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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영을 따라 다른 이들을 돌보고 하나님의 용서를 인식함으로써 왕국 생활을 함

Living the Kingdom Life
by Taking Care of Others
according to the Spirit
and by Realizing God’s Forgiveness
그 영을 따라
또 하나님의 용서를 깨달음에[체득함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을 돌봄으로
그 왕국 생활을 삶

마태복음 7장
1절부터 12절까지는
왕국 백성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원칙에 관한 것이며,
왕국 백성에 대한
하늘에 속한 다스림은
왕국 백성에게
영을 따라
다른 이들을 돌볼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계시한다
― 삿 9:8-9.

왕국 백성은
왕국의
하늘에 속한 다스림 아래에서
겸손한 영으로 삶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고
항상 자신을 판단한다
― 마 7:1.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의로 판단한다면
우리도
주님께
의로 판단받을 것이고
(마 7:2),
다른 이들을
긍휼로 판단한다면
우리도
주님께
긍휼로 판단받을 것이다.
긍휼은
판단 곧 심판을 이긴다
― 약 2:13.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는
자신을 거절하고
그들을 고려하며,
그들을 동정하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생각나게 해야 한다
― 마 7:3.

들보가
우리 눈에 남아 있다면,
우리는
시각이 흐려져서
분명하게 볼 수 없다
― 마 7:4-5.

우리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져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거룩한 것과 진주를
발로 짓밟고
돌아서서
우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 마 7:6.

마태복음 7장 6절에서
‘거룩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객관적인 진리를 가리키고,
‘여러분의 진주’는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개는
발굽이 없고
되새김질도 하지 않는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있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둘 다
부정하다
― 레 11:27, 7, 행 10:1-15, 28.

베드로후서 2장
12절과 19절부터 22절까지와
빌립보서 3장 2절의
계시에 따르면,
여기의 ‘개’와 ‘돼지’는
종교적이지만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소중한 체험을
말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을
받아들일 역량이 있는지의
여부를 감지하고 판단해야 한다.

사람들을 접촉하고 대할 때,
우리는
그들을 접촉하는
합당한 길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 마 7:7-8, 딤전 5:1-2.

구하는 것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이고,
찾는 것은
특별한 방법으로 간구하는 것이며,
두드리는 것은
가장 친밀하고도 진지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왕국 백성이
다른 사람들을 접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왕국과 그 영에 따라서
접촉하는 것이다
― 마 7:9-12, 눅 11:13.

하나님의 영 안에 체현된
풍성을 받아들여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돌봄 아래 있는
모든 이들을
먹이기 위해,
우리는
기도함으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 눅 11:1-13.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다른 이들 안으로
그리스도를 공급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것을
십자가를 통해,
그리고 그 영으로 말미암아
하기를
배워야 한다
― 대하 1:10.

왕국 생활과
하나님-사람의 생활과
교회생활을
하기 위해
우리는
겸손해야 하며,
어떤 믿는 이도
멸시하지 않고
우리의 형제를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
― 마 18:1-35, 5:48, 7:13-14, 롬 14:17.

왕국 생활을 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낮추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 마 18:2-4.

왕국 생활을 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거나
실족하게 하는 어떤 것도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 마 18:5-9, 11:6.

왕국 생활을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작은 믿는 이라도
멸시해서는 안 된다
― 마 18:10-14.

왕국 생활을 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형제를
한없이 용서해야 한다
― 마 18:21-35.

우리는
죄를 지은 형제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마 18:21-22.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께 진
빚을 다 갚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 마 18:23-26.

우리와 주님과의
교통을 회복하기 위해,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패배함으로 진
빚을 면제하여 주셨다
― 마 18:27.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 빚은
우리가
주님께 진 빚에 비하면
너무나 적다
― 마 18:28.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다른 형제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고,
그들은
이 문제를
주님께 가져갈 것이다
― 마 18:28-31.

만일 우리가
오늘
마음속에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오는 시대에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 마 18:32-35, 막 11:25-26.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 안에
다섯 종류의 용서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보고 인식해야 한다.

영원한 용서.
이것은
생명과 관계있다.

우리가
구원과 함께 얻은 용서는
영원한 용서이다.

일단 우리가
용서받으면
영원히 용서받은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영원히 받은 것이며,
의롭다 함을
영원히 받은 것이다
― 눅 24:47, 롬 4:7-8, 시 103:12.

우리는
주 예수님 안으로
믿어 들어가는 그 순간,
우리의 모든 죄들을
용서받는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들을 없애시고,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죄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 행 10:43, 히 8:12.

대표를 통한 용서.
이것은
교회와 관계있다.

주님은
그분의 교회에게
성령을 보내셨을 때,
교회에게
이 땅에서
그분의 대표가 될 것을
명하셨다.
이제 교회를 통해
용서가 주어진다
― 요 20:22-23.

대표를 통한 용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용서를 선언하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갓 구원받았는데
용서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교회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서
그에게
“당신은 오늘
주님을 받아들였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죄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에
당신은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회복의 용서.
이것은
교통과 관계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죄를 지을 때,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유죄 판결하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통은 중단된다
― 행 24:16, 딤전 1:5, 3:9, 딤후 1:3.

아버지와 아들로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생명의 관계는
결코 변할 수 없지만,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통을 손상할 수 있다.
우리가
교통 가운데서
용서를
확실하게 얻을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죄들과 잘못들을
하나님께 자백해야 한다
― 요일 1:7, 9, 2:1-2.

우리가
우리의 형제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반드시 그들에게도
자백해야 한다
― 마 5:23-24.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통 안에
계속 두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죄악된 행위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분께
용서를 구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통은 회복될 것이고
우리의 마음은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 시 51:12, 잠 15:13상, 17:22상, 15:15하.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비결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통 안에
계속 두는 것이다.
우리가 실패한다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며,
이전에
하나님과 가졌던
달콤한 교통을
회복해야 한다
― 요일 1:9.

