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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예수님의 영

The Spirit of Jesus
예수님의 그 영

 

우리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예수님의 영,
곧 성령으로
체험하고
누릴 수 있다
— 행 16:6-7.

우리는
사도행전 16장
6절과 7절에 나오는
‘성령’과 ‘예수님의 영’이라는
두 가지 신성한 칭호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두 칭호가
서로 바뀌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께서
성령이시라는 것을
계시한다.

‘성령’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영에 대한
일반적인 칭호이다.

‘성령’이라는 칭호는
주 예수님께서
잉태되셨을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 눅 1:15, 35.

‘성령’이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은 바로
신약 시대를 열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한
길을 예비하고
그분을 위해
사람의 몸을
예비하는
시기가
도래했을 때였다
— 눅 1:35, 마 1:18, 20.

‘성령’이라는 칭호가
처음 사용되었을 때의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칭호가
주님의 육체 되심과
관련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첫 번째 언급의
원칙에 따르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과 출생과
관계있다.

신약에서
‘성령’이라는 칭호는
하나님께서 지금
그분 자신을
사람과 연합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 눅 1:35.

‘예수님의 영’은
하나님의 영에 대한
특별한 표현이며,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으로서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거치신,
육체가 되신
구주의 영을
말한다
— 눅 1:31, 35, 마 1:21, 행 16:7.

예수님의 영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한 요소뿐 아니라,
예수님의 인성의 요소,
그리고 인간 생활과
죽음의
고난의 요소들도
있다.

예수님의 영은
그분 자신 안에
신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신성한 생명을
살게 하실 뿐 아니라,
그분 자신 안에
인성을 가지고 계신
사람 예수님의 영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합당한 인간 생활을
하며
인생의 고난들을
견디게 하신다.

고난 가운데 있던
바울에게는
예수님의 영이
필요했는데,
이는 예수님의 영 안에는
고난의 요소와
박해에 저항하며
고난을 견디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 골 1:24, 행 9:15-16, 16:7.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도
반대와 박해에
직면하기 위해
예수님의 영이
필요하다.

사도행전 16장 7절에서
누가는
성령에서
예수님의 영으로
전환한다.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은
먼저
인간 생활을 사셨고,
그런 다음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셨다
— 행 2:23-24, 32-33.

예수님은
하늘들로 승천하셔서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셨다
— 행 2:36.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은
주님의
인성과 인간 생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함축한다
— 행 16:7.

예수님의 영은
성령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 행 16:6-7.

성령은 오직
주 예수님의
육체 되심과 출생만을
포함한다
— 눅 1:35, 마 1:18, 20.

예수님의 영은
예수님의
인성과 인간 생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포함한다
— 행 1:1-3, 8, 2:23, 32, 36.

예수님의 영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예수님의
총체와 완전한 실재화이시다
— 행 16:7.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의 실재이시듯이,
예수님의 영은
예수님의 실재이시다
— 롬 8:9, 행 16:7.

우리에게
예수님의 영이 없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재가 되지 못하실 것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실재이자 실재화이신
예수님의 영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재가 되신다
— 행 16:7.

예수님께서
부활 안에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으므로
아직 계시지 않았던
그 영은
예수님의 인성을
가지신 영이시다.
오늘날 그 영은
예수님의
영광스럽게 된 인성으로
조성되셨다
— 눅 24:26, 요 7:37-39, 행 16:7.

우리가 마시는
생수이시고
우리 안에서부터
흘러나오시는
이 영은
예수님의 인성으로
조성되어 계신다.
예수님의 인성이 없다면 결코
그러한 영이 계실 수 없다.

인간 본질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은
흐르는 생명수가
되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
흐르는 생명의
강이 되시려면 반드시
예수님의 인간 본성으로
조성되셔야 한다.

“이제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님의 영이
있다.
… 우리는
축복의 강들로
우리 안으로 흐르시고,
우리를 통해 흐르시며,
우리로부터 흘러 나가시는
그분을 영접했다.”
(앤드루 머리)

우리는
복음 전파와
교회 봉사와
우리의 매일의 행함과
주님의 회복을 위해
예수님의 인성의 영을
체험하고 누려야 한다
— 갈 5:22-23, 빌 2:15, 4:8.

복음 확산을 위한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움직임은
그들의
결정과 선호에 따른 것이거나
사람들의 회의에서 결정한
어떤 일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에 의한 것이었다
— 행 16:6-7.

