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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에베소서에 계시된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

거룩한 말씀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에 관한 계시는 교리적인 이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하나님을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은 백성 안으로 그들의 체험과 누림을 위해 분배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은 삼일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의 믿음의 대상만이 아니심을 계시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주관적인 분으로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어 우리의 생명과 생명 공급이 되신다.

성경은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그들의 생명과 생명 공급으로 일해 넣으신다는 통제하는 원칙에 따라 쓰였다.

신성한 삼일성은 성경 전체의 골격이다. 성경 전체, 특별히 에베소서는 신성한 삼일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에베소서만 모든 장이 신성한 삼일성을 기본 요소로 하여 구성되었다.

우리가 삼일 하나님을 모른다면 에베소서의 심오함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이 책의 각 장이 신성한 삼일성을 골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산출과 존재와 성장과 건축과 전쟁에 관한 에베소서의 계시 전체는 신성한 경륜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안으로 신성한 삼일성을 넣어 주는 신성한 분배로 구성된다. 이처럼 에베소서의 중대한 초점은 믿는 이들 안으로 신성한 삼일성을 넣어 주는 신성한 분배이다.

에베소서 1장은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원 안에서 지체들을 선택하시고 미리 정하시고, 아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영 하나님께서 보증으로서 그들에게 도장 찍으시어, 그리스도의 몸 곧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인 교회의 형성을 위하여 그분 자신을 그분의 믿는 이들 안으로 나누어 주셨는지를 밝혀 준다.

에베소서 1장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성의 분배와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전달의 결과를 계시한다.

아버지 하나님의 분배의 결과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말해 주고(엡 1:3-6), 아들 하나님의 분배의 결과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성취를 말해 주며(7-12절), 영 하나님의 분배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목적의 적용을 말해 준다.

초월하신 그리스도는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초월하는 전달은 삼일 하나님의 모든 풍성한 분배를 포함한다. 삼일 하나님의 삼중 분배는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전달 안에 포함되어 있고,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포함한 전달로 완성되고 완결된다.

에베소서 2장은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모든 믿는 이, 곧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아들 하나님을 통하여 영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엡 2:18.

이것은 이 셋이 동시 존재하시고, 상호 내재하시며, 심지어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의 모든 과정을 거치신 후에도 그러하시다는 것을 가리킨다.

성취하시는 분이시요 수단이신 아들 하나님을 통하여, 집행하시는 분이시요 적용이신 영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기원이신 분이시요 우리 누림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

우리는 근원이신 아버지와 과정이신 아들과 흐름이신 그 영의 분배로 지어진 시이다.

걸작품을 산출하는 아버지의 분배와, 새사람을 산출하는 아들의 분배와, 우리를 한 몸 안에서 아버지께 데려가는 그 영의 이끄심은 교회를 건축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에베소서 3장에서 사도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 하나님을 통하여 능력으로 믿는 이들을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기를, 즉 그들의 온 존재를 점유하시기를 기도하며, 믿는 이들이 삼일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신성한 삼일성 안에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분께 참여하는 일의 절정이다.

아버지는 근원이시고, 그 영은 수단이시며, 아들은 목표이시고, 삼일 하나님의 충만은 결과이다.

셋 각각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삼일 하나님의 충만을 위해 행하신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에베소서 4장은 그 영과 주님과 아버지이신 분, 곧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시어 결과적으로 몸의 모든 지체가 신성한 삼일성을 체험할 수 있는지 묘사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삼일 하나님께서 발전하시기 위한 영역이다.

모든 사람 위에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모든 사람을 통과하여 계시는 아들과 모든 사람 안에 계시는 그 영의 신성한 분배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이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고 누릴 수 있게 된다.

이 절들은 한 몸과 한 영과 한 주님과 한 아버지 하나님, 이렇게 네 인격이 한 실체로 함께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이 된 것을 계시한다. 이처럼 삼일 하나님과 몸은 하나 안의 넷이다.

에베소서 5장은 믿는 이들에게 영 하나님의 노래로 아들 하나님이신 주님께 찬양하라고 권유하며, 또 아들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유한다.

이것은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을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함으로써 우리가 삼일 하나님이신 그분을 누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조성되어 사랑과 빛이신 하나님 안에서 행한다.

에베소서 6장은 우리에게 아들 하나님이신 주님 안에서 굳세게 되어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로 무장하고, 그 영의 검을 사용하여 영적인 전쟁을 하라고 가르친다.

아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이시고, 아들 안에 실재화되신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 위에 입는 전투 장비이시며, 영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검이시다.

이렇게 믿는 이들은 영적 전쟁에서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고 누린다.

성경 육십육 권의 계시 전체에 따르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신성한 삼일성은 하나님의 분배를 위해, 즉 하나님을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나누어 주기 위해 계신다. 하나님께서 삼일이신 것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고 일해 넣으실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그 결과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축되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될 수 있으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세상의 왕국이 우리 주님과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이 되어 그분께서 영원무궁히 왕으로서 다스리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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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엡 4:4-6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름을 받았을 때 한 소망 안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침례도 하나입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며,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고, 모든 사람을 통과하여 계시고, 모든 사람 안에 계십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바울은 먼저 한 몸을 말했고, 그다음에 한 영, 한 주님, 한 하나님 곧 아버지를 말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삼일 하나님께서 몸 안에서 발전하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에베소서 4장 6절에서 바울은 한 분 하나님, 모든 사람의 아버지를 말할 때, 아버지께서 모든 사람 위에 계시고, 모든 사람을 통과하여 계시고, 모든 사람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 이것은 삼일 하나님과 몸의 연합을 지적한다.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 가지 위치, 즉 모든 사람 위에 계시고, 모든 사람을 통과하여 계시고, 모든 사람 안에 계시는 것이 가능한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삼일’이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심지어 아버지 하나님도 삼일이시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모든 위치를 소유하고 계신다. 그분은 아버지로서 모든 사람 위에 계시고, 아들로서 모든 사람을 통과하여 계시며, 그 영으로서 모든 사람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비밀한 몸인 교회는 삼일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다.

