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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에스라의 사역과 느헤미야의 인도 직분의 내재적인 의미 ― 새 예루살렘을 살아 내고 이루어 냄으로써 하나님의 집이자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를 건축함

에스라의 사역의 내재적인 의미는 ‘정화’와 ‘교육’과 ‘재조성’이라는 단어로 구체화되고, 느헤미야의 인도 직분의 내재적인 의미는 ‘분별’과 ‘보호’와 ‘표현’이라는 단어로 구체화된다. 우리는 하늘에서의 사역을 수행하시는 주님과 협력하여, 이러한 내재적인 의미에 따라 새 예루살렘을 살아 내고 이루어 냄으로써, 하나님의 집이자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를 건축해야 한다.

시대의 사역 안에서 시대의 이상에 따라 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새 예루살렘을 살아 내고 이루어 내는 것이다. “성벽은 벽옥으로 건축되어 있었고, 그 성은 맑은 유리와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 계 21:18.

성이 맑은 유리와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거룩한 본성을 지니신 하나님으로 정화되는 것이 필요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의 생각에 적용함으로 교육받는 것을 통해 빛 비춤 받는 것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지고 빛 비춤을 받아,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고려하시는 것들과 하나님의 길들에 대해 우리가 분명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건축하는 일’은 우리를 삼일 하나님으로 재조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일이다. 이러한 일의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으로 재건축되고 하나님을 다른 이들 안으로 공급하여,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그들의 존재 안으로 건축하셔서 그들을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 존재들이 되게 하실 수 있게 한다.

성벽을 포함한 성은 하나님의 머리의 권위 아래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인 새 예루살렘을 상징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분별해 주고 하나님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성벽이 벽옥(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으로 되어 있고 성이 금(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 그분의 유일한 표현을 위해 우리를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그분과 똑같이 만드는 것임을 계시한다.

새 예루살렘을 살아 내고 이루어 내는 것은 에스라의 사역과 느헤미야의 인도 직분의 내재적인 의미 안에서 살고 봉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혼합에서 정화되는 과정에 머물면서, 주님과 그분의 영원한 경륜의 권익을 우리의 유일한 목표로 취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추시고 드러내시고 심판하시는 과정을 통해, 십자가로 종결되고 제해지는 것을 통해, 피로 깨끗하게 되고 씻기는 것을 통해, 그 영께서 흐르시고 적시시는 것을 통해 정화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안에 있는 생명수의 씻는 과정을 통해 정화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더 많이 있을수록 더욱더 순수하게 된다.

레위기 19장 19절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어떤 혼합도 없이 그 종류대로 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계시한다.

가축을 혼합하여 교미시키지 않는 것은 생명에는 혼합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생명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를 따라 살지 말아야 한다.

씨를 혼합하지 않고 뿌리는 것은 말씀의 사역에서 오직 한 종류의 씨 곧 한 종류의 가르침을 뿌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가르침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관한 유일한 가르침이다.

혼합된 재료로 짠 옷감을 사용하지 않고 의복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혼합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의 생명을 사는 사람은 구약의 규례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되며, 주님께 속한 사람은 이방인의 관습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은 “여러분이 진리에 순종하여 자기의 혼을 정결하게 함으로써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혼(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이 정결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혼이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것에서 구출되어, 단일한 대상과 유일한 목표이신 하나님께 고정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내용이자 실재인 진리에 순종할 때, 우리의 혼 전체는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고, 우리의 혼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정결하게 된다.

혼을 정결하게 할 때, 우리의 온 존재가 하나님께 집중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정결하게 된 결과로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사람을 마음에서부터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 곧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진리로 교육할 수 있도록 교육받아야 한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이 사도들의 가르침, 곧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건강한 가르침에 따라 건축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에 능통했는데, 이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경륜과 연결되어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시자, 하나님의 증거, 하나님의 묘사, 하나님의 표현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우리가 기록된 말씀 안에서 살아 있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감으로써, 그분은 적용된 말씀이 되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주입받아 예수님의 증거가 되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경륜을 가르치는 유일한 사역 안에 머묾으로써, 우리는 말씀의 내재적인 의미를 이해하여 생명의 빛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문화, 곧 새사람의 하나님-사람의 문화 안에서 ‘유다 말’ 곧 새 언어를 사용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은혜, 곧 우리에게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시는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으로 재조성되어야 한다.

열두 사도는 신약의 은혜를 대표하며, 이것은 은혜가 새 예루살렘을 산출하기 위한 근원과 요소와 수단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은혜 위에 은혜로 조성되고, 은혜에 의해 수고하며, 은혜를 분배하고, 은혜의 말씀을 공급해야 한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사람 안으로 조성하심으로 사람을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그분과 똑같이 되게 하심으로써 건축된다. 그 결과 하나님과 사람은 한 단체적인 실체가 되고 상호 거처가 된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일, 곧 새 예루살렘에 속한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을 계속 이끄시어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의 주요 단계들, 곧 거듭나게 하심과 거룩하게 하심과 새롭게 하심과 변화시키심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하심과 결국 영광스럽게 하심을 통과하게 하실 것인데,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이러한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

이러한 식으로 우리는 한 단계씩 올라가서 결국 가장 높은 지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지점에서 우리는 같아진다. 즉 더 이상 육체도 없고 더 이상 타고난 존재도 없으며, 모두가 영 안에 있고 새 예루살렘에 속한 존재들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의 가장 높은 지점이며, 우리는 그분의 동역자들이다.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은 그분의 갈망의 선한 기쁨에 따라서, 그리고 그분의 경륜 안에 있는 가장 높은 의도를 위해서, 그분 자신을 그분의 선민 안으로 건축하시고 그분의 선민을 그분 자신 안으로 건축하고 계신다. 이것은 그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조성체를 얻으시기 위한 것인데, 이 조성체는 신성과 인성의 연합으로서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이자 그리스도의 몸이며,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표현이자 구속하시는 하나님과 구속된 사람을 위한 상호 거처이다. 이 보배로운 기적적인 구조물의 최종 완결은 영원히 존재하는 새 예루살렘일 것이다.” ― 위트니스 리.

우리는 하나님께로 완전히 분별되어 하나님으로 완전히 적셔짐으로, 교회생활을 위한 거룩한 생활을 하여 거룩한 성이 되어야 한다.

생각이 새로워지고 그 결과 변화될 때, 우리는 세상의 요소로 흠뻑 배인 우리의 본성과 생활에서 분별되고 구원받는다.

우리의 영 안에 살면서 감추어진 만나이신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이겨 하나님의 건축물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는 세상인 바빌론에서 완전히 분별되어야 한다. 바빌론의 특징은 탐심과 속임수와 돈을 사랑하는 것과 연관된, 사업이나 상업의 사악함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없어야 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은 돈을 버는 상업이어서는 안 된다.

사탄은 장사꾼 곧 상인이며, 그의 사상은 자신의 상업적인 원칙에 따른 것이다. 사탄의 상업적인 원칙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대립된다.

바빌론에서 팔리는 상품 중의 첫 번째 항목은 금이고, 마지막은 사람들의 혼이다. ‘사람들의 혼’은 고용되기 위해 자신을 파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장차 올 바빌론을 묘사할 뿐 아니라, 오늘날의 세상을 묘사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직업에 자신의 혼과 자신의 생명, 즉 자기 자신을 팔고 있으며, 자기들의 영원한 운명과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 되어 있는 동안 바빌론 사람들에게서 배운 사업상의 사악함을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바빌론(시날 땅)으로 돌려보내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건축해야 한다.