그들의 일은
주님의
육체 되심과 출생과 연관되신
성령에 의한 것이었고
(행 16:6),
주님의
인성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과 승천과 연관되신
예수님의 영에 의한 것이었다
(7절).
사도들은 이렇게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의 지시와 인도 아래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어떤 종류의 일을
할 것인지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영에 의해
인도받고 지시받고
가르침받고 조성되는지에
달려 있다.

삼일 하나님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
바울은
주님의
육체 되심과 출생과 연관되신
성령과,
그리고 주님의
인성과 인간 생활과
모든 것을 포함한
죽음과
생명을 나누어 주는
부활과 승천과 연관되신
예수님의 영으로
완전히 조성되었다
— 행 16:6-7.

바울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이 영으로
조성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었다
— 행 13:26-39, 17:18, 28:31.

그 영께서
우리의 조성이 되신다면,
이때
우리의 일은
이 영의 표현이 될 것이고,
우리는
육체 되신 분으로서
인성과 인간 생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포함하신
예수님을 위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영으로
조성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분이신
예수님을 공급하는
일을 하며,
이렇게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분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해 줄 것이다
— 행 9:20, 22, 17:18, 28:23, 31.

예수님의 영은
빌립보서의 처음 두 장에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빌립보서 1장에서
우리는
복음 전파를 본다
(12-18절).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영이
필요하다.

이 장은
시기나 다툼 없이
복음을 위해
교통하는 것과
관계있다
— 빌 1:5, 15, 17.

복음서들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예수님의 생활은
시기나 다툼이나 경쟁이
없는 생활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영께는
시기나 다툼이나 경쟁이
없다.

우리는
시기나 다툼이나 경쟁 없이
예수님의 영 안에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복음을 위한 교통은
우리에게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빌 1:27).

우리가
예수님의 영 안에
있지 않다면,
복음을 위한 교통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영 안에서만
우리가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기나 다툼이나 경쟁 없이
예수님의 영에 의해
복음을 위한 교통 안에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영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본으로
취할 수 있다
— 빌 2:1-9.

예수님의 영에 의해
우리는
예수님처럼
겸손할 수 있다
— 빌 2:5-7.

예수님의 영에 의해
우리는
사도 바울의 요구를
충족하고
다른 성도들을
돌볼 수 있다
— 빌 2:3.

예수님의 영에 의해
우리는
한 가지 것을 생각하고
같은 사랑을 가질 수 있다
— 빌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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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예수님의 영”

6일

빌 1:5
왜냐하면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의 확산을 위하여
교통해 왔기 때문입니다.

빌 1:27
오직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나 보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복음의 믿음과 더불어
한 혼으로
함께 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듣도록 해 주십시오.

빌립보서의 처음 두 장은
예수님의 영과
관련되어 있고,
마지막 두 장은
그리스도의 영과
관련되어 있다.
1장과 2장은
부활과 관련되어 있지 않고,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3장과 4장은
부활과 관련되어 있다.
… 빌립보서의 첫 장에서는
복음 전파가 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영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영은
처음 두 장에
분명하게 묘사된다.
예수님의 영은
다투지 않으시며,
그분께는
어떤 경쟁심이나 적의도 없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분께는
어떤 시기나 다툼이나 경쟁도
없으셨다.
이 세 가지 부정적인 것들이
빌립보서 1장에서
언급된다.
이 장에는 또한
몇 가지 긍정적인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교통’과
‘한 영과
한 혼 안에 있는 것’과 같은
문제들이다.
어떻게 우리는
한 영과 한 혼을
가질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의 영에 의해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은
시기하는 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인도하는 것을 볼 때
시기하게 된다.
그리고 경쟁하는 영으로
다투기 시작한다.
비록 우리의 영은
이와 같지만,
예수님의 영은
그렇지 않으시다.
복음서들에 나타난
예수님의 생활을
주목해 보라.
그분의 생활은
시기나 다툼이나 경쟁이
없는 생활이었다.
한 영과
한 혼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영 안에서만
가능하다.

한 혼이 된다는 것은 주로
한 생각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혼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 각자가
첫째가 되기를 갈망하고,
어느 누구도 기꺼이
마지막이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영에 의해
한 혼이 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나는
예수님의 영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즉시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될 것이고,
다른 이들과
한 영과 한 혼이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복음을 위해
함께 분투할 수 있을 것이다.
빌립보서 1장 27절의
‘함께’라는 말은
우리가
조율되고,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단체적임을
뜻한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영 안에 있고
한 혼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함께 분투할 것이다.