한 몸, 한 영과 더불어 한 소망이 있다(엡 4:4). 현재 우리의 몸은 아직 육체의 생명 안에 있다. 몸은 아직까지 변형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의 물질적인 몸이 변형되리라는, 즉 영광스럽게 되리라는 소망이 있다. 그날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것이다. 이 영광은 그 영께서 함께하시는 한 몸에게 소망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몸과 한 영과 한 소망을 갖고 있다.

에베소서 4장 5절에서 바울은 계속하여 한 주님을 말한다. 몸이 그 영과 연합되어 있는 한, 몸은 주님과 합해져 있다. 사실 그 영께서 곧 주님이시다(고후 3:17). 우리는 그 영과 주님을 분리할 수 없다. 아들께서 오실 때 아버지도 오시고, 그 영께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도 함께 오신다. 이제 몸은 그 영과 연합되었으며, 그 영은 아들과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실 수 없다. 우리는 그 영과 아들과 아버지를 소유한다. 그러므로 몸이 그 영과 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주님도 소유한다.

주님과 더불어 우리는 한 믿음과 한 침례를 갖는다. 믿음은 우리를 주님과 합하게 한다.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그분과의 유기적인 연결 안으로 들어간다. 이 생명의 연결 안에서 우리는 주님과 한 영으로 합해진다(고전 6:17). 우리가 주님 안으로 믿어 들어갔기 때문에, 믿음은 우리를 주님과 합하게 한다.

침례에는 두 방면이 있다. 한 면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았고, 또 한 면으로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단절되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태어났지만, 침례에 의해 아담에게서 나와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졌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면에서 침례는 끝냄을 뜻하고, 긍정적인 면에서는 연결을 뜻한다. 믿음과 침례에 의해 우리는 아담에게서 나와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졌다. 이제 우리는 주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연결을 갖고 있다.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를 통해 우리 모두는 우리의 영 안에서 신성한 포도주이신 그 영으로 충만해져야 한다(엡 5:18). 우리가 이런 식으로 우리의 영 안에서 충만하게 되면,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로 서로 화답할 것이고(엡 5:19상), 우리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고 시를 읊을 것이며(19하절), 항상 모든 일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우리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감사할 것이다(20절).

아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이시고, 아들 안에 실재화되신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 위에 입는 전투 장비이시며, 영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검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 영께서 우리의 검이시라는 사실은 우리가 말함으로써 전쟁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 모두는 말씀을 말해야 하고, 우리가 들은 진리를 제시해야 한다. 이렇게 신성한 말씀을 말하는 것이 곧 원수를 살육하는 검이다. 내적으로는 능력을 받고 외적으로는 전투 장비로 무장한 단체적인 전투원으로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원수를 대항하기 위해 검을 사용해야 한다.

5일

엡 3:14 이런 이유로, 나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엡 3:16-17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분의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여러분을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해 주시고,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서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9절까지에서 바울은 근원이신 아버지께 기도했다. 그럴 때 아버지는 수단과 통로이신 그 영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강하게 하신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는 움직이시고 일하심으로써 믿는 이들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신다. 마침내 그 결과는 삼일 하나님의 충만이다. 아버지는 근원이시고, 그 영은 수단이시며, 아들은 목표이시고, 삼일 하나님의 충만은 결과이다.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9절까지에 제시된 그림은 삼일 하나님의 매우 아름답고 섬세하며 깊은 동역을 보여 준다. 아버지는 교회라는 운전자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아버지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통로가 되시는 셋째 분이신 그 영에 의해 일하신다. 근원과 통로 모두 목표와 목적이신 아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신다. 더 나아가 아들께서 그분의 모든 믿는 이들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는 것은 아들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셋 각각은 자신을 위해 일하시지 않는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께서 우리 안에서 더욱 깊이 일하시는 것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이다. 신성한 삼일성은 매우 완전하고도 깊은 방식으로 일하심으로써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분의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러분이 금요일 저녁에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낙담해 있고 실망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날은 우울한 날이었다. 아무것도 좋지 않았다. 집에 올 때 여러분은 아내나 자녀들에 대해서도 기쁘지 않다. 여러분이 상황을 고려할수록 그것은 더 나쁘게만 보인다. 그럴 때 여러분은 바울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 그분의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여러분을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해 주시고”. 그러고 나서 여러분은 “사탄아, 나에게서 떠나라! 나는 나의 속사람 안으로 들어가겠다.”라고 선포해야 한다. 여러분이 속사람으로 돌이킨다면 분발되고 강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여러분이 몇 분 동안 기도한다면 한층 더 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강하게 되는 것은 심지어 여러분의 몸의 약함과 피곤함을 삼킬 것이다.

여러분이 피곤하다고 말할 때, 여러분은 옛사람 안에 있는 것이고, 겉사람 안에 있는 것이며, 여러분의 심리 안에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되어야 한다. 겉사람 안에 남아 있지 말라. 여러분은 피곤할지라도 그분은 피곤하지 않으시다.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시는 그분은 여러분보다 훨씬 더 강하시다. 그분은 결코 피곤하지 않으시다. 그분은 여러분이 속사람에 이르도록 여러분을 강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될 때,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는 것은 커다란 문제이다. 이것은 그분 자신께서 우리의 내적 존재 안에 완전히 정착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셨다면, 그분께서 우리 마음의 모든 방을 점유하셨다면, 우리는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거룩하고 심지어 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때, 우리는 영적인 생활에서 강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매우 일반적인 방식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거실’ 한쪽 모퉁이에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분께서 다른 부분으로 움직이실 수 있도록 자유를 드리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로 적셔지지 않았기 때문에 약하다. 우리에게는 생각, 감정, 의지, 양심 안으로 생명이 분배되어 우리 전 존재를 적시는 것이 매우 부족하다. 그러나 우리 내적 존재의 각 부분이 생명의 분배를 통해 그리스도로 완전히 적셔졌다면, 우리는 강하게 될 것이다.

