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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엘리사는 생명 안에서 은혜의 사역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대표, 하나님의 대행자로 처신하였음

엘리사는 생명 안에서 은혜로운 기적들을 행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구약에 있는 예표들과 그림자들의 성취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참엘리사이시다. 참엘리사이신 주 예수님은 달콤하고 즐거움을 주는 신언자, 축복의 신언자이시다.

엘리사는 구약에 있는 예표로서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대표한다.

은혜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하시는 하나님이다.

이러한 은혜는 신성한 생명을 가져오는데, 이 신성한 생명은 풍성하고 높으며 심지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공동 왕들이 되게 한다.

엘리사가 여리고에서 물을 치료한 기적과 주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의 의미는 동일하게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이다 .

엘리사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불러낸 일은 주 예수님께서 무리를 먹이신 것과 원칙상 동일하다.

엘리사가 죽은 사람을 부활시킨 일, 곧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준 일은 육신적인 면에서나 영적인 면에서 주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동일하다.

엘리사가 야생 박의 독성을 가루로 제거한 것은, 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누룩에 물든 제자들을 고운 가루이신 그분 자신으로 치료하신 것과 원칙상 동일하다.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사용하여 물에 빠진 도끼머리를 떠오르게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그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죽음의 물에 빠진 죄인들의 잃어버린 능력을 회복시키시는 것을 상징한다.

엘리사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신성한 치유의 기적을 베풀었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은 기적적인 치유를 받지 못하였다. 이것이 바울과 그의 동료 일꾼들의 체험이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고난을 당할 때 외적인 은사의 능력 아래 있기보다는 오히려 내적인 생명의 훈련 아래 있었다.

전자는 능력 곧 기적적인 능력이 있는 은사의 문제이고, 후자는 생명 안에 있는 은혜의 문제이다.

교회가 하락해 갈 때, 또 사람이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을 때에 능력이 있는 은사보다는 생명 안에 있는 은혜가 더 많이 필요하다.

엘리사는 비록 몸은 죽었지만 여전히 영 안에서 사역하여 죽은 한 사람을 살렸다.

심지어 죽은 엘리사도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접촉하는 사람은 살아난다.

거듭남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접촉하여 살아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모세와 사무엘과 바울처럼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대표,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처신하였다.

여호와는 모세에게 그분이 그를 파라오에게 하나님이 되게 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서 그분을 대표하고 그분의 뜻을 집행할 한 사람을 얻으셨다. 모세는 결코 파라오에게 스스로 말하지 않고 항상 주님께서 그에게 말하라고 하신 것을 말하였다.

사실상 파라오는 하나님의 대사인 모세의 말을 듣고 있거나 모세를 상대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파라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고 하나님을 상대하고 있었다.

사무엘은 이 땅에 있는 그분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대표였다. 사무엘은 그러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대행자였다.

사무엘의 존재와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대행자가 될 수 있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다. 즉 그는 하나님의 마음의 복사본이며 복제였다.

사무엘의 생활과 일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대언자와 하나님의 행정이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대행자였다.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바울은 그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믿는 이들을 위로하였고, 하나님의 단순성으로 처신하였으며, 하나님의 질투를 나타내었고,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어 화목의 사역을 수행하였다.

사도가 오랫동안 감금된 채 순탄하지 않은 항해를 계속하는 동안, 주님은 사도를 그분의 초월 안에 있게 하시고 염려가 없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셨다.

가장 뛰어난 신성한 속성들을 표현하는 최고 수준의 인간 미덕을 지닌 이러한 삶은 완전히 위엄 있는 삶이었으며, 수년 전에 주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서 사셨던 삶과 닮은 삶이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신성하게 부요해진 인성 안에서 또다시 이 땅에 사시는 것이었다.

이것은 복음서들에서 사셨던, 놀랍고 탁월하고 비밀한 하나님-사람께서 그분의 많은 지체 중 한 사람을 통해 사도행전에서 계속해서 사시는 것이었다.

신약의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기능을 발휘하는 면에서 바울과 똑같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 선택받고 구속받고 거듭난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 된 이들, 하나님으로 조성된 이들, 하나님을 사는 이들, 하나님을 표현하는 이들,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는 이들, 하나님을 대표하는 이들이 되어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하나님께 선택받고 구속받고 거듭난 백성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

성경의 기본 원칙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그분 자신을 사람과 하나 되게 하시고 사람을 그분과 하나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성한 생명과 사람의 생명이 함께 결합하여 한 생명이 됨으로 한 생활을 하기를 갈망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조성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의 존재 안에 분배함으로써, 우리의 존재가 그분의 존재로 조성되어 그분의 존재와 한 조성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신성한 생명 안에서, 그리고 신성한 생명의 법의 운행에 의해서 하나님은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지실 것이며, 우리는 생명과 본성에서 그분으로 조성될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 되고 하나님으로 조성된 이들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에 따르면,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의 요소와 그분의 실질과 그분의 본성의 성분들을 우리의 존재 안에 분배하시어 우리가 그분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사실상 하나님 그분 자신이어야 하며, 따라서 항상 하나님을 사는 생활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표현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우리의 생명으로 일해 넣으심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그분의 목표는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을 위하여 우리가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이들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큰 바퀴와 같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움직이시는 그분 자신과 동역하는 것이 필요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과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임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움직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대표해야 한다.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표하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생명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해야 한다. 아론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부활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표하는 권위가 있었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합당한 방법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고, 하나님으로 조성되며, 하나님을 살고, 하나님을 표현하며,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고, 하나님을 대표한다면,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에서 그분과 똑같이 되어 그분의 경륜을 수행하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인 신언자 엘리사는 그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대표,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처신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인 우리도 그와 동일하게 되어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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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고전 6:17 그러나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 영입니다.