빌립보서의 첫 장이
다소 길기는 하지만,
그것은
매우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이 장은
시기나 다툼이나 경쟁이 없는
예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위해
교통하는 것을 다룬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한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를 청산하고
자신을 헌신하며
내적인 기름 바름을 주의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몸에서 머리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머리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시기와 다툼과 경쟁이 없는
예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위해
교통하는 것이
필요하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삶에
시기나 다툼이나 경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반대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그 대신 우리는
예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단순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
아주 미미한 경쟁이라도
있을 경우,
우리는
예수님의 영 안에
있을 수 없게 된다.
더욱이 우리가
예수님의 영 안에 있지 않으면,
복음을 위한 교통 안에
있지 않게 되므로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대해서도
끝나게 된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기나 다툼이나 경쟁이 없는
예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위해
교통하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지금까지
빌립보서 2장에 계시된 본을
모방하라고
다른 이들을 격려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결코
어린양과 같이
될 수 없다.
어린양과 같이
되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생명을
가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 예수님을 모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분의 겸손의 표준은
우리에게
너무나 높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
예수님의 영에 의해
우리는
그분처럼
겸손할 수 있다.
예수님의 영에 의해
우리는
사도 바울의 요구를
충족하고
다른 성도들을
돌볼 수 있다.
예수님의 영에 의해
우리는
자신의 모든 의견들을
내려놓고
영과 혼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영에 의해
한 가지 것을 생각하고
같은 사랑을 가질 수 있다.

 

5일

행 28:23
… 더욱 많은 사람이
그의 숙소로
찾아왔다.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해하여
하나님의 왕국에 관하여
엄숙히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서와
신언자들의 글을 들어
예수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였다.

행 28:31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을
가르쳤다.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우리의 인성으로 취함으로써
그분과 하나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인성을
취할 수 없다면,
그것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이 말은
우리가
인간다운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이
필요하고,
이 인성은
예수님의 영 안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인성에 의해서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내로서 여러분은
그분의 인성에 의해
아내가 되어야 한다.
남편으로서 여러분은
그분의 인성에 의해
남편이 되어야 한다.
학생으로서 여러분은
예수님의 인성에 의해
학생이 되어야 한다.
… 우리가
이러한 사람이라면,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생명의 흐름이
있을 것이다.
교사들인 모든 형제자매들이
이러한 사람들이 된다면,
학교 안에
참된 생명의 흐름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다른 교사들과 학생들은
여러분 안에
만족시키고, 살아 있고, 흐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느낄 것이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인성을 누림으로
그분을 마시는 형제라면,
여러분에게
능력이 없어 보일지라도
여러분 안에 있는
생명의 흐름은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확신을 주고,
매혹하고,
결국 회심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교회생활에서
복음이 확산되는 길이다.
이러한 복음 전파는
능력에 달려 있다기보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누리는 생활에
달려 있다.

예수님의 인성은
은사 있는 사람들을
산출하는 것과
많은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속생명의 흐름을
산출한다.
그러한 생명의 흐름을
가지려면,
항상 예수님의 영을
마심으로써
예수님의 인성을
누리는 길밖에 없다.
우리의 관념은
참으로 바뀌어야 한다.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이러한 관념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 영을
마실 때마다
우리는
이러한 관념으로
마셔야 한다.
우리는
능력이나 힘이나 기적을
얻기 위하여
그 영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성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의 영을
마시고 있다.

복음 확산을 위한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움직임은
그들의
결정과 선호에 따른 것이거나
사람들의 회의에서 결정한
어떤 일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결에 따른 것이자
예수님의 영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은
빌립의 복음 전파에서도
볼 수 있다
(행 8:29, 39).

우리가
주님을 위해
어떤 종류의 일을
할 것인지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영에 의해
인도받고 지시받고
가르침받고 조성되는지에
달려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나 여호와의 영으로
조성되지 않았고,
성령과 예수님의 영으로
조성되었다.
삼일 하나님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
바울은
주님의
육체 되심과 출생과
연관되신
성령과,
그리고 주님의
인성과 인간 생활과
모든 것을 포함한 죽음과
생명을 나누어 주는 부활과 승천과
연관되신
예수님의 영으로
완전히 조성되었다.
바울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이 영으로
조성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외지로 나가서
복음을 전파할 때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어떤 종류의 일을
할 것인지는
어떤 종류의 영에 의해
인도받고
어떤 종류의 영으로
조성되는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에
인상을 받아야 한다.
사실상 이 영이
우리의 조성이
되셔야 한다.
이럴 때
우리의 일은
이 영의
표현이 될 것이고,
우리는
육체 되신 분으로서
인성과 인간 생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포함하신
예수님을 위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영으로
조성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분이신
예수님을 공급하는
일을 하며,
이렇게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분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해 줄 것이다.