우리는 어린양의 이기는 피를 통해 성벽을 건축할 수 있다. 어린양의 피는 우리가 회개하고 우리 죄들을 자백하며 하나님께 깨끗하게 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유일한 신약 사역의 한 나팔을 불어서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모든 의결과 함께 주님의 보호하는 경고와 건강한 가르침을 하나님의 양 떼에게 선포함으로 그들을 목양해야 한다. 그럴 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한 이들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몸 안에서 전쟁을 함으로써 교회를 보호하는 성벽을 건축해야 한다.

몸은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를 입고 모든 지체 하나하나를 보호한다. 우리는 몸의 보호와 호위를 받기 위해 몸의 조언과 덮음을 추구해야 한다.

영적 전쟁은 ‘한 사람이 천 명을 뒤쫓고 두 사람이 만 명을 도망치게 할 것이다.’라는 이 원칙을 따른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신성의 풍성의 권익을 보호하고 하나님께서 완결되심으로 성취하신 것들을 보호하는 성벽을 건축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살고 그리스도를 살아 냄으로 그리스도를 확대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표현인 교회를 건축할 수 있다.

성의 벽은 하나님의 표현을 위해 있다. 따라서 ‘성벽을 건축하는 것’(느 2:17)은 하나님의 표현인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다.

오늘날 주님은 그분의 회복 안에서, 자신의 표현인 합당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정상적인 상태를 복원하는 일을 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섞이는 생활 안에서 신성한 삼일성과 연합된 생명을 삶으로써, 우리의 타고난 기질과 자아 모양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말씀 안에 있는 씻는 물로 매일 거룩하게 되고 새롭게 되어, 우리의 신랑이신 그리스도 앞에 그분의 순수하고 영광스러우며 하나님을 표현하는 신부로 세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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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롬 16:20 화평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이 여러분의 발아래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

엡 6:11 마귀의 계략에 대항해 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로 무장하십시오.

신 32:30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않고 여호와가 그들을 넘겨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한 사람이 천 명을 뒤쫓고 두 사람이 만 명을 도망치게 하겠느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몸은 모든 지체 하나하나에게 공급을 한다. 또한 이 몸은 모든 지체 하나하나를 보호한다. 이것은 영적 전쟁에서 특별히 중요하다.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에베소서 6장은 영적 전쟁이 개인의 일이 아니라 교회의 일임을 말한다. 사탄은 개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교회를 두려워한다(마 16:18). 우리는 몸의 위치에 서서 마귀와 맞서야 한다. 심지어 우리가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에도 믿음으로 몸의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원수 앞에서 넘어지는 것은 그들이 단독으로 서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가 단독으로 서는 것은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도록 사탄을 초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를 입는다. 몸의 각 지체는 각자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특징을 합한 것이 완전한 전투 장비이다. 어떤 형제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는 믿음의 방패를 갖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형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그는 그 영의 검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는 모든 지체의 특징을 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전투 장비는 온 교회를 위한 것이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한 가지 기능은 바로 모든 지체를 보호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몸의 덮음이 필요하다. 몸의 덮음이 없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원수에게 노출될 것이다. 고립된 개인은 또한 쉽게 속임을 당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몸의 덮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동료 믿는 이들과 상의해야 한다. 우리는 막연하게 우리에게 몸이 필요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또한 구체적으로 우리의 형제자매들에게 가서 도움을 구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일을 할 때 형제자매와 상의하지도 않고 함께 기도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몸의 보호를 모르는 것이다. 그 결과 결국 넘어지게 된다. 우리는 모두 몸의 보호의 실재를 보아야 하고, 또한 몸의 보호 아래 숨으며 몸의 보호를 받아들여야 한다.

몸을 단지 교리로만 아는 사람은 몸의 조언과 덮음을 구할지 모르지만,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일종의 정책일 뿐 생명이 아니다. 그는 생각날 때는 그렇게 하지만 쉽게 몸을 잊어버린다. 몸의 실재를 보고 체험적으로 몸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결코 몸을 잊지 않는다. 몸이 그들의 생명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몸이라는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에베소서 6장 11절은 우리가 어둠의 군대에 대항하려면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를 입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투 장비는 개별적인 믿는 이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에게 주어진 것이다. ‘완전한 전투 장비’는 오직 몸만이 입을 수 있으며, 단독적인 지체는 입을 수 없다. 영적 전쟁은 ‘한 사람이 천 명을 뒤쫓고 두 사람이 만 명을 도망치게 할 것이다.’(신 32:30)라는 이 원칙을 따른다. 소위 교회가 원수의 군대를 패배시키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생활하고 있고 몸 안에서 기능을 발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계산으로, 한 사람이 천 명을 뒤쫓는다면 두 사람은 마땅히 이천 명을 뒤쫓아야 한다. 그러나 영적인 수학에서는, 한 사람이 천 명을 뒤쫓으면 두 사람은 만 명을 뒤쫓을 수 있다. 두 사람이 합한 힘은 두 사람이 개별적으로 내는 힘의 다섯 배이다. 둘은 최소한의 단체적인 숫자이다. 만일 두 사람이 개별적으로 뒤쫓는다면, 만 명을 패배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원칙이다. 단체적인 몸의 힘은 매우 강하다. 하나님은 단체적인 몸을 중시하신다.

5일

계 2:17 … 이기는 이에게는 내가 감추어진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것이다. 그 돌 위에는 받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새 이름이 적혀 있다.’

슥 5:7-8 (그러자 납 뚜껑이 들려 올려졌는데) 에바 그릇 속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가 말하였다. “이 여자는 악입니다.” …

만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하는 하늘에 속한 양식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만나의 일부는 궤 안에 감추어진 금항아리 안에 보관되었다(출 16:32-34, 히 9:4). 공개된 만나는 주님의 백성이 공개적으로 누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감추어진 만나는 세상적인 교회의 타락을 이기는 이들, 곧 그분을 간절히 찾는 이기는 이들을 위하여 남겨진 특별한 몫이다. 교회가 세상의 길을 가는 동안에도 이러한 이기는 이들은 지성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와 거하며, 이 지성소에서 특별한 몫이신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매일의 공급으로 누린다. 이 약속은 오늘날 합당한 교회생활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장차 올 왕국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간절히 찾고 세상적인 교회의 타락을 이기며 주님의 특별한 몫을 누린다면, 장차 올 왕국에서 감추어진 만나이신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상이 되실 것이다. 만일 오늘날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의 특별한 몫이신 그분을 놓친다면, 장차 올 왕국에서 보상이신 그분을 결코 누리지 못할 것이다.

스가랴서 5장 5절부터 11절까지는 에바 그릇에 대한 이상을 말한다. 에바 그릇은 한 에바를 담을 수 있는 측량 용기로, 장사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데 사용되었다.

“나와 말하던 천사가 … 말하였다. ‘나아오는 이것은 에바 그릇입니다.’ 그가 또 말하였다. ‘이것이 온 땅에 있는 그들의 모양입니다.’ ”(슥 5:5-6) 세계 인구의 많은 비율이 사업이나 상업에 종사한다. 사업의 외양은 그리 나쁘지 않다. 오히려 온 땅에서 상업은 그럴듯한 외양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보겠지만, 사실상 오늘날의 상업은 총체적으로 사악하다.