빌 1:21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나에게 있어서 죽음은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1:21-22 그러나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께로 견고하게 붙이시는 분이시며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에게 도장을 찍으시고, 그 영을 우리 마음에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신언자 엘리사는 그의 사역에서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대표,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처신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인 우리도 그와 동일하게 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살고 그분과 하나 된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그러한 사람들은 결국 교회가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살고 하나님과 하나인 단체적인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며, 그분께서 영원 안에서 얻으려고 목적하셨던 것이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자신과 그의 동역자들이 그러한 사람들이었음을 그들에게 보여 준다. 모든 사도는 하나님과 하나였고 그리스도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심지어 어떤 장소에 가려고 결정하는 것과 같은 사소한 문제까지도 바울은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결정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떠나거나 하나님과 분리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그리스도께 접붙이심으로써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있었고 신실하신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기름부음 받으신 분께 접붙여졌기 때문에, 부활의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고 부활 생명을 살 수 있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기름부음 받으신 분의 일부임을 의미한다.

기름부음은 도장 찍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기름부음 아래 있을 때, 기름부음은 도장 찍음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된다. 더욱이 도장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 도장은 형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실 때, 그 기름부음은 도장 찍음이 된다. 고무도장이 잉크의 요소를 종이에 바르는 것과 같이, 기름부음은 신성한 본질을 우리 안으로 가져온다. 먼저 하나님은 기름부음을 통하여 그분 자신의 본질을 우리에게 더하신다. 그런 다음 이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본질을 우리에게 도장 찍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 붙이신 결과는 세 가지이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요소를 우리 안으로 나누어 주는 ‘기름부음’이고, 둘째로는 신성한 요소가 형태를 이루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도록 하는 ‘도장 찍음’이며, 셋째로는 하나님을 완전히 맛보는 것에 대한 견본과 보장이 되도록 우리에게 미리 맛보게 하는 ‘보증’이다. 우리에게 기름이 부어졌고 도장이 찍혔으며 우리가 보증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고 그리스도를 살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변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를 살도록 자격을 갖추었고 장비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좋은 땅을 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움직임 안에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동역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신을 바라보았다면, 자신에게는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능성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었으며, 그분께는 그분의 선민이 그분의 움직임 안에서 그분과 동역함으로써 그분의 경륜을 수행하는 것이 필요했고, 그분의 선민이 그분의 갈망 안에서 그분과 동역함으로써 거대한 바퀴인 그분의 경륜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이 육체 되심의 원칙이다. 특히 이것은 이 땅을 강탈하는 사탄의 세력을 멸망시키기 위한 육체 되심의 원칙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의 강탈하는 손에서 땅을 되찾으시기 위해서는 육체 되심의 원칙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완전히 협력하고 동역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 안에서, 그리고 땅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원하시지만,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그분은 우리가 육체 되심의 원칙에 따라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을 필요로 하신다.

5일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질투로 여러분에게 질투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러분을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순수한 한 처녀로 드리려고 약혼시켰기 때문입니다.

행 27:24 ‘바울이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반드시 가이사 앞에 서야 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대와 함께 항해하는 모든 사람을 그대에게 주셨습니다.’

항해 내내, 그리고 이제 몰타라는 섬에서 바울은 확실히 그 영 안에서 행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육체가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인 생명을 살았다. 사실상 바울의 생활은 생명 주시는 영의 표현이었다. 바울은 일상생활의 모든 상황에서 바로 그가 전파한 그리스도의 표현이었다. 그는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 곧 육체가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전파했으며, 몰타섬에서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이신 이러한 그리스도를 살았다. 이것은 나중에 쓴 빌립보서 1장 20절과 21절 상반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에서 나타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어떤 일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매사에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를 살고 그분을 확대하는 것만을 관심했다. … 바울은 그분을 살았고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확대했다. 우리는 바울의 생활에 관한 누가의 기록을 읽을 때, 그의 생활이 육체가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하나님께서 높이신 그리스도의 완결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이었음을 본다.

주님은 사도를 폭풍이 이는 바다 위에서 함께 항해하는 사람들의 주인으로만 아니라(행 27:24), 생명의 보증인과 위로자로 삼으셨다(22-25절). 더 나아가 이제 평온한 육지에서 주님은 그를, 미신적인 사람들의 눈에 신기한 매력을 지닌 사람으로만 아니라(28:3-6), 그들의 치료자와 기쁨이 되게 하셨다(8-9절). 사도가 오랫동안 감금된 채 순탄하지 않은 항해를 계속하는 동안, 주님은 사도를 그분의 초월 안에 있게 하시고 염려가 없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신성한 속성들을 표현하는 최고 수준의 인간 미덕을 지닌 이러한 삶은 완전히 위엄 있는 삶이었으며, 수년 전에 주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서 사셨던 삶과 닮은 삶이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신성하게 부요해진 인성 안에서 또다시 이 땅에 사시는 것이었다! 이것은 복음서들에서 사셨던, 놀랍고 탁월하고 비밀한 하나님-사람께서 그분의 많은 지체 중 한 사람을 통해 사도행전에서 계속해서 사시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육체가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하나님께서 높이신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증인이었다. 바울은 항해하는 동안 그리스도를 살며 확대했다.

