기는 이들의 특징은
형제 사랑이다.
사랑이
그들 가운데
편만하기 때문에,
그들은
기운을 북돋아 주는
하나님의 임재로
사람들을
소중히 보살피고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건강한 가르침으로
그들을 보양함으로써
하나님을 따라
사람들을 목양한다.
빌라델비아에서의 주님의 회복은
질에 있어서의 회복,
곧 교회의 원래 실질이자
하나님의 내적 실질인
사랑의 회복이다.
하나라는 참된 터,
곧 교회의 터 위에 서는 것은
모든 형제를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은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의 회복이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기는 이들은
하나라는 참된 터 위에 서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계속 거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모든 형제를 사랑한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기는 이들은
주님의 유일한 신약 사역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주님의 유일한 신약 사역은
그들을 이끌어
그들의 생명과 모든 것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귀한 인격을
참되게 감상하고 사랑하며 누리도록 한다.
우리가
교회 건축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고
승리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부흥된 생활을 하고
목양에 수고해야 한다.
이러한 생활과 수고는
주님과 형제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서
흘러나온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왜냐하면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압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요일 4:7-8.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가지신 사랑을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 요일 4:16.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그분의 사랑을
우리 안에 주입하셨고,
또 우리 안에
사랑을 산출하셨다.
우리는
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한다.
여러분에게 할당된
하나님의 양 떼 위에
군림하지 말라.
교회들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장로들에게 할당된 토지,
위탁된 자산이다.
하나님께서
장로들에게
이러한 교회들을 돌보도록
맡기셨다.
기꺼이 성도들의 노예가 되라.
장로들은
서로 목양하고
서로 사랑하여
몸의 생활의
본이 되어야 한다.
장로들은
성도들 안에
그리스도를 분배하기 위해
모든 일과 모든 측면에서
성도들을 돌보아야 한다.
장로들은
성도들을 접촉하고 방문하며
가정에서의 식사에 초대해야 한다.
“장로들은
서로 사랑해야 하고,
그들의 아내들도
서로 사랑해야 하며,
그들은
서로의 자녀들을 사랑해야 한다.”
빌라델비아의 길을
계속 가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라오디게아,
곧 타락하고 비뚤어진 빌라델비아의 길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라오디게아는 여전히
자신의 역사를 기억하지만
이전의 생명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현재의 임재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라오디게아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실지로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뜨겁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라오디게아는
명목상으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 무엇을 위해서도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수 없다.
라오디게아는
이전의 자신의 영광은 기억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현재 상태는
잊어버린다.
이전에
그것은 빌라델비아였지만,
지금은
미지근함과 영적인 교만이 가득한
라오디게아이다.
우리가
빌라델비아의 길을
계속 가고자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대가를 지불하여
금과 흰옷과 안약이신
삼일 하나님을
더욱 얻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인도하시는 이기는 분이신
주님과 하나일 수 있고,
그 천년왕국 안에서
그분의 왕좌 위에
그분과 함께
앉을 수 있다.
1일
베드로후서 1장 12절에 언급된 ‘현재의 진리’를 ‘최신의 진리’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모든 진리들이 성경에 있다. 모든 진리들이 성경에 기록되었지만, 사람의 어리석음과 불성실함과 부주의함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진리들이 상실되었고 사람에게 감추어졌다. 진리는 여전히 거기에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한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때가 찼을 때 어떤 진리들을 열어 주심으로써 다시 그것들을 드러내신다.
이렇게 새롭게 계시된 진리들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발명하신 것이 아니다. 그보다 그 진리들은 사람이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지나간 세대에 하나님은 여러 진리들을 계시하셨다. 그분은 어느 특별한 시대에 사람들이 특별한 진리를 발견하게 하셨다. 우리는 이런 진리들을 교회사에서 매우 분명히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6세기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하나님에 의해 일으켜졌을 때, 하나님은 그의 눈을 여시어 그에게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다. 루터 전에도 이 사실이 있었지만, 루터는 이 진리를 더 강하게 깨달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는 특별히 이 진리에 대해서 탁월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진리가 그 시대에서는 ‘현재의 진리’였다.
주님의 모든 일꾼은 현재의 진리가 무엇인지에 관해 하나님 앞에 여쭈어야 한다. 물론 성경에는 중요하고 중대한 진리들이 많지만,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현재의 진리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가 축적되는 것임을 안다. 새로운 진리는 과거의 진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과거의 모든 진리들은 오늘날의 기초이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님의 축적된 계시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여시어 우리가 이 사실을 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의 조류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조류는 하나님께서 이전 시대들에서 행하신, 과거의 모든 일들의 연속이다.
1926년부터 우리는 구원과 교회와 십자가에 관한 메시지를 많이 해방했고, 또 이것들에 관하여 많이 증언했다. 1927년에 우리는 십자가의 주관적인 일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했다. 우리는 십자가에,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진리가 있을 뿐 아니라 부활의 사실도 있음을 보았다. 과거에 우리가 전한 부활은 주로 믿음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고 우리의 체험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부활은 부활이 생명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교리가 아니라 영적인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원칙이다. 이후에 하나님은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이고 그 실재가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이것은 바울이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갈 1:12)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에게서 도움을 얻었지만 우리의 계시는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님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마르틴 루터, 친첸도르프(Zinzendorf), 모라비아 형제회, 케직(Keswick) 사경회 메시지들에서 도움을 받았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최종 목표가 그리스도를 모든 것이 되시게 하는 것임을 믿는다. 나는 오늘날 하나님께 오직 한 가지 일만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골로새서 1장 18절의 메시지이다. 이 절은 하나님께서 보기를 갈망하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다. 그리스도 외에는 영적 실재가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현재의 진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만질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낮추고 엎드리며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일이 단지 몇몇 사람을 구원하거나 다른 이들이 영적이게 되도록 돕는 것만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현재의 진리’를 알게 하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가 ‘현재의 진리’에 뒤처진 사람들이 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