스가랴서 5장 7절 하반절과 8절 상반절이 계시하는 것은 에바 그릇 속에 앉아 있는 여자가 탐욕과 속임수와 돈에 대한 사랑과 같은, 상업 안에 담겨 있는 사악함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판매자는 돈을 사랑하여 구매자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얻고자 하고, 구매자 역시 돈을 사랑하여 원하는 것을 낮은 가격으로 구입해서 돈을 아끼려고 한다.

스가랴서 5장에 나오는 이상은 요한계시록 18장에 나오는 큰 바빌론의 이상과 일치한다. 이 이상들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상업에 담겨 있는 사악함이 우상숭배와 음행의 형태임을 보여 준다. 사업은 돈 벌기를 열망하는 간음하는 여자이다.

스가랴서 5장 7절과 8절에서 우리는 납 뚜껑 즉 납덩어리를 에바 그릇의 아가리 위로 던져 덮는 것을 본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상업 속에 있는 사악함이 제한받는 것을 상징한다. … 만일 상업 특히 국제 교역을 제한할 수 있다면, 온 땅이 거룩하게 될 것이다.

한 여자가 두 여자가 된 것(슥 5:9상)은 일단 상업에 규제가 없어질 경우 나타날 두 배의 효과를 상징한다.

두 여자의 날개는 황새의 날개 같았고, 두 여자는 날개로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은 에바 그릇을 땅과 하늘들 사이로 들어 올렸다(슥 5:9하). 이 모든 것은 사악한 상업이 신속하게 확산되는 것을 상징한다.

“나와 말하던 천사에게 내가 말하였다. ‘저들이 에바 그릇을 어디로 가져가는 것입니까?’ 그가 내게 말하였다. ‘시날 땅에 그것을 위해 집을 지을 것입니다. 다 준비되면 그것이 제자리에 놓일 것입니다.’ ”(슥 5:10-11)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 되어 있는 동안 바빌론 사람들에게서 배운 사업상의 사악함을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바빌론(시날 땅)으로 돌려보내실 것임을 의미한다. 이 사악함이 바빌론으로 돌아가게 하라. 하나님의 선민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은 정직하고 단순한 생활을 해야 한다.

4일

벧전 5:10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을 그분의 영원한 영광 안으로 부르신 분께서 잠시 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직접 온전하게 하시고, 견고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터를 튼튼하게 하실 것입니다.

요 1:16 우리가 다 그분의 충만에서 받았으니, 은혜 위에 은혜였다.

계 21:14 … 열두 기초…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었습니다.

보석들은 주 영의 변화시키는 일로 말미암아 산출될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으로 조성된다. 은혜는 바로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체현이다. 따라서 은혜로 조성되는 것은 새 예루살렘의 구성 성분이신 그리스도로 조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면 할수록 그리고 그리스도를 얻으면 얻을수록, 그리스도의 신성한 요소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되고 더 많이 새 예루살렘의 구성 성분이 되어,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변화시키신 모든 백성과 함께 건축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인 거룩한 성이 될 수 있다.

요한계시록 21장 14절에서 사도들은 신약의 은혜를 대표하며, 이것은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은혜 위에 건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그 성은 하나님의 은혜 위에 건축된다. 여기에 있는 ‘열두 사도’는 새 예루살렘이 이스라엘로 대표되는 구약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사도들로 대표되는 신약의 성도들로도 구성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거듭난 이들, 거룩하게 된 이들, 새롭게 된 이들(새 사람), 변화된 이들, 그분과 같은 형상을 이룬 이들(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룬 이들), 영광스럽게 된 이들로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새 예루살렘 안에 있을 사람들은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이다.

특별히 하나님은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을 거듭나고, 거룩하게 되고, 새롭게 되고, 변화되고,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심지어 하나님에 의해 영광스럽게 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신다. 이 길에서 우리는 가장 높은 지점에 이를 때까지 한 수준 한 수준 올라간다. 가장 높은 지점에서 우리는 똑같아질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육체가 없고 타고난 존재가 없다. 모두가 영 안에 있다. 모두가 천국 안에 있고, 모두가 새 예루살렘에 속한 존재들이 된다. 우리가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고, 한 수준 한 수준 올라갈 때 결국에는 더 이상 육체가 없고 타고난 존재가 없으며 모두가 영 안에 있는 가장 높은 지점에 이른다. 그것이 새 예루살렘이다. 우리는 오직 새 예루살렘을 이루는 일을 해야 한다.

이 시대를 본받는 것은 세상의 현재 조류를 본받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생각이 새로워짐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변화될수록 육체와 자아와 세상에서 더 구출될 것이다.

어떤 것이 우리를 점유하고 사로잡는다면, 그것이 세상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때가 반드시 와야 한다. “주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저는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로잡는 온갖 것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이 땅에서 저를 점유하거나 사로잡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황이라면, 우리가 여전히 이 땅에 살지라도 세상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음식과 결혼과 의복과 주거와 교통수단이 여전히 필요하겠지만 아무것도 우리를 점유하거나 사로잡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대한 이상을 본다면, 우리는 세상적인 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점유하거나 사로잡는 것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온전히,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역량은 그분을 위한 것이다. 우리 안의 모든 입지와 여지는 그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3일

스 7:6 이 에스라가 바빌론에서 올라왔는데, 에스라는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통달한 율법학자였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의 손이 그의 위에 있으므로 왕은 그의 요청을 모두 들어주었다.

느 13:24 그들 자녀… 중 누구도 유다 말은 할 줄 모르면서 다른 민족의 말을 하였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율법에 통달한 율법학자이기도 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에 통달한 누군가가 백성을 도와, 그들이 다만 일반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라 하나님을 알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스라는 그러한 역량이 있었으므로, 자청하여 왕에게 가서 유대인들이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칙령을 내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구약의 역사서들을 연구할 때, 우리는 이러한 책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경륜에 연결되는지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안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한 백성으로 세우셨고 한 나라로 형성하셨으며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이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경륜과 연결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사람을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셔서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을 산출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과 실재와 목표이시다. 율법은 하나님의 묘사, 하나님의 사진,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증거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과 연결된다. 하나님의 증거인 율법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분, 곧 하나님의 묘사, 하나님의 사진, 하나님의 증거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예표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탐내지 않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묘사이며, 심지어 하나님의 복사판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살고 하나님을 표현해야 했다.

주님의 회복의 새로운 언어에서 육체 되심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사람 안으로 이끄시어 그분의 신성을 인성과 연합시키시고 하나님과 사람을 한 실체가 되게 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새로운 언어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을 이해하기는 쉽지만,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사람 안으로 이끄시어 그분의 신성을 인성과 연합시키신 것을 이해하기는 더 어렵다.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육체 되심에 대한 최고의 해석이다. 육체 되심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이러한 수준에 이르지 않았다면, 우리는 육체 되심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육체 되심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사람과 연합시키시고 한 실체로 만드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깊은 것이다.