로마에서 온 형제들의 따스한 환영과 보디올에 있는 형제들의 사랑스러운 돌봄(행 28:13-14)은 초기에 교회들과 사도들 사이에 있었던 아름다운 몸의 생활을 보여 준다. 이러한 생활은 사탄이 어둡게 한 땅, 곧 사람이 거주하는 땅 위에 있는 하늘에 속한 왕국 생활의 일부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도가 결박당한 죄수로서 사탄이 점령한 제국의 어두운 수도(首都)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 것 같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진 그리스도의 대사(엡 6:20, 마 28:18-19)로서 이 땅 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왕국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 곧 몸의 생활에 참여하는 또 다른 부분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는 사탄의 제국 안에서 종교의 박해를 받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교회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이것은 그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 절대적으로 하나였다. 바울은 하나님과 하나였기 때문에, 고린도 사람들이 모든 환경과 상태와 상황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데 도움을 받도록 그와 같은 방식으로 질문들에 답변했다. 바울은 결혼에 관한 어떤 질문들에 대답할 때, 어떤 것을 시도하거나 바꾸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대답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기를 원하고 실제로 그분과 하나라면, 우리는 어떤 변화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며, 특히 결혼 생활과 관련한 변화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4일

출 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하나님이 되게 하였다. …

삼상 2:35 내가 나를 위하여 신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는 내 마음과 내 생각에 있는 것을 따라 행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안전한 집을 지어 줄 것이고, 그는 줄곧 나의 기름부음 받은 이 앞에서 행할 것이다.

렘 15:1 …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서 있다 할지라도 내 혼은 이 백성을 향하지 않을 것이다. …

하나님과 파라오 사이에 일어난 충돌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합당한 방법을 배울 수 있다. 합당한 방법은 수고하거나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대표하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보냄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분께 보냄을 받아야 한다.

출애굽기 11장 3절은 이렇게 말한다. “더욱이 모세라는 사람은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의 신하들과 백성에게 아주 위대하게 여겨졌다.” 모세는 싸우지 않았고 심지어 힘들게 일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대표로서 그는 단지 몇 번이고 파라오를 보러 갔을 뿐이다. 모세는 스스로 가지 않았다. 그는 매번 갈 때마다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이로서 갔다. 더 나아가 그는 파라오에게 스스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주님께서 그에게 말하라고 하신 것을 말하였고, 파라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렸다. 그러므로 사실상 파라오는 모세의 말을 듣고 있거나 모세를 상대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파라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고 하나님을 상대하고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사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방법은 이렇게 하나님의 대표가 되는 것이다.

나는 동역자들에게 우리가 너무 많이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이것은 우리가 게으르거나 나태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접촉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일을 위해 너무 많이 기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을 접촉하고, 그분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느낌을 감지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의 존재를 적시실 때까지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을 대표하게 될 것이고, 그분은 우리를 보내실 것이다. 그것은 달음질하는 사람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원하는 사람에게 속한 것도 아니며,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롬 9:16). 우리는 달리거나 원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필요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이며, 그분께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사도는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 사도는 자신이 대표하는 분에게서 보냄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인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대표로서 그곳에 있다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보잘것없으며 매우 약하다. 사실상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대표한다. 하나님의 대표들인 우리는 자신의 말을 하거나 자신의 일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가시나무 떨기이며, 주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타오르고 있는 불이시다. 불과 가시나무 떨기는 하나이다. 우리가 이 실재 안에 있을 때, 가시나무 떨기와 불을 구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6장 17절의 바울의 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 영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합당한 길은 우리가 사랑하고 섬기는 분의 대표가 바로 우리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자신에 의해 가지 않고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간다.

출애굽기의 이 장들에서 우리는 고집 센 파라오와 하나님의 대표인 모세를 모두 본다. 파라오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자신을 주권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셨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서 그분을 대표하고 그분의 뜻을 집행할 한 사람을 얻으셨다. 우리 중 누구도 파라오가 아니고, 우리 모두가 주님과 하나인 모세인 것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하자! 주님의 주권과 긍휼 안에서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주님과 함께 가고 그분을 대표하며 그분의 뜻을 집행한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주권으로 인해 그분께 경배하고, 그분의 긍휼로 인해 그분께 감사드리기 바란다!

사무엘의 사역의 말기, 곧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일으켜졌을 때(삼상 9:3-10:27), 사무엘은 가장 높은 위치에 도달하였다. 우리는 그보다 위에 계신 분은 오직 한 분뿐이었고,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의 대표였던 사무엘이 하나님의 대행자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움직이시고 행동하고자 하셨지만, 그분께는 대표가 필요하셨다. 그래서 사무엘은 신언자와 제사장과 사사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대언자와 하나님의 행정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대행자였다.

3일

왕하 13:14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그에게 내려가 그를 보고 울면서 말하였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왕하 13:21 …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장사하다가, … 그 사람을 엘리사의 무덤에 내던지고 달아났다. 그런데 그 사람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마자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섰다.

엘리사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신성한 치유의 기적을 베풀었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은 기적적인 치유를 받지 못하였다.