4일

엡 2:10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 창조되었습니다. …

엡 2:15-16 … 이것은 이 둘을 그분 자신 안에서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시어 화평을 이루시려는 것이며, 또한 적대감을 십자가로 소멸하셔서 이 십자가를 통하여 이 둘을 한 몸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엡 2:18 왜냐하면 그분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구원이 하나님의 걸작품을 산출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절에서 ‘걸작품’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포이에마(poiema)’로서 ‘시(poem)’라는 단어로 영어화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詩)이다. 시는 종종 작가의 지혜를 보여 준다. 그것은 작가의 기술, 예술성, 구상을 보여 준다. 우리는 근원이신 아버지와 과정이신 아들과 흐름이신 그 영의 삼중의 생명 분배로 지어진 시들이다. 이러한 삼중의 생명 분배는 우리를 시가 되게 한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삼중의 생명 분배에 의해 우리 삼일 하나님의 걸작품이 되었다.

유대인 믿는 이들과 이방인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 나아간다. 그리스도는 규례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없애 버리셨고,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어뜨리셨으며, 적대감을 십자가로 소멸하셔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화목하게 하셨다. 또한 그리스도는 피를 흘리심으로써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구속하시고, 그들을 하나님께 이끄셨다.

먼저, 유대인 믿는 이들과 이방인 믿는 이들은 모두 한 몸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엡 2:16). 이것은 위치적인 문제였다. 그러고 나서 이 둘은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간다. 이것은 체험적인 것이다. 우리가 위치적으로 얻은 것을 체험적으로 누리려면 성령 안에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모든 것을 포함한 죽음을 성취하신 후에, 그분은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엡 2:17). 어떻게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되신 후에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실 수 있었는가? 그 대답은 그분께서 부활하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실 수 있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는 것이다(고전 15:45하).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 예수님도 또한 전파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분은 죽고 부활하셔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신 후에 우리 안에 다시 오셔서, 가장 높은 복음, 새사람의 복음, 생명을 분배하여 화평을 이루는 복음을 전하셨다.

우리를 그분의 걸작품으로 만드신 하나님은 근원이신 아버지이시며, 통로이신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행동하셨다. 아들은 오셨을 때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고(요 5:43), 아버지와 함께 오셨으며(8:29, 16:32), 심지어 아버지라 불리시기까지 하셨다(사 9:6). 아들은 아버지의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이자 과정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하늘들의 영역에 앉히시는 통로와 수단이 되셨다.

죽고 부활하신 후에 아들 그리스도는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그 영으로 오셨다. 그 영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요 15:26) 아들의 이름으로 오셨다(14:26). 이것은 그 영께서 오셨을 때 아들께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들이 복음을 전하시는 것을 통해 아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 영을 받는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그 영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으며, 이제 그 영은 다시 아들을 통해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끄신다. 이렇게 오고 가는 놀라운 통행을 통해 우리는 삼일 하나님에 의한 삼중의 생명 분배를 누린다.

위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체험적으로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간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구원받는 것이다.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어 그분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여기에 신격의 삼일성이 암시되어 있다. 성취하시는 분이시요 수단이신 아들 하나님을 통하여, 집행하시는 분이시요 적용이신 영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기원이신 분이시요 우리 누림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

3일

엡 1:4-5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도록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며 그분의 뜻의 선한 기쁨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아들의 자격을 얻어 하나님 자신께 이르도록 우리를 미리 정하셨습니다.

엡 1:22-23 (하나님은) … 그리스도를 만물 위의 머리가 되게 하시어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입니다.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께서 첫째로 아버지, 둘째로 아들, 셋째로 그 영에 의한 삼중의 분배로 믿는 이들을 축복하셨음을 보여 준다. 결국 이러한 분배는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전달하심에 의해 수행될 것이다. 아버지의 분배인 선택하심과 미리 정하심은 거룩하게 되고 있는 하나님의 가족을 이루는 많은 아들들을 산출한다. 아들의 분배인 구속하심과 구원하심은 하나님의 개인 소유인 하나님의 유업과 보물을 산출한다. 그것은 아버지의 분배로 산출된 많은 아들들이 모두 하나님의 유업인 하나님의 보물이 될 것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소유와 보물로 얻으신다. 그다음에 그 영의 분배인 도장 찍으심과 보증하심은 믿는 이들에게 유업이 되시는 하나님을 가져다줌으로써 믿는 이들을 온전하게 되는 데 이르게 한다. 하나님의 삼일의 분배의 결과는 많은 아들들, 하나님의 소유, 우리의 유업이다. 그러나 초월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분배의 총체를 전달하기 위해 오실 때까지는 교회가 없다. 많은 아들들, 하나님의 유업, 우리의 유업,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전달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완결된다.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다음 그분은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 우리에 대한 운명을 결정하셨다(엡 1:5). 하나님은 그분의 선택에 뒤이어 우리를 아들의 자격에 이르도록 미리 정하셨다(엡 1:5).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아들들이 되도록 우리의 운명을 미리 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의 자격은 생명을 분배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풍성한 생명을 가지신, 위대하신 아버지를 소유하고 있다. 그분의 역량은 우주적으로 크며, 그분은 분배하실 많은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아들들을 낳으시는 이 모든 일에서 그분의 생명을 아들들 안으로 분배하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아들의 구속은 ‘때가 찰 때의 경륜을 위한 것이다. 이 경륜은 만물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통일되도록 하는 것이다’(엡 1:10).

많은 믿는 이들이 여전히 옛 창조물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떨어져 있다. 그들에게는 하나가 없으며 연결도 없다. 그것은 그들이 머리 아래 통일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 신성한 생명으로 살고 있는 한 연결되게 된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연결하는 생명을 사용하시어 우리를 머리이신 그분 아래 통일하심으로 하나의 교회생활을 하게 하신다.

그 영의 분배는 ‘하나님께서 사신 소유가 구속에 이를 때까지’ 그 영께서 도장 찍으심으로써 ‘그분의 영광이 찬송되도록’(엡 1:13-14) 한다. 성령의 도장은 살아 있다. 성령의 도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성숙하여 결국에는 우리의 몸이 완전히 구속될 때까지 우리 안에서 작용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요소로 침투되고 변화되게 한다.

그러한 삼일의 분배는 삼일 하나님의 분배의 풍성한 세부 항목들을 밝혀 준다.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분배하심으로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이 산출되고, 하나님께 값진 유업이 산출되며, 우리가 신성한 아들의 자격에 완전히 참여하게 되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산출되지 않는다. 바로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전달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산출된다.