새로운 언어에 대한 이와 같은 예들이 많이 있다. 거듭남에 대한 최고의 정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생명으로 그분의 백성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즉 그분의 신성한 생명과 사람의 생명을 접붙이심으로 그들이 한 생명을 갖게 하신 것이다. 새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바뀌는 것이다. 연합된 영과 함께 그리스도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을 관통하여, 우리의 영을 생각의 영으로 만든다. 우리의 영은 우리의 존재의 중심이고, 우리의 혼은 우리의 영을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의 혼의 주요 부분은 우리의 생각이다. 우리가 거듭날 때, 그 영은 우리의 영 안으로 오셔서 우리의 영과 하나 되신다. 그때부터 우리의 영과 하나로 연합되신 그 영은 우리의 생각 안으로, 즉 우리의 혼 안으로 확장되실 기회를 기다리고 계신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언어에 따른 새롭게 됨이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회복 안에서 이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한다. 주님의 회복은 새로운 문화이다. 나는 모든 성도들이 이 새로운 문화의 새로운 어휘 안으로, 새로운 언어와 구변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란다.

2일

엡 5:26 이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말씀 안에 있는 씻는 물로 교회를 깨끗이 하여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벧전 1:22 여러분이 진리에 순종하여 자기의 혼을 정결하게 함으로써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오늘날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 안에 계신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실재, 즉 하나님 자신을 담고 있다. 이러한 실재이신 하나님 자신은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계시는데, 바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읽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체험이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지와 관계없이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읽고, 또한 읽은 이 말씀을 하루 중에 조금이라도 음미해 본다면 우리는 거룩하게 된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읽고 또 읽을 때 우리 안의 세상적인 것들이 모두 제거되며, 우리는 깨끗해지고 거룩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실재를 가져오고 우리 안에서 특별한 효과를 산출하는데, 그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이 혼합된 세상에서 우리를 구출하여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하는 것이다.

세상은 매우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의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를 순수하게 만든다. 이렇게 순수해진 결과가 바로 거룩함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더 많이 있을수록 더욱더 순수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지 않고 세상 안에 있는 사람은 복잡하고 불순하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하나님의 실재를 지닌 이 말씀이 우리 안에서 거룩하게 하는 일을 하여 우리를 하나님께 이르게 할 것이고 이렇게 하여 우리를 순수하게 만들 것이다. 사탄은 혼합된 세상의 왕이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순수함의 하나님이시다. 실재의 말씀은 혼합된 세상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구출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순수함으로 돌아오게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가 된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부터 25절까지에서 우리의 혼을 정결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 안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그 영께서 우리의 기질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죄들을 정결하게 하는 것과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보다 더 깊은 것이다. 죄들을 정결하게 하는 것과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밖의 행위를 정결하게 하는 것이고, 혼을 정결하게 하는 것은 내적 존재를 정결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결하게 하는 것은 에베소서 5장 26절에 나오는 것처럼 말씀으로 씻는 것과 같다.

우리의 혼이 정결하게 되는 것은 우리 마음의 부분들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더럽거나 오염된 모든 것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은 생각, 감정, 의지가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것에서 구출되어, 단일한 대상과 유일한 목표이신 하나님께 고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정결하게 되는 것은 믿음의 내용과 실재인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내용이자 실재인 진리에 순종할 때, 우리의 혼 전체는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고, 이런 식으로 우리의 혼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정결하게 된다. 이것이 거룩하게 하는 진리인 심어진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혼을 더러운 모든 것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 있는 베드로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진리에 순종하여 우리의 혼을 정결하게 한다. 여기에는 혼을 정결하게 함, 순종, 진리라는 세 가지 항목이 있다. 우리는 이것들 중 어느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진리가 무엇인지,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더욱이 베드로는 진리에 순종하여 우리의 혼을 정결하게 함으로써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베드로는 단지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런 다음에 그는 계속해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권한다.

신언노트, 2023 04 02

에스라의 사역과
느헤미야의 인도 직분의
내재적인 의미
― 새 예루살렘을
살아 내고
이루어 냄으로써
하나님의 집이자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를 건축함
에스라의 사역과
느헤미야의 인도 직분의
본질적인 중요성
― 그 새 예루살렘을
살아 냄과
또 일해 냄(산출함, 가져옴)에 의하여
하나님의 집이자
또 하나님의 왕국인
그 교회를 건축함

왕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벽옥처럼 보이시고,
그 새 예루살렘의 성벽 전체는
벽옥으로 건축된다.
그뿐만 아니라
성벽의 첫 번째 기초는
벽옥이다.
요한계시록 21장 11절에 따르면,
벽옥은
‘가장 귀한 보석이고
수정처럼 맑다’.
그 색깔은
풍성한 생명을 상징하는
짙은 녹색임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모습이
벽옥과 같다는 것은
그분의 모습이
풍성한 생명임을 뜻한다.
벽옥은
하나님의 모습이며
또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모습일 것이다.
성 전체의 모습이
하나님과 같은 모습이다.
그 도시의 중심은
벽옥처럼 보이시는,
그 왕좌 위에 계신
하나님이고,
그 성의 둘레는
벽옥으로 건축된
성벽이다.
이것은
그 도시 전체가
그것의 중심에서부터
그것의 둘레까지,
그분의 풍성함 안에 있는
생명의
바로 그 하나님의
한 표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21장 12절은
하나님께로의 분별을 위해
또 하나님의 이익의 보호를 위해
그 성벽이 크고 또 높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성벽의 높이는
백사십사 규빗이다.
일 규빗은
약 사십오 센티미터이므로
성벽의 높이는
약 육십오 미터이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성벽의 길이가
만 이천 스타디온이라고 말한다.
일 스타디온은
약 백팔십오 미터이므로
성벽의 길이는
약 이천이백 킬로미터이다.
이것은 대략
로스앤젤레스에서부터 댈러스까지의
거리이다.
새 예루살렘의 성벽은
만리장성보다
적어도 일곱 배나 높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우리의 큰 성벽은
벽옥으로 건축되어 있고,
이 벽옥은 수정처럼 맑다.
우리의 큰 성벽은
투명하다.
지구상의 어떤 성벽도
새 예루살렘의 성벽과
비교할 수 없다.

새 예루살렘의 성벽에는
일곱 가지가 암시되어 있다.
성벽은
변형과
건축과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표현과
예수님의 증거와
분별과
또 보호를
암시한다(함축한다, 내포한다).
성벽은 항상
어떤 특정 공간을
다른 모든 공간으로부터
분별한다.
성벽은 또한
온갖 종류의
부정적이고 악한 것으로부터
그 안에 있는 것을
보호한다.

성벽의 기초에는
열두 사도들의 이름들이 있다.
각 사도는
하나의 보석으로 상징된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돌’을 뜻한다.
돌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지만
변형된 것은 아니다.
모든 보석들은
변형된 실체들이다.
베드로는 원래
돌이었지만,
결국에는
새 예루살렘의 첫 번째 기초인
벽옥이 되었다.
성벽 그 자체가 벽옥이며,
성벽의 첫 번째 기초도 벽옥이다.
베드로는 단지
돌에 불과했지만,
새 예루살렘에서는
성벽의 기초의 첫 번째 층인
벽옥이다.
이것은
변형을 암시한다.

성벽은 단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천연적인 재료들로
건축되지 않고,
변형된 것들로 건축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옛 창조물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새 창조물로 만드시기 위해
그리스도 안으로 넣으셨다.
우리 모두는
타고난 존재들이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옛 창조물로부터
새 창조물로 변형되었다.
새 예루살렘에는
중국인, 미국인,
스페인인, 멕시코인,
일본인, 한국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독일인이나
또는 다른 어떤 문화나 종족이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완전히 변형될 것이다.
나는 심지어
우리의 색깔도 변형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날에는
우리 모두가
‘녹색’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벽옥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한 색깔을 지닌
한 백성이 될 것인데,
바로 ‘녹색’이 될 것이다!
다른 모든 색깔과
다른 모든 문화는
삼일 하나님의
풍성하고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삼켜질 것이다.
이것이 변형이다.