 

4일

눅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시고,

요 7:39
이것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받을
그 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

요한복음 7장
37절부터 39절까지는
예수님의 인성과
아주 많은 관계가 있다.
우리는 모두
이 절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절들을
암송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 절들에서 주로
생수의 항목에
주의를 기울인다.
또한 생수는 바로
그 영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단락에서
그 영이
예수님의 인성과
많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아마 결코 보지 못했을 수 있다.
우리 안에서부터
흘러나오시는
생수이신 이 영은
예수님의 인성으로
조성되어 계신다.
예수님의 인성이 없다면
결코 이러한 영이
계실 수 없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39절에 의해
분명해진다.
이것은
그 영께서
예수님의
영광스럽게 된 인성으로
조성되셨음을
입증한다.
우리는
성경의 이 말씀이
부활한 인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에 언급된
그 영은
하나님의 영과
다르다.
하나님의 영은
이미 존재하셨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영은
아직 계시지 않았다.
따라서 이 영은
하나님의 영과는 다른
새로운 것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신성한 본질로만
조성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그 영은
더 많은 것으로
조성되셨다.
그분께는
신성한 본질은 물론이거니와
사람의 본질도 있었다.
이전에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본질로만
조성되어 계셨지만,
이제
예수님의 영은
하나님의 본질뿐 아니라
사람의 본질로도
조성되어 계신다.
이전에
그 영은
한 가지 요소
즉 신성한 요소만
지니셨지만,
이제
예수님의 영은
두 요소
곧 신성한 요소와 사람의 요소를
포함하신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시기 이전에,
즉 그분께서
부활하시기 이전에
예수님의 영은
아직 계시지 않았다.
신성한 본질을 지니신
그 영은
그곳에 계셨지만,
신성한 본질과 사람의 본질
둘 다를
지니신
그 영은
아직 계시지 않았다.

인간 본질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은
흐르는 생명수가
되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
흐르는 생명의
강이 되시려면
반드시 예수님의 인간 본성으로
조성되셔야 한다.
예를 들어,
물이 없다면
차(茶)를 대접할 수 없다.
차를 대접하기 위해서는
차를
물에 넣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영은
능력이 있으셨지만,
사람 안에서 흐르는
생명은 되실 수 없었다.
그분께서
사람 안에서
흐르시려면,
예수님의 인성이
그분 안에
더해지는 것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영께서
천사들 안에서 흐르는
생명이 되시고자 한다면,
아마 예수님의 인성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
사람에게 흐르는
생명이 되시려고 한다면,
사람의 요소가
요구된다.
그분은
예수님의 인간 본성이
필요하시다.

어느 날 나는
앤드루 머리의 저서인
〈그리스도의 영〉 5장을
다시 읽었다.
그 글에서 나는
가장 큰 확신을
얻었다.
… 앤드루 머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 “이제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님의 영이 있다.
그분은
그분 자신을
부어 주셨고,
우리는
축복의 강들로
우리 안으로 흐르시고,
우리를 통해 흐르시며,
우리로부터 흘러 나가시는
그분을 영접했다.”

우리가
생명과
생명의 성장과
생명의 흐름을
가지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이다.
다른 이들을
만족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흐르는 생명이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의 영을 마신다면,
우리의 모든 어떠함은
생명의 흐름이 되어
우리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킬 것이다.
그러한 생명의 흐름은
기적적으로
다른 언어로 말하거나
은사들이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다.
또 그것은
능력이나 지식이나 가르침의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항상 예수님을 마시는 생활이다.
이러한 생활은
기적적이고 신성하며 하늘에 속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3일

눅 1:31
보십시오,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 부르십시오.

마 1:21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예수라 부르십시오.
왜냐하면 바로 그분께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은
주님의
육체 되심과 인성과 인간 생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수행된다.
성령과 예수님의 영은
이 항목들을 포함한다.
이것은 지금
성령과 예수님의 영이라고 불리시는
그 영께서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과
인성과 인간 생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총체이자 최종 완결이심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성령과 예수님의 영이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과 인성과 인간 생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가진다.

부활 후에 그리고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는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가 되셨다.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는
그 영과 동일하시다
(고전 15:45, 고후 3:17).
예수님의 영이시기도 한
성령은
공기 같은 영이신
이 그리스도의
총체이시다.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는
몇 가지 요소들,
곧 육체 되심과 인성과 인간 생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조성되어 계신다.
온 우주에서
그분만이
이 여섯 가지 공적을
가지고 계신다.
오직 그분만이
육체 되심과 인성과 인간 생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자격을 갖추게 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영은
자격을 갖추신
이 예수님의
실재화이시다.
예수님의 영은 이렇게
모든 것을 포함하신 분의
총체이시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이러한 영,
곧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총체이신
그 영의
지시 아래서
움직였다.