삼일 하나님의 삼중 분배는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전달 안에 포함되어 있고,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포함한 전달로 완성되고 완결된다.

2일

엡 1:4-5 하나님 아버지는 …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며 … 우리가 아들의 자격을 얻어 하나님 자신께 이르도록 우리를 미리 정하셨습니다.

엡 1:7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을 따라, 사랑하시는 분 안에서 그분의 피로 구속받고, 범죄가 용서되었습니다.

엡 1:13 … 그분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도장 찍혔습니다.

성경 육십육 권은 전적으로 신성한 삼일성을 지지대와 골격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으며, 다른 모든 부분들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마치 애너하임 집회소의 겉모습을 바라보면서 돌이 아름다운지, 목재가 완전한지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과 같다. 강철 기둥들이 애너하임 집회소를 받치고 있기 때문에, 애너하임 집회소는 요새나 작은 산처럼 튼튼하게 서 있다. 그것은 아마도 매우 큰 지진이 아니고서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와 똑같은 원칙으로, 신성한 삼일성은 성경 전체의 골격이다. 이것은 신약의 에베소서에서 특히 그렇다. 우리가 삼일 하나님을 모른다면 에베소서의 심오함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이 책의 각 장이 신성한 삼일성을 골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는 교회를 계시한다. 에베소서에 계시된 교회는 삼일 하나님으로 구성되며 삼일 하나님을 표현한다. 에베소서에 있는 신성한 계시 전체는 신성한 삼일성으로 세워지고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를 통제하고 지시하는 이상을 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신성한 이상을 보아야 하고,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삼일성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신성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산출과 존재와 성장과 건축과 전쟁에 관한 에베소서의 신성한 계시 전체는 신성한 경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삼일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안으로 분배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원 안에서 이 지체들을 선택하시고 미리 정하셨다는 것(4-5절)과, 아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셨다는 것(6-12절)과, 영 하나님께서 보증으로서 그들에게 도장을 찍으셨으며(13-14절),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 곧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인 교회(18-23절)를 형성하시기 위하여 그분 자신을 믿는 이들 안으로 나눠 주셨다는 것을 밝혀 준다. 2장에서는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모든 믿는 이, 곧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아들 하나님을 통하여 영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18절). 이것은 이 셋이 동시 존재하시고, 상호 내재하시며, 심지어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의 모든 과정을 거치신 후에도 그러하시다는 것을 가리킨다. 3장에서 사도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에 이르도록 믿는 이들을 강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고, 또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기를, 즉 그들의 온 존재를 점유하시기를 기도했으며,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했다(14-19절). 이것은 믿는 이들이 삼일성 안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분께 참여하는 일의 절정이다. 4장에서는 그 영과 주님과 아버지이신 분, 곧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4-6절)과 연합되시어 결과적으로 몸의 모든 지체가 신성한 삼일성을 체험할 수 있는지 묘사한다. 5장에서는 믿는 이들에게 영 하나님의 노래로 아들 하나님이신 주님을 찬양하라고 권유하며, 또 아들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유한다(19-20절). 이것은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을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함으로써 우리가 삼일 하나님이신 그분을 누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6장에서는 아들 하나님이신 주님 안에서 굳세게 되어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로 무장하고, 또 영 하나님의 검을 사용하여 영적인 전쟁을 하라고 가르친다(10-11, 17절). 이것은 믿는 이들이 심지어 영적인 전쟁에서도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고 누리는 것이다.

신언노트, 2023 01 08

에베소서에 계시된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
에베소서에 계시된
신성한 삼일의
신성한 분배하심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신격의 삼일이
조직신학의
교리적인 이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 안으로
하나님 자신을 분배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성경에서
그 삼일은 항상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과 관련하여,
특히 그분께서 창조하신 사람,
더 특별하게는
그분께서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백성과 관련하여
계시되거나 언급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거룩한 말씀 안에 있는
신격의 삼일에 관한
신성한 계시는 분명히
신학적인 연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비밀스럽고 놀라운
삼일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 자신을
선택하신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시는지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가
고린도의 믿는 이들에게 한
축복에서 가리키듯이,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인
우리가 이제부터 영원토록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께 참여하고
그분을
체험하고
누리며
소유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아멘.

우리 가운데 몇몇 사람은
수년 동안
시편 36편 8절과 9절을
읽고
연구하며
암송했다.
그러나 통제하는 이상,
곧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이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사람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일해 넣으셔서,
그들의 생명과 생명 공급이 되시고
그들의 전 존재를
신성한 삼일성,
즉 원천이신 아버지와
기름진 것이신 아들과
강이신 그 영으로
적시신다는
이상에 의해
이 절을 해석할 수 없었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의 어떤 부분을 해석하든지
우리를 통제하고 지시해야 하는
이상이다.
이러한 이상이 없다면,
우리는
시편 36편
8절과 9절에 근거한
좋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메시지는
매우 피상적일 것이고
그 신성한 삼일에 속한 것을
전혀 만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스트롱의 성경 종합 용어 색인〉을 참고하여
기름진 것이
희생 제물의
기름진 재를 가리킨다는 것을
발견할지라도,
이상이 없다면
이것이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결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통제하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희생 제물이라는
표현을 볼 때,
이것이
그 신성한 삼일의
두 번째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의 강을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로마서 14장 17절은
하나님의 왕국이
“의와
화평,
그리고 성령 안에 있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이 강을 다시 언급한다.
성령 안에 있는 기쁨은
기쁨의 강이다.
또는 우리는
기쁨의 강이
기쁨의 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이
이 통제하는 원칙 아래서 기록되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 원칙은
우리가
‘생명의 원천’이라는 말씀과
“주님의 빛 안에서
우리는 빛을 봅니다.”
(시 36:9)라는 말씀을
해석하도록 도와준다.
이 원칙은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었음을
보도록 도와준다.
하나님은
생명이시자
빛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께서
생명과 빛 모두의
원천이시다.