통치상의 용서.
이것은
징계와 관계있다.

이러한 종류의 용서는
하나님의
안배와 주권과
징계와 손길과
관련된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분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다.
이것은
그분의 행정이다.

하나님의 통치상의 용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독하시고
다스리시며
다루시는
방식과 관계있다
― 갈 6:7.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
우리의 죄들을
하나님께 자백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통은 회복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대하시는
그분의 방식을
바꾸실지도 모른다.

다윗은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해
자신의 죄들을 자백하고
자신의 범죄를 인정했다
(삼하 12:13, 시 51편).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야의 아내가 낳은
아들을 죽게 하셨고,
칼이
다윗의 집에서
떠나지 않게 하셨다
(삼하 12:7-15).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상의
징계 아래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분의 권능의 손 아래에서
겸손해지기를
배우는 것이다
(벧전 5:5-7).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상의
손길을 거절하면 할수록
더 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모세는
므리바에서
반석을 친 후에
(민 20:10-12, 24, 27:14),
하나님의 통치상의
손길 아래로 떨어졌다.

하나님은
화를 내지 않으셨는데
모세는
화를 냄으로써
거룩한 본성을 지니신
하나님을
합당하게 대표하지 못했고,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경륜과 관련된
그분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그분의 신성한 경륜을
손상한 것이다.

비록 모세가
하나님과 친밀했고,
하나님의 동반자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출 33:11),
이 일 때문에 그는
좋은 땅으로 들어갈
권리를 잃어버렸다.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해서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의 태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을
따라야 하며,
우리의 행동은 반드시
그분의 신성한 경륜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그분을
거룩하시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다른 이들에게
관대하기를 배우고,
항상 용서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가볍게 비난하고,
다른 이들을
쉽게 유죄 판결하며,
다른 이들의 행위에 대해
계속해서 불평하고,
다른 이들에게서 받은
부당한 대우를
계속해서 생각한다면,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상의
손길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엄격하다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엄격하실 것이다
― 마 6:15, 18:23-35.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며,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존경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를
배워야 한다
― 시 2:11-12, 86:11,
고후 5:10-11, 사 11:2.

다른 이들이
곤경에 처할 때,
이때는 우리가
그들을 도와줄 때이지
그들을 비난할 때가 아니다
― 창 14:14-16.

오늘날 많은 형제들이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과거에
너무 심하게
다른 이들을 비난했다.
오늘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약점들이
과거에
그들이 비난했던
바로 그 약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상의
손길을 피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해야 한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기를
배우기 바란다
― 엡 4:32.

왕국의 용서.
이것은
행정과 관계있다.

우리가
이 시대에서
사람들을
가혹하게 대하거나
용서하지 않는
영을 가진다면,
우리는
왕국 시대에서
징계를 받을 것이다
― 눅 6:37-38, 마 18:33-35.

우리가
비열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대하고
무자비하게
다른 이들을 비난한다면,
하나님은
장래에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다루실 것이다
― 마 7:1-2.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우리가
다른 이들을
긍휼히 여기고
또한 비열하거나
날카롭거나
엄격하게
다른 이들을 대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이럴 때 우리는
그날
하나님에게서
긍휼을 얻을 수 있다
― 마 5:7, 딤후 1:1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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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영을 따라 다른 이들을 돌보고 하나님의 용서를 인식함으로써 왕국 생활을 함”

6일

마 7:1-2
여러분이
판단을 받지 않으려거든,
판단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판단받을 것이며,
여러분이 평가하는
그 평가로
여러분도 평가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한 가지 용서가 더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통치상의 용서라고
부를 수 있다.
… 하나님의 통치는 바로
그분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다.
이것은
그분의 행정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
우리의 죄들을
하나님께 자백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른 방식을 사용하시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통은 회복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대하시는
그분의 방식을
바꾸실지도 모른다.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상의 손길이
쉽게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올바른 일을 하고 있음을
확신하실 때에야
그분의 통치상의 손길을
거두신다.
통치상의 용서는
영원한 용서나
대표를 통한 용서나
교통 방면에서의 용서와는
완전히 다르다.
통치상의 용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독하시고
다스리시고
다루시는
방식과 관계있다.

통치상의 용서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 우리야의 아내와 관련된
다윗의 예를
보아야 한다.
다윗이 저지른
두 가지의 죄는
간음과 살인이다.
… 다윗은
실수한 후에
그의 죄들을 자백했다.
그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수치와 더러움과 거리낌이 있다고
느꼈다.
… 다윗과 하나님 사이의 교통은
시편 51편의 자백 후에
회복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다윗의 죄를 제하셨지만,
우리야의 아내가 낳은
아들을 죽게 하셨고,
칼이
그의 집에서
떠나지 않게 하셨다
(삼하 12:10-14).
… 다시 말해서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징계는
속히 떠나지 않는다.

우리의 하나님은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통치상의 손길을
바로 거두지 않으신다.
많은 경우,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그대로 두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통치상의 손길을 대시면
…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의 손 아래에서
겸손해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우리가
그분의 권능의 손 아래에서
우리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저항하지 않을수록
하나님은
통치상의 손길을
쉽게 거두어 가실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을 겸손히 낮추지 않고,
화를 내고
자기 의견을 내며
분개한다면,
하나님께서
통치상의 손길을
거두어 가시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모세가
므리바에서
반석을 친 후에
(민 20:10-12),
모세와 아론, 두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상의 손길 아래로
떨어졌다.