성령과 예수님의 영에 관해
내가 전하고 있는 것은
… 반세기 이상
거룩한 말씀과
다른 이들의 저술들을
연구한 것에 더하여,
성도들의 체험을
관찰한 것과
나 자신의 체험을
더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신성한 영의
이 두 가지 칭호에 관한
나의 교통은
여러 해에 걸친
연구와 관찰과 체험을
기초로 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성령과 예수님의 영이라는
두 가지 칭호의
의미를 보았다면,
이런 문제들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가련한 상황에 대해
슬퍼하며 애통할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
자격을 갖추신 유일하신 분,
곧 육체 되심과 인성과 인간 생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자격을 갖추신 분이신
그리스도의
총체와 실재화라는 것을
누가 알고 있는가?
확실히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긍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해야 할
부담을 가지고 있다.
그 영에 관한
진리의 깊은 것들은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반대로 그것은
말씀의 깊은 부분에 있다.
만일 말씀의 이런 깊은 것들을
알고자 한다면,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듯이’
말씀의 표면에 있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말씀의 표면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확실히 우리는
사도행전 16장
6절과 7절에 있는
두 가지 신성한 칭호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울과 실라가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이
금지된 것은
하나님의 영이나 여호와의 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주의 잉태를 수행하셨던
성령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이
비두니아로
가려고 애쓸 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분은
하나님의 영이나 여호와의 영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영이었다.
예수님의 영은
인성을 가지시고,
이 땅에서
삼십삼 년 반의
인간 생활을 사시고,
모든 것을 포함한
죽음을 죽으시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모든 믿는 이들 안으로
신성한 생명을 나누어 주어
이 생명을 번식시키시며,
하늘들로 승천하시어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신 분의
영이시다.
사도들이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그 영은
이러한 예수님의 영이셨다.
이 영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예수님의
총체와 완전한 실재화이시다.
이 절들은
사도들이 이렇게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의
지시와 인도 아래서
움직이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로
만족하지 않고
여기에 있는
계시를
보기 바란다.

 

2일

행 16:7
무시아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였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골 1:24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받는
나의 고난을
기뻐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웁니다.

예수님의 영은
그분 자신 안에
신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신성한 생명을
살게 하실 뿐 아니라,
그분 자신 안에
인성을 가지고 계신
사람 예수님의 영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합당한 인간 생활을
하며
인생의 고난들을
견디게 하신다.

우리는
사도행전 16장
6절과 7절에 나오는
‘성령’과 ‘예수님의 영’이라는
두 가지 신성한 칭호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두 칭호를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께서
성령이시라는 것을
계시한다.
‘성령’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영에 대한
일반적인 칭호이며,
‘예수님의 영’은
하나님의 영에 대한
특별한 표현이다.
예수님의 영은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으로서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거치신,
육체가 되신
구주의 영을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영 안에
하나님의 신성한 요소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람의 요소
그리고 그분의 사람의 생활과
또 그분의 죽음의 고통을 겪음의
요소들도 또한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한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한 영께서
그 사도의
전파하는(preaching; 전달하는) 사역을 위해
필요했는데,
이는 곧 그 사람의 생활(life; 생명)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among; 중에),
또 사람들을 위해
수행된
고통을 겪음의 한 사역이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누가는
성령에 대해
말한 다음
예수님의 영에 대해
말했다.
하나님의 영에 대한
이 두 칭호는
구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성령’이라는 칭호는
주 예수님이 잉태되실 때에
처음 사용되었다.
‘성령’이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은
바로 신약 시대를 열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한
길을 예비하고
그분을 위해
사람의 몸을 예비하는
시기가 도래했을 때였다
(눅 1:15, 35, 마 1:18, 20).
‘성령’이라는 칭호가
처음 사용되었을 때의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칭호가
주님의 육체 되심과
관련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따라서 첫 번째 언급의
원칙에 따르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과 출생과
관계있다.
이 칭호는
하나님께서
육체 되심 안에서
사람 안에 오셔서
사람과 하나 되시는 것을
가리킨다.
신약에서
‘성령’이라는 칭호는
하나님께서
지금
그분 자신을
사람과 연합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6장 7절에서
누가는
성령에서
예수님의 영으로
전환한다.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은
먼저
인간 생활을 사셨고,
그런 다음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셨으며,
그런 후에
하늘들로
승천하셔서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은
주님의
인성과 인간 생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함축한다.