성경의 모든 책은
우리가
성경의 이 부분을
이렇게 이해한 것을
확증한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가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이 구속하신 사람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그들의 누림과 음료로서,
또한 그들의 생명과 빛의 원천으로서
일해 넣으신다는
원칙에 따라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신약의 어떤 부분을 해석하든지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끝이 없다.
그럴 때
성경의 어느 부분을 사용한
우리의 메시지는
매우 풍성해질 것이다.
그것은
기름진 것으로
가득할 것이고,
기쁨의 강의 흐름으로
가득할 것이며,
생명과 빛의 원천으로
가득할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 가르치며 전파하는
모든 것을 통제하는
내재적인 원칙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부담이다.
우리는
이러한 원칙으로
조성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은
우리에게
이상이 되지 않았다.
우리에게
성경을 읽는 눈과
성경을 이해하는 생각이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을 여는
열쇠는 없다.
우리에게는
열쇠가 필요하다.

거룩한 말씀 안에 있는
그 삼일 하나님에 관한 계시는
교리적인 이해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한 삼일 안에서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은 백성 안으로
그들의 체험과 누림을 위해
그분을 분배함을 위해 있다.

성경은
삼일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의 믿음의 대상만이 아니심을
계시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주관적인 분으로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셔서
우리의 생명과 생명 공급이 되신다.

성경은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그들의 생명과 생명 공급으로
일해 넣으신다는
통제하는 원칙에 따라
쓰였다.

성경 육십육 권은 전적으로
그 신성한 삼일을
지지대와 골격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으며,
다른 모든 부분들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마치
애너하임 집회소의 겉모습을 바라보면서
돌이 아름다운지,
목재가 완전한지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과 같다.
강철 기둥들이
애너하임 집회소를 받치고 있기 때문에,
애너하임 집회소는
요새나 작은 산처럼
튼튼하게 서 있다.
그것은 아마도
매우 큰 지진이 아니고서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와 똑같은 원칙으로,
그 신성한 삼일은
성경 전체의 골격이다.
이것은
신약의 에베소서에서
특히 그렇다.
우리가
삼일 하나님을 모른다면
에베소서의 심오함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이 책의 각 장이
신성한 삼일성을
골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는
교회를 계시한다.
에베소서에 계시된 교회는
삼일 하나님으로 구성되며
삼일 하나님을 표현한다.
에베소서에 있는
신성한 계시 전체는
그 신성한 삼일로
세워지고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를 통제하고 지시하는
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 신성한 삼일에 관한
한 신성한 이상을 보아야 하고,
우리는
그 신성한 삼일 안에서
또 그 신성한 삼일과 함께
살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산출과 존재와
성장과 건축과
전쟁에 관한
에베소서의 신성한 계시 전체는
신성한 경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삼일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안으로
분배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원 안에서
이 지체들을 선택하셨고
미리 정하셨다는 것과,
아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셨다는 것과,
영 하나님께서
보증으로서
그들에게 도장을 찍으셨으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
곧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인 교회를
형성하시기 위하여
그분 자신을
믿는 이들 안으로
나눠 주셨다는 것을
밝혀 준다.
2장에서는
그 신성한 삼일 안에서
모든 믿는 이,
곧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아들 하나님을 통하여
영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것은
이 셋이
동시 존재하시고,
상호 내재하시며,
심지어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의
모든 과정을 거치신 후에도
그러하시다는 것을
가리킨다.
3장에서 사도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에 이르도록
믿는 이들을
강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고,
또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의 집을 지으시기를,
즉 그들의 온 존재를 점유하시기를
기도했으며,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했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삼일 안에 계시는
(그분의 삼일 안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참여함의
절정이다.
4장에서는
그 영과 주님과 아버지이신 분,
곧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시어
결과적으로 몸의 모든 지체가
그 신성한 삼일을
체험할 수 있는지
묘사한다.
5장에서는
믿는 이들에게
영 하나님의 노래로
아들 하나님이신
주님을 찬양하라고 권유하며,
또 아들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유한다.
이것은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을
신성한 삼일 안에서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함으로써
우리가
삼일 하나님이신
그분을 누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6장에서는
아들 하나님이신 주님 안에서
굳세게 되어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로 무장하고,
또 영 하나님의 검을 사용하여
영적인 전쟁을 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심지어
영적인 전쟁에서도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고 누리는 것이다.

신성한 삼일은
성경 전체의 골격이다.
성경 전체,
특별히 에베소서는
신성한 삼일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에베소서만
모든 장이
신성한 삼일을
기본 요소로 하여
구성되었다.

우리가
삼일 하나님을 모른다면
에베소서의 심오함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이 책의 각 장이
신성한 삼일을
골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산출과 존재와
성장과 건축과
전쟁에 관한
에베소서의 계시 전체는
신성한 경륜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안으로
신성한 삼일을 넣어 주는
신성한 분배로
구성된다.
이처럼 에베소서의 중대한 초점은
믿는 이들 안으로
신성한 삼일을 넣어 주는
신성한 분배이다.

에베소서 1장은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원 안에서
지체들을
선택하셨고,
미리 정하셨으며,
아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셨고,
영 하나님께서
보증으로서
그들에게 도장 찍으셔서,
그리스도의 몸
곧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인 교회의
형성을 위하여
그분 자신을
그분의 믿는 이들 안으로
나누어 주셨는지를
밝혀 준다.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께서
첫째로 아버지,
둘째로 아들,
셋째로 그 영에 의한
삼중의 분배로
믿는 이들을 축복하셨음을
보여 준다.
결국 이러한 분배는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전달하심에 의해
수행될 것이다.
아버지의 분배인
선택하심과 미리 정하심은
거룩하게 되고 있는
하나님의 가족을 이루는
많은 아들들을 산출한다.
아들의 분배인
구속하심과 구원하심은
하나님의 개인 소유인
하나님의 유업과 보물을 산출한다.
그것은
아버지의 분배로 산출된
많은 아들들이 모두
하나님의 유업인
하나님의 보물이 될 것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소유와 보물로 얻으신다.
그다음에
그 영의 분배인
도장 찍으심과 보증하심은
믿는 이들에게 유업이 되시는
하나님을 가져다줌으로써
믿는 이들을
온전하게 되는 데 이르게 한다.
하나님의 삼일의
분배의 결과는
많은 아들들,
하나님의 소유,
우리의 유업이다.
그러나 초월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분배의
총체를 전달하기 위해
오실 때까지는
교회가 없다.
많은 아들들,
하나님의 유업,
우리의 유업,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전달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완결된다.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다음 그분께서는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
우리에 대한
운명을 결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택에 뒤이어
우리를
아들의 자격에 이르도록
미리 정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아들들이 되도록
우리의 운명을
미리 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의 자격은
생명을 분배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풍성한 생명을 가지신,
위대하신 아버지를
소유하고 있다.
그분의 역량은
우주적으로 크며,
그분께서는
분배하실 많은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아들들을 낳으시는
이 모든 일에서
그분의 생명을
아들들 안으로 분배하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아들의 구속은
‘때가 찰 때의
경륜을 위한 것이다.
이 경륜은
만물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통일되도록 하는 것이다’
(엡 1:10).