에스라의 사역의
내재적인 의미는
‘정화’와 ‘교육’과 ‘재조성’이라는
단어로 구체화되고,
느헤미야의 인도 직분의
내재적인 의미는
‘분별’과 ‘보호’와 ‘표현’이라는
단어로 구체화된다.
우리는
하늘에서의 사역을 수행하시는
주님과 협력하여,
이러한 내재적인 의미에 따라
새 예루살렘을
살아 내고
이루어 냄으로써,
하나님의 집이자
하나님의 왕국인
그 교회를 건축해야 한다.

시대의 사역 안에서
시대의 이상에 따라
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새 예루살렘을
살아 내고
이루어 내는 것이다.
“성벽은
벽옥으로 건축되어 있었고,
그 성은
맑은 유리와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 계 21:18.

성이
맑은 유리와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거룩한 본성을 지니신
하나님으로 정화되는 것이
필요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의 생각에 적용함으로
교육받는 것을 통해
빛 비춤 받는 것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지고
빛 비춤을 받아,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고려하시는 것들과
하나님의 길들에 대해
우리가
분명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건축하는 일’은
우리를
삼일 하나님으로 재조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일이다.
이러한 일의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으로 재건축되고
하나님을
다른 이들 안으로 공급하여,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그들의 존재 안으로 건축하셔서
그들을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
존재들이 되게 하실 수
있게 한다.

그것의 성벽을 가지는
그 도시는
하나님의 머리의 권위 아래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인
새 예루살렘을 상징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분별해 주고
하나님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 도시의 성벽이
벽옥(그것의 부유함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되어 있고
그 도시가
금(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
그분의 유일한 표현을 위해
우리를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그분과
똑같이 만드는 것임을
계시한다.

오늘날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 안에 계신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실재,
즉 하나님 자신을
담고 있다.
이러한 실재이신
하나님 자신은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계시는데,
바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읽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체험이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지와 관계없이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읽고,
또한 읽은 이 말씀을
하루 중에
조금이라도 음미해 본다면
우리는
거룩하게 된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읽고 또 읽을 때
우리 안의 세상적인 것들이 모두
제거되며,
우리는
깨끗해지고
거룩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실재를 가져오고
우리 안에서
특별한 효과를 산출하는데,
그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이 혼합된 세상에서
우리를 구출하여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하는 것이다.

세상은 매우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의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를 순수하게 만든다.
이렇게 순수해진 결과가 바로
거룩함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더 많이 있을수록
더욱더 순수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지 않고
세상 안에 있는 사람은
복잡하고 불순하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하나님의 실재를 지닌
이 말씀이
우리 안에서
거룩하게 하는 일을 하여
우리를
하나님께 이르게 할 것이고
이렇게 하여 우리를
순수하게 만들 것이다.
사탄은
혼합된 세상의 왕이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순수함의 하나님이시다.
실재의 말씀은
혼합된 세상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구출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순수함으로
돌아오게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가 된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부터 25절까지에서
우리의 혼을 정결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 안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그 영께서
우리의 기질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죄들을 정결하게 하는 것과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보다
더 깊은 것이다.
죄들을 정결하게 하는 것과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밖의 행위를 정결하게 하는 것이고,
혼을 정결하게 하는 것은
내적 존재를 정결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결하게 하는 것은
에베소서 5장 26절에 나오는 것처럼
말씀으로 씻는 것과 같다.

우리의 혼이
정결하게 되는 것은
우리 마음의 부분들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더럽거나 오염된 모든 것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은
생각, 감정, 의지가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것에서 구출되어,
단일한 대상과
유일한 목표이신
하나님께 고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정결하게 되는 것은
믿음의 내용과 실재인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내용이자 실재인
진리에 순종할 때,
우리의 혼 전체는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고,
이런 식으로 우리의 혼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정결하게 된다.
이것이
거룩하게 하는 진리인
심어진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혼을
더러운 모든 것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 있는
베드로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진리에 순종하여
우리의 혼을
정결하게 한다.
여기에는
혼을 정결하게 함,
순종,
진리라는
세 가지 항목이 있다.
우리는
이것들 중 어느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진리가 무엇인지,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더욱이 베드로는
진리에 순종하여
우리의 혼을 정결하게 함으로써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베드로는 단지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런 다음에 그는 계속해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권한다.

새 예루살렘을
살아 내고
이루어 내는 것은
에스라의 사역과
느헤미야의 인도 직분의
내재적인 의미 안에서
살고
봉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혼합에서
정화되는 과정에 머물면서,
주님과
그분의 영원한 경륜의
이익을(중요성을, 관심사를)
우리의 유일한 목표로
취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추시고 드러내시고 심판하시는
과정을 통해,
십자가로
종결되고
제해지는 것을 통해,
피로 깨끗하게 되고
씻기는 것을 통해,
그 영께서
흐르시고
적시시는 것을 통해
정화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안에 있는
생명수의 씻는 과정을 통해
정화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더 많이 있을수록
더욱더 순수하게 된다.

레위기 19장 19절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어떤 혼합도 없이
그 종류대로 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계시한다.

가축을
혼합하여 교미시키지 않는 것은
생명에는
혼합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생명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를 따라
살지 말아야 한다.

씨를
혼합하지 않고 뿌리는 것은
말씀의 사역에서
오직 한 종류의 씨
곧 한 종류의 가르침을
뿌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가르침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관한
유일한 가르침이다.

혼합된 재료로 짠
옷감을 사용하지 않고
의복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혼합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의 생명을 사는 사람은
구약의 규례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되며,
주님께 속한 사람은
이방인의 관습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은
“여러분이
진리에 순종하여
자기의 혼을
정결하게 함으로써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혼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이
정결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혼이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것에서 구출되어,
단일한 대상과
유일한 목표이신
하나님께 고정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내용이자 실재인
진리에 순종할 때,
우리의 혼 전체는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고,
우리의 혼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정결하게 된다.

혼을 정결하게 할 때,
우리의 온 존재가
하나님께 집중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며,
생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정결하게 된 결과로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사람을
마음에서부터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율법에 통달한
율법학자이기도 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에 통달한 누군가가
백성을 도와,
그들이 다만
일반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라
하나님을 알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스라는
그러한 역량이 있었으므로,
자청하여
왕에게 가서
유대인들이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칙령을 내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구약의 역사서들을 연구할 때,
우리는
이러한 책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경륜에 연결되는지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안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한 백성으로 세우셨고
한 나라로 형성하셨으며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이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경륜과
연결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사람을
(신격 안에서가 아니라)
생명 안에서 또 본성 안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셔서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을
산출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과 실재와 목표이시다.
율법은
하나님의 묘사,
하나님의 사진,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증거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과 연결된다.
하나님의 증거인 율법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분,
곧 하나님의 묘사,
하나님의 사진,
하나님의 증거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예표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탐내지 않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묘사이며,
심지어 하나님의 복사판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살고
하나님을 표현해야 했다.