하나님은
화를 내지 않으셨는데
모세는
화를 냄으로써
거룩한 본성을 지니신
하나님을
합당하게 대표하지 못했고,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경륜과 관련된
그분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그분의 신성한 경륜
모두를 손상한 것이다.
비록 모세가
하나님과 친밀했고
하나님의 동반자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출 33:11),
이 일 때문에 그는
좋은 땅으로 들어갈
권리를 잃어버렸다.

하나님의 백성에 관하여
우리가 말하고
하나님의 백성 앞에서
우리가 행동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의 태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을
따라야 하며,
우리의 행동은 반드시
그분의 신성한 경륜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그분을 거룩하시게 하는 것이다
(민 20:12).

우리는
관대하게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항상
다른 사람의 행위를 원망하고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좋게 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 일이
우리를
하나님의
통치상의 손길 아래로
떨어지게 할 것이다.
…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엄격하다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엄격하실 것이다.

우리는
온유하고 자비롭고 관대하게
형제를 대하기를
배워야 한다.
많은 일들에서
사람들을
관대히 대하라.
모든 한담과 비평을
멈추라.
다른 이들이
곤경에 처할 때,
이때는 우리가
그들을 도와줄 때이지
그들을 비난할 때가 아니다.

오늘날
많은 형제들이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과거에
너무 심하게
다른 이들을 비난했다.
오늘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약점들이
과거에
그들이 비난했던
바로 그 약점들이다.
…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상의 손길을
피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기를
배우기 바란다.

 

5일

롬 4:7
“불법들이 용서받고
죄들이 가리어진
사람들은 복이 있다.

요 20:22-23
예수님께서
… 그들 안으로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누구의 죄들을 용서해 주면,
그들이
용서를 받을 것이고,
누구의 죄들을 그대로 두면,
그들의 죄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다고
말한다
(32절).
요한복음 20장 23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용서할 권위가 있다고 하시며,
“여러분이
누구의 죄들을 용서해 주면,
그들이
용서를 받을 것이고”
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따르면,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신다.
마태복음 6장
14절과 15절에 따르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한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지만,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야고보서 5장 15절에 따르면,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장로들을 청하여
우리를 위해 기도하도록 요청하면
용서를 받는다.
이 다섯 절을 읽는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모두
용서의 문제를
말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절들에서는
단지 한 종류의 용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 종류의 서로 다른 용서를
말한다.

우리는
구원의 용서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용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4장 47절에서 말씀하신
용서이다.
“죄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영원한 용서이다.
로마서 4장 7절에서 말하는
용서도
영원한 용서이다.

이 용서를
영원한 용서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한 번 만에
영원토록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들을
깊은 바다에 던지시고
무저갱에 던지셔서
다시는 보지도 않으시고
기억하지도 않으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받을 때 얻은
용서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
주 예수님께서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또한 그의 모든 죄를 제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그의 어떤 죄도
남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용서이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내가 너를 용서한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너의 죄를 용서하셨다!”
라고 선포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대표를 통한 용서라고 부르는
다른 종류의 용서를
보여 준다.
요한복음 20장
22절과 23절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
그들 안으로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누구의 죄들을 용서해 주면,
그들이
용서를 받을 것이고,
누구의 죄들을
그대로 두면,
그들의 죄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
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님은
그분의 성령을
교회에게 주시면서,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그분의 그릇이 되게 하셨다.
이제 교회를 통해
용서가 주어지는데,
이것을
대표를 통한 용서라고 부른다.
… 성령을 받은 후에
교회는
죄를 용서하거나
그대로 둘 수 있는
권위를 가진다.
교회는
누구의 죄가
그대로 있고
누구의 죄가
용서받았는지를
선포할 수 있다.
교회에게
이러한 권위가 있는 이유는
교회가
성령의 권위 아래
있기 때문이다.
… 이것은
일종의 간접적인 용서이다.
이러한 용서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용서하시는 것이며,
교회는
그분의 통로가 된다.

만일 누가
진심으로 믿었다면,
여러분은
그에게
“당신은 오늘
주님을 받아들였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죄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에
당신은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해 줄 수 있다.
… 이것은
교회가
주님에게서 받은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다.
… 이러한 선포는 반드시
성령의 권위 아래서
수행되어야 한다.
… 이것이
성경 안에 있는
두 번째 종류의 용서이다.
이와 같은 용서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죄를
직접 용서하시지 않고
교회를 통해 용서하신다.
영원한 용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직접 용서하시는 것이고,
대표를 통한 용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어떤 이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자주 넘어졌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한다.
이전의 죄는
용서받았지만,
또다시 죄를 짓는다.
… 내가
구원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다시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어버린다.
나는 여전히
그분의 아들이지만,
그분의 얼굴을
대할 수 없다.
…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생명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하나님과의 교통은
잃어버릴 수 있다.
…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한다면
죄들이 용서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요일 1:9).
… 이 용서는
우리의 교통을
회복한다.

 

4일

마 18:3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마 18:21-22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 “주님,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은
우리가
천국에서
살고 행해야 하는
길을 다룬다.
(1)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2-4절).
(2) 우리는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거나
실족하게 하는 어떤 것도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5-9절).
(3) 우리는
어떤 작은 믿는 이라도
멸시해서는 안 된다
(10-14절).
(4) 우리는
교회의 말을
들어야 하고,
교회의 유죄 판결을
받지 말아야 한다
(15-20절).
(5) 우리는
형제를
한없이 용서해야 한다
(21-35절).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겸손해야 하고,
어떤 믿는 이도
멸시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의 형제를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마 18:1).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 중에 누구도
이렇게 하기를
즐겨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려고 한다.