엘리사는 비록 몸은 죽었지만 여전히 영 안에서 사역하여 죽은 한 사람을 살렸다. 심지어 죽은 엘리사도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접촉하는 사람은 살아난다. 거듭남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접촉하여 살아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한 후에(딤후 4:19),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남겨 두었습니다.”(20절)라고 말한다. 왜 사도는 그토록 가까운 사람을 위하여 병 고치는 기도를 하지 않고 병든 상태로 두었는가? 왜 사도는 병 고치는 은사를 베풀어(행 19:11-12) 디모데의 위장병을 고쳐 주지 않고 자연 치료법으로 고치라고 했는가(딤전 5:23)?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모두 고난을 당할 때 외적인 은사의 능력 아래 있기보다는 오히려 내적인 생명의 훈련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전자는 능력 곧 기적적인 능력이 있는 은사의 문제이고, 후자는 생명 안에 있는 은혜의 문제이다. 교회가 하락해 갈 때, 또 사람이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을 때에 능력이 있는 은사보다는 생명 안에 있는 은혜가 더 많이 필요하다.

신약에 따르면, 기적적인 은사는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 한자리를 얻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가 하락이나 박해를 견디기 위해서는 기적적인 은사나 능력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붙잡은 영원한 생명만이 유력하다. 이 생명으로 우리는 하락과 박해를 견딜 수 있다.

바울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디모데의 질병과 드로비모의 병을 돌본 것은 다소 그가 믿지 않는 이와 같이 행동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성경에는 그가 병을 고치기 위해 기도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그는 분명히 병 고치는 은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했으며, 드로비모는 밀레도에 남겨 두었다. 바울은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그의 동역자들을 돌보았다. 그는 과시하기 위해 구경거리가 될 만한 어떤 일을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과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시험과 시련과 박해와 공격과 반대를 견딜 수 있는 영원한 생명만을 강조해야 한다. 견고한 기초는 서 있다. 이러한 입지는 기적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은혜로 있는 영원한 생명에 달린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겨울이 되기 전에 올 수 있도록 힘쓰라고 명령하고, 자신과 함께하는 모든 형제들의 문안 인사를 보내고 나서 “주님께서 그대의 영과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바랍니다.”(딤후 4:22)라고 결론을 짓는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구성하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인 강한 영과 하나님의 은혜로 결론을 짓는 것을 본다. 교회의 타락에 대처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디모데후서는 우리의 영을 대단히 강조한다.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는 능력의 영과 사랑의 영과 맑은 생각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를 부채질하여 불타오르게 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주님의 생명을 분배하는 은혜를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다(1:6-10). 결론 부분에서 이 책은 주님께서 우리의 영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를 축복한다. 주님께서 우리의 영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하락시키는 흐름에 대항해 서기 위하여, 또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영(1:14)과 장비시키는 말씀(3:16-17)을 통해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하여, 주님을 은혜로 누릴 수 있다.

2일

왕하 4:40-41 그들은 사람들에게 죽을 먹으라고 퍼다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조금 먹다가 부르짖으며 말하였다. “하나님의 사람이시여! 솥에 죽음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죽을 먹을 수가 없었다. 엘리사가 말하였다. “가루를 조금 가져오십시오.” 엘리사는 가루를 솥에 넣은 다음 말하였다. “사람들이 먹도록 죽을 퍼다 주십시오.” 그러자 솥 안에 있던 해로운 것이 없어지게 되었다.

엘리사는 또한 죽은 사람을 죽음에서 부활시켰다(왕하 4:18-37, 비교 히 11:35, 눅 7:11-17, 요 11:41-44, 롬 4:17하). 주 예수님은 우리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을 부활시키셨다(요 5:25).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불러내는 것과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단지 기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일들은 생명을 가져오는 은혜로서,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게 한다.

엘리사의 제자들은 식량이 부족했을 때, 독성을 지닌 야생 박으로 죽을 끓였다. 엘리사는 야생 박의 독성을 가루로 제거하였다(왕하 4:38-41). 원칙적으로, 주 예수님도 그분의 제자들에게 같은 일을 하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경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고 경계하십시오.”(마 16:6-12) 그리고 그분은 고운 가루이신 그분 자신으로 제자들을 치료하셨다.

오늘날의 기독교의 많은 가르침들이 ‘독성을 지닌 야생 박’이다. 일부 기독교 서적들은 좋지만, 많은 서적들이 순수하지 않다. 우리는 앤드루 머리(Andrew Murray)와 다른 이들의 글을 추천한다. 특히 앤드루 머리의 걸작인 〈그리스도의 영〉뿐 아니라, 메리 맥도너(Mary E. McDonough)의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루스 팩슨(Ruth Paxson)의 〈최고 수준의 생명〉을 추천한다. 우리 가운데에는 니 형제님의 사역도 있다. 니 형제님이 젊었을 때 형제님의 사역은 서양 선교사들에게 거절당했지만, 오늘날에는 전 세계의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졌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과거 칠십여 년 동안 성경의 모든 핵심적이고 중요한 계시가 워치만 니 형제님의 사역과 나의 사역을 통해 다루어졌다. 나는 우리가 순수하고 건강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독성을 지닌 야생 박’을 수집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를 권한다.

열왕기하 6장 1절부터 7절까지에서 엘리사는 나뭇가지를 사용하여 물에 빠진 도끼머리를 떠오르게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그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죽음의 물에 빠진 죄인들의 잃어버린 능력을 회복시키시는 것을 상징한다. 죄인들인 우리는 우리의 능력인 ‘도끼머리’를 잃어버렸지만,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그분의 십자가인 ‘나뭇가지’를 사용하셔서 이 잃어버린 능력을 회복시키셨다.