예수님의 영은
성령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성령은 오직
주 예수님의
육체 되심과 출생만을
포함하지만,
예수님의 영은
그분의
인성과 인간 생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포함하고 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우리는
복음 전파의
일을 하는
사도들의 움직임이,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본다.
그보다 그 움직임은
주님의
육체 되심과 출생과
관련이 있는
성령에 의한 것이었고,
또한 주님의
인성과 인간 생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관련이 있는
예수님의 영에 의한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신성한 칭호는
복음 전파의
일을 수행하는
바울의 움직임이
옛 시대의 방식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지적해 준다.
만일 그것이
옛 시대의 방식에 따른
움직임이었다면,
하나님의 영이나 여호와의 영이
언급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 16장에서는
하나님의 영이나 여호와의 영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보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성령께서 막으셨고,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였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누가가
성령과 예수님의 영을
언급한 사실은
사도들의
복음 전파의 일이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 있는
새로운 움직임이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신언노트, 2018 12 09

우리는
 부활하셨고 또 승천하신
 그 그리스도를
 예수님의 그 영,
 곧 그 성령으로
 (as … the Holy Spirit; 그 거룩하신 영으로서)
 체험하고
 또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6장
 6절과 7절 안에 있는
 두 신성한 칭호들
 —‘그 성령’과 ‘예수님의 그 영’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칭호들의
 서로 바꿀 수 있는 사용은
 예수님의 그 영께서
 그 성령이시라는 것을
 계시합니다.

‘그 성령’은
 그 신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 영의
 한 일반적인 칭호입니다:

‘그 성령’이라는 칭호는
 주 예수님의
 잉태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성령’이라는 칭호가
 사용 안으로 온 것은
 (came into use;
 사용된 것은,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도께서(for Him; 그분께서)
 그 신약 시대를(dispensation)
 개시하기 위하여
 그분의(Christ’s;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한
 그 길을
 준비하고
 사람의 한 몸을
 준비하는
 그 시간이
 왔을 때였습니다.

‘그 성령’이라는 칭호의
 첫 번째 사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칭호가
 주님의 육체 되심과
 관련 있다는 것을
 (… is involved with; 연루된다는 것을)
 볼(see;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언급의
 원칙에 따라서,
 그 성령은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과 또 출생에
 관련됩니다.

그 신약에서
 ‘그 성령’이라는 칭호는
 하나님께서 지금
 그분 자신을
 사람과
 섞고 계시다는 것을
 (is … mingling; 연합하고 계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그 영’은
 하나님의 그 영에 관한
 한 특별한 표현이고
 육체 되신 그 구주의
 그 영을 언급하는데,
 그분은
 (who; 육체 되신 그 구주는),
 그분의 인성 안에서
 예수님으로서,
 사람의 생활함과
 그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영 안에는
 하나님의 그 신성하신 요소뿐 아니라
 또한 예수님의 그 사람의 요소와
 또 그분의 사람의 생활하심의
 또 그분의 죽음의 고통을 겪으심의
 요소들까지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영은
 우리가
 그 신성한 생명을
 살도록 하시는
 그분 안의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그 영이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가
 한 적절한 사람의 생활을 살고
 또 그것의(its) 고통을 겪음들을
 견디도록 하시는
 그분 안의 인성을 가지신
 그 사람 예수님의 그 영이십니다:

그의 고통을 겪음 안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그 영을
 필요로 했는데
이는 예수님의 그 영 안에
 박해를 이겨 내기 위해
 그 견디는
 (the suffering; 고통을 겪는)
 요소와
 또 그 견디는
 강함이(strength;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그 복음을 전파함 안에서,
 우리도 또한
 그 반대와 또 박해를
 마주보기 위해
 (to face; 직면하기[직시하기] 위한)
 예수님의 그 영을
 필요로 합니다.

사도행전 16장 7절 안에서
 누가는
 그 성령께로부터
 예수님의 그 영으로
 향합니다
 (turns; 화제를 바꿉니다, 전환합니다, 돌아섭니다):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사람의 한 생활을 사셨고
 그러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하늘들로 승천하셨고
 주와 또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was made).

예수님의 그 영께서는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 사람의 생활,
 죽음, 부활, 또 승천을
 함축합니다
 (implies; 내포합니다,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그 영께서는
 그 성령께서
 하시는 것보다
 (than … does; 포함하시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합니다:

그 성령께서는 오직
 주 예수님의
 그 육체 되심과 출생만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그 영께서는
 그분의
 인성, 사람의 생활,
 죽음, 부활, 또 승천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그 영께서는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예수님의
 전체와
 (the totality; 총체와, 총계와)
 또 완전한 실재화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그 영께서
 그리스도의 실재이신 것과 똑같이,
 예수님의 그 영께서는
 예수님의 실재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그 영을
 가지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실재적이시지 않을 것입니다
 (will not be real;
 현실적이시지[실질적이시지, 참되시지,
 생생하시지, 실감 나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실재, 곧 실재화이신
 예수님의 그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실재적이십니다.