성경에 의하면,
용서하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 우리에게 저지른
잘못을 잊어버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의 잘못을
영원토록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실 때
잊어버리신다.
히브리서 10장 17절은
“내가 다시는
그들의 죄들과 불법들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전혀
죄를 짓지 않았던 것처럼
여기신다.
이는 그분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고
우리의 죄들을
잊어버리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잘못을 용서할 때,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에게
이것을 상기시킨다.
… 참된 용서는
잘못을 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8장 22절에서 말하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무한히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했는지
세거나 기록할
필요가 없다.
몇 번이든지
여러분은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

마태복음 18장
23절부터 35절까지에서
주님은
하나의 비유를
예로 드셨다.
… 결산하는 것은
… 이 시대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것을
가리킨다.
… 이것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며,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를
그분께 간구하게 된다.
24절에 따르면,
어떤 노예가
왕에게
일만 달란트,
다시 말하면
대략 백이십 억 원을
빚지고 있었다.
이 빚진 사람은
이 빚을
갚을 수 없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주님을 거슬러 지은
죄들이 쌓여서 생긴
무거운 죄 빚을
가리킨다.

그 노예가
왕에게
빚을 갚을 때까지
참아 주기를 구하자,
주인이
불쌍히 여겨
그를 놓아 보내며
그 빚을 면제하여 주었다
(마 18:27).
이것은
우리와 주님과의
교통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패배함으로 진
빚을 용서받는 것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18장 28절은
“그러나 그 노예는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노예 한 사람을 만나,
그를 붙들고
목을 조르며
‘네가 빚진 것을
갚아라.’
라고 하니”
라고 말한다.
… 이 절에서 말하는
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의
백만분의 일도 안 된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형제들이
우리에게 지은
죄를 가리킨다.
형제들이
우리에게 진 빚은
우리가
주님께 진
빚에 비하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꺼이 용서해 주지 않으려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 18장
29절과 30절에서
… 주님은
죄인들이 아닌
구원받은 이들,
즉 믿는 이들을
다루고 계신다.
그분은
마음이 상한 뒤에
용서해 주지 않으려고 하는
어떤 형제를 다루신다.

마태복음 18장 31절은
“동료 노예들이
일어난 일을 보고
몹시 마음이 상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자세히 다 알리니”
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다른 형제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고,
그들은
이 문제를
주님께 가져갈 것이다.

마태복음 18장 34절은
…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우리가
마음속에서부터
그를 용서할 때까지,
즉 우리가 빚진
모든 것을 다 갚을 때까지
징계하실 것임을
암시한다.
… 이것은 우리가
오늘
마음속에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오는 시대에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3일

마 7:11
여러분이 악할지라도
좋은 선물을
자녀에게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눅 11:13
여러분이 악할지라도
좋은 선물을
자녀에게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에서
사람들을 접촉하는
합당한 길은
왕국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다.
주님은
9절과 10절에서
떡과 생선을 구하는
아들의 예를 사용하신 후에,
11절에서
“여러분이 악할지라도
좋은 선물을
자녀에게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은
왕국에 관한 책이기 때문에
의심할 바 없이
11절에 있는 ‘좋은 것들’은
왕국에 속한 것들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7장 11절의 자매 절인
누가복음 11장 13절은
“여러분이 악할지라도
좋은 선물을
자녀에게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
‘좋은 것들’이 ‘성령’으로 바뀌었다.
만일 우리가
이 두 절들을 합쳐서 본다면,
우리는
왕국 백성이
다른 사람들을 접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왕국과 성령에 따라서
접촉하는 것임을
본다.
… 우리가
다른 이들을 대할 때,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결국 우리는
왕국을 따라서
그리고 그 영을 따라서
다른 이들을 대하기 위해
안내를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이들을 접촉하는 데 있어서
통제하는 원칙은
왕국과 그 영이다.
만일 우리가
이 원칙에 근거해서
다른 이들을 접촉한다면,
우리는
실수하지 않을 것이고,
… 누구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접촉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이들을 돌아보아야 하며
“주님,
저에게 길을 보여 주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먼저, 우리는
구해야 한다.
만일 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찾아야 한다.
만일 여전히 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두드려야 한다.
두드리는 것은
우리가 찾는 분께
가까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구할 때
여전히 거리가 있지만,
우리가 두드릴 때
거기에는 거리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찾는 분 바로 앞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찾기 위해
시간을 들여야 한다.
다른 이들을 접촉함에 있어서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그럴 때
문이 열릴 것이고,
다른 이들을 접촉하기 위한
바른길이 주어질 것이며,
우리의 접촉은
유익할 것이고,
우리는
실수하는 데서
구원받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개들과 돼지들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7장 6절과 12절 사이에 삽입된
7절부터 11절까지의 의미이다.

우리는
구함과 찾음과 두드림에 대한
추가의 말을 할
필요가 있다.
구하는 것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이고,
찾는 것은
특별한 방법으로 간구하는 것이며,
두드리는 것은
가장 가깝게
문에 다가서는 것이다.
8절에 있는
구하고 받는 것에 대한 문제는
왕국 백성이
왕국의 새 율법을 지키는 것에 관한
그들의 기도에 적용된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구하고
그것을 받을 것이다.
추구하고 찾는 것에 대한 문제는
6장 33절에 적용된다.
왕국 백성은
아버지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추구하고
그것을 찾을 것이다.
두드리고
문이 열리는 것에 대한 문제는
7장 14절에 적용된다.
좁은 문은
왕국 백성의 두드림으로 인해
그들에게 열릴 것이다.

교회를 위한
영적이고 신성한 것들에 관하여
우리는
네 가지 중요한 요점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우리의 타고난 취향은
그리스도에 의해
십자가로 제해져야 한다.
미국 사람과 중국 사람 모두
십자가로 제해져야 한다.
교회 안에는
타고난 사람을 위한
여지가 없으며,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신다
(골 3:11).
십자가 위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둘 다
십자가로 끝났다.
둘째, 모든 것을
그 영에 의해
해야 한다.
셋째, 이것은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하기 위한 것이다.
넷째, 모든 것은
교회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십자가를 통해
그 영에 의해
해야 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해야 한다.