이상의 모든 것에 따르면, 우리는 엘리사가 그리스도의 매우 정확한 예표임을 볼 수 있다. 엘리사는 예표로서 시대를 바꾸었고, 주님은 성취로서 동일한 일을 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바뀐 시대, 즉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성취하는 시대에 있다.

누가복음 7장 11절부터 17절까지에서 우리는 사람-구주께서 울고 있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녀의 죽은 아들을 살려 주신 것을 본다. 이 상황은 매우 슬프다. 그 여인은 먼저 남편을 여의었고 이제는 외아들을 잃었다.

구주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은 다시없는 애정 어린 동정심으로 가득하였다. 그분은 요청을 받지 않으셨지만, 자원하여 부드러운 긍휼로 부활 능력을 사용하시어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다. 이것은 잃어버린 죄인들을 구원하시러 오신(눅 19:10) 그분의 유일한 위엄을 나타내며,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사람-구주의 높은 도덕성의 표준을 보여 준다.

누가복음 7장 13절부터 15절까지는 “주님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울지 마십시오.’라고 하시고는 다가가시어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던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청년이여, 내가 그대에게 말합니다. 일어나시오.’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시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구주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과부에게 말씀하시고 관에 손을 대신 것을 본다. 그런 다음에 주님은 과부의 죽은 아들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셨다.

신언노트, 2022 8 21

엘리사는
생명 안에서
은혜의 사역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대표,
하나님의 대행자로
처신하였음

구약에 있는
예표들과 그림자들의 성취이신
그리스도는 또한
참엘리사이시다.
엘리사는
엘리야보다 더 유쾌한
느낌을 주는 신언자였다.
엘리야는
유죄판결 하는 신언자로
여길 수 있으며,
엘리사는
축복하는 신언자로
여길 수 있다.
엘리사가 행한 일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소금으로
나쁜 물을
치료한 것이다.
이 치료는
엘리사가
백성에게
축복이 되는
다정한 느낌을 주는
신언자였음을 나타낸다.
엘리사가
엘리야 뒤에 와서
엘리야를 이은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침례자 요한 뒤에 오셔서
요한을 이으셨다.
참엘리사이신
주 예수님은
달콤하고
즐거움을 주는 신언자,
축복의 신언자이시다.

엘리사는
생명 안에서
은혜로운 기적들을 행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엘리야는
비가 내리지 않도록
하늘을 닫히게 한 것과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그 위에 부어진 물을
삼켜 버리게 한 것과 같은
몇 가지 큰 기적들을 행하였다.
그러나 엘리사가 와서
엘리야를
대신하게 되었을 때,
그는
기이한 일들을
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사는
생명 안에서
은혜로운 기적들을
행하였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적들을 주의하지만,
은혜와 생명의 문제는
소홀히 하거나
은혜와 생명의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얕은 방식으로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은혜를 매우 많이 강조했다.
로마서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은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것에
이른다.

은혜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하시는
하나님이다.
이러한 은혜는
신성한 생명을 가져오는데,
이 신성한 생명은
풍성하고 높으며
심지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공동 왕들이 되게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신성한 생명 안에서
우리가
왕들로 다스리게 한다는 것을
믿는 이들에게 말해 주는
메시지를 거의 들을 수 없다.

여리고는
사탄을 상징하며,
사탄과 함께한 모든 것은
물을 포함하여
죽음이다.
그러나 여리고의 나쁜 물은
엘리사의 말에 따라
치료받았고
좋은 물,
즉 생명을 주는 물이
되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이었다.
이 기적의 의미는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이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은
요한복음에 언급된
주님의 모든 기적을
지배하는 원칙이며,
요한복음 3장부터 11장까지에서
그분께서 처리하신
모든 사례를
지배하는 원칙이다.
열왕기하 2장에서
엘리사가 행한 기적과
요한복음 2장에서
주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의미는 동일하게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엘리사는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불러내었다.
특히 그는
한 그릇에서
많은 그릇의
기름을 산출했을 때,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불러내었다.
주 예수님도
원칙적으로 동일한
일을 하셨다.
마태복음 14장과 15장에서
주님은
얼마 되지 않은
떡과 물고기로
수천 명을 먹이셨다.

이 점에서도 엘리사는
신약 시대의
주 예수님의 예표였다.
예표로서
엘리사는
그 어떤 신언자보다도
실재이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같은 일을 하였다.
원칙적으로,
엘리사와 주 예수님은
생명 안에서
은혜로운 기적들을 행하는
같은 일을 하였다.

엘리사는 또한
죽은 사람을
죽음에서 부활시켰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을 부활시키셨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불러내는 것과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단지 기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일들은
생명을 가져오는 은혜로서,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게 한다.

엘리사의 제자들은
식량이 부족했을 때,
독성을 지닌
야생 박으로
죽을 끓였다.
엘리사는
야생 박의 독성을
가루로 제거하였다.
원칙적으로,
주 예수님도
그분의 제자들에게
같은 일을 하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경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고 경계하십시오.”
(마 16:6-12)
그리고 그분은
고운 가루이신
그분 자신으로
제자들을 치료하셨다.

우리 가운데에는
니 형제님의 사역도 있다.
니 형제님이 젊었을 때
형제님의 사역은
서양 선교사들에게 거절당했지만,
오늘날에는
전 세계의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졌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과거 칠십여 년 동안
성경의 모든
핵심적이고 중요한 계시가
워치만 니 형제님의 사역과
나의 사역을 통해
다루어졌다.
나는
우리가
순수하고 건강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독성을 지닌
야생 박’을 수집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를
권한다.