주님의 회복의
새로운 언어(표현) 안에서
육체 되심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사람 안으로 이끄셔서
그분의 신성을
인성과 섞으시고
하나님과 사람을
한 실체가(실재가, 존재가)
되게 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 새로운 언어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을
이해하기는 쉽지만,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사람 안으로 이끄셨고
또 그분의 신성을
인성과 섞으신 것을
이해하기는 더 어렵다.
신성과 인성의 섞임이
육체 되심에 대한
최고의 해석(설명, 통역)이다.
만약 육체 되심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이 높이(절정)에 이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잘 알지 못한다.
육체 되심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사람과 섞으셔서
그분 자신을
사람과 한 실체로
만드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깊다.

새로운 언어에 대한
이와 같은 예들이
많이 있다.
거듭남에 대한
최고의 정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생명으로
그분의 백성을
거듭나게 하셨다는 것,
즉 그분의 신성한 생명과
사람의 생명을
접붙이셔서
한 생활을
가지게 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새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바뀌는(변하는) 것이다.
그 섞인(연합된) 영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을 관통하고,
우리의 영을
우리의 생각의 영으로 만든다.
우리의 영은
우리의 존재의 중심이고,
또 우리의 혼은
우리의 영을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의 혼의 주요 부분이
우리의 생각이다.
우리가 거듭날 때,
그 영께서
우리의 영 안으로 오셔서
우리의 영과 하나 되신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우리의 영과 하나로 섞이시는
그 영께서
우리의 생각 안으로,
즉 우리의 혼 안으로
퍼지실(펼쳐지실) 그 기회를
기다리고 계신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언어에 따른
새롭게 됨이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주님의 회복 안에서
이 새로운 언어를(표현을)
알아채기를(골라내기를, 익히기를)
배워야만 한다.
주님의 회복은
한 새로운 문화이다.
나는
그 모든 성도들이
이 새로운 문화의
새로운 어휘,
새로운 언어,
또 구변 안으로
들어갈 것을 기대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
곧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에 대한
그 진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교육하도록
교육받아야 한다.

그 거룩한 도시, 곧 그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들은
그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들을 지닌다(가진다).
(이것은)
그 새 예루살렘이
그 사도들의 가르침,
곧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건강한 가르침에 따라
건축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에 숙련되었는데,
이 율법은
하나님의 경륜에 연결된다.
그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증거,
하나님의 묘사,
하나님의 표현이신
그리스도의 한 예표이다.

우리가
그 기록된 말씀 안에서
그 살아 있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다가옴으로써,
그분께서
적용된 말씀이 되셔서
우리가
그분을 주입받아
예수님의 증거가
되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경륜을 가르치는
그 유일한 사역 안에 머묾으로써,
우리는
그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를 이해하여
생명의 빛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그 새로운 문화,
곧 그 새사람의
하나님-사람 문화 안에서(안에 있는)
그 새 언어, 곧 ‘유다 말’을
사용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 보석들은
주 영의
변화시키는 일로 말미암아
산출될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으로
조성된다.
은혜는 바로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체현이다.
따라서 은혜로 조성되는 것은
새 예루살렘의 구성 성분이신
그리스도로 조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면 할수록
그리고 그리스도를 얻으면 얻을수록,
그리스도의 신성한 요소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되고
더 많이 새 예루살렘의 구성 성분이 되어,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변화시키신
모든 백성과 함께 건축됨으로써
그 거룩한 도시,
곧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가 될 수 있다.

요한계시록 21장 14절에 있는
그 사도들은
신약의 은혜를 대표하며,
이것은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은혜 위에 건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한 도시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그 도시는
하나님의 은혜 위에 건축된다.
여기에 있는 ‘(열두) 사도들’은
새 예루살렘이
이스라엘로 대표되는
구약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사도들로 대표되는
신약의 성도들로도 구성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거듭난 이들,
거룩하게 된 이들,
새롭게 된 이들(새 사람),
변화된 이들,
그분과 같은 형상을 이룬 이들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룬 이들),
영광스럽게 된 이들로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새 예루살렘 안에 있을 사람들은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이다.

특별히 하나님은
그분께 선택받은
한 사람을
거듭나고, 거룩하게 되며,
새롭게 되고, 변화되며,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심지어 하나님에 의해
영광스럽게 되는
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신다.
이 길에서 우리는
가장 높은 지점에 이를 때까지
한 수준 한 수준 올라간다.
가장 높은 지점에서 우리는
똑같아질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육체가 없고
타고난 존재가 없다.
모두가
영 안에 있다.
모두가
천국 안에 있고,
모두가
새 예루살렘에 속한
존재들이 된다.
우리가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고,
한 수준 한 수준 올라갈 때
결국에는 더 이상
육체가 없고
타고난 존재가 없으며
모두가 영 안에(in the spirit) 있는
가장 높은 지점에 이른다.
그것이 새 예루살렘이다.
[우리는] 오직
그 새 예루살렘의 일을
해야 한다.

이 시대를 본받는 것은
세상의 현재 조류를
본받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그 세상의 현재의 흐름에
같은 형상이 되지 않고[순응하지 않고])
생각이 다시 새로워짐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우리는 변형될수록
육체와 자아와 세상에서
더 구출될 것이다.

어떤 것이든
그것이
우리를 점유하고
또 우리를 사로잡는다면,
우리에게
그 세상의 한 항목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그 시간이 반드시
와야만 한다.
“주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저는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저는
각각의 모든 종류의 사로잡음에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이 땅 위에서
저를 점유하거나
또는 사로잡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상황일 때,
여러분이 여전히
이 땅 위에 살고 있더라도
여러분은
그 세상과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음식과 결혼과
의복과 주택과
교통 수단을
필요로 하겠지만,
이것들 중에 어떤 것도
우리를
점유하거나 사로잡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세상에 대한 이상을 본다면,
우리는
세상적인 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점유하거나 사로잡는 것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온전히,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역량은
그분을 위한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그 모든 장소, 곧 그 모든 공간은
그분을 위해 있다.

우리는
은혜,
곧 우리에게
생명과 또 각각의 모든 것들이 되시는
과정을 거치신 그 삼일 하나님으로
재조성되어야 한다.

그 열두 사도들은
신약의 은혜를 대표하며,
이것은
은혜가
새 예루살렘을 산출하기 위한
근원과 요소와 수단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은혜 위에 은혜로 조성되고,
은혜에 의해 수고하며,
은혜를 분배하고,
은혜의 말씀을 공급해야 한다.

그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사람 안으로 조성하심으로
사람을
그 신격에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생명과 본성 안에서 계시는 것과
똑같이 되게 하심으로써
건축되며
그 결과 하나님과 사람은
한 단체적인 실체가 될 수 있고
한 상호 거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일,
곧 그 새 예루살렘의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택받은 사람들을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의
주요 단계들
—거듭나게 하심,
거룩하게 하심,
다시 새롭게 하심,
변형시키심,
또 같은 형상이 되게 하심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하심에 이르도록 데려가시기를
진행하실 때,
우리는
우리 안의
움직이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필요가 있다.