그 영께서는,
 예수님께서 아직
 부활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직 계시지 않으셨고,
 예수님의 인성을 가지신
 (with the humanity of Jesus;
 예수님의 인성과 함께 하시는)
 그 영이십니다;
그 영께서는
 오늘날
 예수님의
 영광스럽게 되신 인성으로
 구성되셨습니다
 (has been constituted;
 이루어지셨습니다, 조성되셨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그 살아 있는 물이시고
 또 우리 안에서부터
 밖으로 흐르고 계시는
 이 영께서는,
 예수님의 인성으로
 구성되십니다;
예수님의 인성 없이는,
 결코 그러한 한 영께서
 계실 수 없습니다.

사람의 그 본질(the … essence) 없이는
 하나님의 그 영께서
 그 흐르는 생명의 물이
 되실 수 없으셨습니다
 (could not be; 없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한 흐르는 생명의 강이
 되고자 하신다면,
 그분께서는 반드시
 예수님의
 사람의 그 본성으로(the … nature)
 구성되셔야만 합니다.

“이제
 그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님의 그 영께서 계십니다:
… 우리는
 축복함의 강들로
 (in rivers of blessing;
 축복함의 강들 안에서)
 우리 안으로
 흐르시도록,
 우리를 통하여
 흐르시도록,
 또 우리에게서부터 밖으로
 흐르시도록(to stream; 흐르시는)
 그분을
 받아들였습니다”
(앤드루 머리; Andrew Murray)

우리는
 복음 전파함을 위하여,
 그 교회 봉사를 위하여,
 우리의 매일의 행함을(walk; 걸음을) 위하여,
 또 주님의 회복을 위하여
 예수님의 그 인성의
 (of the humanity; 그 인성인)
 그 영을
 체험하고 누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 복음의 그 확산을 위한
 그 사도 바울과
 또 그의 동역자들의
 움직임은
 (move; 이사는, 이동은)
 그들의
 결정과 또 선호에 따른 것이거나
 또는 사람의 한 회의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일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그 영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일은
 그 성령에 의한 것이었고,
 그분께서는
 주님의
 육체 되심과 또 출생에
 관련되셨으며,
 또 예수님의 그 영에 의한 것이었고,
 그분께서는
 주님의
 인성,
 사람의 생활하심,
 십자가에 못 박히심,
 부활,
 또 승천에
 관련되셨습니다;
그 사도들은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러하신 한 영의
 그 지시와(the direction; 그 명령과)
 또 안내(guidance; 지도, 인도) 아래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가 하는
 일의 종류는
 우리가
 그분에 의하여(by whom)
 안내받고,
 지시받으며,
 가르침받고,
 또 구성되는(constituted; 조성되는)
 영의 종류에
 달려 있습니다:

그 삼일 하나님을
 담고 있는
 한 그릇으로서,
 바울은
그 성령으로
 완전히 구성되었는데
 (was fully constituted;
 충만하게 조성되었는데),
 그분께서는
 주님의
 육체 되심과 또 출생에
 관련되셨고,
그리고
 예수님의 그 영으로
 (완전히 구성되었는데,)
 그분께서는
 주님의
 인성,
 사람의 생활하심,
 모든 것을 포함하는 죽음,
 생명을 나누어 주는 부활,
 또 승천에
 관련되셨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이 영으로
 구성된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thus; 이렇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truly; 정말로, 진심으로, 진실되게,
 진정으로, 충실하게, 정확하게)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 영께서
 우리의 구성이
 (constitution;
 구조가, 체질이, 기질이, 본질이)
 되신다면,
 그때
 우리의 일은
 이 영의 표현이
 될 것이고,
 또 우리는
 인성, 사람의 생활하심, 죽음,
 부활, 또 승천을 가지신
 (with …; 승천과 함께 하시는)
 육체 되신 그 한 분이신
 예수님을 위한
 한 일을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그 영으로
 구성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한 분이신
 예수님을
 공급함의
 (of ministering; 사역함의)
 그 일을 할 것이고,
 또 그러하신 한 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영께서는
 빌립보서의
 처음 두 장들 안에서
 분명하게 묘사됩니다:

빌립보서 1장 안에서
 우리는
 그 복음을 전파함을
 가집니다;
그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그 영을
 필요로 합니다:

이 장은
 시기나 다툼 없이
 그 복음에 이르는
 (unto; …을 향한)
 그 교통과
 (the fellowship; 그 교제와)
 관련 있습니다.