열왕기하 6장
1절부터 7절까지에서
엘리사는
나뭇가지를 사용하여
물에 빠진
도끼머리를
떠오르게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그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죽음의 물에 빠진
죄인들의 잃어버린 능력을
회복시키시는 것을
상징한다.
죄인들인 우리는
우리의 능력인
‘도끼머리’를 잃어버렸지만,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그분의 십자가인
‘나뭇가지’를 사용하셔서
이 잃어버린 능력을
회복시키셨다.

이상의 모든 것에 따르면,
우리는
엘리사가
그리스도의 매우 정확한 예표임을
볼 수 있다.
엘리사는
예표로서
시대를 바꾸었고,
주님은
성취로서
동일한 일을 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바뀐 시대,
즉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성취하는 시대에 있다.

구주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은
다시없는 애정 어린 동정심으로
가득하였다.
그분은
요청을 받지 않으셨지만,
자원하여
부드러운 긍휼로
부활 능력을 사용하시어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다.
이것은
잃어버린
죄인들을 구원하시러 오신
그분의 유일한 위엄을 나타내며,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사람-구주의
높은 도덕성의
표준을 보여 준다.

누가복음 7장
13절부터 15절까지는
“주님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울지 마십시오.’라고 하시고는
다가가시어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던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청년이여,
내가 그대에게 말합니다.
일어나시오.’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시니”
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구주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과부에게 말씀하시고
관에 손을 대신 것을
본다.
그런 다음에 주님은
과부의 죽은 아들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셨다.

엘리사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신성한 치유의
기적을 베풀었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은
기적적인 치유를
받지 못하였다.

엘리사는 비록
몸은 죽었지만 여전히
영 안에서 사역하여
죽은 한 사람을 살렸다.
심지어 죽은 엘리사도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접촉하는 사람은
살아난다.
거듭남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접촉하여
살아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모두
고난을 당할 때
외적인 은사의
능력 아래 있기보다는
오히려 내적인 생명의
훈련 아래 있었다.
전자는
능력 곧 기적적인 능력이 있는
은사의 문제이고,
후자는
생명 안에 있는
은혜의 문제이다.
교회가
하락해 갈 때,
또 사람이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을 때에
능력이 있는 은사보다는
생명 안에 있는 은혜가
더 많이 필요하다.

신약에 따르면,
기적적인 은사는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
한자리를 얻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가
하락이나 박해를
견디기 위해서는
기적적인 은사나 능력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붙잡은
영원한 생명만이
유력하다.
이 생명으로
우리는
하락과 박해를
견딜 수 있다.

바울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디모데의 질병과
드로비모의 병을
돌본 것은 다소
그가
믿지 않는 이와 같이
행동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성경에는
그가
병을 고치기 위해
기도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그는 분명히
병 고치는 은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했으며,
드로비모는
밀레도에 남겨 두었다.
바울은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그의 동역자들을 돌보았다.
그는
과시하기 위해
구경거리가 될 만한
어떤 일을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과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시험과 시련과 박해와
공격과 반대를
견딜 수 있는
영원한 생명만을
강조해야 한다.
견고한 기초는
서 있다.
이러한 입지는
기적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은혜로 있는
영원한 생명에
달린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구성하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인
강한 영과
하나님의 은혜로
결론을 짓는 것을
본다.
교회의 타락에
대처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디모데후서는
우리의 영을
대단히 강조한다.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는
능력의 영과
사랑의 영과
맑은 생각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를
부채질하여
불타오르게 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주님의 생명을 분배하는
은혜를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다.
결론 부분에서
이 책은
주님께서
우리의 영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를 축복한다.
주님께서
우리의 영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하락시키는
흐름에 대항해
서기 위하여,
또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영과
장비시키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하여,
주님을
은혜로 누릴 수 있다.

하나님과 파라오 사이에
일어난 충돌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합당한 방법을
배울 수 있다.
합당한 방법은
수고하거나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대표하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보냄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분께 보냄을 받아야 한다.

모세는
싸우지 않았고
심지어 힘들게 일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대표로서
그는
단지 몇 번이고
파라오를 보러 갔을 뿐이다.
모세는
스스로 가지 않았다.
그는
매번 갈 때마다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이로서
갔다.
더 나아가 그는
파라오에게
스스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주님께서
그에게 말하라고 하신 것을
말하였고,
파라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렸다.
그러므로 사실상 파라오는
모세의 말을 듣고 있거나
모세를 상대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파라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고
하나님을 상대하고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사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방법은 이렇게
하나님의 대표가 되는 것이다.

나는
동역자들에게
우리가
너무 많이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이것은
우리가
게으르거나
나태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접촉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일을 위해
너무 많이 기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을 접촉하고,
그분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느낌을 감지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의 존재를
적시실 때까지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을 대표하게 될 것이고,
그분은
우리를 보내실 것이다.
그것은
달음질하는 사람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원하는 사람에게
속한 것도 아니며,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는
달리거나 원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필요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이며,
그분께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사도는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
사도는
자신이 대표하는 분에게서
보냄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인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대표로서
그곳에 있다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보잘것없으며
매우 약하다.
사실상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대표한다.
하나님의 대표들인
우리는
자신의 말을 하거나
자신의 일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가시나무 떨기이며,
주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타오르고 있는 불이시다.
불과 가시나무 떨기는
하나이다.
우리가
이 실재 안에 있을 때,
가시나무 떨기와 불을
구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6장 17절의
바울의 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 영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합당한 길은
우리가 사랑하고 섬기는 분의
대표가
바로 우리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자신에 의해 가지 않고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간다.