 

2일

마 7:6-8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여러분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마십시오.
그것들이
진주를 발로 짓밟고,
돌아서서
여러분을 물어뜯을지도 모릅니다.
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찾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찾아낼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열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고,
찾는 사람이 찾아낼 것이고,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 6절에서
‘거룩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객관적인 진리를 가리키고,
‘여러분의 진주’는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개는
발굽이 없고
되새김질도 하지 않는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있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둘 다 부정하다
(레 11:27, 7).
베드로후서 2장
12절과 19절부터 22절까지와
빌립보서 3장 2절의
계시에 따르면,
여기의 ‘개’와 ‘돼지’는
종교적이지만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7장 6절 또한
다른 이들을 돌아보는 것과
관계있다.
우리가
어떤 진리나 교리나 빛을
보았을 때,
우리는 종종
다른 이들에게,
그들이 ‘개들’인지
‘양들’인지
또는 ‘이리들’인지에
상관하지 않고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우리는 오직
자신의 흥분된 느낌만을 주의한다.
우리는
“오, 나는
교회생활에 관한 빛을 보았다!
교회는 영광스럽고 놀랍다!”
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흥분한 채
이것을
그릇된 사람들과
나누려고 할지 모른다.
이것이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것을
다른 이들에게 주려고 할 때,
우리는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한 것들을
개들에게 주지 말아야 하고,
또한 우리의 진주들을
돼지들에게 던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거룩한 것들인 진리들이나
진주들인 체험들에 대하여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할 때,
여러분은
다른 이들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가 나누어 주고자 하는 것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그들이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를
감지해야 한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는
영적인 것들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할 때,
우리의 느낌이나 갈망에 따라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을
받을 수 있는
그들의 역량에 따라
말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돌아본다면,
우리는
모든 이들에게
모든 것을 다 교통하지는
않을 것이고,
우리가
간증을 이야기해 주지 말아야 할
몇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왕국 백성이 다른 이들을 대하는
원칙이다.
… 우리는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지혜로울 것이며,
‘개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이나
‘돼지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려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흥분하여
자신만을 주의하고
다른 이들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려움에 빠질 수 있고
심지어 어려움을 야기할 것이다.
과거에
우리 젊은이들 중 몇몇이
다른 이들의 모임에 가서
오직 그들의 열심만을 주의하고
지혜롭지 않게 말했다.
그들은 불탔지만
다른 이들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만 일으켰을 뿐이었다.

왕국 백성은
가장 지혜로운 백성이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접촉할 때마다
그들의 기질이 어떠한지를
알아야 하며,
그들의 상황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합당한 방식으로 행해야 하며
개들이
우리를 물어뜯거나
돼지들이
우리를 공격하도록
격동시켜서는 안 된다.
그들은
돌아서서
우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마태복음 7장
7절과 8절은
… 다른 이들을 대할 때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앙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분께 구해야 하고,
그분을 찾아야 하며,
그분을 두드려야 한다.
많은 때에 우리는
이렇게 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 절들은
우리가
사람들을 접촉하고 대하는
바로 그때에
주님을 앙망하며
“주님,
저에게
어떻게 이 사람들을 접촉할지를
말씀해 주소서.
주님,
저에게
어떻게 그들을 대할지
보여 주소서.”
라고 말해야 함을
가리킨다.
때때로 단지 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찾아야 하고
심지어 두드려야 한다.
이것은
사람을 접촉하는 것이
매우 진지한 문제임을
가리킨다.
그것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말라.
우리 왕국 백성은
사람을 접촉하는 일에
진지하게 접근해야 하며,
결코 가볍고 느슨한 방식으로
그저 우리의 느낌을 따라
행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다른 이들을 돌아봄으로
사람들을 접촉해야 한다.
우리는
길을 구해야 하고,
길을 찾아야 하며,
심지어 길을 위해
하늘에 속한 문을 두드려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며,
그럴 때 우리는
사람들을 접촉하는
합당한 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신언노트, 2019 06 02

그 영을 따라
 또 하나님의 용서를 깨달음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을 돌봄으로
 그 왕국 생활을 삶

마태복음 7장
 1절부터 12절까지는
 왕국 백성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dealing with;
 상대하는, 다루는)
 그 원칙들에 관련되고
 (concerns),
또 그 왕국 백성 위에의
 하늘에 속한 그 다스림은
 그들이
 그 영을 따라
 (according to the spirit)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계시합니다:

그 왕국 백성은,
 그 왕국의
 하늘에 속한 그 다스림 아래에서
 한 겸허한 영 안에서 살면서,
항상 자신을 판단하고
 (judge;
 재판하고, 심판하고, 비판하고,
 평가하고, 감정하고, 통치하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의를 가지고
 (with righteousness;
 의와 함께, 의로)
 판단한다면,
우리가
 주님에 의하여
 의를 가지고
 판단받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긍휼을 가지고
 (with mercy;
 긍휼과 함께, 긍휼로)
 판단한다면,
우리가
 주님에 의하여
 긍휼을 가지고
 판단받을 것입니다;
긍휼이
 판단 위에 이깁니다
 (triumphs over judgment;
 심판 위에 승리를 거둡니다
 [개가를 올립니다, 크게 기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기 위하여
 (For us to deal with others;
 … 대하면서, 대할 때),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들을 거절하고
 또 그들을 고려해야만 하며
 (must … consider;
 숙고[참작, 감안, 배려]해야만 하며),
 그들을 동정해야만 하고,
 또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만 합니다
 (must … be merciful;
 자비로워야만[동정심이 많아야만,
 관대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형제의 눈 안에 있는
 그 가시는
 (the splinter;
 그 조각은[파편은, 부목은, 티는])
 반드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눈 안에 있는
 그 들보를
 (the beam;
 그 목재를[{쟁기} 자루를,
 기둥을, 대를{bar}, 막대를])
 생각나게 해야만 합니다
 (must remind us of;
 연상하게 해야만[상기시켜야만] 합니다).