많은 믿는 이들이 여전히
옛 창조물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떨어져 있다.
그들에게는
하나가 없으며
연결도 없다.
그것은
그들이
머리 아래 통일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 신성한 생명으로
살고 있는 한
연결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연결하는 생명을 사용하시어
우리를
머리이신 그분 아래 통일하심으로
하나의 교회생활을
하게 하신다.

그 영의 분배는
‘하나님께서 사신 소유가
구속에 이를 때까지’
그 영께서
도장 찍으심으로써
‘그분의 영광이
찬송되도록’
(엡 1:13-14) 한다.
성령의 도장은
살아 있다.
성령의 도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성숙하여
결국에는 우리의 몸이
완전히 구속될 때까지
우리 안에서 작용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요소로
침투되고
변화되게 한다.

그러한 삼일의 분배는
삼일 하나님의 분배의
풍성한 세부 항목들을
밝혀 준다.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분배하심으로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이 산출되고,
하나님께 값진
유업이 산출되며,
우리가
신성한 아들의 자격에
완전히 참여하게 되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산출되지 않는다.
바로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전달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산출된다.

삼일 하나님의 삼중 분배는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전달 안에 포함되어 있고,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포함한 전달로
완성되고 완결된다.

에베소서 1장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의 분배와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전달의 결과를
계시한다.

아버지 하나님의 분배의 결과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말해 주고,
아들 하나님의 분배의 결과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성취를
말해 주며,
영 하나님의 분배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목적의 적용을
말해 준다.

초월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초월하는 전달은
삼일 하나님의 모든 풍성한 분배를 포함한다.
삼일 하나님의 삼중 분배는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전달 안에
포함되어 있고,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포함한 전달로
완성되고 완결된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구원이
하나님의 걸작품을 산출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절에서
‘걸작품’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포이에마(poiema)’로서
‘시(poem)’라는 단어로
영어화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詩)이다.
시는 종종
작가의 지혜를
보여 준다.
그것은
작가의
기술, 예술성, 구상을
보여 준다.
우리는
근원이신 아버지와
과정이신 아들과
흐름이신 그 영의
삼중의 생명 분배로
지어진 시들이다.
이러한 삼중의 생명 분배는
우리를
시가 되게 한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삼중의 생명 분배에 의해
우리 삼일 하나님의
걸작품이 되었다.

유대인 믿는 이들과
이방인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 나아간다.
그리스도께서는
규례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없애 버리셨고,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어뜨리셨으며,
적대감을
십자가로 소멸하셔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화목하게 하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피를 흘리심으로써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구속하시고,
그들을
하나님께 이끄셨다.

먼저,
유대인 믿는 이들과
이방인 믿는 이들은 모두
한 몸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이것은
위치적인 문제였다.
그러고 나서 이 둘은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간다.
이것은
체험적인 것이다.
우리가
위치적으로 얻은 것을
체험적으로 누리려면
성령 안에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모든 것을 포함한
죽음을 성취하신 후에,
그분께서는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
어떻게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되신 후에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실 수 있었는가?
그 대답은
그분께서 부활하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실 수 있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
예수님도 또한
전파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분은
죽고 부활하셔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신 후에
우리 안에
다시 오셔서,
가장 높은 복음,
새사람의 복음,
생명을 분배하여
화평을 이루는
복음을 전하셨다.

우리를
그분의 걸작품으로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근원이신 아버지이시며,
통로이신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행동하셨다.
아들께서 오셨을 때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고,
아버지와 함께 오셨으며,
심지어 아버지라 불리시기까지 하셨다.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이자 과정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고
일으키셨으며
하늘들의 영역에 앉히신
통로와 수단이 되셨다.

죽고 부활하신 후에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그 영으로 오셨다.
그 영께서 오셨을 때,
그분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아들의 이름으로 오셨다.
이것은
그 영께서 오셨을 때
아들께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들께서
복음을 전하시는 것을 통해
아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 영을 받는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
그 영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으며,
이제 그 영께서는 다시
아들을 통해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끄신다.
이렇게 오고 가는
놀라운 통행을 통해
우리는
삼일 하나님에 의한
삼중의 생명 분배를 누린다.

위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체험적으로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간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구원받는 것이다.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그분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여기에
신격의 삼일성이
암시되어 있다.
성취하시는 분이시요
수단이신
아들 하나님을 통하여,
집행하시는 분이시요
적용이신
영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기원이신 분이시요
우리 누림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

에베소서 2장은
그 신성한 삼일 안에서
모든 믿는 이들,
곧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아들 하나님을 통하여
영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것은
이 셋이
동시 존재하시고,
상호 내재하시며,
심지어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의
모든 과정을 거치신 후에도
그러하시다는 것을
가리킨다.

성취하시는 분이시요 수단이신
아들 하나님을 통하여,
집행하시는 분이시요 적용이신
영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기원이신 분이시요
우리 누림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

우리는
근원이신 아버지와
과정이신 아들과
흐름이신 그 영의
분배로 지어진 시이다.