출애굽기의 이 장들에서
우리는
고집 센 파라오와
하나님의 대표인 모세를
모두 본다.
파라오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자신을
주권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셨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서
그분을 대표하고
그분의 뜻을 집행할
한 사람을 얻으셨다.
우리 중 누구도
파라오가 아니고,
우리 모두가
주님과 하나인
모세인 것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하자!
주님의 주권과 긍휼 안에서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주님과 함께 가고
그분을 대표하며
그분의 뜻을 집행한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주권으로 인해
그분께 경배하고,
그분의 긍휼로 인해
그분께 감사드리기
바란다!

사무엘의 사역의 말기,
곧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일으켜졌을 때,
사무엘은
가장 높은 위치에
도달하였다.
우리는
그보다 위에 계신 분은
오직 한 분뿐이었고,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의 대표였던 사무엘이
하나님의 대행자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움직이시고 행동하고자 하셨지만,
그분께는
대표가 필요하셨다.
그래서 사무엘은
신언자와 제사장과 사사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대언자와
하나님의 행정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대행자였다.

항해 내내,
그리고 이제 몰타라는 섬에서
바울은 확실히
그 영 안에서
행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육체가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인
생명을 살았다.
사실상 바울의 생활은
생명 주시는 영의
표현이었다.
바울은
일상생활의 모든 상황에서 바로
그가 전파한 그리스도의
표현이었다.
그는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
곧 육체가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전파했으며,
몰타섬에서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이신
이러한 그리스도를
살았다.
이것은
나중에 쓴
빌립보서 1장
20절과 21절 상반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에서
나타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어떤 일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매사에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를 살고
그분을 확대하는 것만을
관심했다.
바울은
그분을 살았고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확대했다.
우리는
바울의 생활에 관한
누가의 기록을 읽을 때,
그의 생활이
육체가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하나님께서 높이신
그리스도의 완결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이었음을
본다.

사도가
오랫동안 감금된 채
순탄하지 않은
항해를 계속하는 동안,
주님은
사도를
그분의 초월 안에
있게 하시고
염려가 없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신성한 속성들을 표현하는
최고 수준의 인간 미덕을 지닌
이러한 삶은
완전히 위엄 있는 삶이었으며,
수년 전에
주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서 사셨던 삶과
닮은 삶이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신성하게 부요해진 인성 안에서
또다시 이 땅에 사시는 것이었다!
이것은 복음서들에서 사셨던,
놀랍고 탁월하고 비밀한
하나님-사람께서
그분의 많은 지체 중
한 사람을 통해
사도행전에서
계속해서 사시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육체가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하나님께서 높이신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증인이었다.
바울은
항해하는 동안
그리스도를 살며
확대했다.

로마에서 온 형제들의
따스한 환영과
보디올에 있는 형제들의
사랑스러운 돌봄은
초기에
교회들과 사도들 사이에 있었던
아름다운 몸의 생활을
보여 준다.
이러한 생활은
사탄이 어둡게 한 땅,
곧 사람이 거주하는 땅 위에 있는
하늘에 속한
왕국 생활의 일부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도가 결박당한 죄수로서
사탄이 점령한 제국의
어두운 수도(首都)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 것 같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진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이 땅 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왕국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
곧 몸의 생활에 참여하는
또 다른 부분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는 사탄의 제국 안에서
종교의 박해를 받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교회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이것은
그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
절대적으로 하나였다.
바울은
하나님과 하나였기 때문에,
고린도 사람들이
모든 환경과 상태와 상황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데
도움을 받도록
그와 같은 방식으로
질문들에 답변했다.
바울은
결혼에 관한
어떤 질문들에 대답할 때,
어떤 것을 시도하거나
바꾸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대답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기를 원하고
실제로 그분과 하나라면,
우리는
어떤 변화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며,
특히 결혼 생활과 관련한
변화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인 신언자 엘리사는
그의 사역에서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대표,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처신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인
우리도
그와 동일하게
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살고
그분과 하나 된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그러한 사람들은 결국
교회가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살고
하나님과 하나인
단체적인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며,
그분께서
영원 안에서
얻으려고 목적하셨던 것이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자신과 그의 동역자들이
그러한 사람들이었음을
그들에게 보여 준다.
모든 사도는
하나님과 하나였고
그리스도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심지어
어떤 장소에 가려고
결정하는 것과 같은
사소한 문제까지도
바울은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결정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떠나거나
하나님과 분리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그리스도께 접붙이심으로써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있었고
신실하신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기름부음 받으신 분께
접붙여졌기 때문에,
부활의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고
부활 생명을
살 수 있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기름부음 받으신 분의
일부임을 의미한다.