그 들보가
 우리의 눈 안에
 남아 있는 한,
우리의 시야는
 (vision;
 시력은, 시각은, 눈은, 보기는)
 흐릿하게 되고,
 또 우리는
 또렷하게
 (clearly; 분명하게)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것을
 그 개들에게
 주지 말아야만 하고
 또는 우리의 진주들을
 그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말아야만 하는데,
그것들이(they)
 그것들의 발들로
 그것들을 짓밟고
 또 돌아서서
 (and turn;
 또 몸을 돌리며)
 또 우리를 찢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lest …; … 물어뜯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마태복음 7장 6절 안에서
 ‘거룩한 것’은
 하나님께 속하는,
 그 객관적인 진리를
 언급합니다;
‘여러분의 진주들’은
 우리의 것들인,
 그 주관적인 체험들을
 언급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must).

개들은
 발굽들을 가지지 않고,
 그 되새김질 거리를
 씹지도 않습니다;
돼지들은
 갈라진 발굽들을
 (divided hoofs;
 나누어진 발굽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되새김질 거리를
 씹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여, 둘 다
 깨끗하지 않습니다
 (unclean;
 더럽습니다, 부정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12절, 19절에서 22절,
 또 빌립보서 3장 2절 안에 있는
 그 계시에 따라서,
마태복음 7장 6절 안에 있는
 ‘개들’과 ‘돼지들’은
 종교적이지만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진리나
 또는 그리스도에 관한
 우리의 귀중한 체험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우리는 반드시
 그들이
 우리가 나누려고 의도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그 수용력을
 (the capacity;
 그 능력을[자격을, 가능성을,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아닌지를
 감지하고(perceive)
 또 알아내야만 합니다
 (must … determine;
 밝혀야만[결정지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접촉하고
 또 그들을 대할 때,
우리는 반드시
 그들을 접촉하는
 그 적절한 방식을 위하여
 (for the proper way;
 그 알맞은[특유의, 합당한] 길을 위해)
 구하고
 (ask; 청하고, 부탁하고, 요구하고),
 찾으며
 (seek; 추구하며, 청하며, 탐색하며),
 또 두드려야만 합니다
 (must … knock; 부딪쳐야만 합니다):

구하는 것은
 한 일반적인 방식으로
 (in a common way;
 한 평범한 방식 안에서, 한 공통의 길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고,
찾는 것은
 한 특정한 방식으로
 간구하는 것이며
 (to supplicate;
 간청[탄원, 애원]하는 것이며),
또 두드리는 것은
 가장 친밀한
 또 가장 열렬한
 (and most earnest;
 또 가장 열심인[성실한, 진심 어린, 심각한])
 그 방식으로
 요청하는 것입니다
 (to demand;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왕국 백성이
 다른 사람들을 접촉하는
 그 가장 좋은 방식은
그 왕국을 따라
 또 그 영을 따라
 있습니다
 (is according to …;
 …에 따라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으로
 (into God)
 우리 자신들을
 (ourselves;
 우리 스스로, 우리가 직접)
 기도할 필요가 있는데
그 결과(so that)
 우리는
 그분의 영 안에 체현되는
 그 부유함을
 (the riches;
 그 부를[재물을, 풍부를])
 받아들일 수 있고
그래서(to; 그 결과)
 우리 자신들과
 또 우리의 돌봄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먹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for His Body;
 그분의 몸을 향하여)
 다른 사람들 안으로
 그분을 공급하기 위하여
 (in order to minister Christ;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우리는 반드시
 그 십자가를 통하여
 또 그 영에 의하여
 각각의 모든 것들을
 하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 왕국 생활,
 곧 그 하나님-사람 생활,
 곧 그 교회 생활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겸허해야만 하고
 또 어떤 믿는 사람도
 업신여기지 않고
 (not despise;
 멸시하지[경멸하지, 얕보지] 않고)
 오직 우리의 형제를
 사랑해야만 하며
 또 우리의 형제를
 용서해야만 합니다:

그 왕국 생활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들을
 겸허하게 해야만 하고
 또 어린아이들처럼
 되어야만 합니다.

그 왕국 생활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넘어질 뻔하게
 하지 말아야 하고
 (stumble;
 발부리가 걸리게[비틀거리게,
 발을 헛디디게, 실족하게]
 하지 말아야 하고)
 또는 넘어질 뻔하게 하는
 어떤 장애물도
 (any … block;
 어떤 방해도[덩어리도, 토막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 왕국 생활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한 작은 믿는 사람조차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 왕국 생활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형제를
 한없이
 (without limit;
 무제한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마음을 상하게 하는
 (offending;
 불쾌하게 하는, 불편하게 하는,
 비위에 거슬리는, 죄를 범하는)
 그 형제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의 빚은
 다 갚기가
 (to pay off;
 청산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그분과의 교통의
 (of … fellowship with Him;
 주님과의 교제의)
 그 회복을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의
 패배 당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안에 있는
 우리의 빚들을
 탕감하셨습니다
 (forgave;
 용서하셨습니다, 너그럽게 봐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우리에게의 빚은
우리의
 주님께의 빚에 비하여
 매우 적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 대하여
 (against; …를 거슬러)
 죄를 짓는
 그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다른 형제들을
 몹시 슬프게 할 것이고
 (will grieve;
 비통하게[마음 아파하게] 할 것이고),
 또 그들이
 주님께
 이 문제를
 가져갈 수도 있습니다
 (may bring).