걸작품을 산출하는
아버지의 분배와,
새사람을 산출하는
아들의 분배와,
우리를
한 몸 안에서
아버지께 데려가는
그 영의 이끄심은
교회를 건축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9절까지에서
바울은
근원이신 아버지께 기도했다.
그럴 때 아버지께서는
수단과 통로이신
그 영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강하게 하신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께서는
움직이시고 일하심으로써
믿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의 집을 지으신다
(그분의 거처를 정하신다).
마침내 그 결과는
삼일 하나님의 충만이다.
아버지는 근원이시고,
그 영은 수단이시며,
아들은 목표이시고,
삼일 하나님의 충만이 결과이다.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9절까지에
제시된 그림은
삼일 하나님의
매우 아름답고 섬세하며 깊은
동역을 보여 준다.
아버지께서는
교회라는 운전자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께서는
아버지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통로이신
그 세번째 한 분,
곧 그 영에 의해
일하신다.
근원과 통로 모두
목표와 목적이신
아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신다.
더 나아가 아들께서
그분의 모든 믿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의 집을 지으시는 것은
아들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셋은 각각
그분 자신을 위해(스스로)
일하시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더 깊은 일 안에서의
그 신성한 삼일의
한 아름다운 그림이다.
그분께서는
매우 완전하고도 깊은
한 방식으로 일하셔서
우리의 마음들 안에
그분의 집을 지으신다.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분의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러분이
금요일 저녁에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낙담해 있고
실망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날은 우울한 날이었다.
아무것도 좋지 않았다.
집에 올 때 여러분은
아내나 자녀들에 대해서도
기쁘지 않다.
여러분이
상황을 고려할수록
그것은
더 나쁘게만 보인다.
그럴 때 여러분은
바울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 그분의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여러분을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해 주시고”.
그러고 나서 여러분은
“사탄아,
나에게서 떠나라!
나는
나의 속사람 안으로
들어가겠다.”
라고 선포해야 한다.
여러분이
속사람으로 돌이킨다면
분발되고
강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여러분이
몇 분 동안 기도한다면
한층 더 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강하게 되는 것은 심지어
여러분의 몸의
약함과 피곤함을
삼킬 것이다.

여러분이
피곤하다고 말할 때,
여러분은
옛사람 안에 있는 것이고,
겉사람 안에 있는 것이며,
여러분의 심리(사고 방식) 안에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되어야 한다.
겉사람 안에
남아 있지 말라.
여러분은 피곤할지라도
그분께서는 피곤하지 않으시다.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시는 그분은
여러분보다 훨씬 더 강하시다.
그분께서는 결코
피곤하지 않으시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이
속사람에 이르도록
여러분을 강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는 것은
한 큰 문제이다.
이것은
그분 자신께서
우리의 내적 존재 안에
완전히 정착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셨다면,
그분께서
우리 마음의
모든 방을 점유하셨다면,
우리는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거룩하고 심지어 영적인
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때,
우리는
영적인 생활에서
강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매우 일반적인 방식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거실’ 한쪽 모퉁이에만
받아들였다.
우리는
다른 부분 안으로
움직이실 수 있는
그 자유를
그분께 드리지 않았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약하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적셔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생각, 감정,
의지, 양심 안으로
생명이 분배되어
우리 전 존재를
흠뻑 적시는 것이 부족하다.
그러나 우리 내적 존재의
각각의 모든 부분들이
생명의 분배함을 통해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흠뻑 적셔졌다면,
우리는
강할 것이다.

에베소서 3장에서
사도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 하나님을 통하여
능력으로
믿는 이들을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들 안에
그분의 집을 지으시기를,
즉 그들의 온 존재를
점유하시기를
기도하며,
믿는 이들이
삼일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신성한 삼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분께 참여하는
일의 절정이다.

그 셋은 각각
그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삼일 하나님의
충만을 위해
일하신다.
이것은
그 신성한 삼일의
한 아름다운 그림이다.

에베소서 4장에서
바울은 먼저
한 몸을 말했고,
그다음에
한 영,
한 주님,
한 하나님 곧 아버지를 말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삼일 하나님께서
몸 안에서 발전하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에베소서 4장 6절에서
바울은
한 분 하나님,
모든 사람의 아버지를 말할 때,
아버지께서
모든 사람 위에 계시고,
모든 사람을 통과하여 계시고,
모든 사람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 삼일 하나님의
그 몸과의 한 섞임을
가리킨다.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 가지 위치들,
즉 모든 사람 위에 계시고,
모든 사람을 통과하여 계시고,
모든 사람 안에 계시는 것이
가능한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삼일’이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심지어 아버지 하나님도
삼일이시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의
모든 위치들을(지위들을)
소유하신다.
그분께서는
아버지로서 모든 사람 위에 계시고,
아들로서 모든 사람을 통과하여 계시며,
그 영으로서 모든 사람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그 비밀한 몸인 그 교회는
그 삼일 하나님과 섞인다.

한 몸, 한 영과 더불어
한 소망이 있다.
현재 우리의 몸은
아직 육체의 생명 안에 있다.
몸은 아직까지
변형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의 물질적인 몸이
변형되리라는,
즉 영광스럽게 되리라는
소망이 있다.
그날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것이다.
이 영광은
그 영께서 함께하시는
그 몸에게
한 소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몸과 한 영과 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에베소서 4장 5절에서
바울은 계속하여
한 주님을 말한다.
그 몸이
그 영과 섞이는 한,
그 몸은
주님께 합쳐진다.
사실 그 영께서
주님이시다.
우리는
그 영과 주님을
분리할 수 없다.
아들께서 오실 때
아버지께서도 오시고,
그 영께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께서도 함께 오신다.
이제 그 몸은
그 영과 섞이며,
그 영께서는
아들과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실 수 없다.
우리는
그 영과 아들과 아버지를
가진다.
그러므로 그 몸이
그 영과 섞이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주님을 가진다.

주님과 더불어
우리는
한 믿음과 또 한 침례를 가진다.
믿음은
우리를
주님께 합쳐지게 한다.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그분과의 유기적인 합일 안으로
들어간다.
이 생명 합일 안에서
우리는
주님께
한 영으로 합쳐진다.
우리가
주님 안으로
믿어 들어갔기 때문에,
믿음은
우리를
주님께 합친다.

침례에는
두 방면이 있다.
한 면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았고,
또 한 면으로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종결되었다(끝났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태어났지만,
침례에 의해
아담에게서 나와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졌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면에서
침례는
끝냄을(종결을) 뜻하고,
긍정적인 면에서는
합일을 뜻한다.
믿음과 침례에 의해
우리는
아담에게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졌다.
이제 우리는
주 그리스도와의
한 유기적인 합일을
가지고 있다.