그 복음서들 안에서
 제시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그 생활은
 (the life; 그 생명은)
 시기(envy; 부러워함),
 다툼(strife; 불화, 갈등),
 또는 경쟁이(rivalry; 대항이, 적대가)
 없는 한 생활이었습니다;
이와 같이(thus; 그래서),
 예수님의 그 영께서는
 시기, 다툼, 또는 경쟁을
 가지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시기, 다툼, 또는 경쟁 없이,
 예수님의 그 영 안에서
 그 복음을 전파해야만 합니다.

그 복음에 이르는 교통은
 우리가
 한 혼을 가지고(with; …과 함께)
 한 영 안에 있는 것을
 요구합니다(requires):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그 영 안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복음에 이르는
 그 교통 안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그 영 안에서만
 우리가
 한 영 안에
 또 한 혼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하여
 우리는
 시기, 다툼, 또는 경쟁 없이
 예수님의 그 영에 의하여
 그 복음에 이르는
 그 교통 안에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영에 의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본으로
 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영에 의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과 같이
 겸허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영에 의하여
 우리는
 그 사도 바울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또 다른 성도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영에 의하여
 우리는
 그 하나의 것을
 생각할 수 있고
 또 그 같은 사랑을
 가질 수 있습니다.

 

1일

행 16:6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을
거쳐,

눅 1:35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그대 위에 임하시고,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덮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실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많은 놀라운 요소들이
더해지신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바로 이 영께서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산출하시기 위해
확산되고 계셨다.
…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은
그리스도 자신이신
예수님의 영이
되셨다.
바로 이 놀라우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의 확산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모든 사건을
새롭게
깨닫고 이해하고 조망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산출하기 위하여
놀라우신 영이신
예수님께서
확산되시는 것이다.
… 이 놀라우신 그리스도는
초대 교회 시대에
그분 자신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바울과
디모데와
수천의 믿는 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과
연합하셨다.
사도행전에서
모든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께
연결되었고,
그 영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마지막 아담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하고,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주님께서
그 영이시라고
말한다.
게다가 고린도전서 6장 17절은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 영입니다.”
라고 말한다.
나는
여러분이
이 세 절 모두를
기억해 두기를
바란다.
여기 우리 사람의 영 안에
그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이 두 영은
하나로
연합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성령이나
하나님의 영뿐만 아니라
생명 주시는 영이시다.
생명 주시는 영은
구속을 위한
육체 되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과
승천과
심지어 보좌에 오르심과
머리의 권위와
지배 권위를 포함하여
그분께 더해진
많은 놀라운 요소들과 함께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시다.
이 영께서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시고,
이 두 영은
하나가 된다.
이 하나가
교회와
교회생활과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의
실재이다.
초기에
베드로와 바울과 모든 사도들은
이 하나 안에서
살고 일했다.
달리 말해서,
그들은
이 영 안에서,
곧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와
우리 사람의 영이
하나로 연합되어 이루어진
연합된 영 안에서
살고 일했다.

사도행전 16장
6절과 7절은
예수님의 영, 곧 성령께서
사역을 수행하는
사도들을 인도하시는 것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예수님의 영, 곧 성령으로
체험하고 누릴 수 있음을
가리킨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에 대해
이 절들은
이렇게 말한다.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을 거쳐,
무시아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였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복음 확산을 위해
움직인 것은
그들의 결정과 선호에
따른 것이거나,
사람의 회의를 통해
결정된
어떤 일정에 따라
수행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에 의해
수행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의 실재이시듯이,
예수님의 영은
예수님의 실재이시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영이 없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재가 되지 못하실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님의 실재,
예수님의 실재화이신
예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재가 되신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계속해서
심한 박해를 받은
사람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은
고난을 견딜 수 있는
넘치는 힘을 가진
한 사람의 영이시다.
그분은
고난을 견디는
힘을 가진
영이실 뿐 아니라
한 사람의 영이시다.

복음 전파자로서
바울은
외지로 나가
복음을 전파했고
또한 고난을 받았다.
그러한 고난 가운데 있던
바울에게는
예수님의 영이
필요했는데,
이는
예수님의 영 안에는
박해를 견딜 수 있도록 하는
고난을 견디는 요소와
고난을 견디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도
반대와 박해에
직면하기 위해
예수님의 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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