만약 우리가
 오늘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한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오고 있는 시대 안에서
 그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will not be allowed).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그 왕국 안에
 다섯 종류의 용서가
 있다는 것을
 보아야만 하고
 또 깨달아야만 합니다
 (must … realize;
 체득해야만 합니다):

영원한 용서가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과 관련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함께 오는
 (comes with;
 …에 딸려 있는)
 그 용서는
 영원한 용서입니다.

일단 우리가
 용서받으면
 (Once we are forgiven;
 한번 우리가
 용서받자마자)
우리는
 영원히 용서받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고,
또 우리가
 영원히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are justified;
 정당화됩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 안으로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들에서
 용서받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들을
 제거하시고,
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의 흔적과 함께
 남겨지지 않습니다
 (are left with no trace of sin;
 죄의 흔적과 함께
 그대로 두어지지 않습니다).

도움이 되는
 (instrumental;
 수단이[동기가] 되는, 수단적인,
 쓸모 있는[긴요한], 대표를 통한)
 용서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교회와 관련 있습니다:

그 거룩하신 영을
 (the Holy Spirit; 그 성령을)
 그분의 교회에게
 보내심 안에서,
주님께서는
 그 교회에게
 그 땅 위에 있는
 그분의 대표가 되는 것을
 책임 지우셨습니다
 (charged;
 담당시키셨습니다, 명[명령, 청구]하셨습니다);
용서는 이제
 그 교회를 통하여
 주어집니다
 (is … granted;
 부여됩니다, 승인[허가]됩니다).

도움이 되는 용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한
 용서의 선포입니다
 (God’s proclamation of forgiveness through man;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용서를 선언하심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
 최근에
 (newly; 새로, 갓)
 구원받지만
 (is … saved but; 구원되지만)
 용서의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그 교회의 한 대표가
 일어서서
 그에게
“당신은 오늘
 주님을 받아들였습니다
 (have accepted);
그분께서
 당신의 죄들에서
 (of your sins;
 당신의 죄들에 있어서[…에 대하여])
 당신을 용서하셨기 때문에
당신은
 그분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복원하는
 (restorative;
 복구하는, 회복시키는, 부흥의, 회복의)
 용서가 있습니다
 ―이것은
 교통과 관련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매일의 생활에서
 죄를 지을 때,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유죄 판결하고,
또 우리의
 하나님과의 교통은
 방해받습니다
 (is interrupted; 중단됩니다).

생명 안에 있는
 우리의
 하나님과의
 아버지-아들 관계는
 (Father-son relationship)
 결코 변하게 될 수 없지만,
죄는
 우리의
 하나님과의 교통을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can damage;
 훼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통 안에서
 우리의 용서를
 확실하게 할 수 있기 전에
 (before … can secure;
 보장할[지킬,
 보안 장치를 할] 수 있기 전에)
하나님께
 우리의
 죄들과
 또 마음을 상하게 함들을
 (offenses;
 범죄들을, 위반들을)
 자백해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형제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들에게도 또한
 자백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통 안에
 우리 자신들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have to maintain;
 지켜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 때,
우리는
 정직하게
 우리의 죄 많은 행동들을
 인정해야만 하고
또 그분께
 용서를 구해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한다면,
우리의
 하나님과의 교통이
 복원될 것이고,
 또 우리의 마음은
 구원의 그 기쁨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그 생활의
 그 비결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통 안에
 우리 자신들을
 유지함입니다;
만약 우리가 실패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만 하고,
 또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하나님과 가졌던
 (had; 가진)
 그 달콤한 교통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통치적인
 (governmental;
 다스림의, 행정적인)
 용서가 있습니다
―이것은
 징계와
 (to discipline; 훈육에)
 관련 있습니다:

이 종류의 용서는
 하나님의
 안배
 (arrangement;
 배치, 배열, 정돈, 정리, 준비),
 주권,
 징계,
 또 손길을
 (hand;
 손[돕기, 조력, 일손,
 솜씨, 관여, 노력]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분의
 일들을 함의
 방식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행정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적인 용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관리하시고(manages),
 (우리) 위에 다스리시며,
 또 다루시는
 그 방식에 관계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against)
 죄를 지을 때(When),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그분께 자백하면(when)
그분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그분과의 교통은
 회복될 수 있지만
 (can be restored),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하는(with)
 그분의 방식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may change).

다윗이
 하나님에 의하여
 용서받기 위하여
그의 죄들을 자백했고
 또 그의 범죄를
 (guilt;
 유죄를, 죄책감을)
 인정했지만
 (삼하 12:13, 시 51편),
하나님께서
 우리야의 아내에게 낳아진
 (born to; … 태어난)
 그 아들이 죽게 하려 하셨고
 (would cause … to die)
또 그 칼이
 다윗의 집으로부터
 떠나지 않게 (하려 하셨습니다)
 (삼하 12:7-15).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적인 징계 아래에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유일한 일은
 그분의 능하신 손 아래에
 우리 자신들을
 겸허하게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더 많이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적인 손길을
 거절할수록,
더 많은 문제들을
 우리가 만날 것입니다
 (will encounter;
 맞닥뜨릴[부닥칠] 것입니다).