이 길 안에서
우리가
한 단계씩 올라가서 결국
그 가장 높은 지점에
도달하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같아진다(동일하게 된다);
거기에 더 이상 육체가 없고
또 더 이상 타고난 존재가 없다;
모두가
영 안에(in the spirit) 있고
또 모두가
그 새 예루살렘의 존재들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의
그 가장 높은 지점이며,
또 우리가
그분의 동역자들이다(동료 일꾼들이다).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은
그분의 갈망의
선한 기쁨에 따라서,
그리고 그분의 경륜 안에 있는
가장 높은 의도를 위해서,
그분 자신을
그분의 선민 안으로 건축하시고
그분의 선민을
그분 자신 안으로 건축하고 계신다.
이것은
그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조성체를 얻으시기 위한 것인데,
이 조성체는
신성과 인성의 한 섞임으로서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이자
그리스도의 몸이며,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표현이자
구속하시는 하나님과
구속된 사람을 위한
상호 거처이다.
이 보배로운 기적적인 구조물의
최종 완결은
영원히 존재하는
새 예루살렘일 것이다.”
― 위트니스 리.

우리는
하나님께로 완전히 분별되어
하나님으로 완전히 적셔짐으로,
교회생활을 위한
거룩한 생활을 하여
거룩한 도시가 되어야 한다.

생각이 다시 새로워지고
그 결과 변형될 때,
우리는
세상의 요소로 흠뻑 적셔진
우리의 본성과 생활에서
분별되고 구원받는다.

만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하는
하늘에 속한 양식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만나의 일부는
궤 안에 감추어진
금항아리 안에 보관되었다.
공개된 만나는
주님의 백성이
공개적으로 누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감추어진 만나는
세상적인 교회의 타락을 이기는 이들,
곧 그분을 간절히 찾는 이기는 이들을 위하여
남겨진 특별한 몫이다.
교회가
세상의 길을 가는 동안에도
이러한 이기는 이들은
지성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와 거하며,
이 지성소에서
특별한 몫이신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매일의 공급으로 누린다.
이 약속은 오늘날
합당한 교회생활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장차 올 왕국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간절히 찾고
세상적인 교회의 타락을 이기며
주님의 특별한 몫을 누린다면,
장차 올 왕국에서
감추어진 만나이신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상이 되실 것이다.
만일 오늘날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의 특별한 몫이신
그분을 놓친다면,
장차 올 왕국에서
보상이신 그분을
결코 누리지 못할 것이다.

스가랴서 5장
5절부터 11절까지는
에바 그릇에 대한
이상을 말한다.
에바 그릇은
한 에바를 담을 수 있는
측량 용기로,
장사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데 사용되었다.

“나와 말하던
천사가 … 말하였다.
‘나아오는 이것은
에바 그릇입니다.’
그가 또 말하였다.
‘이것이
온 땅에 있는
그들의 모양입니다.’ ”
(슥 5:5-6)
세계 인구의 많은 비율이
사업이나 상업에 종사한다.
사업의 외양은
그리 나쁘지 않다.
오히려 온 땅에서 상업은
그럴듯한 외양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보겠지만,
사실상 오늘날의 상업은
총체적으로 사악하다.

스가랴서 5장
7절 하반절과 8절 상반절이 계시하는 것은
에바 그릇 속에 앉아 있는 여자가
탐욕과 속임수와 돈에 대한 사랑과 같은,
상업 안에 담겨 있는
사악함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판매자는
돈을 사랑하여
구매자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얻고자 하고,
구매자 역시
돈을 사랑하여
원하는 것을
낮은 가격으로 구입해서
돈을 아끼려고 한다.

스가랴서 5장에 나오는
이상은
요한계시록 18장에 나오는
큰 바빌론의 이상과 일치한다.
이 이상들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상업에 담겨 있는 사악함이
우상숭배와 음행의 형태임을
보여 준다.
사업은
돈 벌기를 열망하는
간음하는 여자이다.

스가랴서 5장
7절과 8절에서
우리는
납 뚜껑 즉 납덩어리를
에바 그릇의 아가리 위로
던져 덮는 것을 본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상업 속에 있는 사악함이
제한받는 것을 상징한다.
만일 상업 특히 국제 교역을
제한할 수 있다면,
온 땅이
거룩하게 될 것이다.

한 여자가
두 여자가 된 것은 일단
상업에 규제가 없어질 경우 나타날
두 배의 효과를 상징한다.

두 여자의 날개는
황새의 날개 같았고,
두 여자는
날개로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은
에바 그릇을
땅과 하늘들 사이로
들어 올렸다.
이 모든 것은
사악한 상업이
신속하게 확산되는 것을
상징한다.

“나와 말하던 천사에게
내가 말하였다.
‘저들이
에바 그릇을
어디로 가져가는 것입니까?’
그가
내게 말하였다.
‘시날 땅에
그것을 위해
집을 지을 것입니다.
다 준비되면
그것이
제자리에 놓일 것입니다.’ ”
(슥 5:10-11)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 되어 있는 동안
바빌론 사람들에게서 배운
사업상의 사악함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바빌론(시날 땅)으로
돌려보내실 것임을
의미한다.
이 사악함이
바빌론으로 돌아가게 하라.
하나님의 선민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은
정직하고 단순한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의 영 안에 살면서
감추어진 만나이신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이겨
하나님의 건축물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는 세상인
바빌론에서
완전히 분별되어야 한다.
바빌론의 특징은
탐심과 속임수와 돈을 사랑하는 것과 연관된,
사업이나 상업의 사악함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없어야 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은
돈을 버는 상업이어서는 안 된다.

사탄은
장사꾼 곧 상인이며,
그의 사상은
자신의 상업적인 원칙에 따른 것이다.
사탄의 상업적인 원칙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대립된다.

바빌론에서 팔리는 상품 중의
첫 번째 항목은 금이고,
마지막은 사람들의 혼이다.
‘사람들의 혼’은
고용되기 위해
자신을 파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장차 올 바빌론을
묘사할 뿐 아니라,
오늘날의 세상을
묘사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직업에
자신의 혼과
자신의 생명,
즉 자기 자신을 팔고 있으며,
자기들의 영원한 운명과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 되어 있는 동안
바빌론 사람들에게서 배운
사업상의 사악함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바빌론(시날 땅)으로
돌려보내실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몸은
모든 지체 하나하나에게
공급을 한다.
또한 이 몸은
모든 지체 하나하나를 보호한다.
이것은
영적 전쟁에서
특별히 중요하다.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에베소서 6장은
영적 전쟁이
개인의 일이 아니라
교회의 일임을 말한다.
사탄은
개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교회를 두려워한다.
우리는
몸의 위치에 서서
마귀와 맞서야 한다.
심지어 우리가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에도
믿음으로
몸의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원수 앞에서 넘어지는 것은
그들이
단독으로 서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가
단독으로 서는 것은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도록
사탄을 초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께서 주신
전체의 전투 장비를 입는다.
몸의 각 지체는 각자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특징을 합한 것이
전체의 전투 장비이다.
어떤 형제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는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형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그는
그 영의 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는
모든 지체의 특징을
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전투 장비는
온 교회를 위한 것이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한 가지 기능은 바로
모든 지체를 보호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몸의 덮음이 필요하다.
몸의 덮음이 없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원수에게 노출될 것이다.
고립된 개인은 또한
쉽게 속임을 당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몸의 덮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동료 믿는 이들과
상의해야 한다.
우리는
막연하게
우리에게
몸이 필요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또한
구체적으로
우리의 형제자매들에게 가서
도움을 구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할 때
형제자매들과 상의하지도 않고
함께 기도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몸의 보호를
모르는 것이다.
그 결과 결국
넘어지게 된다.
우리는 모두
몸의 보호의
실재를 보아야 하고,
또한 몸의 보호 아래 숨으며
몸의 보호를 받아들여야 한다.