신성한 삼일의
신성한 분배를 통해
우리 모두는
우리의 영 안에서
신성한 포도주이신
그 영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우리의 영 안에서
충만하게 되면,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로
서로 화답할 것이고,
우리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고
시를 읊을 것이며,
항상 모든 일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우리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감사할 것이다.

아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이시고,
아들 안에 실재화되신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 위에 입는
전투 장비이시며,
영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검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 영께서
우리의 검이시라는
사실은
우리가 말함으로써
전쟁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 모두는
말씀을 말해야 하고,
우리가 들은
진리를 제시해야 한다.
이렇게 신성한 말씀을 말하는 것이
곧 원수를 살육하는 검이다.
내적으로는 능력을 받고
외적으로는 전투 장비로 무장한
단체적인 전투원으로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원수를 대항하기 위해
검을 사용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은
그 영과 주님과 아버지이신 분,
곧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과 섞이셔서
결과적으로 몸의 모든 지체가
신성한 삼일을 체험할 수 있는지
묘사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삼일 하나님께서
발전하시기 위한
영역이다.

모든 사람 위에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모든 사람을 통과하여 계시는 아들과
모든 사람 안에 계시는
그 영의 신성한 분배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이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고 누릴 수 있게 된다.

이 절들은
그 한 몸과
한 영과
한 주님과
한 아버지 하나님,
이렇게 네 인격들이(위격들이)
한 실체로 함께 섞여서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인 것을
계시한다.
따라서
그 삼일 하나님과 그 몸은
하나 안의 넷이다.

에베소서 5장은
믿는 이들에게
영 하나님의 노래로
아들 하나님이신
주님께 찬양하라고
권유하며,
또 아들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유한다.

이것은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을
신성한 삼일 안에서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함으로써
우리가
삼일 하나님이신 그분을
누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조성되어
사랑과 빛이신
하나님 안에서 행한다.

에베소서 6장은
우리에게
아들 하나님이신 주님 안에서
굳세게 되어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로 무장하고,
그 영의 검을 사용하여
영적인 전쟁을 하라고
가르친다.

아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이시고,
아들 안에 실재화되신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 위에 입는
전투 장비이시며,
영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검이시다.

이렇게 믿는 이들은
영적 전쟁에서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고 누린다.

성경 육십육 권의
계시 전체에 따르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신성한 삼일은
하나님의 분배를 위해,
즉 하나님을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나누어 주기 위해 계신다.
하나님께서 삼일이신 것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고
일해 넣으실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그 결과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축되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될 수 있으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세상의 왕국이
우리 주님과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이 되어
그분께서 영원무궁히
왕으로서 다스리실 것이다.

1일

고후 13:1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시 36:8-9 그들은 주님의 집에 있는 기름진 것으로 적셔지며 주님은 그들에게 주님의 기쁨의 강을 마시게 하십니다. 생명의 원천이 주님께 있으니 주님의 빛 안에서 우리는 빛을 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신격의 삼일성이 조직신학의 교리적인 이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 안으로 하나님 자신을 분배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성경에서 삼일성은 항상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과 관련하여, 특히 그분께서 창조하신 사람, 더 특별하게는 그분께서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백성과 관련하여 계시되거나 언급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거룩한 말씀 안에 있는 신격의 삼일성에 관한 신성한 계시는 분명히 신학적인 연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비밀스럽고 놀라운 삼일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 자신을 선택하신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시는지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가 고린도의 믿는 이들에게 한 축복에서 가리키듯이,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인 우리가 이제부터 영원토록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께 참여하고 그분을 체험하고 누리며 소유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아멘.

우리 가운데 몇몇 사람은 수년 동안 시편 36편 8절과 9절을 읽고 연구하며 암송했다. 그러나 통제하는 이상, 곧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이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사람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일해 넣으셔서, 그들의 생명과 생명 공급이 되시고 그들의 전 존재를 신성한 삼일성, 즉 원천이신 아버지와 기름진 것이신 아들과 강이신 그 영으로 적시신다는 이상에 의해 이 절을 해석할 수 없었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의 어떤 부분을 해석하든지 우리를 통제하고 지시해야 하는 이상이다. 이러한 이상이 없다면, 우리는 시편 36편 8절과 9절에 근거한 좋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메시지는 매우 피상적일 것이고 신성한 삼일성에 속한 것을 전혀 만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스트롱의 성경 종합 용어 색인〉을 참고하여 기름진 것이 희생 제물의 기름진 재를 가리킨다는 것을 발견할지라도, 이상이 없다면 이것이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결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통제하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희생 제물이라는 표현을 볼 때, 이것이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의 강을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로마서 14장 17절은 하나님의 왕국이 “의와 화평, 그리고 성령 안에 있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이 강을 다시 언급한다. 성령 안에 있는 기쁨은 기쁨의 강이다. 또는 우리는 기쁨의 강이 기쁨의 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이 이 통제하는 원칙 아래서 기록되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 원칙은 우리가 ‘생명의 원천’이라는 말씀과 “주님의 빛 안에서 우리는 빛을 봅니다.”(시 36:9)라는 말씀을 해석하도록 도와준다. 이 원칙은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었음을 보도록 도와준다(1:4). 하나님은 생명이시자 빛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께서 생명과 빛 모두의 원천이시다.

성경의 모든 책은 우리가 성경의 이 부분을 이렇게 이해한 것을 확증한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가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이 구속하신 사람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그들의 누림과 음료로서, 또한 그들의 생명과 빛의 원천으로서 일해 넣으신다는 원칙에 따라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신약의 어떤 부분을 해석하든지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끝이 없다. 그럴 때 성경의 어느 부분을 사용한 우리의 메시지는 매우 풍성해질 것이다. 그것은 기름진 것으로 가득할 것이고, 기쁨의 강의 흐름으로 가득할 것이며, 생명과 빛의 원천으로 가득할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 가르치며 전파하는 모든 것을 통제하는 내재적인 원칙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부담이다. 우리는 이러한 원칙으로 조성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은 우리에게 이상이 되지 않았다. 우리에게 성경을 읽는 눈과 성경을 이해하는 생각이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을 여는 열쇠는 없다. 우리에게는 열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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