모세가
 므리바에서(in)
 그 반석을 친 후에,
그는
 하나님의
 통치적인 손길 아래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화내지 않으셨을 때
 화냄 안에서
 (In being angry; 화냄으로),
모세는
 그분의 거룩한 본성 안에서
 올바르게(rightly)
 하나님을 대표하지 않았고,
또 그 반석을 두 번 침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in; 안에 있는)
 그분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또 그분의 신성한 경륜을
 둘 다
 (offended;
 거슬렀습니다, 어겼습니다, 범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가
 하나님과 친밀했고
 또 하나님의 한 동반자로
 여겨질 수 있더라도,
모세는
 그 좋은 땅 안으로 들어가는
 그 권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에 관하여
 말하고 또 하는
 모든 것들 안에서,
우리의 태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에 따라
 있어야만 하고,
또 우리의 행동들은 반드시
 그분의 신성한 경륜에 따라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분을
 신성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to sanctify;
 거룩하시게 하는[시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한 것을
 (to be generous;
 너그러운[후한, 아끼지 않는, 넉넉한] 것을)
 배워야만 하고
또 용서하는 것을
 항상 배워야만 합니다
 (must … learn always to forgive;
 항상 용서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가볍게
 (lightly;
 부드럽게, 조금, 얕보아)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criticize;
 비판[비평, 혹평]하고, …의 흠을 찾고),
쉽게
 다른 사람들을
 유죄 판결하며,
다른 사람들의 그 행위에 대하여
 불평하기를 계속하고(keep),
또 우리가
 그들로부터 받아들이는
 그 나쁜 대우를
 (the ill-treatment;
 그 학대를[냉대를, 혹사를])
 셈하는 것을
 (to count;
 합계하는[포함시키는, 탓하는] 것을)
 계속한다면(continue),
이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통치적인 손길 아래에
 데려갈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엄격하다면
 (are severe;
 혹독하다면, 가혹하다면, 엄하다면, 엄정하다면)
하나님께서도 또한
 우리를 향하여
 엄격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며,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존경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곤경에 처할 때,
 이때는 우리가
 그들을 도와줄 때이지
 그들을 비난할 때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형제들이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너무 심하게
 다른 이들을 비난했습니다.
오늘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약점들이
 과거에
 그들이 비난했던
 바로 그 약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상의
 손길을 피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기를
 배우기 바랍니다.

왕국의 용서.
 ―이것은
 행정과 관계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서
 사람들을
 가혹하게 대하거나
 용서하지 않는
 영을 가진다면,
우리는
 왕국 시대에서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비열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대하고
 무자비하게
 다른 이들을 비난한다면,
하나님은
 장래에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다루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우리가
 다른 이들을
 긍휼히 여기고
 또한 비열하거나
 날카롭거나
 엄격하게
 다른 이들을 대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날
 하나님에게서
 긍휼을 얻을 수 있습니다.

 

1일

마 7:1-2
여러분이
판단을 받지 않으려거든,
판단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판단받을 것이며,
여러분이 평가하는
그 평가로
여러분도 평가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
1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에 있는
주님의 의도는
… 우리가
자신을 잊어버리고
다른 이들을 돌보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앞의 두 장들에서
주님은
우리의 성질,
우리의 정욕,
우리의 내적 존재,
자아,
육체,
그리고 우리의 염려를
파헤치셨다.
이제 그분은
우리가
다른 이들을 돌보는 것을
배워야 하는 지점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판단할 때,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판단해 주기를
바라는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다른 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주님은
“여러분이 판단을 받지 않으려거든,
판단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씀하셨다.
왕국 백성은
왕국의
하늘에 속한 다스림 아래에서
겸손한 영으로 삶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고
항상 자신을 판단한다.
판단을 받지 않으려면
판단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다른 이들을 돌보는 것에 대한
말씀 같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 안으로
깊이 들어갈 때,
우리는 실지로
이것이
다른 이들을 돌보는 것을 의미함을
보게 된다.

마태복음 7장 2절은
“왜냐하면 여러분이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판단받을 것이며,
여러분이 평가하는
그 평가로
여러분도 평가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왕국의
하늘에 속한 다스림 아래에서
왕국 백성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대로
판단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의로 판단한다면
그들도
주님께
의로 판단받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긍휼로 판단한다면
그들도
주님께
긍휼로 판단받을 것이다.
긍휼은
판단 곧 심판을 이긴다
(약 2:13).
다른 이들을
너무 많이 판단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정도로
판단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이들을 돌본다면
그들에게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이들을 대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그들을 향하여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왕국 백성들은
다른 이들을 대할 때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

마태복음 7장
1절부터 12절까지에 감추어진
기본 원칙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고
다른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왜 자신이
다른 이들을 비평하고
판단하는지 아는가?
그것은
여러분이
자신에 대하여
너무 많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다른 이들의 느낌을
소홀히 하고
그들을 돌보지 않는다.
여러분은 오직
자신의 느낌만을 주의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비평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잊고
다른 이들을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다른 이들의 느낌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비평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다른 이들을 돌본다면
우리는
그들을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마태복음 7장 3절에서
주님은
“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그대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하지 못하십니까?”
라고 말씀하신다.
왕국의
하늘에 속한 다스림 아래에서
겸손한 영으로 사는
왕국 백성인 우리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볼 때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생각해야 한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우리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생각나게 해야 한다.

마태복음 7장 4절은 계속하여
“보십시오,
그대의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그대가
형제에게
‘내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어 주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한다.
3절과 4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은
매우 깊다.
여기에서 그분의 의도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돌보라고
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돌보라고
명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 5절은
“위선적인 사람들이여,
먼저 그대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십시오.
그 후에야
분명히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들보가
우리 눈에 남아 있다면,
우리는
시각이 흐려져서
분명하게 볼 수 없다.
형제의 결점을
지적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자신에게 더 큰 결점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형제의 결점은
티에 비유되었고,
우리의 결점은
들보에 비유되었다.
주님의 의도는
우리가
다른 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결점을
지적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아닌
그의 결점을 주의할 것이다.
… 만일 우리가
그 형제를 돌본다면,
우리는
그의 결점을
주의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의 결점은
나의
거대한 들보와 같은
결점과 비교한다면
단지 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결점을
기쁘게 지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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