기름부음은
도장 찍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기름부음 아래 있을 때,
기름부음은
도장 찍음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된다.
더욱이 도장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
도장은 형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실 때,
그 기름부음은
도장 찍음이 된다.
고무도장이
잉크의 요소를
종이에 바르는 것과 같이,
기름부음은
신성한 본질을
우리 안으로 가져온다.
먼저 하나님은
기름부음을 통하여
그분 자신의 본질을
우리에게 더하신다.
그런 다음 이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본질을
우리에게 도장 찍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 붙이신
결과는 세 가지이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요소를
우리 안으로 나누어 주는
‘기름부음’이고,
둘째로는
신성한 요소가
형태를 이루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도록 하는
‘도장 찍음’이며,
셋째로는
하나님을
완전히 맛보는 것에 대한
견본과 보장이 되도록
우리에게
미리 맛보게 하는
‘보증’이다.
우리에게
기름이 부어졌고
도장이 찍혔으며
우리가
보증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고
그리스도를
살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변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를 살도록
자격을 갖추었고
장비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좋은 땅을 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움직임 안에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동역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신을 바라보았다면,
자신에게는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능성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었으며,
그분께는
그분의 선민이
그분의 움직임 안에서
그분과 동역함으로써
그분의 경륜을 수행하는 것이
필요했고,
그분의 선민이
그분의 갈망 안에서
그분과 동역함으로써
거대한 바퀴인
그분의 경륜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이
육체 되심의 원칙이다.
특히 이것은
이 땅을 강탈하는
사탄의 세력을
멸망시키기 위한
육체 되심의 원칙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의 강탈하는 손에서
땅을 되찾으시기 위해서는
육체 되심의 원칙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완전히 협력하고
동역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 안에서,
그리고 땅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원하시지만,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그분은
우리가
육체 되심의 원칙에 따라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을
필요로 하신다.

1일

왕하 2:21 엘리사가 수원지로 가서 소금을 그곳에 뿌리며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물을 치료하였으니 다시는 물 때문에 죽거나 씨가 마르는 일이 없을 것이다.’ ”

롬 5:17 … 은혜를 넘치게 받고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사람들은 더욱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릴 것입니다.

구약에 있는 예표들과 그림자들의 성취이신 그리스도는 또한 참엘리사이시다(왕하 5:9, 눅 4:27). 엘리사는 엘리야보다 더 유쾌한 느낌을 주는 신언자였다. 엘리야는 유죄판결 하는 신언자로 여길 수 있으며, 엘리사는 축복하는 신언자로 여길 수 있다. 엘리사가 행한 일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소금으로 나쁜 물을 치료한 것이다(왕하 2:19-21). 이 치료는 엘리사가 백성에게 축복이 되는 다정한 느낌을 주는 신언자였음을 나타낸다. 유죄판결 하는 신언자로서 엘리야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책망하고 심지어 그들을 ‘독사의 자손들’(마 3:7)이라고 했던 침례자 요한의 예표였다. 엘리사가 엘리야 뒤에 와서 엘리야를 이은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침례자 요한 뒤에 오셔서 요한을 이으셨다. 참엘리사이신 주 예수님은 달콤하고 즐거움을 주는 신언자, 축복의 신언자이시다.

엘리사는 생명 안에서 은혜로운 기적들을 행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엘리야는 비가 내리지 않도록 하늘을 닫히게 한 것과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그 위에 부어진 물을 삼켜 버리게 한 것과 같은 몇 가지 큰 기적들을 행하였다. 그러나 엘리사가 와서 엘리야를 대신하게 되었을 때, 그는 기이한 일들을 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사는 생명 안에서 은혜로운 기적들을 행하였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적들을 주의하지만, 은혜와 생명의 문제는 소홀히 하거나 은혜와 생명의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얕은 방식으로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은혜를 매우 많이 강조했다. 로마서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은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것에 이른다.

은혜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하시는 하나님이다. 이러한 은혜는 신성한 생명을 가져오는데, 이 신성한 생명은 풍성하고 높으며 심지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공동 왕들이 되게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신성한 생명 안에서 우리가 왕들로 다스리게 한다는 것을 믿는 이들에게 말해 주는 메시지를 거의 들을 수 없다.

여리고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물이 나빠 땅은 씨가 말라 가고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수원지로 가서 소금을 그곳에 뿌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물을 치료하였으니 다시는 물 때문에 죽거나 씨가 마르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왕하 2:21) 여리고는 사탄을 상징하며, 사탄과 함께한 모든 것은 물을 포함하여 죽음이다. 그러나 여리고의 나쁜 물은 엘리사의 말에 따라 치료받았고 좋은 물, 즉 생명을 주는 물이 되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이었다(2:3-11). 이 기적의 의미는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이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은 요한복음에 언급된 주님의 모든 기적을 지배하는 원칙이며, 요한복음 3장부터 11장까지에서 그분께서 처리하신 모든 사례를 지배하는 원칙이다. 열왕기하 2장에서 엘리사가 행한 기적과 요한복음 2장에서 주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의미는 동일하게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엘리사는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불러내었다(왕하 4:1-7, 8-17, 42-44, 비교 마 14:14-21, 15:32-39, 롬 4:17하). 특히 그는 한 그릇에서 많은 그릇의 기름을 산출했을 때,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불러내었다. 주 예수님도 원칙적으로 동일한 일을 하셨다. 마태복음 14장과 15장에서 주님은 얼마 되지 않은 떡과 물고기로 수천 명을 먹이셨다.

이 점에서도 엘리사는 신약 시대의 주 예수님의 예표였다. 예표로서 엘리사는 그 어떤 신언자보다도 실재이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같은 일을 하였다. 원칙적으로, 엘리사와 주 예수님은 생명 안에서 은혜로운 기적들을 행하는 같은 일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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