몸을 단지
교리로만 아는 사람은
몸의 조언과 덮음을
구할지 모르지만,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일종의 정책일 뿐
생명이 아니다.
그는
생각날 때는
그렇게 하지만
쉽게 몸을 잊어버린다.
몸의 실재를 보고
체험적으로 몸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결코 몸을 잊지 않는다.
몸이
그들의 생명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몸이라는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에베소서 6장 11절은
우리가
어둠의 군대에 대항하려면
‘하나님께서 주신
전체의 전투 장비’를
입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투 장비는
개별적인 믿는 이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에게 주어진 것이다.
‘전체의 전투 장비’는
오직 몸만이 입을 수 있으며,
단독적인 지체는
입을 수 없다.
영적 전쟁은
‘한 사람이
천 명을 뒤쫓고
두 사람이
만 명을 도망치게 할 것이다.’
(신 32:30)라는
이 원칙을 따른다.
소위 교회가
원수의 군대를
패배시키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생활하고 있고
몸 안에서
기능을 발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계산으로,
한 사람이
천 명을 뒤쫓는다면
두 사람은 마땅히
이천 명을 뒤쫓아야 한다.
그러나 영적인 수학에서는,
한 사람이
천 명을 뒤쫓으면
두 사람은
만 명을 뒤쫓을 수 있다.
두 사람이 합한 힘은
두 사람이 개별적으로 내는 힘의
다섯 배이다.
둘은
최소한의 단체적인 숫자이다.
만일 두 사람이
개별적으로 뒤쫓는다면,
만 명을 패배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원칙이다.
단체적인 몸의 힘은
매우 강하다.
하나님은
단체적인 몸을 중시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건축해야 한다.

우리는
어린양의 이기는 피를 통해
성벽을 건축할 수 있다.
어린양의 피는
우리가
회개하고
우리 죄들을 자백하며
하나님께 깨끗하게 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유일한 신약 사역의
한 나팔을 불어서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모든 의결과 함께
주님의
보호하는 경고와
건강한 가르침을
하나님의 양 떼에게 선포함으로
그들을 목양해야 한다.
그럴 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한 이들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몸 안에서
전쟁을 함으로써
교회를 보호하는
성벽을 건축해야 한다.

그 몸은
하나님께서 주신
전체의 전투 장비를 입고
모든 지체 하나하나를
보호한다.
우리는
몸의 보호와 호위를 받기 위해
몸의 조언과 덮음을
추구해야 한다.

영적 전쟁은
‘한 사람이
천 명을 뒤쫓고
두 사람이
만 명을 도망치게 할 것이다.’라는
이 원칙을 따른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신성의 풍성의
이익을 보호하고
하나님께서
완결되심으로 성취하신 것들을
보호하는
성벽을 건축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살고
그리스도를 살아 냄으로
그리스도를 확대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표현인
교회를 건축할 수 있다.

그 도시의 벽은
하나님의 표현을 위해 있다.
따라서 ‘성벽을 건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표현인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다.

오늘날 주님은
그분의 회복 안에서,
자신의 표현인
합당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정상적인 상태를
복원하는 일을
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섞이는 생활 안에서
신성한 삼일과 섞인
생명을 삶으로써,
우리의 타고난 기질과 자아 모양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말씀 안에 있는
씻는 물로
매일 거룩하게 되고 새롭게 되어,
우리의 신랑이신
그리스도 앞에
그분의
순수하고
영광스러우며
하나님을 표현하는
신부로 세워져야 한다.

1일

계 21:11-12 … 성의 빛은 가장 귀한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그 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이 있었고, …

계 21:18 성벽은 벽옥으로 건축되어 있었고, 그 성은 맑은 유리와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계 4:3 앉아 계신 분의 모습은 벽옥과 … 같았으며, …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은 벽옥과 같으시고, 새 예루살렘의 성벽 전체는 벽옥으로 건축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성벽의 첫 번째 기초는 벽옥이다. 요한계시록 21장 11절에 따르면, 벽옥은 ‘가장 귀한 보석이고 수정처럼 맑다’. 그 색깔은 풍성한 생명을 상징하는 짙은 녹색임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모습이 벽옥과 같다는 것은 그분의 모습이 풍성한 생명임을 뜻한다. 벽옥은 하나님의 모습이며 또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모습일 것이다(계 21:11). 성 전체의 모습이 하나님과 같은 모습이다. 그 성의 중심은 벽옥과 같으신,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이고, 그 성의 둘레는 벽옥으로 건축된 성벽이다. 이것은 그 성 전체가 중심에서 둘레까지, 풍성한 생명의 하나님 자신의 표현이라는 것을 뜻한다.

요한계시록 21장 12절은 하나님께로 분별되고 하나님의 권익을 보호하도록 성벽이 크고 높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성벽의 높이는 백사십사 규빗이다. 일 규빗은 약 사십오 센티미터이므로 성벽의 높이는 약 육십오 미터이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성벽의 길이가 만 이천 스타디온이라고 말한다. 일 스타디온은 약 백팔십오 미터이므로 성벽의 길이는 약 이천이백 킬로미터이다. 이것은 대략 로스앤젤레스에서부터 댈러스까지의 거리이다. 새 예루살렘의 성벽은 만리장성보다 적어도 일곱 배나 높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우리의 큰 성벽은 벽옥으로 건축되어 있고, 이 벽옥은 수정처럼 맑다(21:11). 우리의 큰 성벽은 투명하다. 지구상의 어떤 성벽도 새 예루살렘의 성벽과 비교할 수 없다.

새 예루살렘의 성벽에는 일곱 가지가 암시되어 있다. 성벽은 변화와 건축과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표현과 예수님의 증거와 분별과 보호를 암시한다. 성벽은 항상 어떤 특정 공간을 다른 모든 공간으로부터 분별한다. 성벽은 또한 온갖 종류의 부정적이고 악한 것으로부터 그 안에 있는 것을 보호한다.

성벽의 기초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 각 사도는 하나의 보석으로 상징된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돌’을 뜻한다. 돌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지만 변화된 것은 아니다. 모든 보석들은 변화된 실체이다. 베드로는 원래 돌이었지만, 결국에는 새 예루살렘의 첫 번째 기초인 벽옥이 되었다. 성벽 그 자체가 벽옥이며, 성벽의 첫 번째 기초도 벽옥이다. 베드로는 단지 돌에 불과했지만, 새 예루살렘에서는 성벽의 기초의 첫 번째 층인 벽옥이다. 이것은 변화를 암시한다.

성벽은 단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천연적인 재료들로 건축되지 않고, 변화된 것들로 건축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옛 창조물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새 창조물로 만드시기 위해 그리스도 안으로 넣으셨다. 우리 모두는 타고난 존재들이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옛 창조물로부터 새 창조물로 변화되었다(고후 5:17). 새 예루살렘에는 중국인, 미국인, 스페인인, 멕시코인, 일본인, 한국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독일인이나 다른 어떤 문화나 종족이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완전히 변화될 것이다. 나는 심지어 우리의 색깔도 변화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날에는 우리 모두가 ‘녹색’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벽옥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한 색깔을 지닌 한 백성이 될 것인데, 바로 ‘녹색’이 될 것이다! 다른 모든 색깔과 다른 모든 문화는 삼일 하나님의 풍성하고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삼켜질 것이다. 이것이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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